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ed for ""

대단한 장사는 아니지만 베풀면서 살자던 시어머니 말씀 따라요

세상 물가 다 올라도 국밥 한 그릇에 2,000원

서울 종로구 낙원동 권영희씨네 국밥집

취재 문진정 사진 홍성훈

치솟는 물가. 커피 한잔 값도 5천 원이 훌쩍 넘는 요즘, 단돈 2천 원에 따뜻한 한 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세상 물가가 다 올라도 여기는 안 오른다’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 국밥집 ‘소문난집 추어탕’이다. 간판은 ‘추어탕’이지만 지금은 소뼈와 우거지로 푹 고아낸 국물에 손두부를 넣어 끓인 ‘우거지얼큰탕’ 한 가지만 팔고 있다.

“추어탕은 없고, 우거지얼큰탕~ 2천 원이에요. 맛있어요.”

매일 새벽 4시에 문 열기, 하루 종일 손님에게 해장국 떠드리기 40년째라는 권영희(65)씨가 바로 이집 주인. 허술한 건물에 싼값이라고 맛까지 허투루 본다면 섭섭한 말씀이다. 예술가, 탑골공원에 바람 쐬러 나오신 어르신들,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친구와 자녀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 너무 싼 가격에 반신반의하며 들어온 손님들까지, 담백하고 얼큰한 국물 맛에 감탄하기 때문이다. 워낙 오랜 단골이 많아 20년 된 손님 정도는 ‘얼마 안 됐다’며 겸손해지게 만드는 곳이니, 새내기 손님들은 그야말로 엄지를 치켜들 뿐이다.

“국물이 얼큰한 게 진짜 맛있어요. 가격도 고맙고(웃음). 밥은 먹어야겠고, 돈은 별로 없고, 그럴 때 이렇게 한 끼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고마워요. 특히 겨울엔 우리같이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덜덜 떨거든요. 그럴 때 여기 와서 우거지탕 한 그릇 먹으면 속이 뜨듯하면서 살 것 같죠.” (퀵서비스 기사 이승용, 56세)

권영희씨의 식당 이야기를 듣자면 시어머니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57년 전, 한국 전쟁 때 피난을 온 시어머니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추어탕 집을 시작한 것.

시집오자마자 어머니를 도와야 했던 권영희씨에게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식당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한다. 당시 추어탕 가격도 400원으로 다른 식당의 절반 수준이었다. 배고픈 시절을 겪으셨던 시어머니는 ‘우리가 비록 대단한 장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웃에게 베풀면서 살자,그게 다 훗날에 복이 된다’며싼 가격을 유지하셨다. 시어머니에게 가게를 물려받은 권영희씨는 어머니의 그 뜻까지도 이어받고자 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이 물가가 계속 오르자, 권영희씨는 추어탕에서 우거지얼큰탕으로 메뉴를 바꾸었다. 비싼 미꾸라지 대신 새벽같이 도매시장에 직접 가서 구할 수 있는 걸로 국밥을 만들면 단가를 낮출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격 올리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어르신들, 어려운 분들이 많이 오시니까.”

미안해서 못 먹겠다며 가격 좀 올리라는 손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년 동안 천오백 원을 유지했다. 그러다 작년 가을 배추 한 포기가 만 원을 넘으면서 어쩔 수 없이 지금의 2천 원을 받게 되었다며 미안해한다. 대신 맛있는 국밥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권영희씨. 그녀에게는 무섭게 오르는 물가도, 나의 수고에 대한 대가나 이익도 아랑곳없어 보인다.

그 마음 안다는 듯 손님들은 직원을 자청한다. 인건비라도 줄이라며 직접 국밥을 나르고, 휴지도 메뉴판도 알아서 주고받는다.

“에구, 그러지 말라니까 그러네. 갖다 준다니까.” “됐다고요~ 나도 손 있다고요~”

식당 안엔 미소가 번지고, 권영희씨의 국밥 푸는 손은 더욱 바빠진다.

“내가 만든 음식, 맛있게 먹어주고 팔아주니, 내가 더 고마워해야 되는데 손님들이 나보다 더 고마워하니까 그게 보람이죠. 언제까지 할지는 나도 모르지. 힘닿는 데까지 해야죠.”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8)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8)

효녀 심청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지만 심성 곱게 자란 심청이는,

지극정성으로 앞 못 보는 아버지를 부양합니다.

그러다가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도 있다는 말에,

공양미 삼백 석을 받는 대가로 뱃사람들의 제물이 되기로 하지요.

짙푸른 바닷물 앞에 선 심청이는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아버지 어두운 눈 밝게 하시어 이 세상을 보게 하소서.”

