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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밖에 없는 내 삶의 후회 없는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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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시집온 지 18년이 지났다. 결혼 후 한국 생활과 사회에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왔고, 항상 밝고 친절한 태도와 미소를 잃지 않으려 했다. 일본인인 나와는 완전히 다른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접할 때마다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도 겉으로는 맞추려 했다.
조금씩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내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때론 너무 괴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남몰래 운 날도 많았다. 복잡하게 상처받은 마음을 풀기 위해 여러 가지 해소법을 시도했지만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진 않았다.
“다 이런 거지, 사람은 누구나가 고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라고 포기하던 어느 날, 나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준 것은 마음수련 명상이었다.
2007년의 봄, 남편과 친구를 통해 연이어 듣게 된 마음수련 센터에 찾아갔다. 수련 방법을 알려주시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외국인인 나에게도 쉬웠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명상을 하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에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항상 밖에서 뭔가를 추구해왔던 나에게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명상이었다. 왜냐하면 이 명상 방법은 ‘더하기가 아니고 빼기’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내가 안고 살았던 마음을 버림으로써 ‘나다움’을 상실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되었고, 오만하게도 누구보다 착하고 상냥하고 바르게 살아온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하니 거부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내면과 정면에서 싸웠다. 내 마음세계를 제3자 입장에서, 영화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내 인생이 비디오테이프처럼 흘러갔다. 본심을 가리며 살았던 나의 마음속은 이중인격 정도가 아니었다. 몇 겹으로 겹친 양파 껍질을 벗기듯, 얽히고설킨 실이 풀리듯 복잡했던 마음이 하나하나 버려지고 있음이 확인되자 명상이 즐거웠다.
2과정에 이르면서는 속이 완전히 텅 비워진 것같이 느껴지며 상쾌했다. 그러나 단계가 올라가면서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의외의 마음들도 나왔다. 한마디로 냄새나는 쓰레기통 속에서 썩은 쓰레기를 하나하나 집어내는 작업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더럽고 천한 쓰레기 같은 마음들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이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한 단계씩 과정이 올라갈수록 마치 어두운 터널 속에서 환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이 나타나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기도 했고, 때론 나 자신도 놀라운 여러 생각들이 올라와서 집중을 방해했지만 나는 계속 해나갔다. 7과정에 이르자 드디어 터널의 출구에 도착한 것 같은 안도감과 함께 감사의 마음으로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8과정에 이르러선 터널 밖의 세계를 맛보았다. 마치 새장의 새가 넓은 하늘을 향해 날갯짓하며 자유를 만끽하듯이, 스스로 만들어낸 마음세계의 테두리로부터 해방되며 평화로운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중3인 아들도 중1 때부터 방학 때면 청소년 캠프에 참가했다. 의식이 굉장히 넓고 커져서인지 변화된 아들의 언행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오랜만에 찾아오신 친척분에게 “진지는 맛있게 드셨습니까?” “필요한 것은 없으세요?” 하며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다. 또 괴로운 일이 생기거나 불리한 상황에 닥쳐도 변명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무리하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아들을 보면 마음이 항상 안정되어 있는 것이 느껴진다.
우주처럼 웅대한 마음, 대자연과 하나가 된 순수한 마음, 그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키는 전인 교육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후회 없는 값진 삶을 살 것인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지만 나는 마음수련 명상을 만나서 정말로 좋았다. 그래서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늘 말한다. “가무사하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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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September 월간마음수련

“화·짜증, 버리면 버려지는 게 신기해요”

제목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시기를 ‘1315세대’라고 부른다. 학교 현장에선 통제 불능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걱정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대화 중 욕설을 사용하는 비율이 20% 이상 된다는 청소년도 76.6%에 이른다. 화를 조절 못 하고, “짜증 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거칠게 말하는 요즘 아이들. 그 공격적인 성향은 그대로 아이들 마음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말해준다. 마음을 비워낸 만큼 변화하는 모습도 놀라운, 아이들의 마음수련 캠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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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요즘 애들’을
위한 변명

이인숙 구산초등학교 교사

내가 처음 부임했던 80년대의 아이들은 화나 짜증이 별로 없었다. 어른과 친구들을 생각할 줄 알고 온순하며, 다혈질이나 공격성이 적어 다투는 일도 없었다. 수업에 대한 집중력도 높아 한두 명 산만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자기 마음을 주체 못 하는 아이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요즘엔 매해 3월 학부모 총회 때마다 “요즘 아이들은~”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해가 갈수록 점점 정이 메말라 가고, 남을 생각하거나 배려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마음수련 명상 1, 2과정 방법을 해보게 했다. 공부에 대한 집착이나 부모, 친구에 대한 미움 등을 떠올려 그 마음을 빼게 한 것. 아이들에겐 스트레스 1순위가 부모이고 2위가 교사라 하지 않던가.
교사가 먼저 편안하게 다가가 공감하며 마음을 버리게 하니 아이들이 밝아지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아이들이 차분해지고 집중력이 높아져 학업 성취도가 올라갔고 공격성이 줄어들었다. 잘 다투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바뀌었고, 자기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아이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몇 년 전 일이다. 우울증에 인터넷 중독이었던 기훈이는 한번 화가 나면 자기 감정을 조절 못 하고 씩씩대며, 어른이고 교사고 안 보이던 아이였다. 한번은 친구와 싸워 상담하려고 남으라 했더니, 씩씩거리고 소리 지르다 가방도 놓고 집으로 가버렸다. 예전 같으면 혼내거나 손바닥 매질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울분과 화, 짜증, 열등감을 풀어내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여러 날에 걸쳐 아이가 마음을 버리도록 유도하자 편안한 마음을 찾았다. 표정도 밝아지고 돌출 행동을 덜 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여지없이 부모의 행동 양식을 그대로 반복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엄마에 대한 집착이 가장 클 시기여서 엄마와 같은 행동을 그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 때문에 고민하고 상담하시는 부모님께 꼭 먼저 마음을 버려보시라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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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하고
이중적이며 감사를 모르던 아이

성현우 14세. 경기도 성남시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난 모범생이라 불렸고, 주위에서도 항상 칭찬을 받았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자 슬슬 교만함을 갖더니 감사함을 모르는 아이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 때문에 울고 힘들어했던 아이들도 꽤 많이 있었다. 친구와 하루에 한 번씩은 치고받고 싸우고, 친구의 약점을 잡아 놀리기도 했다. 열 살 남짓한 나이였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지 못했다.
어른들 앞에서는 모범생이었지만, 친구들에게는 못되게 굴었으니 난 이중적이었다. 엄마는 나 때문에 우시기도 했다. 너무 삐뚤어져서 잡아 줄 수 없을 지경이 되기 직전, 마음수련 명상을 알게 되었다.
열 살 때였다.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서 명상을 시작해보니 나는 참 이상한 아이였다. 마음속으로 자기가 혐오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곧 나 자신이었다. 넌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왜 이렇게 짜증이 많냐고, 왜 배려심이 이렇게 없냐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지만 실은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또 내가 그동안 이런 행동들을 왜 해왔는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나온 시절을 돌아보면서 버리다 보니 그동안 나는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 했고 또 항상 받아왔었다. 주위 사람들은 내게 거의가 친절했었다. 그래서 그 호의를 잃을까 두려워 언제나 내 진심은 꼭꼭 숨겨둔 채 가식의 얼굴만을 내비쳐 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안에 억눌려 있던 것이 쌓여 주위 사람들에게 예민해지고, 그것이 굳이 가식을 떨 필요가 없는 친구들에게 표출되었던 것이다.
난 특히 내가 칭찬받았던 기억, 내가 칭찬 받으려고 했던 행동들, 예를 들면 아이답지 않게 선물을 사양하고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체했던 기억들을 버렸다. 버리는 도중에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고 이렇게 못난 나에게도 친구라고 친절히 대해주던 급우들에게 미안해졌다. 그런 ‘마음 사진’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성격이 만들어지고 주위 사람들을 괴롭게 했으리라.
그런데 좀 더 명상을 해보니 이유는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던 내 건강 탓도 있었다. 몸이 힘들어서 고생했던 기억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주위 사람에게 화를 내는 예민한 사람으로 만들어갔다.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웃는 얼굴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또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찬 투정 같은 것을 포함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하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말들도 모두 잘 보이기 위한 형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나’가 생겨난 배경을 보니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받아만 왔던 기억들 때문이었다. 나는 이것도 버렸다.
위에서 말한 것들을 내가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아마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일 것이다. 다행히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물론 사춘기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예전보다 쉽게 짜증을 내거나 하지 않고 먼저 나를 없애본다. 덕분에 요즘은 내가 짜증을 많이 낸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가장 좋은 점은 가식으로써의 내 모습이 아닌 진짜 모습을 주위 어른들께 편하게 보여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어른들과의 대화도 더욱 편해졌다. 예전에 통지표에 항상 좀 예민하다고 쓰셨던 선생님들도 이제는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고 활발하다고 써주신다.
나는 내가 명상을 어린 시절에 만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사진’들을 남기지 않고 바뀐 것에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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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쟁이,
상대의 의사를 묻고 행동하다

