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자연의 마음

하늘이 맑으니
하늘 색이 푸르다 못하여 검게 보이누나
맑은 물이 산 사이의 계곡 따라
돌바닥인 계곡물이 맑기 그지없는데
이름 모를 고기가 놀고 있구나
 
산은 높은데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나고
새싹이 나뭇가지에 돋아나고 있구나
산에는 산나물이 돋아나고
다래나무에는 다래순이 많기도 하구나
산 계곡을 따라가다가 보니 취나물이
밭처럼 많기도 하구나
인적이 없는 산천을 따라 나물하러 이리저리 다니니
햇살마저 따스해 맑은 공기에 맑은 물에
세상에 찌들은 몸이 찌든 기가 다 빠지고
가볍기가 그지없고
온몸이 산천 닮아 깨끗하기가 그지없구나
젊은 날 등산을 했던 덕에 이 산 저 산을
헤매고 걸어도 지칠 줄을 모르겠구나
 
가지고 간 도시락을 물가의 넓은 바위에
앉아 먹고 있으니
조그마한 폭포가 있구나
낙수되는 언덕바지에 이름 모를 새가
무어라 조잘거리며 왔다 갔다 하구나
봄날의 산천에는 나만 보기가 너무나 아까운 것이 많고
날씨마저 따스한데
이 산천이 있고 얼마만 한 사람이
나가 다닌 곳을 다녔는지가 궁금해지구나
오기가 쉽지 않은 심산유곡에
사람이 다녔겠느냐는 마음이 들어 궁금했던 것이다

산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마다
현저히 나뭇잎이 덜 자라 있구나
계곡에 왔던 산노루 놀라 뒤를 힐끔힐끔 보며
달아나고 있고
이 산에 있는 동식물이 사람처럼 대 이어 살구나
집도 없고 발가벗은 자기만 가지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오는 대로
춥고 더우면 춥고 더운 대로 말없이 살구나
 
있었던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다시 오고 또 가고 하지만
간 곳도 본래이고 온 곳도 본래인 이치를
나만이 알고
무상한 세상에 무엇을 찾고 구하려고
수많은 이가 싸움하고 죽이고
도둑질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철없다는 생각이 드누나
 
자연의 심이 되어 탓함도 없고
시기 질투 잘남이 없고 옳다 그르다가 없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는 마음이 없고
인간의 마음이 다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심이라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시인, 저술가, 강연가입니다. 2002년 인간 내면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UN-NGO 산하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평화 대사로도 활동 중입니다. 저서로 <세상 너머의 세상>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등이 있으며 그의 저서 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은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에서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5개 국제도서상 2013 LNBA, NIEA, IBA, IPPY Awards, 2012 eLit Awards에서 영성, 정신, 철학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근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의 영역본이 2014 에릭 호퍼 북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하는 등 마음과 비움, 깨침에 대한 우 명 선생의 철학이 전 세계의 관심과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열린 고민 상담소

제 고민은요?

한순간의 실수로 3년 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입니다. 저는 교도소에서 새사람이 되고자 많이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전기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도 졸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로 돌아가면 분명 주변 사람들보다 뒤처질 테고, 또한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흠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범죄자라는 편견, 차별과 불이익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내고 싶네요. 힘내라고 응원 좀 해주세요.

제 생각은요!

저는 강원도에서 건설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희 사업장에는 모두 일곱 명의 출소자분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출소한 후 오갈 데 없는 분들을 돕기 위해 2008년부터 고용을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십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전과자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에 개의치 마시고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만 가지십시오. 취업을 한 후에도 성실히 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요. 저는 출소자들을 위한 상담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출소 예정자들을 미리 만나 살길을 의논하고 상담을 하다 보니까 전혀 거부감이나 편견 없이 자연스럽게 고용까지 이뤄졌습니다. 전국적으로 지역마다 법무복지공단이 있고, 공단에서 운영하는 생활관에서는 생활도 함께하고 직업 교육 등도 시켜줍니다. 취업하실 때 도움을 받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장덕범

