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나와 만나고, 새로운 사람과 만났던 소중한 순간의 이야기

뚜벅이 가족 여행 도와준 고마운 제주 아저씨

변창기 51세. 직장인. 울산시 동구 남목15길

2010년 4월 중순, 정리 해고가 되었다. 10년을 다닌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잃고 나니 황당했다.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걱정이 떠나지 않아 3개월 동안 골머리만 썩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제주도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자고 했다. 훌훌 털어버리고 가족과 여행을 하고 나면 나도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생길 것만 같았다.

여행 기간은 일주일을 잡았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보자는 취지였다. 가족 여행 여섯째 날. 초등학생 3학년 아들과 중학교 2학년 딸과 아내 그리고 가볍지 않은  보따리 하나씩 짊어지고 6일째 뚜벅이 여행을 했더니 지치고 힘든 상태였다.

어느 한 곳의 관람을 다 하고 다음 여행지로 가려고 관람지 정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초콜릿박물관을 보고 싶어 했다. 지도상으론 바로 옆에 있었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어느 필름 회사 이름이 붙어 있는 승합차에서 내리는 분께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 보았다. 그분은 잠시만 기다리라더니 짐 칸에서 박스 몇 개를 가지고 관람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나와서 말했다.

“타세요. 그곳으로 가는 길이니 태워다 드리지요.”

우린 사막에서 시원한 샘물을 만난 듯이 기뻤다. 그분의 승합차에 타서 뭐하는 분인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동안 힘든 여정을 살아오신 분이다. 17년 전, 총각 시절 부산에서 사업하다가 하루아침에 거덜 나고, 혈혈단신 제주도로 왔다고 했다.

먹고살 일을 찾던 차에 필름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처음엔 힘들었지만 지속적으로 가게를 찾아다니며, 주인이 바쁘면 일도 거들고 청소도 해주며 노력했더니 공급처가 생기면서 사업이 되어 갔다고 했다. 영업은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진실하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왜 우리를 태워주냐고 물었더니 제주도 와서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힘들게 여행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은 결혼도 하고 중학교 3학년 된 딸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차량 봉사를 한 게 우리만이 아니었다. 그분은 이미 오래전부터 힘들게 여행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태워주고 있었다.

그분은 우릴 위하여 일부러 해안 도로로 달렸다. 송악산에 들러 잠시 공급처에 물품을 내려주고 다시 해안 도로를 타고 천천히 차를 몰며 해안 구경을 시켜주었다. 버스를 타고 갔다면 볼 수 없었던 주상절리라는 절경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가 주상절리를 구경하는 사이, 그분은 물품을 배달해주고 다시 우리를 태우러 왔다. 귀찮다면 귀찮은 일임에도 그분은 계속 ‘가는 길’이라며 태워주었다.

“내일은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가 찜질방에 내려 하룻밤 지낸다고 하니 다음 날 일정을 물어본다. 표선 쪽으로 가서 한 바퀴 돌 거라고 했더니 그분이 말했다. “그럼 내일 오후 3시쯤 성산일출봉 구경하고 계세요. 제주 시내까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그다음 날 약속 시간에 그분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구경 잘했냐면서 밝은 모습으로 우릴 맞아주었다. 우린 다시 그분 승합차를 타고 차량 여행을 했다. 오전부터 날이 흐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니 그분이 더없이 고마웠다. 비도 내리고 갈 길은 먼데 짐 보따리를 든 채 버스를 타고 여행했다면 아마도 가족 모두 벌써 지쳐 버렸을 것이다.

“어디 또 들러보고 싶으세요?” 그분이 친절하게 물었다. 아들이 미로공원에 가보고 싶어 한다고 하자 기꺼이 우리를 안내했다. 그분은 영업하러 갔다가, 구경이 끝날 즈음 다시 데리러 왔다.

다음 날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해서 공항에서 가까운 찜질방을 찾는다고 하니까 그분은 또 그곳까지 태워다 주었다. 가족과 한 번 가보았는데 좋더라며.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지내본 찜질방은 모두 후덥지근해서 좀 그랬는데 그분이 소개해준 곳은 시원했다. 모두 제주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그곳을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 가족은 그분 덕분에 좋은 구경도 하고 즐거운 제주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여행 하면 가장 고마운 분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은 따듯한 곳임을 깨닫게 해준 분이다.

강예신 작.
<소유… 존재>
162×130cm. Oil on canvas. 2012.

