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벨벳처럼 우아한 새해 선물, 블랙클로버

요즘 선물할 데 참 많으시죠? 연말연시 들뜨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흘러가는 시간을 음미해보자는 거룩한 뜻을 살린다면 무채색의 블랙클로버는 어떤가요? 식물이 가진 색 중에서 가장 보기 드문 것이 이 블랙인데 보드라운 최고급 벨벳을 연상시키는 색감과 잎 가장자리를 따라 그려진 초록색 라인 덕분에 우아함이 더욱 돋보입니다. 작은 뿌리 하나만 있어도 어느 사이엔가 화분이 꽉 차고 다시 두 화분에 나눠 심어도 금세 또 꽉 차는 블랙클로버는 가격도 착하고 잘 커서 주변 분들께 선물하기에 아주 좋아요. 블랙클로버의 사랑스러움이 당신 마음에도 포근히 가 닿기를….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햇빛 직사광선이나 그에 가까운 강한 햇빛을 받아야 잎 빛깔이 예뻐져요.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마르면 한 번에 흠뻑 주세요.
번식 포기 나누기나 꺾꽂이(삽목법)로 하세요. 추위에도 강해서 영하로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거뜬하게 월동합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빛나고

어둠이 내린 세상에는 적막과 고요만이 가득하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만이 살아 숨을 쉰다.
저마다의 밝기와 저마다의 빛깔로 제각각 반짝이는 별들,
은하수가 흐르고 별똥별들이 떨어지는 그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눈앞에 보이는 건 온통 드넓은 하늘에 수많은 별뿐이다.
이토록 많은 별이 있었던가. 우주는 얼마나 드넓은 것인가.
우리가 어찌 이 광활한 우주에 ‘오직 우리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우주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떠날 때 그랬습니다.
온갖 소원을 빌어야겠다고…
하지만 밤새 아무 소원도 빌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생각건대
나와 별이 하나 된 순간
인간사 모든 소망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님의 시처럼
그렇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면 될 것입니다.

경기도 가평군 코스모피아 천문대에서. 2009년 11월

사진, 글 김선규

마음속에 깊은 바다를 품은 사람들

사진, 글 이용택 SBS-TV <최후의 툰드라> 촬영감독

모두 잠든 밤에 촬영한 오로라의 장관.

시베리아 북서쪽 야말반도. ‘야말’은 세상의 끝을 뜻한다. 툰드라의 유일한 순록 유목민 네네츠족은 겨울에는 남쪽으로, 여름에는 북쪽으로 7천여 마리의 순록과 3백여 대의 썰매를 끌고 1천㎞의 대장정에 나선다. 수천 년간 순록과 함께 살아온 툰드라 원주민의 순수한 삶은 SBS 특집 다큐 <최후의 툰드라>로 방영돼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촬영 틈틈이 스틸사진에 담은 툰드라의 삶.

툰드라 사람들이 입고, 먹고, 집을 지을 때 쓰는 것도 순록이다. 소처럼 순하디순한 순록은 그들의 삶을 지켜준 가족이다. 원주민들은 특별한 표시를 하지 않아도 자기 순록을 다 알아본다. 네네츠족의 거대한 이동은 순록이 먹을, 겨울엔 눈 밑의 이끼를, 여름엔 새순을 찾기 위해서다. 조상 때부터 이어져온 유목 생활이라 지도가 없어도 별을 보면 몇km 된 지점인지 정확히 안다. 특별한 지휘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수천km를 조직적으로 움직여 이동하는 것이 놀라웠다.

+ 1년 중 7개월이 겨울인 툰드라의 겨울은 보통 영하 40~60도가 예사다. 여기서 어떻게 살까 싶었다. 그러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영혼을 존중하고, 대자연을 경외하는 이곳 사람들에게 툰드라는 척박한 땅이 아니라, 풍요의 땅이다.

+ 이들은 12시간 자고 12시간 일을 한다. 큰 천막집인 ‘춤(chum)’을 짓고 같이 다니지만 남의 집 사생활엔 일절 관여를 안 한다. 가족 구성원의 일은 뚜렷이 구분되어 아빠는 순록을 키우고, 엄마는 밥 짓기 등 ‘춤’을 관리한다.

순록 가죽의 딱딱한 부분을 다듬는 네네츠족 여성. 순록의 힘줄을 꼬아 실로 만들어 바느질하며 옷을 짓는다.

