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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샤 튜더의 마음의 정원에서 봄을 맞는다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버몬트주 30만 평에 자리한 비밀의 정원.
미국의 가장 사랑받는 동화 작가였으며 일러스트 화가로 백 권이 넘는 그림책을 펴냈던 타샤 튜더는
2008년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곳에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옷을 지으며 19세기 생활 방식으로 살았다.
일년 내내 꽃이 지지 않아 비밀의 정원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낙천적이며 소박하게 살아온 그녀의 삶과 철학을 두 권의 저서를 통해 만나본다.

출처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타샤 튜더 지음, 리처드 브라운 찍음)
<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리처드 브라운 찍음) (도서출판 윌북)

 

 

 

타샤는 붉은 꽃잎이 너울대는 자포니카 동백을 좋아한다. 아이리스 모양뿐 아니라 장미 형태를 지닌 종류도 갖고 있다. 모두 가운데 가루 같은 노란 수술이 있다. 3월이면 동백꽃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집에 와서, 여러 개의 백랍 단지에 꽂고 또 꽂는다. 그 섬세한 색과 극적인 움직임에 이끌려 믿기 어려울 만치 탐스럽고 복슬대는 귀한 동백꽃들을 모아놓는다.

타샤는 마당에 있는 풀 한 포기까지 진심으로 사랑하고, 식물 하나하나를 그대로 애지중지하면서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타샤는 꽃들에 대해 ‘그 아이가 싹을 예쁘게 틔웠는데, 날이 건조해서 시무룩해졌지요’라고 말한다. 정원이 늘 황홀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듯싶다.

헛간이나 집에서 일할 때면 종종 인생을 살면서 저지른 온갖 실수들이 떠오른다. 그러면 얼른 그런 생각을 뒤로 밀어내고 수련을 떠올린다. 수련은 항상 불쾌한 생각들을 지워준다. 새끼 거위들도 수련처럼 마음에 위안을 준다. 새끼 거위의 눈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지? 단춧구멍을 낸 듯한 눈 주변과 보송보송한 솜털이라니. 기분 좋을 때 내는 이상한 휘파람 소리 같은 지저귐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 20~30년간 기른 화초에서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설레는 일이다.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랄까. 수선화는 낙천적인 꽃이고 잘못될 리 없는 꽃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는 ‘제비가 엄두를 내기 전에 오는 수선화, 3월 바람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네’라고 읊었다.

‘1박 2일’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한 여행

KBS-2TV ‘1박2일’에서 외국인 근로자 특집을 마련했다고 할 때, 처음엔 좀 의아했습니다.
왜 굳이 ‘1박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외국인 근로자’ 특집을 마련했을까 하고요.
그러나 방송은 예상치 못한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번 방송은 ‘글로벌 특집 2탄’이라고도 명명되었는데,
작년 여름의 ‘글로벌 특집 1탄’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KBS

니띤과 와프와 스캇 등 1탄의 외국인 참가자들은 노동이 아니라 공부와 예술 활동 등을 위해 한국에 왔고, 끼와 예능감까지 겸비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타향에서 외롭게 고생하고 있는 2탄의 외국인 참가자들은 성격도 수줍고 약간씩 위축되어 보였지요. 그들의 사연에는 다큐멘터리와 같은 눈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신이 받는 월급 중 5~6만 원을 제외한 모두를 고향으로 부친다는 네팔 친구, 강호동의 짝꿍 ‘까르끼’. 고향에 두고 온 여섯 살과 두 살의 어린 딸들이 매일 보고 싶다는 까르끼는 어머니가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했는데, 자기가 부쳐주는 돈으로 약을 사 먹어서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니,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이제껏 그들을 개별적, 인간적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회적 문제로만 인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읽었던 신문 기사에는 중소기업주들이 외국인 근로자 고용 문제로 골치 아파하거나 차별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1박2일’에 등장한 사장님들은 아주 달랐습니다.