하고 하늘을 향해 간절히 빌고는 인당수에 몸을 던집니다.

그리고….

심청이의 크나큰 효심에 감동한 용왕님은 심청이를

다시 살려주라 하고,

임금님의 눈에 뜨인 심청이는 황후가 됩니다.

어질고 아름다운 심황후가 바로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된 심봉사는

너무나도 벅찬 기쁨과 환희에 찬 나머지 기적처럼 두 눈을 뜨게 되지요.

작가도 알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우리의 이야기.

원래 심청이 이야기를 쓴 이가 하고픈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다면,

지금까지의 나 자신은 다 버려라. 그것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하는 참된 길이다.”

과연 나는 돈을 잘 쓰고 있는가?

돈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2)

정리 문진정

우리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 굳게 믿으며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돈벌이에 소모한다. 그리고 ‘친구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으니까’ 등의 정신적인 가치를 핑계 삼아 무분별한 소비를 한다. 그러나 돈에 대한 나의 감정과 경험들을 되돌아보면 결코 돈이 개인의 행복이나 진실한 인간관계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돈을 버느라 하루하루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기 전에,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얼마의 돈과 맞바꾸고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왜 돈을 쓰고, 어떤 소비에 만족하며, 얼마나 낭비하고 있는지’ 소비 실태를 종이 위에 낱낱이 꺼내 보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눈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돈이 아쉽고 쪼들렸던 생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될 것이다.

* 실제로 내가 버는 돈은 얼마일까?

 대부분의 직장인은 월급이 곧 버는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가는 돈’을 월급에서 빼야만 실제로 내 손에 들어오는 수입이 된다.

① 직장에 다니느라 필요한 모든 것(출퇴근, 정장 구입, 점심 식사, 스트레스 해소, 휴가, 병원 치료, 자녀 보육, 파출부 고용 등)에 들어가는 비용과 모든 시간을 계산한다.

② 비용은 월급에서 제하고, 시간은 근무 시간에 더한 다음, 계산된 총비용을 총시간으로 나누면 시간당 실제로 버는 돈을 알 수 있다. → 자녀 보육비, 점심 식사비, 퇴근 후 술자리 비용 등을 제하고 나면 실제 수중에 들어오는 수입은 월급보다 훨씬 적다.

* 돈이 가치 있게 쓰이고 있을까?  

우리가 쓰는 돈은 곧 삶의 에너지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돈을 버는 데 쓰기 때문이다.

돈을 수명으로 바꿔 보면 그 가치가 달라진다.

① 자신만의 소비 패턴을 알아낸 후 주거비, 식비, 피복비, 교통비, 의료비 등의 항목별로 나누고 항목마다 하위 범주를 세세하게 구분한다(예_식비 : 집에서, 회사에서, 간식, 외식, 술, 커피, 건강식품 등).

② 세부 항목별 지출 금액을 ‘시간당 실제 임금’으로 나누어 시간으로 환산한다. 예를 들어 시간당 실제 임금이 4천 원인 사람이 퇴근 후 맥주로 스트레스를 푸는 데 월급 중 20만 원을 사용한다면 한 달에 50시간은 술을 먹기 위해 인생을 소모하는 셈이다. → 어떤 물건을 사기 위해서 실제 몇 시간 동안 일을 했는지, 그 시간의 인생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소비였는지 돌아본다.

* 삶을 변화시키는 세 가지 질문

지출 세부 항목마다 다음의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 소비 습관을 바꿀 수 있다.

① 내가 투자한 에너지와 시간에 걸맞은 만족과 가치를 얻었는가? ② 내 가치와 인생의 목적에 부합하는가? ③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면, 과연 그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가?

돈을 주지 않아도 기꺼이 시간을 투자할 만큼 만족스럽고, 인생의 목적에 맞는 소비였다면, ‘+’를, 그렇지 않다면 ‘-’를  표시한다. → 매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다 보면 나의 쇼핑 습관이 얼마나 충동적이며 중독성 있는지 알게 된다. 습관적으로 혹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지출을 한눈에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비가 자동으로 줄어든다.

