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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쌀로 맛있는 밥 짓기

결혼하고 일 년 만에 남편이 중국 주재원 발령을 받았습니다. ‘밥은 제대로 해먹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작은 압력솥 하나 이민 가방에 넣고 중국 생활을 시작했어요.

중국이란 나라는 땅이 넓어서 그런지 쌀도 참 다양하더라고요. 길쭉한 안남미부터 찹쌀의 찰기도 다르고 가격에 따라 맛도 같은 게 없었어요. 쌀 깨끗이 씻어서 ‘손등 위로 찰랑하게’라는 물 붓기 공식은 통하지도 않고요. 이 쌀 저 쌀 사다가 물도 맞춰가며 밥 짓기에 성공하면 얼마나 행복하던지.ㅎㅎ

하루에 세 끼를 하면 세 끼 모두 밥 상태가 다르니, 맛있게 고슬고슬하게 잘 지어진 날은 9첩 반상 부럽지 않게, 밥 한 그릇 소복이 떠서 그것만 먹은 날도 있습니다. 밥풀 묻은 주걱을 쥐고 밥알 떼어 먹느라 신이 난 아기 표정을 보면, 밥 한 번 잘한 걸로 진짜 엄마가 된 거 같았고, 남편의 ‘이야~ 한국 밥맛이다’ 소리에 신이 났습니다. 밖에서 먹고 와도 꼭 집밥에 김치를 찾는 남편 덕에 더 신경을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밖에서 먹는 밥은 허하다는 남편이 찬밥이라도 찾으면 사실 마음이 짠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설 쇠러 한국에 왔을 때 그 밥 잘하기로 유명하다는 쿠○를 샀답니다.

밥 짓기 기술은 늘었어도, 매끼 압력솥에 밥하고, 찬밥은 또 데우는 게 귀찮아서 알아서 잘한다는 쿠○를 산 거지요. 근데 알아서 못하더라는…ㅜ.ㅜ 쌀이 중국 쌀이라 그런지 10년 전으로 돌아가 물 맞추기를 다시 했지요. “밥은 쿠○가 한다더만 지가 알아서 물 맞추고 이런 거 몬하는갑지?” 남편 말에 웃으며 진밥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보온불이 켜진 밥솥을 보면 따뜻한 밥이 담겨 있단 생각에 흐뭇해지는 거, 제 속마음입니다.ㅋㅋ

요리 서혜정 & 그림 최정여

중국의 다양한 쌀로 밥 짓는 노하우

길쭉한 안남미는 물을 좀 적게 부어 밥을 고슬하게 짓습니다. 다 퍼낸 다음, 살짝 누룽지를 만들어 설탕을 솔솔 뿌려 먹거나 숭늉으로 먹으면 맛있답니다. 대부분의 중국 쌀은 찰기가 약해, 찹쌀을 섞거나 잡곡 쌀을 섞고, 밥을 지을 때 소금을 살짝 넣으면 간이 맞아서 훨씬 맛있는 잡곡밥이 됩니다. 찰기가 떨어지는 쌀로 한 밥이 남으면, 볶음밥이나 식혜로 해서 먹으면 정말 맛있어요.

지하철 손잡이 ‘룩 업 핸들’

만든 사람

권일현(26) 한성대학교 제품디자인 전공

이지수(24) 가천대학교 산업디자인 전공

● 이름은? 룩 업 핸들(Look Up Handle).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거나, 창밖을 두리번거릴 필요 없이 고개를 들어 손잡이만 바라보면 간편하게 다음 도착역의 정보를 알 수 있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꽉 찬 지하철 안, 일찍 탄 덕분에 편안히 자리에 앉아 목적지로 가고 있었다. 한 10분 정도 흘렀나? 내릴 역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지하철 문 상단에 설치된 정보판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빽빽한 사람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더러 시끄러워서 안내 방송 또한 잘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지나쳤을까 앉은 자리 뒤쪽 창문으로 아무리 고개를 두리번거려도 보이지 않고. 결국 일어서서 문 앞까지 사람들을 뚫고 갔더니 목적지까지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이런 불편함을 여러 번 느끼고 나서 앉아 있는 승객이 고개만 들어도 볼 수 있는 곳인 손잡이에 지하철역 정보가 보이도록 디자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제품의 기본 원리는? 손잡이 옆면을 깎아낸 부분에 작은 LCD판을 설치하여 도착역 정보가 보이게 된다.

● 중점을 둔 부분은? 우선 앉아 있는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적당한 화면의 각도와, 서 있는 사람이 손잡이를 잡는 데 있어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형태 스타일링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마다 한 사람은 서서 손잡이를 잡아보고 다른 한 사람은 앉아서 위를 올려다보며 반복적인 경험을 하면서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게 디자인하는 것에 신경을 썼다.

● 주변의 반응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주최한 2013년 유니버셜 디자인 공모전에서 특선을 했다. 이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지도해주신 교수님이나 주변의 많은 친구들도 지하철을 탈 때마다 힘들고 불편했던 문제였다며 많이 공감해주었다.

● 하고 싶은 말? 일상생활을 하다가 주변의 모든 것들에 영감을 받아 디자인을 하게 된다. 남들이 잘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부분도 관찰하고 연구해서 모든 사용자가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제품 디자인을 하고 싶다. 그리고 제품 디자이너로 세상에 나가기 전에 월간 <마음수련> 독자분들께 소개가 되어 감사드린다.

폴 포츠가 전하는 말

“제 아내는 저를 보면서 여전히 짜증 난다고 말합니다. 저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본모습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원챈스>의 개봉에 맞춰 내한한 폴 포츠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성공한 후의 자신에 대해 물어보자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실수투성이라며 우리나라에 와서도 커다란 간장을 넘어뜨려 와이셔츠를 버렸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왜 그는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연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말했을까.

폴 포츠. 아마도 그의 성공담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영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던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 나와 독설가 심사 위원으로 유명한 사이먼 코웰을 미소 짓게 만들었던 인물. 뚱뚱한 몸에 훈남이라고도 할 수 없는 외모, 게다가 당시에도 적지 않은 나이의 이 휴대전화 판매원이 오디션 무대에서 그것도 대중적이지 않은 오페라를 부르겠다고 했을 때 관객은 물론이고 심사 위원들조차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르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오디션장을 가득 채웠을 때 관객들과 심사 위원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는 단 한 곡의 노래로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폴 포츠의 삶이 워낙 드라마틱해서인지 그를 다룬 영화 <원챈스>는 특별한 이야기를 가미하지 않고도 극적인 영화가 되었다. 흔히들 폴 포츠를 ‘인생 역전’의 대명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원챈스>라는 영화를 통해 폴 포츠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접해보면 그 안에는 ‘인생 역전’ 같은 세속적인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폴 포츠는 <브리튼즈 갓 탤런트> 우승 이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하고 자신의 이야기가 책은 물론 영화화되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왜 달라진 것이 없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는 걸까.

폴 포츠의 성공은 무언가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오페라에 빠져 있었고 타고난 외모 때문에 왕따를 당할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면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고 그래서 또 노래를 하고…. 이 무한 반복이 그의 유년과 청소년 시절의 대부분이었다는 것. 하지만 오페라 같은 건 남자가 하는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아버지 밑에서 억눌려 있었다. 그러니 그는 엄밀히 말하면 휴대전화 판매원으로 일하다가 오페라 가수로 변신한 게 아니다. 그는 본래부터 준비된 오페라 가수였지만 현실에 억눌려 다른 삶을 자기 삶인 것인 양 치부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따라서 폴 포츠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꿈’을 이루는 ‘인생 역전’의 스토리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그 본래 모습이 무엇이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삶의 자세다. 폴 포츠는 자신의 부족한 면들을 모두 긍정했고, 또 부족한 삶이 만들어낸 노래에 대한 열정(그가 왕따를 당하면서도 살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 노래가 아니었던가!)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래서 어느 날 그에게 운명처럼 날아든 단 한 번의 기회(One chance)는, 사실상 준비된 그에게는 자신의 본모습이 갖고 있는 매력을 드러내는 시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승리와 절망을 만났을 때 그 두 사기꾼을 똑같이 대하라.’ 이 키플링의 시는 폴 포츠가 어렸을 때부터 간직하고 있는 좌우명이라고 한다. “승리와 절망은 실체가 없고 우리가 겪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폴 포츠의 이 말은 성공이든 실패든 변치 않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의 인생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폴 포츠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당신 그대로가 아름답다.

정덕현

왜 야쿠르트 아줌마를 보면 반가울까?

