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닭고기 냉채

야참에 빠질 수 없는 닭고기. 튀기고 굽고 조려 먹어도 맛있지만 담백한 맛으로 상큼한 맛으로 봄의 입맛을 돋우어주는 건 단연 닭고기 냉채이다. 입맛 없는 분들이라면 쌉싸름한 봄나물을 첨가하여 만들어주면 더 맛있다. 마늘소스 외에도 겨자소스, 칠리소스 등을 이용해도 좋고 닭고기 대신 오징어와 새우 같은 해산물을 이용해도 된다.

글 & 요리 이미경 자료 제공 <국민 야참>(상상출판)

재료 닭 가슴살 1조각, 숙주나물 100g, 풋고추 4개, 식용유, 소금·통깨 약간

마늘 양념장 재료 간장 0.3큰술, 식초 2큰술, 설탕 1.5큰술, 맛술 0.5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소금 약간

① 닭 가슴살은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삶아 물기를 빼서 가늘게 찢는다. ② 숙주나물은 머리, 꼬리를 떼고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데쳐 찬물에 헹구어 물기를 뺀다. ③ 풋고추는 반으로 잘라 씨를 긁어내고 가늘게 채 썰어 식용유를 두른 팬에 볶아서 소금으로 간하고 접시에 펴서 식힌다. ④ 준비한 재료를 접시에 돌려 담고 마늘 양념장을 만들어 뿌리고 통깨를 솔솔 뿌려 낸다.

요리 연구가 이미경님은 쿠킹스튜디오 ‘네츄르먼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동양매직요리학원 원장, 선재사찰음식문화 수석연구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건강한 제철 음식, 심플하고 부담 없는 레시피를 대중에게 알려오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국민 야참> <아이요리> 외 다수가 있습니다.

페이퍼 펄프 헬멧

만든 사람
에드워드 토마스, 바비 피터슨, 토마스 고테리어
영국 런던 거주

이름은?
페이퍼 펄프 헬멧 Paper Pulp Helmet. 종이로 만든 자전거 헬멧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의 졸업 작품을 구상하던 중 단순히 종이를 재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도시에서는 아주 방대한 양의 신문지 쓰레기가 매일매일 생산된다. 우리는 이 쓰레기가 다른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재료 공급의 고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종이 펄프의 형태만 바꾸어서 저렴한 자전거 헬멧을 만들었다. 런던의 자전거 대여 시스템(Barclays Bicycle Hire Scheme)과 결합했을 때 좋은 활용 방안이 될 수 있다.

제품의 재료는?
100% 신문지다. 버려진 신문을 모아서 많은 양의 물과 섞어 갈아주면 까만색의 종이죽이 되는데 표백제나 접착제는 들어가지 않고 다만 유기농 첨가제를 약간 넣어 종이 펄프가 더 잘 결합될 수 있도록 한다.

제작 방법은?
혼합된 종이죽에 작은 구멍이 많이 뚫린 거푸집을 담그고 진공 흡입관을 연결해 공기를 빨아들인다. 물기는 진공관을 따라 빠져나가고 종이 섬유에 거푸집이 씌워지면서 헬멧의 모양을 갖춘다. 거푸집을 제거해 말린 후 조이는 끈을 끼우면 완성된다.
헬멧은 6시간 정도 비를 맞아도 괜찮을 정도로 방수가 가능하며 헬멧 사이즈를 색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천연 색소를 첨가하기도 한다. 헬멧은 잠깐 사용하는 용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폐기 또한 쉽다. 헬멧은 물론 조이는 끈까지 그대로 종이 펄프 통에 넣기만 하면 재료의 손상 없이 고스란히 새 헬멧을 만들 수 있다. 홈페이지에서 제작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중점을 둔 부분은?
헬멧의 구조다. 종이 원래의 형태로는 튼튼하지 않기에 빳빳하게 유지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종이는 형태만 바꾸면 제품 포장재로도 널리 사용될 만큼 충분히 튼튼하다. 우리는 단지 이런 기술적인 부분을 헬멧에 새롭게 적용시켰을 뿐이다.

주변의 반응은?
모양이 독특하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이 종이 헬멧이 충격에 강할까 의심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주 튼튼하며 계속 강도를 측정하는 실험 중이다. 많은 유럽의 자전거 헬멧 안전 기준을 충족시켜서 이 헬멧이 충분히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판매는 아직 하지 않고 있지만 만들게 되면 1개당 1달러 이하로 하고 싶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세상엔 여러 형태의 가정이 있고 다양한 부류의 부모가 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과 유대 관계를 쌓는 데 단 하나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함께한 시간’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시간은 피보다 깊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피를 나눈 자식과 세월을 함께한 자식 사이에서 갈등하는 두 가정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료타와 미도리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남편은 일류 대기업의 인정받는 건축가이며, 엄마는 상냥하고 배려 깊은 살림꾼이다. 부부에겐 아들 케이타가 있다. 애교 넘치면서도 조숙하고 착한 케이타는 부부에게 큰 기쁨이다. 이런 부부의 행복은 어느 날 케이타가 태어난 산부인과 병원에서 전화가 오며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친아들 이름은 류세이. 유다이와 유카리 부부가 기르고 있었다. 두 가정은 병원에 맞서 함께 소송을 진행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바꿀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둘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영화는 두 가정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이에게 필요한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설파한다.

유다이는 철물점을 운영하며, 세 아이를 둔 아버지다. 그는 아들과 목욕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연날리기를 함께해주고, 놀이방에서 같이 노는 게 책임이라 여기며 아이를 늘 웃게 만든다. 반면, 료타는 다정하지만 동시에 냉정한 아버지다. 대기업에 다니는 엘리트답게 그는 어떤 것이든 자신이 앞서야 하고, 정복해야만 한다. 그 역시 케이타를 사랑하지만 때로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케이타가 료타는 아쉽다. 친자 검사 결과가 나온 날, 료타는 “역시 그랬군”이라고 말한다. 료타의 그 말은 그동안 자신만큼 뛰어나지 못한 케이타를 이상하게 여긴 그의 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료타의 모습을 우리는 아니꼽게만 볼 수도 없다. 료타 그 자신도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역시 그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지 않았다. 재혼해서 어린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줬고 그래서 그는 새어머니를 향해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다. 료타에게 부자 관계란 그저 일직선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아들은 나를 닮은 존재이자 나의 분신이다. 그래서 그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줄 존재라고 생각한다.

두 가족은 결국 아이를 바꾼다. 하지만 류세이는 생각보다 잘 적응하지 못한다. 심통을 부리고, 키워준 부모 얘기를 하며 결국 몰래 집을 나가 옛집을 찾아간다.

류세이와 케이타, 상이한 가정에서 자란 두 아이의 대비되는 모습은 짧지만 강렬하게 어떤 서글픔을 준다. 류세이는 직접 보고 싶은 부모를 찾아간다. 반면 케이타는 아버지 료타가 류세이를 찾으러 왔을 때, 벽장에 몸을 숨긴다.

류세이의 가출로 무언가를 깨달은 료타는 결국 조금씩 변화한다. 아이의 총싸움에 응해주고 함께 게임을 하며 시종일관 장난을 걸어준다. 하지만 이런 료타의 변화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그렇게’에 해당하는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장면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부성애가 들끓는 장면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해바라기 같은 숨겨진 애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료타는 케이타가 남긴 카메라 속 사진에서 자신을 향한 아이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무장해제되고 만다. 자신만을 향한, 자신만을 바라본 아이의 사랑을 깨달은 후 료타는 자신 ‘역시’ 케이타의 아버지였음을 깨닫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칫 신파로 흐를 수도 있는 소재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강한 울림을 지닌 가족 드라마로 만들었다. 피보다 서로 함께 나눈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아이들의 순수한 연기로 보여준다. 케이타의 사랑은 료타를 해제시키고 아버지로 만들었듯이, 관객의 마음까지 해제시켜 버린다. 보는 이의 마음을 풀어헤치는, 아이의 눈망울 같은 영화다.