김상철 13세. 서울시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우셨다. 동생과 나는 눈치를 보고 자신 없어 하는 성격으로 바뀌고 있었다. 남들보다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며 자라가고 있었다.
학교에선 나를 무시하는 것 같으면 화를 참지 못해 친구들이랑 싸움하는 불량 학생이어서 선생님들에게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원래 엄마한테도 화를 잘 내고 기분 상하면 나에게도 화를 내고 그랬다. 동생도 퍽퍽 때리고, 친구들에게 욕을 막 했다. 내가 너무 욕을 많이 써서 ‘욕쟁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엄마가 어느 날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를 가라 하셨을 때 난 가기 싫었다. 열심히 하면 휴대폰을 사주신다는 엄마의 권유와 설득으로 가게 되었을 때도 내가 원한 것이 아니어서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휴대폰이 생긴다는 생각에 매일 열심히 했다. 캠프엔 형, 누나, 동생들로 가득했고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 “학교에서처럼 무시당할까?”
이런 생각을 안고 “이제 지옥의 시작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 점점 지옥이 아니라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이었다. 싸우고, 욕하고, 짜증 내는 기억을 버릴수록 내 기분이 좋아지고, 짜증도 나지 않았고 상대방이 나와 같은 존재란 걸 알게 되어 내가 잘못을 하면 바로 사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생활하면 할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도 좋아졌다.
학교생활로 돌아간 후에 친구들은 내 모습을 낯설어했다. 늘 나에게 시비를 걸던 애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점점 나는 욕을 하는 일도 사라지고 친구의 의사를 물어보며 대하기 시작했다.
5학년 때부터 나를 자주 괴롭히고, 짜증 나게 하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3교시에 그 친구가 싸움을 걸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겁만 주려고 살짝 배만 건드렸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도망가 버렸다. 4교시에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 친구가 구급차에 실려갔다는 것이다. 교장실까지 가게 되고 학교에선 내가 나쁜 아이로 찍히고 말았다. 선생님께서 집으로 연락을 하고 엄마가 친구의 어머니를 만나 사과하고 다 책임지겠다고 했다. 내가 때려서 병원에 실려간 것처럼 돼서 억울했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선생님께서 엄마에게 절대로 나는 함부로 때리는 애가 아니고, 그 친구가 스스로 놀라서 쓰러진 거라고 얘기해주셨다. 내가 마음수련 명상을 안 했다면 참지 못하고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아들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동생에게 예전처럼 무시하거나 때리지 않고 엄마가 없을 때 동생을 엄마 대신 보호해주는 형이 되려고 노력 중이다.
꼭 의사를 물어보아 행동해서 지금은 동생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점점 선생님들도 나를 인정해주시고 친구들도 많아지게 됐다. 예전엔 욕과 싸움이 나의 방패였지만 지금은 대화가 나의 방패가 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의 내가 엄청나게 바뀐 것 같아 너무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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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성격을
고치는 최고의 방법,
진짜 신기하다!

이주승 13세. 울산시

옛날에는 친구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 나를 화나게 만들거나 살짝만 건드려도 나는 정말 참지 못하고 주먹이 날아갔다.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왜 따라오는데?”라고 하는 아이들의 말을 듣고, 나는 참지 못하고 아이들을 때렸다. 모른 척하고 집에 오니 잠시 후에 그 애 엄마가 우리 집에 와서 엄마가 사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도 내가 잘못한 게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명상을 해보니 상대방을 괴롭히면 그것이 바로 나한테 온다는 걸 알았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 마음수련이라는 명상를 배웠다. 처음엔 집에 가고 싶었지만 차근차근 마음을 버렸더니 정말 버려졌다. 그 후로는 성격도 고쳐졌고 특히 싸움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젠 속에서 가짜가 때려라 때려라 해도 진짜 마음이 가짜를 사라져주게 한다. 이것은 최고의 방법이다. 친구가 놀리면 나는 못 들은 척하고 화나는 마음을 버리고 그냥 가버린다. 그러니 당연히 친구들과도 싸움을 하지 않는다.
이제는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다. 내가 안 때리니까 친구들도 나와 친해지려고 한다. 동생을 대하는 것도 달라졌다. 가끔 엄마가 동생을 혼내면 감싸주게 된다.
명상을 배운 뒤, 배우지 않았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 더! 공부를 예전보다 잘하게 되었다. 집중력, 정서 불안이 나아졌다. 마음수련 명상은 정말 신비로우면서도 감동을 준다.

2010. 9. September 월간마음수련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목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일은 초심을 지키는 일이다.’
미국 선(禪) 문화의 기초를 닦았던 스즈키 선사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첫 마음은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다. <선심초심>은 ‘선’을 수행할 때의 바른 태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는 삶에서 무언가를 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바꾸어도 정확히 맞는 말이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도(道)이기에 진리를 찾아가는 수행과 우리의 삶은 둘이 아니다. 처음으로 일(수행)을 시작할 때의 아홉 가지 마음가짐.

정리 편집부 출처 <선심초심> (스즈키 순류 / 물병자리)

1. 초심을 유지하라
초심은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수행에서는 그 목표를 시작할 때 가졌던 마음을 항상 유지하는 것에 둔다. 마음이 비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해서든 항상 준비되어 있고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상태이다.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스스로 ‘숙련’된 사람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아주 조금밖에 없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나는 무엇을 얻었다’는 생각이 없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모두 우리의 광대한 마음을 제한한다. 무엇을 성취했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 자기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 그것이 진정으로 시작하는 사람이다.

2. 바른 자세를 유지하라
마음과 몸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른 자세로 앉는 것은 바른 마음 상태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바른 자세로 앉으면 저절로 바른 마음 상태가 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마음 상태를 얻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다. 무언가를 얻고자 하면 마음은 이리저리 방황하지만, 어떤 것도 얻으려고 애쓰지 않을 때,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온존할 수 있다. 바른 자세로 운전을 하고, 바른 자세로 책을 읽는다. 구부정한 자세로 독서를 한다면 맑은 정신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

3. 일편단심으로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는 것은 ‘준비’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수행이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 음식으로 지극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저 그 일을 할 뿐이어야 한다. 어떤 일이 다른 무엇을 위한 준비인 것은 없다.
구도의 길은 ‘일편단심의 길’ 또는 ‘한 방향으로 달리는 수천 리 철길’이라고 한다. 기차가 다니는 철길의 간격은 언제나 같다. 매 순간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지극한 마음을 표현하는 마음 자체가 철길이다.

4. 반복이 깨달음을 준다
매일같이 똑같은 음식을 만드는 것은 지루하고 싫증나는 일일 수 있다. 반복하는 정신을 잃으면 매우 어렵지만 생기가 충만하면 어렵지 않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무엇인가를 하게 되어 있는데 그걸 제대로 하려면 매우 주의 깊고 빈틈이 없어야 한다. 이를테면 빵을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이 어떻게 빵이 되는지 알게 되면 깨달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실제 수행은 어떻게 빵이 되는지를 알 때까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이다.

5. 올바른 노력
무엇을 할 때 보통 무언가를 성취하기를 원하며, 어떤 결과를 기대하며 거기에 집착한다. 이럴 때 필요하지 않은 어떤 군더더기 요소들이 개입된다. 수행이 잘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쭐해지는 마음을 갖기 쉽다. 그것이 군더더기이다. 무엇을 함으로써 무엇을 얻으리라 기대했던 모든 것을 잊고, 그저 무엇만 하라. 그러면 그것의 특성이 스스로 드러날 것이며, 그러면 그것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6. 흔적 없이
사람들은 한 가지 행동을 하면서 대개 두세 가지 다른 생각을 한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새를 잡으려 하기에 한 가지에 집중하기 어렵고, 결국은 한 마리도 못 잡고 만다. 무엇을 할 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면 온 몸과 마음으로 그 일을 해야 한다. 하는 일에 집중해서 활활 타는 모닥불처럼 자신을 완전히 태워버려야 한다. 순간순간 자신을 수행에 바쳐야 한다.

7. 낙심하게 될 때
수행을 할 때 대개는 대단히 이상적이 되어 목표를 높게 설정한다. 그러면 무엇을 얻으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얻으려는 생각으로 수행을 하는 한, 어떤 이상이 성취된다고 해도 또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결국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것이 된다. 이런 태도보다 더 안 좋은 것은, 타인과 경쟁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태도이다.
무엇을 하다 낙심하게 되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약점이 있음을 알려주는 경고 신호가 나타날 때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한다. 그럴 때는 태도를 새롭게 고쳐 잡음으로써 회복할 수 있다.

