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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이야기

꽃1

사월 한식 날 엄마하고 아버지 산소 벌초하는데 당신 허리처럼 굽은 호미로 잡초 매시던 우리 엄마 산소 언저리에 홀로 핀 노오란 풀꽃 언뜻 보시더니 그만 눈을 뺏겨 호미 끝으로 마른 흙 톡톡 파시기에 그 꽃 옮겨 가면 집 근처도 못 가 말라 죽을 거라고 낫으로 잡풀 베어 넘기던 내가 쓴소리 건넸더니 우리 엄마 깜짝 놀라 물러앉아 두 손으로 흙을 퍼서 풀꽃 주위 도톰하게 채워놓고 토닥토닥 다져주시더라 애비야 꽃 안 다치게 조심해서 하거라 말씀하시더라 벌초를 다 마치고 아버지께 잔 올리고 재배 드리고 나뭇등걸마냥 거친 엄마 손 잡고 산비탈을 내려오니 배꽃보다 더 하얗고 붓꽃보다 더 곱던 엄마 생각에 퇴주잔 끝에 불콰해진 나는 그냥 울고 싶더라

꽃2

어머니가 서울 친척 집에 꼭 다녀오실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사는 시골집을 비우게 되었다. 모처럼 새 단장을 하신 어머니가 오래된 손가방에 돋보기와 성경책과 안약을 챙겨 넣고 나갈 채비를 하셨다. 하지만 당신은 선뜻 나서지 않고 거실 한 켠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화분 앞에 앉으셨다. “할매 댕기올 때까지 잘 크고 있거라. 얼릉 댕기 와서 할매가 많이 많이 쳐다봐주께.”

눈이 깊은 사람은 꽃을 눈길로 가꾸는가 보다. 작은 화분의 앙증맞은 꽃들이 꼬마 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어머니 시선은 가늘고 푸른 줄기에서 싱싱한 잎새 사이로, 이 꽃잎에서 저 꽃잎으로 나비처럼 분주하게 옮겨 다녔다.

이십여 년 전, 화단 앞에서 어머니가 하신 혼잣말을 나는 기억한다. “아무리 귀하고 예쁜 제 자식도 어떤 때는 미울 때가 있는디, 꽃은 왜 이리 볼 적마다 예쁘다냐.”

며칠 후, 어머니가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되었다. 지금쯤 화분 밑에 감추어 둔 열쇠를 꺼내 집에 들어오고, 오래된 가방에서 돋보기와 성경책과 안약을 꺼내 제자리에 놓을 때다 싶어서 전화를 했다. “내 집에 옹께 너무 좋다. 세상에 어디가 편허것냐. 내 걱정 말아라.”

그래놓고는 한껏 들떠 꽃들의 안부를 전해 주었다. 그 목소리가 은초롱처럼 맑았다. “아 글쎄, 저번 장날 사놓은 쪼깐한 화분이, 나가 없는 사이 손톱만 한 꽃을 피웠더라 말이시. 그래 갖고 이짝 저짝에서 할매 나 좀 보소. 할매 나부텀 먼저 봐주소. 함시로 서로 저 쳐다봐달라고 난리더라.”

동쪽 하천 따라 긴 방죽 끝자락 외딴집, 다시 당신의 일상으로 돌아온 내 어머니는, 오늘도 개미처럼 꼬물꼬물 텃밭 일을 마치고 이제 단잠에 드셨겠다. 세상에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눈길 고운 할머니를 위해 꽃망울 펑펑 터뜨리는 꿈을 꾸시겠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봄처녀처럼 활짝 웃어라, 친구야

마을 들녘에서 할머니 두 분이 봄을 캐고 계십니다. 이렇게 두 분이 봄을 함께 맞은 지가 50년이 넘었습니다. 서로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안다는 두 할머니는 어딜 가든 이렇게 꼭 붙어 다닙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참 서러운 것도 많았던 시절, 문만 열면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속마음 내비칠 수 있는 유일한 말벗이 되었습니다. 두 분 모두 남편을 여읜 지 10여 년, 그 후로 더욱 친자매처럼 지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웃어주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고….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반평생을 함께했습니다.

