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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런던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송대남 선수

2004년과 2008년 두 번의 올림픽 선발 좌절, 세 번의 체급 변경, 부상….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번번이 운이 따르지 않았던 송대남 선수는 ‘불운의 사나이’라 불렸다. 하지만 그 불운마저 넘어서 2012년 처음으로 런던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한다. 그의 나이 34세. 유도에서는 환갑을 넘어 진갑이라 불리는 나이에, 체급을 바꾼 지 1년여 만에 금메달을 따낸 것은 유도 역사상 이례적인 일이었다. 0.1%의 기적, 사람들은 이제 그를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 부른다. 런던올림픽이 끝나고 일주일 후 만난 그에게선, 많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선수답게 강하지만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풍겨 나왔다.

“아직까지 좋아 보여요. 그만큼 혹독한 훈련을 소화했다는 겁니다.”

브라질 선수와의 준결승전 경기 말미, 지치지 않고 계속된 공격 시도를 하는 송대남 선수를 보고, 해설위원은 말했다. 5분이라는 짧은 경기 안에, 유도만을 위해 살아온 그의 23년 세월이 녹아 있었다. 그리고 8월 2일, 드디어 열린 -90kg급 결승전. 상대인 쿠바 선수는 겨우 22살, 힘도 세고 유연성도 좋은 선수. 하지만 결연한 표정으로 경기에 임하던 송대남 선수는, 치열한 접전 끝, 연장전 10여 초만에 절묘한 기술을 시도, 성공하며 경기를 마쳤다. 순식간에 이뤄진 기술이었다. 금메달 확정 후 매트에서 내려온 그는 그도 모르게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후배 조준호 선수는 “대남이 형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에 금메달을 따는 순간, 경기장에 있던 관계자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금메달 축하드립니다.
요즘 송대남 선수를 알아보는 사람도 많지요?

사실 금메달을 땄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저 같은 경우는 의외로 아저씨 팬들이 굉장히 많이 생겼어요.(웃음) 힘들어하시는 가장들한테 많이 힘이 된 것 같아요. 또 후배들한테 전화도 많이 받아요. 포기하려고 했는데 형 때문에 다시 하게 됐다고. 그렇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참 뿌듯합니다.

실력보다 운이 안 따라주는 선수,
그런 느낌이 강했기에 더 감동한 것 같아요.

이번에도 올림픽엔 나가게 됐지만 금메달 후보로 주목받지는 못했어요. 항상 제 수식어가 그런 거였어요. 불운의 한판승의 사나이, 만년 2인자. 한번은 제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아버님이 문구를 써주신 적이 있어요. ‘외로운 1등보다 후덕한 2등이 낫다, 힘내라, 아들아.’ 그게 너무 가슴에 남아서 항상 그걸 가슴에 새겼어요. 그렇다고 힘들어하고만 있지는 않았어요. 내가 덜 노력했으니까 그런 거구나, 생각했고 더 많이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이번에 정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정말 엄청나게
훈련을 하셨죠?

운동은 진짜 한 번 한 번 할 때마다 죽을힘을 다해서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훈련을 소화할 수가 없거든요. 만약에 새벽 운동 시간에 400미터 트랙을 1분 안에 몇 바퀴를 뛰어야 하는데 못 했다, 그러면 밥도 안 먹고 오전에 다시 나와서 기록 안에 들어올 때까지 뛰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죽을힘을 다해서 해요. 그렇게 새벽, 오전, 오후, 야간 운동을 하면서 4년 동안 준비를 한 거죠. 특히 저한테는 이 올림픽이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이기 때문에 정말 후회 없이 경기하고 싶어서 피나는 땀을 엄청나게 흘렸어요. 달리는 말에게 채찍질하듯이 나약해지지 않도록, 제 자신한테 혹독했죠.

그렇게 연습해도
시합 때는 몹시 긴장될 것 같은데,
그걸 해소하는 방법이 있나요?