이희구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황금의 나라, 신라> 전

세계 4대 미술관이자 관광 명소로 꼽히는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하 ‘메트’).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의 모든 문화가 백과사전처럼 모여 있는 이곳에서 지난 11월 초부터 특별기획 전시 ‘황금의 나라, 신라’ 전이 열리고 있다. 메트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30년 만의 한국미술전이자, ‘신라’를 주제로 한 서양 최초 전시로 현재까지 16만 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며 현지 언론과 관람객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고대 국가 신라의 미술은 어떻게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메트의 유일한 한국인 큐레이터 이소영씨 이야기이다. 정리 문진정

신라 유물이 뉴욕에 오기까지

‘신라’전은 2008년 5월, 국립경주박물관 측에서 당시 강연차 방문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중국미술 담당 큐레이터 드니스 라이디씨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메트의 한국미술 담당 큐레이터로서 언젠가는 한국 고대 미술을 전시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한국 측의 제의로 예상보다 조금 앞당겨진 셈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서울과 경주를 오가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과 전시 공간 선점부터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5년의 치열한 준비 기간을 거쳤다. 전시가 열리는 1층 특별전시실은,메트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그리스 로마 전시실 바로 옆에 자리해 공간적으로, 또 시대적으로도 연결선상에 있게 했다.

정교한 황금빛 장신구, 기품 있는 금동 불상

초기 신라는 한반도 구석의 작은 나라였지만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 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삼국을 통일시킨 주역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지리적으로도 유라시아대륙의 동서양 문화 교류의 요충지로서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불교 미술을 발전시키는 등 전 시대에 걸쳐 다양한 예술을 꽃피웠다. 이러한 풍부한 문화를 보다 깊이 있게 조명하면서도 ‘신라’라는 생소한 나라를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과제였다.
전시의 전체 콘셉트는 황금 문화를 바탕으로 400~800년대를 통틀어 시대별 예술의 큰 흐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잡았다. 화려한 금관을 비롯하여 현대적이면서 세련된 황금 장신구뿐만 아니라 신라 불교 미술의 전성기도 다루었다. 그 대표 작품이 한국의 모나리자라고 할 수 있는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83호)이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우며, 강력한 고요함을 풍기고 있다.(뉴욕타임즈)” “앉아 있지만 정적이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모습이다.(월스트리트)” 등 현지 유명 언론들이 관심 있게 보도했고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극찬을 받고 있다.

① 황남대총 북분 금관(국보 191호). 황금 장신구의 대표작이자 5세기 황금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이 아니라 왕비가 썼다는 점이 재미있다.
② 보문합장분 귀걸이(국보 90호)
③ 금관총 금제 장식(국보 87호)
④ 철조여래좌상. 유명한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이어받은 조각이자, 당시 불교 미술 속의 ‘국제 양식’을 잘 반영하는 품위 있고 장엄한 작품이다
⑤ 토우장식뚜껑 굽다리접시

예술성 높은 유물과 최첨단 디지털 기술의 조합

이번 전시의 차별점은 고대 미술 전시에 최첨단 디지털 기술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넓은 벽면 가득 경주 황남대총 영상을 접하게 되는데 마치 1,500년의 역사를 거슬러 고대 신라 서라벌의 고분 앞에 서 있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석굴암 축조 과정이 85인치 삼성 UHD TV로 상영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국보 90호 보문합장분 귀걸이의 정교함을 리움 디지털 돋보기로 360도로 회전, 확대해 볼 수도 있다. 그 외에 금속 장신구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도 있다. 이런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를 활용해 전시품의 고고학적인 의미와 섬세한 예술적 가치, 이 두 가지 모두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신라 특별전을 마무리하며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가 K-pop, 영화, 드라마 못지않게 매력 있는 전통문화, 특히 고대 미술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것에 감사한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 유물을 접하고 감탄하던 사람들, 신라가 실크로드의 일부였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는 관객들을 보면 큐레이터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 또한 “메트에서 본 전시 중 가장 아름다운 전시 중 하나다”라는 현지 관람객들과 큐레이터들의 평가와, 미국에 오래 거주한 한국 교포분들이 “뉴욕에서 신라 미술을 보게 되니 감동이다”라고 했던 말씀들도 기억에 남는다. 존재조차 생소했던 ‘신라’라는 나라가 어느새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각인된 것 같아 더없이 뜻깊다. 세계 어느 시대, 어느 문화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풍부한 아름다움과 역사적 중요성을 갖춘 고대 신라 문화가 세계에 알려진 것이 기쁘고 벅차다.

푸른 물결 넘실대는 그림 같은 땅, 체코 남모라비아

사진 & 글 전중호

어느 날 지인에게서 사진 몇 장을 소개받았다.
사진 속 풍경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체코, 남모라비아로 떠났다.
그곳은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근대 선교 역사에 100년 동안 매일 24시간씩 무릎을 꿇었던
모라비안 교도의 기도가
평화로운 대지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시간 카메라를 둘러메고
여러 곳을 다녔지만 체코는 특별했다.
선과 색과 패턴이 주는 조화를 뛰어넘어
300m 화각에 알맞은
특이한 풍광의 이미지는 잊을 수 없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구릉과 구릉,
그 아름다운 선들….
마치 너무나 잘 가꾸어 놓은 듯
푸른 융단처럼 너무나 경이로웠다.

봄에는 땅이 넉넉해서인지 곳곳에 갈색의 휴경지가 있다.
비에 촉촉해진 까만 흙과 녹색의 밀밭, 군데군데 노란 유채꽃이 색감을 자랑한다.
가을엔 평범한 옥수수밭도 추수가 끝나면 콤바인이 지난 자리로 멋진 궤적을 만들어낸다.
더구나 수확을 기다리며 온몸을 까맣게 태우는 해바라기밭도 패턴 속에 있다.
그렇게 풀밭을 거닐다 보면 밀 싹을 먹고 자라는 노루들이 나를 반긴다.
그래서 5차례나 모라비아에 갔다.
풍광은 매번 달랐지만 언덕과 언덕이 만나는 선과 색과 면의 평화로움은 같았다.
그중에서도 군더더기를 뺀 단순화된 패턴을 찾아 구릉을 몇 번이나 넘었던가!
14년의 내 사진 작업 방향을 정립해준 체코의 들녘이 사랑스럽다.
그 땅은 나의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평화를 찾아가는 마음의 여행지가 되고 있다. 또한 나에게도.

전중호님은 1983년 건국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2013년 단체전 KIAF(한국국제아트페어), ‘One Room One Photo’전, 개인전 ‘Peace를 찾아서’를 열었으며, 아름다운 땅 체코에서 평화를 주제로 사진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박수근 화백

화가 박수근(1914~1965). 그는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내고자 한 서민 화가였다. 경매에 나오는 그림마다 사상 최고의 낙찰가를 기록하는 등 사후의 영광과는 달리, 생전엔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된 개인전조차 열지 못했던 박수근 화백. 하지만 그가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세상에 대한 따듯한 시선은 마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을 연상시키며 세월을 뛰어넘어 메마른 사람들의 삶과 마음까지 보듬어주었고, 지금도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화가 박수근을 말한다.

정리 김혜진 & 사진 제공 가나아트

“밀레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박수근이 화가의 꿈을 갖게 된 건 12살 때였다. 들녘에서 두 농부가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밀레의 <만종>은, 어린 수근에게 ‘너무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를 정도로’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꿈은 고단한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초등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지만,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이어갔다. 너른 들판은 소년에게 일터이자 배움터였다. 봄나물을 뜯는 소녀, 농가에서 일하는 여인 등 일상 풍경들은 좋은 그림 소재가 되었다. 1932년, 18살 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봄이 오다’로 입선하며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그는 아내 김복순과의 만남으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여고를 나온 부잣집 딸이었음에도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밖에 없었던’ 화가를 기꺼이 반려자로 선택한 아내, 그녀의 헌신적인 내조는 외로운 화가의 길을 걷는 그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01 빨래터 Washerwomen by the Stream, 1959, Oil on canvas, 50.5×111.5cm
02 고목과 행인, An Old Tree and Women, 1960s, Oil on canvas, 53×40.5cm
03 아기 업은 소녀와 아이들 A Girl Tending to a Infant and Children, 1950s, Oil on canvas, 45.8×37.5cm
04 앉아 있는 여인 A seated Woman, 1963, Oil on canvas, 65×53cm
05 노상 Selling by the Roadside, 1957, Oil on canvas, 31.5×41cm.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박수근은 부두 노동자로, 미국부대 PX(매점)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때 PX에서 함께 일하던 이가 소설가 고 박완서 선생이다. 훗날 두 사람의 인연은 박완서 선생의 데뷔작 <나목>을 통해 재탄생된다. <나목>에 등장하는 화가 ‘옥희도’가 바로 박수근 화백인 것. 선생은 박수근 화백을 ‘언 몸을 녹여주는 따듯한 물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내가 초상화부에서 한 일은 미군에게 초상화 주문을 받는 일이었다. 주문이 늘어날 무렵 난 화가들에게 안하무인으로 굴기 시작했다. 양갓집 딸로, 서울대 학생인 내가 간판쟁이들에게 일거리를 주는데 생색쯤 못 낼 게 뭔가 싶었다. 그렇게 나는 한없이 밑바닥으로 전락한 불행감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화집 한 권을 들고 나에게 왔다. 망설이는 듯 수줍은 미소로, 그림을 가리키며 선전에 입선한 그림이라고 했다.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있다는 건 충격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불행감에서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 소설가 박완서

