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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우먼 김영희

5년 차 개그우먼 김영희(32)는
‘아줌마 개그의 최강자’로 통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10년 데뷔, 28세 때부터
줄곧 다양한 아줌마의 역할로 웃음을 줘왔기 때문이다.
최근엔 <개그콘서트> ‘끝사랑’에서
정열적인 사랑 중인 ‘김여사’로
시청자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김영희씨.
개그맨이 되고자 두 번 연속 공채에 도전,
합격했지만 신인이 실력을 발휘할
개그 프로가 없다는 것에 좌절해야 했던 그녀.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KBS 공채에 도전했으며,
긴 공백 등의 어려운 시간들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그녀는 ‘자신에 대한 믿음’
‘도전하는 용기’ 그리고 ‘즐길 줄 아는 것’이
꿈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 말한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옴~마!!” “앙대요~” “짓꾸져~!”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돌싱 김여사는 정사장(정태호) 앞에서 최선을 다해 혀 짧은 소리를 내고, 과감한 애정행각도 마다하지 않는다. 촌스러운 화장에 온갖 멋을 부린 ‘좀 노는 아줌마’ 김영희와 죽이 척척 맞는 ‘허세 왕’ 정태호. 두 사람의 연기에 웃음이 절로 터지는 <끝사랑>이 요즘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다. 김여사의 “앙대요~”는 이미 국민 유행어가 되었다.

요즘 ‘끝사랑’이 인기가 많습니다. 기분 좋으시죠?

사실 그런 인기를 느낀 지는 얼마 안 돼요. 아이디어 짜고, 회의하고 녹화하고… 개그맨들의 일주일 패턴이 똑같거든요. 어디 놀러 간다거나 돌아다니는 게 없다 보니까, 실제로 체감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 ‘인간의 조건’이라는 프로를 찍으며 외부를 다니면서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는구나 알았죠. 너무 좋고 감사합니다.

처음에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짜게 됐나요?

연인 코너를 재밌게 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중년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중년의 사랑이 되게 예쁘단 말이에요. 제가 조민수씨의 연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조민수씨가 예전에 출연한 드라마 <피아노> 때의 억척스러움과 고급스러움 섞인 걸 찾아서 해보자 해서 모티브로 삼아 했는데, 이게 저한테는 최선인 거죠.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들을 떠올려보면 다 아줌마는 맞는데 미묘한 차이가 있어요. 그동안은 좀 억센 아줌마 쪽이었다면 <끝사랑>의 아줌마는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억세지는 않은 나름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고급선이라고 할까.(웃음)

김영희씨 연기를 보다 보면 ‘맞아, 우리 동네에도 저런 아줌마 꼭 있었어!’라는 생각이 늘 듭니다. 관찰력이나 연기력이 대단하신 것 같은데,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요?

아유, 감사합니다. 실제로 평소 주변을 많이 관찰하고, 드라마나 영화도 많이 봐요. 같은 영화도 필이 꽂히면 일곱 번 여덟 번씩 봅니다. 처음엔 전체 스토리만 보인다면, 다음엔 세트, 옷차림, 엑스트라 등등 보면 볼수록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면서 내 것을 만들 수 있더라고요. 특히 제가 빼놓지 않고 보는 게 KBS 드라마 <사랑과 전쟁>이에요. 거기서 본 아줌마 캐릭터들이 제 안에 쌓여 있다가 개그로 나오는 거 같아요. 이제 <끝사랑> 김여사도 봄옷으로 개편을 해야 해서 요즘엔 유심히 아줌마들의 옷이며 액세서리 같은 것을 더 관찰하는 중이에요.

작년 <거지의 품격>이 끝나고 몇 개월간 공백기 후의 코너여서인지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는데요.

다 그렇겠지만 저에게는 정말 개그콘서트 무대가 절박했어요.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을 해도 자신의 주 무대에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늘 힘들었거든요. 원래는 이 코너가 2년 전에 다른 분과 만든 코너였어요. 그때도 제가 오랜 공백기 때였는데, 검사 맡으면 반응은 좋은데 통과가 안 되는 겁니다.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런 기다림 끝에 된 거거든요. 첫 녹화를 마치고, 마지막에 인사를 하는데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눈물이 떨어지더라고요. 너무 원했던 무대에, 제가 원하는 코너로 다시 섰다는 게 찡한 거예요.

“김영희는 개그계의 홍수환이다.” 동료 개그맨 허경환은 한 방송에서 그녀를 그렇게 표현했다. 네 번 쓰러지고 다섯 번 일어나 승리한 전설의 복서 홍수환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악바리 같은 끈기와 근성을 말한 것이다.

동네 개그맨이라 불릴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끼가 많았던 김영희가 본격적으로 개그맨이라는 꿈을 갖게 된 것은 대학 졸업 후였다. 그녀 안의 개그 본능이 자연스레 개그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시작도 좋았다. 2010년 KBS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한 그해 개그콘서트 <두 분 토론>으로 KBS 연예대상 코미디부문 여자 신인상과 최우수 아이디어상을 수상한 것.

하지만 그녀에게도 몇 번의 슬럼프가 찾아온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2011년 <두 분 토론>이 끝난 후 찾아온 9개월간의 긴 공백기였다고 한다. 끊임없이 새 코너를 짜 검사를 맡았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끈질기게 놓지 않은 건 개그에 대한 열정이었다. 코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그콘서트 회의실에 나가서 매일매일 아이디어를 짜고, 검사를 맡고, 떨어지고, 좌절하고 다시 도전하고…. 그 기간은 개그맨 김영희를 넘어 한 인간으로서 그녀를 성장시킨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계속 도전할 수 있었던 의지는 어디서 나온 건가요?

좋아하는 거 같아요. 사실 제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뭐를 하겠다고 시작했다가 끝까지 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도 저를 못 미더워하고, 저도 저를 못 믿고 살았어요. 그런데 개그는 이상하게 끝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흥미를 굳히고 나면서부터는 저한테는 안 하면 안 될 거 같은 존재가 돼버렸어요.

개인적으로 웃음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웃음의 힘을 느꼈던 적이 있나요?

일단 제가 시청자의 입장이었을 때 너무너무 웃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거 같애요. 고민을 하거나 슬플 때 등, 다른 감정에는 다 생각이 들어 있잖아요. 그런데 웃을 때만은 생각이 없어요. 웃으면서 “나는 이래서 웃는 거야” 생각하는 사람 없잖아요. 자연스레 웃으면서 거기에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게 웃음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제가 무대에 섰을 때는 제가 웃지는 않아도 보는 분들의 웃음을 받는 입장이잖아요. 받았을 때의 그 에너지도 이루 말할 수가 없죠. 한 주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더라고요.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가 올 수 있잖아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두 분 토론> 후 9개월간의 공백기가 있었을 때 정말 힘들었거든요. 저에게는 마치 9년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때 생각한 게 ‘나를 믿자’였어요. 내가 나를 안 믿고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그 시간들이 더 힘들어지는 거예요. 나를 믿지 못하면 모래알도 바위처럼 크게 느껴지거든요. 근데 나를 믿으면 바위가 다가와도 모래알처럼 여겨지는 힘이 생겨요.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음을 비우는 것이 최고의 극복법이었던 것 같아요.

마음을 비운다는 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면요?

내려놓는다는 건데, 그게 솔직히 힘들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용을 써도 안 되고 악을 써도 안 되는데 이렇게 안 될 거면 차라리 내가 행복하기라도 하자, 하면서 내려놨죠. 이 코너를 꼭 해야겠다는 욕심, 내가 꼭 무대에 서야겠다는 욕심…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즐기려고 했어요. 그 즈음 새 코너들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도 개콘을 하다가 쉬고 있는 후배에게 이야기를 해요. 내려놓으라고. 내려놓고 그냥 놀라고. 뭔가 내려놨을 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데, 내가 꽉 잡고 있으니까 그런 공간이 안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내려놓으면서 진짜 즐길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서울시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김영희씨와 양상국씨

그래서인지 무대 위에서 보면 항상 즐기는 거 같은 모습이에요.

솔직히 그런 여유가 이제 좀 생긴 거 같아요. 사실 처음 <두 분 토론> 할 때도 전혀 즐기지 못했어요. 첫 회만 좀 즐겼던 거 같고, 갑자기 큰 인기가 와버리니까 욕심이 생기고 일이 돼버린 겁니다. 무대에서는 그냥 놀아야 하는데, 뭔가를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트레스를 받고 병적으로 소재 찾고 대본에 매달리고. 스스로 매여서 스스로를 죄여가면서 사법고시 준비하듯이 해버린 거예요. 매 주를. 동료 신보라씨는 제가 ‘두 분 토론’ 할 때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하니까 놀라더라고요.

역시나 행복은 많이 가진다고 오는 건 아닌 걸까요.

돌아보면 오히려 대학로 소극장에서 식권 2장 받으면서 생활했던 개그맨 지망생 때 더 행복했어요. 그때는 꿈이 있었고, 즐겼으니까. 그런데 그게 일이 된 순간 못 웃기면 안 된다, 더 잘해야 한다, 그런 생각들로 제 마음이 꽉 찼어요. 아무것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고, 당연히 행복할 수가 없죠. 박영진 선배도 제가 힘든 기간들을 거치면서 변했다는 이야기를 하세요. 그 기간들이 있었기에 자만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거 같다고. 예전에는 앞만 보며 달려왔기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 보이는 거 같아요. 내가 뭐가 부족한지도 보이고. 그러면서 사람도 주변에 더 생기고, 예전보다 표정이나 이런 게 많이 편해졌다는 이야기도 들어요.

“아줌마 캐릭터를 파는 게 흥미롭고 재밌다, 지금도 하고 싶은 아줌마 캐릭터가 무궁무진하다”는 김영희씨는 데뷔 초부터 아줌마들을 연기해왔다. 고루한 정장에 단발머리, 뿔테 안경을 걸치고, 거침없이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두 분 토론>의 여당당 대표, 아주머니들이 떼 지어 등산복을 입고 등산 가는 모습에서 힌트를 얻은 <봉숭아학당>의 싱글 아줌마들 모임인 비너스회 회장, <끝사랑>의 김여사…. KBS 개그맨이 되기 전부터 아줌마 연기가 전담 마크였다고 하니, 그 역사는 더 오래된 셈이다.

