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아라비아 재스민

화려했던 봄꽃들이 자취를 감추고 여름이구나 싶을 때면, 기다리던 ‘아라비안 재스민’ 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꽃 한 송이만으로도 집안 전체에 퍼지는 황홀한 향기~ 향기도 향기이지만 그 소박한 꽃잎에 매료되는 때가 바로 여름입니다. 윤기가 흐르는 진한 초록색 잎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하얀 꽃. 기다란 줄기가 덩굴을 이루며 자라기 때문에 그냥 흘러내리게 하거나 지지대를 만들어 감아올리며 키워도 좋은데 밝은 햇빛 아래 두고 겉흙이 말랐을 때 흠뻑 물을 주기만 하면 무탈하게 크는 착한 식물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재스민차’의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재스민차를 만드는 방법은 보통 꽃차와 같은 방법으로 하면 되는데, 활짝 핀 꽃을 따서 그대로 끓인 물에 띄워 마시거나, 꽃잎을 잘 말려 보관했다가 마시면 된답니다.
다른 이와 함께도 좋지만 저는 특히 혼자서 차 마시는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나의 내면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작은 꽃잎 하나가 만들어주는 향기로운 차 한 잔. 그 앞에 조용히 앉아 크게 한 번 숨 고르기를 하다 보면 내 마음을 어지럽히던 소리들과 이미지가 흐려지면서 정신이 해방되는 것을 느낍니다.

‘바쁘다’는 말을 남에게 내보이고 싶은 명함처럼 입에 달고 살면서 실제로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가꾸기 위해 비워두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것 같아요. 잠시라도 스마트폰에서 떨어지면 불안하고, 늘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만 안심이 되고, 일부러 빡빡한 스케줄을 짜서 그대로 실천해야만 제대로 사는 것 같은 착각들이 과연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 생각해 봅니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마음의 스케줄 정리가 필요한 순간, ‘재스민차’ 한잔 어때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친구, 바로 나 자신과 함께 말입니다.^^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미네스트로네

재료

베이컨, 샐러리, 감자, 당근, 베이크드 빈, 양파, 마늘, 양배추, 생토마토, 토마토홀

만드는 법

① 마늘은 편으로 썰고, 샐러리는 껍질을 벗겨서 다진다. 다른 야채들도 0.5~1cm 정도로 다진다. 토마토는 껍질을 벗기고, 베이컨도 취향대로 썬다. ② 올리브유를 두르고 편으로 썬 마늘을 볶다가, 양파를 넣고 살짝 투명해질 때까지 볶는다. ③ 베이컨을 넣고 콩을 제외한 나머지 야채를 넣어서 볶다가 토마토홀과 토마토를 넣는다. ④ 토마토가 뭉개지면 육수나 물을 붓고 한 번 헹군 콩을 넣어 끓이다가 후추, 소금으로 간하면 끝. ⑤ 그라나 파다노 치즈와 파슬리를 올려서 먹거나 빵을 구워 곁들이면 더 맛있다.

감기에 걸려서 뇌를 코로 다 풀어낸 듯한 날. 입맛은 없고, 배는 고프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도 뭔가는 해 먹어야 하는 그런 날. 코를 줄줄 흘리면서 집 근처 호수를 두 바퀴 돌다가 마트에 가서 샐러리, 감자, 당근, 베이크드 빈을 사가지고 와 8리터짜리 곰솥에 한가득 만들어 먹었던 미네스트로네. 어릴 적 경양식집에서 크림스프와 야채스프 중에서 선택해야 하면 나는 야채스프를 선택하곤 했다. 언니는 언제나 크림스프. 왜인지는 모르지만 감기가 독하게 걸렸을 때, 꼭 먹고 싶은 이 토마토 야채스프가 나의 소울푸드다. 배가 고플 때는 숏파스타인 펜네를 넣어서 한 사발 말아 먹기도 한다.

국물 별로 없이, 되직하게 끓여서 한 사발만 먹어도 몸이 뜨뜻해지고, 감자와 콩이 들어 있어 더 든든하다.

요리 둥기둥기 블로거 & 그림 최정여

실종 아동 찾는 ‘인페이스’

● 이름은? 인페이스 InFace. ‘얼굴 안에서 찾는다’ ‘얼굴 안에 답이 있다’라는 의미로 지었다. 얼굴만으로 부모와 아이를 만나게 해줄 수 있는 우리의 프로젝트를 잘 나타낼 수 있는 단어이다.

만든 사람
임팩트(전은솜, 박호성, 황의종, 이수민)

● 어떻게 이런 생각을? 마이크로소프트의 학생 파트너 프로그램(Microsoft Student Partners)에 참여하면서 우리 셋(전은솜, 박호성, 황의종)이 만나게 되었고 이수민씨는 이후에 합류했다.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고민하다가, 지인으로부터 시리아 봉사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접했다. 시리아 난민이나 고아들을 도울 방법, 그들의 가족, 엄마를 찾아줄 방법을 생각하다가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평소 즐겨 했던 게임의 부모 캐릭터 얼굴의 외모적 형질을 유전받아 아기 캐릭터가 생성된다는 점에 착안해 얼굴만으로 미아를 찾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 어려웠던 부분은?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시킬 방법, 그래서 미아 관련 일을 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실무적으로 도움을 드릴 방법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얼굴 인식을 기본으로 하다 보니 개인 신상 정보의 문제가 있어서 테스트 대상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기술 구현을 위한 내용이 우리 대학생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으나, 이러한 서비스가 아직 사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수하면서 도전했다.

● 주변의 반응은? 2014 이매진컵 한국 파이널에서 월드 시티즌십 분야 1위, 네이버 D2 Award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국 대회 수상 이후 매체에 소개가 되면서, 실제로 이 서비스가 상용화되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프로그램의 필요성도 실감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정말 잘해야겠다’고 느낀다.

● 주변의 반응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주최한 2013년 유니버셜 디자인 공모전에서 특선을 했다. 이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지도해주신 교수님이나 주변의 많은 친구들도 지하철을 탈 때마다 힘들고 불편했던 문제였다며 많이 공감해주었다.

● 하고 싶은 말? 여태까지 어려운 점도, 위기도 많았는데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고 도움을 주셔서 영광이고 감사할 따름이다. 저(전은솜) 또한 팀원으로부터 배워가고 있는 점도 많아서 고마운 마음을 항상 갖고 있다. ‘매 순간 순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이다’라는 영화 대사를 참 좋아하는데, 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앞으로도 더욱 겸손하게, 처음의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겠다. 현재 세계 준결승전(World Semi-Final)에 참가 중인데 Final에 꼭 진출하여 세계인들에게 한국에도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는 대학생이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 이 프로젝트가 실용화되어 최대한 많은 사람들, 세계인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잘 먹고 잘 사는 법, 식사하셨어요?

설 특집으로 방영되었던 ‘잘 먹고 잘 사는 법, 식사하셨어요?’가 정규 편성되었다. 방랑 식객 임지호와 이영자가 함께 ‘밥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라는 취지하에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치유와 치료의 밥상을 차려주는 것이다.

임지호와 이영자 그리고 게스트 김혜수는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나고 자란 풀들을 이용하여 첫 만찬을 즐긴다. 즐비하게 자란 조팝나무와 소루쟁이, 임지호씨가 아니라면 그것들이 음식이 될 거라 상상할 수 없는 식물들이, 소루쟁이 된장국과, 참기름 내가 진동하는 조팝나무순 주먹밥으로 재탄생된다.

이영자는 묻는다. 여의도라면 차도 많이 다니고, 먼지도 많은데 이런 걸 먹어도 되냐고. 그런 우문에 대해 임지호씨는 현답을 내린다. 그 오염된 환경에서 뿌리 내린 식물은 이미 그 오염된 환경을 이겨낸 결과물이라고, 사람들이 이 환경 속에서 살아가듯, 그렇게 살아가는 식물들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필요 없다고. 늘 사람이 사는 주변 환경의 식물이 바로 그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음식이라는 그의 생각처럼, 한강 고수부지의 식물들은 서울 하늘을 함께 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역시나 필요한 식물이라는 것.

그렇게 첫 만찬을 끝내고서 이들은 차를 달려 첫 번째 의뢰인을 찾아 나선다. 의뢰인은 김재민, 23살의 대학생, 청년은 자신의 부모님들께 밥 한 끼를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청년이 인도하는 데로 찾아간 곳에 계신 분들은 그의 친 부모님이 아니었다. 그가 가슴으로 맞아들인 부모님은 그의 선배였던, 고 문광욱씨의 부모님이었다.

고 문광욱씨는 해병대에 입대한 후 2010년 11월 11일 연평도에 배치를 받았다가, 11월 23일 연평해전 교전 중에 전사한 해병대원이다. 그리고 김재민씨는 그렇게 세상을 떠난 문광욱씨의 뒤를 따라 입대한 친구와 후배들 23명 중 한 사람이었다.

