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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봐

젊은 교생 선생님들이 실습하는 동안 내 인기가 추락했다. 교생 실습이 끝난 월요일, 나는 우리 반 아이들한테 쪽지를 나누어주고 소원을 적으라고 했다. 선생님이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라면 들어줄 것이고,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소원이라면 너희들 대신 부탁드리겠다고 했다. 열한 살 꼬마들이 나에게 바라는 소원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 옆 짝꿍은 여자끼리 앉기

* 중앙 현관으로 다니고 싶다

* 제티를 하루만 우유에 타 먹을 수 있게 해주기(제티: 우유에 타서 맛을 내는 분말)

* 언제 한번 학교에서 함께 컵라면 먹기

* 나 혼자 칠판을 예쁘게 꾸며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다

* 쉬는 시간에 선생님하고 축구하고 싶다

* (선생님) 식빵 복근 보여주기(식빵 복근 : 초콜릿 복근에서 유래됨. 중년의 복스러운 복근)

* 수업 시간에 교실 바닥에 누워 잠자기

그중 ‘제티를 하루만 우유에 타 먹게 해주기’는 내일 당장 실시 가능하고 ‘교실에서 컵라면 먹기’는 가장 추운 토요일 3교시에 실시하면 딱이다. 좋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쿠폰과 스티커를 팍팍 풀고, 그것을 빌미로 우리 반 아이들의 소원을 하나씩 들어줄 작정이다. 그래서 바닥을 기는 내 인기도를 회복하고 말 것이다.

내가 이렇게 아이들의 소원을 겁 없이 경청하게 된 것은, 오로지 작년 이맘때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열세 살 유리 덕분이다. 여학생 중 제일 키가 작았던 유리는 어느 날 나에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원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뭐냐고 물었더니 하나는 골마루 이쪽에서 골마루 저쪽 끝까지 신나게 달려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담임 선생님인 나와 ‘야자타임’을 가져보는 것이라고 했다.

맹랑한 녀석. 하지만 내가 그 발랄하고도 소박한 바람을 무시할 수 없었던 까닭은, 지난해 매일 이른 아침, 그 아이가 제일 먼저 등교해서 우리 교실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주는 일을 도맡아주었기 때문이다. 유리는 가지런히 창문을 열다가 가끔씩 운동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나를 발견하면 두 팔을 올려 커다란 하트를 날려주었다. 상쾌한 아침에 4층 교실과 운동장 사이 먼 공간을 두고 우리는 정겨운 텔레파시를 주고받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우선 신나게 골마루 달리는 비법을 아무도 몰래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그리고 지난겨울 끝자락, 운동장 한쪽에 혼자 앉아 있는 유리한테 다가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의 두 번째 소원을 풀어보자’고 했다. 유리는 마주 앉은 날 보고 할 듯 말 듯 망설이더니 결국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다음에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되면 하겠다며 웃었다. 아이는 제가 말한 두 가지 소원 중 하나는 제 스스로 이루고, 또 하나는 제 스스로 풀었다. 어른인 나는 그냥 귀를 열고 들어주기만 하였다.

그것이 내가 열세 살 유리를 통해 깨우친 소원풀이 비결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부자 되세요!’라고 외치는 것보다, 내 관심이 필요한 누군가에 다가가 ‘소원을 말해봐’라고 속삭이는 사람이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 나는 그 방법으로 인기를 회복할 계획이다. 그런데 고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원한 식빵 복근이 문제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28년 전, 그 누나의 선물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 누나’ 생각이 납니다.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늘 동상에 걸려 빨갛게 된 내 귀를 보면서, “이 귀마개가 너의 귀를 따뜻하게 해줄 거야” 하고 건네주었던 그 누나의 선물을 28년이 지난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득렬 42세. 언론사 근무

 

초등학교 3학년, 저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 수업을 마치면 석간신문을 배달했습니다. 요즘은 어린이나 청소년이 신문 배달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지만 그 시절에는 참으로 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최소한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배달하지만 그때는 걸어서 배달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시간도 참 많이 걸렸습니다. 신문 백여 부를 끈으로 묶어 어깨에 메고 걸어 다니며 대문 아래로 신문을 던집니다.

당시는 아파트가 드물었고 일반 주택이 대부분이라 집을 찾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구독하는 집 대문에 분필로 별도의 표시를 해두고 배달을 하기도 했습니다. 배달 부수에 따라 금액이 달랐지만 당시 받은 월급은 7천8백여 원. 1980년대 초반 자장면 가격이 3백 원 정도였으니, 지금 물가로 환산한다면 약 7~8만 원 정도의 화폐 가치라 생각됩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더욱 분주해집니다. 지국에서 나눠주는 우의를 입고, 신문이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로 덮거나 감싸는 등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대문 아래로 던져 넣지만, 비 오는 날이면 초인종을 눌러 주인에게 직접 신문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비 오는 날의 신문 배달은 인정이 넘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우의를 입었지만 비에 흠뻑 젖은 저에게 새 우산을 내주신 아주머니도 있었고, 거금 5천 원을 주시며 학용품을 사 쓰라는 고마운 분도 계셨습니다. 그 고마움은 성인이 된 지금도 그리움으로 정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누나도 매년 이맘때면 꼭 만나보고 싶은 고마운 분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누나의 나이는 당시 20대 초반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대구 동구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위치한 부엌가구 매장에 근무를 했던 누나는 신문을 배달하러 들어서면 항상 웃는 얼굴로 “고생 많다”며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어린이날, 추석, 설날에도 잊지 않고 선물을 챙겨 주었습니다. 연필 한 다스, 필통, 노트와 짓기장 등 학용품을 선물해 주며 공부 열심히 하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이브였습니다. 그 누나는 귀마개와 털장갑을 선물하며 “크리스마스 때 집으로 놀러 오라”고 말했습니다. “누나네 집에서 케이크랑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자”며 30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라고 약도까지 그려 주었습니다. “아파트 OO동 201호로 오면, 문이 열려 있을 거야” 하면서 꼭 오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저는 그 누나가 그려 준 약도를 손에 꼭 쥐고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를 전혀 타보지 않았던 저로서는 멀리까지 가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종점에서 내려 아파트의 동과 호수를 확인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2층에 올라가니 누나의 말대로 현관문이 반 정도 열려 있었습니다. 아파트 안에서 반가운 누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생각하고 열린 현관문을 통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안에서는 제 또래의 아이들 열 대여섯 명이 음식을 먹으면서 웃고 있었습니다. 누나는 나만 초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많은 아이들을 초대하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는 1층으로 다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너무 늦게 도착해서 많은 사람 속을 뚫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다음 날, 신문 배달을 가자, 누나는 “왜, 어제 안 왔었냐”고 물었고, 나는 집에 일이 있어서 못 갔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누나는 어려운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며 늘 후원을 하였고, 때로는 아이들을 집에 초대해 함께 밥을 먹으며 남모르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받았던 따뜻한 정은 평생 간직하는 참 소중한 기억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나 역시 그때 받았던 정을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더군요. 그래서 찬 바람을 맞으며 생활하는 아이들, 방학 때면 공부할 곳조차 없는 아이들처럼, 어렵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지인들과 함께 작은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옥매트 사장님은 따뜻한 매트를 준비하고, 전자제품 업체 사장님은 전기온열기를, 정수기 사장님은 따뜻한 물이 나오는 정수기를 선뜻 내놓았습니다. 꽃집 사장님은 판매 금액의 일부를 적립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요리사이자 한의사인 원장님은 무료 건강 검진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이 따뜻한 정들이 세상에 뿌려지면 더 많은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에서 살게 되겠지요.

