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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커피를 마실까?

“커피가 위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루에 50잔 이상의 커피를 마셨다는 프랑스의 문학가 발자크의 말처럼 커피는 전 세계인의 삶에 조용히 그리고 깊게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각성 효과, 감미로운 향과 질리지 않는 씁쓸한 맛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를 깨워주고,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고, 친밀한 소통을 끌어내주는 커피. 우리는 커피를 왜 마실까요?

알고 마시면 더 맛있는 커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편집자 주


숫자로 보는 커피

커피콩 100개 100ml 커피 한 잔을 만들기 위해 커피콩 100개가 필요하다.
하루 3잔우리나라 식약청의 카페인 일일 섭취 권고량은 400mg 이하. 아메리카노 커피 3잔 이하가 적당하다.
전 세계 커피 소비량 17억 잔 국제커피협회(ICO)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소비된 커피는 모두 17억 잔으로, 정확히 1초당 1만9,675잔이 팔렸다. 1,142만 명이 매일 1,522만 잔의 커피를 마시는 셈이다.
무역 거래량 2위 커피는 무역 거래량 세계 2위로 석유 다음으로 많은 양이며, 연간 생산량 700만 톤에 달한다.
1인당 1년에 484잔 한국은 세계 7위의 원두 수입국으로, 국민 1인당 1년에 484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추정된다.
2만 개의 커피 전문점 국내 커피 전문점 숫자는 2007년 2,305개에서 2013년 4월 기준 1만8천 개를 넘어 큰 폭으로 늘어났으며 곧 2만 개를 눈앞에 두고 있다.


커피와 신조어

카페라떼 효과 습관적으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4천 원)을 아껴 저축할 경우 물가 상승률과 이자 등을 포함해 2억 원 이상의 재산을 축적할 수 있다는 논리.
카페 맘 ‘Cafe Mom’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커피 전문점에 모여 아이 교육 정보를 나누는 엄마.
코피스족(Coffee+Office) 커피 전문점에서 노트북과 휴대전화로 사무를 보는 직장인.
카페브러리(Cafe+Library) 도서관처럼 공부나 스터디를 하는 대학가의 커피 전문점.


카페, 이 시대의 문학과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다

1645년경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에 유럽 최초의 카페가 생겼다. 당시 시민들은 그 카페를 매음과 도박의 온상으로 지목했지만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여러 카페들이 들어섰고, 이용객 수는 점차 늘어났다.
1674년에 런던에서 발간된 팸플릿 중에 <커피하우스의 규율과 질서들>이 있다. 거기에는 [고상한 귀족이나 사업하는 부르주아 층이나 누구든 환영합니다. 그러나 누구든 높은 신분의 사람이 들어왔다고 해서 자리에 일어나 그에게 자리를 권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쓰여 있다. 말하자면 카페는 특정인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동안 유럽에는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사적으로 자유롭게 만나는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중세에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술을 마시는 관습이 있었는데 절차와 예법이 아주 까다로웠다. 그런데 커피는 그럴 필요가 없다. 술처럼 잔 뚜껑도 필요가 없고 절차도 따지지 않고 한꺼번에 들이킬 필요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즐기면 되는 것이다.
이런 대화의 장은 문학인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거의 매일 카페에 드나들었던 17~18세기 문학인들은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하면서 나온 말들을 생생하게 문학에 옮기게 되었고 ‘대화체 문장’이 등장하게 된다. 문어체에서 대화체로! 그것은 문학의 일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들도 왕이나 귀족, 장군이 아니라 서민들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커피는 사실 유럽 문화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나아가 카페는 이런 음용 관습을 기반으로 실질적인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변화를 끌어내는 공간으로 작용하게 된다. 커피하우스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에는 저널리스트, 정치가, 학자, 부르주아, 교인들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카페에 모인 것 자체가 집회의 자유를 의미했다. 이렇게 카페는 그 자체만으로도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깊고 진한 커피 이야기>(장수한 | 자음과모음)


커피에 대해서 공부도 해야 되겠지만 사람에 대해서 공부도 하고 마지막에는 본인과 커피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커피란 과연 무엇인가를 각자 찾아가야 하는 것이 숙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즘 커피를 누구나 많이 마시잖아요. 사람들이 물질적인 부분에서 시달리면서 정신적인 행복감을 얻기 위해서 더 커피를 찾는 것 같아요. 커피를 내리고, 또 마시면서 커피라는 존재 자체가 행복을 주니까요. 저는 그 행복감이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국경을 넘어서 그 행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 또 커피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그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과 커피를 통해 꿈과 희망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박이추, 커피 명인, 대한민국 1세대 바리스타


한 포털 사이트가 직장인 503명을 대상으로 하루 커피 섭취량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1.9%인 110명이 하루에 커피를 4잔 이상 마신다고 답했다. 커피를 마시는 이유로는 ‘습관이 돼서’(25.7%)가 1위로, ‘기분 전환하려고’(18.3%), ‘잠을 깨려고’(16.9%), ‘집중력을 높이려고’(12.9%), ‘식사 후 마땅한 입가심거리가 없어서’(11.1%),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10.1%), ‘나만 안 마실 수가 없어서’(4.1%)가 뒤를 이었다.
또한 응답자의 39%가 커피의 부작용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는데, ‘속쓰림’이 27.4%, ‘불면증’(22.4%), ‘신경과민’(14.9%), ‘소화불량’(11.1%) 순이었다.
또 다른 설문 조사에서 ‘커피숍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43.9%가 ’맛’이라고 했다. 이어서 ‘가격’이 24.9%로 2위, ‘위치’(20.2%)가 3위였다.

직장인 5명 중 1명이
하루 커피 4잔 이상!
왜 마시는데?

