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해 ‘까마중’을 다시 만나다
유연동 47세. 직장인.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몇 년 전부터 산에 가면 꽃과 신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이러한 식물보다는 사람들이 먼저 보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사실은 내가 말한 것이다) 산에 가서 꽃이 보이기 시작하면 인생이 꺾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하기야 내 나이 벌써 40대 중반을 넘어버렸으니 꺾인 나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아파트 뒤편으로는 학의천이 흐른다. 그 옆 산책길은 나설 때마다 심심치 않게 나를 반겨준다. 봄이면 이름 모를 들꽃들이 기다리고 있고, 여름, 가을, 겨울도 제각기 다른 계절 색으로 나의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팔월 말, 더위가 꺾여가고 있을 무렵, 나는 또다시 주말에 학의천을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두 가지 식물, 그것은 늦게 올라오고 있는 들깨와 까마중이었다. 들깨는 깻잎으로 흔히 보는 것이었지만 까마중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나는 내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기르고 보살피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하나씩 조심스럽게 뽑아 아파트로 가지고 왔다. 새 화분에 하나씩 심었다. 다음 날 아침 물을 주고 출근했다. 퇴근해서도 화분부터 살피게 되었다. 근데 들깨는 없어졌고 까마중만 남아 있었다. 아내는 들깻잎에 벌레가 너무 많아 할 수 없이 버렸다고 했다.
사실 집사람은 화분 가꾸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원예니 농사니 하는 것에는 원래 깡통인지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물 주기뿐이었다. 물도 성의 없이 줬다. 가끔 생각나면 주고 물주는 양도 일정하지 않았는데, 나도 화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 집에서 새 둥지를 튼 까마중은 기대 이상으로 씩씩하게 자라났다. 자슥이 물만 주면 아무 소리 안 하고 쑥쑥 커 나갔다. 특유의 굴광성으로 해를 쫓아다니느라 줄기는 구부러졌고, 가을로 들어서자 벌써 첫 열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까만 열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초엽이 되자 나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 까마중은 일년생 풀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죽어야 한다. 그런데 이놈은 죽지 않았다. 겨우내 베란다에 뿌려지는 햇빛과 나와 집사람의 물 주기로 겨울을 버텨냈고 봄을 맞았다. 당연한 결과인지는 몰라도 일년생이 다년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박남철 작. <Walk 45-한낮>
116.7×80.3cm, 목천에 수간채색, 아크릴릭
2011
새봄이 되자 화분이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집사람은 큰 화분을 준비해 주면서 나더러 학의천에 가서 흙을 퍼 오라고 했다. 내 친구 까마중을 만났던 또 하나의 내 친구 학의천으로 비닐봉지를 들고 나갔다. 흙을 캐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 눈도 의식이 되고. 다리 밑으로 가서 공사 현장에서 쓰는 질 낮은 모래를 싸들고 집으로 왔다. 분갈이를 하는 내 맘속에 걱정이 앞섰다.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이 흙은 영양가가 거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생각보다 굵고 단단해져 있는 뿌리만이 위안이었다.
역시나 흙이 바뀌었건만 물만 주면 또 무럭무럭 자랐다. “고놈 참 신기한 녀석이야.” 아내는 까마중이 뭐에 좋다나 어쨌대나 하며 열심히 따 먹는다.
하지만 여름이 올 무렵 내 친구 까마중은 새로 들어온 이름 모를 화초에 집을 내주게 되었다. 나는 뽑혀진 까마중을 학의천에 갖다 버렸다. 시들어가는 까마중을 보면서 어린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 들판에 널려 있는 까마중은 실제로 노랑 까마중이었다. 노랑 까마중은 검정 까마중보다 더 달고 껍질도 부드러웠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까마중밭에 숨으면, 숨기 위해 까마중밭에 온 건지 까마중을 먹기 위해 온 것인지 망각하고는 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들은 어느새 민주화의 주역이 되었고, 이제는 이 사회를 움직이는 주역이 되어버렸다. 무공해 까마중의 힘으로.
오늘은 비가 왔다. 회사 옆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던 나는 도시의 시멘트 틈 사이로 꿋꿋이 잎을 드러내고 있는 내 친구, 까마중을 발견하게 되었다. 갈등이다. 이 친구를 차에 모셔가야 하나 어째야 하나.
아버지가 주신 매직박스
에드워드 김(김희중)
73세. 사진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인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금고에서 보자기로 싼 카메라를 꺼내 보여주셨다. 그것은 아버지가 애지중지 아끼시는 바람에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이 이어졌다.
“카메라는 사진만 만들 수 있는 박스가 아니라 매직박스이니, 방학 숙제로 카메라가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 알아내 보거라.”
