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생긴 건 괜찮았다. 하지만 멀쩡한 겉과 다르게 사람들 앞에서 말이라도 할라 치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 아무것도 아닌 말에 상처받고, 심장은 쿵쿵 뛰고 말꼬리도 쏙 기어들어갔다. 어린 시절,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면 가게 앞에 쭈뼛쭈뼛 서 있다가 그냥 돌아오기 일쑤였다. 가게 주인한테 “이거 주세요” 말하는 것이 왜 그리 힘든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엉뚱한 걸 사오는 일도 많았다. 모심는 날, 엄마를 따라가면 맛있는 못밥을 먹을 수 있는데도 그 길을 차마 따라나서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난 언제나 꾸어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마치 세상과 뚝 떨어진 외딴섬 같았다.
그렇게 작아지다 못해 쪼그라지는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준 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우연히 시인 이상의 작품을 본 순간, 마치 ‘부조리’한 내 모습을 발견한 듯 반가울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려, 인간의 모습은 원래 이리 복잡하고 부족한 것. 내가 잘못된 건 아니여.”
그렇게 문학에 취한 나는 대학 같은 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공부를 못해서, 환경이 안 따라줘서라기보다는 필요 없기 때문에 안 가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간혹 “몇 학번이세요?” 하고 물으면 슬그머니 문학 이야기로 얼버무리고 책의 한 구절로 튕겨냈다. 속으로 ‘대학 나와 봤자 별 볼 일 없으면서’ 하며 ‘썩소’를 날렸다. 집에 들어오면 방 안 벽면 가득한 책들이 나를 반긴다. 저 책들은 나의 교양과 지적 수준을 드러내는 것, 저것이면 충분했다. 대학 졸업장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울한 걸까.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대학생들 앞에선 어쩔 수 없이 기가 죽고, 꿈을 꿔도 대학에 떨어지는 꿈을 꾼다. 그런 내가 싫어 매일 술을 마셨다. 하지만 술에서 깨어나 다시 쪼그라든 내 모습을 발견할 때의 참담함이란…. 그야말로 아침에 뜨는 해조차 절망스러웠다. 매일 술을 마시고 엉망진창으로 사는 나를 직장에서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나는 그렇게 믿지 못할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못났다’는 생각이 화석처럼 굳어져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만난 마음수련. 그때가 내 나이 마흔둘이었다.
가짜라고 했을 때 희망이 생겼다
수련을 하며 앨범을 들추듯 내 인생을 살펴보니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학예발표회 때였다. 1인극을 해야 했는데 연습을 제대로 못 해 결국 무대에 섰다가 중간에 도망 나왔던 창피한 기억. ‘아, 그 기억의 사진 때문에 내가 사람들 앞에만 서면 긴장했구나.’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나는 그 기억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무엇 하나 남들보다 잘난 것이 없는 상태에서 택했던 문학과 술. 하지만 그럴수록 가난한 가정환경과 학력, 대인 기피로 인한 콤플렉스의 늪에서 더욱 허우적거렸고 헤어나질 못했다.
문학을 했던 속마음도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인간이야!” 하며 정신세계를 추구한답시고 나는 다른 속물적인 인간들과 다르다며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했다. 결국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에다 아주 못난 놈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면 너무 힘들어서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내가 그보다 한 수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문학을 하면서 냉소적으로 변해간 것도 그 이유였다. “당신도 어딘가 못난 구석이 있을 거야. 당신도 별 볼 일 없네….” 그렇게 단정하고 치부해야 내가 존재할 명분이 생기기에. 나도 세상도 속이고 있었구나, 나는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워 그 모든 마음들을 버리고 비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 차의 헤드라이트를 켜면 환해지듯이, 내 마음에 빛을 비추니 지저분한 부유물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천만다행인 건 그동안 그렇게 살아온 나는 가짜이고 나의 본래는 무한대 우주라는 것! 결국, 콤플렉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나 역시 버리면 되는 거였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것이 꿈처럼 없는 세상이었음을 아는 순간, 희망이 생겼다. 간밤의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꿈이었으면 좋겠습니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김춘수의 ‘꽃’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였다. 세상과 전혀 교감을 못 한 나로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란 시구가 생경할 뿐이었다. 꽃을 봐도 예쁜지 몰랐고, 오히려 “너는 뭐하려고 이 세상에 나왔니?” 하며 못마땅해했다. 그만큼 내 마음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생기 있는 봄과는 겉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봄이 좋고, 봄이 기다려진다. 꽃을 보면 “너는 왜 이리 예쁘게 생겼냐, 반갑다~!”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도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몇 층 가십니까?” 하고 먼저 묻는다.
