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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기의 시대에서 빼기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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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21세기는 정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마음의 시대, 감성의 시대라고도 하지요. 먹고사는 생계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면 사람들은 자아의 성장에 관심을 갖는다고 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목표로 달려온 인류가 이제 마음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업, 지식보다 감성을 중요시하는 교육….
물질의 시대가 더하기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빼기의 시대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살아온 삶의 마음들을 빼내고 자기라는 존재를 다 없애면 근원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네 삶도 마음의 이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옷장에, 주방에, 책상에, 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와 경제, 예술, 교육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쌓여온 삶의 군더더기들은 소통과 흐름을 막는 우리 마음의 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전반에서 진행되고 있는 빼기의 흐름은 참된 본성으로 향하는 마음의 길을 알려줍니다. 진정한 ‘웰빙(Well-being)’은 빼는 삶입니다. 그 참된 삶을 위한 생활의 지혜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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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안에 가득한 옷들. 자주 착용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2년 넘도록 입은 적이 없는 불필요한 옷이라면 부담이 될 뿐이다.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옷의 20%만을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80%의 옷은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파레토법칙’이라 불리는 20대 80의 법칙은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들, 대부분의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묵은 옷들은 공간만 차지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도 입을 확률이 거의 없는 이 옷들은 내 기억과 마음까지 차지한 채 나를 묶어둔다. 사계절을 두 번이나 순회하는 긴 시간 동안 입을 마음이 없었다면 이미 나와 인연이 끝난 것이다. 그 옷들을 떠나보내야 할 때다. 옷에는 사람의 체취가 배어 있고, 2년이 넘도록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을 어쩌다 입게 되면 옷과 몸이 맞지 않아 불편할 때가 있다.
물건에는 수명이 있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물건은 생명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가 정체된다.
묵은 옷들은 과거에 묶인 기억과 같다. 집착의 마음이며 잡동사니를 치우는 과정은 버림에 관한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물건을 간직해야 했던 우리의 두려움을 버리는 것이다. 가진 게 적을수록 지금 가진 물건을 더 많이 쓰게 되는 법. 물건을 돌보는 일에 에너지도 덜 빼앗긴다.
버리면 버릴수록 마음이 정리되고 상쾌해진다. ‘버리는 것’은 곧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버리는 것은 ‘새로운 기회와 만남을 불러오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빼기 방법    2년 이상 한 번도 입지 않고 옷장 속에 묵혀 두었던 옷은 과감히 버린다. 그리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그 기준을 분명히 한다. 어떤 컬러가 나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기분까지 즐겁게 만드는지 파악한다. 부족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남아 있는 옷들을 살펴보면서 어떤 기분이 드는지 지켜보자. 모양이나 재질, 착용감, 치수 그밖의 무엇이든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련 없이 버리자.

‘언젠가’의 심리를 버리자.    설문 조사에서는 처리하기 곤란한 물건,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물건의 베스트 3은 책, 잡지, 옷이었다. 이것들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이 ‘언젠가’의 심리 탓. 그러나 언젠가는 결코 오지 않는다.

가능한 한 밝은 색 옷을 입는다.    보는 순간, 만지는 순간 기분이 좋아지고 안심이 되는 그런 옷을 고른다. 얼굴을 환하게 만들어주고, 입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번지는 옷, 절로 어깨가 펴지면서 자신감이 생기는 옷, 밝고 경쾌한 인상을 주는 옷이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다. 입으면 긍정적이고 밝은 느낌이 드는 옷이 좋은 옷이다.

버리기 위한 기술 10가지
1. 보지 않고 버린다
2. 그 자리에서 버린다
3. 일정량을 넘으면 버린다
4.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버린다
5. 정기적으로 버린다
6. 아직 사용할 수 있어도 버린다
7. ‘버리는 기준’을 정한다
8. ‘버리는 장소’를 많이 만든다
9. 좁은 곳부터 시작해본다
10. 누가 버릴지 역할 분담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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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약혼식 때 사진입니다. 1년 8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했지요. 저를 번쩍 들어 안아 입 맞추던 그때, 여자로서 꿈꾸던 로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죠. 경찰인 남편은 일이 많았지만 새벽 2, 3시에도 저를 보려고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1시간을 달려 바닷가로 향했고 별도 세고, 달도 세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무겁다며 제 가방도 들어주고, 못 먹는 멍게도 제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맛있게 먹어주던 자상한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남편은 ‘24시간 근무 중~’ 무뚝뚝한 하숙생이 따로 없었습니다. 첫아이를 낳고 얼마간은 아기와 잘 놀아주더니 곧 나 몰라라 했고, 어쩌다 집에 있을 때면 텔레비전만 끼고 앉아 웃는데, 얼마나 얄밉던지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졌습니다. 결혼한 걸 후회했고 부부싸움도 잦아졌습니다.
그렇게 십 년을 살다가 2007년 마음수련 명상을 하면서 기억 속에 있는 마음의 사진 버리기를 몇 달째, 연애 시절처럼 낭만적이고 자상한 남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자기 일을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남편이 멋져 보이고, 집에 오면 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이해되더군요. 어느 날 남편이 한마디 하더라고요.
“마음수련을 하니 사람이 이렇게 바뀌는구나. 고마워, 감동했다.”
똑같은 약혼식 사진인데, 사진처럼 남편에게 떠받들려지길 바랐던 마음을 버리고 나서 다시 보니, 오직 사랑 가득한 우리 부부입니다. 결혼하길 정말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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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먹는 걸 좋아했다. 세상엔 먹고 싶은 것투성이였다. 배가 불러도 먹고,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밥도 보통 남자들보다 많이 먹었고, 과자도 애들보다 많이 먹었다. 먼저 먹어야 힘을 내서 일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먹으면 살찌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 때문에 먹으면서도 고민을 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나는 다른 엄마들과 나의 차이를 알았다. ‘다른 엄마들은 자식 먼저 챙겨 먹이는데 나는 왜 나부터 먹을까, 내가 왜 이렇게 먹고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명상을 하며 비로소 내가 과식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살아온 기억을 떠올려 버리다 보니 엄마의 칭찬 한마디가 떠올랐다. “너는 참 밥을 맛있게 먹는구나.”
솔직히 나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특별히 잘하는 게 없었다. 그런 내게 엄마가 유일하게 칭찬해준 것이 바로 밥을 잘 먹는다는 거였다. 그 칭찬이 좋았고 더 듣고 싶었다. 점점 더 먹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과식을 당연하게 여겼다. 음식만 보면 아이도 신랑도 눈에 보이지 않았고,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일단 나의 허기부터 채워야 주위 사람들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도 당신이 드시기 전에 자식들이 먼저 먹는 걸 싫어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버리고 싶어 살아온 내 모습과 내 생각, 관념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더 이상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먹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사라지고, 옆에서 먹는 얘기를 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젠 음식을 보면 다른 사람 먼저 챙겨줄 줄도 안다. 그렇게 나는 과식 습관에서 벗어났다.

 

참고 도서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 캐런 킹스턴 저 / 도솔
<정리 플래너> 제니퍼 베리 저 / 나무발전소
<성공 정리법> 캐슬린 켄달 택케트 저 / 큰나
<큰 쓰레기통을 사라> 우스이 유키 저 / 산수야
<버리는 기술> 다쓰미 나기사 저 / 이레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낭만에 대하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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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의추억

김병종 작. <카리브의 추억> 한지, 면천, 먹과 채색. 변형 60호. 2008.

김병종 화백의 낭만 이야기

낭만과 현실을 허락받은 내 삶

지금까지의 나의 삶은 한국인 남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낭만을 좇는 연속이었다 할 만하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과 미술을 좋아해서 꿈꾸는 소년이었고, 청년 시절에는 삶의 반경을 조금씩 넓혀서 국내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 꿈으로 그리는 낭만을 현실의 지평 위에 올려놓곤 했으며, 대학의 교원이 되어서는 방학 때마다 스케치북과 카메라를 들고 지구촌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풍경 속에 내재한 삶의 의미와 여러 모습들을 나 아닌 타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기록하기도 했다. 흔히들 낭만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경쟁 속에서 개척해야 될 그 무엇이고 청소년이나 청년기에 잠깐 바람처럼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낭만이야말로 삶의 양념이며 향기라고 생각한다. 특히 유교적인 전통 위에서 과묵하고 무뚝뚝한 것이 남성다움의 표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곳에서는 나이 든 남자의 낭만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니 내 마음이 뛴다고 했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고백처럼 낭만이야말로 생명의 상징이며 그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할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관악의봄

