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남자

 

 

 

 

 

 

가을이 석류의 계절인 이유는, 석류알 같은 선홍빛 추억이 가을 속에 송송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날 시내 다방에서 독서회 정기 모임을 마치고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토론을 벌이다가 늦은 밤 헤어졌다. 나는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마음을 바꾸어 혼자 걸었다. 무심하게 스치는 차량 불빛을 바라보며 최백호의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를 흥얼거렸다.

‘♪…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개 속에 가로등 하나~♬’

그 대목에서 노래가 끊겼다. 명색이 내 십팔번인데도 불구하고 다음 구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이미 취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언뜻 고개를 들어보니 초량삼거리 정발 장군 동상이 보였다. 장군님 무엇이 진실입니까. 문학과 진실은 어떤 사이입니까. 나는 집요하게 대화를 시도했지만 정발장군은 들은 척 만 척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어느 가게 앞에 비어 있는 평상에서 쉬고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총각! 쫌 일어나 보소!”

누군가 흔들었다. 눈을 떠보니 어떤 아줌마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줌마 얼굴 뒤로 환하게 밝은 하늘이 보였다. 행인이 오가는 시장 골목 근처였고 나는 평상 위에 곱게 누워 있었다. 아줌마는 빗자루로 가게 앞을 쓱쓱 쓸며 ‘자기 집 안방처럼 잘도 주무시더라’고 말했다.

어쩐지 누운 자리가 편안하더니, 나는 평상에 누워 별을 보다가 잠에 똑 떨어진 것이다. 이 남우세스러운 상황을 어쩌나. 일단 거처를 빌어주신 주인아줌마에게 넙죽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데 아줌마가 내 소매를 잡았다. “용기 잃지 말고….”

가게 아줌마가 무슨 봉투 같은 것을 호주머니에 찔러주었다. ‘뭘 이런 걸 다….’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앉으니 밤새 놓아버린 정신이 슬금슬금 돌아왔다. 한숨을 돌리고 아까 받은 봉투를 열어 보았다. 초대장이었다. 초대장 앞면에 후광이 빛나는 하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교회 성령대부흥회.

졸지에 동정을 받게 된 내가 한심했다. 심호흡을 하고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 아! 나는 온데간데없고 웬 굴뚝 청소부 아저씨가 비춰졌다. 깜짝 놀라 손가락으로 얼굴을 문질러 보니 시커먼 검정이 묻어나왔다. 밤새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을 온몸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 모습은 분명 사랑의 실패자 아니면 인생의 낙오자, 아무리 좋게 봐도 꾀죄죄한 노숙인에 지나지 않았다.

석류 빛깔처럼 부끄러운 추억이다. 하지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또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나는 밤늦게 혼자 술 마실 일도, 무작정 어디론가 걷는 일도 없어졌다. 허겁지겁 바쁘고 고단한 일상일 뿐이다. 아주 가끔씩은 나그네처럼 막연한 쓸쓸함도 괜찮은 것 같은데 뭔가 허전하다. 예전에 노숙인의 쓴맛을 보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려서 그런 게 아니다.

가을이라서, 남자의 계절이라서 그런 거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