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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 프로의 아름다운 도전

지난 5월 마지막 주 ‘나는 가수다’ 경연에서 박정현은 고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를 열창했습니다. 박정현 특유의 애절한 보이스가 살아 있는 명곡이었죠. 비록 경연에서는 3위에 그치고 말았지만, 원곡이 여성들이 부르기 ‘어려운’ 노래라는 것을 감안하면 선전한 셈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나는 가수다’ 경연 녹화 전날까지 5일 동안이나 자신의 콘서트에서 노래를 했다고 합니다. 콘서트를 막 마친 후라 목 상태도 안 좋은데, ‘나는 가수다’에서 열창을 하여 많은 시청자들을 감동시키기까지 한 것입니다.

박정현 콘서트에 가보신 분들은 그녀가 라이브의 여왕이라는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고 하더군요. 유감스럽게도 저는 박정현의 라이브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가수다’를 보고 조그마한 체구에서 폭발적이면서도 간드러지는 보이스를 뽐내는 박정현에 반했습니다. 박정현의 앨범을 들어보면 여러 장르의 음악을 소화하고 있고,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자질도 뛰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점은 지난주 경연에서 부른 부활의 ‘소나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아일랜드 음악 풍에, 드렐라이어 등 다소 생소한 악기로 잔잔한 변신을 추구한 것이죠.

비록 청중단들의 평가 등수는 1위에서 7위로 내려가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수로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악의 장르를 소화해내려는 그녀의 아티스트적 면모가 더욱 마음에 들더군요.

 

‘주먹이 운다’를 부른 이소라 역시 ‘이럴 것이다’라는 프레임을 완전히 깨버렸습니다. 평소 이소라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감성 보컬로 마음 깊숙이 우러나는 목소리로 사랑받은 여가수입니다. 하지만 보아의 ‘넘버원’에 이어 힙합은 물론 락적인 요소가 접목된 ‘주먹이 운다’까지 완벽히 소화해내는 이소라의 파격 변신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실제 그녀는 몸 상태가 좋지 못해 경연을 끝내자마자 병원에 입원을 했고 방송 진행도 못할 정도였지만 무대에서는 아픈 몸이라는 걸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신의 열창을 선보였습니다.

박정현, 이소라뿐만이 아닙니다. 김범수, BMK도 지난 방송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부었던 탓인지 몸이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윤도현도 기침이 멈추지 않자,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와서는 전혀 아픈 기색 없이 무대를 소화해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가수는 무릇 아파도 무대 위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언제나 최상의 상태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했습니다. 목 상태가 말이 아니었음에도 애초 예정되어 있던 녹화가 하필이면 자신의 콘서트 다음으로 미뤄졌어도 군말 없이 노래를 부르고, 또 열창을 하는 박정현의 프로 정신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심각한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파격 변신을 거듭하는 이소라의 열정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열심히 살지 않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입니다.

비록 요즘 말이 참 많지만, 이렇게 가수들이 자신의 틀과 한계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도전이 돋보이는 ‘나는 가수다’가 참 좋습니다. 아픈 와중에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열창하는 가수들의 도전 정신, 노래 잘하는 가수에서 아티스트로 진화해가는 그 모습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그런 대접을 받을 권리가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앞으로도 그런 가수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방송 무대에 설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권진경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MBC

권진경님은 1985년생으로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으며 2009년부터는 자신의 블로그에 ‘너돌양’이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와 예능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에너지 시드 Energy Seed, 폐건전지가 모여 빛의 꽃을 피운다

만든 사람: 박성우 30세. 김선희 27세. 디자이너

이름은?

에너지 시드(Energy Seed). 폐건전지를 모아 공공장소에 불을 밝히는 친환경 폐건전지 수거함이다. 적은 양의 에너지를 간직한 채 버려지는 건전지가, 씨앗(Seed)이 되어 화분에 심어지고, 그 에너지들이 모여 빛의 꽃을 피워낸다는 콘셉트이다. 에너지 씨앗을 심는 즐거움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이 환경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우연히 장난감 자동차를 바라보다가 ‘자동차의 모터를 돌리느라 소모된 건전지를 벽시계에 넣는다면 시계 바늘이 돌아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폐건전지가 완전히 사용되지 못한 채 버려진다는 사실을 알았고 분리수거가 되지 않을 경우에 화학 물질(니켈, 카드뮴)이 대기와 토양을 오염시키게 된다. 그래서 환경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화분 형태로 만들었고 건전지를 씨앗 심듯이 넣을 수 있게 했다. 밤이 되면 불빛으로 재사용된 폐건전지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분리수거할 수 있도록 했다.

중점을 둔 부분은?

전체 크기는 120cm 정도이고, 구멍이 난 곳에 건전지를 직렬로 넣을 수 있는데 이때 +, -극을 잘 맞춰서 넣어야 한다. 구멍 아래에는 스프링이 있어서 충분한 양의 건전지를 넣을 수 있고 그렇게 모여진 에너지가 합쳐져 LED 조명에 빛을 공급한다. 대부분의 폐건전지에는 0.8~1.3V의 전력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두 개 이상 모일 경우 2V의 LED 조명 한 개의 빛을 낼 수 있다. 간단한 타이머 기능을 통해 불이 켜지고 꺼지며, 몇 달 후 빛이 약해지면 아래쪽 문을 열고 건전지를 수거한다.

