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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마저 내 것이 아님을 알 때 감사함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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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 30일, 스물셋의 여대생이었던 저는 여느 때처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오빠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음주운전자가 낸 7중 추돌사고로 전신 55퍼센트에 3도의 중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하고,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으며 중환자실로 실려 간 때가 벌써 10년 전입니다.

그동안 30번이 넘는 고통스런 수술과 재활 치료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회복실에서 처음 드는 생각은 ‘이 짓을 대체 몇 번이나 더 해야 할까?’라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죽기 전에는 끝이 나려나 싶습니다. 그럴 때면 무서운 절망들이 스멀스멀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 찾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희망의 틈을 찾는 것입니다.
엄마는 “하루 한 가지씩 감사할 거리를 찾아”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우리가 사람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길은 ‘감사 찾기’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원망하고 불평할 것밖에 없어 보였는데, 신기하게도 감사할 것을 찾으니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제 발로 걸어서 화장실 갔던 날, 눈물겹게 감사했습니다. 처음 왼손으로 숟가락을 잡고 제 입에 밥을 넣을 수 있었던 날에도, 손에 피가 나도록 안간힘을 써도 열지 못했는데, 처음 문고리 잡고 열었던 날엔 문 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습니다. 걸어서 계단 몇 층을 올라가면 그날은 그것에 감사하고, 그런 일도 없는 날엔 살아 있어서 가족들과 눈 맞추고, 목소리 들을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내 힘으로 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보고 나니, 내가 가진 것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내 몸’마저도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고, 내게 주어진 것 그리고 남겨진 모든 것을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엔 입술로 시작한 감사가 내 귀를 통해 다시 나의 마음으로 들어와 그 감사는 점점 진심 어린 고백이 되었습니다. 감사는 그동안 진통제가 줄 수 없었던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감사는 미미하지만 어제보다 좋아진 오늘을 발견할 눈을 뜨게 해주었고, 또 오늘보다 좋아질 내일을 소망할 힘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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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저자의 허락을 받아,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문학동네)와 기존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사진 제공 문 학 동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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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고가 났을 때 모두들 저보고 인생이 끝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인생의 끝, 바닥이라는 그곳에서, 저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피부도 없는 몸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서 정말 ‘꿈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나 같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요.
제가 다치고 나니까, 사회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전 얼굴이 없어졌을 뿐, 저 자신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완전 주변부로 떨어졌고, 그 상황을 겪으면서야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사는 장애인, 노인 분들, 부모님 없는 아이들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덜 들게끔, 나만의 삶이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졌습니다.
2002년 12월에 엄마와 함께 처음으로 미국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재활 상담 공부라는 미국으로의 유학길이 열리기 시작했고, 어느덧 석사 과정까지 무사히 마치고, 사회복지 박사 과정에 들어갑니다. 바닥에서 찾은 희망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는 저를 잃은 후, 진짜 ‘나’를 얻었습니다. 겉모습과 관계없이, 내가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이, 나는 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진리 아래 누구 때문에,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웃는 것뿐 아니라, 지독한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자유는 남들과 비교해 얻는 상대적인 행복이 아닌, 변하지 않는 것들에서 비롯된 절대적인 행복을 맛보게 해주었습니다.
누군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맛본 행복 때문입니다. 새 봄에 피어난 꽃의 향기를 맡고,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것을 이제 보게 되는 것. 무형이라서 손에 잡히진 않았지만 이제는 맛볼 수 있는 것. 이게 제가 발견한 행복입니다.

 

이지선님은 ‘한림화상재단’ ‘푸르메재단’ 등의 홍보 대사로 활동해왔으며, 저서로는 <지선아 사랑해> <오늘도 행복합니다>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가 있습니다. 2001년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졸업, 2008년 보스턴대 재활상담학 석사,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9월부터 UCLA 사회복지 박사 과정에 들어갑니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행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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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헤맸는데 알고 보니 그 행복이 내 마음 안에 있었다는 마테를링크의 동화는 평범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파랑새 증후군’이라는 말에 더 공감하는 듯합니다. 좀처럼 자신의 현재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입니다. 행복은 내 안에 있지만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나누어주는 것임을 깨닫기까지 ‘나’라는 고비를 숱하게 넘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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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특별하고 귀한 선물 하나를 받았다. 영화 속에 나오는 숲속의 통나무집 같은 곳에나 걸려 있을 법한 사슴 박제였다. 자신이 직접 뉴질랜드 북섬의 로토루아 산속에서 사냥한 야생 사슴의 머리 부분을 박제해 놓은 것이라 했다. 뿔이 머리 양옆으로 우아하게 솟아올라 있는 데다가 털 색깔 또한 엷은 갈색의 아주 멋진 사슴 박제였다.
걸어놓고 보니 거실 품격이 확 달라 보일 정도로 멋졌다. 그날 저녁 그 박제를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자정까지 넘겼다. 거실의 환한 불빛을 받아 사슴의 순하고 큰 눈망울들이 살아 있는 듯 반짝였고, 까만 코 또한 윤기가 흘렀다. 죽어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리 보아도 정말 살아 있는 진짜 같았다.
그러다가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죽은 애완견을 박제로 만들어 곁에 놓고 사는 사람도 있을까? 그런 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은 없겠지. 이미 세상 떠나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부모, 가족, 친지 등을 박제로 만들어 놓고 가보처럼 모시고 사는 사람들도 있을까? 세상천지에 그런 혐오스럽고 엽기적인 괴물은 절대 없겠지. 그런데… 가만있어 보자. 내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인연의 상相들. 언제나 내 기억 속에 진짜처럼 살아 있으면서 상주하고 있는 그 인연의 상들 또한 실은 박제들이 아니던가?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가 진짜 같지만 실은 하나같이 죽어 있는 박제들이다. 이렇게 기억 속의 상들이 모두 죽어 있는 박제들임을 시인하자, 그 이후부터는 명상할 때 그것들이 놀랍도록 쉽게 버려졌다. 마음으로 시인하니 믿음과 결의가 커지고, 믿음과 결의가 커진 만큼 잘 버려졌다.
며칠 후 문득 중국의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된 진시황제의 무덤 속 모습이 떠올랐다. 불로초를 구하지 못한 진시황제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근위병들이 자신을 호위해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죽자 그 시위군사들 모두를 실제의 모습 그대로 흙으로 복제하여 구워낸 다음 그의 무덤 속에 대열을 지어 세워 놓았다. 그는 몸은 비록 죽었더라도 영혼만큼은 살아서 그 깜깜한 무덤 속에서나마 자신이 살아온 것과 똑같은 삶의 연극을 영원히 되풀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에는 진시황제의 그런 무덤 속 사진을 보면서 엄청난 권력을 지녔던 그의 우매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욕심 말고는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수련 명상을 하면서 뜻밖에도 바로 내 안에 수천 년 전의 그런 진시황제가 있다는 것, 아니 그보다 수천 배 더 어리석은 내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내 삶 속의 모든 인연과 장소들을 실물 그대로 박제품과 복제품들로 만들어 내 안에 진열해 놓고 그 안에서 살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나의 어리석음은 진시황제와 하등 다를 바 없었으나, 나는 몸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그러한 짓을 하였으니, 진시황제와는 비할 수도 없는 어리석은 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진시황제의 무덤 속 같은 박제들만이 즐비한 마음의 세계를 계속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내가 만들어 놓은 상들을 진짜라고 믿으며 허송세월만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내려다보니 참으로 기막히게 불쌍하고 우매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명상하면서 그 마음의 짐들을 자꾸 내려놓았다. 그러자 마음세상은 점차 호수처럼 맑아지고 바깥세상은 점점 더 경이롭고 충만해 보였다. 생활하면서 부딪치는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경우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시비 판단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주위의 모든 인연들과 자연이 나와 마찬가지로, 또한 나와 함께, 우주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마다, 즉 정신을 차릴 때마다, 고향에 온 것 같은 하나 됨의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자유롭게 살려면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하고, 정신 차리고 살려면 마음 청소부터 해야 함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아침이면 등교하는 어린이처럼 우선 명상센터로 발길을 향한다. 가짜인 나를 청소해 버리기 위함이다.

