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내 친구 뚱땡이

따르릉 따르릉~ 아침이면 휴대 전화가 울린다.
안부를 묻는 내 친구 뚱땡이의 전화다. 꼭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다. 나에게 전화를 해야 하루가 돌아간다고 한다.

그 친구는 얼마나 뚱뚱한지 별명이 뚱땡이다. 뚱땡이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깊다. 시골에서 살기 때문에 풍족하지는 못해도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간다. 봄이면 산에 올라가서 고사리, 취나물 뜯어서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 고사리 꺾으면서 손도 얼굴도 새까맣게 타도 마냥 좋아한다. 가을이면 농사지은 쌀을 나눠주고 떡국을 뽑아서 나누어 먹는다.

겨울이면 텃밭에서 도라지, 당근을 캐 나누어 먹고, 김치를 담아서 홀로 사시는 독거노인들께 드린다. 나에게도 늘 준다. 아이들 고시원에도 보내주고. 시어머니 드시라고 맛있는 음식도 가져다준다. 친구의 마음속에는 ‘사랑’이란 샘물이 펑펑 솟아나온다. 바다처럼 모든 것을 수용하고, 항상 싱글벙글 콧노래를 부르며 다니는 뚱땡이를 너무 좋아한다.

내 친구 뚱땡이, 김부임을 만난 지는 벌써 10년이 넘었다. 당시 조그만 개인 회사에 다닐 때 알게 되었다.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으며 밝게 웃는 낙천적인 성격의 부임이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성격도 잘 맞아 금세 친해졌다. 나는 구례, 부임이는 순천에 산다. 일을 그만두고도 계속 전화로 연락하고 만나며 지내고 있다.

부임이는 몇 년 전부터 요양보호사를 하고 있다. 하루에 세 집을 다니면서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음식도 해주며 할머니들을 보살핀다. 봄이면 쑥을 뜯어 쑥국을 끓여드리고 미나리 부침개 부쳐서 냠냠 함께 먹으면서 작은 봉사를 하는 뚱땡이가 부럽다.

할머니 마음도 잘 어루만져준다. 웃음 치료사같이 말도 잘한다. 할머니가 시름시름 아파하면 깡충깡충 노래도 불러주고, 치매 예방에 좋다며 10원짜리 화투도 같이 쳐드린다. 그렇게 해드리니 “요양보호사 선생님 최고다, 뚱땡이 선생님 최고다” 한다.

살다 보면 사람 때문에 힘들 때가 너무 많이 있다. 그럴 때는 사람이 싫어서 피하고만 싶어진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 또한 사람으로 인해서 치유받는다는 것을. 그걸 부임이를 통해 배웠다.

추운 어느 겨울날 따르릉~ 뚱땡이의 전화다. 꼭 만날 일이 있다 하였다. 튀김집에서 만나서 튀김 먹고 어묵 먹고 까르르~ 깔깔. 춥지만 둘이서 거리를 걸으면서 원 없이 웃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뚱땡이가 내 주머니에 손을 꼭 넣고 다녔다. 추워? 물었더니 친구는 “아니여~ 너 호주머니 얼마나 따듯한가 보려고” 한다.

한참을 걷다 지나가는 택시가 오니까 가야겠다며 호주머니 속에서 손을 얼른 빼고서 택시를 탔다. 허 가시내가~ 하면서 혼자서 웃었다. 그런데 보니 내 주머니 속에 봉투를 넣고 간 거다. 속을 보니까 5만 원이 들어 있었다. 요게 뭐당가? 나중에 물어보니 친구가 말한다.
“그 돈 말이여. 너에게 용돈 주는 거야. 하하~ 맛있는 거 사 먹거라.”

봉급 타면 어떤 핑계를 대서든 용돈을 준다. 자기는 애들도 다 결혼시키고, 나보다 편한 조건이라며 그렇게 챙겨준다. 그렇게 다 퍼주면 어떻게 사나? 걱정될 정도지만 오히려 더 잘산다. 마음씨가 좋아서 그런지 하늘이 보살펴주는 거 같다.

‘꽃보다 당신’이라는 코너에 꼭 소개하고픈 친구였다. 부임에게는 그랬다.
“나가 진짜 글을 열심히 써서 채택되면 책 선물을 할게. 할머니들 읽어주라.”
이렇게 소개가 되니 너무 좋다. 부임아 뚱땡아. 세상에 태어나서 니같이 좋은 친구를 얻어서 고맙다. 늘 예쁜 마음씨 베풀어주어서 고마워. 사랑한다. 뚱땡아.

고욱향 58세. 전남 구례군 구례읍

‘내 친구 뚱땡이 뿌임아 항상 고맙고 사랑한데이.’
고욱향님의 마음을 담은 문구와 함께 김부임님께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나에게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담은 편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주인공 돋보이게 해주는 엑스트라 식물들

제법 몸값이 나가는 화초를 심은 화분을 보면,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여러 식물을 함께 심어 멋지게 연출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어요. 커다란 식물 아래 작은 화초나 돌멩이, 또는 이끼 같은 것을 곁들여 조화롭게 꾸미면 정말 값어치 있어 보일 뿐만 아니라 주연 식물들을 훨씬 돋보이게 만들어주지요. 어떻게 보면 배경으로 쓰인 식물이나 돌멩이 등은 엑스트라라고 할 수 있겠네요.

꽃 시장에서 ‘타라’ ‘천사의 눈물’ ‘구름이끼’라 불리는 식물들이 주로 엑스트라 역할을 맡고 있는데 생김새가 튀지 않고 수더분하면서 가격도 저렴한 편이랍니다.

어느 날 분갈이를 하다가 알게 된 건데, 엑스트라 식물을 빼내고 주연 식물만 따로 심었더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함께 있을 때만큼 살아나지 않더라고요. 아뿔싸, 그동안 이걸 몰랐네 싶었습니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폼 나지 않는 일도 해줘야만 다 같이 제대로 어우러질 수 있다는 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누구는 중심이 되고 누구는 배경이 되고, 각각 다른 모양으로 사는 것 같아도, 모두가 세상을 위한 필연적 질서이며, 성격이 다를 뿐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제는 고무나무 밑에서 오랫동안 잘 자라 풍성해진 ‘천사의 눈물’을 따로 파내어 녀석 하나만 아끼는 화분에 정성스레 심어줬답니다. “그래, 너도 주인공이야. 우리 모두 주인공이야”라고 말해주면서요. 순간 녀석이 환하게 웃더라구요. 정말이라니깐요~^^*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마다가스카르식 족발 요리

재료

손질된 족발, 토마토, 생강, 통후추, 월계수 잎 등의 향신료, 소금 약간

만드는 법

① 압력솥에 물을 가득 붓고 족발과 함께 토마토, 생강, 통후추, 월계수 잎 등의 향신료를 넣고 간은 소금으로 한다.
② 살코기가 흐물흐물하게 퍼질 때까지 푹 삶는다.
③ 따듯한 국물과 함께 떠서 먹는다.