아들을 잃은 대신 23명의 아들을 다시 얻었다고 말하는 문광욱씨의 아버지지만, 아들이 죽은 후 5개월 동안 술로 세월을 보내느라 위가 수축되어 지금도 밥을 잘 못 먹는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도 꿈에서 아들을 만났다고 하는 어머니는 아들이 첫 휴가 때 사가지고 온 쌀을 아직도 뜯지도 못한 채 보관한다. 아버지를 닮아 돼지고기를 좋아했던 아들, 부모님은 아들이 죽은 후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부모님에게 임지호씨는 말한다. 아들이 사가지고 온 쌀은 그의 기일에 밥을 해서 함께 먹으면서 마음의 상처도 풀어내라고. 그리고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좋아했던 돼지고기를 이용해 만찬을 차린다. 봄의 생기를 머금은 과일과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군산의 벚꽃 봉오리는 요리의 하이라이트. 열매라는 건 꿈, 그래서 열매를 이용한 요리는 미래를 지향하는 의미를 담는다고 임지호씨는 덧붙인다.

마음으로 얻은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시 시름을 잊고 수저를 든다. 이 장면을 보며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팽목항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또 다른 부모님들, 그분들도 언젠가 이들처럼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음식을 드실 그날이 올까….

음식을 통한 치유, 나아가 음식을 통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야무진 시도를 내보인 <잘 먹고 잘 사는 법, 식사하셨어요?>는 하지만 그 시도가 안타깝게 방송 시간은 모처럼 늦잠을 자거나, 혹은 외출하기 좋은 토요일 아침 8시 40분이다. 그래서인가 정지해버린 예능 프로그램들 속에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딘 이 프로그램의 흔적은 희미하다.

예능이 정지된 시간, 그저 언제 다시 시작해 볼까 눈치만 볼 게 아니라, 사실 이 시간에 필요한 것은, 이 정지된 시간들을 채웠던 지난 시간들 속에서, 우리가 그간 너무 흥청망청 웃고 떠들지만 않았는가 하는 반성이 아닐까. 그리고 그저 시간이 지나 조금 무뎌졌다고 다시 예전처럼 그럴 것이 아니라, 세월호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전 국민이 상처를 얻은 이 시간… 치유하는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정희

짜장면은 어떻게 국민 음식이 되었을까?

짜장면의 시조는 작장면(炸醬麵)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작(炸)은 ‘불에 튀기다’, 장(醬)은 말 그대로 된장 등의 발효식품을 말하며, 면(麵)은 밀가루 국수를 뜻한다. 즉 중국식 된장을 기름에 볶아 국수 위에 얹어 먹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짜장면에 얽힌 행복한 추억 하나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 있을까. 지금도 전국적으로 하루에 대략 600만 그릇을 넘게 먹는다는 짜장면을, 2006년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 100대 민족문화상징’의 하나로 선정했다. ‘중국에서 유래하였으나 그것과 다르게 우리나라에서 토착화한 음식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대표적인 외식 메뉴이며 세계화가 가능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반세기 가까이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아온 짜장면의 이야기다. 정리 최창원

참조 도서 <짜장면뎐>(양세욱 | 프로네시스), <식탁 위의 한국사>(주영하 | 휴머니스트), <사물의 민낯>(김지룡, 갈릴레오 SNC | 애플북스), <한국음식문화 박물지>(황교익 | 따비), <처음 만나는 우리 문화>(이이화 | 김영사)

저는 짜장면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한반도 땅에 살아온 지 어언 100년도 훨씬 넘었네요. 제가 언제 어디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어요. 다만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들어온 청나라 군인들을 따라 중국 상인들도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 이후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그때의 중국식 짜장면과 지금의 한국식 짜장면은 아예 맛이 다릅니다. 짜장면 맛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춘장이라고 부르는 소스예요. 중국의 정식 이름은 면장이라고 하는데 중국 산동 지역이 원산지로, 원래 중국 짜장면은 짠맛이 강했죠.

그런데 1948년 중국 산동성 출신의 화교 왕송산이 ‘사자표 춘장’이라는 한국 최초의 면장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다 1950년대 중반 캐러멜을 섞어 달달한 맛을 더했고, 이것이 보편화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맛의 한국식 짜장면이 탄생했습니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 한국 짜장면 맛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재료가 등장하였는데, 바로 양파였어요. 그러니까 지금의 짜장면은 1960년대 이후 개량된 것이라 보아야 할 거 같네요.

제가 국민 음식의 반열에 오르게 된 데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한국 전쟁 후 미국의 잉여 농산물이 원조로 제공됐는데, 밀이 70%를 차지하였어요. 그런데 밀 소비가 정부의 계획대로 확산되지 못하자 정부는 ‘혼, 분식 장려 운동’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고, 당시 밀가루 대용식으로 짜장면이 언급되면서 중국 음식점에 가자는 운동이 일어났지요.

또 서민들은 하루하루 빠듯한 가계를 이어갔지만, 뭔가 특별한 날 외식을 즐기고 싶을 때 주로 찾은 곳이 바로 중국 음식점이었어요. 외식거리로 값이 저렴하면서 집에서 먹기 힘든 별식, 일탈의 음식으로 딱이었던 거죠. 그래서 졸업식 날이면 중국 식당은 꽃다발을 든 졸업생과 학부모들로 북적거렸고 생일, 운동회, 이삿날 등 특별한 날이면 어김없이 짜장면을 먹게 된 것입니다.

저는 1분 1초가 아까운 산업화 시대에 딱 맞는 음식이기도 했습니다. 재료가 준비된 상태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3분, 먹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죠. 배달의 문화를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도 저였어요. 단 한 그릇이라도 주문하면 어디든 빠르게 배달됐지요. 중국 음식점이 늘어난 데는 화교들의 고단한 삶도 연관이 있습니다. 1950~60년대 중국 대륙의 공산화와 한반도의 남북 분단, 한국 정부의 ‘화교의 토지 소유 금지 정책’ 등으로 생계가 어려웠던 화교들이 호구지책으로 찾은 게 중국 음식점을 차리는 거였거든요. 통계에 의하면 1948년 332개소였던 중국 음식점이 1972년엔 2,454개로 늘었습니다. 그 수요를 보고 한국인들도 짜장면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유니짜장, 쟁반짜장, 삼선짜장…. 21세기 들어 더 다양해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저의 종류도 다양해졌지요.

1990년대 후반에는 ‘블랙데이(4.14)’까지 생겨서 놀랐어요. 발렌타인데이(2.14)와 화이트데이(3.14) 때 초콜릿이나 사탕을 받지 못한 젊은이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짜장면을 먹는 날이라나요.

“짜장면 시키신 분~” 하며 저를 넣고 어디든 같이 다녔던 철가방은 2009년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이 선정한 ‘코리아 디자인 목록’ 52개 가운데 하나로도 꼽혔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문화인류학적 소산이라 할 만큼 완전한 디자인’이라는 게 선정 이유였습니다.

고단했던 반세기를 한국 국민과 동고동락해오다 보니 저를 소재로 삼은 영화, 드라마, 연극, 동화, 노래, 소설, 시도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다양한 음식 문화들 속에서 외식의 왕자라는 절대 권좌의 자리는 내려놓게 되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저를 사랑해주시는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짜장면박물관. 짜장면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인천시 중구 선린동 일대 차이나타운에 있다. 2012년 4월, 20세기 초 세워진 한국 중화요리사의 상징인 공화춘(근대문화재 제246호, 1983년에 폐업)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


고빈의 동물 사진

소녀와 염소 :
라자스탄, 인도. 2007.
벽을 움푹하게 파놓은 것은 제단(벽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제단에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내는 일은 일 년 중 단 며칠에 불과하다. 제단은 제사 지낼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염소들의 안락한 휴식처로 사용된다.

살구꽃 :
셰헬리, 아프가니스탄. 2007.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들고 있는 것은 살구나무 가지다. 살구꽃은 벚꽃과 비슷한 시기에 피어나며 생긴 모습 또한 비슷하다. 여름이면 꽃이 피었던 자리엔 어느덧 살구가 영글고, 누구나 손만 뻗으면 살구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먹다가 남은 것들은 건살구로 말려 겨우내 먹는다. 살구씨는 기름을 짜서 약으로 쓰고, 씨앗 안에 행인은 말려서 유용한 식량으로 쓴다.

당나귀의 일상 :
라자스탄, 인도. 2003.

당나귀는 세탁소에서 일을 한다. 아침 일찍 빨래를 싣고 빨래터로 갔다가 오후가 되면 햇볕에 잘 마른 빨래를 싣고 다시 세탁소로 돌아온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주인은 당나귀에 물린 재갈을 풀어준다. 자유의 몸이 된 당나귀는 마을 이곳 저곳을 마음껏 마실 다니다 해가 저물면 세탁소로 돌아간다.