정경현님은 1996년 뉴질랜드로 이민한 뒤 현지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쳐왔으며, 테니스 코치로 활동 중입니다.


임지호

요리연구가 산당 임지호 님은 1956년 경북 안동 생으로, 자연 재료로 특유의 멋과 맛을 선보이면서 해외에서도 다수의 한국 음식전을 열며 큰 호평을 받은 요리예술가입니다. 저서엔 <마음이 그릇이다, 천지가 밥이다>(샘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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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는 낸 만큼 어리석어지고 없애는 만큼 이익이다. 화가 없어지는 것이 바로 이익인 것이다. 나는 화가 나거나 말거나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단순하게 살려고 한다. 행복은 단순한 데 있고 그것은 곧 고요함이다.
내 마음도 그렇듯 고요하게 운영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잘 안되지만 노력하다 보면 몸에 배어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로워진다.
화장실 청소도 좋은 방법. 아내와 나는 우리가 운영하는 식당의 화장실 청소를 매일 한다. 이는 자기 마음을 닦는 것과 같다. 가장 더러운 것을 가장 성스러운 기도로써 닦는 것이다. 그러면 화가 쌓이지 않고 동시에 화장실을 이용하는 손님의 기분도 좋게 한다. 화장실을 쓰는 사람은 청소해준 사람의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젊었을 때는 열정이 강해서인지 우선 화가 먼저 났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오십이 넘으면서 더 겸허해지고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내가 마음을 닦아서 아주 멋진 인간이 되겠다’는 것보다는 한 땀 한 땀 기워 내는 바느질처럼 마음도 그렇게 하나하나 정리하고 주변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살고 싶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그렇게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일으켜주는 것이 행복의 비결인 것 같다.


이수나

연기자 이수나님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MBC 특채로 연기자가 된 뒤, MBC드라마 <전원일기> <안녕 프란체스카> 등에 출연했습니다. 30년 이상의 연륜에도 아직도 연기를 할 때면 긴장된다는 님은 늘 처음이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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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외도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마음을 안정시킬 곳을 찾다가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됐다. 처음엔 그 사람을 떠올리기만 해도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차츰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을 대하던 내 마음을 보게 된 것이다. 잘난 척했고 나보다 못하다며 하대하고, 나한테 열등감을 느끼게 하고…. 모두 내 잘못이었다. 남편을 떠올리며 잘못했다고 참회했다. 그러다 보니 미움도 화도 빠져나갔다. 몇 개월 후 다시 만난 남편과 참 편안했다.
재작년, 친한 동생에게 나로서는 큰 돈을 빌려주었다. 동생은 얼마 후 잠적을 해버렸다. 온갖 마음이 끓어올랐다. 나는 돈에 대한 집착과 동생에 대한 마음들을 버리고 또 버렸고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돈 욕심과 집착이 강했다. 돈을 빌려준 것도 이자를 많이 쳐준다는 말에, 돈을 더 벌고 싶은 욕심에 빌려준 것이다. 겉으로는 동생의 사정을 이해하는 척하며…. 마음으로 동생을 떠올리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후 동생과 다시 만났을 때 오히려 감싸 안을 수 있게 되었다.
화가 날 땐 나를 먼저 돌아보고, 나의 오만과 교만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나 반성한다. 마음을 버리고 버려 진심으로 나를 낮출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아예 화날 일이 없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버릴 수 있어서 참 좋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이 사람, 행복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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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목표가 행복해지는 것이었다는 마지 콘보이씨. 그녀는 사랑과 명예와 돈을 좇으며 그 행복을 가지려 했다. 그러나 갖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음을 깨달은 그녀는 그 귀한 경험을 혼자만 알기엔 아까워 보스턴에서 명상 도우미로서 봉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사람들을 안내해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하버드대학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했다.

취재, 사진  조선혜,  정리  편집부


새 마음으로 살고 싶었어요
저는 보스턴에서 자랐고 부모님은 레스토랑을 하셨어요. 형제가 일곱 명인 대가족이었죠. 부모님이 굉장히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일을 하셔서 우리는 아주 좋은 교육을 받으며 편안한 환경에서 살았어요. 부모님을 본받아 우리 형제들도 열심히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죠. 하지만 레스토랑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열심히 일했던 아버지는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대가족을 입히고 먹여야 했던 어머니에게도 스트레스가 있었죠.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우리 부모님 사이에 문제가 있었어요. 그걸 보고 자란 저도 훗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고 저의 결혼 생활에도 스트레스가 있었죠.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을 만나 결혼했어요. 세 아이를 낳았고 남편과 저도 레스토랑에서 열심히 일했죠. 이것은 어릴 때 자라면서 보아왔던 부모님의 삶을 반복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밤에 일하고 낮에 아이들을 길렀고, 남편은 낮에 일하고 밤에 아이들과 있었어요. 부모님이 살던 방식 그대로였지요.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고, 13년 뒤 결국 이혼을 했어요.
저는 마음을 바꿔 먹을 필요가 있었어요. 내가 아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은행원으로 직업도 바꾸었어요. 사람 관계와 환경을 바꾸면 행복해질 거라 믿었어요. 돈과 명예와 사랑을 추구하며 계속 외부에서 행복을 찾고 있었어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어요. 휴가도 가고, 요가, 침술, 호흡법도 배우고. 하지만 뭔가를 하려 하면 결국 더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이걸 하기 위해선 이것도 더 해야 했고, 저것도 해야 하니, 대부분은 불편하고, 시끄러운 마음 상태였어요. 미래에 대해서도 굉장히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불안해질까봐 두려웠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행복하지 못할까봐 또한 걱정이었지요. 진짜 행복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나? 그렇다면 그 인생은 정말 의미 없구나, 정말 무서웠어요.
마음수련 명상은 친구가 가져온 책자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내용을 읽고 ‘아, 이 명상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 내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어요. 그 속에는 과거가 쌓인 것이 ‘자기’이며,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죽어 있는 기억들을 닦고 버려야 한다고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바로 그 과거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어요. 저는 마음수련이 말하는 것처럼만 된다면 평생 갈구했던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명상을 하며 찾아온 변화는 너무나 대단했어요.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이 어떻게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녹아내리더군요. 물론 하루아침에 된 건 아니에요.
명상은 내 마음속에 사진처럼 쌓아둔 이미지를 버려요. 그 이미지에는 온갖 마음들과 감정이 묻어 있기 때문이지요. 내 안에 그 사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이 내 기준과 내 틀에 맞게 행동해야 된다고 주장하게 되고 문제가 생겨요. 그것이 가짜마음인 거죠.

과거에 묶여 살던 내가 없어지더군요
하지만 그 사진들을 버리고, 집착을 놓으면 그지없이 자유로워지고, 더 이상 그들을 내 이기적인 사진세계로 보지 않게 돼요. 이 말은 즉 훨씬 편안해지고 즐길 수 있는 인간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명상을 하면서 예전과 달리 어느 곳을 가든지 편안하고 자유로워진 나를 느낄 수 있었어요. 과거에 묶여 살아가던 내가 더 이상 없더군요.
명상을 시작하기 전 저를 굉장히 걱정하게 만들었던 것은 제 딸이 “엄마, 내가 뭐 하는지 왜 자꾸 물어요? 내가 뭐 하는지 관심 있는 것처럼. 내 말은 절대 듣지도 않으면서”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명상하면서 정말로 나는 그동안 딸들뿐 아니라 어떤 사람의 말도 들을 수 없었구나, 알 수 있었어요. 나만의 사진세계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서 듣고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딸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도 진짜로 들을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은 아이들과 가족들과의 관계도 ‘완벽’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얼마 전부터 저의 어머니도 명상을 시작하셨어요. 어머니는 제 가족과 친척들에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마지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어떻게 명상이 저를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내고 싶어 하시죠.(웃음)
이제 제 인생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인 과거의 사진세계에서 벗어나 세상의 마음으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에요. 세상의 마음이 되면 우리는 세상 전체를 알 수 있고, 진짜 논리, 자연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요.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해요.