그리고는 거리 맞추는 방법, 노출을 조정하는 요령 등 간단한 카메라 작동법을 설명하시고는 필름 몇 통을 주셨다.
카메라가 무슨 마술을 부린다는 것인가? 싶었지만, 카메라를 마음껏 사용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아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때만 해도 카메라가 여간 귀한 게 아니던 시절이라 아이들도 마냥 좋아라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을 찍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뭐 찍을 만한 것 없나,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주변을 눈여겨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항상 눈앞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이 서서히 보였다.
한번은 동네에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새댁이, 언제 낳았는지 갓난아이를 안고 나와 있었다. 아이가 칭얼대며 보채자 그녀는 저고리 앞섶을 풀더니 보름달처럼 둥근 젖가슴을 꺼내 아이의 입에 물리는 것이었다. 용기가 부족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지만 아이가 쌕쌕이며 젖을 빠는 모습과 젖을 물린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때부터 나는 익숙하던 것들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눈으로 새롭게 사물을 바라보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이 카메라라는 것이 사람을 보게 만드는 기계로구나!”
방학이 끝날 무렵 아버지와 마주 앉아 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점을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께선 매우 기뻐하셨다.
박남철 작. <Walk>
53×53cm, 목천에 수간채색
2011
“희중아, 사람들은 항상 눈을 뜨고 살지만 눈앞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라는 것이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주니 이게 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때부터 아버지의 매직박스와 함께 내 삶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시간만 나면 나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전국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 길에서 우리 농부를 다시 만나고, 우리 고향을 다시 만나고, 무심한 일상의 풍경들을 다시 만났다.
그렇게 새로 만나는 세상은 가슴 벅차리만큼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점차 내가 느낀 그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을 처음 접하면서 발견한 1950년대 우리의 모습들을 주제로, 학창 시절 두 번에 걸친 개인전을 열었다.
그 이후 사진의 매력에 이끌려 60년이 가까이 되도록, 사진과 함께 살아왔다.
아빠의 마당
이유진 34세. 플로리스트.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결혼하기 전까지 한 번도 아파트에 살아 보지 않았습니다. 6살 이후론 줄곧 한집에 살았으니 아파트에 살 기회도 없었지요. 제가 자란 작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은, 소위 ‘집 장사’들이 지은 것으로 이렇다 할 멋도 매력도 내세울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집을 처음 자식들에게 보여주시던 날 부모님의 흥분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집은 다 지어지지 않고 골조뿐이었고, 마당에는 전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심어져 있었지요.
“지금은 여기 나무가 하나밖에 없는데, 봄 되면 나무를 많이 심을 거다. 이쪽에는 목련을 심고, 집에는 대추나무가 있어야 되니까, 그것도 심고.”
그 집, 그 마당에서 아빠는 오래 바쁘셨습니다.
봄이 되면 마당에는 제일 먼저 목련이 꽃을 피웁니다. 그 후 진달래가 피고, 철쭉이 피고, 모란도 피고 장미도 피고 졌습니다. 가을이면 감이 영글고 대추가 익었지요. 겨울에는 전나무에 전구를 감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둘렀습니다. 어느 날이라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당에서 흙 삽을 들고, 또는 호스를 들고 있는 아빠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마당이 어린 제게는 얼마나 거대한 공원이었는지요. 작은 오솔길에서 언니, 오빠와 고무줄놀이를 하고 소꿉장난을 했습니다. 철쭉 피는 봄이면 돌에 올라앉아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장미 철에는 큰 종이에 장미 축제라 써 붙이고 가족끼리 파티를 벌이기도 했지요. 아빠는 어린 딸이 좋아한다는 핑계를 대며 새장을 걸고 닭도 키우고, 강아지도 키우셨습니다. 그 마당에서 대추를 따 먹고, 감을 따 먹는 동안 저는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가고, 오빠가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고, 언니가 결혼을 해 아이를 둘 낳았습니다.
박남철 작. < Walk 45-16>
53×53cm, 목천에 아크릴릭
2012
어른이 되어 대학 다닌다고, 외국에 공부하러 간다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 본 아빠의 마당은 얼마나 좁던지. 두세 걸음이면 성큼 현관에 닿을 만큼 좁디좁은 곳이었지요. 어린 저에게는 그토록 드넓은 마당이었지만, 아마 아빠에게는 처음부터 이렇게 손바닥만 한 마당이었던 걸까요? 아빠는 그곳에서 어떻게 그런 마법을 보여주신 걸까요?
오래 살던 집을 떠나, 지금은 아파트 11층에 살고 있습니다. 멀리 내다보는 전망도 좋고, 고층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잘 가꿔진 아파트의 정원을 내려다보는 일은 어쩐지 쓸쓸합니다.