주변의 반응은?

여러 공모전에 출품했고 2008 서울디자인 올림픽과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 중 하나인 미국 2009 IDEA에서 Gold Prize를 수상했다. 해외의 한 사이트에 소개된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메일을 보내왔고 캐나다 출신의 한 학생은 직접 책상용 에너지 시드를 제작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몇 백 개의 제품을 주문하고 싶다는 메일도 받았는데 프로젝트의 규모가 너무 커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아쉬운 점은?

거리에 놓인 에너지 시드가 비를 맞는다거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 -극을 잘못 집어넣어 빛이 나지 않는 등 문제점들이 많다. 현재는 상용화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가정용이나, 연립 단지에 놓이는 작은 제품의 형태로 좀 더 많은 고민을 해보면 상용화가 가능하리라고 본다. 좀 더 현실성 있게 발전시키기 위해 깊은 고민을 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아쉬움이다.

스노우 화이트 박 Snow White Park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하얀 잎, 최고급의 얇디얇은 한지 생각이 나게 하는 이 식물은
재작년 국립종자원에 신품종으로 등록되어 작년부터 시중에 선보이기 시작한 ‘스노우 화이트 박(Snow White Park)’이랍니다.
자랑스럽게도 처음 개발하신 분이 우리나라의 ‘박씨’ 성을 가진 분이라 이름 끝에 ‘박’을 붙이셨다는군요.
칼라디움의 한 종류인 스노우 화이트 박은 열대성 알뿌리 식물로, 온도와 습도가 높은 장마철을 아주 좋아합니다.
가을철 잎이 시들기 시작하면, 휴면기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물 주기를 중단해야 해요.
그대로 영상 10도 이상의 실내에 두고 다음 해 봄까지 기다려주세요.

햇빛 한여름의 직사광선을 피한다면 밝은 햇빛일수록 좋아요. 햇빛이 부족하면 줄기가 길어지고 잎이 푸르스름해집니다.
물주기 흙은 건조하게! 화분의 속흙까지 말랐을 때 한 번에 흠뻑 주세요. 건조한 실내라면 가끔 물을 분무해주세요.
관리 늦은 봄 화분의 흙 위에 작은 고체형 비료를 얹어주세요. 시든 잎이나 줄기는 그때그때 잘라냅니다. 탄저병이나 응애, 진딧물이 생기면 상한 잎을 깨끗이 자른 후 병충해 약을 뿌려주세요.
번식 알뿌리를 나눠 심기 하세요.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적채와 무 피클, 피로 회복과 간 기능 향상에 좋아요

적채는 보라색이 나는 양배추예요. 안토시아닌이라는 성분 때문에 보라색이 나는 건데요,
열을 가하거나 피클 액 같은 산과 만나면 그 색이 우러나와 온통 보라색으로 물이 들어요.
적채는 양배추처럼 채 썰어 샐러드에 이용하기도 하지만,
무와 함께 피클을 만들면 고운 색이 무에 물들면서 색다른 요리가 되지요.
적채의 안토시아닌 성분은 블루베리에도 많이 들어 있는 것으로,
시력이나 피로 회복에 좋고 간 기능을 향상시켜주기도 한답니다.

이양지 자연요리연구가

재료 준비

적채 1/6~1/8개(150g), 무 5cm 길이 1개, 피클 액(식초 1컵, 물 1컵, 설탕 4큰술, 소금 1큰술, 통백후추, 월계수 잎(생략 가능) 조금)

만들기

① 적채는 폭 1cm, 길이 5cm 크기로 채 썰고, 무는 5cm 길이로 손가락 굵기만 하게 썬다. ② 냄비에 피클 액 재료를 모두 넣고 한소끔 끓인다. ③ 적채와 무를 용기에 담고 ②가 뜨거울 때 부어 그대로 식혀서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다음 날 먹는다. 3일 정도 먹고도 남으면 피클 액만 따로 다시 한 번 끓이고 식혀서 붓는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도전, 두렵지 않아요

두렵지 않아요, 실패는 날 더욱 단단하게 해줄 테니까요!

백기렬
20세. 경기대학교 방송연예학과 1학년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우리 학교에는 자신의 멘토를 정하고 멘토가 되어 달라고 자기 소개서도 쓰는 등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는 과정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요리사가 꿈이었던 나는 여러 음식점에 전화를 걸었고, 양식 레스토랑 한 곳에서 나를 받아주었다.

 

나는 먼저 요리사로서 해야 할 기본적인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음식 재료 고르기, 샐러드 물에 담그기, 닭 다리 손질하기 등 하루 12시간씩 3개월을 주방에서 지냈다. 설거지 양도 어마어마했지만 열정적으로 요리를 하시는 분들 옆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냉정한 세계였다. ‘레스토랑이 호수 위의 백조라면, 주방은 물 밑에서 버둥거리는 백조의 발’이라는 말처럼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닭 다리를 손질하다 손을 베어도, 쓱 보고 지나가거나 간단한 조치만 해줄 뿐이었다. 자기가 알아서 랩으로 감싼 후 바로 칼질을 해야 했다. 더운 오븐기 앞에서 항상 땀이 범벅되면서도 웃으면서 일하는 셰프님들…. 힘들어도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처럼 정말 요리가 미치도록 좋아서 할 자신은 없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됐구나. 정말 어리구나, 아직 사회에 나갈 준비가 안 됐구나.’