일본 교린대학 코가 요시히코 교수는 작업을 할 때 커피 향이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했다. 피실험자에게 커피 향을 맡으면서 화면에 숫자가 보이면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작업을 시켰다. 물 냄새를 맡으면서도 같은 동작을 반복하게 했다. 그 결과 커피 향을 맡으며 작업할 때가 뇌에서 더 적은 혈액을 필요로 했다. 커피 향만으로도 뇌가 많은 활동 없이 작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 동경자혜의대 스즈키 마사토 교수는 원두커피와 운동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실험 쥐에게 5주간 운동을 시키고 내장 지방량을 검사했는데, 운동만 한 쥐는 54% 감소한 반면, 커피를 먹인 후 운동을 시킨 쥐는 60%가 감소한 것이다. 실제로 커피 속 카페인은 내장에 축적된 중성지방이 좀 더 쉽게 분해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즉 카페인 섭취와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운동만 하는 것보다 체중 감소에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30분 후부터 혈중 카페인 농도가 높아지는데 그 상태가 3시간 정도 유지되므로 그때 운동을 하면 효과적이다.
이 밖에도 커피에 들어 있는 폴리페놀 성분이 여러 가지 항산화작용을 하는데, 하루 3잔의 블랙커피를 꾸준히 4개월 이상 장기적으로 마시는 경우에 지방간 발생을 40% 억제할 수 있으며, 혈당 수치를 떨어뜨리고, 심혈관질환 예방, 치매 예방과 암세포 전이를 억제하는 등 여러 가지 긍정적인 연구 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이것은 모두 폴리페놀이라는 성분이 항산화작용을 하기 때문인데, 커피에는 포도주의 3배, 홍차의 9배나 되는 폴리페놀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매일 질리지 않고 마시는 음료 중에서 가장 훌륭한 폴리페놀 공급원으로 볼 수 있다.
하루 3잔 이상 너무 많은 양의 카페인을 섭취하거나 고칼로리 커피를 마실 경우 카페인 중독, 당뇨, 역류성 식도염, 위궤양 등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 <커피의 건강학> 중에서

몸에 좋다 VS 안 좋다


내가 핸드드립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핸드드립이 갖고 있는 인간적다인 속도와 자연성에 있다.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대신 지구 중력 외에 어떠한 인위적인 에너지도 필요하지 않다. 말하자면 아날로그 방식이다. 이렇게 한 잔의 커피를 내리면 그 순간만큼은 의식이 명료해지고 이때 풍기는 커피 향은 세상살이에 지친 나의 영혼을 치유하고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혹자는 말한다. “그거 따로 배워야 하고 기구까지 사려면 돈 많이 들잖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근 유행하는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과 비교하면 핸드드립 커피는 충분히 가격 경쟁력이 있다. 게다가 직업으로 커피를 다루지 않는 한 커피를 일부러 배울 필요도 없다. 우리가 밥 짓는 것을 학원에서 배우지 않듯이 서구에서는 커피도 대를 이은 삶 속에서 소비되어 왔다.
오늘날 커피가 교양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자본이 만든 허상일 수도 있다. 커피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핸드드립 커피는 물을 끓일 때 말고는 커피를 내리는 동안에 이산화탄소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다. 한편 커피 산지의 환경을 보호함으로써 생태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정무역 커피나 열매우림동맹 커피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런 커피 생산 방식에 대한 화답으로 핸드드립만큼 적절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핸드드립 커피는 나와 세상을 돌아보게 만든다. 경쟁으로 인해 지친 당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똑같은 아파트와 똑같은 커피, 똑같은 욕망을 이식당해 왔던 사회를 다양하게 만들어준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슬로우 커피’는 세상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더욱 널리 퍼져나갈 것임에 틀림없다.
박우현 <커피는 원래 쓰다>의 저자

커피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커피가 맛있어지면 어른이 된 거라고 할 수 있지.” 어릴 적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 말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블랙커피를 마시며 어른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믹스의 맛을 본 후 블랙 마시고 믹스 마시고 하며 교대로 흡입하기 시작했다. 최소 하루에 6-7잔. 40대에 들어서며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하자 다들 커피부터 줄이라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에라, 이대로 살다 죽을란다, 커피 없이 못 산다’ 하며 대놓고 마셨다. 그런 어느 날 업무 차 오지에 일주일 정도 취재를 갔는데 커피 마시기가 여의치 않았다. 뜨거운 물을 구하기도 어렵고 바쁘기도 했다. 그런데 어라, 커피를 안 마셔도 살 만한 게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정화되는 느낌도 들었다. 그때 생각했다. 나는 왜 커피를 마시는가? 1. 어른 흉내로부터 시작된 커피에 대한 막연한 관념 있음. 2. 사실 먹고 나서 후회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먹음, 특히 믹스. 3.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 카페 같은 데 가도 다른 것을 선택할 용기 없음. 고로,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였다. 커피를 줄이기 시작한 나는 커피가 당길 때면 스스로에게 말한다. ‘에헤~ 왜 이래, 아직도 어른 안 된 거야?’ ‘달달이 믹스 먹고 후회하기는 이제 그만.’ ‘자, 용기 내 새로운 차에 도전해 보자고. 허브차 좋네. 콜~’ 이형자 42세. 방송인.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커피와 나

‘키작남’의 외모 콤플렉스 극복기

작은 키 때문에 콤플렉스에 시달렸다는 30대 후반 ‘키작남’을 만났습니다. 실제로 만나 보니 정말 작았습니다.^^;; 작은 키에 가느다란 목소리, 울퉁불퉁한 피부까지.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부산 사나이. 하지만 마음수련을 통해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마음에서 빼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헤어디자이너로 일하며 편안한 인상과 동안 외모를 뽐내는 한 남자. 자신감 넘치는 그와의 리얼 빼기 토크입니다.

(엄청 조심스럽게) 키가 몇인지…? 158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큰 편에 속했다. 성격도 억수로 밝고 쾌활했고. 그런데 5학년 때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때 키가 멈춘 것 같다.

160센티도 안 되다니.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학교 마치고 집에 왔는데 강도가 들어 엄마가 돌아가셨다. 강도와 쓰러져 있는 엄마를 동시에 맞닥뜨렸고, 나도 강도 손에 기절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후 키가 안 컸다. 성격도 완전히 변했다. 말도 없고 소극적이고 한곳만 응시하고….