온갖 벌레들이 윙윙대고 거미줄과 길고양이들이 활개 치던 아빠의 마당이 그립습니다. 내가 자란 곳은 그 마당이었음을, 그 시절이 내 삶의 씨앗이 되어, 오늘을 열매 맺게 해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시대에 말이 가진 신뢰는 얼마나 될까. 아마도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이유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기 때문이다. 인터넷만 열면 우리는 단박에 엄청나게 많은 말들의 홍수를 목도할 수 있다. 그 수많은 주장들이 던지는 호기심에 이끌려 클릭을 하다 보면 때론 ‘아 속았다!’고 느꼈던 이른바 ‘낚시질에 걸린’ 경험들은 이제 누구나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러니 말의 공신력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때문에 <무한도전>의 ‘말하는 대로’ 특집은 새삼 말의 신뢰를 떠올리게 하는 미션이었다.
사실 <무한도전>의 ‘말하는 대로’ 특집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참 게임에 몰두하면서 벌칙으로 무리수에 가까운 공약을 내걸고는 결과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벌칙을 수행하던 ‘지못미’ 특집도 알맹이를 보면 이 특집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박명수와 정준하가 다크나이트 조커와 쿵푸팬더로 분장한 채 길거리를 활보하던 그 벌칙 수행은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무한도전>의 세상을 이미 보여준 바 있다.
알래스카에서 김상덕씨 찾기 미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식객> 편에서 농담 식으로 던진 ‘알래스카 김상덕씨’ 얘기가 일이 커지면서 실제 미션이 되어버린 사례다. 그들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알래스카까지 날아가 혹한에서 바늘 찾듯 김상덕씨를 수소문했고 결국 찾아내기도 했다. 작은 말 한마디가 거대한 사건으로 연결된다는 것, 그 자체가 주는 흥미진진함은 <무한도전>만이 가진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공약으로 내건 것은 반드시 이뤄진다.
<무한도전> ‘말하는 대로’ 특집은 이러한 공약형 미션(?)의 업그레이드판이다. 이미 말하면 수행하는 것이 하나의 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특집은 가능해진다. 각자 이름이 걸린 자신의 버스가 있고, 멤버들은 자기 버스 혹은 상대 버스에 육하원칙 미션을 집어넣을 수 있다. 육하원칙이 완성되면 해당 버스의 멤버는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데, 노홍철은 마지막 조커를 사용, 자기 버스의 미션을 다른 멤버들에게 ‘반사’ 해버린다. 이렇듯 빈 공간이 채워질 때마다 미션 내용이 뒤집어지는 반전은 ‘말하는 대로’ 특집의 묘미였다.
미션 중 박명수는 조커 활용을 잘못 이해해 미션을 적지 않고 그저 조커라고 써서 붙여놓음으로써 큰 웃음을 주기도 했는데, 이것 역시 박명수에게는 하나의 공약 수행으로 처리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무한도전>을 재개하면서 그가 내건 “목 놓아 웃겨 드리겠다”는 공약을 자기가 스스로 망가짐으로써 수행하게 되었으니까.
이처럼 <무한도전>의 세계는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세우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이제 버스에 적힌 대로 정준하는 독도로 달려가 애봉이 가발을 쓰고 비키니를 입은 채 열무국수와 콩국수를 먹을 것이다.
말의 힘이 사라지면서 생겨난 신뢰 없는 세상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특히 요즘처럼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 홍수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도대체 무슨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무한도전> ‘말하는 대로’ 특집은 재미는 물론이고 큰 의미까지 거둔 전형적인 <무한도전>식의 미션이었다고 여겨진다. 그저 웃고 즐겨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곰곰 씹어보면 더 감칠맛 나는 생각거리가 담겨져 있는 그런 미션. 과연 <무한도전>이 보여주는 것처럼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세상은 가능할까. 말이 제힘을 찾고 그로 인해 불신보다는 신뢰가 넘치는 세상. 이제 이것도 노력 없이는 힘든 일이 되었다. 무한히 도전해야 할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니 도전할밖에.
글 정덕현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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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펌프팩(Pumpack). Pump의 원리로 압축 팩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캐리어이기 때문에 Pump+pack을 줄여 Pumpack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지난해에 유럽을 가게 됐는데 2주의 긴 기간 동안 사용할 짐을 가져가야 했고 겨울이었기 때문에 옷의 부피가 상당했다. 옷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수동 압축 팩을 챙겼지만 불편함이 많아 캐리어의 손잡이가 펌프의 손잡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디자인하게 되었다. 발을 끼우는 부분도 추가하여 좀 더 사용하기 편하게 했다.
제품의 원리는?
