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추위 이겨내고 다시 태어난 튤립처럼

새 학기, 새 직장….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봄날입니다.

튤립을 보고 있으면 이때에 정녕 딱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작고 못생긴 알뿌리에서 ‘우리 이렇게 부활했어요’ 하고

당당히 꽃대를 드는 튤립들.

실내 식물 중에서도 노지에서 겨울을 나는 것은 드문데요,

튤립 같은 알뿌리식물은 겨우내 마치 죽은 것처럼 있다가

영하의 추위를 다 이겨내고 이렇게 예쁜 꽃으로 피어오른답니다.

생명의 신비를 깨닫게 해주는 튤립은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줍니다.

햇빛 밝은 햇빛과 서늘한 기온을 좋아해요.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마르면 한 번에 흠뻑 주세요.

번식 꽃이 지고 나면 꽃송이 아랫부분을 자르고 해가 잘 드는 곳에 두세요.

잎이 완전히 시들면 알뿌리를 캐내어 그물망에 넣고 서늘한 곳에 뒀다가, 가을이 되면 냉장고에서 두 달 정도 보관합니다. 저온 처리 기간 동안 알뿌리 숫자가 불어납니다. 겨울에 알뿌리들을 흙에 심어주세요. 봄이면 다시 예쁜 꽃을 볼 수 있답니다.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1박 2일’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한 여행

KBS-2TV ‘1박2일’에서 외국인 근로자 특집을 마련했다고 할 때, 처음엔 좀 의아했습니다.
왜 굳이 ‘1박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외국인 근로자’ 특집을 마련했을까 하고요.
그러나 방송은 예상치 못한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번 방송은 ‘글로벌 특집 2탄’이라고도 명명되었는데,
작년 여름의 ‘글로벌 특집 1탄’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KBS

니띤과 와프와 스캇 등 1탄의 외국인 참가자들은 노동이 아니라 공부와 예술 활동 등을 위해 한국에 왔고, 끼와 예능감까지 겸비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타향에서 외롭게 고생하고 있는 2탄의 외국인 참가자들은 성격도 수줍고 약간씩 위축되어 보였지요. 그들의 사연에는 다큐멘터리와 같은 눈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신이 받는 월급 중 5~6만 원을 제외한 모두를 고향으로 부친다는 네팔 친구, 강호동의 짝꿍 ‘까르끼’. 고향에 두고 온 여섯 살과 두 살의 어린 딸들이 매일 보고 싶다는 까르끼는 어머니가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했는데, 자기가 부쳐주는 돈으로 약을 사 먹어서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니,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이제껏 그들을 개별적, 인간적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회적 문제로만 인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게다가 그동안 읽었던 신문 기사에는 중소기업주들이 외국인 근로자 고용 문제로 골치 아파하거나 차별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1박2일’에 등장한 사장님들은 아주 달랐습니다.

까르끼의 회사 사장님은 자신의 젊은 시절, ‘오일 머니’를 벌기 위해서 중동에 나가 일할 때 겪었던 어려움을 기억하기 때문에,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도 진심으로 차별 없이 대해주고 싶다 말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우리의 형제들도 지금 어디선가 낯선 곳에서 이들과 똑같은 설움을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종민의 짝꿍인 스물여덟 살의 캄보디아 청년 쏘완은 방송에 출연한다고 나름 멋을 부리고 나왔던 모양인데, 사장님은 “멋 내고 갔다가 너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냐?”면서 자기의 점퍼를 벗어 입혀주시더군요. 하필이면 그날은 사상 최대의 한파가 몰아닥친 날이었습니다. 점퍼를 입고도 “사장님, 추워요!”라며 떠는 쏘완의 옷깃을 여미며 토닥여주는 사장님은 정말 아버지 같았습니다.

이승기의 짝꿍은 ‘예양’이라는 이름의 미얀마 친구였는데, 작업반장님은 예양을 굶기면 안 된다고, 복불복에 져도 밥은 먹여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으며, 사장님도 이승기를 향해 “고생시키면 안 된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양을 향해서는 “고생하는 것도 재미있다. 한국에 와서 이런 추억 만들기는 정말 힘든 거다. 너는 행운아다”라고 격려했습니다. 역시 아버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당신은 함께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자막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이 제 가슴에도 와 닿았습니다.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지구상에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함께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니까요.

지현정님은 명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십여 년간 출판사에 근무했으며 2009년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빛무리’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와 예능, 영화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타샤 튜더의 마음의 정원에서 봄을 맞는다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버몬트주 30만 평에 자리한 비밀의 정원.
미국의 가장 사랑받는 동화 작가였으며 일러스트 화가로 백 권이 넘는 그림책을 펴냈던 타샤 튜더는
2008년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곳에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옷을 지으며 19세기 생활 방식으로 살았다.
일년 내내 꽃이 지지 않아 비밀의 정원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낙천적이며 소박하게 살아온 그녀의 삶과 철학을 두 권의 저서를 통해 만나본다.

출처 <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타샤 튜더 지음, 리처드 브라운 찍음)
<타샤의 정원> (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리처드 브라운 찍음) (도서출판 윌북)

 

 

 

타샤는 붉은 꽃잎이 너울대는 자포니카 동백을 좋아한다. 아이리스 모양뿐 아니라 장미 형태를 지닌 종류도 갖고 있다. 모두 가운데 가루 같은 노란 수술이 있다. 3월이면 동백꽃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집에 와서, 여러 개의 백랍 단지에 꽂고 또 꽂는다. 그 섬세한 색과 극적인 움직임에 이끌려 믿기 어려울 만치 탐스럽고 복슬대는 귀한 동백꽃들을 모아놓는다.

타샤는 마당에 있는 풀 한 포기까지 진심으로 사랑하고, 식물 하나하나를 그대로 애지중지하면서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타샤는 꽃들에 대해 ‘그 아이가 싹을 예쁘게 틔웠는데, 날이 건조해서 시무룩해졌지요’라고 말한다. 정원이 늘 황홀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듯싶다.

헛간이나 집에서 일할 때면 종종 인생을 살면서 저지른 온갖 실수들이 떠오른다. 그러면 얼른 그런 생각을 뒤로 밀어내고 수련을 떠올린다. 수련은 항상 불쾌한 생각들을 지워준다. 새끼 거위들도 수련처럼 마음에 위안을 준다. 새끼 거위의 눈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지? 단춧구멍을 낸 듯한 눈 주변과 보송보송한 솜털이라니. 기분 좋을 때 내는 이상한 휘파람 소리 같은 지저귐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 20~30년간 기른 화초에서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설레는 일이다. 옛 친구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랄까. 수선화는 낙천적인 꽃이고 잘못될 리 없는 꽃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는 ‘제비가 엄두를 내기 전에 오는 수선화, 3월 바람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네’라고 읊었다.

당신이 빛날 때

월요일 아침, 직원 회의를 마치고 우르르 교실로 향하던 중, 함께 걷던 오십 대 여선생님이 앞서 가던 이십 대 처녀 선생님에게 말했다.

“하선생, 어쩜 그렇게 예쁘고 날씬하노?”

젊디젊은 이십 대 선생님은 뜻하지 않은 찬사에 뒤돌아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에도 젊음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오십 대 여선생님도 그런 빛나는 청춘의 세월이 있었을 터이다. 그래서 나는 누님 같은 여선생님을 위로하듯 또는 아부하듯 한마디 하였다.