까르끼의 회사 사장님은 자신의 젊은 시절, ‘오일 머니’를 벌기 위해서 중동에 나가 일할 때 겪었던 어려움을 기억하기 때문에,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도 진심으로 차별 없이 대해주고 싶다 말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우리의 형제들도 지금 어디선가 낯선 곳에서 이들과 똑같은 설움을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종민의 짝꿍인 스물여덟 살의 캄보디아 청년 쏘완은 방송에 출연한다고 나름 멋을 부리고 나왔던 모양인데, 사장님은 “멋 내고 갔다가 너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냐?”면서 자기의 점퍼를 벗어 입혀주시더군요. 하필이면 그날은 사상 최대의 한파가 몰아닥친 날이었습니다. 점퍼를 입고도 “사장님, 추워요!”라며 떠는 쏘완의 옷깃을 여미며 토닥여주는 사장님은 정말 아버지 같았습니다.

이승기의 짝꿍은 ‘예양’이라는 이름의 미얀마 친구였는데, 작업반장님은 예양을 굶기면 안 된다고, 복불복에 져도 밥은 먹여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으며, 사장님도 이승기를 향해 “고생시키면 안 된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양을 향해서는 “고생하는 것도 재미있다. 한국에 와서 이런 추억 만들기는 정말 힘든 거다. 너는 행운아다”라고 격려했습니다. 역시 아버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당신은 함께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자막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이 제 가슴에도 와 닿았습니다.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지구상에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함께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니까요.

지현정님은 명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십여 년간 출판사에 근무했으며 2009년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빛무리’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와 예능, 영화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추위 이겨내고 다시 태어난 튤립처럼

새 학기, 새 직장….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봄날입니다.

튤립을 보고 있으면 이때에 정녕 딱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작고 못생긴 알뿌리에서 ‘우리 이렇게 부활했어요’ 하고

당당히 꽃대를 드는 튤립들.

실내 식물 중에서도 노지에서 겨울을 나는 것은 드문데요,

튤립 같은 알뿌리식물은 겨우내 마치 죽은 것처럼 있다가

영하의 추위를 다 이겨내고 이렇게 예쁜 꽃으로 피어오른답니다.

생명의 신비를 깨닫게 해주는 튤립은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줍니다.

햇빛 밝은 햇빛과 서늘한 기온을 좋아해요.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마르면 한 번에 흠뻑 주세요.

번식 꽃이 지고 나면 꽃송이 아랫부분을 자르고 해가 잘 드는 곳에 두세요.

잎이 완전히 시들면 알뿌리를 캐내어 그물망에 넣고 서늘한 곳에 뒀다가, 가을이 되면 냉장고에서 두 달 정도 보관합니다. 저온 처리 기간 동안 알뿌리 숫자가 불어납니다. 겨울에 알뿌리들을 흙에 심어주세요. 봄이면 다시 예쁜 꽃을 볼 수 있답니다.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감기 예방과 피부 미용에 좋아요, 새싹채소 샐러드, 딸기 드레싱

여러 가지 쌈 채소의 어린잎을 따서 모은 새싹채소.

잎이 여리고 부드러워 생으로 먹기에 좋고,

샐러드는 물론 요리에 곁들이는 채소로도 아주 좋다.

비타민C와 식이섬유가 풍부한 새싹채소와 딸기 드레싱으로

감기 예방과 피부 미용에 좋은 샐러드를 만들어보았다.

이양지 자연요리 연구가

재료 준비

새싹채소 200g, 노랑·빨강 파프리카 1/4개씩,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1큰술, 드레싱(딸기 5개,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3큰술, 레몬즙 1 1/2큰술, 꿀 1작은술, 소금·후춧가루 조금씩)

만들기

① 새싹채소는 찬물에 씻어 물기를 잘 빼두고, 파프리카는 씨를 뺀 뒤 4~5cm 길이로 얇게 채 썬다.