아… 정말 유감이다. 그 사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을 것 같다. 제정신 아닌 상태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멍~ 하게 있으니까 애들이 놀리기 시작했다. 기가 죽고 친구들이랑 키 차이가 점점 심해졌다. 친구들은 방학만 지나고 오면 팍팍 크는데 나는 아무래도 잘 안 챙겨 먹어서인지 그대로였다. 또 변성기를 지나면서 너무 말을 안 해서인지 목소리도 여자처럼 가늘었다. 애들이 동성애자라고 놀리면 정말 너무 싫었다. 진짜 너무너무. 근데 걔들은 키도 크고 풍채도 있으니까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같으면 애들을 줘패뿌던지 물어뜯던지, 내가 맞더라도 같이 싸웠을 거다. 근데 그때는 그냥 당하기만 했다.

정말 암담하고 살기 싫었을 것 같다. 친구, 친척, 부모님 원망뿐이었다. 집에 가면 누나들도 힘들어하고 아빠도 더 엄하게 화를 많이 내셨다. 집에서도 치이고 학교에서도 치이고. 중고등학교 때는 자신감이 너무 없어서 거리를 걸을 때도 땅만 보고 다녔다. 그리고 하나 더. 여드름 자국이 심했다. 여드름을 하도 짜서 피부가 정말 안 좋았다.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나? 오직 나의 해방구는 음악, 사물놀이였다. 음악을 하는 순간에는 마음이 확 열렸다. 특히나 국악, 사물놀이는 같이 어울리는 음악이라서 좋았다. 그리고 28살에 대회에 나가 명인부 장원을 땄다. 그때만 해도 어린 나이에 장원을 한 사람이 드물었다. 매달릴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외모를 가꾸려는 노력은 안 했나? 스무 살쯤 되니까 이제 나도 과거에서 벗어나서 꾸미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은데 키가 안 되니까 정말 스트레스였다. 바지를 사도 무조건 밑단은 잘라야 하고, 맵시도 안 나고 신발도 맞는 게 없었다. 양복도 입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 깔창을 5센티미터 깔고 굽 높은 하얀색 캔버스화를 신었다. 하늘색 남방에 남색 면바지로 스마트하고 댄디한 느낌을 줬다. 머리는 좀 더 잘생겨 보이고 튀어 보일까 하면서 왁스 바르고. 피부에 양보한 것도 많다. 소소하게는 녹차 티백 우린 물에다가 세수하고. 감자 팩이 피부를 뽀샤시하게 한다 해서 감자도 갈아서 붙이고, 꿀하고 요플레랑 섞어서 팩도 해봤고 좋다 하는 유기농 화장품도 써봤다. 피부과 치료는 돈이 많이 들어서 포기했다. 내 피부로 보아 한두 번 해서 안 될 거 같아서.(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나를 미용업계로 이끌었던 것 같다. 요즘도 키 작고 머리 크고 피부 안 좋은 사람들은 특히  더 멋지게 스타일링해 준다. 누구보다 잘 이해하니까.

외모 때문에 피해본 적은 없나? 우리 사회는 아직 외모로만 판단하고 키가 작으면 일단 시시하게 보는 편견이 있다. 기본 심성은 배제해 버린다. 친척들한테도 많이 무시를 당했다. 남들이 생각하는 번듯한 직장인도 아니었으니까. 안정적인 길을 갈 것인가 내가 하고 싶은 길을 갈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가 도망가는 심정으로 마음수련을 시작한 것 같다. 벗어나고 싶었다.

마음수련 하면서 제일 많이 버린 게 뭔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많이 버렸다. 또 그 사건 속의 강도가 정말 원수였는데, 그 미운 감정을 버리는 게 가장 힘들었다. 놀림받고 힘들었던 것도 버렸다. 그리고 내 자신을 가장 많이 버렸다.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했던 내 모습들, 외모 콤플렉스도 버렸다.

그게 말처럼 쉽게 없어지나? 마음수련 하기 전에는 평생 살아온 이 모습이 나의 전부였다. 근데 마음수련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작은 몸이 내가 아니라 그냥 우주 전체가 본래 나라는 걸 알게 되니까 몸이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나 집착이 안 생긴다. 진짜 내 본성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콤플렉스도 없어지는 셈이다. 이 우주가 내 본성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 기뻤다. 고귀한 본성을 한번 알게 된 이상 이걸 잘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무한한 우주의 마음으로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자신의 외모를 평가한다면? 완전 만족이다. 봐라, 인상도 너무 좋고 동안이지 않나. 사람은 자기 마음이 얼굴에 나타난다. 십 대, 이십 대는 화장으로 커버가 되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상이 중요한 건 살면서 마음을 어떻게 썼는지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일 거다. 의식적으로 표정을 밝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좀 못생겼고 피부는 까맣더라도 마음이 편하고 스트레스가 없으면 인상은 아주 밝아진다. 그래서 나 같은 동안 외모가 가능한 것 같다.ㅋㅋ

요즘은 다이어트 중독에 성형 중독자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외모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기 삶을 돌아보면 어떠한 계기로든 생긴 열등감이 분명 있을 거다. 그게 뭔지는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 열등감을 버리고 원래의 본성으로 살아가면 ‘나’와 내 외모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어버린다. 표정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빛이 나고 아무리 못생겼던 사람도 정말 매력적이 된다. 겉으로 치장해서 나오는 광채가 아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자체 발광?ㅋㅋ 자기 안의 열등감을 다 버려 진정 나를 사랑하고 외모가 어떻든지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보에 연주자 신지혜씨

신지혜(32)씨는 촉망받는 실력파 오보에 연주자다. 독일에서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와 여러 오케스트라의 객원 수석 및 실내악 연주에 참여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과 경북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 지도 교수 이윤정(현 경희대 교수)씨는 그녀에 대해 “음악성이 뛰어나다. 무엇보다 뛰어난 건 늘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흔들리는 게 없다는 것이다”라고 평한다. 그녀가 한결같은 실력의 연주자가 되기까지는 진정으로 자신을 비우는 시간들이 있었다고 한다. 정리 & 사진 최창원

오보에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할 때 첫 음을 맞추는 역할을 해요. 연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오보에가 ‘라’ 음을 불면 거기에 맞춰, 다른 악기들이 음을 맞춰요. ‘라’ 음을 부는 소리만 들어도 그 오보에 주자가 얼마나 잘하는지 알 수 있어요. 오보에의 음이 잘못되면 악단 모두가 틀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엄청 긴장하게 되지요.

