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ed for ""

집에는 엄마가 있다

나는 가끔 그 사람을 떠올린다. 잊을 수 없어 기억의 갈피에 새겨두고 있는 것이다.

절친한 친구도 아니고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 안다면 겨릅대처럼 약한 체질에 바보스러운 데다가 간질병까지 앓는 40대의 지체장애자라는 정도이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면 그 사람은 내가 40여 년 살아온 자그마한 진거리에서 밥 동냥 하는 걸인이었다. 막말로 거지 비렁뱅이라는 말이다.

거지란 대체로 그러하듯이 그 사람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삼검불처럼 헝클어진 뿌연 머리, 구질구질하고 너덜너덜한 옷에 발가락이 나오는 신발을 질질 끌고 다니는데 때가 가득 낀 손에는 언제나 작은 가방 하나와 사기물이 떨어진 법랑 고뿌 하나 그리고 뚜껑이 오그라든 군용 밥통이 들려 있었다.

그 사람의 하루 일과는 아침부터 골목길을 오르내리면서 가가호호의 대문을 두드리는 것인데 그렇게 먹을 것을 조금 얻으면 휘파람을 불며 돌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냉대를 받기는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은 그를 보면 온역신을 만난 듯이 피하였고 아예 대문 밖에서 쫓아버리곤 했다.

그런다고 인심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내남이 다 식량난으로 배를 곯던 세월에 아무리 동정심이 많다 해도 매일같이 쌀과 밥을 퍼줄 만한 집이 어디 그리 많았을까? 조무래기들의 기시는 더구나 심했는 바 무리를 지어 따라다니며 놀려주기, 욕하기, 침 뱉기에 돌 총질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그 사람의 동냥길은 그만큼 갖은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그래도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마음이 약해서 아무런 항변도 없이 고작 화내는 흉내를 내다가 히쭉 웃으면 끝이었다.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에게 ‘히쭉이’라는 별호를 달아주었다.

훗날 내가 교편을 잡고 출근할 때 히쭉이를 만난 것은 간이 음식점 앞에서였다.

바로 그 무렵부터 히쭉이의 동냥 반경은 집집의 대문을 두드리던 데로부터 보다 안전하고 구걸 확률이 높은 음식점으로 옮겨진 것이다. 히쭉이는 진거리에 있는 역전식당, 대중반점과 회족식당을 전전하면서 구걸하였는데 그 방법을 살펴보니 먼저 유리 창문으로 지켜보다가 어느 상의 손님이 일어나면 즉시로 뛰어 들어가 먹다 남긴 음식을 마구 집어 먹는다. 그러다가 혹시 만두나 빵 조각을 만나면 가방에 집어 넣고 밥이 있으면 밥통에 담고 반반한 반찬이 있으면 법랑 고뿌에 담으면서 운이 좋다는 듯이 히쭉 웃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서였다. 큰길가에 숱한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기에 무슨 구경거리가 있나 보다 하고 다가서 보니 히쭉이가 쓰러진 채로 입에 거품을 가득 물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말로만 들어오던 간질병이 발작한 것이다. 예사롭게 여기는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하나 둘 제 갈 길을 가고 시간이 꽤나 지나서야 의식을 회복한 히쭉이가 언제 그랬냐 싶게 부스스 털고 일어났다. 히쭉이는 아무 말 없이 히쭉 웃더니 땅에 쏟아진 콩나물 반찬과 밥을 끌어 담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팔부 취급도 못 받는 히쭉이가 매일같이 부지런히 밥 동냥을 다니는 것은 자기 하나의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집에 홀로 계시는, 바깥출입도 못 하는 칠십 고령의 앉은뱅이 노모(老母)를 공양하기 위해서였다.

남들이야 웃건 말건 나는 그날 히쭉이가 한 말에 진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체장애자로, 걸인으로 이 세상 밑바닥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히쭉이에게 그처럼 지극한 효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더는 히쭉이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히쭉이네 집은 철길 동쪽 마을에 있었다. 히쭉이는 운신 못 하는 엄마의 하루 세 끼 식사를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금 반반한 음식을 여남 있게 얻는 날이면 나머지는 움 속에 넣었다가 다시 끓이고 덥혀 엄마에게 드리는 그런 효자였다.