② 딸기 드레싱을 만든다. 볼에 딸기를 넣고 포크로 짓이긴 뒤 나머지 드레싱 재료를 넣고 고루 섞는다.

③  큰 볼에 새싹채소와 파프리카를 넣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1큰술을 넣고 살짝 버무린 뒤 그릇에 올린다.

④ ③에 ②의 드레싱을 끼얹는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나 돌아보기, 새로운 세상을 맞는다

나 돌아보기,
새로운 세상을 맞는다

고권호 48세. KT 네트웍스 근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사진 홍성훈

입사 5년 만에 다른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의 일은 지금까지 해온 일과 달랐다.
낯선 일에 적응할 틈도 없이 상사의 지시는 쉴 새 없이 내려왔다.
책상 앞에 서류는 끊임없이 쌓여갔고,
현장은 현장대로 바쁘게 돌아갔다.
마치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사람들과도 부딪쳤다.
상사의 지적 한마디는 큰 상처가 되었고,
반면 상사한테 칭찬받는 동료에 대한 열등감은 커져 갔다.

 

‘동료는 예뻐하고, 나는 미워하는구나. 고향도 다르니까 대우를 더 못 받는 거야….’ 동료들의 모습을 확대 해석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혔고, 매사 비굴해져 갔다. 내가 자라온 환경도 원망스러웠다. 섬 머슴아로 태어나고 자라 대도시에 왔을 때부터 가졌던 열등감이었다. 작은 상처에도 꽁해지고, 대범하게 받아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불안이 엄습해왔다. 마치 전깃불이 확 하고 켜지듯이 온몸으로 쏟아지는 불안감이었다. 퇴근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지만, 결국 중간에 내려야 했다. 미친 듯이 병원을 찾아 헤매었고, 제 발로 찾아 들어간 곳은 응급실이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숨 쉬기도 힘들고, 발끝과 손끝이 점점 마비되는 듯했다. 이렇게 죽나 보다….

그렇게 예고탄도 없이 병마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늘어난 업무는 큰 압박감을 주었고 결국엔 과부하가 걸린 거였다.

공황장애라 했다. 의사는 약은 보조 역할일 뿐 마음을 바꿔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했지만, 고로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늘 긴장 상태이고 심장은 쿵쿵 뛴다.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무대에 혼자 서 있는 기분. 긴장 상태가 최고조에 올라가면 과호흡으로 위험해진다. 겨우겨우 호흡 조절을 하면서 위기를 넘겼지만, 언제 닥쳐올지 모를 불안감에 몰골은 수척해갔다.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해오기도 하고, 24시간 지옥 같은 공포가 이어지기도 했다. 한적한 곳으로 가면 나을까 싶어 시골로 발령을 내봤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업무는 여유 있는데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업무 습관은 그대로였다.

내가 마음이 여리고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보니, 이런 병에 걸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책도 보면서 안정을 취하려고 했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치 기타줄 당기듯이 뒷골이 당기는 증상까지 겹치면서 죽음의 공포가 연거푸 밀려왔다. 40대에 가장 많다는 ‘돌연사’. 내가 바로 그렇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때 불현듯 동료가 권유했던 마음수련이 떠올랐다.

죽어라 마음을 버렸다. 마음이 나약해서 이런 병에 걸렸다며 그동안 얼마나 한탄했던가. 그런 마음들을 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했다. 처참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가족들 앞에서도 노래도 못 부를 정도로 소심했고, 학급 회의 때도 말 한마디 못 했던 학창 시절….

나는 여리다, 소심하다, 하는 기억의 사진들을 떠나보냈다. 이렇게 나약하게 태어나게 했다며 부모님을 원망했던 마음도 버렸다. 나는 평소 사람들한테 잘하는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근데 나의 내면을 살펴보니,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서 나온 행동이었다. 때문에 내 딴엔 잘해주던 상대한데 싫은 소리를 들으면 더 큰 상처가 되었다. 그런 자잘한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더 작아졌다. 마음사진들이 나를 계속해서 여리고 왜소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사진이 스트레스였다.

