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거짓말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으나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머물게 된 나만의 이야기들, 그 사랑스러운 고백을 들어봅니다.

희망을 전하는 거짓말쟁이

김숙이 47세. 전남 화순군 효성노인복지센터장.

사회복지사.

"오늘따라 너무 예쁘시네요, 무슨 좋은 일 있으셨어요? 오늘만 같으면 아주 금방 나으시겠어요…."

복사꽃 꽃망울이 터질 듯 봄을 알리는 아침, 나는 오늘도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며 어르신 댁에 들어선다. 척추 골절로 인해서 아예 서지를 못하던 80세의 어르신을 살포시 안아드리며 뽀뽀를 해준다. 어르신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그 순간, 그곳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나라로 변모한다.

어르신을 처음 뵌 것은 2008년 7월. 사회복지사로 일주일에 한 번씩, 2년 넘게 만나 뵈면서 설령 그것이 거짓말일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희망을 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시네요? 곧 걸을 수도 있으시겠어요." "이번 봄에는 같이 꽃구경 가실 수 있겠어요~ 하하하!"

그리고 다 해드리기보다는 어르신의 남은 힘으로 하실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때론 말상대가 되어 세상 이야기도 나누고 재미난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드린다. 그런 과정에서 어르신도 많이 변하셨다. 수저, 젓가락 하나도 못 들고 누워만 계시던 분이 이제는 혼자 일어나고 혼자 앉으시고 혼자 누우실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웃음을 찾으신 것이다.

"나 언제나 걸어 다닐 수 있을까?"

통 말씀도 안 하시던 분이 그 말씀을 하셨을 땐 희망을 가지시는 것 같아 너무나 기뻤다.

김주호 작. <생생관계>

마트지에 아크릴릭.

53.5×38.5cm. 2009.

나는 매주 20여 분의 어르신들을 찾아뵙는다. 다들 편찮으신 분들이기에 물리치료와 재활 마사지, 혈당, 혈압 체크도 해드리고 빨래며 청소며 반찬이며 목욕 등을 도와드린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어르신이 예전에 즐겨 부르시던 노래라도 같이 불러드리면 지난 세월이 원망스러우신지 때론 엉엉 울기도 하신다.

사회복지사란 직업은 참 어렵고 힘이 든다. 하지만 가장 힘들 때는 "나는 인제 이러다 죽겄지라잉? 나 같은 것은 살아 봐야 식구들만 귀찮게 하니께 그만 살고 빨리 죽어야 하는디…"라고 하실 때이다. 몸도 좋지 않은데 그런 암울한 마음으로 살아가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프다. 그럴 때 나는 용기를 내어 말한다.

"그런 걱정 하실 힘이 있는 거 보니까 충분히 나아서 걸어 다니실 수 있으시겠네요.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지금 얼마나 많이 좋아지시고 있는데요!"

그러면 내심 거짓말인지 뻔히 아시면서도 굉장히 좋아하신다.

그럴 때마다 안쓰럽고 마치 내가 불효자가 된 것처럼 죄송스럽지만, 단 한 시간을 살아도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나는 또 거짓말을 하고야 만다. 비록 뻔히 아는 거짓말일지라도 이 일을 멈추지 않는 한 나의 거짓말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분들이 마지막 남은 삶의 굴레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며 한 조각 희망을 잃지 않는 그날까지는….

내 인생 최악의 거짓말 세 편을 고백합니다

박필선 49세. 교사. 경남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나의 최초의 굵직한 거짓말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집에서는 별로 대접을 못 받았으나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인정을 받고 있던 터라, 여름 방학 숙제를 하나라도 안 해가는 것은 내 이미지에 치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를 졸라 그림을 그려 달라 하고, 중학생 오빠의 국어책에서 동시를 하나 베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우리 선생님은 초등학교에만 계시니 중학교 책은 모르겠지! 떡하니 내 이름을 달아 제출했다. 다음 날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너 이 시 베껴왔지?"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셨는데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며 서 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 선생님은 나에게 눈길도 안 주시고 심부름도 시키지 않으셨다. 그해 2학기는 무척 힘든 학기였고, 내 마음속에 그늘 하나가 새겨졌다.

20대 시절의 가장 발칙한 거짓말은 29세 때였다. 나는 그때까지 나름 꿋꿋하게 싱글로 버티고 있었는데 내년이면 삼십이라 생각하니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김주호 작. <그런데 말이야>

질구이 삼벌. 68×47×23cm. 2009.