김병종 작. <관악의 봄>
한지에 먹과 채색.
6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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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선 / 48세. 회사원. 이탈리아 제노바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낭만에 대하여’는 가사와 멜로디가, 중년 가수 최백호씨 특유의 투박하지만 서정적인 음색과 잘 어우러지며, 과거의 향수를 있는 대로 불러일으킨다.
80년대 초반, 대학에 들어가 처음 맞이한 여름 방학이었다. 여고 동창생 친구 두 명과 함께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내린 곳이 마석이었지 아마. 첫날 민박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대청봉을 넘기 위해 출발했다. 으… 힘들었다. 배낭과 텐트가 너무 무거웠다. 그런데 구세주를 만났다. 대학 3학년 형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남자 선배를 오빠라 하지 않고 형이라 불렀다. 그들도 고등학교 동창들이라고 했고 우리처럼 3명이었다. 짐도 들어주고 텐트도 쳐주고 밥도 해주고…. 3박 4일 코스를 4박 5일 걸려 대청봉을 넘는 동안 길도 모르고 걸음도 느린 우리들을 잘 돌보아주었다.
어느 날 밤, 하루 종일 힘든 산행을 마치고 야영을 하던 그날, 하늘의 별이 쏟아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들 중 한 명이 기타를 쳤다. 노래도 불렀다. 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나는 소위 말하는 음치이기 때문에 노래 잘하는 사람을 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좀 반한다. 그때 그 형이 부른 노래는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였다.
‘저 형이 나를…!’ 분명 나를 향한 노래 같았고 나는 가슴이 뛰었다. 달콤한 밤이었다. 하지만 낭만은 착각이었고 현실은 슬픈 것이었다. 노래하던 형과 내 친구가 사귄다는 사실을 그리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순간 뭔가 쌉싸름한 것이 목을 넘어가는 듯하더니 가슴께를 지나며 확실히 씁쓰름해졌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왠지 허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난다. 힘들고 고생스러웠지만 첫 ‘산행’의 경험은 설레는 것이었고 또 그 형들과 함께여서 더욱 즐거웠던 것 같다. 이제 다들 아저씨 아줌마가 되었겠지.
낭만이란 너무 큰 기쁨이거나 가슴이 쿵쿵 뛰는 그런 것이 아니고 약간의 설렘, 약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약간의 감미로움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행복은 아니고 행복에 대한 기대감, 본격적인 사랑은 아니고 사랑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 말이다. 그러기에 낭만은 더욱더 젊은 날의 것으로 생각되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수 최백호씨도 낭만을 노래하며 ‘잃어버린 것’ ‘다시 못 올 것’이라 하였나 보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낭만을 ‘다시 못 올 것’이라고 단정 지어버린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노래 끝 구절을 내 맘대로 바꿔본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사랑으로 채워어~(원래는 ‘못 올 것에 대하여’다)

생명의노래2

김병종 작. <생명의 노래>
닥판에 먹과 채색.
60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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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 37세. 간호사. 서울시

어린 시절 일년에 몇 번 이사를 간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계속해서 전학을 가기가 어려워서 몇 달간 버스를 꽤 오래 타고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처음으로 혼자 타 보는 버스. 처음에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잘 탔다. 하지만 길치이면서도 영리하지 못했던 나는 그 버스가 아닌 다른 버스를 타면 왜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번호의 버스가 반대쪽에서도 오는데 왜 그 버스는 타면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기다리는데 버스가 너무도 안 오는 것이다. 건너편 길로는 같은 번호의 버스가 몇 번이고 지나가는데…. 나는 당당히 반대쪽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 있게 탔다. 그리고 내가 아는 동네가 보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가도 가도 익숙한 동네를 볼 수가 없었던 나는 저녁 시간이 가까워 오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부모님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그때는 전화라는 것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버스 안내원 언니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나 보다. 결국은 언니가 먼저 “어디 가니?”라고 물어보았다.
다행이다 싶어 동네 이름을 말했는데 언니가 모르는 것이 아닌가. 어른들이 하던 말을 주워들은 거였는데 그게 정식 명칭이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저렇게 꿰맞추던 언니는 “아!” 하더니 “꽤 멀리 왔네. 돈은 있니?” 하며 차비를 챙겨주고 어떻게 가야 할지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을 안고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오히려 버스를 타는 것에 자신이 붙었던 기억이 난다. 버스를 잘못 타도 안내원 언니들에게 말하면 잘 챙겨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후에도 수도 없이 언니들의 도움을 받았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어린 시절의 그 경험은 세상을 늘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 아이가 커서 좀 더 큰 세상으로 나갈 때도 손을 내밀어 줄 누군가를 만나리라 믿는다. 아이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믿을 만한 곳이고 따뜻한지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카리브

김병종 작. <카리브>
캔버스에 혼합재료.
72x50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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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순 / 57세. 교사. 충남 홍성군

지금보다 훨씬 청춘이었을 때 나도 남 못지않게 ‘한 낭만’ 했었다.
낭만을 찾아 도보 여행, 기차 여행, 하이킹 등등 나 홀로 자유 찾는 방랑자가 되어 보기도 했고, 근사한 추억과 사연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내 꼬라지에야 번번이 꽝!일 수밖에 없었지만, 바다 건너 작은 섬마을까지 홀로 훌쩍 떠나 보기도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바다, 산, 들에서 밤새 모닥불 캠핑도 하고. 그리고… 마누라한테 들킬까봐 차마 못 쓰는 사연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삶은 지극히 평범한 현실이 되고 “낭만 좋아하네. 뭐 말라빠진 낭만이가. 피곤하다, 피곤해. 편한 게 최고지.” 뭐, 이런 식으로 낭만은 그야말로 ‘개뿔’ 수준이 되어갔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나이 오십의 중반이 넘어, 드디어 아무리 탐해도 지나침이 없는 이 세상 최고의 낭만을 찾았고 그 속에서 산다. 낭만이란 무엇이냐? 근사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 감동의 물결이 찰찰 넘치는 것, 아주 그냥 죽여주는 것, 뭐 이런 것 아니겠는가. 즉 최고의 낭만이란 바로 감동이요, 내가 찾은 세상 최고의 감동이란 바로 ‘감사의 마음’이다.
감사의 마음은 내가 대하고 만나는 일체를 모시는 마음일 때 우러난다.
부모를, 아내를, 아이들을, 동료를, 선배를, 그리고 지나가는 그 누구조차 말이다. 진정한 감사는 시비하고 시기하거나 미워하거나 이중적으로 대하는 마음들이 없어질 때 비로소 시작되는데, 다행히도 나는 마음수련 명상을 알게 되고, 마음을 비우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나, 아무튼 나는명상을 통해 마음을 버리고 버리자 결국 남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있게 해준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였다.
그 감사는 자존심을 녹여 세상과 내가 하나이게 해주고, 스트레스도, 외로움도 불안함도 초조함과 우울함도 사라지게 했다. 피곤함을 이겨내게 해, 하는 일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되게 한다. 지난 일들 또한 나에게 있어야만 했던 일, 기쁜 추억이 되게 해주었다.
심지어 마누라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이게 하니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 하늘땅을 통틀어 이보다 더 근사하고 멋진 ‘낭만’이 있으랴.

2010년 10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에 함께한 님은 김병종화백입니다. 서울대 미대 교수인 님은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다수의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한 중견 화가입니다. 그동안 미술기자상, 선미술상, 대한민국기독교 미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대학 시절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이며, 유가(儒家)철학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1~4권)> <중국회화연구> <바보 예수> <생명의 노래> <오늘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낭만에 대하여… (1)

카리브어락

김병종 작. <카리브 어락> 캔버스에 아크릴과 혼합재료. 227×142.7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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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최백호씨의 ‘낭만에 대하여’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낭만’이라는 말 참 많이 듣게 됩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라고 하지요. 그래서일까요? 낭만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 템포 느린 여유와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하얀 도화지에 고운 빛깔이 스며들듯, 텅 빈 마음에 깃드는 낭만은 아마도 우리가 다가가고픈 순수한 마음일 것입니다. 청춘을 지나, 잊고 있던 것, 잃어버린 것, 우리네 삶이 빛나던 순간의 풍경들. 독자들의 낭만 이야기를 모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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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덕 / 45세. 교사. 대구시

1990년 1월 31일. 교사로서 첫 발령을 받은 해의 겨울 방학 마지막 날 밤이었다. 흰 눈이 가득 쌓인 대문 앞에 큰 책가방을 든 한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멈칫하며 가까이 가서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모임에서 몇 번 얼굴을 봤을 뿐, 말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여기에 어쩐 일이냐고, 집은 어떻게 알았냐고 다그쳤더니, 예전에 모임이 끝난 후 사람들을 차례대로 집 앞까지 태워다 준 적이 있었고,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서 한 시간 넘게 헤매어서 찾아왔으며, 무작정 기다린 게 2시간이 넘었다고 했다. “왜요?”라고 묻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봅시다!”
세상에! 이렇게 어색하고, 뻣뻣하고, 우스꽝스럽고…. 이런 말이 어디 있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보자니!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용기를 내어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운 방법으로 연애를 제안했던 그는 단칼에 거절당한 후 한동안 단식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후에도 대학생이 된 내 동생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으며 나를 향한 열정을 변함없이 불살랐다. 하지만 나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던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도둑이야!” 자취방 주인아주머니의 소리가 들렸고, 아주머니는 우리 방문을 두들기며 어떤 남자가 우리 집 담을 넘어오려고 하다가 도망쳤으니,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나는 혹시나 하며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저녁도 그 사람은 변함없이 나를 보러 왔었고, 9시쯤 되어서야 아쉬움을 뒤로하며 집으로 돌아갔었는데….
다음 날, “어젯밤 우리 집 담을 넘으려는 남자가 있었다는데…” 했더니 역시나 그가 빙긋 웃으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집으로 돌아가다 아쉬움이 남아 다시 왔는데 방 불은 꺼지고, 대문은 잠기고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더란다. 그래서 담을 넘어 방문이라도 두드려보려고 올라가려 하는데, 아주머니가 보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정신없이 도망을 갔고, 동네 슈퍼 앞 평상에 앉아 태연한 척 시치미를 떼며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데 경찰이 지나가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뛰었다는 것이다. 만약 경찰에 붙잡혔으면 그 창피를 어쨌겠냐며 동생과 나는 배꼽을 쥐고 웃었다. 그날 이후 내 마음은 조금씩 열렸으며, 그 다음 해 4월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내년이면 벌써 결혼 20주년이 된다.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미소가 도는 그 어색한 한마디! “우리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봅시다!”
세상에서 제일 촌스럽고 어색했던 연애 제안, 그만큼 순수하고 기교를 부릴 줄 몰랐던 그 시절 그 사람의 말 한마디가 ‘낭만’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며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탱고의발상지라보카