한국인에게 정말 감사해요
정말 인생의 목적을 찾고 싶다면, 두려움과 스트레스와 분노를 없애고 싶다면, 갈등을 없애고 싶다면, 정말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진짜가 무엇인지 알고 진짜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어요. 거기엔 자유가 없죠. 그 과거의 프로그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가짜인 과거의 사진들을 빼내야만 해요. 마음수련 명상은 이것을 굉장히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빼내게 해줍니다.
하버드대학에서 올해의 여성상을 받은 것은 제가 마음수련에서 했던 일 때문이에요. 명상을 하고 너무나 편안하고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고 그렇게 했을 뿐인데, 그 헌신을 하버드에서 인정해준 것이지요. 하지만 상을 받고 제일 놀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였어요. 저는 이 상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명상이 얼마나 중요한지와 그 효과를 더욱 알게 된 것 같아요. 무엇보다 한국 사람들에게 너무 감사해요. 한국에서부터 마음수련이 시작되었고, 한국 사람들의 그 관대함과 노력으로 지금 마음수련이 전 세계에 퍼질 수 있었으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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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 콘보이 Margie Conboy님은 대학에서 비즈니스 매니지먼트를 전공했으며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중 2003년부터 마음수련을 시작하였습니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더하기의 시대에서 빼기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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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21세기는 정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마음의 시대, 감성의 시대라고도 하지요. 먹고사는 생계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면 사람들은 자아의 성장에 관심을 갖는다고 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목표로 달려온 인류가 이제 마음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업, 지식보다 감성을 중요시하는 교육….
물질의 시대가 더하기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빼기의 시대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살아온 삶의 마음들을 빼내고 자기라는 존재를 다 없애면 근원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네 삶도 마음의 이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옷장에, 주방에, 책상에, 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와 경제, 예술, 교육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쌓여온 삶의 군더더기들은 소통과 흐름을 막는 우리 마음의 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전반에서 진행되고 있는 빼기의 흐름은 참된 본성으로 향하는 마음의 길을 알려줍니다. 진정한 ‘웰빙(Well-being)’은 빼는 삶입니다. 그 참된 삶을 위한 생활의 지혜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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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안에 가득한 옷들. 자주 착용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2년 넘도록 입은 적이 없는 불필요한 옷이라면 부담이 될 뿐이다.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옷의 20%만을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80%의 옷은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파레토법칙’이라 불리는 20대 80의 법칙은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들, 대부분의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묵은 옷들은 공간만 차지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도 입을 확률이 거의 없는 이 옷들은 내 기억과 마음까지 차지한 채 나를 묶어둔다. 사계절을 두 번이나 순회하는 긴 시간 동안 입을 마음이 없었다면 이미 나와 인연이 끝난 것이다. 그 옷들을 떠나보내야 할 때다. 옷에는 사람의 체취가 배어 있고, 2년이 넘도록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을 어쩌다 입게 되면 옷과 몸이 맞지 않아 불편할 때가 있다.
물건에는 수명이 있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물건은 생명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가 정체된다.
묵은 옷들은 과거에 묶인 기억과 같다. 집착의 마음이며 잡동사니를 치우는 과정은 버림에 관한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물건을 간직해야 했던 우리의 두려움을 버리는 것이다. 가진 게 적을수록 지금 가진 물건을 더 많이 쓰게 되는 법. 물건을 돌보는 일에 에너지도 덜 빼앗긴다.
버리면 버릴수록 마음이 정리되고 상쾌해진다. ‘버리는 것’은 곧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버리는 것은 ‘새로운 기회와 만남을 불러오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빼기 방법    2년 이상 한 번도 입지 않고 옷장 속에 묵혀 두었던 옷은 과감히 버린다. 그리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그 기준을 분명히 한다. 어떤 컬러가 나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기분까지 즐겁게 만드는지 파악한다. 부족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남아 있는 옷들을 살펴보면서 어떤 기분이 드는지 지켜보자. 모양이나 재질, 착용감, 치수 그밖의 무엇이든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련 없이 버리자.

‘언젠가’의 심리를 버리자.    설문 조사에서는 처리하기 곤란한 물건,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물건의 베스트 3은 책, 잡지, 옷이었다. 이것들을 버릴 수 없는 것은 이 ‘언젠가’의 심리 탓. 그러나 언젠가는 결코 오지 않는다.

가능한 한 밝은 색 옷을 입는다.    보는 순간, 만지는 순간 기분이 좋아지고 안심이 되는 그런 옷을 고른다. 얼굴을 환하게 만들어주고, 입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번지는 옷, 절로 어깨가 펴지면서 자신감이 생기는 옷, 밝고 경쾌한 인상을 주는 옷이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다. 입으면 긍정적이고 밝은 느낌이 드는 옷이 좋은 옷이다.

버리기 위한 기술 10가지
1. 보지 않고 버린다
2. 그 자리에서 버린다
3. 일정량을 넘으면 버린다
4.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버린다
5. 정기적으로 버린다
6. 아직 사용할 수 있어도 버린다
7. ‘버리는 기준’을 정한다
8. ‘버리는 장소’를 많이 만든다
9. 좁은 곳부터 시작해본다
10. 누가 버릴지 역할 분담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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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약혼식 때 사진입니다. 1년 8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했지요. 저를 번쩍 들어 안아 입 맞추던 그때, 여자로서 꿈꾸던 로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죠. 경찰인 남편은 일이 많았지만 새벽 2, 3시에도 저를 보려고 달려왔습니다. 우리는 1시간을 달려 바닷가로 향했고 별도 세고, 달도 세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무겁다며 제 가방도 들어주고, 못 먹는 멍게도 제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맛있게 먹어주던 자상한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남편은 ‘24시간 근무 중~’ 무뚝뚝한 하숙생이 따로 없었습니다. 첫아이를 낳고 얼마간은 아기와 잘 놀아주더니 곧 나 몰라라 했고, 어쩌다 집에 있을 때면 텔레비전만 끼고 앉아 웃는데, 얼마나 얄밉던지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졌습니다. 결혼한 걸 후회했고 부부싸움도 잦아졌습니다.
그렇게 십 년을 살다가 2007년 마음수련 명상을 하면서 기억 속에 있는 마음의 사진 버리기를 몇 달째, 연애 시절처럼 낭만적이고 자상한 남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자기 일을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남편이 멋져 보이고, 집에 오면 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이해되더군요. 어느 날 남편이 한마디 하더라고요.
“마음수련을 하니 사람이 이렇게 바뀌는구나. 고마워, 감동했다.”
똑같은 약혼식 사진인데, 사진처럼 남편에게 떠받들려지길 바랐던 마음을 버리고 나서 다시 보니, 오직 사랑 가득한 우리 부부입니다. 결혼하길 정말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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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먹는 걸 좋아했다. 세상엔 먹고 싶은 것투성이였다. 배가 불러도 먹고,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밥도 보통 남자들보다 많이 먹었고, 과자도 애들보다 많이 먹었다. 먼저 먹어야 힘을 내서 일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먹으면 살찌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 때문에 먹으면서도 고민을 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나는 다른 엄마들과 나의 차이를 알았다. ‘다른 엄마들은 자식 먼저 챙겨 먹이는데 나는 왜 나부터 먹을까, 내가 왜 이렇게 먹고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명상을 하며 비로소 내가 과식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살아온 기억을 떠올려 버리다 보니 엄마의 칭찬 한마디가 떠올랐다. “너는 참 밥을 맛있게 먹는구나.”
솔직히 나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특별히 잘하는 게 없었다. 그런 내게 엄마가 유일하게 칭찬해준 것이 바로 밥을 잘 먹는다는 거였다. 그 칭찬이 좋았고 더 듣고 싶었다. 점점 더 먹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과식을 당연하게 여겼다. 음식만 보면 아이도 신랑도 눈에 보이지 않았고,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일단 나의 허기부터 채워야 주위 사람들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도 당신이 드시기 전에 자식들이 먼저 먹는 걸 싫어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버리고 싶어 살아온 내 모습과 내 생각, 관념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더 이상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먹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사라지고, 옆에서 먹는 얘기를 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젠 음식을 보면 다른 사람 먼저 챙겨줄 줄도 안다. 그렇게 나는 과식 습관에서 벗어났다.