8. 한결같이
사람들은 보통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끌어모은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는 대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면 어떤 것이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엇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다. 모든 것을 그 자체의 가치대로 음미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늘 한결같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9. 부정과 긍정을 넘어서는 큰 마음
무엇에 대해서 말할 때는 그저 그것에 대해서 말하기만 한다. 그것을 지적으로 이해해보려고 하거나 자기 생각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들을 때도 자기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모든 일을 좋으냐 나쁘냐 따지지 않고 행할 수 있다면, 그리고 온 몸과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이 곧 수행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할 때, 그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를 이해시키려 하거나 논쟁하지 말라. 논쟁을 해서 상대방을 굴복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그저 듣기만 해라. 말하는 것과 듣는 것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다. 때로는 그저 듣고 때로는 그저 말하는 것뿐이다.
무엇을 함과 하지 않음이 모두 큰 마음의 표현이다. 큰 마음은 표현해야 할 무엇이지 이렇다 저렇다 짐작할 무엇이 아니다. 큰 마음은 찾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큰 마음을 지니고 있다.


 

제목3

<내 생애 가장 큰 행복> 자서전 펴낸 이호선 할머니

나는 어린 시절 글을 안 배워 평생을 눈 뜬 장님으로 살았다. 공문이 와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이 아버지가 오면 ‘이거 왔다’ 하고 갖다 주었다. 그동안은 궁금하지만 애만 태우고 있었다. 살면서 너무 답답하고 속이 상해서 울기도 많이 했다.

이호선 75세. 청주시

스무 살에 시집와서 시부모님 모시고 오 남매를 키우며 사는 동안 내 나이 칠십이 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복지관에서 한글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나는 어려서 못 배우면 영 못 배우는지 알았다. 그런데 복지관이 생겨서 배울 수 있다니 너무 좋았다.
첫날은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글씨를 쓰는데 벌벌 떨려서 그냥 앉아 있다가 글자를 보고 따라 그리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너무나 좋아서 날아갈 것 같았다. 세월이 너무 좋구나, 너무 신이 나고 맨날 힘이 났다. 어려워도 하루에 한 자씩만이라도 배우면 얼마 정도 댕기면 조금 알겠지. 지금이라도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자꾸 생겨서 자꾸 갔다. 그러면서 조금조금 알아졌다. 배우면 되는구나 싶었다. 무엇이든지 보기만 하면 쓰고 읽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공부하느라 고생했는데 보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서전을 써보라고 권했다. 우리가 배운 것도 없이 어떻게 쓰느냐고 했다. 하면 된다고 다 도와준다고 하면서 권했다. 생각나는 대로 말도 안 되는 것을 자꾸 써갔다. 한 번도 안 써보고 이때까지 살았는데 이걸 쓴다는 게 신이 나서 손가락에 못이 배기도록 썼다. 몇 번 못이 배긴 게 떨어져 나가고 새살이 나고를 반복했다.
이 글이 과연 책으로 나올 수 있을까 했는데 시작이 반이라고 시작을 했더니, 작년 말에 <내 생애 가장 큰 행복>(이호선 글 모음)이라는 책이 나왔다. 말도 안 되고 받침도 안 되는 것 만드느라 선생님이 참 고생하셨다. 우리 선생님 아니면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고 보니 내가 이걸 썼나 싶다. 생각하면 대견하기도 하다. 누구한테 자랑도 하고 싶다.
요즘 젊은이들은 고생을 너무 모른다. 혹시라도 내가 쓴 글을 읽고 웬만한 고생은 이겨내라고 하고 싶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같이 힘이 들지는 않겠지. 지금은 그렇게 배고픔은 없겠지. 웬만한 고생은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지내다가 보면 행복이 오겠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말하고 싶다.
옛날에는 쌀이 없어서 밥을 못 하고 있으면 동네 사람이 저 집 밥 안 한다고 한다 해서 그냥 솥에다 물을 붓고 불을 땠다. 그러면 연기가 나온다. 그거 보고 저 집에 밥한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불을 땠다. 그리고 식구들은 물 한 그릇씩 마시고 있었다. 이렇게 생활을 해도 누구 하나 불평 안 했다.
지금은 너무 쉽게 포기하고 고생되면 자살하고 한다. 툭하면 이혼하고 도둑질도 많이 한다. 지금 사람들은 너무 호강하고 살아서 힘든 걸 못 참는다. 꼭꼭 참고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올 텐데 말이다.
내 어려서는 가정이 어려워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친구가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책보를 허리에 메고 학교 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학교에 가고 싶어서 혼자 뒤란에서 울고는 했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아무 책이나 다 읽을 수 있다. 병원에 가도 접수하는 것도 알겠고, 수납도 하고 은행에서 돈도 찾아올 수 있다. 매사 자신감도 생기고 활력이 넘치고 생기가 난다.
지금도 공부를 계속한다. 맨날 틀리지만 뭐든지 읽고 적는다. 지금이라도 남은 인생을 열심히 배우고 더 많이 배우고 즐겁게 살려고 한다. 이제는 즐겁게 살면서 아프지 말고 내 인생도 돌보고 살아보고 싶다. 앞으로는 컴퓨터도 하고 싶고 서예도 하고 싶다.
나에게는 지금이 진짜 감사하고 고맙다. 하나님 나에게 이런 행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글은 이호선 할머니가 70세 이후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해 틈틈이 써놓은 글과,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제목2

생애 처음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지며

2005년 3월 휴일 아침이었다. 아내가 아픈지 못 일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먼저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밥을 안치고 갈치찌개를 끓였다. 생전 처음 요리였지만 그냥 어디서 본 대로, 두부, 콩나물, 파, 마늘…. 이것저것 다 듬뿍 넣었다. 결혼한 지 26년 만에, 내 생애 처음으로 아내를 위한 밥상을 준비한 것이다.

박만표 60세. 포항시

50년을 넘게 살아오며 한 번도 밥상을 차려본 적이 없었다. 경상도 시골 마을에서 오 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남자는 절대 부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단단히 받으며 자랐다. 그러니 결혼해서도 집안일은 당연히 아내의 일이라 생각하고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그날 밥상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정말 아내에게 잘못했구나, 하는 참회를 하면서였다.
나는 아내와 많이 다투면서 살아왔다. 당시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이혼 위기의 갈등까지 간 상태였다. 나는 항상 내 기준으로 살려고 했고 아내의 입장에 한 번도 서본 적이 없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한다며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가는 날도 많았다. 아내가 육아에도 신경을 쓰라고 이야기를 해도, 오히려 아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남자라고, 가장이라고, 돈을 벌어온다고, 대접만 받으려고 했었다.
이렇듯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온 내가 백프로 아내 입장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된 건 마음수련 명상을 하면서였다. 지나온 결혼 생활을 하나하나 떠올려 버리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사람을 내심 가장 무시하며 많은 상처를 주고 있었다. 한 번도 진심으로 아내를 아껴주고 사랑해준 적이 없었다. 아내는 혼자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이혼 위기의 갈등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두 다 내 잘못이었다. 명상을 하는 도중 너무나 미안해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정말 내가 잘못했소. 이제부터는 당신을 정말 행복하게 해주겠다 약속하겠소.”
나는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아들, 딸에게도 전화를 했다. 그 이후 내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로 바뀌었고, ‘내 생애 처음으로’ 해보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했다.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을 자연스럽게 하는 내 자신이 놀랍기도 했다.
명상을 하고 난 뒤에 맞은 아내의 첫 생일날이었다. 늘 그냥 외식으로 축하를 전하곤 했지만, 그날은 뭔가 뜻깊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직장에서 100송이 장미 꽃바구니 배달을 보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아내는 처음에 받았을 때 너무 어리둥절했다 한다. 잘못 온 게 아니냐고 몇 번을 확인하다 정말 자기에게 온 것을 알았을 때 너무 행복해서 그 꽃 옆에서 한참 동안 발을 못 뗐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계절별로 옷을 다 갈아입고 딸아이에게 부탁해서 온갖 포즈를 취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진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가끔 보며 힘을 얻었다고.
그 말을 하며 아내는 자신이 봐도 코미디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날은 아내 평생 최고의 날이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놀랐다. 그런 작은 선물 하나에도 그렇게까지 행복해하는구나 싶고 또 여태까지 그런 마음 하나 몰라주었을까 후회도 되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그때 생애 처음으로 했던 일들이 일상이 되었다. 처음에 아내는 변화한 내 행동을 의아하게 지켜보았지만, 한결같이 실천하는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언젠가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그동안 고생했지만 나이 들어서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게 축복인 것 같다. 당신이 나를 왕비로 만들어주니 나도 당신을 왕으로 대접하게 된다”고. “당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2010. 9. September 월간마음수련

