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말은 큰 실수였다
정순옥 50세. 과외 교사.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월피동
정우를 처음 만난 것은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과외를 하고 있었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시작한 과외는 당장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나는 밤늦게까지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아이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최선을 다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엄마들의 입소문을 타서 실력 있는 과외 선생님으로 자리 잡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찾아왔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찾아온 정우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과외를 택한 것도 손자를 염려한 할머니의 결정이었고 아이는 마지못해 따라온 것이었다.
“선상님, 우리 정우 잘 좀 가르쳐주셔요. 얘가 천방지축 놀기만 하지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구먼요. 듣자 허니 영식이가 여기서 공부한다믄서요? 암쪼록 그렇게만 해주셔유.”
사실 공부라는 게 하루아침에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과외를 한다고 무조건 성적이 오르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영식이는 반에서 1등만 하는 아이인데. 솔직히 정우 같은 아이를 받았다가 기존의 아이들까지 괜히 빠지는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도 됐지만, 할머니의 간절한 눈빛에 나는 정우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정우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할 수 없어 혼자, 맨 마지막 시간에 가르치게 됐다. 그렇게 가르치면서 정우의 사정을 알아갔다. 엄마는 안 계셔서 대신 할머니가 키워주고, 아빠는 집 짓는 데서 일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우는 항상 자신의 환경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빠는 벽돌도 나르고, 무거운 쇳덩어리도 옮긴대요. 그래서 우리 아빠는 힘이 무척 세요.”
거리낌 없는 정우의 말에 나는 애틋한 마음이 생겨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은 언젠가부터 정우를 다른 아이들보다는 만만한 아이로, 평범한 가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은연중 차별을 두고 대하게 됐다. 게다가 정우 역시 자신은 꼴찌라는 사실에 그런 나의 차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듯했다.
또 쉬지 않고 이어지는 과외 시간의 마지막이다 보니 기운이 달릴 때도 있어 가끔은 숙제 검사만 하는 것으로 수업을 끝내기도 하고, 때로는 말을 듣지 않는다며 자로 손바닥을 치고, 한 번쯤은 거리낌 없는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럴 때면 정우는 시무룩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타나곤 했었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할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너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집 짓는 데서 벽돌 나르는 일 할래? 그보다는 집을 지으라고 시키는 일을 해야지. 그러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겉으로는 정우에게 공부에 대한 동기를 찾아준다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나중에야 그 말이 엄청난 실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은연 중 나는 정우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아빠에 대한 자부심도 조금씩 허물어지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정우는 공부에 재미를 갖게 돼 성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더니 중학생 때는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했고,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내게 오지 않았다.
그 후 간혹 정우를 떠올릴 때면 한없이 미안해지곤 했다. 정우는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차별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또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훨씬 더 잘 자라난 정우는 아이들을 가정환경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정우에게 그렇게 말한 이후 한 번도 그런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작년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다 우연히 정우를 만났다. 처음에는 건장한 체격의 낯선 청년이 먼저 인사를 건네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정우였다.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 길가의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정우는 대학교에 다니다 작년에 군에 입대했는데 지금은 휴가를 나왔단다. 할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초등학생 정우와 맑은 웃음을 짓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우에게 미안하고 할머니께 죄송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좋다. 그리고 정우야, 아버지 말이야. 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너를 이렇게 반듯하게 키워주셨잖니? 그러니까 자랑스럽게 여겨야 해.” 혹시나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이 상처로 남아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렇게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나는 미안함을 그렇게 내비쳤다.
“그럼요. 아빠는 저에게 영원한 아빠예요. 예전과 좀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힘이 세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어요. 저에게 공부에 대한 재미를 갖게 해주셨거든요. 언제나 건강하세요.” 나는 대답 대신 정우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십수 년 묵혔던 미안함을 그제야 풀었다. 정우의 손이 거인의 손처럼 느껴졌다. 세상 모든 것을 감싸 안은 듯한 든든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