새로운 캐릭터를 시도할 때마다 신기하고 재밌다는 그녀는, 엄마, 엄마의 친구들, 드라마, 영화 속의 아줌마들을 면밀히 관찰해, 말투부터 화장법, 의상, 몸짓 등 세밀한 부분까지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을 통해 배꼽을 잡게 만드는 아줌마들이 탄생했다.

항상 아줌마 역할을 하다 보니, 실제 김영희씨를 아줌마로 보는 인식도 많잖아요. 그런 이미지가 좀 걱정되지는 않나요?

일단 진짜 아줌마가 아니니까 개의치 않고요. 일상에서 오해는 많이 하시지만 좋게 생각해요. 그만큼 연기를 잘하고 있다는 거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TV에서 보는 것보다 실물이 더 낫네’ 이런 얘기도 많이 들으니까, 그것도 좋은 거 같아요. 제가 개그 시작하고 제 나이 또래의 캐릭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계속 연령대가 좀 있는 캐릭터를 해서인지 어머니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꽤 있어요. 팬레터를 보내주시는 분도 계시고 아이디어를 보내주시는 분도 계시고. 언젠간 아줌마들이 단체로 나오는 프로그램에 리포터로 갔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작가님이 제가 아줌마계의 소녀시대라고 할 땐 감사했죠. 팬에게 예쁜 도시락이나 이런 건 못 받아봤어도, 산지에서 보내주시는 고구마 감자 이런 거는 받아봤습니다.(웃음)

아줌마 캐릭터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일단 되게 인간적이지 않나요?

바쁜 현실 속에서도 로망을 찾고 사랑을 찾고 감성을 찾으면서 인간적인. 그리고 뭔가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해도 되는 게 좋아요. 한번은 제 뱃살 중간에 마이크 줄을 차서 상황을 연출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아줌마 캐릭터의 매력인 거 같아요.

가장 존경하는 롤모델로 신봉선씨를 꼽았는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또 그 외에도 특별히 힘이 되어주었다거나 존경하는 선배가 있다면요.

신봉선 선배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시청자 입장일 때부터 그 선배 개그를 보면서 많이 웃었죠. 꺼지지 않는 에너지가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개그맨이 되고 나서도 특별히 만날 일은 없다가, 개그콘서트 특집 때 처음으로 한 무대에 서봤어요. 정말 그 무한 에너지가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걸 정말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힘이 되어주신 선배는 많지만 특히 첫 코너를 같이 했던 박영진 선배에게 정말 감사해요. 그 선배는 후배 100명에게 물어봐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정도를 걷는 분이에요. 경상도 남자 스타일이라 말씀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가끔 제가 주눅 들어 있거나 자신감을 잃은 모습을 보이면 지나가면서 어깨 한번 꾹 눌러주고 가세요. 그런 무언의 격려가 일주일을 버티는 힘이 됐죠. 저도 그렇게 후배들을 챙기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개그를 하는, 어떤 개그맨이 되고 싶은지 말씀해주신다면요.

예전부터 모든 연령층에 통하는 개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요즘은 너무 흐름이 빠르게 변하다 보니까, 엄마랑 같이 개그 프로를 보다 보면 방청객들이 왜 웃는 거야? 저거는 무슨 뜻이야? 줄임말만 나와도 못 알아들으니까 그런 질문을 하세요. 엄마는 이해를 못 하겠는데 방청객들은 웃으니까 괴리감이 느껴지시나 봐요. 저도 엄마가 웃으실 때가 제일 좋아서, 데뷔하기 전에도 그런 생각을 늘 했었어요. 엄마가 웃을 수 있는 개그를 하고 싶다! 실제로 제가 개그맨을 하면서 어머니 또래의 아주머니들을 웃길 수 있다는 게 좋더라고요. 엄마가 웃을 수 있는 개그, 더 나아가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웃을 수 있는, 그런 개그를 하고 싶어요.

방송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 만난 김영희씨는 아담하고 귀엽고 여성스러웠다. 패션, 네일아트, 퀼트 등에도 관심이 많다는 그녀는, 작년 <인간의 조건> 개그우먼 특집에 출연 ‘휴대전화와 쓰레기 없이 살기’라는 미션을 수행하며 뛰어난 손재주로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약간은 부정적인, 스스로에게는 약간 야박한, 잘 만족하지 못하는 완벽주의, 무엇이든지 일단 주어진 것은 열심히 하는 성격’ 덕분에 오히려 매주 안주하지 않고 더 좋은 프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김영희씨. 무대 위의 김여사일 때가, 사람들이 웃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녀는 천생 개그맨이었다. 인터뷰 말미 “앙대요~” 한 번만 해달라고 부탁하자, 조곤조곤 말하던 그녀에게서 갑자기 에너지 넘치는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웃고 살지 않음 앙대요~” “사랑하지 않음 앙대요~”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영희님은 대학 졸업 후 대학로 코미디극장에서 개그맨 지망생 생활을 시작합니다. 3개월 활동 후 2008년 OBS 공채에 합격하지만 개그 프로그램이 없어, 2009년 MBC 공채에 다시 도전, 합격합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신인들이 능력을 펼칠 기회는 얻기 어렵자, 2010년 KBS 공채 시험에 다시 도전, 데뷔를 하게 됩니다. 이후 KBS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 ‘두 분 토론’ ‘거지의 품격’ 등을 통해 웃음을 주었으며, 현재 <개그콘서트>, <인간의 조건>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실수는 잠시 멈춰 서나를 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거울입니다.

잊지 못할 소학교 2학년 때의 실수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잊음이 헤퍼지는 것을 스스로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의 일도 잘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이렇게 망각증에 시달리면서도 아득히 머언 60년 전의 한 가지 일이 별스럽게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 아마도 그때 그 일이 나의 여린 가슴에 너무나 큰 자극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인가 보다.

나는 다른 애들보다 한 살 먼저 학교에 들어갔다. 함께 놀던 소꿉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가니 나도 가겠다고 떼를 썼다. 일곱 살인 것을 여덟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학교에 붙은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 보니 바람이 거센 날과 비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가 학교 대문 앞까지 업어다 주시었다.

그런 철부지가 2학년에 올라간 여덟 살 때 선생님을 크게 노엽히는 일을 저지를 줄이야. 그때의 1교시는 조선어 시간이었는데 언제나 수업 전에 먼저 소고(小考)라는 작은 시험을 치러야 했다. 전날에 배운 것을 어느 만큼 아는가를 검사하는 시험인데 그날도 금자라고 부르는 처녀 선생님이 연필과 32절지 종이 한 장 준비하고 책가방은 책상 옆 교실 바닥에 내려놓으라고 하시었다. 그것은 교과서나 필기장을 보고 쓰는 부정행위(컨닝)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반급에서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은 나의 자리는 왼쪽으로 첫 번째 줄 제일 앞자리였다. 나는 시험 준비를 하고 나서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책가방을 나의 앞쪽 교실 구석에다 슬쩍 밀어놓았다. 그것으로 하여 그날 선생님은 대노하였고 나는 체벌을 받아야 했다. 책상 옆 교실 바닥에다 놓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선생님을 노엽혔던 것이다.

선생님은 죄꼬만 것이 돼먹지 못한 행실을 한다고 교단에서 내려오시더니 식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분필 꽁다리로 나의 이마를 아프게 문대놓고 또 귀를 잡아 비틀어놓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분부대로 책가방을 가져다 제자리에 놓고 책상에 엎드렸다. 아픈 것보다 억울해서 울었다. 원래는 “선생님, 전 훔쳐보지 않고서도 100점을 맞을 수 있습니다”라는 뜻으로 한 일인데 그만 선생님을 괄시하는 무례한 짓으로 되었던 것이다. 품성이 좋고 행실이 단정하다고 칭찬받던 내가 그만 딴짓을 하여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100점을 장담하던 그날 시험은 빵점이 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나는 금자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이로 되었다. 그런데 그다음 학기에 금자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학교로 전근하였다고 했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선생님이 전근한 것을 은근히 좋아하였다. 만약 지금 이 세상에 금자 선생님이 생존해 계신다면 팔십 중반에 오른 파파 할머니로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소학교 2학년 때 저지른 큰 실수였다. 내가 오늘까지 그날의 잘못을 잊지 못하는 것은 철없는 여덟 살 적에 받은 체벌이 억울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한 번의 실수가 훗날 내가 성장하는 길에서 삶의 도리 하나를 깨우치는 경종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철학 개념으로 풀이하면 동기와 결과의 관계로서 아무리 좋은 동기도 결과가 나쁘면 나쁜 것으로 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좋은 주관 욕망이라 해도 그 행위 표현에 따라 상대방에게 엄청난 오해와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이다.

넘어지며 일어서며 살아온 인생길에서 내가 범한 실수가 어찌 한두 가지일까만 그중에서도 내내 잊지 못하는 어릴 적 실수는 오늘도 단순하고 유치했던 동년을 꼬집으면서 나더러 매사에 신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수란 조금만 조심하지 않거나 주의하지 않으면 생기는 잘못이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성장 과정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실수라는 것이 도꼬마리처럼 붙어 다닌다.

이 말은 결코 실수의 정당성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실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하여 실수를 자랑거리로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실수란 많이 하기보다 적게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실수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은 실수를 하고도 교훈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실수를 하고 교훈을 찾을 줄 안다면 실수를 적게 하면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해보는 말이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헬리코와 얼음산>
26×48cm. 종이에 오일. 1989.

그때 그 말은 큰 실수였다

정순옥 50세. 과외 교사.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월피동

정우를 처음 만난 것은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외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시작한 과외는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나는 밤늦게까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아이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최선을 다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엄마들의 입소문을 타서 실력 있는 과외 선생님으로 자리 잡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찾아왔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찾아온 정우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과외를 택한 것도 손자를 염려한 할머니의 결정이었고 아이는 마지못해 따라온 것이었다.

“선상님, 우리 정우 잘 좀 가르쳐주셔요. 얘가 천방지축 놀기만 하지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구먼요. 듣자 허니 영식이가 여기서 공부한다믄서요? 암쪼록 그렇게만 해주셔유.”