행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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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헤맸는데 알고 보니 그 행복이 내 마음 안에 있었다는 마테를링크의 동화는 평범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파랑새 증후군’이라는 말에 더 공감하는 듯합니다. 좀처럼 자신의 현재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입니다. 행복은 내 안에 있지만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나누어주는 것임을 깨닫기까지 ‘나’라는 고비를 숱하게 넘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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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특별하고 귀한 선물 하나를 받았다. 영화 속에 나오는 숲속의 통나무집 같은 곳에나 걸려 있을 법한 사슴 박제였다. 자신이 직접 뉴질랜드 북섬의 로토루아 산속에서 사냥한 야생 사슴의 머리 부분을 박제해 놓은 것이라 했다. 뿔이 머리 양옆으로 우아하게 솟아올라 있는 데다가 털 색깔 또한 엷은 갈색의 아주 멋진 사슴 박제였다.
걸어놓고 보니 거실 품격이 확 달라 보일 정도로 멋졌다. 그날 저녁 그 박제를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자정까지 넘겼다. 거실의 환한 불빛을 받아 사슴의 순하고 큰 눈망울들이 살아 있는 듯 반짝였고, 까만 코 또한 윤기가 흘렀다. 죽어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리 보아도 정말 살아 있는 진짜 같았다.
그러다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죽은 애완견을 박제로 만들어 곁에 놓고 사는 사람도 있을까? 그런 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은 없겠지. 이미 세상 떠나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부모, 가족, 친지 등을 박제로 만들어 놓고 가보처럼 모시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까? 세상천지에 그런 혐오스럽고 엽기적인 괴물은 절대 없겠지. 그런데… 가만있어 보자. 내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인연의 상相들. 언제나 내 기억 속에 진짜처럼 살아 있으면서 상주하고 있는 그 인연의 상들 또한 실은 박제들이 아니던가?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가 진짜 같지만 실은 하나같이 죽어 있는 박제들이다. 이렇게 기억 속의 상들이 모두 죽어 있는 박제들임을 시인하자, 그 이후부터는 명상할 때 그것들이 놀랍도록 쉽게 버려졌다. 마음으로 시인하니 믿음과 결의가 커지고, 믿음과 결의가 커진 만큼 잘 버려졌다.
며칠 후 문득 중국의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된 진시황제의 무덤 속 모습이 떠올랐다. 불로초를 구하지 못한 진시황제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근위병들이 자신을 호위해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죽자 그 시위군사들 모두를 실제의 모습 그대로 흙으로 복제하여 구워낸 다음 그의 무덤 속에 대열을 지어 세워 놓았다. 그는 몸은 비록 죽었더라도 영혼만큼은 살아서 그 깜깜한 무덤 속에서나마 자신이 살아온 것과 똑같은 삶의 연극을 영원히 되풀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에는 진시황제의 그런 무덤 속 사진을 보면서 엄청난 권력을 지녔던 그의 우매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욕심 말고는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수련 명상을 하면서 뜻밖에도 바로 내 안에 수천 년 전의 그런 진시황제가 있다는 것, 아니 그보다 수천 배 더 어리석은 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내 삶 속의 모든 인연과 장소들을 실물 그대로 박제품과 복제품들로 만들어 내 안에 진열해 놓고 그 안에서 살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나의 어리석음은 진시황제와 하등 다를 바 없었으나, 나는 몸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그러한 짓을 하였으니, 진시황제와는 비할 수도 없는 어리석은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진시황제의 무덤 속 같은 박제들만이 즐비한 마음의 세계를 계속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내가 만들어 놓은 상들을 진짜라고 믿으며 허송세월만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기막히게 불쌍하고 우매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명상하면서 그 마음의 짐들을 자꾸 내려놓았다. 그러자 마음세상은 점차 호수처럼 맑아지고 바깥세상은 점점 더 경이롭고 충만해 보였다. 생활하면서 부딪치는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경우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시비 판단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주위의 모든 인연들과 자연이 나와 마찬가지로, 또한 나와 함께, 우주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마다, 즉 정신을 차릴 때마다, 고향에 온 것 같은 하나 됨의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자유롭게 살려면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하고, 정신 차리고 살려면 마음 청소부터 해야 함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아침이면 등교하는 어린이처럼 우선 명상센터로 발길을 향한다. 가짜인 나를 청소해 버리기 위함이다.

정경현님은 1996년 뉴질랜드로 이민한 뒤 현지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쳐왔으며, 테니스 코치로 활동 중입니다.


임지호

요리연구가 산당 임지호 님은 1956년 경북 안동 생으로, 자연 재료로 특유의 멋과 맛을 선보이면서 해외에서도 다수의 한국 음식전을 열며 큰 호평을 받은 요리예술가입니다. 저서엔 <마음이 그릇이다, 천지가 밥이다>(샘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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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낸 만큼 어리석어지고 없애는 만큼 이익이다. 화가 없어지는 것이 바로 이익인 것이다. 나는 화가 나거나 말거나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단순하게 살려고 한다. 행복은 단순한 데 있고 그것은 곧 고요함이다.
내 마음도 그렇듯 고요하게 운영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잘 안되지만 노력하다 보면 몸에 배어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로워진다.
화장실 청소도 좋은 방법. 아내와 나는 우리가 운영하는 식당의 화장실 청소를 매일 한다. 이는 자기 마음을 닦는 것과 같다. 가장 더러운 것을 가장 성스러운 기도로써 닦는 것이다. 그러면 화가 쌓이지 않고 동시에 화장실을 이용하는 손님의 기분도 좋게 한다. 화장실을 쓰는 사람은 청소해준 사람의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젊었을 때는 열정이 강해서인지 우선 화가 먼저 났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오십이 넘으면서 더 겸허해지고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내가 마음을 닦아서 아주 멋진 인간이 되겠다’는 것보다는 한 땀 한 땀 기워 내는 바느질처럼 마음도 그렇게 하나하나 정리하고 주변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살고 싶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그렇게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일으켜주는 것이 행복의 비결인 것 같다.


이수나

연기자 이수나님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MBC 특채로 연기자가 된 뒤, MBC드라마 <전원일기> <안녕 프란체스카> 등에 출연했습니다. 30년 이상의 연륜에도 아직도 연기를 할 때면 긴장된다는 님은 늘 처음이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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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외도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마음을 안정시킬 곳을 찾다가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됐다. 처음엔 그 사람을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차츰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을 대하던 내 마음을 보게 된 것이다. 잘난 척했고 나보다 못하다며 하대하고, 나한테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모두 내 잘못이었다. 남편을 떠올리며 잘못했다고 참회했다. 그러다 보니 미움도 화도 빠져나갔다. 몇 개월 후 다시 만난 남편과 참 편안했다.
재작년, 친한 동생에게 나로서는 큰 돈을 빌려주었다. 동생은 얼마 후 잠적을 해버렸다. 온갖 마음이 끓어올랐다. 나는 돈에 대한 집착과 동생에 대한 마음들을 버리고 또 버렸고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돈 욕심과 집착이 강했다. 돈을 빌려준 것도 이자를 많이 쳐준다는 말에, 돈을 더 벌고 싶은 욕심에 빌려준 것이다. 겉으로는 동생의 사정을 이해하는 척하며…. 마음으로 동생을 떠올리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후 동생과 다시 만났을 때 오히려 감싸 안을 수 있게 되었다.
화가 날 땐 나를 먼저 돌아보고, 나의 오만과 교만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나 반성한다. 마음을 버리고 버려 진심으로 나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아예 화날 일이 없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버릴 수 있어서 참 좋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이 우주의 주인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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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이 우주의 주인을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이 우주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한얼님 사상인 우리나라에서는 한얼님이라고 부른다.
이 존재는 분명히 창조주일 것이고 이 존재는 분명 참인 존재일 것이고 전지전능한 존재일 것이다. 이 존재는, 대우주에서 만상만물을 없애어 보라. 바로 이 존재가 천지 만물만상의 근원이고 또 주인이시고 또 창조주이신 참인 존재의 본래 모습이다.

이 존재는 몸 마음이 있어 만상의 몸 마음은 이 존재의 표상이다. 이 존재의 몸 마음을 일컬어 보신불 법신불이라 일컫고 성령 성혼(부) 또 정과 신이라 일컫는다.
이 존재는 비물질적 실체이고 이 존재는 살아 계시는 참인 진리의 존재이고 전지전능 자체의 존재다. 이 존재는 만상의 어버이이고 근원이고 본래이고 주인이시고 이 존재는 시작 이전에도 계셨고 시작 이후에도 계시는 스스로 그냥 존재하는 완전한 존재이시라. 만상의 어버이는 이 존재다.
이 존재는 이 우주의 어느 곳이든 시공에 관계없이 존재하시고 만상만물은 이 존재가 창조하셨다.