해변의 개 :
푸리, 인도. 2003.

인도양을 접하고 있는 이 바닷가 마을은 항상 순례자들로 넘쳐난다. 순례자들의 중요한 의식 중 한 가지는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침례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도 잊지 않는다. 침례의식을 마친 순례자들이 옷을 말리는 동안 동네 개들은 순례자들 주변을 서성거린다. 누군가가 던져줄 자비로운 빵을 기다리며….

나는 동물이 좋다.
순수한 눈동자를 가진 그들은
인간이 빚어낸 선함과 악함이 스며들지 않아
말과 말,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오해하고 상처받고, 또 슬퍼하지 않는다.
넘치는 말도 없이, 생각의 흔들림도 없이
나도 그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순수가 되고 싶다.
내 마음은 그들에 동화되어
덧없는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진정 평화로울 수 있었다.

바둑이와 아이들 :
폰티체리, 인도. 2005.
인도의 개들은 대부분 주인도 없이 거리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살아간다. 인도 친구에게 물었다. 왜 인도의 개들은 주인이 없느냐고. 그런데 친구는 오히려 “왜 개에게 주인이 있어야 하는가?”라며 되물었다. 그렇다. 비록 거리에서 태어났지만 당당히 자신의 삶을 헤쳐가고 있는 저 생명에게 굳이 주인이 필요한 것일까? 그 삶의 주인은 바로 그 자신일 텐데….

꽃과 고양이 :
라다크, 인도. 2005.
고작 세 가구만 사는 히말라야 오지의 작은 마을. 마을엔 네 명의 아이들과 잿빛 고양이 한 마리도 살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고양이를 데리고 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붙들려온 고양이는 사진을 찍는 내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편, 아이들은 카메라에 담긴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오지 아이들이라 사진에 찍혀본 일도 거의 없었을 텐데 들꽃까지 꺾어와 멋진 연출까지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그러한 천진무구한 순수가 고양이를 움직인 것일까? 마침내 고양이는 그윽하게 꽃향기를 맡는 포즈까지 취하는 것이었다.

사진가 고빈님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습니다. 인도, 네팔, 몽골 지역 등을 여행하며 사람과 동물의 삶, 그 주변의 모습을 친근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건축가 이타미 준

‘물·바람·돌의 건축가’로 불리는 건축가 이타미 준(한국명 유동룡·1937~2011). 40여 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해온 그를 기리는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이 열려 눈길을 끌고 있다. 사람들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그는 200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을 수상하며 세계 건축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어 2010년 한국 국적의 건축가로서 일본 최고 권위의 건축상 ‘무라노 도고상’을 수상하며 일본 건축계에서도 대가로 인정받았다. 자연 앞에 겸손했던 그의 건축은 흙·돌·나무 등 날것의 소재에 빛과 바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공간을 빚어냈고, 따스한 온기를 담은 건축을 탄생시켰다. 그가 직접 말하는 건축과 인간, 자연에 대한 이야기다.  정리 김혜진 &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건축은 자연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는 특별한 건축물이 하나 있다. 하늘의 교회, 이른바 방주 교회다. 창세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따온 이 건축물은 마치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건물의 지붕은 건축가가 지난하게 고민했던 흔적들을 말해준다. 반짝이는 은빛 철제 지붕은 제주도의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표정 – 날이 좋은 표정, 흐린 날의 표정 – 등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온전히 담겨지는 것이다.

건축가 이타미 준. 그는 한국과 일본 경계 사이에서 늘 이방인의 시선을 받았던 건축가였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존재의 근원에 관심을 갖게 했다. 그것은 건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의 수많은 건축가들은 풍부한 기술로 첨단 건축을 선보였지만, 그는 사물 본래가 가진 모습을 그대로 담으려고 노력했다. 자연은 그에게 최고의 건축 소재였던 것이다.

“건축의 경우에도 의식적으로 흙, 돌, 금속, 유리, 나무 등의 소재를 콘크리트와 대비시킨다. 유리를 통해 비쳐 드는 빛으로 인해 빛나는 금속, 그런 것들에서 소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나무나 돌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거뭇거뭇해지고, 금속은 녹이 슬면서 색이 변하고, 유리의 빛 역시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 예술은 태어난 곳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내부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일이다. 내가 너무나 감탄한 것은 비 갠 후 물기를 머금은 돌바닥에 비친 기둥들이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의 아름다움이었다. 말로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 아름다움은 인간의 작위보다 자연이 오히려 한층 더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 뒤 어떤 형태로든 내게 영감을 주었다. 지금도 그때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하늘의 교회(방주 교회). 2009.
제주도의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건축으로 담기 위해 고민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처럼 보이면서 대지 지형이나 주변 자연과 일체화 되는 형태를 추구하였다. 사진_김용관

“건축가는 도공의 마음과 같이 무심(無心)으로 건물을 만들어야 한다”

이타미 준은 고미술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후로, 매년 한 달에 3~4번씩 꾸준히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한국의 미를 추구했던 건축가였다. 우연히 본 조선 민화에 매료된 이후 민화를 비롯한 고가구와 벼루, 신라의 불상, 그리고 조선시대의 백자 등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영감을 주었고, 우리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수집하기에 이른다. 특히 “진품 백자를 만나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날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고백처럼, 백자는 그에겐 또 다른 스승이었다.

“백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우윳빛 표면을 손으로 만지면 저절로 달라붙는 질감…. 그 온기와 자연의 미를 건축 속에 담고 싶다. 조선 민화나 고가구, 백자 항아리처럼 튀지 않고 자연과 환경에 스며들어 빛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게 내 건축이 지향하는 것이다. 특히 긴장을 풀어주는 은은함을 지닌 조선 자기는 현대 건축에서 가장 부족한 온기와 소박함을 가르쳐준다.”

이타미 준은 ‘이 시대 마지막 아날로그 건축가’라고 불릴 정도로 손의 감각에서 비롯되는 건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치 도공이 도자기를 빚듯이, 손으로 스케치를 하고 드로잉을 했을 때라야 질감 표현과 온기를 담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구상 단계에서부터 구현될 건축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표현함으로써 철저히 아날로그 감성을 지키려고 했다.

포도호텔. 2001.

지붕 곡선은 흡사 제주의 산이나 민가, 또는 제주 오름처럼 보인다. 주 출입구 앞의 두 기둥에는 돌, 철판, 나무가 사용되어 기둥 하나에서도 ‘소재의 미’를 발견할 수 있다. 제주의 토착성과 지역성을 건물 형상과 재료 그리고 내부 공간에까지 담으려 했다. 사진_준초이

석 미술관. 2006.

시적 환상을 품은 돌의 공간. 어두운 박스 안 꽃잎 모양으로 열린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움직임은 사람들에게 환상의 공간을 느끼도록 해준다. 사진_김용관

“건축가는 겸손한 자세로 대지를 대하고 건축을 해야 한다”

특히, 수(水)·풍(風)·석(石) 미술관은 하나의 자연이자 예술이 되는 건축을 꿈꿔왔던 그의 건축 철학이 가장 잘 녹아 있는 건축물로 손꼽힌다. 당시 관리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미술관 짓는 것을 고민했던 건축주에게 그가 제안한 건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이었다. 그것은 관리가 따로 필요 없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자연인 물, 바람, 돌을 수집한 미술관이었다. 천장이 뚫린 덕분에 물과 하늘이 만나고, 갈대밭의 바람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어두운 박스 안 꽃잎 모양으로 열린 구멍을 통해 빛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수·풍·석 미술관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탁월한 사상에는 체온 같은 것이 있고, 탁월한 건축에도 따스한 체온이 있다고 생각한 건축가 이타미 준. 그는 인간이 그러하듯 건축 역시 땅에서 와서 땅으로 돌아가는, 영원한 자연에 비하면 잠깐 왔다 가는 아이 같은 존재라고 여겼고,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주변 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건축은 인간에 대한 찬가이자 자연 속에서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바치는 또 다른 자연이었던 것이다.

건축가 이타미 준은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나 1964년 무사시 공업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4년 뒤 이타미 준 건축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주로 자연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흙, 돌, 나무 같은 소재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건축들을 발표한 그는 ‘현대 미술과 건축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003년에 프랑스 국립 기메 미술관의 초청으로 개인전을 열었으며 대표작으로는 <먹의 집> <석채의 교회> <엠 빌딩> <온양미술관> <포도호텔> 등이 있습니다. 이 글은 <돌과 바람의 소리>(학고재) 등을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이타미 준을 기리는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이 오는 7월 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제5전시실에서 열립니다.