절구질하는 여인,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길가의 행상들, 아기 업은 소녀…. 박수근 작품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너무 흔해서 지나치기 쉽고 하잘것없어 보이는 것을 그는 남다른 애정으로 바라보았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고단한 삶에서도 힘겨움을 탓하지 않고 살아가는 서민들의 무던한 마음을 담아냈던 것이다.

“버스에서 내린 그이와 같이 오는데, 노상에서 우산을 받치고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 세 분이 나란히 앉아 계셨다. 아이들 과일 사다 주자고 하면서 한 아주머니에게 몇 알, 다음 아주머니에게 몇 알 사기에, 내가 비 오는데 한군데서 사지 뭘 그렇게 여기저기서 사느냐고 했더니 ‘한 아주머니에게만 사면 딴 아주머니들이 섭섭해하지 않겠어’ 하며 골고루 사셨다. 그이는 물건을 살 때면 큰 상점보다 노상에서 손수레나 광주리 장사에게 사셨다. 광주리 장사하는 여인들을 늘 불쌍히 여겼고, 전후에 고생을 겪는 이웃들을 늘 애처롭게 여겨 그분 그림의 소재가 모두 노상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 아내 김복순

왼쪽 서울 창신동 집에서. 박수근은 PX에서 근무한 뒤 창신동에 집을 마련했다. 마루는 그의 화실이었고, 때론 외국인들이 그림을 감상했던 화랑이기도 했다.
오른쪽 아들 성남, 딸 인애와 함께
06 시장 사람들 People at the Marketplace, 1950s, Oil on canvas, 77.5×51.5cm

“나는 우리나라의 옛 석물, 즉 석탑, 석불 같은 데서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낀다”

50년대 중반 박수근은 본격적으로 전업 화가의 길을 걷는다. 경주 남산과 유적지를 드나들며 발굴된 신라 기와와 파편들을 탁본하면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는 스스로 미석(美石)이라는 호를 붙일 정도로 우리나라 옛 석물들을 사랑했고, 그 아름다움을 작품에 담으려 했다. 이끼 낀 화강암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보는 듯 여러 층으로 물감을 겹겹이 발라 쌓아올린 질감은, 마치 바위에 햇빛이 비치고 바람이 불고 꽃가루가 묻고 비에 젖듯이 오랜 세월 풍상을 겪은 자연 상태의 소박한 그림을 낳았다. 당시 작품들은 한국에 있는 미국인 미술 애호가들에게 단연 인기였다. 서양에선 볼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박수근의 그림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해요. 저는 그의 소박한 접근 방식이 좋아요. 박수근 그림 속 사람들 얼굴에는 표정이 없지만, 한참 보고 있으면 소박한 표정을 상상할 수 있어요. 이미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어요. 박수근의 그림은 그 모든 것을 담고 있어요.” – 소장가 존 릭스, 미국

1963년 마흔아홉 되던 해 한쪽 눈을 잃고도 51세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늘 “괜찮아, 괜찮아…”란 말을 해왔던 박수근 화백. 그의 삶은 작가 자신의 그림에도 종종 등장하는 ‘나목’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겨울날 벌거벗고 선 아이 같고, 자라다가 찬 서리를 만나 꺾어버린 사람과도 같은 나무들…. 나목, 그것은 추운 겨울을 견뎌내며 푸른 잎들이 자라나길 묵묵히 기다리는, 작가 자신이었다.

한국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박수근 화백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로 입선, 화가의 길에 들어섭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도 당당히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화강암 질감에 단순한 선으로 표현해낸 그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란 평을 받습니다.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오는 3월 16일까지 가나인사아트센터(서울시 인사동)에서 열립니다. 유화 및 수채화, 드로잉 등을 총망라한 박수근 화백의 그림 120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46). 그는 불안 많은 부모들에게 따듯한 위로와 해법을 건네는 우리 시대 육아 전문가이다.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해집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트위터에 올리기 시작한 육아 조언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화제가 되었고, 최근 출간한 책 <서천석의 마음 읽는 시간>도 큰 인기를 끌었다. 늘 거울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비춰주며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끌어주려고 노력하는 의사.
그가 오랫동안 상담을 하다 보니 저절로 갖게 됐다는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근조근 요즘 사람들의 마음 이야기를 전했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마음 읽는 시간>이란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실제 그런 시간의 필요를 많이 느끼시나요?

그럼요.(웃음) 우리가 보통 마음먹기 나름이다,라고 하잖아요. 외부의 여러 가지 상황들도 결국 내 마음을 통해 소화가 돼서 해석을 하게 되고요. 내 마음에 바람이 부냐, 파도가 치냐, 구름이 껴 있냐에 따라서 외부 상황이 전혀 다르게 비치죠. 흔들리는 내 마음에 따라서 봐놓고 정확히 본 거다 착각하는 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거 같습니다. 지금 내 마음의 상태를 알아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도 있잖아요. 타인을 볼 때도 마찬가지고요. 하루 10분이라도 꾸준히 내 마음을 읽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내 인생도 조금은 잘 조절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요?

가령 어제 있었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구나 살펴보고, 이럴 때는 내 마음이 이렇게 움직이네 하며 자기반성적인 사고를 가지는 거죠. 그런데 경험이 없으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혜와 철학이 담긴 글을 읽으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도 도움이 돼요. 사실 우리가 나한테 벌어진 일들과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자기 마음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잖아요. 내 마음이 어땠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 바깥에서 벌어진 일들이 원인이라고만 여기면, 바깥이 변하지 않는 한 어떤 해결책도 나오지 않아요. 내가 주체로서 문제를 풀어나갈 방법을 찾으려면 내가 그 상황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그 마음이 어땠는지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죠.

요즘의 부모들은 불안이 많다고 하셨듯이, 부모들부터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부모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렇게 느낄 때가 많아요. 내가 이대로 유지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애들도 잡는 거지요. 아이의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그 행동을 부모인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내가 불안한 정도가 나의 반응을 결정합니다. 아이를 보고 있지만 실제의 아이가 아닌, 자신의 걱정과 불안으로 인해 왜곡된 아이를 보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를 제대로 보려면 부모의 마음부터 걷어내야 합니다. 내가 불안해서 그랬구나를 알면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달라지더라고요. 불안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불안한 것에 지지 않고 맞서려고 해보는 거예요. 실제로 나를 돌아보며 이 불안이 근거 있는 건가? 묻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자 마음먹으면서, 그것에 집중하는 거죠.

“저 역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제 부족함이 늘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제가 부족함을 채우려고 노력하기보다 부족한 저를 원망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시간을 쓰지 않고 저를 탓하느라 시간을 다 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안 다음 부족한 나를 인정하고, 하나라도 더 제게 채워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아이에게 주는 가장 큰 가르침이 될 것이니까요.”

