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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킨 실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영화의 주인공은 론 우드루프입니다. 배운 것 없이 자존심만 살아서는 마약과 여자 등 온갖 방탕한 생활에 찌든 제멋대로 속물이죠. 그러던 어느 날 작업장에서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간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떨어집니다.

혈액 검사 결과, HIV 바이러스 양성 판정이 나온 것이죠. 말로만 듣던 에이즈에 걸려 30일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는 현실을 부정하지만, 결국 살길을 찾아 나섭니다.

더러운 호모라며 친구들도 모두 떠나고, 그에겐 담당 간호사와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자꾸 접근하는 게이 남성밖에 남지 않습니다. 치료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는 비허가 약품 사용 후 나름의 효과를 보게 되고, 생명의 불꽃과 함께 다시 돌아온 속물근성 덕택에 비허가 약품 밀수 사업장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열게 되죠.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피골이 상접한 매튜 맥커너히의 몸입니다. 에이즈로 죽어가는 남성을 표현하기 위한 그의 감량은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론 우드루프라는 캐릭터의 끈질긴 생명력과 외유내강적 면모와도 알게 모르게 조화를 이룹니다.

영화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속물근성을 버리지 않던 론이 죽음의 문턱을 넘기며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생각지 못했던 무언가와 마주하며 변화를 겪게 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사람들과 가치들을 다시 태어난 눈으로 되돌아보며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잘못해 왔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처음엔 그 변화마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죽어도 누구 하나 슬퍼해 줄 것 같지 않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손길에 그는 마침내 새사람이 됩니다.

이런 성장담과 더불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제약 회사와 FDA(미국 식품의약국), 의사들을 비롯한 ‘가진 자’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과거를 고발하기도 합니다. 주인공 론 우드루프와 밑바닥에서 세상의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 된 그의 삶, 그 이야기가 펼쳐졌던 당시의 사회상 등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결정적인 구성 요소들은 모두 실재했던 것입니다.

이 영화 속 매튜 맥커너히의 연기는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 강렬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옵니다. 분노, 기쁨, 능청스러움, 슬픔, 희망, 좌절 등 론 우드루프 캐릭터에 빙의되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매튜 맥커너히도 엄청나지만, 그와 함께 20kg를 감량한 자레드 레토(레이언 역) 역시 가히 충격적입니다. 아무리 분장을 하고 변신을 해도 얼굴 구별만큼은 자신 있었던 제가 이 영화의 자레드 레토는 한참 동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매튜 맥커너히와 비견해도 아쉽지 않을 그 연기력으로 두 사람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나란히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보통 영화에서 주인공이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면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뜨거운 사랑을 하는 등의 로맨스 쪽으로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장 마크 발레 감독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그 흔한 로맨스 없이도, 한 남자의 인생 말년만을 보여주면서도 모든 이야기와 메시지를 훌륭히 전달해냈죠. 이렇듯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흔한 듯 흔하지 않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매력으로 모두에게 어필합니다.

김지성

문화재가 된 만화

2013년 2월 처음으로 만화가 등록문화재로 선정되었다. 한국 최초의 만화 단행본 김용환의 <토끼와 원숭이>(1946), 10판까지 재인쇄되었던 한국 최초의 만화책 베스트셀러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1958), 최장 기간 연재된 시사만화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 이렇게 세 편이다. 등록문화재란 근대 문화유산 가운데 보존 및 활용 가치가 큰 것을 지정하는 것으로, 이제는 만화가 문화재가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각 만화 주인공들의 입을 빌어 그들의 소감을 들어본다. 정리 최창원 & 자료 제공 한국만화박물관

저는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 단행본 <토끼와 원숭이>의 주인공 토끼예요. 제가 살던 시대는 일제 강점기 말기랍니다. 원래 저희 토끼들은 토끼나라(조선)에서 아주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이웃 원숭이나라(일본)에서 무력을 앞세워 쳐들어왔어요. 원숭이들은 우리를 집에서 쫓아내고 재산을 빼앗고 하인처럼 부렸어요. “너희들은 이제 속마음과 겉모양이 다 원숭이가 되어야 한다”며 우리 귀를 자르고, 흰 털을 검게 물들이고, 엉덩이의 털을 밀어 원숭이처럼 붉은 칠을 하면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모두 원숭이처럼 바꾸고자 했어요. 우리는 힘이 없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국 뚱쇠나라(중국)와 센이리나라(러시아, 미국 등 열강 세력)가 힘을 합쳐 물리쳤지요.

저를 그리신 분은 우리나라 현대 만화의 개척자인 김용환(1912~1998) 선생님이세요. 만화는 당시까지만 해도 신문이나 잡지에 삽화 정도로나 연재되던 보조적인 개념이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만화로만 이루어진 하나의 책을 만드신 거예요. 만화의 위상을 끌어올려 주신 거지요. 원래 이 만화의 원작은 아동 문학가 마해송(1905~1966) 선생님이 쓰신 거예요.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의 정치사를 저 같은 동물로 의인화하여 함축적으로 풍자한 작품을, 김용환 선생님이 만화로 표현한 거지요. 김용환 선생님은 코주부로도 유명하신데, <코주부 삼국지>라는 작품도 곧 등록문화재가 될 예정이라고 하니, 참 기분이 좋습니다.

<토끼와 원숭이> (김용환. 마해송 원작. 1946년. 조선아동문화협회에서 간행)

등록문화재 제537호. 한국 최초의 만화책 단행본. 그동안 문헌상의 기록만 있던 것을 2010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경매를 통해 구매해 소장하고 있다.


나는 시사 문제에 날카로운 고바우 영감이라오. 50대의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정치인들이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소. 나의 단 한 올의 머리카락은 기분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1955년 동아일보 연재 초기에는 가벼운 세태 풍자 정도였소. 그런데 가면 갈수록 분통 터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거요. 점차 강도 높은 정치, 세태 비판적 성격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소. 내가, 보기에는 이래 보여도 좀 날카로운 구석이 있소. 촌철살인의 시각으로 내가 느낀 사회상을 4컷 만화에 표현을 하면 나 같은 소시민들이 같이 열광을 했다오. 다만 정치인들은 뜨끔했는지 검열, 연재 중단, 경범죄 처벌, 취조 등을 받기도 했소만. 그런데 지금은 작품과 캐릭터 자체로도 그렇고, 현대사 연구를 위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크다며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는 세상이니, 참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오.

자랑 좀 하자면 내가 인기를 끌면서 영화, 드라마, 광고로도 만들어졌다오. 나를 토대로 많은 연구도 이루어졌다고 들었소. 일본에 ‘고바우 작가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대학원생도 있었다고 하더이다. 나를 그린 이는 김성환(83) 화백이시오. 김용환 선생과 더불어 한국 현대 만화의 개척자로서 많은 후진들을 이끌어왔지요. 2001년부터는 자비로 고바우만화상을 제정, 매년 만화 문화 발전에 공헌한 만화가를 선정, 상장과 상금을 수여하고 있으시니 참 고마운 분이지요.

<고바우 영감> (김성환. 1955-2000년까지 발행)

등록문화재 제538호. 최장 기간 연재된 시사 만화. 1950년부터 <사병만화>

등의 기관지에 수록. 1955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 이후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을 거치며 모두 1만4,139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원화는 최고급

양지에 묵으로 그렸으며 철장(綴裝), 낱장, 병풍 등의 형태로 보관돼 있다.

저는 헤어진 엄마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금준이라 하옵니다. 조선 초기 성종대 15세기 중후반, 황해도 구월산 기슭 토막골에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어머니와 헤어졌지요.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께서 술값을 벌고자 노비로 팔아버렸던 겁니다. 어머니는 슬피 우시며 그해 국화꽃이 피면 다시 온다고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뒤늦게 후회하셨으나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저는 7살 때 엄마를 찾아 홀로 삼만리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숱하게 많은 일을 겪습니다. 그 세월 동안 글을 읽고 배워 과거 시험에 장원급제해 암행어사도 됩니다. 전국 곳곳을 다니며 탐관오리나 권력자의 부정에 대해서는 강하게 처벌하고, 뭇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풉니다. 그리고 드디어 15년 만에, 여러 번 엇갈렸던 어머니와 국화꽃이 만발한 구월산에서 만나게 됩니다. “아~ 보고팠습니다. 어머님~ 흑흑~.”

저의 이야기를 쓰고 그리신 분은 전통 극화의 개척자인 김종래(1927~2001) 선생님입니다. 당시 한국전쟁 이후 가족과 헤어진 시대 아픔과 맞물려 저의 이야기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58년에 초판 상권이 발행된 후 10판까지 재인쇄되며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저는 일개 만화 속 주인공이오나, 현실 세상에서 사시는 모든 분들, 그 누구도 다시는 엄마 찾아 삼만리 길을 떠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옵고 바라옵나이다.

<엄마 찾아 삼만리>

(김종래. 1958년. 고전 사극 만화)

등록문화재 제539호. 한국 최초의 만화책

베스트셀러. 원래 상권 220매와 하권

224매 등 모두 444매로 구성됐으나,

현재 하권 1매의 원화가 유실돼

모두 443매가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원화는 2010년 유족의 기증으로 한국만화영상

진흥원에서 소장, 관리하고 있다.

하늘에서 본 봄맞이 농촌 풍경

전북 고창군 고구마 심는 풍경

하늘을 날며 매의 눈으로 땅을 바라보면 세상사 자잘한 것들까지 모두 보일까. 풀과 흙과 자갈과 모래가 모두 한눈에 보이고 한 가슴에 젖어들까.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들을 지나는 바람을 따라가면, 가슴에 밟히고 눈에 밟히는 것은 흐르는 강이고 휘어지는 논두렁이고 빛나는 아지랑이구나.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 병아리 떼 쫑쫑거리는 봄날의 땅 가에서 일찍이 고향을 잃어 상처 난 마음 살에 보송보송 솜털 같은 새살이 돋아나는구나. 아버지는 삽을 들고 새벽안개 가득한 들판으로 나가 안개 따라 다가온 동녘햇살 한 삽 한 삽 퍼 올려 들판 가득 채우시고, 어머니는 들밥 광주리 이고 나가 햇살 푸짐한 들판에 고수레 뿌리시니 보리싹 새싹이 아지랑이 반주에 흔들흔들, 고랑고랑 논고랑 밭고랑에 촉촉한 젖빛 물이 깃든다. 종달새 종종 대는 봄날, 농부들이 고랑을 치고 밭을 갈 때, 강을 따라 걷거나 들길을 따라 걷는 일은 지상에서의 가장 큰 축복이다. 바람은 부드럽고 햇살은 따뜻한데 땅에서는 아른거리는 추억이 솟아나면 맨발로 걸어볼 일이다. 천지의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오를 것이다.