캐리어의 특징이 ‘펌프’ 기능이기 때문에 심플하면서도 기능을 잘 보여주는 디자인에 중점을 두었다. 캐리어 손잡이는 일반 핸들과 압축 펌프 기능, 두 가지 다 겸용으로 쓸 수 있게 했다. 내장되어 있는 압축 팩에 부피가 줄어들 수 있는 짐을 넣은 후 핸들을 펌프 기능으로 변환하여 펌프질을 하면 내부에 연결된 압축 팩의 공기를 밖으로 빼내어 짐의 부피를 줄여준다. 그 후 넓어진 캐리어 공간에 다른 짐들을 더 넣을 수 있다. 이동할 때는 일반 핸들 기능을 사용하면 된다.
아쉬운 점은?
아직 상용화되지 않아 정확한 기능에 대한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다. 예전에 북유럽 쪽에서 상용화 제의가 들어왔었는데, 그때 당시는 팀원들이 다 학생이었기 때문에 기회를 잡지 못했다. 지금은 조건만 된다면 꼭 상용화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은?
운이 좋게 2011 red dot award에서 수상하였을 때 정말 기뻤다. 한국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입장으로 시상식 무대에 올랐을 때 많은 분들이 박수를 쳐주셨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이제 시작하는 디자이너로서 앞으로 더 좋은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디자인하고 싶다.
만든 사람 이예지(24), 오서빈(22), 문종찬(27), 홍원의(26) /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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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드레싱의 산뜻함과 쑥갓의 향긋함이 자칫 비릴 수 있는 생선 맛을 커버해줍니다. 오이를 색다르게 잘라 곁들이면 보는 재미가 더해져요.
소요시간 25분
재료(2인분) 오이 1개, 쑥갓 6줄기, 흰살 생선(대구살 전용) 10개, 레몬 1개,
올리고당 1큰술, 후춧가루 1/8작은술
① 오이는 깨끗이 씻어 씨 부분을 제외하고 필러로 길게 썬다. ② 쑥갓은 깨끗이 씻어 4cm 길이로 썬다. ③ 흰살 생선은 찜통에 후춧가루를 약간 뿌려 부드럽게 10분 정도 찐다. ④ 레몬즙을 짠 후 올리고당, 후춧가루와 함께 골고루 섞는다. ⑥ 오이, 쑥갓, 흰살 생선을 보기 좋게 담고 ④의 드레싱을 뿌려 낸다.
Single’s Tip
손질해서 파는 냉동 생선을 활용하면 좋습니다. 대구살 외에 동태살, 훈제 연어나 냉동 참치도가능합니다. 오이는 너무 일찍 잘라두면 수분이 날아가니, 미리 손질할 경우 꼭 용기에 넣거나 랩을 씌워주세요.
글 문인영 / 자료 제공 지식채널
문인영님은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현재 푸드스타일리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다양한 잡지와 방송매체를 통해서 메뉴 개발과 스타일링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싱글만찬> <다이어트 야식> <메뉴 고민 없는 매일 저녁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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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정장을 기증받아 면접용 정장이 필요한 청년 구직자들에게 저렴하게 대여해주는 곳이 있다. 셔츠는 5천 원, 정장 한 벌은 1만 원 정도. 유행이 지난 옷은 디자인을 고쳐주기도 한다니, 헉~하게 비싼 정장값이 부담되었던 취업 준비생들에게는 대~박이다.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박금례, 한만일, 김소령, 윤정용, 이혜영, 이혜원씨. 2011년 9월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배움터인 희망제작소 ‘소셜디자이너스쿨’에서 만나 ‘열린옷장’ 아이디어를 냈고 2012년 7월 온라인 사이트를 오픈하였다고 한다. 팀원 6명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운영하고 있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 말이 쉽지 투잡이 어디 보통 일인가. 암튼 현재 기증받은 정장이 약 140벌, 대여자는 약 50명에 이르렀고 앞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 같다고 한다.
참여 방법은 다음과 같다.
기증하고 싶을 때
① theopencloset.net에 접속한다.
② 연락처와 주소를 남긴다.
③ 정장을 담을 박스가 집으로 배달된다.
④ 응원 메시지를 적어 옷과 함께 반송한다.
⑤ 기증된 옷은 세탁, 수선을 거쳐 열린옷장 홈페이지에 등록된다.
대여하고 싶을 때
① theopencloset.net에 접속한다.
② 필요한 정장을 고른다.
③ 주소, 연락처를 기입한 후, 대여료를 입금한다.
④ 배달된 정장을 받아 잘~ 입는다.