시합 나가면 긴장 많이 하죠. 특히 올림픽 무대는 더해요. 몇 만 관중 앞에서 딱 둘이 시합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얼마나 즐기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굉장히 즐기려고 노력했어요. 이게 마지막이다, 앞으로 나에게 이런 긴장감은 없을 거다, 하면서. 그리고 대회 준비하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이나 심리 치료도 많이 받았고요. 계속 마인드 컨트롤도 했죠. 매트 위에서는 내가 제일 강하다! 내가 흘린 땀은 결코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한테 부끄럽지 않을 만큼 훈련을 했기 때문에 나는 자신 있다! 하지만 절대 자만해서는 안 돼요. 그런 마음들 때문에 이기고 지는 거거든요.(웃음)

송대남 선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유도를 시작했다. 타고난 운동신경의 그는 초등학교 때 나간 첫 전국 대회에서 3등이라는 성적을 내며 유도 유망주로 주목받는다. 그즈음 88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목표를 금메달로 삼는다. 이후 그는 23년 동안 유도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길에는 유독 많은 고비가 있었다.

첫 번째 고비는 고등학교 2학년 초. 척추분리증이라는 병으로 1년 동안 쉬게 되면서 찾아온다. 운동선수로서는 치명적인 것. 다행히 그 고비를 이겨내고 다시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2004년 아테네올림픽 선발전에서 아쉽게도 탈락. 그렇지만 이번에도 다시 시작했고, 각종 대회에서 입상하며 명실상부한 -81kg급 세계 최강자로 자리를 굳힌다. 그동안의 고비를 이겨내면서 쌓아온 탄탄한 기본기, 모든 훈련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 안정적이고 매너 있는 경기 등 유도인으로서 인정받았지만, 2008년 베이징올림픽 선발전에서 또다시 탈락. 그때 나이 서른, 유도 선수로서는 환갑이라 하는 나이였다.

“그때는 이제는 은퇴해야겠다. 유도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완전히 유도판을 떠났었어요. 올림픽 열기를 보는 것도 싫어서 아예 한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갔어요. 그때 평생 먹을 술을 다 마신 거 같아요.”

하지만 운명은 그를 그렇게 두지만은 않았다. 2008년 12월, 다시 기회가 온 것이다. 마침 러시아에서 세계 랭킹 1위부터 16위까지 모아놓고 하는 세계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 대회에서 당당하게 1등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저력을 알아본 대표팀 정훈 감독은 그에게 다시 한 번 시작하자며 손을 내민다. 하지만 그게 시련의 끝은 아니었다.

2010년 11월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으로 또 한 번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그는 수술 후의 병원 생활로 체중이 불자, 오히려 -90kg급으로 체급 변경, 5개월 만에 첫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한다. 연골 봉합 수술 뒤, 적어도 6개월은 운동하지 못할 것이란 진단,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 도전이었지만 그는 선발전에서 승리하고 당당히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게 된다.

▼ 송대남 선수는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를, 2010년에 두 살 터울의 막내누나가 하늘나라로 갔을 때라고 말했다. 올림픽 시합을 하며 그는 누나에게 기도했다. 동생의 마지막 시합이니까 포기하지 않게,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누나가 많이 도와준 것 같다며 웃는다. 그리고 그동안 힘드셨던 부모님을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해드려서 많이 행복하다 한다.

송대남 선수의 유도 인생을 보면
‘인간 승리’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무릎 수술 후 뛰면서 아프니까 울면서 뛰고, 주저앉아서 무릎 만지다가 괜찮아지면 또 뛰고 그랬어요. 제가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어요. 23년 동안 가졌던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목표. 포기하기에는 23년이라는 세월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때 느낀 게 하나의 목표가 있으면 사람의 능력은 무한대가 된다는 거였어요.

위기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송대남 선수를 믿어주신 분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고2 때 부상당하고 1년을 쉬고 나서였어요. 다시 유도를 하는데 항상 이겼던 선수들에게 번번이 지니까 참 힘들더라고요. 그때는 진짜 어린 말로 울면서 그만하겠다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어요. 근데 “힘들면 그만해라. 다른 길도 많으니까 괜찮다” 하시는데,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면서 나를 이렇게 믿어주시는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2008년 올림픽 선발전에서 떨어져 방황할 때는 정훈 감독님이 잡아주셨죠. 이번에도 34살이나 돼서 나갔다가 지면 창피하니까 그만둬라 하면서 비웃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많이 속상했지만, 저를 믿어주시는 분들이 있었기에 끝까지 할 수 있었어요. 믿음이라는 단어가 제 가슴속에 박혀서 굉장히 큰 힘이 되었던 거예요.