저는 교도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님의 고민은 수형자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고민입니다. 전문 용어로 게이트 피어(gate fear)라고 하는데 수형 생활에 익숙해지고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단계에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전과를 가지고 사회에 나가서 적응하는 것은 당연히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곳에서도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열심히 수형 생활을 한 수형자들이 교도소 소개로 자동차 정비 업체 등에 취업한 사례가 다수 있습니다. 업주들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채용하였으나 출소자가 정말 성실히 일하여, 선입견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이후 적극적으로 교도소에 구인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의 열심히 하고자 한 결심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파에 마음을 닫지 않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성실히 삶을 살아간다면 사회 구성원들과 같은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먼 훗날 뒤돌아봤을 때 전과자라는 작은 흠은 시나브로 덮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장성일

저는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무기수에서 또다시 20년 수로 감형이 되었고, 모범적인 수형 생활을 인정받아 2010년 3.1절 특사로 가족의 품에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변해버린 사회 속에서 그동안 잃어버린 청춘을 찾으며, 가족의 몫을 충실히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고군분투하며 정신없이 4년을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청천벽력같이 아내가 위암으로 떠나는 등 큰 아픔과 슬픔을 겪으면서 가파른 험한 산을 몇 번 넘어왔는지 모릅니다.

저는 힘겨움이 닥치면 옛날 교도소 사형수 시절의 교훈들을 떠올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긍정적인 마인드로 굳건히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지금은 직장에서 A급으로 인정을 받고 있고, 교도소에서 배운 자동차 광택업을 창업하여 투잡으로 늘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비번 날에는 교정기관 교육 강사로도 활동하면서 삶의 보람도 찾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행복한 사형수>라는 자전적 에세이 책도 출판했고, 시인으로 등단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자화자찬하는 이유는 님께서도 “나도 남들처럼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재소자라는 선입견에 위축이 되지 말고, 조금이나마 힘과 용기를 내셔서 힘찬 삶을 사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전과자를 넓은 마음으로 보아주는 이는 드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수한 과거에 대해 죗값을 치르고, 앞으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잘 살겠노라 다짐하며, 따듯한 마음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향기로운 꽃처럼 사람의 향기를 풍기는 이에게 왜 돌을 던지겠습니까. 가슴 쓰라린 오늘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내일의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릅니다. 행복한 내 삶을 위하여 희망의 끈을 잠시도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배정수

지금 고민 중이신가요. 혼자
힘들어하지 마시고 함께 나눠보아요.
고민과 의견이 실리신 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엽서, 이메일 edit@maum.org
SNS 관련 게시글의 댓글로도
참여 가능합니다.

함께 나누고 싶은 다음 고민입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 지난 호 박성근 님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네요. 전 50세의 주부(백수)인데 지독한 손치, 몸치, 느린 행동, 안경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고도근시, 사고로 인해 못 듣는 왼쪽 귀를 지녔습니다. 올봄 수급자를 위한 취업을 했지만 한쪽 귀만 들어서 일하는 데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중도 탈락했습니다. 요즘처럼 살기 빠듯한 세상에 남편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제가 답답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모든 걸 빠르게 빠르게, 더 빠른 사람만이 인정받는 세상에서 제가 살아갈 길은 없을까요?

‘개딸’이라 불리는 우리 집 딸아이

아침 7시 중학교 2학년 딸아이를 깨우려고 방에 들어갑니다. 방문이 안 밀립니다. 안에서 잠가놓은 건 아닌데 잘 안 밀립니다. 좀 더 힘을 줘서 밀어보니 제 몸 하나 겨우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확보됩니다. 문 앞에 딸아이의 책가방이 놓여 있습니다. 어깨끈이 문 밑에 끼어서 잘 안 열렸습니다. 책가방뿐만 아니라 문 앞에 널브러진 물건들이 많습니다. 문 앞에서 딸아이가 누워 있는 침대까지 약 네 걸음….

첫발에 무언가 걸렸습니다. 딸아이가 벗어놓은 바지, 형체 그대로 홀라당 뒤집혀 있습니다. 두 번째 발걸음, 발바닥에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생라면 부스러기를 밟았습니다. 세 번째 발걸음에 무언가 미끄덩하며 중심을 잃었습니다. 딸아이의 스타킹을 밟았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물건이 그냥 방바닥에 널려 있습니다.

“야~~~ 개딸~~~ 일어나라~ 7시다~~~”

딸아이가 미동도 없습니다.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미끄덩하고 손이 미끄러집니다. 잠들기 전 동백기름을 바르고 잤는지 머리에 기름기가 좔좔입니다.