대전 동구 찬샘마을. 2009년 3월

사진, 글 김선규

불현듯 찾아온 봄이여,
천천히 가시게

충북 단양에서 오지로 손꼽히는 가곡면 보발리 성금마을. 밭이 산비탈에 있다 보니 기계를 사용할 수 없어서 여전히 소 쟁기질을 합니다. 7가구 주민들은 내 집 일, 네 집 일 구분 없이 서로 일손을 돕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하루 일을 접고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갑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소나 주인이나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충북 단양 성금마을. 2009년 3월

추억이 빛나는 밤에: 코미디언 구봉서, 후배에게 보낸 다섯 장의 편지

1926년생, 올해 나이 86세가 된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의 모습을 브라운관에서 볼 수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구봉서는 후배들의 부축을 받긴 했어도 운신에 큰 어려움이 없는 듯 편안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가 등장하자 코미디언 후배도 아닌데 저 역시 왠지 모를 고마움이 가슴속에 가득 차오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MBC

 

지난 2월 3일 ‘추억이 빛나는 밤에’의 게스트는 이홍렬과 이성미였습니다. 구봉서는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어려운 걸음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방문을 전혀 모르고 있던 이홍렬은 구봉서의 이름을 듣자마자 “설마… 설마 어떻게 오셨겠어?”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노선배의 몸을 부축해서 걸어 나오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1990년대 초반, 이홍렬은 일본 체류 중에 구봉서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주실 거라고는 기대도 못 했었답니다.그런데 구봉서는 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정성 들인 글씨로 편지지 5장을 꽉 채워서 보내주었습니다.그 편지는 이홍렬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었고, 지금까지 곱게 간직하고 있다 합니다.그 편지의 내용 일부를 소개해 봅니다.

‘그러잖아도 어떻게 연락해야 되나 걱정하던 차에,
자네 편지를 받아보고 자네 얼굴을 보듯이 반가웠네.
자네의 처지와 심경을 나는 훤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네.
어쨌든 그 역경을 헤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니,
반갑고 기쁘고 고맙기도 하네.(모두 눈물이 글썽)
우리 희노회(아마도 희극인들의 모임인 듯)는 약속한 대로
매주 화요일에 꼭 모이고 있네.
박미선이는 한 번 나오더니 영 안 나오고(모두 울다가 웃음),
한무는 영 그 후로 한 번도 안 나오고(또 웃음)
나머지 식구들은 열심히 하고 있네…(중략)…
한국에 있는 코미디언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연장시킨다는데,
자네가 귀국한다면 평균 수명이 100세는 되리라 생각하네.
이제 할 말의 오분의 일도 안 됐는데,
벌써 어깨가 결리고 여기저기 쑤시니 그만 쓸까 보네.
자네 집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에게 연락하라고 하게.
주소가 바뀌면 바로 연락해줘.- 1991년 6월 15일 아침, 구봉서’

시원하게 터뜨리는 웃음 한 방이 얼마나 건강에 유익한지 많은 연구 결과로도 증명되었지요. 정말 좋은 코미디언은 타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네가 귀국한다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100세는 되리라….” 이와 같은 편지를 대선배가 보내주셨으니, 이홍렬이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그날 게스트와 MC 후배들은 대선배 앞에 세배를 드렸고 구봉서의 덕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자네들도 오래오래 코미디 하고…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하는 일에 긍지를 가져야 해요. 별 볼일 없는 선배라도, 자주 연락하고 끈끈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구봉서가 현역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풍채 좋고 표정도 유들유들하니 천생 희극인이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 당시의 유쾌한 모습보다 지금의 모습이 더욱 좋군요. 왠지 그 앞에 있으면 추운 날 아랫목에 발을 담근 듯 마음이 따스해지고, 인생의 모든 고통이 별것 아닌 듯 느껴지는…. 지금의 구봉서는 그렇게 신선 같은 풍채를 지녔습니다. 이러한 대선배가 생존해 계신다는 것은, 코미디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행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현정님은 명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십여 년간 출판사에 근무했으며 2009년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빛무리’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와 예능, 영화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봄의 싱그러움이 와락~ 양골담초

 

 
녹음이 시작되는 봄의 한가운데,
개나리가 지고 난 후 더 찬란하게 샛노란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양골담초(유통명 : 애니시다)입니다.
선명한 노란색에 잘 어울리는 시원하고 상큼한 향기~
진정 봄이 왔구나, 와락 달려드는 봄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어요.
시원하게 뻗은 꽃줄기, 인심 좋게 피어나는 풍성한 꽃들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뒤숭숭하고 우울한 기분도 말끔히 날아가 버립니다.
실내에서 키워도 예쁘지만 마당 있는 집에 울타리로 심어도 좋아요.
꽃이 지면 가지치기를 해주세요.
금세 잎이 자라나서 귀여운 관상용 화분이 된답니다.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햇빛
직사광선 또는 그에 가까운 밝은 햇빛을 좋아해요.
꽃이 피지 않는다면 햇빛이 모자란다는 증거.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마르면 한 번에 흠뻑 주세요.
꽃이 지고 나면 조금 건조하게 관리하세요.