정훈 감독님과의 인연이 특별한 것 같아요.
감독님의 막내 처제와 결혼한 사실,
금메달을 딴 후 정훈 감독님께
큰절을 드린 것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선수 생활하면서는 가족이라고 한 번도 생각 안 했어요. 가족이라고 생각했으면 함께 운동 못 했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조금 잘못하면 감독님한테 피해가 갈까 봐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습니다. 감독님께서도 더 엄하게 대하신 것도 있고요. 선발 대회에서 1등을 했음에도 가족이니까 챙겨서 올림픽 내보내는 것 아니냐, 그런 소리도 많았어요. 아마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금메달 하나로 다 대답이 된 것 같아서 정말 기뻤죠. 금메달 따고 바로 옆에 계신 감독님 얼굴을 뵈니까 그동안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면서, 너무 감사해서 그렇게 절을 드린 거 같아요. 그게 외신 기자들한테 독특하게 느껴졌나 봐요. 시합을 마치고 인터뷰하는데 신기한 듯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은 감사하면 큰절한다, 그게 지도자에 대한 예의다,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다, 그런 얘기를 했죠.(웃음)

유도 선수들은 체급을 바꾼 지 1년여 만에 금메달을 따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살을 찌우면 그것을 또다시 근육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정 등, 체급에 맞는 혹독한 적응 훈련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점심 식사로 스테이크 10장 이상, 낮이고 밤이고 먹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식사를 하고 그것을 근육으로 만들기 위해 또 훈련을 했다. 또 -81kg급에서 -90kg급으로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힘도 그 체급들 중에서 제일 약했고, 키도 제일 작았다.

하지만 그는 그걸 보완하기 위해 기술과 스피드를 더 가다듬었다. 다행히 유도는 강한 힘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에 순응하면서 그 힘을 역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기본 원리였기에, 매 경기마다 업어치기의 달인이라 불리는 그의 절묘한 ‘명품 업어치기’는 더욱 빛을 발했다.

▲ 맏형인 그의 경기마다 후배들의 응원이 함께 있었다. 32강, 16강, 8강, 한 판 한 판 올라갈 때마다 동생들은 와서 힘을 실어주고 기를 몰아주었다고. SBS 예능 프로그램 출연 시의 한 장면. 왼쪽부터 조준호, 김재범, 송대남 선수.

유도 선수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유도는 그런 것을 보여줘요. 사실 유도는 힘도 좋아야 하고, 근성, 근력 등 모든 게 받쳐줘야지만 할 수 있는 운동이에요. 그렇지만 저는 유도 선수라면 무엇보다 먼저 인성이 갖춰졌으면 좋겠어요. 좀 잘한다고 잘난 체하고, 막 목에 힘주고 다니면 운동을 아무리 잘해도 인정을 못 받아요. 그래서 유도 선수로서 필요한 첫 번째 자세는 겸손인 것 같아요. 겸손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정해놓지 말자’가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들었습니다.

훈련을 하다 보면 정말 힘들어요. 그러면 나는 이만큼이 한계야, 이러면서 그만하잖아요. 근데 저는 ‘인간의 한계를 정해놓지 말자’고 했어요.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말고 노력하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유도와 인생이 비슷한 것 같아요. 어제의 승자가 오늘의 패자가 되고, 오늘의 패자가 내일의 승자가 되고. 인생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일희일비하지 말자 생각해요. 승자가 됐다고 우쭐할 필요도, 패자가 됐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항상 아무리 힘들어도 힘내시고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열심히 하면 그 꿈을 꼭 이룰 거라고.

시련도 환희도 모두 맛본 선수, 극과 극을 달려본 송대남 선수의 말이기에 더욱 마음에 다가왔다. 이제 선수로서는 은퇴한 송대남 선수는 대표팀 코치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단다.

“늘 땀을 흘릴 때가 제일 행복했습니다.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많이 행복했고 시합을 하면서도 행복했고 금메달 땄을 때도 행복했습니다. 이제 올림픽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열심히 도와주고 싶습니다. 많이 응원해주시면 우리나라 유도를 최고로 계속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웃음)”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마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떠나는 송대남 선수. 그는 유도의 금메달을 너머 인생의 금메달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었다.

최창원 & 사진 홍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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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8주년, 무한한 가능성의 씨앗으로 삼고 싶습니다.

