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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셰어링, 쏘카

취재 문진정

아이들과 함께 외출할 때,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할 때, 내 차처럼 사용할 수 있는 자동차 나눔 서비스가 있다. 개인의 소유물이었던 자동차를 공공의 재화로 만든 카셰어링 기업 ‘쏘카’다. 일 년에 한두 번, 특별한 날 하루 종일 빌려 쓰는 것이 렌터카라면 쏘카는 10분 단위로 예약할 수 있는, 나의 출퇴근, 장보기, 데이트 시간을 함께하는 일상 서비스이다.

쏘카는 2012년 초 제주도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제주도에는 집집마다 자동차가 두세 대씩 세워져 있다. 김지만 대표는 잠깐씩 필요할 때만 쓸 수 있는, 함께 쓰는 차가 생기면 경제적 부담도 줄고 에너지 절감, 환경 보호 등의 많은 이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하이브리드 자동차 30대를 구입, 카셰어링 서비스를 시작했다. 3개월 만에 제주도민과 여행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2013년 2월부터는 서울시 공식 ‘나눔 카’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 부산, 대구, 울산, 제주 등 전국 420여 곳에서 쏘카존이 운영되고 있으며 통합 회원은 9만 명, 차량은 540대를 돌파할 정도로 고속 성장하였다.

이제는 비싼 관리비, 보험료, 주차비를 걱정하면서 ‘내 차’를 굳이 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에 나와 너의 차, 우리의 쏘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쏘카, 이용 방법

① 쏘카 홈페이지(Socar.kr)에 접속해 회원가입 후 쏘카 회원카드를 발급받는다.

② 우리 동네 쏘카존을 검색하여 원하는 차를 예약한다.

③ 쏘카존으로 가서 차를 사용한 후 다시 지정된 쏘카존으로 돌아온다.

주유는 차량 내부에 비치된 주유카드로 해결. 시간과 주행 거리에 따라 사용 요금과 주유비가 자동으로 결제된다. 1시간 이용 시 요금은 4~6천 원 선.

쏘카의 나눔 활동

‘나눔 보따리’는 ‘아름다운가게’에서 매년 소외 계층에 생필품과 쌀을 배달하는 봉사 활동이다. 지난겨울에는 쏘카에서 차량을 무상 지원하여 회원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성금을 모아 양말을 제작, 배달하는 등 다양한 나눔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쏘카 마케팅팀 홍지영씨 이야기

카셰어링이란 것이 어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대단하고 특별한 행위라기보다, 아주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서비스로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한번 쏘카를 타보면 ‘재미있다’ ‘합리적이다’ ‘쿨해 보이는데?’ 등 카셰어링의 재미를 느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는 ‘한 줄 댓글’이라고 해서 차마다 그 차를 이용한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었어요. 이 차를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썼는지, 이용 노하우도 공유하고 차를 나눠 쓰는 사람끼리 친밀해지면서 서로 배려하게 되고 정도 쌓이는 곳이죠.

‘차에 CD를 놓고 왔는데 그냥 들으세요.’ ‘지난번에 깜빡하고 쓰레기를 못 치워서 미안합니다. 대신 음료수 넣어놨어요.’ ‘쏘카로 늘 데려다주던 여자 후배랑 사귀게 되었어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나누시는데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연말 파티, 봉사 활동 등 기회가 생길 때마다 회원분들과의 모임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실제 이용하시는 분들이 원하는 차종도 반영하고, 차량을 편도로 대여하는 서비스도 실행하게 되었고요.

올 상반기에는 차량도, 회원도 지금의 두 배 정도 늘리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더 합리적이고, 일상적이고, 건강한 서비스, 그리고 자동차를 더 똑똑하게 쓸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저희의 최종 목표입니다.

중환자실에서 만난 잊지 못할 보호자

재작년 9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할 때였다. 당시 중환자실 8명의 환자를 2명의 보호사가 돌보았다.

첫날, 저녁쯤 한 환자분의 딸이 엄마를 보러왔다. 40대 후반의 직장 여성이었는데, 회사 일을 마치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첫인상은 좀 차갑다 할까, 말도 별로 없고 되게 까다로운 분이겠거니 했다. 다음 날도 비슷한 시간쯤 딸이 찾아왔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딸은 어김없이 병원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뭐 며칠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계속 반복되니까 뭔지 모를 감동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알고 보니 엄마가 입원한 지 1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를 보러 왔다고 했다!

딸은 오면 우선 물을 떠다가 엄마 얼굴도 씻기고, 손발도 닦아주고 로션도 발라주었다. 우리들이 다 했다고 해도 “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하며 엄마를 챙겼다.

그리고 욕창 환자들이 쓰는 베개도 네 벌씩 사다놓고 모든 면에서 엄마가 편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엄마, 내가 어렸을 때 오빠가 50원 준 거 엄마한테 말 안 하고 썼다고 엄마가 혼냈었잖아, 기억 나?” “엄마, 오늘 오빠가 승진했대. 오빠 잘했지?” 그리고 엄마의 손을 꼬옥 잡고 지나간 추억 이야기며 손자들 자라는 이야기, 집안 이야기 등을 해드리곤 했다.

비록 못 움직이고, 말도 못하고, 밥도 코로 연결된 줄을 통해 겨우 드셔야 하는 중환자이시지만, 그렇게 딸이 있을 때면 눈빛도 얼굴색도 활짝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는 날씨도 춥고 비도 내리고 무척 궂은 날이었다. 오늘도 올까? 했는데 어김없이 딸은 나타났다. “이런 날은 좀 쉬지. 내가 있잖아요. 나도 엄마한테 최선을 다해드리는데.” 그렇게 말하자 딸이 한마디 했다. “저도 알지요. 그런데 엄마가 기다릴 거 같아서요. 왔다 가야지 마음이 편해요.”