“뭘 그렇게 부러워하십니까? 선생님도 젊었을 때는 한 인물 했잖습니까?”

그랬더니 오십 대 여선생님이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더. 나는 젊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예뻐예. 우리 집 아저씨가 그랬어예.”

함께 걷던 동료 교사들의 웃음꽃이 쏟아졌다. 그 속에 중년 남교사도 맞장구를 쳤다. “맞십니더. 우리 마누라도 내가 나이 들수록 멋지다 그랍니다.”

봄나들이 가는 아침이 밝았다. 정성 들여 세수를 하고 매끈하게 면도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데 아무래도 옷차림이 겨울의 칙칙함을 떨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봄날에 어울리는 화사한 스타일이 좋을 듯했다. 안되겠다 싶어 옷장 서랍을 열고 기웃거리니 아내가 깃이 있는 티셔츠를 입으라고 권했다.

“나이 든 아저씨 같아 보여서 싫은데?” “당신 나이 든 아저씨잖아? 점잖아 좋아 보이구만.” “나는 점잖은 스타일보다 나쁜 남자 스타일이 어울리는데….”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입지 않았던 원색 셔츠를 꺼내 입었다. 거울 앞에 서 보니 가슴에 있는 큰 체크무늬가 상쾌했다. 아까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흡족했다.

“음. 적당히 나빠 보이는군. 됐어!”

그때 문밖에서 힐끗 나를 흘겨보던 아내가 중얼거렸다.

“나쁜 남자? 별꼴이야. 정말.”

아내의 혼잣말을 또 귀 밝은 내가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말 별꼴’이라는 표현이 거슬리지 않았다. 짧은 순간, 젊은 시절 시시껄렁한 수작을 거는 터벅머리 총각과 좋은 듯 싫은 듯 뽀로통해져서 톡 쏘아붙이는 콧대 높은 아가씨를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재미있어서 속으로 나를 옹호했다.

‘별꼴이 반쪽이다. 흥!’

지난 시절은 우리 곁을 떠나 이미 사라져 버린 빛. 젊은 날 풋풋했던 우리 모습도 믿지 못할 기억의 편린. 하지만 바로 지금 우리가 보는 이 광경은 화사하게 쏟아지는 눈부신 빛의 향연. 강물과 유리창, 새벽하늘과 아스팔트 그리고 나뭇잎과 아이의 눈망울이 그렇게 빛나는 이유를 이제야 어슴푸레하게 알겠다. 삼월이다. 당신도 눈부시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우리 동네 어르신들을 소개합니다

동대전고 학생들의 ‘어르신 자서전 써드리기’

노가윤 동대전고등학교 3학년

2학년 학기 초였습니다. 국어 선생님께서 “우리 주위의 평범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자서전을 써드리는 봉사 활동을 하려고 하는데,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오라”고 하셨습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려운 작업’이라고 하셨지만 해보고 싶었습니다. 항상 어른들을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런 점도 개선해보고 싶었고, 또 글 쓰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거든요. 지원자가 꽤 많았는데, 최종적으로 20명의 아이들로 꾸려졌습니다. 복지관에서 다섯 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추천받았고 우리는 다섯 팀으로 나누어서 한 분씩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할머니 어디서 태어나셨어요?”

2010년 6월 12일. 인영순 할머니를 처음 뵌 날 너무나 떨렸습니다. 어색하게 첫 질문을 드리자 할머니는 웃으시며 살아오신 이야기를 쭈욱 해주셨습니다. 형제분들과 부모님 이야기를 여쭙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얘기해주셨고, 점점 할머니와 있는 시간이 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일주일에 한두 번씩 찾아뵀습니다.

인영순 할머니는 음력 1938년 2월 3일에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태어나셨다 했습니다. 화장품 장사, 물비누 장사, 블라우스 공장….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하셨고, 한국 전쟁 때는 작은오빠가 전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 시절, 매일매일 울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셨을 때는 저희도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런 어려운 시절을 겪었기에 우리가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시간이 갈수록 저희는 할머니 댁에 가는 날이 기다려졌습니다. 저희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는 꼬들꼬들한 쌀밥과 된장국, 부드러운 계란찜 등 맛있는 반찬을 준비해주셨어요. 할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때면 꼭 친할머니 댁에 온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오늘은 어떤 말씀을 듣게 될까 기대도 컸습니다. 할머니는 살아오신 이야기뿐 아니라, 저희에게 도움 되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우리 때는 여자들은 공부를 할 수 없었어. 그저 시집을 가야 했지. 지금은  너무 좋은 시대니까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 “화내지 말고 상대방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해. 나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 덕분에 좋은 사람도 만나고 지금까지 잘 살 수 있었구나 싶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인생이 저렇게 허망하구나’ 싶었지. 나는 어리석게 살아왔지만 너희들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어요. 사실 그즈음 친구랑 사이도 안 좋아지고 해서 의기소침했었는데, 할머니 말씀을 들으며 자꾸자꾸 거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너무 경솔하게 살았구나, 편하게만 살려고 했구나, 우리는 환경이 잘 갖춰져 있는데도 만날 불평만 했구나, 하는 반성도 되었고요.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부터라도 내 인생을 잘 가꿔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수업에도 활발히 참여하게 되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성공한 인생도 아니고 그저 기구하게만 살아왔는데, 글로 남긴다는 것이 부끄럽다 하시고, 내가 좀 더 훌륭한 인물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분이셨어요. 어려운 와중에 자식들을 다 공부시키셨고, 돈을 많이 벌어 남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대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언제나 기도를 하신다는 할머니. 73세의 연세에도 노인복지회관에 다니면서 할머니보다 더 불편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도우시며 “내가 아직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하다”는 할머니.

할머니를 만나면서 어느 위대한 사람만이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할머니의 인생 또한 가치가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힘든 일을 많이 겪은 편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왜 불행할까 하고 매사에 부정적인 아이가 되어갔어요. 하지만 할머니를 만나면서 많이 밝아지고 나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10월 중순, 모든 인터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문장 다듬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녹음해 놓은 할머니 말씀을 각자 맡아 정리하고 그것을 서로 돌려가면서 읽었습니다. 11월 중순에는 선생님께서 가제본을 만들어주셔서 할머니께 보여드리고 확인을 받았습니다.

“아유, 뭐 말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내용이 뭐가 많네.” 할머니가 뿌듯해하시면서 당신의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고맙다고 하실 땐 정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제목이랑 표지는 할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편집했고, 드디어 11월 말에 책이 나왔어요. 제목은 <그리스도와 함께>, ‘인영순, 글 김민정·김현지·곽진빈·노가윤’이라고 우리 이름도 나와 있었습니다.

12월 3일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모시고 출판기념회도 열었습니다. 할머니는 “뭐 대단한 거라고 출판기념회를 해”라고 하셨지만 막상 그날은 자녀분들도 다 데리고 오셨답니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자서전을 쓰는 데 보내는 것이 괜찮을까 걱정도 했지만,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송구스러울 만큼 너무 많은 것을 얻었거든요. 무엇보다 제가 정말 많이 밝아졌다는 겁니다.

지금 할머니의 소망은 후손들이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평생 간직할 겁니다.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권하고 싶습니다. 주변의 평범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라고요. 왜냐하면 어느 유명한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말씀을 듣게 될 거니까요. 바로 그분들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분들임을 알게 될 테니까요.