사실 음악 인생이라는 게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끊임없는 경쟁의 연속입니다. 입시 경쟁, 끊임없는 시험, 오디션….

저는 어릴 적부터 항상 음악과 함께해 왔어요. 어머니가 피아노를 전공하셨기 때문에 집 안에서는 항상 피아노 소리에, 집 밖에서는 오케스트라 연주, 악기별 독주 등 클래식 연주회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죠. 이런 환경에서 어머니는 당연히 딸도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처음에는 피아노, 그다음에는 첼로 다 해보다가 중학교 때 오보에를 시작했어요. 소리가 달콤하다고 해야 하나, 사람 마음을 흔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 점들이 제게 다가왔지요. 연습할 때는 힘들어도 무대에 서서 연주할 때의 성취감, 박수 받고 주목받는 것들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행복했던 적은 별로 없었어요. 지기 싫어하고 예민한 성격이라 더 스트레스를 받았죠. 그래서 항상 체기가 없던 적이 없었어요. 오보에는 부는 악기라 호흡이 다 느껴지고, 내 마음이 안 좋으면 더 티가 나요. 그래서 지도 교수님도 오보에를 연주하기 위해선, 한결같은 평상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하셨는데 그러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그랬던 저에게 변화의 계기가 됐던 게 대학교 2학년 때 시작한 마음수련이었어요. 처음엔 한 일주일만 해볼 생각이었는데, 막상 마음을 비워보니까 정말 편안하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계속하게 되었는데, 마음을 비우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죠. 항상 체하던 것도 없어지고, 쓸데없는 스트레스나 걱정들도 사라지고. 그러다 보니까 점점 연주 실력도 늘고요.

그러다 2007년에 독일 만하임국립음악대학교로 유학 갔을 때였어요. 주눅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한국에선 잘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낯선 환경에 언어도 안되고 여러 가지로 힘들 때, 가장 위안이 되었던 곳이 프랑스에 있는 파리 마음수련원이었습니다. 지금은 독일 베를린에도 수련원이 있지만 제가 만하임음대 다녔을 적에는 제가 있는 도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파리 수련원이었어요. 에펠탑 근처에 있는 수련원인데, 기차 타고 3시간 거리였어요. 그곳에는 한국어 교수님, 직장인, 유학생들 등 수련생들이 많았습니다. 다들 마음을 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니 당연히 분위기도 좋았지요. 언제든 가면 맛있는 것도 해주시고 늘 힘을 주시고 수련도 도와주셨어요. 덕분에 힘들고 걸리는 것, 마음에 쌓인 것들, 나의 틀들을 버리면서 낯선 환경에 도전할 용기도 생겼고 적극적으로 유학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보에에서 중요한 리드(reed). 입에서 악기로 숨결을 전달해주는 진동판인데, 연주자들이 직접 깎아서 만든다. 리드에 따라 소리의 80%가 좌우되기 때문에, 연습은 쉬어도 리드는 깎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성을 들여 깎는다. 같은 악기지만, 각자 오보에 음색을 갖고 있다고 하는 이유는 리드를 다듬는 마음 등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에 따라 음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어느 날 수련을 하며 정말 제가 마음에 아주 큰 것을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오보에였어요. 오보에가 없는 나는 상상할 수도 없고, 사람들한테 항상 자신감 있는 모습도 오보에를 하고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좋아해주는 것도 오보에 때문이고…. 그 엄청난 집착이 저를 구속하고 있더라고요. 오보에가 나 자체이니, 인정받기 위해 더 잘해야 하고, 못할까 봐 긴장하고, 불안해하고, 못하면 괴롭고…. 좋아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계속하고 있었던 거예요. 오보에를 안 하면 남들로부터 무시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진심으로 오보에를 놓아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열하게 몇 날 며칠을 버렸지요. 그리고 마음에서 탁 놔지는 순간의 해방감이란… 그게 바로 자유더라고요. 음악, 명예, 사랑… 그런 것들을 다 버리고 비웠을 때, 진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지요.

버리면 다 없어지는 것 같지만 세상은 더 큰 걸 주더라고요. 그렇게 크게 한번 나를 넘어서고 나서야 음악을 진짜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게 180도 달라졌어요. 악기를 하는 그 시간 자체가 너무 소중해지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게 되더라고요.

같은 악보인데도 예전에는 안 보였던 것들도 보였지요. 이 음악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아이디어도 계속 나오고요. 그동안 신지혜라는 좁은 마음세계에서 연주했다면,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되었으니까요. 연주할 때 예전엔 나 잘하는지 한번 봐줄래? 그런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사람들의 평가에 집착하지 않으니까 몰입도 잘되고 물 흐르듯 연주도 흘러갔습니다.

친구들도 편안해졌다고, 얼굴부터 달라졌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수련을 하면 가장 많이 생기는 것 중의 하나가 집중력이에요.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들이 없어지니까, 하고 싶은 만큼 마음먹은 만큼 최대한 능력을 다 펼칠 수가 있습니다. 진짜 아무것도 없어야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다는 말을 많이 실감하게 됩니다.

특히 음악인들에겐 마음을 다스리는 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주위에 보면 긴장감에 안정제를 안 먹으면 무대에 못 서는 연주자들도 많아요. 음악가들은 음악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잖아요. 좋은 음악을 위해서라도 꼭 한번 자신을 내려놓는 시간, 비워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음악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잖아요. 저도 마음 없는 진짜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합니다. 제 음악을 듣고 ‘행복했다’ 하시는 분들이 아주아주 많아질 날을 꿈꿉니다.

신지혜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졸업, 독일 만하임국립음악대학교 Diplom(K. A) 과정 졸업, 독일 베를린국립예술대학교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그동안 금호영아티스트 독주회 및 작년에 귀국 독주회를 열었고, 원주시립교향악단, 서울솔리스텐윈드오케스트라 등의 객원 수석을 역임했다. 현재 이너스 목관5중주 멤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경북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오는 9월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가진다.