+ 툰드라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집안일을 도와준다.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배는 큰 순록 썰매를 몰고, 작은 ‘춤’을 뚝딱 지어낼 줄 알며 도시의 아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립성과 의젓함을 지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살아가는 법을 자연 속에서 스스로 배우는 강인한 아이들.

+ 아이들은 무척 해맑다. 영혼이 아주 맑고 투명하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아이들을 매우 존중한다. 스스로 할 수 있게끔 부모들이 이래라 저래라 지적과 간섭을 안 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할 일을 찾아낸다.

이곳은 원주민이 입는 전통 의상이 아니면 얼어 죽을 만큼 춥다. 말리차라 부르는 순록 털가죽 옷을 입는다. 정말 따듯하다.

+ 왜 촬영 팀을 받아줬는지 네네츠족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는 “난 당신들이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라서 받아줬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잘사는지 묻지 않았다. ‘한국에는 호수가 몇 개 있는지’ ‘나무와 어떤 물고기가 있는지’ 등 자연에 대해 물었다.

 

+ 네네츠족에겐 삶의 원칙이 있다. 어른과 아이를 똑같이 대한다는 것. 부모는 아이에게 지시를 하지 않고 큰소리로 야단을 치지 않는다.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원수여도 조난당하면 구조해주고, 누구든지 집에 오면 이유를 묻지 않고 사흘간 먹여주고 재워준다. 항상 필요한 만큼,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

+ 순록이 이동하기 전 간단한 식사를 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이 불을 때고 준비를 한다.

이용택 촬영감독은 1973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신구대학을 졸업하고, <SBS 모닝와이드>를 시작으로 영화 <워낭소리> <세계 테마 기행>(EBS) <현장르포 제3지대>(KBS) <러브 인 아시아>(KBS) <최후의 툰드라>(SBS) 등의 프로그램을 촬영해왔습니다.

밴댕이 선생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속설이 있지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루 여덟 시간씩 개구쟁이 등살에 속이 상할 대로 상해 나온 것이니

지나가던 견공이 피해 갈 법도 합니다.

‘초등학교 선생들은 쩨쩨하다’는 말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온종일 철부지들 속에서 아옹다옹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이 수준이 된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랍니다.

우리 반 녀석들이 요즘 아주 드러내놓고 나더러 ‘늙었다’고 합니다. ‘못생겼다.’ ‘할배 같다.’ ‘늙었다.’ 이런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 아픔을 주는지, 열한 살 인생들이 알 턱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내 자신을 못생기거나 늙었다고 생각한 적이 결단코 없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교실에는 일기나 숙제를 안 해온 개구쟁이들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요 녀석들이 제 할 일은 안 하고 선생님 앞에서 콩닥콩닥 잡담만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내가 “어이, 꼬마들 빨리 숙제하고 집에 가시지” 그랬더니 녀석들이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꼬마들은 꼬마라는 호칭을 엄청 싫어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어이, 미남들 빨리 숙제 안 할 거야!”

그랬더니 째깍 반응이 옵니다. 일명 ‘빠박이 아저씨’ 성흠이가 씨익 돌아보며,

“누가 미남인데요?”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려고 올망졸망 앉아 있는 꼬마들의 얼굴을 비교 관찰 하였습니다. 나름 귀엽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 미남이라 할 수 없는 앳된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살짝 농을 섞어 바른 대로 말해주었지요.

“일단 선생님이 제일 미남이고 너희들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표정들이 갖가지입니다. 지태는 ‘나는 뭐 원래 미남도 아닐 뿐이고’라고 중얼거리고, 준영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저 혼자 비시시 웃고, 동승이는 빨리 일기 쓰고 축구하러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책상에 코를 박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 아까 질문했던 ‘빠박이 아저씨’가 한마디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안 늙었잖아요.”

요 녀석이 또 민감한 내 나이를 들먹여 반격을 합니다.

“뭐라고! 내가 어디가 늙었냐? 쨔샤!”

뚜껑에서 슬슬 김이 솟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쫀쫀하게 따지다가는 나만 손해입니다. 그래서 미남의 품위와 교사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참습니다. 농담 끝에 분위기는 싸늘해지고 아이들 연필 소리만 사각사각 들립니다. 꼬마들은 아무렇지 않는데 나 혼자 외톨이처럼 심각해집니다. 이렇듯 요즘 나는 체중 30kg 남짓하고 신장 약 130cm 정도 되는 꼬맹이들 때문에 가끔 토라집니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집에는 엄마가 있다

나는 가끔 그 사람을 떠올린다. 잊을 수 없어 기억의 갈피에 새겨두고 있는 것이다.