그 누나도 그런 꿈을 꾸었겠지요.

당시 20대 초반이었으니, 그 누나는 벌써 50세가 훨씬 넘은 중년의 아주머니가 되었을 겁니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따스함을 나눠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그 누나가 보고 싶습니다.

한겨울의 추위를 녹여주었던 그 누나의 따뜻한 선물, 올해도 귀마개를 다시 한 번 꺼내 보며 그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해 봅니다.

전득렬님은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1999년 경북대학교 농경제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내일신문 입사, 현재 구미팀 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신년특집 | 지라니 합창단 단원장 열다섯 살 ‘헤린느 타카’ 양


 
 
지라니 합창단 단원장 열다섯 살 헤린느 타카
열다섯 살의 소녀 헤린느 타카(Heryne Taka) 양의 고향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외곽의 빈민촌 고로고초 마을이다. 학비가 없어 학교를 그만둘 위기에 처했었고, 병약한 어머니를 도와 길에서 좌판을 놓고 과일을 팔기도 했던 타카의 삶이 변화된 것은 지라니 합창단의 단원이 되면서였다.
4년 전, 합창단에 들어온 타카는 올해 1월, 이젠 세계적인 합창단으로 성장한 지라니 어린이 합창단 한국 콘서트팀의 리더인 단원장이 되었다.

최창희 사진 홍성훈

 

지난 11월 28일, 청주에서 펼쳐진 공연, 마지막 곡 ‘아리랑’이 끝나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앙코르 요청이 이어졌다. 앙코르 곡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이 우리말로 불려질 때 눈물을 흘리며 노래하는 소녀가 있었다.

헤린느 타카에겐 이번이 세 번째 한국공연이다. 총 26회로 예정된 공연의 두 번째 공연. 한국어로 부르지만 감동이 전해질 땐 언어가 필요 없단다. 내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합창단을 떠나야 하는 타카에겐 이번 한국 공연이 각별하다. 이런 것을 두고 어른들은 만감이 교차한다고 표현할까. 타카는 그 감동의 한가운데서 고향 케냐를 떠올렸다고 한다.

“부모님 생각, 고향 생각 그리고 모든 기억들이 떠올랐어요.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노래가 유난히 감동적이고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노래와 하나가 되는 것 같아요.”

타카는 케냐의 수도 외곽에 위치한 고로고초라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쓰레기’라는 뜻의 ‘고로고초’라는 말 그대로, 타카가 사는 마을은 전체가 거대한 쓰레기 야적장이다. 합창단에 들어오기 전에는 한 번도 다른 지역에 가본 적이 없는 타카에겐 그곳이 세상의 전부였다. 늘 악취가 풍기고 구정물이 도랑을 이루는 그곳에서도 불편한지 모르고 자랐단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탓에 병든, 가족 같은 이웃들의 죽음을 수없이 바라봐야 했단다. 살아서 어른이 되는 게 삶의 가장 큰 목표가 되어야 하는 아이들. 생존을 위한 절박한 삶의 조건들은 어린 소녀를 일찌감치 철들게 했다.

오히려 그런 가난한 형편 덕에 합창단에 들어오고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학비 걱정 없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고, 타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생각이 깊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의젓한 소녀 타카는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나눔의 가치들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합창단원이 되고 나서 생활이 크게 변화되었겠네요.

어떤 변화라는 건  생각도 못 했지요. 이곳과 관련된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격려해주고 도와줘서 정말 감동했어요.

한국엔 세 번째 공연 여행인데,

이렇게 다른 나라에 오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한국도 좋지만 고향도 참 좋아요. 케냐는 굉장히 아름답고 평온하고, 우리 마을도 사람들이 모두 가족같이 서로를 위해줘요. 물론 저도 쓰레기 야적장이라는 환경이 바뀌기를 바라죠. 저는 커서 꼭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어요. 케냐에 관한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요.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케냐를 도울 수 있도록.

합창단 활동이 타카의 꿈인 기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되겠네요.

격려와 경험은 제일 좋은 선생님이잖아요. 저는 지금 제 경험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해요. 지금 제가 받은 격려들이 나중에 기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를 주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좋은 기자는 용기 있는 사람이고 또 용기와 격려를 주는 사람이잖아요.

어떤 격려가 가장 큰 힘이 되었나요?

신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항상 나와 같이 계신다는 말이요. 언젠가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도요. 늘 기도할 때면 내가 아직 살아 있음에 감사드려요. 또 가족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에서 죽었고, 많은 아이들이 고아로 살아가는데 나는 아직도 살아 있고, 여전히 부모님이 계세요. 그래서 난 아주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가족이 사라지는 것처럼 굉장히 슬프죠.