번식
목질화된 가지를 골라 꺾꽂이하세요.

체지방이 쌓이는 걸 막아줘요, 한식 스타일 스파게티 메밀국수볶음

이탈리아 요리가 건강식으로 주목을 받는 이유는
질 좋은 올리브유와 신선한 제철 채소, 어패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파게티의 면은 대부분 수입한 것이다.
탱글탱글하게 삶은 스파게티 면을 먹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건강을 생각해서 하얀 밀가루로 만든 수입 면이 아니라
우리 식의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양지 자연요리 연구가

재료 준비

메밀국수(건면) 160g, 청경채 100g, 당근 1/4개, 맛타리버섯 1팩, 홍고추 1개, 바지락 1봉지, 간장 1큰술, 청주 2큰술, 다진 마늘 0.5큰술, 소금/후춧가루/올리브유 조금씩

만들기

① 메밀국수를 제시된 시간대로 삶아 냉수에 헹구어 건져 체에 밭쳐 물기를 뺀다.

② 청경채는 3~4cm 길이로 썰고 당근도 같은 길이의 골패 모양으로 썬다. 맛타리버섯은 가닥가닥 손으로 뜯는다. 홍고추는 얇게 어슷 썰고, 바지락은 씻어서 체에 밭친다.

③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다진 마늘과 홍고추, 당근을 넣어 볶다가 당근에 기름이 돌면 청경채와 맛타리버섯, 바지락을 넣어 같이 볶는다.

④ ③에 간장과 청주를 넣어주고 물을 1/4컵 정도 부어주어 촉촉하게 한 다음 메밀국수를 넣어 한데 어우러지도록 볶고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을 한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마음수련으로 달라진 우리 부부, 이제 한 곳을 향해 갑니다.

김지영 45세. 서울 관악구 서원동

이마와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과 무표정한 얼굴….
어느 때부터인가 거울을 마주하는 게 싫었습니다.
무뚝뚝해지고 강퍅해지는 내 모습을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나이 들수록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억센 아줌마일 뿐이었습니다.

20년 전, 결혼했습니다. 독신으로 살고 싶은 마음도 접게 한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시작한 결혼 생활. 자유를 포기한 만큼 가정을 일구며 더 큰 걸 얻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참고 인내해야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내 삶은 온데간데없어진 것 같았고, 직장 일로 바쁜 남편을 볼 때면 ‘나를 잊어버렸구나…’하는 생각에 외로웠습니다.

어느 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을 아빠한테 맡긴 채 떠난 하루 동안의 기차 여행.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부산의 광안리 바닷가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발 디딘 곳만 달라졌을 뿐 내 마음은 그대로였으니까요. 돌아가면서도 마음은 집안 걱정으로 가득했고, 더욱 우울해졌습니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근심은 더해졌습니다. 채권자들에게 시달리기도 하고, 생활비 없이 지내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아이들을 제대로 뒷바라지 못해주는 게 미안했고, 경쟁 사회에서 뒤처질까 불안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나날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남편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칠 때면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러냐”며 아이들을 닦달했습니다. 큰아이가 “엄마, 왜 그래~” 하며 울부짖었고, 나는 멈칫했습니다. ‘정말 내가 왜 이러지?’ 하지만 그것도 순간뿐 어찌할 수 없이 반복되는 상황들. 마치 내 마음은 촘촘한 체가 되어버린 듯 남편이나 아이들의 모습, 말 한마디도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엄마가 없는 게 행복해” 하던 아이의 상처 어린 말들, 그 말을 들은 게 억울해서 또다시 남편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집안은 총성 없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논산에 있다는 마음수련 교육원으로 떠났습니다. 평소에는 생각해볼 수도 없는 한 달간의 긴 여행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는 뭔가 해결되지 못하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절박한 만큼 집중해서 수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니 우리 부부는 한 공간에 있어도, 한순간도 같이 산 적이 없었더군요. 나는 과거에 살고, 남편은 미래에 살고 있었으니까요. 각자의 기나긴 평행선을 향해 달려갈 뿐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연애 시절 남편이 나에게 보여줬던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달라진 남편을 보며 외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반면, 남편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지나고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들고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교차점은 없었습니다. 남편만 보면 원망스럽고 불안하고, 남편 역시 믿어주지 않는 아내를 답답해했습니다.

