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결혼할 수 있을까요, 앞날이 불안해요

제 고민은요?

30대 중반 미혼 직장 여성입니다. 요즘은 결혼에 대한 압박 때문에 너무 힘이 듭니다. 부모님의 잔소리도 힘들지만, 남편과 알콩달콩 사는 친구들을 보면 이제는 저도 가정을 꾸리고 싶은 생각에 조급해집니다. 하지만 어느새 주변의 괜찮은 남자들은 다 품절남이 되었고, 선이라도 보려 하면 다 40대에서 50대입니다. 나이가 드니 직업이니, 연봉이니 이것저것 더 따지게 되고. 저도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제 앞날이 불안합니다.

제 생각은요!

A 저 역시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결혼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고 짜증도 났습니다. 이제 웬만하면 결혼을 좀 해볼까 해서 선을 봐도 내 눈에 차지도 않고 잘 안되더라고요. 내가 무슨 문제 있는 것처럼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아 위축감도 들었어요. 이대로 40을 넘기면 그냥 혼자 살 수도 있겠다 완전히 좌절하던 시기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지요. 물론 결혼 결심까지 쉽지는 않았어요. 부족한 부분도 보이고, 이 사람이 맞나 싶고, 결혼 공포증도 생기고.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보니 내가 보지 못했던 남편의 좋은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님이 생각하는 조건을 다 충족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울 겁니다. 마음을 좀 내려놓고 어떤 부분이 부족하더라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보세요. 쉽게 보려 하면 쉬워지고, 노력을 하면 우연치 않게 좋은 인연도 만난답니다. 윤신영

A 저도 서른이 훌쩍 넘어 부모님의 등쌀에 지금의 남편을 8번 만나고 결혼했어요. 10년을 살았고, 다행인 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맞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확신과 가정에 대한 신념이 아니면 견디기 힘들 때도 많다는 거예요. 결혼은 상대방의 직업, 나이, 외모보다 ‘나’를 알지 못하면 유지하기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답니다. 결혼 생활하면서 제일 어려운 게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거였어요. 나 자신을 알아야 조심해야 할 부분, 챙겨줘야 할 부분도 쉽게 설명할 수 있고 서로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말 그대로 소울메이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부부로 살아가는 시간입니다.
남자의 조건, 나이, 직업, 연봉을 보기에 앞서 나를 먼저 바라봤으면 좋겠어요. 누군가에게 정말 좋은 아내, 엄마, 좋은 사람이 될 준비가 된 사람인지.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나 자신만큼은 알고 있을 때 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 같아요. 남들 눈에 드는 결혼을 생각하지 마시고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답답하고 고루하게 들리겠지만 누구나 아는 촌스럽고 낡아 보이는 명언이 해답일 때가 많더라구요. 서혜정

A 40대 중반 독신 여성입니다. 저도 한때는 결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많았습니다. 소개팅도 많이 하고,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포기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다 마음수련 명상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저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결혼에 집착했는지. 결국 결혼을 통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채우고 싶었던 거더라고요.
먼저 스스로 결혼을 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기 마음을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지,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인지, 기대고 싶은 존재를 찾는 것인지…. 하지만 뭔가를 얻고자 해서 결혼한다면 불행의 씨앗을 안고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달라져서 내가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를 원망하게 될 테니까요. 나의 부족함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혼 여부를 떠나 내 스스로 완전해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런 노력을 했어요. 일도 더 적극적으로 하면서 내 안에 숨은 재능을 발견하게 되고, 더 좋은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내 능력을 발휘하고 충분히 누리며 살고 있어요.
중심이 없을 때는 주변의 말에 흔들리고 남들이 잘사는 거 보면 부럽고 했는데, 지금은 결혼,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입니다. 주위에서는 그래도 나이 들수록 가족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데, 옆에 누가 있는 게 낫지 않냐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을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하는 게 결혼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가족이라는 틀에 자신을 가두게 되기도 하죠.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훨씬 더 다양하고, 그렇게 멋지게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여성들도 생각보다 정말 많답니다. 남편이 있어야 자식이 있어야 행복한 게 아니라, 그냥 나 자체로 행복할 때, 진정한 상대도 만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김신희

함께 나누고 싶은 다음 고민입니다.
혼자 계신 아버지가 걱정입니다.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80대 아버지 혼자 시골에서 지내십니다. 처음엔 농사일도 조금씩 하시더니, 얼마 전부터는 통 다니지도 않고 누워만 계시고, 작년 한 해만 폐렴 등으로 입원을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어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직업상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고, 결혼한 언니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요양병원에라도 모실까 했는데 선입견이 있으신지 내키지 않아 하십니다. 어떻게 하는 게 아버지께 가장 좋은 선택일까요?