해외 공연 가면 모두 쓰레기 마을에서 왔다 하고 불쌍한 아이들이 노래를 하네, 하는데 그런 표현이 듣기 싫을 때는 없나요?

아니요.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기분 나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가난한 나라에서, 쓰레기 마을에서 왔지만 고향이잖아요. 당당하게 여겨야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잘 알려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해야죠. 사람들과 공유하고 나눔의 소중함을 알리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언론을 통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기자가 돼서 저도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합창단의 설립 의미도 나눔이지요.

‘지라니(Jirani)’는 이웃이라는 뜻이에요. 지라니문화사업단은 우리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설립된 문화NGO(비정부 민간단체)라는 걸 알아요. 그렇게 나누는 단체이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일은 나눔을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생이 나눔이고 나눔이 인생이기 때문에요.

합창에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순종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예를 들면 지휘자님의 요청을 빠르게 이해하고 그에 적합한 행동을 취하며 따르는 것이지요. 아무리 자기가 리더의 자리에 오르고 유명해졌다고 해도 순종은 굉장히 필요할 거예요.

내 생각이 남과 다를 때는 어떻게 하나요.

처음에 상대의 의견을 잘 경청하면 다음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어요. 저는 주로 듣는 편이에요. 자주 아이들이 와서 많은 이야기를 해요. 웃기고 재미난 이야기도 하고, 가끔 힘든 얘기도 하고요. 웃을 땐 같이 웃고 힘들어할 땐 얘기 들어주고 고민을 얘기할 때는 다 듣고 난 뒤에 제 의견을 얘기해요.

타카의 합창단 활동은 올해로 끝난다. 2012년 지라니문화사업단에서 아트스쿨을 세울 계획이지만 그때까지는 새로운 환경과 마주해야 한다. 타카에게는 몹시 아쉽고 낯선 일이지만 지혜로운 소녀 타카는 역시 삶에 긍정적이다.

“언제나 제 능력보다 더 좋은 기회들이 왔었어요. 합창단에 들어올 때도, 단원장이 되었을 때도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과분했지만 참 행복했어요. 헤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앞으로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서 삶의 다른 면을 많이 배우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를 도와주신 분들께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고요.”

신년특집 | 사진가 신미식이 만난 케냐 지라니 합창단 아이들

‘하쿠나 마타타’는 스와힐리어로 ‘아무 문제없어’라는 뜻이다.
쓰레기 야적장 한가운데에 위치한 고로고초 마을은 상상 이상으로 빈곤했지만 그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희망이었다. 지금도 지라니 합창단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그 환희를 잊지 못한다. 아프리카 음악 특유의 흥겨운 리듬과 간절한 울림은 노래 실력 이상의 특별한 힘이 있었다.
2006년에 만들어진 지라니 합창단은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정작 고로고초 마을 사람들은 합창단의 정식 공연을 본 적이 없다. 노란색 정장 단복을 입은 아이들의 합창 사진을 찍기로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도 합창단의 멋진 공연을 감상할 기회를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너무 좋아하며 아이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췄다.
사진, 글 신미식

쓰레기가 바람에 날려 하늘을 덮었다. 그런데 왜 이 쓰레기들을 보면서 절망이 아닌 희망이 떠올랐을까.

+ 고로고초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외곽에 위치한 마을이다. 도시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속에서 하루치 양식이나 내다 팔 물건을 찾아낸다.

+ 아이들에 대한 첫인상은 무기력함이었다. 하지만 아이들 하나하나를 만나,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곧 그들의 숨겨진 재능과 천진난만한 내면을 만날 수 있었다.

+ 쓰레기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머리황새 외에 들개나 돼지들도 먹을 것을 찾는다.

 

아이들은 처음엔 제대로 된 발성은커녕 목소리조차 자신 있게 내지 못했다. 태어나서 음악 수업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깊은 영혼의 울림으로 노래를 하여 선생님들을 감동시키곤 한다.

+ 합창단 아이들이 연습실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밥을 먹는 것이다. 합창단에서 먹는 한 끼가 하루 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 매일 노래를 하는 아이에게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저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낼 것인지만 생각하던 아이들이 이젠 동생을 돌보고 책임감이 생기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다음에 크면…’이라는 꿈이 생긴 것이다.

+ 연습 시간에 늦어서 벌을 서는 아이들, 벌서는 것마저 재미있는지 아이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지라니 합창단의 대표곡인 후잠보 송은 ‘하쿠나 마타타’라는 후렴이 계속 반복된다.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삶의 이유를 찾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노래로 깨닫게 된 아이들이 쓰레기 야적장 주민들 앞에서 작은 공연을 선보였다. 한 달간의 고로고초 마을과의 만남은 사진 에세이집 <지라니 합창단, 희망을 노래하다>에 담았다.

우리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꽃으로 피어난 저마다의 바람들….

내가 바랐던 수많은 것들… 그리고 지금

김달래 44세. 주부. 경남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내 나이 삼십 대 후반,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내 집을 마련했다. 안방에 누우면 회색빛 하늘이 손바닥만큼만 보이던, 그래서 숨이 턱턱 막히던 전셋집과는 달랐다. 전망이 어찌나 좋고 햇볕도 잘 들든지, 꼭 하루가 25시간으로 길어진 듯 햇볕이 아주 오래오래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눈이 내린 날 베란다에서 바라보면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져 있었고 아침 공기는 또 어찌나 상쾌하든지. 그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던 송년의 밤, 노란 불빛 아래 올망졸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세 아이들과 남편이 까르르거리며 뒹굴고 있었다. 베란다 너머 보이는 바깥세상의 풍경은 반짝이는 불빛들과 폭죽 소리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또 한 해가 지나간다며 아쉬워도 하고, 새해에는 더 잘 살아보겠다 다짐을 하기도 하며 흥청거리고 있었다. 한데 나는 행복하면서도 괜히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이 아름다운 순간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하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신혼 시절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면회를 갔었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는 “달래야! 나는 이제 우짜꼬, 우짜꼬…” 하며 울고 계셨다. 더 살고 싶어도, 일어나 걷고 싶어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도 다시는 그리될 수 없는 그 절망감, 막막함, 두려움, 그 순간 모른 척 꼭꼭 덮어 두었던 나의 미래를 그만 보고 말았다. 많은 것들이 이루어진 순간에도 또 가장 기쁘고 행복하다 하는 순간에도 나는 그 장면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이 아름답고 또 슬프기도 한 생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또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는.