4월의 잔인한 어느 봄날, 외롭다고 툴툴대는 나에게 여고 시절 친구가 성당 청년회 회장이라며 한 남자를 소개시켜주었다. 나이도 동갑이고 해서 같이 영화도 보고 선물도 받고 하는 사이 어느새 가을이 와버렸다. 그런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어느 토요일 밤 그 남자가 양복을 쫙 빼입고 와서는 청혼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나 부담스럽고 어색한 순간을 빨리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다음 달에 수녀원에 들어갈 거라고 거짓말을 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남자가 술만 먹고 성당도 안 나온다는 소식을 친구들로부터 들었다. 그 뒤 나는 꽤나 깊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30대 후반 끔찍했던 거짓말 사건은 추운 어느 겨울에 어이없이 찾아왔다. 험한 고개를 두 번 넘는 장거리 출퇴근을 할 때였다. 어느 날 출근을 하는데 고개 꼭대기에 눈이 하얗게 쌓여 쌀가루를 뿌려놓은 듯 별천지였다. 그 눈부신 세상은 나의 허황한 낭만주의를 자극하고 말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저 하얀 눈 위를 뽀드득뽀드득 걷고 싶은 유혹을 못 이기고 외투도 벗어둔 채 차에서 마침내 내리고 말았는데…. 아뿔싸! 그만 차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지나가는 차를 애타게 기다렸다. 한참 뒤 꿈같이 경찰차가 고개를 내려왔고 사정을 말하니 읍내 가서 열쇠업자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곧이어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선생님이 차를 세웠는데 나는 경찰이 해결해주기로 했다며 그냥 보내 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1교시를 시작할 즈음이고 연락할 길도 없고…. 두려움이 엄습해와 추위에 떠는 것은 뒷전이었다.

한참 뒤 트럭이 하나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두 팔을 마구 흔들며 차를 세우자 온몸을 무장한 장정 대여섯 명이 내렸다. 무서웠지만 차문 좀 열어달라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와중에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과 아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분들은 산에 야생 난을 캐러 다니기 때문에 온갖 도구가 있다면서 쉽게 열어주었다. 어찌나 고맙던지 꼭 보답하겠다고 인사를 하고 시동을 거는데, 누군가 혹시 소변이 마려워서 내린 거냐고 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후  산꼭대기에서 방뇨를 한 여교사라는 오명을 남기고 창원으로 전근을 오게 되었다. 나의 알량한 낭만과 체면은 그 고갯마루 눈 속에 뭉개진 채….

아직도 나는 거짓말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쉬고 싶을 때 학생들이 찾아오면 바쁘다고 해 버리고, 남편과 자식에게도 최대한 내 편한 쪽으로 핑계를 댄다.

지금이라도 매순간 누구에게나 진솔할 수 있다면 남은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 텐데, 나는 오늘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바쁘다, 힘들다, 죽겠다 하면서!

착한 거짓말을 응원한다

조세형 41세. 삼성SDS 홍보팀,

<회사에서 통하는 커뮤니케이션> 저자

내가 일하는 사옥의 식당으로 들어가는 1층 입구에는 대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들을 처음 식당으로 데리고 갈 때면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이 대나무밭에 유리벽을 쳐놓은 이유는 이곳에 판다곰 한 쌍이 살고 있어서 그래. 북경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우리 기업의 적극적인 후원에 감사해서 중국 정부가 판다곰 한 쌍을 중국 본사에 선물로 주었고, 이곳에 사옥을 건립하면서 한국으로 들여왔지."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신입사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판다곰을 열심히 찾는다. 그럼 내가 또 덧붙인다.

"아, 그게. 점심시간에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해서 곰들이 스트레스를 받거든. 그래서 매주 화요일하고 수요일, 이틀만 3시부터 5시까지 볼 수 있어."

신입사원들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곰 찾는 일을 멈춘다.

 

김주호 작. <나는 지금>

캔버스에 아크릴릭.

72.5×60cm. 2009.

점심을 먹으며 나는 나의 거짓말에 대한 자수를 바로 한다. 곧 웃음이 터지고 식사 시간은 유쾌해진다. 도심 한복판에 판다곰이 살 리가 없건만 진지한 나의 말을 믿어주는 사원들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 나 또한 그들과 더욱 친해지게 된다. 서먹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착한 거짓말’에 그들도 긴장을 풀고 마음을 연다.

거짓말이 좋을 리는 없다. 거짓은 일단 상대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이처럼 거짓말이 다 나쁜 거짓말이지 착한 거짓말이 어디 있겠냐마는 가끔 동료들을 웃게 하는 거짓말이나 술자리의 분위기를 띄우는 재밌는 거짓말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기분 좋은 ‘착한 거짓말’은 정말 기분을 ‘거짓말’처럼 풀어주기 때문이다.

다만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거짓말’은 절대 안 될 것이다. ‘나쁜 거짓말’은 언젠가 자기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오직 ‘착한 거짓말’을 응원한다.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7)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7)

1980년 프랑스에서의 일입니다.

르네(Rene Poec’h)라는 의사는 마음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합니다.

무작위로 움직이는 로봇 하나를 빈 박스에 넣습니다.

로봇은 벽에 부딪히면서 박스 안 전체를 골고루 다녔습니다.

그다음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로봇을 본 병아리 한 마리를 박스 옆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러자 무작위로 돌아다니던 로봇이 병아리 근처에서만 움직였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르네 박사는 무려 20년 가까이 그 실험을 지속적으로 했고, 매번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2002년 박사는 초심리학 학술지에 ‘마음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로봇의 동선에 영향을 준 건 바로 병아리가 가진 마음의 힘이라는 확신을 얻은 겁니다.

조류는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 처음 본 움직이는 사물을 어미로 인식하지요.

병아리의 어미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로봇의 움직임에 변화를 준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마음의 힘에 주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긍정의 힘’을 믿고 자신의 염원을 시도해 보지만 생각처럼 되지는 않지요.