⑤ 정장을 입은 후 착용 소감, 메시지를 적어 옷과 함께 택배로 반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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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사람 : 박금례씨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많이 들었던 얘기가 ‘낡은 정장을 누가 입어?’ 예요. 그런데 대학교 4학년 학생 열 명 중 아홉 명 이상이 면접용 정장 구입에 부담을 느끼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취업준비생들뿐 아니라 고등학생의 학부모, 갑자기 정장이 필요한 직장인들도 많으세요. 한두 번 입을 옷이라면 ‘빌리는 게 효율적이다’라는 생각들이 점점 생겨났으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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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사람 : 한만일씨
열린옷장의 장점이 있다면 옷마다 기증자분과 대여자분의 이야기를 쌓아나간다는 거예요. 보통 물건을 기증하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는데, 열린옷장의 기증자는 옷 대여 여부와 대여 소감을 메시지로 받게 됩니다. 대여자와 기증자 간에 인생의 선후배로서 면접, 진로, 회사 생활 등 도움을 주면서 계속 교류해 나가면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박원순 시장님께 기증받은 옷이 시청 공무원 면접 준비자에게 대여가 되어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것처럼요. 대여자와 기증자 간의 모임이나 이벤트도 생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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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자 : 이정성 26세. 취업 준비생
정장이 없어서 취업캠프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을 하던 차에 열린옷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되더라고요. 덕분에 모의 면접에서 1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장 정장을 가지고 있어도 세탁이 안 되어 있거나 장소에 맞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필요한 옷을 곧바로 빌릴 수 있으니 대여료 몇 배의 가치를 주는 것 같아요. 9월부터 하반기 공채가 시작되는데 모의 면접에서 1등 한 것처럼 실제 면접에서도 1등 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저도 정장을 기증하고 싶습니다. 다른 구직자분들도 열린옷장을 이용하시면서 꿈을 이루는 데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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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 : 고주연 28세. 초등학교 교사
트위터에서 열린옷장을 알게 되어서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기증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고 누가 빌려갔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신기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게 재밌었어요. 저도 이 정장으로 임용고사 실기 시험을 봤는데요, 다른 대여자분들도 정장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덜어진 만큼 하시는 일이 모두 잘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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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중반의 미혼 여성입니다. 수십 년간 편찮으신 엄마가 최근 몸이 더 안 좋아지면서 부쩍 저에게 의지를 하십니다. 결혼한 다른 형제들이 있지만, 불편하다며 저하고만 살려고 하시지요. 요즘 들어 엄마는 둘이 한적한 시골에 가서 살자 하십니다. 그렇지만 한창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제가 그런 결정을 하기란 쉽지 않네요. 일을 그만두고 엄마를 모셔야 하나 싶다가도, 그냥 이렇게 제 삶을 포기했다가 후회와 원망이 남을까 두렵습니다. 어머니와 제 삶 모두 지혜롭게 꾸려갈 방법이 없을까요.
저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4년 전쯤 엄마가 담도암에 걸리셨어요. 막 결혼하고, 일도 하고 있었을 때였죠. 아빠도 대장암으로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가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엄마를 돌보았어요. 그런데 힘들더라고요. 특히 환자들은 작은 것에도 섭섭해하고 민감하시니까요. 저도 ‘내가 이 정도 했으면, 엄마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면서 자꾸 바라는 게 생기고. 계속 이러다가는 오히려 서로 원망과 상처만 남을 것 같았습니다. 6개월 만에 가족들과 상의해서 형제들과 분담을 했어요. 처음엔 당황한 듯했지만 형제들도 이제야 자식 노릇 한다 싶어 마음이 편하다 하고, 엄마도 자식들 키운 보람이 있다고 하십니다. 혼자 고민하지 마시고 항상 내 심정을 엄마와 형제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러다 보면 방법이 나옵니다. – 문지혜 / 직장인
어머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니, 그럴수록 가장 믿는 따님께 의지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암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님을 7년 동안 모셨지만 돌아가신 후 엄청 울었습니다. 잘해드린다 했지만 어머님의 고통까지 느끼지는 못했던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되, 엄마 때문에 따님의 인생을 발목 잡히고 자기 일까지 잊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어머님이 서운하시겠지만 가족과 잘 상의하셔서 가까운 요양원에서 친구들과 치료받으시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혼자만 감수하고 고통받지 마시고 다른 형제분들과 잘 상의하세요.