서커스단의 코끼리

 

한 소년이 아빠와 함께 서커스 구경을 왔습니다.
재밌게 코끼리 쇼를 보던 중 소년이 문득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저 코끼리 위험하지 않아요? 묶여 있는 끈이 되게 가늘어요. 저 정도 줄은 금방 끊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걱정하는 소년을 안심시키며 아빠가 말했습니다.
“괜찮아. 저 코끼리는 어릴 때 굵은 쇠사슬에 묶여서 훈련을 받았단다. 그때는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가 없었어. 끊으려 하면 발만 아팠지. 세월이 흘러 저렇게 큰 어른이 되고 힘도 세졌지만 이제는 아예 줄을 끊으려고도 하지 않는단다. 자기는 끊을 수 없다고 믿게 된 거야. 마음만 먹으면 끊을 수 있는데,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 거지.”
 
결국 그 끈은 코끼리의 발이 아니라, 마음을 묶고 있었던 겁니다.
혹 지금 내 마음을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끊어낼 수 있는데, 벗어날 수 있는데…,
나의 어떤 기억이 어떤 경험이 그 길을 막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 봄 그런 기억 따위는 훌훌 털어내 봅니다.
그 어떤 것에도 묶여 있지 않는 내 마음…
그 자유를 만끽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며 진리의 존재가 무엇인가

우리는 세속에 살면서 진리라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나는 이렇게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살아 있는 존재라고 가르치고, 세속에서 배우지 않는 진리의 존재를 이 세상의 물질 이전의 자리, 다시 말하면 우주에서 하늘의 별 태양 달 지구를 또 물질인 공기 중에 있는 물질을 없애면 이 세상에는 허공만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 존재는 시작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영원 후에도 존재하는 살아 있는 존재라. 이 세상에 있는 일체가 모두 없는 허공에서 나타났고 이 존재가 진리의 원래라. 있는 일체 모두는 이 존재에서 와서 있어도 이 존재요 없어도 이 존재라.
이 존재는 항시 그냥 있었으나 사람들은 근원이시고 본래이신 이 존재가 사람 마음에 없기에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라.
이 존재와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고는 이 존재를 보고 알 수가 없는 것이라.
사람의 마음은 세상의 것을 사진 찍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사진 속의 하늘은 살아 있지 않아 이 존재를 알 수가 없는 것이라.

이 존재는 시작 이전에도 있었고 이 세상이 다 없어져도 존재하는 살아 있는 신의 존재라.
각 종교에서는 이 존재를 한얼님 하나님 부처님 알라 창조주라 일컫는 존재라. 천지만상을 나타낸 주인이시라.
이 세상의 물질은 이곳에서 와서 이곳으로 가는 것이 진리인 세상의 이치라. 이 땅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과 동식물이 이 지구상에 살다가 다 어디를 갔는가. 없어지지 않았는가.
이 자체는 모두가 근원이고 본래인 이 존재인 없는 허공으로 가지 않았는가.
이것이 세상의 이치라.
물질은 있어도 이 존재요, 없어도 이 존재라.
이 진리의 존재가 사람으로 세상 왔을 때 천극락인 이 존재의 나라에 이 존재의 몸과 마음으로 이 세상이 다시 나 영원히 죽음이 없고 살아 있는 나라가 이 나라라.
이 나라는 물질 이전의 영혼의 나라이라. 성령 성부의 나라이고 보신불 법신불의 나라이고 정과 신의 나라이라.

이 세상의 물질의 세계가 본래인 근원의 나라에 근원의 영과 혼으로 거듭나 사는 곳이 바로 천국이라. 이 세상에 물질은 영원한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진리 존재인 우주의 하늘은 영원하듯이 하늘 중 하늘인 근본의 하늘의 영과 혼인 정과 신으로 다시 나는 것만이 진리가 되어 영원히 살 수가 있는 것이라.
진리란 있는 것이고 영원불변 살아 있는, 물질 일체를 뺀 빈 하늘이 근원이고 본질이고 본래인 진리라.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시인, 저술가, 강연가입니다. 2002년 인간 내면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UN-NGO 산하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평화 대사로도 활동 중입니다. 저서로 <세상 너머의 세상>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등이 있으며 그의 저서 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은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에서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5개 국제도서상 2013 LNBA, NIEA, IBA, IPPY Awards, 2012 eLit Awards에서 영성, 정신, 철학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근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의 영역본이 2014 에릭 호퍼 북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하는 등 마음과 비움, 깨침에 대한 우 명 선생의 철학이 전 세계의 관심과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열린 고민 상담소

제 고민은요?

전 50세의 주부(백수)인데 지독한 손치, 몸치, 느린 행동, 안경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고도근시, 사고로 인해 못 듣는 왼쪽 귀를 지녔습니다. 올봄 수급자를 위한 취업을 했지만 한쪽 귀만 들어서 일하는 데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중도 탈락했습니다. 요즘처럼 살기 빠듯한 세상에 남편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제가 답답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모든 걸 빠르게 빠르게, 더 빠른 사람만이 인정받는 세상에서 제가 살아갈 길은 없을까요?

제 생각은요!