그럼 이내 포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의 힘’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하지만 특별한 사람만 되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병아리의 마음이 생명체도 아닌 로봇의 움직임을 바꾸게 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마음은 그저 어떤 욕심도 바람도 없는 순수 앞에 그 힘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과연 나에게 돈은 무엇인가?

돈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1)

정리 문진정

‘돈보다 인생이 중요하다’고 누구나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의 절반을 희생한다. 대학에 가기 위해, 결혼과 자녀 양육을 위해 또 풍요로운 노후 생활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한 지출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출퇴근용 차를 사고, 자녀 보육비를 내며, 업무 스트레스로 병원에도 가야 한다. 그리고는 5일간의 힘든 생활을 보상받는 것처럼 주말에는 과소비를 한다.

사람들은 돈을 동경하고 돈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도 정작 돈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가 없다. 돈을 버는 대로 투자하느라 빚에 허덕이면서도 더 많은 돈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지금 지갑에 있는 돈을 앞에 꺼내 놓고 바라보자.

‘돈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돈을 버느라 에너지를 소모하며 죽어가고 있는가.’

돈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교환 수단일 뿐, 그 가치는 항상 변한다. 돈으로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얻었는지, 돈 때문에 걱정이 늘지는 않았는지 따져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돈으로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돈에 대한 굳은 신념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과연 나에게 돈이란 무엇이고, 돈 때문에 무엇을 포기했는지, 돈에 대한 두려움, 욕심 등의 감정들도 충분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 돈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

어린 시절 돈을 대하는 심리 상태에 따라 나의 행동 패턴이 정해진다. 실제로 성장기에 경제적 어려움을 체험한 ‘IMF 세대’는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에 비해 ‘돈이 인생에서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높았다.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못 했거나, 친구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었던 경험 때문에 돈을 인생의 보호자이며 성공의 척도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 높은 연봉이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우리는 직업으로 정체성을 대신해 온 지 오래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직위나 연봉을 과장하여 말하는 것도 그것을 자신의 가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친구의 삶의 가치보다는 직장, 직위, 사는 집과 차가 먼저 궁금해진다면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다.

* 돈은 남보다 많을수록 좋다

주어진 조건은 무시하고 ‘더 많이, 더 좋게, 남과 다르게’를 고집한다면 현재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다. 많은 돈을 벌어도 ‘내가 이만큼 쫓아가면 남은 저만큼 가더라’며 더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항상 남보다 더 많이, 더 특별하기를 원하는 한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은 멀어진다.

* 돈으로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는 생각

기분이 우울하거나 외로울 때 새 옷을 사거나 술을 마시는 등 소비 활동으로 위안을 얻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험에서 느끼는 순간적 기쁨과 안정감은 무의식중에 남아 있다가 기분이 상할 때마다 과소비를 부추긴다. 기분 전환용 소비로 내면의 안정감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잡동사니와 빚만 늘어나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나는 돈에 대해 어떤 감정이었는지 점검해보자. 우선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돈에 대한 관념과 지식, 신념, 행동에서 벗어나 돈을 새롭게 정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지금과는 다른, 돈의 주인으로 사는 삶이 시작될 것이다.

참고 도서  <돈 사용설명서>  비키 로빈 ·조 도밍후에즈 · 모니크 틸포드 / 도솔

아토피가 깨끗이 사라졌어요

김소연 22세.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과 1학년

"아토피가 있었어?" "네, 아주 심했답니다."

지금 친구들은 내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른다. 나의 아토피 과거사를.

아토피는 나의 십 대 시절을 지배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팔 안쪽부터 시작되었던 아토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점점 심해지더니 목, 얼굴, 다리까지 번졌고 중·고등학교 때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얼굴에서 진물이 나고 목 주변이 다 굳어서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안 해본 치료도 없었다. 피부과에서 알레르기 검사도 해보고 한의원 가서 침도 맞고 한약도 먹었다. 이사도 가보고 벽지도 바꿔봤다. 된장국에 야채만 먹었던 때도 있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하나하나를 조심하고 신경 써야 했다. 그런데도 차도가 없었다. 일시적으로 좋아지다가도 또 악화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너무나, 지쳤다.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불을 끄고 목욕을 했다.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여기까지 말하면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전혀 그렇게 안 보여~ 이렇게 피부가 뽀얗고 예쁜데?"

반전은 이제부터다. 2007년 엄마 친구분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된 것이다. 수련을 하며 아주 오랜만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예 고등학교를 휴학했다. 그리고 수련을 하면서 아토피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찾아 버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나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아이었다. 그러다가 새 학년이 되었는데, 나를 몰라주는 아이들, 바뀐 교실 분위기.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때의 스트레스로 아토피가 시작된 거였다. 아토피가 점점 심해졌음에도 무리해서 공부를 했다. 전교 1, 2등을 놓치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친구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 안 아픈 척했지만 외모를 예쁘게 꾸밀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다. 그 무렵 마음에 쌓인 걸 그때그때 버릴 수만 있었더라면 이렇게 심해지진 않았을 텐데….

