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스냅 더 스틱, 워터 웨이

● 이름은? 스냅 더 스틱Snap the stick. 구부려서 자를 수 있는 아이스크림용 나무 막대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평소 아이스크림을 좋아한 덕분이다. 하드바 형태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느꼈던 불편함에서 출발해 “작은 구조 변화로 불편함을 해결해 보자”는 의도로 디자인했다.

● 기본 원리는? 반 이상 먹은 후 남은 하드바를 먹을 때 무리해서 먹다가 입천장에 스틱이 닿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밀어 올리다 손에 잔뜩 묻기도 한다. 이런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일정량 이상을 먹은 후에는 나무 막대를 쉽게 부러뜨릴 수 있게 만든 구조로, 아이스크림 스틱을 찍는 판형의 작은 변화로 구현이 가능하도록 했다.

●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직관성과 쉬운 제작이다. 많은 변형을 가한 디자인은, 제작 과정에서 또 다른 불편함을 초래하거나 제작 투자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 아이스크림 소비자들이 Snap the Stick의 디자인만 보고도 사용 방법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콘셉트 디자인이 콘셉트에만 그치지 않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하였다.

● 하고 싶은 말은?
좋은 디자인이란,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화려함보다는 심플함, 많은 기능보다는 꼭 필요한 기능을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평소 꿈은 ‘불편한 것, 보기 싫은 것, 쓸모없는 것을 재창조하여 세상을 바꾸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관심 많은 디자이너가 되고자 한다.

만든 사람 강승관, 방지혜 디자이너

● 이름은? 워터 웨이Water Way. 물이 흐르도록 구멍을 뚫은 얼음 얼리는 트레이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평소에도 우리 셋이 모여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그날도 함께 작업을 하다가 얼음물을 마시는데 문득 ‘얼음 트레이에 얼음 얼릴 때 불편하지 않아? 물이 새잖아’라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자리에서 직접 종이로 얼음 트레이를 만들어 봤다. 그리고는 얼음 트레이 칸의 벽에 작은 구멍들을 뚫어 흐르는 길을 만들게 되었다.

● 기본 원리는? 얼음 트레이 칸의 벽마다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어서 한 칸에만 물을 붓고 있어도 물이 그 구멍을 따라 쉽게 차게 되는 원리다. 플라스틱 소재를 사용하면 트레이 벽에 있는 구멍도 함께 얼어 빠지기가 힘들다고 생각해서 실리콘 소재로 만들어 잘 구부러지면서 얼음이 더 잘 빠질 수 있도록 하였다.

●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사용자들의 불편을 덜어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사용자에게 쉽게 와 닿을 수 있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 하고 싶은 말은? 사소한 곳에서 디자인을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불편함이 있더라도 사람들은 거의 느끼지 못하거나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을 문제점이라고 인식하고, 화두를 던지고, 고치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든 사람 황유진, 윤지연, 전계진

5주년 기념 ‘유희열의 스케치북’

<유희열의 스케치북> 호청자라면 누구나 가지는 불만은 바로 이 프로그램의 방영 시간이다. 불금 아니 불금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늦은 시간, 12시 하고도 20분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시작된다. 아니 그것도 운이 ‘좋으면’이다. 요즘처럼 월드컵이라도 하면, 그야말로 함흥차사이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5주년 방송이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5주년이기 때문이 아니라, 브라질 월드컵이 16강전에 앞서 하루를 쉬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MC인 유희열은, 그것이 바로 ‘가늘고 길게’ 5주년까지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저력(?) 중 하나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밤 11시대에 공중파, 케이블을 막론하고, 야심차게 편성되었던 모든 음악 프로그램들이,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어쩌면 정말 그 애매한 시간대는, 제약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일 수도 있겠단 ‘웃픈’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무려 5년이나 지속해온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야무지게도, 내친김에, 유희열이 송해 할아버지 나이가 될 때까지 해보겠단 포부를 펼친다. 그리고 그 포부의 ‘현현’으로, 5주년 특집으로 마련한 것이, 바로 장수 프로그램 특집이다. 이른바 KBS의 장수 프로그램인 <전국노래자랑> <뮤직 뱅크> 그리고 <열린 음악회>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방문한 것이다.

<전국노래자랑>의 시그널이 울리고, 송해 할아버지의 우렁찬 ‘전국 노래 자랑~!’이라는 멘트가 울려 퍼지는 <유희열의 스케치북>, <전국노래자랑>의 단골 초청 가수 박구윤의 트로트 ‘뿐이고’가 화려한 무대를 펼친다. 오래도록 <열린 음악회>를 지켜왔던 황수경 아나운서가 그 내공의 한 자락을 펼치고, <열린 음악회> 하면  떠오르는 가수 인순이가, 그 무대에서 즐겨 불렀던 <거위의 꿈>을 수화와 함께 열창한다.

5주년 특집으로, <전국노래자랑>과 <열린 음악회>의 무대를 고스란히 퍼 나른,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보고 있노라면,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라는, 자부심과 정의를 확인하게 된다.

‘고품격 음악 방송’으로써, 음악이 자리한 그곳의 모든 것을 눈여겨보고, 그것의 가치와 존재를 제대로 확인시켜 주는, 우리 시대의 어쩌면 유일한 방송,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존재론을, 5주년 특집으로 다시 한 번 스스로 증명해낸다.

덕분에, 이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가수들의 절창은 물론, 가수들의 절창을 가능케 해준 음악인으로서의 연주자들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제 5주년을 맞이하여, 그 가수와 음악인들에게 오래도록 무대를 제공해 왔던 ‘장수 무대’들의 존재를 새삼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

어려서 <뮤직 뱅크>를 즐기다, 철들어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맛들이고, 나이가 지긋해져 가면서 <열린 음악회>가 편해지고, <전국노래자랑>이 흥겨워지는, KBS의 음악 프로그램만으로, 마치 누군가의 일생을 조망하게 되는 듯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또한 ‘아이유’라는 가수를 발견해 주고, ‘십센치’의 붐을 선도했으며, ‘장미여관’을 발굴했던, 음악 프로그램 본연의 몫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5주년에 즈음하여, 스스로에게 개근상을 수여하듯, 되돌아본다.

이것이 또 하나의 이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이다. ‘인기 가수’가 된 많은 가수들이, 일찍이 유희열의 극찬을 받으며 떨리는 모습으로 이 무대에 섰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가기 전에, 그들과 조우했던 ‘선견지명’의 맛은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호청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몫이었다.