1971년 냉장고가 드물던 시절, 제품을 신선하게 배달하기 위해 생긴 야쿠르트 아줌마 제도. 47명으로 시작한 야쿠르트 아줌마는 현재 1만3천여 명이다. 야쿠르트 한번 먹어보지 않고 자란 사람 있을까? 노란색 옷과 모자, 노란 손수레를 끌고 동네 곳곳을 누비던 아줌마들은 어느새 거리의 문화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노란색의 기억은 떠나보내야 할 거 같다. 44년 만에 새 유니폼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1977년 야쿠르트 아줌마가 된 후 37년째 한길을 걸어온 이재옥(64) 여사, 그녀를 통해 들어보는 야쿠르트 이야기. 정리 최창원

제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27살 때였어요. 큰애가 갓 나서 심장 질환이 있었는데, 애 아빠 월급만으로는 병원비를 댈 수가 없으니까 나서게 되었죠.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사회 통념상 주부가 밖에 나가 일을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어요. 그래서 1971년 처음 회사에서 아줌마들을 모집할 때만 해도 지원자를 구하기 어려웠다고 해요. 영업 사원들이 교회, 동사무소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겨우 47명이 모집됐다니 실감 나죠. 그런데 몇 년 사이로 급성장하면서 6년 후 제가 시작할 때는 야쿠르트 아줌마가 전국에 2천 명 가까이 됐어요. 제품이 없어 못 팔 때도 많았습니다.

일을 시작한 곳이 여의도 지구였어요.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 국회도 들어서고 우후죽순으로 아파트 빌딩 같은 것들도 생기던 시대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리를 다니며 야쿠르트를 팔고 배달하는 일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혹시나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모자를 눈 위로 쓰고 다닌 적이 없었어요. 딸들이 부끄러워하면 어떨까 싶어서 말도 못 했고요. 그런데 나중에 아이가 쓴 일기장을 보게 됐는데 이미 알고 있었더라고요.

‘오늘은 날씨가 춥다. 엄마는 얼마나 추울까. 엄마의 옷소매에 찬 바람이 들어가겠지.’ 그 글을 보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다음부터 그래, 자존심이 어딨냐, 내가 부끄러운 일 하는 것도 아니고 더 당당해지자 마음먹었죠.

1971년 한국야쿠르트에서 처음 나온 야쿠르트는 용량 80ml, 25원에 판매됐다.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지금도 매출 90% 이상을 책임질 정도로 성실하게 활동하고 있다. 야쿠르트 아줌마들끼리는 ‘여사님’으로 호칭한다. 이재옥 여사는 현재 여의도 국회를 책임지고 있다.

44년 만에 바뀌는 새 유니폼은 정구호 디자이너의 작품. 통풍성이 뛰어난 기능성 소재를 사용했고, 기존 복장보다 세련되고 건강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늘 내 손에서 전달되는 걸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배달을 해요. 매일 한 340집 정도를 배달했는데, 하루에 얼마나 걷나 싶어서 만보기를 차봤는데 만이천이 좀 넘게 나오더라고요. 하루 만 보만 걸으면 만병이 없어진다는데, 건강에도 좋겠구나 싶었죠. 야쿠르트 가방이 보기보다 되게 무겁거든요. 배달을 시작할 때 딱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부터 헬스 시작이다, 야쿠르트 가방이 운동 기구다. 그런 마음으로 들고 걷고 뛰다 보면 일이 즐겁고 재밌어요. 만약에 단순히 일이라고만 생각했으면 이렇게 오래 못했을 거예요.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얼굴들을 다 알았어요. 아이가 야쿠르트만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도 하고, 집에 들어오라고 하면 같이 대화도 나누고. 맨날 저만 기다리던 혼자 사는 할머니도 계셨어요. 대화할 상대가 없다 보니 항상 저를 반겨주셨는데, 수년 동안 그렇게 보아온 할머니가 어느 날 돌아가셨을 땐 참 안타까웠죠. 어느새 동네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길에 서 있으면 길도 많이 물어보세요.

물론 힘들게 하는 분들도 만납니다. 그러다 보니 참을 인자가 3번이 아니라 30번은 필요했을 때도 많았죠. 그래도 그런 과정에서 인생을 배우게 되더라고요. 마음 갖기에 따라 힘든 것도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구나, 오늘이 조금 힘들어도 내 곁에 언제나 행복이 맴돌고 있구나도 알겠더라고요.

애기 때부터 야쿠르트 받아 먹던 애들이 커서 군대 가고, 또 결혼한다고 초대해주고 그럴 때는 꼭 제가 야쿠르트 먹여서 키운 거 같은 착각도 들면서 흐뭇해져요.(웃음) 이 일 하길 잘했다 싶고요. 이제는 성실하게 일해온 제 자신에게 만족합니다.

사실 저만이 아니라 우리 동료들이 다 그래요. 한번은 ‘야쿠르트 아줌마들의 자녀들이 대학 진학률이 높다’며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온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거울이라고 하잖아요. 비록 자기네들을 건사 못 하고 나갈지언정, 열심히 사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그만큼 더 공부를 열심히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 아이들도 그랬거든요.

30년 넘게 일을 했어도 야쿠르트 복장 입은 동료들을 보면 여전히 예뻐 보입니다. 올봄부터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까 다들 더 젊어 보이는 거 같아요. 그럼 이제 또 배달하러 가보겠습니다.

4인 4색의 세계 여행기

위쪽 김상구 작. <라오스 야시장>
라오스 루앙프라방. 2011.

300미터가 넘는 라오스 야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화려한 뱀술부터 작은 기념품까지 볼거리로 가득 찬 라오스의 야시장이 있어 밤이 기다려진다.
오른쪽 안성호 작. <산토리니 일몰>
그리스 산토리니. 2013.

하얗고 파란 산토리니 섬의 청명한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붉게 물든 일몰 풍경은 가히 세계 최고다.

100인의 여행 사진전. 처음에는 어느 누구도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4년 3월 8일, 나는 4명의 작가와 함께 그 시작을 열었다. 세계 여행가 안성호씨, 40대 직장인 유천씨, 10년 차 공무원 정지현씨, 사진작가 김상구가 함께한 4인 4색의 전시. 한마음으로 서로 배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2년 11월, 여행 커뮤니티 카페 ‘여행나라’를 만들어 운영을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수천 명의 회원이 가입했고,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취미로 사진을 하며 가족의 일상 등을 찍는 자상한 아빠들과의 만남은 내게 새로운 꿈을 꾸게 했다.

‘100인의 여행 사진전’이란 이름의 전시…. 단지 취미가 아닌 전문 사진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가족들이 응원해주고, 그 속에서 느끼는 행복을 전하고 싶었다. 2012년, 직장인 유천씨를 만나면서 사진전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하나하나 그려가기 시작했다. 진행은 순조롭지 않았지만 도전을 하면 할수록 이 일은 숙명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내게 기억에 남는 건 유천 작가님의 어머니와 조카를 비롯한 가족들의 깜짝 방문이었다. 그 역시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이라고 했다.

위쪽 정지현 작. <Welcome>
인도. 2014.

똑똑!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오색 빛 찬란한 세상이 나를 품고 있다.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사랑을 느끼는 순간!
문 너머 반짝이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려 하는 내 마음도 사랑이다.

위쪽 안성호 작. <최고의 엽서>
그리스 산토리니. 2013.

천국의 섬이라 할 정도로 지중해의 코발트 빛 푸름이 넘실대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나 역시 용기를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전시장을 찾았다. 사실 지금까지 어머니와 전시장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식의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시는 어머니, 그리고 “좋다”는 말씀 한마디…. 순간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이게 내가 그토록 바라던 전시회 풍경이 아니었을까. 그 누군가에겐 꿈을 갖게 하고 그 감동을 모두에게 전하고 싶어서 시작한 전시, 하지만 오히려 그들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고 더 큰 선물을 받게 되었다. ‘100인의 여행 사진전’, 처음에는 그 누구도 가능하지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4명의 작가와 함께하면서 나는 그 꿈에 한 발자국 내딛게 되었다. 더 나아가 100명의 사진가와 함께하는 그날까지 달리고 달릴 것이다. 다음 전시의 주인공은 당신일 수 있다.

오른쪽 위 유천 작.
<Spectacle>
이탈리아 로마. 2013.

영화 <글래디에이터> 등 영화 속에서만 보던 역사적인 장소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밀려왔다.
오른쪽 아래 정지현 작.
<특별한 여행>
인도 우다이푸르. 2014.

팔색조 같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우다이푸르의 아름다움은 인도의 색다른 매력이다.
아래 유천 작.
<Panorama of Paris>
프랑스 파리. 2013.

파리의 개선문에 올라서 에펠탑과 샹젤리제 거리를 내려다본 풍경이다.