놀랍게도 수련 3개월이 지나면서 점점 아토피가 없어졌다. 8개월 후쯤에는 언제 아토피가 있었냐는 듯이 얼굴이 깨끗해졌다. 피부가 좀 아프다가도 마음수련을 하며 그 스트레스를 버리면 금세 다시 좋아졌다. 아토피가 생겼던 이유가 확실히 ‘내 마음’ 때문이었음을 그때 알았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모두 치유되고 나서 학교에 복학했고, 한 살 어린 동생들이랑 학교도 신나게 다녔다. 나 때문에 늘 어두웠던 부모님, 눈치 보던 동생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아토피는 단순히 증상만 치료해서는 잘 낫지 않는다. 스트레스가 아토피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져 주눅이 들고 콤플렉스가 생긴다. 심하면 내 경우처럼 대인기피증, 우울증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토피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같이 치료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정말 지긋지긋했던 아토피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토피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내 마음을 들여다볼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

-하늘 나고 사는 길 -살아서 하늘나라에 나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다

하늘 나고 사는 길

하늘은 높고 구름 한 점 없구나

천지는 이것에서 나왔고 이곳으로 되돌아가구나

사람이 난 곳도 하늘땅의 조화로 난 것이다

이 하늘은 끝이 없고 말이 없으나 전지전능하여라

하늘 이전의 하늘이신 정신에 내가 있는 것이 감사하구나

세상에 있는 것이 감사하구나

내가 본정신 차리니 세상이 나와 하나이고 세상과 순리로 살구나

하늘 보고 절하고 빌었던 것도 하늘은

하늘인 본정신이 아니면 이루어준 것이 하나도 없구나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의 뜬구름과 같고

이 하늘인 정신의 나라만이 영원한 진짜의 세상이구나

인간이 완성이 되고 인간이 사는 것은

이 하늘 나고 사는 것인데

이 길은 오직 자기를 버리는 길이라

자기가 없으면 하늘 정신만 남고 그 하늘에서 다시 나는 것이라

살아서 하늘나라에 나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진 찍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

우리의 부모도 조상도 모두 다가 세상을 사진 찍은 허상 속에 살다가 갔다.

그러기에 태어나면서부터 그 마음이 사진 찍어 가진 하나의 필름과 같다.

이것은 그 필름 속의 각본에 의하여 그만큼 말하고 행하고 산다.

그러나 사진이 실이 아니듯 이것은 모두 다가 허다. 사람의 마음 그 자체가 죄요 업이다.

이 사진의 세계와 사진인 자기를 다 없애지 않고는 천국인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자기 개체의 마음의 세계가 없고 자기가 없으면 참세상은 있지 않는가.

참세상에 거듭 다시 나려면 자기와 자기의 마음의 세계가 없으면 다시 날 수가 있다.

자기와 자기의 마음세계가 일체 없으면 참세상이 나올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항시 진리인 하늘의 정신과 하나가 되었을 때 하늘에 날 것이고

하늘의 진리의 에너지와 신인 영과 혼으로 100% 완전히 나야 한다.

살아서 하늘나라에 나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다.

글, 그림 우 명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등 다수가 있습니다.