그렇게, <유희열의 스케치북>만이 할 수 있는 각종 특집들과, <유희열의 스케치북>만의 매의 눈으로, 오늘의 5주년을 만들었다. 늦은 밤의 기다림도, 변심한 애인처럼 가뭄에 콩 나듯 하는 만남도 마다치 않을 터이니, 부디 오래오래 해먹기 바란다.

이정희

왜 여름엔 삼계탕인가?

안녕, 나 삼계탕이야.
내가 역사가 좀 있으니 일단 말은 놓을게. 요즘 많이 덥지?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답답하고 열이 나면서, 맥을 못 추고 어지럽다가, 심한 경우 쓰러지는 경험도 해봤을 거야. ‘더위’를 먹어서 생기는 증상이지. 날씨가 무더워지면 체온이 지나치게 올라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평소보다도 30% 정도 많은 혈액이 피부 근처로 몰리게 되거든.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위장과 근육들이 혈액 순환이 잘 안돼서 그래. 때문에 소화도 쉽게 되고 열이 많은 음식을 먹어 냉~해진 위장과 간을 보호해줘야 해. 즉 나 삼계탕이 답인 거지. 왜 나인지 지금부터 설명해줄게, 잘 들어봐.
이계승

닭과 인삼이 처음 만난 게 언제냐 하면

사실 삼계탕 한두 번 안 먹고 여름 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삼계탕의 인기가 이 정도로 된 데는 사연이 좀 있어. 여름엔 소화 잘되고 열이 많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위에서 얘기했지.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여름 보양식으로 개고기 보신탕을 많이 먹었어. 근데 1988년 서울올림픽 때 국제동물보호단체 등이 한국인의 ‘개고기 문화’를 비하하고 혐오 식품으로 여론몰이를 하는 바람에 보신탕집이 된서리를 맞고 뒷골목으로 숨게 됐잖아. 그 덕에 삼계탕이 여름 보양식의 으뜸으로 자리를 잡게 된 거지.

알고 보면 우리 삼계탕이 아주 대단히 오래된 음식은 아니야. 신라 천마총(A.D 5세기)에서 달걀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닭은 꽤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했어. 그런데 인삼이 이 땅에서 만들어진 것은 16세기부터야. 당시에도 세계적인 영약으로 알려진 산삼을 공납하기 위해 백성들이 산속을 헤매느라 농사에 전념할 수 없었다고 해. 이런 폐단을 안타깝게 여긴 주세붕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직 중이던 1541년에서 1545년 사이에 산삼 씨앗을 구해서 인삼 재배법을 개발해내신 거야! 그러니까 나 삼계탕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봐야지.

영계백숙? 연계백숙?

‘백숙(白熟)’은 간을 하지 않고 맹물에 마늘과 닭을 넣고 끓인 음식을 말하는 거야. 근데 보통 새끼를 낳지 않은 닭 혹은 병아리보다는 크지만 아직 살이 무른 햇닭을 연계라고 불렀어. 또 한편으로는 어린 닭의 살이라 야들야들하고 연해서 ‘연계(軟鷄)’라고 부른 것 같아. 이 연계가 나중에 젊은 닭을 뜻하는 young+계(鷄)=영계란 말로 변형된 거야.

아무튼 이 백숙이 주세붕 선생이 재배한 인삼을 만난 이후부터 찹쌀, 밤, 대추와 함께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푹 끓여 먹는 음식으로 발전했어. 근데 처음부터 삼계탕이란 이름으로 불린 건 아닌 것 같아.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월간지 <조선>에 보면 “더위가 오면 부자들은 거의 매일 계삼탕을 복용한다”는 기사가 나오거든. 계삼탕이 삼계탕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인삼이 대중화되고 외국인들이 인삼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 1960년대 이후 음식점 주인들이 삼계탕으로 간판을 고쳐 걸게 된 이후부터로 보고 있어.

영양 면에서도 화려하기가 특급이지

삼계탕의 주연급인 닭고기는 소화·흡수가 잘되고 단백질과 불포화 지방의 비율이 높아서 소고기보다 건강에 좋은 재료야. 특히 메티오닌을 비롯한 필수 아미노산이 많아 새살을 돋게 하는 데 효과가 있고, 닭 날개 부위에 많은 뮤신은 성장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고 성기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그리고 인삼 좋은 건 세상 사람이 다 알잖아. 진세노사이드라고 불리는 사포닌 성분이 원기 회복과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데 큰 도움을 줘. 조연들도 무시할 수 없어. 황기는 머리를 맑게 해주고, 마늘은 항암 효과가 있고, 밤과 대추는 위를 보하면서 빈혈을 예방해주고….

요즘은 맛으로 즐겨 먹는 맛객들로 인해 사시사철 삼계탕집이 붐비고 있기도 하지. 삼계탕 국물을 보면 어느 가게는 말간 국물인가 하면 또 어떤 집은 뽀얗고 걸쭉한 국물이기도 해. 작은 영계로 국물을 내면 말간 국물이 나오지. 그런데 이것이 심심하다 생각했는지 곡물이나 견과류를 갈아 넣어서 국물을 낸 거라는군. 점점 이런 고소하고 걸쭉한 국물의 삼계탕을 만드는 집이 늘어나는 추세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음식 문화인지라 얼마 후에는 이것이 삼계탕의 일반적인 레시피가 될지도 모르지. 그러면 또 어디선가는 ‘옛맛’ 삼계탕이라고 간판을 걸고 맑은 국물로 마케팅할지도.

소음인에 특히 좋은 삼계탕, 체질 가려서 미안해

한편에서는 평소 몸에 열이 많은 사람, 고혈압이나 뇌졸중을 주의해야 할 사람에게는 삼계탕을 권하지 말라는 얘기도 있어. 한의학에서 보면 삼계탕은 대표적인 소음인 음식이래. 추위도 많이 타지만 특히 여름에 기운이 없고 땀을 많이 흘리는 소음인들은 허열(가짜 열)을 갖고 있는데, 삼계탕이 바로 이런 허열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거야. 하지만 태음인이나 태양인에겐 맞지 않는 음식이란 말도 맞대. 그렇지만 예전의 한국 토종닭들은 사납고 심지어 하늘을 날았다니까 요즘의 비실비실한 양계장 닭들은 조상들보다 약성도 떨어질 거야. 삼계탕이 약은 아니지만 효력 면에서 본다면 예전만은 못하겠지.

모처럼 회식하러 삼계탕집 갔는데, “나는 체질에 안 맞아서…” 하고 빼면 눈총받을지 모르니까 미리 친한 친구랑 삼계탕집 가서 한 그릇 가지고 임상 실험이라도 해보는 건 어떨까?

홀로 계신 아버지가 걱정이에요

제 고민은요?