사진가 김상구님은 캐나다, 아프리카, 라오스, 인도 등 세계 여행을 다니며 독특한 색감과 몽환적인 분위기의 HDR 사진으로 아날로그 감성을 디지털에 담아내고 있다. 지난 3월에 열린 <100개국 여행 사진전>을 시작으로 100인의 여행 사진전을 기획하고 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

권정생(1937~2007), 그는 평생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가난하게 살았고 병마 속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책 읽기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통장에 인세가 쌓여갔으나 가난을 버리지 않고 8평 작은 집에서 살았다. 더러는 그런 그를 두고 성자(聖者)라 칭송하지만 그는 자신을 미화시키는 그런 말을 싫어했다. 그는 우리와 동시대를 치열하게 살았고 어린이를 위해 글을 썼다. 그의 동화는 슬펐지만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 2007년 5월 세상을 떠난 권정생 선생을 추모하며 그의 생애를 돌아본다. 이기영 아동문학 평론가 & 사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그림책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작가

<강아지똥>과 <몽실언니>, 이 두 작품을 쓴 사람이 권정생이다. <강아지똥>은 그림책과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고 <몽실언니>는 1990년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방영된 적이 있으니,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알게 모르게 그의 작품을 한 번쯤은 다 스쳤을 것 같다. 하지만 ‘아동문학가 권정생’은 사람들에게 아직 낯설다. 그의 작품을 책으로 읽기보다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몽실언니>는 6.25 전쟁 때문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전쟁 통에 태어난 이복동생 난남이에게 동냥젖을 물리며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어린 몽실이의 이야기다. 그러나 책으로 읽지 않으면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만나면 적이기 때문에 죽이려 하지만 사람으로 만나면 죽일 수 없다”는 절절한 이 문장을 만날 수 없다. 권정생은 반공 동화가 판을 치던 때에 반공에 반대하며 ‘남과 북은 한민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몽실언니>를 썼다. 몽실이가 인민군 언니, 오빠의 도움을 받고 ‘사람’의 정을 느끼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는 모두 빠졌으니 드라마만 본 사람은 권정생이 이야기하고자 한 <몽실언니>를 온전히 만났다고 할 수 없겠다.

그림책《강아지똥》
권정생 글. 정승각 그림, 길벗어린이

조금 배가 고프더라도 행복하게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나 태평양전쟁까지 줄곧 전쟁마당에서 자란 권정생은 전쟁이 끝나서야 비로소 고국 땅으로 돌아온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어릴 때부터 진절머리 나게 겪은 전쟁을 또 겪는다. 6.25 전쟁이었다. 전쟁 때문에 권정생은 중학교 진학의 꿈도 건강도, 모든 것을 잃는다. 열아홉 살에 결핵에 걸려 수도 없이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던 그는 집안 사정으로 3개월간 거지로 떠돌다 1968년 안동 조탑리 일직교회 문간방에 종지기로 정착한다. 3개월간의 거지 생활로 그는 온몸에 결핵균이 퍼져 콩팥 방광까지 다 들어내어 소변 주머니를 밖으로 달았고 남은 시간 2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서른 살 무렵이었다.

몸과 마음은 고통과 절망의 늪으로 점점 빠져들었지만 그는 새벽마다 종을 쳤다. 종을 치다 보면 깨끗한 하늘에 수없이 빛나는 별들과 종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며 누구보다 가장 큰 고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아온 예수와 마음을 나누며 위로받았다. 그는 “언제나 감싸주고, 사랑을 가르치고, 날아가는 참새와 들꽃을 노래한 한 폭의 그림처럼” 산 예수를 사랑했다. 예수처럼 조금 배가 고프더라도 행복하게, 그렇게 살고 싶었다.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부당하다고 생각하신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우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 한 사람이 하루를 살아갈 돈은 얼마면 될까요?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맞게 살아갈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한 것입니다. 내 몫의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니까요.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권정생은 겨울에는 춥게, 여름에는 덥게 살며 좋아하는 산나물 반찬을 먹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작은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 생각하였지만 병마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그는 ‘글쓰기 농사’를 지었다. 글쓰기는 어릴 때부터 키워온 그의 꿈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방편이기도 했다.

그의 산문을 모아 펴낸 책 <우리들의 하느님>(1996)을 보면 권정생은 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가치를 두는 세상을 거부하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지향한다. “풍요로운 삶이란 새 한마리까지 함께 이웃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책에 썼듯이, 글이나 말과 행동이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이 일관되었고 평생 글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똥이 꽃보다 아름답다

1968년 어느 봄날, 권정생은 강아지똥이 잘게 부서진 자리에 민들레꽃이 핀 것을 본다. 사람들은 민들레꽃에 눈길을 주었지만 권정생은 ‘거꾸로’ 제 몸을 잘게 부수고 있는 강아지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아지똥은 지렁이만도 못하고 똥강아지만도 못하고 그런데도 보니까 봄이 돼서 보니까 강아지똥 속에서 민들레꽃이 피는구나.”  (어린이문학, 1999년 2월)

권정생은 버려진 강아지똥이 병들어 죽음 앞에 선 자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강아지똥처럼 거름으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니 그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며 위안을 주었다.

“<강아지똥>을 쓴 것이 이제부터 30년 전인 1968년 가을에서 1969년 봄까지였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꽃이나 해님이나 별같이 눈에 잘 보이는 것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잘 보이는 것보다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꾼 거지요. 그래서 버려지고 숨겨진 목숨을 찾아 그것들을 이야기로 썼던 것입니다.” <먹구렁이 기차>(우리교육, 1999)

강아지똥이 민들레꽃을 피웠다. 똥이 거름이 되었다.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거름이 되는 것, 똥의 존재와 가치가 달라지는 순간이다. 권정생이 민들레꽃을 조연으로 내리고 강아지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단순한 자리바꿈이 아니라 ‘버려지고 숨겨진 목숨’들의 가치를 되찾는 일이다. <강아지똥>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더럽고 쓸모없는 ‘강아지똥’이 동화의 주인공인 것에 놀랐고 ‘똥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작가 정신에 더욱 놀랐다.

이 동화가 세상에 나온 지 45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 아동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권정생님은 1969년 <강아지똥>으로 등단했으며, 벙어리, 거지, 장애인, 지렁이 등 세상에서 소외받거나 작고 약한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해왔습니다.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림책 <강아지똥> <몽실언니> <우리들의 하느님> 외 40여 편의 동화, 소설, 시뿐만 아니라 동극과 콩트 등이 있습니다.

디자이너 김영세

우리나라 제1세대 산업 디자이너 김영세. 삼성 가로본능 휴대폰,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 등등 그는 빌 게이츠가 ‘디자인계의 구루(지도자)’라고 표현할 만큼, 창의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에 산업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생소했을 시절부터 디자이너의 꿈을 꾸고, 디자인의 씨앗을 심고 발전시켜온 김영세(65). 1986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한국인 최초로 ‘이노디자인’을 세우고 본격적인 디자이너의 길을 걸어온 지 30여 년. 아직도 그는 ‘디자인’이라는 말에 가슴이 뛴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최근 그에게 연일 기분 좋은 소식이 있었다. 이노디자인이 자체 브랜드로 처음 제작한, 헤드폰 ‘이노웨이브’가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2014iF디자인어워드’ 디자인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3월 김영세 뮤지엄(YKDM)이 드디어 개관한 것. “내가 어떤 동기를 만나 디자이너의 꿈을 갖게 됐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꿈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가 뮤지엄을 만든 이유였다.

디자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미국 ‘IDEA’ 상들을 휩쓸고,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된 그의 디자인들은 일상에서 시작된다. 여행 중 불편함에서 나온 여행용 골프가방 프로텍, 아내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한 손으로 쉽게 꺼내어 볼 수 있는 슬라이드 개폐 방식의 콤팩트, 딸을 위해 만들게 된 액세서리처럼 생긴 MP3 등등. 그래서 그는 디자이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상에서 출발하라.”

선생님을 보며 디자이너의 꿈을 꾼 이들도 많은데요,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무엇보다 남들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에서 남들이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죠. 그리고 그게 전달돼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행복해지고. 그게 쌓이면 자연스럽게 보는 눈이 달라지고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게 돼요.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진하게 관심을 가져요.(웃음) 인간으로서는 쓸데없을지 모르겠으나 디자이너로서는 반드시 가져야 할 관심인 거죠. 사람들에 대한 관심 없이는 새로운 디자인이 나올 수 없으니까요.

‘진한 관심’에서 비롯된 디자인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으신가요?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였어요. 지하철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마주쳤는데, 난감한 표정으로 에스컬레이터 앞에 있더라고요. 디자이너로서 그를 도울 수 없을까? 고심하다 떠오른 아이디어가 에스컬레이터의 양쪽 끝에 스키처럼 생긴 발판을 두 개 만들어서 나오는 방식이었어요. 그리고 그러한 장치를 실제 디자인해서 발표했죠. 그걸 보고 교수님도 굉장히 격려해주었는데, 그때부터 저의 디자인에는 발명이라는 키워드가 파고들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창의력을 발산하는 방법도 체득했지요. 불편함을 관찰하라는 것. 그런데 안타까운 게 이게 아직 세상에 나오지를 못했어요. 지금이라도 다시 살려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모든 게 이노디자인 슬로건 ‘디자인은 사랑이다(Design is loving others)’라는 철학과 연결돼 있는 거 같아요.