고민과 의견이 실리신 분께는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엽서, 이메일 edit@maum.org, SNS 관련 게시글의 댓글로도 참여 가능합니다.

누굴 진짜 돼지로 아나

18년 전 결혼할 때 몸무게가 57kg. 날렵한 몸매라고 생각했는데 가끔 그 당시 사진을 보면 정말 피골이 상접해 있다는 말이 딱 맞는 거 같습니다. 살 한번 쪄 보는 게 소원일 만큼 체질상 살과는 거리가 먼 줄 알고 살았습니다. 17년이 지난 현재… 80kg이 넘습니다. 밥 한 끼 거하게 먹으면 80이 훌쩍 넘습니다. 4년 전 20년 넘게 피워 오던 담배를 안 피고 나서는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찐 게 사실입니다. 밖에서는 옷으로 커버가 되고 아직까지는 생활하는 데 별문제가 없지만 집에서 편한 복장을 하고 있으면 핀잔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사실 좀 억울한 부분이 많습니다. 한탄 한번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중, 고등학생 남매, 우리 부부, 여섯 식구가 저녁상에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상에는 제가 젤 좋아하는 쪽갈비김치찜이 먹음직스럽게 올려져 있었습니다. 숟가락을 만졌습니다. 그런데 고2 아들 녀석이 할아버지 먼저 드시고 먹으라는 눈짓을 합니다.
‘이런 짜식이 누굴 위아래도 없는 막돼먹은 돼지로 아나~ 안 먹어~ 안 먹어~ 지금 숟가락 젓가락 놓는 거야~ 아버지 숟가락 복 복 자 새겨진 은수저 놓고 어머니 은수저 놓고 너희들 숟가락 놓고 너희 엄마 숟가락 놓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숟가락 놓은 거야. 하필 그때 니가 본 거야. 물론 김치찜 국물 좀 떠먹었어. 그건 간 본 거야 간. 간이 맞나 안 맞나~ 누굴 밥 앞에 환장한 돼지로 보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 방에 들렀다 딸아이 책상에 올려진 초코파이 상자를 봤습니다. 그리고 한번 흔들어 봤습니다. 그런데 중3 딸아이가 ‘또 먹게?’라는 표정을 지으며 저를 위아래로 훑어봅니다.

‘이 가시나가 누굴 초코파이에 환장한 이등병 돼지로 아나~ 안 먹어~ 안 먹어~ 그냥 본 거야. 포장이 바뀐 거 같아서.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그 정 초코파이 맞는지 확인한 거야. 그리고 저번에 엄마 몰래 이불 속에서 먹었던 거 초코파이 아니야. 카스타드야 카스타드~ 아빤 초코파이 안 좋아해. 누굴 정말 돼지로 아나~’

딸아이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깔았습니다. 그리고 이불 속으로 발을 넣으려는데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밥 먹고 바로 눕게?”

이런 마누라가~ 누굴 잠자는 숲 속에 돼지로 아나~ 안 누워~ 안 누워~ 그냥 이불 미리 깔아 놓은 거야. 안 자~ 안 자~’

억울한 맘에 화장실로 향하는데 아내가 또 한마디 합니다. “먹었으니까 싸게?”

‘이런 안 싸~ 안 싸~ 누굴 진짜 먹고 자고 싸는 돼지 새끼로 아나~’

오기로 자리에 눕지 않고 앉아서 밤늦게까지 TV를 보다가 주방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화장실 가시던 어머니와 마주쳤습니다. “밤늦게 뭐 좀 먹지 마라. 그리고 만두, 낮에 애들이 먹어서 없으니까 찾지 마라.”
‘이런 어무이~ 누굴 올드보이 돼지로 아세요. 저 만두 안 먹어요~ 안 먹어~ 물 먹으러 왔어요, 물~ 지금 제가 냉장실이 아닌 냉동실 연 거 때문에 오해하시나 본데. 거 뭐냐… 그래… 얼음… 얼음물 먹으려고 얼음 찾은 거예요. 아들을 정말 돼지로 보시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살이 찌는 데는 가족들도 분명히 많은 일조를 했습니다. 저녁마다 술친구 해주는 마누라. 먹을 거 아빠 입에 먼저 넣어주는 아들 녀석 그리고 남은 음식 양보(?)해주는 딸아이. 아직도 이른 아침밥 꼬박꼬박 챙겨주시는 어머니. 그리고 건빵 사다 놓으시는 아버지.