“야~~ 개기름 딸~~~ 개딸~~~ 빨리 일어나~~~” 그제야 딸아이가 눈을 부스스 반쯤 뜹니다. “야, 가시나야 너 어제 또 라면 끓여 먹고 잤냐? 얼굴 부은 거 봐라 눈 코 입이 다 파묻혔다.”

커튼을 올리며 딸아이의 방을 한 번 훑어봤습니다. 책상에는 온갖 책과 참고서가 널려 있고 교복은 의자에 반쯤 걸쳐 소매 부분은 의자 바퀴에 끼어 있습니다. 딸아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길게 하품을 한 번 합니다. 볼에 하얗게 침 자국이 선명합니다.

내 딸이지만 정말…………………… 개를 닮았습니다.

15년 전 두 살 많은 오빠 밑으로 딸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정말 예쁜 내 강아지였습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정말 15년 후에 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쁜 애완견이 아닙니다. 일요일 아침 동물농장에 가끔 나오는 녹색 그물에 포획되어 발버둥치는 유기견의 몰골입니다. 다시 그물 속으로 아니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딸아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저는 방문을 나와 발바닥에 붙어 있는 라면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출근을 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퇴근을 하며 집 앞 슈퍼에 들러 개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한 통 사서 들어가는데 마침 딸아이가 슈퍼 앞을 지나칩니다. 길 건너로 달려가는 오빠 친구와 인사까지 하면서 희희낙락입니다. 경비실 앞을 통과하는 딸아이 뒤를 따랐습니다. 한겨울에 짧은 반바지를 입었습니다. 위는 하얀색 두꺼운 털 스웨터를 한쪽 어깨가 보이게 삐딱하게 걸쳤습니다. 가방은 어디 수산시장 아줌마들이나 들 법한 비닐 가방을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등까지 흘러내린 긴 생머리는 드러난 어깨 반대편으로 쓸어 넘겨져 있습니다. 딸아이를 불러 세웠습니다. 저를 돌아보는 딸아이의 얼굴이 경비실 불빛에 환하게 다가옵니다. 입술에 뭔가를 처발랐나 봅니다. “학원 갔다 오냐?” 딸아이가 저에게 달려옵니다. 아침에 봤던 개딸과는 전혀 다른, 이제 아가씨 티가 나는 것도 같은 딸아이가 반갑게 저를 향해 달려옵니다. 두 팔을 벌렸습니다…………… 왼쪽 손에 들려 있던 아이스크림 봉투만 낚아채서 집 쪽으로 뛰어갑니다. 진짜 개라면 꼬리라도 흔들 텐데…… 썅.

조금 전에 길 건너로 내달리던 오빠 친구 녀석은 과연 알까요? 밤마다 생라면을 먹으며 수프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고 이불에 쓱쓱 닦는 우리 개딸을… 하루 종일 신었던 스타킹을 고스란히 침대 밑으로 쑤셔 넣는 우리 개딸을… 분홍색 베개 커버에 알록달록 침 자국을 남기는 우리 개딸을… 침대에서 아이스크림 먹다 질질 흘리고 그냥 손으로 쓰윽 닦고 처자는 우리 개딸을….

15년 전 신생아실 창밖에서 꼼지락거리는 우리 딸아이를 바라보며 “우리 똥강아지~~ 아빠야~~”라고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 똥개까진 아닌 거 같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렵니다… 에휴….

백일성

백일성(44)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노숙인이 만드는 종이 옷걸이 두손컴퍼니

취재 문진정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 겨울, 하루하루 추위와 싸우고 있는 노숙인들을 생각하는 기업이 있다. 일하는 손과 돕는 손이 만나 탄생한 소셜 벤처 ‘두손컴퍼니’. 대학교 동아리에서 시작된 두손컴퍼니의 대표는 28세 청년 박찬재씨다.