2010년 6개월간의 작업 끝에

<여호와 이레> <그리스도와 함께> <夢꿈> <엄마의 일기> <송암 회고록> 5권의 자서전이 탄생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우리를 변화시켰다

글 박초희 동대전고등학교 3학년

예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고지식할 것 같고, 우리가 하는 것을 억제하고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나이가 드셨다는 이유로 무시하기도 했다. 실제로 친구들 중에는 어른들 앞에 서면 투명인간이 된 듯 대화를 어려워하는 애들이 많았다 하지만 자서전을 쓰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우리 모두는 달라져갔다.

우리 조가 맡은 분은 이순금 할머니셨다. 1944년 생이셨는데,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아픈 기억, 즐거웠던 기억,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때론 할머니와 함께 한국 전쟁 피란길을 떠나야 했고, 때론 연탄가스가 방 안 가득 차는 위험한 고비도 맛봐야 했다. 그러면서 할머니께도 우리처럼 어린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았고,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지금도 열정이 있으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서 거리에서 할머니들을 볼 때의 마음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냥 할머니려니, 했는데 이제 어떻게 사시는 분일까 관심이 가고 뭐든 도와드리고 싶어진 것이다. 한번은 리어카를 끌고 힘겹게 가시는 할머니를 만나 도와드렸는데, 그러고 나니 뭔가 마음이 찡했다.

할머니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부모님의 마음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희생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엄마가 나를 낳았으니까 용돈을 줘야 하고 아빠는 당연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너무나 자식들을 사랑하며 키운 이야기를 해주실 때, 우리도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께서 “아무리 자식이 밉게 해도 퍼주는 게 부모니, 너희들이 효도를 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더욱 엄마, 아빠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 친구는 엄마가 잔소리하면 예전에는 무시하고 지나치고 그랬는데 지금은 말도 잘 듣고, 엄마가 집안일 할 때면 할머니 말씀이 생각나서 자신도 놀랄 정도로 이것저것 돕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우리 모두를 변화시켰다.

희망을 디자인하다, ‘소셜 디자이너’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오지랖 넓기로 하면 그는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는다.
시민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참여연대, 삶을 돌아보게 한 재활용 운동 아름다운 가게,
나눔의 가치를 알려 기부 문화를 확산시킨 아름다운 재단, 그리고 우리 사회의 취약 지대인
지역 사회, 농촌, 소기업의 활성화를 위한 일을 해온 희망제작소에 이르기까지,
‘어렵고 힘든 곳에는 반드시 박원순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제는 해외에서도 한 수 배우러 오는 그의 마법 같은 희망 이야기를 들어본다.

최창희 사진 홍성훈

 

그는 매일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방문하고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낸다. 희망을 만드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싱크탱크 희망제작소’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보고 싱크대 제작하는 곳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지만, 이름의 효과는 대단했다. 진짜 희망을 제작할 것으로 기대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방문하거나 메일을 보내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사람들은 그만큼 희망에 목말라 있었다.

희망제작소의 ‘사회 창안 아이디어’는 지금까지 4천여 개 가까이 된다. 그 가운데는 열매를 맺은 아이디어도 많다. 호화 관용차 등급 낮추기, 식품 유통기한 표기 확대, ATM 현금 인출 수수료 사전 고지, 경차 택시 도입 등. 아무도 연구하지 않던 문제들이 어느 날 개선됐다면 희망제작소 덕일지 모른다고 짐작해도 좋을 듯하다. 지방자치단체와 농촌을 일으키고 소기업을 지원하고 공공 리더, 모금 전문가 양성을 하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아무도 시작할 수 없었던 ‘꿈같은’ 일들을 그는 실현해내고 있다.

희망제작소를 하며 그는 자신의 직업을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 지었다. ‘세상을 바꾸고 디자인하는 사람’이라 한다.

정책보다 마음이 바뀌는 게 먼저라고 강조해 오셨는데요, 실제로 적용됐는지요.

생각했다고 바로 행동이 되거나 마음이 바뀌지는 않죠. 행동이 습관에 기반하기 때문이에요. 주로 제가 하는 일이 사회적인 일인데 그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게 인간의 내면, 정신적 치유, 평화로움, 수련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시민의식을 향상시키고 그 바탕에서 시스템과 제도가 바로 설 수 있어요. ‘수신(修身)’이라는 말은 몸과 마음을 다 의미하는 것이죠. 저도 제대로 못 하고 있지만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내면의 성찰과 이웃에 대한 배려, 시민정신은 사회의 중요한 인프라죠. 우리 사회가 이를 위해 노력할 때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 희망의 조짐도 역시 사람에게서 나타나겠죠.

그럼요. 물론 언뜻 보면 절망적인 면이 훨씬 많죠. 하지만 현장에 가서 자세히 보고 관찰해보면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돼요. 저는 미래에 대해 굉장히 낙관적입니다. 한국 사회만큼 다이내믹한 사회가 없거든요. 보세요, 제가 무슨 재주로 세상 변화를 지원하는 시민들을 하루에도 백 명이나 모으겠어요.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여전히 착한 마음을 갖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남겠다는 사람이 많은 거죠.

수많은 사람을 만나시면서 제안도 하고, 모금도 하고 동참도 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전하고 공감을 얻으시는지요.  

진심이 담겨 있으면 그 사람의 눈과 얼굴과 몸과 모든 행동을 통해 다 드러나죠. 모금이라는 것도 그 바탕은 마음이거든요. 단돈 만 원이라도 그 사람한테는 귀한 돈이잖아요. 그 돈을 내놓을 때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죠.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확신, 정말 도와주시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하는 진정한 마음, 그걸 제대로 쓴다는 믿음이 있어야 설득력이 생겨요. 저는 늘 간사들에게 아침에 일어나면 회원들을 향해서 절을 하라고 얘기해요. 그 마음이 통할 때 지원하는 사람도 생겨나요. 저는 지금까지 돈이 없어서 뭘 못 한 적은 없어요. 늘 맨주먹으로 시작하는데 때가 되면 하늘에서 돈다발이 막 내려와요.(웃음)

처음 참여연대가 출범할 당시, 회원 수는 고작 7백여 명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소액주주운동이 호응을 얻으며 회원 수가 1만 명을 넘어섰고, 자발적인 회비만 연간 1억원이 되었다. 2000년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했을 때는 나눔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였다. 연예인들과 기업들도 기부에 적극 동참하면서, 설립 10년 만에 연간 백억 원 이상을 모금할 정도로 성장했다. 헌 물건을 기증받아 싸게 파는 아름다운 가게는 2002년 3월에 시작해 8년 만에 전국 백여 개 매장, 자원봉사 5천 명을 기록할 정도로 대성공했으며, 희망제작소도 최근 회원 4천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던 일이 궤도에 오르면 바로 짐을 꾸렸다. 합리적인 비판과 정책 대안으로 정부와 재벌 기업을 긴장시키던 참여연대가 탄탄하게 자리 잡았을 때인 2002년 그는 사무처장을 그만두었다. “자리는 권력이기도 했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싫었다” 한다. 하지만 열과 성을 다한 그곳을 놓기란 쉽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 앓아누웠다’는 그는 ‘하늘에 떴다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심정이었다’고 저서에서 표현했다.