“나 다시 돌아갈래~~~~~~~~~~~”

백일성(44)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사진관 ‘바라봄’

취재 문진정

국내 최초 장애인과 소외 계층을 위한 사진관이 있다. 나종민(52)씨가 운영하는 ‘바라봄’ 사진관이다. 21년간 IT업계에서 승승장구했던 그는, 돈보다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었고, 2007년 은퇴 후 취미로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늘 품고 있었던 나눔에 대한 뜻을 사진 촬영 봉사를 하며 실천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장애 아동 체육 대회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한 어머니가 다가와 물었다. “사진관에서 나오셨어요? 가족사진을 찍고 싶은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대표는 장애인, 비장애인 누구나 편안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에 대해 구상하게 되었고 2012년, 비장애인 가족이 사진을 한 번 찍으면 자동으로 장애인이나 소외 계층 가족에게 사진 촬영이 후원되는 바라봄 사진관의 문을 열었다.

장애인 사진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손님이 오면 먼저 사진관을 소개하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부터 시작이다. 그들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빼면 모든 게 자연스러워진다. 때로는 2백 번, 3백 번 셔터를 눌러야 할 때도 있고 밝은 표정을 잡아내기 위해 ‘원맨쇼’도 해야 하지만 나대표에게는 그런 매일매일이 가슴 설레고 기쁜 시간이라고 한다.

그는 남는 시간을 쪼개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의 장수 사진, 입양을 기다리는 영아원 아이들 돌 촬영도 다닌다. 또 평일 저녁에는 비영리 단체를 위한 사진 학교를 운영한다. 비영리 단체의 경우, 사진의 질에 따라서 모금 상황이 크게 달라지기에, 홍보 담당자들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소정의 교육비는 좋은 일에 쓰고 있다.

거창한 계획 없이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삶에 울림을 주고, 여러 매체에 알려지면서 많은 후원자들, 그리고 제2의 바라봄 사진관을 만드는 사진가까지도 생겨났다.

앞으로 자신이 느낀 행복을 더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나종민 대표. 그는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셔터를 누른다.

나종민 대표 이야기

일반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은 ‘불편할 것이다’, 더 나아가 ‘불행할 것이다’는 편견이 있어요. 물론 실제로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비록 그렇더라도 사진만큼은 밝게 웃는 표정을 찍습니다. 우리가 카메라 앞에서는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웃잖아요. 사진은 오래도록 남으니까요. 두고두고 바라보면서 행복해지는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한번은 제가 찍은 장애인분들 사진을 전시한 적이 있는데, 어떤 분이 사진을 보고서는 다들 정말 표정이 밝다고, 누가 장애인이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사진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잠시나마 깨지는 순간이었죠. 사진을 찍으러 와서 생전 처음 기부를 했다는 분도 계시고, 사진을 기부받고 또 다른 이에게 후원을 이어 나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 혼자 하는 별일 아니었던 일이 제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또 많은 분들께 나눔의 씨앗을 퍼트리면서, 알게 모르게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장애인 사진관이라고 해서 단순히 장애인분들만 좋은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따듯해지는 거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많은 분들에게 해피 바이러스를 전하고 싶습니다.

내 친구 뚱땡이

따르릉 따르릉~ 아침이면 휴대 전화가 울린다.
안부를 묻는 내 친구 뚱땡이의 전화다. 꼭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다. 나에게 전화를 해야 하루가 돌아간다고 한다.

그 친구는 얼마나 뚱뚱한지 별명이 뚱땡이다. 뚱땡이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깊다. 시골에서 살기 때문에 풍족하지는 못해도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간다. 봄이면 산에 올라가서 고사리, 취나물 뜯어서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 고사리 꺾으면서 손도 얼굴도 새까맣게 타도 마냥 좋아한다. 가을이면 농사지은 쌀을 나눠주고 떡국을 뽑아서 나누어 먹는다.

겨울이면 텃밭에서 도라지, 당근을 캐 나누어 먹고, 김치를 담아서 홀로 사시는 독거노인들께 드린다. 나에게도 늘 준다. 아이들 고시원에도 보내주고. 시어머니 드시라고 맛있는 음식도 가져다준다. 친구의 마음속에는 ‘사랑’이란 샘물이 펑펑 솟아나온다. 바다처럼 모든 것을 수용하고, 항상 싱글벙글 콧노래를 부르며 다니는 뚱땡이를 너무 좋아한다.

내 친구 뚱땡이, 김부임을 만난 지는 벌써 10년이 넘었다. 당시 조그만 개인 회사에 다닐 때 알게 되었다.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으며 밝게 웃는 낙천적인 성격의 부임이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성격도 잘 맞아 금세 친해졌다. 나는 구례, 부임이는 순천에 산다. 일을 그만두고도 계속 전화로 연락하고 만나며 지내고 있다.