그것도 음식이 변했을까 봐 먼저 맛을 보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엄마에게 드리는 그런 효자였다.

그 뒤로 나는 히쭉이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사업 전근으로 현성을 거쳐 다른 고장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년이 흘러간 후에도 내가 히쭉이를 잊지 못하는 것은 거지 효자 히쭉이가 한 말이 항시 내 기억의 깊은 곳에 빛나는 거울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거울을 보면서 옛날 어느 조대의 임금님이 알았다면 효자비라도 세웠으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쩌면 히쭉이는 신통히도 까마귀를 닮은 인간이다. 낳아준 정, 키워준 정, 그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은혜를 갚기 위해 늙고 병든 엄마 까마귀에게 날마다 먹이를 구해다 준다는 그런 새끼 까마귀 같은 존재였다.

찍어 말해서 히쭉이는 걸인이지만 신분과는 관계없이 동양인의 가장 아름다운 사상이며 미덕인 부모에 대한 효심을 안고 효행 길을 산 사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효란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효란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으로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척도인 바, 어찌 효를 떠나 가족 사랑과 민족 사랑을 담론할 수 있으며 또 어찌 효를 떠나 참되고 바른 인생을 운운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 본연의 의지와 자세로 구축된 미풍양속 중에 효라고 하는 영원히 사윌 줄 모르는 어여쁜 꽃이 있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한결 아름다운 것이리라!

이 글을 쓰는 이 시각. 나의 귓전에는 “집에는 엄마가 있는데… 엄마가 날 기다리는데…”라고 하던 히쭉이의 말이 떠날 줄 모른다. 동시에 나의 눈앞에는 쏟아진 음식을 담아 가지고 집으로 달려가던 히쭉이의 가냘픈 뒷모습이 안겨온다. 나는 지체장애자와 걸인이기 전에 인간인 히쭉이의 말과 행동에서 평생 두고 못 잊을 효의 꽃을 보고 있다.

지금 나는 나만이 알고 있는, 남들이 모르고 있는 히쭉이라는 효의 꽃과 그 꽃이 풍기는 효의 향기를 이 세상을 함께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

* 저자의 북한식표기법 원문은 한글맞춤법 표기에 따라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김동진님은 1944년 중국 흑룡강성 녕안시에서 태어났으며 길림성 훈춘시문체국창작실 창작원으로 근무하다 2004년 정년퇴직하였습니다. 현재 중국민족예술가협회,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 <두만강 새벽안개>를 비롯하여 시조집, 수필집, 가사집, 동요동시집 등 15권을 출간했습니다.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한국해외동포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밴댕이 선생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설이 있지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루 여덟 시간씩 개구쟁이 등살에 속이 상할 대로 상해 나온 것이니

지나가던 견공이 피해 갈 법도 합니다.

‘초등학교 선생들은 쩨쩨하다’는 말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온종일 철부지들 속에서 아옹다옹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이 수준이 된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랍니다.

우리 반 녀석들이 요즘 아주 드러내놓고 나더러 ‘늙었다’고 합니다. ‘못생겼다.’ ‘할배 같다.’ ‘늙었다.’ 이런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 아픔을 주는지, 열한 살 인생들이 알 턱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내 자신을 못생기거나 늙었다고 생각한 적이 결단코 없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교실에는 일기나 숙제를 안 해온 개구쟁이들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요 녀석들이 제 할 일은 안 하고 선생님 앞에서 콩닥콩닥 잡담만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내가 “어이, 꼬마들 빨리 숙제하고 집에 가시지” 그랬더니 녀석들이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꼬마들은 꼬마라는 호칭을 엄청 싫어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어이, 미남들 빨리 숙제 안 할 거야!”