명절 때면 가족들 만나기가 불편해 직장에서 숙직을 도맡아 하는 일도 이젠 없다. 아직도 가정을 갖지 못한 것이 부모님과 동생들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명절 때면 제일 먼저 찾아뵙고 집안일도 돕는다.
나도 모르게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어느새 나는 세상과 교류하고 있다. 망각의 강을 건넌 듯, 열등감에 주눅 들고 살았던 때가 언제 있었나 싶다.
지금 콤플렉스로 인해 힘드신 분들이 있다면 묻고 싶다. “그것이 꿈이었으면 좋겠습니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콤플렉스라는 악몽에서 깨어나 실제 삶을 누릴 수 있다.
고3 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살이 쪘었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조금만 방심을 하면 살이 쪄버리는 체질인데, 그때는 공부에만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살이 쪄버린 것이다. “너 왜 그렇게 살이 쪘니, 아저씨 같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던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고, 외출할 때는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헬스클럽에 다니며 두 달간 20킬로 정도의 살을 뺐다. 그럼에도 이전에 가졌던 상처들은 그대로 내 속에 있었다. 다시 살이 찔까 봐 불안해서 매일 아침마다 체중을 쟀고 조금만 몸무게가 늘어도 당장 뛰어나가서 운동을 했다.
더 이상 아저씨 같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콤플렉스는 계속되었다.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기에 합격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주변에 다재다능한 친구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진짜 잘하는 애들 앞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좌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누가 농담으로라도 단점을 얘기하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서 더욱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패션 잡지를 보며 연구하고, 멋진 옷을 찾으러 동대문에도 돌아다니고, 신상품을 사는 데 많은 돈을 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게 세팅이 되지 않으면 집 밖에 나설 수가 없었다. 내 차림 중 어디 한구석만 마음에 안 들어도 짜증이 밀려오고 사람을 만나는 데 자신이 없어졌다. 옷을 자주 사도, 언제나 입을 옷은 없었다. 매일 새로운 이미지로 나를 포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학생 마음수련 캠프에 가게 되었다. 수련을 하며 감추려고만 들었던 나의 콤플렉스를 하나하나 꺼내어 볼 수 있었다. 고3 시절 살이 쪘을 때 사람들에게 들었던 충격의 말들, 나를 무시하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 위축되었던 모습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버려갔다.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한순간 우리 모두의 근원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고, 엄청난 변화도 가져왔다. 나 따로 세상 따로일 때는 내가 돋보여야 하기 때문에 힘들었는데, 나라는 틀이 깨지는 순간 나와 세상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고, 모든 게 하나였다. 그 안에 콤플렉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꾸미지 않아도 당당할 수가 있었다. 외모에 대한 강박관념, 다이어트에 대한 부담조차 버리고 나니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스스럼없고 많이 편해졌다.
한번은 친구들에게 나에게는 이런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걸 감추기 위해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되게 차가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냄새가 난다는 둥 하며 공감해주었고 편안해했다. 콤플렉스를 드러내면 무시를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친구는 예전엔 인상이 날카로웠는데, 수련을 하더니 인상이 둥글둥글해지고, 눈빛도 선해졌다고 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인상도 부드럽게 바뀌는구나 싶다.
수련을 하다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짜는 자기가 가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치장을 해서 드러내려고 하지만,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다고. 허울, 허례허식, 허상의 세계 속에서 살던 나는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가짜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가짜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로소 진짜의 세상에서 진짜 내 삶을 사는 기분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파출부, 막노동을 하면서 4남매를 키우셨다. 엄마는 항상 ‘힘들다, 지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고, 그럴 때마다 난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정신 차리고 살자’고. 당시 내 인생의 목표는 돈 많이 벌어서 잘사는 거였다.