그렇게 정성을 다하니 우리도 감동을 받아 하나라도 더 챙겨드리게 되었다. 돌아가신 우리 엄마 생각도 많이 났다. 사실 나도 효녀 소리 들었지만, 그 딸처럼 하지는 못했다. 애들 낳고 살림한다고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고, 엄마 돌아가실 때도 옆에서 하루밖에 못 있어드렸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한스럽다.

“어떻게 그래요? 엄마가 참 잘 키웠나 보네.” 첫인상은 차가웠지만 보면 볼수록 정이 많은 그 딸에게 한번은 이렇게 물었다.

자식들 키우느라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그렇게 고생을 하신 엄마라고 했다. 자기 아들들도 엄마가 다 키워줬는데, 이제 좀 쉬실 만할 때 쓰러지셨다고.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할머니가 키워줬다던, 이제 대학생이 된 손자들도 자주 와서 꼭 엄마처럼 할머니에게 하고 갔다. 얼마나 사랑을 많이 줬으면 손자들까지 그렇게 할까 싶어서 부럽기도 했다.

“바쁠 텐데 싫다고 안 하고, 할머니 보고 싶어서 왔어?” 물으면 손자들은 “당연히 와야죠. 우리 할머니인데요” 하고 대답을 했다. 역시 자식들은 보고 배우는 것일까.

5개월 후 내가 다른 병원으로 옮기게 되면서 그 환자하고도 헤어졌다. 지금도 그때 당시의 짝궁 보호사를 통해 소식을 듣는데 그 따님은 여전히 매일같이 엄마를 찾아온다고 한다.

비록 말은 못하지만 그 엄마는 참 행복하실 것이다. 중환자실의 의식 없어 보이는 환자들도 다 느낀다. 우리는 안다. 좋으면 웃는 게 느껴지고 어떨 때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본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보호자를 본다는 것은 참 드문 일이라, 지금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딸 이야기를 하곤 한다. 최고의 효도는 뭘 해드려서가 아니라 얼굴을 자주 보여드리는 것이다. 부모에겐 맨날 봐도 보고 싶은 게 자식이다.

박승금 67세. 요양보호사

‘주변을 감동시켰던
그 따님’에게 박승금 님의
마음을 담아 꽃바구니를
보내드립니다.

‘나에게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담은 편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제라늄’을 소개합니다

외국의 멋진 풍경을 보면 집집마다 건물마다 창가를 풍성한 꽃으로 장식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알고 보니 꽃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보다 더 큰 이유는 꽃을 이용한 ‘방충망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 꽃들 중에서도 어딜 가나 만날 수 있는 가장 흔한 꽃이 바로 ‘제라늄’입니다.
사실 가격도 저렴한 편인 데다 여름철의 과습만 주의하면 일 년 내내 예쁜 꽃을 보여주는 아주 바람직한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이 제라늄이에요. 꽃 시장에서는 ‘구문초(驅蚊草: 몰구, 모기 문, 풀초=모기를 몰아내는 식물)’라 불리는 ‘로즈 제라늄’이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제라늄에서 나는 독특한 향기는 해충을 쫓아주는 효과가 있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꽃과 잎에서 풍기는 강한 향이 싫다고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비린내가 섞인 듯한 동물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냄새가 역하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제라늄의 향기가 해충을 쫓아준다는 것을 알고 나면 생각을 조금 달리하기도 합니다만.^^ 더구나 모기에 물려 가려울 때 제라늄 잎을 잘라 문질러주면 금세 진정이 되는 것을 보고는 “어, 이거 괜찮은데!”라는 소리를 절로 하게도 되지요. 살다 보면 이런 경우 정말 많습니다.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들 말이에요. 나의 입장에서만 보면 ‘이런 건 없었으면 좋겠다’ ‘저건 불필요한 것이다’라고 생각되는 것이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어딘가에 도움이 되고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 문득 노자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한테 예쁘고 좋은 것만 선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잘못된 생각이다.”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중국 쌀로 맛있는 밥 짓기

결혼하고 일 년 만에 남편이 중국 주재원 발령을 받았습니다. ‘밥은 제대로 해먹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작은 압력솥 하나 이민 가방에 넣고 중국 생활을 시작했어요.

중국이란 나라는 땅이 넓어서 그런지 쌀도 참 다양하더라고요. 길쭉한 안남미부터 찹쌀의 찰기도 다르고 가격에 따라 맛도 같은 게 없었어요. 쌀 깨끗이 씻어서 ‘손등 위로 찰랑하게’라는 물 붓기 공식은 통하지도 않고요. 이 쌀 저 쌀 사다가 물도 맞춰가며 밥 짓기에 성공하면 얼마나 행복하던지.ㅎㅎ

하루에 세 끼를 하면 세 끼 모두 밥 상태가 다르니, 맛있게 고슬고슬하게 잘 지어진 날은 9첩 반상 부럽지 않게, 밥 한 그릇 소복이 떠서 그것만 먹은 날도 있습니다. 밥풀 묻은 주걱을 쥐고 밥알 떼어 먹느라 신이 난 아기 표정을 보면, 밥 한 번 잘한 걸로 진짜 엄마가 된 거 같았고, 남편의 ‘이야~ 한국 밥맛이다’ 소리에 신이 났습니다. 밖에서 먹고 와도 꼭 집밥에 김치를 찾는 남편 덕에 더 신경을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밖에서 먹는 밥은 허하다는 남편이 찬밥이라도 찾으면 사실 마음이 짠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설 쇠러 한국에 왔을 때 그 밥 잘하기로 유명하다는 쿠○를 샀답니다.