사실 공부라는 게 하루아침에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과외를 한다고 무조건 성적이 오르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영식이는 반에서 1등만 하는 아이인데. 솔직히 정우 같은 아이를 받았다가 기존의 아이들까지 괜히 빠지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도 됐지만, 할머니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정우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정우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어 혼자, 맨 마지막 시간에 가르치게 됐다. 그렇게 가르치면서 정우의 사정을 알아갔다. 엄마는 안 계셔서 대신 할머니가 키워주고, 아빠는 집 짓는 데서 일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우는 항상 자신의 환경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빠는 벽돌도 나르고, 무거운 쇳덩어리도 옮긴대요. 그래서 우리 아빠는 힘이 무척 세요.”

거리낌 없는 정우의 말에 나는 애틋한 마음이 생겨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은 언젠가부터 정우를 다른 아이들보다는 만만한 아이로, 평범한 가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은연중 차별을 두고 대하게 됐다. 게다가 정우 역시 자신은 꼴찌라는 사실에 그런 나의 차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듯했다.

또 쉬지 않고 이어지는 과외 시간의 마지막이다 보니 기운이 달릴 때도 있어 가끔은 숙제 검사만 하는 것으로 수업을 끝내기도 하고, 때로는 말을 듣지 않는다며 자로 손바닥을 치고, 한 번쯤은 거리낌 없는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럴 때면 정우는 시무룩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타나곤 했었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너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집 짓는 데서 벽돌 나르는 일 할래? 그보다는 집을 지으라고 시키는 일을 해야지. 그러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겉으로는 정우에게 공부에 대한 동기를 찾아준다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나중에야 그 말이 엄청난 실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은연 중 나는 정우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아빠에 대한 자부심도 조금씩 허물어지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우는 공부에 재미를 갖게 돼 성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더니 중학생 때는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했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내게 오지 않았다.

그 후 간혹 정우를 떠올릴 때면 한없이 미안해지곤 했다. 정우는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차별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또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훨씬 더 잘 자라난 정우는 아이들을 가정환경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정우에게 그렇게 말한 이후 한 번도 그런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작년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 우연히 정우를 만났다. 처음에는 건장한 체격의 낯선 청년이 먼저 인사를 건네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정우였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길가의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정우는 대학교에 다니다 작년에 군에 입대했는데 지금은 휴가를 나왔단다. 할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초등학생 정우와 맑은 웃음을 짓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우에게 미안하고 할머니께 죄송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좋다. 그리고 정우야, 아버지 말이야. 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너를 이렇게 반듯하게 키워주셨잖니? 그러니까 자랑스럽게 여겨야 해.” 혹시나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이 상처로 남아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렇게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나는 미안함을 그렇게 내비쳤다.

“그럼요. 아빠는 저에게 영원한 아빠예요. 예전과 좀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힘이 세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어요. 저에게 공부에 대한 재미를 갖게 해주셨거든요. 언제나 건강하세요.” 나는 대답 대신 정우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십수 년 묵혔던 미안함을 그제야 풀었다. 정우의 손이 거인의 손처럼 느껴졌다. 세상 모든 것을 감싸 안은 듯한 든든함으로.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피에로가 된 자파>
31.5×24cm. 종이에 오일. 1996.

초보 가위손 시절의 실수들

장미숙 50세. 주부. 서울시 송파구 송파대로8길

머리를 자른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앞머리가 많이 자라 있었다. 가보처럼 소중하게 모셔둔 가위들을 꺼내 살짝 다듬었더니 금방 눈앞이 시원해졌다. 가위를 치우려고 하는데 아들 녀석의 덥수룩한 뒷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다듬어준다고 하자 아들은 영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들을 의자에 앉혀놓고 이발 기계로 지저분한 뒷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아들은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이발 기계에 머리카락이 몇 올 뜯겼던 것이다. 가위는 괜찮은데 이발 기계는 그동안 묵혀둔 탓인지 영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다시 가위와 이발 기계를 닦아서 서랍 속에 소중하게 넣어두었다. 비록 앞으로 쓸 일이 없더라도 버리고 싶지 않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 나는 미용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스물여섯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기술을 익혔고, 수습 기간을 거쳐 어엿한 미용사가 되었는데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그 과정에서 저지른 잊을 수 없는 엽기적인 실수들은 지금도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내가 처음 취직한 미용실은 여대 근처에 있던 제법 큰 미용실이었다. 그곳의 주인이면서 제일 실력이 좋았던 미용사는 나보다 어린 남자였다.

초보 시절에는 가위를 드는 것보다 허드렛일을 더 많이 했다. 청소, 손님 머리 마사지며 머리를 감기는 일, 미용 기구를 정리하고 약을 바르는 일 등등. 그러다 보니 손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고 만져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미용사가 나에게 어떤 남자분의 커트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분은 단골손님이었는데 성격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위와 빗을 잡고 그분 곁에 서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애써 태연한 척 머리를 잘라나갔다. 거울 속의 손님 눈과 마주치면 더 떨릴 것 같아 외면했다. 손님도 내가 초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발 기계로 밑머리를 밀고, 가위로 쳐올려가며 마지막 마무리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커트를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가위가 두 개 필요하다. 하나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데 사용하고, 하나는 틴닝 가위라고 숱이 많은 부분을 가볍게 해주고, 끝부분은 자연스럽게 골라주는 마무리용 가위이다. 그래도 바짝 긴장하며 조심했던 덕분에 대충 머리 모양이 나온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적이 안심을 했다. 그리고는 뒷마무리를 하기 위해 숱이 많은 뒷머리에 가위를 넣어 싹둑 잘랐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확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가위를 빼자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아닌가. 틴닝 가위로 숱을 골라야 할 부분을 그만 잘 드는 커트 가위로 한 움큼이나 잘라내 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손님 뒷머리에 웅덩이가 움푹 생겨버리고 말았으니….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어찌할 줄 몰라 괜히 뒷머리를 다듬는 척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미용사가 아직 멀었느냐면서 다가왔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미용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님, 우리 직원이 처음이라 실수를 했네요. 제가 다시 손질을 해드리겠지만 뒷부분이 약간 짧아질 것 같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무료로 해드릴 테니 이해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얼굴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일이 다 끝나고 난 뒤 나는 남자 미용사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분에 그 뒤로는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용사가 되고 난 뒤 그보다 더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아니, 그건 실수라기보다는 한눈을 팔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여고생 커트를 하는 중이었는데 뒤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자꾸 말을 시키는 것이었다. 잠시 뒤를 돌아보며 손님 말을 거들었는데 “아얏!” 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여고생의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다 가위로 귀를 살짝 건드렸던 것이다. 다행히 여고생은 단골손님인 데다 상처가 작아서 쉽게 마무리되었지만, 내 생애 가장 엽기적인 실수를 한 순간이었다. 그 외에도 고데기로 머리카락을 태워버린 일이며 자잘한 실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실수도 많이 하면 실력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덕분에 나의 미용 실력도 점점 늘어났다. 지금도 그때 그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감사하다.

어렵게 배웠던 미용 기술을 포기하고 평범한 주부로 살아온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되었다. 그러나 가위를 볼 때마다 그때 일들이 생각나 빙그레 미소를 짓게 된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내 이름은 스윗하트>
21×18.5cm. 종이에 아크릴. 2008.

월간 마음수련 6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와 함께한 작가는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1세대 앙드레 단(André Dahan, 1935~)입니다. 그의 동화책 <안녕, 꼬마 물고기> <피에로가 된 자파> <내 친구 달>은 프랑스 옥토곤상(1991), 앙굴렘 국제만화 대상 등 독일, 프랑스, 벨기에, 슬로바키아, 일본 등지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하였고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등에 꾸준히 초청되었습니다. ‘행복’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는 그의 작품은 인종과 천적, 시공간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을 전하며, 소소한 행복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앙드레 단의 한국 첫 개인전 <My Dear Friends- 앙드레 단 특별전>이 롯데갤러리에서 열립니다(4.30~5.23). 초창기 원화부터 앙드레 단의 도서 49권의 대표 원화, 판화 100여 점이 전시되며, 전시 진행은 앙드레 단이 평생 즐겨 썼던 친구(사랑), 달, 별, 해, 꿈, 성장이라는 소재들로 구성됩니다. 자료 제공 롯데갤러리 02-726-4456

실수는 잠시 멈춰 서나를 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거울입니다.

딸아, 실수불감증에 걸려 더 많은 용기 갖기를

남희한 34세. 항공 SW 엔지니어. 경남 사천시 정동면

이제 세 살이 되는 나의 첫딸아, 아빠는 가끔 햄버거 가게에 가게 되면 혼자서 실소를 머금는단다. 생각하면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우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는, 어느덧 3년이 다 되어가는 추억의 실수담 덕분에.

2011년 5월, 아빠와 엄마는 미국 파견 후 2개월 만에 처음으로 그랜드캐니언을 방문하게 된단다. 가는 도중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맥도날드에 들리게 되지. 당연한 얘기지만 미국에 있는 맥도날드이기에 그네들이 하는 말은 모두 영어였단다.

그곳에서 아빠는 주문을 하게 되지. 세트 메뉴 하나와 음료 하나를 주문하는 데 대략 10여 분 정도 걸렸던 것 같구나. 그네들과 아빠는 모두 영어를 썼지만 서로가 서로의 말을 100%로 이해하지 못했단다. 그네들의 갸웃거림의 횟수와 의문형의 질문들은 셀 수 없이 늘어갔고 아빠 뒤에 늘어선 사람들의 수도 그에 비례해 점점 늘어만 갔단다.

반복되는 Yes와 No의 외침 속에서 드디어 기나긴 주문은 끝이 났고 몇 분 후 아빠의 손엔 햄버거 세트 하나와 해피밀 세트 하나, 그리고 음료 컵 세 개가 들려 있었지. 아빠가 원했던 건 햄버거 세트 하나와 음료 하나였는데 말이지.

그것들을 받고 나니 바로 뒤에 선 한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킥킥거렸는지 알 것 같더구나. 주문한 상품을 받고 당황한 날 보곤 한없이 웃던 그 할아버지와 함께 아빠 역시 너무 허탈해 한참 동안 헛웃음을 흘렸단다.

그런데 그 기억이 떠오를 때면 안타까운 것이 “왜 저런 실수를 더 많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거란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저런 실수를 만들고 고치고 또 만들고 고쳤다면 영어든 뭐든 더 많이 배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는구나.