나의 소비를 철저히 분석하면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많은 돈이 아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순간 마음에서 큰 만족감이 생길 것이다. 모든 물건을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기고 내 것을 이웃과 나누는 기쁨도 알게 된다. 그때부터 돈은 예전의 돈이 아니다. 그동안 돈을 벌고, 빚을 걱정하느라 소모했던 에너지를 가치 있게 사용할 방법을 찾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가치와 꿈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참고 도서  <돈 사용설명서>  비키 로빈 ·조 도밍후에즈 · 모니크 틸포드 / 도솔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어요

국지혜 25세. 직장인.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착한 아이로 통했다. 친구들은 뭐든 부탁을 해왔다. 하나둘 들어주다 보면 숙제도 조별 과제도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아끼는 옷이나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빌려줬다가 망가져서 돌아온 물건 때문에 부모님께 혼도 났다. ‘난 못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힘들었다.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마음수련을 하면서 초등학교 시절의 사건이 떠올랐다. 단짝 친구와 나 사이에 새로운 친구가 등장하면서 나만의 솔메이트를 빼앗겼던 일. 나는 이제 누구랑 놀고 버스에서는 누구랑 앉나…. 어린 마음에 한참 동안 울며 힘들어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몇 년 후 그 단짝 친구는 메신저로 사과를 했고 오해는 풀렸지만, 그때의 상처와 열등감은 마음에 그대로 남았다. 혼자가 된다는 것이 두려웠고 친구를 잃을까 봐 불안했다. ‘남을 위한답시고 베풀었던 호의가 친구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한 일이었구나.’ 내가 생각했던 바름, 예의, 배려의 기준과 틀을 버려나갔다. 친구를 잃었다는 상처도 두려움도 다 버리고 나니 인간관계에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지혜롭게 부탁을 거절하는 방법도 안다. 그것은 스스로 투명해지는 것이다. 도와주고 싶지만 못 하는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하면, 친구도 이해를 해주고 나도 마음에 앙금이 없으니 편안하다. 예전에는 겉으로만 웃었다면 지금은 마음이 자유롭게 웃는다. 아무런 바람 없이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배려인 것 같다.

수면제, 소화제와 헤어지다

이정아 41세. 직장인. 서울시 서초구 서초2동

99년도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던 나는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그때쯤부터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버거웠고 “장녀도 아닌데 왜 집안 살림을 떠맡아야 하느냐”며 가족에 대한 원망과 화가 끓어올랐다. 잠을 푹 잘 수가 없으니 두통이 심했다.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위장이 바늘로 찌르는 것같이 아팠다. 어쩔 수 없이 진통제와 소화제를 매일 들고 다녔다. 몸이 아프니 짜증도 많이 났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학생 수가 줄면 줄어서, 늘면 늘어서 스트레스였다. 불면증 약을 먹어보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운동을 하면 잠이 잘 온다고 해서 헬스클럽에 등록하기도 하고, 새벽까지 동대문 쇼핑센터와 새벽 시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수면 사이클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7년을 버티다가 너무나 힘이 들어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지인으로부터 마음수련을 소개받은 나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경제적 압박감과 불안을 버려나갔다. 자리에 누우면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는데, 버릴수록 그런 현상이 점점 없어졌다. 부모님을 떠올려보니 자식을 위해 평생 헌신하신 것밖에 없었다. 잠깐 돈 좀 번다며 그렇게 유세를 떨었다니…. 너무도 부끄러웠다. 한 달쯤이 지나자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잠이 오기 시작했다. 두 달째부터는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다. 예민하던 성격이 부드러워지고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규칙적으로 아침 식사를 하니 위도 튼튼해졌다. 1년 전부터는 회사를 다니는데, 하루 종일 일을 하지만 숙면을 취해서인지 활력 있어 보인다, 부지런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무기력했던 나를 건강한 아침형 인간으로 만들어준 신기한 빼기 방법. 마음을 버릴수록 빼기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신경을 안정시켜줘요, 돼지고기 달래무침

돼지고기를 데쳐 채소와 무치는 요리는 되도록 얇게 저민 고기를 사용합니다.
샤브샤브용으로 얇게 썰어진 것을 구입하거나 즉석에서 냉동 고기를 얇게 썰어달라고 주문합니다.
보통은 삼겹살이 일반적이나 간혹 앞다리 살이나 뒷다리 살도 얇게 썰어줄 때가 있습니다.
달래는 비타민C와 칼슘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효능이 있어 잠이 잘 오게 합니다.