“웬만한 삼류 소설보다 재밌다”

그 칭찬 한마디

최규화  31세.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중학교 1학년 때 특별 활동으로 문예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문예반엔 스무 명 남짓 있었는데, 사실 ‘문예’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저 축구반이나 농구반에 지원했다가 가위바위보에 져서 ‘밀려’ 들어온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그때 문예반 담당은 조미향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은 특별 활동 시간이면 중1 까까머리들을 데리고 박물관으로 화랑으로 데려가셨다. 집과 학교밖에 모르는 ‘샌님’이었던 나는 선생님 덕분에 처음으로, 경주박물관의 에밀레종도 작가들의 그림도 직접 볼 수 있었다. 당시 국어 선생님이신 조미향 선생님께서 꽤 이름이 알려진 화가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선생님 덕에 처음 하게 된 것 중 최고는 바로 ‘글쓰기’다. 한번은 특별 활동 시간에 글을 직접 쓰라고 하셨는데, 그날 내주신 주제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지금 학교를 그만둔다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나이 마흔이 됐다고 생각하고 상상해서 써 봐라.”

처음엔 황당했다. 지금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혼자서 공부하는 청소년들도 많다지만, 그때는 그런 것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어떻게 상상을 해서 썼는데 줄거리는 대충 이랬다.

<주인공이 가출을 하고 방황을 하며 몇 년을 보내다가 후회를 하고 농촌으로 가서 날품팔이로 일한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마을 주민들의 인정을 받아서 빈집도 얻고 소작도 얻어서 그럭저럭 살림을 일구고, 착한 마을 처녀와 조금 늦은 결혼을 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잘 살았다.>

선생님은 내 글을 읽으시더니 소리를 내서 웃으셨다. 그리고는 교실 앞으로 불러내 친구들한테 그 글을 읽게 하셨다. 쭈뼛거리며 글을 다 읽었을 때 선생님이 한마디를 하셨다.

“일간지에 실리는 웬만한 삼류 소설보다 재밌다.”

기분이 묘했다. 그냥 막 기쁜 것도 아니고 진짜 묘했다. 그때부터 한 번도 써 보지 않았던 글을 내 마음대로 쓰기 시작했다.

박남철 작. < Walk 45-봄2>

53×53cm, 목천에 수간채색, 아크릴릭

2012

 

아버지한테 혼났을 때도 쓰고, 누나들과 싸웠을 때도 쓰고, 어디선가 잊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썼다. 이 말 저 말, 말 잘 ‘듣기’만 바라는 어른들한테 내 ‘말’을 해주고 싶을 때도 썼다. 그러다 보니 그 글을 통해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감을 느끼게 됐다고 해야 할까? ‘무슨 중학교 몇 학년 몇 반 몇 번’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나’라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누가 쓰라고 하지도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도 않고, 돈도 안 되는 글을 계속 써 오고 있다. 지금 하는 일도, 시민기자 제도로 운영되는 한 신문사의 편집기자로서 한 달이면 수백 편씩 올라오는 글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 때문일까? “이 글은 별로네요”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웬만하면 “좋다, 재밌다, 진솔하다, 감동적이다” 하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선생님이 나한테 해주신 칭찬이 그랬듯이, 나의 짧은 한마디가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에는 선생님이 보여주신 에밀레종과 화랑에서의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선생님이 해주신 칭찬이 얼마나 고마운지 제대로 몰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간들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점점 확인하게 되었다. 그걸 알기까지 15년이 걸렸다.

조미향 선생님, 앞으로 더 신명나게 말하고 글 쓰며 살아가겠습니다. 그것만이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갚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고맙습니다.

무공해 ‘까마중’을 다시 만나다

유연동  47세. 직장인.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몇 년 전부터 산에 가면 꽃과 신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이러한 식물보다는 사람들이 먼저 보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사실은 내가 말한 것이다) 산에 가서 꽃이 보이기 시작하면 인생이 꺾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하기야 내 나이 벌써 40대 중반을 넘어버렸으니 꺾인 나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아파트 뒤편으로는 학의천이 흐른다. 그 옆 산책길은 나설 때마다 심심치 않게 나를 반겨준다. 봄이면 이름 모를 들꽃들이 기다리고 있고, 여름, 가을, 겨울도 제각기 다른 계절 색으로 나의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팔월 말, 더위가 꺾여가고 있을 무렵, 나는 또다시 주말에 학의천을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두 가지 식물, 그것은 늦게 올라오고 있는 들깨와 까마중이었다. 들깨는 깻잎으로 흔히 보는 것이었지만 까마중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나는 내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기르고 보살피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하나씩 조심스럽게 뽑아 아파트로 가지고 왔다. 새 화분에 하나씩 심었다. 다음 날 아침 물을 주고 출근했다. 퇴근해서도 화분부터 살피게 되었다. 근데 들깨는 없어졌고 까마중만 남아 있었다. 아내는 들깻잎에 벌레가 너무 많아 할 수 없이 버렸다고 했다.