참여연대를 떠나시면서 ‘시작부터 떠날 준비를 함께 해야겠다’ 결심하셨는데, 희망제작소는 어느 지점에 와 있나요.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늘 제 목표죠. 어느 정도 되면 저는 언제나 떠납니다. 처음엔 그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후론 처음부터 회원들이 주인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합니다. 희망제작소도 거의 다 왔어요. 당장 그만두지는 않지만 굉장히 자유로워졌어요.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주간 회의에도 안 들어간 지 일년 됐어요. 대부분의 사업이 저 없이 잘 돌아가요. 다만 새로운 사업들만 챙기죠.

인터뷰를 했던 당일은 공공여행 연합투어를 새롭게 출범시킨 날이었다. 흔히 ‘외유(外遊)’라고 비판받아왔던 공무원들의 해외시찰교육을 제대로 프로그램화한, 획기적인 사업의 시작이었다. 일본, 영국 등 전 세계에 네트워크가 있어 가능했는데, “이제 기반을 다졌을 뿐”이라는 희망제작소의 노하우를 이미 영국, 일본 등지에서도 배워 제2, 제3의 희망제작소들이 생겨나고 있다.

희망제작소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정책을 마련하고 실현해내는 비영리 조직은 사실상 세계 최초 아닌가요?

우리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하는 덴 잘 없죠. 외국에서 와보면 되게 놀래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요. 우리는 지방 정부하고는 일년에 몇 천 명씩 교육을 계속하거든요. 어찌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 정부 일이에요. 그러면서 비영리 단체이고 기업이기도 하구요. 기존엔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죠. 그래서 저는 월급 안 받는 공무원이라고 이야기해요. 회원들이 세금을 내시니 우리도 작은 정부잖아요. 아니, 우리가 오히려 더 잘하는 거죠. 적은 돈으로.(웃음)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인데요, 누군가가 좋은 비전의 깃발을 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마음수련도 세상의 마음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잖아요.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게 그런 거죠.

1980년에 사법시험에 합격, 그는 검사가 되었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고 일년 만에 변호사가 되었다. 스스로를 꽤 건전한 전문인이라고 자부했던 그가 전혀 다른 인생의 길로 접어든 것은 선배이며 인권 변호사로 존경을 받던 고 조영래 변호사가 작고하기 전 병상에서 한 말 한마디가 계기가 되었다.

“박변호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제 좀 눈을 돌려봐.”

인권 변론은 물론 여러 단체에 크고 작은 기부금을 내고 있었고, 어려운 친구나 가족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온 그였지만 그 말은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젊은 나이에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탔고 제법 큰 집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그는 더 좋은 차와 집이 눈에 밟히는 자신을 자각했단다. 더 늦기 전에, 그는 변호사 업무를 중단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시민운동가의 길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의미였고, 그는 다시는 부자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내 것’이라는 집착을 버리니 오히려 세상은 더 풍요로워졌다고 한다.

남들처럼 갖는 삶이 아니라 버리는 삶을 택했다고 하셨는데 어찌 보면 구도자의 삶 같네요.

사실은요, 저는 큰~ 장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웃음) 작게 버리면 작게 얻고, 다 버리면 다 얻어요. 저는 인생에서 집을 크게 짓고 큰 돈을 벌고 높은 직책을 갖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아래로 갈수록 더 귀함을 받고, 더 사람들의 박수를 받거든요. 우리는 늘 현장에서 뛰는 일꾼이고 싶어요. 근데 어딜 가나 대우하고 대표 하라고 하고, 사실은 그게 더 힘들어요.

참다운 리더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1세기 리더십은 희생과 헌신의 리더십이다, 이런 얘길합니다. 정치인이 됐든 기업인, 민간단체 리더가 됐든 자기 먹을 거 다 챙겨놓고 나서 남을 살피면 그건 리더가 아니죠. 리더는 늘 주변 사람들이 제대로 밥을 먹고 있는지 제대로 쉬고 있는지 살핀 다음에 자기가 쉬고 자기가 밥 먹어야 되는 사람이니까요. 부담과 희생의 자리죠. 그런데 그런 자격 없는 사람들이 리더를 가지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죠.

지난해 12월, 국회는 굶는 아이들을 위한 급식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시켜 날치기로 통과시켜 버렸다. 그때 그는 아름다운 재단을 통해 ‘결식아동제로캠페인’을 벌여 3주간 3억여 만 원을 모았다. 백만 명에 이르는 결식 아동을 다 돕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온라인을 통한 캠페인으로는 대단한 모금액이었다. 가난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세금으로 해결하는 게 원칙이지만, 굶는 아이들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정책에야말로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결식이란 말도 안 써요. 그 말 자체가 아이들한테 상처를 주잖아요. 무상급식에 대해서 부자 아이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하냐고도 하지만 그러면 가난한 애들만 모아놓고 따로 주나요? 돈 조금 더 써가지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안 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죠. 돈보다 훨씬 귀한 가치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수련을 정부에서부터 시작해야 해요.

“그래도 우리 사회가 희망이 많다고 믿는다”는 그는 할 일 많은 세상에 태어난 게 감사하단다. 올해 농촌 소기업, 청년 사회적 기업, 장애인 기업의 물건을 전문적으로 팔아주는 일, ‘희망 수레’를 계획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아침부터 자정까지 뛰어다닌다. 그는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진로를 묻는 젊은이들에게 가급적 삶의 가장자리를 찾아가라고 권한다.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은 그곳엔 기회도 많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젊은 세대들이 너무 편안한 길만 간다고 우려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고된 일이 기다리는데도 희망제작소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줄을 섰다는 것이 우리 젊은이들의 희망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려면, 고민하고 계산하기보다 쉽게 버리는 데에서 힘이 나온다는 그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라고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나로 인해서 행복해지는가, 아니면 불행해지는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은 누군가의 삶에 보탬이 되는가. 이런 물음이 돈과 사회적 지위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나누는 마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1956년 경남 창녕 생으로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후에 다시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1980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잠시 검사 생활을 하다가 1983년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80년, 90년대를 아울러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로 치열하게 살았다. 1996년 참여연대를 창립하여 사무처장으로 소액주주운동 등 획기적인 성과를 이끌어냈고, 2000년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 진보사회운동을 나눔과 기부로 확장하고, 2006년부터 희망제작소를 만들어 ‘희망’을 실현해내고 있다. <국가보안법연구 1, 2, 3> <NGO,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꾸다>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 <원순씨를 빌려드립니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막사이사이상’ ‘단재상’ 등을 수상했다. http://www.makehope.org

우리는 함께 해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내야, 사랑하는 나의 아내야

정태하 55세. 구미상록학교 교장

나는 경북 김천시의 조그만 촌락에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두들 그러했듯이 먹고살기가 힘들던 때라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을 하고, 어린 나이에 신문 배달, 구두닦이, 생선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스물셋에 나보다 한 살 어린 아내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마치 여고생마냥 머리를 양 갈래로 늘어뜨리고 웃음 띤 얼굴에, 보조개가 살며시 들어가는 아리따운 모습에 나는 한눈에 반했다. 너무나 가난해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였지만 이담에 꼭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아내와 함께 열심히 일을 했다. 포장마차, 과일 장사, 생선 장사…. 부지런히 일해서 돈도 모으고 어느 정도 성공도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허전함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못 배운 설움 때문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가정 통신란에 부모 학력을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중학교 졸업 어떤 때는 고등학교 졸업을 했노라고 양심을 속이고 말았다. 여러 모임에 참석을 하곤 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사람이라며 무시를 받는 것 같아 항상 꾸어다놓은 보릿자루마냥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늘 배우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설움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보! 빨리 갑시다” 아내가 내 손을 잡고 야간학교에 데려갔다.