김병종 작. <탱고의 발상지 라보카>
종이에 먹과 아크릴.
53.5x45c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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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 / 만화가. 인천시

어렸을 적에, 남자 아이들에게 구타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때 그 아이는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힌다는, 다소 순진하고 귀여운 발상을 조금 거칠게 표현한 것이었을 텐데, 거기에 정색하고 달려든 나로 인해 큰 싸움으로 번졌고 급기야 그 아이는 전교생 앞에서 나에게 때려눕혀진 것처럼 보이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그것은 사고였고, 내 주먹에 맞아 벽에 부딪히며 머리에 살짝 피가 났을 뿐이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그 아이는 같은 반 남자애들을 모아 하교하는 나를 쫓아다니며 복수하려 했다. 다행히 끔찍한 충돌 없이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 일로 인해 나는 남자라면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 연애를 하게 될 리 만무하고 그 흔한 총각 선생님에게 가슴 떨려보는 풋풋한 추억 하나 없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졸업할 즈음에야 연애를 한 번쯤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짧고 굵은’ 연애를 했다. 짧고 굵다고 하니 말은 그럴싸하지만 판타지로 시작했다 순식간에 식어버린 찌질한 연애였다. 역시 나는 남자가 싫어,라며 툴툴거리다 두 번째 남자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이 녀석이 술 먹을 때마다 내 절친에게 전화를 하여 좋아한다고 고백했단 사실을 알게 되며 헤어졌다.
그 후에도 연애가 잘 안 풀려 그냥 이렇게 살다 죽지,라며 포기했을 때쯤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났다. 그전까지 질풍노도의 엉망진창 연애만 하다가, 갑자기 평화로운 연애를 하게 되니 마치 연애를 처음 하는 것처럼 낯설었다. 꽃 선물을 받고 나서 ‘아, 내가 몇 놈 만나봤지만 꽃을 받아 본 건 처음이네’라는 걸 깨닫는 씁쓸함과 묘한 기쁨의 혼합이랄까.
나는 여전히 남자에게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고 깊은 불신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점점 사랑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낭만과 애틋함에 대해서는 이제 조금씩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고 또 부서지기 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이렇게 주고받는 진심을 통해 변화되고 좋아지는 것들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이 내 생에 있어 가장 낭만적인 순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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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식 / 72세. 경북 경산시

이렇게 펜을 드니 쑥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소만 용기 내어 몇 자 적어보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빈민 농가에서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불행한 일들을 참으로 많이 겪었네. 열한 살 땐 6·25전쟁이 나며 형제들과 뿔뿔이 헤어졌고, 열두 살 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고 열여덟 살 때부터는 몸이 아파 5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 아들이 안됐는지 어머니는 “홀로 있으면 외로우니 결혼하라” 하셨고 나는 입대 전에 원치 않은 결혼을 했었네. 하지만 군 생활 15개월 됐을 즈음 아내마저 7개월 된 딸을 두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더군. 그 후 재혼을 하며 당신을 만났지.
하지만 불행은 계속해서 내 곁을 맴도는 것 같았소. 예비군 창설 당시 중대장을 했던 나는 아상과 우월감, 열등감 때문에 늘 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오. 직장 생활에 적응도 못 했고 당신과도 한 달이 멀다 하고 싸웠지. 가족들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무시하고 화도 많이 냈었소.
당신에겐 미안했지만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늘 세상이 싫었고, 마음을 의지할 곳도 없었다오. 그러다 마음수련 명상에 관한 책을 보고는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소.
명상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요. 눈물이 흐르고 참회가 되면서 ‘내가 이 세상에 죄인이구나, 죽어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마구 들더이다. 무엇보다 당신에게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서 세상에 나가기가 두려울 정도였소.
내 말이 곧 법이라며 가족들의 무조건적인 희생만 바랐던 세월들, 내 말을 안 따르면 화내고 물건을 던지던 나. 얼마나 무서운 아버지였던지 내가 들어서기만 하면 울고 웃던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던 모습도 하나하나 떠오릅디다.
‘아~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삶을 반복해서 살겠구나.’ 그건 너무도 끔찍할 것 같아 계속 명상을 했소. 집으로 돌아온 내가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자, 당신은 별꼴을 다 보겠다는 듯 방으로 들어갔었지.
그래도 명상하고 내가 참 많이 변하긴 하지 않았소? 지금은 청소도 설거지도 집안일도 하고 말이오. 당신 마음에야 안 들겠지만, 40년 동안 당신이 나를 위해 옷을 빨아주고 청소해주고 밥상을 차려준 거에야 비교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갚고자 하는 내 마음이니 넉넉히 받아주오.
얼마 전인가 당신이 ‘요즘은 날이 새는 게 아까울 정도로 편하고 행복하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나 역시 이불을 개고 널면서도 내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스스로 놀랍고 감사해서 눈물이 난다오. 요즘은 화가 날 상황에도 화가 나지 않으니 참으로 마음이 많이 버려지긴 한 것 같소.
여보, 우리도 젊은이들 신혼처럼 한번 재미나게 지내봅시다. 그동안 나 같은 못난 사람 틀에 맞춰주느라 고생 많았소. 앞으로 남은 여생은 내가 당신 틀에 맞춰 살 테니, 아무 걱정 말고 당신은 그저 건강만 조심해주면 되오.

생명의노래

김병종 작. <생명의 노래>
닥판에 먹과 채색.
100×111.5cm. 2005.

2010년 10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에 함께한 님은 김병종화백입니다. 서울대 미대 교수인 님은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다수의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한 중견 화가입니다. 그동안 미술기자상, 선미술상, 대한민국기독교 미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대학 시절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이며, 유가(儒家)철학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1~4권)> <중국회화연구> <바보 예수> <생명의 노래> <오늘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인간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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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잠자고 바람도 잠자고
갈 곳 없는 사람만 제 할 일 못하고 바쁘기만 바쁘구나
세상이 분주한 것은 사람이 분주하여 분주하구나
대자연은 그냥 있으나 만상은 그냥 사나
이룰 것 제대로 하나도 못 이루는 사람만 갈팡질팡
제 마음속에 허상의 세계에서
허상인 사진이 찍힌 대로
그 사진의 각본대로 자유가 없이 살아가고 있구나

땅에 제 스스로 갇혀 땅인 허상의 세계에 살아가니
지옥의 세계에 고통 짐을 지고 사나
그것은 생명이 없는
실상세계인 세상에 없으니 허상이라
땅에 난 자는 땅에 산다는 뜻은
땅에 나서 마음의 터널 속에 살고 있으니 그것이 지옥이라
하늘 난 자는 하늘 산다는 것은 하늘의 진리인
실상의 마음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니
그 마음 터널 밖인 하늘에 다시 나니
온 세상과 하나 자체라
하늘나라인 진리나라에 사는 것이라

허가 참 되는 것이 완성이고
허허를 다 없애면 참이 남고
가짜인 내 몸과 마음이 없으면
진짜만 남고 진짜로 다시 나야
인간이 제 할 일을 한 것이고
인간이 완성이 되는 것이라

 
 
 
 
 

인간의 완성은 가짜인 인간을 다 버리고
진짜인 사람으로 다시 나야 완성이 되는 것이라

영생천국도 살아서 영생하고 살아서 천국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수많은 사람이 세상에 살지만
천국 난 의인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으니
사람은 자기가 죽어도 죽은 줄도 모르고
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참사람은 죽은 것도 알고 산 것도 아니
이 세상은 하나의 허상 속 사는 세상이라
아는 자가 없구나

아는 자란 자기가 세상인 진리나라 나 사는 사람이 아는 자라
안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라
세상의 이치란 세상의 근본을 알고
세상의 있음 없음이 하나임 알고
나고 죽고 살고의 의미를 알고
참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고 지혜라