그랬더니 째깍 반응이 옵니다. 일명 ‘빠박이 아저씨’ 성흠이가 씨익 돌아보며,

“누가 미남인데요?”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려고 올망졸망 앉아 있는 꼬마들의 얼굴을 비교 관찰 하였습니다. 나름 귀엽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 미남이라 할 수 없는 앳된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살짝 농을 섞어 바른 대로 말해주었지요.

“일단 선생님이 제일 미남이고 너희들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표정들이 갖가지입니다. 지태는 ‘나는 뭐 원래 미남도 아닐 뿐이고’라고 중얼거리고, 준영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저 혼자 비시시 웃고, 동승이는 빨리 일기 쓰고 축구하러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책상에 코를 박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 아까 질문했던 ‘빠박이 아저씨’가 한마디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안 늙었잖아요.”

요 녀석이 또 민감한 내 나이를 들먹여 반격을 합니다.

“뭐라고! 내가 어디가 늙었냐? 쨔샤!”

뚜껑에서 슬슬 김이 솟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쫀쫀하게 따지다가는 나만 손해입니다. 그래서 미남의 품위와 교사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참습니다. 농담 끝에 분위기는 싸늘해지고 아이들 연필 소리만 사각사각 들립니다. 꼬마들은 아무렇지 않는데 나 혼자 외톨이처럼 심각해집니다. 이렇듯 요즘 나는 체중 30kg 남짓하고 신장 약 130cm 정도 되는 꼬맹이들 때문에 가끔 토라집니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마음속에 깊은 바다를 품은 사람들

사진, 글 이용택 SBS-TV <최후의 툰드라> 촬영감독

모두 잠든 밤에 촬영한 오로라의 장관.

시베리아 북서쪽 야말반도. ‘야말’은 세상의 끝을 뜻한다. 툰드라의 유일한 순록 유목민 네네츠족은 겨울에는 남쪽으로, 여름에는 북쪽으로 7천여 마리의 순록과 3백여 대의 썰매를 끌고 1천㎞의 대장정에 나선다. 수천 년간 순록과 함께 살아온 툰드라 원주민의 순수한 삶은 SBS 특집 다큐 <최후의 툰드라>로 방영돼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촬영 틈틈이 스틸사진에 담은 툰드라의 삶.

툰드라 사람들이 입고, 먹고, 집을 지을 때 쓰는 것도 순록이다. 소처럼 순하디순한 순록은 그들의 삶을 지켜준 가족이다. 원주민들은 특별한 표시를 하지 않아도 자기 순록을 다 알아본다. 네네츠족의 거대한 이동은 순록이 먹을, 겨울엔 눈 밑의 이끼를, 여름엔 새순을 찾기 위해서다. 조상 때부터 이어져온 유목 생활이라 지도가 없어도 별을 보면 몇km 된 지점인지 정확히 안다. 특별한 지휘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수천km를 조직적으로 움직여 이동하는 것이 놀라웠다.

+ 1년 중 7개월이 겨울인 툰드라의 겨울은 보통 영하 40~60도가 예사다. 여기서 어떻게 살까 싶었다.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영혼을 존중하고, 대자연을 경외하는 이곳 사람들에게 툰드라는 척박한 땅이 아니라, 풍요의 땅이다.

+ 이들은 12시간 자고 12시간 일을 한다. 큰 천막집인 ‘춤(chum)’을 짓고 같이 다니지만 남의 집 사생활엔 일절 관여를 안 한다. 가족 구성원의 일은 뚜렷이 구분되어 아빠는 순록을 키우고, 엄마는 밥 짓기 등 ‘춤’을 관리한다.

순록 가죽의 딱딱한 부분을 다듬는 네네츠족 여성. 순록의 힘줄을 꼬아 실로 만들어 바느질하며 옷을 짓는다.

+ 툰드라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집안일을 도와준다.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배는 큰 순록 썰매를 몰고, 작은 ‘춤’을 뚝딱 지어낼 줄 알며 도시의 아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립성과 의젓함을 지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살아가는 법을 자연 속에서 스스로 배우는 강인한 아이들.