전북 고창군 배추밭

들은 땅이고 땅은 흙이다. 강과 산은 들을 키우고 흙을 거름지게 한다. 들은 세상의 품이고 들은 농심이고 농심은 흙이다. 언 땅이 풀리고 흙이 젖어들며 푸른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농부의 마음은 부풀어진다. 이때가 농부가 가장 부자 마음일 때다. 아무리 거창하게 이야기를 시작해도 땅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농심으로 돌아온다. 이는 우리 정신 속에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고향을 품고 있는 DNA 때문이다. 이는 또 먹고 사는 즐거움이 된다. 보리와 쌀, 고구마와 감자, 푸성귀, 옥수수, 된장과 고추장, 풋고추 등등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들판에 가득하다.

전남 함평군 모내기하는 풍경

봄날 오면, 봄 햇살 가득한 들판의 농부들은 가래질, 쟁기질, 호미질, 삽질을 하다가 들밥을 기다린다. 농사는 들밥 먹는 재미로 한다고 했다. 어쩌면 들판의 곡식도 들밥과 막걸리를 먹고 크는지도 모른다. 우수 경칩이 지나고 아지랑이 피어오를라치면 도시락 싸들고 들밥 먹으러 들로 나가 고수레를 해야겠다.

사진가 신병문님은 개인 비행 장비를 타고 하늘에서 직접 찍은 우리 땅 풍경을 통해 이 땅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 소명 의식을 갖고 있으며 현재 하늘과 땅에서 대한민국을 기록하는 5년간의 국토대장정 사진 기록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저서로는 <비상-하늘에서 본 우리 땅의 새로운 발견>이 있습니다.

글쓴이 이민님은 여행수필가, 카페인테리어 작가로 2009년 가을 목포에서 서울까지 도보 여행 후 <대한민국 국도1번 걷기 여행>을 시작으로 여행길에서 느낀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으며 저서로는 <소울로드>(공저) <하늘을 보며 천천히 걷다> 등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나비학자 석주명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모시나비, 봄처녀나비, 줄꼬마팔랑나비, 물결나비

봄이 되면 나비들의 날갯짓이 화려하다. 우리나라엔 어떤 나비들이 살고 있을까. 봄처녀나비, 팔랑나비, 모시나비…. 그 예쁜 이름은 누가 지어주었을까.

세계적인 나비학자 석주명(1908~1950). 그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비들의 가짓수를 정하고, 이름을 지어준 나비 분류 학자이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외국인들이 그보다 50년 앞서 한국 나비를 연구하면서 범한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점이다. 42년이란 짧은 생애 동안 75만여 마리의 나비를 연구하면서 남긴 논문만도 128편.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치열한 노력과 열정의 결과였다.

정리 김혜진  사진 제공 이병철, 서영호

“잘못 붙여진 나비 이름들을 바로잡아야겠소”

1938년 어느 날이다. 석주명 앞으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 단체 영국왕립 아시아학회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조선산 나비 전체를 다룬 논문을 써주십시오. 아시아학회지에 싣겠습니다.’ 하지만 제출한 논문은 발표되지 못했다. 학회 측에서 한 번 학회지에 발표하고 말기엔 내용이 너무 아깝다는 이유로 책 출판을 제안했던 것.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그 유명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접류 총목록)>이다. 당시 석주명의 위상은 일본의 한 신문에 ‘세계적인 나비학자 석주명 도쿄에 오다’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한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사람으로서 일본 신문에 당당히 기사화되는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석주명이라는 중학교 선생이 영어로 된 책을 펴냈는데, 그 내용이 세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학자들이 새로운 종이랍시고 새 이름을 붙여 발표한 나비들이 수없이 많다. 석주명은 그 잘못을 바로잡아 무려 500종이 넘는 나비 이름을 목록에서 제외했다. 그런데도 그의 작업이 워낙 과학적으로 근거가 확실해 아무도 항의하지 못했다. 그가 채집하고 연구하는 박물학교실의 표본은 무려 60만 개가 넘는다. 대영박물관보다 더 많아 세계 제일이다.’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졌다는 석주명. 송도고보 박물관 연구실에서 나비의 날개 무늬를 관찰하고 있다.(1932년)

공안과에 있던

한글문화원에서 작업하는 공박사

“내가 다닌 길이 거미집 모양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다”

석주명은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의 농림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척박했던 농촌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스승의 결정적인 한마디로 인해 나비 연구에 발을 디디게 된다. “자네가 조선의 나비를 죽어라 10년간 연구하면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걸세.” 1931년 송도고보 박물 교사로 취임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나비 연구에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 박물관은 그가 채집한 나비들로 가득 찼고, 개성의 명소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세계 최초로 고비사막에서 공룡 화석을 찾은 지질학자 모리스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수많은 표본들을 보고 감탄한 모리스는 미국의 유명 박물관들과의 나비 표본 교류를 제안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박물관들로부터 연구비까지 지원받게 된 그는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해졌다. 백두산에서 제주도까지 한반도 전역에 채집 여행을 다니면서, 나비들이 서식하는 곳을 일일이 지도에 표시해 나갔다. 이 자료는 훗날 생물지리학 사상 걸작으로 꼽히는 <한국산 접류 분포도>의 모태가 되었다.

“내가 돌아다는 곳을 지도에 표시한다면 꽤 복잡할 것이다. 사실 나는 내가 다닌 길을 100만 분의1 지도에 붉은 선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거의 거미집 모양이 돼가고 있다. 몇 해 지나 나비 종류 수대로 붉은 선 거미집이 완성되면 이 나비 분포 지도를 보고 채집지를 골라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나는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졌다”

석주명은 채집한 나비들의 이름을 알기 위해, 일본 유명 학자가 쓴 곤충도감을 보다가 큰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크기와 무늬만 약간 차이가 있을 뿐 분명히 같은 종임에도, 전혀 다른 종으로 분류되었던 것. 당시 학자들이 개체 변이에 대한 지식이 없이 마구잡이로 이름을 붙인 결과였다. 개체 변이란 같은 종이라도 형질이 조금씩 다른 현상을 말한다.

석주명은 먼저 한국 나비들 중에서 844개의 동종이명을 없애나갔다. 그리고 개체 변이 현상을 연구 목표로 삼았다. 어디까지가 같은 나비이고 아닌지 그 범위를 밝혀야만 조선의 나비가 몇 종인지 알고, 그 이름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총 167,847마리의 배추흰나비와 씨름을 해야 했다. 나비들을 암컷과 수컷으로 나누어 날개 길이를 일일이 자로 재고, 무늬가 몇 개인지 세고, 크기와 모양을 비교했다. 이를 통해 배추흰나비의 앞날개의 옅고 짙은 색깔은 봄부터 여름까지 계절에 따라 차츰 변해가는 연속된 변이 현상임을 밝혀냈다. 미련해 보일 정도로 엄청난 작업이었지만 가능한 한 많이 채집해 정확한 통계를 내겠다는 원칙을 지켜낸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그는 1940년 <한국산 접류 총목록>을 통해 한국 나비는 총 255종임을 밝혀냈다. 이 책은 한국 나비 목록을 집대성한 것으로, 한국인 저서 최초로 영국왕립학회 도서관에 소장되었다.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오른 순간이었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송도고보를 사직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촉탁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주도에서 근무할 때는 나비 연구뿐만 아니라 제주도 방언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우리말에 대한 관심은 훗날 나비 이름을 짓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산 나비 248종에 대해 아름다운 우리말로 직접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정말로 산 공부를 하려면 시간을 아껴야 한다”며 자신의 모든 삶을 나비 연구에 쏟았던 석주명.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 전쟁 중 불의의 총격 사건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가 남긴 엄청난 유고 중에서 미완성인 원고는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치열했던 연구 인생을 말해준다. 이제 그의 흔적은 그가 하나하나 정성껏 지어주었던 나비들의 이름과 함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국학이란 자연과학에도 관련되는 것으로, 생물학에서는 깊은 관련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조선에 많은 까치나 맹꽁이는 미국에도 소련에도 없고, 조선 사람이 상식(常食)하는 쌀은 미국이나 소련에서는 그리 많이 먹지 않는다. 이처럼 자연과학에서는 생물학처럼 향토색이 농후한 것이 없으니 조선 생물학이라는 학문도 성립될 수가 있다. … 무릇 우리나라 안에 있는 것이면 그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는 비단 나비학자만이 아니었다. 민족의 자긍심으로 세계 속으로 나아간 자랑스런 한국인 과학자였다.