내게 가족은 나의 바람과 기대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참으로 가족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을 때…. 눈물이 쏟아졌고, 그 순간 소외된 엄마, 소외된 주부, 소외된 아내라는 우울한 마음도 함께 녹아내렸습니다.

내 한과 내 욕심과 내 집착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향해 꽁꽁 묶어놨던 줄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자, 비로소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 준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커준 아이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거센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내 마음도 점차 잔잔해지고,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남편도 함께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고, 우리 부부는 이제야 같이 사는 기분입니다.

남편이 말합니다. “당신 덕분에 마음공부도 하고 이렇게 한마음으로 살게 돼서 너무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참 고마웠습니다. 아이가 무릎 위에 누워 살갑게 얼굴을 비비고,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반갑게 맞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그 일상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비운 만큼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거울을 봅니다. 40대 중반의 한 아줌마가 활짝 웃습니다.
세월에 따라 저절로 생겨나는 주름도 예쁘게만 보입니다.
부족하다고 슬프지도, 넘친다고 자랑할 것도 없이
주어진 조건과 세상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래서 나는 행복한 엄마, 아내입니다.

육아 스트레스, 시원하게 날렸어요

한순애 41세.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여덟 살 남자 아이와 다섯 살 여자 아이를 둔 결혼 8년 차 엄마다.
하루하루가 아이들의 소소한 다툼으로 시끄럽다.
장난감 하나를 두고 서로 가지고 놀겠다고 싸우기라도 하면 남편은 항상
울고 있는 작은아이 편을 들고, 큰아이는 서럽게 운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아프다. 아이들에게서 예전의 내 모습이 비춰질 때마다,
혹시 나처럼 상처가 남을까 봐 늘 불안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다. 어부이신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시는 편이라 어머니와 자주 다투시곤 하셨다. 8남매를 키우느라 돈 때문에도 자주 싸우셨다. 내가 괜히 태어나서 더 힘들게 해드리는가 싶어, 눈치 보며 꾹꾹 참으며 살았다.

부모님께 학용품 사달라는 얘기를 제대로 못 하고 등록금이 나와도 말을 못 해 맨 나중에 내곤 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직장 상사들의 눈치를 많이 보다 보니 오래 일하기가 힘들었다.

결혼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을 키우면서 늘 참고 눈치 봤던 마음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육아에서 나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돈 쓸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어린 시절 불우하고 어두웠던 가정 환경이 떠올랐고,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힘들 때 아이들이 떼를 쓰고 투정을 부리면,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감정이 격해지면 아이를 때렸다. 그리고 나서 잠든 아이를 보면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아이가 놀다가 실수해서 값비싼 물건이라도 깨면 놀란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기보다 소리부터 질렀다. 머리론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많은 부분들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행동들이 되물림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죄책감과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막막했고 희망이라곤 없었다. 이런 부모의 성격과 마음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전해지기에 더 끔찍했다.

그래서, 마음수련을 결심했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한테 물질적으로 장난감 하나를 더 사주는 것보다 상처 주지 않고, 그늘 없는 밝은 마음을 물려주고 싶었다. 과거가 지금 현재의 모습이고, 현재가 미래라고 생각하니, 나부터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수련을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쉰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들과 마음속의 짐들을 지울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었다. 설움과 한숨이 눈물과 함께 빠져나갔다.

열등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가슴속에 쌓아두었던 상처들이 하나하나 걷어져 나갔다. 열등감과 불안함, 자책이 사라진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엄마가 다시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고 장난감 하나를 두고 싸우고 있다. 얼마나 아이들다운가. 나는 더 이상 슬픈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웃으며 투정을 받아주고 보듬어준다. 어깨를 짓누르던, 아이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도 사라졌다. 아이들을 세상에 내려놓을 줄도 알고 마음 놓고 바라보는 여유가 생겼다.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것은 선생님이 가르쳐주고, 친구들과 만나며 배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짐이 아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상처를 치유해주고 함께 성장해가는 고마운 존재, 세상의 일부분이었다.

