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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부부가 함께 등산하면 좋은 점 몇 가지

몇 달 전부터 아내와 함께 등산을 합니다. 멀리 가는 건 아니고 인근 산들을 다닙니다. 새벽에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해서 쉬엄쉬엄 산을 오릅니다. 그러다 경치 좋은 곳이 나오면 자그마한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나눠 먹습니다. 그리고 자그마한 바위에 기대 보온병에 담아온 따스한 커피 한잔을 먹습니다. 정상까지 갈 때도 있고 굳이 힘들면 중간에서 그냥 쉬엄쉬엄 내려올 때도 있습니다.

내년이면 결혼 20년 차 부부의 주말 둘만의 산행 이야기에 결혼 4년 차 후배가 연신 부럽다며 소주 한잔을 따라줍니다. 후배 눈에는 중년 부부가 주말에도 같은 취미 생활을 하는 게 이상적으로 보였나 봅니다. 그런 후배에게 우리 동네 선배 형은 형수와 같이 사이클을 타기 위해서 요즘 형수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준다는 말도 해주었습니다.

후배 녀석이 앞에 소주잔을 들고 고개를 한번 갸웃하며 부부가 나이 먹으면 따로 노는 줄 알았더니 다들 재밌게 산다며, 자기도 나이 먹으면 꼭 같이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소주 한잔을 시원하게 비웁니다.

후배 화니야~~ 자, 그럼 이제부터 네가 부러워하는 우리 동네 중년 부부들의 실상을 이야기해줄게. 먼저 우리 부부. 아내와 등산 다니면 좋은 점 딱 4가지만 얘기해줄게.

첫 번째, 산에 가면 주말 보내는 데 딱히 돈이 안 들어. 등산화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올라가서 시간 때우기 딱 좋아.

둘째, 최소한 산에 있는 동안만큼은 싸울 일이 없어. 싸움도 힘이 있어야 하지. 숨차고 힘들어서 못 해.

셋째, 서너 시간 길게는 대여섯 시간 같이 있는데 대화가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 딱 산이다. 이 점이 난 제일 좋아.

넷째, 산에 갔다 오면 니 형수 아주 잘 자~. 밤까지 쭈욱~~~. 그래서 가끔은 아주 멀리 돌아서 내려올 때도 있어.

그리고 동네 형님 이야긴데, 형수가 며칠 전 맥주 한잔하면서 한탄을 하더라고. 우리 남편이 21년 전 연애할 때 자전거를 한번 가르쳐준다며 뒤에서 나를 안고 태워주기도 하고 그 더운 여름날 졸졸 따라다니며 한 시간이나 자전거 중심 잡아주며 연신 천천히 천천히, 조심 조심을 외치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디 다친 데 없냐고 난리가 났던 사람이 며칠 전 몇 십 년 만에 다시 자전거 가르쳐주면서 내가 잡아주는 거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넘어지니까 저 멀리 그늘에 앉아서 딱 한마디 하더래. “일어나~~~”

말이 짧은 거 같다고 째려봤더니 한마디 더 해주더래. “인나~~” 우리 나이 때가 아내 자전거 가르쳐주기 참 편한 나이란 걸 나도 새삼 깨달았단다.

이러면서 왜 굳이 같이 다니냐고? 내년이면 결혼 60주년을 맞이하시는 우리 부모님도 아침마다 같이 집 앞 신학대 운동장으로 운동을 나가시는데 집에서 가끔 내려다보고 있으면 두 분이서 걸음 속도도 비슷하신데 같이 안 걸으시고 항상 반대편에서 돌아. 언뜻 보면 동계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처럼 정확히 반대편에서 마주치시지. 그래서 하루는 아버지에게 두 분이 나란히 좀 걸으시지 왜 그렇게 떨어져 걸으시냐고 물었더니 아버지 하시는 말씀이 “이 나이 되면 같은 하늘 아래서 숨 쉬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뭘 더 바라냐!”

그래도 다음 말로 이 말은 꼭 하시더라고. “그래도 지지고 볶든 뭘 해도 부부끼리 같이 하라”고. “편하자고 따로 놀면 한도 끝도 없다”고.