석주명님은 한국 나비의 변이와 분포 상태를 담은 <조선산 접류 총목록>을 통해 한국 나비를 최종 255종으로 분류한 공로를 인정받아 세계에서 30여 명밖에 안 되는 ‘만국 인시류학회’ 정회원이 되어 세계적인 대학자로 올라섰으며, <조선산 배추흰나비의 변이연구> <제주도 방언집> 등 17권의 저서와 128편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글은 이병철님이 쓴 <석주명 평전>을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나무박사 박상진

50여 년간 나무를 연구해온 박상진(73) 교수. 그는 우리나라 나무 문화재 연구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로 손꼽힌다. 나무 세포를 연구하는 ‘목재조직학’을 전공한 그는 나무를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비유한다. 지구상에서 삶의 기록을 매년 몸속에 남기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백제 무령왕의 관재(棺材), 팔만대장경, 거북선 등 나무에 담긴 역사의 비밀을 밝혀왔던 박상진 교수. 평생 나무와 함께해서일까. 마치 언제나 곁에 있던 오랜 나무와 마주하듯 박상진 교수와의 만남은 휴식처럼 편안했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덕수궁 안으로 들어서자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박상진 교수가 보였다. 문득 그가 쓴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원래 궁궐의 건축물 가까이에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 임금을 해치려는 자객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으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또한 궁궐 문 앞에 나무가 있으면 ‘한가로울 한(閑)’ 자 모양이 되어 나라가 번창할 수 없고, 담 안쪽 가운데에 나무가 있으면 ‘곤란할 곤(困)’ 자 모양이므로 왕조의 앞날이 암담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궁궐의 우리나무> 중에서

우리는 흔히 나무 이야기 하면 딱딱한 식물도감을 떠올린다. 이렇듯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나무 이야기에 역사와 문화를 곁들여 나무살이를 재미있게 전하는 학자가 바로 박상진 교수다. 2001년 <궁궐의 우리나무>를 시작으로 최근에 발행한 어린이를 위한 나무 책까지 그동안 집필해온 나무 관련 교양서만 십여 권에 이른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씨는 “한 나무에 담긴 역사, 문화 등 접근하는 방식이 거의 인문학 수준”이라고 평가할 정도. 그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4대 사서를 비롯해 각종 고전 기록에서 찾아낸 나무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나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했다.

이렇게 덕수궁에서 뵈니 맨 처음 집필하셨던 <궁궐의 우리나무>란 책이 생각납니다. 궁궐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나무가 가장 많이 모인 곳이 어딜까 생각했어요. 바로 궁궐이더라고요. 일제 강점기에 원형을 잃긴 했지만 지금은 많이 복원됐습니다. 남해안에서 자라는 일부 수종을 빼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나무를 거의 볼 수가 있거든요.

박사님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말 못하는 나무의 ‘대변자’ 같으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무마다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내가 나무가 돼서 이야기하려고 하죠. 단순히 나무 이름만 알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근데 나무에 담긴 우리의 역사와 문화, 삶을 알게 되면 나무가 달리 보이거든요. 재미있는 사연들도 많습니다. 가령 경복궁에 가보면 앵두나무가 유별나게 많아요. 애틋한 부자 관계를 담고 있지요. 세종대왕이 앵두를 좋아했는데 효자로 이름난 문종이 세자 시절, 아버지 세종에게 드리려고 손수 앵두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맛본 세종이 얼마나 흐뭇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그가 나무와 인연을 맺게 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일본에서 임학과를 나온 선생님은 “저 산을 푸르게 만들어보라”면서 그에게 임학과 진학을 권유했다. 1950년대 당시 우리나라 산은 그야말로 민둥산이었고, 덴마크의 황무지를 푸르게 만든 엔리코 달가스(1828-1894) 이야기가 한창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한때 달가스처럼 사회 운동가를 꿈꿨지만, 내성적인 자신과는 잘 맞지 않다고 판단, 목재조직학을 전공하게 된다.

목재조직학은 어떤 학문인가요?

쉽게 말하면 나무 해부학입니다. 예를 들면 의사들은 인체해부학을 공부하잖아요. 그거와 비슷해요. 현미경을 통해 나무속의 세포를 연구하는 것이죠. 나무는 1년 단위로 자신이 처한 자연환경을 종합적으로 나이테에 기록해요. 무한 용량의 자연식 하드디스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테를 조사해보면 나무의 종류뿐만 아니라 당시의 기후 등도 짐작할 수 있어요.

순수 목재조직학을 연구하다가 나무에 문화와 역사를 접목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지요.

1975년 일본 유학 중에 만난 강우방 교수의 영향이 컸어요. 그는 나와 동년배이면서 경주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인데 알기 쉽게 한일 문화재를 비교해서 설명해주곤 했거든요. 그때 문득, 제 전공과 접목시켜서 역사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록 썩은 나무토막이라 할지라도 1mm 되는 부스러기만 있어도 어느 나무인지 알 수 있거든요. 특히 나무는 종류에 따라 정해진 지역에만 자라는 특성이 있어서 나무 재질을 통해 지역 간의 교역 범위도 추정할 수 있으니까요.

차츰 그의 연구실에는 역사가 새겨진 문화재 나무들의 작은 표본들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멀리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살림터에서 나온 나무부터 임금님들의 관재, 옛 배를 만드는 데 쓰인 나무, 각종 건축재, 글자가 새겨진 목판까지 저마다 사연을 갖고 있는 나무들…. 잃어버린 세월의 흔적을 밝히기 위해 현미경과의 씨름은 계속됐고, 5천 년 역사의 현장 목격자인 나무들은 선조들의 생활상까지 짐작게 해주었다. 또한 백제 무령왕의 관재, 팔만대장경 등 단지 역사 기록만으로는 풀리지 않았던 의구심들이 하나하나 풀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무에게 입이 있고, 문자가 있었다면 필히 보고 들은 사연을 수많은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라며, 그는 나이테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세상에 알려나갔다.

여러 연구 중에서도 1991년 ‘백제 무령왕의 관재가 일본의 금송’임을 밝힌 게 가장 큰 성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가 제일 인상에 남죠. 1971년 충남 공주에서 최대 백제 고분인 무령왕릉이 발굴됐고, 20년이 지나 어렵사리 관재 조각 일부를 얻게 되었지요. 현미경으로 보는 순간 놀랐습니다. 일본에만 자라는 금송이었던 겁니다. 그동안 밤나무로 알려져 있었거든요. 백제와 일본, 두 나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였죠. 무령왕이 어릴 때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역사 기록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걸 밝혔다는 데 자부심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우리나라 고고학 분야에 과학의 도입이 늦었다는 면에서는 안타깝죠.

팔만대장경의 경우 기존의 학설을 뒤엎고 ‘강화도가 아닌 해인사 근처에서 제작됐다’는 주장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아직 학계에선 의견이 분분한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 고려 왕실이 강화도에서 자작나무로 만들어 해인사로 옮겨졌다는 게 통설이었죠. 하지만 전 다르게 생각해요. 우선 기록에 나오는 것과 맞춰보면 너무 맞지가 않아요. 표본 조사 결과, 자작나무가 아닌 산벚나무, 돌배나무, 남쪽 지방에 있는 후박나무, 해인사 근처에 있는 거제수나무 등이 대장경판으로 쓰인 게 확인됐거든요. 또한, 강화도에서 옮겼다고 하기엔 무게만도 4톤 트럭 70대분에 해당하는 280톤인 8만여 장의 경판의 양도 너무 많고, 그 과정에서 있을 법한 그 흔한 마모된 흔적조차 없이 너무 깨끗해요. 아직은 개인의 주장일 뿐이지만, 언젠가는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합니다.

나무가 역사의 길라잡이를 한다는 점에서 새삼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끈 거북선이 백전백승했던 이유도 바로 나무에 있어요. 우리 군이 내세운 전술은 당파(撞破), 즉 박치기를 해서 일본 배를 부수는 거였는데, 그게 가능했던 건 배를 만드는 침엽수 중 가장 단단한 소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주요 부위는 참나무, 가시나무 등 더 강한 나무로 힘을 보강했지요. 반면 일본 배는 훨씬 약한 삼나무로 만들어서 박치기하면 그냥 박살이 났지요. 어찌 보면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일등 공신은 나무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자료 제공_김영사

그의 관심은 죽어 있는 문화재뿐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재인 고목나무로도 이어졌다. 1995년 남해 창선도 넓은 들판에서 본 천연기념물 왕후나무와의 만남. 웅장하면서도 위엄이 있는 나무와 마주한 순간 경외심이 들면서 ‘뭔가가 숨겨져 있는 거 같은…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강렬한 느낌이 전해졌다. 관련 역사 자료를 찾아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그 나무 밑에서 군사들과 쉬어갔다는 전설이 있었다.

‘나무 문화재’란 인식조차 희박했던 시절, 그는 천연기념물인 고목나무 세계로 점점 빠져들었다. 고목나무의 전설은 때론 역사의 편린을 꿰어 맞출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나무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현재까지 찾아간 고목나무 장소만도 175군데에 이른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고목나무가 어느 정도 되나요?

전국에 265군데의 천연기념물 나무와 숲이 있습니다. 대부분 한적한 시골 마을 어귀에 자리하고 있죠. 천연기념물은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살아 있는 문화재인데, 이것이 꼭 우리가 알아야 될 부분이에요. 문화재가 금관, 석탑만이 아니거든요. 동물, 바위, 나무 등도 포함됩니다. 천연기념물인 나무는 불타버리면 5백년, 천년 된 역사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잘 보살피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수많은 나무들을 만나면서 안타까운 순간도 많았을 거 같은데요, 소중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요?

나무들이 오히려 과잉보호로 수난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어찌 보면 그동안의 자연 조건에 잘 적응해서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 가장 적합한 환경이라 볼 수 있는데, 보호한다면서 오히려 나무를 힘들게 하는 것이죠. 주위에 돌담을 쌓거나 나무 밑동 주위를 흙으로 돋아 놓은 복토(覆土)를 종종 보거든요. 때론, 시멘트나 아스콘으로 아예 포장해버리고. 그렇게 되면 잔뿌리가 숨을 쉬지 못해 결국 나무는 죽게 됩니다. 굉장히 치명적이죠. 외과수술이란 이름으로 나무줄기의 썩은 구멍을 메우는 일도 그래요. 나무는 썩은 부분이 살아 있는 부분을 보호해주는 기능을 잘 갖추고 있거든요. 자연 상태로 가만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왼쪽 전남 강진의 은행나무

오른쪽 강원도 정선의 주목

그는 기억에 남는 나무로 전남 강진의 600년 된 은행나무를 꼽는다. 이 나무는 태풍으로 인해 한국에 떠밀려 오게 된 네델란드인 하멜이 나무 밑의 고인돌에 걸터앉아 고향을 그리워했다 해서 일명 ‘하멜의 은행나무’라고도 불린다. 하멜은 13년간의 조선 생활을 기록한 <하멜 보고서>를 쓰게 되는데, 우리에겐 <하멜 표류기>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훗날 조선을 서구에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혹시 박사님 개인적으로 쉬고 싶을 때 찾아간다던지, 유독 마음이 가는 나무가 있나요?