밥 짓기 기술은 늘었어도, 매끼 압력솥에 밥하고, 찬밥은 또 데우는 게 귀찮아서 알아서 잘한다는 쿠○를 산 거지요. 근데 알아서 못하더라는…ㅜ.ㅜ 쌀이 중국 쌀이라 그런지 10년 전으로 돌아가 물 맞추기를 다시 했지요. “밥은 쿠○가 한다더만 지가 알아서 물 맞추고 이런 거 몬하는갑지?” 남편 말에 웃으며 진밥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보온불이 켜진 밥솥을 보면 따뜻한 밥이 담겨 있단 생각에 흐뭇해지는 거, 제 속마음입니다.ㅋㅋ

요리 서혜정 & 그림 최정여

중국의 다양한 쌀로 밥 짓는 노하우

길쭉한 안남미는 물을 좀 적게 부어 밥을 고슬하게 짓습니다. 다 퍼낸 다음, 살짝 누룽지를 만들어 설탕을 솔솔 뿌려 먹거나 숭늉으로 먹으면 맛있답니다. 대부분의 중국 쌀은 찰기가 약해, 찹쌀을 섞거나 잡곡 쌀을 섞고, 밥을 지을 때 소금을 살짝 넣으면 간이 맞아서 훨씬 맛있는 잡곡밥이 됩니다. 찰기가 떨어지는 쌀로 한 밥이 남으면, 볶음밥이나 식혜로 해서 먹으면 정말 맛있어요.

지하철 손잡이 ‘룩 업 핸들’

만든 사람

권일현(26) 한성대학교 제품디자인 전공

이지수(24) 가천대학교 산업디자인 전공

● 이름은? 룩 업 핸들(Look Up Handle).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거나, 창밖을 두리번거릴 필요 없이 고개를 들어 손잡이만 바라보면 간편하게 다음 도착역의 정보를 알 수 있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꽉 찬 지하철 안, 일찍 탄 덕분에 편안히 자리에 앉아 목적지로 가고 있었다. 한 10분 정도 흘렀나? 내릴 역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지하철 문 상단에 설치된 정보판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빽빽한 사람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더러 시끄러워서 안내 방송 또한 잘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지나쳤을까 앉은 자리 뒤쪽 창문으로 아무리 고개를 두리번거려도 보이지 않고. 결국 일어서서 문 앞까지 사람들을 뚫고 갔더니 목적지까지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이런 불편함을 여러 번 느끼고 나서 앉아 있는 승객이 고개만 들어도 볼 수 있는 곳인 손잡이에 지하철역 정보가 보이도록 디자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제품의 기본 원리는? 손잡이 옆면을 깎아낸 부분에 작은 LCD판을 설치하여 도착역 정보가 보이게 된다.

● 중점을 둔 부분은? 우선 앉아 있는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적당한 화면의 각도와, 서 있는 사람이 손잡이를 잡는 데 있어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형태 스타일링에 가장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마다 한 사람은 서서 손잡이를 잡아보고 다른 한 사람은 앉아서 위를 올려다보며 반복적인 경험을 하면서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게 디자인하는 것에 신경을 썼다.

● 주변의 반응은?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주최한 2013년 유니버셜 디자인 공모전에서 특선을 했다. 이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지도해주신 교수님이나 주변의 많은 친구들도 지하철을 탈 때마다 힘들고 불편했던 문제였다며 많이 공감해주었다.

● 하고 싶은 말? 일상생활을 하다가 주변의 모든 것들에 영감을 받아 디자인을 하게 된다. 남들이 잘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부분도 관찰하고 연구해서 모든 사용자가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제품 디자인을 하고 싶다. 그리고 제품 디자이너로 세상에 나가기 전에 월간 <마음수련> 독자분들께 소개가 되어 감사드린다.

폴 포츠가 전하는 말

“제 아내는 저를 보면서 여전히 짜증 난다고 말합니다. 저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본모습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원챈스>의 개봉에 맞춰 내한한 폴 포츠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성공한 후의 자신에 대해 물어보자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실수투성이라며 우리나라에 와서도 커다란 간장을 넘어뜨려 와이셔츠를 버렸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왜 그는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연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말했을까.

폴 포츠. 아마도 그의 성공담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영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던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 나와 독설가 심사 위원으로 유명한 사이먼 코웰을 미소 짓게 만들었던 인물. 뚱뚱한 몸에 훈남이라고도 할 수 없는 외모, 게다가 당시에도 적지 않은 나이의 이 휴대전화 판매원이 오디션 무대에서 그것도 대중적이지 않은 오페라를 부르겠다고 했을 때 관객은 물론이고 심사 위원들조차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르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오디션장을 가득 채웠을 때 관객들과 심사 위원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는 단 한 곡의 노래로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폴 포츠의 삶이 워낙 드라마틱해서인지 그를 다룬 영화 <원챈스>는 특별한 이야기를 가미하지 않고도 극적인 영화가 되었다. 흔히들 폴 포츠를 ‘인생 역전’의 대명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원챈스>라는 영화를 통해 폴 포츠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접해보면 그 안에는 ‘인생 역전’ 같은 세속적인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폴 포츠는 <브리튼즈 갓 탤런트> 우승 이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하고 자신의 이야기가 책은 물론 영화화되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왜 달라진 것이 없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는 걸까.