“난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내가 식모살이라도 해서 도울 테니 공부를 시작해 봐요.” 내가 방황만 하고 있을 동안 오히려 아내는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본 것이다.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처음엔 내가 서른이 넘어 무슨 공부를 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남들에게 들킬까 봐 숨죽여 가며 야간학교에 다녔다. 굳어진 머리로 공부를 하는 것 또한 쉽지가 않았다. 힘들어지면 나는 또 술을 마셨다. “나는 안 돼” 하면서 창문 밖으로 책을 마구 집어던졌다. 그러면 아내는 무조건 내가 잘못했으니 이러지 말라며 남몰래 책을 주워다가 살며시 머리맡에 놔두고는 하였다. 그리고는 두 손을 꼬옥 붙들고 “배우지 못한 설움이 죄는 아니다”라며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차츰 공부에 재미를 붙인 나는 3개월 만에 고입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았다. 나는 아내에게 “여보! 고맙소” 하며 머리를 파묻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내도 말없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싹텄고 대입 검정고시, 대학, 대학원까지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993년 나는 야학교를 설립했다. 나처럼 가난 때문에, 혹은 갖가지 형편 때문에 공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 배움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90세가 가까운 할머니도 계시고, 주경야독으로 공장에서 일하면서 어렵게 공부하는 청소년들도 온다. 지금까지 천여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한글도 깨우치지 못했던 어르신들이 글을 읽고, 손수 은행에 가서 통장도 만들고 스스로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등교하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감개무량함을 느낀다.

2008년부터는 대안학교를 설립하여 정규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위기의 청소년들도 맡아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출석조차 안 하는 애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데려다놓고, 그러면 또 도망가고…. 그렇게 일년 정도 지나면 열심히 공부를 한다. 졸업할 때는 졸업식장이 온통 눈물바다가 된다. 그리고 자기를 붙잡아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 때면, 내가 방황할 때 붙잡아준 아내 생각이 난다.

지난날 아내가 그토록 믿고 기다려주지 않았다면 나에게 이런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아내와 나는 중년이 되어 마주하고 있다. 아내는 40대 초반에 큰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아야 했다. 아내가 입원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된 나는 항상 받기만 하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내가 퇴원한 후, 나는 아내에게도 공부하라고 독려했다. 그렇게 검정고시에 합격한 아내는 올해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는 대학생이 되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게 죄가 아니라, 방법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환경 탓으로만 돌리던 나약한 내 삶을 바꿔준 진정 용기 있는 아내. 아내가 있었기에 나는 살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아내를 만난 나의 삶에 감사한다. 아내야 사랑하는 나의 아내야.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닥종이에 혼합 채색. 65×52cm. 2008.

지금 소중한 나의 친구도

처음엔 낯선 사람이었다

이태희 30세. 직장인.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4년 전, 나는 일본으로 향했다. 똑같은 일이라면 외국에서 한번 해보고 싶었다. 일본 회사에 입사하여 신입 사원 공동 수련회에 가게 되었다. 장소에 도착한 후 같은 방을 쓰게 된 사람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목소리가 밝고 활발한 그 친구와는 동갑이었고, 취향도 비슷해서 우린 급속도로 친해졌다.

첫날부터 힘든 일정을 소화한 우리들의 마지막 코스는 목욕탕이었다. “등 밀어줄까?” 그 친구는 스스럼없이 등을 밀어주겠다며 다가왔다. 일본 사람이 선뜻 다가와 등을 밀어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어서 놀랍고 고마웠다. 나는 보답으로 그 친구에게 양 머리 수건을 만들어주었고, 그 친구는 만드는 법도 가르쳐 달라고 하며 주위에 있던 다른 친구들도 데리고 왔다.

두 번째 날은 호된 산행 훈련. 나는 그날 모든 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몸져누워 버리게 되었다. 집 떠나 다른 나라에 온 지 며칠 안 되었는데 고열로 아파 눕게 되니 왠지 모르게 그리움이 밀려왔다. 복받치는 슬픔에 서러워하다 잠이 들었는데, 얼마쯤 지났을까? 방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내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는 다시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때 참 신기하게도 조금 전까지도 추웠던 침대가 갑자기 따뜻해져오는 것이 느껴졌다.

일본을 동경해왔지만 처음엔 많은 것이 힘들었다. 일본어도 서툴고, 일본 사람들이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용기 있는 선택이었지만, 막상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따듯하게 다가와준 그 친구를 보며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수련회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만남을 이어갔다. 당시 회사에는 원리, 원칙을 따지며 나를 싫어하는 여직원이 있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 때면 나는 그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 친구는 언제나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었고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일본의 기본 예절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들 등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지혜로운 조언들을 해주었다.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장지에 혼합 채색.

장지에 혼합 채색. 53×45cm. 2010.

일본은 친한 사람과 안 친한 사람의 경계가 확실하다. 힘든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의 차이가 확실해서,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것을 하면 굉장히 큰 실례로 여긴다. 그런데 그 친구는 힘든 얘기를 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어 소박하게 사는 것이 꿈인 친구, 하지만 작은 만남도 소중하게 가꿀 줄 아는 그녀에게서 내가 느낀 것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넉넉하고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일본에서 2년 좀 넘게 일을 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도 그 친구와 여전히 연락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 친구를 위해서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함이 많다. 언젠가 한국에 오면 이번엔 내가 많이 돌봐주고 싶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낯선 사람과의 만남의 연속일 것이다. 지금 잘 알고 지내는 누군가도 처음엔 낯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첫 만남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계속해서 낯선 이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 낯선 첫 만남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던 내 친구. 힘든 상황의 누군가에게 먼저 건네는 작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걸 알게 해준 그 아이에게 고맙다.

만남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안수경 Ahn Studio 대표, 미술칼럼니스트

몇 년 전 지하철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 경미를 만났다. 나는 그 친구 앞에 서 있었고 앉아 있었던 내 친구는 책을 읽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나를 알아본 것이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참 많이 반가워했다. 하지만 서로 행선지가 다르고 약속도 있는 상황이어서 전화번호만 주고받고 헤어졌다.

경미는 전공이 비슷했던 영미와는 일 때문에 자주 사회에서 만나는 상황이었나 보다. 그런데 영미는 또 우연히 신원이를 만났다. 신원이는 꽤 오래전에 미국에 간 친구이고 그래서 나와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최근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정말 우연히 길에서 영미를 만났고 신원이는 나를 궁금해했다고 했다. 이 우연한 만남 때문에, 경미와 영미 때문에 나는 그동안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했던 신원이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신원이가 더욱 반가운 것은 사실 상희 때문이었다. 신원이는 미국에서 상희와 왕래를 하며 지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민을 간 상희와 나는 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긴 지 20년쯤 된다. 그동안 그토록 연락이 닿기를 원했었지만 다시는 소식을 알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했던 상희와 다시 연락이 닿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꿈만 같았다. 우리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상희와 나와의 만남은 더 큰 만남의 준비 단계일 뿐이었다.