절친한 친구도 아니고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 안다면 겨릅대처럼 약한 체질에 바보스러운 데다가 간질병까지 앓는 40대의 지체장애자라는 정도이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면 그 사람은 내가 40여 년 살아온 자그마한 진거리에서 밥 동냥 하는 걸인이었다. 막말로 거지 비렁뱅이라는 말이다.

거지란 대체로 그러하듯이 그 사람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삼검불처럼 헝클어진 뿌연 머리, 구질구질하고 너덜너덜한 옷에 발가락이 나오는 신발을 질질 끌고 다니는데 때가 가득 낀 손에는 언제나 작은 가방 하나와 사기물이 떨어진 법랑 고뿌 하나 그리고 뚜껑이 오그라든 군용 밥통이 들려 있었다.

그 사람의 하루 일과는 아침부터 골목길을 오르내리면서 가가호호의 대문을 두드리는 것인데 그렇게 먹을 것을 조금 얻으면 휘파람을 불며 돌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냉대를 받기는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은 그를 보면 온역신을 만난 듯이 피하였고 아예 대문 밖에서 쫓아버리곤 했다.

그런다고 인심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내남이 다 식량난으로 배를 곯던 세월에 아무리 동정심이 많다 해도 매일같이 쌀과 밥을 퍼줄 만한 집이 어디 그리 많았을까? 조무래기들의 기시는 더구나 심했는 바 무리를 지어 따라다니며 놀려주기, 욕하기, 침 뱉기에 돌 총질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그 사람의 동냥길은 그만큼 갖은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그래도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마음이 약해서 아무런 항변도 없이 고작 화내는 흉내를 내다가 히쭉 웃으면 끝이었다.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에게 ‘히쭉이’라는 별호를 달아주었다.

훗날 내가 교편을 잡고 출근할 때 히쭉이를 만난 것은 간이 음식점 앞에서였다.

바로 그 무렵부터 히쭉이의 동냥 반경은 집집의 대문을 두드리던 데로부터 보다 안전하고 구걸 확률이 높은 음식점으로 옮겨진 것이다. 히쭉이는 진거리에 있는 역전식당, 대중반점과 회족식당을 전전하면서 구걸하였는데 그 방법을 살펴보니 먼저 유리 창문으로 지켜보다가 어느 상의 손님이 일어나면 즉시로 뛰어 들어가 먹다 남긴 음식을 마구 집어 먹는다. 그러다가 혹시 만두나 빵 조각을 만나면 가방에 집어 넣고 밥이 있으면 밥통에 담고 반반한 반찬이 있으면 법랑 고뿌에 담으면서 운이 좋다는 듯이 히쭉 웃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서였다. 큰길가에 숱한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기에 무슨 구경거리가 있나 보다 하고 다가서 보니 히쭉이가 쓰러진 채로 입에 거품을 가득 물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말로만 들어오던 간질병이 발작한 것이다. 예사롭게 여기는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하나 둘 제 갈 길을 가고 시간이 꽤나 지나서야 의식을 회복한 히쭉이가 언제 그랬냐 싶게 부스스 털고 일어났다. 히쭉이는 아무 말 없이 히쭉 웃더니 땅에 쏟아진 콩나물 반찬과 밥을 끌어 담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팔부 취급도 못 받는 히쭉이가 매일같이 부지런히 밥 동냥을 다니는 것은 자기 하나의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집에 홀로 계시는, 바깥출입도 못 하는 칠십 고령의 앉은뱅이 노모(老母)를 공양하기 위해서였다.

남들이야 웃건 말건 나는 그날 히쭉이가 한 말에 진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체장애자로, 걸인으로 이 세상 밑바닥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히쭉이에게 그처럼 지극한 효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더는 히쭉이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히쭉이네 집은 철길 동쪽 마을에 있었다. 히쭉이는 운신 못 하는 엄마의 하루 세 끼 식사를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금 반반한 음식을 여남 있게 얻는 날이면 나머지는 움 속에 넣었다가 다시 끓이고 덥혀 엄마에게 드리는 그런 효자였다.