프랑스 국적자 남편을 만나 결혼한 지 4년 차 되는 주부입니다. 프랑스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해, 익숙해질 즈음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로 이민을 왔습니다. 남편은 가장 살고 싶은 곳으로 늘 기후 좋고 사람들이 온화한 마다가스카르를 꼽았고, 신혼 초 일주일간 함께 마다가스카르를 여행해 보고, 여러 가지 매력에 반해 이민을 결정했습니다.
지인 하나 없는 마다가스카르에서의 생활은 정말이지 알아가야 할 것투성이였습니다. 프랑스 파리와 달리 교민도 적고, 한국 식품점도 없었습니다.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고 모든 게 낯설었지요.
그런 저에게, 이민 초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계십니다. 40살이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프랑수아즈 할머니! 할머니께서도 젊은 나이에 프랑스에서 만난 마다가스카르인 남편을 따라 이곳에 오셨고 결혼을 한 지는 올해로 50주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를 더욱 살갑게 챙겨주셨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로 ‘마다가스카르식 족발 요리’입니다. 슈퍼에서 깨끗이 손질돼 파는 돼지 족발을 보는 순간 너무도 반가워 할머니께 얘기했더니, 깜작 놀라시며 마다가스카르 사람들도 족발을 즐겨 먹는다고 하셨죠.
그리고 어느 날, 서프라이즈 선물같이 직접 만들어 오신 ‘마다가스카르식 족발 요리’!
여러 향신료를 가득 넣고선, 살점이 퍼질 정도로 오래 끓여 먹는 마다가스카르식 족발 요리는 제 마음도 참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너무 맛있게 먹는 걸 보신 후, 족발 요리를 하실 때면 제 것을 따로 챙겨주실 정도로 정 많고 따듯한 내 친구 프랑수아즈 할머니. 이런 감사한 인연들과 함께, 또 각국의 요리들과 함께 마다가스카르에서의 생활은 더욱 아름답고 훈훈해집니다.

요리 김민지 & 그림 최정여

모기 앞에선 투명 인간 ‘카이트 모기 패치’

● 이름은?
카이트 패치Kite Patch. 연(Kite) 모양의 작고 네모난 패치 스티커로 옷이나 소지품, 아기 유모차 등에 붙이면 모기로부터 48시간 동안 보호해준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말라리아, 황열병 등 모기 관련 질병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이 위협받고 있으며 특히 남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남미 지역은 모기를 퇴치하는 것이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래서 4년 전 세계적으로 모기 관련 질병 퇴치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과학자, 디자이너, 엔지니어, 공중보건전문가 등이 모여 연구가 시작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리버사이드에서 과학적 연구가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미국국립보건원의 지원이 있었다.

● 제품의 원리는?
모기는 사람의 이산화탄소를 추적하여 다가오는데, 카이트 패치 물질이 모기의 이산화탄소 추적 능력을 방해한다. 그래서 모기에게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 물질은 일반적인 모기약에 들어 있는 독성 물질은 전혀 없이, 음식의 맛과 향에서 나오는 화합물로 만들어졌다. 크기는 1.5인치 정도로 작지만 크기에 비해 넓은 공간을 모기로부터 차단시켜준다. 모기가 많은 지역에서는 보통 독성 물질 스프레이로 모기를 죽이는데 그것은 인간에게도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바르거나 뿌리는 퇴치제 또한 사용하기에 번거롭고 피부에도 좋지 않다. 어떤 지역에서는 모기장 하나를 쳐놓고 할아버지, 엄마, 아기가 한데 모여 자기도 하는데 그것도 완전한 대안은 아니다. 우리는 기존에 나온 모기 퇴치제의 가장 완전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전 세계의 기후 조건과 모기의 종류에 가장 적합한 제품을 계속해서 연구 중이다.

● 제품의 상용화 계획은?
현재로서는 제품을 살 수는 없다. 정부의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작년 여름, 우간다에서 있을 1차 현지 테스트를 위해 인터넷으로 대중들의 자금을 모았고 모두 11,254명이 기부해, 목표 금액 7만 5천달러의 7배가 넘는 55만 7천 달러가 모였다. 기부자들에게는 미국 환경보호청(EPA) 승인 후 패치가 배송될 예정이다. 현재는 우간다 현지 테스트를 하고 있다. 이후에는 모기가 생명에 위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많은 나라에 우선 배포될 예정이다. 다른 국가에서도 정부의 규제 절차를 통과하면 배포 지역을 확장할 것이다.

만든 사람 ieCrowd 사, 올팩터 연구소(Olfactor Laboratories, Inc.)

SBS-TV <런닝맨> 딱지 대회, 그리고 경쟁 사회와 놀이

SBS 주말 예능 <런닝맨>이 마련한 전국 딱지 대회는 사실 꽤 오래전부터 기획된 아이템이다. <런닝맨> 제작진은 일반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아이템을 작년부터 고민해 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전국 딱지 대회. 오랜 고민의 결실인 듯 <런닝맨>의 전국 딱지 대회는 딱지 하나로도 충분히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아가 이 게임 버라이어티의 새로운 전기이자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런닝맨>의 가장 큰 고민은 아마도 이 재밌는 게임을 하는 당사자가 연예인들에 국한되고 있다는 것이었을 게다. 이것은 게임이 제아무리 기상천외하고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저들끼리 웃고 즐기는 느낌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런닝맨>이라는 게임 버라이어티가 가진 특성도 한몫을 차지했다. 일반인과 함께 뛴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또 그렇게 참여를 시킨다고 해도 누구와 함께 어떤 공간에서 할 것인가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전국 딱지 대회는 이런 고민에 대한 괜찮은 해답을 보여주었다. 무작위로 뽑은 전국의 일반인들이 아니라 그 대상을 대학과 대학생으로 좁힌 것은 프로그램의 집중도를 높여주었다. 이미 <캠퍼스 영상가요>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그 가능성이 입증된 공간이 대학이다. 대학생들의 리액션과 끼, 에너지는 확실히 다르게 다가온다. 딱지를 치고는 넘어가지 않자, “시간을 거스르는 자!”를 반복적으로 외치며 계속 딱지를 쳐 하하를 포복절도하게 만든 대학생도 있었고, 마침 학원이 휴강이라 달려왔다는 유재석을 닮은(?) 입담 좋은 여학생도 있었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프로그램에 담아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게다가 우승자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다는 것도 프로그램의 취지를 살려주기에 충분했다. 취업 전쟁으로 지쳐 있는 그들에게 잠시간의 숨 쉴 틈으로서의 놀이의 장을 마련해 준다는 것. 요즘처럼 경쟁에 내몰려 놀이와 멀어질 수밖에 없는 대학생들에게는 이 <런닝맨>이 마련한 전국 딱지 대회가 남다른 의미로 다가갔을 것이다.