제가 잘 가는 곳이 해인사인데, 학사대 전나무를 좋아해요. 신라 시대 최치원 선생을 떠올리면서 우리 역사를 알 수 있어서 제겐 특별한 곳이죠. 또 늘 가까이 하고 싶은 나무는 느티나무입니다. 편안하고 넉넉하게 보듬어주니까요. 느티나무 하면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로만 생각하지만, 나무의 재질이 좋아 쓸모가 많았던 나무이기도 합니다. 고려 이전만 해도 궁궐 기둥, 임금의 관재 등으로 쓰였거든요. 보통 소나무를 제일 좋은 나무로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나라 나무 중 제일 좋은 나무를 뽑으라면 느티나무라고 말합니다.

박사님께 나무란 무엇인가요?

변함없는 친구죠. 언제나 나를 반겨주면서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변함없이…. 10년이란 세월도 긴데 천년을 넘는 나무도 있으니까, 대단한 거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는 나무로 강원도 정선에 주목이란 나무가 있어요. 나이가 1,400살이죠. 김유신 장군, 계백 장군과 동갑내기인데, 아직 이 나무는 살아 있고 1,400년의 역사를 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가끔 사람들에게 얘기해요. 고목나무를 찾아가서 세월을 이야기하고 역사를 이야기해 보라고 합니다. 그럼, 인생을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평생 나무만을 연구해온 박상진 교수. 그에게 나무란 훌륭한 벗, 편안한 안식처를 넘어 우리들의 과거이자 살아 있는 미래다. 때문에 그는 지금도 전국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을 만나러 천리길도 마다 않는다. 그리고, 나무들의 그 깊은 에너지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이 봄, 우리 주변에 있는 나무에 한번 가까이 다가가보면 어떨까. 어떠한 마음도 한없이 받아주고 가장 편안하게 감싸줄 수 있는 나무가 우리 곁에 있다.

나무박사 박상진 교수는 1963년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산림과학원, 전남대 및 경북대 교수를 지냈으며 2006년 정년 퇴임한 후 현재 경북대 명예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02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했으며,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살아 있는’ 노하우들을 소개합니다.

마음까지 정리되는 정리 노하우

박희경 38세. 행복한집정리 정리컨설턴트. blog.naver.com/tkrlwl

저는 6살 여자아이를 둔 엄마예요. 제가 정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아이와 아버지 덕분이에요.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싶어서 작은 집을 넓게 꾸미느라, 이리저리 5단 책장을 옮기고, 서랍장을 옮기고 정리하는 게 제 하루의 일과였거든요.

퇴근한 신랑은 그런 나를 보고 늘 대단하다고 할 정도였어요. 아마도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인 듯도 하고 어릴 때부터 깔끔히 정돈해놓은 집에서 자란 덕인 듯도 해요.

친정아버지는 평소 자신의 재능을 베풀며 사는 분이셨어요. 뚝딱뚝딱 못 고치시는 게 없었고, 발가락뼈가 부러졌는데도 이웃집 지붕을 고쳐주실 정도로 정이 많은 분이셨죠. 서울에 사는 딸이 이사라도 할라치면, 딸이 직장 간 사이 짐을 옮기고 정리까지 완벽하게 해주셨고요. 친정어머니는 설거지 후 하얀 행주로 물기를 제거한 그릇들을 그릇장에 차곡차곡 수납해두시고, 다른 물건들도 항상 제자리에 잘 있어서 물건 찾을 때 엄마한테 물어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깔끔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인지 결혼해서도 친정부모님처럼 내 아이와 신랑을 위해 정리정돈하면서 살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2012년 어느 날,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시면서 눈물 마를 날 없이 참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제게 남편은 여성인력개발센터에 정리 관련 수강 신청을 해주었어요. 평소 정리 정돈을 좋아하는 저를 위한 남편의 배려였습니다. 그곳에 자격 과정을 모두 통과하고 지금은 정리컨설턴트라는 전문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빈자리, 허전함을 채우려고 했을 때 만난 정리. 정리에 대해 공부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마음도 함께 다잡아지는 거 같았어요. 좁은 집에 사는 제게도 꼭 필요한 거였지요. 그동안은 수납을 잘하는 정도였다면, 정리를 배운 후부터는 남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라든지 물건 쓰임에 따라 제자리에 정확하게 놓는 법을 알게 되었어요. 또 용도에 따라 분류를 잘하게 되고, 무엇보다 불필요한 걸 버리는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나 스트레스도 같이 비워진다는 게 참 좋았어요. 덩덜아 제 마음도 정리되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비워지고 긍정적인 생각들로 채워지더라고요. 어떤 상황도 좋게 받아들이고 ‘괜찮아…괜찮아’ 저 자신을 다독이는 걸 보면서 정리의 힘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재밌게 집을 정리한 모습들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걸 보고 저를 찾으시는 블로그 이웃분이 계셨어요. 육아로 인해 여유가 없어서 정리 정돈 안 된 어수선한 가정에서 지낸다는 사연과 함께…. 정리하는 일도 직업이 될 수 있구나 알게 되었죠. 제겐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어느 가정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어요. 엄마의 속옷이 아무 데나 있을 정도로 수납이 제대로 안 된 집이었는데 일을 마무리할 무렵, 유치원생 7살짜리 아들이 “와아, 정말 멋져요, 제 방 만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며 90도 인사를 100번을 하면서 너무나 고마워할 때는 정말 뿌듯했습니다. 방문이 안 열릴 정도로 항상 어질러 있어서 자기 방이 없었는데 이제야 생겼다면서 너무나 좋아하는 거였어요. 그런 감동이 있기에 일은 고되도, 제겐 뜻깊은 직업이 된 듯합니다.

요즘 새봄, 신학기를 맞아 정리 정돈을 의뢰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그분들께 정리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첫째, 박스 2개를 펼쳐놓는다. 박스가 없다면 고무대야도 세숫대야나 곰솥도 좋다. 둘째, 박스에 이렇게 적는다. 쓸 것, 버릴 것. 물건을 꺼내면서 버릴 게 구분되지 않을 때는 “사용해?”라고 스스로 질문해본다. “네”가 바로 나오면 쓸 것 박스에, “글쎄…” 하고 생각한다면 단호히 버린다. 셋째, 쓸 것을 다시 용도별로 분류한다. 욕실, 문구, 옷 등 어느 공간에 필요한지, 옷이라면 남편 옷, 아이 옷, 내 옷 이렇게 분류해서 담고 하루에 한 공간씩 마무리한다. 그리고, 마무리 단계에서는 시간이 남아도 과감히 박스를 닫고 다음 날 정리한다. 무리하게 하면 정리하는 게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즐겁게 하고 빨리 마무리해서, 양치질하듯 습관처럼 정리를 하는 게 중요하다.’

엄마는 정리된 주방에서 콧노래 부르며 가족들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만들고, 아빠는 정리된 서재에서 업무로 힘든 몸을 잠시 쉬고, 온 가족이 행복하게 담소를 나누는 집, 그런 모습들을 가능케 하는 정리란 일은 그래서 제겐 참 보람되고, 행복한 일입니다.

박현웅 작.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갑니다>

85×100cm.

Mixed media. 2007.

가난한 지방대생이라 누릴 수 있었던 것들

김채현 24세. 미국 뉴욕에서 어학연수 중

나는 재주도 능력도 없는 가난한 지방대생이었다. 한때 수도권에서 넉넉하게 대학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많이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만 있기에는 내 청춘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대학 4년 내내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누릴 수 없는 경험들을 참으로 많이 누렸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노하우를 공유하고 싶다.

나의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시다. 내가 어릴 때 큰 교통사고를 당하시고 다발성경화증에 걸리신 후로 시력이 마비되셨다. 그전에 무역업을 크게 하시다 1997년 IMF 사태로 이미 가세가 많이 기울어졌는데, 사고까지 나면서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아빠는 열심히 노력해서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고, 어려운 형편에도 헌신적으로 우리를 길러주셨다. 워낙 자존심이 세서 이런 환경을 창피해한 적도 많았지만 솔직히 죄책감이 더 컸다.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것에 비해 내가 보여드린 결과는 너무 보잘것없어서 죄송했다. 그래서 대학 때는 부모님께 용돈을 안 받으려고 여기저기 많이 알아봤다. 그런 과정에서 지방이라는 이점을 잘 활용하면 오히려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요즘 대부분의 대학교들이 취업률 향상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특히 ‘~개발센터’ ‘~지원센터’ 같은 식의 이름을 지닌 부서에서 주로 시행을 한다. 그런 정보는 캠퍼스 내 현수막, 게시판 혹은 학교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통해 알 수 있다. 돈도 벌고 경험도 쌓을 수 있는 알짜 정보가 꽤 많이 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친구들이 모르다 보니 경쟁률이 낮아 비교적 쉽게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었다. 또한 지방 정부에서 시행하는 좋은 프로그램들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서 참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나중에 전국 단위의 규모가 더 큰 프로그램에 지원할 때 상당히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교환학생, 콘텐츠 개발, 영어 봉사 활동, 해외 어학연수 등 다양한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해외 봉사 활동, 교내 근로 활동, 청소년 국제 교류, 해외 어학연수와 같이 국가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은 어려운 가정 형편 학생들에게 가산점을 주었기 때문에, ‘가난함’이라는 이점이 없었다면 쉽게 누리지 못할 경험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높은 학점을 ‘쉽게 딸 수 있는’ 과목을 듣기보단, 다소 어렵더라도 내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과목을 들었다. 특히 하나의 주제를 정해 그 주제와 관련해 다양한 학과에서 개설한 과목들을 수강하기도 했는데,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비교하는 재미도 느끼며 그 주제에 대해 깊이 탐구할 수 있었다. 그런 경험들은 어느새 나에게 큰 자산이 되어 있었다.