서천석 박사가 부모들에게 건네는 이야기들은 그 역시 두 아이를 키우며 부모로서 성장해간 과정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그 울림은 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고 인생은 왜 사는가? 늘 고민해왔던 그는 의대에 진학하며 자연스레 정신과를 택하게 된다. 그 후 정신과 전문의로 일하면서 어른들이 앓는 마음의 병의 뿌리가 어린 시절에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았고, “그 상처를 어린 시절에 치료했더라면 지금은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 그는 자신의 아이가 태어날 무렵 소아정신과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진료실에서 무수히 많은 부모와 아이들을 만나고 상담하며, 그리고 두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느낀 이야기들을 트위터에 올리기 시작한다. 단순한 위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그의 글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기하게도 그의 트위터를 구독하는 이들의 반은 아이를 키우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그는 자연스레 성인들이 겪는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글을 쓰게 된다. 많은 이들에게 따듯한 위로와 더불어 마음의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가 필요했구나 느끼는 순간이었다.

자료 제공_창비

부모는 부모가 되어서야 성장한다고 했는데, 스스로도 부모가 되어 배운 게 있다면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진짜로 느끼는 거 같아요. 그전에는 누군가를 사랑해서 결혼했어도 그 사람을 소유하는 것, 나한테 잘 대해줬으면 좋겠는 거, 그 정도를 생각했다면 애한테는 내 중심적으로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기대하지 않고 주는 사랑을 하게 되잖아요.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내가 노력했다고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그래도 주는 과정에서 만족을 얻고, 내가 노력한 것만으로도 나를 위안하고 만족할 수 있다는 거, 이런 거를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거 같아요. 그리고 좀 더 겸손한 자세도 배웠지요. 남의 애 얘기를 함부로 하면 안 된다거나, 미래에 대해서도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다거나 하는 거요. 늘 쉽게 단정하고 쉽게 판단했는데, 그러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기다리는 이런 태도는, 아이를 키우지 않았으면 배우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아이들의 행복지수가 OECD 23개국 중에 23위, 그것도 4년 연속으로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체감하시는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어떤가요?

아이들의 행복지수가 어른들보다도 낮다는 건 객관적으로 분명한 거 같아요. 요즘 아이들은 압도적으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요. 애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는데 부모가 행복해 보이지 않으니까요. 사는 게 괴롭고 힘든 모습만 보다 보니 어른이 되기 싫은 거고, 그런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없죠.

결국 아이를 위해서라도 부모가 먼저 행복해야겠네요. ‘좋은 부모가 되려면 우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거 같습니다.

소아정신과 의사다 보니 아이가 해주는 부모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애들이 정말 정확히 부모를 보고 있구나 하면서 놀랄 때가 많아요. 한번은 어떤 아이가 그런 말을 해요. “엄마가 친구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저희 엄마는 친구가 없어요.” 부모들은 인식하지 못해도, 아이들은 다 보고 있거든요. “내 삶이 곧 내 메시지다.” 간디가 그런 말을 했는데,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부모가 먼저 자신이 말한 대로 된다면, 아이는 저절로 따라가요. 그 가르침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지죠. 매일 병원에서 부모들을 만나다 보면, 부모 자신이 만족하지 않고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 한 아이가 충분히 좋아지긴 어렵더라고요.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자신부터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두 아이를 키우며, 특별히 노력하는 부분이 있으세요?

저는 낙관적, 늘 노력하는 자세, 포기하지 않고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해보려는 마음, 그런 걸 아이들에게 강조하거든요. 인생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어려움들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피할 수 없다면 어려움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느냐가 관건이니까요. 그래서 말하기에 앞서 나는 정말 그런가? 나부터 그렇게 빨리 회복해서 벗어나고 있는가? 그런 걸 먼저 돌아보고 나 자신부터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죠.(웃음)

요즘 방송에도 ‘아빠 육아’가 트렌드잖아요.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 자문의로도 활동하고 계신데, 육아를 어려워하는 아빠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처음에 <아빠 어디 가>를 보면서 제가 흥미로웠던 부분은 아빠들의 변화였어요. 초기에는 아이와 어떻게 교류해야 할지 모르던 아빠들이 어느새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려 하잖아요?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도 보면, 아빠들도 아이들도 변화가 굉장히 커요. 세 달 정도 녹화하면서, 8일 정도를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타블로씨 아이 ‘하루’의 경우 성격이 굉장히 바뀌었어요. 아빠하고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처음에는 말수도 없고 쿨 시크한 아이였는데 굉장히 활발하고 적극적이고 자기표현이 많은 아이로 변했거든요. 또 처음에 힘들어하고 벅차하던 아빠들도 가정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는 모습이 나와요. 그저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뿐인데, 이런 변화가 오는 겁니다.

‘아이에게 무엇이 되고 싶다보다 어떻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갖게 해줘라’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무엇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주는 기쁨은 별로 없어요. 내가 사는 모습이 내 마음에 들어야 사람이 만족하게 되잖아요. 무엇이 되느냐만 생각하면, 안 될 때는 난 안 돼~ 하며 자꾸 좌절감에 빠지고 소위 말하는 잉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돼요. 그런데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면 잉여가 아니죠. 그러면 내가 나에게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렇고, 삶을 살아가면서도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결해 가셨는지 궁금합니다.

16년 전쯤 정신과 전공의 시절에 6개월이 넘도록 안 낫는 환자가 있었어요. 답답하고 괴롭고, 자기 회의도 빠지고. 도저히 안 돼서 지도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계속 물어보시는 게 한 가지였어요. 정말 그분을 고치고 싶은가? 그리고 말씀하시길 “자네가 진심으로 고치고 싶다면 고칠 수 있을 것이네.” 그런데 가만 보니 정말 고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봤나 생각해봤더니 그러지 않은 거예요. 내가 늘 해오던 방식만 하고서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 거죠. 그 후 새로운 방법을 더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도움이 됐죠. 부모가 아이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아이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면 부모로서 얼마나 노력했냐 물어보면 별로 해본 게 없어요. 어떤 문제든 정말 진심으로 원하면 반드시 길은 있는 거 같아요.

좋은 사람, 행복한 부모가 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결과보다는 늘 과정에 집중하시라는 겁니다. 결과에 집착하는 순간 내 모습이 보이지 않거든요. 양궁 선수가 활을 쏠 때 과녁보다 자기에 집중한다고 해요. 과녁을 보면 오히려 맞히지 못한다고. 내 자세와 호흡, 내 몸의 근육과 내 마음이 내가 훈련하고 기억한 그대로인지에만 집중하는 거지요. 내 생활 내 태도를 봐야 오히려 그 결과에 다가갈 수 있는데 결과만 보며 조급해하면 다른 것들은 전혀 보지 못하죠. 아이를 키울 때도 아이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대하는 내 태도에 집중해 보세요. 분명 ‘행복한 아이를 둔 부모’라는 결과를 얻게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정신과 상담은 거울과 같은 것. 누군가의 마음을 바르게 비쳐주기 위해 스스로도 똑같은 입장에서 상담을 하는 등 자신의 마음을 알기 위해 노력을 했다는 서천석 박사. 17년 정신과 의사 이전에 마음에 대해 늘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이기에, 그가 건네는 이야기들엔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는가 보다.

“오늘 비가 왔다고 내일 맑은 걸 느끼지 않을 필요가 없잖아요?”
혹 오늘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떤가, 혹 오늘 부족함을 느낀들 어떠한가. 서천석 박사는 그 한계를 인정하고 긍정적인 방향을 찾으려 노력한다면, 언제나 우리는 화창한 내일을 준비하는 행복한 사람이지 않겠냐고 말한다.

“자신의 강점을 완벽함에 두지 마세요. 늘 성장하려 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태도를 장점으로 삼으십시오. 그래야 자신을 오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 사랑받아야 마땅한 존재가 당신입니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님은 1969년 생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진료실에서는 물론 트위터(twitter.com/suhcs), 신문과 방송, 강연 등을 통해서도 활발히 이 시대와 소통하고 있는 그는, 막연한 원칙이 아닌 현실적인 답을 주는 의사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 <하루 10분 내 아이를 생각하다>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창비) <서천석의 마음 읽는 시간>(김영사) 외에 어린이 그림책 <자라는 몸> <싸우는 몸> <느끼는 몸> 등을 펴냈다.