부지런히 그 사진을 버려나갔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서류 한 장, 사람들의 말 한마디, 지시 사항에 쪼그라들고 상처받던 예전의 ‘고.권.호’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죽어라고 마음을 빼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공황장애도 밤손님처럼 언제 간지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졌다. 나에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연히 직장 생활도 달라졌다. 마음의 빼기만 했을 뿐인데 사람들과의 부딪침은 줄어들었고, 세상을 넓게 보고 수용하는 마음이 커졌다. 일을 할 때도 ‘과연 잘될까?’ 하며 미리 결과를 걱정하고 초조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결과는 나오듯이, 이제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함께하는 동료들이 고맙고, 남을 분별하기보다는 내가 과연 내 역할을 잘하는지부터 점검하게 된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 모두들 직장 생활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해온 일만 고수하고 내 모습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살아온 내 모습을 버리며 틀에 박혀 있던 고정관념 또한 바꿀 수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후배들도 존중하며 스스럼없이 도움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남 앞에서 말도 못 하던 내가 어느덧 가족 모임이나 동창회 모임도 주도한다. 일도 모임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지만 생활에 치인다는 마음이 없다. 안될 거란 생각 자체가 없다. 늘 긍정이다.

세상은 나의 마음을 펼쳐서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스트레스로 힘들거나, 안 좋은 일 때문에 괴롭다면 내 마음부터 살펴보길 권유하고 싶다. 자기를 되돌아볼 줄 안다는 것은 곧 새로운 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노력해도 안 되던 것들이 해결되네요

열등감, 비교 스트레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것들이
해결되네요

김영희 45세. 화장품 영업. 서울시 강북구 쌍문동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25세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9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다가
화장품 영업 일을 처음 시작했다.
애들 돌볼 시간도 있고, 돈도 벌 수 있겠다 싶어서 선택한 일.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 자라고 대학도 나오지 못한 나는 일단 사람들의 메이커 옷차림과 명품 가방 앞에서 기가 죽었다. 특히 전문직 여성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대화 중에 문득문득 외래어나 영어가 나올 때면 못 알아들어 애먹을 때도 많았다. 말문이 막혀 대화가 끊겼고, 자신감은 떨어졌다. 똑똑하고 일 처리 잘하는 동료들과 비교될 때마다 기운은 없어지고, “나는 왜 이리 못났을까” 한숨만 나왔다. 자신감을 갖기 위해 리더십 강의를 들으러 다녔지만, 거기서도 영어는 큰 걸림돌이었다. 칠판 가득 써 있는 영어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적었지만, 내 노트는 텅 비어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았다. 영업 잘한다는 사람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거울을 보고 웃으면서 하루에 열 번씩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쳤다. 하지만 그 무수한 다짐도 내 것이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영업 지역이 지방에서 서울로 옮겨지면서 영업 실적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로에 섰을 때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육성회비를 제일 늦게 내서 선생님께 또 혼나고 있었다. 간식으로 우유를 먹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가게 앞을 지나다가 과자가 먹고 싶어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초등학교 때 기죽어 살았던 사진들이 한참 쏟아져 나왔다.

‘가난하고 예쁘지도 않고 키도 작고…, 난 지지리 복도 없어.’ 불만이 가득하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달란트를 골고루 주신다는데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태어났나, 한탄하던 나를 계속해서 버리던 어느 날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내 모습이 너무나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오직 나만 잘살게 해달라고 울고불고 떼쓰는 꼴이었다. 똑같은 자식들이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마음 써주는 자식과 나만 예뻐해 달라고 떼쓰는 자식들 중 누가 더 예쁠까? 세상 이치가 그러할진대, 오로지 나, 내 가족만 잘살게 해달라고 투정 부린 나는 아무리 봐도 복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영업이 힘든 것도 당연했다. 고객에게 친절했던 것도 오직 돈 한 푼 벌기 위해서일 뿐, 거기에 상대방을 위한 배려는 없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잘못 살아온 게 너무나 창피해서 한동안 울면서 다녔다.