이양지 자연요리 연구가

재료 준비

돼지고기(앞다리 살) 200g, 달래 100g, 홍고추 1/2개, 상추 7장, 김(김밥용) 1장, 무침 장(고춧가루 1.5큰술, 설탕 0.5큰술, 간장 3.5큰술, 생강즙 1작은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레몬즙 1작은술, 참기름/통깨 조금씩)

만들기

① 돼지고기는 끓는 물에 한 장씩 흩어서 넣어 삶아 체에 밭쳐 물기를 빼면서 식힌다.
② 달래는 머리가 굵은 것은 반으로 갈라 3~4cm 길이로 썬다.
③ 홍고추는 씨를 빼고 얇게 채를 썰고 상추는 한입 크기로 뜯는다. 김은 잘게 찢는다.
④ 볼에 무침 장 재료를 넣어 섞고 ①,②,③을 전부 넣어 살살 버무려낸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万象が生まれた理由と目的は -生きて?理となってこそ天?に行ける


万象が生まれた理由と目的は

?っ?な空は、今も昔も?わることなくただあるなあ

その?空は、人間が暮らす地球にも万象万物にも

ない所がないなあ

永遠の前にもあり、永遠の後にもあるのは

本?である宇宙以前の宇宙だ

夜が明けたら空だけがあるように

この天地が無くなったら天の本精神だけが?る

その精神は物質ではなく、物質が生まれる以前から

自ら存在する精と神なのだ

一つの存在だが、精と神があり

何も無い中に神が存在し

何も無いそのものが天地の母であり

神が万象の心であり万象の意識だ

天地にあるものはこの存在から生まれ出たものである

この存在は、始まりの以前にも存在し

始まりの以後にも自ら存在する全知全能なる

神????なのだ

生きている?理の存在であり、生きている本物の存在である

自ら完全であり、エネルギ?が完全なる本物である

エネルギ?と神が一つだから不足が無く

人間の?像の?と心が

この存在の?と心、すなわち

?理のエネルギ?と神として復活すれば

死ぬことがなくなり、この?で永生不死の神として生きられるだろう

この?はこれそのものがエネルギ?であり

ありのままに自ら存在する。万象が生まれた理由と目的は

この存在の?と心に生まれ?わり

永遠に生きることにある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

生きて?理となってこそ天?に行ける

一般に宗?を信じている人?は、自分が死んだら天極?に行けるものと思い、

また、?事を?いた者は地獄に落ちると考える。

しかし、天極?はどこにあり、地獄はどこにあるのかを知っている者はいない。

簡?に言えば、天?とは、“?”である?理が生きる?であり、地獄とは、?であり妄想の、?在しない?である。

自分が人としてこの世に生まれたことは奇跡の中の奇跡だ。

自分の祖先から、また自分の?親から、その日、その時に、?億個の精子の中から、

自分につながる精子が卵子に結びついたことはまさに奇跡ではないか。

しかし、自分が奇跡的に生を授かったのは、この地に生まれ、相?の?命を送って死ぬためではないはずだ。

永遠に生きる方法は間違いなくある。人が永遠に生きることは、?理に生まれ?わってこそ?現する。

?理とは本?であり、本?にならなければ生きるすべはない。

生きている時に?理となり、生きている時に天?に生まれていない者が天?に行くというのは道理に合わない話ではないか。

生きている時に、完成そのものである?理に人間がなることは、?である自分自身を消し去ってこそ果たされる。

?理とはこの世であり、?とは自分である。

だから、自分を?し?くせば、消し?くせば、永遠不?の?理が現れることだろう。

生きている時に?理に生まれ?わった者のみが?理だ。その者は、?理の?である天極?に永遠に生きるだろう。

?として死んだら?に終わるだけであり、?とは存在しないものだ。

文と? ウ?ミョン

봄의 싱그러움이 와락~ 양골담초

 

 
녹음이 시작되는 봄의 한가운데,
개나리가 지고 난 후 더 찬란하게 샛노란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양골담초(유통명 : 애니시다)입니다.
선명한 노란색에 잘 어울리는 시원하고 상큼한 향기~
진정 봄이 왔구나, 와락 달려드는 봄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어요.
시원하게 뻗은 꽃줄기, 인심 좋게 피어나는 풍성한 꽃들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뒤숭숭하고 우울한 기분도 말끔히 날아가 버립니다.
실내에서 키워도 예쁘지만 마당 있는 집에 울타리로 심어도 좋아요.
꽃이 지면 가지치기를 해주세요.
금세 잎이 자라나서 귀여운 관상용 화분이 된답니다.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햇빛
직사광선 또는 그에 가까운 밝은 햇빛을 좋아해요.
꽃이 피지 않는다면 햇빛이 모자란다는 증거.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마르면 한 번에 흠뻑 주세요.
꽃이 지고 나면 조금 건조하게 관리하세요.

번식
목질화된 가지를 골라 꺾꽂이하세요.