내 어머니 정읍댁의 팔도 유람

김현 완산여고 교사

‘여행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팔순이 넘으신 제 어머니와 이모에겐 여행이 힘을 준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어머닌 온 생을 자식들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위한 삶을 살지 않겠냐만 어머닌 유독 심했습니다. 시골 동네에서 버스를 빌려 놀러 가는 날에도 어머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싫어 엄마도 가시라고 하면 버스를 타면 어지럽고 속이 안 좋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조금 못마땅해했습니다. 특히 동네에서 여행을 갈 땐 더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부가 짝이 되어 놀고 마시고 즐기는데 아버지 혼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아버진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어이! 자네 죽어서 여행 갈라구 그렁가. 죽으면 보고 싶어도 못 봉게 가세잉!” 그러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영감이나 재미나게 댕겨오쇼잉. 나는 안 갈랑게.”

그렇게 여행을 가자! 안 간다! 하던 두 분은 이제 이승과 저승의 양쪽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4년 전 여든여덟을 일기로 이승의 삶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닌 아버지 영정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여행 한 번 떠나지 못했음을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너그 아부지가 떠난께, 살아서 너그 아부지 말 안 들은 게 쪼께 미언허구나.”

그러면서 자신도 얼마 남지 않은 생, 팔도강산을 돌아댕겨야겠다 혼잣말을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은 자식들은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돌아가신 지 1년이 안 돼 실행하게 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모님이 동생을 찾아 시골집에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팔십 중반을 넘긴 이모님은 걷기를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그때 두 분을 모시고 새만금에 갔습니다. 육십 년, 칠십 년 만에 떠나는 자매의 첫 여행일지도 모릅니다.

백발이 성성한 두 자매는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은지 잠시도 쉬지 않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풍경을 바라보며 “참 좋다! 참 좋아! 죽기 전에 이런 데도 와 보구, 니 덕에 좋은 귀경헌다”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찌나 죄송하고 마음이 짠하던지요.

새만금에 다녀온 후 댁에 가신 이모는 자식들에게 엄청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둘째 형과 형수가 일을 잠시 미루고 어머니와 이모를 모시고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강원도를 구경하고 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가려 했던 형은 일 때문에 잠시 시골에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 제가 두 분을 모시고 고창에 갔습니다. 두 분이 코스모스 꽃밭을 조심조심 걷습니다. 젊은 사람들 속에 백발을 하고 코스모스 꽃길을 걷는 이는 어머니와 이모 두 사람뿐입니다.

“옛날 생각나네. 처녀 적에 우리도 이런 꽃길을 걸었는디.” “난 생각도 안 나네. 땅 파고 풀 매고 이렇게 백발 신세가 되었응게.”

다시 집에 오는 길. 두 노인은 피곤도 할 터인데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1시간 넘게 차를 타고 가서 눈요기로 꽃구경을 한 게 그리도 좋으실까요. 며칠 전 강원도에서 형수가 전화로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작은아빠, 엄마랑 이모 좋아 죽네. 형님은 피곤하다고 허는데 엄마랑 이모는 잠도 안 주무시고 그냥 싱글벙글이세요. 진작에 올 걸 그랬나 봐.” 그 소린 오히려 ‘너그들 여태껏 뭐 했냐!’ 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형 내외는 두 분을 모시고 다시 부산까지 여행을 이어갔습니다. 3일 동안의 여행을 마무리한 후 형 내외와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두 분 모시고 여행 못 간 게 지금 너무 아쉽다.” “나도 그래. 그래도 형이 큰일 했네. 형수도요.”

나이 든 부모를 모시고 며칠씩 여행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잠자리, 먹을거리, 비용도 만만치 않고요. 그런데 일단 떠나면 무척 좋아하십니다. 말로는 “다 늙어서 뭐 그런 데 가냐?” 하면서도요. 그렇게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돌고 오신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야야! 죽기 전에 팔도유람 한 번 떠나고 갈라고 혔는디 요참에 고걸 해뿌렸다.”

이제 거동이 불편하셔 먼 곳으로 여행을 가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가까운 데라도 자주 다녀오려고 합니다. 오래오래 같이 여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예신 작.
<Once upon a time>
97×145cm. Oil on canvas. 2012.