사실 집사람은 화분 가꾸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원예니 농사니 하는 것에는 원래 깡통인지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물 주기뿐이었다. 물도 성의 없이 줬다. 가끔 생각나면 주고 물주는 양도 일정하지 않았는데, 나도 화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 집에서 새 둥지를 튼 까마중은 기대 이상으로 씩씩하게 자라났다. 자슥이 물만 주면 아무 소리 안 하고 쑥쑥 커 나갔다. 특유의 굴광성으로 해를 쫓아다니느라 줄기는 구부러졌고, 가을로 들어서자 벌써 첫 열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까만 열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초엽이 되자 나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 까마중은 일년생 풀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죽어야 한다. 그런데 이놈은 죽지 않았다. 겨우내 베란다에 뿌려지는 햇빛과 나와 집사람의 물 주기로 겨울을 버텨냈고 봄을 맞았다. 당연한 결과인지는 몰라도 일년생이 다년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박남철 작. <Walk 45-한낮>

116.7×80.3cm, 목천에 수간채색, 아크릴릭

2011

 

새봄이 되자 화분이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집사람은 큰 화분을 준비해 주면서 나더러 학의천에 가서 흙을 퍼 오라고 했다. 내 친구 까마중을 만났던 또 하나의 내 친구 학의천으로 비닐봉지를 들고 나갔다. 흙을 캐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 눈도 의식이 되고. 다리 밑으로 가서 공사 현장에서 쓰는 질 낮은 모래를 싸들고 집으로 왔다. 분갈이를 하는 내 맘속에 걱정이 앞섰다.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이 흙은 영양가가 거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생각보다 굵고 단단해져 있는 뿌리만이 위안이었다.

역시나 흙이 바뀌었건만 물만 주면 또 무럭무럭 자랐다. “고놈 참 신기한 녀석이야.” 아내는 까마중이 뭐에 좋다나 어쨌대나 하며 열심히 따 먹는다.

하지만 여름이 올 무렵 내 친구 까마중은 새로 들어온 이름 모를 화초에 집을 내주게 되었다. 나는 뽑혀진 까마중을 학의천에 갖다 버렸다. 시들어가는 까마중을 보면서 어린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 들판에 널려 있는 까마중은 실제로 노랑 까마중이었다. 노랑 까마중은 검정 까마중보다 더 달고 껍질도 부드러웠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까마중밭에 숨으면, 숨기 위해 까마중밭에 온 건지 까마중을 먹기 위해 온 것인지 망각하고는 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들은 어느새 민주화의 주역이 되었고, 이제는 이 사회를 움직이는 주역이 되어버렸다. 무공해 까마중의 힘으로.

오늘은 비가 왔다. 회사 옆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던 나는 도시의 시멘트 틈 사이로 꿋꿋이 잎을 드러내고 있는 내 친구, 까마중을 발견하게 되었다. 갈등이다. 이 친구를 차에 모셔가야 하나 어째야 하나.

아버지가 주신 매직박스

에드워드 김(김희중)

73세. 사진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인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더니 금고에서 보자기로 싼 카메라를 꺼내 보여주셨다. 그것은 아버지가 애지중지 아끼시는 바람에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이 이어졌다.

“카메라는 사진만 만들 수 있는 박스가 아니라 매직박스이니, 방학 숙제로 카메라가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 알아내 보거라.”

그리고는 거리 맞추는 방법, 노출을 조정하는 요령 등 간단한 카메라 작동법을 설명하시고는 필름 몇 통을 주셨다.

카메라가 무슨 마술을 부린다는 것인가? 싶었지만, 카메라를 마음껏 사용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아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때만 해도 카메라가 여간 귀한 게 아니던 시절이라 아이들도 마냥 좋아라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을 찍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뭐 찍을 만한 것 없나,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주변을 눈여겨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항상 눈앞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이 서서히 보였다.

