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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해도 안 되던 것들이 해결되네요

열등감, 비교 스트레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것들이
해결되네요

김영희 45세. 화장품 영업. 서울시 강북구 쌍문동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25세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9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다가
화장품 영업 일을 처음 시작했다.
애들 돌볼 시간도 있고, 돈도 벌 수 있겠다 싶어서 선택한 일.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 자라고 대학도 나오지 못한 나는 일단 사람들의 메이커 옷차림과 명품 가방 앞에서 기가 죽었다. 특히 전문직 여성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대화 중에 문득문득 외래어나 영어가 나올 때면 못 알아들어 애먹을 때도 많았다. 말문이 막혀 대화가 끊겼고, 자신감은 떨어졌다. 똑똑하고 일 처리 잘하는 동료들과 비교될 때마다 기운은 없어지고, “나는 왜 이리 못났을까” 한숨만 나왔다. 자신감을 갖기 위해 리더십 강의를 들으러 다녔지만, 거기서도 영어는 큰 걸림돌이었다. 칠판 가득 써 있는 영어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적었지만, 내 노트는 텅 비어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았다. 영업 잘한다는 사람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거울을 보고 웃으면서 하루에 열 번씩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쳤다. 하지만 그 무수한 다짐도 내 것이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영업 지역이 지방에서 서울로 옮겨지면서 영업 실적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로에 섰을 때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육성회비를 제일 늦게 내서 선생님께 또 혼나고 있었다. 간식으로 우유를 먹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가게 앞을 지나다가 과자가 먹고 싶어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초등학교 때 기죽어 살았던 사진들이 한참 쏟아져 나왔다.

‘가난하고 예쁘지도 않고 키도 작고…, 난 지지리 복도 없어.’ 불만이 가득하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달란트를 골고루 주신다는데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태어났나, 한탄하던 나를 계속해서 버리던 어느 날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내 모습이 너무나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오직 나만 잘살게 해달라고 울고불고 떼쓰는 꼴이었다. 똑같은 자식들이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마음 써주는 자식과 나만 예뻐해 달라고 떼쓰는 자식들 중 누가 더 예쁠까? 세상 이치가 그러할진대, 오로지 나, 내 가족만 잘살게 해달라고 투정 부린 나는 아무리 봐도 복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영업이 힘든 것도 당연했다. 고객에게 친절했던 것도 오직 돈 한 푼 벌기 위해서일 뿐, 거기에 상대방을 위한 배려는 없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잘못 살아온 게 너무나 창피해서 한동안 울면서 다녔다.

우선 악착같이 돈 벌고 싶은 마음부터 내려놓았다. 매출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으니 훨씬 일이 쉬워졌다. 내 마음이 편안하니, 상대방도 편하게 받아들였다. 고객의 이야기를 잘 못 알아들으면 솔직하게 “제가 잘 모르거든요” 하며 다시 묻는 용기도 생겼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았던 것들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영업 실적도 10배나 올랐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써 버린다. 그래서 정작 자신의 능력은 제대로 발휘 못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긍정적인 마음과 감사함을 배웠고, 진정한 자기 계발이란 진심을 이야기하는 거란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뭐 좋은 일 있나 봐, 일하는 게 아니라 노는 거 같은 표정이야.” 정말 그렇다. 일을 하되 일이 아니라 마치 신나는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아등바등 안 해도 늘 생기가 돋네!

전전긍긍 아등바등 안 해도
늘 생기가 돋네!

양재일 52세. K은행 본점 부서장.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지난 90년대 말 IMF 사태가 준 충격은 컸다.
우리 회사 전체 직원의 30%가 감원되고,
지점에선 많은 동료들이 줄줄이 떠나가게 된 것이다.
떠난 자와 남은 자의 갈림길, 그 속에서 나는 남겨진 자에 속했다.
하지만 남겨진 것에 대한 안도와 감사함 한편으로 회의가 밀려왔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것,
과연 열심히 일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공허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더 이상 여태껏 해온 생활을 반복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달라져야 했다.

