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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주치의 이종욱 WHO 사무총장

한국인 최초 국제기구 수장이었던 고(故) 이종욱 WHO(World Health Organization,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2003년 1월 선출되어, 같은 해 7월 제6대 WHO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던 그는 결핵, 두창(천연두), 에이즈, 소아마비와 같은 질병을 물리치는 데 기여함으로써 ‘백신의 황제’ ‘아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렸다. 하지만 정작 그의 헌신적인 삶과 업적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삶의 무대가 대부분 국제 사회였고,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헌신적인 삶을 살다간 이종욱 박사의 삶과 생애를 들여다본다.

정리 김혜진 & 사진 제공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1981년 남태평양에 위치한 조그만 섬나라 사모아에 한 동양인 의사가 도착했다. 태평양 섬들을 오가며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 중인 이종욱 박사다. 그는 청진기와 같은 의료 기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직접 환부를 쓰다듬으며 진료했고, 이런 모습을 수행하는 현지 의료진들에게 보여주며 진료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종욱 박사에게 개발도상국의 보건의료인 양성은 평생의 꿈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약 26개 개발도상국 350여 명의 보건의료 인력이 한국을 찾고 있다. 이른바 ‘이종욱 펠로우십’이라 일컫는 이 프로그램은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뜻을 잇기 위해 개발도상국의 의료진을 대상으로 하는 후진 양성 프로그램으로, 한국에서 선진 의료 기술을 익혀 자국의 국민들을 치료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뜻은 그의 삶에서 비롯됐다.

이종욱 박사는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쟁의 경험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갖게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무렵, 어머니, 두 형제와 서울서 대구까지 60일 동안 눈보라 속을 걸었을 때 그는 사람에 대한 연민을 처음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것이 그가 봉사하는 삶을 선택했던 이유였다. 대학 시절에는 경기도의 한센병 환자촌 ‘나자로 마을’에서 활동을 벌였고, 1994년에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HO 본부로 갈 때까지 남태평양 한센병 퇴치 팀장으로서 남태평양 오지에서 진료 활동을 벌였다. 그는 “내가 처음 WHO에서 취업한 것은 월급이나 여러 조건들이 좋아서였다. 숭고한 사상을 가지고 취업한 것은 아니다”고 했지만,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WHO 예방백신국장으로 근무하며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선포해 1년 만에 소아마비에 걸리는 비율을 인구 만 명당 한 명 이하로 떨어뜨리며 ‘백신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고, 결핵국장으로 있을 때에는 비싼 결핵약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국제의약품기구를 만들어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것.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제6대 WHO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12월, 서남아시아 지진 후 파키스탄 내의 캠프에서 겨울을 보낸 사람들의 보건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

“이 일이 과연 옳은 일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해야 해”

이종욱 박사가 WHO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며 가장 중요하게 내건 공약은 바로 에이즈 감염자들에게 항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를 투여하는 치료 사업인 ‘3 by 5’ 사업이었다.

2005년까지 개발도상국에 거주하는 3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항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약값이 너무 비싸서 6백만 명의 환자 중 40만 명만이 약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환자 대부분이 의료 체계가 빈약한 아프리카 회원국인 데다, 확보되지 않은 예산 등으로 불가능한 공약이라는 직원들의 우려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록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1백만 명이라는 많은 사람에게 약을 공급했던 것. 이는 큰 전환점이 되었고, 공감대를 만들어 모든 국가의 관심과 지지를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2008년 비로소 3백만 명이 치료 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한 WHO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 중대한 질병이 발생하거나 긴급 사태가 발생했을 때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위기관리센터 ‘전략보건운영센터(SHOC)’를 만들어 신종플루 등 각종 재난에 체계적으로 대처하기에 이른다.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해야 해. 돈이 없어서, 전문 인력이 부족해서, 같이 일할 지원 인력이 필요해서, 회원국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렸다가….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면 한이 없거든. 옳은 일을 하면 다들 도와주고 지원하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라고. 그러나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결국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셈이지. 이건 실천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것만도 못한 죄악이라네.”

이종욱 박사는 현지인들과 친해지기 위해 직접 그들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무총장 취임 후 처음 방문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쾀랑가에서 주민들과 어울려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이종욱 박사는 3년 동안 60개국을 순방, 병들고 가난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위로해주기 위해 고된 여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낮아질 준비를 하고 지낸다네”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섞여 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긴급한 의료 지원을 필요로 하는 60개국 이상을 방문했고,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질병의 퇴치 기금 마련을 위해 각국 정부 지도자와 기업인, 유명 인사들의 관심과 협력을 구하는 데 헌신했다. 1년에 150일 출장, 비행기로 30만 킬로미터 넘게 이동하며 이등석 좌석에 두 명의 수행원을 동반했고, 때론 혼자 다녔다. 자기 소유의 집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솔직히 자신이 없어. 각국의 국가 원수를 자주 만나고 좋은 음식만 먹고, 내로라하는 사람들과 회의를 하지. 대접을 받다 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혹시 교만해지고 또 건방져질지 말이야. 그래서 나는 항상 낮아질 준비를 하고 지낸다네. 은퇴하면 한 사람의 자연인 이종욱일 뿐이지.”

2006년 5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과로로 숨졌을 때,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Man of action 행동하는 사람’

“이종욱 박사는 보건계의 수장이었다. 그의 지도력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종욱 박사의 원칙, 온정, 추진력 덕분에 노력과 결단만 있다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세계적 보건 문제도 극복할 수 있다는 박사의 신념을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다. 그의 죽음이 세계의 건강 공동체에 비극적인 상실이긴 하지만, 세계는 그의 비전과 영감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보다 건강하고 보다 평등한 세계를 구축하는 데 대한 그의 공헌은 인류의 영원한 유산이 될 것이다.”

– 빌 게이츠,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대표

파키스탄 지진 재해 지역 방문. 2005년 12월. 파키스탄 아바스 의과학연구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9세 소녀 아미나. 지진으로 인해 집이 붕괴되었을 때 그녀는 잔해에 발이 잘렸다. 이종욱 박사는 “아미나 가족과 같은 수십만 명의 이재민을 잊을 수가 없다”고 밝혔다.

인류의 주치의 이종욱(1945~2006) 박사는 서울대학교 의예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센병 환자 등을 치료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던 그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자, WHO 서태평양 지역 사무처 한센병 자문관으로 국제기구에 들어갑니다. 이후 20여 년간 주요 요직을 거치며 뛰어난 성과를 남겼으며, 2006년 5월 22일 WHO 총회 준비 중 과로사로 서거합니다. 이 글은 <이종욱 평전>(데스몬드 에버리 지음, 이한중 옮김) 등의 자료를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SNS 시인, ‘시팔이’ 하상욱

SNS에 시를 써서 스타가 된 ‘시스타’가 있다. 뛰어난 재치, 촌철살인의 통찰력, 감성을 뒤흔드는 시들로, 수많은 네티즌의 마음을 사로잡은 하상욱(33) 작가다. 한순간에 평범한 직장인에서 인기 작가가 되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시를 팔아 먹고산다’며 ‘시팔이’라 부른다. ‘웃고 있는데 왠지 슬픈’ 공감 백배, 웃음 백배인 그의 시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단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하상욱 작가를 알게 된 건 페이스북에서였다. 평범한 일상사를 짧고 간단히 정리한 시 안에는 재기 발랄함을 넘어 촌철살인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었다. 재미와 웃음, 그리고 한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글들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가 낸 첫 전자시집 <서울 시>는 1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와 함께 인기에 힘입어 두 권의 종이책으로도 발간, 15만 권 이상 팔렸다.

검은색 뿔테 안경에 꽃무늬 넥타이를 매고 하상욱씨가 인터뷰 장소로 들어섰다. 재밌는 사람일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그는 내내 진지했고, ‘고민’이란 단어를 일상 용어처럼 반복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내다가 이젠 당당히 전업 작가로 살아가고 있는 그에겐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여전히 고민 중이라는 이 남자, 우리로 하여금 ‘드라이아이스’를 보며 새삼 고마운 인연을 생각해보게 만든 사람, 시자이너 하상욱씨에게 요즘 기분부터 물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갑자기 유명해지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거 같아요.

사실 힘들어요. 처음엔 제 SNS에 친구 공개로 시를 올린 거였거든요. 그러다가 전자책으로 내게 되고, 독자분이 재미있다고 올리면서 인터넷에 퍼져서 여기까지 온 건데 사람들은 제가 유명세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저부터 인간관계나 일적인 면에서 30년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패턴으로 움직이니까 부담스럽기도 하고 적응이 안 되죠. 기존에 저를 알던 사람들과 편한 관계로 남고 싶으니까 말 하나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돼요. 가령 누군가가 부탁했을 때 부득이하게 거절하면 ‘떴구나~’ 해버리니까 답이 없어요. 뭔가 이상해져버린 느낌, 근데 이해는 가요. 이 상황을 어떻게 풀까 걱정이죠. 특히 저를 부러운 시선으로 보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어요. 대화를 하면 ‘야, 그래도 너는…(유명해져서 돈 잘 벌면 성공한 거 아니야?)’ 그 말이 그렇게 듣기가 싫어요. 사실 저는 잃은 것도 상당히 많아요. 그게 많이 슬프고 아프기도 해요. 그다음에 내가 뭘 해도 참 힘들겠다 생각하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시각으로 보니까요. 이 생활이 언젠가 끝날 텐데 다음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되죠.

사람들이 막연히 갖고 있는 고정 관념에 대해서 깨주고 싶은 게 많겠어요.

