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노인에게

 

 

 

 

콩 이파리 물결치는 텃밭 속에서, 홀로 콩 이파리를 따는 저 노인처럼,
나 또한 기꺼이 세월 속에 있으리라.

바람도 노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바람이 지나가는 골목 어귀에 여름 내내 할머니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 한동네에 도란도란 살고 있는 할머니들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보다 지나가는 행인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가 더 많다. 어제 해거름판에 내가 그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듣지 못했지만, 할머니 한 분이 바람이 차다고 말한 모양이다. 다른 할머니가 말했다.

“춥기는 뭐가 춥단 말이고? 나는 더워 죽겠구마는.” “니는 옷을 많이 입었으니까 안 춥지!” 한 분은 덥다 하고 한 분은 춥다 했다. 골목을 돌아 나오던 가을바람이 제 이야기하는 줄 알고 서성거리다 갔다.

노인은 작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골 시외버스 주차장 대합실. 나무 의자에 앉아 차 시간을 기다리는 노인 앞으로 중절모를 쓴 노인이 다가왔다. 두 분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형님뻘 되어 보이는 중절모 노인이 다른 노인에게 말했다. “가자! 한 꼬푸 하자.” “안 할랍니더. 나 술 끊었습니더.” “뭐라꼬?” “인자 술 안 묵습니더.” 중절모 노인이 걱정되는 투로 물었다. “괜찮더나?” “뭐, 잔칫집 같은 데 가면 좀 땡기지만서도….” “그래, 잘했다. 잘 가제이.” 중절모 노인은 미련 없이 작별 인사를 건네고 총총히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노인은 글보다 밥을 공경한다.

일년에 한두 번 우리 학교를 찾아오시는 노인이 계시다. 조선 시대에서 시간 여행을 온 듯 하얀 도포 차림이다. 노인은 교무실에 와서 ‘배우는 학생들을 위해 붓글 한 점 써 주고 싶다. 필요한 글귀 있으면 말씀하시라’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딱히 청할 문구가 없다. 교감이 ‘기왕 때가 되었으니 점심이나 드시고 가라’ 권한다.

시끌벅적한 학교 급식소에서 노인이 식사를 하신다. 아이들 속에서 학처럼 꼿꼿하게 앉아 한 끼를 해결하신다. 그리고 아이들처럼 냅킨을 뽑아 입가를 닦고, 잔반을 정리하는 일용직 할머니에게 빈 식판을 반납한다.

“감사합니다. 참 잘 먹었습니다.”  최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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