디자인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중에 가장 핵심은 사랑이다, 이렇게 시작된 겁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게 선물인데 그게 디자인이 아닌가 생각해요. 선물을 고르면서 어떤 것을 그 사람이 더 좋아할지 고민하듯이 디자인도 고민을 하는 거죠. 그래서 디자이너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듯이 디자인하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디자인은 사랑이다’라는 걸 느낀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들이 16살 때, 어버이날에 아내에게 쿠폰북을 선물했어요. 세차하기, 설거지하기 등이 적혀 있는 쿠폰인데, 쿠폰마다 만기일이 적혀 있었는데 마지막 쿠폰 ‘엄마를 사랑하기’에만 ‘만기 없음’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걸 보는 순간 아내가 눈물을 흘리는데, 이게 바로 디자인이구나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엄마가 기뻐할까 궁리하며 아들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그리고 썼을 거 아니에요? 참된 디자인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했죠. 사랑이 담긴 디자인은 반드시 마음을 움직이게 되어 있더라고요.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마음이 모든 것이겠지요. 뭘 표현한다는 것은 마음이 지시하는 것일 거고. 마음을 전달하는 메시지가 제 경우에는 디자인인 것이죠. 결국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거죠.

그가 디자이너의 꿈을 갖게 된 것은 열여섯 살 때였다. 우연히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외국 디자인 잡지를 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가정용품, 조명기기, 병따개 등 멋있고 신기한 디자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설렘이 전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디자인이다!라는 결코 시들지 않는 목표가 생긴다. 하지만 그가 디자이너를 꿈꿨던 1960,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산업 디자이너라는 호칭조차 없었을 때였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1976년, 그는 산업디자인으로 유명한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언어의 장벽, 동양인에 대한 차별 대우…. 그 길이 녹록지만은 않았지만 그의 디자인에 대한 열정, 한결같이 밀어붙이는 뚝심과 배짱, 치열하게 도전하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매번 새로운 기회들이 주어졌다.

최근 개관한 YKDM(김영세 뮤지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안에 위치하고 있다.
아래 지하철 이촌역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어어지는 나들길. 전체적으로 T라인(태극라인)을 활용해, 박물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도록 디자인했다.

그리고 그는 1986년 첨단산업의 심장부인 실리콘밸리에 한국인 최초로 디자인 전문회사 ‘이노디자인’을 세운다. 자신의 꿈과 희망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오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디자인은 기술이 먼저 나오면 그것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의문을 갖는다. 우리가 먼저  아이디어를 내고, 그걸 생산할 수 있는 회사에 찾아가서 제공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디자인 우선주의(Design First)’라는 개념이었다.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그는 ‘디자인을 먼저 정하고 그것에 맞는 제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많은 기업들과 함께 수많은 히트 상품을 만들어낸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이리버 MP3이다. 2001년 천편일률적인 사각형의 MP3들 속에 나왔던 세계 최초의 삼각기둥 형태의 MP3(iFP-100시리즈)는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 작은 중소기업이었던 아이리버(당시 레인콤)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009년 일본의 유력 경제지 닛케이 BP는 ‘세계 10대 디자인 회사’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이노디자인을 뽑았다. ‘디자인 우선주의’라는 프로세스를 세계 최초로 시도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때로는 실패하는 디자인도 생기고 또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설령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누군가 실패라 말해도 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여겨요. 디자인이라는 것은 미래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 있는 요인이 너무 많거든요. 마이클 조던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수많은 골을 성공시켰을 때는 그거 곱하기 서너 배 되는 골을 실패했다고. 만약에 실패를 안 했다면 도전을 안 한 거겠죠.

‘이노의 디자인에는 빼기 기법을 쓴다’는 말이 다가왔습니다. 좀 더 설명해주신다면요?

이노의 디자인을 어린 친구들이 재미나게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심플 쌈박이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고맙다고 했죠.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 이노디자인의 핵심이니까요. 왜냐하면 군더더기는 값어치가 없고 또 쓸데없는 비용이에요. 빼기 디자인이란 군더더기를 빼자예요. 그렇게 하면 그 결과는 심플 쌈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가격이 싼 상품이 돼요. 늘 디자인의 3대 요소는 진선미라고 합니다. 진은 기능이 진실해야 한다, 선은 가격이 착해야 한다, 미는 모양이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면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하려면 빼기 디자인이 필요하죠.

처음 선진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가며 그가 다짐한 것이 있었다. ‘디자인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이다,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어 한국의 디자인 발전을 위해 애쓰겠다’는 것. 그의 바람처럼 처음 그가 디자인을 시작했던 당시와 2014년의 지금, 서울의 거리와 한국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인식도 엄청나게 변화되었다.

디자인 미개척지에 태어나 먼저 앞서가며 씨를 뿌리고, 개척하는 그 발전의 과정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감사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 디자인을 이끌어갈 후배들을 키우기 위해, 후배들을 위한 멘토링 강연 활동 등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인터넷 SNS 트위터(@YoungSeKim)를 통해 젊은이들과의 소통도 즐긴다.

김영세 디자이너 하면 T라인 디자인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생활 전반에 걸쳐 태극라인을 활용해서 디자인을 하고 계시잖아요. 디자이너로서 한국적 디자인이란 뭘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딱 들어온 게 태극기의 선이었어요. 이 오묘한 선들의 조화로 어떤 디자인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죠. 앞으로 이 태극라인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으로 세계에 코리아의 이미지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디자이너로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움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늘 끊임없이 도전해 오셨습니다. 그런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완벽하지 못하다는 걸 아는 거지요. 디자인도, 작품도. 목표만큼 나오질 않는구나. 어떻게 보면 부정적인 건 아니에요. 열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만약에 이루었다면 열정은 식잖아요. 열정이 진행 중이란 것은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다음엔 뭘까. 잣대를 높여가는 거죠. 그러러면 또 엄청나게 노력을 해야 하죠.

얼마 전 트위터에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덕목은 정성과 재능이다. 그런데 정성이 80% 재능이 20%다’라 하셨는데요.

최근 이야기인데 우리가 해놓은 일을 보고 상당히 부족한 부분을 발견했어요. 왜 여기까지밖에 안 될까. 그러다 보니 재능이 아니라 정성이 부족했구나를 알겠더라고요. 예를 들면 프로젝트에 대한 정성, 최종 사용자들에 대한 정성, 이런 정성이 없으면 재능이 아무리 많아도 나의 재능을 어디다 쓸지를 몰라요. 그런데 재능은 약간 떨어지더라도 정성이 지극하면 그 재능을 찾아서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세계적인 디자인 컬렉션 브랜드인 애크미의 펜과 생활용품. T라인을 활용해 세계에 ‘한국의 현대적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자신의 일을 즐기며 결과적으로 남을 기쁘게 하는 창조적인 사람들을 일컫는 퍼플피플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미래를 이끌어갈 사람들은 퍼플피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우리는 짧은 순간에도 가치를 생산하는 창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예를 들어 식당 일을 하더라도 손님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퍼플피플이에요. 돈 벌려고 어쩔 수 없이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얼굴 표정부터 다르죠. 스스로 내가 하는 일은 내 거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동안에 많은 걸 배우고 진화하게 되죠.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대단한 재능을 받아서 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개발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인 거죠. 그래서 나의 일을 내 일처럼 할 때 ‘내일’이 생긴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자기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정말 즐겁게, 자기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디자인이란 사람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 디자인이 사람을 위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믿는 그는 늘 호기심과 설렘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희망이 많은 사람은 젊은 사람이고, 후회가 많은 사람은 늙은 사람이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항상 젊다. 그가 앞으로 가져올 디자인이 또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줄까. 희망과 설렘을 주는 그는 우리들 역시 젊게 만들어주는 마음 디자이너이다.

“나의 디자인의 세 가지 키워드는 생활, 문화, 공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으며, 그들 모두를 연결하는 고리는 사랑이다.” – 김영세

김영세님은 1950년생으로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일리노이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1986년 미국에 이노디자인을 설립한 이래, 디자인계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지는 IDEA 금, 은, 동상을 모두 수상하는 진기록을 남겼으며, 미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1999년 한국에 지사를 만듭니다. 중국과 일본으로도 진출했으며, 현재 상명대 디자인대학 석좌 교수로도 재직 중입니다. 저서로 <이매지너> <퍼플피플> 등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해줄 수 없는 선물일지라도 그 마음만은 잊지 말고 전해보면 어떨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선물을 하며…

원성룡
72세. 전남 광양시 광양읍

운동은 건강에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훌륭한 치료법이다. 나는 공기 맑고 하늘이 드높게 펼쳐지는 백운산에 산책을 간다. 걷는 운동을 하고 생수를 꼭 떠온다. “생수 배달이요~ 생수요~” 생수를 떠와 이웃들에게 골고루 선물해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생수를 배달한 후 넓은 텃밭에다 채소를 심는다. 마늘을 파종하자 싸늘한 날씨에도 싹을 틔웠고 축 처진 양파는 서서히 일어나 당당하게 세상과 마주했다. 신기하고 신비로운 일이다. 시금치 생강과 마늘은 기본이고, 상추, 부추, 배추, 무, 당근 등등. 텃밭에서 수확한 작물들은 모두 친척들에게 선물한다. 남에게 퍽퍽 퍼주어야 마음이 편해져오니 나 자신도 모르게 주는 기쁨으로 한평생을 살아왔다.