 

먼저 급변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실 감각을 키우고 싶었다. 업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영어 공부는 물론 은행 업무와 관련한 전문 자격증 취득에 매진했다. 덕분에 10개 이상의 자격증을 취득했고, 인사 담당관은 “이제 더 딸 자격증이 없겠네요”라고 했다.

아침 8시, 회사에 1등으로 출근했고, 고객의 전화 한 통이면 무조건 달려갔다. 고객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방문을 했다. 토요일, 일요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온 결과, 온종일 내 책상의 전화는 불이 났다. 예금 유치액도 2배 이상 늘어났다. 실적에 자신감이 생겼고, 어느 순간엔 맘만 먹으면 목표 달성액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신바람이 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부하 직원들의 업무 태도가 눈에 점차 거슬렸다. 9시 출근, 6시면 땡~ 퇴근하는 직원들이 못마땅했다. 고객이 찾으면 휴일도 반납하고 언제든지 달려가는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 하나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왜 그리 못하냐”면서 직원들을 꾸짖었고, 직원들의 불만도 커졌다. 내 책상 앞으로 고객들은 줄을 섰지만 직원들과는 손발이 맞지 않아 일이 점점 힘겨워졌다.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직장 생활에 대한 허무함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설사 목표 달성을 하더라도 아무런 보람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바쁘게만 뛰어갈 뿐, 이유도 뜻도 없이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나름 동기 부여를 하면서 의미를 애써 찾아보았지만,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직장 생활이 이런 게 아닌데, 내가 이렇게 다니려고 직장에 들어온 게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내 얼굴이 안되어 보였는지 은행 청원경찰이 내게 마음수련 책자를 건네주었다. 마음을 버릴 수 있다는 문구가 참 맘에 와 닿았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나. 서글프면서도 씁쓸했다. 나이 먹는다는 게 두렵고 불안한 나. ‘갑자기 잘리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남보다 잘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나. 자기밖에 모른다며 면박을 주었던 직원들. 근데 돌아보니 나야말로 나밖에 몰랐다. 고객을 위한다고 휴일도 반납했지만, 결국 나를 위한 거였다. 실적은 곧 내 명예요, 자존심이었다. 목표를 세워 그 기준에 따라오면 잘한 거고, 못 미치면 못한다고 다그쳤던 직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했지만 오직 나만을 위한 최선이었다. 직원들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에 다름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아찔했다. 소의 고삐를 잡고 끌고 가듯 내 잣대에 맞추려고 억지로 끌고 가려 했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구나….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수많은 굴레에 덮어씌어 있었다. 자식도 잘돼야 했고, 동기들한테 창피 안 당하려면 승진도 해야 했다. 퇴직도 마찬가지였다. ‘직장 생활 30년 했다, 지점장이다’ 등 과거의 타이틀을 부여잡고, 낯선 세상에 던져진다는 게 두려웠다. 아등바등 잘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사이 주변 사람들은 이미 깊은 상처를 받고 있었다. 내가 오히려 그들을 힘겹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미안했다.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주위 사람들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내 잣대로 바라본 세상이 불만투성이였다면, 나로부터 벗어나 바라본 세상은 온전히 나를 거두어주는 한없이 따듯한 세상이었다. 하나하나가 다 감사했다. 잘 커주는 아이들, 아내가 정성스레 끓여준 된장국,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 그들이 달리 보였다. 그 자리에 있는 이유와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내 방식대로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게 줄어들었다.

직원들의 의견을 많이 듣고 존중하려 했다. 혹여 할 일을 잊어버린 거 같으면 메시지를 띄워주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제안해주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좀 더 많이 웃으면서 대했을 뿐인데 직원들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해주었다. 그 결과 우리 지점은 고객만족도평가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욕심으로 일을 할 땐 하는 것 없이 힘만 들더니, 지금은 많은 일을 해도 늘 생기가 돋는다.

내가 무수히 그어놓았던 선을 지우니 그 자유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앞으로 다가올 퇴직도 이젠 걱정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내 인생 제2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이제야 제대로 된 자격증을 딴 기분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참되게 살아갈 수 있는, 생애에서 가장 멋진 자격증을 갖는 것이다.