 

참고 도서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 캐런 킹스턴 저 / 도솔
<정리 플래너> 제니퍼 베리 저 / 나무발전소
<성공 정리법> 캐슬린 켄달 택케트 저 / 큰나
<큰 쓰레기통을 사라> 우스이 유키 저 / 산수야
<버리는 기술> 다쓰미 나기사 저 / 이레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낭만에 대하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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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의추억

김병종 작. <카리브의 추억> 한지, 면천, 먹과 채색. 변형 60호. 2008.

김병종 화백의 낭만 이야기

낭만과 현실을 허락받은 내 삶

지금까지의 나의 삶은 한국인 남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낭만을 좇는 연속이었다 할 만하다. 어렸을 때부터 문학과 미술을 좋아해서 꿈꾸는 소년이었고, 청년 시절에는 삶의 반경을 조금씩 넓혀서 국내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 꿈으로 그리는 낭만을 현실의 지평 위에 올려놓곤 했으며, 대학의 교원이 되어서는 방학 때마다 스케치북과 카메라를 들고 지구촌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풍경 속에 내재한 삶의 의미와 여러 모습들을 나 아닌 타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기록하기도 했다. 흔히들 낭만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경쟁 속에서 개척해야 될 그 무엇이고 청소년이나 청년기에 잠깐 바람처럼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낭만이야말로 삶의 양념이며 향기라고 생각한다. 특히 유교적인 전통 위에서 과묵하고 무뚝뚝한 것이 남성다움의 표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곳에서는 나이 든 남자의 낭만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니 내 마음이 뛴다고 했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고백처럼 낭만이야말로 생명의 상징이며 그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할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관악의봄

김병종 작. <관악의 봄>
한지에 먹과 채색.
6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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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선 / 48세. 회사원. 이탈리아 제노바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낭만에 대하여’는 가사와 멜로디가, 중년 가수 최백호씨 특유의 투박하지만 서정적인 음색과 잘 어우러지며, 과거의 향수를 있는 대로 불러일으킨다.
80년대 초반, 대학에 들어가 처음 맞이한 여름 방학이었다. 여고 동창생 친구 두 명과 함께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내린 곳이 마석이었지 아마. 첫날 민박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대청봉을 넘기 위해 출발했다. 으… 힘들었다. 배낭과 텐트가 너무 무거웠다. 그런데 구세주를 만났다. 대학 3학년 형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남자 선배를 오빠라 하지 않고 형이라 불렀다. 그들도 고등학교 동창들이라고 했고 우리처럼 3명이었다. 짐도 들어주고 텐트도 쳐주고 밥도 해주고…. 3박 4일 코스를 4박 5일 걸려 대청봉을 넘는 동안 길도 모르고 걸음도 느린 우리들을 잘 돌보아주었다.
어느 날 밤, 하루 종일 힘든 산행을 마치고 야영을 하던 그날, 하늘의 별이 쏟아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들 중 한 명이 기타를 쳤다. 노래도 불렀다. 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나는 소위 말하는 음치이기 때문에 노래 잘하는 사람을 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좀 반한다. 그때 그 형이 부른 노래는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였다.
‘저 형이 나를…!’ 분명 나를 향한 노래 같았고 나는 가슴이 뛰었다. 달콤한 밤이었다. 하지만 낭만은 착각이었고 현실은 슬픈 것이었다. 노래하던 형과 내 친구가 사귄다는 사실을 그리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순간 뭔가 쌉싸름한 것이 목을 넘어가는 듯하더니 가슴께를 지나며 확실히 씁쓰름해졌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왠지 허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난다. 힘들고 고생스러웠지만 첫 ‘산행’의 경험은 설레는 것이었고 또 그 형들과 함께여서 더욱 즐거웠던 것 같다. 이제 다들 아저씨 아줌마가 되었겠지.
낭만이란 너무 큰 기쁨이거나 가슴이 쿵쿵 뛰는 그런 것이 아니고 약간의 설렘, 약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약간의 감미로움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행복은 아니고 행복에 대한 기대감, 본격적인 사랑은 아니고 사랑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 말이다. 그러기에 낭만은 더욱더 젊은 날의 것으로 생각되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수 최백호씨도 낭만을 노래하며 ‘잃어버린 것’ ‘다시 못 올 것’이라 하였나 보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낭만을 ‘다시 못 올 것’이라고 단정 지어버린다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노래 끝 구절을 내 맘대로 바꿔본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사랑으로 채워어~(원래는 ‘못 올 것에 대하여’다)

생명의노래2

김병종 작. <생명의 노래>
닥판에 먹과 채색.
60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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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 37세. 간호사. 서울시

어린 시절 일년에 몇 번 이사를 간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계속해서 전학을 가기가 어려워서 몇 달간 버스를 꽤 오래 타고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처음으로 혼자 타 보는 버스. 처음에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잘 탔다. 하지만 길치이면서도 영리하지 못했던 나는 그 버스가 아닌 다른 버스를 타면 왜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번호의 버스가 반대쪽에서도 오는데 왜 그 버스는 타면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기다리는데 버스가 너무도 안 오는 것이다. 건너편 길로는 같은 번호의 버스가 몇 번이고 지나가는데…. 나는 당당히 반대쪽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 있게 탔다. 그리고 내가 아는 동네가 보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가도 가도 익숙한 동네를 볼 수가 없었던 나는 저녁 시간이 가까워 오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부모님에게 연락하고 싶었으나, 그때는 전화라는 것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버스 안내원 언니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나 보다. 결국은 언니가 먼저 “어디 가니?”라고 물어보았다.
다행이다 싶어 동네 이름을 말했는데 언니가 모르는 것이 아닌가. 어른들이 하던 말을 주워들은 거였는데 그게 정식 명칭이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저렇게 꿰맞추던 언니는 “아!” 하더니 “꽤 멀리 왔네. 돈은 있니?” 하며 차비를 챙겨주고 어떻게 가야 할지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을 안고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오히려 버스를 타는 것에 자신이 붙었던 기억이 난다. 버스를 잘못 타도 안내원 언니들에게 말하면 잘 챙겨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후에도 수도 없이 언니들의 도움을 받았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어린 시절의 그 경험은 세상을 늘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 아이가 커서 좀 더 큰 세상으로 나갈 때도 손을 내밀어 줄 누군가를 만나리라 믿는다. 아이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믿을 만한 곳이고 따뜻한지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카리브

김병종 작. <카리브>
캔버스에 혼합재료.
72x50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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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순 / 57세. 교사. 충남 홍성군