폴 포츠의 성공은 무언가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오페라에 빠져 있었고 타고난 외모 때문에 왕따를 당할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면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고 그래서 또 노래를 하고…. 이 무한 반복이 그의 유년과 청소년 시절의 대부분이었다는 것. 하지만 오페라 같은 건 남자가 하는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아버지 밑에서 억눌려 있었다. 그러니 그는 엄밀히 말하면 휴대전화 판매원으로 일하다가 오페라 가수로 변신한 게 아니다. 그는 본래부터 준비된 오페라 가수였지만 현실에 억눌려 다른 삶을 자기 삶인 것인 양 치부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따라서 폴 포츠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꿈’을 이루는 ‘인생 역전’의 스토리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그 본래 모습이 무엇이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삶의 자세다. 폴 포츠는 자신의 부족한 면들을 모두 긍정했고, 또 부족한 삶이 만들어낸 노래에 대한 열정(그가 왕따를 당하면서도 살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이 노래가 아니었던가!)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래서 어느 날 그에게 운명처럼 날아든 단 한 번의 기회(One chance)는, 사실상 준비된 그에게는 자신의 본모습이 갖고 있는 매력을 드러내는 시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승리와 절망을 만났을 때 그 두 사기꾼을 똑같이 대하라.’ 이 키플링의 시는 폴 포츠가 어렸을 때부터 간직하고 있는 좌우명이라고 한다. “승리와 절망은 실체가 없고 우리가 겪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폴 포츠의 이 말은 성공이든 실패든 변치 않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의 인생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폴 포츠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당신 그대로가 아름답다.

정덕현

왜 야쿠르트 아줌마를 보면 반가울까?

1971년 냉장고가 드물던 시절, 제품을 신선하게 배달하기 위해 생긴 야쿠르트 아줌마 제도. 47명으로 시작한 야쿠르트 아줌마는 현재 1만3천여 명이다. 야쿠르트 한번 먹어보지 않고 자란 사람 있을까? 노란색 옷과 모자, 노란 손수레를 끌고 동네 곳곳을 누비던 아줌마들은 어느새 거리의 문화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노란색의 기억은 떠나보내야 할 거 같다. 44년 만에 새 유니폼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1977년 야쿠르트 아줌마가 된 후 37년째 한길을 걸어온 이재옥(64) 여사, 그녀를 통해 들어보는 야쿠르트 이야기. 정리 최창원

제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27살 때였어요. 큰애가 갓 나서 심장 질환이 있었는데, 애 아빠 월급만으로는 병원비를 댈 수가 없으니까 나서게 되었죠.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사회 통념상 주부가 밖에 나가 일을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어요. 그래서 1971년 처음 회사에서 아줌마들을 모집할 때만 해도 지원자를 구하기 어려웠다고 해요. 영업 사원들이 교회, 동사무소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 겨우 47명이 모집됐다니 실감 나죠. 그런데 몇 년 사이로 급성장하면서 6년 후 제가 시작할 때는 야쿠르트 아줌마가 전국에 2천 명 가까이 됐어요. 제품이 없어 못 팔 때도 많았습니다.

일을 시작한 곳이 여의도 지구였어요.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 국회도 들어서고 우후죽순으로 아파트 빌딩 같은 것들도 생기던 시대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리를 다니며 야쿠르트를 팔고 배달하는 일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혹시나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모자를 눈 위로 쓰고 다닌 적이 없었어요. 딸들이 부끄러워하면 어떨까 싶어서 말도 못 했고요. 그런데 나중에 아이가 쓴 일기장을 보게 됐는데 이미 알고 있었더라고요.

‘오늘은 날씨가 춥다. 엄마는 얼마나 추울까. 엄마의 옷소매에 찬 바람이 들어가겠지.’ 그 글을 보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다음부터 그래, 자존심이 어딨냐, 내가 부끄러운 일 하는 것도 아니고 더 당당해지자 마음먹었죠.

1971년 한국야쿠르트에서 처음 나온 야쿠르트는 용량 80ml, 25원에 판매됐다.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지금도 매출 90% 이상을 책임질 정도로 성실하게 활동하고 있다. 야쿠르트 아줌마들끼리는 ‘여사님’으로 호칭한다. 이재옥 여사는 현재 여의도 국회를 책임지고 있다.

44년 만에 바뀌는 새 유니폼은 정구호 디자이너의 작품. 통풍성이 뛰어난 기능성 소재를 사용했고, 기존 복장보다 세련되고 건강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늘 내 손에서 전달되는 걸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배달을 해요. 매일 한 340집 정도를 배달했는데, 하루에 얼마나 걷나 싶어서 만보기를 차봤는데 만이천이 좀 넘게 나오더라고요. 하루 만 보만 걸으면 만병이 없어진다는데, 건강에도 좋겠구나 싶었죠. 야쿠르트 가방이 보기보다 되게 무겁거든요. 배달을 시작할 때 딱 이렇게 생각해요. 지금부터 헬스 시작이다, 야쿠르트 가방이 운동 기구다. 그런 마음으로 들고 걷고 뛰다 보면 일이 즐겁고 재밌어요. 만약에 단순히 일이라고만 생각했으면 이렇게 오래 못했을 거예요.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얼굴들을 다 알았어요. 아이가 야쿠르트만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도 하고, 집에 들어오라고 하면 같이 대화도 나누고. 맨날 저만 기다리던 혼자 사는 할머니도 계셨어요. 대화할 상대가 없다 보니 항상 저를 반겨주셨는데, 수년 동안 그렇게 보아온 할머니가 어느 날 돌아가셨을 땐 참 안타까웠죠. 어느새 동네 이정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길에 서 있으면 길도 많이 물어보세요.

물론 힘들게 하는 분들도 만납니다. 그러다 보니 참을 인자가 3번이 아니라 30번은 필요했을 때도 많았죠. 그래도 그런 과정에서 인생을 배우게 되더라고요. 마음 갖기에 따라 힘든 것도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구나, 오늘이 조금 힘들어도 내 곁에 언제나 행복이 맴돌고 있구나도 알겠더라고요.