그것도 음식이 변했을까 봐 먼저 맛을 보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엄마에게 드리는 그런 효자였다.

그 뒤로 나는 히쭉이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사업 전근으로 현성을 거쳐 다른 고장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년이 흘러간 후에도 내가 히쭉이를 잊지 못하는 것은 거지 효자 히쭉이가 한 말이 항시 내 기억의 깊은 곳에 빛나는 거울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거울을 보면서 옛날 어느 조대의 임금님이 알았다면 효자비라도 세웠으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쩌면 히쭉이는 신통히도 까마귀를 닮은 인간이다. 낳아준 정, 키워준 정, 그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은혜를 갚기 위해 늙고 병든 엄마 까마귀에게 날마다 먹이를 구해다 준다는 그런 새끼 까마귀 같은 존재였다.

찍어 말해서 히쭉이는 걸인이지만 신분과는 관계없이 동양인의 가장 아름다운 사상이며 미덕인 부모에 대한 효심을 안고 효행 길을 산 사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효란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다. 효란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으로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척도인 바, 어찌 효를 떠나 가족 사랑과 민족 사랑을 담론할 수 있으며 또 어찌 효를 떠나 참되고 바른 인생을 운운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 본연의 의지와 자세로 구축된 미풍양속 중에 효라고 하는 영원히 사윌 줄 모르는 어여쁜 꽃이 있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한결 아름다운 것이리라!

이 글을 쓰는 이 시각. 나의 귓전에는 “집에는 엄마가 있는데… 엄마가 날 기다리는데…”라고 하던 히쭉이의 말이 떠날 줄 모른다. 동시에 나의 눈앞에는 쏟아진 음식을 담아 가지고 집으로 달려가던 히쭉이의 가냘픈 뒷모습이 안겨온다. 나는 지체장애자와 걸인이기 전에 인간인 히쭉이의 말과 행동에서 평생 두고 못 잊을 효의 꽃을 보고 있다.

지금 나는 나만이 알고 있는, 남들이 모르고 있는 히쭉이라는 효의 꽃과 그 꽃이 풍기는 효의 향기를 이 세상을 함께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

* 저자의 북한식표기법 원문은 한글맞춤법 표기에 따라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김동진님은 1944년 중국 흑룡강성 녕안시에서 태어났으며 길림성 훈춘시문체국창작실 창작원으로 근무하다 2004년 정년퇴직하였습니다. 현재 중국민족예술가협회,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 <두만강 새벽안개>를 비롯하여 시조집, 수필집, 가사집, 동요동시집 등 15권을 출간했습니다.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한국해외동포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인생의 제2막, 더욱 폭넓은 대중의 품에서 양준혁

 

1993년 프로로 입단해 18년이었다.
2,135경기 출전 7,332타수 2,318안타 351홈런…. 프로야구 통산 1위. 그러나 양준혁 선수는 지난해 9월 은퇴식을 끝으로 인생 제2막을 열었다.“최고의 기록보다 1루까지 전력 질주했던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그에게 지금도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은 ‘양준혁 선수’였다. 사람들은 그 열정과 헌신의 감동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강연과 방송 출연으로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보았다.

그날 대구 구장엔 비가 쏟아졌다. 어김없이 그는 9회에서 땅볼을 치고도 모자가 벗겨지도록 1루로 죽어라 전력 질주했다. 한결같았다.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 뻔한 1루를 향해서도 악착같이 뛰었던 그가 누구던가. 프로야구 통산 최다 출장, 최다 홈런, 최다 안타, 최다 2루타, 최다 득점, 최다 사사구…. 18년 프로 선수 생활 중 14시즌 동안 3할대 타율, 15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홈런, 16시즌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때려낸 대(大)타자 양준혁 선수의 마지막 경기 모습이었다.