그전에도 나는 항상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 왔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잘해서 더 나은 대학에 가기를 바랐고, 대학 시절에는 교사가 되고 싶었고 그 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한집에 살고 싶었다. TV에서 수없이 보아온 것처럼 아들딸 낳고 평수 넓은 집에서 풍요롭게 살기를 바랐다. 마치 화성에라도 가는 것처럼 난생처음 온 가족의 바람이던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그렇게 내가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지면 뭔가 다른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던 것일까? 이룬 순간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또 다른 바람이 생겼으므로.

이제 내 나이 사십 대 중반, 나는 더 이상 새로운 바람을 갖고 싶지 않다. 살아오면서 가졌던 그 수많은 바람들을 이루느라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잃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얼른 자라서 몸이 좀 편해지기를 바라느라 내 아이들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를 놓쳐버렸다. 좀 더 넓은 집과 돈 많이 버는 남편을 바라느라 세 아이 아빠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어 버렸다. 공부 잘하는 자식을 바라느라 내 아이의 싱그러워야 할 사춘기 시절에서 생기와 자신감을 빼앗아 버렸다. 왜 그것이 이제야 보이는지.

이제 마음수련을 하며 바람조차 버리며 살려 한다. 바람이 욕심이 되어 소중하고 감사함으로 반짝이는 삶의 순간을 가려 버리지 않도록. 이제 남은 생의 나날들에는 지나간 나날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으리라 마지막으로 바라본다.

모용수 작. <외출>

캔버스 위에 오일. 41×53cm. 2008.

바람조차 내려놓을 때 찾아온 행복

송수란 48세. 주부. 러시아 모스크바 거주

20년의 결혼 생활을 이혼으로 종지부를 찍으면서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혼 초부터 이혼 시까지 전남편의 외도는 가정불화가 되었다. 20년을 살며 너무 많이 참아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에 마비가 와서 더 이상 몸을 가눌 수도 없을 때 이혼을 했기에 난 감히 고개를 떳떳이 들고 다녔다. 이혼을 하고도 난 억울하다 했다. 내가 무슨 죄가 많아 이런 일을 당했나 하면서 지난 세월과 전남편을 원망하면서 살았다.

이혼 후 힘든 몸과 마음으로 씨름하고 있을 때 착실하고 성실한 지금의 남편을 만나 모스크바로 왔다. 외도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참을 수 있다! 다짐하고 시작했지만, 매일 직장에서 늦게 돌아오는 남편을 하루 종일 혼자 집 안에서 기다려야 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모스크바 생활도 점차 힘들어지고 향수병까지 왔다. 너무 힘들 땐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나왔지만, 몸과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고 나니 욕망과 욕심이 조금씩 올라왔다. 자연히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스스로 혀를 찼다. 벽에 ‘처음처럼’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써 붙여가면서까지 처음 올 때의 바람 없는 마음으로 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모스크바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기를 일년 정도 하고 나니 우울증이 왔다. 좋은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갑갑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힘들어하다니, 이 마음은 도대체 무슨 마음인가?

그러다 마음수련을 하고서야 알았다. 끝도 없이 바라는 한 인간의 마음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나만을 위해 시간을 같이 해달라 바라는 마음을 버리니 남편도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수련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착실한 남편과도 힘들어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수련을 하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모용수 작. <사랑합니다>

캔버스 위에 오일. 105×105cm. 2010.

전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모든 게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사랑과 부부에 대한 도리를 담보로 엄청난 집착을 하고 살았다는 것을…. 주변에서 우려하는 결혼을 하였기에 남 보란 듯이 잘 살아야 된다는 자존심까지 더했었다. 수련을 하면 할수록 사랑의 가면을 쓴 채 똘똘 뭉쳐 있었던 나의 집착이 보였다. 항상 내 입장에서 상대를 보았고 당연히 상대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 계속 반복되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해주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도 다 나를 위한 것이었지 진정 상대를 위해 아무런 보상이나 바람 없이 해준 적이 없었다.

바라는 마음은 기대를 하게 되고 그만큼 욕심을 갖게 한다. 작은 바람이 이루어져도 또 다른 바람이 생긴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거나 화가 난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할 때만이 진실된 행이 되고 그 행이야말로 복이라는 사실을….

작든 크든 갈등 없는 부부는 드문 것 같다. 그 갈등이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이 된 것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바라는 마음은 다 내려놓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살 때 항상 건강한 가정이 될 것이다. 마음수련은 내가 잘 살도록 해주는 등대 빛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톰 케이스 (Tom Kayes, 김한국)

29세. 그래픽 디자이너. 미국 오하이오주 샤론빌 거주

제 이름은 톰 케이스, 한국 이름은 김한국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서울시 동작구에서 1982년 1월 5일에 태어났습니다. 제 입양 서류에 따르면 상도동 지역 이씨 성을 가진 분의 집 앞에 버려졌을 때 생후 18개월의 아기였다고 합니다. 당시 저는 담요에 단단하게 싸여져 있었고 옆에 놓인 가방에는 여분의 옷과 백일 사진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진 뒤에 저의 생년월일과 김한국이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고요. 이후 저는 장애가 있는 고아들을 돌봐주는 암사재활원에서 생활했습니다. 출생 시 제 등뼈가 완전히 발달해 있지 않아 일부 밖으로 드러난 척추 뼈 때문에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세 살 때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사는 케이스씨 가족이 저를 입양하였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입양한 마지막 아이였지만 7명의 동생과 11명의 손위 형제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3명의 친자식을 가진 후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16명의 아이들을 입양했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가정에 입양되었지만 저는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찬 십 대를 보냈습니다. 자주 싸웠고, 집에서도 말썽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 그것으로 대학에 가고 컴퓨터그래픽을 전공해 원하는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저는 불행했습니다. 거의 웃지 않았고 만일 웃는 경우가 있어도 그건 행복해서 웃는 건 아니었습니다.

