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차 백수의 백수 생활 노하우
주덕한 46세. 전국백수연대 대표. 인터넷 카페 백수회관 cafe.daum.net/backsuhall
요즘 같은 불경기에 스스로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는 ‘예비 백수’가 주변에 있다면, 일단 뜯어말리는 것이 좋겠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서 하는 일이 대개 자영업인데, 서울시의 경우 3년 이내 절반이 폐업한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백수가 될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직 생활을 즐기는 그 노하우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백수 생활을 즐기겠다고 하면, 일단 부정적인 생각이 앞선다. 그러나 나는 백수 생활이 내세울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부끄러워야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실, 세상만사가 그렇듯 백수 생활도 나름의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백수 생활로 인해 경제적 여유는 없어지긴 하지만, 반대로 시간적 여유가 주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주어지는 시간적 여유를 제대로 활용하는 초보 백수들은 드물다.
내가 백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96년 7월,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나서부터이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것이 삶의 당연한 매뉴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생각이 깨지게 된 게 졸업 후 3개월 동안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였다. 그곳에서 수많은 배낭여행족을 만났는데, 그들 중에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1년 이상 여행을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앞날이 걱정되지 않냐고 물었더니 “직장은 또 구하면 되지”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놀랐다. 돈이나 직장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처음으로 ‘다르게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5년 여행에서 돌아와 한 IT업체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한창 회사의 틀을 잡아가던 시기였기에 야근은 기본이고 며칠씩 밤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나를 채용했던 젊은 대표가 과로사하고 말았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실감 나고 1년 반 동안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과연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6개월 휴직계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사실 그때만 해도 이게 20년 가까이 이어질지는 몰랐다.
처음에는 가족과 주변의 눈치도 보였다. 하지만 이왕 백수인 거 당당한 백수가 되자 마음먹었다. 그 이후 총각 파출부, 인구 조사 아르바이트, 방청 아르바이트, 돌잔치 이벤트 플래너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필요한 만큼 벌고, 번 만큼 쓰며 그동안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그중 하나가 여행이었다. 유폐되듯 방 안에서 아무리 고민해도 보이지 않던 앞길이 길 위에서는 보일 수도 있다. 월세도 서너 달 밀리고, 전기세 낼 돈도 여의치 않던 지리멸렬했던 1999년, 일본에도 백수 단체(다메렌)가 있으니, 국제 교류를 해보면 어떠냐는 이야기에 단돈 6만 원을 갖고 15일 간의 일본 도쿄 여행을 갔다. 일본어는 배워본 적이 없고, 일본 친구도 한 명 없었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백수정신(?)이 통했을까? 결론적으로는 즐겁게 잘 다녀올 수 있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일본의 NPO(비영리 단체) 활동가들을 만날 기회도 가졌다. 수입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교류와 만남들은 인터넷 카페모임 ‘전국백수연대’를 2006년 서울시 비영리 민간 단체로 등록하고, 내가 ‘백수활동가’로 활동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행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생각의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늘 수입이 생기면 새로운 분야의 책들을 찾아 읽으며 사회를 보는 안목을 넓혔다. 그러다가 나의 경험들과 자료들을 모아 백수들을 위한 안내서를 출판하게 됐다. 책의 반응은 뜨거웠고 언론에 인터뷰한 것을 계기로, 전국 백수들과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백수’ 하면 돈 없고 주위에 빌붙기 좋아하는 민폐 캐릭터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와는 달리 만나 보니 유쾌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물질과 지위를 떠나 사람 자체를 볼 수 있는 안목도 얻었다.
2006년 ‘전국백수연대’를 시민 단체로 정식 등록한 후에는 더 다양한 청년 실업 관련 활동을 했다. 때로는 내가 정말 백수 맞나? 싶을 정도로. 각종 자료와 나의 경험들을 토대로, 힘들어하는 백수들의 상담도 해주고, 그들이 잘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주려 노력했다.
백수라서 못 하는 일보다 백수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다. 그건 돈보다는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고 일단 부딪쳐보았기 때문이다. 뜻이 있으면 길은 항상 있는 거 같다. 요즘에는 퇴직 연령이 낮아지며 50대 은퇴 백수들도 늘어나고 있는데,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도 고민하고 있다. 새로운 일자리 모델을 만들고, 사회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단체가 되고 싶다.
백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도전할 것이 너무 많은’ 이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보다 꿈꾸는 백수, 노력하는 백수가 되고, 눈을 낮추는 게 아니라 눈을 맞추면 결국 나는 한발 더 발전하고 있는 백수 아닌 백수가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