자기 성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지름길

스트레스, 기업이 관리해야

중앙대병원 순환기 내과 이광제 교수는 “미국에서는 피로를 호소하는 직원을 전문 상담사와 연결해 치료까지 지원하는 멘탈 피트니스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며 “사업주가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하나의 질병이라고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례로 종업원 지원 프로그램(EAP)을 도입한 미국 기업 ‘3M’은 종업원의 생산성이 80% 가량 향상되었으며, ‘킴벌리클라크’는 건강 증진 프로그램인 ‘LIVEWELL’을 통해 건강검진, 에너지 재충전, 멘탈 헬스 관리를 실시하여, 결근율 43%, 산업재해 35%를 감소시켰다. 일본 기업 ‘소니’는 ‘Wellness Center(건강 센터)’를 설치하여 정신과 의사를 상근시키고 있으며, ‘캐논’은 보건 담당자가 상담과 스트레스 관리 교육을 연간 80시간씩 받는 등 직원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회사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고, 기업 및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SK텔레콤’은 입사한 지 10년이 지난 사원에게 1~3개월 리프레시 휴가를 주고 있으며, 삼성전자도 올해부터 일반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 정신과 검진을 확대하고, 심리상담사 수를 늘릴 계획이다.

인제대학교 스트레스 연구소 우종민 소장(백병원 신경정신과)은 “업무상 스트레스로 산업재해와 과로사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스트레스를 기업이 나서서 풀어주는 것이 생산성 향상과 위기 탈출의 관건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 고통의 원천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 그것이 스트레스 관리의 출발점”이라고 진단했다.

직장에서 행복을 유지하는 6가지 비결

미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은 미국 컨설팅업체 숀 아처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직장에서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6가지를 제시했다.

1. ‘고마운 일’을 찾아라 : 매일 감사 리스트를 작성한다. 감사할 때 일의 성과도 높아진다.
2. 일하는 틈틈이 재미를 찾아라 : 잠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인터넷에서 재밌는 동영상을 찾아 즐기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된다.
3. 업무 환경을 밝게 꾸며라 : 긍정적인 생각을 유도할 수 있는 사진이나 장식들로 책상을 꾸며보자.
4. ‘걱정 노트’를 만들어라 : 부정적인 느낌을 글로 쓰게 되면 걱정거리가 객관화되면서 그 크기가 반감된다.
5. 인간관계에 투자하라 :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끈끈한 유대 관계는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6. 쉬면서 업무 효율을 높여라 : 90~120분 일하고 5분 쉴 때 업무 효율이 극대화 된다.

병원 봉사 연주자, ‘포유뮤직’의 이주은, 최시애 씨

취재 최창원, 사진 홍성훈

“어머니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였어요. 로비에서 음악 공연하는 걸 보게 되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지쳐 있던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눈물이 나는 겁니다. 나도 음악 전공자인데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저도 꼭 하리라 마음을 먹었지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졸업 후 전문 강사와 연주자로 활동하던 이주은(32)씨에게 그때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는 우선 대학에서 함께 피아노를 전공하고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는 최시애(32)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2009년 3월, 병원 연주 봉사자들의 모임인 ‘포유뮤직(For You Music)’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고, 2009년 4월 1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첫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아해주시는 거예요. 고맙다며 손잡아주시고, 또 오라고 해주시고. 저희가 오히려 진심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지더라고요.”

한 번, 두 번 연주를 진행하는 사이, 점차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저도 악기 연주 가능한데, 함께할 수 있을까요?” 하며 동참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렇게 연주자가 2백여 명으로 늘었고, 앙상블, 관현악, 합주뿐 아니라 성악, 국악, 재즈 등 장르도 다양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 건대병원, 아산병원 등 5개 병원에서 정기 연주를 하고, 요양원 등의 요청이 있으면 방문한다.