뭔가 일을 한다는 것은우리 인생의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자, 축복일 것입니다

북촌을 달리는 행복한 인력거꾼

김형준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 아띠인력거(주) 근무

나는 인력거꾼이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인 서울 북촌에서 자전거로 된 인력거에 손님을 모시고 아름다운 북촌의 모습과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나는 그들이 눈과 귀 그리고 몸으로 북촌을 만났으면 한다. 아직도 내겐 알고 싶은 곳이 너무나 많은 북촌. 나는 오늘도 세발자전거에 몸을 싣고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다닌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난다.

우연히 알게 된 영화 ‘오래된 인력거’. 영화에 나오는 인력거꾼들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고 힘겨운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인도에 있을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신발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낄 정도로 딱딱해져버린 맨발. 언제 빨았을지 모를 누더기 옷들…. ‘난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가슴속으로 되새기게 했던 모습들이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 시작한 일이 인력거꾼이라니!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2009년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20대가 가기 전에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여행하는 거였다. 그때는 몰랐다. 그 여행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은. 나의 첫 여행지는 중국이었다. 그 후에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하고 미국 횡단과 종단을 했다. 또다시 네팔, 스리랑카 등을 돌고 마지막으로 인도로 갔다. 인도라고 하면 왠지 현자들이 있을 것 같고 죽음과 삶에 대한 통찰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 인도에서 현자를 만난 건 아니지만 내 인생의 방향성은 찾은 듯했다. 문득 투어 가이드가 되고 싶어졌다.

한국으로 돌아와 우연히 친구 소개로 한국에도 인력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발자전거에 사람을 태우고 다닌단다. 자전거 여행에 이미 일가견 있던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특히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북촌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는 거였다.
내겐 더없는 연습 무대인 것이다.

14명의 라이더가 함께하는 아띠인력거. 지난해 처음 인력거에 올라타고 창덕궁을 지나 안국동으로 갈 땐 기분이 이상했다. 재미있을 줄만 알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에게 인력거를 이용하라고 길에서 말하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떠오른 인도에서 보았던 인력거꾼들의 모습이 날 괴롭혔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무료로 사람들을 태워주기 시작했다. 음료수, 과자, 커피 등 여러 가지로 작은 팁을 주시며 고마워들 하셨다. 정식으로 요금을 받고 첫 손님을 맞이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북촌을 돌며 여기저기 여행을 했다. 투어가 끝났을 때 내게 행복했다며 고마워하셨다. 어떤 손님은 정말 오랜만에 엄마가 밝게 웃는 모습을 봤다며 감사하단다. 기분이 묘했다. 분명히 옷은 땀범벅이 되었는데 몸은 가볍고 날아갈 듯 행복감을 느꼈다.

하루는 한 커플을 태우고 예쁜 불빛들 사이로 바람과 함께 달렸다. 인력거에 오를 땐 말다툼을 했는지 말없이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각자 다른 곳을 향하던 커플의 시선이 같은 곳으로 향했다. 나도 모르게 신이 나 골목길을 내달리자 약간의 흔들림으로 그들의 사이는 좁혀졌다. 마지막으로 나만의 초특급 유머 서비스! 하하! 커플은 손을 꼬옥 잡고 인력거에서 내렸다. 그리고 남자분이 조용히 다가와 건넨 말. “정말 고마워요. 인력거에 타기 직전에 여자 친구랑 헤어질 뻔했어요.” 내가 절로 뿌듯해졌다.

우리 회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20대부터 40대까지, 연애박사부터 나무박사까지 다양한 배경들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말머리 가면을 쓰고 퍼포먼스도 하고 CF를 자체 제작한다. 가끔은 음악인들이 인력거에서 노래를 하며 ‘움직이는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신나고 재미있다.

영화 속의 인력거꾼들은 돈을 벌기 위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하지만 지금 나와 함께 일하는 인력거꾼들은 다르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라며 반갑게 인사하고,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밝음, 기쁨, 희망을 보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분명 영화 속 인력거꾼들과 우리들이 흘리는 땀방울은 같을 것이다. 정직하게 몸을 움직여 흘린 소중한 땀방울들이다. 왜 같은 직업 같은 땀을 흘리면서도 서로 다를까? 아마도 달려가는 심장의 방향이 달라서이지 않을까? 우리들은 말한다. 돈만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만의 문화와 재미를 만들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거라고.

김은술 작.
<Move2-이사>
91×116cm.
장지에 채색. 2007.

오드리 헵번을 사랑한 남자

임정도 33세.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3가. <오드리 헵번> 카페 근무

1995년 1월 7일 오후 4시. 눈이 소복소복 내리던 버스 정류장 뒤 무등 서점 앞. 한 소년이 서점 유리창에 붙어 있는 여배우의 브로마이드 앞에 서 있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소년은 그녀의 사진 앞에서 한참 동안 넋이 나가 있었고, 잠시 후 버스에서 내리신 어머니가 소년의 어깨를 흔들었을 때 소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엄마, 저 여자 누구야?” “응? 오드리 헵번이네!”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

그때부터 20년이란 시간 동안 내 마음속의 빛으로 살고 있는 오드리 헵번에 관하여 이야기해보려 한다. 당시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던 나는 내성적이고 친구 한 명 없는,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저녁 6시까지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던 사춘기 소년이었다. 왜 이렇게 외로운 건지, 커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지….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꿈도 희망도 없던 나는 서점 앞에서 헵번을 본 후 헵번을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무미건조하고 정처 없이 흘러만 가던 내 삶에 뭔가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그 깊고 아름다운 눈을 완벽하게 그려내고 싶었다.

오드리 헵번을 4년 정도 그리다 보니 이번에 그녀를 밖으로 꺼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3년 동안 조소를 전공하였다. 그러고 나니 그녀가 밟았던 길을 가보고 싶었다. 그녀가 영화를 찍었던 촬영 장소를 시작으로,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 그녀가 살았던 집 등 그렇게 헵번과 관련된 나라인 파리, 벨기에, 스위스, 런던, 뉴욕,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녀오니 이번엔 그녀의 직업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배우가 되었다.

23살 군 제대 후 배우 생활을 하기 시작해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2011), 부활 더 골든 데이즈(2012) 등 연극 무대와 무용극, 뮤지컬 무대에도 올랐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무대에 수없이 오르내리며 이런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해준 헵번에게 감사했다.

짬이 날 때마다 배우 피규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소룡, 제임스 딘 등 다른 배우들도 만들었지만 항상 메인은 오드리 헵번이었다. 돈벌이가 시원찮았던 연극배우 시절, 값비싼 조형 재료와 한 달 생활비 중 선택하라면 나는 기꺼이 조형 재료를 선택했다. 조형 재료를 사면 그 달은 거의 굶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너무 행복했다. 그러던 중 작년 3월엔 TV 출연까지 하게 되었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란 프로그램에 ‘오드리 헵번을 사랑한 남자’로 말이다. 방송이 나간 후 ‘오드리 헵번 카페’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었다.

오드리 헵번 재단과 손잡고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카페를 오픈한다는 것이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20년 동안 내 삶의 빛이 되어준 헵번에게 나름 은혜를 갚고 싶었다. 모든 일을 정리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32살에 회사원이 되었다. (현재 홍보·마케팅 팀에서 일하고 있다.) 입사 후, 그녀의 둘째 아들인 루카 도티를 만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3박 4일 동안 그의 개인 비서가 되어 모든 행사에 함께 했다.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싫은 티 한 번 내지 않고 어떤 힘든 일도 긍정적으로 임하는 모습이 언제나 긍정적으로 세상을 대했던 오드리 헵번과 흡사했다. 그리고 눈과 코, 얼굴선, 몸의 비율,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물론 활짝 웃는 모습에서 헵번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33년 동안 나의 삶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삶이었다. 그러다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서 지난해부터 성당에서 하는 봉사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동생과 살고 있는, 보일러도 땔 수 없는 추운 방에 동생과 함께 앉아 있던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의 눈을 보면서 중학교 때 힘들었던 내 모습이 보였다. ‘왜 더 빨리 도와주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왔나?’ 그때부터 그 아이에게 재능 기부로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고, 매달 소액의 돈을 모아 전하고 있다. 날 보며 밝게 웃는 아이를 보면, 말년에 가난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던 헵번이 떠오른다. ‘헵번이 이런 느낌이었을까?’란 생각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너에게 오드리 헵번은 무엇이냐고. 나에게 헵번은 빛 같은 존재다. 꿈도 희망도 없던 12살 소년에게 다가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삶을 살게 해준 어둠 속 등대 같은 존재. 이제껏 그 빛을 따라가서 실패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기에 나는 앞으로도 그 빛을 따라갈 것이다. 그 빛이 나를 또 어떤 곳으로 이끌지 정말 궁금하다.