팀에 부담을 주면 유니폼을 벗겠다고 마음먹고 일년여 간 고민했단다. 어린 시절, 어려운 형편 때문에 부모님이 반대하자, 동냥을 해서라도 야구를 하겠다고 설득하던 그때 이후 그는 오직 야구만 생각하며 살았다. 중학생 시절,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그의 꿈은 고향 팀 삼성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달리는 거였다. 그 후로도 그 마음은 일편단심. 사춘기도 청춘도 야구만 생각했고, 밥 먹을 때도 젓가락을 야구 ‘빳다’로 생각했다는 그이다. 야구 때문에 행복했고, 야구 때문에 수도 없이 자신을 내려놓으며 담금질도 해야 했던 그가 은퇴를 마음먹었을 때 왜 아쉬움이 없었을까. “무지하게 허전하고 외로울 것 같아 조금 두려웠다”는 은퇴식은 그의 32년 야구 인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고 야구장 앞은 텐트촌이 되었다.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다. 팬들은 그의 지극한 야구 사랑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는다. 평상시 별로 말이 없는 그가 초청 강연을 위해 연단에 서면 구수하고 진솔한 입담이 거침없다. 말재주 덕이 아니다. 오직 한 가지 꿈을 꾸며 한길을 달려온 사람만이 갖게 되는 지혜가 이젠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있었다.

선수가 은퇴 후 이렇게 강연을 많이 하는 건 처음인 듯한데요.

사회 초년생인 셈이죠. 아주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선수 때는 그냥 팀에 속해서 움직이는 대로 스케줄대로 따라가면 되었지만 이제는 달라졌죠. 선수할 때는 승부의 세계에서 긴장하며 살았잖아요. 이제는 마음이 너무 편안합니다. 저는 경상도 사람이고 혼자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말을 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말수도 적은 편인데 이제는 말이 직업이 되어 버렸네요.(웃음)

청중들이 주로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갖고 감동하던가요.

살아왔던 얘기들을 주로 합니다. 아무래도 선수 활동 하면서 겪었던 어떤 시련이나 슬럼프 경험을 얘기해요. 제 말투 자체가 사투리도 팍팍 쓰다 보니 잘 들어주시더라고요. 되게 좋아들 해주세요. 누구나 살다 보면 안될 때가 많잖아요. 저도 수천 번의 실패를 겪었죠. 그렇지만 중간에 포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부분에 공감하시는 것 같아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를 하지 않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끝까지 하는 거죠. 부딪쳐보고 안 돼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고, 데이터로 갖고 있었어요. 예를 들면 타격 폼이 안 맞을 때는 그 원인을 찾는 거죠. 실패에서 원인을 찾아서 오늘은 이렇게 해보고 안 되면 내일은 저렇게 해보고. 실패한 걸 토대로 다른 방법을 찾는 거예요. 진짜 밀림에서 길을 내듯이 찾아 나가는 거예요.

그런 건 누가 지도해주는 건 아닐 텐데요, 어떻게 극복해 나가셨나요.

아무리 해도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오히려 바닥을 쳐버렸어요. 야구는 그냥 놔버리고 페이스를 오히려 떨어뜨려 버려요. 대신에 완전히 놓는 건 아니고 나름대로 연구도 많이 하죠.저는 오히려 슬럼프 오고 힘들면 팀의 궂은일을 하며 봉사를 해버려요. 혼자 땅 고르고 볼 줍는 일을 합니다. 야구는 딴 애들한테 맡겨 놓고, 후배들을 위해 벤치에서 파이팅 하고. 그러니까 오히려 팀에서 더 좋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준비를 하죠.

그에겐 실패와 좌절, 슬럼프와 부활의 치열한 경험이 있었다. 은퇴하기까지 8년간의 기간이 그랬다. 팀의 리더로 삼성의 우승을 이끈 2002년, 그는 개인적으로 사상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타율이 3할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바로 타율 3할 2푼 9리를 기록하며, 완벽하게 부활했다. 그는 “그때까지 치던 타격 폼을 다 버리고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타격 기술을 다시 쌓기 시작했다”고 했다. ‘잘나가던 양준혁’을 버리고 얻은 게 ‘만세 타법’이다.

그는 두 달간 혼자서 타격 폼을 연구했단다. 어느 날 배트를 휘두른 뒤 한 팔을 놓으면서 마치 만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단다. 그렇게 쳐보니까 잘 맞았다. 방망이를 던지면서 임팩트를 가하는 게 치면 칠수록 굉장히 효과적이었던 것. 그 특유의 만세 타법으로 그는 2003년에는 최고 속력을 냈고 야구 인생의 큰 전환점을 갖게 된다.

이제 그 ‘만세 타법’을 못 보는 팬들의 아쉬움이 큰 듯합니다.