“눈물이 나오네요” “덕분에 힘이 났어요”라며 감동하는 사람들, 꼬깃꼬깃 지폐를 건네주시던 할머니, 그 시간만 기다려진다는 환자분들. 그중에서도 음악을 듣고는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는 뇌성마비 아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2009년 5월, 보라매병원에서였다. 누워 있던 아이가 음악에 반응을 보이자, 놀란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나왔고 아이는 연주를 들으며 웃음까지 지었다. 그때부터 음악 연주회는 이 모자에게 큰 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작년 8월 이주은씨는 갑작스럽게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그녀 자신이 환자가 된 것이다.

“수술하러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번엔 제가 환자의 입장에서 음악을 듣게 되었어요. 영화음악, 재즈 같은 친근한 음악들이었는데 정말 눈물이 나도록 힘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항상 더 높은 것만을 좇았구나 싶었어요. 나도 저 사람처럼 유학 가고 싶다 등등 못 이룬 것이 너무 안타깝고, 더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이렇게 제 연주를 즐거워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구요.”

함께 연주를 해왔던 최시애씨도 “항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제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마음이 생겨가는 것 같다”고 한다.

“예전에는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무조건 여행을 갔어요. 그렇게 허전함을 달래고 충전을 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누군가를 위해 연주를 하면 마음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겁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도 더 유심히 보게 되고, 환자들과 어떻게 더 교감할 수 있을까 노력하게 되고 생활에도 활력이 생겼어요.”

정기 연주뿐 아니라 밸런타인데이 콘서트, 화이트데이 콘서트도 기획하는 이들은 앞으로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무료 레슨도 하고 싶단다.

포유뮤직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연주를 다닌다. 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등 5개 병원 정기 연주와 요양원 등의 초대 공연을 한다.

http://cafe.naver.com/musichm

-生きている世界 -?理であるこの世と一つになってこの世に生まれたら


生きている

世界

雲一つなく

晴れ渡った空に、?えきれないほど多くの

星だけが?って輝いている

その遠い昔にも

??しい人?の?史にも

この星?は何も言わずにただあった

??しかった人?は?月に?み?まれてしまったのだなあ

この世にある天?と万物万象も

いつかは?月に?み?まれてしまう

人間の心の世界にある話だ

この世では一切が生きている存在なのだなあ

この世になってみたら

この世と一つになっているものは

すべてがみな生きているのだ

?理であるこの世と一つになってこの世に生まれたら

人間の生そのものが?像である

「人は妄想に生きている」。そんな話を私たちはよく耳にしてきた

また、いつかは救世主が現れて

私たちを救?してくれるという

このような話があるのも人間が正しき世界に生きられずにいるためだ

だから宗?では「心を磨け」

「心を無くせ」と?いているのだ

人間は?際の世界に生きていると思っているが

人間が暮らしている世界とは自分が作った一つの映?フィルムの中である

?際の世界と心の世界が重ね合わされているために?付かずにいるだけなのだ

人は小さい頃から

一つのフィルムを製作し

自分の心の中に持ち

この世を撮影して作ったフィルムの中に暮らしている

試しに、今朝の食事を思い返してみればいい

自分の心の中に、自分が座っていた場所や

一?に食事をした人も、??に撮られて

自分の心の中という??の中にあるではないか

?際の世の中ではなく、自分の心の中という??の中の出?事だったではないか

朝の食事も今日一日の生活も

自分の心のフィルムの中にあるではないか

自分は?際の世の中にいたのではなく

自分の心の中にいたではないか

今この瞬間も後から振り返ってみれば

??の中にあるはずだ

今この瞬間は心とこの世が重なっているために

人は?際の世の中に生きていると錯?しているのである

?際の世の中と一つになってこの世に生きれば

??は一つも無いだろう

人間の心は、??を撮って作られたフィルムであるが

本?の世界の心には??が撮られない

この事?を知らないために

人間は、本?の世界に生まれ出るという救?に?れずにいるのである

この??の世界の中には

苦痛の荷物と生死と善?、生老病死

過去、未?、現在があるが

?理であるこの世と一つとなりこの世に生まれたら

それら一切が無い

永遠不?の生命そのものだ

文と? ウ?ミョン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

위장을 보호해요, 연근 파래전

연근과 파래는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을 예방하고 진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파래는 추운 겨울이 제철이지만 구할 수 없을 때는 파래가루를 활용해도 좋다.
또 새콤달콤하게 무쳐도 좋지만 이렇게 전을 부치면 쫀득쫀득해지며 맛과 향이 더 좋아진다.