너무나 깨주고 싶어요. 고정 관념이 결국 자기를 힘들게 해요. 지금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이 예전처럼 부러워 보이지 않아요. 불쌍하다는 느낌도 많이 들고, 저는 아이돌 가수들이 요즘 되게 측은해요. 어렸을 때부터 이런 걸 겪으면서 살아왔을 텐데 제가 힘든 것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요. 보통 강인함을 갖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겠구나 싶어요.

새삼 ‘웃기려는 게 아니라 울리고 싶어서 글을 쓴다’고 하신 말이 다가오네요. 콘텐츠가 인기가 많아지면서 <서울 시>를 패러디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 안에 나름 이야기를 담으려 노력했는데, 결국 표면만 보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구나. 안타까운 것은 글에 편견을 담아 재미를 주거나 외모를 소재로 쓴다거나 너무 비판적인 글을 쓴다거나…. 그런 식으로 되는 건 슬퍼요. 형식은 빌리더라도 저와 또 다른 이야기를 하면 좋을 텐데 하죠.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는 느낌은 못 받았거든요.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느 철학책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름대로 철학서라고 생각하고 쓰고 있어요. 사실은 눈물 나게 하고 싶어요. 정말 슬픈 것은 웃기면서 슬픈 거잖아요. 저는 작은 얘기에도 큰 얘기가 똑같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쓴 글 중에 ‘아닌데? / 맞는데? / 쌩얼’ 이란 글이 있어요. 제가 강연 때 쌩얼이 어떤 거냐고 물어보면 기준이 다 달라요. 결국 우리가 겪는 갈등의 대부분이 기준 문제인 게 많거든요.

<서울 시>에 있는 작가 소개란.
하상욱씨의 재치가 돋보인다.

“책은 <서울 시>인데 연고도 없는 부산경찰 SNS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는 하상욱씨.

가까이에 있는 사람끼리라도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정말 달라지겠죠.

그 정도만 돼도 상당히 많이 바뀌죠. 사회가 바뀌기 위해선 정책이나 법이 중요한데 그것은 사람들의 의식이 만들어주는 거니까요. ‘저 사람도 저래? 나만 그런 게 아니네’ 알게 되면 상대를 이해할 수 있고, 상대를 배려할 수 있겠죠. 사실 모든 문제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게 아닐까요. 공감이라는 평범한 사람들의 특권을 재밌게 누렸으면 좋겠어요.

원래는 웹디자이너 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다 시를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처음에 시를 올렸을 때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더라고요. 그 재미로 했었죠. 그리고 디자이너다 보니까 이미지가 아닌 글로도 재미를 찾아보고 싶었거든요. 규칙을 만들고 싶었는데 디자인하는 습관이 글에도 담기더라고요. 그래서 시자이너란 말을 쓰기도 했고요. 일단 길게 쓰는 게 싫었고 짧게 압축하면서 쓰는 게 재밌더라고요. 페이스북의 영향이 컸어요. 디자인의 첫 번째 원칙은 단순화거든요. 어떤 작품에서 한 요소를 더 빼면 타인이 내 의도를 못 알아보는 시점이 있는데, 그때까지 모든 것을 단순화시키죠. 좋은 디자인은 ‘더 이상 뺄 게 없는 디자인’인데, 똑같은 개념을 글 쓸 때도 대입시켰죠.

<서울 시>를 읽으며 디테일한 감정을 잘 포착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남들이 보기에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해요. 말을 하고 나서 괜히 불편할 때가 있잖아요. 다들 아는데 애써 말하지 않는 것들…. 가령 일을 하다가도 ‘아까 커피숍에서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했지?’ 곰곰이 생각하는 거죠. 가령 인터뷰를 하다가도 인터뷰가 끝나면 할 말이 없잖아요. 그런 어색한 상황은 왜 생길까. 이모티콘을 쓰는 게 나은가 안 나은가 그런 고민들을 깊게 해요. 그런 디테일한 감정들을 알아가는 게 재밌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말실수가 없는 편이에요.

사실 상대방과 말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상처 줄 때가 많잖아요.

그런 경우가 많죠. 저는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살 좀 찌세요. 그런 말을 되게 많이 듣거든요. 근데 잘 살펴보면 그 사람이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 대화 속에는 마치 좋은 말처럼 포장되어 있는 말들이 있어요. 오히려 진짜 가까운 사람들은 살 좀 찌라고 안 하거든요, 그냥 존중해주죠. 사소하게 던지는 말, 긍정적인 말에도 공격적인 말이 상당히 많아요. 그런 것들을 되새겨 보기 위해 글 쓸 때 고민을 많이 해요. 그래서 제 글 대부분이 관계에 대한 글이 많아요. 우리 관계가 왜 이렇게 됐지?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거죠.

글을 쓸 때 어떤 부분에 가장 신경 쓰시는지 궁금해요.

사람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서 조사 하나, 1인칭, 3인칭 시점 등을 많이 생각해요. 그리고 내 이야기처럼 쓸 때 맘이 더 편하겠다, 남의 이야기처럼 쓸 때 맘이 더 편하겠다 구분하면서 써요. 가령 강한 비판이 담긴 글은 내 이야기처럼 써요. 그래야 맘이 더 편하니까. 남을 비판하는 것처럼 쓰면 상대를 힘들게 하고 굉장히 되바라진 느낌이거든요. 가령 얼마 전에 쓴 글인데 ‘진짜 친구가 아니라며 실망만 했네 / 진짜 친구가 되어주려 하지 않고’ 이런 글들은 내 이야기로 쓰죠. 이걸 반대로 쓰면 굉장히 불쾌한 글이 돼요. ‘왜 진짜 친구가 아니라고 뭐라고만 하니 / 진짜 친구가 되어주진 않고’ 이렇게 글을 쓰면 고민하지 않게 돼요. 내가 아닌 남이 나한테 잘못한 거니까. 결국 내 탓일 때 돌아보게 되거든요. 뉘앙스 하나가 사람한테 생각하게 하느냐 마느냐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는 거 같아요.

쉽게 쓴 글처럼 보이는 면도 있었는데 그렇게 섬세했구나 싶어 놀랍네요.

쉽게 한두 편은 쓸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런 고민이 없었다면 5, 6백 편의 글들이 욕을 먹어도 진작 먹었을 거예요. 저는 공감만큼 사람을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해주는 게 있을까 싶어요. 사실 <서울 시>에 담은 글은, 저는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질문을 던지는 글이에요. 이왕이면 우리가 좋아하는 감정들, 찐한 웃음, 슬픈 눈물 속에서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거죠. 누가 누구를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 안 해요.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글 중 하나가 ‘계기가 없는 걸까, 의지가 없는 걸까’예요. 누군가가 나를 바꿔줄 거란 기대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거든요.

‘시팔이’ 하상욱님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를 졸업했으며 전자책 전문 회사에서 기획자 겸 에디터로 활동했습니다. SNS에 우연히 올린 글이 인기를 끌면서 2012년 전자시집 <서울 시>를 발표했으며 이후 <서울 시> 1, 2권을 출간,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혹시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나요?

20대 분이었는데 나중에 자기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은 서울시 1, 2권에서 슬픔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지금의 바람은 제 글들이 몇 년 후에 봤을 때는 공감이 안 되는 게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어떤 생각을 만드는 글이 됐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그런 글이 되면 어떨까’라고 하셨죠. 사실 창작자라면 자기 작품이 오래 남길 바랄 텐데, 그런 마음까지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있나요?

어떤 게 비호감일까 생각해보면 대부분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물론 누군가는 저도 그런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유명해지는 게 목적이었다면 예능 프로를 여러 개 하고 있었을 거예요. 전 그런 생각을 해요. ‘나는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다, 영원히 머물 사람처럼 행동하면 이게 다 내 것처럼 행동하면 내려놨을 때 살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오늘 하루 잠깐이라도 그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그것도 큰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누군가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랬듯이 누구나 평범함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거니까요.” 누군가의 성공을 쫓아가기보다는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먼저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는 하상욱 작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타인과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가 평범한 우리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

여행이라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나와 만나고, 새로운 사람과 만났던 소중한 순간의 이야기

뚜벅이 가족 여행 도와준 고마운 제주 아저씨

변창기 51세. 직장인. 울산시 동구 남목15길

2010년 4월 중순, 정리 해고가 되었다. 10년을 다닌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잃고 나니 황당했다.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걱정이 떠나지 않아 3개월 동안 골머리만 썩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제주도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고 했다. 훌훌 털어버리고 가족과 여행을 하고 나면 나도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생길 것만 같았다.

여행 기간은 일주일을 잡았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보자는 취지였다. 가족 여행 여섯째 날. 초등학생 3학년 아들과 중학교 2학년 딸과 아내 그리고 가볍지 않은  보따리 하나씩 짊어지고 6일째 뚜벅이 여행을 했더니 지치고 힘든 상태였다.

어느 한 곳의 관람을 다 하고 다음 여행지로 가려고 관람지 정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초콜릿박물관을 보고 싶어 했다. 지도상으론 바로 옆에 있었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어느 필름 회사 이름이 붙어 있는 승합차에서 내리는 분께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 보았다. 그분은 잠시만 기다리라더니 짐 칸에서 박스 몇 개를 가지고 관람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나와서 말했다.

“타세요. 그곳으로 가는 길이니 태워다 드리지요.”

우린 사막에서 시원한 샘물을 만난 듯이 기뻤다. 그분의 승합차에 타서 뭐하는 분인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동안 힘든 여정을 살아오신 분이다. 17년 전, 총각 시절 부산에서 사업하다가 하루아침에 거덜 나고, 혈혈단신 제주도로 왔다고 했다.