2007년 처음으로 한국을 2주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제가 태어난 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긴 역사와 풍습과 문화가 있는 나라였고 그러한 것들은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너무 멋진 여행이었고 제 인생에 있어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기였을 때 머물렀던 고아원 방문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아주 심각한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가는 아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방문 4일째 되는 날은 제가 버려졌던 상도동 집에도 갈 수 있었습니다. 25년이 지난 당시에도 그 집은 여전히 그대로 있었습니다만 이선생님은 2년 전에 이사를 가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저는 이선생님을 만나 뵙고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모용수 작. <나들이>

캔버스 위에 오일.

117.5×176cm. 2010.

미국으로 돌아온 후 저는 매일매일 한국을 그리워하였습니다. 한국의 입양 기관에게,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해주셨던 모든 것과 그곳의 아이들에게 베풀어주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의 선물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한 달여의 기간 동안 매일 밤 한국에서 찍어온 3천여 장의 사진들을 가지고 모자이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만들면서 아이들의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가족도 없고 장애를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항상 웃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왜 나는 저렇게 행복해할 수 없는가. 가족, 친구 그리고 좋아하는 일까지 있는데 말입니다.

2008년 봄,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암사재활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러 그곳을 찾았습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오기도 하고, 경찰서에서 근무한다는 다섯 명의 청년은 일주일 휴가를 그곳에서 보내기도 하더군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저는 암사재활원에 있는 아이들을 돕고자 웹사이트를 개설해 저의 작품들을 판매해 보았습니다. 이 웹사이트는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아주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지금까지 거의 1만 달러를 후원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바람이라면 한국의 모든 장애 아동들이 한국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많은 한국의 가정들이 가족이 없는 아이들을 입양하는 것에 마음을 더 열기를 희망합니다.

친부모께서 안녕하시기를, 저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분들은 훌륭한 가족이 발견할 수 있는 곳에 저를 데려다 놓으셨고 생년월일과 이름을 남겨놓아 제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위한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제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진정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제가 태어났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www.MyWishForYou.org

우리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꽃으로 피어난 저마다의 바람들….

사랑하니까!

황교진 42세. 출판 편집자. <어머니는 소풍 중> 저자

그해 가을은 이상한 마음이 들 만큼 기쁜 일들이 많이 몰려왔다. 대학 졸업반 내내 밤을 새우며 준비한 건축 구조 졸업 작품이 교내 과학상에서 대상을 받았고, 꿈 같은 이성 교제를 시작했으며, 대학원 특차 합격으로 진로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했다.

그러나 1997년 11월 27일, 밤늦은 시간에 응급실로 급히 달려가 뇌출혈로 쓰러져 전신 마비가 된 어머니의 모습을 대할 때의 참담함이란….

하나님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어머니를 일으켜주시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바람도 땅에 떨어지고, 세 군데나 옮겨 다닌 7개월여의 병원살이 끝에 결국 ‘가망 없음’ 통보를 받고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와야만 했다.

괴로웠지만 조용히 연애를 끝냈으며, 슬며시 건축가의 꿈도 접었다. 대신 식물인간 상태의 중환자인 어머니의 유일한 의사요, 간호사, 영양사가 되었다.

어린 시절을 나는 거의 외할머니 댁에서 보냈다. 가난한 살림에 상경하신 부모님은 의류업을 하시며 나를 키울 수 있는 형편이 되기까지 따로 떨어져 살았다. 고아 아닌 고아처럼 사는 동안 어린 나는 늘 어머니 품이 그리웠다. 뒤늦게 이렇게라도 보상을 받는 것일까? 긴 세월 동안 우리 모자는 수많은 고통을 함께 견디며 둘이 한 몸처럼 지내왔으니 말이다.

쓰러지신 날까지 어머니는 모두가 잠든 새벽의 동대문 시장을 훤히 밝히며 생활고를 붙들고 계셨다. 나는 달라진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어머니 간호에 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의대를 나온 아들 이상이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렸다. 실제로 중환자를 간호하는 지혜를 날마다 연구하며 어머니께 적용시켜 갔을 때 기대 이상의 안정적인 모습으로 편히 계시는 어머님을 보며 나 또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 어머님 몸에 향기가 나도록 매일 청결하게 씻겨드리고, 영양이 부족하지 않도록 열량을 계산하여 죽을 만들어드리고, 표정만 보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감’을 얻으면서 고단한 현실은 견딜 수 있는 일상으로 바뀌어갔다.

그렇게 14년이 흘렀다. 환자인 어머님이 늘 편하게 주무시도록 애쓰는 동안 외출도 하지 못하고 잠을 편히 잘 수도 없고 공부도 접어야 했던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누군가와 말하고 싶은 갈망을 글쓰기로 달랬고, 그 글은 <어머니는 소풍 중>이란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어머니 덕에 백수 아들은 ‘에세이 저자’가 된 것이다. 덕분에 어머니 간호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배려해주겠다는 회사에 취직도 되었고 내 책을 읽은 한 여성과 결혼하여 올해 3월이면 벌써 두 아이의 아빠가 된다.

지금도 우리 모자는 변함없이 함께하고 있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어머니는 줄곧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계심을 느끼고 있다. 나는 어머니 덕에 고운 아내를 만났고, 글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출판 편집자로 살고 있으며, 이 땅의 소외되고 고통받는 약자들을 돕겠노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건축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 집을 짓는 영혼의 건축가로 성장한 것이다. 내가 바랐던 것은 어머니를 잘 간호할 수 있는 아들이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떳떳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치 있는 꿈을 가지고 살도록 이끄셨다. 어머니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길을 열어주신 분이다. 의식 없는 식물인간 상태의 중환자이지만, 내겐 언제나 건강하고 포근한 어머니로만 보이는 당신의 곁이 행복하다. 사랑하니까!

모용수 작. <사랑>

캔버스 위에 오일.

90×90cm. 2010.