재료 준비

연근 1개(큰 것), 파래 1/2컵(한 타래), 녹말·밀가루 각 1큰술씩, 소금·후춧가루·쌀눈유(현미유)·밀가루 조금씩

만들기

① 연근은 껍질을 필러로 깎고 얇게 저며 썬 것 10장을 남기고
② 나머지 연근은 강판에서 간다. 파래는 물속에서 흔들어 씻어 물기를 짠 다음 짧게 썬다.
③ ②의 연근에 파래와 녹말, 밀가루, 소금, 후춧가루를 넣어 섞는다.
④ 팬에 쌀눈유를 두르고 ③을 한 숟가락씩 떠놓은 다음 ①의 얇게 저민 연근의 한쪽 면에 밀가루를 묻혀 위에 올리고 손으로 살짝 눌러 앞뒤로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콤플렉스, 깨어나야 할 꿈일 뿐

콤플렉스, 깨어나야 할 꿈일 뿐

차재성 사진 홍성훈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나름 생긴 건 괜찮았다. 하지만 멀쩡한 겉과 다르게 사람들 앞에서 말이라도 할라 치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 아무것도 아닌 말에 상처받고, 심장은 쿵쿵 뛰고 말꼬리도 쏙 기어들어갔다. 어린 시절,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면 가게 앞에 쭈뼛쭈뼛 서 있다가 그냥 돌아오기 일쑤였다. 가게 주인한테 “이거 주세요” 말하는 것이 왜 그리 힘든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엉뚱한 걸 사오는 일도 많았다. 모심는 날, 엄마를 따라가면 맛있는 못밥을 먹을 수 있는데도 그 길을 차마 따라나서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난 언제나 꾸어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마치 세상과 뚝 떨어진 외딴섬 같았다.

 

그렇게 작아지다 못해 쪼그라지는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준 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우연히 시인 이상의 작품을 본 순간, 마치 ‘부조리’한 내 모습을 발견한 듯 반가울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려, 인간의 모습은 원래 이리 복잡하고 부족한 것. 내가 잘못된 건 아니여.”

그렇게 문학에 취한 나는 대학 같은 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공부를 못해서, 환경이 안 따라줘서라기보다는 필요 없기 때문에 안 가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간혹 “몇 학번이세요?” 하고 물으면 슬그머니 문학 이야기로 얼버무리고 책의 한 구절로 튕겨냈다. 속으로 ‘대학 나와 봤자 별 볼 일 없으면서’ 하며 ‘썩소’를 날렸다. 집에 들어오면 방 안 벽면 가득한 책들이 나를 반긴다. 저 책들은 나의 교양과 지적 수준을 드러내는 것, 저것이면 충분했다. 대학 졸업장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울한 걸까.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대학생들 앞에선 어쩔 수 없이 기가 죽고, 꿈을 꿔도 대학에 떨어지는 꿈을 꾼다. 그런 내가 싫어 매일 술을 마셨다. 하지만 술에서 깨어나 다시 쪼그라든 내 모습을 발견할 때의 참담함이란…. 그야말로 아침에 뜨는 해조차 절망스러웠다. 매일 술을 마시고 엉망진창으로 사는 나를 직장에서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나는 그렇게 믿지 못할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못났다’는 생각이 화석처럼 굳어져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만난 마음수련. 그때가 내 나이 마흔둘이었다.