회사일로 미술 전시회에 갔다가 나는 또 뒤에서 “너, 안수경이지?” 하는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뒤돌아보니 초등학교 동창 미경이었다. 미경이는 자녀들의 미술 교육 차원에서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미경이는 그날 저녁에 전화를 했고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한두 달쯤 지났을까? 상희가 한국에 잠깐 온단다. 그것은 상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했다. 아, 이렇게 척척 맞아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인가? 반창회를 할 만한 연락망이 바로 얼마 전의 모든 우연한 만남으로 준비가 된 것이다.

졸업한 지 벌써 30년. 우리는 서로 몇몇 친구들과만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우연한 만남들이 하나를 캐면 줄줄이 따라 나오는 고구마처럼 서로 이어졌고, 상희가 20년 만에 한국에 온다는 소식은 우리가 만나야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라고 말한다. 정말 우리가 겪은 이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의 이 만남을 위해 예정된 과정이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우주는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에겐 살아가는 날만큼의 많은 만남이 있었다. 그 많은 만남 속에서 정말 멋진 우주의 어떤 힘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 같다.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50×72.7cm. 2010.

우리는 함께 해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있었을까

김영지 26세. 어린이집 교사.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

나에겐 언제나 떠올리면 마음이 훈훈해지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고등학교 동창 지혜다. 지혜를 처음 본 건 학기 초 토론 시간이었다. 어찌나 말이 논리 정연한지 ‘쟤는 대체 누구야?’ 하며 궁금했다. 지혜와 친해진 건 기숙사에서였다. 그 당시 기숙사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감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는데, 지혜는 자원해서 밤새 각 층을 돌면서 점호를 하고 다음 날도 일찍 일어나 기상 음악을 틀어 친구들을 깨워서 등교를 시키고 나서야 기숙사를 나오곤 했다. 나는 지혜를 도와주고 싶어서 “뭐해?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물었고 자연스럽게 기숙사 일을 함께 했다.

그게 고마웠던 것일까. 지혜가 나를 집에 초대했다. 지혜는 집에 친구를 초대한 것은 처음이라며 쑥스러워하였다. 그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편찮으셔서 거동하기 힘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목욕탕에서 일하시는 어머니, 두 동생, 그리고 실직하신 아버지. 언제나 적극적이던 지혜의 가정 형편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더 놀라운 건 지혜였다. 지혜는 밝은 얼굴로 가족들을 소개시켜주었다. 나는 그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미안하기도 하면서, 고맙기도 하면서 얼떨떨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맏딸인 지혜는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가정을 돕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네가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주변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이렇게 할 수 있어서 좋다, 감사하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게다가 공부 잘하는 아이, 안 하는 아이, 두루두루 친구의 폭도 넓었다. 지혜를 중심으로 봉사 단체가 만들어질 만큼 활동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선배들조차 고민 상담을 하러 올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우린 고3이 되었고, 지혜는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과외 선생님께 지혜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논술과 면접 과외를 무료로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정말로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해주셨고 얼마 뒤, 지혜는 수도권 대학의 법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 이후 각자 다른 대학에 입학하고 학업에 매진하느라 바빠 반년 정도 만나지를 못했다. 그사이 나에겐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들이 닥쳐왔다. 경제적 문제, 가족과의 문제, 학업에 대한 부담감 등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대학 입학 후 처음 사귄 남자 친구와도 헤어져 마음도 많이 약해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숨쉬기가 힘들고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공황장애와 대인 기피 증세였다.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장지에 혼합 채색.

53×45cm. 2009.

그러던 와중에 지혜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지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취방에 들러주었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불면증에 시달려서 늦은 시각에 연락을 하면 달려와 나를 돌봐주다가 등교했다.

살기 싫다며 울고 화를 내도 오히려 자기에게 화를 더 쏟아붓게 해주었다. 말을 하면서 풀 수 있도록 유도를 해준 것이다. 불안해하고 초조할 때마다 과거에 좋았던 추억들을 이야기해주고 “너는 할 수 있어, 괜찮아질 거야”라며 격려해주었다. 그러한 따듯한 보살핌 속에서 나는 점차 회복되어갔고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다.

지혜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지혜는 로스쿨에 합격했다. 지혜는 늘 사람을 사랑하는 법관이 되고 싶다고 말해왔다. 지혜라면 그 꿈을 이룰 거라고 믿는다. 사랑해, 고마워, 지혜야~^^.

당신의 뒷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백영기 53세. 직장인. 울산시 남구 신정4동

이십 년을 함께했는데, 이제 정년을 맞이해 새로운 세계로 떠나시는 당신. 가는 이의 발걸음은 가벼운데 함께한 추억이 많은 저는 보내기가 힘이 듭니다.

이십 년 전, 저는 당신보다 한 달 먼저 입사를 했었습니다. 처음 만난 당신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자그마한 체구와 동안(童顔)으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늘 웃으면서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모습에 끌렸고, 점차 형, 동생으로 편하게 지내게 되었지요. 그렇게 함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재작년 여름, 십 년 전에 그만둔 동료가 사업이 어려워진 터에 부친상까지 당했습니다. 그 소식에 네 시간의 버스를 타고 가 상여를 메시더니 그 동료에게 “다음에 나 죽으면 네가 내 상여를 메라” 하시곤 돌아올 차비만 남기고 적지 않은 부의를 선뜻 내어놓으셨지요.

직장 특성상 교대로 식사를 할 때도 매번 나이 어린 동료부터 먹게 하고, 당신은 맨 나중이었습니다. 식은 밥과 흐트러진 반찬에 미안해하시는 아주머니께 뜨거운 음식 잘 못 먹는다고 괘념치 마시라고 웃음으로 너스레 쳐주시던 그 마음 어찌 모르겠습니까!

갓 입사한 동료가 아기를 낳아 단칸 셋방에 어려워할 때, 아기 옷 한 벌 준비하시고 그 속에 넣으신 당신 한 달의 용돈 봉투, 산모가 맛난 것 먹고 젖이 잘 돌아야 아기 배 곯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고 잔병치레 없어야 병원비 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술도 안 하고, 버스도 타지 않고 운동한다며 걸어 다니셨지요.

어느 여름 장마 때였습니다. 침수로 차가 다니지 않아 야간 근무 출근이 어려웠지요. 아무도 출근하지 못했을 때 당신은 철길로 돌아 돌아서 출근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오히려 웃음으로 사과를 했지요.

회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동료를 꼭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대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돌아서던 당신이었습니다. 피곤해하는 동료를 대신하여 새운 밤이 얼마이며, 힘들어하는 동료의 주머니에 아무 말 없이 음료수를 살며시 넣어주면서 꼭 잡아주시던 손, 동료의 생일은 꼭 기억하고 챙겨 작은 선물이라도 주시던 배려를 어찌 잊겠습니까.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닥종이에 혼합 채색. 53×45cm. 2009.