– 팔천사 / 블로그(blog.naver.com/a508004) 운영
어머니께서 조금이라도 거동이 가능하신가요?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어머니께서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복지관 같은 데서 좋은 프로그램을 배울 수도 있고, 또래의 친구들도 만나다 보면 마음도 많이 편해지실 수 있을 겁니다. 딸이 보살펴드릴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요. 지금이라도 어머니가 남은 삶을 스스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으면 좋겠네요. – 구복서 / 간호사
저는 엄마가 얼마 전 돌아가셨지요. 엄마가 몸이 안 좋아지시면서 병원 생활을 할 때, 저도 님과 같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저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나고 마셨지요. 제가 님이라면 일단 어머님을 모시고 시골에 내려가겠습니다. 요즘은 재택근무도 많으니, 집에서도 가능한 일을 찾아 해가면서 어머니를 돌보는 거지요. 그렇게 해보면, 엄마의 마음도 풀릴 것이고 님도 후회가 안 남지 않을까요? 한번 시작해보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길을 찾아나갔으면 좋겠습니다. – 이희정 / 직장인
집에 아픈 엄마를 혼자 두고 직장에서도 편하게 일할 수가 없으시겠네요. 저는 따님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주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네요. 노인장기요양 방문 서비스나 바우처 사업 등 해당 건강보험공단운영센터와 구청의 사회복지과를 찾아가면 자세히 안내해줄 거예요. 물론 처음에는 어르신의 거부감이 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꾸 방문해서 말씀도 경청해 드리고 실제적인 것들을 도와드리다 보면 달라지십니다. 꼭 가족들만이 어르신을 돌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르신을 내 부모님처럼 모시기 위해 준비하며, 자격을 갖춰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답니다. 혼자만 고민을 안고 있지 마시고, 사회복지서비스의 도움을 받아보세요. 분명 행복한 시간들이 올 겁니다. – 김숙이 / 전남 화순 효성노인복지센터장
50대 중반의 남자 직장인입니다. 아이가 셋인데, 첫째가 대학생이고 나머지는 고등학생, 중학생이에요. 이 아이들 어떻게 키울까 앞길이 막막한데, 퇴직 압박만 다가옵니다. 젊은 사람들은 치고 올라오는데, 몸은 잘 안 따라주고, 머리도 예전만큼 안 돌아가고요. 집에서는 근엄한 가장처럼 보이지만, 제 안의 자신감은 점점 사라지네요. 제가 이 아이들을 끝까지 잘 키울 수 있을지 하루하루가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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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ream of Yoon Jin Young was to live the “free life”. She believed that if she became a career woman, like she saw portrayed in the media, she would become free. So she studied to be a dentist and gained people’s respect for being involved in academic activities and volunteer work. Somewhere along the way her mind, weighed down by the burdens of work and life, became unendurable, like a heavy weight on her shoulders.
As she threw away her mind she came to realize that the real freedom comes when that “self” that was in pursuit of success, happiness and enjoyment is no longer present. Now, after doing Maum Meditation, she greets her patient everyday with happiness and enjoyment, just as she used to do when she opened her office ten years ago. This is her story of throwing away the mind.
I am an orthodontist, and it has been ten years since I opened my clinic. Scattered around the clinic there are paintings and dolls that are presents from my patients. It usually takes two to three years to complete an orthodontic program, so the patients become like family. Over time though, I grew to feel like I was literally suffocating in the office, and I always wanted to escape from there. Now, this place feels so precious to me and I am truly grateful to be here.
Growing up I was the eldest of three daughters. My father ran his own business, but due to the uncertainty in it we were constantly caught up in insecurity. It was worse for me because as the eldest daughter I felt a sense of responsibility towards the family, yet I didn’t like this “self” that had to face reality. I often couldn’t go to school because I was weak, so from a young age I had felt that life was truly futile. Living was not fun for me because I had the thought that I couldn’t accomplish anything at all. All the other people seemed to live happily; why not me? How could I manage to live this life? I was always concerned about this. Actually, I went into dentistry to escape this futility, and I wanted to live more realistically. I thought it would be fun to have the life of a career woman like those I saw on television.
But it turned out that dentistry was not what I was interested in. Most of all, the classes were rather tough due to all the competition between students. Besides that, what the future held for me was far away from what I had dreamed of. What I longed for was to enjoy the whole wide world, which I couldn’t do with this job. I literally felt suffocated because I had to stay inside that tiny little clinic all day long.
In my fourth year, just before graduation, my instructor suggested I study orthodontics at the orthodontic research institute. Somehow I sensed that this was what I was looking for. I had a complex about smiling brightly during my childhood because my teeth were irregular. Since I had once been a patient who benefited from braces, I felt that I could do many things for my patients. Moreover, there were lots of opportunities to go overseas for further study in, for example, academic exchange seminars; and I also had the opportunity to be a volunteer in programs that shared those techniques with dentists in China and Central Asia. Because I was actually thirsty for knowledge I went everywhere there was a chance to learn more.
Finally, at the age of 29, I opened my dental clinic in 2002. During the treatments to straighten their teeth, pessimistic patients would become brighter; and some became happier after getting successful jobs. It really was a worthwhile job for me. Over the next couple of years more and more patients came to my clinic; plus, I continued my overseas activities. Although my reputation grew bigger and bigger, I felt like there was a heavy load bearing down on my shoulders. It just felt as if there were heavy metal chains wrapped around me; and my mind was always burdened, uncomfortable and I always felt as if there was something chasing me.