백일성(44)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이웃집이 도서관이자 북카페 ‘똑똑도서관’

취재 문진정

경기도 파주시의 한 아파트에는 건물도, 대출증도, 책 반납일도 없는 도서관이 있다. 이웃집의 대문을 ‘똑똑’ 두드리고 책을 빌려가는 이른바 ‘똑똑도서관’이다.
아파트 입주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공유하고 싶은 책 목록을 도서관 홈페이지에 올릴 수 있는데, 그러면 우리 집이 곧 도서관이 되고 나는 곧장 ‘사서’로 임명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용자는 편한 시간에 ‘똑똑’ 문을 두드리고 책을 빌려 가면 된다. 그렇게 이웃의 얼굴을 알고, 차를 함께 마시고,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점점 두터운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똑똑도서관 ‘관장’은 아파트 주민 김승수씨.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한 그는 몇 년 전 학생들에게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라는 과제를 내주면서, 본인 스스로도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36세의 젊은 나이로 동 대표와 아파트 입주자 대표 회의장에 출마하게 된다. 2년간의 임기를 성실히 마친 후 한 가지 미해결 과제로 남았던 것이 바로 도서관 건립. 이를 위해서 김승수씨는 자신의 집에서 콘퍼런스를 열고, 지인의 아이디어였던 ‘똑똑도서관’을 아파트에 적용하게 된 것이다.

현재 도서관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집은 20여 가구. 게다가 요리, 리본공예, 냅킨아트 등 주민들이 가진 재능을 자발적으로 나누는 ‘리빙 라이브러리’ 강좌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맨얼굴에 슬리퍼 차림으로 개최되는 콘퍼런스, 남편이 출장 간 집에서 열리는 리본공예 수업과 요리 워크숍…. 평범한 ‘아줌마’들은 서로의 공간과 재능을 나누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하다 보니 실력이 늘어 리본 납품도 하고, 요리 대회에도 출전하기에 이르렀다. 타지로 이사 가도 돌아오고 싶은 고향 같은 아파트, 더 이상 CCTV가 필요 없는 안전한 아파트를 만드는 법은 결코 어렵지 않다. 옆집 아이 이름을 알고, 윗집 아랫집을 똑똑 두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똑똑!

‘똑똑도서관’의 아이디어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개최한 시민교육박람회에서 최우수상(2012), 우수상(2013)을 수상했다.

김승수 관장 이야기

알고 보면 똑똑도서관이라는 것도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해오던 방식이에요. 한 집에 모여 뜨개질하고, 마당에서 수박도 먹고, 물건도 빌려주고요. 그런데 요즘엔 워낙 이웃 간에 소통도 없는 데다, 평범한 이웃도 혹시 범죄자가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신뢰가 무너지다 보니, 소소한 일도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똑똑도서관이라고 해서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예를 들어 여자 친구를 만날 때 뭘 좋아할까, 어떤 모습이 예쁜가, 관찰하고 관심 가지면 더 관계가 좋아지는 것처럼 내가 사는 동네도 뭐가 필요할까,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을까, 탐색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우리 동네에 맞게 적용시켜 보는 거죠. 꼭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원룸에서도, 대학교에서도 할 수 있고, 뭐든 나눌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똑똑도서관입니다.

앞으로도 동네 사람들과 함께할 일들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광장에 그랜드피아노를 설치하고 동네 피아노 학원 원장님의 음악회를 여는 겁니다. 귀뚜라미 소리 들리는 가을 저녁에, 우리 동네 아티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그 기억이 정말 좋지 않을까요?

크고 화려하다고 좋은 아파트가 아니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사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4년간 주민들과 함께하면서, 네 것 내 것이 없어지고, 이웃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먼 미래보다는 오늘 하루하루가 즐거운 일들을 탐색하고 만들어왔듯이, 여러분도 이웃을 알아가고, 믿으면서 똑똑도서관 문화 운동을 시작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그런 이웃이 있다면 일상에서 많은 변화가 생겨날 테니까요. 다음에 있을 ‘똑똑도서관 전국 관장단 회의’에서 만나 뵙길 기대하겠습니다.^^

50년 어깨 통증 고쳐준 고마운 한의사

제가 이렇게 펜을 들게 된 것은, 고마운 한의사 한 분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 한의사를 만난 건 논산에 있는 마음수련 메인센터에 명상을 하러 가서입니다. 2년 전, 상처를 하고 홀로 된 제가 안쓰러웠던지 딸이 권해서 마음수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 비우니 좋고, 공기 좋고, 풍경 좋은 곳이었지만, 허리와 왼쪽 엉덩이, 다리까지 저리고 아파서 앉아 있어도 서 있어도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욱신욱신 저리는 게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아파, 자다가도 일어나 제 손으로 꼬집어가며 뒤척거리기를 몇 년이었습니다.