봄이 찾아오니 요즘은 너무 바쁘다. 넓은 텃밭에 씨앗을 뿌릴 준비 작업을 해야만 한다. 여름이면 풀과의 전쟁이다. 뽑아도 뽑아도 또 올라오는 풀을 매야 하고 또 매야 하고 무공해 채소를 가꾸기가 정말 힘이 든다. 그래도 계속 일을 하는 이유가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하 웃음이 나온다. 내가 먹기보다 친척들에게 무공해 채소를 선물하기 위함인 것이었다. 힘은 들어도 농약 없이 채소를 가꾸어가는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무공해 채소를 선물하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행복해지는 마음, 그 누가 알리요?

친척들의 “감사해요, 고마워요~, 이걸로 동네 잔치했어요.” 그 따듯한 말 한마디에 힘든 몸이 위로받는다. 작년 겨울에는 너무 많이 아파서 다시는 텃밭 일을 안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봄이 찾아오니 내 발걸음은 다시 텃밭으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못 말리는 내 자신이여. 아들딸들은 이제 좀 쉬라며 일을 못 하게 한다. 나는 알았어, 알았다, 대답만 하고 열심히 텃밭에서 봄을 맞고 있다. 힘이 닿는 한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야 나도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주는 기쁨을 계속 얻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채소를 가꾸며 마음의 대화를 나눈다. 무럭무럭 크거라. 꼭 자식을 돌보는 기분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자연이 주는 선물들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자연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냥 준다. 그런 자연에 비하면 자꾸만 더 가지려 하는 인간들의 욕심이 부끄럽다. 들판의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활짝 웃는다. 나도 따라 웃어본다. 힘들어도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를 위로해 보며 이 글을 쓴다.

정일 작.
<선물>
60.6×72.7cm.
Oil on canvas. 2013.

선유 천사, 네가 우리에겐 가장 큰 선물이란다

정용희
37세. 자영업. hyeyoung0308.blog.me

2012년 2월 2일 새벽, 우리 부부에게 작고 아담한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과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공주님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 우리 공주님은 SMA(척수성근위축증)이란 희귀병을 진단받았습니다. 몸의 근육이 점차 소실되는 병이었습니다. 왜 하필 우리 부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슬프고 절망적이었습니다. 병명을 검색하면 암울한 글들뿐이었습니다. 이후 좋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1년이 넘게 중환자실에 있는 날들은 계속됐고, 기관절개수술과 위루관수술 등으로 아프고 쓰린 상처만이 몸에 남았습니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를 중환자실에 홀로 남겨두고 떠날 때면 우리 부부의 가슴은 찢어질듯 아프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환우 모임들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많은 위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가끔 힘들다 털어놓는 말 한마디에 응원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 새삼 마음을 터놓고 함께할 수 있는 이웃들이 있다는 게 참 감사했습니다.

우리 부부에겐 슬퍼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언제 우리 곁을 떠날지 모르는 선유 천사 덕분에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선유 천사는 길게 잠을 못 잡니다. 잘 때도 침을 계속 흘립니다. 침을 삼킬 수 있는 근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침이 기도로 넘어갈까 봐 밤잠을 설쳐가며 번갈아가면서 보살펴도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짜증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줄까 늘 생각하고 연구했습니다. 선유 천사에게 꼭 필요한 재활 치료도 열심히 받고, 필요한 보조기는 직접 만들기도 했습니다. 늘 누워만 있는 선유 천사를 위해 지루하지 않게 쉬는 날이면 전시회관이나 마트 그리고 놀이공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선유 천사에게 맞는 놀이 기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몇 번의 고비가 찾아왔지만, 우리 부부와 선유 천사는 꿋꿋이 이겨나갔습니다.

지금 선유 천사는 27개월이 되었습니다. 이젠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가 스트레칭과 호흡기 재활 치료를 해주고 밥을 먹고 음악을 듣고 만화를 보고 신나는 몬테소리 수업을 합니다. 눈짓과 얼굴 표정으로 엄마와 이야기합니다. 우리 동네에서 최고로 부지런한 엄마를 만들어버리는 우리 선유 천사님….

우리 가정은 항상 바쁘고 항상 북적북적거리고 항상 행복해서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마치 누군가 조용히 놓고 간 선물 같은 우리 선유 천사님 덕분에 우리 부부는 제2의 인생을 산다고 할 정도로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선물에는 항상 의미가 있다고 하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왜 선유를 보내주셨을까…. 우리 부부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선유 천사를 돌보며 나는 정말 사랑이 없고, 미성숙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부족한 사람임을 매일매일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고,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는 다른 사람들의 눈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의 아픔에 눈물 흘리고 공감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이 선유 천사를 통해 받은 선물들입니다.

우리 부부는 희귀병으로 고통받는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내는 블로그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선유 천사의 병을 알려나갔습니다. 블로그엔 같은 처지의 엄마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응어리진 마음들을 푸는 창구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그 인연으로 우리 부부는 천안에 사는 가족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유 천사와 같은 병을 앓는 아이가 있는데, 외출하는 건 엄두를 못 내고 있다기에, 직접 유모차를 태우고 외출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을 열고 세상에 한 걸음 내딛는 그 가족을 보며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우리 부부는 소망합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장애아로 인해 힘들어할 가족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삶이 버겁고 힘들겠지만, 반드시 언젠가는… 그 아픔조차도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모두에게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그래서 우리 부부는 늘 내일이 가슴 뛰게 기대됩니다. 앞으로 있을 선유 천사와 함께할 많은 날들에 또 어떤 선물 보따리를 받게 될지 말입니다.^^

정일 작.
<기다림>
22×27cm.
Oil on canvas. 2013.

어느 해 오월, 아들이 건넨 카네이션

이현주
50세. 주부. 경기도 화성시 진안동

어느 해 오월, 근심의 나날을 보낸 적이 있다. 작은아들이 잘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피시방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낮과 밤이 바뀌어 생활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퇴근하듯 들어와 하루 종일 잠만 잤다. 누군가 한동안 그러다가도 지치면 그만두겠지! 그러니 믿고 기다려보라는 이야기만 했다. 하지만 속상하고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절대로 우리 아이들은 방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중학교 때까지 공부도 잘했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원하지 않던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공고에 가고 싶어 했다. 입학해 두 달도 채우지 않고 그만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만 자는 아들을 보면 화가 났다. “그럴 거면 나가라”며 윽박지르고 짜증을 냈다. 아들은 엄마, 아빠의 눈치도 살피지 않았다. 하루는 현관 입구에 벗어 놓은 슬리퍼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슬리퍼를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쪽이 달랑달랑 떨어진 채로 끌고 다니는 슬리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에서 깬 아들은 또 외출을 하려는지 슬리퍼를 찾았다. 쓰레기통에 넣었다고 했다. 화가 난 아들은 “나도 버리지!” 그리곤 쓰레기통을 뒤져 슬리퍼를 다시 꺼내는 것이 아닌가? 어이없고 기가 막혔다. 화가 난 아들은 더욱 그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그렇게 힘들고 괴롭고 전쟁 같았던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부터 잠만 자던 녀석이 점심만 되면 일어나 어디론가 급하게 나가버렸다. 그러다가 피곤에 쌓인 모습으로 들어와 코까지 골며 잠을 잤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잘 가는 피시방 근처에서 몰래 숨어 살폈다. 그 순간, 아들이 보이고 아들 친구들도 여럿 보였다. 무슨 일일까? 가슴이 뛰고 걱정이 앞섰다. 사람들과 말을 하고 웃기도 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좌판에 펼쳐 놓은 꽃을 팔고 있었다. 용돈을 벌자며 꽃집 알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후 어버이날이 되었다. 남편이 출근을 하려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아들은 웃으며 한 손에 카네이션이 담긴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엄마, 아빠 선물이라며 건네준다. 남편과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를 위해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고맙다는 말을 하고 출근했다. 나는 속으로 엄청 울었다. 방황만 한 줄 알았던 아들은 그동안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왔던 거다. 그동안 모은 알바비가 100만 원이 되었다며 좋아했다. 엄마 옷도 사 입으라며 10만 원을 준다. 그날 너무 놀라고 미안해서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너한테 공부해라 뭐 해라 아무 말 안 할게. 엄만 너를 믿을게.”