+ 아이들은 무척 해맑다. 영혼이 아주 맑고 투명하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아이들을 매우 존중한다. 스스로 할 수 있게끔 부모들이 이래라 저래라 지적과 간섭을 안 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할 일을 찾아낸다.

이곳은 원주민이 입는 전통 의상이 아니면 얼어 죽을 만큼 춥다. 말리차라 부르는 순록 털가죽 옷을 입는다. 정말 따듯하다.

+ 왜 촬영 팀을 받아줬는지 네네츠족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는 “난 당신들이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라서 받아줬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잘사는지 묻지 않았다. ‘한국에는 호수가 몇 개 있는지’ ‘나무와 어떤 물고기가 있는지’ 등 자연에 대해 물었다.

 

+ 네네츠족에겐 삶의 원칙이 있다. 어른과 아이를 똑같이 대한다는 것. 부모는 아이에게 지시를 하지 않고 큰소리로 야단을 치지 않는다.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원수여도 조난당하면 구조해주고, 누구든지 집에 오면 이유를 묻지 않고 사흘간 먹여주고 재워준다. 항상 필요한 만큼,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

+ 순록이 이동하기 전 간단한 식사를 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이 불을 때고 준비를 한다.

이용택 촬영감독은 1973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신구대학을 졸업하고, <SBS 모닝와이드>를 시작으로 영화 <워낭소리> <세계 테마 기행>(EBS) <현장르포 제3지대>(KBS) <러브 인 아시아>(KBS) <최후의 툰드라>(SBS) 등의 프로그램을 촬영해왔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빛나고

어둠이 내린 세상에는 적막과 고요만이 가득하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만이 살아 숨을 쉰다.
저마다의 밝기와 저마다의 빛깔로 제각각 반짝이는 별들,
은하수가 흐르고 별똥별들이 떨어지는 그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눈앞에 보이는 건 온통 드넓은 하늘에 수많은 별뿐이다.
이토록 많은 별이 있었던가. 우주는 얼마나 드넓은 것인가.
우리가 어찌 이 광활한 우주에 ‘오직 우리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우주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떠날 때 그랬습니다.
온갖 소원을 빌어야겠다고…
하지만 밤새 아무 소원도 빌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생각건대
나와 별이 하나 된 순간
인간사 모든 소망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님의 시처럼
그렇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면 될 것입니다.

경기도 가평군 코스모피아 천문대에서. 2009년 11월

사진, 글 김선규

벨벳처럼 우아한 새해 선물, 블랙클로버

요즘 선물할 데 참 많으시죠? 연말연시 들뜨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흘러가는 시간을 음미해보자는 거룩한 뜻을 살린다면 무채색의 블랙클로버는 어떤가요? 식물이 가진 색 중에서 가장 보기 드문 것이 이 블랙인데 보드라운 최고급 벨벳을 연상시키는 색감과 잎 가장자리를 따라 그려진 초록색 라인 덕분에 우아함이 더욱 돋보입니다. 작은 뿌리 하나만 있어도 어느 사이엔가 화분이 꽉 차고 다시 두 화분에 나눠 심어도 금세 또 꽉 차는 블랙클로버는 가격도 착하고 잘 커서 주변 분들께 선물하기에 아주 좋아요. 블랙클로버의 사랑스러움이 당신 마음에도 포근히 가 닿기를….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햇빛 직사광선이나 그에 가까운 강한 햇빛을 받아야 잎 빛깔이 예뻐져요.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마르면 한 번에 흠뻑 주세요.
번식 포기 나누기나 꺾꽂이(삽목법)로 하세요. 추위에도 강해서 영하로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거뜬하게 월동합니다.

위장을 보호해요, 연근 파래전

연근과 파래는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을 예방하고 진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파래는 추운 겨울이 제철이지만 구할 수 없을 때는 파래가루를 활용해도 좋다.
또 새콤달콤하게 무쳐도 좋지만 이렇게 전을 부치면 쫀득쫀득해지며 맛과 향이 더 좋아진다.