돌아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어려운 형편 속에서 지방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내 인생의 선물이었다. 덕분에 힘들게 밖에서 아르바이트 안 하고도, 부모님 도움 없이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재밌게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대학 졸업 후 국가 지원 프로그램에 응시해, 국가 지원으로 미국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와 있다. 이것도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가난한 우리 집안 덕분인 거 같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남들 기준으로 따라하고 비교하기보다는 주어진 조건마다의 이점을 잘 발견하면 얼마든지 멋지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박현웅 작.

<Sound of music>

50×70cm.

Mixed media. 2013.

면접의 고수가 되는 법

서은진 31세. 세일즈 매니저. 홍콩 란타우섬 거주

2006년, 대학교 졸업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취업을 준비했던 나는 참담한 결과에 한동안을 침울하게 보냈다. 약 30곳이 넘는 회사의 서류 전형 모두 탈락. 한두 곳 겨우 잡힌 면접마저도 탈락. 매일 우울하게 보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탈락 원인은 바로 나 자신에 있었다. 준비 부족이었다. 이렇게 가다간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면접 준비에 올인했다. 그리하여 결국 가장 들어가고 싶던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다져진 면접 스킬은 이후 세 번의 이직에도 유용하게 쓰여 매번 원하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성공적인 취업을 위해 서류보다 더 중요한 면접의 고수에 이르는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최대한 나의 진솔한 경험을 통해 준비한다. 면접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두 가지다. 이 회사에 지원한 이유와 나를 고용해야 하는 이유. 한번은 외국계 은행의 파견직 비서로 면접을 볼 때, 다른 회사에 좋은 포지션도 많은데 왜 지원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에게 파견직, 계약직, 정규직 그런 고용 형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글로벌 기업에서 쟁쟁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배우고 싶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나는 대학교 때 영어를 전공하고 정말 다양하고 많은 해외 활동을 했다. 면접을 준비하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니 바로 답이 나왔다. 내가 원하는 곳은 해외와 소통할 수 있는 외국계 회사였다. 면접은 바로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그리하여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가 답변에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도록 해야 면접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면접 당일, 막상 면접이 시작되면 누구라도 떨리기 마련이다. 긴장을 풀기 위해 내가 쓰는 방법은 면접관을 보고 활짝 웃는 것이다. 특별히 인상이 좋지 않았던 나는 내 인상을 고치기 위해 최소한 6개월 이상을 노력했다. 매일 거울을 가지고 다니며 웃는 얼굴을 체크하고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아래로 기울여 쓰며 웃는 연습을 하고 다녔다. 밝은 얼굴, 웃는 인상은 호감을 주기 마련이다. 면접 중에 또 중요하고 까다로운 질문을 받았을 경우에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라고 덧붙이고 답변을 시작한다. 면접자는 칭찬받아서 좋고 본인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어 침착하게 답변을 이어갈 수 있다.

또 내가 가장 가고 싶은 회사는 가장 나중에 면접을 보도록 한다. 다양한 면접 경험을 쌓아 놓으면 마지막에 정말 내가 가고 싶은 회사에선 자신감 있게 내 매력을 발산할 수 있다.

나는 현재 홍콩의 한 금융통신 회사에서 전 세계 글로벌 은행을 상대로 세일즈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잘 다듬어진 면접 스킬은 나에게 국내에서 해외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입사 후에도 중요한 발표를 해야 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본인도 회사를 면접 보시기 바란다. 내가 정말 일할 만한 곳인지, 내가 같이 일할 사람들이 보고 배울 만한 사람인지, 내가 이곳에서 클 수 있는지, 회사의 비전이 나의 목표와 맞는지. 나와 회사의 궁합이 잘 맞아야 입사 후에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다. 뽑히면 열심히 하겠다보다 이곳에서 어떤 점을 배워 1년 후, 5년 후, 10년 후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는 게 좋다. 입사 당시 나의 목표는 경력을 살려 홍콩과 한국을 커버하는 매니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 등 더 큰 무대로 가는 것이다. 회사는 오랫동안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찾는다. 즉 개인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어떤 곳인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취업을 준비하는 분들 모두 자신에게 꼭 맞는 회사를 찾아 행복하게 일할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박현웅 작.

<알사탕>

160×109cm.

Mixed media. 2009.

자신만의 노하우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살아 있는’ 노하우들을 소개합니다.

친구 같은 아빠 되기, 어렵지 않아요~

김동권 <아빠와 10분 창의놀이> 저자, 육아 파워블로거 www.monsterdad.kr

나는 일주일에 7일 출근하는 일중독 아빠다. 결혼한 다음 해에 아이가 태어났지만, 아이가 9살 될 때까지 나는 육아에 신경을 전혀 쓰지 못했다. 아이가 다가와 “아빠. 제가요… 오늘이요…” 이렇게 말을 걸어와도 나는 “피곤해… 다음에…” 이 말만 반복했다.

가끔 영화에서 아빠와 아이가 친구처럼 지내는 장면을 보면 왠지 뭉클하고, 늘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똑같은 패턴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러다 아이가 9살이 되었을 때, 하루는 집에서 말없이 아이를 쳐다보았다. 피곤에 지친 내 굳은 얼굴을 본 아이는 겁이 났는지 갑자기 막 울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이에게 비춰진 내 모습은 아빠가 아니라 괴물이구나. 항상 일만 하는 괴물.’

가족의 행복을 위해 바쁘게 일하는 거니까, 표현하지 않아도 알아주겠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더 늦기 전에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아이의 유년기 추억 속의 아빠라는 모습을 ‘두려움, 딱딱함’이 아닌 ‘재미, 즐거움, 흥분, 기대’로 심어주고 싶었다. 놀아줄 시간도 없었고, 방법도 몰랐던 내가 시행착오 끝에 터득하게 된 노하우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우선 아이와 잘 놀아주는 아빠가 되기 위해 아빠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부터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아이와 뭔가를 해야겠다고 느낀 그날부터 나는 무엇을 함께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축구도 해보고, 배드민턴도 해보고, 동화책도 읽어줘 봤지만 모두 3일을 넘기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응가 콤플렉스가 있는 아이를 위해 달력 뒷면에 하마 얼굴을 그려서 변기에 붙여주었다. “얘는 똥 먹는 하마야. 입을 쩍 벌리고 네 똥을 먹고 자라는 하마지. 가끔 오렌지주스도 주면서 친하게 지내.” 응가 하는 것을 무척 부끄럽게 생각하던 아이가, 차츰 응가 하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가끔 얘기하는 것도 보게 되었다.

“하마야. 잘 자~ 내일도 맛있는 응가 줄게~” 그림 한 장 그려서 붙여주고 이야기를 만들어줬을 뿐인데, 이렇게 많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그때부터 아이를 위해 무엇을 그릴까, 무엇을 만들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집에 굴러다니는 재활용품으로 놀이를 만들어 아이와 조금씩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아이가 너무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아이가 잠든 시간에 재활용품으로 새 놀이를 만들었다. 아침에 ‘짠’ 하고 보여주면 아이가 좋아하니까 점점 더 신이 나 하게 되었다.

이것만은 3년 넘게 꾸준히 하고 있다. 이걸 꾸준히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이를 떠나서 나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어렸을 때 취미 중의 하나가 그림을 그리거나 창의적으로 뭘 만드는 것이었다. 의무감이 아니라 내가 즐거우니까 더 잘하게 된 것이다. 그걸 30년간 잊고 살아왔었는데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다시 피어나게 되었다. 200여 개의 재활용 놀이를 만든 지금에 와서도 계속해서 같은 흥분에 빠지게 된다. ‘오늘은 또 무슨 재미있는 놀이를 만들까?’ 이런 생각을 하며 말이다.

또 한 가지 꾸준히 할 수 있는 비결은 목표를 낮게 잡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아이에게 매일 10분씩 놀아주겠단 약속을 했다. 아마 30분, 1시간으로 정했다면 한 달도 못 갔을 것이다. 그리고 재활용품 놀이도 최대한 간단히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노는 동안만큼은 최선을 다한다. 이게 반복되니 아이도 아빠에게 신뢰가 생겨서 무조건 더 놀아달란 떼를 쓰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나도 처음엔 아이와 놀아준다는 것이, 날 잡아서 여행을 가거나 나들이를 가는 거창한 것으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나’ 놀아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놀아주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놀이를 만들어 아이와 논 지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가 다가와 내게 과자 선물을 주면서 말했다. “우리 아빠 최고!” 그 순간 눈물을 흘렸다.

아내의 권유로, 나처럼 바쁜 아빠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내가 만든 놀이들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얼떨결에 아빠로서는 최초로 네이버 육아 파워블로거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그냥 먹고살기 위해 평범한 일을 하는 한 가장이다. 내 꿈과 생활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아빠와 함께하는 10분 게임’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응축해서 아이와 함께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몸은 더 바빠졌지만 마음만은 행복하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만 있는 게 아니라 작게라도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거 같다. 대한민국 모든 아빠들이 바쁜 와중에도 가족과 함께 행복해지시길 소망한다.

박현웅 작.

<영원한 보헤미안>

70×50cm.

Mixed media. 2012.

18년 차 백수의 백수 생활 노하우

주덕한 46세. 전국백수연대 대표. 인터넷 카페 백수회관 cafe.daum.net/backsuhall

요즘 같은 불경기에 스스로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는 ‘예비 백수’가 주변에 있다면, 일단 뜯어말리는 것이 좋겠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서 하는 일이 대개 자영업인데, 서울시의 경우 3년 이내 절반이 폐업한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백수가 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직 생활을 즐기는 그 노하우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백수 생활을 즐기겠다고 하면, 일단 부정적인 생각이 앞선다. 그러나 나는 백수 생활이 내세울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부끄러워야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실, 세상만사가 그렇듯 백수 생활도 나름의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백수 생활로 인해 경제적 여유는 없어지긴 하지만, 반대로 시간적 여유가 주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주어지는 시간적 여유를 제대로 활용하는 초보 백수들은 드물다.