혼자 계신 아버지가 걱정입니다.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80대 아버지 혼자 시골에서 지내십니다. 처음엔 논일 밭일도 조금씩 하시더니, 얼마 전부터는 통 다니시지도 않고 누워만 계시고, 작년 한 해만 폐렴 등으로 입원을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어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고, 결혼한 언니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요양병원에라도 모실까 했는데 선입견이 있으신지 내키지 않아 하십니다. 어떻게 하는 게 아버지께 가장 좋은 선택일까요?


제 생각은요!

요양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입원하신 어르신들과 보호자 사이에서 서로 마음 놓고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안심서비스’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병원에 오고 싶어도 자주 못 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가족분들을 대신해 어르신들이 외롭지 않도록 신경을 더 써드리고 있지요. 같은 방 친구분들과 잘 어울리게 도와드린다든지 대화 상대도 해드리고, 보호자분들이 궁금해할 경우 의사 선생님 혹은 간호 팀과 직접 전화를 연결해드리기도 합니다.
사실 아직 많은 분들이 요양병원에 대한 선입견이 많으신데요, 요즘은 기존 요양병원을 탈피한 새로운 요양병원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병원만 해도 직접 방문해보고는 만족해하는 분들이 많으세요. 우선 병원을 선택할 때 자식 입장에서 편한 곳보다는 부모님이 좋아하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처음엔 내키지 않아 하시겠지만 좋은 요양병원을 알아보신 후, 아버님을 모시고 방문해보시면 어떨까요. 직접 그곳에서 지내시는 어르신들의 편안한 모습도 보고 하면 아버님의 마음도 바뀌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선선

저 역시 14년간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사연을 들으니 자식으로서 고민이 많이 되실 것 같습니다. 우선 아버지께서 집에 계시는 게 편하다고 하시는 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젊은 저희도 그렇듯 내 집만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아버지 혼자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시군에서 운영하는 노인 돌봄 시스템 같은 걸 활용해 보는 겁니다. 가령 가스 불 잠그는 걸 깜박하시는 등 사고의 위험이 있다면 요양병원이나 실버타운에 가시는 걸 고려해 보겠지만, 약간의 거동만 불편한 경우라면, 가까운 동네 분들에게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방문해서 말동무해주십사 부탁을 드리고 따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자식들 입장에서는 부모님을 편하게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병원에 입원하신 후 활동량이 크게 줄어들면서 더 아프신 경우도 많이 보아왔거든요. 특히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분이시라면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시는 게 아버지를 위해서도 더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자은

님의 고민을 보고 안쓰럽고 답답했습니다. 정말 사면초가에 빠지신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요. 하지만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제 생각엔 더 이상 마음만 졸이지 말고, 결단을 내리면 어떠실까 합니다.
홀로 계신 아버지가 그렇게 외로워하시는데, 몸도 아프신데, 꼭 직장에 다녀야 하는지요? 언니분과 상의하신 후, 님께서 아버지를 모시는 쪽으로 하면 어떨까요? 상황도 자세히 모르면서 너무 쉽게 말한다 하실지 모르지만, 지금 중요한 건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느냐인 것 같습니다.
두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너무나 후회를 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게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처럼 한이 남지 않으시길 바라며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지수

아내가 저를 바람둥이 취급합니다

저녁밥을 먹고 소파에 누워서 빈둥대고 있는데 아내가 쌀이 떨어졌다며 마트 쇼핑을 원합니다. 내일로 미뤄 보지만 당장 내일 아침쌀도 없다며 차 키를 던져 줍니다. 차로 20분 정도 거리의 대형 마트에 도착했습니다.

이것저것 생활용품을 고르고 있는 아내의 뒤를 카트를 끌고 무심히 걸어가고 있는데 아이들 먹을 시리얼 코너 앞에서 아내가 무엇을 고를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가씨 둘이서 아내 옆에서 같이 시리얼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셋이서 자리를 조금씩 이동하며 고르고 있는데 두 아가씨 중 한 명이 맨 위 칸의 시리얼을 빼서 보고 다시 넣어 두는데 약간 위태롭게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 칸의 시리얼을 꺼내는 순간, 그 위태롭던 시리얼이 마침 아래 앉아 있던 다른 아가씨의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순간 저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튕겨 나가 시리얼을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아가씨의 놀란 비명, 제 손에 쥐어진 시리얼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연신 감사하다는 두 아가씨의 인사를 받으며 저는 별말 없이 괜찮다는 손 인사를 하며 시리얼을 제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잠시 후 아내가 건넨 시리얼을 카트에 담고 라면 코너로 향하는데 관자놀이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집니다. 곁눈질로 보니 아내가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군데가 더 따갑게 느껴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엄지손가락이었습니다. 좀 전에 시리얼을 낚아채다 선반에 엄지손가락을 부딪치면서 금방 멍이 들고 까진 자국이 눈에 띄었습니다. 엄지손가락을 본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아주 영웅 나셨네. 30분 전에 소파에서 일어날 때는 열대우림의 나무늘보 같더니 좀 전에 시리얼 낚아채는데, 당신은 아주 거 뭐냐 색깔 변하는 도마뱀… 어?” “카… 멜레온?”

“그래, 맞아. 카멜레온이 혓바닥으로 파리 낚아채듯 눈 깜짝할 새 아가씨를 구하셨네. 그것도 부상 투혼까지 당하면서. 어디서 갑자기 그런 스피드가 나오디? 어? 고르라는 애들 시리얼은 안 보고 아주 첨부터 아가씨들 동선을 쫓아갔으니 그런 찰나의 위험에서 어린양들을 구하셨겠죠?”

이때 라면 코너에서 좀 전의 두 아가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아가씨들은 다시 눈인사를 하고 지나쳤습니다. 저도 짧게 인사를 받았습니다. 이 모습에 아내가 제 옆에 붙더니 나지막이 속삭입니다. “바람둥이 아저씨. 잘 봐… 혹시 저 위에 라면 박스라도 떨어질지 알아?” 깐죽이는 아내에게 꿀밤 시늉을 했습니다. 아내가 머리를 더 들이밀며 말합니다. “젊은 것들은 구해주고 늙은 건 줘 패냐?”