지금보다 훨씬 청춘이었을 때 나도 남 못지않게 ‘한 낭만’ 했었다.
낭만을 찾아 도보 여행, 기차 여행, 하이킹 등등 나 홀로 자유 찾는 방랑자가 되어 보기도 했고, 근사한 추억과 사연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내 꼬라지에야 번번이 꽝!일 수밖에 없었지만, 바다 건너 작은 섬마을까지 홀로 훌쩍 떠나 보기도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바다, 산, 들에서 밤새 모닥불 캠핑도 하고. 그리고… 마누라한테 들킬까봐 차마 못 쓰는 사연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삶은 지극히 평범한 현실이 되고 “낭만 좋아하네. 뭐 말라빠진 낭만이가. 피곤하다, 피곤해. 편한 게 최고지.” 뭐, 이런 식으로 낭만은 그야말로 ‘개뿔’ 수준이 되어갔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나이 오십의 중반이 넘어, 드디어 아무리 탐해도 지나침이 없는 이 세상 최고의 낭만을 찾았고 그 속에서 산다. 낭만이란 무엇이냐? 근사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 감동의 물결이 찰찰 넘치는 것, 아주 그냥 죽여주는 것, 뭐 이런 것 아니겠는가. 즉 최고의 낭만이란 바로 감동이요, 내가 찾은 세상 최고의 감동이란 바로 ‘감사의 마음’이다.
감사의 마음은 내가 대하고 만나는 일체를 모시는 마음일 때 우러난다.
부모를, 아내를, 아이들을, 동료를, 선배를, 그리고 지나가는 그 누구조차 말이다. 진정한 감사는 시비하고 시기하거나 미워하거나 이중적으로 대하는 마음들이 없어질 때 비로소 시작되는데, 다행히도 나는 마음수련 명상을 알게 되고, 마음을 비우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나, 아무튼 나는명상을 통해 마음을 버리고 버리자 결국 남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있게 해준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였다.
그 감사는 자존심을 녹여 세상과 내가 하나이게 해주고, 스트레스도, 외로움도 불안함도 초조함과 우울함도 사라지게 했다. 피곤함을 이겨내게 해, 하는 일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되게 한다. 지난 일들 또한 나에게 있어야만 했던 일, 기쁜 추억이 되게 해주었다.
심지어 마누라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이게 하니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 하늘땅을 통틀어 이보다 더 근사하고 멋진 ‘낭만’이 있으랴.

2010년 10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에 함께한 님은 김병종화백입니다. 서울대 미대 교수인 님은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다수의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한 중견 화가입니다. 그동안 미술기자상, 선미술상, 대한민국기독교 미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대학 시절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이며, 유가(儒家)철학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1~4권)> <중국회화연구> <바보 예수> <생명의 노래> <오늘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낭만에 대하여… (1)

카리브어락

김병종 작. <카리브 어락> 캔버스에 아크릴과 혼합재료. 227×142.7c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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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최백호씨의 ‘낭만에 대하여’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낭만’이라는 말 참 많이 듣게 됩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라고 하지요. 그래서일까요? 낭만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 템포 느린 여유와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하얀 도화지에 고운 빛깔이 스며들듯, 텅 빈 마음에 깃드는 낭만은 아마도 우리가 다가가고픈 순수한 마음일 것입니다. 청춘을 지나, 잊고 있던 것, 잃어버린 것, 우리네 삶이 빛나던 순간의 풍경들. 독자들의 낭만 이야기를 모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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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덕 / 45세. 교사. 대구시

1990년 1월 31일. 교사로서 첫 발령을 받은 해의 겨울 방학 마지막 날 밤이었다. 흰 눈이 가득 쌓인 대문 앞에 큰 책가방을 든 한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멈칫하며 가까이 가서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모임에서 몇 번 얼굴을 봤을 뿐, 말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여기에 어쩐 일이냐고, 집은 어떻게 알았냐고 다그쳤더니, 예전에 모임이 끝난 후 사람들을 차례대로 집 앞까지 태워다 준 적이 있었고,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서 한 시간 넘게 헤매어서 찾아왔으며, 무작정 기다린 게 2시간이 넘었다고 했다. “왜요?”라고 묻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봅시다!”
세상에! 이렇게 어색하고, 뻣뻣하고, 우스꽝스럽고…. 이런 말이 어디 있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보자니!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용기를 내어 세상에서 가장 촌스러운 방법으로 연애를 제안했던 그는 단칼에 거절당한 후 한동안 단식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후에도 대학생이 된 내 동생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으며 나를 향한 열정을 변함없이 불살랐다. 하지만 나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던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도둑이야!” 자취방 주인아주머니의 소리가 들렸고, 아주머니는 우리 방문을 두들기며 어떤 남자가 우리 집 담을 넘어오려고 하다가 도망쳤으니,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나는 혹시나 하며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저녁도 그 사람은 변함없이 나를 보러 왔었고, 9시쯤 되어서야 아쉬움을 뒤로하며 집으로 돌아갔었는데….
다음 날, “어젯밤 우리 집 담을 넘으려는 남자가 있었다는데…” 했더니 역시나 그가 빙긋 웃으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집으로 돌아가다 아쉬움이 남아 다시 왔는데 방 불은 꺼지고, 대문은 잠기고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더란다. 그래서 담을 넘어 방문이라도 두드려보려고 올라가려 하는데, 아주머니가 보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정신없이 도망을 갔고, 동네 슈퍼 앞 평상에 앉아 태연한 척 시치미를 떼며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데 경찰이 지나가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뛰었다는 것이다. 만약 경찰에 붙잡혔으면 그 창피를 어쨌겠냐며 동생과 나는 배꼽을 쥐고 웃었다. 그날 이후 내 마음은 조금씩 열렸으며, 그 다음 해 4월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내년이면 벌써 결혼 20주년이 된다.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미소가 도는 그 어색한 한마디! “우리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봅시다!”
세상에서 제일 촌스럽고 어색했던 연애 제안, 그만큼 순수하고 기교를 부릴 줄 몰랐던 그 시절 그 사람의 말 한마디가 ‘낭만’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며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탱고의발상지라보카

김병종 작. <탱고의 발상지 라보카>
종이에 먹과 아크릴.
53.5x45c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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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 / 만화가. 인천시

어렸을 적에, 남자 아이들에게 구타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때 그 아이는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힌다는, 다소 순진하고 귀여운 발상을 조금 거칠게 표현한 것이었을 텐데, 거기에 정색하고 달려든 나로 인해 큰 싸움으로 번졌고 급기야 그 아이는 전교생 앞에서 나에게 때려눕혀진 것처럼 보이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그것은 사고였고, 내 주먹에 맞아 벽에 부딪히며 머리에 살짝 피가 났을 뿐이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그 아이는 같은 반 남자애들을 모아 하교하는 나를 쫓아다니며 복수하려 했다. 다행히 끔찍한 충돌 없이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 일로 인해 나는 남자라면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 연애를 하게 될 리 만무하고 그 흔한 총각 선생님에게 가슴 떨려보는 풋풋한 추억 하나 없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졸업할 즈음에야 연애를 한 번쯤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짧고 굵은’ 연애를 했다. 짧고 굵다고 하니 말은 그럴싸하지만 판타지로 시작했다 순식간에 식어버린 찌질한 연애였다. 역시 나는 남자가 싫어,라며 툴툴거리다 두 번째 남자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이 녀석이 술 먹을 때마다 내 절친에게 전화를 하여 좋아한다고 고백했단 사실을 알게 되며 헤어졌다.
그 후에도 연애가 잘 안 풀려 그냥 이렇게 살다 죽지,라며 포기했을 때쯤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났다. 그전까지 질풍노도의 엉망진창 연애만 하다가, 갑자기 평화로운 연애를 하게 되니 마치 연애를 처음 하는 것처럼 낯설었다. 꽃 선물을 받고 나서 ‘아, 내가 몇 놈 만나봤지만 꽃을 받아 본 건 처음이네’라는 걸 깨닫는 씁쓸함과 묘한 기쁨의 혼합이랄까.
나는 여전히 남자에게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고 깊은 불신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점점 사랑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낭만과 애틋함에 대해서는 이제 조금씩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고 또 부서지기 쉽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이렇게 주고받는 진심을 통해 변화되고 좋아지는 것들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이 내 생에 있어 가장 낭만적인 순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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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식 / 72세. 경북 경산시