이렇게 전국 대학에서 뽑힌 학생들이 모여 마치 이종격투기 경기를 벌이듯 딱지 대회를 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웃음을 주었다. 초대 가수로 에이핑크가 나오고 학생들이 열광하는 걸 보고 유재석이 “딱지치기가 이렇게 큰 규모로 진행될 줄 몰랐다”고 한 말은 이 아이템이 가진 웃음의 가능성과 가치를 새삼 느끼게 한 것이었다.

끝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딱지치기 대회의 우승은 결국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지석진 팀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 딱지치기 대회라는 아이템은 부지불식간에 <런닝맨>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저들끼리 노는 것보다 함께 놀 때 더 재미있다는 것이고, 우리가 우습게 봤던 딱지치기 같은 놀이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토록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경쟁 사회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놀이 문화를 그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지며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미 수년간 달려온 길을 통해 <런닝맨>과 출연자들은 놀이의 고수들이 되었다. 이제는 그 노하우를 일반 대중들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노는 방법을 알려줘야 할 때다. 우리 사회에 놀이가 필요한 곳은 대학 이외에도 끝없이 많을 것이다. 생업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허리 펴고 놀까말까 한 농어촌의 어르신들도 좋고, 매주 월요일마다 월요병을 토로하는 직장인들도 좋으며, 아이들 가르치느라 본인은 놀 겨를이 없는 선생님이나, 군 복무에 여념이 없는 군인들도 좋을 것이다. 어디든 놀이가 필요한 곳이면 나타나 그들과 함께 즐거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슈퍼히어로, 놀이의 고수 <런닝맨>의 활약을 기대한다.

정덕현 문화칼럼니스트

왜 모나미는 국민 볼펜이 되었을까?

누가 언제 갖다 놨을까? 사무실이든 집이든 어디를 가나 신기하게도 몇 개쯤은 눈에 띄는 모나미 153 볼펜. 1963년 대한민국 최초의 유성볼펜으로 탄생한 이래, 50년 이상 꾸준히 사랑을 받은 모나미 볼펜은 지난 5월 중순, 첫 프리미엄 라인업인 ‘153ID’가 출시되며 화제를 모았다. 매월 300만 자루 이상 판매, 누적 판매 수량만 36억 자루! 하루가 다르게 신제품이 쏟아지며 빠르게 변화하는 문구 시장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우리 곁에 남아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모나미 볼펜. 그 비결을 모나미 153에게 들어본다.
정리 최창원

대한민국 필기구의 혁명, 모나미 153 볼펜의 역사

안녕하세요. 모나미 153 볼펜입니다. 제 생일은 1963년 5월 1일이에요. 제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볼펜이라는 것은 생소한 필기구였어요. 당시 필기구라고는 연필이나 잉크를 묻혀 쓰던 철필과 만년필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런데 1962년 모나미의 창업자 송삼석 회장이 일본의 볼펜을 보고 매료되었고, 우리나라에도 볼펜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어요. 그리고 일본에서 기술 전수를 받은 후,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저를 만들게 돼요.

하지만 처음부터 인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래서 모나미 직원들은 ‘잉크병 없애기 운동’을 하게 됩니다. 가방마다 볼펜을 꽉꽉 채워 하루 종일 관공서, 은행, 기업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볼펜의 장점을 알려나가기 시작했어요. 별도로 잉크병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펜을 사용할 수 있다, 사용법이 편리하다 등등. 그렇게 2년쯤 지나자 볼펜을 사용하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사무 능률 면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와요. 다른 문구 제조 회사에서도 잇따라 볼펜을 내놓게 되고요. 한마디로 필기 역사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고나 할까요. 하하.

기본 기능에 충실한 단순한 디자인

제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허례허식이 없고, 기본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얀 플라스틱 몸통에 까만색 부리가 제 모습의 다잖아요. 더도 덜도 없이 딱 필요한 것만 갖추었지요. 일찍이 디자인의 거장 디터 람스는 ‘적게 그러나 낫게(Less is more)’라는 디자인 철학을 이야기했는데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쑥스럽지만 그 철학에 근접한 디자인이 아닐까 싶어요.

모나미 볼펜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품질은 지금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조금만 날씨가 추워도 볼이 구르지 않아 글씨가 안 써졌고, 촛불 등에 촉을 달구어서 여러 번 문질러서야 써졌으며, 일명 ‘똥’이 많이 나와서 곁에는 항상 똥 닦는 휴지가 대기해야 했다. 1963년 출시 이후 현재까지 검정, 파랑, 빨강 세 가지 색의 볼펜이 판매되고 있다.

“어떻습니까? 값이 비쌉니까? 모양이 흉합니까? 쓰기에 불편합니까?” 1968년 모나미 광고 카피에 등장한 3가지 질문이에요 그에 대한 답은 지금도 전부 ‘아니요’잖아요. 그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한다는 것만으로 좋은 디자인의 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점들 때문에 2008년에는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이 선정한 ‘코리아 디자인 2008’의 52개 제품 중 하나로 꼽혔어요. 그리고 2011년에는 <코리아 헤리티지> 전을 통해 뉴욕에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저렴한 가격과 튼튼한 내구성

처음 나올 당시 제 가격은 15원이었어요. 당시 신문 한 부 값,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 15원이었는데 여기에 착안해 15원으로 했던 거지요. 당시로 따지면 조금 비싼 편이었지만 지금은 3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지요.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 덕분에 그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간해서는 망가지지 않아요. 참,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저를 사서 심이 다할 때까지 써보신 분 있으세요? 아마 많지 않을 거예요. 쓸 때는 실용적이면서 나도 모르게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편안하고 부담 없는 존재. 어쩌면 그게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은 비결 같아요.

한국인의 삶과 함께하다

벌써 제 나이가 52살이 되었네요. 그 기간을 함께했던 분들은 저하고의 추억 하나쯤은 있을 거예요. 연필만 쓸 수 있었던 초등학교 시절에 저를 쓰던 언니, 오빠들을 부러워했다거나, 수업 시간에 습관적으로 볼펜을 딸깍, 딸깍 하다가 혼났던 일, 제 몸통에 몽당연필을 끼워 사용했던 일 등등. 그 외에도 저는 생활 곳곳에 다용도로 활용되었지요.

이제는 저랑은 비교할 수도 없이 질 좋고 세련된 문구류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에 발맞춰 모나미에서도 2011년에는 48년 만에 신제품을 출시했지요. 기존 형태와 가격은 동일하되 몸통을 노란색으로 바꾸고, 두께를 1.0mm로 두껍게 했어요. 또 지난 5월 중순에는 저의 첫 프리미엄 라인업인 ‘153ID’가 나왔지요. 디자인 및 특징적 요소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급 볼펜에 사용되는 알루미늄 소재와 잉크를 사용한 제품이에요. 그러다 보니 가격은 좀 셉니다.

저도 앞으로 계속 변화 발전해가겠지요. 하지만 단 한 가지, 모나미(MonAmi), 불어로 ‘나의 친구’라는 뜻처럼, 언제나 사람들 곁에 편안하고 부담 없는 친구로 남고 싶습니다.