그러다 올봄, 수련원 가까이에 병원이 하나 생겼는데 한방과도 있다고 해서, 침이나 맞아볼까 하고 갔습니다. 사실 그 사이 물리치료도 받고 한의원에도 다녀보고 했지만 며칠 괜찮다가 다시 아프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그리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는데, 30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 한의사가 활짝 웃으며 맞아주었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여기가 아프고 저기가 아프고 한참 하소연을 했는데, 어찌나 잘 들어주던지, 얘기를 하는 동안 벌써 마음이 좋았습니다. 그리고는 진료를 하며 여기 아프시죠? 여기도? 여기도? 하며 꼭꼭 누르는데, 어찌나 아픈 데를 정확하게 짚으며 침을 놓던지, 안심이 확 되면서, 순간 ‘아이고, 내가 이제야 제대로 의사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2주 정도 치료를 받고 나자 씻은 듯이 다 나았지 뭡니까. 몇 년 동안 아파서 고생하던 것이 2주 만에 다 나으니, 하도 신기해서 왼쪽 어깨 통증도 얘기를 해보았습니다.

사실 어깨가 아픈 것은 50년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지게를 졌고, 군 제대 후부터는 쌀가게 일하느라 쌀가마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후에는 중동으로 나가 기능공으로 지냈는데, 30대가 되면서 통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이 들수록 심해졌고 점점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여러 병원에서도 못 고쳤고, 온갖 것을 다 해보아도 낫지를 않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예 말도 안 했던 것입니다.

‘이소열 과장님, 내 병을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소열 한의사님께는 이호담님의 마음을 담아
꽃바구니를 보내드립니다.

그런데 그 한의사께서는 제 얘기를 다 듣고 아픈 부위를 만져보더니, “침으로 고쳐보죠, 어르신 걱정 마세요, 고쳐드릴게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벌써 기분이 좋았습니다. 또 한 번 나은 경험이 있으니, 어쩌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침 치료를 시작했는데 이틀 만에 통증이 없어져 잠을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20일 정도 계속 치료받고 침 맞고 어깨 통증이 정말 신기하게도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믿어지지가 않아 어깨를 돌려보고, 만져보고, 물건을 들어보고 해보았는데 정말 아프지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남은 날들은 내가 이제 어깨 통증 없이, 안 아프게 살 수 있구나 싶으니, 눈물이 핑 돌면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환자는 아무래도 의사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소연도 하게 되는데, 그럴 때 말문이 막히게 하고 눈치를 보게 하는 의사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언제나 편안히 대해주니, 늘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치료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나을 수 있다는 믿음도 더 생기는 것 같아, 의사가 얘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환자는 병이 10분의 1은 낫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소열 과장님, 너무 고마워서 평생 못 잊을 겁니다. 갈 때마다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해주고, 정성스럽게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호담 79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신길동

가드닝의 즐거움 베스트 3

얼마 전 모 잡지사의 요청으로 화초 키우기 블로거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가드닝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아이디만 듣고도 ‘아, 그 사람!’ 하고 알 수 있을 정도로 고수들이었는데, 저도 운 좋게 한자리 차지할 수 있었지요. 그곳에서 ‘가드닝에서 얻는 가장 큰 즐거움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참석자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꼽은 답변, 베스트 3입니다.

1 자존감을 높여준다.

무한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서로 너무 바쁘고 또 주변엔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 집 화초들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이 세상에 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위로를 준다.

2 자연의 섭리에서 배우는 게 많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화초를 키우는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키우고 있다. 그들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면 계절에 따른 자연의 섭리 앞에 저절로 겸손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무엇이든 남보다 앞서고 싶고 빨리 해내고 싶은 나의 욕심은 고개 숙이게 되고, 억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때가 되어야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당연한 진리를 진심으로 알게 된다. 어느 사이 내 삶에 깊은 여유와 평화로움이 깃든다.

3 긍정적이고 밝아진다.

맨손으로 흙을 만지고 분갈이를 하고, 이리저리 화분 배치를 하는 동안, 잡념은 사라지고 내가 마치 식물의 일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화초들에게 흠뻑 물을 뿌려주고 나면 심신이 말갛게 씻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 흙냄새, 화초 잎에 맺히는 물방울, 새로 돋아나는 어린 싹들 덕분에 기분이 한층 가벼워지고, 나에게 스트레스를 준 상황도 나를 힘들게 한 사람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하는 너그러움이 덤으로 따라온다. 덕분에 나는 더욱 힘찬 모습으로, 더 환한 웃음으로 사람들에, 일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퇴근길에 가까운 꽃집에 들러 작은 식물 하나 골라 보세요. 녀석과의 동거가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아시게 될 거예요. 우리 서로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달라도 근본은 하나라는 것, 그래서 함께 있음이 천국이라는 것. 여러분 모두 해피 가드닝 하시길 바랍니다.^^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홍옥과 아버지의 편지

박신연 & 그림 최정여

아직도 보기만 하면 가슴이 저리는 먹을거리, 바로 ‘홍옥’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전 무던히도 부모님 속을 썩이던 문제아였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학생 신분으로는 가서 안 될 곳을 드나들었고 가끔씩은 술, 담배도 입에 대며 어른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귀가하는 일이 잦아지자,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하던 아버지는 어느 날 그간 눌러왔던 화를 한꺼번에 폭발시키셨습니다.