물질이 아니어서 사람이 보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인 의식이 허인 자기의 관념 관습을 다 부수고 이 존재에 귀의할 때 이 존재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도 세상 속에 살면서 허든 실이든 안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것만큼 알고 말하고 산다. 그렇듯 이 존재가 자기 속에 있어야 이 존재를 알 수가 있는데 허인 자기의 관념의 세상을 다 부수고 없애면 실이고 참인 이 존재가 나 속에 있게 되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존재는 만고불변의 진리이신 영원불변하며 살아 있는 존재다.
우주의 만상이 없어져도 이 존재는 그냥 그대로 존재하고 이 존재는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 실체다. 진리는 만고에 이것밖에 없기에 이 존재로 다시 나지 않고는 사는 방법이 없다.
이 존재와 하나가 되어 거듭나면 이 존재의 나라에 영생불사신으로 살 것이다.

만상의 근원은 우주에서 만상을 없앤 그 자리이고 또 있는 만상도 이 자체라. 그 영혼이 영원히 살 것이고 사람도 이 자체의 몸 마음으로 다시 나면 영원히 살 것이다.
 
우 명

 

우 명 선생은 마음수련의 창시자이며, 저술가이자 시인이다. 깨달음과 진리에 관한 3권의 시집을 포함, 모두 열 권의 책을 펴냈으며, 마음과 우주의 이치, 사람들이 마음을 닦아 참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담고 있다.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로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기념하는 에릭 호퍼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했으며 철학, 영성, 명상 분야에서 다수의 도서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및 일본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를 다니며 강의와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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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이에게도 학사모를 씌워줘야 하는데….”
올여름, 대학 졸업식을 앞두고 교수님들은 종종 미담이 얘기를 하셨습니다. 7학기 내내 제가 한 과목 수강을 마치면 모두 “미담이와 경민이가 열심히 했다”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런 미담이가 저는 늘 고맙고 자랑스러웠지요.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의 길을 안내견 미담이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구술 김경민, 정리 편집부, 사진 제공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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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이는 래브라도 레트리버종으로 여섯 살이다. 두 살이 지나 경민씨와 함께하게 된 미담이는 학교를 오갈 때, 수업을 들을 때도 그랬듯이, 경민씨가 졸업을 한 지금도 언제나 곁에서 생활을 함께하며 경민씨를 지켜주고 있다.

미담이와 저는 24시간 함께합니다. 미담이가 걸으면 저도 걷고, 미담이가 서면 저도 서지요. 공부할 때나, 밥 먹을 때, 잠을 잘 때조차도 조용히 제 곁을 지켜줍니다. 잠깐 미담이를 두고 혼자 나갔다 돌아오면 신발 소리만 듣고도 나와서 펄쩍펄쩍 뛰며 좋아합니다. 미담이는 항상 저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미담이를 만난 것은 2007년 2월입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 분양 신청을 했어요. 안내견학교에서 4주간의 입소 교육을 받으러 가게 되었을 때, 처음엔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개를 정말 무서워했거든요. 그런데 미담이가 만나자마자 뛰어오르고 좋아하며 뽀뽀를 하는 거예요. 저는 처음엔 잘 다가가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했죠.
그런데 교육 1주 차 때였어요. 몸살이 심하게 걸린 겁니다.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워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다가 중심을 못 잡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어요. 한참 후에 정신이 들고 보니 미담이가 계속 제 곁을 지키고 있었어요. 이제 괜찮다며 미담이를 만져주니까 그때서야 안심이 됐는지 물을 먹으러 가는 거예요. 그때 참 감동을 받았어요. 앞으로 함께할 친구라는 생각이 드니까 무서움도 없어졌습니다.
처음엔 서로 맞춰가느라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호기심 때문에 다른 길로 간다든지, 길에 떨어진 음식을 먹으려 한다든지, 그러면 미담이를 바로잡아 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뭐라고 하면 고개를 제 가슴에 파묻으면서 안겨요. 그러면 제 마음도 약해지지요. 꼭 애기 같아요.
제가 실수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공사를 하고 있거나, 차가 있으면 위험하니까 미담이가 가지를 않아요. 그러면 저는 미담이가 딴짓하느라 멈춘 줄 알고 야단을 쳐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면 위험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꼬리를 흔들며 괜찮다는 거예요. 이제는 안 가려고 하면 딱 알지요. 요즘에는 좀 위험하다 싶으면 코로 한번 제 다리를 찍어요. 앞에 뭐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얼마나 세심한지 계단을 내려갈 때도 제 발을 보고 있다가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하고는 내려갑니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다 통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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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숙명여대 여름 학기 졸업식. 문과대학 수석으로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 서게 된 경민씨 옆에는 안내견 미담이도 있었다. 의류학과 친구들은 미담이에게도 학위복을 만들어주었고 미담이는 경민씨와 나란히 졸업식을 치렀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예 시력을 잃었어요. 날짜도 기억합니다. 2000년 8월 1일.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이던 그날이요. 그 이후로 자기 전에 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벽지를 볼 수 있었으면, 천장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무엇보다 하늘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유치원 때는 다른 친구들처럼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제는 유치원 때만큼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구나, 내가 다른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이때를 그리워하겠지. 잃고 나서야 그때 가졌던 것이 참 좋은 것이었다고 느낀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구나. 그러고 보니 저는 가진 게 참 많았습니다. 저를 사랑해주는 가족, 친구들이 있고, 그리고 미담이가 있으니까요.
사실 대학 입학을 앞두고는 좀 힘들었습니다. 계속 시각 장애인을 위한 맹학교를 다녔는데, 과연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자려고 누워도 한 시간마다 깨고 가위에 눌렸어요. 그때도 미담이가 큰 위안이 되었지요.
미담이는 성격이 참 밝습니다. 사람을 안 가리고 좋아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웃으면 자기는 뭔지도 모르면서 꼬리를 흔들고 뽀뽀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푼수 아줌마’입니다. 그리고 나가는 것을 즐거워해요. 나가서 함께 걷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미담이도 행복해하는구나 하고 느껴집니다.
저는 제가 세상에 빚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까 수업을 따라가기 힘든데, 그때마다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장애 학생 도우미 언니들이 대신 수업을 타이핑해서 점자로 만들어주거나, 교재를 음성 파일로 만들어줘요. 그리고 저희가 읽는 점자 책은 정말 어렵게 만들어진답니다. 그걸 아니까 한 권 한 권이 너무너무 귀해서 서너 번은 보게 됩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감사한 마음 때문에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 생활 동안 숙명 점역봉사단에 들어가 시각 장애 학생용 문제집을 만들고, 맹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빚진 걸 갚고 싶었거든요. 요새는 임용 고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미담이와 함께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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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님은 1988년 1남 1녀 중 장녀로 서울에서 태어나 국립서울맹학교에서 초·중·고를 다니고,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선천적 녹내장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늘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감사하며 느끼자’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2010. 11. November 월간마음수련

꽃보다 아름다운 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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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사랑이 되게 하는 향기로운 사람

세상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한 상처 입은 것들조차도 스스로 아름다워질 때가 있다.
많은 희망들 속에서 서글픈 눈물이 그러하듯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깨달음이
한 번쯤은 세상의 꽃들을 사랑으로 바라볼 때 한 번 한 번쯤… 하면서
스스로의 고귀함이 모두의 고귀함으로 가녀린 눈물도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 꽃이기에…
生字之意 榮華可期(생자지의 영화가기), 생의 뜻은 살아 있음이니 영화로움을 기약하게 된다.

2010년 오순환 작가 작업노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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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환 작. <꽃>
캔버스에 아크릴.
92x72cm. 1996.


 

상대를 사장님으로 모시는 사장님, 우리 아버지!