저는 올해로 67세 되는 요양보호사입니다. 지금 나이까지 살다 보니, 사람의 행동이 느리고 빠르고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아무리 빨리 잘하는 사람도 마음이 곱지 않으면 그리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왠지 고민녀 님께서는 마음이 참 고우실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귀 한쪽 안 들리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돼요. 한쪽 귀만 듣고 한쪽 눈만 갖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취업에 탈락한 것은 일 자체가 님 하고 안 맞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요양보호사 일은 어떠실는지요. 저도 사는 게 어려워지면서 58세에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일은 어르신들하고 소통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가능하지요. 한쪽 귀가 안 들리면 다른 한쪽 귀를 기울여 대화를 하면 됩니다. 손이 느리고 몸이 느리면, 조금 더 일찍 출근하여 미리미리 해야 할 일을 준비하면 됩니다. 저도 행동이 그렇게 빠르지도 않고, 작은 체구에 힘도 세지 않지만, 거구의 어르신들도 보살필 정도의 요령이 생겼습니다. 꼭 이 일이 아니더라도, 50세면 한창인 나이시니, 희망을 가지고 멋지게 님만이 가진 능력을 펼치며 사시길, 인생 선배의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박승금

저는 사회복지사입니다. 우선 저는 님께서 조금만 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을 하러 가서도 “저런 사람이 왜 여기 왔나” 그런 시선에 많이 부딪혔을 수도 있습니다. 위축되어 자신을 그 시선 안에 가두지 마세요. 손치, 몸치, 느린 행동들…, 그런 사람도 분명히 잘할 수 있는 게 있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희 어머니가 시각장애 1급이십니다. 어머니 나이 40대 전후에 시각장애가 찾아왔지요. 처음에는 진짜 힘들어하셨는데 곧 “이게 내 복이고 내가 헤쳐 나가야 하는 일이다, 여기서 내가 힘들다고 하면 나는 무능력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게 마음을 바꿔 먹으시더라고요. 지금은 ‘장애인 일자리 사업’에 지원하여 복지관 식당에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저희 엄마지만 대단해 보이는 건, 어디에 가서든 당당하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나는 이러이러해서, 이런 일은 못한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하겠다. 그래서 주로 칼질과 식당 정리를 하시는데 그 일에 인정을 받고 계십니다. 나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는 사람…, 혹여라도 스스로에 대해 그런 부정적인 게 있다면 조금 긍정적으로 바꿔 보세요. 그리고 낮은 등급이라도 병원에서 장애 등급을 받을 수 있다면, ‘장애인 일자리’를 구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어렵다 해도 동 주민센터, 여성일자리센터 등을 방문해서 사회복지사와 상담해보세요. 꼭 일자리를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박소정

저는 님과 비슷한 또래의 주부입니다. 주부인데 본인을 백수라고 표현해서 깜짝 놀랐어요. 일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처지가 참 안타깝지만 주부 역시 참으로 중요한 역할임을 잊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남편이 맘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집안을 살피고, 편히 쉬고 다시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 말예요. 경제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돈보다 마음이 행복해지는 일을 찾으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님보다 어려운 사정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 일주일에 한 번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돈이 없으면 봉사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 행복이 깃들면 자연스레 님이 원하시는 일도, 행복도 찾아오지 않을까요? 사정을 자세히 모르면서 조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세상이 꼭 빠른 사람에게만 손길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마음으로나마 파이팅을 보냅니다. 신재숙

지금 고민 중이신가요. 혼자
힘들어하지 마시고 함께 나눠보아요.
고민과 의견이 실리신 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엽서, 이메일 edit@maum.org
SNS 관련 게시글의 댓글로도
참여 가능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다음 고민입니다.

직장 생활한 지 10년 차가 다 되어가는 30대 여성입니다. 요즘 저의 최대 고민은 정말 재밌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겁니다. 요즘에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재밌는 사람이 인정받잖아요. 꼭 인정을 원하는 건 아닌데 재밌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즐거운 에너지를 주고 흥을 돋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러워요. 저 같은 경우는 소심해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회식 자리 같은 데 가서도 뻘쭘히 아무 말도 못 하고 와서는 후회를 하곤 합니다. 코미디 프로를 보고 따라해 보려고 해도 어색하고 쉽지 않더라고요. 유머 감각도 후천적으로 키워질 수 있는 걸까요?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할머니의 잔인한 복수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중학교 2학년 딸아이에게 전해주면 좋을 거라며 아이돌 그룹의 화보집을 선물받았습니다. 반갑게 화보집을 들춰보는 딸아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얘들이 엑스오냐?”
저의 물음에 딸아이가 피식 웃었습니다.
“엑스오가 뭐예요, 엑소지.”
딸아이의 썩소에 발끈해 한마디 더 했습니다.
“엑스오나 엑소나 그게 그거지, 가시나야.”
그러자 딸아이도 발끈합니다.
“엑소를 엑~~스오라 그러면 안 되죠. 아빠가 좋아하는 씨스타를 ‘씨소타’ 뭐 ‘그네타’ 이러면 안 되지 않겠어요?”
이런…. 마지막 페이지를 다 넘기고 첨부터 다시 펼쳐 보는 딸아이가 화보 속의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찬열이… 그리고 세훈이… 백현이….”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긴 아이들 이름이 신기해서 다음 페이지 아이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얘는 누구냐?”
“찬열이라고 했잖아요. 앞에 찬열이… 얘는 세훈이 아까 말한 세훈이.”
그리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며 다시 저에게 묻습니다.
“얘가 누구라고요? 모르죠? 찬열이요, 찬열이. 다 같은 찬열이.”
그리고 12명의 멤버들 이름을 손가락을 짚어가며 나열합니다.
“크리스, 레이, 디오, 타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얘 누구라구요? 찬열이 찬열이 찬열이!!!”
내 딸이지만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5년 전 썼던 글이 생각나 소개합니다.

제목 할머니의 잔인한 복수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서는데 어머니와 5학년 3학년 두 남매가 거실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이다.
“할머니 이게 뭐라고요?”
“케….”
“케로로라구요.”
“이게 뭐라고요?”
재차 이어지는 질문에 어머니는,
“케… 로… 로….”
그러자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맞았어요! 할머니.”
“자, 그럼 이건요?”