그동안 얼마나 부모님한테 의존하면서 살았는지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했다. 돌아보니 나는 오직 내가 만든 요리를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때의 즐거움만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들 세계에선 그건 기본이었다. 중요한 건 요리를 하는 과정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하기 싫은 일도 수없이 해야 했다.

한 번은 딱 3분 지각을 했는데, 벌칙으로 1시간 30분 동안 오이 10박스를 썰게 했다. 내겐 큰 고비였다. 처음엔 하나씩 톡톡 썰다가 나중엔 오이 4개를 한꺼번에 썰었다. 그렇게 오이를 다 썰고 식초, 설탕을 넣어 용기에 오이 피클을 담은 다음 ‘백기렬’이란 이름을 마지막으로 적었을 때, 그 성취감과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3개월 후 학교에 돌아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발표했다. 선생님께선 “네가 드디어 자신을 넘어섰구나” 하며 기립 박수를 치고 칭찬을 해주셨다. 하지만 그 이후 나는 요리사의 꿈을 접었고, 다시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부모님의 권유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수련을 하며 돌아보니 요리사 인턴 과정을 겪으며 재미는 있지만 나와 맞지 않다고 결정한 건 결국 몸이 힘들고 피곤해서였다. 그걸 극복했다면 나는 지금 경력 2년 차의 요리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앞으로가 문제였다. 매번 힘들다고 포기하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 역시 설사 실패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나를 더 단단하게 해줄 것임을 아니까. 그렇게 나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이런 놈이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스스로가 한심했다. 돌이켜보면 이 한 몸 편하고 싶다고 떠받들고 살아온 삶이었다. 물 뜨는 것조차 귀찮아서 후배를 시키거나 친구와의 약속도 귀찮으면 취소하고 딩가딩가 집에서 누워 TV만 봤다.

아무 대책도 없이 막연히 “잘될 거야” 했던, 나를 버려나갔다. 남들보다 위에 있고 싶어 하는 자존심도 버렸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심 두려워하는 마음도 버렸다.

자존심과 두려움, 욕심으로 가득 찼던 마음들을 버리자, 나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순수하고 무한한 우주가 원래의 나임을 알았을 땐 픽 웃음이 나왔다. 본래의 나는 못한다 잘한다도 없고, 위아래도 없고, 한계도 없었다. 세상엔 하찮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가짐이 바뀌니 행동도 바뀌어갔다. 쓰레기 버리기, 방 청소 등 작은 일부터 열심히 하게 되었다. 마음수련은 내게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져주었다.

지금 내겐 도전하고픈 꿈이 있다. 바로 모델이다. 모델이 된다는 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는 힘든 일이지만, 나에게 잘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몇 백 명의 모델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출발이 늦은 셈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바심은 없다. 좋은 모델이 되기 위해 워킹 연습도 하고, 기본적으로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에 따라 모델과에서 방송연예과로 전과도 했다. 처음엔 인물을 분석하고 대본 외우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도움이 된다는 걸 알기에 연기 연습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향해 달려간다. 세상에는 하다가 힘들어서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2배, 3배, 10배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렇게 도전하는 자만이 무대 위에 설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도 말이다.

-여상 졸업 직장인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다 -‘그 나이에 뭐하러?’ 아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

여상 졸업 직장인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다

허영희 43세. 성주초등학교 교사.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집안 환경이 넉넉하지 못하고 공부에도 관심이 없었던 나는 중학교 졸업 후 여상에 들어갔다. 졸업 후엔 바로 대기업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반도체 칩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 일은 섬세함과 정교함이 매우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늘 덤벙거렸고, 실수가 잦았다. 그러다 보니 매번 팀장님께 불호령이 떨어지게 혼나기 일쑤였다. 회사 생활이 무기력하게 느껴지고 자신감이 바닥을 쳤다. 그럴 때마다 ‘여기서 못 하면 딴 데 가서도 똑같다’는 동료들의 말을 위로 삼으며 직장 생활을 계속했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나의 실수는 회사에 큰 손실을 가져왔고, 무기력과 좌절, 괴로움, 고통스러움으로 점철된 직장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좋은 잡지와 책을 보면서 내 마음을 다잡았다.

도전과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 깊이 공감하면서

그들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인 양 생각하며 꿈을 키웠다.

한 번 태어난 인생,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억눌렸던 생활에서 벗어나 날개를 활짝 펴보고 싶었다.

24살 되던 해 결국 나는 직장에 사표를 냈다. 집에선 시집이나 가라며 재촉했지만 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심을 하고 입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학원에서 학력 평가를 할 때 최하 점수를 받았다. 영어 발음기호를 몰라 영어 단어조차 읽을 줄 몰라서 남동생한테 하나하나 물어가며 공부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힘든 직장 생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밤과 낮이 없는 3교대 근무에다 몸, 마음이 혹독한 시기였던 만큼, 무엇인가를 꿈꾸고 도전하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도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하다 보니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고, 그만큼 매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공부를 하다가 암담해지고 슬럼프에 빠지면 공부로 그 슬럼프를 극복해갔기에 학원에서 만난 동생들은 지금도 “그때 공부 참 열심히 했던 언니”로 기억한단다.