내가 밝아지니, 아이들의 표정도 더 밝아졌다. 아이들이 봄 새싹처럼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인다. 딸아이는 특히 나를 닮아 예민하고 고집이 센 편이었는데, 지금은 엄마처럼 많이 밝아지고 두리뭉실 놀기도 잘한다.

“예쁜 우리 아이들 대현이 민서야,
미안한 게 많은 부족한 엄마한테 엄마라고 불러줘서 고맙다.
엄마가 더 많이 노력할게.”

겨우내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여니 봄 햇살이 맘껏 쏟아져 들어온다. 내 마음에도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은 가고 꽃 피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새봄이 찾아왔다. 나에게도 희망이 보인다.

엄마 스트레스를 풀어드리는 우리가 진짜 ‘엄친아’

집안일을 도와드려요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집안에서 하는 일은 어렵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6살 때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설거지를 못 하신 걸 보았다. 내가 재밌을 줄 알고 했는데 냄비는 너무 무겁고, 허리는 너무 아팠다. 그때부터 설거지가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 9살 때 손님이 오셔서 엄마를 도와 하루 종일 요리를 해보았다. 그때도 요리는 재밌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그때서야 엄마들이 하는 집안일이 보통 일이 아니란 걸 알았다. 엄마가 팔이 아프셔서 나는 지금도 엄마를 도와 쌀 씻기, 음식물 쓰레기 갖다 버리기, 청소기 돌리기, 빨래 널기, 바닥 닦기 등을 도와드린다. 그런데 가끔 엄마가 너무 많은 일을 시키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난다. 그래도 그 일을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깐 엄마들은 아프셔도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앞으로도 난 엄마가 시키시는 심부름을 날 보살펴주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은 마음으로 할 것이다.

신미수 13세. 서울 월촌초등학교 6학년

따듯하게 안아드려요

엄마가 직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시다 퇴근해서 집에 오시면 표정이 어둡고 힘들어 보일 때가 있다. 바로 침대에 쓰러져 주무실 때면 안쓰럽기도 하다. 어릴 때 엄마가 따듯하게 안아주었던 게 좋아서인지 몰라도, 나도 모르게 엄마가 집에 오면 두 팔을 벌려 안는다. “엄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빨리 주무세요”란 말과 함께. 가끔 다 큰 자식이 안긴다며 “수염이 까칠하다, 저리 가~” 하지만, 좋아하시는 게 분명하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로하는 나만의 응원가인 셈이다. 엄마의 밝은 미소를 보면 나도 힘이 나는 것 같다.

윤상혁 19세. 서울 현대고등학교 3학년

동생을 돌봐줘요

엄마가 꽃 가게를 하시다 보니 밤늦게 오실 때가 많다. 엄마가 없어서 동생과 밥 차려 먹고 설거지할 때마다 힘들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이해가 갔다. 엄마가 이렇게 힘드니 나한테 짜증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엔 내가 미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엄마가 덜 힘들게 도와드리고 싶어서 내가 동생을 돌보기 시작했다. 동생과 놀아주고, 한글을 가르쳐주고, 씻겨주기도 한다. 동생이 방을 어질러 놓을 때면 “엄마가 지금까지 너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셨는데 이렇게 하면 어떡해” 하며 오빠로서 충고도 한다.^^ 우리가 집안을 깨끗이 해놓아서, 엄마가 집에 들어오실 때 밝은 표정을 지으시면 행복하다.

송영철 13세. 제주도 서귀북초등학교 6학년

엄마랑 데이트해요

3년 전부터 엄마가 할아버지의 병 수발을 하게 되었다. 매끼 할아버지의 식사를 챙겨드려야 해서 밖에도 잘 못 나가신다. 옛날엔 그런 엄마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아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서 마음이 아파왔다. 그동안 우리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셨고 이젠 자식들이 다 컸으니 친구도 만나고 여행도 다니시면 좋으실 텐데, 오히려 우리를 키우느라 힘들었던 때로 되돌아간 거 같아 맘이 아프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기분전환 겸해서 엄마와 영화나 연극 공연을 보러 간다. 하루라도 집안일에서 해방시켜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가 즐겁게 보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 기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왜 진작 해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죄송한 마음이 든다. 서로 공연을 본 소감을 얘기하다 보면 엄마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도 더 잘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이보희  29세. 회사원.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