먹고살 일을 찾던 차에 필름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처음엔 힘들었지만 지속적으로 가게를 찾아다니며, 주인이 바쁘면 일도 거들고 청소도 해주며 노력했더니 공급처가 생기면서 사업이 되어 갔다고 했다. 영업은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진실하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왜 우리를 태워주냐고 물었더니 제주도 와서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힘들게 여행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은 결혼도 하고 중학교 3학년 된 딸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차량 봉사를 한 게 우리만이 아니었다. 그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힘들게 여행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태워주고 있었다.

그분은 우릴 위하여 일부러 해안 도로로 달렸다. 송악산에 들러 잠시 공급처에 물품을 내려주고 다시 해안 도로를 타고 천천히 차를 몰며 해안 구경을 시켜주었다. 버스를 타고 갔다면 볼 수 없었던 주상절리라는 절경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가 주상절리를 구경하는 사이, 그분은 물품을 배달해주고 다시 우리를 태우러 왔다. 귀찮다면 귀찮은 일임에도 그분은 계속 ‘가는 길’이라며 태워주었다.

“내일은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가 찜질방에 내려 하룻밤 지낸다고 하니 다음 날 일정을 물어본다. 표선 쪽으로 가서 한 바퀴 돌 거라고 했더니 그분이 말했다. “그럼 내일 오후 3시쯤 성산일출봉 구경하고 계세요. 제주 시내까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그다음 날 약속 시간에 그분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구경 잘했냐면서 밝은 모습으로 우릴 맞아주었다. 우린 다시 그분 승합차를 타고 차량 여행을 했다. 오전부터 날이 흐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니 그분이 더없이 고마웠다. 비도 내리고 갈 길은 먼데 짐 보따리를 든 채 버스를 타고 여행했다면 아마도 가족 모두 벌써 지쳐 버렸을 것이다.

“어디 또 들러보고 싶으세요?” 그분이 친절하게 물었다. 아들이 미로공원에 가보고 싶어 한다고 하자 기꺼이 우리를 안내했다. 그분은 영업하러 갔다가, 구경이 끝날 즈음 다시 데리러 왔다.

다음 날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해서 공항에서 가까운 찜질방을 찾는다고 하니까 그분은 또 그곳까지 태워다 주었다. 가족과 한 번 가보았는데 좋더라며.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지내본 찜질방은 모두 후덥지근해서 좀 그랬는데 그분이 소개해준 곳은 시원했다. 모두 제주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그곳을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 가족은 그분 덕분에 좋은 구경도 하고 즐거운 제주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여행 하면 가장 고마운 분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은 따듯한 곳임을 깨닫게 해준 분이다.

강예신 작.
<소유… 존재>
162×130cm. Oil on canvas. 2012.

내 어머니 정읍댁의 팔도 유람

김현 완산여고 교사

‘여행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팔순이 넘으신 제 어머니와 이모에겐 여행이 힘을 준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어머닌 온 생을 자식들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위한 삶을 살지 않겠냐만 어머닌 유독 심했습니다. 시골 동네에서 버스를 빌려 놀러 가는 날에도 어머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싫어 엄마도 가시라고 하면 버스를 타면 어지럽고 속이 안 좋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조금 못마땅해했습니다. 특히 동네에서 여행을 갈 땐 더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부가 짝이 되어 놀고 마시고 즐기는데 아버지 혼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아버진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어이! 자네 죽어서 여행 갈라구 그렁가. 죽으면 보고 싶어도 못 봉게 가세잉!” 그러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영감이나 재미나게 댕겨오쇼잉. 나는 안 갈랑게.”

그렇게 여행을 가자! 안 간다! 하던 두 분은 이제 이승과 저승의 양쪽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4년 전 여든여덟을 일기로 이승의 삶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닌 아버지 영정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여행 한 번 떠나지 못했음을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너그 아부지가 떠난께, 살아서 너그 아부지 말 안 들은 게 쪼께 미언허구나.”

그러면서 자신도 얼마 남지 않은 생, 팔도강산을 돌아댕겨야겠다 혼잣말을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은 자식들은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돌아가신 지 1년이 안 돼 실행하게 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모님이 동생을 찾아 시골집에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팔십 중반을 넘긴 이모님은 걷기를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그때 두 분을 모시고 새만금에 갔습니다. 육십 년, 칠십 년 만에 떠나는 자매의 첫 여행일지도 모릅니다.

백발이 성성한 두 자매는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풍경을 바라보며 “참 좋다! 참 좋아! 죽기 전에 이런 데도 와 보구, 니 덕에 좋은 귀경헌다”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찌나 죄송하고 마음이 짠하던지요.

새만금에 다녀온 후 댁에 가신 이모는 자식들에게 엄청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둘째 형과 형수가 일을 잠시 미루고 어머니와 이모를 모시고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강원도를 구경하고 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가려 했던 형은 일 때문에 잠시 시골에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 제가 두 분을 모시고 고창에 갔습니다. 두 분이 코스모스 꽃밭을 조심조심 걷습니다. 젊은 사람들 속에 백발을 하고 코스모스 꽃길을 걷는 이는 어머니와 이모 두 사람뿐입니다.

“옛날 생각나네. 처녀 적에 우리도 이런 꽃길을 걸었는디.” “난 생각도 안 나네. 땅 파고 풀 매고 이렇게 백발 신세가 되었응게.”

다시 집에 오는 길. 두 노인은 피곤도 할 터인데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1시간 넘게 차를 타고 가서 눈요기로 꽃구경을 한 게 그리도 좋으실까요. 며칠 전 강원도에서 형수가 전화로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작은아빠, 엄마랑 이모 좋아 죽네. 형님은 피곤하다고 허는데 엄마랑 이모는 잠도 안 주무시고 그냥 싱글벙글이세요. 진작에 올 걸 그랬나 봐.” 그 소린 오히려 ‘너그들 여태껏 뭐 했냐!’ 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형 내외는 두 분을 모시고 다시 부산까지 여행을 이어갔습니다. 3일 동안의 여행을 마무리한 후 형 내외와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두 분 모시고 여행 못 간 게 지금 너무 아쉽다.” “나도 그래. 그래도 형이 큰일 했네. 형수도요.”

나이 든 부모를 모시고 며칠씩 여행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잠자리, 먹을거리, 비용도 만만치 않고요. 그런데 일단 떠나면 무척 좋아하십니다. 말로는 “다 늙어서 뭐 그런 데 가냐?” 하면서도요. 그렇게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돌고 오신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야야! 죽기 전에 팔도유람 한 번 떠나고 갈라고 혔는디 요참에 고걸 해뿌렸다.”

이제 거동이 불편하셔 먼 곳으로 여행을 가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가까운 데라도 자주 다녀오려고 합니다. 오래오래 같이 여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예신 작.
<Once upon a time>
97×145cm. Oil on canvas. 2012.

눈물 대신, 여행

장연정 34세. 작사가, 작가(<소울 트립> <슬로 트립> <눈물 대신, 여행> 저자)

3년이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슬픔은 제자리에 있다. 조금 흐려진 색으로, 조금 차분해진 깊이로.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타이르는 일이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 근 반년 동안, 깊은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여전히 친구가 사는 동네를 서성거렸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했고, 마지막 문자를 버릇처럼 들여다보았다. 죽음이란 단어는 이별이라는 단어와 비슷했지만 멀었다. 그녀의 죽음은 인정했지만, 나와의 이별은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반년 동안 나의 상태는 심각해졌다. 너무나 자주 웃다가 울었고, 바삐 돌아가는 시간 속에 홀로 멈춰졌고, 당장의 내일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산산이 무너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잔인하게도, 나에게는 살아내야 할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현실을 살기 위해, 나는 당장의 현실을 잠시 놓기로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사를 준비했다. 가장 추웠던 내 마음에 어울리는 여행지를 고르고, 비행기 표를 샀다.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나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 분명했지만, 자꾸만 죄책감에 둘러싸여 여기저기 고장 나고 있는 나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떠나기 전에도 여러 번 망설였다. 이것은 여행일까, 도피일까. 결론을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둘 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곳은 생각보다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런 사치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편안하고 여유가 넘치는 곳. 아, 살아 있으니 이렇게 행복하구나. 나는 자주 울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잔인하게도 여행을 하는 내내 앞으로 더 잘 살겠다, 자주 다짐을 했다. 당장 눈뜰 수 있는 내일은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사실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일분일초가 너무나도, 소중했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그 친구의 모습이 하루라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었으나, 어느 날은 많이 웃을 수 있었고, 새로운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은 그 순간의 낯설음이 좋아서 가슴이 뛰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미안해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대신, 오래오래, 아주 오래오래 잊지 않고, 아름답게 기억하겠다 마음먹었다. 그녀와의 좋았던 행복했던 시절들을 떠올렸다. 어렸었고, 그래서 용감했고, 자주 넘어졌지만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무릎을 툭툭 털어주던 그 시절의 느낌들을. 처음 만났던 스무 살의 여름부터 서른셋의 마지막 겨울까지 우리가 보란 듯 절망에게 띄웠던 수많은 웃음들을.