-生きている世界 -?理であるこの世と一つになってこの世に生まれたら


生きている

世界

雲一つなく

晴れ渡った空に、?えきれないほど多くの

星だけが?って輝いている

その遠い昔にも

??しい人?の?史にも

この星?は何も言わずにただあった

??しかった人?は?月に?み?まれてしまったのだなあ

この世にある天?と万物万象も

いつかは?月に?み?まれてしまう

人間の心の世界にある話だ

この世では一切が生きている存在なのだなあ

この世になってみたら

この世と一つになっているものは

すべてがみな生きているのだ

?理であるこの世と一つになってこの世に生まれたら

人間の生そのものが?像である

「人は妄想に生きている」。そんな話を私たちはよく耳にしてきた

また、いつかは救世主が現れて

私たちを救?してくれるという

このような話があるのも人間が正しき世界に生きられずにいるためだ

だから宗?では「心を磨け」

「心を無くせ」と?いているのだ

人間は?際の世界に生きていると思っているが

人間が暮らしている世界とは自分が作った一つの映?フィルムの中である

?際の世界と心の世界が重ね合わされているために?付かずにいるだけなのだ

人は小さい頃から

一つのフィルムを製作し

自分の心の中に持ち

この世を撮影して作ったフィルムの中に暮らしている

試しに、今朝の食事を思い返してみればいい

自分の心の中に、自分が座っていた場所や

一?に食事をした人も、??に撮られて

自分の心の中という??の中にあるではないか

?際の世の中ではなく、自分の心の中という??の中の出?事だったではないか

朝の食事も今日一日の生活も

自分の心のフィルムの中にあるではないか

自分は?際の世の中にいたのではなく

自分の心の中にいたではないか

今この瞬間も後から振り返ってみれば

??の中にあるはずだ

今この瞬間は心とこの世が重なっているために

人は?際の世の中に生きていると錯?しているのである

?際の世の中と一つになってこの世に生きれば

??は一つも無いだろう

人間の心は、??を撮って作られたフィルムであるが

本?の世界の心には??が撮られない

この事?を知らないために

人間は、本?の世界に生まれ出るという救?に?れずにいるのである

この??の世界の中には

苦痛の荷物と生死と善?、生老病死

過去、未?、現在があるが

?理であるこの世と一つとなりこの世に生まれたら

それら一切が無い

永遠不?の生命そのものだ

文と? ウ?ミョン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

병원 봉사 연주자, ‘포유뮤직’의 이주은, 최시애 씨

취재 최창원, 사진 홍성훈

“어머니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였어요. 로비에서 음악 공연하는 걸 보게 되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지쳐 있던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눈물이 나는 겁니다. 나도 음악 전공자인데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저도 꼭 하리라 마음을 먹었지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졸업 후 전문 강사와 연주자로 활동하던 이주은(32)씨에게 그때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는 우선 대학에서 함께 피아노를 전공하고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는 최시애(32)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2009년 3월, 병원 연주 봉사자들의 모임인 ‘포유뮤직(For You Music)’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고, 2009년 4월 1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첫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아해주시는 거예요. 고맙다며 손잡아주시고, 또 오라고 해주시고. 저희가 오히려 진심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지더라고요.”

한 번, 두 번 연주를 진행하는 사이, 점차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저도 악기 연주 가능한데, 함께할 수 있을까요?” 하며 동참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렇게 연주자가 2백여 명으로 늘었고, 앙상블, 관현악, 합주뿐 아니라 성악, 국악, 재즈 등 장르도 다양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 건대병원, 아산병원 등 5개 병원에서 정기 연주를 하고, 요양원 등의 요청이 있으면 방문한다.

“눈물이 나오네요” “덕분에 힘이 났어요”라며 감동하는 사람들, 꼬깃꼬깃 지폐를 건네주시던 할머니, 그 시간만 기다려진다는 환자분들. 그중에서도 음악을 듣고는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는 뇌성마비 아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2009년 5월, 보라매병원에서였다. 누워 있던 아이가 음악에 반응을 보이자, 놀란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나왔고 아이는 연주를 들으며 웃음까지 지었다. 그때부터 음악 연주회는 이 모자에게 큰 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작년 8월 이주은씨는 갑작스럽게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그녀 자신이 환자가 된 것이다.

“수술하러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번엔 제가 환자의 입장에서 음악을 듣게 되었어요. 영화음악, 재즈 같은 친근한 음악들이었는데 정말 눈물이 나도록 힘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항상 더 높은 것만을 좇았구나 싶었어요. 나도 저 사람처럼 유학 가고 싶다 등등 못 이룬 것이 너무 안타깝고, 더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이렇게 제 연주를 즐거워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구요.”

함께 연주를 해왔던 최시애씨도 “항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제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마음이 생겨가는 것 같다”고 한다.

“예전에는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무조건 여행을 갔어요. 그렇게 허전함을 달래고 충전을 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누군가를 위해 연주를 하면 마음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겁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도 더 유심히 보게 되고, 환자들과 어떻게 더 교감할 수 있을까 노력하게 되고 생활에도 활력이 생겼어요.”

정기 연주뿐 아니라 밸런타인데이 콘서트, 화이트데이 콘서트도 기획하는 이들은 앞으로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무료 레슨도 하고 싶단다.

포유뮤직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연주를 다닌다. 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등 5개 병원 정기 연주와 요양원 등의 초대 공연을 한다.

http://cafe.naver.com/musichm

자기 성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지름길

스트레스, 기업이 관리해야

중앙대병원 순환기 내과 이광제 교수는 “미국에서는 피로를 호소하는 직원을 전문 상담사와 연결해 치료까지 지원하는 멘탈 피트니스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며 “사업주가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하나의 질병이라고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례로 종업원 지원 프로그램(EAP)을 도입한 미국 기업 ‘3M’은 종업원의 생산성이 80% 가량 향상되었으며, ‘킴벌리클라크’는 건강 증진 프로그램인 ‘LIVEWELL’을 통해 건강검진, 에너지 재충전, 멘탈 헬스 관리를 실시하여, 결근율 43%, 산업재해 35%를 감소시켰다. 일본 기업 ‘소니’는 ‘Wellness Center(건강 센터)’를 설치하여 정신과 의사를 상근시키고 있으며, ‘캐논’은 보건 담당자가 상담과 스트레스 관리 교육을 연간 80시간씩 받는 등 직원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회사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고, 기업 및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SK텔레콤’은 입사한 지 10년이 지난 사원에게 1~3개월 리프레시 휴가를 주고 있으며, 삼성전자도 올해부터 일반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 정신과 검진을 확대하고, 심리상담사 수를 늘릴 계획이다.

인제대학교 스트레스 연구소 우종민 소장(백병원 신경정신과)은 “업무상 스트레스로 산업재해와 과로사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스트레스를 기업이 나서서 풀어주는 것이 생산성 향상과 위기 탈출의 관건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 고통의 원천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 그것이 스트레스 관리의 출발점”이라고 진단했다.

직장에서 행복을 유지하는 6가지 비결

미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은 미국 컨설팅업체 숀 아처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직장에서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6가지를 제시했다.