눈물 대신, 여행

장연정 34세. 작사가, 작가(<소울 트립> <슬로 트립> <눈물 대신, 여행> 저자)

3년이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슬픔은 제자리에 있다. 조금 흐려진 색으로, 조금 차분해진 깊이로.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타이르는 일이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 근 반년 동안, 깊은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여전히 친구가 사는 동네를 서성거렸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했고, 마지막 문자를 버릇처럼 들여다보았다. 죽음이란 단어는 이별이라는 단어와 비슷했지만 멀었다. 그녀의 죽음은 인정했지만, 나와의 이별은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반년 동안 나의 상태는 심각해졌다. 너무나 자주 웃다가 울었고, 바삐 돌아가는 시간 속에 홀로 멈춰졌고, 당장의 내일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산산이 무너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잔인하게도, 나에게는 살아내야 할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현실을 살기 위해, 나는 당장의 현실을 잠시 놓기로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사를 준비했다. 가장 추웠던 내 마음에 어울리는 여행지를 고르고, 비행기 표를 샀다.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나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 분명했지만, 자꾸만 죄책감에 둘러싸여 여기저기 고장 나고 있는 나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떠나기 전에도 여러 번 망설였다. 이것은 여행일까, 도피일까. 결론을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둘 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곳은 생각보다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런 사치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편안하고 여유가 넘치는 곳. 아, 살아 있으니 이렇게 행복하구나. 나는 자주 울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잔인하게도 여행을 하는 내내 앞으로 더 잘 살겠다, 자주 다짐을 했다. 당장 눈뜰 수 있는 내일은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사실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일분일초가 너무나도, 소중했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그 친구의 모습이 하루라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었으나, 어느 날은 많이 웃을 수 있었고, 새로운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은 그 순간의 낯설음이 좋아서 가슴이 뛰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미안해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대신, 오래오래, 아주 오래오래 잊지 않고, 아름답게 기억하겠다 마음먹었다. 그녀와의 좋았던 행복했던 시절들을 떠올렸다. 어렸었고, 그래서 용감했고, 자주 넘어졌지만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무릎을 툭툭 털어주던 그 시절의 느낌들을. 처음 만났던 스무 살의 여름부터 서른셋의 마지막 겨울까지 우리가 보란 듯 절망에게 띄웠던 수많은 웃음들을.

그렇게 행복한 기억만을 떠올리던 어느 날부터 나의 하루 속에서, 밤의 꿈속에서 그 친구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내가 웃는 만큼, 마음속의 그녀도 웃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새로운 공간에 안착했다. 때때로 마음속의 그녀를 보듬었고, 아름답게 기억해 주었다. 슬픔은 차츰 흐려져 갔고, 나는 다시 건강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하루에 단 한 번도 그녀의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이 시작되었다. 비로소 이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세상 위에 발을 붙일 수 있는 한 아직 가야 할 곳은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내일’을 당연한 듯 약속해주지 않기에, 나는 가능한 한 많이 떠나고 돌아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지내고 있다.

누군가를 잃어버림으로 인해 알게 된 내 삶의 의미. 그 삶의 의미는 떠나고 돌아오는 여행 속에서 더 깊은 색을 입는다.

눈물 대신, 여행. 세 번째 책의 제목을 그렇게 지어 놓고, 나는 참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앞으로 이 말이 필요해지는 때가 얼마나 더 찾아올 것인가. 그래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삶’이 내 곁에 있는 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강예신 작.
<지침서c- 대답되지 않는 질문의 이해>
130×89cm. Oil on canvas. 2012.

혼자 떠난 여행, 사람을 만나다

황상민 27세. 경북 포항시 북구 두호동

2년 전, 사회생활을 갓 시작할 무렵이었다.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면서 잠시 쉬어갈 기회를 엿보던 중, 무작정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제주도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지도 한 장을 들고 제주 국제공항에 발을 디뎠다. 계획도 없이 공항에서부터 해안 도로를 따라 제주도를 한 바퀴 다 돌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걷다가 힘들면 제주도 일주 버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인연이란 무엇일까? 그렇게 2주간의 여행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생길도 함께하고 있다. 지금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그곳에서 만났다.

제주도에는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들이 있다. 해안 도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매일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매일 밤 제주도 여행객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나 말고도 혼자 온 분들이 많았다. 이야기를 나누며 우린 쉽게 친해졌다.

진로 고민을 하는 대학 새내기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오랜 투병 끝에 병마를 이겨내고 제주로 내려오셨다는 아주머니에게 박수를 쳐드리기도 하고, 퇴직 후 오랜 죽마고우와 여행 오신 아저씨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나 또한 진로에 대한 고민과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어쩌면 내가 고민하는 건 참 작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단순히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만이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는 것도 느꼈다. 다양한 여행자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생한 인생 수업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 만에 친구가 되어 다음 날 함께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동행할 사람을 만나고 좋은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었다. 아직도 만남을 이어나가고 있는 제주도 인연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수많은 날들 중 그날을,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들 중 그곳을 선택해서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하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비우려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더 값진 것들로 마음을 꽉꽉 채워 돌아왔던 여행. 인생을 살며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 배낭 하나만 메고 나는 또다시 제주 공항에 내린다.

강예신 작.
<낭만이 필요해>
91×73cm. Oil on canvas.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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