늦은 밤 살금살금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더니 그때까지 딸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가위를 들고 제 머리를 싹둑싹둑 자르신 겁니다. 워낙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전 반항 한번 못 해보고 그냥 쥐 파먹은 머리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한 달 정도 모자를 눌러쓰고 학교에 다녔는데, 그런 제 모습을 보자니 아버지 마음이 몹시도 아프셨나 봅니다.

하루는 친구와 통화하던 중 “난 사과 중에 홍옥이 제일 좋더라. 백설공주가 먹은 사과가 홍옥이었을 것 같지 않니?” 하고 수다를 떨었는데, 다음 날 책상에 빨간 홍옥 3개와 아버지의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아, 그날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네 머리를 그렇게 해놓고 이 애비가 얼굴을 똑바로 못 보겠구나. 거칠었던 애비 행동은 잊어버리고 너를 진정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애비 마음만 알아다오.”

철없는 딸은 어느새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수다나 떨고 있는데, 한 달이 넘도록 마음 아파하며 딸의 마음이 다쳤을까 봐 염려했던 아버지. 가슴이 뻐근해져왔습니다. 그 이후였을 겁니다. 반항과 방황을 그만두고 착실한 학생 신분으로 돌아온 것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도 어언 14년, 전 고등학생 딸을 둔 엄마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내 마음과 달리 어깃장을 놓을 때, 어느새 컸다고 엄마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행동할 때, 그 옛날 늦은 밤마다 딸의 귀가를 기다렸을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여름이 끝날 무렵, 재래시장 좌판에 나온 빨간 홍옥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 봉지씩 사다가 한동안 식탁 위에 얹어놓곤 합니다. 자식을 바른 길로 이끌려고 단 한 번 무리수를 쓰긴 했지만 여리디여린 마음에 혼자 가슴앓이했던 아버지를 두고두고 그리워합니다.

트루스 허브 씨앗 컵

● 이름은?

‘씨즈 오브 트루스Seeds of Truth’. 남아프리카 로스팅 커피 전문 브랜드 ‘트루스’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일회용 컵이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요즘 일회용 커피 컵의 소비량은 엄청나다. 개인이 사용하는 테이크아웃 컵은 일 년에 1톤의 쓰레기를 만드는데, 한마디로 30제곱미터의 숲을 없애고, 10킬로그램의 이산화탄소량을 발생시키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회용 커피 컵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방법, 친환경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트루스’ 커피와 합작하여 새로운 일회용 컵을 발명하게 되었다.

● 제품의 기본 원리는?

컵을 감싸고 있는 컵홀더에 바질, 로켓(루꼴라) 등 한 종류의 허브 씨앗을 넣었다. 커피를 다 마신 후 씨앗이 들어 있는 컵홀더를 마구 구겨서 컵 속에 넣고, 흙 한 삽과 물을 넣어주기만 하면 허브 씨앗 심기가 끝난다. 그리고 커피를 젓는 막대기를 꽂아주면 되는데 이 막대에는 어떤 허브인지 알 수 있도록 이름이 쓰여 있다. 이대로 며칠만 기다리면 허브 싹이 돋아난다. 허브를 더 오래 키우고 싶다면 컵째 땅에 심어주기만 하면 된다. 컵은 생분해 가능한 재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100% 흙으로 되돌아간다.

●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우리는 환경이 오염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커피를 아예 사 먹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 대신, 사람들 스스로 탄소발자국을 줄일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친환경적이고 신선한 분위기의 개인 허브 정원을 만들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그래서 일회용 컵의 단순한 재활용을 넘어서 컵, 컵홀더, 커피 스틱의 용도를 현실에서 탈바꿈시키는 방법을 연구했고 사람들이 소장하고 싶고 친환경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도록 컵 디자인에도 신경 썼다.

● 하고 싶은 말은?

한정판으로 나온 이 컵은 지난 5월 말부터 트루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점에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후 SNS, 잡지 등을 통해 전 세계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사람들이 이 커피 컵에 씨앗을 심는 경험을 해보면서 작은 변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생활 속에서도 느껴보길 바란다.

만든 사람 Native VML(남아프리카공화국 광고 에이전시)

3주년 특집 ‘힐링캠프’ 신애라 편

2011년 7월 18일에 시작한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가 3주년을 맞았다.

‘힐링’이란 말 그 자체만으로도, 어쩐지 위안이 될 것 같은 시기에 태어나, 이제 ‘힐링’이란 말 자체에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는, 아니 ‘힐링’만으로는 그 어떤 위로도 될 수 없는 고단한 시대까지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시대적 감수성과 그 치료 방법의 ‘난치’가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힐링캠프>의 3주년 초대 손님은 신애라였다.