집에 와서 아내가 제 엄지손가락에 약을 발라주며 한마디 합니다. “이거 봐, 아무리 젊은 애들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해도 결국 약 발라주는 건 마누라지? 그러니까 한눈팔지 마세요. 바람둥이 아저씨~” 저도 아내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형우 엄마. 그 아가씨 머리 위에 떨어졌으니까 내가 손으로 낚아챘지. 만약에 당신 머리 위에 떨어졌으면 낚아챌 여유가 어디 있겠어. 내 몸을 날려 당신 덮었겠지….” 아내가 물끄러미 절 쳐다봅니다. 그리고 딱 한마디 하네요. “공구통이라든지, 통짜로 된 바둑판 같은 게 떨어져도?” 통짜 바둑판 세 변이 모이는 꼭짓점 생각에 대답이 약간 늦었습니다. 바로 엄지손가락이 꺾였습니다.ㅠㅠ

백일성(44)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동물과 인간이 서로를 치유하는 세상 ‘폴랑폴랑’

취재 문진정

반려동물 보유 인구 1천만 명. 늘어난 반려동물만큼이나 휴가철이면 버려지고, 길을 잃는 동물들도 많아진 시대에 반려동물과 사람의 평화로운 공존을 꿈꾸는 사회적기업이 있다. 동물의 발을 뜻하는 포(Paw)에 ‘~함께’라는 의미의 ‘랑’을 합쳐 이름 붙인 ‘폴랑폴랑’이다.

어릴 적부터 반려동물과 가족처럼 지내왔다는 김윤정 대표는 청소년기에 우연히 유기견을 입양하게 되면서 유기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국내 반려견 훈련소를 찾아가 동물의 언어와 행동, 훈련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전공이나 직업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지만 20년 넘게 반려동물들과의 소통은 계속되었다. 덕분에 동물행동심리전문가, 국제동물행동심리협회 회원, 국제반려견훈련사협회 회원, 공인 반려동물 응급처치 강사 등의 남다른 이력들도 따라왔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2011년, 국내 최초의 국제 인증 반려동물 교육 전문 기업인 동물심리연구소 폴랑폴랑을 만들게 되었다. 주로 하는 활동은 반려동물을 위한 교육, 유기동물 입양, 치유동물을 통한 인간 치유 프로그램 등이다. 치유 프로그램에는 특별한 훈련을 받은 강아지들이 함께 참여한다. 강아지에게 책을 읽어주고 함께 놀며, 아이들은 자신감을 되찾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책임감, 욕구 표현 방법들을 터득하게 되면서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눈에 띄게 달라지고,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준다.

작년부터는 ‘워터 페스티벌’과 ‘할로윈 페스티벌’을 열기도 했다. 반려인, 비반려인 모두가 도심에서 동물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맛본다면 유기동물은 서서히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다. 사회 문제 해결은 물론 인간 심리 치유까지, 동물과 인간이 손에 손잡고 서로를 치유하고 함께 성숙해가는 세상. 폴랑폴랑을 통해 기대해 본다.

2013년, 수개월의 논의 끝에 서울시 야외 수영장의 반려견 출입 허가를 얻어 개최된 반려견 워터 페스티벌 ‘개리비안 베이’는 오는 8월 말에 다시 열릴 예정이다. 10월에는 반려견과 함께하는 할로윈 페스티벌. 3월부터 연말까지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는 ‘아름다운가게’와 함께 하는 독서치유프로그램 ‘강아지와 책읽기’가 진행된다. 그 밖에도 국제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도그워커 아카데미’, 40세 이상의 시니어로서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분을 위해 폴랑폴랑의 치유 동물 팀도 운영 중이다.

www.polangpolang.com

김윤정 대표 이야기

동물의 행복과 인간의 행복은 이어져 있습니다. 동물의 일방적인 희생을 통해 행복을 얻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요. 아동기 동물 학대의 70%가 어떤 형태로는 성인이 되어서의 사회적 범죄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고, 따돌림, 아동 학대,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삶을 살아가는 자세라고도 볼 수 있는 거죠.

그렇기에 반려동물에 대한 특별한 기술을 배우기 이전에 한 생명으로서 ‘존중’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도 한집에 산다고 해서 무조건 가족이 아니듯이 반려동물을 이해하고 소통하면서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거죠. 저희가 노력하고 있는 부분 또한, 유기동물은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근사한 친구’라는 인식을 심어줘서 함께 살고 싶은 진짜 가족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지요. ‘유기하지 마라’ 또는 ‘유기동물을 입양하라’는 지시나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 즐거움을 알고, 동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생력을 되찾고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느끼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마음을 열고 반려동물을 받아들이면서 얼굴이 어둡고 딱딱하게 굳었던 분들이 금세 화사하게 바뀌는 걸 봅니다. 그런 매 순간이 저에게는 보람이고 또 모든 반려동물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선생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폴랑폴랑이 ‘생명을 대하는 시각이나 태도’에 기존과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등대 같은 역할을 했으면 합니다.

우리 학교 최고의 안전 요원, ‘배움터 지킴이’ 선생님

우리 학교에는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훌륭한 인품을 지닌 ‘배움터 지킴이’ 선생님이 계시다. ‘배움터 지킴이’는 2006년 학교 폭력의 예방을 위해 처음 생겨난 제도로, 현재 많은 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데, 주로 공직 생활을 오랫동안 하고 정년 퇴임을 하신 분들이 하고 있다. 모든 직책이 마찬가지지만, 특히 사회봉사 개념을 곁들인 ‘배움터 지킴이’는 하는 분에 따라서 역할이나 기능이 천차만별이다. 지킴이 교사에 대해 이웃 학교에서 전해 오는 소문이 별로 좋지 않을 때도 더러 있다. 퇴직 관리자 출신인 경우, 상전 아닌 상전으로 교사들 위에 군림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우리 학교 배움터 지킴이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일찍 출근하신다. 학교에 오신 지 만 3년이 되셨는데 늘 한결같다. 많은 학교가 학생들이 등교하는 길과 차도의 구분이 명확지 않다. 모 학교에서는 복잡한 등교 와중, 교사의 차에 학생이 다쳤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학부형님들이 교대로 교통 지도를 해주시기도 하지만 좀 더 전문적인 담당자가 필요한 현실이다.

출근할 때 교문 앞에서 처음 마주치는 분이 학교 지킴이 선생님이시다. 교통 지도 봉을 들고 호루라기를 불며 아주 숙련된 솜씨로 교통 지도를 하신다. 등교 학생과 출근 차량의 위험한 접촉이 없는지 좌우를 살피며, 교통경찰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뿜으신다.

등교 지도가 끝난 다음엔 교실 복도와 교문 입구 초소를 순간 이동하시며 하루를 보내신다. 교실에 담임 선생님이 임장해 계시는 초등학교와 달리, 선생님이 안 계시는 중학교의 쉬는 시간은 가히 무법천지다. 좁은 복도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큰 소리로 떠들며 몸을 부대낀다. 소리 지르는 아이, 장난치는 아이, 창문턱에 앉아 바깥쪽으로 위험하게 몸을 기울이며 ‘묘기대행진’을 펼치는 아이 등 교사들이 철수한 빈 공간을 아이들이 순식간에 점령해 버린다.