내가 백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96년 7월,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나서부터이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것이 삶의 당연한 매뉴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생각이 깨지게 된 게 졸업 후 3개월 동안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였다. 그곳에서 수많은 배낭여행족을 만났는데, 그들 중에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1년 이상 여행을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앞날이 걱정되지 않냐고 물었더니 “직장은 또 구하면 되지”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놀랐다. 돈이나 직장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처음으로 ‘다르게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5년 여행에서 돌아와 한 IT업체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한창 회사의 틀을 잡아가던 시기였기에 야근은 기본이고 며칠씩 밤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나를 채용했던 젊은 대표가 과로사하고 말았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실감 나고 1년 반 동안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과연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6개월 휴직계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사실 그때만 해도 이게 20년 가까이 이어질지는 몰랐다.

처음에는 가족과 주변의 눈치도 보였다. 하지만 이왕 백수인 거 당당한 백수가 되자 마음먹었다. 그 이후 총각 파출부, 인구 조사 아르바이트, 방청 아르바이트, 돌잔치 이벤트 플래너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필요한 만큼 벌고, 번 만큼 쓰며 그동안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그중 하나가 여행이었다. 유폐되듯 방 안에서 아무리 고민해도 보이지 않던 앞길이 길 위에서는 보일 수도 있다. 월세도 서너 달 밀리고, 전기세 낼 돈도 여의치 않던 지리멸렬했던 1999년, 일본에도 백수 단체(다메렌)가 있으니, 국제 교류를 해보면 어떠냐는 이야기에 단돈 6만 원을 갖고 15일 간의 일본 도쿄 여행을 갔다. 일본어는 배워본 적이 없고, 일본 친구도 한 명 없었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백수정신(?)이 통했을까? 결론적으로는 즐겁게 잘 다녀올 수 있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일본의 NPO(비영리 단체) 활동가들을 만날 기회도 가졌다. 수입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교류와 만남들은 인터넷 카페모임 ‘전국백수연대’를 2006년 서울시 비영리 민간 단체로 등록하고, 내가 ‘백수활동가’로 활동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행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생각의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늘 수입이 생기면 새로운 분야의 책들을 찾아 읽으며 사회를 보는 안목을 넓혔다. 그러다가 나의 경험들과 자료들을 모아 백수들을 위한 안내서를 출판하게 됐다. 책의 반응은 뜨거웠고 언론에 인터뷰한 것을 계기로, 전국 백수들과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백수’ 하면 돈 없고 주위에 빌붙기 좋아하는 민폐 캐릭터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와는 달리 만나 보니 유쾌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물질과 지위를 떠나 사람 자체를 볼 수 있는 안목도 얻었다.

2006년 ‘전국백수연대’를 시민 단체로 정식 등록한 후에는 더 다양한 청년 실업 관련 활동을 했다. 때로는 내가 정말 백수 맞나? 싶을 정도로. 각종 자료와 나의 경험들을 토대로, 힘들어하는 백수들의 상담도 해주고, 그들이 잘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주려 노력했다.

백수라서 못 하는 일보다 백수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다. 그건 돈보다는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고 일단 부딪쳐보았기 때문이다. 뜻이 있으면 길은 항상 있는 거 같다. 요즘에는 퇴직 연령이 낮아지며 50대 은퇴 백수들도 늘어나고 있는데,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도 고민하고 있다. 새로운 일자리 모델을 만들고, 사회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단체가 되고 싶다.

백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도전할 것이 너무 많은’ 이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보다 꿈꾸는 백수, 노력하는 백수가 되고, 눈을 낮추는 게 아니라 눈을 맞추면 결국 나는 한발 더 발전하고 있는 백수 아닌 백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박현웅 작.

<어느 소설가의 집>

11.5×17.2cm.

Mixed media. 2012.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호칭의 노하우

방진섭 50세. 대전 <카이스트> 교학기획팀 팀장

현대인들은 대부분 조직 생활을 통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직의 성격과 임무 그리고 역할은 각양각색이겠지만 그 속에서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드라마를 통해서 보는 여러 직장의 구성원들 간 호칭을 보면 상사의 경우는 ○○ 실장님, ○○ 이사님 등 직위를 부르지만 동료와 부하 직원의 경우에는 ○○씨, ○○양 등이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호칭에는 존중과 정감이 느껴지기보다는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90년대만 해도 남성 중심이었던 조직에 점점 여성 비율이 높아지면서, 특히나 여성을 향한 호칭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호칭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있어야 하며, 상대에게 하는 호칭이 나의 인격을 표현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언어 수단이라는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나름대로 호칭에 대한 정의를 내리다 보니 “상대를 존중하고 기분 좋게 만들면서 나를 각인시킬 수 있는 호칭이 무얼까?”를 고민하였고, 그 결과 여직원들에게 “○○ 선녀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해보기로 하였다. 가만 보니, 언제나 곁에서 나의 업무를 도와주고, 성과를 이룰 수 있도록 함께해주는 여직원들이야말로 나에게는 선녀 같은 존재가 아닌가.

결론적으로 그것은 그야말로 대박 사건이었다. ○○씨 대신에 “○○ 선녀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자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하고 낯설어하였지만, 자신을 존중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주기 위한 것임을 알고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나를 좋은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

15년 정도 전부터 이 호칭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내부 여직원뿐만 아니라 일을 하게 되면서 접하게 되는 외부 여직원분들께도 당당히 “○○ 선녀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간혹 상대가 당혹스러워하면 이제는 옆에 있는 우리 직원들이 대신 호칭에 대해 설명까지 해주면서 나를 지원해준다. 오히려 이제는 중년의 여직원분들은 선녀님이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싫어하는 정도까지 되고 있다. 결혼을 하고 자녀가 성장을 해도 여전히 선녀님이라는 호칭은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모양이다.

어떤 존칭이든 좋다. 상황과 직무, 관계에 맞는 좋은 존칭을 고민해보자. 좋은 존칭은 내 마음까지 저절로 상대에 대해 존중의 마음이 생기게 해주니까.

상대를 존중하고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 결국은 내가 존중받고 나 역시 기분 좋아진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확인하면서 나는 오늘도 나의 ‘선녀님’들을 부르고 있다.

박현웅 작.

<전망 좋은 방>

50×70cm

Mixed media. 2012.

나는 왜 커피를 마실까?

“커피가 위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루에 50잔 이상의 커피를 마셨다는 프랑스의 문학가 발자크의 말처럼 커피는 전 세계인의 삶에 조용히 그리고 깊게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각성 효과, 감미로운 향과 질리지 않는 씁쓸한 맛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를 깨워주고,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고, 친밀한 소통을 끌어내주는 커피. 우리는 커피를 왜 마실까요?

알고 마시면 더 맛있는 커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 주


숫자로 보는 커피

커피콩 100개 100ml 커피 한 잔을 만들기 위해 커피콩 100개가 필요하다.
하루 3잔우리나라 식약청의 카페인 일일 섭취 권고량은 400mg 이하. 아메리카노 커피 3잔 이하가 적당하다.
전 세계 커피 소비량 17억 잔 국제커피협회(ICO)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소비된 커피는 모두 17억 잔으로, 정확히 1초당 1만9,675잔이 팔렸다. 1,142만 명이 매일 1,522만 잔의 커피를 마시는 셈이다.
무역 거래량 2위 커피는 무역 거래량 세계 2위로 석유 다음으로 많은 양이며, 연간 생산량 700만 톤에 달한다.
1인당 1년에 484잔 한국은 세계 7위의 원두 수입국으로, 국민 1인당 1년에 484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추정된다.
2만 개의 커피 전문점 국내 커피 전문점 숫자는 2007년 2,305개에서 2013년 4월 기준 1만8천 개를 넘어 큰 폭으로 늘어났으며 곧 2만 개를 눈앞에 두고 있다.


커피와 신조어

카페라떼 효과 습관적으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4천 원)을 아껴 저축할 경우 물가 상승률과 이자 등을 포함해 2억 원 이상의 재산을 축적할 수 있다는 논리.
카페 맘 ‘Cafe Mom’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커피 전문점에 모여 아이 교육 정보를 나누는 엄마.
코피스족(Coffee+Office) 커피 전문점에서 노트북과 휴대전화로 사무를 보는 직장인.
카페브러리(Cafe+Library) 도서관처럼 공부나 스터디를 하는 대학가의 커피 전문점.


카페, 이 시대의 문학과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다

1645년경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에 유럽 최초의 카페가 생겼다. 당시 시민들은 그 카페를 매음과 도박의 온상으로 지목했지만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여러 카페들이 들어섰고, 이용객 수는 점차 늘어났다.
1674년에 런던에서 발간된 팸플릿 중에 <커피하우스의 규율과 질서들>이 있다. 거기에는 [고상한 귀족이나 사업하는 부르주아 층이나 누구든 환영합니다. 그러나 누구든 높은 신분의 사람이 들어왔다고 해서 자리에 일어나 그에게 자리를 권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쓰여 있다. 말하자면 카페는 특정인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동안 유럽에는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사적으로 자유롭게 만나는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중세에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술을 마시는 관습이 있었는데 절차와 예법이 아주 까다로웠다. 그런데 커피는 그럴 필요가 없다. 술처럼 잔 뚜껑도 필요가 없고 절차도 따지지 않고 한꺼번에 들이킬 필요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즐기면 되는 것이다.
이런 대화의 장은 문학인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거의 매일 카페에 드나들었던 17~18세기 문학인들은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하면서 나온 말들을 생생하게 문학에 옮기게 되었고 ‘대화체 문장’이 등장하게 된다. 문어체에서 대화체로! 그것은 문학의 일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들도 왕이나 귀족, 장군이 아니라 서민들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커피는 사실 유럽 문화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나아가 카페는 이런 음용 관습을 기반으로 실질적인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변화를 끌어내는 공간으로 작용하게 된다. 커피하우스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는 저널리스트, 정치가, 학자, 부르주아, 교인들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카페에 모인 것 자체가 집회의 자유를 의미했다. 이렇게 카페는 그 자체만으로도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깊고 진한 커피 이야기>(장수한 | 자음과모음)