이렇게 펜을 드니 쑥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소만 용기 내어 몇 자 적어보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빈민 농가에서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불행한 일들을 참으로 많이 겪었네. 열한 살 땐 6·25전쟁이 나며 형제들과 뿔뿔이 헤어졌고, 열두 살 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고 열여덟 살 때부터는 몸이 아파 5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 아들이 안됐는지 어머니는 “홀로 있으면 외로우니 결혼하라” 하셨고 나는 입대 전에 원치 않은 결혼을 했었네. 하지만 군 생활 15개월 됐을 즈음 아내마저 7개월 된 딸을 두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더군. 그 후 재혼을 하며 당신을 만났지.
하지만 불행은 계속해서 내 곁을 맴도는 것 같았소. 예비군 창설 당시 중대장을 했던 나는 아상과 우월감, 열등감 때문에 늘 부딪쳤고, 그럴 때마다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오. 직장 생활에 적응도 못 했고 당신과도 한 달이 멀다 하고 싸웠지. 가족들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무시하고 화도 많이 냈었소.
당신에겐 미안했지만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늘 세상이 싫었고, 마음을 의지할 곳도 없었다오. 그러다 마음수련 명상에 관한 책을 보고는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소.
명상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요. 눈물이 흐르고 참회가 되면서 ‘내가 이 세상에 죄인이구나, 죽어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마구 들더이다. 무엇보다 당신에게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서 세상에 나가기가 두려울 정도였소.
내 말이 곧 법이라며 가족들의 무조건적인 희생만 바랐던 세월들, 내 말을 안 따르면 화내고 물건을 던지던 나. 얼마나 무서운 아버지였던지 내가 들어서기만 하면 울고 웃던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던 모습도 하나하나 떠오릅디다.
‘아~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삶을 반복해서 살겠구나.’ 그건 너무도 끔찍할 것 같아 계속 명상을 했소. 집으로 돌아온 내가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자, 당신은 별꼴을 다 보겠다는 듯 방으로 들어갔었지.
그래도 명상하고 내가 참 많이 변하긴 하지 않았소? 지금은 청소도 설거지도 집안일도 하고 말이오. 당신 마음에야 안 들겠지만, 40년 동안 당신이 나를 위해 옷을 빨아주고 청소해주고 밥상을 차려준 거에야 비교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갚고자 하는 내 마음이니 넉넉히 받아주오.
얼마 전인가 당신이 ‘요즘은 날이 새는 게 아까울 정도로 편하고 행복하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나 역시 이불을 개고 널면서도 내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 스스로 놀랍고 감사해서 눈물이 난다오. 요즘은 화가 날 상황에도 화가 나지 않으니 참으로 마음이 많이 버려지긴 한 것 같소.
여보, 우리도 젊은이들 신혼처럼 한번 재미나게 지내봅시다. 그동안 나 같은 못난 사람 틀에 맞춰주느라 고생 많았소. 앞으로 남은 여생은 내가 당신 틀에 맞춰 살 테니, 아무 걱정 말고 당신은 그저 건강만 조심해주면 되오.

생명의노래

김병종 작. <생명의 노래>
닥판에 먹과 채색.
100×111.5cm. 2005.

2010년 10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에 함께한 님은 김병종화백입니다. 서울대 미대 교수인 님은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2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다수의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한 중견 화가입니다. 그동안 미술기자상, 선미술상, 대한민국기독교 미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대학 시절 동아일보, 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이며, 유가(儒家)철학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김병종의 화첩기행(1~4권)> <중국회화연구> <바보 예수> <생명의 노래> <오늘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인간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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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잠자고 바람도 잠자고
갈 곳 없는 사람만 제 할 일 못하고 바쁘기만 바쁘구나
세상이 분주한 것은 사람이 분주하여 분주하구나
대자연은 그냥 있으나 만상은 그냥 사나
이룰 것 제대로 하나도 못 이루는 사람만 갈팡질팡
제 마음속에 허상의 세계에서
허상인 사진이 찍힌 대로
그 사진의 각본대로 자유가 없이 살아가고 있구나

땅에 제 스스로 갇혀 땅인 허상의 세계에 살아가니
지옥의 세계에 고통 짐을 지고 사나
그것은 생명이 없는
실상세계인 세상에 없으니 허상이라
땅에 난 자는 땅에 산다는 뜻은
땅에 나서 마음의 터널 속에 살고 있으니 그것이 지옥이라
하늘 난 자는 하늘 산다는 것은 하늘의 진리인
실상의 마음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니
그 마음 터널 밖인 하늘에 다시 나니
온 세상과 하나 자체라
하늘나라인 진리나라에 사는 것이라

허가 참 되는 것이 완성이고
허허를 다 없애면 참이 남고
가짜인 내 몸과 마음이 없으면
진짜만 남고 진짜로 다시 나야
인간이 제 할 일을 한 것이고
인간이 완성이 되는 것이라

 
 
 
 
 

인간의 완성은 가짜인 인간을 다 버리고
진짜인 사람으로 다시 나야 완성이 되는 것이라

영생천국도 살아서 영생하고 살아서 천국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수많은 사람이 세상에 살지만
천국 난 의인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으니
사람은 자기가 죽어도 죽은 줄도 모르고
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참사람은 죽은 것도 알고 산 것도 아니
이 세상은 하나의 허상 속 사는 세상이라
아는 자가 없구나

아는 자란 자기가 세상인 진리나라 나 사는 사람이 아는 자라
안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라
세상의 이치란 세상의 근본을 알고
세상의 있음 없음이 하나임 알고
나고 죽고 살고의 의미를 알고
참세상의 이치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고 지혜라

근본인 세상의 본래가 사람으로 와야
세상이 구원이 될 수가 있는 것은
그 나라의 주인이라
살리고 죽이고 있고 없고를 할 수가 있기에
본래의 주인만이 있게 할 수가 있고
없게 할 수가 있기에 그러한 것이라
이것이 살활자재권이라
 
詩_ 우 명

 

우 명 선생은 마음수련의 창시자이며, 저술가이자 시인이다. 깨달음과 진리에 관한 3권의 시집을 포함, 모두 열 권의 책을 펴냈으며, 마음과 우주의 이치, 사람들이 마음을 닦아 참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담고 있다.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로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기념하는 에릭 호퍼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했으며 철학, 영성, 명상 분야에서 다수의 도서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및 일본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를 다니며 강의와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이 우주의 주인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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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이 우주의 주인을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이 우주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한얼님 사상인 우리나라에서는 한얼님이라고 부른다.
이 존재는 분명히 창조주일 것이고 이 존재는 분명 참인 존재일 것이고 전지전능한 존재일 것이다. 이 존재는, 대우주에서 만상만물을 없애어 보라. 바로 이 존재가 천지 만물만상의 근원이고 또 주인이시고 또 창조주이신 참인 존재의 본래 모습이다.

이 존재는 몸 마음이 있어 만상의 몸 마음은 이 존재의 표상이다. 이 존재의 몸 마음을 일컬어 보신불 법신불이라 일컫고 성령 성혼(부) 또 정과 신이라 일컫는다.
이 존재는 비물질적 실체이고 이 존재는 살아 계시는 참인 진리의 존재이고 전지전능 자체의 존재다. 이 존재는 만상의 어버이이고 근원이고 본래이고 주인이시고 이 존재는 시작 이전에도 계셨고 시작 이후에도 계시는 스스로 그냥 존재하는 완전한 존재이시라. 만상의 어버이는 이 존재다.
이 존재는 이 우주의 어느 곳이든 시공에 관계없이 존재하시고 만상만물은 이 존재가 창조하셨다.

물질이 아니어서 사람이 보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인 의식이 허인 자기의 관념 관습을 다 부수고 이 존재에 귀의할 때 이 존재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도 세상 속에 살면서 허든 실이든 안다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것만큼 알고 말하고 산다. 그렇듯 이 존재가 자기 속에 있어야 이 존재를 알 수가 있는데 허인 자기의 관념의 세상을 다 부수고 없애면 실이고 참인 이 존재가 나 속에 있게 되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존재는 만고불변의 진리이신 영원불변하며 살아 있는 존재다.
우주의 만상이 없어져도 이 존재는 그냥 그대로 존재하고 이 존재는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 실체다. 진리는 만고에 이것밖에 없기에 이 존재로 다시 나지 않고는 사는 방법이 없다.
이 존재와 하나가 되어 거듭나면 이 존재의 나라에 영생불사신으로 살 것이다.