그렇게 행복한 기억만을 떠올리던 어느 날부터 나의 하루 속에서, 밤의 꿈속에서 그 친구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내가 웃는 만큼, 마음속의 그녀도 웃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새로운 공간에 안착했다. 때때로 마음속의 그녀를 보듬었고, 아름답게 기억해 주었다. 슬픔은 차츰 흐려져 갔고, 나는 다시 건강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하루에 단 한 번도 그녀의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이 시작되었다. 비로소 이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세상 위에 발을 붙일 수 있는 한 아직 가야 할 곳은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내일’을 당연한 듯 약속해주지 않기에, 나는 가능한 한 많이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지내고 있다.

누군가를 잃어버림으로 인해 알게 된 내 삶의 의미. 그 삶의 의미는 떠나고 돌아오는 여행 속에서 더 깊은 색을 입는다.

눈물 대신, 여행. 세 번째 책의 제목을 그렇게 지어 놓고, 나는 참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앞으로 이 말이 필요해지는 때가 얼마나 더 찾아올 것인가. 그래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삶’이 내 곁에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강예신 작.
<지침서c- 대답되지 않는 질문의 이해>
130×89cm. Oil on canvas. 2012.

혼자 떠난 여행, 사람을 만나다

황상민 27세. 경북 포항시 북구 두호동

2년 전, 사회생활을 갓 시작할 무렵이었다.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면서 잠시 쉬어갈 기회를 엿보던 중, 무작정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제주도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지도 한 장을 들고 제주 국제공항에 발을 디뎠다. 계획도 없이 공항에서부터 해안 도로를 따라 제주도를 한 바퀴 다 돌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걷다가 힘들면 제주도 일주 버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인연이란 무엇일까? 그렇게 2주간의 여행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생길도 함께하고 있다. 지금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그곳에서 만났다.

제주도에는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들이 있다. 해안 도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매일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매일 밤 제주도 여행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나 말고도 혼자 온 분들이 많았다. 이야기를 나누며 우린 쉽게 친해졌다.

진로 고민을 하는 대학 새내기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오랜 투병 끝에 병마를 이겨내고 제주로 내려오셨다는 아주머니에게 박수를 쳐드리기도 하고, 퇴직 후 오랜 죽마고우와 여행 오신 아저씨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나 또한 진로에 대한 고민과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어쩌면 내가 고민하는 건 참 작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단순히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만이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는 것도 느꼈다. 다양한 여행자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생한 인생 수업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 만에 친구가 되어 다음 날 함께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동행할 사람을 만나고 좋은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었다. 아직도 만남을 이어나가고 있는 제주도 인연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수많은 날들 중 그날을,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들 중 그곳을 선택해서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하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비우려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더 값진 것들로 마음을 꽉꽉 채워 돌아왔던 여행. 인생을 살며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 배낭 하나만 메고 나는 또다시 제주 공항에 내린다.

강예신 작.
<낭만이 필요해>
91×73cm. Oil on canvas. 2012.

여행이라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나와 만나고, 새로운 사람과 만났던 소중한 순간의 이야기

엄마랑 여행하길 정말 잘했다

김윤호 27세. blog.naver.com/kimyuenho

울 엄마는 충청남도 시골 땅에서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옛말에 매우 충실하게도, 어려서부터 살림 밑천 노릇을 톡톡히 하셨단다. “예쁨받아도 모자랄 국민학생의 손으로 동생들의 기저귀를 갈거나 산속에서 땔감을 주워 와야 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렇게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가 없더라.” 울 엄마의 아버지는 젊고 건장했지만, 가정적이지는 못했다. 살림 밑천을 충분히 활용하셨고, 가정사에는 충실하지 않으셨다.

울 엄마는 가방끈이 짧다.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울 아빠랑 결혼하고도 삶은 그리 넉넉지 못해, 그 흔한 해외여행 호사 한 번 못 누려봤다. 그런 울 엄마는, 그래도 항상 긍정적이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불만 많은 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해준다.

혼자만의 긴 여행을 가려고 준비하는 내게 엄마가 “100만 원이라도 보태줄게, 돈도 없을 텐데…”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엄마의 말이 나에게는 ‘엄마도 가고 싶다’라고 들렸다. 평생 희생만 하며 사신 엄마에게도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 같이 갈래?” 울 엄마 입가에 퍼지던 완연한 미소, 대답으로 충분했다. 비행기 예약을 마치고 여행을 준비할 때였다. 예기치 않게, 외할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셨다.

나는 ‘외할아버지는 엄마를 끝까지 붙잡는가 보다…’ 싶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나의 여행은 엄마와 함께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는 여행이 되어버렸기에, 여행을 3주 늦추면서까지 외할아버지의 차도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외할아버지께서는 쉽게 일어나지 못하셨고,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장녀로서 아버지의 곁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쉽사리 여행을 결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감사하게도, 엄마의 형제들과 외할머니가 적극 지지해주었다. 게다가 엄마가 감당해야 할 모든 일들을 아빠가 대신 해주겠다고도 하셨다. 덕분에, 엄마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외할머니께서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엄마에게 편지와 함께 여비까지 주셨다.

‘사랑하는 우리 딸, 외손자랑 여행 잘 다녀오너라.’ 그 짧은 글을 읽는데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한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작년 연말 60일간의 남미 여행에 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아들과 여행 가는 게 마치 꿈꾸는 거 같다고 말하던 엄마.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매 순간 순간이 생생하지만, 내가 엄마랑 여행하길 참 잘했다고 느꼈던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남미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여행 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터라,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다녔다. 특히 볼리비아에서 만난 한 여행자가 택시 강도를 당했다는 말에 택시보다는 로컬 버스를 이용했다. 그러나 페루의 쿠스코는 버스 시스템이 전무한 수준이라, 부득이하게 다음 도시인 리마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데 긴장이 풀렸던 탓일까? 짐을 내리고 버스터미널로 향하는데, 어머니께서 짐 하나를 두고 내린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그랬다. 어머니는 급하게 내리느라, 가방 하나를 놓고 내렸고, 공교롭게도 그 안엔 가장 중요한 여권과 귀중품들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셨고, 나는 메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팽개치고, 택시를 쫓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단 호스텔로 다시 돌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버스 일정도 변경해야 했고, 여권을 찾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기에, 심신이 지친 어머니를 호스텔에 두고, 잠시 다녀오겠노라 하고 홀로 시내로 나섰다. 한인 식당 사장님이 나를 위로해주며, 방법을 알려주었다. 여권 재발급을 받기 위해 경찰 리포트를 받고, 여행사 사장한테도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등 모든 조치들을 취하다 보니, 어머니와 약속한 시간보다 상당히 늦어졌다. 밤늦게서야 호스텔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촉촉한 눈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시며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하시면서 손을 잡으시는데, 얼마나 긴장하셨던지 손에 땀이 흥건하셨다. 어머니는 여권보다 귀중품보다, 나를 가장 많이 걱정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네가 왔으니 됐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하시면서 환하게 웃으시는데, 여행 일정과 잃어버린 돈만 걱정했던 내 마음도 그제야 풀리기 시작했다. 물론, 어렵고 힘든 일을 당했지만, 어머니와 함께하기에 쉽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지금도 엄마와 나는 여행 가서 있었던 추억을 나누곤 한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함께했던 그 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행복해지는 엄마와 나. 아, 엄마랑 여행하길 정말 잘했다!

강예신 작.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
89×130cm. Oil on canvas. 2011.

그리움이 쌓이는 히말라야

김인식 46세. 자영업. 대구시 남구 대명3동

아마도 중학생 때였지 싶다. 놀자고 부르는 친구도 없고 마땅히 할 일도 없어 애꿎은 텔레비전만 이리저리 틀어대다 어느 한 장면에 꽂혀 한참을 꼼짝 않고 앉아 들여다봤다. 거대하게 펼쳐진 설산, 그 산을 오르려고 애쓰는 등반가들의 거친 숨소리.

‘어? 우리 동네 뒷산(가야산)이 제일 높은 줄 알았는데… 저건 무슨 산이지?’ 그렇게 히말라야는 까까머리 중학생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 놓았고 강렬한 그날의 인상은 가슴 한켠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꼭 히말라야에 가봐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그동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무던하게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작지만 온 열정을 다해 가꿔가는 일터가 있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아이들이 있고 소중한 나의 반쪽이 있음에 늘 감사했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 문득문득 마음이 허전해져 올 때가 있었다. 앞만 보고 사느라 그간 잊고 지낸, 가슴 한켠에 묻어둔 내 작은 꿈의 꿈틀거림이었으리라. 텔레비전이 아닌 진짜 히말라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조금씩 피어올랐고 눈을 감으면 거대한 산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즈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히말라야에 대한 간절함에 강하게 불을 지핀 이가 있었으니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이었다. 간만에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히말라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본인은 수년 전에 다녀왔고 꼭 한번 권하고 싶은 여행지라는 말에 나는 큰 용기를 내게 되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면 못 갈 이유가 더 많은 게 현실인지라 비행기 표부터 끊어 놓으면 어떻게든 가게 된다는 지인의 말에 2012년 12월 31일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일찌감치 8월 초에 끊어두고 우리 가족은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준비에 들어갔다.

생애 첫 해외여행인 데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는 자유 여행이다 보니 여권부터 시작해서 언어, 중간 경유지의 숙소 예약 및 트레킹 준비물 등 준비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트레킹을 위한 체력 단련도 필수였기에 틈틈이 운동과 산행도 병행해야 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내는 나에게 종종 이렇게 묻곤 했다. “여보, 우리 말야…. 네팔에 도착은 할 수 있을까?” 그러면 나는 “갈 수 있지.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고 따라와”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내심 불안하고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여행은 원래 그런 거 아닐까? 늘 동경의 대상이지만 막상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면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동반하는 거. 그러기에 영혼을 살찌우고 마음을 훌쩍 자라게 하고플 땐 여행이 최고의 명약인지도 모른다.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차근차근 준비한 덕분에 우리 가족은 17일간의 네팔 여행 및 히말라야 트레킹을 무사히 마치고 올 수 있었다.