근본인 세상의 본래가 사람으로 와야
세상이 구원이 될 수가 있는 것은
그 나라의 주인이라
살리고 죽이고 있고 없고를 할 수가 있기에
본래의 주인만이 있게 할 수가 있고
없게 할 수가 있기에 그러한 것이라
이것이 살활자재권이라
 
詩_ 우 명

 

우 명 선생은 마음수련의 창시자이며, 저술가이자 시인이다. 깨달음과 진리에 관한 3권의 시집을 포함, 모두 열 권의 책을 펴냈으며, 마음과 우주의 이치, 사람들이 마음을 닦아 참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담고 있다.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로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기념하는 에릭 호퍼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했으며 철학, 영성, 명상 분야에서 다수의 도서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및 일본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를 다니며 강의와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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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이에게도 학사모를 씌워줘야 하는데….”
올여름, 대학 졸업식을 앞두고 교수님들은 종종 미담이 얘기를 하셨습니다. 7학기 내내 제가 한 과목 수강을 마치면 모두 “미담이와 경민이가 열심히 했다”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런 미담이가 저는 늘 고맙고 자랑스러웠지요.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의 길을 안내견 미담이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구술 김경민, 정리 편집부, 사진 제공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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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이는 래브라도 레트리버종으로 여섯 살이다. 두 살이 지나 경민씨와 함께하게 된 미담이는 학교를 오갈 때, 수업을 들을 때도 그랬듯이, 경민씨가 졸업을 한 지금도 언제나 곁에서 생활을 함께하며 경민씨를 지켜주고 있다.

미담이와 저는 24시간 함께합니다. 미담이가 걸으면 저도 걷고, 미담이가 서면 저도 서지요. 공부할 때나, 밥 먹을 때, 잠을 잘 때조차도 조용히 제 곁을 지켜줍니다. 잠깐 미담이를 두고 혼자 나갔다 돌아오면 신발 소리만 듣고도 나와서 펄쩍펄쩍 뛰며 좋아합니다. 미담이는 항상 저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미담이를 만난 것은 2007년 2월입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 분양 신청을 했어요. 안내견학교에서 4주간의 입소 교육을 받으러 가게 되었을 때, 처음엔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개를 정말 무서워했거든요. 그런데 미담이가 만나자마자 뛰어오르고 좋아하며 뽀뽀를 하는 거예요. 저는 처음엔 잘 다가가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했죠.
그런데 교육 1주 차 때였어요. 몸살이 심하게 걸린 겁니다.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워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다가 중심을 못 잡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어요. 한참 후에 정신이 들고 보니 미담이가 계속 제 곁을 지키고 있었어요. 이제 괜찮다며 미담이를 만져주니까 그때서야 안심이 됐는지 물을 먹으러 가는 거예요. 그때 참 감동을 받았어요. 앞으로 함께할 친구라는 생각이 드니까 무서움도 없어졌습니다.
처음엔 서로 맞춰가느라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호기심 때문에 다른 길로 간다든지, 길에 떨어진 음식을 먹으려 한다든지, 그러면 미담이를 바로잡아 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뭐라고 하면 고개를 제 가슴에 파묻으면서 안겨요. 그러면 제 마음도 약해지지요. 꼭 애기 같아요.
제가 실수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공사를 하고 있거나, 차가 있으면 위험하니까 미담이가 가지를 않아요. 그러면 저는 미담이가 딴짓하느라 멈춘 줄 알고 야단을 쳐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면 위험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꼬리를 흔들며 괜찮다는 거예요. 이제는 안 가려고 하면 딱 알지요. 요즘에는 좀 위험하다 싶으면 코로 한번 제 다리를 찍어요. 앞에 뭐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얼마나 세심한지 계단을 내려갈 때도 제 발을 보고 있다가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하고는 내려갑니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다 통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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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숙명여대 여름 학기 졸업식. 문과대학 수석으로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 서게 된 경민씨 옆에는 안내견 미담이도 있었다. 의류학과 친구들은 미담이에게도 학위복을 만들어주었고 미담이는 경민씨와 나란히 졸업식을 치렀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예 시력을 잃었어요. 날짜도 기억합니다. 2000년 8월 1일.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이던 그날이요. 그 이후로 자기 전에 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벽지를 볼 수 있었으면, 천장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무엇보다 하늘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유치원 때는 다른 친구들처럼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제는 유치원 때만큼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구나, 내가 다른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이때를 그리워하겠지. 잃고 나서야 그때 가졌던 것이 참 좋은 것이었다고 느낀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구나. 그러고 보니 저는 가진 게 참 많았습니다. 저를 사랑해주는 가족, 친구들이 있고, 그리고 미담이가 있으니까요.
사실 대학 입학을 앞두고는 좀 힘들었습니다. 계속 시각 장애인을 위한 맹학교를 다녔는데, 과연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자려고 누워도 한 시간마다 깨고 가위에 눌렸어요. 그때도 미담이가 큰 위안이 되었지요.
미담이는 성격이 참 밝습니다. 사람을 안 가리고 좋아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웃으면 자기는 뭔지도 모르면서 꼬리를 흔들고 뽀뽀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푼수 아줌마’입니다. 그리고 나가는 것을 즐거워해요. 나가서 함께 걷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미담이도 행복해하는구나 하고 느껴집니다.
저는 제가 세상에 빚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까 수업을 따라가기 힘든데, 그때마다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장애 학생 도우미 언니들이 대신 수업을 타이핑해서 점자로 만들어주거나, 교재를 음성 파일로 만들어줘요. 그리고 저희가 읽는 점자 책은 정말 어렵게 만들어진답니다. 그걸 아니까 한 권 한 권이 너무너무 귀해서 서너 번은 보게 됩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감사한 마음 때문에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 생활 동안 숙명 점역봉사단에 들어가 시각 장애 학생용 문제집을 만들고, 맹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빚진 걸 갚고 싶었거든요. 요새는 임용 고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미담이와 함께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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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님은 1988년 1남 1녀 중 장녀로 서울에서 태어나 국립서울맹학교에서 초·중·고를 다니고,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선천적 녹내장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늘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감사하며 느끼자’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2010. 11. November 월간마음수련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겸 지휘자 윤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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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은 지휘가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겁니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수십 명이 하나의 소리를 낼 때,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한국 합창 지휘의 선구자 윤학원(73) 선생. 1978년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세계합창경연대회 최우수상에 올려놓음으로써 세계에 이름을 알린 그는 카네기홀을 비롯한 해외 유명 연주장에서 무려 3백 회, 정기 연주회 등을 수천 회 가진 세계적인 지휘자다. 그의 손짓에 하나의 소리가 되고, 그의 눈빛에 하나의 마음이 된다.

이권자, 사진 홍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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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 그리고 ‘하모니’.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맞추어 노래하다, 조화를 이루다, 듣기만 해도 훈훈한 뜻의 두 단어는 요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이자 화두가 되었다.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의 영향이었다. 출연진 외에 공개 오디션을 통해 뽑힌 수십 명의 개성 강한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함께 공감하고 감동케 했던 것이다.
가장 화제가 된 이는 지휘를 맡은 박칼린씨. 지휘자로서 자신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을 무렵 그녀는 자신이 평소 존경해 마지않았던 한 대가를 언급하며 잘하고 있다는 그분의 칭찬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고 했다.
합창에 평생을 바친 사람, 한국 합창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한국 음악을 세계에 알린 사람, 바로 윤학원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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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합창에 대한 관심을 실감하시는지요.

그럼요. 그렇지 않아도 박칼린씨를 만났을 때 합창 문화 발전에 크게 도움 될 수 있으니 잘해달라고 했는데, 아주 잘해냈어요. 나도 눈물이 나던데요.

사람들로 하여금 합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 것 같습니다.

합창이란 여러 사람이 모인 거잖아요. 각자 자기 나름대로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개성을 죽이고 같이 맞춰 나가려는 게 참 멋있잖아요. 제일 중요한 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게 해준다는 거예요. 독창은 자기만 잘하면 되지만, 합창은 다 같이 해요. 누가 멜로디를 하면 그 사람을 돋보이게 받쳐주고, 자기가 멜로디를 하면 맡은 바를 충실히 하고. 그게 합창의 정신인데 우리가 사회생활 하는 데도 굉장히 필요한 거거든요.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모은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듯합니다.

굵은 소리도 있고 빼죽한 소리도 있고 걸걸한 소리도 있고 소리의 질이 사람마다 달라요. 그걸 하나로 모으는 합창은 한 번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아’ ‘오’ 모음 하나를 갖고 계속해서 맞춰요. 그래서 제가 지휘자는 쩨쩨한 것이다, 그런 얘길 합니다.(웃음) 어떤 때는 곡 하나 갖고 천 번이고 연습을 해요. 그런 작업을 통해서 하나의 소리가 만들어질 때의 일치감, 그 희열은 굉장합니다.

지휘자는 단원들의 마음까지 잘 조율해줘야 할 듯합니다.