‘이출이 배움터 지킴이 선생님!
언제나 한결같으신 모습에 존경을 보냅니다.’
이출이 선생님께는 박영숙 교사의 마음을
담아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나에게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담은 편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장난꾸러기 악동들의 정글 속에서 지킴이 선생님은 마치 어린 타잔을 다스리는 어른 타잔처럼 종횡무진 복도를 누비신다. 과한 장난을 말리고, 혹시 싸우는 아이들이 있는가를 살피신다. 종이 쳐도 망아지처럼 쏘다니는 아이들을 교실로 들어가게 하는 푸시맨 역할도 하신다. 학교 폭력이나 사고가 일어나는 시각이 주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인데, 교사들이 없는 위험한 시간대를 지킴이 선생님이 잘 지켜주시는 것이다. 수업이 시작되면 재빨리 교문으로 이동하셔서 방문객을 살피신다. 잡상인이나 이상한 방문객으로 고초를 겪는 일이 가끔 있기 때문에 교문 역시 비워둘 수 없는 지킴이 선생님의 주요 근무 영역인 것이다.

한 사람의 훌륭한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한 분의 성실한 지킴이 선생님은 학교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교사들이 존경하고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직 철부지 같은 우리 학생들도 그것을 안다.

어쩌다 봉급 이야기가 나와서 지킴이 선생님의 적은 보수를 미안해하면 손사래를 치신다. “제 나이에 다른 데 일자리가 쉽습니까? 봉사한다고 생각해요. 연금도 있으니까 월급 작아도 괜찮아요.”

아이들과 부대끼는 게 힘들 때 늘 아이들의 파도 속을 넘나드는 지킴이 선생님을 생각한다. 지킴이 선생님은 학생들이 교내에서 만나면 웃으면서 반갑게 인사할 때, 3년 동안 무사히 잘 마치고 영광스러운 졸업장을 들고 정문을 나설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하신다.

학교에 관한 암담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잇따르면서 하루 종일 학교에서 생활하는 교직원과 학생들은 바윗돌에 눌리는 듯, 엄청난 무게감에 힘들어하고 있다. 하지만 드센 바람과 거센 비에도 피어나는 풀과 자라는 나무처럼 성실히 학교 공간을 지키는 이런 분들에게서 다시 희망을 본다.

박영숙 교사.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히말라야, 그 영원한 찰나

사진 & 글 이창수

K2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달빛 1200×1800mm.

“3년, 700일 동안의 여정, 히말라야는 내게 한 걸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줬어요. 처음엔 의식적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어느 순간 그 욕심이 사라지더라고요. 밤새 5,000m 설산을 넘으며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극복하니 걷는 게 달라지더군요. 많은 생각을 하다 어느 날 굉장히 가뿐하게 치고 올라갔더니 벌써 에베레스트에 와 있더군요. 그때 어떤 깨달음이 왔어요. 한 걸음, 한 걸음일 뿐이야… 한 걸음만 떼면 돼. 오래 걷다 보니 무시간성(無時間性) 시간이라는 게 느껴져요. 나 없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게 뭔지 어렴풋이 알게 됐고, 그게 시간성, 현재성이 주는 실재 아닐까 생각했죠. 그렇게 걷는 것에 집중하면서 다가오는 것을 한 장 한 장 담았습니다.”

‘자연’이라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시간의 변화를 안고 간다. 그곳에서 작은 한 점 되어 걸었다. 길을 걷다 보면 앞에 있는 산이, 그 산을 감싸는 구름이, 그 구름 사이를 비집는 빛이, 꿈틀대고 넘실대는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아니한 것이 없다. 큰 기쁨이다. 너도 나도.

어느 한순간 마음으로 한 장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비록 한 편의 일부일지라도 대상과 맞닿는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의 순간이 ‘영원한 찰나’라는 살아 있음이다. ‘사진 찍기’는 대상을 마음으로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 순간의 진정한 마음만이 필요할 뿐이다.

얌드록초 호수 1500×4300mm. 라싸에서 시가체 가는 중간 길에 있는 얌드록초 호수. 티베트의 4대 성호 가운데 하나이다.

히말라야는 고대 인도 말인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사는 곳을 뜻하는 ‘알라야(alaya)’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로 ‘눈이 있는 곳’ 또는 ‘눈의 집’을 의미한다. 이처럼 히말라야에는 1년 내내 새하얀 만년설이 덮여 있다.

시작도, 끝도 찰나.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다는 현존. 그 길을 걸었다. 높은 산, 먼 길. 살 수 있는 땅과 죽을 수 있는 땅의 경계까지. 너무 빨라 멈출 것만 같은 심장의 뜀박질과 희박한 산소를 한껏 마셔야만 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다시 또 한 걸음 내디뎠다. 히말라야 산중에서, 히말라야 산중을.

언제였는지도 모를,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묵은 눈, 빙하에 지금 눈이 내린다. 더 짙을 수 없는 푸른빛이 설산을 감싸 안아 더 투명할 수 없는 세상을 연다. 2000억 개인지, 4000억 개인지도 모를 만큼, 많은 별이 모였다는 은하의 강이 먹빛 어둠을 밝힌다. 그런 시간 속에서 얼키설키 엮여 만들어진 나의 DNA에 이 모든 것들이 내려앉는다.

한 호흡과 한 걸음에 깊이 빠질 때, 산과 내가 ‘한 존재’로 느껴지는 바로 그때, 감히 사진 한 장 찍곤 다시 걷는다. 히말라야가 품고 있는 내면의 숨결 또한 가슴 깊이 새긴다. 그런 산의 모습을 오롯이 느끼는 순간은 곧 자신의 본성을 보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야크 카르카 캠프의 아침 운해 1200× 5800mm. 시샤팡마 베이스캠프 가기 전 야크 카르카 캠프에서 본 아침 운해.
멀리 네팔의 히말라야산맥이 운해 사이로 보인다.

팅그리 평원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와 초오유 1200×4800mm. 에베레스트(초모랑마) 와 초오유에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다.
에베레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영국의 측량국장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사진가 이창수님은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샘이 깊은 물> <월간 중앙> 등의 사진기자를 지냈다. 2000년 경남 하동 악양에 정착하여 지리산의 속내와 사람살이를 사진에 담아 <움직이는 산, 智異> <Listen-‘숨’을 듣다> 등의 사진전을 열었다. 현재 순천대학 사진예술학과 외래교수이다. 2011년 12월부터 700여 일에 걸쳐 히말라야 설산의 내면과 사람들을 담은 히말라야 14좌 사진展 <이창수·영원한 찰나> 전시회가 오는 8월 11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에서 열린다. 히말라야 14좌는 히말라야산맥과 카라코람산맥에 걸쳐 분포하는 8,000미터급 봉우리 14개를 말한다. 히말라야는 인도 북부에서 중앙아시아 고원 남쪽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이다.