한번은 동네에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새댁이, 언제 낳았는지 갓난아이를 안고 나와 있었다. 아이가 칭얼대며 보채자 그녀는 저고리 앞섶을 풀더니 보름달처럼 둥근 젖가슴을 꺼내 아이의 입에 물리는 것이었다. 용기가 부족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지만 아이가 쌕쌕이며 젖을 빠는 모습과 젖을 물린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때부터 나는 익숙하던 것들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눈으로 새롭게 사물을 바라보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이 카메라라는 것이 사람을 보게 만드는 기계로구나!”

방학이 끝날 무렵 아버지와 마주 앉아 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점을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께선 매우 기뻐하셨다.

박남철 작. <Walk>

53×53cm, 목천에 수간채색

2011

 

“희중아, 사람들은 항상 눈을 뜨고 살지만 눈앞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라는 것이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주니 이게 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때부터 아버지의 매직박스와 함께 내 삶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시간만 나면 나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전국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 길에서 우리 농부를 다시 만나고, 우리 고향을 다시 만나고, 무심한 일상의 풍경들을 다시 만났다.

그렇게 새로 만나는 세상은 가슴 벅차리만큼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점차 내가 느낀 그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을 처음 접하면서 발견한 1950년대 우리의 모습들을 주제로, 학창 시절 두 번에 걸친 개인전을 열었다.

그 이후 사진의 매력에 이끌려 60년이 가까이 되도록, 사진과 함께 살아왔다.

아빠의 마당

이유진  34세. 플로리스트.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결혼하기 전까지 한 번도 아파트에 살아 보지 않았습니다. 6살 이후론 줄곧 한집에 살았으니 아파트에 살 기회도 없었지요. 제가 자란 작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은, 소위 ‘집 장사’들이 지은 것으로 이렇다 할 멋도 매력도 내세울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집을 처음 자식들에게 보여주시던 날 부모님의 흥분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집은 다 지어지지 않고 골조뿐이었고, 마당에는 전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심어져 있었지요.

“지금은 여기 나무가 하나밖에 없는데, 봄 되면 나무를 많이 심을 거다. 이쪽에는 목련을 심고, 집에는 대추나무가 있어야 되니까, 그것도 심고.”

그 집, 그 마당에서 아빠는 오래 바쁘셨습니다.

봄이 되면 마당에는 제일 먼저 목련이 꽃을 피웁니다. 그 후 진달래가 피고, 철쭉이 피고, 모란도 피고 장미도 피고 졌습니다. 가을이면 감이 영글고 대추가 익었지요. 겨울에는 전나무에 전구를 감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둘렀습니다. 어느 날이라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당에서 흙 삽을 들고, 또는 호스를 들고 있는 아빠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마당이 어린 제게는 얼마나 거대한 공원이었는지요. 작은 오솔길에서 언니, 오빠와 고무줄놀이를 하고 소꿉장난을 했습니다. 철쭉 피는 봄이면 돌에 올라앉아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장미 철에는 큰 종이에 장미 축제라 써 붙이고 가족끼리 파티를 벌이기도 했지요. 아빠는 어린 딸이 좋아한다는 핑계를 대며 새장을 걸고 닭도 키우고, 강아지도 키우셨습니다. 그 마당에서 대추를 따 먹고, 감을 따 먹는 동안 저는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가고, 오빠가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고, 언니가 결혼을 해 아이를 둘 낳았습니다.

박남철 작. < Walk 45-16>

53×53cm, 목천에 아크릴릭

2012

 

어른이 되어 대학 다닌다고, 외국에 공부하러 간다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 본 아빠의 마당은 얼마나 좁던지. 두세 걸음이면 성큼 현관에 닿을 만큼 좁디좁은 곳이었지요. 어린 저에게는 그토록 드넓은 마당이었지만, 아마 아빠에게는 처음부터 이렇게 손바닥만 한 마당이었던 걸까요? 아빠는 그곳에서 어떻게 그런 마법을 보여주신 걸까요?

오래 살던 집을 떠나, 지금은 아파트 11층에 살고 있습니다. 멀리 내다보는 전망도 좋고, 고층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잘 가꿔진 아파트의 정원을 내려다보는 일은 어쩐지 쓸쓸합니다.

온갖 벌레들이 윙윙대고 거미줄과 길고양이들이 활개 치던 아빠의 마당이 그립습니다. 내가 자란 곳은 그 마당이었음을, 그 시절이 내 삶의 씨앗이 되어, 오늘을 열매 맺게 해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