저 사건 이후 유사한 몇 가지 사건의 여파로 한 달여 동안 주문에 노이로제가 걸리다시피 했던 것 같다. 최대한 간단하게, 항상 주문하던 것으로, 그리고 되도록 교과서적으로 말해 줄 것 같은 백인에게…. 한동안 그랬던 것 같다. 다행히 또 다른 계기로 극복하긴 했지만 당시의 소극적인 태도는 1년 넘는 파견 기간 동안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불쑥불쑥 튀어나와 마음을 다잡고 적극적이던 아빠를 위축시키곤 했단다.

딸아.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한다. 크건 작건 좋건 나쁘건, 아빠는 그 실수들이 네가 좀 더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누구나 실수는 한단다. 그때 누군가는 실수에 겁을 먹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누군가는 실수에서 배우고 해결책을 찾아 ‘실수’를 ‘경험’으로 만들어버리지. 그러니 딸아, 부디 실수불감증에 걸려 많은 실수를 소중한 경험으로 만드는 용기가 샘솟길 바란다.

조금 더 나은 인생을 걸어가길 바라며. 아빠가.

p.s. “A Meal No. 8 and a Happy Meal, please~” 이 주문은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고 두 번째로 그랜드캐니언을 방문했을 때 했던 주문이란다. 정확하게 나왔지. 흠.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크리스마스 토끼>
32×48cm. 종이에 아크릴. 2000.

며느리의 실수에 대처하는 시어머니의 지혜

이명옥 56세. 장애인복지신문, 작은책 객원 기자

어느 해 정초였다.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살짝 놓치는 바람에 밥그릇과 냉면 대접이 깨지고 컵의 귀가 살짝 떨어졌다. 하필이면 떨어뜨린 밥그릇이 바로 시어머님 주발이었다. 당황해서 “어, 밥그릇이 왜 깨지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머니는 얼른 다가오셔서 내 손가락부터 살피신 후, 깨진 조각들을 살짝 들어내시곤 “어디 다친 데 없니? 다른 조각이 또 있나 봐라” 하시며 내 손가락을 재차 살피신다. 어머니는 손이 멀쩡한 것을 보시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깨진 그릇을 말없이 다용도실 한켠에 치우셨다.

결혼 후 나는,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못마땅해 보이기에 충분한 실수를 시도 때도 없이 저지르곤 했다. 바지에 휴지, 손수건, 동전이나 돈을 그냥 두고 세탁기를 돌리는 것은 다반사. 때론 휴대폰을 놓고 나오거나 버스카드를 잊고 안 가져가 시어머니가 지하철역으로 가지고 나오시게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우산을 들고 나갔다가 날이 개면 어김없이 우산을 지하철이나 어느 장소에 버려두고 빈손으로 덜렁거리며 온 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덜렁거림이나 건망증에 속상해하며 안달하는 것은 내 자신이었고 시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을 하시며 나를 위로하시곤 했다.

“사람 무사히 들어온 것으로 된 거다. 우산이야 누군가 가져다 잘 쓰겠지. 잃어버려야 장사꾼도 먹고살지. 그런다고 잃어버린 우산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마라.”

실수로 그릇을 깨뜨렸을 때도 마찬가지셨다. 단 한 번도 “왜 그렇게 찬찬하지 못하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안 다쳤니? 그러면 됐다” 하셨다.

이미 저질러진 일을 가지고는 절대 야단을 치지 않으시는 시어머니. 내가 시어머니를 존경하는 몇 가지 이유 중 첫 번째가 바로 지혜로움이다. 삶에서 묻어나는 지혜로 가득하고, 부지런하시고, 남 험담을 하지 않으시며, 상대방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는 분이다. 결혼 후, 가난한 집 맏며느리인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가정 파탄의 위기를 여러 번 넘겼다. 그때마다 가정이라는 틀을 지키게 한 것은 아이와, 한없이 지혜로우신 시어머니였다.

내가 시어머니의 인품에 더 반하게 된 것은 시장을 같이 다니면서부터였다. 시어머니는 장을 보실 때 절대 물건값을 깎아달라거나 덤을 요구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한 주먹 더 얹어주려 하면 “그렇게 더 집어주면 뭐가 남겠느냐”며 손사래를 치시곤 하셨다.

그렇게 지혜로운 어머니와 20년을 넘게 살면서도 난 여전히 아들아이가 실수라도 할라치면 금세 “야, 너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거야?” 혹은 “너 그렇게 덜렁거릴래?”라며 야단을 치거나 똑같은 잔소리를 해대곤 하니 인생 수업 열등생인 셈일까?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어머니의 지혜를 닮아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날을 꿈꿔본다.

요즘은 어머니가 연로하셔서 거동도 불편하시고, 자주 편찮으셔서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 그 지혜 모두 배워 저도 지혜로워질 때까지 오래 건강하셔야 해요.”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1학년 달>
31.5×49cm. 종이에 아크릴. 2014.

실수를 통해 알게 되는 그 사람의 온기

이영미 55세. 서예가, 사회복지사. 충북 청주시 흥덕구

어릴 적 앓았던 병으로 나는 청신경장애를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언젠가부터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지 않으면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증세까지 같이 겪게 되었다. 그래서 10년을 가르치거나 20년을 아는 관계라 해도 며칠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아니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수십 번 다녀왔지만 아직도 엄마와 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오직 한 개만 있는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도 매주 쓰지 않으면 외우지 못한다. 부모님 기일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생일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게 없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한번은 비영리민간단체 대표가 되어 방콕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꼭두새벽 4시에 청주에서 출발해서 인천공항에 갔다. 그런데 아뿔싸! 여권을 놓고 와버렸다. 동행들은 예정대로 탑승해서 출장을 갔지만 내 비행기 표는 취소하고 그날 마지막 비행기 표를 다시 예매했다. 안 그래도 일행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무처 직원들은 나 때문에 더욱 분주해졌고 나는 여권을 가지러 다시 인천에서 청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몇 시간 후 비행기에 올랐다. 방콕에 먼저 간 일행은 나를 세미나장으로 안내할 사람을 섭외해서 보내주었다.

‘WELCOME! 이영미!’ 그들은 이렇게 영어와 한글이 함께 쓰인 큰 피켓을 들고 공항에 나와 있었다. 행사를 준비하는 주최 측에서도 나 때문에 신경을 쓴 셈이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럽고 미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세 평안해진 것은 건망증으로 인한 내 실수에 대해서 아무도 개의치 않고 모두들 그런 경험이 있다고 토닥거려준 것이다. 그 경험으로 인해서 여권에 관해서는 건망증이 재발하지 않게 되었다.

한 번은 문하생들이 전국 공모전에 내는 작품을 열 개 정도 넘겨받았다. 가로 140센티와 세로 70센티의 작품들이었는데 마감을 끝낼 때 작품을 선별해주고 내 딴에는 도와준다고 내가 이왕에 가는 김에 작품을 접수하려고 작품과 원서와 출품비를 받았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마트로 가서 시장을 보았다. 마트의 빨간 카트에는 작품들이 들어 있는 긴 비닐종이와 부식들이 담겼다. 나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고 분주히 저녁을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뭔가 허전했다. 아뿔싸! 작품 열 개를 모두 카트에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부랴부랴 마트로 다시 갔고 마트의 분실물 보관소와 폐지를 버리는 청소함 모두 샅샅이 뒤졌으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주최 측에 사정 이야기를 하고 마감을 하루 늦춰달라고 했고, 문하생들에게도 연락해서 차선 작품을 가지고 오게 하거나, 하루 더 작품을 제작해서 가지고 오게 했다. 그렇게 해서 열 명이 다시 작품을 만들어서 무사히 제출했는데 두고두고 미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문하생들은 내 실수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었다. 내 마음의 온기를 알아주는 문하생들은 때로는 나의 울타리가 되기도 하고 스승의 역할도 한다. 서로의 실수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것은 마치 허리 잘린 산도 보듬어 안고 날마다 변하는 달도 품는 호수처럼 서로가 아직도 따스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 같아 무척 고맙다.

실수란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거울처럼 반영해주고,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집중하고 노력하게 해주는 아주 쓰지만 고마운 감초 같은 것이다. 또 나의 실수 또는 타인의 실수로 인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좀 더 진솔하고 돈독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일상적으로 일으키는 건망증이 없어지기를 그렇게 바라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생기는 건망증과 내 신체적 장애 때문에 생기는 기억 장애가 어떻게 다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애로가 있는 현실로 인해서 나는 반복 학습을 쉼 없이 하고, 그 덕분에 나도 모르게 이러한 반복 행동은 일상적인 습관이 되어 내 삶의 목표를 향해 제대로 가는 거름이 되고 있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카밀라의 꿈>
24×35.5cm. 종이에 유화. 1989.

재산이 된 나의 실수들

최정숙 43세. 음식점 운영. 대구시 남구 대명3동

농사일로 바쁜 엄마를 도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일찌감치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들에 나가 피곤해할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저녁이라도 지어놔야겠다고 마음먹은 어느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밥은 했는데 반찬은 무얼 할까 고민을 하다 남은 감자조림 반찬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름 연구를 해서 똑같이 만든다고 만들어 보았다. 처음 만든 것치고는 그럴싸한 모양새에 나름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맛보시던 아버지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으니 간이 하나도 안 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금이나 간장으로 한 간은 눈에 안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도전 정신만큼은 높은 점수를 받았다.

중학생 때였다.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해서 마늘 심는 날이라고 수업 마치는 대로 일찍 오라는 당부가 있었던 토요일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집에 와보니 새참으로 내어갈 모양인 칼국수가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삶아 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엄마는 한창 일하느라 바쁠 테니 내가 끓여 가야겠다 싶어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국수 삶기에 돌입했다. 국수가 삶아지면 양이 많아져 물을 넉넉하게 부어 끓여야 한다는 사실을 중학생이 어찌 알았겠는가. 삶고 보니 많아 보이던 국물은 다 어디로 갔는지 국수만 찜통 가득이었다. 그래도 알아서 국수도 다 삶아 온다고 엄마가 대견해하시리라 생각하며 국수가 가득 담긴 찜통을 들고 논을 향해 걸어갔다. 중간쯤 갔을 무렵 바쁜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오는 엄마를 만났다.