이 모두가 당신의 책임감과 성실, 그리고 배려의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작년 말, 당신이 떠나시고 이제 저는 이 회사에서 가장 연장자가 되었습니다. 후배들에게 나도 형님처럼 그런 뒷모습을 남겨줄 수 있을까 두렵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하고 베풀고자 마음먹지만,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당신이 만든 배려의 전통을 후배들이 따라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사회가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항상 당신을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베풀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앙금이 없이 너무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젠 쉴 수 있어 시원하다 하시면서도 아쉬워하는 마음 압니다. 일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몇 번을 당부하시는 마음도 압니다. 남은 이들의 가슴에 좋은 형, 좋은 동생으로, 좋은 인연으로 계속 이어지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좋은 추억만 생각하시고, 건강하시고, 직장 생활하느라 못 하셨던 많은 꿈 다시 시작하여 모두 이루시길 바랍니다.

정년 퇴임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는 김복철님께 올립니다.

내 인생의 반전 가져다준 소중한 인연

강민주 28세. 직장인. 러시아 모스크바 가리발디 거주

2003년 가을이었다. 이제 갓 스무 살, 하지만 나는 엄청나게 지쳐 있었다. IMF 위기 때 집이 부도가 나며 중학교 때부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내가 아무리 바동거려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세상 앞에 나는 너무 작은 존재였고, 희망이라는 것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대학, 아르바이트, 또 홀로 서울 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들키기 싫어 겉으로는 더욱 밝은 척 행동을 했다. 하지만 혼자가 되면 나는 무척 지쳤다. 반복되는 감정 기복과 불면증, 외로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계속되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1학년을 마치자마자 호주로 떠났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3개월간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저녁엔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 바다와 사막으로 미친 듯이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라도 하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나는 내 인생을 뒤바꿔 버린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그분은 내가 청소를 해주는 대가로 다락방에서 무료로 지내게 된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숙을 하고 계셨다. 그곳 미대에 교환 교수로 와 계신 한선주 교수님, 독신이셨던 그분은 그냥 ‘엄마’라 부르라며 친근하게 대해주셨고, 나는 자연스레 살면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교수님은 한국 음식도 해주시고,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셨다. 마음 둘 곳 없었던 내게 그 멀리 타국에서 의지할 곳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7개월 정도 교수님과 함께했고,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에 복학해 당시 광주에 계시던 교수님을 뵈러 갔을 때였다. 교수님은 고향 온 자식처럼 온갖 것을 챙겨주었다. 같이 여행도 다니고, 전시회도 데리고 다니는 교수님을 보면서 “저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호주에 다녀와 잠잠했던 마음이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 있거나 작업을 할 때가 되면 갑자기 우울해지면서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 당시 잠들기 전에 했던 기도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죽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제자가 하고 있다는 마음수련을 소개해주셨고 마음을 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희망이었다.

취업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수련부터 하겠다는 결정에, 모두 걱정했지만 교수님은 달랐다. “마음수련부터 끝내라, 취업이 문제가 아니다”라며, 수련비까지 대주셨다. 나중에 꼭 갚겠다고 했을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마음 깊이 남아 있다.

“이 돈은 나중에 내가 아니라 다른,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갚으면 돼. 아무 생각 말고 우선 마음부터 다스리고 생각하자. 먼저 네 스스로가 행복해야지.”

교수님은 남들이 볼 때 행복해 보이는 자리가 아닌, 진정한 나의 행복을 위해 그렇듯 도와주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수련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기억, 부모님에 대한 원망, 나는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느낀 불안함…. 그렇게 하나하나 버렸다. 남보다 잘살고 싶었지만 그런 조건이 되지 않아 원망하고 나를 포장했던 마음들을 버리며 깨달았다. 나는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 주변을, 세상을, 단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었구나, 참으로 나 자신을 만나본 적이 없었구나….

그렇게 나를 가리던 마음의 때를 닦아내며 나는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했다. 너무나 순수하고 맑고 아름다운 나, 그리고 세상.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나를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감사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나무도 하늘도 감사했다.

나는 바로 교수님께 편지를 썼다.

“마음수련을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는 저를 낳아줬지만 교수님은 저를 정신적으로 성장시켜 준 분입니다.”

나는 지금 모스크바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랑으로 품어주신 교수님 덕분에 나는 지금 새로운 세상에서, 진짜로 숨을 쉬고 살고 있다.

장영모 작. <고향 이야기>

닥종이에 혼합 채색.

53×45cm. 2008.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6)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6)

사냥꾼들에게는 원숭이를 잡을 때의 비결이 있습니다.

손 하나 들어갈 정도로 병목이 좁은 유리병 안에

바나나를 넣어놓는 것이지요. 그리고 원숭이가 잘 다니는 길에 놓아둡니다.

맛있는 바나나를 발견한 원숭이는 병 속으로 손을 넣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나나를 꽉 움켜쥔 채로는 주먹이 빠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손목을 빼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을 때 사냥꾼이 다가옵니다.

빨리 바나나를 놓고 손을 빼면 도망칠 수 있는데,

계속 움켜쥔 채 빼려고 욕심내다가 결국 사로잡히고 맙니다.

 

누구에게나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중요한 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이때 뭔가를 움켜쥐고 있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그것이 실패에 대한 참담한 기억일 수도,

혹은 성공이 준 달콤한 결과물일 수도 있습니다.

상처가 남긴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가진 것을 놓지 않는 나 중심의 판단이라면….

 

남음 없이 내려놓을 때 더 큰 미래가 기다립니다.

후회 없고 아름다운 삶의 출발, ‘내려놓음’이 시작입니다.

책상과 컴퓨터 비우기, 머릿속이 정리된다

정리 문진정

사무실을 둘러보면 한 명쯤 책상이 너저분한 동료가 있기 마련이다. 서류가 넘치고 책들이 쌓여 있고, 쪽지들, 과자 봉지, 커피 잔…. 빈 공간이 거의 없다. 이러한 사람은 산만한 주변 환경 때문에 일에 몰두하기 어렵고 뭔가를 찾아 헤매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므로 일에 실수도 많다.

반면 매번 일이 끝나는 대로 책상을 정리하는 사람은 생산력과 창의력,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류 더미를 치우느라 기진맥진하는 것보다 훨씬 안정감을 얻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이 정리가 되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진다. 최근 대기업들이 직원의 업무 효율 향상을 위한 방법으로 ‘책상 정리 정돈’을 내세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캐서린 K. 타깃의 연구 결과, 난잡한 작업 환경에서 일할 경우 심박 수와 혈압 상승, 머리와 어깨의 통증을 일으키기 쉽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해 동료나 부하 직원에게 화를 잘 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깨끗한 책상은 깨끗한 마음을 나타낸다. 매일 5분씩 책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생각을 명확히 하고 현재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서류 정리, ‘우선 박스’ 하나면 끝낼 수 있다

서류는 머릿속의 생각을 종이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서류를 버리면 쓸데없는 잡념도 함께 버려져, 정신 집중에 도움이 된다.

①다 쓴 문구류, 우편물, 포스트잇, 메모는 가능한 자주, 많이 버린다. ②중요한 메시지는 하나의 노트에 정리하고 정기적으로 컴퓨터에 옮겨둔다. ③서류는 ‘불필요한 것’을 구분해 버리고 애매한 서류는 ‘우선 박스’를 만들어 몇 개월 후 버린다. 이렇게 반복하면 중요도를 판단하는 능력이 커진다.

늘어나는 명함, 과거를 버려라

중요한 인맥을 책상 한구석에 어수선하게 방치하는 것은 인간관계를 소홀히 하는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명함 수가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명함은 즉시 버린다. 그와 연관된 성공과 실패의 기억도 함께 버린다면 새로운 만남에 더 충실할 수 있다.