1. ‘고마운 일’을 찾아라 : 매일 감사 리스트를 작성한다. 감사할 때 일의 성과도 높아진다.
2. 일하는 틈틈이 재미를 찾아라 : 잠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인터넷에서 재밌는 동영상을 찾아 즐기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된다.
3. 업무 환경을 밝게 꾸며라 : 긍정적인 생각을 유도할 수 있는 사진이나 장식들로 책상을 꾸며보자.
4. ‘걱정 노트’를 만들어라 : 부정적인 느낌을 글로 쓰게 되면 걱정거리가 객관화되면서 그 크기가 반감된다.
5. 인간관계에 투자하라 :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끈끈한 유대 관계는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6. 쉬면서 업무 효율을 높여라 : 90~120분 일하고 5분 쉴 때 업무 효율이 극대화 된다.

아등바등 안 해도 늘 생기가 돋네!

전전긍긍 아등바등 안 해도
늘 생기가 돋네!

양재일 52세. K은행 본점 부서장.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지난 90년대 말 IMF 사태가 준 충격은 컸다.
우리 회사 전체 직원의 30%가 감원되고,
지점에선 많은 동료들이 줄줄이 떠나가게 된 것이다.
떠난 자와 남은 자의 갈림길, 그 속에서 나는 남겨진 자에 속했다.
하지만 남겨진 것에 대한 안도와 감사함 한편으로 회의가 밀려왔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것,
과연 열심히 일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공허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더 이상 여태껏 해온 생활을 반복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달라져야 했다.

 

먼저 급변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실 감각을 키우고 싶었다. 업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영어 공부는 물론 은행 업무와 관련한 전문 자격증 취득에 매진했다. 덕분에 10개 이상의 자격증을 취득했고, 인사 담당관은 “이제 더 딸 자격증이 없겠네요”라고 했다.

아침 8시, 회사에 1등으로 출근했고, 고객의 전화 한 통이면 무조건 달려갔다. 고객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방문을 했다. 토요일, 일요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온 결과, 온종일 내 책상의 전화는 불이 났다. 예금 유치액도 2배 이상 늘어났다. 실적에 자신감이 생겼고, 어느 순간엔 맘만 먹으면 목표 달성액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신바람이 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부하 직원들의 업무 태도가 눈에 점차 거슬렸다. 9시 출근, 6시면 땡~ 퇴근하는 직원들이 못마땅했다. 고객이 찾으면 휴일도 반납하고 언제든지 달려가는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 하나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왜 그리 못하냐”면서 직원들을 꾸짖었고, 직원들의 불만도 커졌다. 내 책상 앞으로 고객들은 줄을 섰지만 직원들과는 손발이 맞지 않아 일이 점점 힘겨워졌다.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직장 생활에 대한 허무함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설사 목표 달성을 하더라도 아무런 보람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바쁘게만 뛰어갈 뿐, 이유도 뜻도 없이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나름 동기 부여를 하면서 의미를 애써 찾아보았지만,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직장 생활이 이런 게 아닌데, 내가 이렇게 다니려고 직장에 들어온 게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내 얼굴이 안되어 보였는지 은행 청원경찰이 내게 마음수련 책자를 건네주었다. 마음을 버릴 수 있다는 문구가 참 맘에 와 닿았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나. 서글프면서도 씁쓸했다. 나이 먹는다는 게 두렵고 불안한 나. ‘갑자기 잘리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남보다 잘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나. 자기밖에 모른다며 면박을 주었던 직원들. 근데 돌아보니 나야말로 나밖에 몰랐다. 고객을 위한다고 휴일도 반납했지만, 결국 나를 위한 거였다. 실적은 곧 내 명예요, 자존심이었다. 목표를 세워 그 기준에 따라오면 잘한 거고, 못 미치면 못한다고 다그쳤던 직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했지만 오직 나만을 위한 최선이었다. 직원들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에 다름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아찔했다. 소의 고삐를 잡고 끌고 가듯 내 잣대에 맞추려고 억지로 끌고 가려 했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구나….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수많은 굴레에 덮어씌어 있었다. 자식도 잘돼야 했고, 동기들한테 창피 안 당하려면 승진도 해야 했다. 퇴직도 마찬가지였다. ‘직장 생활 30년 했다, 지점장이다’ 등 과거의 타이틀을 부여잡고, 낯선 세상에 던져진다는 게 두려웠다. 아등바등 잘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사이 주변 사람들은 이미 깊은 상처를 받고 있었다. 내가 오히려 그들을 힘겹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미안했다.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주위 사람들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내 잣대로 바라본 세상이 불만투성이였다면, 나로부터 벗어나 바라본 세상은 온전히 나를 거두어주는 한없이 따듯한 세상이었다. 하나하나가 다 감사했다. 잘 커주는 아이들, 아내가 정성스레 끓여준 된장국,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 그들이 달리 보였다. 그 자리에 있는 이유와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내 방식대로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게 줄어들었다.

직원들의 의견을 많이 듣고 존중하려 했다. 혹여 할 일을 잊어버린 거 같으면 메시지를 띄워주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제안해주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좀 더 많이 웃으면서 대했을 뿐인데 직원들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해주었다. 그 결과 우리 지점은 고객만족도평가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욕심으로 일을 할 땐 하는 것 없이 힘만 들더니, 지금은 많은 일을 해도 늘 생기가 돋는다.