그거는요. 또 얼마 안 있으면 다 잊혀집니다. 저는 그렇게 꿈을 먹고 살지는 않아요.(웃음)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준비들을 저는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야구 시작할 때부터 언젠가는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은퇴할 때도 결단을 내릴 수 있었고요. 저는 제가 그렇게 스타라고도 생각하지 않고요. 그걸 계속 갖고 있으면 힘들어요. 빨리빨리 잊어야지.

늘 스스로를 최고의 선수가 아닌, 2인자라고 하셨지만 팬들은 ‘양신(梁神)’이라고 불렀지요.

하하. 선수 생활 때는 안 그랬습니다. 끝에 가서 좀 그런 소리 들었지요. 저는 진짜 살면서 도 닦는 기분으로 살았어요. 기록도 많이 갖고 있었지만 항상 2인자였죠. 우리 팀에는 이승엽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으니까요. 솔직히 서러운 것도 좀 많았어요. 표정 관리하기 참 힘든 때도 있었고요. 하지만 묵묵히 이겨냈어요. 오히려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그런 조연 역할을 잘 해왔던 거 같아요. 잘하는 사람을 살려주고 뒷받침해주는 것이 팀을 위한 것이고 그런 역할을 하다 보니까 2인자처럼 살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모든 기록을 다 갖고 있잖아요.

그런 마음을 가지려면 치열하게 자신을 객관화할 때 가능할 텐데요.

저는 제 자신은 진단을 잘해요. 저는 항상 내 자신이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한테 묻고 내가 스스로 처방을 내려요. 의사처럼요.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보고 연구해야죠. 저는 제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반성하고 판단을 해야 어떻게 앞으로 나갈 건가 진단을 내릴 수가 있어요. 저는 주위에서 지적을 해주면 굉장히 잘 받아들입니다. 자신한테 고집을 부리지는 않아요.

야구에서처럼, 자기 분야에서 일할 때 가장 중요한 마음 자세는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사랑, 열정. 나는 야구로 표현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얼마만큼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야구도 결국 실력은 백지 한 장 차입니다. 그렇지만 야구를 얼마나 사랑하고 애살을 가지고 하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더라고요. 승엽이 같은 경우도 안타를 못 치는 날은 훈련장 가면 새벽 세 시, 네 시까지 때립니다. 그런 열정이 있어야 돼요. 보통 마음만 있지 행동을 잘 안 하잖아요.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일단 부딪쳐 본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부딪쳐 보면 답이 나오거든요.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되면 되는 대로 답을 찾아내고 그런 과정이 있어야 되겠죠.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건 부딪쳐 봐야 된다. 될 때까지. 중간에서 포기하는 게 제일 나쁜 겁니다. 후배들도 보면 이런 얘기 많이 합니다. 하다가 또 힘들면 안 해버린다고요.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여러 기록 중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늘 사사구를 말씀하시더라구요.

사사구(四死球)는 포볼하고 데드볼, 몸에 맞는 볼이에요. 그건 안타에도 타율에도 올라가지 않아요. 하지만 팀을 위한 야구를 했는가를 말해주죠. 저도 신문 1면에 나고 싶죠. 홈런도 하고 싶고요. 하지만 그런 욕심을 참고 오히려 뒷타자한테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상대 투수들 공 하나라도 더 던져 지치게 하려고요. 아무도 안 알아주는 기록이지만 저한테는 제일 소중한 기록입니다. 솔직히 어렵습니다. 다른 기록은 다 깨지겠지만 그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거예요.

그런 마음이 야구를 오래도록 할 수 있게 했던 힘인 것 같습니다.  

과거에 얽매이면 절대 안 돼요. 현재에 충실하게 삶을 살아야죠. 옛날에 야구 잘했다, 그거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냥 이력서일 뿐이에요. 제가 오래 할 수 있었던 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타격 폼도 늘 변화를 추구했어요. 야구할 때도 오로지 이 한 게임에 최선을 다했지 내일은 없었어요. 오늘에 모든 걸 쏟아붓는 거죠. 그 한 게임에 전력을 다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32년 야구 인생의 2막을 시작하셨는데요, 오랜 야구 경험이 그대로 녹아난 앞으로의 계획들이 기대가 됩니다.

일반 사람들은 해외 연수 가서 감독 되는 게 수순인데 저는 강연하면서, 야구를 알리면서, 이론 공부하면서, 야구 재단 만들어서 아이들이 야구를 마음껏 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야구는 엄청난 야구 인구를 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또 아이들도 공부도 중요하지만 체력이 우선이 돼야 해요. 그리고 위기에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죠. 야구를 통해서 인성 교육을 하고 사회의 리더로 키우는 것이 제 궁극적인 취지입니다.