체지방이 쌓이는 걸 막아줘요, 한식 스타일 스파게티 메밀국수볶음

이탈리아 요리가 건강식으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질 좋은 올리브유와 신선한 제철 채소, 어패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파게티의 면은 대부분 수입한 것이다.
탱글탱글하게 삶은 스파게티 면을 먹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건강을 생각해서 하얀 밀가루로 만든 수입 면이 아니라
우리 식의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양지 자연요리 연구가

재료 준비

메밀국수(건면) 160g, 청경채 100g, 당근 1/4개, 맛타리버섯 1팩, 홍고추 1개, 바지락 1봉지, 간장 1큰술, 청주 2큰술, 다진 마늘 0.5큰술, 소금/후춧가루/올리브유 조금씩

만들기

① 메밀국수를 제시된 시간대로 삶아 냉수에 헹구어 건져 체에 밭쳐 물기를 뺀다.

② 청경채는 3~4cm 길이로 썰고 당근도 같은 길이의 골패 모양으로 썬다. 맛타리버섯은 가닥가닥 손으로 뜯는다. 홍고추는 얇게 어슷 썰고, 바지락은 씻어서 체에 밭친다.

③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다진 마늘과 홍고추, 당근을 넣어 볶다가 당근에 기름이 돌면 청경채와 맛타리버섯, 바지락을 넣어 같이 볶는다.

④ ③에 간장과 청주를 넣어주고 물을 1/4컵 정도 부어주어 촉촉하게 한 다음 메밀국수를 넣어 한데 어우러지도록 볶고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을 한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마음수련으로 달라진 우리 부부, 이제 한 곳을 향해 갑니다.

김지영 45세. 서울 관악구 서원동

이마와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과 무표정한 얼굴….
어느 때부터인가 거울을 마주하는 게 싫었습니다.
무뚝뚝해지고 강퍅해지는 내 모습을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나이 들수록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억센 아줌마일 뿐이었습니다.

20년 전, 결혼했습니다. 독신으로 살고 싶은 마음도 접게 한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시작한 결혼 생활. 자유를 포기한 만큼 가정을 일구며 더 큰 걸 얻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참고 인내해야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내 삶은 온데간데없어진 것 같았고, 직장 일로 바쁜 남편을 볼 때면 ‘나를 잊어버렸구나…’하는 생각에 외로웠습니다.

어느 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을 아빠한테 맡긴 채 떠난 하루 동안의 기차 여행.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부산의 광안리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발 디딘 곳만 달라졌을 뿐 내 마음은 그대로였으니까요. 돌아가면서도 마음은 집안 걱정으로 가득했고, 더욱 우울해졌습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근심은 더해졌습니다. 채권자들에게 시달리기도 하고, 생활비 없이 지내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뒷바라지 못해주는 게 미안했고, 경쟁 사회에서 뒤처질까 불안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나날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남편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칠 때면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러냐”며 아이들을 닦달했습니다. 큰아이가 “엄마, 왜 그래~” 하며 울부짖었고, 나는 멈칫했습니다. ‘정말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그것도 순간뿐 어찌할 수 없이 반복되는 상황들. 마치 내 마음은 촘촘한 체가 되어버린 듯 남편이나 아이들의 모습, 말 한마디도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엄마가 없는 게 행복해” 하던 아이의 상처 어린 말들, 그 말을 들은 게 억울해서 또다시 남편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집안은 총성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논산에 있다는 마음수련 교육원으로 떠났습니다. 평소에는 생각해볼 수도 없는 한 달간의 긴 여행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는 뭔가 해결되지 못하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절박한 만큼 집중해서 수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니 우리 부부는 한 공간에 있어도, 한순간도 같이 산 적이 없었더군요. 나는 과거에 살고, 남편은 미래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각자의 기나긴 평행선을 향해 달려갈 뿐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연애 시절 남편이 나에게 보여줬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달라진 남편을 보며 외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반면, 남편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지나고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들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교차점은 없었습니다. 남편만 보면 원망스럽고 불안하고, 남편 역시 믿어주지 않는 아내를 답답해했습니다.

내게 가족은 나의 바람과 기대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참으로 가족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을 때…. 눈물이 쏟아졌고, 그 순간 소외된 엄마, 소외된 주부, 소외된 아내라는 우울한 마음도 함께 녹아내렸습니다.

내 한과 내 욕심과 내 집착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향해 꽁꽁 묶어놨던 줄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자, 비로소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 준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커준 아이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거센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내 마음도 점차 잔잔해지고,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남편도 함께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고, 우리 부부는 이제야 같이 사는 기분입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당신 덕분에 마음공부도 하고 이렇게 한마음으로 살게 돼서 너무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참 고마웠습니다. 아이가 무릎 위에 누워 살갑게 얼굴을 비비고,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반갑게 맞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 일상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비운 만큼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거울을 봅니다. 40대 중반의 한 아줌마가 활짝 웃습니다.
세월에 따라 저절로 생겨나는 주름도 예쁘게만 보입니다.
부족하다고 슬프지도, 넘친다고 자랑할 것도 없이
주어진 조건과 세상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나는 행복한 엄마, 아내입니다.