결국 3년간의 노력 끝에 광주교대의 장학생으로 입학했을 땐 가족들도 신기해했고 나도 무척이나 기뻤다. 학교의 과 동기와 선배들은 “어떻게 그 나이에 여상을 졸업하고 교대에 올 수 있었냐”며 놀라워했다. 돌아보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덕분에 나이 차 많이 나는 선후배들과의 학교생활도 즐겁게 해나갈 수 있었다. 그때의 도전은 나로 하여금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어느덧 9년 차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교사를 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그런 삶을 살게 되어서 기쁘다.

 

‘그 나이에 뭐하러?’ 아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정현순 59세. 시민기자. 경기도 광명시 광명5동

우리 세대 여자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남편과 아이 뒷바라지하며, 자기가 무엇을 하기보다는 그렇게 그냥 세월을 보낸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뭔가 하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지만, 아무것도 도전하지 못한 채 어느새 할머니가 되고 말았다.

남편도 아이들도 모두 자기들만의 생활이 있었고, 내 가슴엔 허전함만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늦었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서 해보지 못했던 일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2000년, 48세 때 그렇게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를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소한 거 하나라도 메모를 하지 않으면 기억을 못 하고, 메모한 것을 수차례 거듭해서 해봐야지 그제야 반 정도는 내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배운 피아노는 나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

첫 도전에 성공하자 다른 분야에 도전할 용기가 생겼다. 50세에는 글쓰기 공부를 했다.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2년, 인터넷 신문에 첫 기사를 올렸다. 그냥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쓴 것인데 생각지도 않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면서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고, 잡지사 연재, 방송 프로그램의 패널로도 출연을 했다. 갑작스런 변화에 나도 놀랄 따름이었다.

52세 때에는 디지털카메라에 도전했다. 글을 쓰다 보니 사진도 함께 찍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무식할 정도로 마구 찍어댔지만 어느 정도 지나자 감이 잡혔다.

사진을 찍으며 내 주변에 있는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죽어가는 이름 모를 작은 벌레, 길가에 핀 알 수 없는 풀꽃들 모두가 아름답게 보였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 하더라도 작은 렌즈를 통해서 보는 세상은 아직 아름답고 살 만한 것이란 것도 알았다.

사진을 찍다 보니 이번엔 포토샵의 필요성을 알게 돼 53세에는 포토샵을 배웠다. 사실 강좌 내내 1/4 정도도 못 알아듣고, 못 따라했지만 그래도 시작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보기만 했던 기교들을 내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57세 때에는 지역 신문의 시민기자가 되었다. 젊은 사람들만의 점유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기자를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도전은 도전으로 이어지고, 내 삶을 전혀 다르게 바꾸어놓았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뭔가에 처음 도전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어디를 가나 제일 나이가 많았고, ‘그 나이에 뭐하러?’ 하는 시선을 느낄 때는 좌절도 했다. ‘내가 이 나이에 주제도 모르고 시작한 것은 아닌가, 집에서 살림이나 잘하고 손자나 봐줄 걸 그랬나?’ 하면서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었다. 포기하고 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했더라면 오늘의 이 기쁨, 이 행복, 희열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때 난 내 나이를 까맣게 잊곤 한다. 사실 나이라는 게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처음 도전을 시작했던 40대 후반. 지금 그 나이의 엄마들을 보면 무엇이든지 겁 없이 배워도 좋을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70세가 되어 지금의 내 나이를 바라보면 또 그럴 것이다. 혹 나이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내일이 오기 전에 망설이지 말고 시작하라”고.

-도전하는 삶이 아름답다, 작지만 위대했던 우리들의 도전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울렁증 극복하고 사람들 앞에서 사회 보기

지난해 연말 동호회 모임에서 송년회 사회를 부탁해왔다. 남들 앞에 서는 것 자체가 크나큰 벌처럼 느껴졌던 내겐 참으로 난감한 제안이었다. 회사에 입사해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자리에서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고 손은 땀으로 범벅되고 심장 소리가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 앞에 서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해야 했다. ‘한번 나를 내던지고 도전해 볼 것인가, 말 것인가….’ 하지만 살면서 하기 싫다고 무섭다고 피하다가는 나 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걸 수없이 느껴왔기에 큰 결심을 하고 사회를 맡게 되었다. 처음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얼굴이 굳어갔지만, 작은 말 한마디에도 따뜻한 박수와 함성으로 큰 힘을 실어주시는 동호회 분들 덕분에 나도 몰랐던 잠재된 끼가 나오기 시작했다. 송년회가 끝나고 ‘혹시 전에도 사회를 본 경험이 있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고, 무척이나 기뻤다. 그때의 경험은 마치 누군가가 날개를 달아줘서 강 하나를  넘어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누군가가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면 격려해주려고 한다. 그 격려와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줄을 알기에.