 

‘수고했어’ 한마디가 아내를 행복하게 합니다

김종신 41세.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주부 역할을 자청한 남자, 남편들에게 고함

나는 전업주부이다. 공무원인 아내가 직장을 계속 다니기로 하며 가장 역할을 떠맡았다. 5살 된 딸을 키우고 가정 일을 하며, 과외를 한다. 이런 생활이 만 2년을 넘어갔다. 전임강사였던 시절 아내와 나는 평일 한 끼 식사도 같이 하기 힘든 상태였다. 아내가 퇴근하면 난 일을 하러 나가야 했고, 아내가 출근할 때 난 잠에 취해 있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고 아내의 1년 휴직 기간이 끝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바로 육아 문제였다. 아이를 할머니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돌도 안 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안정적인 아내가 직장 생활을 계속하고 불안정한 직장인 학원 강사였던 내가 전업주부를 하기로 했다.

집안일은 작은 일의 연속이지만 그것이 주는 피곤함과 스트레스는 주부라면 다 알 것이다. 아침 준비 후 청소하고, 점심 준비하고 빨래하고, 아이와 놀고, 저녁 준비하고 청소하고…. 조금 과장하면 아내가 퇴근해서 아이와 놀아주기 전에는 쉴 틈이 없다. 나름대로 건강한 편인 내가 이렇게 힘들다면 여자인 주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초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기 시간이 없다는 것,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작아져간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존재감을 회복하기 위한 사회생활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좋지 않을까 싶다.

세상의 남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내 입장에서 아내를 보고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오늘도 아내는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고,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하루 종일 집에서 힘들었을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줄 남편을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 소박한 바람을 밖에서 힘들게 일하다 왔다는, 돈 벌고 왔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뭉개지 않았으면 한다. 남편이 먼저 “집안일하느라 오늘 수고했어요”라고 따뜻하게 한마디 건네고 안아주자. 아빠를 기다렸을 아이들과 진심으로 30분이라도 놀자. 소파에 누워 TV에만 시선을 맞추지 말고 말이다.

직장 일이 힘든 것을 안다. 그러나 집안일도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자신만큼 어쩌면 자신보다 힘들었을 아내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애정 어린 한마디 잊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편으로, 가장 행복한 아내와 자식과 함께, 더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농촌과 도시를 잇는 착한 브로커, ‘빛트인’의 정천식씨

‘배가 저온 창고에서 상해갑니다. 차라리 좋은 일에 쓰일 방법은 없을까요?’

작년 5월, 트위터에 올라온 어느 농민의 글이다. 이 글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번져나갔고 결국 한 청년의 눈에 들어왔다. 청년은 배의 활용 방법을 인터넷으로 공모했고, 충남 아산의 한 마을에서 잼을 만들 수 있다는 답변을 받게 된다. 결국 쓰레기가 될 뻔했던 배들은 소셜 네트워크와 청년의 노력으로 배 잼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태풍이나 구제역처럼 갑작스런 재해가 발생하면 판매할 시기를 놓치는 농산물이 많이 생겨요. 먹는 데 문제가 없어도 외모 때문에 제값을 못 받는 ‘못난이 농산물’도 생기고요. 그런 농산물을 대신 팔아주는 착한 중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경희대 3학년에 재학 중인 정천식씨는 청년 기업 ‘빛트인’의 대표다.

‘빛트인(Between)’은 작거나 못생겨서, 혹은 판로가 없어져서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하는 농산물을 도시의 소비자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위탁 판매하는 청년 기업. 농촌과 도시에 희망의 빛을 틔운다고 해서 ‘빛트인’으로 이름 붙였다 한다.

고등학교 때 조리를 전공했던 정천식씨는 작년 3월 박원순씨의 ‘희망제작소’에서 진행한 희망별동대 청년 프로젝트 중 친환경 먹을거리 분야에 참여를 시작했었다. 그러던 차 처분 못한 배 때문에 고민하는 농민의 글을 보았고 배 잼 만드는 일까지 적극 도왔다.