아이를 내 뜻대로 인문계 고등학교로 보낸 후 얼마 안 되어 아들이 “이제라도 공고로 옮겨 달라”고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괜찮겠거니 하고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때 조금만 아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더라면 아이가 행복했을 텐데. 늘 엄마 마음대로 아이를 키우려 했구나 싶어 참 미안했다. 다행히도 나와는 달리 남편은 언제나 아이를 그냥 지켜봐주었다. 그래도 그런 아빠가 있어서 아이가 이렇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 후, 아들은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믿어주는 만큼 아이는 스스로 알아서 했다. 군 생활도 마치고 지금은 복학을 해서 멋진 대학 생활을 하고 있다. 믿고 기다리면 결국은 자기의 길을 찾아가는 거 같다.

처음으로 아들에게 받았던 카네이션 선물. 지금도 카네이션만 보면 설렌다. 너무도 행복해서다. 카네이션 바구니에 작은 아이비 화분이 꽂혀져 있었는데 6년이 지난 지금도 잘 크고 있다. 아이비가 크는 만큼 우리 아들도 이렇게 커가는구나 싶다. 아이비는 겨울이 되면 잎이 다 떨어지고 노랗게 마르지만,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순이 돋아난다. 온실이 아니라 바깥에서 바람이나 햇볕을 골고루 받으면 더 잘 성장한다. 사람도 똑같은 거 같다.

“그때 우리가 왜 그랬지?” 한번은 아이가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팽팽한 삶의 인생에서 사춘기라는 순간이 있는 것처럼, 방황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된다. 선물이 된다.

정일 작.
<푸른빛 산토리니>
61×93cm.
Oil on canvas. 2013.

지금 당장 해줄 수 없는 선물일지라도 그 마음만은 잊지 말고 전해보면 어떨까요.

한밤의 라디오에 나를 위한 노래가 나왔을 때

나운영
42세. 주부. 일본 치바현 거주

주는 이와 받는 이의 당시 마음을 되짚어 볼 수 있다면 선물은 그 좋은 징표이자 증거일 것이다. 사십 평생 살아오면서 주는 이의 입장에 서서 건넨 선물이 받는 이의 입장에서 받아든 선물보다 많았더라는 사실을 새삼 추억해 보니 처음엔 손해 보고 살았나 싶었다가,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잘한 것 같아 입가에 잠깐 미소가 번진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선물 중 하나는 한밤에 듣던 라디오방송에 사연을 보낸 일이다. 고3 시절 특이한 친구 한 명이 있었다. 다들 공부하는데 그 친구는 맨날 음악을 들으며, 좋은 곡은 녹음해서 들려주기도 하고 빌보드 차트 순위 같은 것을 가르쳐주는 아이였다.

하루는 그 친구와 함께 평소 즐겨 듣던 라디오방송을 그날 밤 꼭 들으라고 당부를 했다. ‘친구 나운영 님을 위해 들려드립니다’ 알고 보니 나를 위해 노래 사연을 보낸 거였다.

그렇게 나를 위한 팝송을 듣던 날, 처음으로 웃으면서 잠들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라디오에 내 이름 석 자를 나오게 했던 그 추억의 선물이 너무도 큰 감동과 행복함을 맛보게 해주었다.

이후 대학에 들어가 나도 최고의 행복을 맛보게 해주고 싶어, 한 친구를 위해 사연과 음악을 신청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디제이에게 뽑힐 수 있을까 고민 고민해서 보낼 때의 설렘과 떨림이란. 물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방송 매체에 자신의 이름이 나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던 우리들! 지금은 보통 휴대전화의 뒷번호로 소개되는 사연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게 사연을 선물해 주었던 친구는 지금 소식이 끊겼고, 내가 사연을 선물했던 친구는 페이스북이며 카톡 덕분으로 가끔 소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연결 고리는 갖게 되었다. 그 친구 역시 아직도 그 선물을 두고두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금은 세 아이라는 선물을 하나님께 받아 잘 키우고 있다. 국경은 넘더라도 나이는 밑으로 넘지 말자,라고 웃는 소리로 했던 슬로건이 그야말로 그대로 적중해 국경을 넘어 일본인 남편과 일본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내겐 매일같이 해외여행처럼 느껴지는 일본 생활. 한국에서 갈고 닦은 일본어 실력을 십분 활용하고 입에서 쉰내가 날 정도로 원 없이 일본어로 살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어를 전공할 때만 해도 인생이 이렇게 진행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은 신의 선물의 연속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좀 심술도 부리고 투정도 부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힘든 고비를 넘고 또 넘고 보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게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는 특별한 선물이었다.

사실 돌아보면 선물을 줄 때의 마음은 내가 얼마나 당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주오~’가 많았던 거 같다. 그렇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하지만 신의 선물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에게 딱 맞는 것을 그냥 주고 계신다. 받은 선물을 어떻게 잘 쓸지는 자기의 몫이다.

하루하루라는 선물! 아이들이라는 선물, 남편이라는 선물, 일본이라는 선물! 그 종합 세트를 손에 들고 있는 이는 바로 나임을 늘 각성하며 오늘 하루도 파이팅을 외쳐본다.

정일 작.
<푸른 여행>
24.5×34cm.
Oil on canvas. 2014.

사장님께 받은 장미꽃 쉰여덟 송이

박만춘
57세. 주부. 충남 보령시 지장골길

딩동~, 누구세요? 네, 꽃 배달입니다. 순간 스쳐가는 생각. 꽃을 배달해 줄 사람이 우리 집에는 없다. 아이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리지아 작은 꽃다발을 선물한 것이 전부이다. 그래도 이야기나 들어보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와, 붉은 장미 쉰여덟 송이가 예쁘게 장식된 꽃바구니다! 카드도 있었다. “결혼기념일을 축하드립니다.” 보내신 분은 놀랍게도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이었다. 세상에, 하늘같이 높은 사장님께서 직원들의 결혼기념일을 챙겨주시다니. 고맙기도 하고 남편 직장에 대한 자부심에 기뻐서 두둥실 떠오르는 풍선이 되었다.

남들은 고가의 명품 가방과 옷 신발 등을 사들이며 자랑으로 여기지만 우리 같은 서민은 명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뿐더러 생일이면 쇠고기 듬뿍 넣은 미역국을 끓여 먹으며 가족 간에 감사의 정을 나누는 것이 전부이다. 꽃은 마음의 꽃으로 대신한다. 생일 맞은 주인공을 가족들이 차례대로 안아주며 생일 축하와 함께 건강한 덕담을 나눈다.

퇴근하는 딸이 거실을 환하게 밝혀주는 장미꽃 다발을 보며 “아주 탐스럽고 멋진 꽃다발이네요. 엄마가 사셨을 리는 없고 누가 사오셨어요?” 하고 묻는다. 카드를 보더니 “퇴직을 앞둔 아빠를 위로하는 꽃다발인가 봐요?” 하고 묻는다.

그렇구나! 3월 17일 결혼기념일도 축하할 겸 퇴직 기념 꽃다발이구나. 남편은 3월 27일 38년간 다니던 발전소 엔지니어 일을 마감하게 된다. 58세가 되어 정년퇴직을 하게 된 것이다. 늘 그 모습 그대로고 마음만은 이팔청춘이건만 이제 회사 일은 그만하라니 섭섭하다. 그렇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어서 한 자리라도 내어주는 것이 원활한 순환을 위하는 것이리라!

여보,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교대 근무 하면서 때로 잠도 설치고 밤에 일 나가야 할 때는 안쓰러운 적도 많았어요. 혹시나 위험한 일이 있을까 마음 졸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늘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일한 당신이 존경스럽습니다. 38년 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당신 좋아하는 산도 실컷 다니며 좀 쉬세요. 앞으로 더 재밌게 살아봐요.

발전소 사장님 감사드립니다. 빠알간 빛의 장미 향기처럼 남에게 도움을 주고 기쁨을 선물하는 멋있는 가족으로 행복하게 지낼게요. 남편의 평생직장이었던 발전소 또한 사고 없이 더 좋은 직장이 되길 바랍니다.

정일 작.
<story garden>
62×93cm.
Oil on canvas. 2005.

한결같이 선물을 주던, 선물 자체였던 그 아이들

이지은
26세. 부산시 영도구 청학로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 또는 준다는 것은 참 특별한 일이다.

선물 하면, 내게 2년간이나 선물을 주었던 그들이 떠오른다. 어느 날엔 꽃을, 언제쯤은 편지를, 또 다른 날엔 그림을, 또 갑자기 인형을…. 어쩌면 한결같이 변함없이 선물을 주던지. 그 덕분에 언제나 마음은 봄처럼 설렘 가득했다.

내 나이 24살, 처음으로 어린이집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늘 주눅 들고 살아서, 나는 그렇게 안 하리라 다짐하며 유아교육과를 갔다.