만상의 근원은 우주에서 만상을 없앤 그 자리이고 또 있는 만상도 이 자체라. 그 영혼이 영원히 살 것이고 사람도 이 자체의 몸 마음으로 다시 나면 영원히 살 것이다.
 
우 명

 

우 명 선생은 마음수련의 창시자이며, 저술가이자 시인이다. 깨달음과 진리에 관한 3권의 시집을 포함, 모두 열 권의 책을 펴냈으며, 마음과 우주의 이치, 사람들이 마음을 닦아 참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담고 있다.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로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기념하는 에릭 호퍼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했으며 철학, 영성, 명상 분야에서 다수의 도서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및 일본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를 다니며 강의와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2010. 10. October 월간마음수련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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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이에게도 학사모를 씌워줘야 하는데….”
올여름, 대학 졸업식을 앞두고 교수님들은 종종 미담이 얘기를 하셨습니다. 7학기 내내 제가 한 과목 수강을 마치면 모두 “미담이와 경민이가 열심히 했다”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런 미담이가 저는 늘 고맙고 자랑스러웠지요. 오늘도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의 길을 안내견 미담이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구술 김경민, 정리 편집부, 사진 제공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메인사진

미담이는 래브라도 레트리버종으로 여섯 살이다. 두 살이 지나 경민씨와 함께하게 된 미담이는 학교를 오갈 때, 수업을 들을 때도 그랬듯이, 경민씨가 졸업을 한 지금도 언제나 곁에서 생활을 함께하며 경민씨를 지켜주고 있다.

미담이와 저는 24시간 함께합니다. 미담이가 걸으면 저도 걷고, 미담이가 서면 저도 서지요. 공부할 때나, 밥 먹을 때, 잠을 잘 때조차도 조용히 제 곁을 지켜줍니다. 잠깐 미담이를 두고 혼자 나갔다 돌아오면 신발 소리만 듣고도 나와서 펄쩍펄쩍 뛰며 좋아합니다. 미담이는 항상 저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미담이를 만난 것은 2007년 2월입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 분양 신청을 했어요. 안내견학교에서 4주간의 입소 교육을 받으러 가게 되었을 때, 처음엔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개를 정말 무서워했거든요. 그런데 미담이가 만나자마자 뛰어오르고 좋아하며 뽀뽀를 하는 거예요. 저는 처음엔 잘 다가가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했죠.
그런데 교육 1주 차 때였어요. 몸살이 심하게 걸린 겁니다.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워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다가 중심을 못 잡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어요. 한참 후에 정신이 들고 보니 미담이가 계속 제 곁을 지키고 있었어요. 이제 괜찮다며 미담이를 만져주니까 그때서야 안심이 됐는지 물을 먹으러 가는 거예요. 그때 참 감동을 받았어요. 앞으로 함께할 친구라는 생각이 드니까 무서움도 없어졌습니다.
처음엔 서로 맞춰가느라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호기심 때문에 다른 길로 간다든지, 길에 떨어진 음식을 먹으려 한다든지, 그러면 미담이를 바로잡아 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뭐라고 하면 고개를 제 가슴에 파묻으면서 안겨요. 그러면 제 마음도 약해지지요. 꼭 애기 같아요.
제가 실수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공사를 하고 있거나, 차가 있으면 위험하니까 미담이가 가지를 않아요. 그러면 저는 미담이가 딴짓하느라 멈춘 줄 알고 야단을 쳐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면 위험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꼬리를 흔들며 괜찮다는 거예요. 이제는 안 가려고 하면 딱 알지요. 요즘에는 좀 위험하다 싶으면 코로 한번 제 다리를 찍어요. 앞에 뭐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얼마나 세심한지 계단을 내려갈 때도 제 발을 보고 있다가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하고는 내려갑니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다 통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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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숙명여대 여름 학기 졸업식. 문과대학 수석으로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 서게 된 경민씨 옆에는 안내견 미담이도 있었다. 의류학과 친구들은 미담이에게도 학위복을 만들어주었고 미담이는 경민씨와 나란히 졸업식을 치렀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예 시력을 잃었어요. 날짜도 기억합니다. 2000년 8월 1일.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이던 그날이요. 그 이후로 자기 전에 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벽지를 볼 수 있었으면, 천장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무엇보다 하늘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유치원 때는 다른 친구들처럼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제는 유치원 때만큼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구나, 내가 다른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이때를 그리워하겠지. 잃고 나서야 그때 가졌던 것이 참 좋은 것이었다고 느낀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구나. 그러고 보니 저는 가진 게 참 많았습니다. 저를 사랑해주는 가족, 친구들이 있고, 그리고 미담이가 있으니까요.
사실 대학 입학을 앞두고는 좀 힘들었습니다. 계속 시각 장애인을 위한 맹학교를 다녔는데, 과연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자려고 누워도 한 시간마다 깨고 가위에 눌렸어요. 그때도 미담이가 큰 위안이 되었지요.
미담이는 성격이 참 밝습니다. 사람을 안 가리고 좋아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웃으면 자기는 뭔지도 모르면서 꼬리를 흔들고 뽀뽀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푼수 아줌마’입니다. 그리고 나가는 것을 즐거워해요. 나가서 함께 걷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미담이도 행복해하는구나 하고 느껴집니다.
저는 제가 세상에 빚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니까 수업을 따라가기 힘든데, 그때마다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장애 학생 도우미 언니들이 대신 수업을 타이핑해서 점자로 만들어주거나, 교재를 음성 파일로 만들어줘요. 그리고 저희가 읽는 점자 책은 정말 어렵게 만들어진답니다. 그걸 아니까 한 권 한 권이 너무너무 귀해서 서너 번은 보게 됩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감사한 마음 때문에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 생활 동안 숙명 점역봉사단에 들어가 시각 장애 학생용 문제집을 만들고, 맹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빚진 걸 갚고 싶었거든요. 요새는 임용 고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미담이와 함께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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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님은 1988년 1남 1녀 중 장녀로 서울에서 태어나 국립서울맹학교에서 초·중·고를 다니고,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선천적 녹내장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늘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감사하며 느끼자’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2010. 11. November 월간마음수련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겸 지휘자 윤학원

윤학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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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은 지휘가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겁니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수십 명이 하나의 소리를 낼 때, 그 희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한국 합창 지휘의 선구자 윤학원(73) 선생. 1978년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세계합창경연대회 최우수상에 올려놓음으로써 세계에 이름을 알린 그는 카네기홀을 비롯한 해외 유명 연주장에서 무려 3백 회, 정기 연주회 등을 수천 회 가진 세계적인 지휘자다. 그의 손짓에 하나의 소리가 되고, 그의 눈빛에 하나의 마음이 된다.

이권자, 사진 홍성훈

윤학원_악보
‘합창’ 그리고 ‘하모니’.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맞추어 노래하다, 조화를 이루다, 듣기만 해도 훈훈한 뜻의 두 단어는 요즘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이자 화두가 되었다.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의 영향이었다. 출연진 외에 공개 오디션을 통해 뽑힌 수십 명의 개성 강한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함께 공감하고 감동케 했던 것이다.
가장 화제가 된 이는 지휘를 맡은 박칼린씨. 지휘자로서 자신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을 무렵 그녀는 자신이 평소 존경해 마지않았던 한 대가를 언급하며 잘하고 있다는 그분의 칭찬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고 했다.
합창에 평생을 바친 사람, 한국 합창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한국 음악을 세계에 알린 사람, 바로 윤학원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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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합창에 대한 관심을 실감하시는지요.

그럼요. 그렇지 않아도 박칼린씨를 만났을 때 합창 문화 발전에 크게 도움 될 수 있으니 잘해달라고 했는데, 아주 잘해냈어요. 나도 눈물이 나던데요.

사람들로 하여금 합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 것 같습니다.