간절하게 보고 싶던 히말라야를 원 없이 보았고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참으로 작은 존재라는 것도 느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걷는 11일 동안의 트레킹에서는 고산 증세로 가족 모두가 힘든 순간들도 있었지만 고통을 동반한 대가로 얻게 되는 자연의 고귀한 선물들을 많이도 받았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관이었던 푼힐의 일출, 창을 열면 눈앞에 펼쳐지던 설산의 파노라마, 머리 위로 쏟아질 것 같던 밤하늘의 별들,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이어지던 돌계단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네팔 친구들과 좋은 여행객들.

음식과 고산 증세로 힘들 때도 있었지만 여행 막바지로 접어들자 일정을 좀 더 길게 잡을 걸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온 뒤 한참 동안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고 기르며 네팔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그리움 한 자락을 히말라야에 두고 왔다.

문득 히말라야가 미친 듯이 그립고 다시 가고픈 마음이 강하게 이는 순간이 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막연하게 품었던 꿈처럼 다시금 히말라야를 가슴 한켠에 품었다. 머지않아 나는 또다시 히말라야를 보러 갈 것이다. 히말라야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에.

강예신 작.
<얼룩얼룩 꿈꾸기>
60×45×4cm. Mixed media. 2013.

모르는 이들의 집과 차를 나누다, 공유 여행

신기철 26세. 대학생. 경기도 광명시 철산3동

작년 여름 우연히 공유 여행과 관련된 공모전을 알게 되었다. 평소 여행을 자주 다녔던 나는 여름 방학을 이용해 공모전에 지원했다. 운 좋게 여행 지원금을 받아 4명의 대학 친구들과 함께 공유 경제를 활용한 전국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공유 경제의 사전적 의미는 ‘물품을 소유가 아닌 서로 대여해 주고 차용해 쓰는 것으로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쉬운 예로 ‘카풀’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남과 함께 나누어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 여행은 한마디로 모르는 사람과 집과 차를 공유하며 떠나는 여행이었다. 나와 친구들 역시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었기에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차근차근 계획을 짜나갔다. 모두 호텔관광경영학을 전공하는 같은 과 친구들이라 여행의 테마는 ‘축제’로 했다. 작년 여름 축제가 계획돼 있는 도시를 중심으로, 서울-제주-부산-대구-여수-순천-서울로 돌아오는 6박 7일 일정을 계획했다.

출발 전 ‘비앤비히어로’ 사이트를 통해 각 여행지마다 숙소를 모두 예약해 놓고 마음 편히 제주도로 출발하였다. 비앤비히어로란 여행지 주민이 제공하는 숙소를 연결해주는 사이트다. 개인 소유의 집부터 기존 게스트하우스 등의 남는 공간을 여행자들이 쉽게 검색하고 예약, 결제할 수 있다. 제주 공항에 도착했을 때 주인아주머니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셨다. 아들처럼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제주도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과 곳곳의 숨은 맛집에 대한 고급 정보도 상세히 알려주셨다.

제주도에서 다시 공항으로 이동할 때는 ‘티클’을 이용했다. 티클은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이 차를 타고 같이 이동할 수 있도록 ‘카풀’을 중개해주는 서비스이다. 티클을 통해 제주에서 근무하는 어느 여성분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공항 가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외에도 대구에서 홀로 사시는 할머니 집에서의 하룻밤, 4명의 따님을 모두 서울로 보내신 후 떡집을 운영하시는 여수의 딸 부잣집, 축제 홍보위원이었던 한 아주머니네 으리으리한 펜트하우스에서 묵기도 했다. 모두가 자식들을 타지로 보내신 정 많은 부모님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계 맺는 일을 좋아하는 분들이었다.

“이왕 사는 김에 조금 더 샀다”며 4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먹을 양의 고기를 구워주시기도 하며 친자식처럼 살뜰히 챙겨주시던 분들.

공유 여행은 단순히 저렴한 비용으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가치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정’을 나누는 것이었다. ‘모텔이나 펜션을 예약하고, 렌트카를 탔더라면 돈만 더 쓰고 좋은 사람도 못 만났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래선지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순간의 기억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잊히질 않는다. 그 후 함께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은 모두들 공유 기업을 적극 활용하고 있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알리고 있다.

여행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목적지보다 여행을 통해 어떤 생각을 하고 느끼고 배우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테마와 방식으로 여행을 해보면 비슷한 장소라도 전혀 다른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름 방학이 다가오는 지금, 공유 여행을 계획해보는 건 어떠신지.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직도 좋은 분들이 많구나, 따듯한 정을 많이 느낄 것이다.

강예신 작.
<히치하이크-나를 데려가줘>
89×130cm. Oil on canvas. 2011.

나는 왜 문자가 편할까?

한때 휴대폰이 대중화되면서 30초면 끝날 이야기를 문자로 끊임없이 주고받는 ‘엄지족’이 화제가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국민 스마트폰 시대를 맞이한 지금, 초등학생부터 할머니까지 전 세대가 ‘엄지족’이 되었지요. 하루 60억 개가 넘는 ‘카톡’ 메시지, 안부 인사, 업무 약속, 이별 통보도 문자로 하곤 합니다. 나는 왜 문자가 편한 걸까요? 언젠가부터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심호흡을 하게 되는 우리들, 편안하고 기분 좋은 문자 소통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 주


LG경제연구원의 2011년 조사에 따르면, 39%의 응답자가 전화를 거는 것보다 문자나 SNS로 대화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답했다. 그중에서도 10대와 20대 젊은 층은 그 비율이 42%로 나타났다. 한편 2010년 인크루트에서 회원 47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 음성 통화보다 문자를 선호하는 이유로는 간단해서(62.0%), 심리적으로 편안해서(49.3%), 효율적이라서(40.1%)라고 복수 응답했다. ‘예전에 통화로 하던 것을 이제는 문자로 하는 일’에는 전화번호나 이메일 주소 교환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문자 메시지를 활용하면서 57.2%의 응답자가 전화 통화 시간이 줄어들었다고 답했다. 실제로 휴대 전화 가입자 한 사람당 음성 통화 시간은 2008년 월 181분에서 2011년 172분으로 줄었다.


문자 메시지의
확산과 사회적 의미

사람들이 문자를 더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문자 메시지는 음성 통화와 달리 시간 차를 두고 반응할 수 있기에 운전 중, 옆 사람과 대화 중, 회의 중인 경우에 응답을 적절한 시점으로 지연시킬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더군다나 하루 24시간을 미세하게 분할해서 사용하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음성 통화는 상대의 일상을 방해하는 무례한 통신 수단’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 더 적절한 시점에 답장을 할 수 있는 문자 소통은 친구와 가족, 먼 친척들과 ‘거절당하는’ 부담감 없이 연락을 유지할 수 있다.
한편 ‘카카오톡’ ‘라인’ 등 무료 대화 어플리케이션이 있어 통신비를 절약할 수 있으며 1:1 대화뿐 아니라 단체 채팅이 가능해지면서 매우 소심하거나 수줍어하는 사람도 ‘실시간 응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문자 메시지는 제3자가 모르게 주고받을 수 있어 사생활을 확보할 수 있고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약속을 잡거나 정보를 제공할 때에 효율적이다.
또한 이모티콘 등을 통해 대화를 이미지화할 수 있다는 점, 기존 글쓰기 형식을 이탈할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그래서 세대별, 공동체별로 고유한 언어 형식과 문체를 창조하는 재미도 느끼게 된다.
참조 도서 <호모 모빌리쿠스>(김성도 | 삼성경제연구소)


키보드 소통의 혁명 이모티콘

감정을 뜻하는 이모션(emotion)과 아이콘(icon)의 합성어로, 스마일리(smiley)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모티콘은 1982년 9월,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 스콧 E. 팰먼(Scott E. Fahlman) 교수가 발명했다.
80년대 초반 당시 컴퓨터 통신은 일부 컴퓨터 전문가, 특히 남자들이 많이 사용했는데, 학교 내 게시판에는 매번 딱딱한 글이 올라와 이내 감정싸움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팰먼 교수는 가장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3개의 부호로 이모티콘을 만들어, 함께 웃자고 쓴 글의 제목 끝에는 🙂 를 붙이고, 진지하게 쓴 글은 🙁 를 붙이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모티콘은 큰 호응을 얻으며 인터넷 보급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나라별로 수천 가지 이모티콘을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다.
게시판에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이 셰익스피어처럼 뛰어난 문장력을 가지지 않았기에, 이모티콘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을지라도 충분히 사용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 팰먼 교수. 그 덕분에 우리는 ‘말로는 차마 표현하지 못할’ 감정들을 이모티콘으로 표현하고 소통하게 되었다.
32년이 지난 지금, 이 혁신적인 발명품은 인간의 뇌 반응까지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 호주 플린더스 대학 오웬 처치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이모티콘을 사람 표정을 본 것처럼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모티콘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없었던 뇌 신경 반응을 ‘학습’된 언어인 이모티콘을 통해 창조한 것이다.


문자는 문자일 뿐
오해하지 말자!