정리 정돈의 사각지대, 컴퓨터를 비우자

컴퓨터 속은 책상과 똑같이 머릿속의 상태를 그대로 표현한다. 컴퓨터의 느린 속도를 탓하기 전에, 바탕화면에 폴더와 파일이 정신없이 늘어져 있지 않은지 살펴본다. 나름의 기간을 정해 하드디스크를 정리하면 오래도록 빠른 속도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 판단이 어려운 파일은, 종이 서류와 마찬가지로 ‘우선 폴더’를 만들어 보관해 두었다가 몇 개월 후 제일 먼저 버린다. 불필요한 파일만 제거해도 머릿속이 맑아지고 업무 부담이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①바탕화면의 아이콘은 컴퓨터 속도를 떨어뜨리므로 최소화한다.   ②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 사용하지 않는 소프트웨어와 ‘즐겨찾기’는 삭제한다. ③수시로 ‘휴지통’을 비워준다. ④이메일은 바로 답장하여 편지함을 비우고, 3개월간 안 읽은 뉴스레터는 수신을 차단한다.

초록이 주는 긍정과 편안함

책상이 깔끔히 정돈되었다면 근처에 녹색식물을 놓아 보자. 일본과 호주의 심리학자들이 업무 환경과 창의성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책상 근처에 화분을 놓아두면 창의성이 1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분을 두기 어렵다면, 점심시간만이라도 싱그러운 식물을 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

참고 도서 <부자가 되려면 책상을 치워라> 마스다 미츠히로 / 이아소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 캐런 킹스턴 / 도솔

감당키 어려운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지닌 이들에게

이수정 28세.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

어느 날이었다. 수련을 하는데, 불현듯 네다섯 살 때의 일이 눈앞에 떠올랐다. 먼 친척 어른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기억이었다. “예쁘다”며 다가왔던 그 아저씨…. 너무 힘들고 싫었던 기억…. 그 일은 남자들에 대한 깊은 증오를 갖게 했고, 예쁘다는 것은 안 좋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뿌리 깊게 했다. 비로소 나의 모든 행동과 성격이 그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항상 가슴을 움츠리고, 남의 시선을 두려워한 것도, 폭식으로 뚱뚱해진 것도, 모두 그 일 때문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이제 도망치지 않으리라. 나는 당당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버려나갔다. 그 일은 일종의 사고였고, 나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기에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 기억의 사진을 버린 만큼 남자에 대한 증오와 혐오심이 조금씩 사라졌다. 또한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 나는 정말 딴사람이 되었다. 너무 밝아졌다며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외모에도 신경을 쓰게 되고 체중도 돌아왔다. 연애도 시작했다.

누군가 너무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평생 짊어져야 할 것이 절대 아니며, 반드시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마음속에 찍어둔 사진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에 뿌리박혀 나의 성장을 방해했던 그 마음사진들을 털어버린 후에야 나는 진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진짜 어른 말이다.

판타지 소설 중독에서 벗어나다

김하정 15세. 전주 풍남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판타지 소설에 중독되었다. 중학생이던 오빠가 판타지 소설을 빌려 왔기에 슬쩍 훑어본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푹 빠져들었다. Fantasy. 현실과 동떨어진, 내가 원하는 것만 존재하는 마법 같은 세계가 좋았다.

심각하게 빠지자 부모님이 통제하셨다. 그때부터 새벽에 몰래 읽었다. 길거리에서도, 학교에서도, 매일 네 권 이상 읽었던 것 같다.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공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 내가 여기에 미쳤나 보다’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계속 읽었다. 마음은 그만 읽고 싶은데 그만둘 수 없었다. 내성적이었던 성격이 더 심해졌고 현실 세계의 모든 일에 불만이었다.

6학년 때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 가게 되었다. 짧은 인생을 떠올려 버리다가 판타지 소설에 빠졌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밤늦도록 혼자 집을 지켰다. 외로움, 현실의 불만족을 환상의 세계로 채우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환상의 세계는 없는 것이었다. ‘허튼짓을 했구나’ 그때 알았다.

요즘도 판타지 소설을 읽기는 하지만 없으면 생각도 안 난다. 밤샐 일이 없어서인지 피부도 좋아졌고 몸도 가뿐해졌다. 목표가 없고 주변에 무관심했는데,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도 관심이 가고 선물도 해주고 싶다. 일본어 통역가라는 꿈도 생겼다. 잡생각도 확실히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사춘기도 별 탈 없이 보낼 것 같다.ㅋㅋ

가슴 시원해지면서 코가 뻥 뚫리다

장진익 33세. 직장인.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

나는 항상 코가 막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비염 증세가 있었다. 15세 때부터였는데, 어느 날부턴가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그래서 입으로 숨을 쉬었는데 답답하고 머리까지 멍했다. 조금 지나면 괜찮겠지 하며 무시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간 것이 20대 중반 때였다. 콧구멍 안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이 막혀 있고, 콧구멍 안이 부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을 때는 잠깐 괜찮아지다가, 조금 지나면 다시 똑같아졌다. 답답한 마음에 유명한 이비인후과를 다녀 봐도 똑같았다. 나중에는 아예 포기를 하게 되었다.

코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를 정도로 생활에 지장이 크다. 일단 집중을 잘하지 못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엉뚱한 대답을 하니 사람들도 점차 멀어지는 것 같았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 이뤄본 것도 없고, 자신감도 없었고, 세상에 당당하지 못했다. 이런 내 자신이 싫고 괴로웠다. 그 무렵 마음수련을 알게 되어 살아온 삶을 떠올려 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가 지병으로 초등학교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시느라 너무 바빴다. 어린 나이에 관심도 받고 싶고 사랑도 많이 받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되지않았다. 거기다 “네가 장남이니까 이렇게 해야지” 하는 얘기만 들으니 불만이 많았다. 성격도 내성적이라 모든 감정을 누르는 편이었다.

객관적으로 나를 볼 수 있고 이런 마음들을 버릴 수 있는 게 너무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2주인가 지났을 때였다. 속에 있는 돌멩이가 빠져나간다는 느낌이더니, 코가 뻥 뚫리는 것이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외로움, 꾹꾹 눌러놓은 화와 울분, 위축되어 있던 마음들이 몸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허리, 어깨, 머리 안 아픈 곳이 없었는데, 마음을 쌓아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늘 긴장한 탓에 무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주어 신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코가 뚫렸다가 막히고, 다시 뚫리는 과정이 반복되더니 점차 숨을 제대로 쉬는 날들이 길어졌다. 숨이 편안하니 가슴이 편안하고, 몸이 이렇게 편한 거구나, 깜짝 놀랄 정도였다.

식습관도 돌아보게 되었다. 가공식품을 많이 먹고 항상 빨리 먹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활동량에 비해서 너무 많이 먹었다. 과하게 먹으니 산만하고 졸리게 되고, 집중력도 당연히 떨어졌다. 이런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니, 저절로 천천히 먹으려고 노력했고, 가공식품도 되도록 멀리 했다. 이제 그런 것쯤은 조절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서 수련을 병행하자 점차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생활에 활기가 생겼다. 막힌 코가 뚫리니 집중력도 좋아지고, 쉽게 포기를 하는 성격이었는데, 못할 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노력하니 끝까지 해내는 일들도 생겼다. 나에게 생긴 변화들이 지금도 난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