왜일까?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전 국민적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으로 만나 화제를 몰며 결혼까지 한 차인표 신애라 부부. 그들의 삶은 관심의 영역 바깥에 놓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굳이 궁금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이 부부의 아내, 신애라가 3주년 특집이라니! 하지만 그녀는, 그 예전 ‘피비 케이츠’에 비유될 만한 여전한 모습으로, 아니 외모보다 더 유쾌 상쾌 발랄한 아내이자, 엄마로 <힐링캠프>를 빛내준다.

되돌아보면 그동안 신애라에 대한 이야기는 남편 차인표의 관점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차인표가 그토록 사랑하는 신애라는 다시 태어나도 결혼하고픈 완벽한 아내로 각인되었었다.

그런데 신애라는 그 칭송의 이면을 낱낱이 까발려 내기 시작한다. 이사를 해도 남편에게 의논한 적이 없고, 남편이 바깥일을 보는 동안 이사를 해치우고, 집안일 하나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는 남편을 큰아들이려니 하는 그런 ‘독재자’ 아내의 모습으로.

그리고 <힐링캠프>는 그녀를 3주년 특집에 초대한 첫 번째 이유를, 신애라를 통해 설명해 내고 있는 듯하다. 힐링이란 이름의 막연한 위로보다, 이제 어쩌면 정말 필요한 것은, 신애라처럼 자기 자신을 직시해낼 수 있는 힘이 아닐까라고.

신애라는 남편의 절대적인 신뢰 이면에, 자신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성격이 있음을 털털하게 정의 내린다. 그리고 가정의 행복이란 것이, 그런 자신의 성격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주는 남편의 희생(?)이 전제되어 있음을 자인한다.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두 사람의 행복이 드라마 같은 운명, 그 무엇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온 지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3주년 특집의 주인공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다음이 핵심이다. 자신이 낳은 아들 외에, 쉰 명이 넘는 아이들이 전 세계에 있고, 그중 두 명을 한집에서 키우고 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 말이다.

처음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 어린 나이에 코끼리처럼 두터운 발을 가지게 된 맨발의 아이들이, 되레 운동화를 신은 자신의 발에 박힌 가시를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운동화라도 신겨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전 세계 자녀들의 입양.

하지만 그들이 오십 명이 되면서, 이제는 그 편지조차도 제대로 읽게 되지 않는 무성의(?)한 과정에 이르기까지를 신애라는 오로지,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한집에서 키우고 있는 자녀에 대해, 자신은 배 하나 안 아프고, 배 아파 낳은 아들과 똑같이 느껴지는 두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며 찬사에 찬사를 거듭한다.

굳이 ‘입양’이란 사실을 숨기지 않고, 그 과정을 담백하게 공유하는 엄마 신애라는, 그 자체로 감동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입양되었음을 깨닫게 하고, 그러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엄마로서의 모습은,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온갖 편법을 마다하지 않는 이기적인 부모의 편협한 사랑을 돌아보게 만든다.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힐링’은 상처받은 존재를 전제로 한다. 즉, 자신이 상처받았으니, 좋은 치유가 필요하다는 식이, 그간 우리 사회 ‘힐링’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3주년 기념 <힐링캠프>는 신애라라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그래서 더 반전인 한 사람을 통해, 이 시대의 새로운 힐링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즉,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며, 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힘, 자신의 것을 나누고, 베풂으로써 행복을 얻어가는 자세가, 바로 진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라고 말이다.

이정희

밤섬은 성장기 청소년! 왜?

안녕, 난 밤섬이라고 해. 난 서울 살아. 서울하고도 한강, 그중에서도 서강대교와 마포대교 사이에 길게 누워 있는 섬을 본 적 있지? 그게 나야. 근데 내가 밤같이 생겼어? 옛날 지도에는 율도(栗島)라고 적혀 있다는군. 내가 보기엔 오징어처럼 생긴 것 같아. 그렇다고 오징어섬이라고 부르지는 말아줘. 근데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알아? 섬이니까 몇 백만 살일 거라구? 아니야 틀렸어. 나 마흔여섯 살이야. 깜짝 놀랐지? 섬치고는 젊다구? 아니 난 사춘기 청소년 섬이야. 그 사연을 지금부터 말해줄게.

옛날 옛날 아주 오래된 옛날에 나는 한강과 더불어 생겨났지.