그러다 스물두 살 때 연애를 하게 되었다. 길을 걷는데 나를 보고 쫓아온 그는 고위직 집안에다 유학도 다녀온 너무나 좋은 조건의 남자였다. 그 앞에 서면 내 속의 깊은 열등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일단, 학벌이라도 따고 싶었다. 당시 직장을 다녔던 나는 어렵사리 야간 전문대학에 진학했고, 5년의 연애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해 보자. 같이 노력하면 잘될 거야.” 서로 잘해보자는 거였지만, 내겐 큰 상처였다. 야간 전문대학도 얼마나 죽을 둥 살 둥 다녔는데…. 그가 야속했다. 인연이 아니다 싶어, 그날로 이별을 고했다.
너무나 괴로운 마음으로 보낸 6개월 후, 우연히 친구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골프장 운영을 하던 남자였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는 그럴싸한 모습에 마음이 기울었고 연애를 시작했다. 처음 남자 친구 집에 인사 간 날, 부모님은 쪽지 한 장을 꺼내시며 ‘며느리의 30가지 조건’을 쭉 읽으셨다. ‘안경 쓴 며느리는 안 된다, 두 부모님 밑에서 자라야 한다…’ 등등 까다로운 조건들이었지만, 이미 큰 상처를 받은 나로서는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누구보다 잘 살 수 있다며 오기로 결혼을 강행했다. 하지만 주변의 우려대로 기막힌 상황이 펼쳐졌다. 남자는 소위 ‘마마보이’에다 부모님께 기대 살며 눈치만 보는 무능력한 남자였다. 결국 5년 만에 이혼을 했고, 실패한 인생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즈음 직장 동료로부터 우연히 마음수련에 대해 들었다. 그는 시골 아저씨 같은, 해맑은 모습이 늘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다. 내 마음도 편안해질 수 있을까….
수련을 하며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지 내 이상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닐 뿐이었다. 열등감과 콤플렉스로 채워진 좁디좁은 마음이었기에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끔찍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수련을 알려준 그 직장 동료는 나를 대신해 혼자 계신 어머니를 살뜰히 돌봐주었고, 덕분에 나는 수련에 정진할 수 있었다.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지나온 상처와 열등감을 버리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마음부터 다스리라고 말해주던 사람.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그가 프러포즈 했을 때,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그 과분한 사랑이 차고 넘쳐서…. 남편은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하지만 나에겐 은인이자 스승 같은 존재다. 그를 만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었고, 참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 6시. 대전시 중구 대전노인복지관 옆 가건물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강봉섭(80) 할아버지가 찐빵을 만들고 있다.
밀가루, 베이킹파우더, 소금, 이스트, 물로 반죽하고, 앙꼬를 넣어 큰 솥에 10분 정도 쪄내자 따끈따끈한 찐빵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빵은 그날그날 양로원, 요양원 등에 배달이 된다.
취재 정하나, 사진 홍성훈
강봉섭 할아버지가 하루도 빠짐없이 찐빵을 만들어 나눈 것은 2001년 경로당 노인회장직을 맡고서였다. 몸이 불편한 분들을 병원에 데려다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가뜩이나 기운 없는 노인들이 더욱 지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 지켜보다 생각해낸 것이 찐빵이었다. 당시 밀가루 한 포대 가격이 8천 원. 앙꼬까지 계산해도 3만 원 정도면 육칠 백 명에게 빵이라도 나눠줄 수 있겠다 싶으셨단다. 강할아버지는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처음 찐빵을 쪄내어 나눠주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아, 옛날 생각나네.’ ‘배고픈 시절에 먹었던 빵이네’… 작은 찐빵 하나에,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나 같은 늙은이도 뭔가 할 수 있구나 자부심이 들더라고.”
강할아버지는 “만날 자식들이 사오는 것만 받다가 직접 빵을 만들어서 주니까 자꾸 해주고 싶은 의욕이 생기더라”고 한다.