국지은 / 27세. 서울시 구로구

아버지! 아버지께 편지를 쓰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매해 기념일 때마다 써드리곤 했는데 명상을 시작하고 나서는 처음이네요.
대학생 때 어머니의 소개로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명상하면서 깨달은 지혜와 삶의 태도를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은 적었던 것 같아요. 중요한 건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라 하는데, 막상 생활 속에서 부딪칠 때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러한 삶을 직접 보여주는 분이 아주 가까이 계셨어요. 바로 아버지셨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 사무실을 이사하던 날이었어요. 막 비가 온 뒤라 습도는 높은 데다가 바람 한 점 없는 전형적인 여름 땡볕, 조금만 움직여도 짜증이 후끈 솟아오르던 날씨에, 새로 옮기는 사무실은 예전보다 비좁았고, 집안엔 무거운 가구를 선뜻 옮겨줄 듬직한 아들 하나 없었죠. 결국 아버지가 용달차 아저씨의 도움을 조금 받아서 짐들을 직접 옮겨야 했어요.
그날 저는 짜증이 앞서고 있었어요. 뻔히 지키고 있는데도 건물을 가로막으며 밀고 들어오는 차들에 ‘비켜 달라!’ 짜증 섞인 말투로 툭툭 던지게 되고 사람들이 뭘 파는 곳이냐, 사업한 지 얼마나 되었냐, 사장님은 어떤 분이냐, 시시콜콜 물어보면 ‘그만 좀 참견하지!’ 싶어 뚱하니 앉아 있었죠.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어요. 이 짐 저 짐 옮기면서 용달차 아저씨와 몸이 부딪치기도 하고 말이 꼬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저씨에게 웃으면서 상냥하게 이야기하시고 누가 들어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듬뿍 묻어나는 따뜻한 말을 건네고. 아버지는 용달차 아저씨를 마치 사장님 대하듯 하셨어요.
놀라웠던 건 그 아저씨의 모습이었어요. 처음엔 굉장히 무뚝뚝하고 거치셨던 분이, 아버지와 일하는 동안 조금씩 태도가 바뀌시더니 나중에는 꼭 아버지처럼 되시는 거예요. 짜증 한 번 안 내시고, 제가 도와드리면 ‘무겁지 않냐’며 오히려 자상하게 되물어 보시고. 짐을 거의 다 내렸을 무렵 아저씨가 엄마와 저에게 해주신 말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일이 참 잘되실 겁니다. 사장님이 이렇게 좋으셔서.”
아버지, 명상을 하면 깨닫게 되잖아요. 상대가 곧 나이므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곧 나를 대하는 것과 같다고. 돌이켜 보면 저는 머리로만 알았지, 생활 속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말 마음으로 상대방을 존중하셨고, 그 마음은 아저씨께 전해지고 결국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이었어요.
아버지, 저는 정말 아버지를 본받고 싶습니다. 아버지처럼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대할 때나 진심으로 배려할 줄 아는 마음 넓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열심히 마음도 비우고 노력할게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전 아버지 딸이니까요~^^
– 아버지의 딸이라서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한, 큰딸 지은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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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환 작. <민불(民佛)>
캔버스에 아크릴.
90x65cm. 1994.


 

평범한 언니의 신기한 능력 ‘진심’

여경진 / 39세. 변호사. 서울시 서대문구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투닥투닥 싸우기를 잘했다. 나하고 약 두 살이 못 되는 터울을 가진 아란 언니-언니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중학생이 되고 한참 후일 정도로 맞먹고 지냈다-여동생 선경이, 남동생 경구. 그러니까 나는 3녀 1남의 둘째였다.
언니의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날이었다. 엄마랑 아빠 모두 첫딸 운동회니까 장하고 신기한 마음으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달리기 순서가 되었다. 준비! 땅! 하고 호각이 울려 다른 아이들은 다 운동장 트랙을 돌며 뛰어나가는데 언니가 순간 운동장 바깥쪽으로 쭉 뛰어가더니, 담 안쪽으로 나 있는 느티나무 주변을 따라 뛰는 것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선생님이 운동장 트랙 안으로 돌면 안 되고 바깥쪽을 돌라고 해서 학교 가장자리를 뛰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우리 언니는 좀 모자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순하고 말도 잘 못하고 무슨 놀이를 해도 항상 먼저 죽고 빠릿빠릿하지 못했던 언니는 든든하다기보다 내가 챙겨줘야 할 동생 같았다.
엄마는 애들이 많으니 한 명이라도 빨리 학교에 가면 손을 덜까 해서 거의 여섯 살에 언니를 학교에 보냈다. 자기만 한 큰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간 언니는 학업 진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어 받아쓰기를 해도 십 점, 이십 점, 어떤 때는 빵점. 그래서 나머지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통지를 받으면 아빠도 “갸는 그냥 왔다 갔다만 해도 되니까 공부 더 시키지 마라”고 하셨고 언니는 그렇게 학교를 일삼아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만날 빵점 답안지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던 언니는 5학년, 6학년에 올라가면서 점점 성적이 올라가더니 졸업할 때는 조합장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반항을 하고 온갖 말썽을 다 부렸던 나와는 달리 집안에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마저 희미했던 언니는 점차로 학교 공부에 탄력이 붙으면서 대학교, 대학원, 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천문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 학술회의에도 참가하는, 그야말로 우리 집안에서 가장 빵빵하게 잘나가는 자식이 되었다. 나 또한, 누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두말없이 ‘우리 친언니’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언니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거나 나를 곤궁에서 구해주었거나 잊지 못할 큰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냐고 물으면 딱히 그럴 만한 사건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 앞에서 절대로 잇속을 못 챙기고, 형제들한테 모든 걸 다 해주어야 직성이 풀리고, 불의를 보면 대책 없이 정의의 사도가 되고자 해 우리를 당황시키고, 장녀로서 불끈 책임감을 느끼며 혼자서 집안의 모든 걱정을 지고, 음… 해결은 잘 못하는^^ 지금 그대로의 언니가 너무 좋다.
가끔 그냥 평범한 사람인 언니가 왜 이렇게 좋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 항상 진심이 느껴지기에 그런 것 같다. 언니는 크고 작은 모든 행동에 꾸밈이 없다. 현란한 잔머리가 돌아가는 세상에서 알아도 모른 척해주고 본인이 힘들어도 손해 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남에게 모진 마음을 먹지 못한다. 옆에 있으면 그냥 편안하다. 며칠을 끙끙 앓던 고민도 언니에게 털어놓으면 그 순간 힘든 마음이 사라지니, 언니에겐 신기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언니가 참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상대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림7_꽃

오순환 작. <민불(民佛)>
캔버스에 아크릴.
193x130cm. 2000.


 

영원한 나의 소울 메이트 지은 엄마 수정씨!

현연실 / 53세. 회사원. 창원시

지은 엄마! 수정씨.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가슴이 먹먹해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네요.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나의 둘째 아이 고은이가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였죠. 첫 짝꿍 친구가 지은이였는데 그때 애들이 다섯 살이었으니, 벌써 14년이 흘렀네요.
유치원 3년을 다니면서 아이들도 정이 들었지만 어느새 엄마들까지 친구가 되어 틈날 때마다 만나고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많은 추억을 만들곤 했었지요. 하지만 얼마 후 저에게는 IMF 위기가 쓰나미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휩쓸고 갔어요. 허탈하게 맥 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 참 모질고 모진 시간이 닥치고 있었죠.
가진 것을 한순간에 다 잃고 내 삶의 터전이었던 곳을 떠나서 어쩔 수 없이 시댁으로 들어가게 됐을 땐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목 놓아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큰아이 결이는 한창 예민한 중2, 막내 고은이는 초등학교 3학년.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을 거예요. 하루 종일 일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면 어린 딸 고은이는 긴 머리를 혼자 감고 채 말리지도 못하고 쓰러져 자고 있었어요. 그때 고은이의 머릿속에 생긴 상처와 딱지들이 아직도 제 마음에 흔적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아이가 지쳐갈 무렵 지은 엄마가 전화를 했어요. 고은이를 집으로 보내달라구, 지은이랑 며칠 보내게 하고 싶다구요. 처음엔 망설였어요. 너무나 다른 환경 때문에 고은이가 혹여 주눅들까 봐 우리의 처지를 비관할까 봐요. 엄마의 못난 마음은 아이를 잡고 싶었지만 고은이는 지은이 집에 간다니까 너무 좋아 잠까지 설치더라구요.
며칠을 자고 왔었죠. 올 때 가방에는 예쁜 속옷도 들어 있었고 책도 들어 있었고 수영복까지 새로 사서 넣어주었잖아요. 아직까지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 감사해서 가방을 열어 보고 남몰래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죠. 방학이면 내 자식도 귀찮을 텐데 지은 엄마는 한 번도 그런 내색 안 했어요. 바닷가도 데리고 가고 놀이동산도 데리고 다니면서 고은이의 황량한 유년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워주었어요.
고은이는 지은이네서 며칠을 보내고 오면 꽃처럼 환해진 얼굴로 엄마 엄마 호들갑을 떨면서 즐거웠던 시간들을 자랑하곤 했답니다. 여름 겨울 방학에 지은 엄마가 없었다면 고은이의 텅 빈 마음속에 무엇을 채워줄 수 있었겠어요. 그런 수정씨의 따뜻한 마음에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잘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답니다.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정말 인생의 선배 같고 등불 같은 존재였고 영원히 그런 사람으로 남아 있을 지은 엄마. 내 인생의 구원투수처럼 힘들 때면 홀연히 나타나 아무런 대가 없이 수렁의 늪에서 나를 건져주었던 거, 지은 엄마는 모르죠? 모를 거예요.
내가 밑바닥까지 가지 않았다면, 예전처럼 잘 먹고 잘살면서 오만하고 건방진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지은 엄마 수정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의 인생은 절망의 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비록 지금도 해결해야 할 일이 산같이 많고 아직 반듯하게 서지 못했지만 결코 좌절할 수 없는 건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고 격려해주는 인생의 소울 메이트, 지은 엄마 수정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정보다 맑고 고운 지은 엄마!!!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우리 죽을 때까지 영원한 소울 메이트로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늙어가요.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