애기 때부터 야쿠르트 받아 먹던 애들이 커서 군대 가고, 또 결혼한다고 초대해주고 그럴 때는 꼭 제가 야쿠르트 먹여서 키운 거 같은 착각도 들면서 흐뭇해져요.(웃음) 이 일 하길 잘했다 싶고요. 이제는 성실하게 일해온 제 자신에게 만족합니다.

사실 저만이 아니라 우리 동료들이 다 그래요. 한번은 ‘야쿠르트 아줌마들의 자녀들이 대학 진학률이 높다’며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온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거울이라고 하잖아요. 비록 자기네들을 건사 못 하고 나갈지언정, 열심히 사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그만큼 더 공부를 열심히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 아이들도 그랬거든요.

30년 넘게 일을 했어도 야쿠르트 복장 입은 동료들을 보면 여전히 예뻐 보입니다. 올봄부터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까 다들 더 젊어 보이는 거 같아요. 그럼 이제 또 배달하러 가보겠습니다.

4인 4색의 세계 여행기

위쪽 김상구 작. <라오스 야시장>
라오스 루앙프라방. 2011.

300미터가 넘는 라오스 야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화려한 뱀술부터 작은 기념품까지 볼거리로 가득 찬 라오스의 야시장이 있어 밤이 기다려진다.
오른쪽 안성호 작. <산토리니 일몰>
그리스 산토리니. 2013.

하얗고 파란 산토리니 섬의 청명한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붉게 물든 일몰 풍경은 가히 세계 최고다.

100인의 여행 사진전. 처음에는 어느 누구도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4년 3월 8일, 나는 4명의 작가와 함께 그 시작을 열었다. 세계 여행가 안성호씨, 40대 직장인 유천씨, 10년 차 공무원 정지현씨, 사진작가 김상구가 함께한 4인 4색의 전시. 한마음으로 서로 배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2년 11월, 여행 커뮤니티 카페 ‘여행나라’를 만들어 운영을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수천 명의 회원이 가입했고,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취미로 사진을 하며 가족의 일상 등을 찍는 자상한 아빠들과의 만남은 내게 새로운 꿈을 꾸게 했다.

‘100인의 여행 사진전’이란 이름의 전시…. 단지 취미가 아닌 전문 사진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가족들이 응원해주고, 그 속에서 느끼는 행복을 전하고 싶었다. 2012년, 직장인 유천씨를 만나면서 사진전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하나하나 그려가기 시작했다. 진행은 순조롭지 않았지만 도전을 하면 할수록 이 일은 숙명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내게 기억에 남는 건 유천 작가님의 어머니와 조카를 비롯한 가족들의 깜짝 방문이었다. 그 역시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이라고 했다.

위쪽 정지현 작. <Welcome>
인도. 2014.

똑똑!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오색 빛 찬란한 세상이 나를 품고 있다.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사랑을 느끼는 순간!
문 너머 반짝이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려 하는 내 마음도 사랑이다.

위쪽 안성호 작. <최고의 엽서>
그리스 산토리니. 2013.

천국의 섬이라 할 정도로 지중해의 코발트 빛 푸름이 넘실대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나 역시 용기를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전시장을 찾았다. 사실 지금까지 어머니와 전시장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식의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시는 어머니, 그리고 “좋다”는 말씀 한마디…. 순간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이게 내가 그토록 바라던 전시회 풍경이 아니었을까. 그 누군가에겐 꿈을 갖게 하고 그 감동을 모두에게 전하고 싶어서 시작한 전시, 하지만 오히려 그들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고 더 큰 선물을 받게 되었다. ‘100인의 여행 사진전’, 처음에는 그 누구도 가능하지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4명의 작가와 함께하면서 나는 그 꿈에 한 발자국 내딛게 되었다. 더 나아가 100명의 사진가와 함께하는 그날까지 달리고 달릴 것이다. 다음 전시의 주인공은 당신일 수 있다.

오른쪽 위 유천 작.
<Spectacle>
이탈리아 로마. 2013.

영화 <글래디에이터> 등 영화 속에서만 보던 역사적인 장소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밀려왔다.
오른쪽 아래 정지현 작.
<특별한 여행>
인도 우다이푸르. 2014.

팔색조 같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우다이푸르의 아름다움은 인도의 색다른 매력이다.
아래 유천 작.
<Panorama of Paris>
프랑스 파리. 2013.

파리의 개선문에 올라서 에펠탑과 샹젤리제 거리를 내려다본 풍경이다.

사진가 김상구님은 캐나다, 아프리카, 라오스, 인도 등 세계 여행을 다니며 독특한 색감과 몽환적인 분위기의 HDR 사진으로 아날로그 감성을 디지털에 담아내고 있다. 지난 3월에 열린 <100개국 여행 사진전>을 시작으로 100인의 여행 사진전을 기획하고 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

권정생(1937~2007), 그는 평생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가난하게 살았고 병마 속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책 읽기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통장에 인세가 쌓여갔으나 가난을 버리지 않고 8평 작은 집에서 살았다. 더러는 그런 그를 두고 성자(聖者)라 칭송하지만 그는 자신을 미화시키는 그런 말을 싫어했다. 그는 우리와 동시대를 치열하게 살았고 어린이를 위해 글을 썼다. 그의 동화는 슬펐지만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 2007년 5월 세상을 떠난 권정생 선생을 추모하며 그의 생애를 돌아본다. 이기영 아동문학 평론가 & 사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그림책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작가