육아 스트레스, 시원하게 날렸어요

한순애 41세.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여덟 살 남자 아이와 다섯 살 여자 아이를 둔 결혼 8년 차 엄마다.
하루하루가 아이들의 소소한 다툼으로 시끄럽다.
장난감 하나를 두고 서로 가지고 놀겠다고 싸우기라도 하면 남편은 항상
울고 있는 작은아이 편을 들고, 큰아이는 서럽게 운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아프다. 아이들에게서 예전의 내 모습이 비춰질 때마다,
혹시 나처럼 상처가 남을까 봐 늘 불안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다. 어부이신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시는 편이라 어머니와 자주 다투시곤 하셨다. 8남매를 키우느라 돈 때문에도 자주 싸우셨다. 내가 괜히 태어나서 더 힘들게 해드리는가 싶어, 눈치 보며 꾹꾹 참으며 살았다.

부모님께 학용품 사달라는 얘기를 제대로 못 하고 등록금이 나와도 말을 못 해 맨 나중에 내곤 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직장 상사들의 눈치를 많이 보다 보니 오래 일하기가 힘들었다.

결혼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참고 눈치 봤던 마음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육아에서 나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돈 쓸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어린 시절 불우하고 어두웠던 가정 환경이 떠올랐고,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힘들 때 아이들이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면,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감정이 격해지면 아이를 때렸다. 그리고 나서 잠든 아이를 보면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아이가 놀다가 실수해서 값비싼 물건이라도 깨면 놀란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기보다 소리부터 질렀다. 머리론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많은 부분들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행동들이 되물림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죄책감과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막막했고 희망이라곤 없었다. 이런 부모의 성격과 마음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기에 더 끔찍했다.

그래서, 마음수련을 결심했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한테 물질적으로 장난감 하나를 더 사주는 것보다 상처 주지 않고, 그늘 없는 밝은 마음을 물려주고 싶었다. 과거가 지금 현재의 모습이고, 현재가 미래라고 생각하니, 나부터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수련을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쉰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들과 마음속의 짐들을 지울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었다. 설움과 한숨이 눈물과 함께 빠져나갔다.

열등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상처들이 하나하나 걷어져 나갔다. 열등감과 불안함, 자책이 사라진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엄마가 다시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고 장난감 하나를 두고 싸우고 있다. 얼마나 아이들다운가. 나는 더 이상 슬픈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웃으며 투정을 받아주고 보듬어준다. 어깨를 짓누르던, 아이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도 사라졌다. 아이들을 세상에 내려놓을 줄도 알고 마음 놓고 바라보는 여유가 생겼다.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것은 선생님이 가르쳐주고, 친구들과 만나며 배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짐이 아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상처를 치유해주고 함께 성장해가는 고마운 존재, 세상의 일부분이었다.

내가 밝아지니, 아이들의 표정도 더 밝아졌다. 아이들이 봄 새싹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인다. 딸아이는 특히 나를 닮아 예민하고 고집이 센 편이었는데, 지금은 엄마처럼 많이 밝아지고 두리뭉실 놀기도 잘한다.

“예쁜 우리 아이들 대현이 민서야,
미안한 게 많은 부족한 엄마한테 엄마라고 불러줘서 고맙다.
엄마가 더 많이 노력할게.”

겨우내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여니 봄 햇살이 맘껏 쏟아져 들어온다. 내 마음에도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은 가고 꽃 피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새봄이 찾아왔다. 나에게도 희망이 보인다.

엄마 스트레스를 풀어드리는 우리가 진짜 ‘엄친아’

집안일을 도와드려요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집안에서 하는 일은 어렵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6살 때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설거지를 못 하신 걸 보았다. 내가 재밌을 줄 알고 했는데 냄비는 너무 무겁고, 허리는 너무 아팠다. 그때부터 설거지가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 9살 때 손님이 오셔서 엄마를 도와 하루 종일 요리를 해보았다. 그때도 요리는 재밌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그때서야 엄마들이 하는 집안일이 보통 일이 아니란 걸 알았다. 엄마가 팔이 아프셔서 나는 지금도 엄마를 도와 쌀 씻기, 음식물 쓰레기 갖다 버리기, 청소기 돌리기, 빨래 널기, 바닥 닦기 등을 도와드린다. 그런데 가끔 엄마가 너무 많은 일을 시키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난다. 그래도 그 일을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깐 엄마들은 아프셔도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앞으로도 난 엄마가 시키시는 심부름을 날 보살펴주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은 마음으로 할 것이다.