이기용 41세. 회사원. 인천시 부평구 삼산동

‘슈퍼스타K2’ 탈락의 상처 극복하고 재도전 결심하다

대학 동기가 같이 하자고 해서 얼떨결에 참여하게 된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2. 한 달간의 힘든 촬영이었지만 꿈같은 시간이었다. 친구들과 열심히 밤을 새가며 음악하면서 한 단계씩 오를 때마다 뿌듯했다. 7~8살 어린 꼬마들의 도전도 자극이 되었고, 노래에 대해 객관적으로 심사 위원분들의 평가를 받으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도 했다. 그렇게 24인 안에 들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생각보다 탈락의 아쉬움은 컸다. 친구들이 “얼굴이 많이 안 나왔다”고 할 땐 많이 속상했다. 마음수련을 시작했다. 탈락으로 인해 힘들었던 마음,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 등 내 안에 남은 ‘마음사진’들을 버리자 점점 홀가분해졌다. 탈락이 곧 실패라고 생각한 나머지 위축이 많이 됐었는데 다시 도전하고 싶은 자신감도 생겨났다. 처음엔 얼떨결에 참여해서 많이 긴장했지만, 이번엔 진짜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다. 후회 없이!

선지혜 24세. 대학생. 동아방송예술대학 영상음악과

고소공포증 이겨내고 암벽등반에 도전한 남편

남편과 함께 쉬는 날이면 산을 찾았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등산 교실에 들어와서 가장 기본적인 등산 상식과 정보들을 배우면서 등산도 학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새롭게 암벽등반을 할 때는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높은 바위 벽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누르고 한 발 한 발 올라서 성공했을 때의 그 느낌.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남편에겐 한마디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으리라. 산행 도중에 높은 직벽 계단이나 가파른 바위를 만나면 오금이 저려서 제대로 건너질 못했던 남편이었다. 그랬던 그가 바위 벽을 손과 발을 의지해 올라갔고 죽느냐 사느냐의 심각한 자기 갈등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해냈을 때, 그는 어안이 벙벙해했다. 한 번 해냈다는 성취감이 그에게 두둑한 배짱을 선물했나 보다. 자꾸만 바위 벽을 타고 오르내렸다. 두려움과 불안을 누르고 용기 있게 해냈다는 자기 극복,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한계를 지레 긋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마음을 준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도전은 젊음의 특권만이 아니다. 우리 인생길, 그 자체가 도전이고 모험에 찬 길이 아닌가.

이명화  48세. 경남 양산시 물금읍

실 패 가   두 려 워   도 전 하 지   못 하 는   이 들 에 게

스탠퍼드대학 심리학 교수인 캐럴 드웩의 오랜 관심사는 사람들이 실패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가였다. 그녀는 그 연구의 일환으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10세 전후의 학생들에게 쉬운 퍼즐을 풀게 한 다음 매우 어려운 퍼즐을 제시하여 그 반응과 태도를 지켜본 것이다.

그녀는 실패는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실패를 두려워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실험 반응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는다.

일부 아이들은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전혀 움츠러들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어려운 문제 앞에서 오히려 의자를 바짝 잡아당기고 입맛을 다시며 “전 도전을 좋아해요!”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답을 찾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낙담하지 않았다. 실패했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실패라는 인식조차 하지 않고 다만 자신들이 배우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패마저도 배움으로 받아들이는 이 아이들은 캐럴 드웩의 롤 모델이 되었다.

어린아이일수록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실패라는 생각 자체가 없다. 그렇기에 잘하든 못하든 스스로 해보려고 한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따지고 시작하지 않는다. 안 되면 마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시도해서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그리고 해내고 만다. 뒤집고, 앉고, 걷고, 뛰고, 신발을 신고, 자전거를 타고, 단추를 잠그는 것 등 아이들은 결국 하나씩 하나씩 터득해 나간다. 그것이 바로 성장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실패와 성공이라는 이분법적 구분 없이 그 모든 것이 배움의 연속이고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실패마저도 사랑했던 아이들은 점점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바뀌어간다. 집과 학교와 사회에서 ‘틀려도 괜찮아!’ 대신에 ‘잘못하면 큰일 나!’와 ‘틀리면 안 돼!’를 되풀이해서 배우고 또 배우기 때문이다. 게다가 승자독식으로 이어지는 과잉 경쟁 속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계속 커져만 간다. 그러한 두려움은 우리의 삶을 주저앉히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게 만든다. 있는 것을 지키려 할 뿐 도전은 피하게 만든다.

도전 없이 안주하는 삶! 그것이 바로 삶이 성장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우주비행사를 뽑을 때에는 계속 성공만을 한 사람들은 뽑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실패나 시련을 겪었지만 이를 잘 극복한 사람들을 뽑는다고 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런 실패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실패를 하고 후회를 할 수 있기에 우리는 개선을 이루어내고 성공을 만들어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마음이다. 그것이 바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특성이다.

출처 <그로잉(내 안의 성장 본능을 깨워라)>(문요한 저 | 웅진지식하우스)

정리 편집부

서울 양천구 김구이 봉사단 ‘김 굽는 아줌마들’

김종순, 박종득, 이춘희, 이청미씨 (왼쪽부터)

취재 김혜진 사진 홍성훈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에게 반찬 배달을 한 적이 있었어요. 제일 편하게 드실 수 있는 반찬이 뭘까 생각하다가 복지사 선생님한테 제안한 게 김이었어요.” 김구이 봉사단의 맏언니, 이춘희(64)씨는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위치한 자원봉사센터로 향한다. 그렇게 봉사자들이 속속 모이면 이내 고소한 김 굽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고, 한쪽에선 김을 굽고, 한쪽에선 포장을 하느라 분주해진다.