“엄마~ 국수 삶으러 가? 갈 필요 없다. 내가 벌써 다 삶았다. 한번 봐라.” 득의양양한 내 표정은 아랑곳 않고 미심쩍음 가득한 얼굴로 찜통을 열어본 엄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가 니보고 국시 삶아 오라 하드나? 내가 삶으러 가는데 뭐하러…. 다 망쳐놨네, 국물은 다 어디 갔노? 할 수 없다. 뭐 지금 우짜겠노. 더 퍼지기 전에 빨리 가자.”

칭찬을 기대했던 나는 원망만 잔뜩 듣고 순간 서운함에 울 뻔했지만 하는 수 없이 엄마 뒤를 따라 논으로 갔다. 한창 배고플 시간에 국수를 한 그릇씩 받아 든 동네 아주머니들께서는 시무룩해 있는 나를 향해 “숙아~ 맛있다 맛있어. 우리 숙이는 우예 못하는 기 없노. 그라고 젓가락 쓸 필요도 없고 숟가락으로 떠먹으마 되고 좋다 좋아.” 이러시며 한바탕 웃음으로 위로해 주셨다.

고등학생 때였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살림까지 도맡아 하며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한번은 식혜를 어떻게 하느냐고 엿질금 물을 밥통에다 붓고 취사 버튼을 누르는지 보온 버튼을 누르는지 모르겠다며 묻는 것이었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취사 버튼을 누른다고 말해주었다. 엄마가 자주 식혜를 만드시는데 그렇게 하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했다.

다음 날 친구는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방 안 가득 흘러넘친 엿질금 물이랑 밥알을 닦아내느라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했다고 했다. 친구한테 미안했다.

이 에피소드 말고도 음식과 관련된 나의 실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른다, 못한다 하며 몸을 사리기보다 한번 해보지 하며 도전하다가 생긴 실수들이다 보니 다음에 할 때는 더 잘하게 되었고 요리를 하며 살아가는 나의 삶에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안녕, 꼬마 물고기>
29.7×21cm. 종이에 오일. 1989.

월간 마음수련 6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와 함께한 작가는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1세대 앙드레 단(André Dahan, 1935~)입니다. 그의 동화책 <안녕, 꼬마 물고기> <피에로가 된 자파> <내 친구 달>은 프랑스 옥토곤상(1991), 앙굴렘 국제만화 대상 등 독일, 프랑스, 벨기에, 슬로바키아, 일본 등지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하였고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등에 꾸준히 초청되었습니다. ‘행복’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는 그의 작품은 인종과 천적, 시공간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을 전하며, 소소한 행복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앙드레 단의 한국 첫 개인전 <My Dear Friends- 앙드레 단 특별전>이 롯데갤러리에서 열립니다(4.30~5.23). 초창기 원화부터 앙드레 단의 도서 49권의 대표 원화, 판화 100여 점이 전시되며, 전시 진행은 앙드레 단이 평생 즐겨 썼던 친구(사랑), 달, 별, 해, 꿈, 성장이라는 소재들로 구성됩니다. 자료 제공 롯데갤러리 02-726-4456

나는 위로를 잘 하는 사람일까?

누구나 상실을 경험합니다. 14살까지 평균 5가지, 어른의 경우 10~15가지의 상실을 경험한다는군요. 아무리 단련이 되어도 누군가를 잃은 고통을 자연스럽게 맞이하기란 어렵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도 어렵기만 합니다. 그저 괜찮은 척 슬픔을 억누르거나, 혼자 극복해보려고 애를 쓸 뿐입니다. 혹은 ‘슬퍼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거야’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더 강해져야지’ 등의 말을 건네 보지만 과연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위로를 잘하는 사람일까요? 우리가 겪는 슬픔, 그리고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 주

2006년, 7살 나이에 아빠를 잃은 영국 소녀 밀리(Milly)는 9살에 슬픔을 위로하는 책을 썼다. 책의 제목은 <아빠가 세상을 떠납니다(My Daddy Is Dying)>. 밀리의 아빠 사이먼 벨은 36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밀리는 4개월간 아빠의 고통스런 투병 생활을 지켜보며 큰 상실과 슬픔을 느꼈다. 그래서 비슷한 아픔을 겪는 아이들을 위로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슬픔을 견디는 방법을 책에 담은 것이다. 책에는 상실감을 극복하는 놀이, 상상하는 법,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를 그림과 함께 표현했다.

밀리의 Tips
① 물감 마구 칠하기를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물감을 마구 칠해서 종이 위에 쓰여 있는 아빠 이름을 감추곤 한다.
② 행복한 케이크에 대해 자신만의 레시피를 만들고 그것을 그린다. (‘행복한 생각’이라는 재료를 추천한다!)
③ 하루의 기분이 슬펐는지 행복했는지 아니면 평범했는지 각 감정의 색을 정하고 칠해서 감정 차트를 만든다.
④ 아빠가 돌아가실 때 나는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소녀가 꽃 위를 날아가는 그림을 생각하고 이것이 나의 걱정들을 가져갈 거라고 생각했다.
⑤ 내 인생의 주기, 그리고 식물과 나무들이 어떻게 살고 죽는지를 그림을 그리며 이해했다.


“자신과 대화하십시오! 당신이 당신과 대화하기 시작하고, 그게 완성되면, 그 누구도 당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을 모르기 때문에 긴장하거나 슬퍼하거나 고독한 겁니다. 당신과 친해지십시오!”
– 가수 김태원 KBS <남자의 자격> 중에서


진정으로 위로하는 법

“내가 6살에 뇌종양에 걸려서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 내가 바란 것은 위로였어. 그런데 사람들은 위로는커녕 6살 아이한테 용기를 강요했어. 잔인하게. 괜찮아 영이야. 수술은 안 무서울 거야. 괜찮아 넌 이길 수 있어. 사람들이 그 말밖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냐고? 안 괜찮아도 돼. 영이야 안 괜찮아해도 돼. 무서워해도 돼, 울어도 돼.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난 하루 이틀 울다가 괜찮아졌을 거야. 근데 그때 못 울어서 그런가 지금도 난 6살 그때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 _ SBS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노희경 작. 2013) 중에서.

오영(송혜교 분)이 가짜 오빠 오수(조인성 분)에게 보통 많은 사람들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내보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배운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위로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을 6살 어린 영이에게 그렇게 이성적인 말을 해준 사람들처럼, 실직, 질병, 파산, 심지어 아이의 죽음 등으로 지독한 상실감을 겪어 힘든 사람들에게 그저 “슬퍼하지 마”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 이외에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른다.

그런 이성적인 말이 아니라 “얼마나 무섭니, 얼마나 힘드니,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말. 피하지 말고 그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큰소리로 울어도 괜찮다고, 어떤 감정도 다 표현하라고 말해주고 무엇이든 받아주자. 때로 너무 지쳐 있어 무슨 말을 하기 어려워하는 상황이면, 말을 걸기보다 가만히 옆에 있어주거나 말없이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진정으로 위로를 받은 사람은 누군가 이성적으로 앞으로 이떻게 해야 해, 하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감정의 앙금 없이, 새롭게 일어설 힘을 받게 된다.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① 위로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심리 상태에 큰 영향을 줍니다. 평소 신뢰가 돈독한 관계라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됩니다.
② 어설픈 말과 행동보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공감하고 조용히 곁에서 함께 있어주세요. 슬퍼할 때 손을 잡아주거나 안아주면서 그 슬픔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③ 사고 관련 뉴스와 영상에 장기간 노출되면 직접 사고를 겪지 않았더라도 대리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수 있으므로 주의합니다.
④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콤플렉스, 상처, 아픔, 집착 등 부정적 감정들을 빼내는 훈련을 꾸준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속에 어두운 요소가 줄어들수록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힘도 커지게 됩니다.
⑤ 평소에 즐거운 마음을 유지시킬 수 있는 취미 활동과 산책, 등산을 권장합니다. 또한 기쁨은 배로 나누고 슬플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좋은 인간관계를 잘 유지시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⑥ 자신의 입장에서 경솔하게 위로를 하거나, 꿋꿋이 견뎌내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기대를 준다면 오히려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슬픔을 억누르게 만듦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 김재환, 목포중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글쓰기나 일기 쓰기 등 문학을 통해 고통스러운 감정을 해소한 후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대화하는 등 사회성이 향상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러한 글쓰기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검열이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에서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럽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막지 않도록 문법, 글씨체 등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은 슬픈 감정을 풀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저널 치료의 대가 캐슬린 애덤스는 상실의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보내지 않는 편지’ 쓰기를 제안한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함으로써 고통스런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고, 잃은 사람과의 미완성이었던 관계 부분을 완성할 수 있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면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보다 깊고 명확한 인식이 가능하도록 도와준다.
– 참조 도서 <내 마음을 만지다>(이봉희 | 생각속의집)

‘보내지 않는 편지’를
써보세요


9년 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겨울 방학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일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리고 갑작스런 남편의 교통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전화기 소리가 멀리 아득해지고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남편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반면 난 생각이 많고 부정적이고 남 탓을 잘하는 성격이었다. 남편의 사고가 모두 다 나의 잘못으로 주어진 벌인 것만 같았다. 매일 자책하며 슬픔에 빠져 울었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다가, 부엌에서 밥을 하다가, 자다가 일어나서, 밤이고 낮이고 눈물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화장실에서 울고 나오는 내 앞에 10살 아들이 다가서며 말했다.
“엄마, 엄마가 그럴 때마다 동생이랑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제야 아이들도 아빠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과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두렵고 낯설고 부끄러워 죄인처럼 느껴졌다. 마음을 다스리는 책을 읽고 또 읽고 종교에도 의지해 봤지만 두렵고 우울함은 견딜 수 없었다. 혼자가 되면 더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학교 선생님들을 위한 마음수련 교원 직무연수에 참여하게 되었다.
수련을 하며 살아온 내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악몽 같은 교통사고, 남편에게 잘못했던 일, 나를 괴롭혔던 기억들을 계속 버려나갔다.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지워지면서 마음이 안정이 되고 혼자가 되었다는 두려움과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내 안의 고통스런 감정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곁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남편도 임형주의 노래처럼 ‘천 개의 바람 되어’, 세상이 되어 언제나 함께 있고 변함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마음속 인생 드라마 한 편씩 만들어 가지고 있다. 나도 내 마음속의 내가 만든 드라마 속에서 살며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즐길 줄 안다. 세상에 감사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에 감사한다.
– 빈경남 50세. 필리핀 클락 거주


