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을 사랑한 남자
임정도 33세.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3가. <오드리 헵번> 카페 근무
1995년 1월 7일 오후 4시. 눈이 소복소복 내리던 버스 정류장 뒤 무등 서점 앞. 한 소년이 서점 유리창에 붙어 있는 여배우의 브로마이드 앞에 서 있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소년은 그녀의 사진 앞에서 한참 동안 넋이 나가 있었고, 잠시 후 버스에서 내리신 어머니가 소년의 어깨를 흔들었을 때 소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엄마, 저 여자 누구야?” “응? 오드리 헵번이네!”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
그때부터 20년이란 시간 동안 내 마음속의 빛으로 살고 있는 오드리 헵번에 관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당시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던 나는 내성적이고 친구 한 명 없는,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저녁 6시까지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던 사춘기 소년이었다. 왜 이렇게 외로운 건지, 커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지….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꿈도 희망도 없던 나는 서점 앞에서 헵번을 본 후 헵번을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무미건조하고 정처 없이 흘러만 가던 내 삶에 뭔가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그 깊고 아름다운 눈을 완벽하게 그려내고 싶었다.
오드리 헵번을 4년 정도 그리다 보니 이번에 그녀를 밖으로 꺼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3년 동안 조소를 전공하였다. 그러고 나니 그녀가 밟았던 길을 가보고 싶었다. 그녀가 영화를 찍었던 촬영 장소를 시작으로,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 그녀가 살았던 집 등 그렇게 헵번과 관련된 나라인 파리, 벨기에, 스위스, 런던, 뉴욕,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녀오니 이번엔 그녀의 직업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배우가 되었다.
23살 군 제대 후 배우 생활을 하기 시작해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2011), 부활 더 골든 데이즈(2012) 등 연극 무대와 무용극, 뮤지컬 무대에도 올랐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무대에 수없이 오르내리며 이런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해준 헵번에게 감사했다.
짬이 날 때마다 배우 피규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소룡, 제임스 딘 등 다른 배우들도 만들었지만 항상 메인은 오드리 헵번이었다. 돈벌이가 시원찮았던 연극배우 시절, 값비싼 조형 재료와 한 달 생활비 중 선택하라면 나는 기꺼이 조형 재료를 선택했다. 조형 재료를 사면 그 달은 거의 굶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너무 행복했다. 그러던 중 작년 3월엔 TV 출연까지 하게 되었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란 프로그램에 ‘오드리 헵번을 사랑한 남자’로 말이다. 방송이 나간 후 ‘오드리 헵번 카페’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었다.
오드리 헵번 재단과 손잡고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카페를 오픈한다는 것이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20년 동안 내 삶의 빛이 되어준 헵번에게 나름 은혜를 갚고 싶었다. 모든 일을 정리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32살에 회사원이 되었다. (현재 홍보·마케팅 팀에서 일하고 있다.) 입사 후, 그녀의 둘째 아들인 루카 도티를 만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3박 4일 동안 그의 개인 비서가 되어 모든 행사에 함께 했다.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싫은 티 한 번 내지 않고 어떤 힘든 일도 긍정적으로 임하는 모습이 언제나 긍정적으로 세상을 대했던 오드리 헵번과 흡사했다. 그리고 눈과 코, 얼굴선, 몸의 비율,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물론 활짝 웃는 모습에서 헵번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33년 동안 나의 삶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삶이었다. 그러다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서 지난해부터 성당에서 하는 봉사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동생과 살고 있는, 보일러도 땔 수 없는 추운 방에 동생과 함께 앉아 있던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의 눈을 보면서 중학교 때 힘들었던 내 모습이 보였다. ‘왜 더 빨리 도와주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왔나?’ 그때부터 그 아이에게 재능 기부로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고, 매달 소액의 돈을 모아 전하고 있다. 날 보며 밝게 웃는 아이를 보면, 말년에 가난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던 헵번이 떠오른다. ‘헵번이 이런 느낌이었을까?’란 생각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너에게 오드리 헵번은 무엇이냐고. 나에게 헵번은 빛 같은 존재다. 꿈도 희망도 없던 12살 소년에게 다가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살게 해준 어둠 속 등대 같은 존재. 이제껏 그 빛을 따라가서 실패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기에 나는 앞으로도 그 빛을 따라갈 것이다. 그 빛이 나를 또 어떤 곳으로 이끌지 정말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