다섯 아줌마로 구성된 ‘김구이 봉사단’은 매주 금요일 오후 1시부터 3시간 동안 김을 굽는다. 이렇게 구운 1,000장의 김은 해누리 푸드마켓을 통해 양천구의 기초생활수급권자 4,000가구에 전달된다. 해누리 푸드마켓은 서울시와 양천구가 운영하는 곳으로, 한 달에 한 번 기초생활수급권자들에게 4~5가지의 식료품을 무상으로 지급하는데, 김구이 반찬은 쌀, 라면과 함께 인기 품목으로 꼽힌다고 한다.

3년째 김구이 봉사단을 하고 있는 맏언니 이춘희씨는 “50대에 들어서며 자식들을 다 키우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봉사”였다고 말한다. 그 후 7여 년간 어르신들을 위한 이동 목욕, 반찬 배달 등을 하면서 홀로 지내시는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는 그녀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알게 된 김종순(58)씨와 김구이 봉사단을 처음 만들었다.

“김을 구울 때면 혼자 지내시는 어르신들, 결손 가정 어린이들이 떠올라서, 다들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굽죠.”

김을 구워야 하는데 비라도 오는 날이면 김이 눅눅해질까 봐 난로를 피면서 굽고, 몸이 아파서 못 나오면 대체할 봉사자를 찾는다. 박종득(59)씨의 경우도 2년 전 아파서 못 나오게 된 분을 대신해서 왔다가 김구이 봉사단에 합류했다.

“봉사도 하며 살아야지 하면서도 엄두가 안 나잖아요. 문턱을 넘기가 참 힘들었는데 아픈 분 대신 왔다가 계속하게 됐어요. 봉사는 돈도 시간도 여유가 있는 사람만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마음만 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더라고요.”

이웃과 함께하는 기쁨은 삶의 변화로 이어졌다. 박종득씨는 수요일엔 봉사단에서 만난 김종순씨와 함께 장애인 복지관에서 어르신들 안마도 해드리는 등 점점 봉사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갔다 한다. 그런 데엔 김구이 봉사단의 가족 같은 분위기도 한몫했다.

금요일 오전 요양보호사 일을 마치고, 바로 출근하는 그녀를 위해 도시락을 챙겨주는 언니들. 서로 알뜰살뜰 챙겨주는 반가운 얼굴들을 자주 보고 싶은 마음도 컸다는 그이다.

김종순씨 역시 봉사를 하면서 갱년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한다.

“봉사한 지 벌써 11년째예요. 항상 나와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오다가 주변에 어렵게 살아가시는 분들을 뵈면서 감사하는 마음도 배우고 나를 돌아보게도 되었지요.”

거창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면서 삶에 자신감도 얻었다고 한다.

김을 구우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 가정의 대소사나 남편, 자식, 시댁 이야기 등 속에 묻어둔 것들을 털어놓으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좋은 일을 한다는 기쁨도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겠냐는 김구이 봉사단 아주머니들.

푸드마켓의 소장인 이청미(53)씨가 주부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집 안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나와서 움직이면 나이가 거꾸로 가는 기분이 들어요. 나누고 살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건강해져요.”

-하늘 난 자 하늘 살고 땅에 난 자 땅에 산다-진리라야 진리를 되게 할 수 있다

하늘 난 자 하늘 살고

땅에 난 자 땅에 산다

하늘이란

인간이 볼 때에는

구름이 있고 또 텅 비어 있고

또 파랗다고도 보고

보는 것이 여러 가지나

참 하늘은 살아계시는 성령과 성혼이신

대영혼 자체이시다

일체가 아무것도 없는 자리가 성령의 자리고

없는 가운데 일신이 존재하는 것이

성혼의 자리라

우리말에 신령스럽다는 말은

이 존재가 살아계시어서

천지 만물만상을 창조하시니

살아계시기에 신령스러운 것이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

세상을 복사한 자기가 만든 땅을 그 마음에 가지고

그 마음속에 사니

땅에 난 자는 땅에 사는 것이라

하늘 난 자란

진리이신 성 영혼으로 거듭난 자는

하늘에 난 자라

하늘 일하며 하늘 산다는 뜻이라

허상이고 가짜인 자기가 일체 없는 자라

이 나라에 날 수가 있고

이 나라의 주인이 사람으로 왔을 때만이

사람이 하늘 날 수가 있고

또 사람이 참이 될 수가 있고

또 그 나라 나서 살게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글, 그림 우명

진리라야 진리를 되게 할 수 있다

세상에서 참의 원래 존재는 천지 만물만상이 있기 이전의 자리인 빈 하늘이 본래의 참이고 또 참에서 나온 천지 만물만상도 참이다.

본래 참의 존재는 물질이 아닌 영과 혼이다. 이 비물질적 실체는 전지전능하여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각 종교에서는 재림 예수님이 오신다, 또 미륵불이 온다고 했다.