가짜라고 했을 때 희망이 생겼다

수련을 하며 앨범을 들추듯 내 인생을 살펴보니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학예발표회 때였다. 1인극을 해야 했는데 연습을 제대로 못 해 결국 무대에 섰다가 중간에 도망 나왔던 창피한 기억. ‘아, 그 기억의 사진 때문에 내가 사람들 앞에만 서면 긴장했구나.’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나는 그 기억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무엇 하나 남들보다 잘난 것이 없는 상태에서 택했던 문학과 술. 하지만 그럴수록 가난한 가정환경과 학력, 대인 기피로 인한 콤플렉스의 늪에서 더욱 허우적거렸고 헤어나질 못했다.

문학을 했던 속마음도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인간이야!” 하며 정신세계를 추구한답시고 나는 다른 속물적인 인간들과 다르다며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했다. 결국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에다 아주 못난 놈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면 너무 힘들어서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내가 그보다 한 수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문학을 하면서 냉소적으로 변해간 것도 그 이유였다. “당신도 어딘가 못난 구석이 있을 거야. 당신도 별 볼 일 없네….” 그렇게 단정하고 치부해야 내가 존재할 명분이 생기기에. 나도 세상도 속이고 있었구나, 나는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워 그 모든 마음들을 버리고 비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 차의 헤드라이트를 켜면 환해지듯이, 내 마음에 빛을 비추니 지저분한 부유물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천만다행인 건 그동안 그렇게 살아온 나는 가짜이고 나의 본래는 무한대 우주라는 것! 결국, 콤플렉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나 역시 버리면 되는 거였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것이 꿈처럼 없는 세상이었음을 아는 순간, 희망이 생겼다. 간밤의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꿈이었으면 좋겠습니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김춘수의 ‘꽃’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였다. 세상과 전혀 교감을 못 한 나로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란 시구가 생경할 뿐이었다. 꽃을 봐도 예쁜지 몰랐고, 오히려 “너는 뭐하려고 이 세상에 나왔니?” 하며 못마땅해했다. 그만큼 내 마음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생기 있는 봄과는 겉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봄이 좋고, 봄이 기다려진다. 꽃을 보면 “너는 왜 이리 예쁘게 생겼냐, 반갑다~!”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도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몇 층 가십니까?” 하고 먼저 묻는다.

명절 때면 가족들 만나기가 불편해 직장에서 숙직을 도맡아 하는 일도 이젠 없다. 아직도 가정을 갖지 못한 것이 부모님과 동생들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명절 때면 제일 먼저 찾아뵙고 집안일도 돕는다.

나도 모르게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어느새 나는 세상과 교류하고 있다. 망각의 강을 건넌 듯, 열등감에 주눅 들고 살았던 때가 언제 있었나 싶다.

지금 콤플렉스로 인해 힘드신 분들이 있다면 묻고 싶다. “그것이 꿈이었으면 좋겠습니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콤플렉스라는 악몽에서 깨어나 실제 삶을 누릴 수 있다.

차재성(52) 님은 전북 전주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국민연금공단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대요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대요

박강우 22세. 서울대 산업공학과 2학년

고3 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살이 쪘었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조금만 방심을 하면 살이 쪄버리는 체질인데, 그때는 공부에만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살이 쪄버린 것이다. “너 왜 그렇게 살이 쪘니, 아저씨 같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던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고, 외출할 때는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헬스클럽에 다니며 두 달간 20킬로 정도의 살을 뺐다. 그럼에도 이전에 가졌던 상처들은 그대로 내 속에 있었다. 다시 살이 찔까 봐 불안해서 매일 아침마다 체중을 쟀고 조금만 몸무게가 늘어도 당장 뛰어나가서 운동을 했다.