2011년 여름, 서울역 노숙인 강제 퇴거 조치로 인해 노숙인들은 서울역 인근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사설 용역을 피해 시간마다 자리를 옮기는 노숙인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박찬재씨는 곧장 막걸리를 사들고 서울역을 찾았다. 대부분 과거에는 정상적인 삶을 살다가 IMF 등의 위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앉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고민한 끝에 종이 옷걸이 제작을 생각해냈고 1년여의 준비 끝에 2012년 여름, 친환경 종이 옷걸이에 기업의 광고를 실어 수익을 내는 두손컴퍼니를 만들게 되었다.

옷걸이 광고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홍보 방법이라 소비자들의 주목도가 높은 것이 큰 장점이다. 현재 기업의 판촉물, 광고용 등으로 만들어진 옷걸이는 노숙인들이 직접 조립하고, 140여 곳의 게스트하우스에 배포되고 있다. 작은 옷걸이지만 만든 사람들의 정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제품, 그러면서 사용하는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두손컴퍼니. 노숙인들의 손을 맞잡아주는 이들 덕분에 올 겨울은 더 훈훈할 것 같다.

박찬재 대표 이야기
대학생으로서 생각지도 못했던 창업을 준비하면서 6개월간 노숙인 관련 기관들, 사회적 기업 관계자분들을 만났어요. ‘사지 멀쩡한 사람들이 게을러서 노숙을 한다’는 편견이 있잖아요. 실상을 들여다보면 간절히 재기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하게 된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노숙자’라고 했을 때 흔히 떠올리는 거리 노숙인은 10~20%에 불과하고, 쉼터에서 자활을 준비하거나 구직 활동을 하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이 계세요. 새벽 네다섯 시부터 부지런히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며 저 스스로도 편견이 많이 깨지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지요. 그래서 저희와 함께 옷걸이 조립 작업을 하시는 분들도 주로 자활 의지가 있는, 쉼터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입니다. 아직 ‘일자리’라고 할 만큼 안정적인 고용을 만들어내긴 어렵지만 최대한 지속적으로 일거리를 제공해드리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흔히 농부의 고마움은 잊게 되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이걸 만들고 포장하고 운송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잊게 되는데 그 손길들을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어요. 단순히 물건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연결 관계를 느낄 수 있게요. 노숙인들과 함께 조금 특이하지만 의미 있는 길, 누군가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상을 예방하는 방한화 선물 캠페인

두손컴퍼니에서는 최근 출시된 옷걸이 세트를 구매하면, 그 수익금으로 신발이 없는 노숙인에게 방한 신발을 전달하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옷걸이 디자인은 국민대학교 학생들의 재능 기부로 이루어졌다. 1월 31일까지 참여하면 된다.

www.dohands.com / www.ohmycompany.com

거친 눈보라에도 꺾이지 않는 들풀을 닮은 내 친구

하늘도 청명했던 지난 봄, 출근길에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따스한 봄 햇살과 시원한 공기가 필요할 것 같은 친구의 소식이 궁금해서다.

“어, 나야. 웬일이냐 형한테 전화를 다 하고….”

수신음이 한참 전달된 후 막 끊으려는 순간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눌함이 느껴지지만 목소리에 힘도 있고 무엇보다도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반응이어서 반가웠다.

“아침은 먹었냐? 날 좋은데 바람이라도 쐬러 밖에 좀 나오지 그래?”
“너… 잔말 말고… 지금 어디냐? 지금 다 와 가니까 사무실로… 아니 점심이나 같이 먹자. 거 뭐냐… 왜 새로 생겼다던 쌈밥, 후배 누구…? 에이, 집사람 바꿀게.”

적극적인 의사소통은 아직 무리인 듯 말이 매끄럽지 않다. 며칠 전 후배가 새로 개업한 쌈밥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는 얘긴데, 끝을 맺지 못하고 결국 부인을 바꾼다.

친구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 중환자실에서 두 달여를 보냈다. 심각한 것은 사람을 제대로 못 알아보며 엉뚱한 말을 하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점차 빠르게 회복되어 갔고, 하루 두어 차례씩 전화를 걸어와 완전치는 않지만 안부를 묻고 한참씩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부인은 그의 기억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매일 외출 허가를 받아 그가 일하던 일터를 보여주곤 한다고 했다. 오늘도 그렇게 아침 일찍 병원을 나선 것이다.