병산서원,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공간

입교당에서 만대루를 바라보다

외국인들에게 우리 건축의 특징을 알려주고 싶을 때, 나는 하회마을 언저리에 있는 병산서원으로 안내한다. 병산서원은 건축물로만 따지면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건축이다. 결구방식이나 규모, 장식 등은 흔하고 엉성하기까지 한데도, 이 작은 건축은 늘 감동을 준다. 처음만이 아니다. 몇 번을 찾아가도 그렇다.


만대루는 자연을 매개하는 프레임으로서의 건축을 보여준다

서양 집과 우리 옛집의 다른 점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자연을 대하는 방법이다. 서양은 외부나 자연은 나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에게 자연은 정복하기 위한 대상이고 외부 공격으로부터의 은신처일 뿐이어서 자연과 적대적 위치에 있는 건축이 건축 역사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우리의 옛 건축을 보면 그냥 자연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청이나 툇마루 같은 공간은 내부인지 외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어떻게 보면 자연 속에 집이 던져져 있는 모습이다. 우리 선조들에게 자연은 공존해야 하는 가치였으며, 섬김의 대상이었고,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었다. 따라서 집은 앞산과 뒷산을 연결해주는 매개적 역할을 할 뿐이었으니, 집 자체의 모양보다 공간의 배열이 더 큰 과제였다.
병산서원은 이에 대한 좋은 보기이다.

병산서원은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을 모시는 사액서원으로, 지리적으로 안동 시내와는 물론 하회마을과도 절벽 같은 너들대벽을 두고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병산屛山이 우뚝 솟아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밑으로 낙동강 줄기가 유유히 흐르는 고요한 곳이다.
특히 우리의 관심은 강의동 건축이 구성하는 공간의 아름다움이다. 강의동은 네 개의 건물로 이뤄지는데 맨 위에 강의를 하는 입교당, 그 앞에 좌우로 학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 그리고 남쪽 아래 누각인 만대루晩對樓가 있어 50여 평 크기의 가운데 마당을 감싸고 있다.

밖에서 보면 중첩된 기와지붕이 만드는 풍모가 경사진 지형과 잘 어울려 있지만 가만히 보면 만대루라는 누각의 길이가 다른 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도하게 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 이랬을까. 이 의문은 마당에 들어가 입교당에 앉아 보면 절로 나오는 탄성과 함께 풀리게 된다. 앞산 병산이 만대루에 가득 들어와서 마당의 한쪽 벽면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만대루는 기둥만 남기고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병산을 그 속에 채울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 크기가 마당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길이여야 하는 까닭에 긴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건축은 오로지 자연 속에 걸터앉아 있지 자연을 막거나 닫거나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기둥에 의지하고 걸터앉아 다시 병산을 보면, 이름 그대로 병풍 속에 닫힌 듯 펼쳐져 있고 시시때때로 물안개가 그 풍경을 변화시킨다. 사계절의 절경은 그 속에 갇힌 고요한 마당을 살아 숨 쉬게 하는 힘이 된다. 건축은 프레임으로서만 존재하며 자연을 적극적으로 매개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 황진수 & 글 승효상 건축가

사진가 황진수님은 2007년부터 왕가제례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으로 <신의정원, 조선왕릉>(2009) <한국정원> (2012) 등 정원 연작 작업을 해왔으며, 서울을 주제로 한 사진집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건축가 승효상님은 15년간 김수근 문하를 거쳐 1989년 건축사무소 이로재 개설 후 자신의 건축 철학인 ‘빈자의 미학’을 바탕으로 수졸당, 대전대 혜화문화관 등을 지었으며, 저서로 <건축, 사유의 기호> 등이 있습니다. 이 글은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의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출발점, 병산서원’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인류의 주치의 이종욱 WHO 사무총장

한국인 최초 국제기구 수장이었던 고(故) 이종욱 WHO(World Health Organization,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2003년 1월 선출되어, 같은 해 7월 제6대 WHO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던 그는 결핵, 두창(천연두), 에이즈, 소아마비와 같은 질병을 물리치는 데 기여함으로써 ‘백신의 황제’ ‘아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렸다. 하지만 정작 그의 헌신적인 삶과 업적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삶의 무대가 대부분 국제 사회였고,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헌신적인 삶을 살다간 이종욱 박사의 삶과 생애를 들여다본다.

정리 김혜진 & 사진 제공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1981년 남태평양에 위치한 조그만 섬나라 사모아에 한 동양인 의사가 도착했다. 태평양 섬들을 오가며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 중인 이종욱 박사다. 그는 청진기와 같은 의료 기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직접 환부를 쓰다듬으며 진료했고, 이런 모습을 수행하는 현지 의료진들에게 보여주며 진료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종욱 박사에게 개발도상국의 보건의료인 양성은 평생의 꿈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약 26개 개발도상국 350여 명의 보건의료 인력이 한국을 찾고 있다. 이른바 ‘이종욱 펠로우십’이라 일컫는 이 프로그램은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뜻을 잇기 위해 개발도상국의 의료진을 대상으로 하는 후진 양성 프로그램으로, 한국에서 선진 의료 기술을 익혀 자국의 국민들을 치료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뜻은 그의 삶에서 비롯됐다.

이종욱 박사는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쟁의 경험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갖게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무렵, 어머니, 두 형제와 서울서 대구까지 60일 동안 눈보라 속을 걸었을 때 그는 사람에 대한 연민을 처음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것이 그가 봉사하는 삶을 선택했던 이유였다. 대학 시절에는 경기도의 한센병 환자촌 ‘나자로 마을’에서 활동을 벌였고, 1994년에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HO 본부로 갈 때까지 남태평양 한센병 퇴치 팀장으로서 남태평양 오지에서 진료 활동을 벌였다. 그는 “내가 처음 WHO에서 취업한 것은 월급이나 여러 조건들이 좋아서였다. 숭고한 사상을 가지고 취업한 것은 아니다”고 했지만,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WHO 예방백신국장으로 근무하며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선포해 1년 만에 소아마비에 걸리는 비율을 인구 만 명당 한 명 이하로 떨어뜨리며 ‘백신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고, 결핵국장으로 있을 때에는 비싼 결핵약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국제의약품기구를 만들어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것.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제6대 WHO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12월, 서남아시아 지진 후 파키스탄 내의 캠프에서 겨울을 보낸 사람들의 보건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

“이 일이 과연 옳은 일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해야 해”

이종욱 박사가 WHO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며 가장 중요하게 내건 공약은 바로 에이즈 감염자들에게 항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를 투여하는 치료 사업인 ‘3 by 5’ 사업이었다.