문자 메시지가 ‘붐’이었을 때 청소년기를 보낸 저는 문자할 때 이모티콘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ㅋㅋㅋ’이나 ‘~ㅎㅎ’도 꼭 붙이는 편이에요. 그런데 몇 년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오빠와 ‘카톡’을 하는데 시종일관 단답형, 초성으로만 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분이 나쁜가?’ ‘나랑 연락하기 귀찮은 건가?’ 하고 오해를 했어요. 만나 보면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문자는 꼭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안 했으면 좋겠다고 진지하게 얘기했더니 그 오빠는 당황하며 습관이라 고치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몇 년의 시간 동안 그 오빠는 꾸준히~ 단답형 문자를 고수했고, 저는 최근에서야 원래 단답형 인간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살 차이 안 나지만 문자에도 세대 차, 성향 차이가 확실히 있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또 한 가지, 이모티콘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사람에게 제가 아무리 단답형 문자로 ‘나 기분 엄청 나쁨’을 표시해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아예 없으니까요.
그 이후 문자는 문자일 뿐 오해하지 말자! 하면서 오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상황을 내 기준대로 쉽게 판단하면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거~ㅎㅎ 소소하지만 내 생각이 다 맞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정다운
24세. 서울시 강북구 미아동


문자나 이메일(이하 문자)의 등장은 우리에게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의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오해와 미스커뮤니케이션의 기회도 함께 제공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일들이 문자를 사용했을 때 오해를 유발하는 경우를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표정, 몸짓, 목소리의 크기와 톤, 말투, 시선 등과 같은 비언어적인 단서를 상대방에게 전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이 어떤 하나의 단서를 놓쳐도 다른 단서를 이용해서 메시지 전달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진정한 의미를 해독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문제는 문자의 경우에는, 면 대 면 대화나 전화 통화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다양한 비언어적 단서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동일한 내용이라도 의도와 다르게 해석될 가능성이 훨씬 커지게 되는 것이다.
문자 작성자는 문자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문자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에게만 분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낸 메시지라도 비언어적인 단서가 배제되면 진정한 의미 파악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문자는 친한 사이에도 쉽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나아가 인간관계의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오해의 가능성이 있는 주제라면 문자나 이메일을 명확하게 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수화기를 드는 것이 좋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다. ‘리쌍’과 ‘장기하와 얼굴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우리 지금 만나’가 귓가를 때린다.
우리 지금 만나(만나) / 아 당장 만나(당장 만나) / 우리 지금 만나(만나) / 아 당장 만나(당장 만나) / 휴대 전화 너머로 짓고 있을 너의 표정을 나는 몰라(몰라 몰라 나는 절대로 몰라)
전우영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대학 시절,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와 문자를 주고받았습니다. 비슷한 또래다 보니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말을 놓기도 했어요. 그래서 문자도 아무 생각 없이 반말로 보냈죠. 그런데 막상 문자로 찍히고 나니 선배는 버릇없는 후배라며 엄청 화를 냈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해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죠.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싸가지 없는 후배로 찍히고 말았습니다. 2년쯤 후 그 사건이 자연스럽게 잊히면서 선배도 화가 누그러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후로 중요한 이야기나 오해 살 만한 이야기는 꼭 얼굴을 보고 합니다. 문자로는 전달이 안 되는 게 너무 많더군요. 감정, 억양, 상대방의 상황 같은 거요. 카톡은 특히 상대가 메시지를 수신했는지 여부를 알게 되니까 오해가 더 많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카톡 왜 안 봐?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삐졌어?’ 등등 온갖 타박과 핀잔이 쏟아집니다. 얼마나 바쁜지, 제 상황이 전달이 안 되는 거죠. 문자 소통이 편리한 점도 많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곽규성 31세. 경남 창원시 진해구


얼마 전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그 친구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헤어지자는 말을 문자로 할 수가 있어?”
“왜 꼭 얼굴을 보며 말해야 해?”라는 나의 물음에 대화라는 건 말소리로만 하는 건 아니니까 더군다나 이별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순간에 표정, 손짓, 눈빛들을 함께 보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나의 남자 친구도 그랬다. 얼굴을 보지 않고 “헤어지자”고 하는 건 예의가 없는 거라고. 또한 표정과 눈빛을 알 수 없는 이야기는 진심을 알 수 없고 거짓을 말할 확률이 크다고 했다. 8년 전부터 누누이 해온 말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로 인한 다툼이 많았다. 아니, 지금도 많다. 나의 남자 친구는 글은 말보다 거짓일 확률이 높고, 정리하고 고치고 다듬어지기 때문에 진심을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반대다. 나는 말이 불편하다. 머릿속에 있는, 내 마음속에 준비했던 이야기들이 입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어버버거리고 우물쭈물하다가 보니 상대 페이스에 말려 버리고, 그러다 보니 정작 내가 해야 할 말은 못 하고 상황은 내 뜻과는 다르게 전개될 때가 많다. 내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얘기다. 반대로 글은, 어떠한 방해 요소 없이 내 마음과 생각을,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똑 부러지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이건 성격과 성향의 차이다. 말이 글보다 편한 사람이 있고, 글이 말보다 편한 사람이 있다.
대체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은 말이 편하고 내향적인 사람은 글이 편하다. 물론 항상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난 글이 편한 사람이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데, 모든 걸 말로 할 수도 없고 모든 걸 글로 할 수도 없겠지만 말이 편한 사람들이 글이 편한 사람들에게 예의 없다는 비난은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예의가 없다고 말한다면, 글이 편한 사람들이 불편한 말을 우물쭈물하다 결국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게 올바른 걸까. 선호하는 방식이 다른 건 아닐까. 글로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예의 없는 사람으로 단정 짓는 건 아닌 것 같다는 나의 생각에 8년 만에 남자 친구가 동의했다. 그리고 그는 내 남편이 되었다.
박경미 31세. 인천시 부평구 부개동

말이 편한 사람이 있듯이 문자가 편한 사람도 있다

무섭고 권위적이던 아빠의 대변신

“나는 가족에게 짜증을 많이 냈고 이것저것 많이 시키면서 부려먹다시피 하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빠였다!” 금융 기관에 종사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40대 중반의 가장인 그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한 직장에서 20년 이상 근속하며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가정에서는 밖에서의 스트레스를 모두 풀며 가족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는 그. 어느 날 마음 빼기를 시작하며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는데.

가족에게 도대체 어느 정도였나?      

내 뜻대로 안 되면 짜증을 많이 내고 고함도 많이 질렀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다 보니 겉으로는 늘 웃을 수밖에 없다. 거기서 쌓인 스트레스를 가족들한테 풀었다고 해야 하나. 몸이 피곤하니까 물 떠와라, 리모콘 가져와라, 뭐 가져와라, 그냥 누워서 많이 시켰다. 경상도 남자인 데다 장남으로 자라서,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틀도 컸다. 집안일 하나 도와줄 생각을 안 했다. 화가 나면 물건 같은 것도 막 집어던졌다.

헐! 너무 무서운 아빠였겠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하긴 했다. 그런데 나도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다. 당시에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겹쳤다. 회사에서는 윗사람들끼리 내분이 생기면서, 한쪽에서 다른 쪽을 고소 고발 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됐다. 졸지에 나도 고소를 당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그거 처리한다고 2년간을 휴일도 없다시피 일을 했다. 결국 기각 처리됐지만 너무 고통을 받았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나. 항상 얼굴 보던 사람들이 어떻게 고발을 하나. 분노가 치밀고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화, 분노, 스트레스가 가족에게 다 갔다.

그 후 누나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충격을 받아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삶이 너무 버거웠다. 그때부터 불면증이 생겼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써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집사람은 머리만 대면 자는 거다. 그게 너무 미웠다. 자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내 고통을 알아줄 사람은 집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괴로웠다. 몸도 안 좋아져서 늘 설사를 하고 갑상선 기능 저하에 위도 안 좋아져 약을 달고 살다시피 하니, 애들이 웃고 떠드는 것조차도 짜증스러웠다. 조용히 하라고 소리 지르고. 그러면 집사람하고 애들은 쥐 죽은 듯 조용히 다녀야 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애들하고 집사람은 행복해 보이니까 질투도 있었다. 소외감도 느끼고.

그런데 어떻게 풀리게 된 건가.      

몸은 몸대로 지쳐가고 마음도 지쳐가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차라리 죽고 싶다. 그런 마음이 끝까지 차올라서 퇴근하자마자 집사람에게 ‘나 너무 힘들다. 더 못 살겠다’ 했다. 아내도 내가 힘든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깜짝 놀라더라. 그때 집사람이 마음수련이라고 있는데 가볼래? 했다. 마음수련? 처음 듣는 단어인데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거 같았다. 그날 바로 지역수련회에 가서 등록을 했다. 신기한 게 그러고 나서 그날 너무 잠을 잘 잤다. 아, 이제 뭔가 돌파구를 찾았구나 싶었다.


왠지 듣고 있는 내 마음이 다 놓인다.      

원래 의심이 많은 편이라 이상한 단체는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진짜 마음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20일을 하니까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빠지면서 복잡했던 머릿속의 생각이 줄었다. 진짜 되는 공부구나 확신했다. 그런 어느 날 ‘우주가 원래 나였구나’ 본성을 깨치는 순간, 너무 기뻤다.

가족에 대한 마음도 많이 버렸나.      

정말 많이 버렸다. 나는 내성적인 편인데 집사람은 활달하고 소탈한 성격이다. 그런 성격에 매료돼서 사귀게 되었는데, 막상 살아보니 안 맞는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나는 퇴근하고 오면 집이 깨끗했으면 좋겠는데, 집사람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따르는 성격이다 보니 외부 활동도 잦고. 그런 게 눈엣가시였다. 당연히 자주 부부 싸움을 했다. 그런데 마음을 버리다 보니, 집사람을 내 소유물로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독립된 존재인데 내 맘대로 내 기준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생각이 있는 건데. 아내랑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보였고, 참회가 많이 됐다.