그것은 평소 정천식씨가 생각하던 것들이기도 했다.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처치 곤란, 한숨 덩어리 취급을 받으며 버려져야 하는 농산물들에 대한 재활용 말이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동료도 생겼다. 일본에서 1년간 농사를 체험하며 환경 문제를 고민해왔다는 경희대 4학년 김주영씨가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며 합류한 것.

처음엔 돈도 없고 경험도 부족한 대학생들이 농산물 유통 사업을 현실화할 수 있을까, 단순한 봉사 활동 아닐까, 부정적인 의견도 많았다 한다. 하지만 이들은 직접 농촌 현장을 체험하고 농산물 시장, 일본의 유통 시장까지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고, 작년 5월엔 ‘배 잼 판매 프로젝트’, 7월에는 ‘유기농 단호박 판매 프로젝트’를 실현해 나갔다.

그들은 신세대답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를 충분히 활용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SNS의 특성 때문에, 큰 비용 없이 사업의 아이디어 공모와 홍보, 판매가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작년 9월, 추석을 앞두고 태풍 ‘곤파스’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도 이들은 농촌으로 달려갔다. ‘빛트인’은 그중 한 농가의 흠집 사과를 대신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강한 바람 때문에 흠집은 났지만 먹기엔 전혀 문제가 없어서 ‘OK사과’라고 이름 붙였고, 농민과 함께 소비자 가격을 책정한 뒤,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했다. 결과, 한 달 만에 4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과를 구매했고, 고객들은 “못난이 사과가 맞느냐? 정말 맛있다”며 추가 주문도 이어졌다.

응원의 메시지도 폭발적이었다. 함께 일하고 싶다며 휴가 기간에 찾아온 군인도 있었고, 무료로 컨설팅을 해주겠다는 컨설팅 회사 대표, 1년 동안 자동차를 후원해주는 곳도 생겼다.

도움의 손길이 뻗칠 때마다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면서 다시 열정이 솟아난다는 이들은 혹여 착한 일을 한다며 안주하고 있진 않은지, 기존 유통업자의 관행을 따르고 있진 않은지, 항상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착한 중개자는 농민에게도 소비자에게 꼭 필요한 파트너예요. 당장 큰 도움은 못 되더라도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미래의 농촌과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취재 문진정 사진 홍성훈

-天に生まれて生きる道 -生きて天?に生まれてこそ天?に行ける


天に生まれて

生きる道

天は高く、一点の雲もない

天地はここから生まれ、ここへと?るのだなあ

人が生まれるのも天地の調和によってである

この天は限りなく、何も語らないが、全知全能である

天以前の天である精神に自分がいることに感謝だなあ

この世にいることに感謝だなあ

自分が本?の精神を取り?してみたら、この世が自分と一つであり、この世と共に自分は

順理に生きるのだ

天を?み、天に祈っても

本?の天である本?の精神でなかったら、天が?えてくれたことなど何も無い

この世にあるものはみな、一つの浮き雲と同じで

この天なる精神の?のみが永遠なる本物の世界だ

人間が完成し人間が生きることとは

この天に生まれて生きるということなのだが

そこへ至る道はただ自分を捨てる道である

自分がなくなれば天の精神だけが?り、その天で生まれ?われるのである

生きて天?に生まれてこそ天?に行ける

 

生まれながらにして人間は、この世とこの世の物事を??に撮り?める心を持っている。

我?の?親も祖先もみなが、この世を??に撮って作った?像の中で生きては死んで行った。

それゆえ人間の心はそもそもが、??を撮ってできた一つのフィルムに等しいのである。

人はフィルムの中の筋書きにしたがって話し、行動して生きる。

しかし、??は?物そのものではないように、このフィルムのすべては?物である。

ゆえに人の心そのものが罪であり業であるのだ。

この??の世界と、??そのものである自分とを無くしきらないことには、天?であるこの世に出ることはできない。

自らの個?の心の世界がなく、自分が存在しなければ本?の世界はあるではないか。

本?の世界に復活し、生まれ?わろうとするのなら、自分と自分の心の世界とを無くさなければならない。

自分と自分の心の世界がすべてなくなれば本?の世界が現れるだろう。

?理である天の精神と、いつ何時どこにいようが常に一つになっている時に天に生まれ出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し、

天の?理のエネルギ?と神なる?と魂として100%完全に生まれ出なければならない。

生きて天?に生まれてこそ、天?に行けるのである。

文と? ウ?ミョン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