내가 무수히 그어놓았던 선을 지우니 그 자유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앞으로 다가올 퇴직도 이젠 걱정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내 인생 제2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이제야 제대로 된 자격증을 딴 기분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참되게 살아갈 수 있는, 생애에서 가장 멋진 자격증을 갖는 것이다.

노력해도 안 되던 것들이 해결되네요

열등감, 비교 스트레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것들이
해결되네요

김영희 45세. 화장품 영업. 서울시 강북구 쌍문동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25세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9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다가
화장품 영업 일을 처음 시작했다.
애들 돌볼 시간도 있고, 돈도 벌 수 있겠다 싶어서 선택한 일.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 자라고 대학도 나오지 못한 나는 일단 사람들의 메이커 옷차림과 명품 가방 앞에서 기가 죽었다. 특히 전문직 여성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대화 중에 문득문득 외래어나 영어가 나올 때면 못 알아들어 애먹을 때도 많았다. 말문이 막혀 대화가 끊겼고, 자신감은 떨어졌다. 똑똑하고 일 처리 잘하는 동료들과 비교될 때마다 기운은 없어지고, “나는 왜 이리 못났을까” 한숨만 나왔다. 자신감을 갖기 위해 리더십 강의를 들으러 다녔지만, 거기서도 영어는 큰 걸림돌이었다. 칠판 가득 써 있는 영어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적었지만, 내 노트는 텅 비어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았다. 영업 잘한다는 사람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거울을 보고 웃으면서 하루에 열 번씩 “나는 할 수 있다!”를 외쳤다. 하지만 그 무수한 다짐도 내 것이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영업 지역이 지방에서 서울로 옮겨지면서 영업 실적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로에 섰을 때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육성회비를 제일 늦게 내서 선생님께 또 혼나고 있었다. 간식으로 우유를 먹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가게 앞을 지나다가 과자가 먹고 싶어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초등학교 때 기죽어 살았던 사진들이 한참 쏟아져 나왔다.

‘가난하고 예쁘지도 않고 키도 작고…, 난 지지리 복도 없어.’ 불만이 가득하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달란트를 골고루 주신다는데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태어났나, 한탄하던 나를 계속해서 버리던 어느 날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내 모습이 너무나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오직 나만 잘살게 해달라고 울고불고 떼쓰는 꼴이었다. 똑같은 자식들이라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마음 써주는 자식과 나만 예뻐해 달라고 떼쓰는 자식들 중 누가 더 예쁠까? 세상 이치가 그러할진대, 오로지 나, 내 가족만 잘살게 해달라고 투정 부린 나는 아무리 봐도 복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영업이 힘든 것도 당연했다. 고객에게 친절했던 것도 오직 돈 한 푼 벌기 위해서일 뿐, 거기에 상대방을 위한 배려는 없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잘못 살아온 게 너무나 창피해서 한동안 울면서 다녔다.

우선 악착같이 돈 벌고 싶은 마음부터 내려놓았다. 매출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으니 훨씬 일이 쉬워졌다. 내 마음이 편안하니, 상대방도 편하게 받아들였다. 고객의 이야기를 잘 못 알아들으면 솔직하게 “제가 잘 모르거든요” 하며 다시 묻는 용기도 생겼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았던 것들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영업 실적도 10배나 올랐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써 버린다. 그래서 정작 자신의 능력은 제대로 발휘 못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긍정적인 마음과 감사함을 배웠고, 진정한 자기 계발이란 진심을 이야기하는 거란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뭐 좋은 일 있나 봐, 일하는 게 아니라 노는 거 같은 표정이야.” 정말 그렇다. 일을 하되 일이 아니라 마치 신나는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나 돌아보기, 새로운 세상을 맞는다

나 돌아보기,
새로운 세상을 맞는다

고권호 48세. KT 네트웍스 근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사진 홍성훈

입사 5년 만에 다른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의 일은 지금까지 해온 일과 달랐다.
낯선 일에 적응할 틈도 없이 상사의 지시는 쉴 새 없이 내려왔다.
책상 앞에 서류는 끊임없이 쌓여갔고,
현장은 현장대로 바쁘게 돌아갔다.
마치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사람들과도 부딪쳤다.
상사의 지적 한마디는 큰 상처가 되었고,
반면 상사한테 칭찬받는 동료에 대한 열등감은 커져 갔다.

 

‘동료는 예뻐하고, 나는 미워하는구나. 고향도 다르니까 대우를 더 못 받는 거야….’ 동료들의 모습을 확대 해석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혔고, 매사 비굴해져 갔다. 내가 자라온 환경도 원망스러웠다. 섬 머슴아로 태어나고 자라 대도시에 왔을 때부터 가졌던 열등감이었다. 작은 상처에도 꽁해지고, 대범하게 받아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난 후 의자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불안이 엄습해왔다. 마치 전깃불이 확 하고 켜지듯이 온몸으로 쏟아지는 불안감이었다. 퇴근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지만, 결국 중간에 내려야 했다. 미친 듯이 병원을 찾아 헤매었고, 제 발로 찾아 들어간 곳은 응급실이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숨 쉬기도 힘들고, 발끝과 손끝이 점점 마비되는 듯했다. 이렇게 죽나 보다….