2005년까지 개발도상국에 거주하는 3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항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약값이 너무 비싸서 6백만 명의 환자 중 40만 명만이 약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환자 대부분이 의료 체계가 빈약한 아프리카 회원국인 데다, 확보되지 않은 예산 등으로 불가능한 공약이라는 직원들의 우려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록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1백만 명이라는 많은 사람에게 약을 공급했던 것. 이는 큰 전환점이 되었고, 공감대를 만들어 모든 국가의 관심과 지지를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2008년 비로소 3백만 명이 치료 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한 WHO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 중대한 질병이 발생하거나 긴급 사태가 발생했을 때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위기관리센터 ‘전략보건운영센터(SHOC)’를 만들어 신종플루 등 각종 재난에 체계적으로 대처하기에 이른다.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해야 해. 돈이 없어서, 전문 인력이 부족해서, 같이 일할 지원 인력이 필요해서, 회원국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렸다가….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면 한이 없거든. 옳은 일을 하면 다들 도와주고 지원하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라고. 그러나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결국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셈이지. 이건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것만도 못한 죄악이라네.”

이종욱 박사는 현지인들과 친해지기 위해 직접 그들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무총장 취임 후 처음 방문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쾀랑가에서 주민들과 어울려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이종욱 박사는 3년 동안 60개국을 순방, 병들고 가난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위로해주기 위해 고된 여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낮아질 준비를 하고 지낸다네”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섞여 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긴급한 의료 지원을 필요로 하는 60개국 이상을 방문했고,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질병의 퇴치 기금 마련을 위해 각국 정부 지도자와 기업인, 유명 인사들의 관심과 협력을 구하는 데 헌신했다. 1년에 150일 출장, 비행기로 30만 킬로미터 넘게 이동하며 이등석 좌석에 두 명의 수행원을 동반했고, 때론 혼자 다녔다. 자기 소유의 집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솔직히 자신이 없어. 각국의 국가 원수를 자주 만나고 좋은 음식만 먹고, 내로라하는 사람들과 회의를 하지. 대접을 받다 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혹시 교만해지고 또 건방져질지 말이야. 그래서 나는 항상 낮아질 준비를 하고 지낸다네. 은퇴하면 한 사람의 자연인 이종욱일 뿐이지.”

2006년 5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과로로 숨졌을 때,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Man of action 행동하는 사람’

“이종욱 박사는 보건계의 수장이었다. 그의 지도력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종욱 박사의 원칙, 온정, 추진력 덕분에 노력과 결단만 있다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세계적 보건 문제도 극복할 수 있다는 박사의 신념을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다. 그의 죽음이 세계의 건강 공동체에 비극적인 상실이긴 하지만, 세계는 그의 비전과 영감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보다 건강하고 보다 평등한 세계를 구축하는 데 대한 그의 공헌은 인류의 영원한 유산이 될 것이다.”

– 빌 게이츠,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대표

파키스탄 지진 재해 지역 방문. 2005년 12월. 파키스탄 아바스 의과학연구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9세 소녀 아미나. 지진으로 인해 집이 붕괴되었을 때 그녀는 잔해에 발이 잘렸다. 이종욱 박사는 “아미나 가족과 같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을 잊을 수가 없다”고 밝혔다.

인류의 주치의 이종욱(1945~2006) 박사는 서울대학교 의예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센병 환자 등을 치료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던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자, WHO 서태평양 지역 사무처 한센병 자문관으로 국제기구에 들어갑니다. 이후 20여 년간 주요 요직을 거치며 뛰어난 성과를 남겼으며, 2006년 5월 22일 WHO 총회 준비 중 과로사로 서거합니다. 이 글은 <이종욱 평전>(데스몬드 에버리 지음, 이한중 옮김) 등의 자료를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SNS 시인, ‘시팔이’ 하상욱

SNS에 시를 써서 스타가 된 ‘시스타’가 있다. 뛰어난 재치, 촌철살인의 통찰력, 감성을 뒤흔드는 시들로, 수많은 네티즌의 마음을 사로잡은 하상욱(33) 작가다. 한순간에 평범한 직장인에서 인기 작가가 되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시를 팔아 먹고산다’며 ‘시팔이’라 부른다. ‘웃고 있는데 왠지 슬픈’ 공감 백배, 웃음 백배인 그의 시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단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하상욱 작가를 알게 된 건 페이스북에서였다. 평범한 일상사를 짧고 간단히 정리한 시 안에는 재기 발랄함을 넘어 촌철살인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었다. 재미와 웃음, 그리고 한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글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가 낸 첫 전자시집 <서울 시>는 1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와 함께 인기에 힘입어 두 권의 종이책으로도 발간, 15만 권 이상 팔렸다.

검은색 뿔테 안경에 꽃무늬 넥타이를 매고 하상욱씨가 인터뷰 장소로 들어섰다. 재밌는 사람일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그는 내내 진지했고, ‘고민’이란 단어를 일상 용어처럼 반복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내다가 이젠 당당히 전업 작가로 살아가고 있는 그에겐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여전히 고민 중이라는 이 남자, 우리로 하여금 ‘드라이아이스’를 보며 새삼 고마운 인연을 생각해보게 만든 사람, 시자이너 하상욱씨에게 요즘 기분부터 물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갑자기 유명해지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거 같아요.

사실 힘들어요. 처음엔 제 SNS에 친구 공개로 시를 올린 거였거든요. 그러다가 전자책으로 내게 되고, 독자분이 재미있다고 올리면서 인터넷에 퍼져서 여기까지 온 건데 사람들은 제가 유명세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저부터 인간관계나 일적인 면에서 30년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패턴으로 움직이니까 부담스럽기도 하고 적응이 안 되죠. 기존에 저를 알던 사람들과 편한 관계로 남고 싶으니까 말 하나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돼요. 가령 누군가가 부탁했을 때 부득이하게 거절하면 ‘떴구나~’ 해버리니까 답이 없어요. 뭔가 이상해져버린 느낌, 근데 이해는 가요. 이 상황을 어떻게 풀까 걱정이죠. 특히 저를 부러운 시선으로 보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어요. 대화를 하면 ‘야, 그래도 너는…(유명해져서 돈 잘 벌면 성공한 거 아니야?)’ 그 말이 그렇게 듣기가 싫어요. 사실 저는 잃은 것도 상당히 많아요. 그게 많이 슬프고 아프기도 해요. 그다음에 내가 뭘 해도 참 힘들겠다 생각하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시각으로 보니까요. 이 생활이 언젠가 끝날 텐데 다음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되죠.

사람들이 막연히 갖고 있는 고정 관념에 대해서 깨주고 싶은 게 많겠어요.

너무나 깨주고 싶어요. 고정 관념이 결국 자기를 힘들게 해요. 지금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이 예전처럼 부러워 보이지 않아요. 불쌍하다는 느낌도 많이 들고, 저는 아이돌 가수들이 요즘 되게 측은해요. 어렸을 때부터 이런 걸 겪으면서 살아왔을 텐데 제가 힘든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요. 보통 강인함을 갖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겠구나 싶어요.