김은술 작. <jungle>
91×72cm.
장지에 채색 2010.

식당 아줌마라 행복해요

최정숙 43세. 행밥지기. 대구시 남구 대명3동

“엄마가 있지, 이 일 말고 다른 일 해보면 어떨까?”
“아니, 엄마가 계속했으면 좋겠어. 난 엄마가 항상 요리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하는 게 좋아.”

이따금 아이들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지면 아이들은 항상 이렇게 대답을 하곤 했다.

남편과 함께 대학가에서 조그만 음식점을 운영한 지 올해로 12년째다. 내가 담당하는 것은 요리다. 내 가족이 먹는 음식과 똑같이 정성을 다하고, 음식으로 소통과 나눔을 실천하고자 애쓰며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을 만치 흘렀다.

평소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이들과 나누기를 즐긴 인연으로 2002년 8월에 지금의 이곳에 가게를 열게 되었다. 당시 6살, 3살이었던 남매를 데리고 일을 한다는 건 모험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힘들 때도 많았다. 그러나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즐겁게 하자 생각하고, 꽃길 펼쳐진 길은 없을 테니 스스로 꽃길을 만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살아냈던 시간들이었다.

찾아주시는 손님들에게는 온 마음 다한 정성스러움으로, 집 밥을 먹는 듯한 편안함으로 다가가고자 노력했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원만한 소통을 위하여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도 늘 귀를 기울였으며 명랑한 인사와 웃음 띤 얼굴로 손님을 대하고자 애를 썼다.

덕분에 이 일을 통하여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많이 지었다. 네 살 때부터 아홉 살이 된 지금까지 오고 있는 꼬마 손님 성현이는 항상 나를 ‘최정숙 아주머니’라고 불러주며 학교 친구들 이야기, 여자 친구 이야기, 비밀 이야기도 곧잘 해주곤 한다.

정성스레 포장한 차 선물을 조심스레 건네주던 교수님 단골손님도 계시고, 개업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찾아주는 손님들도 많다. 매번 너무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말을 빼놓지 않고 해주는 손님들이 있어 보람과 힘을 얻는다.

그리고 중학생, 고등학생인 우리 아이들 또래의 학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아이들을 키우는 데 있어 이해하고 대화를 원활히 할 수 있게 되는 장점이 될 때도 많다. 이런 여러 이유들로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밥을 먹는 일은 내 영혼을 공양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중요하고 숭고한 행위라는 말일 것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그저 한 끼 때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주린 배를 채우고 나아가 포만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행복한 마음까지 들게 된다면 먹는다는 행위는 그냥 단순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일에 종사한다고 생각하기까지는 사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말이다.

2013년 초, 가족 첫 해외여행으로 네팔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다녀왔다. 이국의 문화와 음식을 접한다는 기대와 설렘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다. 내 몸과 입에 맞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고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도 아울러 알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많고 많은 게 음식점이다. 단순히 음식을 팔아 돈을 버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매 순간 한 그릇의 음식에 나의 소중한 마음을 담는다.

그리고 나의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그 음식을 먹고 진정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정성 담긴 맛있는 음식은 행복감을 불러오고 나아가 영혼의 허기도 메워줄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음식을 만드는 나의 일을 아주 사랑한다.

김은술 작. <zoo> 116×91cm.
장지에 채색 2009.

뭔가 일을 한다는 것은우리 인생의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자, 축복일 것입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해준 나의 일

김영주 61세. 상품 검수원. 전남 나주시 이창동

근 30년 동안 몸담아오던 직장을 명예 퇴임으로 끝내고 자연인으로 돌아온 날, 거울 앞에 비친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아직은 생기 잃지 않은 동안의 얼굴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동안의 삶의 굴레에서 찌든, 연륜이란 나이테만은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씁쓸한 미소를 지어본다.

그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던 보일 듯 말 듯한 삶의 과제들이 갑자기 큰 빙산으로 변하여 비좁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에 깊은 심호흡을 해본다.

80년대 초 32세 나이로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다 만난 아내와 사내 커플로 결혼했던 신혼 때만 해도 사랑 하나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글세 단칸방에서도 행복했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가정이란 보금자리를 꾸려 나갔다.

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하나 둘 아이들에게 맞추어 살아야 하는 환경을 갖추어야만 했다. 좋은 환경에서 남들보다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직장에서 빌린 돈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위하여 아파트를 장만했다.

결혼하면서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두 아이를 키우는 데 전념했다. 덕분에 시골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두 아이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서울에서 자식 하나 가르치기도 벅찬데 둘을 서울로 보냈다고 대견스럽다고 했다. 어느새 직장인으로서 삶의 목표가 두 아이를 가르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아이가 군 제대 후 대학을 복학하고 졸업을 눈앞에 둔 2010년, 57세 나이로 직장 정년을 하게 되었다. 사전에 예견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예습, 복습 없이 치러야 했던 학창 시절 시험 보기 전의 마음처럼 당황스럽기만 했다. 모든 것이 어려운 난관처럼 느껴졌고 해보고자 하는 일들마다 너무나 생소하고 비좁은 틈새가 되어 눈앞에 다가왔다.

정년을 맞기 전에 제2 인생을 위하여 무언가 준비하라던 선배들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시간들이 후회스러웠다. 차분한 마음으로 휴식을 가지면서 미래를 지켜보라는 지인들의 위로마저 해석하기 힘든 어려운 영문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아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심정으로 구인, 구직란을 뒤져보고 먼지 묻은 명함집 속의 명함들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혹시 하는 기대감으로 가슴 졸이던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60세를 앞둔 고령자를 채용해주는 기업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으며, 더욱이 왜소한 체격에 사무직만 근무했던 탓에 노동을 제공하고 보수를 구하는 직업은 더욱 쉽지 않았다. 그때 마침 지역 개발을 위해 지자체를 통한 직업 훈련소가 지역 내에 개소되면서 인터넷 활용 기술과 전기 용접 등 취업에 필요한 교육을 수강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역 내 실업자 구제를 위한 외부 기업 유치와 동시 지역민에 한하여 고령자 몇 사람을 채용해 주면서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도시 물류 회사를 통하여 공급했던 생활필수품을 지역에서 직접, 도내 편의점에 납품하는 과정에서 상품을 검수하는 일이었다. 퇴직 전 직장에서 18년 정도 담당했던 상품 구매 및 마트 점장 경력이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비록 전 직장에 비하여 모든 조건이 열악했지만 인생에 있어 가장 궁색한 처지를 경험했던 나에게는 한 올의 생명줄마냥 귀하고 감사했다. 그런 마음으로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하자 직장 내 우수 사원으로 꼽히게 되었고, 그렇게 우수 사원으로 근무한 지 벌써 2년이 훌쩍 지나고 있다. 스스로 노력한 자만이 얻어진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제2 인생을 시작하면서 가장 보람 있을 때는 뒤늦게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학교 급식원으로 취업한 아내의 거칠어진 두 손을 포근하게 감싸줄 수 있는 따스한 활력소가 되어줄 때이다.

김은술 작.
<Move1-도시여행2>
130×162cm.
장지에 채색. 2007.

나는야, 피아노들의 의사 선생님

안현수 44세. 농부, 피아노 조율사. 경남 함안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참 좋다. 마음이 편안해지며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도 맑고 경쾌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 잠시 멈추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강당 청소하러 갔다가 학예회 연습하는 피아노 소리에 처음 반한 것 같다.

그리고 나와 피아노의 인연은 군 제대할 즈음 이루어졌다. 우연찮게 종로구 낙원상가에 가게 되었다. 한 모퉁이에서 피아노 조율하는 조율사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저거야’ 하는 느낌이 왔다. 어릴 때부터 뜯어고치고, 조립하고 만드는 것을 좋아했는데 피아노를 고치는 의사라는 직업이 마음에 다가왔다. 그 후 좋은 선생님 밑에서 열심히 배우고 기술을 익혀, 20대 후반부터 피아노 조율사로 살아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조율사로만 살 수가 없어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 요청이 오는 곳으로 피아노를 고치러 가곤 했다.