다행이다. 이제 달라졌나? 가족을 안 부려먹나?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그 차이점을 인정하고 조율해가려고 한다. 남자의 틀도 깨져 가정일도 많이 도와주고 있다. 설거지, 빨래, 청소, 저녁에 애들 밥도 챙겨준다. 명절 때는 쌓인 설거지도 하고. 내 물도 알아서 떠다 먹는다.(웃음) 내가 가족을 위해 몸을 움직이고 그걸 통해서 집사람이랑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좋다. 지금은 거의 짜증 내는 일이 없고 짜증이 나도 그 마음을 보고 쉽게 조절할 수 있다. 나로 인해 가족들의 생활이 너무 자유로워지고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아들이 아침마다 뽀뽀해준다. 예전엔 무섭고 다가가기 싫은 아빠였다면 이제는 편안하고 믿음직한 아빠가 되었다고 자부한다. 한번은 아내가 솔직히 이런 사람하고는 도저히 못 살겠다,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더라. 진짜 안 힘들었겠나. 아내가 긍정적이니까 그나마 버틴 거다. 내가 안 바뀌었다면 어쩌면 지금 현실이 되었을지 모른다. 많이 미안했고 이제부터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달라진 게 신기하다.      

근본적인 스트레스, 불안, 미움의 뿌리가 버려졌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다. 나를 짓누르던 그 엄청난 마음들을 빼버리고 나니까, 언젠가부터 기혈 막힌 게 확 뚫리면서 불면증도 사라지고 건강도 좋아졌다. 힘든 일을 겪으면서 남 탓을 많이 했는데 돌아보니 다 내 탓이었다. 내가 있어 그런 일이 생기고 그렇게 세상을 바라본 거였다. 성격이 예민해서 모든 걸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만약 지금 또 그런 일을 겪는다면 전혀 다르게 대처할 것이다. 원수 같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밉지가 않다. 모든 이에게 항상 진심으로 웃어줄 수 있어 행복하다. 내 자신이 봐도 놀랍다. 나를 버림으로써 엄청난 자유를 얻었다.

대단하다. 힘들어하는 40대 가장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에겐 마음수련이 진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대 가장들은 많이 힘들다. 표현하지 않아도 엄청난 무게감을 안고 산다. 그런 나의 삶을 돌아보며 비우다 보면, 내 본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삶의 의미까지도 깨친다. 그럼 미래에 대한 걱정도 불안도 없어진다. 현실을 열심히 살면서 즐길 줄도 알게 되는 것이다. 가장이 행복하면 가정도 행복해지지 않겠나. 그래서 아빠들부터 꼭 마음 빼기를 해보았으면 좋겠다.

암 환자들 심리 치유의 대안, 마음수련

지난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에서 열린 전인교육학회 국제학술대회에서는 ‘마음수련 명상이 유방암 생존자들의 심리적 안녕에 미친 효과’에 대한 임상 연구 발표가 있었다. 마음수련 후 우울, 불안, 스트레스 등 부정적 감정이 현저히 줄어들고 삶의 질, 삶의 만족도가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암 환자들이 겪는 불면 증상도 현저히 줄어들었음을 보여준 결과였다. 이는 학술대회에 참석한 심리학계 권위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 연구를 주도한 이는 서울대학교 간호학 박사 윤미라(43)씨. 17년간 간호사로 일해 오면서 마음수련의 효과를 직접 경험했기에 나올 수 있는 연구였다. 정리 & 사진 문진정

작년 7월 서울아산병원에서는 유방암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방암 수술이나 항암 치료를 마친 지 2년 6개월이 경과하지 않은 환자 54명을 모집해, 절반의 환자에게는 주 2회, 2시간씩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4주간 주 1회 일반적인 교육을 받도록 하는 비교 연구였지요. 8주 후,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마음 빼기 이후 자식에 대한 애착, 기대감, 실망감으로부터 많이 벗어났고 남편의 변화를 원하던 내 마음이 먼저 변하고 남편을 이해하게 되었다. 늘 폐쇄적이고 울분이 가득 차 있던 마음이 열리고 많이 웃게 되었다. 아픈 기억들, 분노, 원망, 집착이 아주 많이 사라졌으며 사람을 보는 시선이 참 많이 따뜻해졌다.”(참여자 9)

“재발에 대한 두려움도 빼기를 하면서 많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졌다. 그러다 보니 불면증에 시달려왔던 내가 잠을 6시간 이상 푹 자게 되었다. 복직을 앞두고, 재발이나 전이에 대한 두려움, 내 병을 알게 된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에서의 두려운 마음 등을 많이 극복했다.”(참여자1)

“마음 빼기 회를 거듭할수록 솜털같이 가벼워지는 나를 느끼며 복잡 미묘했던 내 가짜마음의 늪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뭇사람의 시선을 피하려 식당에서도 정면을 등지고 앉았던 내가 어느새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폐쇄됐던 내 마음이 개방형으로, 진정한 용기 있는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참여자 7)

8주 동안 마음수련 명상군은 삶의 만족도가 ‘불만 → 평균 → 만족’ 상태로 크게 향상됐고, 불면 증세를 호소하는 비율도 90.9%에서 54.5%로 절반가량 줄었으며, 우울 증상은 ‘유력 우울증 상태’에서 일반 여성의 평균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호전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환자들의 우울 증상은 일반 여성의 우울 정도보다 훨씬 낮아졌고 불안과 스트레스, 불면 증상도 현저히 개선되었습니다. 옆에서 환자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저로서도 가슴 뭉클하고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17년간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그중 10년은 종양 전문 간호사로 근무하며 생사의 기로에 선 암 환자들을 수없이 봐왔지요. 암에 걸리면 신체 증상뿐 아니라 가정, 사회, 경제적 문제 등 다방면으로 갈등이 드러납니다. 가족에 대한 기대와 원망,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와 허무함, 인생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까지도요. 그래서 긴 치료가 끝나도 더욱 우울하고 불행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유방 전절제술을 받은 환자는 큰 상실감을 겪으면서 굉장히 위축되고 자존감이 떨어질 뿐 아니라, 그동안 쌓여 있던 상처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나기도 하지요. 이런 문제들은 결국 마음에서 기인함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을 버려보라고 권해드립니다. 저도 직접 경험해봐서 그 효과에 대한 확신이 있으니까요.

저는 2005년, 여름휴가를 이용해 논산 메인센터에서 마음수련을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한국의 간호사보다 세상에 더 힘든 직업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헌데 마음수련을 하며 제 인생을 낱낱이 들여다보니, 간호사로서 환자들의 마음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고, 열심히 일을 했던 것도 저의 전문 영역을 넓혀가고자 했던 욕심이었더군요. 철저히 제 관점에서 따지고 의심하며 살아온 삶을 모두 떠올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우주가 나임을 알게 되었을 때, 단순히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차원 이상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주 자체가 본래의 나이고 이 우주마음으로 살면 되는 거구나. 이렇게 크고 넓고 살아 있는 이 마음 자체가 되어 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거구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고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그 후 저의 생활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환자분들을 진심으로 도와드리고 싶었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암 환자들 중에는 병원 문 앞에만 가도, 또 빨간 항암제 때문에 빨간색 차만 봐도 구토가 난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증상은 안 좋은 경험을 했던 당시의 기억이 사진처럼 마음속에 찍혀 저장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 마음의 사진을 버리면 너무 쉽게 해결됩니다. 재발에 대한 두려움, 불안과 근심 걱정으로 인한 고통도 결국 마음에서 찍어놓은 사진이 문제이기에, 그것을 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대안이지요.

건강을 위해 신체적 치료에만 관심을 갖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몸의 건강, 나아가 참다운 행복을 위해서는 마음의 건강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최첨단 치료를 자부하는 병원에서도 환자들의 마음 건강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산병원에 처음 마음수련 프로그램 연구를 제안했을 때도 긍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정신 건강을 위해 ‘마음을 비워라’, ‘내려놓아라’고 하지만, 그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속 시원히 제시하고 있지 못합니다. 마음수련에서는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저장되어 있고 어떻게 버릴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방법을 알려주어 그것이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 어떤 명상이나 심리 치료보다도 탁월한 효과를 낼 수밖에 없는 심리 치유적 기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나’라고 알고 살았던 좁은 의식에서 벗어나 우주로 의식이 확대되어 삶과 세상에 대한 인식과 시각이 전환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지요.

처음에는 개인적인 마음의 안정을 위해 마음수련을 시작했지만, 점차 그 차원 이상의 공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것보다 탁월한 어떤 치료법이 새로이 나왔다면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도록 하는 것은 의료인의 책무이자 학자의 도리일 겁니다.