부임이는 몇 년 전부터 요양보호사를 하고 있다. 하루에 세 집을 다니면서 청소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음식도 해주며 할머니들을 보살핀다. 봄이면 쑥을 뜯어 쑥국을 끓여드리고 미나리 부침개 부쳐서 냠냠 함께 먹으면서 작은 봉사를 하는 뚱땡이가 부럽다.

할머니 마음도 잘 어루만져준다. 웃음 치료사같이 말도 잘한다. 할머니가 시름시름 아파하면 깡충깡충 노래도 불러주고, 치매 예방에 좋다며 10원짜리 화투도 같이 쳐드린다. 그렇게 해드리니 “요양보호사 선생님 최고다, 뚱땡이 선생님 최고다” 한다.

살다 보면 사람 때문에 힘들 때가 너무 많이 있다. 그럴 때는 사람이 싫어서 피하고만 싶어진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 또한 사람으로 인해서 치유받는다는 것을. 그걸 부임이를 통해 배웠다.

추운 어느 겨울날 따르릉~ 뚱땡이의 전화다. 꼭 만날 일이 있다 하였다. 튀김집에서 만나서 튀김 먹고 어묵 먹고 까르르~ 깔깔. 춥지만 둘이서 거리를 걸으면서 원 없이 웃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뚱땡이가 내 주머니에 손을 꼭 넣고 다녔다. 추워? 물었더니 친구는 “아니여~ 너 호주머니 얼마나 따듯한가 보려고” 한다.

한참을 걷다 지나가는 택시가 오니까 가야겠다며 호주머니 속에서 손을 얼른 빼고서 택시를 탔다. 허 가시내가~ 하면서 혼자서 웃었다. 그런데 보니 내 주머니 속에 봉투를 넣고 간 거다. 속을 보니까 5만 원이 들어 있었다. 요게 뭐당가? 나중에 물어보니 친구가 말한다.
“그 돈 말이여. 너에게 용돈 주는 거야. 하하~ 맛있는 거 사 먹거라.”

봉급 타면 어떤 핑계를 대서든 용돈을 준다. 자기는 애들도 다 결혼시키고, 나보다 편한 조건이라며 그렇게 챙겨준다. 그렇게 다 퍼주면 어떻게 사나? 걱정될 정도지만 오히려 더 잘산다. 마음씨가 좋아서 그런지 하늘이 보살펴주는 거 같다.

‘꽃보다 당신’이라는 코너에 꼭 소개하고픈 친구였다. 부임에게는 그랬다.
“나가 진짜 글을 열심히 써서 채택되면 책 선물을 할게. 할머니들 읽어주라.”
이렇게 소개가 되니 너무 좋다. 부임아 뚱땡아. 세상에 태어나서 니같이 좋은 친구를 얻어서 고맙다. 늘 예쁜 마음씨 베풀어주어서 고마워. 사랑한다. 뚱땡아.

고욱향 58세. 전남 구례군 구례읍

‘내 친구 뚱땡이 뿌임아 항상 고맙고 사랑한데이.’
고욱향님의 마음을 담은 문구와 함께 김부임님께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나에게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담은 편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주인공 돋보이게 해주는 엑스트라 식물들

제법 몸값이 나가는 화초를 심은 화분을 보면,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여러 식물을 함께 심어 멋지게 연출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어요. 커다란 식물 아래 작은 화초나 돌멩이, 또는 이끼 같은 것을 곁들여 조화롭게 꾸미면 정말 값어치 있어 보일 뿐만 아니라 주연 식물들을 훨씬 돋보이게 만들어주지요. 어떻게 보면 배경으로 쓰인 식물이나 돌멩이 등은 엑스트라라고 할 수 있겠네요.

꽃 시장에서 ‘타라’ ‘천사의 눈물’ ‘구름이끼’라 불리는 식물들이 주로 엑스트라 역할을 맡고 있는데 생김새가 튀지 않고 수더분하면서 가격도 저렴한 편이랍니다.