그러다 30대 후반부터 복지 단체나 시골의 작은 학교, 교회 등의 피아노를 고쳐주는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 봉사 활동을 간 곳은 고성에 있는 ‘보리수동산’이었다. 여학생실과 강당에 있는 피아노를 손보게 되었다. 여학생실에 갔는데 한 여학생이 “아저씨 건반 몇 개가 소리가 안 나요. 제발 연습 좀 하게 해주세요.” 부탁했다. 얼마나 연습이 하고 싶었으면….

피아노는 정말 엉망이었다. 약음페달이 고장 나 있고, 의자 경첩도 없었고 먼지도 가득했다. 몇 시간 먼지도 마시고, 땀을 흘리며 고쳤다. 피아노 소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에게 페달 사용법, 피아노 관리 요령 등도 설명해주었다.

“고맙다. 감사하다”며 잠시 후에 삼삼오오 피아노에 앉아서 연주도 하고, 웃음꽃도 피우는데 그때의 행복함이란….

봉사 활동을 가보면 외형은 번지르르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해서, 피아노를 뜯어보면 먼지, 곰팡이, 현이 녹슬고 끊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철 지난 연예인 사진, 동전, 지우개, 잡동사니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한바탕 웃게 된다.

쓸쓸하고 적막하게 느껴졌던 피아노를 보면 ‘너도 내 손길을 기다렸구나’ 하며 피아노와 대화를 한다. 그리고 피아노를 분해해 진공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내고, 혼신의 힘으로 새 생명을 불어넣고 나면 피아노도 나에게 뜨거운 인사를 건네는 거 같다.

한번은 피아노 부품 중에 브라이들 테이프라는 게 있는데 여든여덟 개를 쥐가 갉아 먹어 엄청나게 고생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다 완성된 후 다음 주 졸업식이 열렸다. 그때의 감동이란.

그 이후로 일 년에 두세 번씩은 봉사를 하러 가곤 한다. 피아노가 고장 났다는 연락을 받으면 어디든 간다. 난 피아노 의사니까. 죽어 있는 피아노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아프리카 박애 사업에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는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좋은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피아노 봉사를 다녀오면 나도 절로 그런 말을 하게 된다. 오늘도 난 공구 가방을 싣고 어디론가 떠난다.

김은술 작. <소풍>
91×72cm.
장지에 채색. 2011.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옥순 54세. 케어보호사. 경남 김해시 진영읍

먼동이 트면 먼저 일어나 따뜻한 수건으로 얼굴 닦아드리며
“어르신 또 하루를 시작하는 해가 밝았습니다”고 인사하는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한 끼의 식사도 거르지 않게, 한 번의 약도 빼지 않는 나는
어르신의 손이 되고 귀가 되고 발이 되고 추억이 되는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손들이 마다하는 어르신의 뒤처리를 마다하지 않는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귀들이 들어주지 않는 끝없는 도돌이표 같은 얘기를 들어드리는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폐허 기둥 같은 앙상한 등에도 마른 낙엽 서걱거리는 듯한 살결에도
향기 나는 비누로 몇 번이고 닦아드리는
나는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루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면 무사히 하루를 보낸 세월 속에
또 하루가 포개어지는구나, 그래서 당신은 나의 거울입니다.
오늘도 그 거울 속에 나를 단장하고 옷깃을 여미고 미래도 봅니다.
어르신 삶에 마지막 인연인
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김은술 작. <소풍>
91×72cm.
장지에 채색. 2010.

글 쓰는 직업을 갖기 위해 나는 그러했나 보다

장희지 27세. 작가 지망생. 대구시 북구 고성동3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공상에 잘 잠겼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지고 길을 걷다가도 머릿속에는 온갖 상념이 가득했다. 틈만 나면 딴생각을 하는 것은 버릇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밤이 되어 자야 할 때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불면증 아닌 불면증을 달고 살았다.

한편 해가 거듭될수록 기억력이 떨어졌다. 예전에는 기억력 하나만큼은 좋다고 자부하여 연필을 잡고 필기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웬만하면 외워야 할 내용은 머릿속에 입력하는 방법을 편하게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 있던 내용을 잘 잊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머릿속으로만 외우는 방식에 한계가 나타났다. 생각은 많아지고 기억력은 감퇴하자 자연스레 고민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귀찮게 여겨지더라도 기록을 하면서 기억력을 보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기록하는 습관은 내 머릿속의 공상을 끄집어내는 단계로 이어졌다. 이렇게 하여 나는 글을 쓰게 되었다.

이전까지 글을 쓰거나 좋아해본 적도 없는 내가 처음으로 글쓰기에 관심을 지니는 계기가 생겨났고 의외로 예상 이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은 점차 습관이 되었고 분량은 짧지만 정성을 들여 완성한 한 편의 글이 탄생하면 뿌듯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자유롭게 글을 기고하게 되었다. 주제가 정해지면 그 주제에 맞게, 주제가 없다면 내가 펼치고 싶은 대로 글을 썼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심도 있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마침 직장에 다니는 것을 지겨워하며 내키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고민은 매일매일 이어졌다. 수많은 고민 끝에 직장에 다니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내게 아무런 의미와 보람도 느낄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직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바탕으로 글을 쓰며 살기 시작하자 새로운 삶이 다가왔다. 예전과 다르게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겨났고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학교나 직장에서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살아온 내가 글을 쓰면서 조금이나마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변화도 나타났다.

더불어 꿈이라는 것도 생겼다. 동화, 영화 등의 작품을 완성하여 공모전에 도전하고 당선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다가 문득 내가 글을 쓰며 살아가려고 어릴 때부터 난데없는 생각을 하였던 것은 아닌지 하는 확신이 조금씩 생긴다. 그리고 건망증이 시작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본다. 앞으로도 아니 아마 평생 글을 쓰며 살지 않을까 상상을 해보며 또 다른 글을 쓸 생각에,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김은술 작. <소풍2>
91×116cm.
장지에 채색. 2011.

나는 왜 자꾸 미룰까?

“이제 움직여야지!” 결심해 봐도 ‘밥 먹고 해야지’ ‘TV만 잠깐 보고 해야지’ 하면서 미루게 되는 게 우리의 일상입니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은 제쳐두고 인터넷 서핑에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매일 미루기만 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후회하면서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지는 않은지요? 나 자신도 모르게 침투해 있는 미루기 바이러스, 이제 퇴치해 봅시다. 더 이상 미루지 않는 나, 생각만 해도 매력적입니다! -편집자주

미루면 좋은 일들

•인터넷 연예 기사 클릭
•각종 SNS 타임라인 섭렵하기
•몸에 안 좋은 야식 먹기
•직장 상사 뒷담화
•가족에게 짜증 내고 화내기
•충동 구매하기
•운전 중 스마트폰 사용하기
•술 마시고 새벽에 옛 애인에게 연락하기

미루면 후회할 일들

•‘고마워, 사랑해’ 마음 표현하기
•부모님께 안부 전화하기
•데면데면해진 인간관계 챙기기
•운동하기
•금연과 금주
•건강검진 받기
•하루를 돌아보고 반성하기

직장인들의 미루기 1위는 운동

최근 한 포털 사이트에서는 가장 공감 가는 미루기 경험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직장인의 경우 헬스나 요가, 수영 등을 등록해 두고 가지 않는 ‘운동 미루기’가 응답률 46.3%로 1위에 올랐다. 다음으로 아침에 5분 더 자려다가 택시 타고 출근하기(41.7%), 회식 자리에서 분위기에 취해 집에 가기 미루다 만취된 상사 책임지기(19.3%), 회식 가기 싫어 늦게 갔다가 사장님 옆자리에 앉기(16.2%) 순이었다.
대학생들의 경우 시험 공부 미루다 벼락치기에 실패했던 경험이 응답률 71.2%로 가장 많았으며, 과제 제출 미루다가 낮은 점수 받았던 경험(48.1%), 마음에 드는 이성 친구, 결정적인 기회만 찾다가 고백도 못 해보고 친구에게 빼앗기기(25.0%) 등도 순위에 올랐다.