2010년 11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와 함께한 작가는 오순환님입니다. 1988년 경성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그동안 16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열었으며, 아련한 여운이 남는 시 한 편을 보는 듯한 그림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 꽃”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작품엔 유난히 꽃과 함께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2010. 11. November 월간마음수련

닭 가슴살 케비지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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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소고기 또는 돼지고기로 하지만
닭 가슴살로 해도 담백하고 부드럽게 먹을 수 있어요.
우리말로 하면 양배추말이찜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화이트 와인 한잔 하면서
빵이나 밥을 곁들이고 우아하게 썰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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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준비 (2인분)
주재료 
간 닭고기(가슴살 1쪽=100g), 양배추(4장)  고기 양념  빵가루(1/2컵), 달걀(흰자 1개), 맛술(1), 다진 양파(1/4개), 다진 마늘(1), 고운소금(0.4), 후춧가루(0.3), 녹말가루  양념  물(1컵), 다진 토마토(小 1개), 월계수 잎(1장), 케첩(2), 치킨스톡(1개)
 
만들기
1.  볼에 간 닭고기(가슴살 1쪽=100g), 빵가루(1/2컵), 달걀(흰자 1개), 맛술(1), 다진 양파(1/4개), 다진 마늘(1), 고운소금(0.4), 후춧가루(0.3)를 넣어 반죽하고, [가슴살은 냉동 상태로 잘게 잘라 믹서에 넣어 갈아야 잘 갈려요.]   2.  김이 오른 찜통에 양배추(4장)를 넣어 3분 정도 찌고,   3.  양배추의 굵은 부분을 저며 낸 다음 녹말가루를 약간 바르고, 반죽한 고기를 넣어 돌돌 말고,   4.  냄비에 물(1컵), 다진 토마토(小 1개), 월계수 잎(1장), 케첩(2), 치킨스톡(1개)을 넣어 끓이다가 양배추롤을 넣고 뚜껑 덮어 중불로 15분 정도 끓이고 마무리. [끓이는 중간에 졸아드는 국물을 체크하고, 양배추롤을 한 번 뒤집어 주세요.]

나물이식 계량법  계량 단위는 일반 수저를 사용해요. 1컵은 종이컵 1컵, 한 숟가락은 (1), 반 숟가락은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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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이’로 잘 알려진 김용환님은 중앙대 한국화과를 졸업하고 끼니를 위해 만든 음식을 사진 찍어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대중 요리사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 등 5권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http://www.namool.com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

감동과 희망 준 젊은이들의 꿈과 도전_슈퍼스타K 허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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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민 오디션’이라 불리는 ‘슈퍼스타K’. 최종 결선에서 대국민 문자 투표 결과 2배 가까이 차이가 나면서 허각의 이름이 불려질 때, 가슴을 졸이며 바라본 많은 시청자들이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노래를 잘한다는 것 외에는 그저 길을 가다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젊은이들이 모여 벌인 오디션이었는데, 결말은 한 편의 해피엔딩 드라마를 본 것처럼 감동적이었습니다.
최현희 문화칼럼니스트 , 사진 제공 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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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이겨낸 사연들, 인간성도 실력이다

준결승을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은 외모와 노래 실력을 겸비한 존박의 우승을 점쳤지요.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노래 실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허각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듯했습니다. 외모도 출중한 편이 아니고 나이도 많은 편인 허각의 강점은 뛰어난 가창력, 그리고 중요한 또 하나, 따듯한 마음과 진실함입니다. 더욱이 어려운 성장기를 보낸 그이기에 허각씨의 우승은 시청자의 염원이 되었나 봅니다.
Top 11에 올라온 참가자들 대부분 부유한 환경인 경우는 없어 보였습니다. 평범한 줄 알았던 우리 젊은이들에게 어찌나 그렇게 저마다 사연들이 깊은지요. 그런데 그 사연의 공통점은 모두 ‘노래’로 자신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꿈을 키워왔다는 점에서 참 대견했습니다.
특히 열네 살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는 허각의 이야기는 단연 관심을 모았습니다. 어려서 부모가 헤어지고, 아버지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던 그는 어려운 형편에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적도 없고, 다른 참가자들처럼 악기 연주도 못합니다. 동네 쇼핑몰 대회에서 처음으로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후 쌍둥이 형과 함께 각종 동네 대회에서 상을 휩쓸다가, 행사를 다니며 노래를 익혀왔다지요. 방황의 시절, 중학교를 중퇴했다 뒤늦게 복학해 졸업했고 당연히 아버지는 아들이 노래하는 것을 많이 걱정하고 반대했다 합니다.
올해 26세의 환풍기 수리공 허각은 몇 년 전 쌍둥이 형과, 유재석씨가 진행하는 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헤어진 어머니를 만났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새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그 가족들은 쌍둥이 형제의 존재를 몰라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를 이해한다는 착한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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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박의 어머니, “허각이 일등이면 더 좋은 일”

합숙 생활과 미션 수행이 방영될 때 참가자들이 떨어져 있던 부모와 해후하는 장면도 나오고, 또 탈락한 자식을 격려하고 안아주는 부모님 모습도 나옵니다.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을 텐데, 큰 품으로 남의 자식까지 껴안은 그 든든한 부모님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는 참가자들에게 마음이 쓰인 것도 인지상정이겠지요. 특히 허각에겐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형편상 아들을 응원하러 오지 못했던 존박의 어머니에게 비행기 티켓을 선사한 이는 뜻밖에도, 처음부터 존박을 친동생처럼 챙겨온 허각이었습니다. 미션에서 우승한 그에게 소원을 묻자 존박의 어머니에게 드릴 비행기 표를 사달라고 했답니다.
허각의 배려로 존박의 어머니가 드디어 합숙소로 아들을 찾아와 눈물로 포옹을 할 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허각을 생각해 마음 아팠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자상하고 성실한 아버지와 우애 깊은 쌍둥이 형이 있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는 컸을 겁니다. 그의 노래가 간절한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지요.
결승 무대에서 라이벌이 된 존박의 어머니도 허각을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마음 편안하게 해라. 네가 일등하면 잘돼서 좋은 일이고, 허각이 일등을 하면 더 좋은 일이다. 힘들게 자랐는데 얼마나 좋은 일이냐’라는 내용의 편지가 전해질 때 참 공감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런 개인의 사연들이 지나치게 밝혀진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래서 더 공감했던 건 아닐까요. 어려운 환경을 잘 극복해낸 젊은이라면, 사람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았겠지요. 그리고 그 어려움을 ‘노래’라는 긍정적인 정서로 풀어낼 수 있는 젊은이라면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진심이 담길 겁니다.
음악은 귀로 듣지만 그것만 갖고 감동이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노력과 거기서 묻어나는 따스함이 더해질 때 우리는 노래를 가슴으로 듣고 노래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당연히 인간성도 실력인 겁니다. 언젠가부터 외형과 배경, 성과주의를 당연한 듯 생각해온 우리에게 인간성이 왜 가장 중요한 실력인지 보여준 것이지요.
가수 윤종신씨는 최종 심사 평에서 “허각씨는 정말 간절함만큼은 언제나 일등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이승철씨의 심사 평도 기억에 남습니다.
“허각씨는 이 땅에 많은 노래를 사랑하는 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노래가 많이 인스턴트화되고 있는데, 앨범 나오면 노래 연습보다는 복근 운동부터 하는 가수들이 많죠. 허각씨는 노래로 승부하는 가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의 힘들고 어려웠던 환경보다는 훌륭한 가수로 성장해가는 그 모습을 지켜봐주고 싶습니다. 참가한 젊은이들 모두, 그렇게 꿈이 자신을 더욱 성장시키는, 행복한 가수가 되길 바랍니다.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

사회복지사업 꿈꾸는 국립발레단 수석 발레리나 김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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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 김주원(34)씨는 매해 연말이면 늘 무대 위에 있다. 캐럴이 들려오고 거리도 들뜨는 연말, 그녀는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가 되고, ‘호두까기 인형’의 마리가 된다. 국립발레단에서만 벌써 11년째. 공연 전, 시연에서는 종종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 초청되어 가장 먼저 관객이 되어준다. 여기엔 사회복지에 관심이 깊은 발레리나 김주원의 배려가 담겨 있다. 김주원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꿈과 희망이 되는 발레, 사회에 보탬이 되는 발레를 하고 싶단다.