재료 준비

연근 1개(큰 것), 파래 1/2컵(한 타래), 녹말·밀가루 각 1큰술씩, 소금·후춧가루·쌀눈유(현미유)·밀가루 조금씩

만들기

① 연근은 껍질을 필러로 깎고 얇게 저며 썬 것 10장을 남기고
② 나머지 연근은 강판에서 간다. 파래는 물속에서 흔들어 씻어 물기를 짠 다음 짧게 썬다.
③ ②의 연근에 파래와 녹말, 밀가루, 소금, 후춧가루를 넣어 섞는다.
④ 팬에 쌀눈유를 두르고 ③을 한 숟가락씩 떠놓은 다음 ①의 얇게 저민 연근의 한쪽 면에 밀가루를 묻혀 위에 올리고 손으로 살짝 눌러 앞뒤로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콤플렉스, 깨어나야 할 꿈일 뿐

콤플렉스, 깨어나야 할 꿈일 뿐

차재성 사진 홍성훈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나름 생긴 건 괜찮았다. 하지만 멀쩡한 겉과 다르게 사람들 앞에서 말이라도 할라 치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 아무것도 아닌 말에 상처받고, 심장은 쿵쿵 뛰고 말꼬리도 쏙 기어들어갔다. 어린 시절,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면 가게 앞에 쭈뼛쭈뼛 서 있다가 그냥 돌아오기 일쑤였다. 가게 주인한테 “이거 주세요” 말하는 것이 왜 그리 힘든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엉뚱한 걸 사오는 일도 많았다. 모심는 날, 엄마를 따라가면 맛있는 못밥을 먹을 수 있는데도 그 길을 차마 따라나서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난 언제나 꾸어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마치 세상과 뚝 떨어진 외딴섬 같았다.

 

그렇게 작아지다 못해 쪼그라지는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준 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우연히 시인 이상의 작품을 본 순간, 마치 ‘부조리’한 내 모습을 발견한 듯 반가울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려, 인간의 모습은 원래 이리 복잡하고 부족한 것. 내가 잘못된 건 아니여.”

그렇게 문학에 취한 나는 대학 같은 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공부를 못해서, 환경이 안 따라줘서라기보다는 필요 없기 때문에 안 가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간혹 “몇 학번이세요?” 하고 물으면 슬그머니 문학 이야기로 얼버무리고 책의 한 구절로 튕겨냈다. 속으로 ‘대학 나와 봤자 별 볼 일 없으면서’ 하며 ‘썩소’를 날렸다. 집에 들어오면 방 안 벽면 가득한 책들이 나를 반긴다. 저 책들은 나의 교양과 지적 수준을 드러내는 것, 저것이면 충분했다. 대학 졸업장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울한 걸까.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대학생들 앞에선 어쩔 수 없이 기가 죽고, 꿈을 꿔도 대학에 떨어지는 꿈을 꾼다. 그런 내가 싫어 매일 술을 마셨다. 하지만 술에서 깨어나 다시 쪼그라든 내 모습을 발견할 때의 참담함이란…. 그야말로 아침에 뜨는 해조차 절망스러웠다. 매일 술을 마시고 엉망진창으로 사는 나를 직장에서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나는 그렇게 믿지 못할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못났다’는 생각이 화석처럼 굳어져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만난 마음수련. 그때가 내 나이 마흔둘이었다.

가짜라고 했을 때 희망이 생겼다

수련을 하며 앨범을 들추듯 내 인생을 살펴보니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학예발표회 때였다. 1인극을 해야 했는데 연습을 제대로 못 해 결국 무대에 섰다가 중간에 도망 나왔던 창피한 기억. ‘아, 그 기억의 사진 때문에 내가 사람들 앞에만 서면 긴장했구나.’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나는 그 기억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무엇 하나 남들보다 잘난 것이 없는 상태에서 택했던 문학과 술. 하지만 그럴수록 가난한 가정환경과 학력, 대인 기피로 인한 콤플렉스의 늪에서 더욱 허우적거렸고 헤어나질 못했다.