개그우먼 김영희

5년 차 개그우먼 김영희(32)는
‘아줌마 개그의 최강자’로 통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10년 데뷔, 28세 때부터
줄곧 다양한 아줌마의 역할로 웃음을 줘왔기 때문이다.
최근엔 <개그콘서트> ‘끝사랑’에서
정열적인 사랑 중인 ‘김여사’로
시청자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김영희씨.
개그맨이 되고자 두 번 연속 공채에 도전,
합격했지만 신인이 실력을 발휘할
개그 프로가 없다는 것에 좌절해야 했던 그녀.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KBS 공채에 도전했으며,
긴 공백 등의 어려운 시간들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그녀는 ‘자신에 대한 믿음’
‘도전하는 용기’ 그리고 ‘즐길 줄 아는 것’이
꿈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 말한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옴~마!!” “앙대요~” “짓꾸져~!”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돌싱 김여사는 정사장(정태호) 앞에서 최선을 다해 혀 짧은 소리를 내고, 과감한 애정행각도 마다하지 않는다. 촌스러운 화장에 온갖 멋을 부린 ‘좀 노는 아줌마’ 김영희와 죽이 척척 맞는 ‘허세 왕’ 정태호. 두 사람의 연기에 웃음이 절로 터지는 <끝사랑>이 요즘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다. 김여사의 “앙대요~”는 이미 국민 유행어가 되었다.

요즘 ‘끝사랑’이 인기가 많습니다. 기분 좋으시죠?

사실 그런 인기를 느낀 지는 얼마 안 돼요. 아이디어 짜고, 회의하고 녹화하고… 개그맨들의 일주일 패턴이 똑같거든요. 어디 놀러 간다거나 돌아다니는 게 없다 보니까, 실제로 체감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 ‘인간의 조건’이라는 프로를 찍으며 외부를 다니면서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는구나 알았죠. 너무 좋고 감사합니다.

처음에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짜게 됐나요?

연인 코너를 재밌게 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중년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중년의 사랑이 되게 예쁘단 말이에요. 제가 조민수씨의 연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조민수씨가 예전에 출연한 드라마 <피아노> 때의 억척스러움과 고급스러움 섞인 걸 찾아서 해보자 해서 모티브로 삼아 했는데, 이게 저한테는 최선인 거죠.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들을 떠올려보면 다 아줌마는 맞는데 미묘한 차이가 있어요. 그동안은 좀 억센 아줌마 쪽이었다면 <끝사랑>의 아줌마는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억세지는 않은 나름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고급선이라고 할까.(웃음)

김영희씨 연기를 보다 보면 ‘맞아, 우리 동네에도 저런 아줌마 꼭 있었어!’라는 생각이 늘 듭니다. 관찰력이나 연기력이 대단하신 것 같은데,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나요?

아유, 감사합니다. 실제로 평소 주변을 많이 관찰하고, 드라마나 영화도 많이 봐요. 같은 영화도 필이 꽂히면 일곱 번 여덟 번씩 봅니다. 처음엔 전체 스토리만 보인다면, 다음엔 세트, 옷차림, 엑스트라 등등 보면 볼수록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면서 내 것을 만들 수 있더라고요. 특히 제가 빼놓지 않고 보는 게 KBS 드라마 <사랑과 전쟁>이에요. 거기서 본 아줌마 캐릭터들이 제 안에 쌓여 있다가 개그로 나오는 거 같아요. 이제 <끝사랑> 김여사도 봄옷으로 개편을 해야 해서 요즘엔 유심히 아줌마들의 옷이며 액세서리 같은 것을 더 관찰하는 중이에요.

작년 <거지의 품격>이 끝나고 몇 개월간 공백기 후의 코너여서인지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는데요.

다 그렇겠지만 저에게는 정말 개그콘서트 무대가 절박했어요.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을 해도 자신의 주 무대에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늘 힘들었거든요. 원래는 이 코너가 2년 전에 다른 분과 만든 코너였어요. 그때도 제가 오랜 공백기 때였는데, 검사 맡으면 반응은 좋은데 통과가 안 되는 겁니다.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런 기다림 끝에 된 거거든요. 첫 녹화를 마치고, 마지막에 인사를 하는데 고개를 못 들 정도로 눈물이 떨어지더라고요. 너무 원했던 무대에, 제가 원하는 코너로 다시 섰다는 게 찡한 거예요.

“김영희는 개그계의 홍수환이다.” 동료 개그맨 허경환은 한 방송에서 그녀를 그렇게 표현했다. 네 번 쓰러지고 다섯 번 일어나 승리한 전설의 복서 홍수환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악바리 같은 끈기와 근성을 말한 것이다.

동네 개그맨이라 불릴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끼가 많았던 김영희가 본격적으로 개그맨이라는 꿈을 갖게 된 것은 대학 졸업 후였다. 그녀 안의 개그 본능이 자연스레 개그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시작도 좋았다. 2010년 KBS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한 그해 개그콘서트 <두 분 토론>으로 KBS 연예대상 코미디부문 여자 신인상과 최우수 아이디어상을 수상한 것.

하지만 그녀에게도 몇 번의 슬럼프가 찾아온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2011년 <두 분 토론>이 끝난 후 찾아온 9개월간의 긴 공백기였다고 한다. 끊임없이 새 코너를 짜 검사를 맡았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끈질기게 놓지 않은 건 개그에 대한 열정이었다. 코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그콘서트 회의실에 나가서 매일매일 아이디어를 짜고, 검사를 맡고, 떨어지고, 좌절하고 다시 도전하고…. 그 기간은 개그맨 김영희를 넘어 한 인간으로서 그녀를 성장시킨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계속 도전할 수 있었던 의지는 어디서 나온 건가요?

좋아하는 거 같아요. 사실 제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뭐를 하겠다고 시작했다가 끝까지 한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도 저를 못 미더워하고, 저도 저를 못 믿고 살았어요. 그런데 개그는 이상하게 끝까지 하게 되더라고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흥미를 굳히고 나면서부터는 저한테는 안 하면 안 될 거 같은 존재가 돼버렸어요.

개인적으로 웃음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웃음의 힘을 느꼈던 적이 있나요?

일단 제가 시청자의 입장이었을 때 너무너무 웃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거 같애요. 고민을 하거나 슬플 때 등, 다른 감정에는 다 생각이 들어 있잖아요. 그런데 웃을 때만은 생각이 없어요. 웃으면서 “나는 이래서 웃는 거야” 생각하는 사람 없잖아요. 자연스레 웃으면서 거기에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게 웃음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제가 무대에 섰을 때는 제가 웃지는 않아도 보는 분들의 웃음을 받는 입장이잖아요. 받았을 때의 그 에너지도 이루 말할 수가 없죠. 한 주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더라고요.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가 올 수 있잖아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두 분 토론> 후 9개월간의 공백기가 있었을 때 정말 힘들었거든요. 저에게는 마치 9년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때 생각한 게 ‘나를 믿자’였어요. 내가 나를 안 믿고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그 시간들이 더 힘들어지는 거예요. 나를 믿지 못하면 모래알도 바위처럼 크게 느껴지거든요. 근데 나를 믿으면 바위가 다가와도 모래알처럼 여겨지는 힘이 생겨요.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음을 비우는 것이 최고의 극복법이었던 것 같아요.

마음을 비운다는 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면요?

내려놓는다는 건데, 그게 솔직히 힘들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용을 써도 안 되고 악을 써도 안 되는데 이렇게 안 될 거면 차라리 내가 행복하기라도 하자, 하면서 내려놨죠. 이 코너를 꼭 해야겠다는 욕심, 내가 꼭 무대에 서야겠다는 욕심… 그런 것들을 내려놓고 즐기려고 했어요. 그 즈음 새 코너들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도 개콘을 하다가 쉬고 있는 후배에게 이야기를 해요. 내려놓으라고. 내려놓고 그냥 놀라고. 뭔가 내려놨을 때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데, 내가 꽉 잡고 있으니까 그런 공간이 안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내려놓으면서 진짜 즐길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서울시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김영희씨와 양상국씨

그래서인지 무대 위에서 보면 항상 즐기는 거 같은 모습이에요.

솔직히 그런 여유가 이제 좀 생긴 거 같아요. 사실 처음 <두 분 토론> 할 때도 전혀 즐기지 못했어요. 첫 회만 좀 즐겼던 거 같고, 갑자기 큰 인기가 와버리니까 욕심이 생기고 일이 돼버린 겁니다. 무대에서는 그냥 놀아야 하는데, 뭔가를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트레스를 받고 병적으로 소재 찾고 대본에 매달리고. 스스로 매여서 스스로를 죄여가면서 사법고시 준비하듯이 해버린 거예요. 매 주를. 동료 신보라씨는 제가 ‘두 분 토론’ 할 때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하니까 놀라더라고요.

역시나 행복은 많이 가진다고 오는 건 아닌 걸까요.