커피에 대해서 공부도 해야 되겠지만 사람에 대해서 공부도 하고 마지막에는 본인과 커피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커피란 과연 무엇인가를 각자 찾아가야 하는 것이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 커피를 누구나 많이 마시잖아요. 사람들이 물질적인 부분에서 시달리면서 정신적인 행복감을 얻기 위해서 더 커피를 찾는 것 같아요. 커피를 내리고, 또 마시면서 커피라는 존재 자체가 행복을 주니까요. 저는 그 행복감이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국경을 넘어서 그 행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 또 커피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그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과 커피를 통해 꿈과 희망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박이추, 커피 명인, 대한민국 1세대 바리스타


한 포털 사이트가 직장인 503명을 대상으로 하루 커피 섭취량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1.9%인 110명이 하루에 커피를 4잔 이상 마신다고 답했다. 커피를 마시는 이유로는 ‘습관이 돼서’(25.7%)가 1위로, ‘기분 전환하려고’(18.3%), ‘잠을 깨려고’(16.9%), ‘집중력을 높이려고’(12.9%), ‘식사 후 마땅한 입가심거리가 없어서’(11.1%),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10.1%), ‘나만 안 마실 수가 없어서’(4.1%)가 뒤를 이었다.
또한 응답자의 39%가 커피의 부작용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는데, ‘속쓰림’이 27.4%, ‘불면증’(22.4%), ‘신경과민’(14.9%), ‘소화불량’(11.1%) 순이었다.
또 다른 설문 조사에서 ‘커피숍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43.9%가 ’맛’이라고 했다. 이어서 ‘가격’이 24.9%로 2위, ‘위치’(20.2%)가 3위였다.

직장인 5명 중 1명이
하루 커피 4잔 이상!
왜 마시는데?

일본 교린대학 코가 요시히코 교수는 작업을 할 때 커피 향이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했다. 피실험자에게 커피 향을 맡으면서 화면에 숫자가 보이면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작업을 시켰다. 물 냄새를 맡으면서도 같은 동작을 반복하게 했다. 그 결과 커피 향을 맡으며 작업할 때가 뇌에서 더 적은 혈액을 필요로 했다. 커피 향만으로도 뇌가 많은 활동 없이 작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 동경자혜의대 스즈키 마사토 교수는 원두커피와 운동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실험 쥐에게 5주간 운동을 시키고 내장 지방량을 검사했는데, 운동만 한 쥐는 54% 감소한 반면, 커피를 먹인 후 운동을 시킨 쥐는 60%가 감소한 것이다. 실제로 커피 속 카페인은 내장에 축적된 중성지방이 좀 더 쉽게 분해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즉 카페인 섭취와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운동만 하는 것보다 체중 감소에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30분 후부터 혈중 카페인 농도가 높아지는데 그 상태가 3시간 정도 유지되므로 그때 운동을 하면 효과적이다.
이 밖에도 커피에 들어 있는 폴리페놀 성분이 여러 가지 항산화작용을 하는데, 하루 3잔의 블랙커피를 꾸준히 4개월 이상 장기적으로 마시는 경우에 지방간 발생을 40% 억제할 수 있으며, 혈당 수치를 떨어뜨리고, 심혈관질환 예방, 치매 예방과 암세포 전이를 억제하는 등 여러 가지 긍정적인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이것은 모두 폴리페놀이라는 성분이 항산화작용을 하기 때문인데, 커피에는 포도주의 3배, 홍차의 9배나 되는 폴리페놀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매일 질리지 않고 마시는 음료 중에서 가장 훌륭한 폴리페놀 공급원으로 볼 수 있다.
하루 3잔 이상 너무 많은 양의 카페인을 섭취하거나 고칼로리 커피를 마실 경우 카페인 중독, 당뇨, 역류성 식도염, 위궤양 등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 <커피의 건강학> 중에서

몸에 좋다 VS 안 좋다


내가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핸드드립이 갖고 있는 인간적다인 속도와 자연성에 있다.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대신 지구 중력 외에 어떠한 인위적인 에너지도 필요하지 않다. 말하자면 아날로그 방식이다. 이렇게 한 잔의 커피를 내리면 그 순간만큼은 의식이 명료해지고 이때 풍기는 커피 향은 세상살이에 지친 나의 영혼을 치유하고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혹자는 말한다. “그거 따로 배워야 하고 기구까지 사려면 돈 많이 들잖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근 유행하는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과 비교하면 핸드드립 커피는 충분히 가격 경쟁력이 있다. 게다가 직업으로 커피를 다루지 않는 한 커피를 일부러 배울 필요도 없다. 우리가 밥 짓는 것을 학원에서 배우지 않듯이 서구에서는 커피도 대를 이은 삶 속에서 소비되어 왔다.
오늘날 커피가 교양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자본이 만든 허상일 수도 있다. 커피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핸드드립 커피는 물을 끓일 때 말고는 커피를 내리는 동안에 이산화탄소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다. 한편 커피 산지의 환경을 보호함으로써 생태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정무역 커피나 열매우림동맹 커피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런 커피 생산 방식에 대한 화답으로 핸드드립만큼 적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핸드드립 커피는 나와 세상을 돌아보게 만든다. 경쟁으로 인해 지친 당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똑같은 아파트와 똑같은 커피, 똑같은 욕망을 이식당해 왔던 사회를 다양하게 만들어준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슬로우 커피’는 세상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더욱 널리 퍼져나갈 것임에 틀림없다.
박우현 <커피는 원래 쓰다>의 저자

커피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커피가 맛있어지면 어른이 된 거라고 할 수 있지.” 어릴 적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 말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블랙커피를 마시며 어른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믹스의 맛을 본 후 블랙 마시고 믹스 마시고 하며 교대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최소 하루에 6-7잔. 40대에 들어서며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하자 다들 커피부터 줄이라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에라, 이대로 살다 죽을란다, 커피 없이 못 산다’ 하며 대놓고 마셨다. 그런 어느 날 업무 차 오지에 일주일 정도 취재를 갔는데 커피 마시기가 여의치 않았다. 뜨거운 물을 구하기도 어렵고 바쁘기도 했다. 그런데 어라, 커피를 안 마셔도 살 만한 게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정화되는 느낌도 들었다. 그때 생각했다. 나는 왜 커피를 마시는가? 1. 어른 흉내로부터 시작된 커피에 대한 막연한 관념 있음. 2. 사실 먹고 나서 후회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먹음, 특히 믹스. 3.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 카페 같은 데 가도 다른 것을 선택할 용기 없음. 고로,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였다. 커피를 줄이기 시작한 나는 커피가 당길 때면 스스로에게 말한다. ‘에헤~ 왜 이래, 아직도 어른 안 된 거야?’ ‘달달이 믹스 먹고 후회하기는 이제 그만.’ ‘자, 용기 내 새로운 차에 도전해 보자고. 허브차 좋네. 콜~’ 이형자 42세. 방송인.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커피와 나

‘키작남’의 외모 콤플렉스 극복기

작은 키 때문에 콤플렉스에 시달렸다는 30대 후반 ‘키작남’을 만났습니다. 실제로 만나 보니 정말 작았습니다.^^;; 작은 키에 가느다란 목소리, 울퉁불퉁한 피부까지.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부산 사나이. 하지만 마음수련을 통해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마음에서 빼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헤어디자이너로 일하며 편안한 인상과 동안 외모를 뽐내는 한 남자. 자신감 넘치는 그와의 리얼 빼기 토크입니다.

(엄청 조심스럽게) 키가 몇인지…? 158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큰 편에 속했다. 성격도 억수로 밝고 쾌활했고. 그런데 5학년 때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때 키가 멈춘 것 같다.

160센티도 안 되다니.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학교 마치고 집에 왔는데 강도가 들어 엄마가 돌아가셨다. 강도와 쓰러져 있는 엄마를 동시에 맞닥뜨렸고, 나도 강도 손에 기절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후 키가 안 컸다. 성격도 완전히 변했다. 말도 없고 소극적이고 한곳만 응시하고….

아… 정말 유감이다. 그 사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을 것 같다. 제정신 아닌 상태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멍~ 하게 있으니까 애들이 놀리기 시작했다. 기가 죽고 친구들이랑 키 차이가 점점 심해졌다. 친구들은 방학만 지나고 오면 팍팍 크는데 나는 아무래도 잘 안 챙겨 먹어서인지 그대로였다. 또 변성기를 지나면서 너무 말을 안 해서인지 목소리도 여자처럼 가늘었다. 애들이 동성애자라고 놀리면 정말 너무 싫었다. 진짜 너무너무. 근데 걔들은 키도 크고 풍채도 있으니까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같으면 애들을 줘패뿌던지 물어뜯던지, 내가 맞더라도 같이 싸웠을 거다. 근데 그때는 그냥 당하기만 했다.

정말 암담하고 살기 싫었을 것 같다. 친구, 친척, 부모님 원망뿐이었다. 집에 가면 누나들도 힘들어하고 아빠도 더 엄하게 화를 많이 내셨다. 집에서도 치이고 학교에서도 치이고. 중고등학교 때는 자신감이 너무 없어서 거리를 걸을 때도 땅만 보고 다녔다. 그리고 하나 더. 여드름 자국이 심했다. 여드름을 하도 짜서 피부가 정말 안 좋았다.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나? 오직 나의 해방구는 음악, 사물놀이였다. 음악을 하는 순간에는 마음이 확 열렸다. 특히나 국악, 사물놀이는 같이 어울리는 음악이라서 좋았다. 그리고 28살에 대회에 나가 명인부 장원을 땄다. 그때만 해도 어린 나이에 장원을 한 사람이 드물었다. 매달릴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외모를 가꾸려는 노력은 안 했나? 스무 살쯤 되니까 이제 나도 과거에서 벗어나서 꾸미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은데 키가 안 되니까 정말 스트레스였다. 바지를 사도 무조건 밑단은 잘라야 하고, 맵시도 안 나고 신발도 맞는 게 없었다. 양복도 입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 깔창을 5센티미터 깔고 굽 높은 하얀색 캔버스화를 신었다. 하늘색 남방에 남색 면바지로 스마트하고 댄디한 느낌을 줬다. 머리는 좀 더 잘생겨 보이고 튀어 보일까 하면서 왁스 바르고. 피부에 양보한 것도 많다. 소소하게는 녹차 티백 우린 물에다가 세수하고. 감자 팩이 피부를 뽀샤시하게 한다 해서 감자도 갈아서 붙이고, 꿀하고 요플레랑 섞어서 팩도 해봤고 좋다 하는 유기농 화장품도 써봤다. 피부과 치료는 돈이 많이 들어서 포기했다. 내 피부로 보아 한두 번 해서 안 될 거 같아서.(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나를 미용업계로 이끌었던 것 같다. 요즘도 키 작고 머리 크고 피부 안 좋은 사람들은 특히  더 멋지게 스타일링해 준다. 누구보다 잘 이해하니까.