나는 원래 돌로 만들어진 섬이었어. 돌섬이니까 무인도였냐구? 아니야. 사람들도 많이 살았어. 고려 시대에 나라에서 죄인들을 나의 섬으로 귀양 보낸 적이 있었어. 그리고 예전부터 물 건너 마포에 큰 나루터가 있었어. 덕분에 남북으로 한강을 따라 중국과 제주도까지 오가며 무역을 하던 상인과 배를 만드는 목수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살았지. 세종과 성종 시대에는 나라에서 약초와 뽕나무를 심어서 키웠어. 갖가지 아름다운 나무가 늘어진 언덕에 으리으리한 기와집도 여러 채 있고, 양과 염소가 유유히 풀을 뜯어 먹으며 놀고 있어. 그리고 이태리 베네치아처럼 집과 포구가 붙어 있어서 안방에서 나오면 바로 배 타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근사한 풍경을 그려봐. 그게 나였어. 겨울에 한강이 꽁꽁 얼면 마포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이쪽으로 건너와 놀기도 했어. 1960년대까지만 해도 17대에 걸친 500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지.

근데 1960년대 당시 한국 정부에서는 왠지 내가 눈에 거슬렸나 봐. 수억 년을 한강과 더불어 잘 살아왔는데 공연히 내가 한강 물의 흐름을 거스른다고 트집을 잡은 거야. 1968년 2월 10일 오후 3시. 결국 엄청난 양의 폭약을 터뜨려서 나를 산산조각 냈어. 그리고 폭파 뒤에 채취된 11만4000m2의 돌과 자갈을 한강 윤중제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만드는 데 가져다 썼지. 그때 난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가 되었어.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 거야. 내가 다시 생겨났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내가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 거지. 지금의 나는 한강의 물살이 실어다준 모래와 자갈들이 모이고 뭉쳐서 만들어진 퇴적섬이야. 재미있는 건 내가 원래 있던 그 자리에 다시 생겨났다는 거야. 신기하지 않아? 지금 있는 곳이 내가 원래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라구!! 지금 내 몸은 두 개로 나뉘어 윗밤섬, 아랫밤섬으로 불리고 있고, 행정상으로는 각각 마포구 상수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관할지가 달라.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나는 지금도 자라고 있다는 거야. 일 년에 평균 440m2씩이나! 그래서 1966년에 45,684m2였는데 2013년에는 279,531m2로 6배나 커졌어. 지금의 나는 서울 시청 앞 광장 21개를 합친 것과 같은 면적이야. 계속 자란다니 놀랍지? 즉, 46살은 섬의 나이로 치면 아직 청소년이라고!!

끝으로 나 이런 얘기 해볼게.

근데… 나, 1999년 8월 생태 경관 보전 지역으로, 또 2012년엔 도심 내 물새 서식지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서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어. 겨울이 되면 수많은 철새들이 나에게 찾아와. 그래서 아무 때나 놀러 오라고 초대할 수가 없어서 미안해.

아, 맞다! 나한테 올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해. 1960년대까지 밤섬에 주민들이 살았다고 했잖아. 그때 78가구 443명의 밤섬 주민들은 폭파 직전에 창전동으로 이주를 했어. 홍익대학교 뒷산인 와우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야. 이분들은 그날 이후로 실향민 아닌 실향민이 되었지. 그래서 그들이 1년에 두 번씩 나한테 돌아오는 날이 있어. 1월과 추석 무렵 두 차례 방문이 이루어지는데, 그때는 일반인도 방문 신청을 하면 배를 타고 같이 올 수가 있는 거야.

지금 나 밤섬에는 버드나무와 갈풀, 갈대, 물억새가 숲을 이루고 있어. 그리고 얘네들 포함해서 138종의 풀과 나무가 같이 살고 있고, 해오라기, 청둥오리, 꿩, 붉은머리오목눈이 등등 49종류의 새들이 살고 있거나 겨울철이면 찾아오기도 하지. 강변 양쪽으로 고층 아파트와 빌딩들이 빽빽한 대도시 한복판에 이렇게 물새들이 찾아와 사는 섬은 전 세계에서도 흔하지 않아. 사실 그동안 생태 보전 지역으로 묶어놓고 사람들 출입을 금지한 덕분에 그렇게 된 것이긴 해. 그 말은 사람들이 가만 내버려두면 자연은 저절로 회복된다는 이야기야.

필요 없다고 없애버렸지만 나는 그 자리에 다시 생겨났고 또 아무것도 없는 모래밭에서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동물들이 뛰어다니고 있어. ‘자연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는다’는 얘기야. 너무 짧게, 가깝게만 보지 말아줘. 인간들 판단으로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다 정하려 들지 말고 어머니에게 맡겨줘. 자연이 어머니야.

밤섬 귀향제 행사와 더불어 일반인도 밤섬 방문의 기회가 있습니다. 추석 전주에 진행하며 마포문화원에서 홈페이지(www.mapocc.or.kr)를 통해 공고합니다. 제한 인원 150명이며, 밤섬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가능합니다.