돌아보면 오히려 대학로 소극장에서 식권 2장 받으면서 생활했던 개그맨 지망생 때 더 행복했어요. 그때는 꿈이 있었고, 즐겼으니까. 그런데 그게 일이 된 순간 못 웃기면 안 된다, 더 잘해야 한다, 그런 생각들로 제 마음이 꽉 찼어요. 아무것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고, 당연히 행복할 수가 없죠. 박영진 선배도 제가 힘든 기간들을 거치면서 변했다는 이야기를 하세요. 그 기간들이 있었기에 자만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거 같다고. 예전에는 앞만 보며 달려왔기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 보이는 거 같아요. 내가 뭐가 부족한지도 보이고. 그러면서 사람도 주변에 더 생기고, 예전보다 표정이나 이런 게 많이 편해졌다는 이야기도 들어요.

“아줌마 캐릭터를 파는 게 흥미롭고 재밌다, 지금도 하고 싶은 아줌마 캐릭터가 무궁무진하다”는 김영희씨는 데뷔 초부터 아줌마들을 연기해왔다. 고루한 정장에 단발머리, 뿔테 안경을 걸치고, 거침없이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두 분 토론>의 여당당 대표, 아주머니들이 떼 지어 등산복을 입고 등산 가는 모습에서 힌트를 얻은 <봉숭아학당>의 싱글 아줌마들 모임인 비너스회 회장, <끝사랑>의 김여사…. KBS 개그맨이 되기 전부터 아줌마 연기가 전담 마크였다고 하니, 그 역사는 더 오래된 셈이다.

새로운 캐릭터를 시도할 때마다 신기하고 재밌다는 그녀는, 엄마, 엄마의 친구들, 드라마, 영화 속의 아줌마들을 면밀히 관찰해, 말투부터 화장법, 의상, 몸짓 등 세밀한 부분까지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을 통해 배꼽을 잡게 만드는 아줌마들이 탄생했다.

항상 아줌마 역할을 하다 보니, 실제 김영희씨를 아줌마로 보는 인식도 많잖아요. 그런 이미지가 좀 걱정되지는 않나요?

일단 진짜 아줌마가 아니니까 개의치 않고요. 일상에서 오해는 많이 하시지만 좋게 생각해요. 그만큼 연기를 잘하고 있다는 거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TV에서 보는 것보다 실물이 더 낫네’ 이런 얘기도 많이 들으니까, 그것도 좋은 거 같아요. 제가 개그 시작하고 제 나이 또래의 캐릭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계속 연령대가 좀 있는 캐릭터를 해서인지 어머니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꽤 있어요. 팬레터를 보내주시는 분도 계시고 아이디어를 보내주시는 분도 계시고. 언젠간 아줌마들이 단체로 나오는 프로그램에 리포터로 갔는데, 난리가 난 거예요. 작가님이 제가 아줌마계의 소녀시대라고 할 땐 감사했죠. 팬에게 예쁜 도시락이나 이런 건 못 받아봤어도, 산지에서 보내주시는 고구마 감자 이런 거는 받아봤습니다.(웃음)

아줌마 캐릭터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일단 되게 인간적이지 않나요?

바쁜 현실 속에서도 로망을 찾고 사랑을 찾고 감성을 찾으면서 인간적인. 그리고 뭔가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해도 되는 게 좋아요. 한번은 제 뱃살 중간에 마이크 줄을 차서 상황을 연출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아줌마 캐릭터의 매력인 거 같아요.

가장 존경하는 롤모델로 신봉선씨를 꼽았는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또 그 외에도 특별히 힘이 되어주었다거나 존경하는 선배가 있다면요.

신봉선 선배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시청자 입장일 때부터 그 선배 개그를 보면서 많이 웃었죠. 꺼지지 않는 에너지가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개그맨이 되고 나서도 특별히 만날 일은 없다가, 개그콘서트 특집 때 처음으로 한 무대에 서봤어요. 정말 그 무한 에너지가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걸 정말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힘이 되어주신 선배는 많지만 특히 첫 코너를 같이 했던 박영진 선배에게 정말 감사해요. 그 선배는 후배 100명에게 물어봐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정도를 걷는 분이에요. 경상도 남자 스타일이라 말씀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가끔 제가 주눅 들어 있거나 자신감을 잃은 모습을 보이면 지나가면서 어깨 한번 꾹 눌러주고 가세요. 그런 무언의 격려가 일주일을 버티는 힘이 됐죠. 저도 그렇게 후배들을 챙기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개그를 하는, 어떤 개그맨이 되고 싶은지 말씀해주신다면요.

예전부터 모든 연령층에 통하는 개그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요즘은 너무 흐름이 빠르게 변하다 보니까, 엄마랑 같이 개그 프로를 보다 보면 방청객들이 왜 웃는 거야? 저거는 무슨 뜻이야? 줄임말만 나와도 못 알아들으니까 그런 질문을 하세요. 엄마는 이해를 못 하겠는데 방청객들은 웃으니까 괴리감이 느껴지시나 봐요. 저도 엄마가 웃으실 때가 제일 좋아서, 데뷔하기 전에도 그런 생각을 늘 했었어요. 엄마가 웃을 수 있는 개그를 하고 싶다! 실제로 제가 개그맨을 하면서 어머니 또래의 아주머니들을 웃길 수 있다는 게 좋더라고요. 엄마가 웃을 수 있는 개그, 더 나아가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웃을 수 있는, 그런 개그를 하고 싶어요.

방송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 만난 김영희씨는 아담하고 귀엽고 여성스러웠다. 패션, 네일아트, 퀼트 등에도 관심이 많다는 그녀는, 작년 <인간의 조건> 개그우먼 특집에 출연 ‘휴대전화와 쓰레기 없이 살기’라는 미션을 수행하며 뛰어난 손재주로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약간은 부정적인, 스스로에게는 약간 야박한, 잘 만족하지 못하는 완벽주의, 무엇이든지 일단 주어진 것은 열심히 하는 성격’ 덕분에 오히려 매주 안주하지 않고 더 좋은 프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김영희씨. 무대 위의 김여사일 때가, 사람들이 웃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녀는 천생 개그맨이었다. 인터뷰 말미 “앙대요~” 한 번만 해달라고 부탁하자, 조곤조곤 말하던 그녀에게서 갑자기 에너지 넘치는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웃고 살지 않음 앙대요~” “사랑하지 않음 앙대요~”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영희님은 대학 졸업 후 대학로 코미디극장에서 개그맨 지망생 생활을 시작합니다. 3개월 활동 후 2008년 OBS 공채에 합격하지만 개그 프로그램이 없어, 2009년 MBC 공채에 다시 도전, 합격합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신인들이 능력을 펼칠 기회는 얻기 어렵자, 2010년 KBS 공채 시험에 다시 도전, 데뷔를 하게 됩니다. 이후 KBS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 ‘두 분 토론’ ‘거지의 품격’ 등을 통해 웃음을 주었으며, 현재 <개그콘서트>, <인간의 조건>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실수는 잠시 멈춰 서나를 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거울입니다.

잊지 못할 소학교 2학년 때의 실수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잊음이 헤퍼지는 것을 스스로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의 일도 잘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이렇게 망각증에 시달리면서도 아득히 머언 60년 전의 한 가지 일이 별스럽게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 아마도 그때 그 일이 나의 여린 가슴에 너무나 큰 자극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인가 보다.

나는 다른 애들보다 한 살 먼저 학교에 들어갔다. 함께 놀던 소꿉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가니 나도 가겠다고 떼를 썼다. 일곱 살인 것을 여덟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학교에 붙은 것이다. 나이가 어리다 보니 바람이 거센 날과 비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가 학교 대문 앞까지 업어다 주시었다.

그런 철부지가 2학년에 올라간 여덟 살 때 선생님을 크게 노엽히는 일을 저지를 줄이야. 그때의 1교시는 조선어 시간이었는데 언제나 수업 전에 먼저 소고(小考)라는 작은 시험을 치러야 했다. 전날에 배운 것을 어느 만큼 아는가를 검사하는 시험인데 그날도 금자라고 부르는 처녀 선생님이 연필과 32절지 종이 한 장 준비하고 책가방은 책상 옆 교실 바닥에 내려놓으라고 하시었다. 그것은 교과서나 필기장을 보고 쓰는 부정행위(컨닝)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반급에서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은 나의 자리는 왼쪽으로 첫 번째 줄 제일 앞자리였다. 나는 시험 준비를 하고 나서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책가방을 나의 앞쪽 교실 구석에다 슬쩍 밀어놓았다. 그것으로 하여 그날 선생님은 대노하였고 나는 체벌을 받아야 했다. 책상 옆 교실 바닥에다 놓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선생님을 노엽혔던 것이다.

선생님은 죄꼬만 것이 돼먹지 못한 행실을 한다고 교단에서 내려오시더니 식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분필 꽁다리로 나의 이마를 아프게 문대놓고 또 귀를 잡아 비틀어놓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분부대로 책가방을 가져다 제자리에 놓고 책상에 엎드렸다. 아픈 것보다 억울해서 울었다. 원래는 “선생님, 전 훔쳐보지 않고서도 100점을 맞을 수 있습니다”라는 뜻으로 한 일인데 그만 선생님을 괄시하는 무례한 짓으로 되었던 것이다. 품성이 좋고 행실이 단정하다고 칭찬받던 내가 그만 딴짓을 하여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리하여 100점을 장담하던 그날 시험은 빵점이 되고 말았다.