아이들을 정말 긍정적으로 밝게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매일매일 밝게 웃으며 “사랑해” “좋아해”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내가 준 것의 몇 배 이상을 돌려주었다. 이틀 주말을 지내고 오면 “보고 싶었어” “그리웠어” 드라마 대사같이 달달한 말들을 눈을 반짝거리며 해온다.

출근해 어린이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그 순간, 저만치서 토끼마냥 깡충깡충거리며 달려와 품에 쏘옥 안긴다. 그러면 또 다른 아이가 또 다른 아이가 대롱대롱 일곱 마리 아기 양들처럼 품속에 파고든다. 아이들과 따스한 포옹, 그것이 나에겐 선물이었다.

자연에서 키우자는 모토를 가진 곳이라, 매일 숲에 갔다. 봄에는 벚꽃 잎이 흩날리는 그 길을, 여름에는 수풀 우거진 그 길을, 겨울에는 싸리눈 내리는 그 길을 같이 걸었다. 아이들은 강아지마냥 뛰어가며 좋아한다. 표정이 어떻게 저렇게 밝을 수 있을까. 계절을 마음껏 느끼는 아이들이 나에겐 선물이었다.

한번은 한여름 숲속 나들이길. 한 아이가 내 허리를 톡톡거린다. 뒤돌아서 아이를 바라보았더니 무언가를 내민다. 숲길을 걸으며 이건 양지꽃, 이건 강아지풀, 저건 아카시아잎 하며 가르쳤던 내게, 그 꽃들을 하나씩 모아 손바닥만 한 꽃다발을 만들어 건넨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꽃다발을 받은 나는 행복한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은 내 생일이었다.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등원하면서 아침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어머님께서 “선생님, 생일이시죠?” 하는 말을 듣더니, 아이가 다시 밖으로 뛰어가 자기가 타고 온 차에서 무언가를 가져온다. 손때가 묻어 노랗게 빛나는 아기 곰 인형을 부끄러운지 발간 볼을 하고 내민다. 아이가 아끼며 놀던 그 곰 인형. 유독 짓궂게 굴었던 아이가 줬던 거라 더 감동적이었다. 이 인형에게 빨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빨아야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인형은 아직도 내 침대맡을 지켜주고 있다.

길 가다 선생님 생각이 났다며 주운 예쁜 모양의 돌, 나뭇잎, 구슬, 아끼는 색종이. 심지어 비비탄 총알…. 아이들이 준 선물들은 무궁무진하다. 한 아이는 매일매일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차를 그려서 선물을 해주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불꽃이 센 자동차” “엔진이 무려 3개나 달린 자동차”라면서. “내가 어른이 되면 차 사줄게요. 스포츠카!” “집 사줄게요.” 아이들의 약속만 지켜지면 난 집도 차도 참 많은 사람일 것이다.

아이들은 뭐든지 주려고 한다. 아이들은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순간순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뒤끝도 없다. 때로 혼을 내도 돌아서면 다시 다가온다. 그래서 동심으로 돌아가라 하나 보다.

아이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경청과 격려를 해왔던 수많은 시간들. 처음 만난 아이들과 있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나에겐 선물이었다. 잊지 못할 그 선물 말이다.

정일 작.
<Story garden>
260×194cm
Oil on canvas. 2005.

생일 선물로 받은 수학 문제집

한나경
20세. 대구시 달서구 진천동

요즘 나의 하루는 늘 똑같다. 그래서 다행이다. 만약 지금 내가 흥미진진하고 매일 새로운 일상을 살고 있다면 정말 큰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재수생, 아니 일명 죄수생이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기상. 잠에 취해 이리저리 머리를 흔들며 가는 버스 안. 학원. 아침 특강. 수업. 밥. 수업. 밥. 자습. 조금은 답답하지만 이런 생활이 내게 바람직하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3월 3일, 그날만큼은 조금 울적했다. 바로 내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재수생에게 생일은 무슨 생일, 의미 없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축하받기는커녕 말 걸기도 미안한 상황이라니. 사실은 많이 외로웠다. 하지만 금방 잊어버리고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살고 있는데, 평소랑은 조금 다른 일이 일어났다.

이제 대학생인 친구가 나의 재수 학원 쉬는 시간에 맞춰 찾아온 것이다. 손에는 간식과 문제집을 가득 들고서 말이다. 유난히 수학에 약한 나를 위해 자신이 전에 보던 수학 기본서들뿐만 아니라 서점에 들러 또 몇 권의 수학 문제집들을 더 사온 것이다.

“생일 선물로 문제집 주는 거는 좀 이상한 거 같아서 다른 거 살까 했거든? 근데 이게 지금 니한테 제일 필요한 거 아이가.”

마음속으로는 감동 먹어서 눈물 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진짜 많다며, 이걸 언제 다 풀겠냐며 괜히 장난스럽게 말했다. 사실 수학울렁증이 있는 나에게는 약간(?) 많은 양이기는 했다. 내가 샀더라면 어쩌면 또 작년처럼 풀다가 지쳐 ‘수학은 내 인생의 걸림돌이야!’ 하고 책을 덮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해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책을 덮고 싶어도 친구의 얼굴이 떠오를 테니 말이다.

오랜만에 만났기에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았지만 우리가 얼굴을 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은 고작 15분이었다. 15분을 위해 버스로 왕복 1시간이 넘는 이곳까지 와 준 친구. 그 친구가 내게 선물한 것은 문제집이나 수학 점수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내가 얻은 건 믿음, 가장 못생기고 초라한 지금의 나를 여전히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 친구가 다녀간 후에도 몇몇 친구들이 학원으로, 집으로 찾아와 선물과 응원을 안겨주고 갔다. 또한 내 휴대폰은 진심이 가득 담긴 축하 문자와 전화들로 가득 찼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대학을 가서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면 이러한 축하와 선물들이 지금만큼 고마웠을까? 내가 이렇게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을까? 고작 스무 해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 삶을 돌이켜보니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매일 집에 가면 “오늘도 고생 많았지. 우리 딸~” 하며 꼬옥 안아주는 부모님, 서로 밥 사주겠다며 아옹다옹하는 친구들, 너라면 꼭 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며 말해주셨던 친척들, 언니가 짱이라는 사촌 동생들과 후배들, 그 외에도 나를 믿어주시는 분들, 그 모든 사람들이 내 인생의 선물이다. 그들을 생각하니 나는 더 이상 혼자 밥을 먹어도, 혼자 공부하고, 혼자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어도 외롭지가 않다. 열~심히 해서 1년 뒤에는 그들에게 받았던 응원, 격려, 사랑을 다시 되돌려줘야겠다.

정일 작.
<그리움>
45×54cm
Oil on canvas. 2012.

나는 왜 야행성일까?

 

OECD 국가 중 가장 수면 시간이 짧은 나라 한국. 우리는 일 중독자로, 수험생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밤잠을 잃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유전적으로 타고난 올빼미형 인간은 열 명 중 한두 명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자기에게 맞지 않는 반쪽 올빼미형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아침형 인간을 동경하고 있지요. 과연 나에게 맞는 수면 패턴은 무엇일까요? 내일을 준비하는 소중한 시간, 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 주

 

가장 오래된 시계,
우리 몸의 생체시계

생체시계는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리듬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졸리는 것, 배가 고픈 것 또한 오랜 진화의 역사에서 비롯된 인간의 생체시계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 몸에 프로그래밍된 이 리듬은 인체의 기관이 순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생체시계는 하루를 24시간이 아니라 25시간에 가깝게 인식하여 현실 시계와는 1시간 정도 차이가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 몸은 이런 시간 차이를 앞당기기 위해 눈을 통해 빛의 양을 인식함으로써 수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 호르몬 분비량을 조절하는 등 현실 시계에 맞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기에 햇빛은 물론 인공조명은 생체시계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평소 충분한 햇빛을 쐬어야 하며, 만약 동굴에서 살아가거나 눈을 다치는 등 빛을 인식하지 못하면 생체시계의 재조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안 맞는 시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EBS 다큐멘터리 <생체시계의 비밀> 중에서

밤샘 근무자들을 위한
숙면 TIP

· 근무할 때는 실내 조명을 최대한 밝혀서 멜라토닌 분비를 억제한다.
· 밤샘 후 아침에 퇴근할 때는 선글라스를 착용하여 햇볕을 차단한다.
· 잠자리에 들 때는 차광 커튼을 쳐서 최대한 햇볕을 차단한다.
· 자기 전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면 체온을 떨어뜨려 숙면에 도움이 된다.
· 밤샘 작업 다음 날 오전에는 푹 자지 말고, 가볍게 잠을 청하자. 낮에는 평소처럼 활 동하고 밤에는 조금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면, 수면 리듬이 깨지지 않고 평소의 패턴으로 금방 돌아올 수 있다.
· 주간 야간 교대 근무자의 경우에는 생체 리듬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 적응하기 쉬우므로 주간 근무, 야간 근무, 심야 근무, 새벽 근무 순으로 근무 시간을 조정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나는 왜 야행성이
되었을까?