1구 1구 온 힘을 다하는 정성, 어떤 공이 들어오든 끝까지 지켜보는 인내심, 땅볼을 치든 뜬공을 치든 무조건 1루를 향해 전력 질주하던 그의 한결같은 모습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성의에 다름 아니었다.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 지금, 그는 자신을 두고 ‘2루 베이스에 슬라이딩하려는 시점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홈까지 전력으로 뛰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언제나 마치 1회 첫 타격에 나선 초보 선수처럼, 그 초심으로.

양준혁 선수는 1969년 대구 생으로 대구상고와 영남대를 졸업하고 1993년 프로야구에 입단했다. 해태, LG에 1년 정도 머문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삼성 라이온즈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타격왕, 타점왕, 최다안타왕에 이어, 8차례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2,135경기 출전 7,332타수 2,318안타 351홈런, 사사구 1,380개 등 프로야구 통산 1위라는 기록을 남겼다. 사진 제공_ 삼성 라이온즈

작은 한 걸음,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기 힘으로 일어서리라 마음먹는 것, 그것이 시작입니다.

알려는 집착 훌훌 털고 쿨하게 다시 서다

김명숙 44세. 도서출판 나무발전소 대표

스물아홉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가면서 ‘아, 나는 죽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격한 감정을 느껴보았다. 외과 의사는 밤새도록 내 얼굴을 깁고 또 기웠다. 아, 도대체 얼굴이 어떻게 된 거지? 하필 얼굴을 다칠 게 뭐람. 처음 붕대를 풀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의 놀람! 절망! 참담한 심정이란…. 내가 나인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왜곡된 얼굴을 보고 울고 또 울었다.

결혼도 안 한 처자가 얼굴을 심하게 다쳤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늘 슬픈 생 일년 동안의 치료 기간을 거쳐,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했지만, 상처는 아물어 가도 콤플렉스는 쉬이 아물지 않았다.

왜 나한테 이런 몹쓸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에게만 이런 힘든 고통을 주셨을까? 하는 자책의 마음이 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혼자 영화관에 갔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라는 일본 예술영화였다. 영화는 한 여인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건의 발단은 평범한 가장인 주인공에게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면서부터다. 부인이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투서였다. 편지 이후 남편은 부인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도소 출소 후 주인공은 늘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주인공이 집안 거실에 놓인 어항을 헤엄쳐나가는 꿈, 한 줄기 빛이 보이고, 편지들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닌다. 주인공은 꿈속에서 깨닫는다.

‘편지는 원래 없었다!’ ‘이 모든 파국은 결국 나의 환상이었다!’

나는 주인공이 하얗게 떠다니는 편지를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장면 속에서 갑작스런 교통사고의 원인을 알려고 어리석게 허우적거리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간 병사의 가슴에 화살이 꽂혔다. 병사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나는 죽게 되는 것인가? 나의 가족들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고 한탄만 하고 있을 때 부처가 나타나 그 화살을 단숨에 뽑아서 살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제1의 화살을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을 맞지는 말라는 말씀도 있다.

하이경 작. <봄과 여름사이>

캔버스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 72.7×91cm. 2009.

나는 그때 같은 영화를 세 번에 걸쳐 보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을 알려고 집착하는 마음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사고는 사고일 뿐 오버하지 말자! 나는 그렇게 쿨하고 털털한 성격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직장을 나와 32세에 기획사를 차리고, 36세에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고 그 생명의 신비에 감사해서, 신이 나에게 선물을 주는구나 하는 벅찬 감동도 느껴보았다. 마음속 앙금을 털어버리고 나니,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2009년에는 1인 출판사를 시작하여 꾸려 나갈 수 있었다.

나는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뭐가 됐든 시작해보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게 맞나, 고민도 하지만 한번 해보자는 마음밖에 없다. 그렇게 내가 주어진 뭔가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해나가다 보면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도 알게 된다. 시작도 안 하면 배우지 못하는 귀한 경험들이다.