점심시간에 만나 밥 한 공기를 간단히 비운 친구는 며칠 새 빠졌던 살이 다시 찐 것 같다며 ‘허허’ 웃었다. 두 달여 만에 함께한 친구와의 식사 자리는 유쾌하게 끝났다. 재삼 다행임을 되뇌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는 유일하게 고향을 함께 지키며 서로 의지하던 친구인 데다, 얼마 전 지역에서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후배가 쓰러진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하직한 일도 있었던 터라 내심 조바심이 컸었다.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안흥찐빵’으로 유명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그 친구와 나의 고향이다. 덩치도 크고 운동 좋아하고 남성스럽고 호방한 성격의 친구. 학창 시절에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각자 도회지로 나가 실컷 삶의 쓴맛을 맛보고 비슷한 시기에 귀향을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30대 후반에 나보다 일찍 고향에 내려와서 몇 년간 열심히 일한 친구는 결국 다시 삶의 터전을 회복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서울에서 작은 사업을 하다 어려움을 겪고 고향에 내려온 나를 따듯이 챙겨준 이가 바로 이 친구였다. 아무리 고향이라 해도 여러 가지로 변해 낯설어진 이곳에서 내가 잘 정착할 수 있었던 건 이 친구의 도움이 컸다. 외모만큼이나 털털하고 정이 많았던 친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야~ 나와, 술 한잔 하자” 하며 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라며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무던히도 많이 헤쳐 온 친구를 보면, 재작년 때늦은 폭설 때 본 들풀이 생각난다. 내가 일하는 건물 지붕 처마 밑 금속 틈바구니에 쌓인 흙먼지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던 이름 모를 들풀. 눈보라를 견디지 못하고 휩쓸려 사라진 줄 알았던 들풀이 며칠 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유난히도 거센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통해 처마 끝을 바라보는 순간, 비스듬히 기울어진 들풀 두 포기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몸을 흔들었지만 오히려 ‘우리, 여기 이렇게 살아 있소’ 몸짓하는 것 같았다. 거친 삭풍 속에서도 절대 꺾이지 않는 배짱과 한결같음. 친구의 삶이 들풀을 닮았다.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지다 보니 친구가 간혹 “난 안 돼” 하며 자포자기할 때가 있다. 하지만 분명 이 친구는 모두 극복해낼 것이다. 머지않아 정상의 모습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야! 커피 한 잔 타~뫄”라고 소리치며 사무실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들꽃이 다시 몸을 드러내었듯, 밤새 몰아치던 비바람이 이내 봄을 가져다 놓듯이.

성락 50세. 직장인.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친구의 쾌유를 바라는
성락 님의 마음을 담아,
친구분께 꽃바구니를 보내드립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편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건강한 화초 고르는 방법

그리 머지않은 곳으로부터 포근한 봄이 다가오는 게 느껴집니다. 우리 집 새봄맞이 분위기 좀 내볼까 하시는 분들께 가장 저렴하고도 효과 만점인 방법은 바로 예쁜 꽃 화분 하나 들여놓는 거라고 귀띔 드리고 싶네요.

화초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키우려면 처음부터 튼튼한 것을 골라야 합니다. 꽃집 주인이 권해주는 대로 덜컥 집어올 게 아니라 다음 몇 가지 사항을 눈여겨보는 게 좋아요.

같은 종류의 화초 여러 개를 비교해 봤을 때, 한눈에 싱싱함이 물씬 느껴지는 것, 잎의 색깔이 진하고 잎맥이 뚜렷한 것, 줄기가 굵고 튼튼하며 잎 표면이 매끈한 것을 고르면 됩니다. 화분 밑으로 뿌리가 삐져나와 있는 건 뿌리가 잘 내렸다는 증거이죠.

잎의 앞뒷면을 꼼꼼히 살펴봤을 때 작은 반점이나 얼룩이 있거나 표면이 울퉁불퉁 하다면 건강하지 못한 녀석이니 조심하세요. 벌레는 주로 잎의 뒷면에 많이 붙어 있으니까 잎을 뒤집어 잘 살펴야 해요. 아울러, 화분의 흙도 유심히 살펴 작은 벌레가 숨어 있는지도 보세요.