누구나 힘들고 지칠 때면 자신만의 조용한 아지트를 찾게 마련이다. 나에게 도자기 작업은 그런 나만의 고백이고 휴식이고 즐거움이다.
내가 도자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십 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이다. 집 주변에 공방이 있었는데,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하면서도 선뜻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조건과 때가 있듯이 나에게 도자기가 다가오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로부터 3년 후쯤 알고 지냈던 사람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지는 일이 일어났다. 좋게만 지내왔던 모든 것들이 허상이고 위선이었다 생각하니 나를 추스릴 수 없을 정도로 혼돈스러웠다. 누구에게 말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위로받고 싶었지만 막막하고 그저 눈물뿐이었다.
그때 간절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도자기 작업이었다. 저것만 하면 비로소 숨구멍이 트일 것 같았다. 그렇게 인연이 된 도자기는 벌써 15년 동안 나를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아지트이자 비밀스런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가만히 혼자서 흙을 만지다 보면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들도 그저 연속극의 이야기같이 가벼워진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느낄 때, 한바탕 마음속의 눈물을 쏟아내고 싶을 때, 항아리를 만들어 마음을 담아둔다. 힘들고 지칠 때면 울퉁불퉁 모난 구석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마음이 평화로울 때는 도자기의 형태나 선도 아주 부드럽고 평화롭다. 그렇게 만든 도자기에는 전부 나의 마음과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도자기들을 통해 나를 챙겨보고 되돌아보는 시간이 좋다. 어쩌면 이런 게 흔히 말하는 힐링이고 치유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내게 도자기가 그러했듯이, 삶이 절박해질 때면 무엇에든 집중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요리가 되었든, 그림이 되었든, 노래가 되었든…. 그것이 곧 치유를 해줄 터이니.
– 박환순 47세. 경북 상주시 모동면

저는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힘들어서는 안 망한대요. 위로를 못 받으면 망한대요. 연인도,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랍니다. 살다가 어떻게 안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힘든 일을 겪고 나서 위로를 받은 연인, 친구들은 오래가고 더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보다 7년 오래 사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자는 술이라는 매개체가 없이도 대화가 가능하고 위로가 가능하대요. 근데 남자들은 술 없이는 어렵죠.
여러분, 한국 남자들 불쌍하게 생각해 주세요. 한국남자가 제일 잘하는 거는 일이래요. 제일 힘들어하는 건 다른 사람을 칭찬하거나 위로하는 것이래요. 이걸 왜 그렇게 힘들어하나 봤더니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하는 걸 본 적이 없답니다. 칭찬하거나 위로하는 걸 싫어하거나 할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해하고 그러다 보니까 반복이 된답니다.
그래서 저는 남자분들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색하지만 “힘들지?” 이야기 해보고, 여자분들은 저 남자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언어를 배우지 못했구나,하고 이해해준다면 어떨까요.
– CBS TV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김창옥 서울여대 교수의 강연 중에서


자매 분쟁 완전 해결

옛날 옛날에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지 못한 슬픈…이 아니고, 언니를 절대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던 화난 동생이 있었습니다. 언니에게 ‘야, 자’는 기본. 거친 언어도 서슴지 않고 날렸던 그녀. 하지만 3년 전 온 가족이 마음 빼기를 하면서 언니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좋아졌고 지금은 누구보다 잘 챙겨주는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언니와의 십여 년간의 지겨운 싸움을 끝내고 드디어 철이 들었다는 동생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언제부터 언니랑 사이가 안 좋았나?   

중학교부터였던 것 같다. 언니는 나에게 완전 친구 ‘급’이었다. 기본적인 존중이나 예의, 그런 건 전~혀 없다. 언니가 뭐라고 하든 말든 ‘너’라고 불렀다. 언니로 대우해준 게 하나도 없었다. 과자가 있으면 “내가 다 먹을 거야!” “아니야, 내가 더 많이 먹을 거야” 싸우고, 어쩌다 툭 밀었다간 “왜 때려?!” 하면서 또 때리고 “왜 더 세게 때려?!” 하면서 더 때리고 더 맞고, 그러다가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초, 중, 고, 대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집에서도 같은 공부방, 같은 침실을 쓰니,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등하교를 했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없을 수가 없었다. 몰래 책상 어지럽히고, 베개에 침 뱉고… 언니는 아직까지 모르는 복수들도 많이 했다. (언니 미안… ㅠ.ㅠ)

싸울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넘 유치한 거 아닌가?   

원래 자매 사이가 그렇다.ㅎㅎ 보통 옷 때문에 제일 많이 싸운다. 내일 입을 옷은 그 전날 코디를 해놓는데 그게 겹치는 경우 비극이 시작된다. “나 내일 이거 입을 거야!” “싫어, 내가 산 거니까, 입지 마!” “먼저 얘기했으니까 니가 딴 거 입어!” 그러다가 머리끄덩이 붙잡고 하이킥 날리고 옷걸이 집어던지고 손톱으로 막 할퀴고 꼬집고… 지금도 흉터가 남아 있다. 거의 일주일에 서너 번은 심하게 싸웠다. 어쩌다가 언니가 내 얼굴을 치게 되면 나는 안경이 날아가고 눈에 보이는 게 없다. 흥분하고 막 욕하면서 “미친… 죽여버린다~~!!” 다시 하이킥! 딱 한 번만 참아도 안 싸웠을 텐데 서로 손톱만큼도 양보가 안 되니까 사태가 점점 심해졌다.

언니가 그렇게 미웠나?   

사실 언니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고 묘한 질투가 있었다. 언니는 첫째라고 할머니께 세뱃돈도 많이 받고 엄마도 언니를 더 많이 챙겼다. 예쁜 옷도 더 사주고 학원도 더 보내고 어릴 때부터 언니가 머리가 좋다~ 아이큐도 높게 나왔다~ 등 언니 칭찬을 많이 하셨다. 초등학교 때는 집에 오시는 미술 선생님이 계셨는데 언니가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 나랑 같이 그림을 그려도 언니 그림만 다들 칭찬을 했다. 그런 언니가 얄미웠다. 워낙 자주 다투다 보니까 언니를 그냥 보기만 해도 머릿속에서 짜증이 끓어올랐다. 나한테 잘해주면 ‘아, 웬일이지? 뭘 시키려고 그러지?’ 선의가 선의로 안 느껴지고 전부다 삐뚤게만 생각했다. 언니가 엄마한테 용돈을 받아가도 ‘아, 진짜 왜 이렇게 돈을 막 써? 자기가 돈 벌어? 엄마도 힘든데.’ 어쩔 때는 “왜 태어났냐? 언니 다 필요 없다. 동생 있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한 적도 있다.

지켜보는 부모님도 답답하셨겠다.   

그러셨을 거다.ㅎㅎ 벌도 세우고, 혼도 내고, 매질도 하셨는데 사이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언니와 나에게 마음수련을 권하셨다. 짧으나마 나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잘해주셨던 엄마한테도 내 맘에 안 들면 짜증 내고 심지어 때리고, 남 생각은 안 하고 살았다. 언니한테도 그동안 욕하고 모질게 대했던 게 정말 많았다. 나는 진짜 철딱서니 없고 동생 같지도 않은 동생, 까불고 대들기만 하는 동생이었다. 언니에 대해 짜증이나 미운 감정을 계속 갖고 있으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불편해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대는 마치 거울처럼 내 마음을 보여준다. 왜 굳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힘들어야 했을까 싶었다.

제일 많이 버린 게 뭔가?   

고집이 좀 셌다. 내가 해야겠다고 하면 무조건 해야 했다. 양보 절대 안 하고 배려 안 하고 먹기 싫은 건 죽어도 안 먹었다. 내가 별로 안 입고 싶었던 옷도 언니가 막상 입겠다고 하면 “싫어! 내가 입을 거야!” 하는 그런 똥고집?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 새로운 것도 시도해보고 수용한다. 사람들을 어려워하고 낯가리는 것도 없어졌다. 생각 자체가 긍정적으로 바뀌어서 뭐든 하면 되겠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도전하게 된다.

요즘에는 옷 때문에 안 싸우나?   

싸울 일이 없다. 만약에 같은 옷을 입고 싶으면 “나는 이 신발 신고 갈게, 언니가 이 옷 입어” 하면서 조율하거나 양보한다. 언니는 내가 늦게 들어오면 걱정도 해주고, 주말에는 같이 맛집 탐방도 다니고 쇼핑도 다닌다. 내가 무언가를 사거나 선택할 때마다 언니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된다. 오빠나 동생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것 같은 소소한 기쁨이다.

언니가 이제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나?   

언니를 보면서 맏이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많이 느낀다. 월급 받으면 할아버지, 할머니, 친척들까지 일일이 챙기는 언니. 손재주가 좋아서 직접 액세서리도 만들어 엄마랑 이모한테 선물을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많이 배운다. 언니의 착한 행동들을 삐딱하게 보지 않고 인정하게 된다. 언니가 남자 친구랑 사진을 찍어 와도 예전에는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세트로 꼴불견’이었지만 지금은 ‘와 예쁘다~ 잘 나왔다~프사(프로필 사진)감이다~’ 얘기가 자연스레 나온다.

마지막으로 언니에게 하고 싶은 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 별것도 아닌 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것 같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우리 둘 다 어엿한 성인이니까 각자 위치에서 항상 배려해주고 그런 착한 언니, 동생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여자 형제는 나이가 들면서 더 친해지고 끈끈하다고 한다. 앞으로도 쭉~ 영원히 지금처럼 평생 붙어 다니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언니가 옆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말 좋고 감사하다. 언니 그동안 미안했고, 사랑해~♥

대학생 정혜선씨

대학교 2학년,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를 당한 후 일상생활이 힘들었다는 정혜선(25)씨. 횡단보도를 건너려면 식은땀이 나고, 차 소리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교통사고 ‘외상 후 스트레스’가 그녀를 괴롭혔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 어떤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어느 날, 그녀는 마음수련을 만나게 된다. 과거의 기억에 끄달리는 좀비 같은 인생에서 이제야 탈출했다며 환하게 웃는 풋풋한 여대생의 마음공부 이야기다.  정리 & 사진 김혜진

대학교 2학년 때였어요. 수업에 들어가려고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차 한 대가 오더라고요. 차가 멈추는 걸 확인하고 건넜는데 갑자기 그 차가 저를 치는 거예요. 순간 당황한 운전자가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아서 저는 보닛을 타고 옆으로 떨어졌죠. 조금만 늦게 일어났어도 버스에 치일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전공 책은 산산조각처럼 흩어지고 온몸의 충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게다가 “나는 바쁘니 보험 회사하고만 연락하라”는 가해자의 태도에도 화가 났었죠.