새삼 ‘웃기려는 게 아니라 울리고 싶어서 글을 쓴다’고 하신 말이 다가오네요. 콘텐츠가 인기가 많아지면서 <서울 시>를 패러디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 안에 나름 이야기를 담으려 노력했는데, 결국 표면만 보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구나. 안타까운 것은 글에 편견을 담아 재미를 주거나 외모를 소재로 쓴다거나 너무 비판적인 글을 쓴다거나…. 그런 식으로 되는 건 슬퍼요. 형식은 빌리더라도 저와 또 다른 이야기를 하면 좋을 텐데 하죠.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는 느낌은 못 받았거든요.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느 철학책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름대로 철학서라고 생각하고 쓰고 있어요. 사실은 눈물 나게 하고 싶어요. 정말 슬픈 것은 웃기면서 슬픈 거잖아요. 저는 작은 얘기에도 큰 얘기가 똑같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쓴 글 중에 ‘아닌데? / 맞는데? / 쌩얼’ 이란 글이 있어요. 제가 강연 때 쌩얼이 어떤 거냐고 물어보면 기준이 다 달라요. 결국 우리가 겪는 갈등의 대부분이 기준 문제인 게 많거든요.

<서울 시>에 있는 작가 소개란.
하상욱씨의 재치가 돋보인다.

“책은 <서울 시>인데 연고도 없는 부산경찰 SNS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는 하상욱씨.

가까이에 있는 사람끼리라도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정말 달라지겠죠.

그 정도만 돼도 상당히 많이 바뀌죠. 사회가 바뀌기 위해선 정책이나 법이 중요한데 그것은 사람들의 의식이 만들어주는 거니까요. ‘저 사람도 저래? 나만 그런 게 아니네’ 알게 되면 상대를 이해할 수 있고, 상대를 배려할 수 있겠죠. 사실 모든 문제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게 아닐까요. 공감이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특권을 재밌게 누렸으면 좋겠어요.

원래는 웹디자이너 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다 시를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처음에 시를 올렸을 때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요. 그 재미로 했었죠. 그리고 디자이너다 보니까 이미지가 아닌 글로도 재미를 찾아보고 싶었거든요. 규칙을 만들고 싶었는데 디자인하는 습관이 글에도 담기더라고요. 그래서 시자이너란 말을 쓰기도 했고요. 일단 길게 쓰는 게 싫었고 짧게 압축하면서 쓰는 게 재밌더라고요. 페이스북의 영향이 컸어요. 디자인의 첫 번째 원칙은 단순화거든요. 어떤 작품에서 한 요소를 더 빼면 타인이 내 의도를 못 알아보는 시점이 있는데, 그때까지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죠. 좋은 디자인은 ‘더 이상 뺄 게 없는 디자인’인데, 똑같은 개념을 글 쓸 때도 대입시켰죠.

<서울 시>를 읽으며 디테일한 감정을 잘 포착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남들이 보기에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해요. 말을 하고 나서 괜히 불편할 때가 있잖아요. 다들 아는데 애써 말하지 않는 것들…. 가령 일을 하다가도 ‘아까 커피숍에서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했지?’ 곰곰이 생각하는 거죠. 가령 인터뷰를 하다가도 인터뷰가 끝나면 할 말이 없잖아요. 그런 어색한 상황은 왜 생길까. 이모티콘을 쓰는 게 나은가 안 나은가 그런 고민들을 깊게 해요. 그런 디테일한 감정들을 알아가는 게 재밌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말실수가 없는 편이에요.

사실 상대방과 말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상처 줄 때가 많잖아요.

그런 경우가 많죠. 저는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살 좀 찌세요. 그런 말을 되게 많이 듣거든요. 근데 잘 살펴보면 그 사람이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 대화 속에는 마치 좋은 말처럼 포장되어 있는 말들이 있어요. 오히려 진짜 가까운 사람들은 살 좀 찌라고 안 하거든요, 그냥 존중해주죠. 사소하게 던지는 말, 긍정적인 말에도 공격적인 말이 상당히 많아요. 그런 것들을 되새겨 보기 위해 글 쓸 때 고민을 많이 해요. 그래서 제 글 대부분이 관계에 대한 글이 많아요. 우리 관계가 왜 이렇게 됐지?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거죠.

글을 쓸 때 어떤 부분에 가장 신경 쓰시는지 궁금해요.

사람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서 조사 하나, 1인칭, 3인칭 시점 등을 많이 생각해요. 그리고 내 이야기처럼 쓸 때 맘이 더 편하겠다, 남의 이야기처럼 쓸 때 맘이 더 편하겠다 구분하면서 써요. 가령 강한 비판이 담긴 글은 내 이야기처럼 써요. 그래야 맘이 더 편하니까. 남을 비판하는 것처럼 쓰면 상대를 힘들게 하고 굉장히 되바라진 느낌이거든요. 가령 얼마 전에 쓴 글인데 ‘진짜 친구가 아니라며 실망만 했네 / 진짜 친구가 되어주려 하지 않고’ 이런 글들은 내 이야기로 쓰죠. 이걸 반대로 쓰면 굉장히 불쾌한 글이 돼요. ‘왜 진짜 친구가 아니라고 뭐라고만 하니 / 진짜 친구가 되어주진 않고’ 이렇게 글을 쓰면 고민하지 않게 돼요. 내가 아닌 남이 나한테 잘못한 거니까. 결국 내 탓일 때 돌아보게 되거든요. 뉘앙스 하나가 사람한테 생각하게 하느냐 마느냐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는 거 같아요.

쉽게 쓴 글처럼 보이는 면도 있었는데 그렇게 섬세했구나 싶어 놀랍네요.

쉽게 한두 편은 쓸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런 고민이 없었다면 5, 6백 편의 글들이 욕을 먹어도 진작 먹었을 거예요. 저는 공감만큼 사람을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해주는 게 있을까 싶어요. 사실 <서울 시>에 담은 글은, 저는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질문을 던지는 글이에요. 이왕이면 우리가 좋아하는 감정들, 찐한 웃음, 슬픈 눈물 속에서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거죠. 누가 누구를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 안 해요.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글 중 하나가 ‘계기가 없는 걸까, 의지가 없는 걸까’예요. 누군가가 나를 바꿔줄 거란 기대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거든요.

‘시팔이’ 하상욱님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를 졸업했으며 전자책 전문 회사에서 기획자 겸 에디터로 활동했습니다. SNS에 우연히 올린 글이 인기를 끌면서 2012년 전자시집 <서울 시>를 발표했으며 이후 <서울 시> 1, 2권을 출간,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혹시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나요?

20대 분이었는데 나중에 자기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은 서울시 1, 2권에서 슬픔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지금의 바람은 제 글들이 몇 년 후에 봤을 때는 공감이 안 되는 게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어떤 생각을 만드는 글이 됐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그런 글이 되면 어떨까’라고 하셨죠. 사실 창작자라면 자기 작품이 오래 남길 바랄 텐데, 그런 마음까지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있나요?