꽃이 피는 식물을 구입할 때는 색깔이 선명하고 상처나 얼룩이 없으며 꽃대가 굵은 것이 좋은데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많은 것보다는 꽃이 어느 정도 피어 있는 것을 구입하는 게 훨씬 안전해요. 집으로 데려오면 온도와 습도, 빛의 밝기와 같은 문제로 꽃봉오리가 그냥 그대로 마르거나 떨어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참, 화초 잎 표면에서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에 현혹되지 마세요. 원래 건강한 화초의 잎에서는 특유의 윤이 나는 게 당연하지만, 요즘엔 대부분 식물 광택제를 뿌려 일부러 윤을 내기 때문에 분간이 어렵답니다.

실내 화초 대부분은 계절에 관계없이 구입할 수가 있는데, 그래도 특히 겨울엔 조심해야 합니다. 온도가 높은 꽃집에 있던 화초를 데리고 와서 서서히 적응시키지도 않고 추운 베란다에 두었을 경우,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로 식물이 스트레스를 받아 상해 버리기 때문이에요. 어때요? 건강한 화초 고르는 방법, 그다지 어렵지 않죠?^^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길쭉길쭉 떡갈비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칼국수에는 칼이 없다(^^)지만, 오늘은 정말 떡이 들어가 떡갈비인, 또 떡처럼 고기를 치대어 만드는 떡갈비를 해보자. 미트로프라고 다진 고기 속에 채소를 넣어 길쭉하게 만들어 먹는 서양 요리가 있는데, 그 요리를 응용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김치와 떡을 넣어 보았다. 쇠고기뿐 아니라 돼지고기나 닭고기로 응용해도 좋다. 미리 만들어 쿠킹호일에 싸서 냉동 보관하였다가 하나씩 꺼내어 구워 먹어도 된다.

글 & 요리 이미경 자료 제공 <국민 야참>(상상출판)

재료 가래떡 1줄, 배추김치 2장, 양파 1/4개, 표고버섯 1개, 식용유 조금, 다진 쇠고기 200g, 빵가루 약간

양념장 간장 1큰술, 설탕 0.5큰술, 맛술 0.5큰술, 다진 파 1큰술, 다진 마늘, 참기름, 후춧가루 약간

➊ 가래떡이 딱딱하다면 물에 담가 부드럽게 불린다. ➋ 배추김치는 속을 털어내고 물기를 제거한다. ➌ 양파와 표고버섯은 곱게 다져 프라이팬에 볶은 후 식힌다. ➍ 볼에 쇠고기와 양념장 재료, 다진 양파와 표고버섯, 빵가루를 모두 넣고 섞어 치대어 쇠고기 반죽을 만든다. ➎ 김발에 랩을 씌운 후, 쇠고기 반죽을 넓게 펴고 그 위에 배추김치와 가래떡을 올려 돌돌 만다. ➏ 200℃로 예열한 오븐에서 10~15분 정도 구운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낸다. 프라이팬에 구울 때는 굴려가며 뚜껑을 덮고 익혀준다.

요리 연구가 이미경님은 쿠킹스튜디오 ‘네츄르먼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동양매직요리학원 원장, 선재사찰음식문화 수석연구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건강한 제철 음식, 심플하고 부담 없는 레시피를 대중에게 알려오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국민 야참> <아이요리> 외 다수가 있습니다.

점자 스캐너 반지, 아이링

이름은?
아이링. Eye+ring. 점자 스캐너다. 시각 장애인들의 눈이 되어줄 수 있는 반지이기 때문에 아이링이라고 이름 붙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나(정용)도 적록색약이 있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몇몇 색이 약간 헷갈리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낀다. 이런 경험 때문이었는지 평소 장애인들이나 우리보다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편함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개선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고민하다가 아이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제품의 원리는?
평소에는 반지로 끼고 다니다 책을 읽을 때 반지를 돌려 손가락 첫 마디에 끼우고 사용한다. 반지 윗부분에 달린 스캐너를 아래로 향하면 책에 적힌 글자가 스캔되고 반지 안쪽에 점자 돌기가 글자에 맞게 차례로 튀어나와 손가락으로 점자를 인식할 수 있다. 음성 지원도 가능하다. 눈이 몸의 일부분인 것처럼 점자 스캐너도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사용하고, 휴대가 쉬우면서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두었고, 구동 원리나 사용 방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평소 콘셉트 디자인뿐만 아니라 가구, 조명, 소품 등에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한 디자인들을 꾸준히 해나가고 있다. 디자인은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을 제품에 부여하는 마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편리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라이프’지에 근무하면서 잡지에 실릴 사진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월터는 상당히 소심한 인물입니다. 같은 회사의 좋아하는 여직원 ‘셰릴’에게 직접 고백은커녕 인터넷 만남 사이트를 통해 ‘윙크’를 보내는 것으로 호감을 표시하려고 하는데 그마저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니까요. 게다가 어머니의 부양비를 비롯해서 동생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에 하루하루 꼼꼼하게 가계부를 작성해야 함은 물론, 다른 ‘특별한 일’을 할 여유도, 엄두도 못 내는 인물입니다.