언젠가는 이 참의 존재가 사람으로 왔을 때 인간도 참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콩이 있어야 콩이 나오고 쌀이 있어야 쌀이 나오듯이 참이 있어야 참이 나올 것이다.

진리인 참의 존재가 세상에 왔을 때 인간은 참이 될 수가 있다.

사람이 허가 무엇인지 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은 허 속에서 살고 있기에 자기 의식이 죽어 있어 모른다.

참의 존재가 있어야 참을 만들 수가 있고 허인 사람이 참이 될 수가 있다.

 

우리 마음수련회는 허를 참으로 만드는 곳이다.

가짜인 자기를 다 버리고 진짜인 우주의 몸 마음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

구원도 허가 참 되는 것이고 다시 나고 거듭나는 것도 이 참의 세상 사람만이 되게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참의 세상 사람만이 참세상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이유는 인간세상에는 참이 없어서이다.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등 다수가 있습니다.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0)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0)

전도유망한 해양지질학자가 있었습니다.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세계적인 학자들과 연구를 하던 그는 과학자이면서 탐험가였지요.

그가 한창 일할 나이인 45세 되던 해였습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공동으로 야외 지질 조사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중

머나먼 미국 땅에서 차량이 전복되는 사고를 당하고 맙니다.

사고 3일 후 의식은 회복했지만 눈만 껌뻑일 수 있을 뿐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3주가 지나면서 겨우 입을 떼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만

몸은 꼼짝할 수 없는 전신 마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비관하거나 우울해하며 현실을 부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그는

놀랍게도 6개월 만에 일상생활에 복귀합니다.

전동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학교로 향했고,

노트북과 연결된 마우스로 프로젝터 스크린을 입으로 작동하며 강의와 연구를 하였습니다.

마우스를 빨면 왼쪽 클릭, 불면 오른쪽 클릭이 되는 식입니다.

“이 정도만 다쳐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그는 스스로 ‘행운아’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일밖에 모르던 내가 사고 후에 오히려 희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고 덕분에 나는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고 집착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사고 전보다 더 주목받는 학자가 됩니다.

“자신에게 닥친 사고를 불운의 시작이라고 보지 말고, 몰랐던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새로운 인생 방향의 전환이라 생각”하라며 장애인 학생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이상묵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어려움이나 실패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역경과 시련을 극복해낸 상태를 말한다 합니다.

행복한 일보다는 어려운 일이 많다고 느껴지는 우리의 삶,

자잘한 일상 속 수많은 스트레스와의 싸움….

그 모든 것이 나를 단련시키고 키워주고 있음을 인정하고 먼저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방사능 물질과 환경 공해

우리 몸 위협하는 독소 빼내기(1)

정리 문진정

최근 15년간, 알레르기 질환을 앓는 청소년의 숫자가 비염의 경우 두 배, 아토피 피부염은 세 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20~30년간의 생활 속 유해 물질 증가를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특히 산업화 이후 화석 연료의 과다한 사용으로 대기는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구제역 대란으로 전국의 토양과 지하수까지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지난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로 우리나라의 빗물 속에서도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서운 독성 물질들이 공기, 물과 토양 속에서, 그리고 집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몸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법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독을 최대한 차단하는 것, 그리고 들어온 독소를 빨리 밖으로 배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고 원자력 발전과 화학 연료 사용을 점차 줄여,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를 재해의 불씨를 미리 없애는 것이다.

현재의 재앙이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자초한 인재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다’며 행해왔던 생활 방식의 변화도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사고방식은 훗날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우리의 자손들에게 더 큰 불행으로 진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포를 파괴하는 방사능 물질

방사능 물질은 원자핵이 다른 원자핵으로 바뀌면서 방출되는데, 세슘, 방사성 요오드, 스트론튬 등이 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피해가 장기적이라는 것이다. 한번 우리 몸에 들어오면 그 양에 따라 백혈병이나 암으로 사망하거나, DNA를 공격해 수년 혹은 수십 년이 경과한 뒤 갑자기 다양한 괴사 세포가 생겨나기도 한다. 갑상선 호르몬을 만드는 원료인 요오드가 몸에 부족할 경우 방사성 요오드를 흡수해 갑상선 암을 유발하고 칼륨이 부족한 경우는 세슘을 칼륨처럼 인식하여 전신 세포에 다양한 암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방사능 물질이 사라지는 데는 수십 년, 수백 년의 시간이 걸리므로 피해는 장기적이고 현재 진행형이며 범위와 그 심각성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방사능 물질 피해 줄이려면

① 원전 사고 이전에 생산된 천일염, 다시마, 김 등의 해조류, 미네랄 생수와 생야채즙을 통해 천연 미네랄을 다량 섭취한다. 몸속에 필수 미네랄이 충분하면 불필요한 미네랄(세슘, 방사성 요오드 등)이 체내로 들어와도 결합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배출하기도 쉽다. ② 바다를 통해 방사능 물질이 농축될 수 있으므로 한동안 해산물류는 피하는 게 좋다. ③ 빗물에는 대기 중에 흩어져 있던 방사능 물질이 섞이므로, 비가 올 때는 우산과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비닐 소재의 옷을 입는다. ④ 황태, 죽염, 유황 오리 등은 특히 방사능을 해독하는 데 뛰어난 음식이므로 섭취하면 도움이 된다.