더 이상 아저씨 같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콤플렉스는 계속되었다.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기에 합격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주변에 다재다능한 친구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진짜 잘하는 애들 앞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좌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누가 농담으로라도 단점을 얘기하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서 더욱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패션 잡지를 보며 연구하고, 멋진 옷을 찾으러 동대문에도 돌아다니고, 신상품을 사는 데 많은 돈을 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게 세팅이 되지 않으면 집 밖에 나설 수가 없었다. 내 차림 중 어디 한구석만 마음에 안 들어도 짜증이 밀려오고 사람을 만나는 데 자신이 없어졌다. 옷을 자주 사도, 언제나 입을 옷은 없었다. 매일 새로운 이미지로 나를 포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학생 마음수련 캠프에 가게 되었다. 수련을 하며 감추려고만 들었던 나의 콤플렉스를 하나하나 꺼내어 볼 수 있었다. 고3 시절 살이 쪘을 때 사람들에게 들었던 충격의 말들, 나를 무시하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 위축되었던 모습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버려갔다.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한순간 우리 모두의 근원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고, 엄청난 변화도 가져왔다. 나 따로 세상 따로일 때는 내가 돋보여야 하기 때문에 힘들었는데, 나라는 틀이 깨지는 순간 나와 세상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고, 모든 게 하나였다. 그 안에 콤플렉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꾸미지 않아도 당당할 수가 있었다. 외모에 대한 강박관념, 다이어트에 대한 부담조차 버리고 나니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스스럼없고 많이 편해졌다.

한번은 친구들에게 나에게는 이런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걸 감추기 위해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되게 차가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냄새가 난다는 둥 하며 공감해주었고 편안해했다. 콤플렉스를 드러내면 무시를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친구는 예전엔 인상이 날카로웠는데, 수련을 하더니 인상이 둥글둥글해지고, 눈빛도 선해졌다고 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인상도 부드럽게 바뀌는구나 싶다.

수련을 하다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짜는 자기가 가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치장을 해서 드러내려고 하지만,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다고. 허울, 허례허식, 허상의 세계 속에서 살던 나는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가짜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가짜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로소 진짜의 세상에서 진짜 내 삶을 사는 기분이다.

비로소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다

비로소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다

송순영 39세. 경기도 안성시 봉산동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파출부, 막노동을 하면서 4남매를 키우셨다. 엄마는 항상 ‘힘들다, 지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고, 그럴 때마다 난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정신 차리고 살자’고. 당시 내 인생의 목표는 돈 많이 벌어서 잘사는 거였다.

 

그러다 스물두 살 때 연애를 하게 되었다. 길을 걷는데 나를 보고 쫓아온 그는 고위직 집안에다 유학도 다녀온 너무나 좋은 조건의 남자였다. 그 앞에 서면 내 속의 깊은 열등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일단, 학벌이라도 따고 싶었다. 당시 직장을 다녔던 나는 어렵사리 야간 전문대학에 진학했고, 5년의 연애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해 보자. 같이 노력하면 잘될 거야.” 서로 잘해보자는 거였지만, 내겐 큰 상처였다. 야간 전문대학도 얼마나 죽을 둥 살 둥 다녔는데…. 그가 야속했다. 인연이 아니다 싶어, 그날로 이별을 고했다.

너무나 괴로운 마음으로 보낸 6개월 후, 우연히 친구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골프장 운영을 하던 남자였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는 그럴싸한 모습에 마음이 기울었고 연애를 시작했다. 처음 남자 친구 집에 인사 간 날, 부모님은 쪽지 한 장을 꺼내시며 ‘며느리의 30가지 조건’을 쭉 읽으셨다. ‘안경 쓴 며느리는 안 된다, 두 부모님 밑에서 자라야 한다…’ 등등 까다로운 조건들이었지만, 이미 큰 상처를 받은 나로서는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누구보다 잘 살 수 있다며 오기로 결혼을 강행했다. 하지만 주변의 우려대로 기막힌 상황이 펼쳐졌다. 남자는 소위 ‘마마보이’에다 부모님께 기대 살며 눈치만 보는 무능력한 남자였다. 결국 5년 만에 이혼을 했고, 실패한 인생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즈음 직장 동료로부터 우연히 마음수련에 대해 들었다. 그는 시골 아저씨 같은, 해맑은 모습이 늘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다. 내 마음도 편안해질 수 있을까….