어느 날 분갈이를 하다가 알게 된 건데, 엑스트라 식물을 빼내고 주연 식물만 따로 심었더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함께 있을 때만큼 살아나지 않더라고요. 아뿔싸, 그동안 이걸 몰랐네 싶었습니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폼 나지 않는 일도 해줘야만 다 같이 제대로 어우러질 수 있다는 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누구는 중심이 되고 누구는 배경이 되고, 각각 다른 모양으로 사는 것 같아도, 모두가 세상을 위한 필연적 질서이며, 성격이 다를 뿐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제는 고무나무 밑에서 오랫동안 잘 자라 풍성해진 ‘천사의 눈물’을 따로 파내어 녀석 하나만 아끼는 화분에 정성스레 심어줬답니다. “그래, 너도 주인공이야. 우리 모두 주인공이야”라고 말해주면서요. 순간 녀석이 환하게 웃더라구요. 정말이라니깐요~^^*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마다가스카르식 족발 요리

재료

손질된 족발, 토마토, 생강, 통후추, 월계수 잎 등의 향신료, 소금 약간

만드는 법

① 압력솥에 물을 가득 붓고 족발과 함께 토마토, 생강, 통후추, 월계수 잎 등의 향신료를 넣고 간은 소금으로 한다.
② 살코기가 흐물흐물하게 퍼질 때까지 푹 삶는다.
③ 따듯한 국물과 함께 떠서 먹는다.

프랑스 국적자 남편을 만나 결혼한 지 4년 차 되는 주부입니다. 프랑스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해, 익숙해질 즈음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로 이민을 왔습니다. 남편은 가장 살고 싶은 곳으로 늘 기후 좋고 사람들이 온화한 마다가스카르를 꼽았고, 신혼 초 일주일간 함께 마다가스카르를 여행해 보고, 여러 가지 매력에 반해 이민을 결정했습니다.
지인 하나 없는 마다가스카르에서의 생활은 정말이지 알아가야 할 것투성이였습니다. 프랑스 파리와 달리 교민도 적고, 한국 식품점도 없었습니다.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고 모든 게 낯설었지요.
그런 저에게, 이민 초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계십니다. 40살이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프랑수아즈 할머니! 할머니께서도 젊은 나이에 프랑스에서 만난 마다가스카르인 남편을 따라 이곳에 오셨고 결혼을 한 지는 올해로 50주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를 더욱 살갑게 챙겨주셨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로 ‘마다가스카르식 족발 요리’입니다. 슈퍼에서 깨끗이 손질돼 파는 돼지 족발을 보는 순간 너무도 반가워 할머니께 얘기했더니, 깜작 놀라시며 마다가스카르 사람들도 족발을 즐겨 먹는다고 하셨죠.
그리고 어느 날, 서프라이즈 선물같이 직접 만들어 오신 ‘마다가스카르식 족발 요리’!
여러 향신료를 가득 넣고선, 살점이 퍼질 정도로 오래 끓여 먹는 마다가스카르식 족발 요리는 제 마음도 참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너무 맛있게 먹는 걸 보신 후, 족발 요리를 하실 때면 제 것을 따로 챙겨주실 정도로 정 많고 따듯한 내 친구 프랑수아즈 할머니. 이런 감사한 인연들과 함께, 또 각국의 요리들과 함께 마다가스카르에서의 생활은 더욱 아름답고 훈훈해집니다.

요리 김민지 & 그림 최정여

모기 앞에선 투명 인간 ‘카이트 모기 패치’

● 이름은?
카이트 패치Kite Patch. 연(Kite) 모양의 작고 네모난 패치 스티커로 옷이나 소지품, 아기 유모차 등에 붙이면 모기로부터 48시간 동안 보호해준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말라리아, 황열병 등 모기 관련 질병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이 위협받고 있으며 특히 남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남미 지역은 모기를 퇴치하는 것이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래서 4년 전 세계적으로 모기 관련 질병 퇴치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과학자, 디자이너, 엔지니어, 공중보건전문가 등이 모여 연구가 시작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리버사이드에서 과학적 연구가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미국국립보건원의 지원이 있었다.

● 제품의 원리는?
모기는 사람의 이산화탄소를 추적하여 다가오는데, 카이트 패치 물질이 모기의 이산화탄소 추적 능력을 방해한다. 그래서 모기에게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 물질은 일반적인 모기약에 들어 있는 독성 물질은 전혀 없이, 음식의 맛과 향에서 나오는 화합물로 만들어졌다. 크기는 1.5인치 정도로 작지만 크기에 비해 넓은 공간을 모기로부터 차단시켜준다. 모기가 많은 지역에서는 보통 독성 물질 스프레이로 모기를 죽이는데 그것은 인간에게도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바르거나 뿌리는 퇴치제 또한 사용하기에 번거롭고 피부에도 좋지 않다. 어떤 지역에서는 모기장 하나를 쳐놓고 할아버지, 엄마, 아기가 한데 모여 자기도 하는데 그것도 완전한 대안은 아니다. 우리는 기존에 나온 모기 퇴치제의 가장 완전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전 세계의 기후 조건과 모기의 종류에 가장 적합한 제품을 계속해서 연구 중이다.