이처럼 무엇 하나 특별한 점, 특별한 경험도 없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월터에게 유일한 특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는 상상의 나래 속에서는 영웅이 되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로맨틱한 고백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영화는 이런 월터의 상상과 현실을 오가면서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특히 직장 상사와 벌이는 상상 속의 결투는 마치 슈퍼 히어로물을 보는 것처럼 박진감이 넘칩니다.

그렇게 오직 상상으로만 위로받던 월터에게 더 이상 상상만 하고 있을 수 없는 현실 속의 위기가 닥칩니다. ‘라이프’지의 갑작스런 폐간 결정! 회사는 급변의 시기를 맞게 되고, 마지막 호 표지 사진이 분실되면서 월터는 ‘구조조정 1순위’가 되어버립니다.

월터는 결국 분실된 그 사진을 찾기 위해 작가를 직접 찾아 나서게 되고, 상상으로 시작해서 그 상상이 조금씩 현실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평범했던 한 남자의 성장기처럼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 성장기는 월터가 갖고 다니던 물건을 통해 형상화됩니다.

회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된 날 누이동생으로부터 받았던 ‘생일 케이크’에서 시작된 특별한 경험은 역시 누이동생에게 받은 ‘고무 인형’을 거쳐 아이슬란드에서 ‘고무 인형’과 교환한 ‘스케이트보드’로 넘어가 음식점 ‘파파존스’를 지나 스케이트보드를 셰릴의 아들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고,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꼭 닮아 있었던 그 며칠간의 행보는 소심했던 월터를 누군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남자로 변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행보 가운데는 헬기에서 바다로 뛰어들기, 바다에서 상어와 싸우기 등이 포함되어 있지요. 이런 월터의 경험들은, 하루하루 정해진 틀에 맞춰 살아가느라 다른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현실 속의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며, 유쾌한 웃음을 선사합니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그리고 히말라야까지 향했던 월터의 뜻밖의 여정은 아름다운 영상으로도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장에 직접 가서 촬영했다는 로케이션 선정 또한 아주 인상적이라, 월터처럼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아질 정도이지요. 게다가 장면 장면에 어우러지는 음악 역시 좋았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매트릭스> 패러디 역시 재미를 더해줍니다.

감독이자 주인공 월터 역을 맡은 벤 스틸러는 기분 좋은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들을 통해 ‘한 번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보는 것이 어떨까?’라고 말합니다.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보라’고 권유하면서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당신이 가장 아름답다’고도 말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들이 유쾌한 웃음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기분 좋은 여운까지 남겨줬던 영화. 새해 첫 영화로 딱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형택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 보관돼 있던 화첩은 2005년 영구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되었고, 8년 만에 그 전모를 공개하게 된 것이다. 전시회와 함께 화첩을 최대한 재현한 영인복제본, 화첩의 환수 과정과 학술적 의미 등을 담은 단행본이 출간되는 등 관련 자료 및 연구가 집대성된 것도 큰 의미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최고의 화가라 불리는 겸재 정선(1676~1759). 어떻게 그의 화첩은 독일로 가게 되었을까?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었을까? – 편집자 주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전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월 2일까지 열린다. 엮어진 화첩 특성상 한 번에 펼칠 수 없어 매주 화요일 한 면씩 교체돼 선보인다.