<강아지똥>과 <몽실언니>, 이 두 작품을 쓴 사람이 권정생이다. <강아지똥>은 그림책과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고 <몽실언니>는 1990년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방영된 적이 있으니,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알게 모르게 그의 작품을 한 번쯤은 다 스쳤을 것 같다. 하지만 ‘아동문학가 권정생’은 사람들에게 아직 낯설다. 그의 작품을 책으로 읽기보다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몽실언니>는 6.25 전쟁 때문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전쟁 통에 태어난 이복동생 난남이에게 동냥젖을 물리며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어린 몽실이의 이야기다. 그러나 책으로 읽지 않으면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만나면 적이기 때문에 죽이려 하지만 사람으로 만나면 죽일 수 없다”는 절절한 이 문장을 만날 수 없다. 권정생은 반공 동화가 판을 치던 때에 반공에 반대하며 ‘남과 북은 한민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몽실언니>를 썼다. 몽실이가 인민군 언니, 오빠의 도움을 받고 ‘사람’의 정을 느끼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는 모두 빠졌으니 드라마만 본 사람은 권정생이 이야기하고자 한 <몽실언니>를 온전히 만났다고 할 수 없겠다.

그림책《강아지똥》
권정생 글. 정승각 그림, 길벗어린이

조금 배가 고프더라도 행복하게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나 태평양전쟁까지 줄곧 전쟁마당에서 자란 권정생은 전쟁이 끝나서야 비로소 고국 땅으로 돌아온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어릴 때부터 진절머리 나게 겪은 전쟁을 또 겪는다. 6.25 전쟁이었다. 전쟁 때문에 권정생은 중학교 진학의 꿈도 건강도, 모든 것을 잃는다. 열아홉 살에 결핵에 걸려 수도 없이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던 그는 집안 사정으로 3개월간 거지로 떠돌다 1968년 안동 조탑리 일직교회 문간방에 종지기로 정착한다. 3개월간의 거지 생활로 그는 온몸에 결핵균이 퍼져 콩팥 방광까지 다 들어내어 소변 주머니를 밖으로 달았고 남은 시간 2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서른 살 무렵이었다.

몸과 마음은 고통과 절망의 늪으로 점점 빠져들었지만 그는 새벽마다 종을 쳤다. 종을 치다 보면 깨끗한 하늘에 수없이 빛나는 별들과 종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며 누구보다 가장 큰 고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아온 예수와 마음을 나누며 위로받았다. 그는 “언제나 감싸주고, 사랑을 가르치고, 날아가는 참새와 들꽃을 노래한 한 폭의 그림처럼” 산 예수를 사랑했다. 예수처럼 조금 배가 고프더라도 행복하게, 그렇게 살고 싶었다.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부당하다고 생각하신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 우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 한 사람이 하루를 살아갈 돈은 얼마면 될까요?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맞게 살아갈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한 것입니다. 내 몫의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니까요.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권정생은 겨울에는 춥게, 여름에는 덥게 살며 좋아하는 산나물 반찬을 먹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작은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 생각하였지만 병마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그는 ‘글쓰기 농사’를 지었다. 글쓰기는 어릴 때부터 키워온 그의 꿈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방편이기도 했다.

그의 산문을 모아 펴낸 책 <우리들의 하느님>(1996)을 보면 권정생은 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가치를 두는 세상을 거부하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지향한다. “풍요로운 삶이란 새 한마리까지 함께 이웃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책에 썼듯이, 글이나 말과 행동이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이 일관되었고 평생 글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똥이 꽃보다 아름답다

1968년 어느 봄날, 권정생은 강아지똥이 잘게 부서진 자리에 민들레꽃이 핀 것을 본다. 사람들은 민들레꽃에 눈길을 주었지만 권정생은 ‘거꾸로’ 제 몸을 잘게 부수고 있는 강아지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아지똥은 지렁이만도 못하고 똥강아지만도 못하고 그런데도 보니까 봄이 돼서 보니까 강아지똥 속에서 민들레꽃이 피는구나.”  (어린이문학, 1999년 2월)

권정생은 버려진 강아지똥이 병들어 죽음 앞에 선 자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강아지똥처럼 거름으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니 그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며 위안을 주었다.

“<강아지똥>을 쓴 것이 이제부터 30년 전인 1968년 가을에서 1969년 봄까지였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꽃이나 해님이나 별같이 눈에 잘 보이는 것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저는 잘 보이는 것보다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꾼 거지요. 그래서 버려지고 숨겨진 목숨을 찾아 그것들을 이야기로 썼던 것입니다.” <먹구렁이 기차>(우리교육, 1999)

강아지똥이 민들레꽃을 피웠다. 똥이 거름이 되었다.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거름이 되는 것, 똥의 존재와 가치가 달라지는 순간이다. 권정생이 민들레꽃을 조연으로 내리고 강아지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단순한 자리바꿈이 아니라 ‘버려지고 숨겨진 목숨’들의 가치를 되찾는 일이다. <강아지똥>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더럽고 쓸모없는 ‘강아지똥’이 동화의 주인공인 것에 놀랐고 ‘똥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작가 정신에 더욱 놀랐다.

이 동화가 세상에 나온 지 45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 아동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권정생님은 1969년 <강아지똥>으로 등단했으며, 벙어리, 거지, 장애인, 지렁이 등 세상에서 소외받거나 작고 약한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작품들을 발표해왔습니다.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림책 <강아지똥> <몽실언니> <우리들의 하느님> 외 40여 편의 동화, 소설, 시뿐만 아니라 동극과 콩트 등이 있습니다.