“…….”
어머니는 코에 걸친 돋보기 너머로 두 눈만 껌뻑인다.
“기로로요, 기로로, 이건 타마마, 이건 쿠루루, 이건 도로로 아셨죠? 이게 뭐라고요?”
“…쿠….”
“쿠루루요, 쿠루루.”
두 남매가 서로 마주 보며 낄낄거린다. TV 만화영화 캐릭터 카드를 들고 할머니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 사실 나도 며칠 전에 당했던 일이라 어머니의 맘을 이해한다. 당해보면 알지만 은근히 약이 올라서 끝까지 받아준다. 이런 쓸데없는 오기로 난 2시간에 걸쳐 ‘개구리중사 케로로’란 만화의 캐릭터를 구분하게 됐다. 두 남매가 개구리 캐릭터를 가지고 어른들을 놀려 먹는 데 신이 났나 보다. 그래도 손자 손녀들이라고 끝까지 받아주며 노력하시는 어머니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며 난 욕실에서 샤워를 끝마치고 나왔다.
여전히 거실에 모여 있는 세 사람 곁을 지나치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풍”… “똥”… “비”….
“이게 뭐라고?”
어머니가 호기에 찬 음성으로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다.
“…….”
아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 모양 묵묵부답.
“풍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이게 오동, 이게 메조, 이게 난초, 이게 홍싸리, 흑싸리….”
어머니의 능숙한 패 돌림과 화려한 손목 스냅 앞에 아이들은 여전히 묵묵부답. 케로로 캐릭터 카드는 이미 한쪽으로 물려 있고 어머니 손에는 화투짝이 쥐어져 있었다.
“너희 아빠한테 물어볼까?”
어머니가 나를 한번 넌지시 쳐다본다. 난 어머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풍초똥팔삼…”이란 한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방으로 들어왔다. 짜식들….
좀 전까지 남매들의 낄낄거림은 온데간데없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어머니의 복수에 찬 다그침만이 거실을 맴돌았다.
너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봐라, 70년 세월을 이길 수 있나.ㅋ

백일성(43)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건국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 ‘터치’

취재 최창원

왼쪽부터 심은영(23), 곽선희(23), 나현수(23), 김정윤(23, 성신여대 의류학과), 김주영(27) 학생.

소외된 이웃들에게 옷을 만들어주는 학생들이 있다. ‘우리의 손짓이 당신의 희망을 터치합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되는 재능 기부 ‘터치’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는 2011년 3월 건국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수업하고 남은 원단으로 독거노인들에게 따뜻한 점퍼를 만들어드리자.”
독거노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하던 안경호(06학번) 학생이 제안했고, 뜻을 함께한 이들은 패딩 30벌을 만들어 서울 자양동의 독거노인들을 찾아가 선물해드렸다. 그 후 2012년 청각장애인 단체 ‘사랑의 달팽이’가 재활 치료를 위해 운영하는 클라리넷 연주단의 여름용 단복 30여 벌을 선물해주었다. 합주단에서 활동하는 동생을 둔 터치 회원의 제안으로 진행된 일이었다. 회원 한 명이 아이들 한 명을 맡아 일대일로 사이즈를 재고, 재단과 재봉 바느질까지 하여 완성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맞춤복. 아이들은 자신들을 생각하고 관심 가져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했다. 그다음 해에는 아동 청소년 공동생활가정(그룹홈) 아이들로 구성된 ‘행복나무소년소녀합창단’ 단원 31명의 단복을 제작해주었다. 수업하고 남은 원단 품목이 한정돼 업체들을 찾아다니며 필요한 원단을 지원받아 진행했다. 올해는 여건이 안 돼서 결혼식을 못 올린 다문화가정 부부들을 위한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만들어드리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울 100% 소재로 만든 합창단 단복(2013). 아이들의 빠른 성장을 고려해 사이즈 조절이 가능하게 만들고, 바지, 치마, 조끼, 나비넥타이, 케이프 등도 각각 만들어서 활용도를 높이려고 했다. 외모에 민감한 나이라 예뻐 보일 수 있게 디자인을 고려했다. 완성된 옷에는 그 옷을 만든 회원의 이름과, 학생 이름을 새겨 넣었다. 터치 활동은 50여 명의 학생들이 함께하고 있다.
www.facebook.com/touchproject

김주영(4학년) 학생의 이야기

저는 2012년 군 전역 후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게 멀게만 느껴졌는데, 내 근처에서 이뤄지니까 나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13년에는 터치 대표를 맡아 그룹홈 아이들로 이뤄진 합창단 아이들의 단복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11월에 세종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을 하는데 단복이 없어서 고민한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회원 한 명이 아이 한 명씩을 맡아서 치수를 재고 그 아이를 위한 옷을 만들었어요. 옷 한 벌이 완성되기까지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데, 그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회원들도 많았어요. 과제, 시험 등을 같이 병행해야 했으니까요. 저 역시 힘들 때도 많았지만, 아이들 생각하면 정신을 차리게 되더라고요. 치수를 재는 것부터 가봉이 되면 입혀보는 등등 그러면서 10번 정도 만났는데, 처음에는 “왜 우리한테 옷을 만들어줘요?”라며 낯설어하던 아이들이, 갈수록 반겨주는 겁니다. 특히 애들이 자기들 먹을 간식을 안 먹고 기다리다가 우리들에게 줄 때는 뭉클했어요. 그럴수록 우리가 섣부른 마음으로 하면 안 되겠다, 아이들이 기대한 만큼 제대로 해주자는 마음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여러 번 다시 해오라고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완성된 옷을 11월 5일 공연을 앞두고 전해주었어요. 사실 말이 하나뿐인 맞춤복이지 저희가 아직 배우는 과정의 학생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기성복보다는 못해요. 하지만 공연하는 걸 보니, 단복이 생각보다 괜찮고 빛나더라고요. 처음 내가 만든 옷을 누군가 입는 걸 본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고, 더 잘 챙겨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는 회원들도 많았습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시작했는데 오히려 제가 더 많이 성장을 했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무언가를 나누는 이런 터치의 활동 같은 것들이 대학 문화 내에 더 많이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생 때 미리 이런 활동을 경험한다면, 사회에 나가서도 작게나마 자기가 할 수 있는 나눔 활동을 찾아 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거 같아요.

정춘수 어른의 가르침

‘어른 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50이 넘어 보니 그 말이 실감이 난다. 나보다 어른들이라면 대개는 60대에서 70대 이상의 분들이다. 그들은 욕심과 거리를 두고 안쓰러운 것들에 눈길을 보낸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그게 누가 되었든 노력하는 젊은이를 위해 손을 걷어붙이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자신들이 겪었던 어려움, 그 미로에서 헤매는 젊고, 용감하고, 가여운 영혼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어른들이 있어 세상은 살 만하다. 내 가장 힘든 인생길에서 만난 정춘수 어른도 그렇다.