그날부터 나는 금자 선생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이로 되었다. 그런데 그다음 학기에 금자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학교로 전근하였다고 했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선생님이 전근한 것을 은근히 좋아하였다. 만약 지금 이 세상에 금자 선생님이 생존해 계신다면 팔십 중반에 오른 파파 할머니로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소학교 2학년 때 저지른 큰 실수였다. 내가 오늘까지 그날의 잘못을 잊지 못하는 것은 철없는 여덟 살 적에 받은 체벌이 억울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한 번의 실수가 훗날 내가 성장하는 길에서 삶의 도리 하나를 깨우치는 경종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철학 개념으로 풀이하면 동기와 결과의 관계로서 아무리 좋은 동기도 결과가 나쁘면 나쁜 것으로 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좋은 주관 욕망이라 해도 그 행위 표현에 따라 상대방에게 엄청난 오해와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이다.

넘어지며 일어서며 살아온 인생길에서 내가 범한 실수가 어찌 한두 가지일까만 그중에서도 내내 잊지 못하는 어릴 적 실수는 오늘도 단순하고 유치했던 동년을 꼬집으면서 나더러 매사에 신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수란 조금만 조심하지 않거나 주의하지 않으면 생기는 잘못이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성장 과정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실수라는 것이 도꼬마리처럼 붙어 다닌다.

이 말은 결코 실수의 정당성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실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하여 실수를 자랑거리로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실수란 많이 하기보다 적게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실수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은 실수를 하고도 교훈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실수를 하고 교훈을 찾을 줄 안다면 실수를 적게 하면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해보는 말이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헬리코와 얼음산>
26×48cm. 종이에 오일. 1989.

그때 그 말은 큰 실수였다

정순옥 50세. 과외 교사.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월피동

정우를 처음 만난 것은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외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시작한 과외는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나는 밤늦게까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아이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최선을 다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엄마들의 입소문을 타서 실력 있는 과외 선생님으로 자리 잡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찾아왔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찾아온 정우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과외를 택한 것도 손자를 염려한 할머니의 결정이었고 아이는 마지못해 따라온 것이었다.

“선상님, 우리 정우 잘 좀 가르쳐주셔요. 얘가 천방지축 놀기만 하지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구먼요. 듣자 허니 영식이가 여기서 공부한다믄서요? 암쪼록 그렇게만 해주셔유.”

사실 공부라는 게 하루아침에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과외를 한다고 무조건 성적이 오르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영식이는 반에서 1등만 하는 아이인데. 솔직히 정우 같은 아이를 받았다가 기존의 아이들까지 괜히 빠지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도 됐지만, 할머니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정우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정우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어 혼자, 맨 마지막 시간에 가르치게 됐다. 그렇게 가르치면서 정우의 사정을 알아갔다. 엄마는 안 계셔서 대신 할머니가 키워주고, 아빠는 집 짓는 데서 일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우는 항상 자신의 환경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빠는 벽돌도 나르고, 무거운 쇳덩어리도 옮긴대요. 그래서 우리 아빠는 힘이 무척 세요.”

거리낌 없는 정우의 말에 나는 애틋한 마음이 생겨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은 언젠가부터 정우를 다른 아이들보다는 만만한 아이로, 평범한 가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은연중 차별을 두고 대하게 됐다. 게다가 정우 역시 자신은 꼴찌라는 사실에 그런 나의 차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듯했다.

또 쉬지 않고 이어지는 과외 시간의 마지막이다 보니 기운이 달릴 때도 있어 가끔은 숙제 검사만 하는 것으로 수업을 끝내기도 하고, 때로는 말을 듣지 않는다며 자로 손바닥을 치고, 한 번쯤은 거리낌 없는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럴 때면 정우는 시무룩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타나곤 했었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너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집 짓는 데서 벽돌 나르는 일 할래? 그보다는 집을 지으라고 시키는 일을 해야지. 그러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겉으로는 정우에게 공부에 대한 동기를 찾아준다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나중에야 그 말이 엄청난 실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은연 중 나는 정우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아빠에 대한 자부심도 조금씩 허물어지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우는 공부에 재미를 갖게 돼 성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더니 중학생 때는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했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내게 오지 않았다.

그 후 간혹 정우를 떠올릴 때면 한없이 미안해지곤 했다. 정우는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차별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또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훨씬 더 잘 자라난 정우는 아이들을 가정환경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정우에게 그렇게 말한 이후 한 번도 그런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작년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 우연히 정우를 만났다. 처음에는 건장한 체격의 낯선 청년이 먼저 인사를 건네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정우였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길가의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정우는 대학교에 다니다 작년에 군에 입대했는데 지금은 휴가를 나왔단다. 할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초등학생 정우와 맑은 웃음을 짓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우에게 미안하고 할머니께 죄송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좋다. 그리고 정우야, 아버지 말이야. 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너를 이렇게 반듯하게 키워주셨잖니? 그러니까 자랑스럽게 여겨야 해.” 혹시나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이 상처로 남아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렇게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나는 미안함을 그렇게 내비쳤다.

“그럼요. 아빠는 저에게 영원한 아빠예요. 예전과 좀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힘이 세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어요. 저에게 공부에 대한 재미를 갖게 해주셨거든요. 언제나 건강하세요.” 나는 대답 대신 정우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십수 년 묵혔던 미안함을 그제야 풀었다. 정우의 손이 거인의 손처럼 느껴졌다. 세상 모든 것을 감싸 안은 듯한 든든함으로.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피에로가 된 자파>
31.5×24cm. 종이에 오일. 1996.

초보 가위손 시절의 실수들

장미숙 50세. 주부. 서울시 송파구 송파대로8길

머리를 자른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앞머리가 많이 자라 있었다. 가보처럼 소중하게 모셔둔 가위들을 꺼내 살짝 다듬었더니 금방 눈앞이 시원해졌다. 가위를 치우려고 하는데 아들 녀석의 덥수룩한 뒷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다듬어준다고 하자 아들은 영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들을 의자에 앉혀놓고 이발 기계로 지저분한 뒷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아들은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이발 기계에 머리카락이 몇 올 뜯겼던 것이다. 가위는 괜찮은데 이발 기계는 그동안 묵혀둔 탓인지 영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다시 가위와 이발 기계를 닦아서 서랍 속에 소중하게 넣어두었다. 비록 앞으로 쓸 일이 없더라도 버리고 싶지 않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 나는 미용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스물여섯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기술을 익혔고, 수습 기간을 거쳐 어엿한 미용사가 되었는데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그 과정에서 저지른 잊을 수 없는 엽기적인 실수들은 지금도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내가 처음 취직한 미용실은 여대 근처에 있던 제법 큰 미용실이었다. 그곳의 주인이면서 제일 실력이 좋았던 미용사는 나보다 어린 남자였다.

초보 시절에는 가위를 드는 것보다 허드렛일을 더 많이 했다. 청소, 손님 머리 마사지며 머리를 감기는 일, 미용 기구를 정리하고 약을 바르는 일 등등. 그러다 보니 손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고 만져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미용사가 나에게 어떤 남자분의 커트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분은 단골손님이었는데 성격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위와 빗을 잡고 그분 곁에 서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애써 태연한 척 머리를 잘라나갔다. 거울 속의 손님 눈과 마주치면 더 떨릴 것 같아 외면했다. 손님도 내가 초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발 기계로 밑머리를 밀고, 가위로 쳐올려가며 마지막 마무리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커트를 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가위가 두 개 필요하다. 하나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데 사용하고, 하나는 틴닝 가위라고 숱이 많은 부분을 가볍게 해주고, 끝부분은 자연스럽게 골라주는 마무리용 가위이다. 그래도 바짝 긴장하며 조심했던 덕분에 대충 머리 모양이 나온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적이 안심을 했다. 그리고는 뒷마무리를 하기 위해 숱이 많은 뒷머리에 가위를 넣어 싹둑 잘랐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확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가위를 빼자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아닌가. 틴닝 가위로 숱을 골라야 할 부분을 그만 잘 드는 커트 가위로 한 움큼이나 잘라내 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손님 뒷머리에 웅덩이가 움푹 생겨버리고 말았으니….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어찌할 줄 몰라 괜히 뒷머리를 다듬는 척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미용사가 아직 멀었느냐면서 다가왔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미용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님, 우리 직원이 처음이라 실수를 했네요. 제가 다시 손질을 해드리겠지만 뒷부분이 약간 짧아질 것 같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무료로 해드릴 테니 이해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그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얼굴 표정은 밝지 못했다. 일이 다 끝나고 난 뒤 나는 남자 미용사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분에 그 뒤로는 다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용사가 되고 난 뒤 그보다 더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아니, 그건 실수라기보다는 한눈을 팔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여고생 커트를 하는 중이었는데 뒤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자꾸 말을 시키는 것이었다. 잠시 뒤를 돌아보며 손님 말을 거들었는데 “아얏!” 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여고생의 귀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다 가위로 귀를 살짝 건드렸던 것이다. 다행히 여고생은 단골손님인 데다 상처가 작아서 쉽게 마무리되었지만, 내 생애 가장 엽기적인 실수를 한 순간이었다. 그 외에도 고데기로 머리카락을 태워버린 일이며 자잘한 실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실수도 많이 하면 실력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덕분에 나의 미용 실력도 점점 늘어났다. 지금도 그때 그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감사하다.