● 제품의 상용화 계획은?
현재로서는 제품을 살 수는 없다. 정부의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작년 여름, 우간다에서 있을 1차 현지 테스트를 위해 인터넷으로 대중들의 자금을 모았고 모두 11,254명이 기부해, 목표 금액 7만 5천달러의 7배가 넘는 55만 7천 달러가 모였다. 기부자들에게는 미국 환경보호청(EPA) 승인 후 패치가 배송될 예정이다. 현재는 우간다 현지 테스트를 하고 있다. 이후에는 모기가 생명에 위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많은 나라에 우선 배포될 예정이다. 다른 국가에서도 정부의 규제 절차를 통과하면 배포 지역을 확장할 것이다.

만든 사람 ieCrowd 사, 올팩터 연구소(Olfactor Laboratories, Inc.)

SBS-TV <런닝맨> 딱지 대회, 그리고 경쟁 사회와 놀이

SBS 주말 예능 <런닝맨>이 마련한 전국 딱지 대회는 사실 꽤 오래전부터 기획된 아이템이다. <런닝맨> 제작진은 일반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아이템을 작년부터 고민해 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전국 딱지 대회. 오랜 고민의 결실인 듯 <런닝맨>의 전국 딱지 대회는 딱지 하나로도 충분히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아가 이 게임 버라이어티의 새로운 전기이자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런닝맨>의 가장 큰 고민은 아마도 이 재밌는 게임을 하는 당사자가 연예인들에 국한되고 있다는 것이었을 게다. 이것은 게임이 제아무리 기상천외하고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저들끼리 웃고 즐기는 느낌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런닝맨>이라는 게임 버라이어티가 가진 특성도 한몫을 차지했다. 일반인과 함께 뛴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또 그렇게 참여를 시킨다고 해도 누구와 함께 어떤 공간에서 할 것인가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전국 딱지 대회는 이런 고민에 대한 괜찮은 해답을 보여주었다. 무작위로 뽑은 전국의 일반인들이 아니라 그 대상을 대학과 대학생으로 좁힌 것은 프로그램의 집중도를 높여주었다. 이미 <캠퍼스 영상가요>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그 가능성이 입증된 공간이 대학이다. 대학생들의 리액션과 끼, 에너지는 확실히 다르게 다가온다. 딱지를 치고는 넘어가지 않자, “시간을 거스르는 자!”를 반복적으로 외치며 계속 딱지를 쳐 하하를 포복절도하게 만든 대학생도 있었고, 마침 학원이 휴강이라 달려왔다는 유재석을 닮은(?) 입담 좋은 여학생도 있었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프로그램에 담아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 게다가 우승자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다는 것도 프로그램의 취지를 살려주기에 충분했다. 취업 전쟁으로 지쳐 있는 그들에게 잠시간의 숨 쉴 틈으로서의 놀이의 장을 마련해 준다는 것. 요즘처럼 경쟁에 내몰려 놀이와 멀어질 수밖에 없는 대학생들에게는 이 <런닝맨>이 마련한 전국 딱지 대회가 남다른 의미로 다가갔을 것이다.

이렇게 전국 대학에서 뽑힌 학생들이 모여 마치 이종격투기 경기를 벌이듯 딱지 대회를 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웃음을 주었다. 초대 가수로 에이핑크가 나오고 학생들이 열광하는 걸 보고 유재석이 “딱지치기가 이렇게 큰 규모로 진행될 줄 몰랐다”고 한 말은 이 아이템이 가진 웃음의 가능성과 가치를 새삼 느끼게 한 것이었다.

끝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딱지치기 대회의 우승은 결국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지석진 팀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 딱지치기 대회라는 아이템은 부지불식간에 <런닝맨>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저들끼리 노는 것보다 함께 놀 때 더 재미있다는 것이고, 우리가 우습게 봤던 딱지치기 같은 놀이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토록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경쟁 사회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놀이 문화를 그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지며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미 수년간 달려온 길을 통해 <런닝맨>과 출연자들은 놀이의 고수들이 되었다. 이제는 그 노하우를 일반 대중들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노는 방법을 알려줘야 할 때다. 우리 사회에 놀이가 필요한 곳은 대학 이외에도 끝없이 많을 것이다. 생업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허리 펴고 놀까말까 한 농어촌의 어르신들도 좋고, 매주 월요일마다 월요병을 토로하는 직장인들도 좋으며, 아이들 가르치느라 본인은 놀 겨를이 없는 선생님이나, 군 복무에 여념이 없는 군인들도 좋을 것이다. 어디든 놀이가 필요한 곳이면 나타나 그들과 함께 즐거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슈퍼히어로, 놀이의 고수 <런닝맨>의 활약을 기대한다.