나는 무슨 형일까?
미루기쟁이의 유형 파악하기

1 전부가 아니면 아예 포기! 완벽주의형 스스로 무결점 인간이 되고 싶어 100% 완벽한 준비를 계획하기 때문에 시작도 못 해보고 미루게 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 자신을 몰아세워 무리한 계획을 잡지 말라. 내가 그리는 완벽한 상황은 오지 않는다. 완벽함이 아니라 우수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이며 완벽이다. 혹시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언젠가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감과 분노를 표출할 가능성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지나친 압박을 가하지 말자.

2 몽상가형 인류 전체를 구원할 원대한 계획을 세우거나, 박애주의자 혹은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을 꿈꾸는 유형. 동시에 3~4가지 일을 추진하면서 노력은 하지 않고 대박을 기대한다. 꿈이 너무나 원대해서 그걸 쫓아가다 보면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일을 미루게 된다. ⇒ 하룻밤에 이뤄지는 성공은 없다. 조금씩 꿈에 다가갈 수 있도록 기본 기술부터 마스터하라. 혼자 상상하고 희망사항만 늘어놓지 말고 매일 조금씩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3 사서 걱정 형 ‘만약 ~하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물음을 항상 달고 다닌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매우 불안, 초조해한다. 그러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한 걱정하기 시작한다. ⇒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유능한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주눅 들었던 경험이 있을 수도 있다. 거기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을 인정하라. 미래를 고민하거나 과거 일을 과장해서 생각하지 말자.

4 무조건 YES 형 다른 사람의 부탁에 무조건 ‘예스’라고 답하며 하루 일과 중 80%를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할애한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주고 또 주느라 업무는 점점 쌓여가고 마감 날짜와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한다. ⇒ 에너지를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닌 가치 있는 곳에 쏟아라. 시간은 가장 귀중한 재산이다. 내 능력 이상을 요구받을 때는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일 목록을 작성한 후 당장 행동으로 옮겨보자.

5 드라마 주인공 형 “나는 압박을 느껴야 일을 더 잘하니까 지금 당장 할 필요가 없어”라며 일을 미루다 최후의 순간에 끝내고 쾌감을 느끼는 유형. 이런 유형은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과금 납부, 세금 신고, 운동 등 소소한 일을 항상 놓치게 된다. ⇒ 나는 슈퍼스타가 아니다. 죽을 둥 살 둥 긴박하게 처리하는 일은 이제 그만. 우선 휴식부터 취하라. 그리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참조 도서_<굿바이 미루기>(제프리콤 | 가디언)

미루는 습관, 이렇게 대처하라

1 긍정적인 대화 일을 미루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부터 찾는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너무 피곤해, 지쳐 녹초가 되어 퇴근했어” 같은 말은 하지 말자. 그 대신 “나는 일을 미루는 사람이 아니야” “제때 일 하는 게 기뻐” “나는 이보다 어려운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어” 등의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단어를 쓰다 보면 압박감이나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일을 대하는 에너지와 태도가 몰라보게 향상된다. ‘반드시 해야 한다’ 같은 단어도 무의식중에 명령이나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꼭 해야 해, 무조건 해야 해 보다는 ‘나는 월요일까지 끝내기로 결심했어’ ‘끝내고 싶어’ 등의 말로 바꿔보는 것이 좋다.

2 5분 기법 하기 싫은 과제를 미루고 싶을 때, 딱 5분 동안만 하기로 계획해보자. 5분이 지나면 5분 더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한다.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혹은 과제가 완성될 때까지 5분씩 더해간다. 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밖에 실행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방법은 미루는 습관을 없애줄 만큼 꽤 효과적이다.

3 구체적인 할 일 목록 하루의 할 일 목록을 만들고 일이 마무리될 때마다 과감하게 지워나가면서 스스로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셀프 격려를 해보자. 목록은 최대한 작은 단위로 나누어서 구체적으로 적고, 목록에는 ‘인터넷 서핑 안 하기’와 같이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함께 포함시킨다.
독일 콘스탄츠 대학의 프랭크 비버 교수팀은 계획과 미루기의 상관관계에 대한 실험을 했는데 A와 B 팀 각각 25명의 학생들에게 간단한 열 가지 행동을 과제로 주고, 그 행동을 실천하기 전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A팀에게는 행동을 하는 개인의 성격, 특성 등 추상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B팀에게는 이 행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작성하라고 지시했는데 그 결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B팀은 A팀에 비해 3배나 빠르게 그 행동을 실천으로 옮겼다. 즉 사람들이 일을 하기 전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경우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지고 그로 인해 더 쉽게 실천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참조 자료_<미루는 습관 버리기> (윌리엄 너스 | 팬덤북스)
KBS 네트워크특선 다큐멘터리 <습관>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내 바탕화면으로 어때요?

디자이너라는 직업 특성상 잦은 야근에다 정신없이 컴퓨터 앞에서 일만 하는 날이 많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에라, 모르겠다!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하고 자기 최면처럼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걸 캘리그래피로 바탕화면을 만들어보았다. 팍팍한 요즘, 과로에 시달리는 많은 분들이 이 글씨를 보고 가끔은 미루기도 하면서 삶의 여유를 찾으셨으면 좋겠다.

신노아 디자이너. ⓒHAON createdbys.blog.me

한 번쯤은 ‘오늘 일을 내일로~’ 마냐나 데이 만들기

남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오후 5시경이 되면 모든 업무가 멈추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진행할 수 없게 된다. ‘오늘’ 처리하지 못한 일은 ‘내일’ 한다는 의미의 마냐나(Mañana)’ 문화 때문이다. 마냐나는 스페인어로 ‘내일’ 또는 ‘나중에’를 뜻하는데 이러한 문화로 인해 저녁 시간에는 마음 편히 식사와 음료를 즐기며 오로지 자신을 위한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미루기를 죄악시하는 우리와 달리 남아프리카 사람들은 초조하게 쫓기거나 긴장하지 않는다. 조금 느릴지 몰라도 언제나 여유 있게 자신을 표현하고 현재를 즐기며 살아간다. 우리도 한 번쯤은 미뤄둔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자책감을 훌훌 털어버리고 마냐나 문화를 누려보는 건 어떨까? 다음 날을 두 배로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만화가를 꿈꾸며 그림을 즐겨 그려왔다. 그런데 내게는 늘 시간을 야금야금 잡아먹는 미루기 습관이 있었다. 콘티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고 만화책을 펼치면 만화에 푹 빠져버리고, 그림을 그리려고 컴퓨터 앞에 앉자마자 인터넷 서핑으로 몇 시간을 날렸다. 그러면서 ‘그래, 이걸 보는 게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될 거야’ 하며 합리화를 했다.
어느 날, 블로그에 올린 나의 만화를 보고 한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고 포털 사이트에 실릴 샘플 만화를 의뢰받게 되었다. 웹툰 작가 데뷔의 절호의 찬스였다.

막상 의뢰를 받고 보니 좋은 퀄리티의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때는 어려서 마감을 지켜야겠다는 개념도 없었고 한편으로는 ‘조금 미뤄도 괜찮아, 만화가라면 당연히 마감에 쫓기다가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 거 아니겠어?’ 하면서 일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냈다. 결국 제출 마감 기한을 일주일이나 넘기고 말았고 꿈같은 기회는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나의 고질적인 미루기 습관을 고치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마음수련이었다. 살아오면서 쌓아뒀던 마음들을 세세하게 살펴보니 참 어리석게도 나의 완벽주의 때문에 소중한 기회를 많이 놓쳐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그것에 부담을 느껴서 더 잘해야 한다, 완벽하지 않으면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자신 없는 일은 끝없이 미루거나 아예 손을 놓아버렸던 것이다. 웹툰 데뷔 기회를 놓쳤던 것처럼.
작년에는 손목을 크게 다쳤다. 어쩔 수 없이 그림 작업을 쉬게 되면서 어쩌면 앞으로 평생 그림 그리는 일을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 참 힘든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마음수련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림에 대한 부담감이나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관념을 실제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잘 그려야 한다,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도 버리고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내 모습도 버리고 보니 더 이상 스스로를 몰아붙이거나 자책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느새 나의 미루는 습관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박지명 31세.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