햇살, 세상을 품는 어머니의 따스한 미소

전남 순천시 순천만 생태공원 2012년 10월

순천만은 생태 관광 1번지이다. 갈대밭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갯벌 너머로 드리우는 노을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들판의 풀숲이나 산자락에 피어나는 안개는 세상의 어머니인 대지의 손길인 듯 보드랍고 아늑하다. 아침 안개와 이슬은 자연이 주는 변치 않는 모성애 같은 선물인 듯 아침 햇살이 산등성을 오르면 잘게 빛나고 황금빛으로 물들다 스러진다.

경남 창녕군 우포늪 2013년 8월
우포늪은 네 개의 작은 늪이 모여 하나의 늪으로 불리는데 이 사진은 사지포로 불리는 가장 동쪽의 늪이다. 이른 아침 태양이 비치면서 온갖 생물이 깨어난다.

물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고랑이 되고 짐승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길이 되었다. 그 길에 스며든 안개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 길 풀잎을 따서 들여다보면 어느새 이슬은 흙으로 스며들어 흔적을 지운다. 흙으로 스며든 이슬은 다시 풀뿌리에 매달리고 거기에 태초의 그리움이 맺힌다. 안개와 이슬이 스며든 대지 위로 뿌려지는 햇살은 안개와 이슬로 세상을 품었던 어머니의 미소다.

경남 함안군 창녕군 낙동강 2013년 5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다. 남지철교로 유명한 남지 부근의 모습이다. 이곳에서 강은 더욱 넓어져 큰 강의 모습을 이룬다. 아침 황금빛에 강도 금빛이 되었다.

세상 구석구석 들판이거나 산길이거나 갯고랑이거나, 저 멀리 외로운 섬까지 품고 있는 잔잔한 파도이거나, 햇살은 가리지 않고 펼쳐진다.
어머니의 자애로운 눈길은 사물과 대상을 가리지 않듯 햇살은 그렇게 멀고 넓게 펼쳐진다. 폭풍우가 일고 눈보라가 쳐도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까닭이다.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달콤한 까닭이다.

사진 신병문 & 글 이민

사진가 신병문님은 개인 비행 장비를 타고 하늘에서 직접 찍은 우리 땅 풍경을 통해 이 땅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 소명 의식을 갖고 있으며, 현재 하늘과 땅에서 대한민국을 기록하는 5년간의 국토대장정 사진 기록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저서로는 <비상-하늘에서 본 우리 땅의 새로운 발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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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민님은 여행수필가, 카페인테리어 작가로 2009년 가을 목포에서 서울까지 도보 여행 후 <대한민국 국도1번 걷기 여행>을 시작으로 여행길에서 느낀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으며 저서로는 <소울로드>(공저) <하늘을 보며 천천히 걷다> 등이 있습니다.

장욱진 화백

2014년 4월, 식구 모두의 숙원이었던 장욱진미술관이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야트막한 야산 아래 아름답게 자리 잡고 문을 열었다. 많은 시간을 아버지의 미술관 건립에 마음을 집중했기에, 내게는 정말 감개가 무량한 일이었다. 시간만 되면 발걸음이 미술관으로 옮겨지곤 한다. 어린아이 같은 소박한 그림들을 하나하나 보면 마치 아버지를 뵙는 듯 가슴이 뭉클하다.
장경수  사진 제공 장욱진미술문화재단

“나는 심플하다”

전시장 첫머리, 나무 아래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계신 아버지, ‘수하(樹下 1954)’를 뵈니 철저한 자유인의 경지에 이른 듯해, 일생을 통해 ‘심플’을 보여주신, 언행이 일치되는 아버지의 모습에 눈앞이 찡해 온다.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아버지의 단골 말 중 하나이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어 했던 아버지께서는 ‘심플[純眞無垢]’을 화두로 삼고 일생을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셨던 분이다. 두어 번(국립중앙박물관, 서울대학교 등)의 길지 않은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구도의 길을 가듯 시골로 다니시며 자기 일에 몰두하셨다. 그림 그리는 일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할 줄 모르는 아버지였다. 자연 가장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것에 대해 식구들한테 늘 미안해했다. 그러나 당신 일에는 늘 철저했던 분이다. 그림 그리는 일이 천대받던 시절부터 일제강점기, 한국동란 등 어렵고 힘든 세월 동안 아버지께서는 그림 그리는 일을 뒤로한 적이 없으시다. “나는 6·25 사변 때를 빼놓고는 평생 붓을 놓은 적이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사심 없이 그림을 주셨고, 아무리 큰돈을 주어도 못 갖는 이도 있었다. 식구에게는 전시회가 끝날 때 또는 이름 있는 좋은 날에 한 점씩 주심으로 즐거움을 주셨고, 어려웠던 시절 딸들에게는 혼수 대신 그림을 몇 점 걸어 주고 가셨다. 그 모든 것이 아버지 사랑이기에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의 그림을 몹시 아낀다.

