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식의 교단일기"

보고 싶다 다람쥐

내가 그 학교에 부임한 날이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배정받은 교실로 가는데, 교실 앞 골마루에 한 아이가 어슬렁거리더니 꾸벅 인사했다. “선생님이 우리 반 선생님이세요?” “그래, 너도 5학년 5반이냐? 아이와 나는 그렇게 첫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소문난 말썽쟁이였다.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선을 교묘하게 넘나들다가, 교사가 방심하면 한순간에 수업 분위기를 제멋대로 만들어버리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하교할… Continue reading

북덕 바람

어머니가 살고 계신 동네 근처로 근무지를 옮겨 일 년을 살았다. 떨어져 있을 때는 혼자 계신 어머니에게 늘 미안할 뿐이었는데, 막상 함께 살게 되니 괜한 일로 속상할 때가 많았다. 작년 김장철이었다. 퇴근하고 대문을 들어서니, 여기저기 배추 이파리와 김장용 비닐 같은 것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어머니가 또 혼자 기어코 김장을 시작한 것이다. 수돗가 커다란 물통에 소금 간을… Continue reading

박하사탕

어린 시절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명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인내’라는 과일이 진짜 있는 줄 알았다.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다? 다음에 커서 돈 벌면 그 요상한 과일을 꼭 사 먹어 보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내가 중학생이 되자마자, 신(神)은 ‘옜다! 네가 바라는 인내다’ 하고 인내를 주셨다. 그 맛은 이랬다. 중학교 때 집안이 사정없이… Continue reading

금슬

지리산 산자락 어느 외딴집에 노부부가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늙은 아내가 병들어 눕고 늙은 남편이 집안일을 맡았다. 남편이 아침부터 담숭담숭 일을 한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방 청소하고, 하얀 요강 단지를 씻어 햇살 잘 드는 앞뜰에 엎어 두었다. 마루를 닦고 마당을 쓸고, 흰 고무신 두 켤레를 뽀득뽀득 씻어 댓돌 아래 가지런히 두었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얀… Continue reading

계사년 대한민력

지난겨울, 어머니와 설장을 보러 갔다. 해가 떴는데도 엄청 추운 날씨였다. 우리는 방앗간에 들러 떡국 쌀 석 되를 맡기고 찹쌀을 빻았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다른 장거리를 보러 시장 속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찹쌀가루 봉지를 들고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도중에 서적 좌판을 벌여 놓고 앉아 있는 노인의 특이한 품새가 눈에 띄었다. 노인은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에 두툼한 잠바를… Continue reading

참외

며칠 전, 발송자를 알 수 없는 참외 한 상자가 어머니 집으로 부쳐 왔습니다. 단내가 코끝에 느껴지는 노란 참외였습니다. 엄마는 노란 참외를 보다가 당신 가슴속에 있던 70년 전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딸만 둘 낳았습니다. 그것이 멍에가 되어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였습니다. 아들 보자고 딴살림 차린 아버지한테 말대답한다고 발길에 차이고,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 꾸역꾸역… Continue reading

선생님과 선생놈

오래전, 나는 우리 반 한나를 데리고 ‘군내 가훈 자랑 대회’에 출전하였다. 애석하게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다. 대회가 끝나고 우리는 근처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학생들과 인솔 교사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은 늦어지고,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해진 목소리 하나가 풀 죽은 정적을 깨뜨렸다. “무슨 심사를 그따구로 하고 말이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목을 빼고 쳐다보았다…. Continue reading

엄마를 잊는 법

  시현이는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반도 못 그렸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교실을 빠져나가고, 숙제 일기 안 해온 친구들도 남아서 숙제 일기를 하고 벌 청소까지 다 마쳤는데, 시현이는 아직도 수채화 작업 중이다. 이제 교실에는 우리 둘뿐. 녀석은 속도를 좀 내려는지 양손에 붓 하나씩 들고 채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 눈총을 의식한 동작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더… Continue reading

어느 날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애들아, 선생님, 동생들, 사정이 있어서 휴대폰을 이제 안 쓸 거야!!! 헤어지려니까 눈물이 나오네 ㅠㅠㅠㅠ  이제 문자는 못 하지만 연락처는 삭제하지 마라죠. 나도 전화번호 다 적어 노을 테니까!! 답은 안 해죠도 되…. 이제….ㅠ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게 저장되지 않는 번호였다. 우리 반 아이 같은데 대체 무슨 상황일까. 나는 갑자기 당황했다. 답을 보내려… Continue reading

안녕, 당나귀

오랜 세월 잘 버텨온 내 차가 주저앉았다. 견인차를 불러 정비소에 갔더니 사장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엔진을 바꾸든지 폐차를 시키든지 하란다. 일찍이 가난한 집에 와서 고락을 함께한 정든 당나귀처럼, 헤어지려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그리고 당장에 주말마다 시골 어머니 집에 가야 할 일도 난감했다. 하지만 나는 이 급작스러운 사태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음을 비우면 편하고 궁하면 통한다….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