바람을 이루기 위한 비법, 다이어리 이야기

김은정 38세. 사회복지사. 대구시 북구 복현2동

3년 전부터 새해가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다이어리에 올해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계획 등을 적는 것이었다. 늘 새해가 되면 뭔가 계획을 세워보곤 했지만 어느새 흐지부지되고는 했었는데, 적는 습관을 들이게 되면서 나의 삶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소소한 생활 속의 기적이었다.

작년 같은 경우는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에 대한 바람을 가졌었다. 공부를 하기 전 나름의 계획을 다이어리에 적고는 나태해지려고 할 때마다 다이어리를 들여다보곤 했다. ‘아~ 내가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구나’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구나’ 내가 세운 계획과 바람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는 것이다. 그리곤 ‘열정을 불태우리 불끈!’ 하는 스탬프를 찍어가며 공부를 했다. 그 덕분인지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또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취미로든 뭐로든 글로 할 수 있는 부분에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글 쓰는 재능을 살려 참여할 수 있는 공모전 같은 것들이 다양하게 많았다. ‘바람’을 적어놓고 노력하는 동안 공사 모니터링 요원에도 뽑히고 잡지에 글도 실렸다. 공모전에도 두 번이나 당선이 되었다. 나에게는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다 다이어리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들을 정리하고, 희망 사항으로 적어놓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체크해가면서 도전을 하니, 좋은 결과도 따라준 것이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이루면서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

단순히 꿈을 적었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바라는 대로만 이루어진다면 그 또한 얼마나 재미없는 삶이겠는가. 다만 이 ‘바람’이 그저 막연하거나, 허황된 것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기에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 같다. 때론 좌절도 있고, 실패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꿈과 희망을 적어나간다. 기록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실천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나에게 기록이란 간절한 염원의 시작이고, 또 나를 힘 나게 하고 이루게 하고 또 도전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것 같다.

새해에는 ‘치유의 삶’을 살고 싶다. 사회복지사로서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자 하고 있지만 나 스스로 힘든 마음을 치유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게 되면서, 내 마음속의 아픔과 힘든 것들이 치유되는 경험들을 했다.

나에게 글쓰기가 치유라면, 어떤 이들에게는 음악이나 미술로써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해에는 미술 치료나 음악 치료, 독서 치료 같은 분야를 배워보고 싶다. 아프고 힘든 마음을 문화로써 치유할 수 있는, 유난히 마음이 추운 누군가에게 따뜻한 등불이 되어주는 그런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 다이어리를 편다. ‘등불 같은 사람이 되자’라고 쓴다. 이제 나는 매일매일 다이어리를 펼치며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스스로 격려하고 다짐할 것이다.

모용수 작. <사랑 이야기>

캔버스 위에 오일. 16×22.5cm. 2009.

‘이 세상은 그대 위해 있노라’

하며 살면 좋겠다

강영순 69세.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2동

나는 아는 것도 없는 늙은이지만 그래도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것들을 말해본다.

지금 제일 바라는 것은 이 세상에 노처녀, 노총각이 없었으면 좋겠다. 결혼을 해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면서 <월간 마음수련>에 실린 우명 선생님 말씀처럼 마음 비우고, 나는 없다 하고, 이곳 세상은 그대 위해 태어났노라, 하면서 살면 좋을 것 같다.

시부모들은 며느리들에 대해 늘 고맙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사위가 백년 손님이라면 며느리는 이백년 손님이라는 생각으로 옛날처럼 야단치고 그럴 게 아니라 고맙다며 잘 대접을 했으면 좋겠다. 손자 손녀 낳아주고 제대로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까 너무 고맙지 않나.

자녀들과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다시 생각하고 얘기하자고 하면 좋겠다. 아들이나 딸이 내 뜻하고 같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검토해보자 하면서 좀 더 자식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이야기하면 큰 문제 없이 풀린다.

화가 나서 욕을 하게 돼도 좋게 했으면 좋겠다. ‘이 나쁜 놈’보다 ‘이 성공할 녀석’ ‘이 잘될 녀석’, 그런 식으로 하면 결국 자기에게 좋다. 절대로 누구한테든 나쁜 놈 소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이라도 ‘에이, 잘될 녀석’ 하면 마음도 좋다.

손녀, 손자 7명이 그야말로 뛰어난 사람은 못될망정 나쁜 사람은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기 재능을 잘 살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손자 손녀에게 재능에 따른 별명을 붙여 부른다. 그림을 잘 그리는 큰손녀에게는 강사임당이라 부른다. 강장군, 강박사, 강장관, 강발명왕, 우리 외손자한테는 한금메달, 한총리 그렇게 부른다.

모용수 작. <첫사랑>

캔버스 위에 오일. 45×51cm. 2008.

항상 상대를 위해 복을 빌어주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부터 임산부를 보면 ‘순산하세요, 건강하게 잘 자라 훌륭한 사람 되세요’라고 마음속으로 세 번 기도하면서 지나가게 된다.

운전할 때 넉넉한 마음으로 했으면 좋겠다. 내가 5분 늦게 가면 된다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안전거리 잘 두고 지시등 잘 켜고 양보 운전 하고 법 잘 지키면 우리나라 사고가 많이 줄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공중 질서를 지켜주면 좋겠다. 길에 쓰레기가 보이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쓰레기를 주울 줄 아는 젊은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지금 혹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노후를 대비해서 자동차 운전 기능 강사 자격증을 준비했다. 두 번의 고배 끝에 작년에 1, 2차 모두 합격했다. 자격증을 취득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전철에서도 책을 보고 짬만 있으면 책을 보니까 되었다. 젊어서는 백 번 읽어서 됐다면 삼백 번은 읽으려고 했다.

내 나이 또래분들은 “이 나이에 뭘해~” 하는 신세타령보다 용기를 가지고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하고자 하는 사람한테는 걸림돌이 없다. 뭐든 못 할 것이 없다.