합창이란 여러 사람이 모인 거잖아요. 각자 자기 나름대로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개성을 죽이고 같이 맞춰 나가려는 게 참 멋있잖아요. 제일 중요한 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게 해준다는 거예요. 독창은 자기만 잘하면 되지만, 합창은 다 같이 해요. 누가 멜로디를 하면 그 사람을 돋보이게 받쳐주고, 자기가 멜로디를 하면 맡은 바를 충실히 하고. 그게 합창의 정신인데 우리가 사회생활 하는 데도 굉장히 필요한 거거든요.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모은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듯합니다.

굵은 소리도 있고 빼죽한 소리도 있고 걸걸한 소리도 있고 소리의 질이 사람마다 달라요. 그걸 하나로 모으는 합창은 한 번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아’ ‘오’ 모음 하나를 갖고 계속해서 맞춰요. 그래서 제가 지휘자는 쩨쩨한 것이다, 그런 얘길 합니다.(웃음) 어떤 때는 곡 하나 갖고 천 번이고 연습을 해요. 그런 작업을 통해서 하나의 소리가 만들어질 때의 일치감, 그 희열은 굉장합니다.

지휘자는 단원들의 마음까지 잘 조율해줘야 할 듯합니다.

사실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결하고 하나로 만들어 가느냐가 중요해요. 좋은 지휘자란 훌륭한 대통령 같아야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대통령은 국민들 마음도 잘 헤아리고 나라 운영도 잘해야 하잖아요. 지휘자도 단원 한 명 한 명을 배려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합창단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부터 어떻게 해야 많은 청중이 듣게 하느냐까지, 다 생각해야 되거든요.

선생님이 이끄셨던 합창단은 모두 세계에서 인정을 받았지요.

너무나 감사한 일이고, 좋은 사람들을 만난 제 복이기도 합니다.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은 세계 순회 공연을 여러 번 했고요, 대우합창단은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합창대회에서 깜짝 놀랄 만한 공연을 해서 외국 지휘자들이 내 앞에 쭉 서서는 사인해 달라고 했었죠. 또 인천시립합창단이 작년 ACDA(미국합창지휘자연합회)에서 주최하는 초청 공연에 갔을 때도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어요. 그럴 때 정말 보람 있죠.


 

윤학원3
“인천시립합창단의 공연은 경이로웠으며 새로운 공연 기준을 보여주었다.”
– 제프리 맥코이, ACDA 총재.

“첫 곡부터 기립 박수가 나온 합창단은 인천시립뿐이다.”
– 브렌트 벨웨크, ACDA 운영위원.

지난해 3월 미국 오클라호마에서는 ACDA가 세계적인 합창단 네 팀만을 초청한 공연이 있었다. ACDA는 50년 역사를 지닌, 전 세계 합창인들의 꿈의 무대. 그곳에 온 미국의 내로라하는 지휘자 6천여 명은 심금을 울리는 인천시립합창단의 공연에 감동해 마지않았다. 예일대 음대 교수 사이먼 캐링톤은 “인천시립합창단 공연 봤어?”라는 말이 한동안 인사였다고 후일담을 전했을 정도. 인천시립합창단의 전임 작곡가 우효원씨가 편곡하고 창작한,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깊이 있는 곡들은 ‘윤학원 지휘’에 맞춰 아름다운 하모니와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완벽한 공연으로 감탄을 자아낸 것이다.
윤학원 선생의 지휘도 화제가 되었다. 저명한 작곡가 폴 카레이는 이렇게 평했다. “그는 작은 제스처로도 원하는 소리를 창조함으로써 모든 지휘자들에게 큰 교육이 되었고 모두를 강타하며 마음을 흔들었다. 그들이 들려준 매우 재미있는 공연 덕에 우리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다. 내가 들은 것 중 최고의 합창이다.”
공연 후 미국의 지휘자들은 한동안 ‘윤학원’을 연호했다. 평생을 합창에 바쳐온 백발의 노장, 최고의 합창을 선물해 준 한국의 지휘자에게 경외와 존경을 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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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회어린이합창단 34년, 대우합창단 5년, 인천시립합창단 15년째…. 그리고 악보와 지휘봉. 윤학원 선생은 평생을 합창 지휘자로 헌신했다.

어릴 때부터 지휘자가 꿈이었나요?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때는 학교 전체에 손풍금 하나가 다였어요. 그걸 칠 줄 아시는 여선생님도 딱 한 분 계셨는데, 제 노래를 들어보시더니, 저를 반마다 데리고 다니시며 시범 창을 시키셨어요. 그때부터 내가 노래를 잘하는구나, 나는 음악가야, 생각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화학자가 되길 바라셨지만 저는 공고에 들어가서도 밴드부를 했죠. 색소폰을 불다가 상급생이 되면서 지휘를 하기 시작했고, 대학을 작곡과에 들어갔는데, 3학년 때 연대기독학생합창단 지휘를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어요.

1971년, 제일 먼저 합창에 안무를 넣어 화제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는데 다 노래를 하면서 움직이더라구요. 그렇게 움직이는 노래를 보다가 그냥 서서 하는 노래를 보면 안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 민요 같은 건 본격적으로 안무를 짜기도 했고요. 그때만 해도 파격적인 시도였죠.

전임 작곡가 제도를 시작하셔서 한국의 음악을 세계에 알리셨지요.

언젠가 외국에 나가서 연주를 하는데 현지인들 말이 바흐나 모차르트 음악은 자기네 음악이니까 너희가 아무리 잘해도 우리보다 못한다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인천시립합창단 지휘자가 되면서 인천시에 전임 작곡가 제도를 요구했지요. 처음엔 참 어려웠어요. 한국에서 합창을 전문으로 작곡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함께 의논하면서 지금까지 개발해 나가고 있는데, 그게 적중했어요. 세계 대회에 나갈 때마다 외국인들이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우리 곡에 기립 박수를 터뜨렸어요. 너무 새롭고 깊이가 있다고.

우리나라에서는 합창단이 무대에 설 기회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합창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많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깝죠.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합창단이 1만5천~2만 개가 있거든요. 근데 우리나라는 4~5백 개밖에 없어요. 그 원인이 어려서부터 점수, 입시 위주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음악, 특히 합창은 부모도 선생님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각 학교에서 합창이 활성화되고, 대회도 많이 열려야 해요. 마음을 합해 다른 사람과 같이 하나의 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아이들 인성 교육에 아주 중요한 거예요.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을 말씀해주세요.

우리나라에 합창단이 한 1만 개 생겼으면 좋겠어요. 동마다 마을마다 합창단이 있어서, 엄마가 합창을 하고, 엄마는 아이에게 하나가 되는 마음을 가르쳐주고…. 그런 날이 곧 오겠지요.(웃음)


 

윤학원 지휘자는 요즘 정기 연주회와 세계합창박람회 공연 준비로 여념이 없다 했다. 프랑스 세계합창박람회는 주최 측의 심사로 12팀이 뽑혔고, 아시아에서는 인천시립합창단이 유일하다고 한다. 한국 합창과 한국 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생을 바쳐온 사람. 그는 이미 한국 합창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거장이었다. 그럼에도 “훗날 후배들에게 ‘윤학원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갔던 지휘자’였다고 기억되고 싶고, 그렇게 된다면 영광이겠노라”고 겸허하게 말했다.
언젠가 그의 손짓에, 그의 눈짓에 하나가 되는 합창을 꼭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백발의 노장이 문밖까지 배웅을 해주며 말했다.
“합창이 재밌습니다. 공연하는 거 보러 꼭 오세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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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다른 모습, 다른 생각, 다른 감정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게 합창의 매력입니다.”

지휘자 윤학원님은 1938년 인천에서 출생, 연세대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하고 미국 로웰주립대 대학원 수료, 미국 쉐퍼드대학과 미드웨스트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평생을 합창 음악에 헌신해온 그는 세계적인 지휘자로서 한국 음악을 세계에 알려왔습니다. 현재 윤학원코랄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중앙대 음대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합창경연대회 최우수상(1978), 옥조근정훈장(2004)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10. 11. November 월간마음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