우선 악착같이 돈 벌고 싶은 마음부터 내려놓았다. 매출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으니 훨씬 일이 쉬워졌다. 내 마음이 편안하니, 상대방도 편하게 받아들였다. 고객의 이야기를 잘 못 알아들으면 솔직하게 “제가 잘 모르거든요” 하며 다시 묻는 용기도 생겼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았던 것들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영업 실적도 10배나 올랐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써 버린다. 그래서 정작 자신의 능력은 제대로 발휘 못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긍정적인 마음과 감사함을 배웠고, 진정한 자기 계발이란 진심을 이야기하는 거란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뭐 좋은 일 있나 봐, 일하는 게 아니라 노는 거 같은 표정이야.” 정말 그렇다. 일을 하되 일이 아니라 마치 신나는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아등바등 안 해도 늘 생기가 돋네!

전전긍긍 아등바등 안 해도
늘 생기가 돋네!

양재일 52세. K은행 본점 부서장.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지난 90년대 말 IMF 사태가 준 충격은 컸다.
우리 회사 전체 직원의 30%가 감원되고,
지점에선 많은 동료들이 줄줄이 떠나가게 된 것이다.
떠난 자와 남은 자의 갈림길, 그 속에서 나는 남겨진 자에 속했다.
하지만 남겨진 것에 대한 안도와 감사함 한편으로 회의가 밀려왔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것,
과연 열심히 일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공허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더 이상 여태껏 해온 생활을 반복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달라져야 했다.

 

먼저 급변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실 감각을 키우고 싶었다. 업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영어 공부는 물론 은행 업무와 관련한 전문 자격증 취득에 매진했다. 덕분에 10개 이상의 자격증을 취득했고, 인사 담당관은 “이제 더 딸 자격증이 없겠네요”라고 했다.

아침 8시, 회사에 1등으로 출근했고, 고객의 전화 한 통이면 무조건 달려갔다. 고객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방문을 했다. 토요일, 일요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온 결과, 온종일 내 책상의 전화는 불이 났다. 예금 유치액도 2배 이상 늘어났다. 실적에 자신감이 생겼고, 어느 순간엔 맘만 먹으면 목표 달성액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신바람이 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부하 직원들의 업무 태도가 눈에 점차 거슬렸다. 9시 출근, 6시면 땡~ 퇴근하는 직원들이 못마땅했다. 고객이 찾으면 휴일도 반납하고 언제든지 달려가는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 하나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왜 그리 못하냐”면서 직원들을 꾸짖었고, 직원들의 불만도 커졌다. 내 책상 앞으로 고객들은 줄을 섰지만 직원들과는 손발이 맞지 않아 일이 점점 힘겨워졌다.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직장 생활에 대한 허무함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설사 목표 달성을 하더라도 아무런 보람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바쁘게만 뛰어갈 뿐, 이유도 뜻도 없이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나름 동기 부여를 하면서 의미를 애써 찾아보았지만,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직장 생활이 이런 게 아닌데, 내가 이렇게 다니려고 직장에 들어온 게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내 얼굴이 안되어 보였는지 은행 청원경찰이 내게 마음수련 책자를 건네주었다. 마음을 버릴 수 있다는 문구가 참 맘에 와 닿았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나. 서글프면서도 씁쓸했다. 나이 먹는다는 게 두렵고 불안한 나. ‘갑자기 잘리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남보다 잘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나. 자기밖에 모른다며 면박을 주었던 직원들. 근데 돌아보니 나야말로 나밖에 몰랐다. 고객을 위한다고 휴일도 반납했지만, 결국 나를 위한 거였다. 실적은 곧 내 명예요, 자존심이었다. 목표를 세워 그 기준에 따라오면 잘한 거고, 못 미치면 못한다고 다그쳤던 직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했지만 오직 나만을 위한 최선이었다. 직원들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에 다름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아찔했다. 소의 고삐를 잡고 끌고 가듯 내 잣대에 맞추려고 억지로 끌고 가려 했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구나….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수많은 굴레에 덮어씌어 있었다. 자식도 잘돼야 했고, 동기들한테 창피 안 당하려면 승진도 해야 했다. 퇴직도 마찬가지였다. ‘직장 생활 30년 했다, 지점장이다’ 등 과거의 타이틀을 부여잡고, 낯선 세상에 던져진다는 게 두려웠다. 아등바등 잘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사이 주변 사람들은 이미 깊은 상처를 받고 있었다. 내가 오히려 그들을 힘겹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미안했다.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주위 사람들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내 잣대로 바라본 세상이 불만투성이였다면, 나로부터 벗어나 바라본 세상은 온전히 나를 거두어주는 한없이 따듯한 세상이었다. 하나하나가 다 감사했다. 잘 커주는 아이들, 아내가 정성스레 끓여준 된장국,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 그들이 달리 보였다. 그 자리에 있는 이유와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내 방식대로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게 줄어들었다.