젊은 시절 내가 바란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워낙 가난했기에 남부럽지 않게 잘살고 싶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왜 돈벌이가 생각처럼 안 될까 늘 의문이었다. 그러다 <월간 마음수련>에서 우명 선생님의 말씀을 접하고는 나의 의문이 풀렸다. 돈벌이가 안 되는 게 아니라 더 많이 벌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서 힘들었던 것이다. 그냥 지금에 만족하면서 일도 하고 생활하면 건강도 좋아지고 그냥 그 자체가 부자인 것이다. 욕심을 버리자 출근길에 콧노래가 나오고,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허망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마음의 거품을 뺐으면 좋겠다. 늘 닦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내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죽는 그날까지 일을 하는 것이다. 바람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미래에 대한 꿈이 없으면 사람이 나태해지게 될 것 같다. 앞으로 내 밭을 사서 예쁜 나무를 심고 싶다. 그리고 항상 고마운 아내가 사는 날까지 건강하기를 바란다.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4)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4)

흔히 쓰는 말 중에 ‘존재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라는 존재를 뚜렷이 각인시키기 위해 자신을 치장합니다.

반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사람을 ‘투명인간’ ‘유령’이라고 부르지요.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지성 선수의 별명 중 하나는 ‘유령’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별명이 꽤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경기장 어디든지 순식간에 나타나 공을 뺏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니,

존재감 없음과는 무관하지만, 십 년 전에는 그에게도

‘보이지 않는 유령’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죽도록 뛰어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유령이었지요. 당시에는 대학에서도,

프로팀에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에도 그는

미래는 더 나은 자신이 되어 있을 거라 믿었다 합니다.

더 나은 자신이 되는 방법은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맨유에서도 언론들은 티셔츠를 팔러 왔다고 했고,

벤치에만 머물 거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팀을 위해 뛰는

그의 진심은 이제 그를 ‘이름 없는 영웅’이라 불리게 합니다.  

박지성 선수는, 승리는 누군가 한결같이 헌신하고

끝까지 배려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령’을 자처합니다.

‘연습벌레’로도 불리는 그에게  

슈팅 훈련은 머릿속을 비우는 수련의 시간이자,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한 버림의 시간이지요.

벤치에 앉아 동료들의 경기를 바라볼 때에도,

그의 활약으로 팀이 승리했을 때에도,

더 나은 자신으로 변화하기 위해 그는 지금까지의 나를 버립니다.

 

참고 <더 큰 나를 위해 나를 버리다> 박지성 지음. 중앙북스

공감의 글쓰기, 마음 빼기 힘 빼기부터

정리 문진정

요즘 사설 글쓰기 강좌와 글쓰기 관련 서적이 큰 인기다. 휴대전화 문자에서부터 블로그, 트위터처럼 글로 소통하는 매체가 늘어나면서 글쓰기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가슴 뭉클한 광고 카피가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보고서 한 장으로 성패 여부가 판가름 나기도 한다. 전자 기술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그 기본은 글쓰기인 것이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두려움부터 앞선다. 글은 생각과 인격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간소한 글은 뭔가 부족하고, 긴 문장이 유식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고 있었던 것이었다’처럼 늘어지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생각하는 대로 말이 나오듯이 글도 마찬가지다. 명료한 생각이 명료한 글이 된다. 진실과 논리는 꾸미는 말이 필요 없다. 오히려 화려한 말은 독자의 신경을 쏠리게 해서 글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오늘날 독자들이 원하는 명문은, 미사여구를 아로새긴 고답적 문장이 아니라 쉽고 분명하면서 마음을 담은 메시지다. 파워블로거의 글이나 인기 드라마의 대사만 보더라도, 솔직하고 인간미 넘치는 글이 성공을 거두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먼저 군더더기를 걷어내는 것이 좋은 글쓰기의 지름길이다.

 

 

 

 

 

‘있을 수 있는 것’을 빼자

국립국어연구원에서 2000년부터 3년간 국어 사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빈도가 가장 높은 단어는 ‘것’과 ‘있다’로 나타났다. 외래종 표현인 ‘수’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글쓰기에서 3적으로 꼽혔다. 내가 쓴 글에서 ‘있다’ ‘수’ ‘것’ 이 세 가지 단어만 빼보면 생기 있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진다.

독자 입장에서 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독자를 항상 유념해야 한다. 독자의 시간과 노력, 인내력을 낭비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독자가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받도록 간결하고 짧게 써야 한다. 요즘은 글을 읽기 전에 전체 분량을 확인하고, 긴 글은 잘 읽으려 하지 않는다. 가독성을 염두하고 가능하면 짧게 쓰는 것이 미덕이다.

두려움을 버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더 멋진 표현으로 거창한 글을 써서 ‘나’를 감추려다 보니 미사여구는 많아지고 문장은 길어진다. 그러나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글쓴이의 열정과 인간미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호소력 있는 간결한 문체가 드러난다.

머리가 아닌 손과 가슴으로

글은 생각 없이 써야 한다. 즉,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써야 한다.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고정관념이 옳고 그름을 검열하기 전에, 가슴속의 언어를 잽싸게 종이 위에 옮겨야 한다.

빼는 만큼 좋아진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잘못된 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루가 지난 후 다시 찬찬히 읽어보라. 글이 장황하게 늘어지거나 중복되는 단어가 많을 것이다. 고쳐 쓰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참고 도서 <글쓰기 만보> 안정효 / 모멘토

<그러니까 당신도 써라> 배상문 / 북포스

<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 돌베개

빼기 방법

보여주기 식 화려한 단어보다는 정확한 단어를 구사한다. ① 중복된 단어와 부사 및 외래어 번역 표현을 자제한다. ② 빼기 아까워서 끼워 넣은 문장이 어울리지 않을 때는 과감하게 잘라낸다. ③ 단기간에 좋은 글을 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끝까지 최대한 다듬는다. ④ 남의 글을 잘라내듯 자신의 글을 잘라내는 것이 진실한 작가가 되는 첫걸음이다.