사실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결하고 하나로 만들어 가느냐가 중요해요. 좋은 지휘자란 훌륭한 대통령 같아야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대통령은 국민들 마음도 잘 헤아리고 나라 운영도 잘해야 하잖아요. 지휘자도 단원 한 명 한 명을 배려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합창단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부터 어떻게 해야 많은 청중이 듣게 하느냐까지, 다 생각해야 되거든요.

선생님이 이끄셨던 합창단은 모두 세계에서 인정을 받았지요.

너무나 감사한 일이고, 좋은 사람들을 만난 제 복이기도 합니다.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은 세계 순회 공연을 여러 번 했고요, 대우합창단은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합창대회에서 깜짝 놀랄 만한 공연을 해서 외국 지휘자들이 내 앞에 쭉 서서는 사인해 달라고 했었죠. 또 인천시립합창단이 작년 ACDA(미국합창지휘자연합회)에서 주최하는 초청 공연에 갔을 때도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어요. 그럴 때 정말 보람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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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립합창단의 공연은 경이로웠으며 새로운 공연 기준을 보여주었다.”
– 제프리 맥코이, ACDA 총재.

“첫 곡부터 기립 박수가 나온 합창단은 인천시립뿐이다.”
– 브렌트 벨웨크, ACDA 운영위원.

지난해 3월 미국 오클라호마에서는 ACDA가 세계적인 합창단 네 팀만을 초청한 공연이 있었다. ACDA는 50년 역사를 지닌, 전 세계 합창인들의 꿈의 무대. 그곳에 온 미국의 내로라하는 지휘자 6천여 명은 심금을 울리는 인천시립합창단의 공연에 감동해 마지않았다. 예일대 음대 교수 사이먼 캐링톤은 “인천시립합창단 공연 봤어?”라는 말이 한동안 인사였다고 후일담을 전했을 정도. 인천시립합창단의 전임 작곡가 우효원씨가 편곡하고 창작한,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깊이 있는 곡들은 ‘윤학원 지휘’에 맞춰 아름다운 하모니와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완벽한 공연으로 감탄을 자아낸 것이다.
윤학원 선생의 지휘도 화제가 되었다. 저명한 작곡가 폴 카레이는 이렇게 평했다. “그는 작은 제스처로도 원하는 소리를 창조함으로써 모든 지휘자들에게 큰 교육이 되었고 모두를 강타하며 마음을 흔들었다. 그들이 들려준 매우 재미있는 공연 덕에 우리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다. 내가 들은 것 중 최고의 합창이다.”
공연 후 미국의 지휘자들은 한동안 ‘윤학원’을 연호했다. 평생을 합창에 바쳐온 백발의 노장, 최고의 합창을 선물해 준 한국의 지휘자에게 경외와 존경을 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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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회어린이합창단 34년, 대우합창단 5년, 인천시립합창단 15년째…. 그리고 악보와 지휘봉. 윤학원 선생은 평생을 합창 지휘자로 헌신했다.

어릴 때부터 지휘자가 꿈이었나요?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때는 학교 전체에 손풍금 하나가 다였어요. 그걸 칠 줄 아시는 여선생님도 딱 한 분 계셨는데, 제 노래를 들어보시더니, 저를 반마다 데리고 다니시며 시범 창을 시키셨어요. 그때부터 내가 노래를 잘하는구나, 나는 음악가야, 생각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화학자가 되길 바라셨지만 저는 공고에 들어가서도 밴드부를 했죠. 색소폰을 불다가 상급생이 되면서 지휘를 하기 시작했고, 대학을 작곡과에 들어갔는데, 3학년 때 연대기독학생합창단 지휘를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어요.

1971년, 제일 먼저 합창에 안무를 넣어 화제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는데 다 노래를 하면서 움직이더라구요. 그렇게 움직이는 노래를 보다가 그냥 서서 하는 노래를 보면 안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 민요 같은 건 본격적으로 안무를 짜기도 했고요. 그때만 해도 파격적인 시도였죠.

전임 작곡가 제도를 시작하셔서 한국의 음악을 세계에 알리셨지요.

언젠가 외국에 나가서 연주를 하는데 현지인들 말이 바흐나 모차르트 음악은 자기네 음악이니까 너희가 아무리 잘해도 우리보다 못한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인천시립합창단 지휘자가 되면서 인천시에 전임 작곡가 제도를 요구했지요. 처음엔 참 어려웠어요. 한국에서 합창을 전문으로 작곡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함께 의논하면서 지금까지 개발해 나가고 있는데, 그게 적중했어요. 세계 대회에 나갈 때마다 외국인들이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우리 곡에 기립 박수를 터뜨렸어요. 너무 새롭고 깊이가 있다고.

우리나라에서는 합창단이 무대에 설 기회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합창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많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깝죠.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합창단이 1만5천~2만 개가 있거든요. 근데 우리나라는 4~5백 개밖에 없어요. 그 원인이 어려서부터 점수, 입시 위주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음악, 특히 합창은 부모도 선생님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각 학교에서 합창이 활성화되고, 대회도 많이 열려야 해요. 마음을 합해 다른 사람과 같이 하나의 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아이들 인성 교육에 아주 중요한 거예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을 말씀해주세요.

우리나라에 합창단이 한 1만 개 생겼으면 좋겠어요. 동마다 마을마다 합창단이 있어서, 엄마가 합창을 하고, 엄마는 아이에게 하나가 되는 마음을 가르쳐주고…. 그런 날이 곧 오겠지요.(웃음)


 

윤학원 지휘자는 요즘 정기 연주회와 세계합창박람회 공연 준비로 여념이 없다 했다. 프랑스 세계합창박람회는 주최 측의 심사로 12팀이 뽑혔고, 아시아에서는 인천시립합창단이 유일하다고 한다. 한국 합창과 한국 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쳐온 사람. 그는 이미 한국 합창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거장이었다. 그럼에도 “훗날 후배들에게 ‘윤학원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갔던 지휘자’였다고 기억되고 싶고, 그렇게 된다면 영광이겠노라”고 겸허하게 말했다.
언젠가 그의 손짓에, 그의 눈짓에 하나가 되는 합창을 꼭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백발의 노장이 문밖까지 배웅을 해주며 말했다.
“합창이 재밌습니다. 공연하는 거 보러 꼭 오세요. 허허.”
윤학원4

“각자의 다른 모습, 다른 생각, 다른 감정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게 합창의 매력입니다.”

지휘자 윤학원님은 1938년 인천에서 출생, 연세대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고 미국 로웰주립대 대학원 수료, 미국 쉐퍼드대학과 미드웨스트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평생을 합창 음악에 헌신해온 그는 세계적인 지휘자로서 한국 음악을 세계에 알려왔습니다. 현재 윤학원코랄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중앙대 음대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합창경연대회 최우수상(1978), 옥조근정훈장(2004)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10. 11. November 월간마음수련

꽃보다 아름다운 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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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사랑이 되게 하는 향기로운 사람

세상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한 상처 입은 것들조차도 스스로 아름다워질 때가 있다.
많은 희망들 속에서 서글픈 눈물이 그러하듯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깨달음이
한 번쯤은 세상의 꽃들을 사랑으로 바라볼 때 한 번 한 번쯤… 하면서
스스로의 고귀함이 모두의 고귀함으로 가녀린 눈물도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 꽃이기에…
生字之意 榮華可期(생자지의 영화가기), 생의 뜻은 살아 있음이니 영화로움을 기약하게 된다.

2010년 오순환 작가 작업노트 중에서

그림5_꽃

오순환 작. <꽃>
캔버스에 아크릴.
92x72cm. 1996.


 

상대를 사장님으로 모시는 사장님, 우리 아버지!

국지은 / 27세. 서울시 구로구

아버지! 아버지께 편지를 쓰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매해 기념일 때마다 써드리곤 했는데 명상을 시작하고 나서는 처음이네요.
대학생 때 어머니의 소개로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명상하면서 깨달은 지혜와 삶의 태도를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은 적었던 것 같아요. 중요한 건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라 하는데, 막상 생활 속에서 부딪칠 때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러한 삶을 직접 보여주는 분이 아주 가까이 계셨어요. 바로 아버지셨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 사무실을 이사하던 날이었어요. 막 비가 온 뒤라 습도는 높은 데다가 바람 한 점 없는 전형적인 여름 땡볕, 조금만 움직여도 짜증이 후끈 솟아오르던 날씨에, 새로 옮기는 사무실은 예전보다 비좁았고, 집안엔 무거운 가구를 선뜻 옮겨줄 듬직한 아들 하나 없었죠. 결국 아버지가 용달차 아저씨의 도움을 조금 받아서 짐들을 직접 옮겨야 했어요.
그날 저는 짜증이 앞서고 있었어요. 뻔히 지키고 있는데도 건물을 가로막으며 밀고 들어오는 차들에 ‘비켜 달라!’ 짜증 섞인 말투로 툭툭 던지게 되고 사람들이 뭘 파는 곳이냐, 사업한 지 얼마나 되었냐, 사장님은 어떤 분이냐, 시시콜콜 물어보면 ‘그만 좀 참견하지!’ 싶어 뚱하니 앉아 있었죠.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어요. 이 짐 저 짐 옮기면서 용달차 아저씨와 몸이 부딪치기도 하고 말이 꼬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저씨에게 웃으면서 상냥하게 이야기하시고 누가 들어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듬뿍 묻어나는 따뜻한 말을 건네고. 아버지는 용달차 아저씨를 마치 사장님 대하듯 하셨어요.
놀라웠던 건 그 아저씨의 모습이었어요. 처음엔 굉장히 무뚝뚝하고 거치셨던 분이, 아버지와 일하는 동안 조금씩 태도가 바뀌시더니 나중에는 꼭 아버지처럼 되시는 거예요. 짜증 한 번 안 내시고, 제가 도와드리면 ‘무겁지 않냐’며 오히려 자상하게 되물어 보시고. 짐을 거의 다 내렸을 무렵 아저씨가 엄마와 저에게 해주신 말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일이 참 잘되실 겁니다. 사장님이 이렇게 좋으셔서.”
아버지, 명상을 하면 깨닫게 되잖아요. 상대가 곧 나이므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곧 나를 대하는 것과 같다고. 돌이켜 보면 저는 머리로만 알았지, 생활 속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말 마음으로 상대방을 존중하셨고, 그 마음은 아저씨께 전해지고 결국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이었어요.
아버지, 저는 정말 아버지를 본받고 싶습니다. 아버지처럼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대할 때나 진심으로 배려할 줄 아는 마음 넓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열심히 마음도 비우고 노력할게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전 아버지 딸이니까요~^^
– 아버지의 딸이라서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한, 큰딸 지은이 올림.