정덕현 문화칼럼니스트

왜 모나미는 국민 볼펜이 되었을까?

누가 언제 갖다 놨을까? 사무실이든 집이든 어디를 가나 신기하게도 몇 개쯤은 눈에 띄는 모나미 153 볼펜. 1963년 대한민국 최초의 유성볼펜으로 탄생한 이래, 50년 이상 꾸준히 사랑을 받은 모나미 볼펜은 지난 5월 중순, 첫 프리미엄 라인업인 ‘153ID’가 출시되며 화제를 모았다. 매월 300만 자루 이상 판매, 누적 판매 수량만 36억 자루! 하루가 다르게 신제품이 쏟아지며 빠르게 변화하는 문구 시장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우리 곁에 남아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모나미 볼펜. 그 비결을 모나미 153에게 들어본다.
정리 최창원

대한민국 필기구의 혁명, 모나미 153 볼펜의 역사

안녕하세요. 모나미 153 볼펜입니다. 제 생일은 1963년 5월 1일이에요. 제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볼펜이라는 것은 생소한 필기구였어요. 당시 필기구라고는 연필이나 잉크를 묻혀 쓰던 철필과 만년필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런데 1962년 모나미의 창업자 송삼석 회장이 일본의 볼펜을 보고 매료되었고, 우리나라에도 볼펜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어요. 그리고 일본에서 기술 전수를 받은 후,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저를 만들게 돼요.

하지만 처음부터 인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래서 모나미 직원들은 ‘잉크병 없애기 운동’을 하게 됩니다. 가방마다 볼펜을 꽉꽉 채워 하루 종일 관공서, 은행, 기업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볼펜의 장점을 알려나가기 시작했어요. 별도로 잉크병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펜을 사용할 수 있다, 사용법이 편리하다 등등. 그렇게 2년쯤 지나자 볼펜을 사용하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사무 능률 면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와요. 다른 문구 제조 회사에서도 잇따라 볼펜을 내놓게 되고요. 한마디로 필기 역사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고나 할까요. 하하.

기본 기능에 충실한 단순한 디자인

제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허례허식이 없고, 기본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얀 플라스틱 몸통에 까만색 부리가 제 모습의 다잖아요. 더도 덜도 없이 딱 필요한 것만 갖추었지요. 일찍이 디자인의 거장 디터 람스는 ‘적게 그러나 낫게(Less is more)’라는 디자인 철학을 이야기했는데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쑥스럽지만 그 철학에 근접한 디자인이 아닐까 싶어요.

모나미 볼펜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품질은 지금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조금만 날씨가 추워도 볼이 구르지 않아 글씨가 안 써졌고, 촛불 등에 촉을 달구어서 여러 번 문질러서야 써졌으며, 일명 ‘똥’이 많이 나와서 곁에는 항상 똥 닦는 휴지가 대기해야 했다. 1963년 출시 이후 현재까지 검정, 파랑, 빨강 세 가지 색의 볼펜이 판매되고 있다.

“어떻습니까? 값이 비쌉니까? 모양이 흉합니까? 쓰기에 불편합니까?” 1968년 모나미 광고 카피에 등장한 3가지 질문이에요 그에 대한 답은 지금도 전부 ‘아니요’잖아요. 그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한다는 것만으로 좋은 디자인의 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점들 때문에 2008년에는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이 선정한 ‘코리아 디자인 2008’의 52개 제품 중 하나로 꼽혔어요. 그리고 2011년에는 <코리아 헤리티지> 전을 통해 뉴욕에 전시되기도 했습니다.

 

저렴한 가격과 튼튼한 내구성

처음 나올 당시 제 가격은 15원이었어요. 당시 신문 한 부 값,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 15원이었는데 여기에 착안해 15원으로 했던 거지요. 당시로 따지면 조금 비싼 편이었지만 지금은 3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지요.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 덕분에 그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간해서는 망가지지 않아요. 참,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저를 사서 심이 다할 때까지 써보신 분 있으세요? 아마 많지 않을 거예요. 쓸 때는 실용적이면서 나도 모르게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편안하고 부담 없는 존재. 어쩌면 그게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은 비결 같아요.

한국인의 삶과 함께하다

벌써 제 나이가 52살이 되었네요. 그 기간을 함께했던 분들은 저하고의 추억 하나쯤은 있을 거예요. 연필만 쓸 수 있었던 초등학교 시절에 저를 쓰던 언니, 오빠들을 부러워했다거나, 수업 시간에 습관적으로 볼펜을 딸깍, 딸깍 하다가 혼났던 일, 제 몸통에 몽당연필을 끼워 사용했던 일 등등. 그 외에도 저는 생활 곳곳에 다용도로 활용되었지요.