문학을 했던 속마음도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인간이야!” 하며 정신세계를 추구한답시고 나는 다른 속물적인 인간들과 다르다며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했다. 결국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에다 아주 못난 놈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면 너무 힘들어서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내가 그보다 한 수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문학을 하면서 냉소적으로 변해간 것도 그 이유였다. “당신도 어딘가 못난 구석이 있을 거야. 당신도 별 볼 일 없네….” 그렇게 단정하고 치부해야 내가 존재할 명분이 생기기에. 나도 세상도 속이고 있었구나, 나는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워 그 모든 마음들을 버리고 비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 차의 헤드라이트를 켜면 환해지듯이, 내 마음에 빛을 비추니 지저분한 부유물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천만다행인 건 그동안 그렇게 살아온 나는 가짜이고 나의 본래는 무한대 우주라는 것! 결국, 콤플렉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나 역시 버리면 되는 거였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것이 꿈처럼 없는 세상이었음을 아는 순간, 희망이 생겼다. 간밤의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꿈이었으면 좋겠습니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김춘수의 ‘꽃’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였다. 세상과 전혀 교감을 못 한 나로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란 시구가 생경할 뿐이었다. 꽃을 봐도 예쁜지 몰랐고, 오히려 “너는 뭐하려고 이 세상에 나왔니?” 하며 못마땅해했다. 그만큼 내 마음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생기 있는 봄과는 겉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봄이 좋고, 봄이 기다려진다. 꽃을 보면 “너는 왜 이리 예쁘게 생겼냐, 반갑다~!”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도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몇 층 가십니까?” 하고 먼저 묻는다.

명절 때면 가족들 만나기가 불편해 직장에서 숙직을 도맡아 하는 일도 이젠 없다. 아직도 가정을 갖지 못한 것이 부모님과 동생들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명절 때면 제일 먼저 찾아뵙고 집안일도 돕는다.

나도 모르게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어느새 나는 세상과 교류하고 있다. 망각의 강을 건넌 듯, 열등감에 주눅 들고 살았던 때가 언제 있었나 싶다.

지금 콤플렉스로 인해 힘드신 분들이 있다면 묻고 싶다. “그것이 꿈이었으면 좋겠습니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콤플렉스라는 악몽에서 깨어나 실제 삶을 누릴 수 있다.

차재성(52) 님은 전북 전주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국민연금공단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대요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대요

박강우 22세. 서울대 산업공학과 2학년

고3 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살이 쪘었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조금만 방심을 하면 살이 쪄버리는 체질인데, 그때는 공부에만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살이 쪄버린 것이다. “너 왜 그렇게 살이 쪘니, 아저씨 같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던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고, 외출할 때는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헬스클럽에 다니며 두 달간 20킬로 정도의 살을 뺐다. 그럼에도 이전에 가졌던 상처들은 그대로 내 속에 있었다. 다시 살이 찔까 봐 불안해서 매일 아침마다 체중을 쟀고 조금만 몸무게가 늘어도 당장 뛰어나가서 운동을 했다.

더 이상 아저씨 같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콤플렉스는 계속되었다.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기에 합격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주변에 다재다능한 친구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진짜 잘하는 애들 앞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좌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누가 농담으로라도 단점을 얘기하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서 더욱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패션 잡지를 보며 연구하고, 멋진 옷을 찾으러 동대문에도 돌아다니고, 신상품을 사는 데 많은 돈을 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게 세팅이 되지 않으면 집 밖에 나설 수가 없었다. 내 차림 중 어디 한구석만 마음에 안 들어도 짜증이 밀려오고 사람을 만나는 데 자신이 없어졌다. 옷을 자주 사도, 언제나 입을 옷은 없었다. 매일 새로운 이미지로 나를 포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학생 마음수련 캠프에 가게 되었다. 수련을 하며 감추려고만 들었던 나의 콤플렉스를 하나하나 꺼내어 볼 수 있었다. 고3 시절 살이 쪘을 때 사람들에게 들었던 충격의 말들, 나를 무시하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 위축되었던 모습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버려갔다.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한순간 우리 모두의 근원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고, 엄청난 변화도 가져왔다. 나 따로 세상 따로일 때는 내가 돋보여야 하기 때문에 힘들었는데, 나라는 틀이 깨지는 순간 나와 세상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고, 모든 게 하나였다. 그 안에 콤플렉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꾸미지 않아도 당당할 수가 있었다. 외모에 대한 강박관념, 다이어트에 대한 부담조차 버리고 나니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스스럼없고 많이 편해졌다.