앞으로 암 환자뿐 아니라 각종 만성질환자, 정신질환자, 중독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의 치료와 아동, 청소년, 특정 직업 종사자 등 다양한 인구의 건강과 행복 향상을 위해 마음수련이 활용될 가치는 매우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할 계획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수련을 통해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고 우리 모두가 참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가 되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공의 비결, Stop Thinking

불평 많은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몹시 성공하고 싶으나,
주변 여건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왕을 찾아가,
성공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왕은 그에게 물이 가득 찬 잔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물 잔을 들고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오면 비결을 가르쳐주마.
단, 물을 엎지르면 큰 벌을 내릴 것이다.”
청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시내 한 바퀴를 돌고 돌아왔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시내를 돌아보니 어떠하더냐? 시끌벅적하지? 장사꾼들도 많이 나왔더냐?”
“글쎄요. 오직 물 잔에만 신경 쓰느라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전심전력(全心全力)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온 마음과 힘을 쏟는다는 것이지요.
몰입하는 사람에게 불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몰입하고 집중하기’가 잘 안된다는 것이지요.
나의 집중력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이 글을 읽는 이 짧은 순간에도 혹 딴생각을 했나요?
성공의 비결….
무엇보다 끊임없이 맴도는 생각부터 멈추어야 합니다.
Stop Thinking!
생각을 멈추기 위해선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전인 교육의 시대

흔히들 정부의 교육 부처에서는 전인 교육에 관하여 많이들 말해 왔다. 학교에서는 전인을 지덕체예(智德體禮)라고 써놓기도 하고 토의하는 시간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전인을 지인용(智仁勇)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한국말로는 지덕체인 것이다.

전인이라고 하면 완전한 사람을 의미한다. 완전한 사람이란 참인 진리인 사람이고 또 참영혼이 죽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이 사람이 성인인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참사람이 구호에만 그치지 말고 되어 살아야 바른 삶을 살 것이다. 사람이 미완성이고 또 거짓이라 사람은 이 전인에 관하여 갈구하고 전인이 되려고 많이 노력하였지만 전인 되기는 쉽지가 않았다. 완전하다는 것은 죽음이 없고 살아 있어야 완전한 것이다.

인간이 의인이 되고 인간이 바르게 되려면 인간의 마음 구조부터 알아야 한다. 인간은 이 세상의 것을 사진 찍는 사진기인 것이다. 세상에 사는 줄 아나 인간은 세상을 봄과 동시에 자기의 마음속에 사진을 찍어 사진 속에 자기가 살고 있어 허인 것이라. 세상과 사람의 마음이 겹쳐져 있기에 사람은 세상 사는 줄 착각하고 사는 것이라.
자기가 경험한 일체가 자기의 마음속에 있지 않는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말하고 감각 있었던 것이 자기의 마음에 새겨져 있지 않는가. 인간의 마음은 세상에서 있었던 일과 세상을 복사하는 복사기와 같은 것이다. 인간마음이 세상을 복사하는 복사기다. 인간은 세상 사는 줄 아나 세상 살지 않고 자기의 마음속에 살고 있기에 전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인간이 완성인 전인이 되려면 더하기만 하던 자기의 마음세계에 빼기를 해야만 완성의 길로 갈 수가 있다. 거짓인 사진이 버려진 만큼 참이 나타날 것이다. 거짓인 인간이 참이 되는 것이 완성인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더하기만 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거짓인 자기 마음속의 사진을 빼고 거짓세계에 살고 있는 자기를 버리면 완성이 될 수가 있고 본성을 회복할 수가 있다.

본성이란 본래의 성품이다. 본래의 성품이란 신의 마음인 진리의 마음이다. 인간이 복사한 그 마음이 없으면 본성을 찾을 수가 있다. 복사하기 전의 원본이 바로 세상인 본성인 것이다. 이 세상에 ‘나’가 있는 것은 바닥인 지구가 있어 있고 지구는 본바닥인 하늘이 있어 있다. 이 하늘의 마음이 되는 것이 본성 회복인 것이다. 거짓인 인간마음과 인간이 다 죽으면 진리인 이 하늘마음만 남아 인간이 본성 회복이 될 수가 있다.

이 하늘인 본성에서 다시 나면 진리인 바른 나라에 난 자라 죽음이 없을 것이고, 세상 자체라 세상의 이치를 다 알 수가 있어 지혜 자체의 사람이 될 수가 있고, 순리의 삶을 살아 도둑이 없고 나쁜 사람이 없어 세상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될 것이다.

지금의 지식 공부는 먹고살기 위한 공부지만 완성인 인간이 되고 먹고사는 공부를 시키면 세상의 이치를 알아 더 공부도 잘하고 더 잘 살 수가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야말로 본성 회복의 시대에 먼저 이 본성을 회복시키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 마음수련회는 본성 회복하는 곳이기에 또 실제로 되는 곳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본성을 되찾기 위하여 모이고 또 많은 이가 본성을 회복하였다.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시인, 저술가, 강연가입니다. 2002년 인간 내면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UN-NGO 산하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평화 대사로도 활동 중입니다. 저서로 <세상 너머의 세상>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등이 있으며 그의 저서 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은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에서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5개 국제도서상 2013 LNBA, NIEA, IBA, IPPY Awards, 2012 eLit Awards에서 영성, 정신, 철학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근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의 영역본이 2014 에릭 호퍼 북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하는 등 마음과 비움, 깨침에 대한 우 명 선생의 철학이 전 세계의 관심과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자꾸 비교하는 아이

제 고민은요?

올해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갔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된 후 요즘 들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내 친구 누구는 엄마가 이런 걸 사줬대, 내 친구 아빠는 한 번 심부름을 하면 10만 원을 준대.’ 헐~! 한 번 심부름했다고 9살 아이에게 10만 원을 주다니. 참 문제구나 싶지만, 그런 친구들과 자꾸 비교하는 아이를 보며 주눅 들까 걱정입니다. 행복은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니라고 설명도 해주지만, 그 말을 얼마나 받아들일지. 자꾸 친구들과 비교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입니다.

제 생각은요!

A 저도 님의 자녀분처럼 부모님께 떼를 쓰며 자라왔습니다. 저보다 잘사는 집 친구들이 많이 부럽더라고요. 누구 집은 피아노 사주는데 우리 집은 왜 없어, 딴 집은 독방 있는데 나는 없어, 나도 00학원 가고 싶어… 등등 투정을 부렸죠.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여유가 없어서 그러셨는지, 늘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형편이냐. 그렇게 부러우면 그 집 가서 살아라.” 지나고 보니 그런 말들이 어린 마음에 상처도 되고 사랑을 못 받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가졌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제 아이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로 공부를 많이 했죠. 우선은 완전히 아이의 입장에서 대화를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내 친구 누구는 엄마가 이런 걸 사줬대, 할 때 그 순간 아이의 마음은 어땠는지를 물어봐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 네 마음이 이랬겠구나, 엄마에게 섭섭했구나~’ 하면, 아이는 자신이 이해받고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그것만으로도 힘을 얻습니다. 그 후 엄마의 마음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어린아이라고 하지만 자기 마음을 이해해주려는 사랑이 전달된다면, 충분히 마법처럼 엄마의 말을 이해하고 스스로가 판단하고 행동이 변화될 거예요. 그렇게 언제나 공감과 지지를 해주는 엄마가 있다면, 아이는 어디서나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 있는 아이로 자라날 겁니다. 정소정

A 초등 4학년, 2학년 자녀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2학년 아들이 욕심이 많아 저 역시 그런 문제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TV에서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이 나오기에 아이에게 보여줬습니다. 그 아이들에겐 먹을거리도, 깨끗한 옷도, 또한 어떤 장난감도 없지만 그 표정은 우리 아이들보다 행복해 보이지 않느냐고 되물으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많이 갖고 누려야 행복할 거라는 마음에 우리가 속고 있는 거라는 이야기를 해줬지요. 또 어느 날은 노숙자를 도와주는 사이트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루 3천 원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외식비를 아껴 이들을 돕기로 하였지요. 그리고 지금 우리 상황에 감사하자고 하며 가난한 이웃을 돕는 후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는데 점점 아이도 알아가는 거 같습니다. 쌓여가는 장난감이 이 지구의 환경을 얼마나 오염시키는지. 그 장난감들로 인해 며칠이나 즐거웠는지 상기시키니 물건에 욕심부리는 일도 적어졌습니다. 한창 비교하고 경쟁하며 크는 게 아이들이겠지요. 그럴 때일수록 주변의 낮은 곳을 보게 해주면 어떨까요? 김민선

A 15년째 상담심리사로 일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이들이 또래 관계를 형성하며, 비교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다만 그럴 때 아이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세요. 엄마의 입장에서 아이가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아이를 바로잡으려 하기보다는, 아이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어주는 거예요. 어릴 때 부모에게 자신의 감정을 인정받고 공감받은 경험을 한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건강하게 자랍니다. 또 한 가지는 엄마 스스로의 마음도 돌아보세요.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내가 아이에게 부족하게 해주고 있는 건 아닌지, 못해주는 부분에 대한 열등감, 다른 집과 비교하는 마음 등등 스스로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가만 보면 아이는 괜찮은데 엄마의 마음의 잣대로 걱정하는 경우도 많지요. 무엇보다 엄마 먼저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행복하게,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세요. 그러면 아이도 저절로 엄마의 모습을 따라 그렇게 성장할 겁니다. 권성명

고민과 의견이 실리신 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엽서, 이메일 edit@maum.org, SNS 관련 게시글의 댓글로도 참여 가능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다음 고민입니다.

30대 중반의 미혼 직장 여성입니다. 요즘 결혼에 대한 압박 때문에 너무 힘이 듭니다. 부모님의 잔소리도 힘들지만, 저 스스로도 남편과 알콩달콩 사는 친구들 모습을 보면 부러워지고 저도 이제 안정되게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집니다. 하지만 어느새 주변의 괜찮은 남자들은 다 품절남이 되었고, 선이라도 보려 하면 다 40대에서 50대입니다. 나이가 드니 직업이니, 연봉이니 이것저것 더 따지게 되고. 나이는 자꾸 들어가고. 저도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제 앞날이 불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