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식의 교단일기"

둥지 세탁소

맑은 날에는 걸어서 출근한다. 도시의 길은 아침과 낮과 저녁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가로수 속 새소리가 선명한 아침 거리는 도로 저 먼 곳까지 시원하게 열려 있어서, 무심결에 스쳐간 사물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사거리 모퉁이에 국수집이 새로 생겼고, 동네에 하나뿐인 줄 알고 있던 약국이 하나 더 있었고, 시내버스 정류장 옆에 하늘색 공중전화 박스가 그대로 있음을 알게 해준다…. Continue reading

고양이와 망아지

내 기억 속의 첫 유행가는 진송남의 히트송 ‘바보처럼 울었다’이다. 고작 아홉 살이었던 아이가 왜 그렇게 청승맞은 뽕짝을 좋아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뽕짝은 온 가족이 함께 즐기던 노래였다. 철물점을 하시던 아버지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얼큰하게 취해서 돌아오는 날이면, 당신은 우리 형제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노래자랑을 시켰다. 부끄럼 많은 열한 살 누나는 이불 속으로… Continue reading

꽃 이야기

꽃1 사월 한식 날 엄마하고 아버지 산소 벌초하는데 당신 허리처럼 굽은 호미로 잡초 매시던 우리 엄마 산소 언저리에 홀로 핀 노오란 풀꽃 언뜻 보시더니 그만 눈을 뺏겨 호미 끝으로 마른 흙 톡톡 파시기에 그 꽃 옮겨 가면 집 근처도 못 가 말라 죽을 거라고 낫으로 잡풀 베어 넘기던 내가 쓴소리 건넸더니 우리 엄마 깜짝 놀라… Continue reading

당신이 빛날 때

월요일 아침, 직원 회의를 마치고 우르르 교실로 향하던 중, 함께 걷던 오십 대 여선생님이 앞서 가던 이십 대 처녀 선생님에게 말했다. “하선생, 어쩜 그렇게 예쁘고 날씬하노?” 젊디젊은 이십 대 선생님은 뜻하지 않은 찬사에 뒤돌아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에도 젊음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오십 대 여선생님도 그런 빛나는 청춘의 세월이 있었을 터이다…. Continue reading

밴댕이 선생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설이 있지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루 여덟 시간씩 개구쟁이 등살에 속이 상할 대로 상해 나온 것이니 지나가던 견공이 피해 갈 법도 합니다. ‘초등학교 선생들은 쩨쩨하다’는 말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온종일 철부지들 속에서 아옹다옹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이 수준이 된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랍니다. 우리 반 녀석들이 요즘 아주 드러내놓고 나더러… Continue reading

소원을 말해봐

젊은 교생 선생님들이 실습하는 동안 내 인기가 추락했다. 교생 실습이 끝난 월요일, 나는 우리 반 아이들한테 쪽지를 나누어주고 소원을 적으라고 했다. 선생님이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라면 들어줄 것이고,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소원이라면 너희들 대신 부탁드리겠다고 했다. 열한 살 꼬마들이 나에게 바라는 소원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 옆 짝꿍은 여자끼리 앉기 * 중앙 현관으로 다니고…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