어떤 게 비호감일까 생각해보면 대부분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물론 누군가는 저도 그런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유명해지는 게 목적이었다면 예능 프로를 여러 개 하고 있었을 거예요. 전 그런 생각을 해요. ‘나는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다, 영원히 머물 사람처럼 행동하면 이게 다 내 것처럼 행동하면 내려놨을 때 살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오늘 하루 잠깐이라도 그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그것도 큰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누군가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랬듯이 누구나 평범함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거니까요.” 누군가의 성공을 쫓아가기보다는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먼저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는 하상욱 작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타인과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가 평범한 우리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

여행이라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나와 만나고, 새로운 사람과 만났던 소중한 순간의 이야기

뚜벅이 가족 여행 도와준 고마운 제주 아저씨

변창기 51세. 직장인. 울산시 동구 남목15길

2010년 4월 중순, 정리 해고가 되었다. 10년을 다닌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잃고 나니 황당했다.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걱정이 떠나지 않아 3개월 동안 골머리만 썩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제주도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고 했다. 훌훌 털어버리고 가족과 여행을 하고 나면 나도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생길 것만 같았다.

여행 기간은 일주일을 잡았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보자는 취지였다. 가족 여행 여섯째 날. 초등학생 3학년 아들과 중학교 2학년 딸과 아내 그리고 가볍지 않은  보따리 하나씩 짊어지고 6일째 뚜벅이 여행을 했더니 지치고 힘든 상태였다.

어느 한 곳의 관람을 다 하고 다음 여행지로 가려고 관람지 정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초콜릿박물관을 보고 싶어 했다. 지도상으론 바로 옆에 있었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어느 필름 회사 이름이 붙어 있는 승합차에서 내리는 분께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 보았다. 그분은 잠시만 기다리라더니 짐 칸에서 박스 몇 개를 가지고 관람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나와서 말했다.

“타세요. 그곳으로 가는 길이니 태워다 드리지요.”

우린 사막에서 시원한 샘물을 만난 듯이 기뻤다. 그분의 승합차에 타서 뭐하는 분인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동안 힘든 여정을 살아오신 분이다. 17년 전, 총각 시절 부산에서 사업하다가 하루아침에 거덜 나고, 혈혈단신 제주도로 왔다고 했다.

먹고살 일을 찾던 차에 필름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처음엔 힘들었지만 지속적으로 가게를 찾아다니며, 주인이 바쁘면 일도 거들고 청소도 해주며 노력했더니 공급처가 생기면서 사업이 되어 갔다고 했다. 영업은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진실하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왜 우리를 태워주냐고 물었더니 제주도 와서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힘들게 여행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은 결혼도 하고 중학교 3학년 된 딸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차량 봉사를 한 게 우리만이 아니었다. 그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힘들게 여행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태워주고 있었다.

그분은 우릴 위하여 일부러 해안 도로로 달렸다. 송악산에 들러 잠시 공급처에 물품을 내려주고 다시 해안 도로를 타고 천천히 차를 몰며 해안 구경을 시켜주었다. 버스를 타고 갔다면 볼 수 없었던 주상절리라는 절경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가 주상절리를 구경하는 사이, 그분은 물품을 배달해주고 다시 우리를 태우러 왔다. 귀찮다면 귀찮은 일임에도 그분은 계속 ‘가는 길’이라며 태워주었다.

“내일은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가 찜질방에 내려 하룻밤 지낸다고 하니 다음 날 일정을 물어본다. 표선 쪽으로 가서 한 바퀴 돌 거라고 했더니 그분이 말했다. “그럼 내일 오후 3시쯤 성산일출봉 구경하고 계세요. 제주 시내까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그다음 날 약속 시간에 그분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구경 잘했냐면서 밝은 모습으로 우릴 맞아주었다. 우린 다시 그분 승합차를 타고 차량 여행을 했다. 오전부터 날이 흐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니 그분이 더없이 고마웠다. 비도 내리고 갈 길은 먼데 짐 보따리를 든 채 버스를 타고 여행했다면 아마도 가족 모두 벌써 지쳐 버렸을 것이다.

“어디 또 들러보고 싶으세요?” 그분이 친절하게 물었다. 아들이 미로공원에 가보고 싶어 한다고 하자 기꺼이 우리를 안내했다. 그분은 영업하러 갔다가, 구경이 끝날 즈음 다시 데리러 왔다.

다음 날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해서 공항에서 가까운 찜질방을 찾는다고 하니까 그분은 또 그곳까지 태워다 주었다. 가족과 한 번 가보았는데 좋더라며.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지내본 찜질방은 모두 후덥지근해서 좀 그랬는데 그분이 소개해준 곳은 시원했다. 모두 제주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그곳을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 가족은 그분 덕분에 좋은 구경도 하고 즐거운 제주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여행 하면 가장 고마운 분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은 따듯한 곳임을 깨닫게 해준 분이다.

강예신 작.
<소유… 존재>
162×130cm. Oil on canvas. 2012.

내 어머니 정읍댁의 팔도 유람

김현 완산여고 교사

‘여행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팔순이 넘으신 제 어머니와 이모에겐 여행이 힘을 준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어머닌 온 생을 자식들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위한 삶을 살지 않겠냐만 어머닌 유독 심했습니다. 시골 동네에서 버스를 빌려 놀러 가는 날에도 어머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싫어 엄마도 가시라고 하면 버스를 타면 어지럽고 속이 안 좋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조금 못마땅해했습니다. 특히 동네에서 여행을 갈 땐 더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부가 짝이 되어 놀고 마시고 즐기는데 아버지 혼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아버진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어이! 자네 죽어서 여행 갈라구 그렁가. 죽으면 보고 싶어도 못 봉게 가세잉!” 그러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영감이나 재미나게 댕겨오쇼잉. 나는 안 갈랑게.”

그렇게 여행을 가자! 안 간다! 하던 두 분은 이제 이승과 저승의 양쪽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4년 전 여든여덟을 일기로 이승의 삶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닌 아버지 영정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여행 한 번 떠나지 못했음을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너그 아부지가 떠난께, 살아서 너그 아부지 말 안 들은 게 쪼께 미언허구나.”

그러면서 자신도 얼마 남지 않은 생, 팔도강산을 돌아댕겨야겠다 혼잣말을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은 자식들은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돌아가신 지 1년이 안 돼 실행하게 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모님이 동생을 찾아 시골집에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팔십 중반을 넘긴 이모님은 걷기를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그때 두 분을 모시고 새만금에 갔습니다. 육십 년, 칠십 년 만에 떠나는 자매의 첫 여행일지도 모릅니다.

백발이 성성한 두 자매는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풍경을 바라보며 “참 좋다! 참 좋아! 죽기 전에 이런 데도 와 보구, 니 덕에 좋은 귀경헌다”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찌나 죄송하고 마음이 짠하던지요.

새만금에 다녀온 후 댁에 가신 이모는 자식들에게 엄청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둘째 형과 형수가 일을 잠시 미루고 어머니와 이모를 모시고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강원도를 구경하고 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가려 했던 형은 일 때문에 잠시 시골에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 제가 두 분을 모시고 고창에 갔습니다. 두 분이 코스모스 꽃밭을 조심조심 걷습니다. 젊은 사람들 속에 백발을 하고 코스모스 꽃길을 걷는 이는 어머니와 이모 두 사람뿐입니다.