어렵게 배웠던 미용 기술을 포기하고 평범한 주부로 살아온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되었다. 그러나 가위를 볼 때마다 그때 일들이 생각나 빙그레 미소를 짓게 된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내 이름은 스윗하트>
21×18.5cm. 종이에 아크릴. 2008.

월간 마음수련 6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와 함께한 작가는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1세대 앙드레 단(André Dahan, 1935~)입니다. 그의 동화책 <안녕, 꼬마 물고기> <피에로가 된 자파> <내 친구 달>은 프랑스 옥토곤상(1991), 앙굴렘 국제만화 대상 등 독일, 프랑스, 벨기에, 슬로바키아, 일본 등지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하였고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등에 꾸준히 초청되었습니다. ‘행복’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는 그의 작품은 인종과 천적, 시공간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을 전하며, 소소한 행복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앙드레 단의 한국 첫 개인전 <My Dear Friends- 앙드레 단 특별전>이 롯데갤러리에서 열립니다(4.30~5.23). 초창기 원화부터 앙드레 단의 도서 49권의 대표 원화, 판화 100여 점이 전시되며, 전시 진행은 앙드레 단이 평생 즐겨 썼던 친구(사랑), 달, 별, 해, 꿈, 성장이라는 소재들로 구성됩니다. 자료 제공 롯데갤러리 02-726-4456

실수는 잠시 멈춰 서나를 돌아보게 하는 또 하나의 거울입니다.

딸아, 실수불감증에 걸려 더 많은 용기 갖기를

남희한 34세. 항공 SW 엔지니어. 경남 사천시 정동면

이제 세 살이 되는 나의 첫딸아, 아빠는 가끔 햄버거 가게에 가게 되면 혼자서 실소를 머금는단다. 생각하면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우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는, 어느덧 3년이 다 되어가는 추억의 실수담 덕분에.

2011년 5월, 아빠와 엄마는 미국 파견 후 2개월 만에 처음으로 그랜드캐니언을 방문하게 된단다. 가는 도중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맥도날드에 들리게 되지. 당연한 얘기지만 미국에 있는 맥도날드이기에 그네들이 하는 말은 모두 영어였단다.

그곳에서 아빠는 주문을 하게 되지. 세트 메뉴 하나와 음료 하나를 주문하는 데 대략 10여 분 정도 걸렸던 것 같구나. 그네들과 아빠는 모두 영어를 썼지만 서로가 서로의 말을 100%로 이해하지 못했단다. 그네들의 갸웃거림의 횟수와 의문형의 질문들은 셀 수 없이 늘어갔고 아빠 뒤에 늘어선 사람들의 수도 그에 비례해 점점 늘어만 갔단다.

반복되는 Yes와 No의 외침 속에서 드디어 기나긴 주문은 끝이 났고 몇 분 후 아빠의 손엔 햄버거 세트 하나와 해피밀 세트 하나, 그리고 음료 컵 세 개가 들려 있었지. 아빠가 원했던 건 햄버거 세트 하나와 음료 하나였는데 말이지.

그것들을 받고 나니 바로 뒤에 선 한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킥킥거렸는지 알 것 같더구나. 주문한 상품을 받고 당황한 날 보곤 한없이 웃던 그 할아버지와 함께 아빠 역시 너무 허탈해 한참 동안 헛웃음을 흘렸단다.

그런데 그 기억이 떠오를 때면 안타까운 것이 “왜 저런 실수를 더 많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거란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저런 실수를 만들고 고치고 또 만들고 고쳤다면 영어든 뭐든 더 많이 배웠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는구나.

저 사건 이후 유사한 몇 가지 사건의 여파로 한 달여 동안 주문에 노이로제가 걸리다시피 했던 것 같다. 최대한 간단하게, 항상 주문하던 것으로, 그리고 되도록 교과서적으로 말해 줄 것 같은 백인에게…. 한동안 그랬던 것 같다. 다행히 또 다른 계기로 극복하긴 했지만 당시의 소극적인 태도는 1년 넘는 파견 기간 동안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불쑥불쑥 튀어나와 마음을 다잡고 적극적이던 아빠를 위축시키곤 했단다.

딸아.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한다. 크건 작건 좋건 나쁘건, 아빠는 그 실수들이 네가 좀 더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누구나 실수는 한단다. 그때 누군가는 실수에 겁을 먹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누군가는 실수에서 배우고 해결책을 찾아 ‘실수’를 ‘경험’으로 만들어버리지. 그러니 딸아, 부디 실수불감증에 걸려 많은 실수를 소중한 경험으로 만드는 용기가 샘솟길 바란다.

조금 더 나은 인생을 걸어가길 바라며. 아빠가.

p.s. “A Meal No. 8 and a Happy Meal, please~” 이 주문은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고 두 번째로 그랜드캐니언을 방문했을 때 했던 주문이란다. 정확하게 나왔지. 흠.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크리스마스 토끼>
32×48cm. 종이에 아크릴. 2000.

며느리의 실수에 대처하는 시어머니의 지혜

이명옥 56세. 장애인복지신문, 작은책 객원 기자

어느 해 정초였다.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을 살짝 놓치는 바람에 밥그릇과 냉면 대접이 깨지고 컵의 귀가 살짝 떨어졌다. 하필이면 떨어뜨린 밥그릇이 바로 시어머님 주발이었다. 당황해서 “어, 밥그릇이 왜 깨지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머니는 얼른 다가오셔서 내 손가락부터 살피신 후, 깨진 조각들을 살짝 들어내시곤 “어디 다친 데 없니? 다른 조각이 또 있나 봐라” 하시며 내 손가락을 재차 살피신다. 어머니는 손이 멀쩡한 것을 보시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깨진 그릇을 말없이 다용도실 한켠에 치우셨다.

결혼 후 나는,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못마땅해 보이기에 충분한 실수를 시도 때도 없이 저지르곤 했다. 바지에 휴지, 손수건, 동전이나 돈을 그냥 두고 세탁기를 돌리는 것은 다반사. 때론 휴대폰을 놓고 나오거나 버스카드를 잊고 안 가져가 시어머니가 지하철역으로 가지고 나오시게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우산을 들고 나갔다가 날이 개면 어김없이 우산을 지하철이나 어느 장소에 버려두고 빈손으로 덜렁거리며 온 적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덜렁거림이나 건망증에 속상해하며 안달하는 것은 내 자신이었고 시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을 하시며 나를 위로하시곤 했다.

“사람 무사히 들어온 것으로 된 거다. 우산이야 누군가 가져다 잘 쓰겠지. 잃어버려야 장사꾼도 먹고살지. 그런다고 잃어버린 우산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마라.”

실수로 그릇을 깨뜨렸을 때도 마찬가지셨다. 단 한 번도 “왜 그렇게 찬찬하지 못하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안 다쳤니? 그러면 됐다” 하셨다.

이미 저질러진 일을 가지고는 절대 야단을 치지 않으시는 시어머니. 내가 시어머니를 존경하는 몇 가지 이유 중 첫 번째가 바로 지혜로움이다. 삶에서 묻어나는 지혜로 가득하고, 부지런하시고, 남 험담을 하지 않으시며, 상대방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는 분이다. 결혼 후, 가난한 집 맏며느리인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가정 파탄의 위기를 여러 번 넘겼다. 그때마다 가정이라는 틀을 지키게 한 것은 아이와, 한없이 지혜로우신 시어머니였다.

내가 시어머니의 인품에 더 반하게 된 것은 시장을 같이 다니면서부터였다. 시어머니는 장을 보실 때 절대 물건값을 깎아달라거나 덤을 요구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한 주먹 더 얹어주려 하면 “그렇게 더 집어주면 뭐가 남겠느냐”며 손사래를 치시곤 하셨다.

그렇게 지혜로운 어머니와 20년을 넘게 살면서도 난 여전히 아들아이가 실수라도 할라치면 금세 “야, 너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거야?” 혹은 “너 그렇게 덜렁거릴래?”라며 야단을 치거나 똑같은 잔소리를 해대곤 하니 인생 수업 열등생인 셈일까?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어머니의 지혜를 닮아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날을 꿈꿔본다.