그렇게 예고탄도 없이 병마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늘어난 업무는 큰 압박감을 주었고 결국엔 과부하가 걸린 거였다.

공황장애라 했다. 의사는 약은 보조 역할일 뿐 마음을 바꿔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했지만, 고로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늘 긴장 상태이고 심장은 쿵쿵 뛴다.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무대에 혼자 서 있는 기분. 긴장 상태가 최고조에 올라가면 과호흡으로 위험해진다. 겨우겨우 호흡 조절을 하면서 위기를 넘겼지만, 언제 닥쳐올지 모를 불안감에 몰골은 수척해갔다.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해오기도 하고, 24시간 지옥 같은 공포가 이어지기도 했다. 한적한 곳으로 가면 나을까 싶어 시골로 발령을 내봤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업무는 여유 있는데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업무 습관은 그대로였다.

내가 마음이 여리고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보니, 이런 병에 걸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책도 보면서 안정을 취하려고 했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치 기타줄 당기듯이 뒷골이 당기는 증상까지 겹치면서 죽음의 공포가 연거푸 밀려왔다. 40대에 가장 많다는 ‘돌연사’. 내가 바로 그렇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때 불현듯 동료가 권유했던 마음수련이 떠올랐다.

죽어라 마음을 버렸다. 마음이 나약해서 이런 병에 걸렸다며 그동안 얼마나 한탄했던가. 그런 마음들을 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사했다. 처참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가족들 앞에서도 노래도 못 부를 정도로 소심했고, 학급 회의 때도 말 한마디 못 했던 학창 시절….

나는 여리다, 소심하다, 하는 기억의 사진들을 떠나보냈다. 이렇게 나약하게 태어나게 했다며 부모님을 원망했던 마음도 버렸다. 나는 평소 사람들한테 잘하는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근데 나의 내면을 살펴보니,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서 나온 행동이었다. 때문에 내 딴엔 잘해주던 상대한데 싫은 소리를 들으면 더 큰 상처가 되었다. 그런 자잘한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더 작아졌다. 마음사진들이 나를 계속해서 여리고 왜소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사진이 스트레스였다.

부지런히 그 사진을 버려나갔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서류 한 장, 사람들의 말 한마디, 지시 사항에 쪼그라들고 상처받던 예전의 ‘고.권.호’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죽어라고 마음을 빼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공황장애도 밤손님처럼 언제 간지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졌다. 나에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연히 직장 생활도 달라졌다. 마음의 빼기만 했을 뿐인데 사람들과의 부딪침은 줄어들었고, 세상을 넓게 보고 수용하는 마음이 커졌다. 일을 할 때도 ‘과연 잘될까?’ 하며 미리 결과를 걱정하고 초조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결과는 나오듯이, 이제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함께하는 동료들이 고맙고, 남을 분별하기보다는 내가 과연 내 역할을 잘하는지부터 점검하게 된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 모두들 직장 생활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해온 일만 고수하고 내 모습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살아온 내 모습을 버리며 틀에 박혀 있던 고정관념 또한 바꿀 수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후배들도 존중하며 스스럼없이 도움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남 앞에서 말도 못 하던 내가 어느덧 가족 모임이나 동창회 모임도 주도한다. 일도 모임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지만 생활에 치인다는 마음이 없다. 안될 거란 생각 자체가 없다. 늘 긍정이다.

세상은 나의 마음을 펼쳐서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스트레스로 힘들거나, 안 좋은 일 때문에 괴롭다면 내 마음부터 살펴보길 권유하고 싶다. 자기를 되돌아볼 줄 안다는 것은 곧 새로운 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감기 예방과 피부 미용에 좋아요, 새싹채소 샐러드, 딸기 드레싱

여러 가지 쌈 채소의 어린잎을 따서 모은 새싹채소.

잎이 여리고 부드러워 생으로 먹기에 좋고,

샐러드는 물론 요리에 곁들이는 채소로도 아주 좋다.

비타민C와 식이섬유가 풍부한 새싹채소와 딸기 드레싱으로

감기 예방과 피부 미용에 좋은 샐러드를 만들어보았다.

이양지 자연요리 연구가

재료 준비

새싹채소 200g, 노랑·빨강 파프리카 1/4개씩,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1큰술, 드레싱(딸기 5개,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3큰술, 레몬즙 1 1/2큰술, 꿀 1작은술, 소금·후춧가루 조금씩)

만들기

① 새싹채소는 찬물에 씻어 물기를 잘 빼두고, 파프리카는 씨를 뺀 뒤 4~5cm 길이로 얇게 채 썬다.

② 딸기 드레싱을 만든다. 볼에 딸기를 넣고 포크로 짓이긴 뒤 나머지 드레싱 재료를 넣고 고루 섞는다.

③  큰 볼에 새싹채소와 파프리카를 넣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1큰술을 넣고 살짝 버무린 뒤 그릇에 올린다.

④ ③에 ②의 드레싱을 끼얹는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