영원한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바야흐로 태양의 계절이다. 이즈음이면 누구라도 배낭을 둘러메고 낯선 거리에 서고 싶다. 순백색 자유를 찾아서…. 세계적인 여행가 김찬삼(1926~2003), 그는 돈키호테였다. 그가 세계 여행을 떠난 1958년의 우리나라는 암흑의 시대였다. 이 암흑을 뚫고 그는 돈키호테의 기상으로 세계를 향해 돌진하였다. 3차례의 세계 일주를 포함하여 20여 회의 해외여행을 성취하였다. 모두 합치면 160여 개국, 여행 거리로는 지구 둘레 약 32바퀴를 여행한 셈이며 여행한 기간은 총 14년에 해당한다. 그 여행들을 바탕으로 그가 펴낸 여행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 어두웠던 시절 우리 민족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글 & 사진 제공 김재민

“한 우물을 파게, 물이 나올 때까지!” 슈바이처와의 만남

“코리아에서 온 미스터 킴이시지요?” 흑인 간호사는 김찬삼을 허름한 오두막으로 안내하였다. 호롱불 아래서 글을 쓰고 있던 슈바이처 박사는 찬삼을 보자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어서 오게! 왜 이리 늦었어? 무슨 사고가 났는지 걱정했다네!” “박사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1963년 11월 25일 밤, 서른여덟의 김찬삼은 소년 시절부터 동경해오던 슈바이처 박사를 만났다. 슈바이처 박사는 오랜 여행 끝에 땀에 찌든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지친 모습으로 서 있는 김찬삼을 따사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 후 김찬삼은 가봉의 람바레네에 위치한 슈바이처병원에 머물면서 병원 일을 도왔다. 환자도 보살피고, 침대나 의자 등 집기도 고치고, 건물 보수도 돕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보름 후 김찬삼은 남은 여정 때문에 슈바이처 박사와 이별을 고해야 했다.

“박사님! 따뜻한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박사님! 제게 인생의 지혜를 하나 가르쳐주십시오.” “음, 인생의 지혜라… 그래! 한 우물을 파게, 물이 나올 때까지!” 김찬삼은 이 슈바이처의 충고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세계로 향하는 창문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은 1926년 6월 5일,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김찬삼에게 있어서 여행은 저항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소년 시절 그의 꿈은 기차의 차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기차의 차장은 하얀 연기와 함께 기적을 울리며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신비로운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후 부친의 근무지를 따라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그의 꿈은,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영국 배를 견학한 후 마도로스로 발전하였다. 그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선원 학교를 지망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세계 여행이라는 그의 꿈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은 슈바이처 박사와 동방견문록의 마르코 폴로였다. 김찬삼은 학창 시절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여행하였다. 집 안에 있으면 왠지 힘이 빠지고,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면 새장에 갇혔던 새가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처럼 한없는 자유가 느껴졌다.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의 꿈은 더욱 절실한 신념이 되었다.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내가 세계 구석구석을 직접 가 봐야겠어! 컴컴한 우물 안에 있는 것 같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세계로 향하는 창문을 만들어야 한다!’

김찬삼은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온 슈바이처 박사를 만났다.(가봉 람바레네. 1963년)

김찬삼은 세계 여행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어학을 공부하며, 신체를 단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가족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김찬삼은 장손이자 독자로서 부모님의 권유로 열아홉에 결혼을 하였으며, 33세에 이미 1남 3녀를 거느린 가장이었던 것이다. 늙으신 부모님과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찬삼은 세계 여행이라는 뜨거운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부친께 세계 여행의 포부를 밝혔다. 그의 부친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법관이 된 훌륭한 분이었다. 김찬삼의 부친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법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그는 “네가 신중히 결정한 것이라면 감행하거라! 다만 이왕 뜻을 품었으면 반드시 성취하거라!” 하며 아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부인 역시 남편의 세계 여행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김찬삼의 부인은 평생토록 남모르는 헌신을 했으며, 그녀의 헌신으로 김찬삼의 꿈은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의 여행기는 어려웠던 시절 많은 젊은이들의 꿈의 산실이었다”

김찬삼이 대망의 세계 여행길에 오른 것은 33세 때인 1958년 9월이었다. 당시는 전쟁 후의 혼란이 채 가시기 전으로, 세계 여행을 시도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요, 선구자적인 것이었다. 이후 그는 3차례의 세계 일주를 포함하여 20여 회의 해외여행을 성취하였다.

여행은 고행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과 배고픔, 예측할 수 없는 위험 그리고 강행군을 통한 구도자의 길이었다. 김찬삼은 평생을 통한 세계 여행을 정리하여 책을 만들었다. 수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완간된 그의 여행기는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외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독자들은 그가 소개하는 여행담과 세계의 문물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의 여행기는 세계로 열린 창이었고, 경이로운 설렘이었다. 서재와 도서관마다 그의 책은 빼놓을 수 없는 장서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의 꿈의 산실이었다.

1992년 67세의 노장 김찬삼은 그가 14세 소년 시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자신은 동에서 서로 가며 서방견문을 하리라 다짐했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발 끈을 동여매었다. 그리고 그 314일간의 고행은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되고 말았다. 여행의 신이 더 이상 그에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지 않은 것이었다.

길 위에서 죽어도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는 2003년 7월 78세의 나이로 여행 인생을 마감하였다.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의 유산은 남아 있다. 그 유산은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용기요, 꿈을 성취해내는 추진력이요, 우리나라 세계화의 초석이요, 인생의 후배들에게 남겨놓은 불굴의 정신적 이정표이다.

여행의 신을 믿는 그의 영혼은 어쩌면 지금도 남미 어느 골목이나 아프리카 오지 마을, 남태평양 작은 섬의 해변가에서 자유로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1950년대에 사진기는 시골은 물론 도시에서조차 ‘요술상자’라 할 만큼 신기한 물건이었다.

김찬삼님은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이후 숙명여자고등학교와 인천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1956년부터 세종대학 지리학과 교수, 1984년부터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저서로는 1962년 <세계 일주 무전여행기>를 시작으로 <목숨을 건 세계 여행> <김찬삼의 세계 여행> <실크로드를 건너 히말라야를 넘다> 등 다수의 여행기를 펴냈으며 2008년에는 우리나라 여행 문화를 개척하고 선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받았습니다.