그림6_꽃

오순환 작. <민불(民佛)>
캔버스에 아크릴.
90x65cm. 1994.


 

평범한 언니의 신기한 능력 ‘진심’

여경진 / 39세. 변호사. 서울시 서대문구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투닥투닥 싸우기를 잘했다. 나하고 약 두 살이 못 되는 터울을 가진 아란 언니-언니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중학생이 되고 한참 후일 정도로 맞먹고 지냈다-여동생 선경이, 남동생 경구. 그러니까 나는 3녀 1남의 둘째였다.
언니의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날이었다. 엄마랑 아빠 모두 첫딸 운동회니까 장하고 신기한 마음으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달리기 순서가 되었다. 준비! 땅! 하고 호각이 울려 다른 아이들은 다 운동장 트랙을 돌며 뛰어나가는데 언니가 순간 운동장 바깥쪽으로 쭉 뛰어가더니, 담 안쪽으로 나 있는 느티나무 주변을 따라 뛰는 것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선생님이 운동장 트랙 안으로 돌면 안 되고 바깥쪽을 돌라고 해서 학교 가장자리를 뛰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우리 언니는 좀 모자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순하고 말도 잘 못하고 무슨 놀이를 해도 항상 먼저 죽고 빠릿빠릿하지 못했던 언니는 든든하다기보다 내가 챙겨줘야 할 동생 같았다.
엄마는 애들이 많으니 한 명이라도 빨리 학교에 가면 손을 덜까 해서 거의 여섯 살에 언니를 학교에 보냈다. 자기만 한 큰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간 언니는 학업 진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어 받아쓰기를 해도 십 점, 이십 점, 어떤 때는 빵점. 그래서 나머지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통지를 받으면 아빠도 “갸는 그냥 왔다 갔다만 해도 되니까 공부 더 시키지 마라”고 하셨고 언니는 그렇게 학교를 일삼아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만날 빵점 답안지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던 언니는 5학년, 6학년에 올라가면서 점점 성적이 올라가더니 졸업할 때는 조합장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반항을 하고 온갖 말썽을 다 부렸던 나와는 달리 집안에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마저 희미했던 언니는 점차로 학교 공부에 탄력이 붙으면서 대학교, 대학원, 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천문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 학술회의에도 참가하는, 그야말로 우리 집안에서 가장 빵빵하게 잘나가는 자식이 되었다. 나 또한, 누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두말없이 ‘우리 친언니’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언니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거나 나를 곤궁에서 구해주었거나 잊지 못할 큰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냐고 물으면 딱히 그럴 만한 사건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 앞에서 절대로 잇속을 못 챙기고, 형제들한테 모든 걸 다 해주어야 직성이 풀리고, 불의를 보면 대책 없이 정의의 사도가 되고자 해 우리를 당황시키고, 장녀로서 불끈 책임감을 느끼며 혼자서 집안의 모든 걱정을 지고, 음… 해결은 잘 못하는^^ 지금 그대로의 언니가 너무 좋다.
가끔 그냥 평범한 사람인 언니가 왜 이렇게 좋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 항상 진심이 느껴지기에 그런 것 같다. 언니는 크고 작은 모든 행동에 꾸밈이 없다. 현란한 잔머리가 돌아가는 세상에서 알아도 모른 척해주고 본인이 힘들어도 손해 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남에게 모진 마음을 먹지 못한다. 옆에 있으면 그냥 편안하다. 며칠을 끙끙 앓던 고민도 언니에게 털어놓으면 그 순간 힘든 마음이 사라지니, 언니에겐 신기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언니가 참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상대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림7_꽃

오순환 작. <민불(民佛)>
캔버스에 아크릴.
193x130cm. 2000.


 

영원한 나의 소울 메이트 지은 엄마 수정씨!

현연실 / 53세. 회사원. 창원시

지은 엄마! 수정씨.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가슴이 먹먹해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네요.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나의 둘째 아이 고은이가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였죠. 첫 짝꿍 친구가 지은이였는데 그때 애들이 다섯 살이었으니, 벌써 14년이 흘렀네요.
유치원 3년을 다니면서 아이들도 정이 들었지만 어느새 엄마들까지 친구가 되어 틈날 때마다 만나고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많은 추억을 만들곤 했었지요. 하지만 얼마 후 저에게는 IMF 위기가 쓰나미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휩쓸고 갔어요. 허탈하게 맥 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 참 모질고 모진 시간이 닥치고 있었죠.
가진 것을 한순간에 다 잃고 내 삶의 터전이었던 곳을 떠나서 어쩔 수 없이 시댁으로 들어가게 됐을 땐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목 놓아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큰아이 결이는 한창 예민한 중2, 막내 고은이는 초등학교 3학년.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을 거예요. 하루 종일 일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면 어린 딸 고은이는 긴 머리를 혼자 감고 채 말리지도 못하고 쓰러져 자고 있었어요. 그때 고은이의 머릿속에 생긴 상처와 딱지들이 아직도 제 마음에 흔적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아이가 지쳐갈 무렵 지은 엄마가 전화를 했어요. 고은이를 집으로 보내달라구, 지은이랑 며칠 보내게 하고 싶다구요. 처음엔 망설였어요. 너무나 다른 환경 때문에 고은이가 혹여 주눅들까 봐 우리의 처지를 비관할까 봐요. 엄마의 못난 마음은 아이를 잡고 싶었지만 고은이는 지은이 집에 간다니까 너무 좋아 잠까지 설치더라구요.
며칠을 자고 왔었죠. 올 때 가방에는 예쁜 속옷도 들어 있었고 책도 들어 있었고 수영복까지 새로 사서 넣어주었잖아요. 아직까지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 감사해서 가방을 열어 보고 남몰래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죠. 방학이면 내 자식도 귀찮을 텐데 지은 엄마는 한 번도 그런 내색 안 했어요. 바닷가도 데리고 가고 놀이동산도 데리고 다니면서 고은이의 황량한 유년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워주었어요.
고은이는 지은이네서 며칠을 보내고 오면 꽃처럼 환해진 얼굴로 엄마 엄마 호들갑을 떨면서 즐거웠던 시간들을 자랑하곤 했답니다. 여름 겨울 방학에 지은 엄마가 없었다면 고은이의 텅 빈 마음속에 무엇을 채워줄 수 있었겠어요. 그런 수정씨의 따뜻한 마음에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잘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답니다.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정말 인생의 선배 같고 등불 같은 존재였고 영원히 그런 사람으로 남아 있을 지은 엄마. 내 인생의 구원투수처럼 힘들 때면 홀연히 나타나 아무런 대가 없이 수렁의 늪에서 나를 건져주었던 거, 지은 엄마는 모르죠? 모를 거예요.
내가 밑바닥까지 가지 않았다면, 예전처럼 잘 먹고 잘살면서 오만하고 건방진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지은 엄마 수정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의 인생은 절망의 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비록 지금도 해결해야 할 일이 산같이 많고 아직 반듯하게 서지 못했지만 결코 좌절할 수 없는 건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고 격려해주는 인생의 소울 메이트, 지은 엄마 수정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정보다 맑고 고운 지은 엄마!!!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우리 죽을 때까지 영원한 소울 메이트로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늙어가요.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

2010년 11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와 함께한 작가는 오순환님입니다. 1988년 경성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그동안 16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열었으며, 아련한 여운이 남는 시 한 편을 보는 듯한 그림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 꽃”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작품엔 유난히 꽃과 함께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2010. 11. November 월간마음수련

꽃보다 아름다운 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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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사랑이 되게 하는 향기로운 사람

꽃처럼 어여쁜 사람, 곁에 두고 사시는지요.
힘들고 고단한 세상을 그래도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어둠이 내려도 별처럼 환하고 따뜻하게 마음을 밝혀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우리네 삶을 꽃피우게 하고는 흔적 없이 머물러주는 이들 덕에 꽃피운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나 봅니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그런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 사랑이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그들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손글씨_ 장사익

그림1_꽃

오순환 작. <꽃>
캔버스에 아크릴.
130x130cm. 2010.