그 후 점점 요양원, 양로원, 어린이 보호센터, 경로당, 파출소 등으로 그 대상이 늘어났다. 한 달에 한두 번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기도 하고, 2007년에는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한 태안으로, 숭례문 화재 사고 후엔 복구 작업 현장으로 큰 솥과 찐빵을 준비해 달려갔다. 이렇게 저렇게 지금까지 나눠준 찐빵만 해도 65만 개나 된다.
“빵을 호호 불면서 먹는 모습을 볼 때의 기쁨은 나밖에 모를 거야. 내가 정성 들여 만든 빵을 맛있게 먹어주니 감사한 거지.”
1932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강봉섭 할아버지는 늘 이웃과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한다. 먹을 것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었고, 언제나 웃음이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찐빵을 나눠줄 때면 그 시절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이 생각 나 가슴 한 켠이 짠해져 온다고 한다.
10년 동안 찐빵을 쪄서 나눠주는 일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한 달에 드는 재료비만 90~110만 원 정도. 처음에는 폐지와 재활용품을 수거해서 충당했지만, 점차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일이었기에 부족한 부분은 늘 저절로 채워졌다.
“신기하게도 비용 걱정을 할 때면 도움을 주는 후원자가 나타나곤 한다”는 할아버지는 “이 일을 하면서 뜻이 있으면 언제나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신다.
요즘엔 찐빵 제조 기술도 나눠주고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성심성의껏 가르쳐주며 “좋은 일을 하며 살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사랑의 찐빵 2호점, 3호점을 냈으면 하는 바람도 내비치셨다.
“나는 무조건 주는 사람이다, 하면 걱정이 없잖아. 욕심을 부리는 순간부터 괴로워지는 거지. 앞으로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한없이 만들어서 나눠주고 싶어.”
하루 평균 200개 정도의 찐빵을 만든다.
포실하게 쌓인 모습만 봐도 모든 피로가 싹 가신다고 하신다.
대한노인회 대전광역시 동구 지회장을 맡고 있는 할아버지는 이곳 직원들 뿐 아니라,
건물의 이웃들, 방문객들에게도 항상 빵을 나누어준다.
사람을 만날 때면 이름 다음으로 묻는 게 바로 나이였다. 동창회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다. “몇 기세요?” 선배일 경우 바로 존칭을 쓰고, 어린 사람은 하대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진지한 상담을 청해오던 후배들은 나와 대화를 하면 한풀 꺾이곤 했다. “나도 그런 거 경험해 봐서 아는데 말이야…”로 시작하며 아랫사람의 경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 친구들이 술을 먹고 실수를 하면 “객기로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겼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실수하면 “나잇값 못 하네” 하며 혀를 찼다.
나이는 내 삶의 기준이었다. 20대엔 결혼해서 20평 정도엔 살아야 하고, 30대엔 30평, 40대엔 40평 정도에는 살아야 하지 않나, 하며 그 목표에 도달하려 애썼다.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직함이자, 먹고사는 방법, 생활 수단까지 포함된 개념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디까지나 내가 정해놓은 기준이지만 그 나이에 맞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했다.
그러다가 아주 재미난 일을 경험했다. 내가 다니는 동호회에서 MT를 갔는데, 이름표를 살펴보니 대부분 20~30대 젊은이들이었다.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나이 먹은 사람이 혼자 뻘쭘히 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괜히 왔다는 생각에, 영 가시방석이었다. 야외에서 술 한잔 할 분위기인데, 점점 어두워지면서 서로 얼굴도 잘 안 보이던 상황, 순간 나는 과감히 내 이름표에 써 있던 나이 42를 24로 바꾸었다.
‘에라~ 모르겠다. 젊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데, 나잇값 못 한다고 할 거 아니야…. 그럴 바엔 이왕 온 거 나이를 한번 확 놓아보자.’ 나도 모르게 오늘 하루만은 나이를 놓고 지내보자는 용기가 생긴 거였다.