신미수 13세. 서울 월촌초등학교 6학년

따듯하게 안아드려요

엄마가 직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시다 퇴근해서 집에 오시면 표정이 어둡고 힘들어 보일 때가 있다. 바로 침대에 쓰러져 주무실 때면 안쓰럽기도 하다. 어릴 때 엄마가 따듯하게 안아주었던 게 좋아서인지 몰라도, 나도 모르게 엄마가 집에 오면 두 팔을 벌려 안는다. “엄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빨리 주무세요”란 말과 함께. 가끔 다 큰 자식이 안긴다며 “수염이 까칠하다, 저리 가~” 하지만, 좋아하시는 게 분명하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로하는 나만의 응원가인 셈이다. 엄마의 밝은 미소를 보면 나도 힘이 나는 것 같다.

윤상혁 19세. 서울 현대고등학교 3학년

동생을 돌봐줘요

엄마가 꽃 가게를 하시다 보니 밤늦게 오실 때가 많다. 엄마가 없어서 동생과 밥 차려 먹고 설거지할 때마다 힘들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이해가 갔다. 엄마가 이렇게 힘드니 나한테 짜증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엔 내가 미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엄마가 덜 힘들게 도와드리고 싶어서 내가 동생을 돌보기 시작했다. 동생과 놀아주고, 한글을 가르쳐주고, 씻겨주기도 한다. 동생이 방을 어질러 놓을 때면 “엄마가 지금까지 너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셨는데 이렇게 하면 어떡해” 하며 오빠로서 충고도 한다.^^ 우리가 집안을 깨끗이 해놓아서, 엄마가 집에 들어오실 때 밝은 표정을 지으시면 행복하다.

송영철 13세. 제주도 서귀북초등학교 6학년

엄마랑 데이트해요

3년 전부터 엄마가 할아버지의 병 수발을 하게 되었다. 매끼 할아버지의 식사를 챙겨드려야 해서 밖에도 잘 못 나가신다. 옛날엔 그런 엄마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아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서 마음이 아파왔다. 그동안 우리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셨고 이젠 자식들이 다 컸으니 친구도 만나고 여행도 다니시면 좋으실 텐데, 오히려 우리를 키우느라 힘들었던 때로 되돌아간 거 같아 맘이 아프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기분전환 겸해서 엄마와 영화나 연극 공연을 보러 간다. 하루라도 집안일에서 해방시켜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가 즐겁게 보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 기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왜 진작 해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죄송한 마음이 든다. 서로 공연을 본 소감을 얘기하다 보면 엄마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도 더 잘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이보희  29세. 회사원.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

 

‘수고했어’ 한마디가 아내를 행복하게 합니다

김종신 41세.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주부 역할을 자청한 남자, 남편들에게 고함

나는 전업주부이다. 공무원인 아내가 직장을 계속 다니기로 하며 가장 역할을 떠맡았다. 5살 된 딸을 키우고 가정 일을 하며, 과외를 한다. 이런 생활이 만 2년을 넘어갔다. 전임강사였던 시절 아내와 나는 평일 한 끼 식사도 같이 하기 힘든 상태였다. 아내가 퇴근하면 난 일을 하러 나가야 했고, 아내가 출근할 때 난 잠에 취해 있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고 아내의 1년 휴직 기간이 끝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바로 육아 문제였다. 아이를 할머니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돌도 안 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안정적인 아내가 직장 생활을 계속하고 불안정한 직장인 학원 강사였던 내가 전업주부를 하기로 했다.

집안일은 작은 일의 연속이지만 그것이 주는 피곤함과 스트레스는 주부라면 다 알 것이다. 아침 준비 후 청소하고, 점심 준비하고 빨래하고, 아이와 놀고, 저녁 준비하고 청소하고…. 조금 과장하면 아내가 퇴근해서 아이와 놀아주기 전에는 쉴 틈이 없다. 나름대로 건강한 편인 내가 이렇게 힘들다면 여자인 주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초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기 시간이 없다는 것,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작아져간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존재감을 회복하기 위한 사회생활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좋지 않을까 싶다.