 

사람에게 사람이란 무엇인가

김형민 / SBS PD

방송국 PD로서 기구한 팔자와 사연을 지닌 분들을 일삼아 만나는 동안 어지간히 덤덤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새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구해 달라는 마흔의 딸과 함께 충청도로 내려가는 봉고차 안에서 나는 글썽거리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차단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그녀의 어조로 옮겨 본다.

“지금 만나러 가는 엄마는 사실 저 스무 살 때까지 만나지 못했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유 없이 집을 나가시고 엄마도 결국 저희를 버리셨거든요. 고아 아닌 고아가 됐죠. 초등학교 때부터 남의 집살이하며 밥하고 아기 보고 그랬죠.
그렇게 지내다가 아버지가 계신다는 제주도에 가게 됐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폭력적인 데다 일체의 돈을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학생 때는 아버지 친구분이 하는 레스토랑 곁방에서 잠을 자고 청소를 해주면서 먹고살았지요. 중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부산에 있는 산업체 부설 학교로 갔어요. 공장 다니면서 졸업장만은 받겠다고 악착같이 공부를 했어요.
서울에서 일을 하다가 남편을 만났어요.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사람도 참 순하고, 그래서 알콩달콩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이혼했냐구요? 남편이 경마에 미친 거죠.
엄마는 혼자 사시면서 장사를 하시다가 지금 새아버지를 만났어요. 엄마가 생활력이 좋으셔서 식당도 서너 개를 운영하셨대요. 그런데 새아버지가 다 깽판을 쳤어요. 술만 안 먹으면 그런 샌님이 없으신데 술만 먹었다 하면 괴물이 되는 거예요.
저 복도 지지리도 없는 여자죠? 부모 복 없는 데다 남편 복까지 없고, 내 한 몸 지탱하기도 어려운데 주변엔 도와줘야 될 사람밖에 없어요.
그래도 PD님, 저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에요. 무슨 말이냐구요? 호호~ 눈 둥그레지시네요. 제주도에서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세요. 레스토랑 곁방에서 생활하다 보니 신발엔 구멍이 나고 옷에선 늘 냄새가 나고 그랬죠. 선생님도 그 사정을 아시고 제게 늘 잘해주셨지요. 하루는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심부름을 시키시더군요. 시장에 가서 어떤 가게들에 뭘 전해달라세요. 종종걸음으로 시장에 갔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처음 간 데는 신발 가게였는데 제가 선생님 물건을 전해주자마자 가게 주인이 ‘아, 네가 걔구나?’ 그러더니 신발을 고르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이미 돈을 맡기고 가셨대요. 모자라면 나중에 더 치르고, 남으면 제게 주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얼떨결에 신발 하나를 신고 왔는데 다음 심부름할 가게 간판을 보니 속옷 가게였어요. 거기서도 사장님이 똑같이 말씀하시더군요. 선생님이 그랬대요. ‘마음 같아선 같이 와서 사주고 싶은데 다 큰 여자애 속옷을 골라 줄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러니 좀 이쁜 걸로 골라주세요.’ 그다음에는 옷 가게였어요. 심부름을 끝내자 저는 신데렐라가 된 것 같았죠. 미울 정도로 고마웠어요. 어떻게 사양하지도 못하게 상황을 꾸며 놓으셨잖아요. 사람이 기쁘고 고마워도 눈물이 솟구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서럽고 슬픈 것에만 눈물이 쓰이는 건 아니라는 걸.
산업체 부설 학교에 다닐 때예요. 주경야독이라는 말이 있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 책 편다는 거 참 힘들더군요. 힘겨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밤에 웬 남자가 찾아왔대요. 놀라서 나가 보니 선생님이셨어요. 서울에서 무슨 회의가 있어서 나오셨다가 ‘뭍에 나온 김에’ 부산에 들르셨다는 거예요. 뭍에 나온 김에…라니요. 서울 부산이 어딘데. 제가 잘 살고 있나 궁금하셨던 거지요. 선생님은 금세 밤길을 재촉하며 떠나셨어요. 그 뒷모습이 뭐랄까 제게는 큰 산 같았어요. 거인 같았어요.
졸업장을 타자마자 바로 제주도로 달려갔죠. 졸업장을 보여 드리니까 선생님이 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하시는 말씀이, ‘고맙다. 이렇게 커줘서. 나는 네가 이렇게 이쁘게 클 줄 알았다’ 하시는데 저 어린애같이 울었어요. 엉엉 울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됐습니다, 멋있는 멘트까지 생각하고 갔는데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선생님 댁에 가니까 사모님이 사법고시 패스한 사람한테도 차려줄 것 같지 않은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제 생애 처음이자 최고의 만찬이었지요.
지금도 그 상상을 하면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킥킥 웃게 돼요. 생기기는 산적 두목급으로 생긴 선생님이 돈 들고 여자 속옷 가게, 양품점, 구두 가게 돌아다니면서 이러이러한 애가 올 텐데 알아서 좀 잘 골라주시라고 사정하고 다니시는 모습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졸업장을 드렸을 때 그 험상궂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 뚝뚝 떨어뜨리던 그 모습도 그렇구요. 아무리 팍팍한 상황이어도 한순간 그걸 제압해 버릴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거, 그런 흐뭇한 추억이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다는 거, 그것만 해도 저는 행복한 사람 아닐까요. 아무리 팔자가 기구해도 말이에요.”

이 얘기를 하면서 그녀는 일곱 번도 더 굵은 눈물을 보였다. 슬픈 얘기를 하며 통절하게 울었고 기쁜 추억에 들떠서 울었다. 그 눈물 앞에서 내가 든 생각은 한 가지 질문이었다. 사람에게 사람이란 무엇인가.

그림2_민불

오순환 작. <민불(民佛)>
캔버스에 아크릴.
116x116cm. 2001.


 

천사표 구멍가게 아주머니

김종필 / 65세. 대학 강사. 경기도 용인시

오전엔 강의실로, 오후엔 ROTC 훈련으로, 저녁엔 아르바이트로…. 이것이 1960년대 말 나의 대학 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정 무렵 파김치가 되어 생활관으로 돌아와서는 식당을 뒤져 겨우 저녁 한 끼를 해결하고서야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때엔 아무리 뒤져도 먹을 것이 없었다.
이럴 때면 뒷동네 골목에 있는 허름한 초가집 구멍가게에서 라면-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삼양라면이 나왔을 때다-으로 때우곤 했다. “라면 좀 끓여주세요” 하면, 졸고 있던 젊은 대구집 아주머니는 반가이 맞이하면서 라면에 식은 밥을 듬뿍 넣고 여기에 김치까지 내놓아 허기를 면하게 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아주머니는 끓여줄 땐 25원 하는 라면값을 15원만 받았다. 학비에 생활비에 심신이 지치고 한 푼이 아쉬운 학생에 대한 배려였으니,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이뿐만 아니었다. 이 동네에는 지방에서 올라와 사글세를 살면서 공장으로 출근하는 여공들이 많았는데, 아주머니는 치부책에 여공들 스스로 상품을 기록만 하고 생필품을 외상으로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그러다가 외상값을 갚지 않고 살짝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여공도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몇 푼 안 되는 돈을 못 갚고 이사 갈 때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았겠나” 하면 그뿐이었다. 4년 동안 정이 들었다며 졸업식 때에는 꽃다발을 한 다발 안고 졸업식장에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셨던 아주머니. 천사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이런 사람이 하늘 복을 듬뿍 받고 자자손손 행복하게 살아야 마땅할 터인데, 아주머니 큰아들이 사업을 한답시고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집을 경매당하고 옥탑방에 셋방으로 전전하던 적도 있었으니 세상 참으로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하며 마음속으로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생각일 뿐. 그런 때에도 어쩌다 찾아가면, 멀리서 온 자식 대하듯 반가이 맞아주고 늘 환하게 웃으며 생활하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하늘은 마음이 큰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만이 느끼고 있는 마음의 세계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것이다.
지금은 꼬부랑 할머니가 됐을 구멍가게 대구집 아주머니. 너나없이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 훈훈하고 따뜻하게 기억될 수 있도록 추억을 남겨주고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신 아주머니는 내 인생의 꽃보다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림3_꽃

오순환 작. <꽃>
캔버스에 아크릴.
112x162cm. 2000.