서로 골고루 얼굴도 익히고 친해지기 시작하자, 젊은 친구들이 한마디씩 건넸다. “근데, 넌 왜 이렇게 늙었니?” “왜 이렇게 삭았어?” 농담이되 농담만은 아닌, 걱정스런 인사말들이었다. 처음엔 당황스럽기도 하고 손해 보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적응되어 갔다. 모처럼 젊은이들과 어울린 자리는 다양한 얘깃거리로 즐거움을 주었고, 그때 느낀 자유와 해방감이란~!
당시의 경험은 나에게 나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얼마나 나이란 틀에 갇혀 살고 있었던가. 그로 인해 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의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그 후론, 의식적으로 나이를 내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을 만나면 나이보단 안부부터 물었고, 나잇값 하느라 무게만 잡던 나를 내려놓고 후배들에게 농담도 걸고, 직원들에게 커피도 돌렸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대화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사무실 분위기도 좋아졌고, 훨씬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가장 큰 변화라면 사람을 만나는 폭이 훨씬 넓어졌다는 것이다. 스무 살 젊은이와도 나보다 한참 많은 어르신과도 금세 친구가 되고 말이 통하는 기분이란 정말 근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동안 왜 그렇게 나이, 나이, 하며 살았는지 픽 하고 웃음이 나온다.
결국 나이를 정말 잘 먹는다는 건 자기의 틀을 잘 없애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온 날만큼 쌓이는 관념과 관습, 그 딱딱하게 굳어진 성벽을 허물 줄 알 때, 정말 상대를 배려하고 잘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제대로 나잇값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나무를 처음 만난 건 2004년 겨울이었습니다. 예당저수지 물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왕버들 나무. 나무는 30년 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넓은 저수지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모습이 꼭 ‘나’ 같았습니다. 모두들 외지로 떠나고, 친구도 없이 외로워하던 내 모습….
힘들고 답답할 때 그 나무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뿌리를 내린 순간부터 온전히 그 자리에 있는 나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물결이 거칠게 쳐도 나무는 늘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꽃이 피고 새순이 돋고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다시 또 꽃이 피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나무는 조금씩 커 나갔습니다.
2009년,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날이었습니다. 눈이 안개처럼 세상을 가리고, 그 나무만이 무심히 서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사진을 찍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사진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수지에 20cm가량의 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날씨, 하지만 나무는 주변에 동그란 작은 연못 하나를 만들어놓고 있었습니다. 한겨울 나무의 겉모습은 차가웠지만, 나무는 따스한 온기로 얼음을 녹이고 있었던 겁니다.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들렀다 가는 새들한테도 온전히 기다리고 품어주는 사람, 사람들의 언 마음을 녹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는 외로움이 참 많았습니다.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이 외로움으로 표현된 거였습니다. 나무가 나를 위안해주는 만큼 외로움을 내려놓으면서 점차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내가 아닌 나 자체로 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상대가 상처를 주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만들고 있는 건 바로 나였습니다. 상처받기 싫어 너무나 가늘고 얄팍하고 치졸하게 살아온 나, 그런 마음이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건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 내가 내 틀로 만들어놓은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만든 틀에 안 맞으면, 충돌하고 아픔을 주고받기 마련이었습니다. 나만 그 틀을 내려놓으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 나무가 편안했던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도 주장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냥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내려놓아야… 누군가에게 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점차 내가 느낀 그 나무의 본질을 찍고 싶었습니다. 학벌이나 경제력 같은, 그 사람을 치장했던 배경을 빼버리면 그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듯이, 이 나무도 온전하게 나무만으로 찍어보고 싶어 안개가 많이 끼는 겨울을 선택해 사진을 찍어나갔습니다.
점차 사람들을 볼 때도 조금 더 본질을 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자기를 치장하는 것들을 버리고 버려도 남아 있는 그 본질에 다가서고 싶었습니다. 최대한 나의 틀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대하면 그 사람 또한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더욱 당당하고 자유로운 그 나무를 닮고 싶습니다.
이기완님은 1981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곳에서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며 작은 사진 모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4세 때 처음으로 카메라를 잡아, 예당저수지의 나무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10월에는 6년간의 작업을 담은 ‘나무를 전시하다’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석달치 월급을 모아야 안경 하나를 살 수 있대요. 제가 일년에 안경을 두세 번 바꿨었어요. 그런데 단지 안경이 없어서 공부도 일도 못 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안경 하나도 너무 소중한 거예요.”