I didn’t regard it as a big deal at first because there were many responsibilities thrust on me in running the clinic. But about the time I was becoming both mentally and physically exhausted Maum Meditation came into my life. By chance I met a lady at a self development seminar who told me about Maum Meditation. I wanted to take a break from the utter exhaustion I was going through, so I visited the local center in my town.
While meditating I came to see myself. I saw that I had thought that if I were not busy 24 hours a day I would fall behind or have troubling difficulties. Also, I had been obsessed with learning more. In order to involve myself in as many overseas activities as possible I needed to be healthy and good at languages. But because I was congenitally weak to begin with I strained my body and was ruining it. I had been pushing myself too hard, so while meditating my body felt painful all over.
As I continued to meditate those harsh memories grew dim and my body started to feel comfortable. I started meditating even harder because I could feel that this was something I had to do; that this was the only way I could find the answers to life. At some point I became so comfortable and was surprised to feel those heavy chains loosen, unwind and drop off me.
I really wanted to live with freedom. But now, from the viewpoint of the universe, I could see the life I had been living; struggling to live while trapped inside the narrow consciousness that was “myself”. I had thought I must be happy, I must be free, I must earn a lot of money, I must have a great reputation… It was this “self” that had actually fettered my freedom. While throwing away the mind I came to know that I am the world, and the world itself is freedom when the self does not exist. Before I thought that freedom meant to buy what I wanted to buy and go where I wanted to go; but real freedom existed when I did not exist.
From then on freedom and happiness surged up from deep within my mind, even though I had been treating patients all day long at the clinic. This feeling grew even stronger the more I threw away the mind of the “myself” that I had thought was me, minds like pride, fame, greed, and so on. It was just like a true miracle!
In short, if, as suggested in Maum Meditation, you live with the “universe mind” by throwing away the “self” which lived with the human mind, you will naturally, with the world’s mind, accept and embrace others, no matter who you are with or what conditions occur in your life.
Doctors actually have a lot of stress, what with the compulsive idea of always having to be a good doctor and meeting the expectations of the patients, and in addition, an emergency could occur at anytime. There is also great pressure about staying in business due to the fierce competition from so many other clinics. Along with this anxiety there is the sense of superiority because of the mind that “I am a doctor”. Although I seemed to the patients to be friendly, I was actually very uncomfortable.
Now, however, I can listen carefully to the patients talking about their problems and help them, and offer them warmhearted words to comfort them because my discernments and pretensions have disappeared to the extent I have thrown them away. So more and more patients are visiting my clinic because of word of mouth advertising, and even other clinics are recommending patients come to me.
Unlike now, I should have done my best in the past with where I was, and lived interacting and sharing with the world; but I had always looked far away at other places and times. I finally feel I have found my place, myself.
Everyone has inside them the reason they were born into the world as a human being. I don’t think it is alright to die after living meaninglessly, not knowing why you live. It is the duty of a human to know the real meaning of life; where you come from and where you go. Because I had lived unaware of this, living was really tough and distressing. After fulfilling that duty I came to know what it is to live through common sense, and life became natural. It was not happiness to be better off than others. I’m finally getting to know real happiness, such as just sharing a warm meal or a comfortably warm room with my neighbors and my siblings next to me.
I feel like I am a real doctor now. I have finally recovered that first mind set of the excitement and enthusiasm that I had 10 years ago when I originally opened my clinic. Once again I was sincerely happy and full of joy to see a patient again.
Edit Kim Hye Jin & Photograph Hong Seong Hoon
The youngest, Gwon Soo Jeong (left), coordinator, and Yang Young Sook (right), chief manager. Ms. Yang has been a dental hygienist for 10 years. She is also practicing Maum Med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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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one world, but it is seen in millions of different ways because there are millions of different human minds. Born as the child, the offspring, of incomplete people, man takes pictures of things in the complete world through his eyes, nose, ears, mouth and body, and stores them inside his mind. This mind world, which overlaps the real world, is man-made and a duplicate. Inside this illusionary world, man lives making ever more illusions. The Bible tells us,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which means heaven that is the true world will become one’s own when he discards his false mind completely. The phrase “cleanse or empty one’s mind” means one should discard and destroy this false mind, which has turned its back on the origin and is an enemy of the world. Because this mind is egotistical, narrow-minded and self-centered, it has discriminations, judgments of right and wrong, likes and dislikes, life and death, enemies and lovers, and distinctions between what does and does not belong to it.
Because pictures, the false mind, live as the master, man is born as the child of falseness, lives in a world of falseness and then passes on to a non-existing false world. It is the reason he ends up dying. For man to become complete he must discard the false world; he must discard the Earth, moon, stars and sun of this world; and he must discard even the materials in the air. What then remains is the place of the Creator, God and Buddha. This place is the origin, and from this viewpoint it is always this place, the original foundation, regardless of whether the creations of the world exist. From man’s perspective however, the world is a place with countless different things because his mind is not one with the world. When the world is seen from the place of the origin and source, it is one. It is one when nothing in the world exists, and even when they do exist, it is still one. Only a person who has returned to the origin and become the true mind can know this.