 

천사표 구멍가게 아주머니

김도연 / 35세. 직장인. 충남 논산시

“처음 봤을 때 언니의 밝은 모습이 참 좋았어요.”
나는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아이는 나의 첫인상은 이러이러했다며 늘 좋게 이야기해준다. 약 6년 전, 이곳 충남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만난 그 아이는 똘망똘망 맑은 눈망울에 조금은 수줍음이 많은, 나보다 네 살 어린 동생이었다.
같은 파트에서 일을 하고, 같은 기숙사를 쓰는 덕에 우리는 거의 24시간 붙어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둘 다 성격도, 일하는 모습도 정반대였기에 처음에는 부딪힘도 많았다. 그 아이의 수줍은 성격과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모습에 난 답답해했다. 한번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든 말든 큰소리로 싸운 적도 있었다. 그때는 일에 지치고 사람들 때문에 참 힘들다고 느꼈다.
그렇게 거의 한 해가 지나갈 때쯤이었다. 기침으로 병원을 찾게 되었고 폐결핵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 모습에 힘들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답답한 게 아니라 내가 그만큼 예민했었다는 것을. 오히려 그 아이는 말없이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간 그 아이의 노력이 어떠했는지는 훗날 다른 동료들의 입을 통해서도 수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가시 같은 말들에 상처받은 동료들에게, 그래서 나에 대해 불평하는 동료들에게, 그 아이가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조심스럽게 내 편을 들어주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에게 왜 그리 예민하냐고, 왜 그리 사람들을 힘들게 하냐고, 한 번도 묻지도 않았고 탓하지도 않았다. 후에 내가 결핵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그 아이는 도리어 나에게 잘 보살펴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 나는 뭐든 잘 외우지 못하고 잘 잊어버린다. 그런 나를 그 아이는 알람처럼 챙겨주었다. 폐결핵에 걸려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결핵은 약을 먹다 안 먹다 하면 내성이 생겨서 2차 약을 먹어야 하고 2차 약마저 내성이 생겨버리면 치료하기 힘들다. 그 이야기를 딱 한 번 했을 뿐인데 6개월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의 약을 챙겨주었다. 아파 누워 있으면 밥을 떠다주고 밤새 일을 해야 하는 날이면 같이 밤을 새워주고, 내가 힘들어할 때면 함께 밤하늘의 별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주었다.
6년이 지나 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이제 서로 다른 파트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 아이는 나의 힘이 되어주고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아이. 끊임없이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주던 그 아이 덕분에 나는 이제 세상 모두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키워가는 것 같다.
주영아! ㅋㅋ. 이름 밝혔다고 펄쩍 뛰며 민망해할 네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나는 꼭 말하고 싶다. 차주영,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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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환 작. <민불(民佛)>
캔버스에 아크릴.
193x130cm. 2000.


2010. 11. November 월간마음수련

보기만 해도 정신이 번쩍, 만데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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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데빌라는 하양, 노랑, 분홍 등 여러 가지 색깔이 있는데 빨간색이 가장 흔하다. 만데빌라처럼 깊고 진한 느낌의 빨간색은 보기 드물다. 에너지를 샘솟게 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빛깔이다. 여름 잠깐을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꽃을 보여주는 만데빌라는 길게 줄기를 뻗어 덩굴을 이루며 자란다. 키가 큰 화분에 심어 늘어지는 모습을 볼 수도 있고 흙에 지지대를 꽂아 줄기가 타고 올라가게 할 수도 있다. 꽃의 색깔이 강해서 단순한 모양을 한 연한 색상의 화분에 심어야 꽃이 돋보인다.
 
잘 키우려면… 1 햇빛 해가 잘 드는 곳에 둔다. 강한 햇빛일수록 좋다. 2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말랐을 때 한 번에 흠뻑 준다. 3 번식 꺾꽂이(삽목)로 한다. 성공률이 높은 편. 4 영양 일년 내내 꽃을 피우기 때문에 영양분이 많이 필요하다. * 고체형 비료를 화분의 흙 위에 놓아두면 물을 줄 때마다 조금씩 녹으면서 뿌리 속으로 영양분이 공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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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

감동과 희망 준 젊은이들의 꿈과 도전_슈퍼스타K 허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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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민 오디션’이라 불리는 ‘슈퍼스타K’. 최종 결선에서 대국민 문자 투표 결과 2배 가까이 차이가 나면서 허각의 이름이 불려질 때, 가슴을 졸이며 바라본 많은 시청자들이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노래를 잘한다는 것 외에는 그저 길을 가다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젊은이들이 모여 벌인 오디션이었는데, 결말은 한 편의 해피엔딩 드라마를 본 것처럼 감동적이었습니다.
최현희 문화칼럼니스트 , 사진 제공 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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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이겨낸 사연들, 인간성도 실력이다

준결승을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은 외모와 노래 실력을 겸비한 존박의 우승을 점쳤지요.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노래 실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허각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듯했습니다. 외모도 출중한 편이 아니고 나이도 많은 편인 허각의 강점은 뛰어난 가창력, 그리고 중요한 또 하나, 따듯한 마음과 진실함입니다. 더욱이 어려운 성장기를 보낸 그이기에 허각씨의 우승은 시청자의 염원이 되었나 봅니다.
Top 11에 올라온 참가자들 대부분 부유한 환경인 경우는 없어 보였습니다. 평범한 줄 알았던 우리 젊은이들에게 어찌나 그렇게 저마다 사연들이 깊은지요. 그런데 그 사연의 공통점은 모두 ‘노래’로 자신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꿈을 키워왔다는 점에서 참 대견했습니다.
특히 열네 살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는 허각의 이야기는 단연 관심을 모았습니다. 어려서 부모가 헤어지고, 아버지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던 그는 어려운 형편에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적도 없고, 다른 참가자들처럼 악기 연주도 못합니다. 동네 쇼핑몰 대회에서 처음으로 노래 실력을 인정받은 후 쌍둥이 형과 함께 각종 동네 대회에서 상을 휩쓸다가, 행사를 다니며 노래를 익혀왔다지요. 방황의 시절, 중학교를 중퇴했다 뒤늦게 복학해 졸업했고 당연히 아버지는 아들이 노래하는 것을 많이 걱정하고 반대했다 합니다.
올해 26세의 환풍기 수리공 허각은 몇 년 전 쌍둥이 형과, 유재석씨가 진행하는 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헤어진 어머니를 만났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새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그 가족들은 쌍둥이 형제의 존재를 몰라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를 이해한다는 착한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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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박의 어머니, “허각이 일등이면 더 좋은 일”

합숙 생활과 미션 수행이 방영될 때 참가자들이 떨어져 있던 부모와 해후하는 장면도 나오고, 또 탈락한 자식을 격려하고 안아주는 부모님 모습도 나옵니다.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을 텐데, 큰 품으로 남의 자식까지 껴안은 그 든든한 부모님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는 참가자들에게 마음이 쓰인 것도 인지상정이겠지요. 특히 허각에겐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형편상 아들을 응원하러 오지 못했던 존박의 어머니에게 비행기 티켓을 선사한 이는 뜻밖에도, 처음부터 존박을 친동생처럼 챙겨온 허각이었습니다. 미션에서 우승한 그에게 소원을 묻자 존박의 어머니에게 드릴 비행기 표를 사달라고 했답니다.
허각의 배려로 존박의 어머니가 드디어 합숙소로 아들을 찾아와 눈물로 포옹을 할 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허각을 생각해 마음 아팠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자상하고 성실한 아버지와 우애 깊은 쌍둥이 형이 있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는 컸을 겁니다. 그의 노래가 간절한 이유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지요.
결승 무대에서 라이벌이 된 존박의 어머니도 허각을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마음 편안하게 해라. 네가 일등하면 잘돼서 좋은 일이고, 허각이 일등을 하면 더 좋은 일이다. 힘들게 자랐는데 얼마나 좋은 일이냐’라는 내용의 편지가 전해질 때 참 공감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런 개인의 사연들이 지나치게 밝혀진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래서 더 공감했던 건 아닐까요. 어려운 환경을 잘 극복해낸 젊은이라면, 사람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았겠지요. 그리고 그 어려움을 ‘노래’라는 긍정적인 정서로 풀어낼 수 있는 젊은이라면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진심이 담길 겁니다.
음악은 귀로 듣지만 그것만 갖고 감동이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노력과 거기서 묻어나는 따스함이 더해질 때 우리는 노래를 가슴으로 듣고 노래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당연히 인간성도 실력인 겁니다. 언젠가부터 외형과 배경, 성과주의를 당연한 듯 생각해온 우리에게 인간성이 왜 가장 중요한 실력인지 보여준 것이지요.
가수 윤종신씨는 최종 심사 평에서 “허각씨는 정말 간절함만큼은 언제나 일등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이승철씨의 심사 평도 기억에 남습니다.
“허각씨는 이 땅에 많은 노래를 사랑하는 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노래가 많이 인스턴트화되고 있는데, 앨범 나오면 노래 연습보다는 복근 운동부터 하는 가수들이 많죠. 허각씨는 노래로 승부하는 가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의 힘들고 어려웠던 환경보다는 훌륭한 가수로 성장해가는 그 모습을 지켜봐주고 싶습니다. 참가한 젊은이들 모두, 그렇게 꿈이 자신을 더욱 성장시키는, 행복한 가수가 되길 바랍니다.


2010. 12. DECEMBER 월간마음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