최창희, 사진 홍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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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연습실을 찾았을 때 김주원씨는 한창 ‘왕자 호동’ 연습 중이었다. 지난 10월, 세계 발레의 중심지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으로 극찬을 받았던 그녀였다. 당시 국립발레단의 이틀 공연은 모두 매진되었다.
볼쇼이극장에서 러시아가 아닌 다른 국적 무용수가 주역으로 참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역대 가장 많은 수는 한 무대에 4명. 이번엔 김주원을 비롯하여 8명이 이틀간 무대에 섰고, 볼쇼이 무대가 익숙한 주역 무용수 김주원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보다도 한국 발레가 세계 무대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는 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귀국 때였다. 공항에서 어느 할머니가 다가와 그녀를 꼭 껴안더란다. 제일 앞줄에서 봤다는 그 스페인 할머니는 줄리엣이 죽는 장면에서 같이 울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최선을 다한 춤의 진심이 전해졌다는 게 너무나 기뻤다”는 그녀다.

98년 주역 무용수로 데뷔한 이래 늘 최고의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들어오셨지요.


저는 주역일 뿐, 최고는 아니에요. 제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더 이상 노력을 안 할 것 같아요. 항상 제가 표현하고 싶은 어떤 느낌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발레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다 써서 연기를 해야 돼요. 정말 어깨 하나로 슬픔을 표현해야 하고 발끝으로 눈물을 표현할 때도 있어요. 근데 저는 타고난 무용수는 아니에요. 어떤 분들은 나의 긴 목과 팔이 장점이라 얘기하는데 처음엔 오히려 단점이었어요. 제 팔은 많이 휜 데다 관절 부분에 각이 지고 도드라져 부드러운 곡선이 만들어지지 않았죠. 그래서 매일같이 목과 팔 단련 운동을 하고 있어요. 무용하면서 알게 된 건 장점이나 단점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어떻게 노력해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녀는 기본이 탄탄한 발레리나로 알려져 있다. 부산 배정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시작한 김주원은 92년 여름, 당시 선화예중 3학년에 재학 중 볼쇼이 발레학교 선생님들이 국내에서 연 발레 워크숍에 참가했다가 발탁되어 홀로 유학을 결심한다. 92년부터 6년간의 유학 생활. 철저하기로 유명한 볼쇼이 발레학교의 우등생이 된다.
하루 평균 12시간. 한 달에 15켤레의 토슈즈를 바꿔 신는 그녀는 일년이면 크고 작은 공연을 백 회 이상 해야 한다. 발레를 계속해온 19년 동안 부상은 일상이었다.
목디스크뿐 아니라 허리디스크, 발바닥 근육을 지나치게 혹사시켜 근육에 염증이 생기는 ‘족저근막염’을 수술하지 않고 재활훈련으로 이겨낸 5개월간, 슬럼프가 없었다는 그녀도 차라리 발레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한다. “치료도, 아픔도 공백이 아니라, 또 다른 공부”라던 어머니의 말씀이 큰 힘이 됐다. 결국 김주원은 6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재기한 그녀에게 그해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여성무용수상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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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 무용수는 단원들을 아우르고 작품을 이끌어가야 하니 쉬운 자리는 아닐 듯합니다.

발레는 절대 혼자 할 수가 없어요. 백 명의 단원들과 소통해야 되니 힘든 건 당연해요. 어릴 때는 제 춤만 신경 썼다면 한 3~4년 전부터는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내가 아픈 채로 무대에 서야 할 때는 무용수들이 더 걱정을 해주고, 템포를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지휘자님이 맞춰주시는 것도 알았고요. 스탭분들도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세요. 제가 잘나서 혼자 추거나 나의 춤이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정말 함께라는 게 느껴지니까 진짜 제가 춤을 춘다는 생각이 더 들어요.

발레를 시작하고 정말 일편단심이셨는데 답답할 때는 없었나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똑같은 일상이에요. 밥 먹을 때도 쉴 때도 늘 발레만 생각해왔구요. 저희 아버지가 어느 날 “난 내 딸이 참 존경스럽다” 이러시는 거예요. 니가 최고가 된다거나 어떤 상을 받는다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난 내 딸이 14년 동안 그렇게 똑같은 생활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는 게 너무나 대단하대요. 너무나 감사했죠. 그때 아 내가 그랬구나, 생각을 해봤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거의 전 항상 발레단-집-공연이더라구요. 춤출 수 있어서 행복하니까요.

그런 그녀의 일상으로 들어온 것이 발레로 하는 사회봉사였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김주원씨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영아원같은 복지 시설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김주원씨의 언니와 여동생은 사회 복지를 전공했다. 2년 전, 국립발레단이 김주원씨의 제안으로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에게 발레스쿨을 연 적이 있었다. 결손가정 소년 소녀 60명은 이렇게 생애 처음으로 발레를 만났다. 그 일은 발레만 생각해온 그녀에게 자신이 세상을 살면서 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일을 만나게 해주었다. 서울사이버대학에 재학 중인 그녀는 “제대로 공부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따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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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고 있는 아이들이 열 명 정도 된다고 들었어요. 결손가정 아이들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나요.

처음 볼 때 그 눈빛이 참 가슴 아팠어요. 제가 그 또래의 조카가 있고 아이들도 참 좋아하는데, 그 아이들 눈빛이 어른인 거예요. 그게 어떤 건지 아세요? 근데 땀을 흘리고 움직이니까 변화되는 게 보이더라구요. 나중엔 가기 싫어할 정도로 울어요.(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게 참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힘든 아이들이 변화되는 과정을 본 거잖아요. 발레는 부유한 아이들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려운 아이들에게도 가능한 거예요. 시간을 더 내서라도 해야겠다 생각을 했죠. 사회복지에 대해 더 잘 알면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예술의 힘을 느낀, 관객과의 교감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십여 년 전 한창 IMF가 심할 때였어요. 두께가 두툼한 팬레터가 온 거예요. 아이 셋을 둔 주부였는데 사업 부도로 빚더미에 올라 남편은 행방불명되고 애들은 키워야 하고 눈앞이 캄캄해서 죽을 생각을 했었대요. 근데 이웃 아주머니가 힘내라면서 공짜 티켓인데 발레 공연 보러 가자 한 거예요. 이게 웬 사치인가 하면서도 아이들을 데리고 오신 거예요. 그때 공연이 ‘지젤’이었어요. 그게 참 슬픈 내용이에요. 끝날 때까지 너무너무 많이 울었대요. 억눌렀던 아픔을 쏟아내신 것 같아요. 주원씨의 춤을 보면서 열심히 살기로 맘을 먹었대요. 이제 돈도 벌고 아이들도 잘 키우겠다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한 열 줄 정도 쓰셨어요. 그걸 읽고는 저도 펑펑 울었어요.(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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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진심을 담아 춤을 춰야 한다고 하신 건, 아마 그때 영향도 크셨을 것 같아요.

어릴 때인데도 아, 예술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느꼈어요. 어떤 이에게는 휴식이지만 크게는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게 예술이구나, 내 만족을 위해서만 춤을 추는 게 아니구나, 제가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지금도 지칠 때 많이 힘들 때 가끔 생각이 나죠. 내가 게을러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발레리나에게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요.

좋은 춤을 추려면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중학교 때부터 항상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네가 춤을 출 거라면, 아름다운 생각 많이 하라고요. 나쁜 생각하고 스트레스 받고 무대에 서면 그게 다 보인다고요. 춤을 통해 생활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아름다운 마음을 갖자가 제 좌우명이 되었죠.

그녀는 아침에 눈떠 몸이 가벼우면 이상하다고 한다. 열심히 안 했나 싶어서. 보통은 땅에 발을 못 디딜 정도로 아프지만 웬만한 건 견딘다. 무대에 서면 아픈 게 신기하게 낫는다는 그녀는 천상 춤꾼이다. 춤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삶이 감사하다는 그녀가 이젠 그 행복을 아이들과 나누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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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주원님은 1978년 부산 생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발레를 시작하여 선화예중 재학 중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에 입학, 1997년 졸업했습니다. 1998년 국립발레단 ‘해적’의 주역으로 데뷔, 2006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최고여성무용수상을 수상했습니다. 호소력 있는 연기, 뛰어난 테크닉으로 올해 제4회 ‘더뮤지컬어워즈’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녀는 12월엔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공연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