이제는 저랑은 비교할 수도 없이 질 좋고 세련된 문구류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에 발맞춰 모나미에서도 2011년에는 48년 만에 신제품을 출시했지요. 기존 형태와 가격은 동일하되 몸통을 노란색으로 바꾸고, 두께를 1.0mm로 두껍게 했어요. 또 지난 5월 중순에는 저의 첫 프리미엄 라인업인 ‘153ID’가 나왔지요. 디자인 및 특징적 요소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급 볼펜에 사용되는 알루미늄 소재와 잉크를 사용한 제품이에요. 그러다 보니 가격은 좀 셉니다.

저도 앞으로 계속 변화 발전해가겠지요. 하지만 단 한 가지, 모나미(MonAmi), 불어로 ‘나의 친구’라는 뜻처럼, 언제나 사람들 곁에 편안하고 부담 없는 친구로 남고 싶습니다.

병산서원,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공간

입교당에서 만대루를 바라보다

외국인들에게 우리 건축의 특징을 알려주고 싶을 때, 나는 하회마을 언저리에 있는 병산서원으로 안내한다. 병산서원은 건축물로만 따지면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건축이다. 결구방식이나 규모, 장식 등은 흔하고 엉성하기까지 한데도, 이 작은 건축은 늘 감동을 준다. 처음만이 아니다. 몇 번을 찾아가도 그렇다.


만대루는 자연을 매개하는 프레임으로서의 건축을 보여준다

서양 집과 우리 옛집의 다른 점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자연을 대하는 방법이다. 서양은 외부나 자연은 나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에게 자연은 정복하기 위한 대상이고 외부 공격으로부터의 은신처일 뿐이어서 자연과 적대적 위치에 있는 건축이 건축 역사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우리의 옛 건축을 보면 그냥 자연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청이나 툇마루 같은 공간은 내부인지 외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어떻게 보면 자연 속에 집이 던져져 있는 모습이다. 우리 선조들에게 자연은 공존해야 하는 가치였으며, 섬김의 대상이었고,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었다. 따라서 집은 앞산과 뒷산을 연결해주는 매개적 역할을 할 뿐이었으니, 집 자체의 모양보다 공간의 배열이 더 큰 과제였다.
병산서원은 이에 대한 좋은 보기이다.

병산서원은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을 모시는 사액서원으로, 지리적으로 안동 시내와는 물론 하회마을과도 절벽 같은 너들대벽을 두고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병산屛山이 우뚝 솟아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밑으로 낙동강 줄기가 유유히 흐르는 고요한 곳이다.
특히 우리의 관심은 강의동 건축이 구성하는 공간의 아름다움이다. 강의동은 네 개의 건물로 이뤄지는데 맨 위에 강의를 하는 입교당, 그 앞에 좌우로 학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 그리고 남쪽 아래 누각인 만대루晩對樓가 있어 50여 평 크기의 가운데 마당을 감싸고 있다.

밖에서 보면 중첩된 기와지붕이 만드는 풍모가 경사진 지형과 잘 어울려 있지만 가만히 보면 만대루라는 누각의 길이가 다른 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도하게 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 이랬을까. 이 의문은 마당에 들어가 입교당에 앉아 보면 절로 나오는 탄성과 함께 풀리게 된다. 앞산 병산이 만대루에 가득 들어와서 마당의 한쪽 벽면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만대루는 기둥만 남기고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병산을 그 속에 채울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 크기가 마당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길이여야 하는 까닭에 긴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다.
건축은 오로지 자연 속에 걸터앉아 있지 자연을 막거나 닫거나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 기둥에 의지하고 걸터앉아 다시 병산을 보면, 이름 그대로 병풍 속에 닫힌 듯 펼쳐져 있고 시시때때로 물안개가 그 풍경을 변화시킨다. 사계절의 절경은 그 속에 갇힌 고요한 마당을 살아 숨 쉬게 하는 힘이 된다. 건축은 프레임으로서만 존재하며 자연을 적극적으로 매개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 황진수 & 글 승효상 건축가

사진가 황진수님은 2007년부터 왕가제례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으로 <신의정원, 조선왕릉>(2009) <한국정원> (2012) 등 정원 연작 작업을 해왔으며, 서울을 주제로 한 사진집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건축가 승효상님은 15년간 김수근 문하를 거쳐 1989년 건축사무소 이로재 개설 후 자신의 건축 철학인 ‘빈자의 미학’을 바탕으로 수졸당, 대전대 혜화문화관 등을 지었으며, 저서로 <건축, 사유의 기호> 등이 있습니다. 이 글은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의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출발점, 병산서원’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