Woo Myung founded Maum Meditation. For his outstanding dedication to the service of humanity, he was awarded the Mahatma Gandhi Peace Award by the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 (IAEWP). He is the author of numerous books including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Nature’s Flow, Mind and Stop Living In This Land, Go To The Everlasting World Of Happiness, Live There Forever which have been published in English. His other books, Heaven’s Formula For Saving The World, The Living Eternal World, The Book Of Wisdom, and The Enlightened World are in the process of being translated into English as well as Chinese, French, German, Italian, Japanese, Portuguese, Spanish and Swedish.
글 백일성
퇴근하는 길 동네 후배에게서 술 한잔하자는 연락을 받고 약속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늦게 동네 선배에게도 퇴근하는 대로 전화 달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아내와도 통화하고 저녁 8시 정도에 후배와 마주 앉아 소주 한 잔을 입에 넣었습니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고 12시 정도쯤 집에 도착한 거 같습니다. 아내가 자리에 금방 누웠는지 인기척에 바로 일어나 눈살을 찌푸리면서 묻습니다. “동네에서 간단하게 먹고 들어온다며? 몇 시야? 도대체 남자 셋이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밌어서 이 시간까지 술을 먹어? 무슨 얘기해?” 여자 셋이 모이면 무슨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30대 초반, 40대 초반, 40대 중반 이런 동네 선후배 남자 셋이 모이면 이런 얘기합니다.
소주 한 병. “요즘 직장 어때요?” “뭐 그렇지~ 넌?” “저도 죽을 맛이죠 뭐.” “술맛 떨어진다! 직장 얘기 그만~” “안주 나오기 전에 한 잔 하시죠.”
소주 두 병. 선배 형님이 늦게 도착했습니다. “늦었네요. 요즘 회사 바빠요?” 선배 형이 소주 한 잔을 비우며 말합니다. “야 술맛 떨어진다 말도 꺼내지 마라.” “안주 드세요.”
소주 세 병. “저 양반 나오면 될까?” “단일화가 문제지.” “누가 되던 그놈이 그놈이지.” “야, 술맛 떨어진다! 정치 얘기 그만~” “안주 하나 더 시키죠.”
소주 네 병. “요즘 씨스타가 대세죠?” “이 형이 카라, 미스터 이후 첨으로 인기가요를 보잖냐. 걔들 때문에.” “저도요, ㅎ” “형님들 뮤직비디오 전송해 드릴까요?” “야, 술맛 난다.” “아줌마 안주 시킨 지가 언젠데~”
소주 다섯 병. 여기서부터는 가물가물 언뜻 생각나는 단어들만 나열합니다. [박지성… .Q뭐?… QPM… 그건 투피엠이고 QPR.… 아… 박주영… 고등학교 때 패싸움이… 첫사랑… 너 몇 사단?… 훈련병 때… 와… 뭐… 야… 거… 내가 진짜… 우아…]
소주 여섯 병. “형이 로또만 되면 말이다….”
붉어진 얼굴로 술집을 나와 걸어가는데 길거리 한복판에 인형 좌판이 벌어졌습니다. 당나귀 인형 대여섯 마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길거리를 누비고 있습니다. 선배가 후배 녀석에게 아이 갖다 주라며 한 마리 골라 보라고 합니다. 길거리 좌판 앞에 술 취한 아저씨 셋이 앉았습니다. 30대 초반의 갓 돌 지난 아이의 아빠는 요즘 전셋값 때문에 걱정입니다. 한없이 올라간 전셋값에 가을에 이사를 결정했나 봅니다. 한마디 합니다. “아저씨 당나귀 말고 기린으로 주세요.” 40대 초반의 중학생 남매를 키우고 있는 아저씨는 서랍에 사표가 넣어져 있습니다. 10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일년째 서랍 안에 있습니다. 한마디 합니다. “야, 당나귀가 더 이뻐~~” 40대 중반의 고3 딸 아빠는 얼마 전 아버님이 폐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오늘도 그의 지갑에는 로또가 있습니다. 한마디 합니다. “아저씨~ 건전지 서비스로 한 개만 더 줘요.”
아내가 재차 묻습니다. “남자 셋이 뭔 얘기를 하냐니까?” 이불 안에서 웅얼거리듯 대답했습니다. “씨….” “뭐?” 아내가 재차 묻습니다. “씨… 스… 타.” 이불 밖으로 내밀렸습니다. 이런~~~
올해 마흔두 살의 백일성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학생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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