집과 직장, 유해 물질의 온상

하루 중 대부분을 보내는 집과 직장의 인테리어 마감재, 가구, 집기, 가전제품, 카펫, 환기 시스템 등은 미세 먼지와 중금속, 유해가스, 곰팡이, 박테리아 등 각종 오염 물질을 방출해 천식, 피부염 등 알레르기성 질환을 유발한다. 따라서 직장인과 전업주부의 경우에 만성 두통, 무기력증, 불임 등의 피해가 심각하다.

실내 유해 물질 빼내려면

① 새집의 가장 큰 문제는 목재와 합판의 포름알데히드 성분. 기본적으로 유해 물질이 없는 자연 친화적인 소재를 쓰는 것이 가장 좋다. 또 새집에 입주하기 전이나 인테리어 공사를 한 경우에는 입주 전 7일간, 하루 8시간 이상 보일러 온도를 30도 이상으로 높여서 화학 물질을 방출시켜야 한다.

② 새집에 입주 후 24시간 동안 환기를 하지 않으면 화학 물질의 농도가 5배 이상 높아진다. 날씨가 더울 경우 농도는 10배 이상 높아지고 최소 5~6년간은 미량의 유해 물질이 계속 나오므로 무엇보다 환기를 자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③ 습도가 높으면 곰팡이, 진드기가 늘어나고 습도가 낮으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활동이 늘어나므로 40~60% 정도의 적정 습도를 유지한다.

참고 도서 <방사능과 암을 극복하는 면역요법> 백승헌 / 다문

<환경의 역습> 박정훈 / 김영사

남자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다

이서현 43세. 서울시 중랑구 면목동

나에게 남자란 경쟁자였다. 학창 시절부터 남자에겐 꼭 이겨야 했고 직장에서도 남자 동료의 제안은 듣는 둥 마는 둥했다. 남자는 쓸데가 없는 존재라 믿고 살았다.

그러다 2년 전, 우연히 방송에서 탤런트 이수나씨가 마음수련 후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마음수련을 하게 됐다.

수련의 첫 단계는 내 마음에 사진처럼 찍혀 있는 기억을 버리는 과정이었다. 어릴 적의 아침 식사 풍경이 떠올랐다. 밥상 위에는 귀한 조기 한 마리가 올라왔고 내가 생선을 집는 순간 “어디서 계집애가 젓가락을 먼저 대냐!”는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시 부모님은 마흔이 넘어 나를 낳으셨고, 나는 2남 1녀의 막내였지만 남존여비 사상은 그만큼 강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먹는 걸로 차별을 하다니….’ 나는 크게 상처를 받았고 한동안 생선을 먹지 않았다. 그 후로 그 경험에 비추어 모든 것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빠의 행동도 부모님의 사랑도 남녀 차별로 왜곡이 되었고 내가 원하는 게 안 되면 오빠들 때문에 혜택을 받지 못해 그렇다며 부모님을 탓했다. ‘마음사진’들을 걷어내자 점점 진짜 내 모습이 드러났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선한 사람으로 살아온 것 같았지만 마음 밑바닥에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이 있었고 특히 남자들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대고 적대시한 거였다.

그런 마음들을 버리고 보니 남자다, 여자다가 없이 모두가 세상의 일부이자 귀한 존재였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도 늦둥이 막내딸을 애지중지 아끼셨던 부모님의 사랑도 알게 됐다. 이제 비로소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탈모 증세를 고치다

류득배 41세. 경남 밀양시 가곡동

30대 후반, 직장을 그만두고 가구 사업을 시작했다. 자금도 넉넉지 않고 전문 지식도 부족한 상태였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보니 머릿속에 뭔가 꽉 들어찬 것처럼 묵직하고 두통이 심해졌다. 하지만 건강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정신없이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문득 거울을 보는데, ‘앗!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지?!’ 이마부터 정수리까지 머리가 빠져 훤~했다.

모발 관리를 받아볼까 생각했지만 오랜 기간 시술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사업은 계속 꼬여만 가고 일년 만에 돈도 머리숱도 점점 없어졌다.

2007년 초, 결국 사업을 접고 마음수련을 해보기로 했다. 수련을 하며 가만히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사업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머리로만 바쁘고 생각만 많았던 날들이었다. 혼자만의 완벽함의 기준을 만들고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머릿속을 메우고 있던 계획, 일이 생기기도 전에 걱정부터 하는 조급함, 완벽주의, 실수는 용납 못 하는 꼼꼼하고 소심한 성격. 그렇게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 내 모습들을 버려갔다.

2007년 가을, 오랜만에 아는 형님을 만났을 때였다. “야~ 머리가 엄청 났구나! 십 년은 젊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탈모 관리 회사에서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부분까지 까맣게 머리가 나 있었다. 뾰족한 수가 없어 포기하고 있었던 탈모도 스트레스를 버리니 자연스럽게 해결이 된 것이다. 두피의 열도 내리고 만성 두통도 사라졌다. 이제는 동창 모임에서도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마음부터 아름답게 하는 마음수련이 나의 동안 비결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