그렇게 열흘간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이상하게 무서운 기분이 드는 거예요. 이게 뭐라 설명이 안 돼요. 특히 밤에 혼자 있으면 불안하고 두려웠어요. 세상에 혼자 남겨진 거 같고. 저는 차가 저를 칠 줄 몰랐거든요. 일단 멈춰 있었고, 횡단보도여서 믿고 건너가다가 치이니까 더 큰 충격이었죠. 그런데다 상대가 안하무인으로 나오니까 더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했던 거 같아요.

그때부터 차에 대한 노이로제가 생겼어요. 처음엔 혼자 길을 건너려고 몇 번을 시도하다가 너무 떨려서 포기하고 돌아온 적도 많아요. 일주일이 지나서야 횡단보도를 겨우 건너고. 몇 번을 기다렸다가 횡단보도 앞에 사람들이 무리 지어 많이 모이면 같이 옆에 붙어서 가고. 유난스러웠죠. 언제든지 방향을 틀어서 나를 칠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항상 차를 주시했어요. 게다가 차 소리에도 민감해져서 차 시동 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도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걷고, 끽~ 소리만 나도 자지러졌고요. 그때 알았어요. 세상천지에 차 없는 곳이 없구나.

성격도 예민하게 바뀌었어요. 그냥 웃고 넘길 말에도 짜증이 확 나고. 분명 말한 사람의 잘못은 아니에요. 내가 바뀐 건데 그게 컨트롤이 안 돼요. 결국 학기 말에 휴학을 했어요. 평범했던 일상생활이 어려워지고, 내가 계획한 것들이 일그러지니까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엄청 났죠.

그 교통사고가 진짜 원망스러웠어요.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늪과 같아요.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어느 순간 하고 있고 떨쳐내기가 어려웠죠. 사고가 나기 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 어떤 것도 그 이전으로 되돌려주지를 못하는 게 저를 더 힘들게 했던 거 같아요. 가족들, 친구들의 위로조차도 제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더라고요. 심지어 부모님의 ‘이젠 잊고 힘내라’는 말에도 굉장히 화가 나는 거예요. 누구보다 자식의 고통에 가슴 아파서 해주신 말씀이신데도, 부모님까지 원망할 정도로 제 마음은 피폐해져 갔습니다.

교내 사고라는 이유로 법적으로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하자, 세상에 대한 원망도 커져갔습니다. 결국 나는 내가 지켜야 하는구나…. 그래서 저한테 최선을 다했어요. 혹시나 우울증이 심해질까 봐 극복하려고 긍정적인 생각도 하고, 친구들도 열심히 만나고, 하루에 3시간씩 운동을 하고…. 근데 1년 넘게 했는데도 바뀌질 않으니까 점점 지쳐가는 거예요. 그때 좀 막막했어요. 탈출구도 없고 답도 없는데 계속 필사적으로 뛰고 있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러던 와중 고등학교 1학년 때 했던 마음수련이 생각나서 집 근처 지역수련회에 찾아갔어요.

마음수련은 기억을 떠올려 버리잖아요. 처음엔 그게 참 힘들었어요. 그때의 내 모습이 싫고, 상황을 떠올리는 순간 운전자 얼굴, 망해버린 내 인생, 절망감과 분노가 뒤섞이면서 힘든 마음들이 올라오니까. 그런데 떠올리지 않으면 버릴 수도 없으니까 조금씩 떠올려 버리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조금씩 벗어났던 거 같아요. 정말 세포 하나하나에도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버려지는 과정에서 그때처럼 똑같이 아파왔어요. 그렇게 한 장면 한 장면 떠올려 버리는데 고통도 같이 버려지는 기분이었어요. 늘 온몸이 무거웠는데 너무 가벼워지고 체력도 점차 좋아지고. 교통사고로 인해 생겼던 트라우마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아온 온갖 마음들까지 돌아보고 버릴 수 있었죠.

돌아보니 어떤 사건, 그 기억이 인생의 한순간을 빼놓지 않고 계속 영향을 준다는 게 참 무섭더라고요. 마음의 사진을 찍고 그 속에 살아간다는 게 참 무서운 거구나, 평생을 그 사건의 노예처럼 끌려다니면서 살겠구나. 정말 나라는 건 과거 사진의 집합체더라고요. 그게 너무 끔찍했기에 정말 열심히 버려나갔어요.

그러다가 우주가 나임을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이 정리된 느낌이었어요. 그때의 감정은 형용할 수가 없어요. 이런저런 사연 속에 사는 게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이 나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정말 후련했거든요. 그리고 희망이 생겼어요. 그 마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으니까요. 아, 되는구나. 마음이 놓였죠.

신기한 건 어느 때부터인가 짜증을 안 낸다는 거예요. 저는 항상 짜증 날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요. 그때 사고를 떠올려도 화도 안 나고, 어쩌다 사고 얘기가 나와도 덤덤하고요. 특히 차 소리가 났을 때 제 변화를 많이 느꼈어요. 예전엔 끽~! 소리만 나도 소스라쳐서 도망쳤거든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길을 걷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세상이 골고루 눈에 들어와요. 거리, 풍경, 친구 얼굴…. 일상이 편안해진 거죠.

친구들은 저보고 용 됐대요. 눈빛이 달라지고 성격도 유해지고…. 무엇보다 감사한 건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됐다는 거예요. 덕분에 내 인생이 달라지고 진짜 의미 있는 삶이 뭔지 알게 됐으니까요. 언젠가부터, 용서라는 말 이전에 용서가 돼 있더라고요. 더욱이 고맙기까지 했어요. 세상에 대한 화, 원망 등 부정적인 감정이 없어지니까 일단 제가 좋아요. 마음이 너무나 자유로우니까요.

꽃다워야 할 20대 초반을 좀비같이 보냈지만, 이제라도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느끼며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해요. 마음을 비워내야만 세상이 보이고 힘든 내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풍림화산!

풍림화산(風林火山)

“움직일 때는 바람처럼 빠르게 하고, 나아가지 않을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있고,
공격할 때는 불처럼 맹렬히 하고, 적으로부터 지킬 때는 산처럼 묵직해야 한다.”
(故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
 
고대 중국의 병법서 <손자병법(孫子兵法)> 군쟁(軍爭)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후 이 말은 종종 인생은 한 편의 전쟁 드라마와 같다는 비유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기가 다가오고 어려움이 닥칠 때,
지금 빨라야 하는지, 고요해야 하는지, 맹렬해야 하는지, 묵직해야 하는지….
잘 판단하고 싶습니다.
그런 지혜로운 자가 되어, 때로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묻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하늘의 뜻

하늘이란 여기도 하늘이고 저기도 하늘이고 이곳저곳이 모두가 하늘이라. 하늘의 참뜻은 이 세상 전체가 빈 하늘이 있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라. 이 우주 전체가 빈 하늘이 있어 우주의 천체가 존재하고 지구의 만상이 존재하는 것이라. 우리가 사는 것은 지구가 있어 있듯이 지구와 천체도 빈 하늘이 있어 있는 것이라. 이 세상에 있는 물체의 전부는 모두가 본바닥이 있어 있는 것이라.

이 세상의 천체와 만상이 또 물질의 어떤 것이 없어도 빈 하늘은 있을 것이다.
또 있어도 빈 하늘은 물질 안에 스스로 존재할 것이다.
이 세상의 이치는 물질이 온 곳이 이 빈 하늘이고 물질이 있다가 없어져도 빈 하늘이라. 온 곳이 빈 하늘이고 갈 곳이 빈 하늘인 것이 세상의 이치이듯, 우리가 세상 났다가 가도 빈 하늘이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만들어놓고 그 속 사니 사람은 세상에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본뜬 허상인 자기의 마음속에 있기에 사람은 죽고 마는 것이라. 인간은 이 마음의 세상을 지우고 빈 하늘의 마음과 하나가 될 때 인간은 이 빈 하늘에서 이 세상과 자기가 하늘에 진리인 이 영혼으로 다시 나며, 그렇게 다시 나지 않고는 살 자가 없는 것이라.

천국도 사람의 마음에 어디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의 천국이고 실제 진리로 존재하는 빈 하늘에 나는 것만이 영생이라는 단어가 성립이 될 것이고 이것이 하늘 난 자는 하늘에 산다는 뜻이다.

빈 하늘이 진리고 하나님 부처님 한얼님 알라이시다. 이 자체는 정과 신, 성령 성신, 보신불 법신불로 존재한다. 일체가 비어 있고 그 자체에 일신이 존재한다. 비어 있는 존재가 우주의 몸인 영이고 일신이 우주의 정신인 혼이다.

이 세상의 물질 일체가 환경인 조건에서 나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다. 이 일체가 하나인 우주의 정신이 물질로 표출이 된 것이다. 이 빈 하늘의 모양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의 일체다.

빈 하늘은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인 실체인 것이다. 이 존재는 물질이 아니라 세상의 물질 일체에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고 이 빈 하늘은 창조주이기에 아니 계시는 곳이 없다. 이 진리이시고 창조주이신 본바닥인 하늘에 나려면 자기를 세상에서 다 지우고 이 빈 하늘이 자기의 마음이 되어 이 재질로 다시 거듭나야만이 인간은 살아서 천국에 갈 수가 있고 영원히 살 수가 있다.

이것은 빈 하늘의 주인만이 빈 하늘에 부활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자체가 구원일 것이다. 살아 있는 빈 하늘이 있어 별 태양 달 지구가 있고 또 지구에 만상과 인간이 있다. 이 빈 하늘이 창조주인 것이다.