직원들의 의견을 많이 듣고 존중하려 했다. 혹여 할 일을 잊어버린 거 같으면 메시지를 띄워주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제안해주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좀 더 많이 웃으면서 대했을 뿐인데 직원들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해주었다. 그 결과 우리 지점은 고객만족도평가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욕심으로 일을 할 땐 하는 것 없이 힘만 들더니, 지금은 많은 일을 해도 늘 생기가 돋는다.

내가 무수히 그어놓았던 선을 지우니 그 자유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앞으로 다가올 퇴직도 이젠 걱정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내 인생 제2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이제야 제대로 된 자격증을 딴 기분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참되게 살아갈 수 있는, 생애에서 가장 멋진 자격증을 갖는 것이다.

자기 성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지름길

스트레스, 기업이 관리해야

중앙대병원 순환기 내과 이광제 교수는 “미국에서는 피로를 호소하는 직원을 전문 상담사와 연결해 치료까지 지원하는 멘탈 피트니스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며 “사업주가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하나의 질병이라고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례로 종업원 지원 프로그램(EAP)을 도입한 미국 기업 ‘3M’은 종업원의 생산성이 80% 가량 향상되었으며, ‘킴벌리클라크’는 건강 증진 프로그램인 ‘LIVEWELL’을 통해 건강검진, 에너지 재충전, 멘탈 헬스 관리를 실시하여, 결근율 43%, 산업재해 35%를 감소시켰다. 일본 기업 ‘소니’는 ‘Wellness Center(건강 센터)’를 설치하여 정신과 의사를 상근시키고 있으며, ‘캐논’은 보건 담당자가 상담과 스트레스 관리 교육을 연간 80시간씩 받는 등 직원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회사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고, 기업 및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SK텔레콤’은 입사한 지 10년이 지난 사원에게 1~3개월 리프레시 휴가를 주고 있으며, 삼성전자도 올해부터 일반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 정신과 검진을 확대하고, 심리상담사 수를 늘릴 계획이다.

인제대학교 스트레스 연구소 우종민 소장(백병원 신경정신과)은 “업무상 스트레스로 산업재해와 과로사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스트레스를 기업이 나서서 풀어주는 것이 생산성 향상과 위기 탈출의 관건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 고통의 원천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 그것이 스트레스 관리의 출발점”이라고 진단했다.

직장에서 행복을 유지하는 6가지 비결

미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은 미국 컨설팅업체 숀 아처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직장에서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6가지를 제시했다.