한번은 친구들에게 나에게는 이런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걸 감추기 위해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되게 차가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냄새가 난다는 둥 하며 공감해주었고 편안해했다. 콤플렉스를 드러내면 무시를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친구는 예전엔 인상이 날카로웠는데, 수련을 하더니 인상이 둥글둥글해지고, 눈빛도 선해졌다고 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인상도 부드럽게 바뀌는구나 싶다.

수련을 하다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짜는 자기가 가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치장을 해서 드러내려고 하지만,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다고. 허울, 허례허식, 허상의 세계 속에서 살던 나는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가짜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가짜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로소 진짜의 세상에서 진짜 내 삶을 사는 기분이다.

비로소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다

비로소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다

송순영 39세. 경기도 안성시 봉산동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파출부, 막노동을 하면서 4남매를 키우셨다. 엄마는 항상 ‘힘들다, 지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고, 그럴 때마다 난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정신 차리고 살자’고. 당시 내 인생의 목표는 돈 많이 벌어서 잘사는 거였다.

 

그러다 스물두 살 때 연애를 하게 되었다. 길을 걷는데 나를 보고 쫓아온 그는 고위직 집안에다 유학도 다녀온 너무나 좋은 조건의 남자였다. 그 앞에 서면 내 속의 깊은 열등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일단, 학벌이라도 따고 싶었다. 당시 직장을 다녔던 나는 어렵사리 야간 전문대학에 진학했고, 5년의 연애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해 보자. 같이 노력하면 잘될 거야.” 서로 잘해보자는 거였지만, 내겐 큰 상처였다. 야간 전문대학도 얼마나 죽을 둥 살 둥 다녔는데…. 그가 야속했다. 인연이 아니다 싶어, 그날로 이별을 고했다.

너무나 괴로운 마음으로 보낸 6개월 후, 우연히 친구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골프장 운영을 하던 남자였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는 그럴싸한 모습에 마음이 기울었고 연애를 시작했다. 처음 남자 친구 집에 인사 간 날, 부모님은 쪽지 한 장을 꺼내시며 ‘며느리의 30가지 조건’을 쭉 읽으셨다. ‘안경 쓴 며느리는 안 된다, 두 부모님 밑에서 자라야 한다…’ 등등 까다로운 조건들이었지만, 이미 큰 상처를 받은 나로서는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누구보다 잘 살 수 있다며 오기로 결혼을 강행했다. 하지만 주변의 우려대로 기막힌 상황이 펼쳐졌다. 남자는 소위 ‘마마보이’에다 부모님께 기대 살며 눈치만 보는 무능력한 남자였다. 결국 5년 만에 이혼을 했고, 실패한 인생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즈음 직장 동료로부터 우연히 마음수련에 대해 들었다. 그는 시골 아저씨 같은, 해맑은 모습이 늘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다. 내 마음도 편안해질 수 있을까….

