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식의 교단일기"
둥근 해가 떴습니다
음악 전담 시간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음악실로 가고, 나는 교실에서 일기장 검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가 보니 1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계단 난간을 잡고 엉엉 울고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 3층까지 올라와 통곡을 할까. 아이한테 다가가서 왜 우느냐 물었다. “우리 선생님이… 엉엉… 막… 화내고… 엉엉… 나가라고 했어요.” 친구와 장난치다가 부딪쳤는데, 선생님이 자기만… Continue reading
폭풍우 치던 밤에
태풍 볼라벤이 북상하던 날, 나는 시골 어머니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콩대, 고양이 밥그릇, 호미, 빈 화분 등 바람에 날릴 만한 것을 몽땅 창고에 넣었다. 심지어 마당에서 놀던 고양이 두 마리도. 당신은 아마 이번 태풍이 고양이도 날려버릴 것이라 판단하신 모양이다.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기 시작한 저녁 무렵, 진주 집에서 아내가 전화를 했다. 아내는 아무래도 유리창에 젖은… Continue reading
가을 남자
가을이 석류의 계절인 이유는, 석류알 같은 선홍빛 추억이 가을 속에 송송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날 시내 다방에서 독서회 정기 모임을 마치고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토론을 벌이다가 늦은 밤 헤어졌다. 나는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마음을 바꾸어 혼자 걸었다. 무심하게 스치는 차량 불빛을… Continue reading
서면시장 칼국수
서면시장 뒷골목에 가면 30년 전 나를 만난다. 나는 금속 공장 2교대 야간 근무를 마치고, 구청 앞 낡은 건물 4층에 있는 독서실로 갔다. 월 이용료를 끊고 그곳에서 씻고 자고 공부하고, 매일 점심때가 되면 독서실 계단을 내려와 서면시장 먹자골목으로 갔다. 그때 내 나이 스물둘이었다. 서면시장 뒷골목 칼국수 집에는 뜨내기손님보다 단골손님이 더 많다. 내 단골집 아줌마는 배신을 모르는… Continue reading
노인이 노인에게
콩 이파리 물결치는 텃밭 속에서, 홀로 콩 이파리를 따는 저 노인처럼, 나 또한 기꺼이 세월 속에 있으리라. 바람도 노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바람이 지나가는 골목 어귀에 여름 내내 할머니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 한동네에 도란도란 살고 있는 할머니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보다 지나가는 행인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Continue reading
내 사랑 병어 각시
옛날 옛적 바닷속 마을에, 입이 아주 큰 노총각 대구가 살고 있었다. 대구란 물고기가 원래 몸뚱이에 비해 입이 우스꽝스럽게 크긴 하지만, 노총각 대구는 정도가 더 심했다. 웃으면 입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중매쟁이 문어 할매가 대구네 집에 찾아와 물었다. “대구야, 병어 각시 얻어주까?” 병어? 대구는 눈을 끔뻑이며 병어 아가씨를 그려보았다. 바다 마을 물고기 중에서 입이 제일… Continue reading
납량 특집
먹구름이 온종일 학교를 뒤덮었다. 오후가 되자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빗방울들이 자꾸만 유리창을 두드리며 ‘비 오는데 무슨 공부냐’고 훼방을 놓았다. 아이들도 옛날이야기 하나 해달라고 보챘다. 그래. 쉬었다 가자. 나는 교과서를 덮고 실내등을 껐다. 그리고 이 학교와 나의 비밀스런 관계를 이야기했다. 나는 올해 이 학교에 처음 전근 왔다. 전근 온 첫날, 교장 선생님이… Continue reading
색종이 놀이
미술 시간입니다. 이번 시간 활동은 ‘색종이를 오려 모양 꾸미기’입니다. 형형색색 색종이를 교사용 책상에 펼쳐 놓고 은근히 아이들의 창작 욕구를 자극합니다. 당장 제 손에 없는 것은 언제나 샘나는 아홉 살 눈망울들이 초롱초롱 예쁩니다. 색종이 한 장을 집어 올려, 이리저리 마음 가는 대로 접습니다. 그리고 싹둑싹둑 오려냅니다. 그런 다음에 활짝 펼치니 정사각형 색종이가 멋진 문양으로 바뀌었습니다. 꼬마들의… Continue reading
자장면 세 그릇
중학생 2학년 때였다.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을 떠났다. 점심때가 되어서 부산역에 도착했다. 선생님은 역 근처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씩 먹고, 경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탄다고 하셨다. 아! 자장면!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부산역을 빠져나와 중화반점을 향해 조랑말처럼 달렸다. 빨간 차양이 드리워진 입구를 통과하자 뚱뚱한 반점 주인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그는 속속 도착하는 들뜬 조랑말들을 2층 내실 안쪽 자리부터…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