요즘은 어머니가 연로하셔서 거동도 불편하시고, 자주 편찮으셔서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 그 지혜 모두 배워 저도 지혜로워질 때까지 오래 건강하셔야 해요.”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1학년 달>
31.5×49cm. 종이에 아크릴. 2014.

실수를 통해 알게 되는 그 사람의 온기

이영미 55세. 서예가, 사회복지사. 충북 청주시 흥덕구

어릴 적 앓았던 병으로 나는 청신경장애를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언젠가부터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지 않으면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증세까지 같이 겪게 되었다. 그래서 10년을 가르치거나 20년을 아는 관계라 해도 며칠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아니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수십 번 다녀왔지만 아직도 엄마와 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오직 한 개만 있는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도 매주 쓰지 않으면 외우지 못한다. 부모님 기일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생일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게 없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한번은 비영리민간단체 대표가 되어 방콕으로 출장을 갔을 때였다. 꼭두새벽 4시에 청주에서 출발해서 인천공항에 갔다. 그런데 아뿔싸! 여권을 놓고 와버렸다. 동행들은 예정대로 탑승해서 출장을 갔지만 내 비행기 표는 취소하고 그날 마지막 비행기 표를 다시 예매했다. 안 그래도 일행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무처 직원들은 나 때문에 더욱 분주해졌고 나는 여권을 가지러 다시 인천에서 청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몇 시간 후 비행기에 올랐다. 방콕에 먼저 간 일행은 나를 세미나장으로 안내할 사람을 섭외해서 보내주었다.

‘WELCOME! 이영미!’ 그들은 이렇게 영어와 한글이 함께 쓰인 큰 피켓을 들고 공항에 나와 있었다. 행사를 준비하는 주최 측에서도 나 때문에 신경을 쓴 셈이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럽고 미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세 평안해진 것은 건망증으로 인한 내 실수에 대해서 아무도 개의치 않고 모두들 그런 경험이 있다고 토닥거려준 것이다. 그 경험으로 인해서 여권에 관해서는 건망증이 재발하지 않게 되었다.

한 번은 문하생들이 전국 공모전에 내는 작품을 열 개 정도 넘겨받았다. 가로 140센티와 세로 70센티의 작품들이었는데 마감을 끝낼 때 작품을 선별해주고 내 딴에는 도와준다고 내가 이왕에 가는 김에 작품을 접수하려고 작품과 원서와 출품비를 받았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마트로 가서 시장을 보았다. 마트의 빨간 카트에는 작품들이 들어 있는 긴 비닐종이와 부식들이 담겼다. 나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고 분주히 저녁을 만들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뭔가 허전했다. 아뿔싸! 작품 열 개를 모두 카트에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부랴부랴 마트로 다시 갔고 마트의 분실물 보관소와 폐지를 버리는 청소함 모두 샅샅이 뒤졌으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주최 측에 사정 이야기를 하고 마감을 하루 늦춰달라고 했고, 문하생들에게도 연락해서 차선 작품을 가지고 오게 하거나, 하루 더 작품을 제작해서 가지고 오게 했다. 그렇게 해서 열 명이 다시 작품을 만들어서 무사히 제출했는데 두고두고 미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문하생들은 내 실수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었다. 내 마음의 온기를 알아주는 문하생들은 때로는 나의 울타리가 되기도 하고 스승의 역할도 한다. 서로의 실수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것은 마치 허리 잘린 산도 보듬어 안고 날마다 변하는 달도 품는 호수처럼 서로가 아직도 따스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 같아 무척 고맙다.

실수란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거울처럼 반영해주고,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집중하고 노력하게 해주는 아주 쓰지만 고마운 감초 같은 것이다. 또 나의 실수 또는 타인의 실수로 인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좀 더 진솔하고 돈독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일상적으로 일으키는 건망증이 없어지기를 그렇게 바라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생기는 건망증과 내 신체적 장애 때문에 생기는 기억 장애가 어떻게 다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애로가 있는 현실로 인해서 나는 반복 학습을 쉼 없이 하고, 그 덕분에 나도 모르게 이러한 반복 행동은 일상적인 습관이 되어 내 삶의 목표를 향해 제대로 가는 거름이 되고 있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카밀라의 꿈>
24×35.5cm. 종이에 유화. 1989.

재산이 된 나의 실수들

최정숙 43세. 음식점 운영. 대구시 남구 대명3동

농사일로 바쁜 엄마를 도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일찌감치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들에 나가 피곤해할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저녁이라도 지어놔야겠다고 마음먹은 어느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밥은 했는데 반찬은 무얼 할까 고민을 하다 남은 감자조림 반찬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름 연구를 해서 똑같이 만든다고 만들어 보았다. 처음 만든 것치고는 그럴싸한 모양새에 나름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맛보시던 아버지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으니 간이 하나도 안 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금이나 간장으로 한 간은 눈에 안 보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도전 정신만큼은 높은 점수를 받았다.

중학생 때였다.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해서 마늘 심는 날이라고 수업 마치는 대로 일찍 오라는 당부가 있었던 토요일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집에 와보니 새참으로 내어갈 모양인 칼국수가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삶아 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엄마는 한창 일하느라 바쁠 테니 내가 끓여 가야겠다 싶어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국수 삶기에 돌입했다. 국수가 삶아지면 양이 많아져 물을 넉넉하게 부어 끓여야 한다는 사실을 중학생이 어찌 알았겠는가. 삶고 보니 많아 보이던 국물은 다 어디로 갔는지 국수만 찜통 가득이었다. 그래도 알아서 국수도 다 삶아 온다고 엄마가 대견해하시리라 생각하며 국수가 가득 담긴 찜통을 들고 논을 향해 걸어갔다. 중간쯤 갔을 무렵 바쁜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오는 엄마를 만났다.

“엄마~ 국수 삶으러 가? 갈 필요 없다. 내가 벌써 다 삶았다. 한번 봐라.” 득의양양한 내 표정은 아랑곳 않고 미심쩍음 가득한 얼굴로 찜통을 열어본 엄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가 니보고 국시 삶아 오라 하드나? 내가 삶으러 가는데 뭐하러…. 다 망쳐놨네, 국물은 다 어디 갔노? 할 수 없다. 뭐 지금 우짜겠노. 더 퍼지기 전에 빨리 가자.”

칭찬을 기대했던 나는 원망만 잔뜩 듣고 순간 서운함에 울 뻔했지만 하는 수 없이 엄마 뒤를 따라 논으로 갔다. 한창 배고플 시간에 국수를 한 그릇씩 받아 든 동네 아주머니들께서는 시무룩해 있는 나를 향해 “숙아~ 맛있다 맛있어. 우리 숙이는 우예 못하는 기 없노. 그라고 젓가락 쓸 필요도 없고 숟가락으로 떠먹으마 되고 좋다 좋아.” 이러시며 한바탕 웃음으로 위로해 주셨다.

고등학생 때였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살림까지 도맡아 하며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한번은 식혜를 어떻게 하느냐고 엿질금 물을 밥통에다 붓고 취사 버튼을 누르는지 보온 버튼을 누르는지 모르겠다며 묻는 것이었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취사 버튼을 누른다고 말해주었다. 엄마가 자주 식혜를 만드시는데 그렇게 하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했다.

다음 날 친구는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방 안 가득 흘러넘친 엿질금 물이랑 밥알을 닦아내느라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했다고 했다. 친구한테 미안했다.

이 에피소드 말고도 음식과 관련된 나의 실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른다, 못한다 하며 몸을 사리기보다 한번 해보지 하며 도전하다가 생긴 실수들이다 보니 다음에 할 때는 더 잘하게 되었고 요리를 하며 살아가는 나의 삶에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앙드레 단 André Dahan 작.
<안녕, 꼬마 물고기>
29.7×21cm. 종이에 오일. 1989.

월간 마음수련 6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와 함께한 작가는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1세대 앙드레 단(André Dahan, 1935~)입니다. 그의 동화책 <안녕, 꼬마 물고기> <피에로가 된 자파> <내 친구 달>은 프랑스 옥토곤상(1991), 앙굴렘 국제만화 대상 등 독일, 프랑스, 벨기에, 슬로바키아, 일본 등지에서 다양한 상을 수상하였고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등에 꾸준히 초청되었습니다. ‘행복’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는 그의 작품은 인종과 천적, 시공간을 뛰어넘는 우정과 사랑을 전하며, 소소한 행복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앙드레 단의 한국 첫 개인전 <My Dear Friends- 앙드레 단 특별전>이 롯데갤러리에서 열립니다(4.30~5.23). 초창기 원화부터 앙드레 단의 도서 49권의 대표 원화, 판화 100여 점이 전시되며, 전시 진행은 앙드레 단이 평생 즐겨 썼던 친구(사랑), 달, 별, 해, 꿈, 성장이라는 소재들로 구성됩니다. 자료 제공 롯데갤러리 02-726-4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