이 빈 하늘의 주인이 사람으로 왔을 때만이 이 빈 하늘에 세상과 인간을 나게 할 수가 있어 이 우주가 있는 것을 살리는 완성이 되는 것이다. 사람 속에 갇혀 죽은 세상을 사람마다의 마음속에 부활하게 하고 거기에 난 자는 그 세상의 주인이라 그 세상에 백성을 모을 것이다. 또 하늘 난 자는 하늘에 살 것이고 하늘 일 할 것이라.

하늘의 뜻이란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뜻이 없고 뜻조차 넘어서 존재하나 스스로 그때에 참이 행하여지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이제는 이 세상이 하늘에 나는 때다. 또 자기도 하늘에 나는 때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고 이때에 우리는 하늘에 들어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사는 이유와 목적은 이때에 하늘 나서 영원히 살기 위함이다.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시인, 저술가, 강연가입니다. 2002년 인간 내면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UN-NGO 산하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평화 대사로도 활동 중입니다. 저서로 <세상 너머의 세상>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등이 있으며 그의 저서 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은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에서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5개 국제도서상 2013 LNBA, NIEA, IBA, IPPY Awards, 2012 eLit Awards에서 영성, 정신, 철학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근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의 영역본이 2014 에릭 호퍼 북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하는 등 마음과 비움, 깨침에 대한 우 명 선생의 철학이 전 세계의 관심과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저보고 팀장하래요!?

제 고민은요?

저희 팀 팀장님이 이직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팀장 자리가 몇 달간 공석이었는데, 최근 근무 연수가 제일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저를 팀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동료들과 나이대도 비슷하고 경력도 비슷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며 허물없이 지냈는데 갑자기 팀장이 되고 보니 되게 어색합니다. 팀장입네 나서기도 애매하고… 일은 해야 하는데 뭔가 불편하고….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 고민입니다.

제 생각은요!

저도 오랜 직장 생활을 해봤지만, 직급이 올라갈 때는 마치 사춘기를 겪는 것처럼 낯설고 어렵고 두렵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의 나와는 달라져야 한다는 혼돈스러운 그런 마음. 우선, 당연히 겪어야 할 단계라고, 마음을 굳게 먹으세요. 공석으로 인해 팀장이 되었다면, 내가 할 일이 아니지 않을까 피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데, 그럼 더 혼돈스러워집니다. 나에게 주어진, 당연히 해야 할 새로운 경험이라고 즐겁게 도전해 보세요. 두 번째, 팀원에 대해서 내가 윗사람이니 명령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서로 도움이 되어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한, 조율자이자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같이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니 각자의 특성이나 장단점을 잘 아시는 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세 번째,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세요. 직급이 올라갈수록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이 주어집니다. 그럴 땐 주변에 물어보며 도움을 받고, 좋은 결과는 함께 나누고 나쁜 결과는 내가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해나가신다면, 모두가 행복한 팀이 될 것입니다. 홧팅! 정영옥

팀원들과 솔직하게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님이 팀장이 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님께서 느끼는 어려움도 털어놓아 보세요. 님이 팀장이라는 자리가 어색하듯, 팀원들도 님을 팀장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마음의 준비나 충분한 업무 경험 없이 팀의 리더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 쉬운 일만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그 자리에 가면 아무래도 그만큼 더 많이 고민하게 되고 움직이기 때문이겠지요. 업무 경험이나 나이가 비슷하다고 했는데, 사실 팀장 역할이라는 게 팀원보다 업무 자체를 잘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팀 운영과 관리를 잘해서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 이제는 팀원으로서의 버릇은 버리고, 한 차원 높은 곳에서 팀 전체가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고민해보세요. 어느새 님을 보는 팀원들의 시선도 달라져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과연 회사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다는 이유만으로 팀장으로 임명 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때로 부족해 보일 때도 있지만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이미 님께 신뢰를 보내고 있음을 믿고, 자신 안의 능력을 긍정하며 더욱 힘내세요. 김미진

3년째 팀 막내 직장남입니다. 솔직히 아직 그런 경우는 없지만, 저와 같이 입사한 동기가 먼저 승진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연차가 가장 오래되신 분이 팀장이 되는 건 여러모로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니 너무 어색해하거나 미안해하지 마세요.
제가 좋아하는 팀장님은 우리 팀이 추진해온 일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결과가 안 좋거나 팀원들이 실수할 때도 책임감 있게 받아주시면 업무에 자신감이 생기고 팀장님에 대한 믿음도 생기지요. 그리고 진심으로 팀원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힘들다고 얘기하면 저를 ‘불만 많은 문제 사원’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거죠. 조언을 할 때도 조직의 미래만 생각하기보다, 팀원 개인이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을 이야기해주면 나 자신을 위해서도 팀을 위해서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간단히 생각해보면 좋은 사람이 결국엔 좋은 팀장 같아요. 내가 좋은 사람이었는지, 자아비판의 시간도 가끔은 가져보시면서(^^;;) 팀원들의 의견을 진심으로 귀담아듣고 조율해 나간다면 주변에서도 다들 도와줄 겁니다. 강동철

 

지금 고민 중이신가요. 혼자
힘들어하지 마시고 함께 나눠보아요.
고민과 의견이 실리신 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엽서, 이메일 edit@maum.org
SNS 관련 게시글의 댓글로도
참여 가능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다음 고민입니다.

올해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갔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된 후 요즘 들어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내 친구 누구는 엄마가 이런 걸 사줬대, 내 친구 아빠는 한 번 심부름을 하면 10만 원을 준대.’ 헐~! 한 번 심부름했다고 9살 아이에게 10만 원을 주다니. 참 문제구나 싶지만, 그런 친구들과 자꾸 비교하는 아이를 보며 주눅 들까 걱정입니다. 행복은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니라고 설명도 해주지만, 그 말을 얼마나 받아들일지. 자꾸 친구들과 비교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입니다.

남자들은 죽어도 모르는 여자들 이야기

퇴근길에 동네 형님을 만나 간단하게 술 한 잔을 하게 됐습니다. 집에 있던 형수도 부르고 오늘 일찍 퇴근해서 미장원에 들른다던 아내에게 전화했는데 받지를 않았습니다. 형수님이 도착하고, 나오는 길에 아내와 통화를 했다며 이제 미장원에서 출발한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오후 3시에 퇴근해서 미장원에 들른다는 아내가 7시가 다 되어서 끝이 났나 봅니다. 저에게는 분명 앞머리만 살짝 다듬는다고 했는데 마음이 변해서 큰 공사를 한 모양입니다.

안주가 나올 때쯤 아내가 왔습니다. 미스코리아 사자머리까지는 생각 안 했지만 그래도 뭔가 크게 달라진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습니다. 그냥 아침에 출근했던 그대로였습니다. 아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동네 친구 사이인 형수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어머야~~ 나 엉치뼈 아파 죽는 줄 알았다. 4시간 앉아 있는데 배도 고프고….” 형수가 두부김치 한 쌈을 싸서 아내의 입에 넣어주며 맞장구를 쳐줍니다. “고생했다 가시나야. 어머, 옆머리 많이 잘랐구나. 훨씬 낫다 얘~~~ 그 정도 라인에서 끊어주니까 내 말대로 컬이 살잖아. 어머, 너무 예쁘다 얘~~”

두부김치 한입을 입에 물고 아내가 신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괜찮니? 어머, 난 너무 올린 거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 요기 밑에 라인까지만 하려다가, 너 말 생각나서 요기까지 올렸잖니, 요기까지 한 번 더 올리려고도 생각했는데, 그럼 이쪽 웨이브가 어중간하다고 담에 끝 부분을 한 번 더 말아주라고 하더라고.”

형수가 아내의 소주잔에 술 한 잔을 채워줍니다. “어머야~ 잘했어~~ 맞아, 지금 길이가 딱 좋아. 어! 윗머리도 폈구나?” 아내가 소주잔을 들었다 다시 놓으며 정수리를 테이블 쪽으로 들이밉니다. “머리가 너무 뜨는 거야. 그래서 머리 뿌리 부분만 스트레이트 했어. 이게 시간이 너무 걸린 거야. 사람도 많고 나 숱 너무 많잖아.” “어머야! 그러니까 밑에가 산다 얘~~ 밑에 볼륨이 사니까 훨씬 어려 보인다. 얘~~”

형수가 아내의 머리끝을 살짝 만져 보는가 싶더니, “영양도 했구나!” 아내가 머릿결을 한번 쓰다듬고, “요즈음 머리가 너무 푸석한 거야.” 이후 전혀 옮겨 적지도 못할 전문적인 언어가 둘 사이를 오고 가나 싶더니, 아내가 얘기하다 말고 문득 형수의 옆머리를 들어 올리나 싶더니, “어머, 지지배 귀걸이 너무 예쁘다. 저번에 귀걸이 아니네. 샀어? 너무 예쁘다.”

형수가 웃으며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올리고 나서야, 귀에 붙은 코딱지만 한 귀걸이를 전 봤습니다. 앞에 형님과 둘이 소주 한 병씩을 다 비울 때까지 두 아줌마는 연신 서로 예쁘다는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청룡영화제 대기실에서 만난 전지현과 김태희도 서로 저렇게 예쁘다고 칭찬을 주고받진 않았을 겁니다.

 

간단한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자주 먹이를 주던 길고양이를 만났습니다. 아내가 늘 가방에 준비하고 다니는 먹이를 하나 꺼내 들고 고양이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한 걸음 떨어져 지켜봤습니다.

그때야 아내의 머리 모양이 눈에 조금 들어왔습니다. 저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내가 뒤를 돌아보며 소주 한잔에 빨갛게 된 건지 쌀쌀한 날씨에 빨갛게 된 건지 모를 볼에 두 손을 살짝 올리며 한마디 합니다. “예뻐서 그러는구나? 이제 둘만 있으니까 예쁘다고 얘기해도 돼.” 질문만 하고, 대답도 안 듣고 아내가 집을 향해 걸어갑니다.

울타리 밑에서 아내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당당이가 울음소리를 냅니다. 아내가 지어준 길고양이 이름입니다. 얼굴에 큰 점이 있고 참 못생겼는데 온 동네를 당당하게 걸어 다닌다고 해서 아내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당당이에게 눈인사를 하며 저도 아내 뒤를 따르다 당당이에게 나지막이 한마디 했습니다. “너도 당당이지만………… 쟤도 44살 먹은 당당이야. 너만 알아….”

백일성(44)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