외모 때문에 피해본 적은 없나? 우리 사회는 아직 외모로만 판단하고 키가 작으면 일단 시시하게 보는 편견이 있다. 기본 심성은 배제해 버린다. 친척들한테도 많이 무시를 당했다. 남들이 생각하는 번듯한 직장인도 아니었으니까. 안정적인 길을 갈 것인가 내가 하고 싶은 길을 갈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가 도망가는 심정으로 마음수련을 시작한 것 같다. 벗어나고 싶었다.

마음수련 하면서 제일 많이 버린 게 뭔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많이 버렸다. 또 그 사건 속의 강도가 정말 원수였는데, 그 미운 감정을 버리는 게 가장 힘들었다. 놀림받고 힘들었던 것도 버렸다. 그리고 내 자신을 가장 많이 버렸다.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했던 내 모습들, 외모 콤플렉스도 버렸다.

그게 말처럼 쉽게 없어지나? 마음수련 하기 전에는 평생 살아온 이 모습이 나의 전부였다. 근데 마음수련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작은 몸이 내가 아니라 그냥 우주 전체가 본래 나라는 걸 알게 되니까 몸이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나 집착이 안 생긴다. 진짜 내 본성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콤플렉스도 없어지는 셈이다. 이 우주가 내 본성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 기뻤다. 고귀한 본성을 한번 알게 된 이상 이걸 잘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한한 우주의 마음으로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자신의 외모를 평가한다면? 완전 만족이다. 봐라, 인상도 너무 좋고 동안이지 않나. 사람은 자기 마음이 얼굴에 나타난다. 십 대, 이십 대는 화장으로 커버가 되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상이 중요한 건 살면서 마음을 어떻게 썼는지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일 거다. 의식적으로 표정을 밝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좀 못생겼고 피부는 까맣더라도 마음이 편하고 스트레스가 없으면 인상은 아주 밝아진다. 그래서 나 같은 동안 외모가 가능한 것 같다.ㅋㅋ

요즘은 다이어트 중독에 성형 중독자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외모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기 삶을 돌아보면 어떠한 계기로든 생긴 열등감이 분명 있을 거다. 그게 뭔지는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 열등감을 버리고 원래의 본성으로 살아가면 ‘나’와 내 외모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어버린다. 표정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빛이 나고 아무리 못생겼던 사람도 정말 매력적이 된다. 겉으로 치장해서 나오는 광채가 아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자체 발광?ㅋㅋ 자기 안의 열등감을 다 버려 진정 나를 사랑하고 외모가 어떻든지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보에 연주자 신지혜씨

신지혜(32)씨는 촉망받는 실력파 오보에 연주자다. 독일에서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와 여러 오케스트라의 객원 수석 및 실내악 연주에 참여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과 경북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 지도 교수 이윤정(현 경희대 교수)씨는 그녀에 대해 “음악성이 뛰어나다. 무엇보다 뛰어난 건 늘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흔들리는 게 없다는 것이다”라고 평한다. 그녀가 한결같은 실력의 연주자가 되기까지는 진정으로 자신을 비우는 시간들이 있었다고 한다. 정리 & 사진 최창원

오보에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할 때 첫 음을 맞추는 역할을 해요. 연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오보에가 ‘라’ 음을 불면 거기에 맞춰, 다른 악기들이 음을 맞춰요. ‘라’ 음을 부는 소리만 들어도 그 오보에 주자가 얼마나 잘하는지 알 수 있어요. 오보에의 음이 잘못되면 악단 모두가 틀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엄청 긴장하게 되지요.

사실 음악 인생이라는 게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끊임없는 경쟁의 연속입니다. 입시 경쟁, 끊임없는 시험, 오디션….

저는 어릴 적부터 항상 음악과 함께해 왔어요. 어머니가 피아노를 전공하셨기 때문에 집 안에서는 항상 피아노 소리에, 집 밖에서는 오케스트라 연주, 악기별 독주 등 클래식 연주회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죠. 이런 환경에서 어머니는 당연히 딸도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처음에는 피아노, 그다음에는 첼로 다 해보다가 중학교 때 오보에를 시작했어요. 소리가 달콤하다고 해야 하나, 사람 마음을 흔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 점들이 제게 다가왔지요. 연습할 때는 힘들어도 무대에 서서 연주할 때의 성취감, 박수 받고 주목받는 것들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행복했던 적은 별로 없었어요. 지기 싫어하고 예민한 성격이라 더 스트레스를 받았죠. 그래서 항상 체기가 없던 적이 없었어요. 오보에는 부는 악기라 호흡이 다 느껴지고, 내 마음이 안 좋으면 더 티가 나요. 그래서 지도 교수님도 오보에를 연주하기 위해선, 한결같은 평상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하셨는데 그러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그랬던 저에게 변화의 계기가 됐던 게 대학교 2학년 때 시작한 마음수련이었어요. 처음엔 한 일주일만 해볼 생각이었는데, 막상 마음을 비워보니까 정말 편안하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계속하게 되었는데, 마음을 비우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죠. 항상 체하던 것도 없어지고, 쓸데없는 스트레스나 걱정들도 사라지고. 그러다 보니까 점점 연주 실력도 늘고요.

그러다 2007년에 독일 만하임국립음악대학교로 유학 갔을 때였어요. 주눅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한국에선 잘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낯선 환경에 언어도 안되고 여러 가지로 힘들 때, 가장 위안이 되었던 곳이 프랑스에 있는 파리 마음수련원이었습니다. 지금은 독일 베를린에도 수련원이 있지만 제가 만하임음대 다녔을 적에는 제가 있는 도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파리 수련원이었어요. 에펠탑 근처에 있는 수련원인데, 기차 타고 3시간 거리였어요. 그곳에는 한국어 교수님, 직장인, 유학생들 등 수련생들이 많았습니다. 다들 마음을 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니 당연히 분위기도 좋았지요. 언제든 가면 맛있는 것도 해주시고 늘 힘을 주시고 수련도 도와주셨어요. 덕분에 힘들고 걸리는 것, 마음에 쌓인 것들, 나의 틀들을 버리면서 낯선 환경에 도전할 용기도 생겼고 적극적으로 유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보에에서 중요한 리드(reed). 입에서 악기로 숨결을 전달해주는 진동판인데, 연주자들이 직접 깎아서 만든다. 리드에 따라 소리의 80%가 좌우되기 때문에, 연습은 쉬어도 리드는 깎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성을 들여 깎는다. 같은 악기지만, 각자 오보에 음색을 갖고 있다고 하는 이유는 리드를 다듬는 마음 등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에 따라 음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날 수련을 하며 정말 제가 마음에 아주 큰 것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오보에였어요. 오보에가 없는 나는 상상할 수도 없고, 사람들한테 항상 자신감 있는 모습도 오보에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좋아해주는 것도 오보에 때문이고…. 그 엄청난 집착이 저를 구속하고 있더라고요. 오보에가 나 자체이니, 인정받기 위해 더 잘해야 하고, 못할까 봐 긴장하고, 불안해하고, 못하면 괴롭고…. 좋아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계속하고 있었던 거예요. 오보에를 안 하면 남들로부터 무시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진심으로 오보에를 놓아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열하게 몇 날 며칠을 버렸지요. 그리고 마음에서 탁 놔지는 순간의 해방감이란… 그게 바로 자유더라고요. 음악, 명예, 사랑…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비웠을 때, 진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지요.

버리면 다 없어지는 것 같지만 세상은 더 큰 걸 주더라고요. 그렇게 크게 한번 나를 넘어서고 나서야 음악을 진짜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게 180도 달라졌어요. 악기를 하는 그 시간 자체가 너무 소중해지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게 되더라고요.

같은 악보인데도 예전에는 안 보였던 것들도 보였지요. 이 음악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아이디어도 계속 나오고요. 그동안 신지혜라는 좁은 마음세계에서 연주했다면,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되었으니까요. 연주할 때 예전엔 나 잘하는지 한번 봐줄래? 그런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사람들의 평가에 집착하지 않으니까 몰입도 잘되고 물 흐르듯 연주도 흘러갔습니다.

친구들도 편안해졌다고, 얼굴부터 달라졌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수련을 하면 가장 많이 생기는 것 중의 하나가 집중력이에요.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들이 없어지니까, 하고 싶은 만큼 마음먹은 만큼 최대한 능력을 다 펼칠 수가 있습니다. 진짜 아무것도 없어야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다는 말을 많이 실감하게 됩니다.

특히 음악인들에겐 마음을 다스리는 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주위에 보면 긴장감에 안정제를 안 먹으면 무대에 못 서는 연주자들도 많아요. 음악가들은 음악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잖아요. 좋은 음악을 위해서라도 꼭 한번 자신을 내려놓는 시간, 비워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음악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잖아요. 저도 마음 없는 진짜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합니다. 제 음악을 듣고 ‘행복했다’ 하시는 분들이 아주아주 많아질 날을 꿈꿉니다.

신지혜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졸업, 독일 만하임국립음악대학교 Diplom(K. A) 과정 졸업, 독일 베를린국립예술대학교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그동안 금호영아티스트 독주회 및 작년에 귀국 독주회를 열었고, 원주시립교향악단, 서울솔리스텐윈드오케스트라 등의 객원 수석을 역임했다. 현재 이너스 목관5중주 멤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경북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오는 9월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