수련을 하며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지 내 이상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닐 뿐이었다. 열등감과 콤플렉스로 채워진 좁디좁은 마음이었기에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끔찍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수련을 알려준 그 직장 동료는 나를 대신해 혼자 계신 어머니를 살뜰히 돌봐주었고, 덕분에 나는 수련에 정진할 수 있었다.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지나온 상처와 열등감을 버리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마음부터 다스리라고 말해주던 사람.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그가 프러포즈 했을 때,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그 과분한 사랑이 차고 넘쳐서…. 남편은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하지만 나에겐 은인이자 스승 같은 존재다. 그를 만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었고, 참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10년간 이웃에게 나눠준 찐빵 65만 개_ 강봉섭 할아버지

아직은 어두운 새벽 6시. 대전시 중구 대전노인복지관 옆 가건물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강봉섭(80) 할아버지가 찐빵을 만들고 있다.
밀가루, 베이킹파우더, 소금, 이스트, 물로 반죽하고, 앙꼬를 넣어 큰 솥에 10분 정도 쪄내자 따끈따끈한 찐빵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빵은 그날그날 양로원, 요양원 등에 배달이 된다.

취재 정하나, 사진 홍성훈

강봉섭 할아버지가 하루도 빠짐없이 찐빵을 만들어 나눈 것은 2001년 경로당 노인회장직을 맡고서였다. 몸이 불편한 분들을 병원에 데려다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가뜩이나 기운 없는 노인들이 더욱 지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 지켜보다 생각해낸 것이 찐빵이었다. 당시 밀가루 한 포대 가격이 8천 원. 앙꼬까지 계산해도 3만 원 정도면 육칠 백 명에게 빵이라도 나눠줄 수 있겠다 싶으셨단다. 강할아버지는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처음 찐빵을 쪄내어 나눠주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아, 옛날 생각나네.’ ‘배고픈 시절에 먹었던 빵이네’… 작은 찐빵 하나에,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나 같은 늙은이도 뭔가 할 수 있구나 자부심이 들더라고.”

강할아버지는 “만날 자식들이 사오는 것만 받다가 직접 빵을 만들어서 주니까 자꾸 해주고 싶은 의욕이 생기더라”고 한다.

그 후 점점 요양원, 양로원, 어린이 보호센터, 경로당, 파출소 등으로 그 대상이 늘어났다. 한 달에 한두 번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기도 하고, 2007년에는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한 태안으로, 숭례문 화재 사고 후엔 복구 작업 현장으로 큰 솥과 찐빵을 준비해 달려갔다. 이렇게 저렇게 지금까지 나눠준 찐빵만 해도 65만 개나 된다.

“빵을 호호 불면서 먹는 모습을 볼 때의 기쁨은 나밖에 모를 거야. 내가 정성 들여 만든 빵을 맛있게 먹어주니 감사한 거지.”

1932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강봉섭 할아버지는 늘 이웃과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한다. 먹을 것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었고, 언제나 웃음이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찐빵을 나눠줄 때면 그 시절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이 생각 나 가슴 한 켠이 짠해져 온다고 한다.

10년 동안 찐빵을 쪄서 나눠주는 일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한 달에 드는 재료비만 90~110만 원 정도. 처음에는 폐지와 재활용품을 수거해서 충당했지만, 점차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일이었기에 부족한 부분은 늘 저절로 채워졌다.

“신기하게도 비용 걱정을 할 때면 도움을 주는 후원자가 나타나곤 한다”는 할아버지는 “이 일을 하면서 뜻이 있으면 언제나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신다.

요즘엔 찐빵 제조 기술도 나눠주고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성심성의껏 가르쳐주며 “좋은 일을 하며 살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사랑의 찐빵 2호점, 3호점을 냈으면 하는 바람도 내비치셨다.

“나는 무조건 주는 사람이다, 하면 걱정이 없잖아. 욕심을 부리는 순간부터 괴로워지는 거지. 앞으로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한없이 만들어서 나눠주고 싶어.”


하루 평균 200개 정도의 찐빵을 만든다.
포실하게 쌓인 모습만 봐도 모든 피로가 싹 가신다고 하신다.
대한노인회 대전광역시 동구 지회장을 맡고 있는 할아버지는 이곳 직원들 뿐 아니라,
건물의 이웃들, 방문객들에게도 항상 빵을 나누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