나는 30대에 사업을 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IMF로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우연한 계기로 승마 일을 접하게 되었다. 새벽 6시, 마장에서 말똥을 치웠다. 말똥을 치우던 그 첫 삽에서부터 나의 인생은 새로 시작되었다.

이후 ‘찾아가는 승마교실’을 열고 장애인들의 치유를 위한 재활승마교육, 매년 말을 타고 하는 기마국토대장정 등 승마의 대중화를 위해 많은 일을 기획하고 시도했다. 보람도 있었지만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고 힘들 때도 많았다.

그때 정춘수 어른이 들려준 말씀은 늘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 어른은 내가 남양주 쪽에서 운영하던 승마장의 땅 주인이었다. 71세신데, 키가 185에 지금도 사냥하러 다니실 정도로 건장한 장수 스타일의 분이다. 평생 공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하고 농장 일을 하고 계셨다.

어른은 두 번 정도 기마국토대장정에 함께하며 도움을 주셨는데, 그 과정에서 더욱 관계가 깊어졌다. 사업을 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오해를 받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이 사람은 그럴 사람 절대 아니다”라며 당신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셨다. 그분이 3년 전 들려주신 말씀을 아직도 새기고 있다. 스트레스로 힘들었던 그날, 어른은 나를 보더니 식사나 하자 하셨고, 그 자리에서 귀한 말씀을 들려주셨다.

“내가 젊을 때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셨지. 내가 외동이야. 젊을 때 성질도 괄괄했지. 그러니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겠어? 그분이 유언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어.

‘나 죽고 난 후, 네가 살다가 힘든 일을 만나, 누구 이야기할 데도 없으면 무조건 여행을 떠나라. 어디든 아무 마을에라도 들러서 그곳의 제일 어른을 찾아가. 가서 아무 말씀이라도 들려 달라고 해봐. 아무리 촌로라도, 그분들은 인생을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어떤 것들을 깨달았을 거야.’

그렇게 해서 나는 얻은 게 있었지. 늘 웃는 것과 남에게 굽히는 것. 언제나 뻣뻣하게 덤벼드는 놈들은, 늘 어디서고 깨지지. 굽히고 들어가서 좀 도와달라는데 누가 죽이려 들겠냐 말이야? 게다가 웃으면서 굽히면, 누가 굳이 뺨을 때리려고 들겠어?

내 말 오해 말고 들어요. 김대장도 말이야. 카우보이 모자 쓰고 늘 아주 빳빳하잖아? 특히 승마 부츠를 봐봐. 어른들 볼 때는 딱 일본 순사라니까? 덩치나 작어? 그런 사람이 허리 꼿꼿하게 펴고 다니면 다들 뒤에서 뭐라고 하지. 그러니 늘 웃으면서 굽히고 들어가. 그러면 누가 뭐라 하겠어? 특히나 김대장처럼 큰일 할 사람은 어디서나 적이 있어서는 안 돼요.”

어른의 진심이 전해져 뭉클해졌다. “뭐 그다지 큰일 할 위인은 못 되지만, 그래도 늘 명심하고 겸손하게 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 이후로 좀 더 유연하게 상대방 입장에서 조금 더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정춘수 어른은 요즘도 혼자 여행을 하신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제 일흔한 살이니 나도 나이 많이 먹었다 생각했는데, 이번에 여행 가서 혼자서 텐트 치고 다 하는 83세 어른을 만나고 나니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네. 김대장 자네는 아직 어린 애니 열심히 하시게.”

정춘수 어른을 뵈면 나도 내 후진들에게 뭔가 쓸 만한 말을 남기는,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곱게 나이 들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다.

김명기 53세. 한국국토대장정기마단 단장

“언제나 건강하셔서,
고목의 그루터기처럼 많은
후배들이 쉴 자리를 만들어주세요.”
라는 김명기 님의 마음을 담은
문구와 함께 정춘수 어른께는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편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햇빛을 싫어하는 식물은 없다!

새봄의 햇빛이 인심 좋게 쏟아져 내리는 요즘, 베란다에 앉아 햇빛 샤워를 즐기고 있노라면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도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초록이들도 신이 나서 여기저기 꽃망울을 터뜨리고 어느 때보다도 더욱 선명한 잎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어요.

혹시, ‘햇빛을 싫어하는 식물은 없다’는 말 아세요? 잎에 무늬가 있거나 꽃을 피우는 화초일수록 밝은 햇빛을 필요로 합니다. 햇빛이 모자라면 잎의 무늬가 흐려지고 꽃의 색깔은 약해지거나 아예 꽃이 피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또 아무리 음지식물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햇빛은 있어야만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고 보기에도 예쁘게 자란답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화장실이나 현관 같은 곳에 화초를 두면 시간이 가면서 줄기가 점점 가늘고 길어지며 모양이 흐트러지는데 이는 빛이 부족하기 때문에 화초가 햇빛을 찾아 목을 길게 빼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화초가 좋아하는 장소는 양지나 반음지랍니다. 실내의 유리창 가까운 곳이 화초 키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고, 아파트라면 집 안의 가장 밝은 곳인 베란다 창가가 되겠지요. 화초를 화장실이나 현관, 또는 거실과 같은 음지에서 잘 키우는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 좀 귀찮은 일이지만 화초를 베란다로 옮겨서 하루 3, 4시간 정도 햇빛을 쪼여주고 다시 원래 위치에 가져다 놓는 것이에요.

저 햇빛 속에는 도대체 어떤 비밀스러운 힘이 숨어 있기에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살찌게 하는 것일까요? 조건 없이 베푸는 자연의 위력이란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나이 들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게 있다면 햇빛처럼 늘 내 곁에 있지만 미처 모르고 지내온 것들,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내 삶의 햇빛 같은 존재들에 대한 고마움입니다. 결국 나란 사람, 보이지 않는 그들의 수고와 관심이 얽히고설킨 네트워크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