동두천외고 동아리 ‘안아주세요’는 ‘안경을 아프리카의 이웃들에게 주세요’의 준말이다. 말 그대로 아프리카에 보내주기 위해 헌 안경을 모은 것이다. 2기 대표인 2학년 문주영 학생은 “동아리 애들이 대부분 안경을 썼는데, 그래서인지 아프리카 아이들의 현실에 더 공감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안아주세요’에서 헌 안경을 모아, 안과의료 봉사 단체인 비전케어서비스에 보내면 그곳에서 수리를 하여 아프리카, 몽골, 스리랑카 등의 개발 도상국에 보내는 것이다. 지난여름엔 한국국제협력단(KOICA) 단원으로 에티오피아에 파견된 안과 전문의로부터 “안경은 아이들의 삶을 바꿔줄 것”이라는 협조 요청 메일을 받고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2008년 9월부터 최근까지 이 학생들이 보낸 안경의 개수는 무려 5,654개.
‘안아주세요’는 3학년 장경진 학생이 처음 만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캐나다인 영어 선생님이 들려준 ‘안경 기부’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한국에서는 안경을 갖다 줄 데가 없어서 안타깝다 하시면서 네가 이런 일을 시작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그래서 자료를 찾아봤더니 전 세계 약 1억3천5백만 명이 단지 안경이 없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경진양이 주축이 되어 포스터를 만들어 학교 곳곳에 붙이고, 안경 수집함도 만들어놓았다. 3개월 뒤, 안경 백여 개가 모였다. 이게 될까 반신반의하며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예상 외로 놀라운 결과였다. 처음에는 단짝 친구의 도움을 받아 진행하다가, 작년 말에는 아예 후배들을 선발했다. 그리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자기 동네에 수집함 설치하기, 거리 홍보하기, 사진 만화 만들기 같은 아이디어를 모았다. 그렇게 하면서 언론에 소개가 되었고, 점차 안경을 기부받는 일도 많아졌다.
이들이 제일 기쁠 때는 당연히 각지에서 모아진 안경이 학교로 배달되어 올 때다. 하나하나 일일이 포장해서 보내준 초등학생, 친지들에게까지 연락해 가득 모아서 보내주신 아저씨, 안경점을 닫게 되었다면서 많은 안경알을 보내주신 분까지 감동이 밀려온단다. 특히 함께 온 격려의 메시지들을 읽을 때면 뿌듯하면서도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세상에 따스한 사람들이 많구나 싶고요. 시험을 못 봤다거나, 사소한 일로 마음이 상해 있을 때 내가 왜 이런 걸로 속상해하고 있나 반성하게 돼요. 그리고 더 열심히 하자고 서로 격려하고 다짐하게 돼요.”
“예전엔 사고 자체가 부정적이고 혼란기였다”는 경진양은 처음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와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하지만 동아리 활동을 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일단 실천하다 보면, 무언가 이루어지는 희망의 이치도 알게 되었다 한다. 새해에 대학생이 되는 경진양은 ‘안아주세요 동아리’ 대학부도 만들어 그 희망을 더 널리 알려나가고 싶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만들기
① 굴은 소금을 뿌려 비벼서 서너 차례 물에 헹구어 씻어 물기를 뺀다.
② 양파와 당근, 감자를 작게 썬다. 시금치는 1cm 길이로 썰고, 베이컨은 5cm 너비로 썬다.
③ 냄비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베이컨을 넣어 볶다가 기름이 배어나오면 양파를 넣고 연한 갈색이 돌도록 중약 불에서 볶고 당근도 넣어 숨이 죽도록 볶는다.
④ ③에 감자를 넣고 다시마 국물을 부어 30분 정도 끓인다. 도중에 거품이 올라오면 걷어낸다.
⑤ ④에 우유를 넣고 한소끔 끓으면 굴을 넣는다. 굴이 익으면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을 맞춘 다음 불에서 내리고 바게트를 먹기 좋게 뜯어 넣는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