① 모태 올빼미형
· 해외 출장 시 시차 적응에 무리가 없다.
· 아침 식사는 거의 하지 않는다.
·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다.
· 오후 5시 이후의 컨디션이 좋으며 저녁 8시부터는 기분이 아주 좋다.
→ 무리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면 오히려 몸이 상할 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맞는 시간에 일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극단적인 올빼미형의 경우에는 태양의 리듬에 어긋나서 생활하기 때문에 건강을 해칠 위험이 더 높다. 지속적으로 밤을 새면 노화 억제, 면역 기능을 강화시켜주는 멜라토닌 호르몬의 분비량이 줄어들게 돼 노화가 빨리 오고, 면역력이 약해 감기나 알레르기성 비염 등에 쉽게 걸린다. 또 야식으로 인해 비만이 될 위험도 있으므로 스스로 위험 요인을 잘 인지하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한다.

② 잘못된 생활 습관형
· 매일 1시간 이상 낮잠을 잔다.
· 커피나 홍차 등 카페인 음료를 하루에 5잔 이상 마신다.
· 매일 밤 10시 이후에 저녁 식사를 한다.
· 습관적으로 야근을 하거나 퇴근 후 어딘가에 들렀다가 귀가한다.
· 인터넷 서핑, 심야 TV 프로그램 시청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 자기 전에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한잔하는 시간이 좋다.
→ 잠자리에 들기 3시간 전부터는 술을 삼가자. 갈증이나 요의를 느껴 한밤중에 깨기 쉽다. 니코틴, 카페인 섭취는 뇌를 각성시켜 깊은 수면을 방해하므로 자제한다. 컴퓨터, TV 시청, 한밤중에 편의점에 가는 것을 자제하자.

③ 체내시계 고장형
· 일어나는 시간이 늘 다르고 지각을 자주 한다.
· 피곤한데도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는다.
· 차라리 야간 근무가 가능한 곳으로 이직하고 싶다.
· 잠자는 시간대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 잠들기 2시간 전부터 조명을 어둡게 해 빛이 눈에 직접 닿지 않도록 한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도록 하고, 일어나면 바로 커튼을 열어 아침 햇살을 듬뿍 받는 것이 좋다.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거나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는 등 야외 활동을 늘리고 햇볕을 쬐어 생체시계가 재조정될 수 있도록 하자.

④ 스트레스 긴장형
· 잠들기 전 항상 고민이나 근심이 많다.
· 최근 직장이나 가정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
· 업무를 집에까지 가져오는 일이 많다.
→ 스트레스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바로 눕기보다는 느긋하게 목욕을 하거나 명상,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긴장을 푸는 시간을 갖자. 흥분된 신경이 가라앉고 휴식 모드로 전환되어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참조 도서 <수면 습관이 건강을 좌우한다>(카지무라 나오후미 | 삼호미디어)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대관령으로 귀촌한 지 십 년이 흘렀다. 솔직히 1년 365일 중 야근하는 날보다는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늦게 귀가하는 날이 훨씬 많았다. 또 집에 가서 아무리 피곤해도 텔레비전을 켜놓고 애국가가 흘러나와야지만 잠을 청했던 것 같다.
늘 머리가 무겁고 잠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많았다. 그러다 직장을 그만두고 대관령에서 펜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곳은 가로등도 없고, 차 소리도 나지 않는 고지 800미터의 시골이라 해만 지면 깜깜한 암흑이다.
그러다 보니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일찍 잠들고, 아침 5시 30분이면 눈이 저절로 떠지는 아침형 인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후 가장 큰 변화는 하루가 길어지고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아침의 여유로운 시간 동안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여러 가지 핑곗거리를 내려놓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에게 아침은 혼자 있기 가장 좋은 시간이다. 생각을 정리하거나 사진을 찍어 블로그, SNS로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굳이 귀농이 아니더라도 24시간 중에서 단 1시간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해 임할 수 있을 때 나의 인생 전체를 리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한 달에 한 번쯤은 과감히 생활에서 떠나보았으면 좋겠다. 일 때문에 안 되고, 아이 때문에 안 되고 이런저런 이유들을 다 놓고 떠나보면 실제 아무 지장이 없구나를 느끼게 된다. 여유 있는 마음으로 어디에서든 자기를 돌아보고 계발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박동일 53세.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습관성 올빼미에서 벗어나다

청소년기에는 뇌가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더 빠르게 발달하고 변화하고 정보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다른 시기보다 더 많은 수면이 필요하다. 호르몬 변화로 인해 생체시계가 뒤로 밀리는 청소년기에는 특히 늦게 잠들게 되고 아침 일찍 일어나기도 어려워진다. 이러한 청소년들의 충분한 수면을 위해서 스위스와 미국, 덴마크 등 여러 나라에서는 ‘늦은 등교’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은 최근 발표한 연구에서 학교를 늦게 시작할수록 학생들의 정신 건강과 교통사고율, 출석률, 성적 등이 크게 개선되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등교 시간을 1시간 이상 늦춘 5개 학군의 학생 9천 명의 수면 시간을 분석한 결과, 7시 30분 등교 시에는 30%의 학생들이 8시간을 잤지만 1시간 늦춘 이후에는 60% 이상이 8시간 이상 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잠을 덜 잔 학생들은 우울증과 카페인·알콜 섭취와 마약 사용률 등이 잠을 많이 잔 학생보다 높았던 반면에, 수업 시간을 7시 30분에서 8시 50분으로 늦춘 와이오밍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한 해 학생들이 일으키는 교통사고가 23건에서 7건으로 크게 줄었다.

생체시간 밀린 청소년기,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 당연
스위스, 미국, 덴마크
‘늦은 등교’ 운동 추진

한때 ‘아침형 인간’ 신드롬이 일면서 우리나라 직장인의 70%가 아침형 인간이 되길 원한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유명 인사 가운데는 나폴레옹,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빌게이츠가 아침형 인간으로 꼽힌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올빼미형 인간의 장점도 속속 연구로 밝혀지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의 연구진은 10대 청소년 1,000여 명을 조사한 결과 올빼미형 인간이 아침 종달새형 인간보다 문제해결 능력, 귀납적 추론 능력, 개혁적인 사고 능력 면에서 더 우수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 공군 지원자들에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는 수평적 사고 능력에서 올빼미형 인간이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저녁형에는 예술가나 외향적 사업가 등 창조적인 직업군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찰스 다윈, 윈스턴 처칠, 엘비스 프레슬리 등이 꼽힌다.

올빼미형은
창조적 예술가 타입

 

나의 소원은 늘 아침형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학창 시절부터 늘 지각하는 게 일상이었다. 마음을 졸이며 헐레벌떡 뛰어가서 겨우 하루를 시작하고 나면, 늘 후회가 밀려오곤 했다. 5분만 일찍 일어나면 됐을 텐데…, 밤에 일찍 잘 걸…. 하지만 일찍 잔다고 해도 일어나는 시간은 엇비슷했고, 그러다 보니 늘 밤까지 해야 할 일들을 다 해놓고 자는 버릇은 이어졌다.
다행히 그런 습관을 가진 나였지만, 밤에 열심히 해서인지 남들이 알아주는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원에도 갔다. 그리고 정말 정말 다행히 야행성 인간인 나에게 딱 맞는, 출퇴근이 비교적 자유로운 직장에 취직도 했다. 나는 직장에서도 비교적 밤 시간에 일하는 게 훨씬 잘되어서 야행성 패턴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20년 넘게 야행성으로 살아왔음에도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아침형 인간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다. 고쳐보려고도 했지만 여전히 똑같아지는 이 패턴이여.
그런 어느 날 내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다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는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 나는 잘 못 살고 있다… 그런 관념들이 나를 묶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동경해 마지않았던 아침형 인간이 됐어도, 나는 또 밤 시간을 잠으로 보낸 나를 한탄했을지 모르겠다. 왜 그래야 하지? 그게 나한테 잘 맞는 생활 방식인데 왜 나는 항상 문제 있다고만 생각했지? 그다음부터는 마음을 바꿔먹기로 했다.
나는 뜨는 해는 보지 못해도, 휘영청 중천에 뜬 달은 본다.ㅋ 남들이 잠든 사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한다. 더 성과도 많이 낸다. 그렇게 마음을 바꿔먹자 나 자신에 대해서 훨씬 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더 당당해졌다. 뭐 또 상황이 바뀌면 생활 패턴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 어떤 패턴으로 살아가든, 잘못됐다,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빼고 내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싶다. 오늘 밤에 떠 있는 달은 얼마나 예쁠까.
최정원 37세. 서울시 도봉구 창동

 

 

 

 

 

 
나는 아침형 인간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