1. ‘고마운 일’을 찾아라 : 매일 감사 리스트를 작성한다. 감사할 때 일의 성과도 높아진다.
2. 일하는 틈틈이 재미를 찾아라 : 잠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인터넷에서 재밌는 동영상을 찾아 즐기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된다.
3. 업무 환경을 밝게 꾸며라 : 긍정적인 생각을 유도할 수 있는 사진이나 장식들로 책상을 꾸며보자.
4. ‘걱정 노트’를 만들어라 : 부정적인 느낌을 글로 쓰게 되면 걱정거리가 객관화되면서 그 크기가 반감된다.
5. 인간관계에 투자하라 :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끈끈한 유대 관계는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6. 쉬면서 업무 효율을 높여라 : 90~120분 일하고 5분 쉴 때 업무 효율이 극대화 된다.

병원 봉사 연주자, ‘포유뮤직’의 이주은, 최시애 씨

취재 최창원, 사진 홍성훈

“어머니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였어요. 로비에서 음악 공연하는 걸 보게 되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지쳐 있던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눈물이 나는 겁니다. 나도 음악 전공자인데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저도 꼭 하리라 마음을 먹었지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졸업 후 전문 강사와 연주자로 활동하던 이주은(32)씨에게 그때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는 우선 대학에서 함께 피아노를 전공하고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는 최시애(32)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2009년 3월, 병원 연주 봉사자들의 모임인 ‘포유뮤직(For You Music)’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고, 2009년 4월 1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첫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아해주시는 거예요. 고맙다며 손잡아주시고, 또 오라고 해주시고. 저희가 오히려 진심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지더라고요.”

한 번, 두 번 연주를 진행하는 사이, 점차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저도 악기 연주 가능한데, 함께할 수 있을까요?” 하며 동참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렇게 연주자가 2백여 명으로 늘었고, 앙상블, 관현악, 합주뿐 아니라 성악, 국악, 재즈 등 장르도 다양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 건대병원, 아산병원 등 5개 병원에서 정기 연주를 하고, 요양원 등의 요청이 있으면 방문한다.

“눈물이 나오네요” “덕분에 힘이 났어요”라며 감동하는 사람들, 꼬깃꼬깃 지폐를 건네주시던 할머니, 그 시간만 기다려진다는 환자분들. 그중에서도 음악을 듣고는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는 뇌성마비 아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2009년 5월, 보라매병원에서였다. 누워 있던 아이가 음악에 반응을 보이자, 놀란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나왔고 아이는 연주를 들으며 웃음까지 지었다. 그때부터 음악 연주회는 이 모자에게 큰 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작년 8월 이주은씨는 갑작스럽게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그녀 자신이 환자가 된 것이다.

“수술하러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번엔 제가 환자의 입장에서 음악을 듣게 되었어요. 영화음악, 재즈 같은 친근한 음악들이었는데 정말 눈물이 나도록 힘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항상 더 높은 것만을 좇았구나 싶었어요. 나도 저 사람처럼 유학 가고 싶다 등등 못 이룬 것이 너무 안타깝고, 더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이렇게 제 연주를 즐거워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구요.”

함께 연주를 해왔던 최시애씨도 “항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제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마음이 생겨가는 것 같다”고 한다.

“예전에는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무조건 여행을 갔어요. 그렇게 허전함을 달래고 충전을 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누군가를 위해 연주를 하면 마음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겁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도 더 유심히 보게 되고, 환자들과 어떻게 더 교감할 수 있을까 노력하게 되고 생활에도 활력이 생겼어요.”

정기 연주뿐 아니라 밸런타인데이 콘서트, 화이트데이 콘서트도 기획하는 이들은 앞으로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무료 레슨도 하고 싶단다.

포유뮤직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연주를 다닌다. 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등 5개 병원 정기 연주와 요양원 등의 초대 공연을 한다.

http://cafe.naver.com/music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