“옛날 생각나네. 처녀 적에 우리도 이런 꽃길을 걸었는디.” “난 생각도 안 나네. 땅 파고 풀 매고 이렇게 백발 신세가 되었응게.”

다시 집에 오는 길. 두 노인은 피곤도 할 터인데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1시간 넘게 차를 타고 가서 눈요기로 꽃구경을 한 게 그리도 좋으실까요. 며칠 전 강원도에서 형수가 전화로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작은아빠, 엄마랑 이모 좋아 죽네. 형님은 피곤하다고 허는데 엄마랑 이모는 잠도 안 주무시고 그냥 싱글벙글이세요. 진작에 올 걸 그랬나 봐.” 그 소린 오히려 ‘너그들 여태껏 뭐 했냐!’ 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형 내외는 두 분을 모시고 다시 부산까지 여행을 이어갔습니다. 3일 동안의 여행을 마무리한 후 형 내외와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두 분 모시고 여행 못 간 게 지금 너무 아쉽다.” “나도 그래. 그래도 형이 큰일 했네. 형수도요.”

나이 든 부모를 모시고 며칠씩 여행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잠자리, 먹을거리, 비용도 만만치 않고요. 그런데 일단 떠나면 무척 좋아하십니다. 말로는 “다 늙어서 뭐 그런 데 가냐?” 하면서도요. 그렇게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돌고 오신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야야! 죽기 전에 팔도유람 한 번 떠나고 갈라고 혔는디 요참에 고걸 해뿌렸다.”

이제 거동이 불편하셔 먼 곳으로 여행을 가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가까운 데라도 자주 다녀오려고 합니다. 오래오래 같이 여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예신 작.
<Once upon a time>
97×145cm. Oil on canvas. 2012.

눈물 대신, 여행

장연정 34세. 작사가, 작가(<소울 트립> <슬로 트립> <눈물 대신, 여행> 저자)

3년이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슬픔은 제자리에 있다. 조금 흐려진 색으로, 조금 차분해진 깊이로.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타이르는 일이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 근 반년 동안, 깊은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여전히 친구가 사는 동네를 서성거렸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했고, 마지막 문자를 버릇처럼 들여다보았다. 죽음이란 단어는 이별이라는 단어와 비슷했지만 멀었다. 그녀의 죽음은 인정했지만, 나와의 이별은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반년 동안 나의 상태는 심각해졌다. 너무나 자주 웃다가 울었고, 바삐 돌아가는 시간 속에 홀로 멈춰졌고, 당장의 내일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산산이 무너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잔인하게도, 나에게는 살아내야 할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현실을 살기 위해, 나는 당장의 현실을 잠시 놓기로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사를 준비했다. 가장 추웠던 내 마음에 어울리는 여행지를 고르고, 비행기 표를 샀다.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나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 분명했지만, 자꾸만 죄책감에 둘러싸여 여기저기 고장 나고 있는 나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떠나기 전에도 여러 번 망설였다. 이것은 여행일까, 도피일까. 결론을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둘 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곳은 생각보다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런 사치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편안하고 여유가 넘치는 곳. 아, 살아 있으니 이렇게 행복하구나. 나는 자주 울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잔인하게도 여행을 하는 내내 앞으로 더 잘 살겠다, 자주 다짐을 했다. 당장 눈뜰 수 있는 내일은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사실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일분일초가 너무나도, 소중했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그 친구의 모습이 하루라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었으나, 어느 날은 많이 웃을 수 있었고, 새로운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은 그 순간의 낯설음이 좋아서 가슴이 뛰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미안해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대신, 오래오래, 아주 오래오래 잊지 않고, 아름답게 기억하겠다 마음먹었다. 그녀와의 좋았던 행복했던 시절들을 떠올렸다. 어렸었고, 그래서 용감했고, 자주 넘어졌지만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무릎을 툭툭 털어주던 그 시절의 느낌들을. 처음 만났던 스무 살의 여름부터 서른셋의 마지막 겨울까지 우리가 보란 듯 절망에게 띄웠던 수많은 웃음들을.

그렇게 행복한 기억만을 떠올리던 어느 날부터 나의 하루 속에서, 밤의 꿈속에서 그 친구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내가 웃는 만큼, 마음속의 그녀도 웃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새로운 공간에 안착했다. 때때로 마음속의 그녀를 보듬었고, 아름답게 기억해 주었다. 슬픔은 차츰 흐려져 갔고, 나는 다시 건강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하루에 단 한 번도 그녀의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이 시작되었다. 비로소 이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세상 위에 발을 붙일 수 있는 한 아직 가야 할 곳은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내일’을 당연한 듯 약속해주지 않기에, 나는 가능한 한 많이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지내고 있다.

누군가를 잃어버림으로 인해 알게 된 내 삶의 의미. 그 삶의 의미는 떠나고 돌아오는 여행 속에서 더 깊은 색을 입는다.

눈물 대신, 여행. 세 번째 책의 제목을 그렇게 지어 놓고, 나는 참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앞으로 이 말이 필요해지는 때가 얼마나 더 찾아올 것인가. 그래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삶’이 내 곁에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강예신 작.
<지침서c- 대답되지 않는 질문의 이해>
130×89cm. Oil on canvas. 2012.

혼자 떠난 여행, 사람을 만나다

황상민 27세. 경북 포항시 북구 두호동

2년 전, 사회생활을 갓 시작할 무렵이었다.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면서 잠시 쉬어갈 기회를 엿보던 중, 무작정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제주도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지도 한 장을 들고 제주 국제공항에 발을 디뎠다. 계획도 없이 공항에서부터 해안 도로를 따라 제주도를 한 바퀴 다 돌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걷다가 힘들면 제주도 일주 버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인연이란 무엇일까? 그렇게 2주간의 여행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생길도 함께하고 있다. 지금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그곳에서 만났다.

제주도에는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들이 있다. 해안 도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매일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매일 밤 제주도 여행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나 말고도 혼자 온 분들이 많았다. 이야기를 나누며 우린 쉽게 친해졌다.

진로 고민을 하는 대학 새내기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오랜 투병 끝에 병마를 이겨내고 제주로 내려오셨다는 아주머니에게 박수를 쳐드리기도 하고, 퇴직 후 오랜 죽마고우와 여행 오신 아저씨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나 또한 진로에 대한 고민과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어쩌면 내가 고민하는 건 참 작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단순히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만이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는 것도 느꼈다. 다양한 여행자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생한 인생 수업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 만에 친구가 되어 다음 날 함께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동행할 사람을 만나고 좋은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었다. 아직도 만남을 이어나가고 있는 제주도 인연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수많은 날들 중 그날을,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들 중 그곳을 선택해서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하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비우려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더 값진 것들로 마음을 꽉꽉 채워 돌아왔던 여행. 인생을 살며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 배낭 하나만 메고 나는 또다시 제주 공항에 내린다.

강예신 작.
<낭만이 필요해>
91×73cm. Oil on canva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