한국 문화를 사랑했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1973년 당시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는 논문을 준비하던 중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1927년에 발간한 <한국의 금강산에서>라는 책에 3폭의 겸재 그림이 실린 걸 보고 놀란다. 1975년 그 실물을 찾아 독일 오틸리엔수도원까지 간 그는 무려 21폭이 담긴 <겸재정선화첩>을 발견하고 숨이 멎는 듯했다고 전한다. 어떻게 겸재의 그림들이 독일 한 수도원에 있게 된 것일까.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는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의 초대 총아빠스(대원장)였다. 그는 선교를 위해 1911년,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일제 강점기 하에 있었고, 그는 한국의 아름다운 미적 감성들이 말살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등 두 권의 책과 두 편의 기록 영화까지 만들며 한국 문화의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성직자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특히 금강산에 매료되었다. 1925년 6월 금강산을 여행한 베버는 일본인 화가와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들을 접한다. 그리고 일본인 화가의 ‘만물상도’와 겸재의 ‘금강내산전도’에 대한 비교를 책에 싣기도 했다.

‘일본인 화가가 다만 자신의 정신 속에 각인된 이 거대한 파노라마를 비단 폭 위에 모방하려는 의도만 있는 데 반해 한국인 화가는 계곡과 깊은 골짜기에 감추어진 산벼랑과 봉우리들에서 바라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사찰들과 암자들까지 빼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중략) 금강산의 한국적 조형 방식은 ‘금강산의 전체적 특성을 재현’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금강산에서> 중에서

<겸재정선화첩>의 내용을 보면 주제와 분야, 작품의 격조, 제작 연대 등에 차이가 있다. 즉 출처가 다른 그림들을 베버 신부가 수집해 한국의 화첩 방식으로 성첩하여 독일로 가져간 것이라 추측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문화재는 일본, 미국, 중국 등 20여 개국에 대략 15만 점 이상이 유출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에 환수된 것은 9,760점에 불과하다.(2013년 10월 기준) 많은 문화재 반환 사례 중에<겸재정선화첩>의 반환은 독일과 한국 가톨릭 수도원 간의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깊다. 오랜 세월 동안 세 번의 전쟁, 두 번의 화마 속에서도 살아남은 화첩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되고 있다.

숨 막힐 듯한 걸작 <겸재정선화첩>의 의의

<겸재정선화첩>은 진경산수화뿐 아니라 사의산수화, 고사인물화 등 다양한 화제(畵題)와 화풍을 담고 있어, 정선의 예술 세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화첩이다. 겸재는 중국풍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 산하를 우리만의 기법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라는 크나큰 성취를 이루어낸 ‘화성畵聖’이었다.

특히 겸재가 평생 가장 심혈을 기울여 그린 것은 금강산이었다.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어우러져 계절 따라 다른 절경을 연출하는 금강산은 조선의 긍지와 주체성의 상징이었다. 한눈에 보이지 않는 금강산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겸재가 그린 한 폭의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겸재 화첩의 존재가 영미 미술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99년. 케이 E. 블랙(전 미국 덴버미술관 동양미술부 연구원)과 에카르트 데게가 함께 쓴 논문이 <오리엔탈 아트>라는 미술 전문지에 실리면서다. 케이 E. 블랙은 겸재의 그림을 보고 ‘숨 막힐 듯한 걸작’이라 감탄했다. 이후 화첩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경매 회사들이 수도원을 찾았고, 뉴욕의 크리스티는 예상 경매가 ‘50억 원대’라는 말을 흘리며 경매에 부치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돈으로 거래한다는 것을 옳지 않게 여긴 수도원에선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화첩의 귀환, 한국의 영혼 한 부분이 돌아오는 것

2005년,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틸리엔수도원은 한국의 형제 수도원인 왜관수도원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화첩을 돌려줄 것을 결정한다.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 등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반환 결정 당시 제6대 대원장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의 ‘담화문’ 중 일부를 소개한다.

‘나의 선임자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문화에 심취한 분입니다. <겸재정선화첩>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당시 선교 활동을 통해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처음부터 한국 문화에 대해 존경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진정으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사랑했습니다. 저희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 화첩이 한국에서 더 많이 사랑받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중략) 저는 화첩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미술사학자인 이정희 박사는 ‘한국의 영혼 한 부분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 무척 감동적인 표현입니다. 화첩 반환이 보도된 후 한국인으로부터 감사의 이메일을 많이 받았습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와 기쁩니다. (중략) 화첩이 고향에서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