디자이너 김영세

우리나라 제1세대 산업 디자이너 김영세. 삼성 가로본능 휴대폰,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 등등 그는 빌 게이츠가 ‘디자인계의 구루(지도자)’라고 표현할 만큼, 창의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에 산업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생소했을 시절부터 디자이너의 꿈을 꾸고, 디자인의 씨앗을 심고 발전시켜온 김영세(65). 1986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한국인 최초로 ‘이노디자인’을 세우고 본격적인 디자이너의 길을 걸어온 지 30여 년. 아직도 그는 ‘디자인’이라는 말에 가슴이 뛴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최근 그에게 연일 기분 좋은 소식이 있었다. 이노디자인이 자체 브랜드로 처음 제작한, 헤드폰 ‘이노웨이브’가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인 ‘2014iF디자인어워드’ 디자인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3월 김영세 뮤지엄(YKDM)이 드디어 개관한 것. “내가 어떤 동기를 만나 디자이너의 꿈을 갖게 됐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꿈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가 뮤지엄을 만든 이유였다.

디자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미국 ‘IDEA’ 상들을 휩쓸고,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된 그의 디자인들은 일상에서 시작된다. 여행 중 불편함에서 나온 여행용 골프가방 프로텍, 아내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한 손으로 쉽게 꺼내어 볼 수 있는 슬라이드 개폐 방식의 콤팩트, 딸을 위해 만들게 된 액세서리처럼 생긴 MP3 등등. 그래서 그는 디자이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상에서 출발하라.”

선생님을 보며 디자이너의 꿈을 꾼 이들도 많은데요,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무엇보다 남들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에서 남들이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죠. 그리고 그게 전달돼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행복해지고. 그게 쌓이면 자연스럽게 보는 눈이 달라지고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게 돼요.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진하게 관심을 가져요.(웃음) 인간으로서는 쓸데없을지 모르겠으나 디자이너로서는 반드시 가져야 할 관심인 거죠. 사람들에 대한 관심 없이는 새로운 디자인이 나올 수 없으니까요.

‘진한 관심’에서 비롯된 디자인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으신가요?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였어요. 지하철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마주쳤는데, 난감한 표정으로 에스컬레이터 앞에 있더라고요. 디자이너로서 그를 도울 수 없을까? 고심하다 떠오른 아이디어가 에스컬레이터의 양쪽 끝에 스키처럼 생긴 발판을 두 개 만들어서 나오는 방식이었어요. 그리고 그러한 장치를 실제 디자인해서 발표했죠. 그걸 보고 교수님도 굉장히 격려해주었는데, 그때부터 저의 디자인에는 발명이라는 키워드가 파고들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창의력을 발산하는 방법도 체득했지요. 불편함을 관찰하라는 것. 그런데 안타까운 게 이게 아직 세상에 나오지를 못했어요. 지금이라도 다시 살려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모든 게 이노디자인 슬로건 ‘디자인은 사랑이다(Design is loving others)’라는 철학과 연결돼 있는 거 같아요.

디자인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중에 가장 핵심은 사랑이다, 이렇게 시작된 겁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게 선물인데 그게 디자인이 아닌가 생각해요. 선물을 고르면서 어떤 것을 그 사람이 더 좋아할지 고민하듯이 디자인도 고민을 하는 거죠. 그래서 디자이너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듯이 디자인하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디자인은 사랑이다’라는 걸 느낀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들이 16살 때, 어버이날에 아내에게 쿠폰북을 선물했어요. 세차하기, 설거지하기 등이 적혀 있는 쿠폰인데, 쿠폰마다 만기일이 적혀 있었는데 마지막 쿠폰 ‘엄마를 사랑하기’에만 ‘만기 없음’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걸 보는 순간 아내가 눈물을 흘리는데, 이게 바로 디자인이구나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엄마가 기뻐할까 궁리하며 아들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그리고 썼을 거 아니에요? 참된 디자인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했죠. 사랑이 담긴 디자인은 반드시 마음을 움직이게 되어 있더라고요.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마음이 모든 것이겠지요. 뭘 표현한다는 것은 마음이 지시하는 것일 거고. 마음을 전달하는 메시지가 제 경우에는 디자인인 것이죠. 결국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거죠.

그가 디자이너의 꿈을 갖게 된 것은 열여섯 살 때였다. 우연히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외국 디자인 잡지를 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가정용품, 조명기기, 병따개 등 멋있고 신기한 디자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설렘이 전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디자인이다!라는 결코 시들지 않는 목표가 생긴다. 하지만 그가 디자이너를 꿈꿨던 1960, 19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산업 디자이너라는 호칭조차 없었을 때였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1976년, 그는 산업디자인으로 유명한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언어의 장벽, 동양인에 대한 차별 대우…. 그 길이 녹록지만은 않았지만 그의 디자인에 대한 열정, 한결같이 밀어붙이는 뚝심과 배짱, 치열하게 도전하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매번 새로운 기회들이 주어졌다.

최근 개관한 YKDM(김영세 뮤지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안에 위치하고 있다.
아래 지하철 이촌역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어어지는 나들길. 전체적으로 T라인(태극라인)을 활용해, 박물관의 정체성을 보여주도록 디자인했다.