뚜벅이 변호사 조우성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사람이 되겠습니다.”

뚜벅이 변호사 조우성씨

기업분쟁연구소 조우성(46) 변호사.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우연히 본 동영상에서였다. 그는 ‘경청은 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가’란 주제로 강의 중이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감동으로 다가왔다. 조우성 변호사는 변호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경청이라고 말한다.
분노하고 격정적으로 부딪치는 상황에서도 얼마나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수없이 목격해왔다는 것. 냉혹한 승부사가 아닌 동반자로서의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그에게 경청의 지혜를 들어본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2014-08-(20)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 17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직접 체험한 ‘경청의 힘’에 대한 내용들을 담아내셨는데요, 책을 내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12년 5월인가 연달아 2개의 사건을 졌어요. 사건에 지고 나면 되게 힘이 빠지거든요. 그러면서 변호사로서 내가 잘하고 있나? 자문할 때였죠. 사건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고, 제 스스로가 방전된 상태라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는데 마침 출판사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처음엔 제 글이 너무 변호사답다고 해서 소설가분들의 책을 필사해가며 편안한 문체로 바꾸려는 연습까지 했어요. 덕분에 공부도 많이 됐습니다. 그동안 제가 쓴 글은 목적과 결론이 중요했는데, 글 쓰는 여정 자체가 의미가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원고를 탈고하는 순간 제 스스로 방전 직전이었던 배터리가 충전되는 기분이었어요.

자연스럽게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돌아보게 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랬죠. 그동안 진짜 앞만 보고 달려가면서 로마 시대 검투사같이 살았거든요. 승과 패에 대해 민감했죠. 근데 돌이켜보니 진짜 좋은 변호사는 가이드(안내자) 같은 사람이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가령 누군가가 캄캄한 동굴에 갇혀요. 처음 소송을 당한 사람은 그런 심정이거든요. 그때 옆에 가이드가 등장하는 거죠. 그런데 가이드라고 해서 이 동굴을 완벽하게 알진 않아요. 가다가 같이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하고 박쥐 떼 습격도 받고. 동굴을 빠져나와서 밝은 세상으로 갈 수도, 못 갈 수도 있죠. 하지만 지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 앞으로의 교훈으로 삼고,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거든요. 승소보다 패소했을 때 의뢰인과 어떤 관계를 가져가느냐도 결과 못지않게 중요해요. 책을 쓰면서 ‘조우성, 너 그렇게 살아왔잖아.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잘 가봐’ 하고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달릴 때는 몰랐는데 일단 멈추고 삶을 반추하면서 알게 된 거죠.

 

조변호사가 전하는 수많은 사건 중에는 가슴 찡한 사연도 많다. 그는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음에도 자식을 위해 끝까지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아버지의 애틋한 부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글을 못 읽는 피의자가 있었는데, 그 사실만 밝혀도 쉽게 무죄를 밝힐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이를 거부했던 것. 그 이유를 알고 보니 고등학생인 자신의 아들이 동네에서 놀림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이 사건을 맡으며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했다는 그는 무죄 선고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실을 밝히려고 끈질기게 설득한 자신이 못내 부끄러웠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도 이럴 것이다’ 지레짐작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닫게 됐다고 한다.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린다는 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작년에 20대 후반 남자분이 3개월째 월급을 못 받았다고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사장을 상대로 민사, 형사, 노동청 소송을 다 했는데도 돈을 못 받은 상태였죠. 그동안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했기에 제가 마땅히 줄 수 있는 해결책이 없다는데도 꼭 상담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일단 얘기를 들어보니 그 과정에서 인격적인 모독을 당했고,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어서 1년 동안 법정 투쟁을 했더라고요. 변호사님, 전 뭘 할 수가 있습니까? 묻는데 ‘정말 할 만큼 다 했네요. 더 잘할 수 없습니다. 이제 과거는 놓고, 새로운 길로 가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할 거 같습니다’ 하니까 이 친구가 갑자기 펑펑 우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야 정리가 된다’는 겁니다. 변호사로서 꼭 해결책을 주는 게 다가 아니구나…. 그 뒤로 비록 해결책은 주지 못하더라도 상담하고 들어주고 조언해주는 것만으로도, 되게 효용이 있는 변호사가 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경청의 힘’을 실감하게 되신 거군요.

많은 의뢰인들을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소송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언제 분노하고 상처받는 걸까? 저마다 사연과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변호사를 찾는 이유는 비슷해요. 바로 자신의 고통에 공감해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다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소송을 시비를 가리고 분쟁을 처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치유의 과정이자 분노를 풀기 위한 방법인 거죠. 사실 어떤 사람은 승소를 해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반면, 패소를 해도 후련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거든요. 결국 소송의 과정을 거치면서 삶의 용기를 얻고 자기 치유를 시작하느냐, 반대로 분노로 제자리걸음하느냐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과정을 거치며 그 일을 해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비즈니스 코칭 콘서트인 ‘을을 위한 행진곡’ 강연. 경제력, 협상력 등에서 불리한 위치인 ‘을’들이 거래 상황에서 알면 유용한 법률 지식과 협상 기법을 소개했다.
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경청은 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조변호사는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나누는 강연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99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철도 공무원이셨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검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찰청에서 인턴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의 적성과는 맞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당시 검사시보(試補 : 수습)였던 그가 했던 일은 피의자, 즉 죄가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을 심문해 수사 기록을 작성하는 거였는데 피의자의 딱한 사정까지 기록했던 것. 급기야 담당 검사가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가 아니라 변호인이 작성한 변론요지서 같습니다”고 말할 정도였다. 피의자의 범죄 행위와 그 사람이 처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몹시 어려웠던 그는 결국 변호사의 길을 택하게 된다.

변호사로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게 가장 기쁘다고 하셨는데요, 그런 성품은 부모님의 영향인가요?

돌아보면 외할머니, 어머님의 영향이 컸던 거 같아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저희 외갓집에는 항상 거지들이 많았어요. 외할머니가 항상 밥을 주셨거든요. 그러다 보니 외갓집에서 무슨 일을 치르면 그 사람들이 와서 다 도와주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남을 도울 수 있는 건 되게 행복한 일이다. 돈이든 마음을 써주는 일이든. 도울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한 거다’고 늘 말씀하셨죠.

법정에선 사람의 밑바닥까지 다 본다고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긍정과 믿음이 계속 변치 않으셨는지요?