장욱진 작.
<진진묘(眞眞妙)>
33×24cm. 캔버스에 유채. 1970.

<가족도(A family Portrait)>
7.5×14.8cm. 캔버스에 유채. 1972.

“나는 평생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

평소 도회지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셨던 아버지는 마흔넷 되시던 해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사직하고, 남양주시 덕소의 한강 변에 작은 화실을 짓고 가족과는 떨어져 혼자 작업하는 전업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하셨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는 숙고를 해 오신 일종의 정신적인 도정이기도 했다. 실제로 식구들에게는 가장의 부재로 인한 어려움은 있었으나, 어머니를 비롯한 온 식구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유독 많은 ‘가족도’(1972, 1978)를 그리셨는데 아마도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사회생활이 거의 없던 아버지께는 가족이 유일한 울타리였고, 한편 식구들은 아버지를 보호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그에 대한 화답이 ‘가족도’로 보여지는데, 온 가족 뒤에 모습을 반쯤 숨긴 그림 속의 아버지의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무엇보다도 온 식구의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은 늘 죄인의 마음으로 따라다녔을 것이고, 그 화답이 어머니의 초상인 ‘진진묘(眞眞妙 1970)’다.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작품을 완성하자마자 덕소 아틀리에에서 서울 집으로 들고 와 어머니께 드리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신 일이 있다. 얼마나 애틋한 일인가. 이렇게 “나는 평생 그림 그린 죄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형형한 아버지의 눈빛을 작품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나, 다시 시작하겠다”

‘자화상’(1951)을 보면서 한국동란으로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을 때, 연미복을 입고 풍요로운 논밭 사이를 유유히 걸어오시며 “나,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를 뵙는다. 이렇게 아버지는 무슨 계기가 있을 때마다 늘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만년에 아버지는 용인 마북동 고옥(현재 등록문화재로 ‘장욱진 고가’)에서 많은 그림을 그리셨다. 작품 중에는 당신 자신을 도인으로 표현한 작품(도인(道人) 1988)이 많다. 모든 잡스러움을 걷어낸 순수했던 아버지의 내면을 본다. 작품 속에서 도인으로 유유자적, 또는 홀로 좌정하시며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의지를 나는 본다.

마지막 그림으로 알려진 ‘밤과 노인’(1990)은 돌아가시기 2개월 전에 그리신 그림이다. 그때는 건강하셨고 누구도 돌아가시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때이다. 그림을 보았을 때 어머니와 나는 좀 이상한 느낌이어서 그림을 곧바로 싸서 장롱에 넣어 두었었다. 1990년 12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나는 바로 그 그림을 꺼내 보았다. 동시에 말은 안 했었지만 돌아가실 걸 예감하고 그리신 건가 하는 생각에 미치니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버지는 언젠가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쓰고 가겠다. 나의 기능이 다하면 나는 간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해 그림도 괜찮게 된다며 많이 그리셨고 건강도 좋아 보이셔서 우리 모두를 안심시켜 놓고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리셨다. 새해에 다시 시작하시겠다고 주변 정리도 해놓으셔서 정말 깨끗하게 떠나셨다. 마지막 그림 속의 유유히 떠나는 도인의 모습으로. ‘아버지, 그곳에서 무엇을 다시 시작하고 계신가요?’

<수하(樹下, Under the Tree>
33×24t.7cm. 캔버스에 유채. 1954.

<도인(An Immortal)>
53×49cm. 캔버스에 유채. 1988.
+
<밤과 노인
(The Night and an Old Man)>
41×32cm. 캔버스에 유채. 1990.

화가 장욱진(1917~1990)님은 1918년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양정고보를 거쳐 도쿄제국 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제2세대 서양화가로, 가족, 나무, 아이, 새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들을 주로 그렸습니다. 1947년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사실을 새롭게 보자’란 의미로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자연 사물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사물 안에 내재해 있는 근원적이고 정신적인 본질을 추구하였습니다. ‘동화적이고 심플한 표현과 독창적인 색채를 사용, 동양화적인 화법에 동양적 철학사상을 담아냈다’는 평을 받았던 그는 옛 양주군이던 덕소(1963~1974), 명륜동(1975~1979), 수안보(1980~1985)를 거쳐 용인 신갈 마북리(1986~1990)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생을 마쳤습니다. 지난 4월 개관한 양주 시립 장욱진미술관에서는 미술관 개관을 기념한 <장욱진> 전이 오는 8월 31일까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