발표울렁증에서 벗어나다

이정훈 30세. 회사원. 서울시 강서구 화곡본동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힘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이 책 읽기를 시킬까봐 늘 마음이 초조했고, 대학에 와서는 발표가 있는 수업은 아예 수강 신청을 안 했다. 어쩔 수 없이 발표를 해야 할 때면 얼굴이 굳어서 말도 잘 안 나오고, 심하게 긴장하고 떨었다. 그러다가 조그만 실수라도 하면 그 일을 곱씹으며 열등감에 괴로웠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인간관계도 좁아지고 친구를 사귀는 것도 싫어졌다. 외출을 싫어해 방 안에서 우울하게 지내는 날이 많았다. 왜 이렇게 남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힘들까. 생각을 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항상 남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하면서 내 생각은 참고 누르다 보니, 어느 때는 머리끝까지 차올라 폭발할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그러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살아온 삶을 버리는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가부장적이셨던 아버지가 방 안에 있는 나를 불러내어 꾸중을 하신다. ‘너는 왜 이렇게 공부를 안 하냐.’ ‘밥 먹을 때는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자세는 왜 이러냐’…. 허구한 날 혼이 났다. 아버지 앞에 무릎 꿇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이 못다 한 공부를 열심히 하길 바라셨고 그렇지 않는 나를 못마땅해하셨다. 한 번도 칭찬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못났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비하하기 시작한다. 그거였다. 남 앞에 서지 못하고, 내 이야기 하기를 어려워하고, 사람들 만나는 게 불편했던 이유가….

원인을 알았으니 버리면 되었다. 마음수련을 하며 나는 과거에 얽매인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 당시를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웠지만 버린 만큼 달라지는 내가 신기했다. 열등감이 차츰 버려지면서 점점 사람들을 대하는 게 편해졌다. 어떻게 잘 말해야 인정받을까, 창피를 안 당할까, 머릿속에 늘 생각이 많았는데, 이젠 내 이야기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열등감도 사라졌다.

여러 사람 앞에서는 물론이고 단 한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두려워했던 내가, 지금은 회사에서 총무직을 맡고 있다. 공지사항도 발표하고 아침 조회도 진행한다. 느긋하게 우스갯소리도 해가면서 말이다.

드디어 담배를 끊다

김명일 41세. 직장인. 전북 남원시 주천면 송치리

“몸에 안 좋은 걸 왜 그렇게 피워.”

2006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내는 그날따라 더욱 진지하게 담배를 끊으라며 압박을 했다. 홧김에 “알았어. 끊을게, 끊어” 했지만 이제는 정말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 때부터 피우기 시작한 담배를 하루에 두세 갑은 피웠다. 몸에서는 늘 담배 냄새가 났고, 건강도 안 좋아지고 있었다.

새해가 될 때마다 올해는 꼭 끊어보리라 다짐했지만 삼 일도 못 가 다시 피우기 일쑤였다. 나는 당장에 담배와 라이터를 버렸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담배 생각이 안 날 리가 없었다.

나는 마음수련의 사진 버리기 방법으로 담배와 관련된 모든 기억들을 떠올려 버렸다. 담배를 처음 피우던 때, 친구들과 숨어서 피우던 기억, 아버지가 담배 피우시는 모습까지…. 특히 나는 긴장하거나 화가 날 때면 담배를 피우곤 했는데  그럴 때도 담배를 찾기보다는 계속 그런 마음들을 버렸다.

어느새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지더니, 담배 냄새가 싫어졌다. 아내가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이해가 갔고, “담배 피우는 것 하나 이해 못 하냐”고 타박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놀라운 것은 담배를 끊고 3개월 동안 계속 가래가 나올 때였다. 폐에 박혀 있던 유해한 것들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도 맑고, 피부도 좋아졌다.

예전에 담배 값으로 나가던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루에 두세 갑이면 한 달이면 거의 20만원. 그 돈으로 적금을 부어 나중에 아내와 해외도 다녀왔다.

여태껏 한 일 중 가장 잘한 것이 담배를 끊은 것이라 생각한다. 담배 끊은 사람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 담배 끊기다. 하지만 습관이라는 것도 자기 마음에 찍어놓은 기억의 사진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 사진을 빼내면 반드시 그 습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허를 다 없애면 참만 남는다. 새 세상에 일하여 복 쌓자.

허를 다 없애면 참만 남는다

세속의 우리나라 말에 “허허참, 기가 막혀”라는 말이 있다.
허허참이란 허허를 다 없애면 참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허상세계인 이 세상에 살면서 더하기 공부만 하여왔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살면서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 맡고 살아오면서 온갖 것을,
세상을 가질 수가 있는 마음을 다 먹어서 살아왔으니
지금의 나가 되지 않았는가.
더하기를 하는 것에는 끝이 없고 더하면 더할수록
허인 사진만 더 가져 고통 짐만 가질 뿐이다.
허허를 없애고 없애다 보면 끝에는 참만이 남을 것이다.
허는 허이기에 없애고 없애다 보면 없어지지만
참은 참이기에 아무리 없애도 그냥 있는 것이다.

참은 가장 나중에 남는 것이 참이라.
허를 다 지운 자가 참인 자라.

글, 그림 우명

새 세상에 일하여 쌓자

가도 가도 가도 끝이 없구나
부질없는 인생사에는 좋고 나쁘고가 있어
좋은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구나
부질없이 바쁘기만 바쁘지만
해도 한 것이 없고 가도 갈 곳이 없구나
소리 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허덕이며
덧없는 인생사만 팔고 살지만
인간이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허인 자기를 지키고
허인 자기의 명예와 안위를 위해서이라
오로지 나만 위해 나의 꿈속의 세상서 허덕이다
빛의 나라에 나니 눈 밝아 천지의 이치를 알겠구나
인생에는 가질 것도 가지고 갈 것도 하나도 없지만
참 나라에 복인 재물을 쌓는 자는 참 재물이 많구나
인간이 살아 해야 할 것은
빛인 참세상에 나고 참세상서 일하여
많은 복 짓는 것이 현인이다
세월은 말없이 흘러가고
제일 못한 자는 무거운 짐 지고 허덕일 것이다
많은 이가 이렇게 살지만
그것을 아는 자도 세상에 없으니
인간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가 다 죽어봐야만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자기를 놓고 삼자가 되어 봐야 자기 입장서 안 보듯
자기 죽고 세상인 우주 입장이 되어 보면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이라
세상 난 것은 살기 위해 났고
참인 세상에 재물 쌓기 위해 났다

덧없는 인생을 살지 말고 빛이 있는 나라에 나서
모두가 새 세상에서 일하여 부자인 새 세상을 만들자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등 다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