사실 제가 정이 많고, 마음이 앞서다 보니 상처받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옛글을 보면서 힘을 많이 얻죠. 제가 한비자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얘기했거든요. 보통 성선설, 성악설 하는데 저는 성약설을 믿어요. 어떤 사람의 얘기든 들을수록 이해되는 것이 그 상황에서 그 선택을 한 이유가 있거든요. 많이 가진 사람은 자기 의도대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은 작은 이익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거죠. 배신도 하고. 저도 사실 흑과 백이 분명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살아갈수록 회색도 많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단정적으로 되지가 않아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는 거죠. 결국 인간은 이익 때문에 움직이니까 그런 인간을 이해하고 컨트롤하라는 게 한비자인데 공부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되게 단단해져요. 일희일비하지 않고, 어떤 충격이 와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도록 제 마음을 단단하게 해준 책이에요.

실제로 고전, 철학 등 인문학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책을 통해 배운 지혜를 사건에 적용한 적이 있으신지요?

피고인들이 처음 소송을 당할 때는 그 일이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법리적으로 이끄는 것 못지않게 인간적으로 어떻게 안내할까 고민하게 되는데, 그 사람의 멘탈을 바로잡아주고 싶을 때 고전을 인용하곤 해요. 예를 들어, 어떤 사장님이 잘나가다가 부도가 나고, 2년간 감옥에 있다 나오면서 울분에 차 있는 거예요. 잘나갈 때는 알짱거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무도 안 보인다면서, 얼른 성공해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계속 무리한 사업을 벌이는 거죠. 그래서 제가 사마천 <사기>의 맹상군열전에 나오는 맹상군과 풍환의 이야기를 해드렸어요. 잘나가던 제상인 맹상군에게는 참모만도 3천 명이었는데, 어느 날 제상 자리에서 물러나자 다 흩어지고, 풍환이란 노참모만 남게 됩니다. 후에 맹상군이 다시 복직하자, 사람들이 다시 아첨하면서 몰려들어요. 이를 본 맹상군이 화가 나서 혼내줘야지 하는데, 이때 풍환이 하는 말이 있어요. ‘세상일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그리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아십니까? 부귀다사 빈천과우(富貴多士 貧賤寡友), 부귀할 때는 선비들이 주위에 많지만 가난하고 천할 때에는 주위에 친구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꽃이 봄여름에 피었다가 가을 겨울에 떨어지듯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저도 그분한테 그랬어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사람들이 떠나간 것에 대해서 분을 갖고 있으면 또 다른 일에 휘말리게 됩니다. 노여움을 풀고 모래성이 아닌 정상적인 탑을 쌓아 가십시오.

17년 동안 몸담았던 법무법인을 떠나 기업분쟁연구소를 차린 지 1년째. 요즘은 SNS를 통해서도 활발한 소통을 하고 있는데, 페이스북으로 들어오는 법률 상담이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다른 변호사, 변리사들과 함께 페이스북에 전문가 그룹을 결성해 국내 스타트업(창업 기업)을 돕고 있다. 그룹 이름은 ‘어벤져스’. 영웅들이 흩어져 있다 사건이 발생하면 모여 일을 해결하는 영화처럼,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함께 능력을 발휘해 도움을 주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앞으로도 법률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스타트업과 중소기업들에 대한 법률 자문을 지속적으로 할 계획이다.

대형 로펌을 그만두고 기업분쟁연구소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실제 법을 필요로 하는 작은 회사나 개인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하셨는데요.

대형 로펌에서는 돈은 벌어 좋았지만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어요. 큰 회사를 대리해서 작은 회사랑 싸우는 게 많았는데, 실제 법을 필요로 하는 곳은 작은 회사나 개인들이었지요. 그런 것에 막연한 채무감이 있었죠. 사실 법은 하나의 도구거든요. 사람들은 흔히 법을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얼마든지 소송 전 단계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우도 많아요. 승소 못지않게 중요한 게 무익한 소송을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분쟁 예방 쪽에 관심이 많은데 되도록 분쟁이 발생되지 않도록 하고,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최소의 비용과 시간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마무리하는 프로그램을 전파하는 게 제 꿈이에요.

변호사로서는 물론 강연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지요?

30대 때는 빨리 무언가를 이뤄야 된다는 ‘스피드’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근데 막상 40대가 되어 보니까 스피드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아무리 목적을 향해 빨리 달렸다 해도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그리고 40대에 막 접어들었을 때, 재능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나는 뭘 잘할 수 있는가, 뭘 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가.’ 그러다가 문득 저란 사람은,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데 열정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됐어요. 그래서 변호사로서의 전문성 외에 리더십, 협상 등 다양한 콘텐츠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를 하면서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었던 사람이 급전직하로 떨어지는 경우도 봤고, 힘들었지만 재기하는 사람도 보면서, 그 물을 담을 만한 역량이 되지 않으면 그릇은 깨진다는 걸 깨달았죠. 그러면서 출세나 돈에 대한 욕심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좋은 일을 하면서 행복을 찾게 된 것 같습니다.

조우성 변호사는 서울대 법과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97년부터 17년간 법무법인 태평양 민사총괄부 및 기업소송부 파트너 변호사로 일했으며, 현재는 기업분쟁연구소 소장이자 법무법인 한중의 파트너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수많은 소송 사건을 담당하며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계약서 작성실무, 지적재산권 소송전략 등을 주제로 법률 강의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4-08 (7)
이 세상에 어떤 변호사로 남고 싶은가요? 좋은 변호사? 혹은 훌륭한 변호사?

좋은 변호사란 승률도 높고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훌륭한 변호사는 처한 상황에 대해 잘 어루만져주고, 이 힘든 상황도 분명히 지나간다, 이기든 지든 여기서 당신은 뭔가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줘서, 재판이 끝나도 아, 그때 그 변호사가 내가 힘들 때 바로 세워줬지, 하고 떠오르는 그런 친구 같은 변호사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이 조영래 변호사님이신데 그분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그분의 반의반 정도, 제가 할 수 있는 깜냥 내에서 소박하게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떳떳하게.

“변호사만큼 절박한 이들을 많이 도울 수 있는 직업도 없다”는 그는 뚜벅이란 말을 좋아한다. 쉽게 흔들리거나 지치지 않고 진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한결같은 변호사가 되겠다는 의미이다.

인생의 소용돌이에서 외롭게 서 있을 때, 자신의 삶에 공감해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명암이 달라지는 것을 수없이 목격해왔다는 조우성 변호사.

그가 말한다. 우리가 그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된다는 건, 팍팍한 무릎을 두드리고 다시 먼 길을 떠날 수 있도록 용기 한 줌을 전하는 것과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