세상의 남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내 입장에서 아내를 보고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오늘도 아내는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고,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하루 종일 집에서 힘들었을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줄 남편을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 소박한 바람을 밖에서 힘들게 일하다 왔다는, 돈 벌고 왔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뭉개지 않았으면 한다. 남편이 먼저 “집안일하느라 오늘 수고했어요”라고 따뜻하게 한마디 건네고 안아주자. 아빠를 기다렸을 아이들과 진심으로 30분이라도 놀자. 소파에 누워 TV에만 시선을 맞추지 말고 말이다.

직장 일이 힘든 것을 안다. 그러나 집안일도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자신만큼 어쩌면 자신보다 힘들었을 아내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애정 어린 한마디 잊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편으로, 가장 행복한 아내와 자식과 함께, 더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농촌과 도시를 잇는 착한 브로커, ‘빛트인’의 정천식씨

‘배가 저온 창고에서 상해갑니다. 차라리 좋은 일에 쓰일 방법은 없을까요?’

작년 5월, 트위터에 올라온 어느 농민의 글이다. 이 글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번져나갔고 결국 한 청년의 눈에 들어왔다. 청년은 배의 활용 방법을 인터넷으로 공모했고, 충남 아산의 한 마을에서 잼을 만들 수 있다는 답변을 받게 된다. 결국 쓰레기가 될 뻔했던 배들은 소셜 네트워크와 청년의 노력으로 배 잼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태풍이나 구제역처럼 갑작스런 재해가 발생하면 판매할 시기를 놓치는 농산물이 많이 생겨요. 먹는 데 문제가 없어도 외모 때문에 제값을 못 받는 ‘못난이 농산물’도 생기고요. 그런 농산물을 대신 팔아주는 착한 중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경희대 3학년에 재학 중인 정천식씨는 청년 기업 ‘빛트인’의 대표다.

‘빛트인(Between)’은 작거나 못생겨서, 혹은 판로가 없어져서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하는 농산물을 도시의 소비자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위탁 판매하는 청년 기업. 농촌과 도시에 희망의 빛을 틔운다고 해서 ‘빛트인’으로 이름 붙였다 한다.

고등학교 때 조리를 전공했던 정천식씨는 작년 3월 박원순씨의 ‘희망제작소’에서 진행한 희망별동대 청년 프로젝트 중 친환경 먹을거리 분야에 참여를 시작했었다. 그러던 차 처분 못한 배 때문에 고민하는 농민의 글을 보았고 배 잼 만드는 일까지 적극 도왔다.

그것은 평소 정천식씨가 생각하던 것들이기도 했다.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처치 곤란, 한숨 덩어리 취급을 받으며 버려져야 하는 농산물들에 대한 재활용 말이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동료도 생겼다. 일본에서 1년간 농사를 체험하며 환경 문제를 고민해왔다는 경희대 4학년 김주영씨가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며 합류한 것.

처음엔 돈도 없고 경험도 부족한 대학생들이 농산물 유통 사업을 현실화할 수 있을까, 단순한 봉사 활동 아닐까, 부정적인 의견도 많았다 한다. 하지만 이들은 직접 농촌 현장을 체험하고 농산물 시장, 일본의 유통 시장까지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고, 작년 5월엔 ‘배 잼 판매 프로젝트’, 7월에는 ‘유기농 단호박 판매 프로젝트’를 실현해 나갔다.

그들은 신세대답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를 충분히 활용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SNS의 특성 때문에, 큰 비용 없이 사업의 아이디어 공모와 홍보, 판매가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작년 9월, 추석을 앞두고 태풍 ‘곤파스’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도 이들은 농촌으로 달려갔다. ‘빛트인’은 그중 한 농가의 흠집 사과를 대신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강한 바람 때문에 흠집은 났지만 먹기엔 전혀 문제가 없어서 ‘OK사과’라고 이름 붙였고, 농민과 함께 소비자 가격을 책정한 뒤,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했다. 결과, 한 달 만에 4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과를 구매했고, 고객들은 “못난이 사과가 맞느냐? 정말 맛있다”며 추가 주문도 이어졌다.

응원의 메시지도 폭발적이었다. 함께 일하고 싶다며 휴가 기간에 찾아온 군인도 있었고, 무료로 컨설팅을 해주겠다는 컨설팅 회사 대표, 1년 동안 자동차를 후원해주는 곳도 생겼다.

도움의 손길이 뻗칠 때마다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면서 다시 열정이 솟아난다는 이들은 혹여 착한 일을 한다며 안주하고 있진 않은지, 기존 유통업자의 관행을 따르고 있진 않은지, 항상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착한 중개자는 농민에게도 소비자에게 꼭 필요한 파트너예요. 당장 큰 도움은 못 되더라도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미래의 농촌과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취재 문진정 사진 홍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