수련을 하며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지 내 이상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닐 뿐이었다. 열등감과 콤플렉스로 채워진 좁디좁은 마음이었기에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끔찍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수련을 알려준 그 직장 동료는 나를 대신해 혼자 계신 어머니를 살뜰히 돌봐주었고, 덕분에 나는 수련에 정진할 수 있었다.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지나온 상처와 열등감을 버리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마음부터 다스리라고 말해주던 사람.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그가 프러포즈 했을 때,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그 과분한 사랑이 차고 넘쳐서…. 남편은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하지만 나에겐 은인이자 스승 같은 존재다. 그를 만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었고, 참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10년간 이웃에게 나눠준 찐빵 65만 개_ 강봉섭 할아버지

아직은 어두운 새벽 6시. 대전시 중구 대전노인복지관 옆 가건물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강봉섭(80) 할아버지가 찐빵을 만들고 있다.
밀가루, 베이킹파우더, 소금, 이스트, 물로 반죽하고, 앙꼬를 넣어 큰 솥에 10분 정도 쪄내자 따끈따끈한 찐빵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빵은 그날그날 양로원, 요양원 등에 배달이 된다.

취재 정하나, 사진 홍성훈

강봉섭 할아버지가 하루도 빠짐없이 찐빵을 만들어 나눈 것은 2001년 경로당 노인회장직을 맡고서였다. 몸이 불편한 분들을 병원에 데려다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가뜩이나 기운 없는 노인들이 더욱 지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 지켜보다 생각해낸 것이 찐빵이었다. 당시 밀가루 한 포대 가격이 8천 원. 앙꼬까지 계산해도 3만 원 정도면 육칠 백 명에게 빵이라도 나눠줄 수 있겠다 싶으셨단다. 강할아버지는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처음 찐빵을 쪄내어 나눠주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아, 옛날 생각나네.’ ‘배고픈 시절에 먹었던 빵이네’… 작은 찐빵 하나에,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나 같은 늙은이도 뭔가 할 수 있구나 자부심이 들더라고.”

강할아버지는 “만날 자식들이 사오는 것만 받다가 직접 빵을 만들어서 주니까 자꾸 해주고 싶은 의욕이 생기더라”고 한다.

그 후 점점 요양원, 양로원, 어린이 보호센터, 경로당, 파출소 등으로 그 대상이 늘어났다. 한 달에 한두 번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기도 하고, 2007년에는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한 태안으로, 숭례문 화재 사고 후엔 복구 작업 현장으로 큰 솥과 찐빵을 준비해 달려갔다. 이렇게 저렇게 지금까지 나눠준 찐빵만 해도 65만 개나 된다.

“빵을 호호 불면서 먹는 모습을 볼 때의 기쁨은 나밖에 모를 거야. 내가 정성 들여 만든 빵을 맛있게 먹어주니 감사한 거지.”

1932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강봉섭 할아버지는 늘 이웃과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한다. 먹을 것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었고, 언제나 웃음이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찐빵을 나눠줄 때면 그 시절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이 생각 나 가슴 한 켠이 짠해져 온다고 한다.

10년 동안 찐빵을 쪄서 나눠주는 일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한 달에 드는 재료비만 90~110만 원 정도. 처음에는 폐지와 재활용품을 수거해서 충당했지만, 점차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일이었기에 부족한 부분은 늘 저절로 채워졌다.

“신기하게도 비용 걱정을 할 때면 도움을 주는 후원자가 나타나곤 한다”는 할아버지는 “이 일을 하면서 뜻이 있으면 언제나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신다.

요즘엔 찐빵 제조 기술도 나눠주고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성심성의껏 가르쳐주며 “좋은 일을 하며 살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사랑의 찐빵 2호점, 3호점을 냈으면 하는 바람도 내비치셨다.

“나는 무조건 주는 사람이다, 하면 걱정이 없잖아. 욕심을 부리는 순간부터 괴로워지는 거지. 앞으로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한없이 만들어서 나눠주고 싶어.”


하루 평균 200개 정도의 찐빵을 만든다.
포실하게 쌓인 모습만 봐도 모든 피로가 싹 가신다고 하신다.
대한노인회 대전광역시 동구 지회장을 맡고 있는 할아버지는 이곳 직원들 뿐 아니라,
건물의 이웃들, 방문객들에게도 항상 빵을 나누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