그리고 그는 1986년 첨단산업의 심장부인 실리콘밸리에 한국인 최초로 디자인 전문회사 ‘이노디자인’을 세운다. 자신의 꿈과 희망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오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디자인은 기술이 먼저 나오면 그것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의문을 갖는다. 우리가 먼저  아이디어를 내고, 그걸 생산할 수 있는 회사에 찾아가서 제공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생각해낸 것이 ‘디자인 우선주의(Design First)’라는 개념이었다.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그는 ‘디자인을 먼저 정하고 그것에 맞는 제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많은 기업들과 함께 수많은 히트 상품을 만들어낸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이리버 MP3이다. 2001년 천편일률적인 사각형의 MP3들 속에 나왔던 세계 최초의 삼각기둥 형태의 MP3(iFP-100시리즈)는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더불어 작은 중소기업이었던 아이리버(당시 레인콤)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009년 일본의 유력 경제지 닛케이 BP는 ‘세계 10대 디자인 회사’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이노디자인을 뽑았다. ‘디자인 우선주의’라는 프로세스를 세계 최초로 시도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때로는 실패하는 디자인도 생기고 또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설령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누군가 실패라 말해도 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여겨요. 디자인이라는 것은 미래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 있는 요인이 너무 많거든요. 마이클 조던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수많은 골을 성공시켰을 때는 그거 곱하기 서너 배 되는 골을 실패했다고. 만약에 실패를 안 했다면 도전을 안 한 거겠죠.

‘이노의 디자인에는 빼기 기법을 쓴다’는 말이 다가왔습니다. 좀 더 설명해주신다면요?

이노의 디자인을 어린 친구들이 재미나게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심플 쌈박이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고맙다고 했죠.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 이노디자인의 핵심이니까요. 왜냐하면 군더더기는 값어치가 없고 또 쓸데없는 비용이에요. 빼기 디자인이란 군더더기를 빼자예요. 그렇게 하면 그 결과는 심플 쌈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가격이 싼 상품이 돼요. 늘 디자인의 3대 요소는 진선미라고 합니다. 진은 기능이 진실해야 한다, 선은 가격이 착해야 한다, 미는 모양이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면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하려면 빼기 디자인이 필요하죠.

처음 선진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가며 그가 다짐한 것이 있었다. ‘디자인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이다,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어 한국의 디자인 발전을 위해 애쓰겠다’는 것. 그의 바람처럼 처음 그가 디자인을 시작했던 당시와 2014년의 지금, 서울의 거리와 한국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인식도 엄청나게 변화되었다.

디자인 미개척지에 태어나 먼저 앞서가며 씨를 뿌리고, 개척하는 그 발전의 과정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감사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 디자인을 이끌어갈 후배들을 키우기 위해, 후배들을 위한 멘토링 강연 활동 등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인터넷 SNS 트위터(@YoungSeKim)를 통해 젊은이들과의 소통도 즐긴다.

김영세 디자이너 하면 T라인 디자인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생활 전반에 걸쳐 태극라인을 활용해서 디자인을 하고 계시잖아요. 디자이너로서 한국적 디자인이란 뭘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딱 들어온 게 태극기의 선이었어요. 이 오묘한 선들의 조화로 어떤 디자인도 가능하겠구나 싶었죠. 앞으로 이 태극라인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으로 세계에 코리아의 이미지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디자이너로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움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늘 끊임없이 도전해 오셨습니다. 그런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완벽하지 못하다는 걸 아는 거지요. 디자인도, 작품도. 목표만큼 나오질 않는구나. 어떻게 보면 부정적인 건 아니에요. 열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만약에 이루었다면 열정은 식잖아요. 열정이 진행 중이란 것은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여기까지 왔는데 그다음엔 뭘까. 잣대를 높여가는 거죠. 그러러면 또 엄청나게 노력을 해야 하죠.

얼마 전 트위터에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덕목은 정성과 재능이다. 그런데 정성이 80% 재능이 20%다’라 하셨는데요.

최근 이야기인데 우리가 해놓은 일을 보고 상당히 부족한 부분을 발견했어요. 왜 여기까지밖에 안 될까. 그러다 보니 재능이 아니라 정성이 부족했구나를 알겠더라고요. 예를 들면 프로젝트에 대한 정성, 최종 사용자들에 대한 정성, 이런 정성이 없으면 재능이 아무리 많아도 나의 재능을 어디다 쓸지를 몰라요. 그런데 재능은 약간 떨어지더라도 정성이 지극하면 그 재능을 찾아서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세계적인 디자인 컬렉션 브랜드인 애크미의 펜과 생활용품. T라인을 활용해 세계에 ‘한국의 현대적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자신의 일을 즐기며 결과적으로 남을 기쁘게 하는 창조적인 사람들을 일컫는 퍼플피플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미래를 이끌어갈 사람들은 퍼플피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우리는 짧은 순간에도 가치를 생산하는 창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예를 들어 식당 일을 하더라도 손님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퍼플피플이에요. 돈 벌려고 어쩔 수 없이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얼굴 표정부터 다르죠. 스스로 내가 하는 일은 내 거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동안에 많은 걸 배우고 진화하게 되죠.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대단한 재능을 받아서 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개발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인 거죠. 그래서 나의 일을 내 일처럼 할 때 ‘내일’이 생긴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자기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정말 즐겁게, 자기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디자인이란 사람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 디자인이 사람을 위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믿는 그는 늘 호기심과 설렘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희망이 많은 사람은 젊은 사람이고, 후회가 많은 사람은 늙은 사람이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항상 젊다. 그가 앞으로 가져올 디자인이 또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줄까. 희망과 설렘을 주는 그는 우리들 역시 젊게 만들어주는 마음 디자이너이다.

“나의 디자인의 세 가지 키워드는 생활, 문화, 공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으며, 그들 모두를 연결하는 고리는 사랑이다.” – 김영세

김영세님은 1950년생으로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일리노이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1986년 미국에 이노디자인을 설립한 이래, 디자인계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지는 IDEA 금, 은, 동상을 모두 수상하는 진기록을 남겼으며, 미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1999년 한국에 지사를 만듭니다. 중국과 일본으로도 진출했으며, 현재 상명대 디자인대학 석좌 교수로도 재직 중입니다. 저서로 <이매지너> <퍼플피플>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