나는 눈뜨자마자 크게 웃고 크게 외친다

고혜성 37세. 개그맨. 자신감코리아 대표

일단 시작하자! 내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나는 1975년 성남의 달동네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에 나는 어릴 적부터 내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생계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했다. 그리고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20대 초반까지 배달이라는 배달은 다 해봤고, 승용차 기사로도 일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간판 세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문전박대도 많이 당했다. 그래도 ‘입구가 깨끗해야 복을 받는다’는 둥 하며 몇 번이고 찾아가 설득을 하자 점차 일거리가 늘어 나중엔 서울 시내 간판이라는 간판은 다 닦았을 정도였다. 그러다 간판 제작 업체를 만들었다. 열심히 스티커, 전단지를 뿌리자 대형 간판 의뢰도 들어왔다. 그렇게 생짜로 나를 세상에 던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지에 대해 배워갔다.

그런 도중에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3층에서 간판 작업을 하다가 떨어져, 발꿈치 뼈가 으스러진 것이다. 의사는 평생 걸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때 내 나이가 25세였다. 불안했지만 슬픔에 빠졌던 건 도합 1분 정도였다. ‘나는 걷는다. 나는 누가 뭐래도 반드시 똑바로 걷는다’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만 했다.

무조건 걸었다. 절뚝거리는 나를 사람들이 쳐다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몸으로 컴퓨터학습 CD 방문 판매 일을 하다가 걷는 것이 힘들어 오토바이 퀵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다 빗길에 오토바이를 몰다 다친 다리를 또 다치고 말았다.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났다. 하지만 ‘혹독한 추위에서 자라는 북극의 수목일수록 목질이 야무져 양질의 목재로 쓰인다’는 글을 보고 또 보며 힘을 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 나의 왼쪽 발뒤꿈치에는 인공 뼈가 박혀 있는데, 걷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서른 살에는 개그맨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꿈이 개그맨이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오락부장을 했고,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애들을 웃길 수 있을까만 고민했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잘하는 것이 무엇일까, 돌아보게 되었을 때 개그맨이 생각났다. 하지만 개그맨 시험에 열 번이 넘게 떨어졌다. 그러다 KBS 개그맨 공개 콘테스트인 ‘개그사냥’에서 1등을 하면서, 개그를 시작했다. 2005년 말 개그콘서트에서 ‘현대생활백수’로 히트를 쳤다. ‘현대생활백수’ 코너를 할 때는 평균 수면 3시간을 넘긴 적이 없다. 미친 듯이 개그만 생각했다.

하지만 6개월여 만에 막을 내리며 나는 다시 원점에 섰다. 금세 복귀하려니 했지만 아이디어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방송을 그만두면서 나는 ‘자신감 대통령’이라는 책을 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이겨내온 자신감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지금은 전문강사가 되어 그런 비결을 알리고 있다.

하이경 작. <연작-스미다>

캔버스에  오일 및 아크릴. 각 40×90cm. 2010.

여전히 내 본업은 개그맨이라고 생각한다. TV에 나와야만 개그맨이 아니고 무엇을 하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희망을 주고, 웃음을 줄 수 있다면 그게 개그맨이라고 생각한다. 토크쇼 MC의 꿈도 있다. MC가 되어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얻고 행복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시작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눈뜰 때라는 것을 알았다. 눈뜰 때 어떠한 마음으로 시작하느냐에 모든 게 달려 있는 것이다. 나는 눈뜨자마자 웃는다. 그리고 외친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안 되는 것은 없다. 다 된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열 번 하면 된다. 백 번 해도 안 되면 천 번, 만 번 하면 된다. 일단 시작하자.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 ‘지금’

강일구 44세. 일러스트레이터.

출세나 성공에 목적을 두지 않으려 한다. 악착같기보다는 즐겁게 느긋하게 일을 하려 한다. 만나면 상쾌하고 나를 돌아보게 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을 선택한다. 내 그림 스타일이 아닐 경우 욕심을 내기보다는 다른 작가를 소개해주고, 묵묵히 내 할 일을 하고자 한다. 아등바등하기보다는 손해 보는 쪽을 택한다.

나의 이런 태도는 세 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생긴 인생관이자 가치관이기도 하다.

34년 전 여름, 나는 첫 번째 죽음의 고비를 맞는다. 어른이 들어가기에도 깊은 웅덩이, 옆집 형의 멋진 다이빙을 보고 수영도 못하는 걸 잊은 채 같은 방법으로 스며들었다. 점점 호흡이 힘들어지고 시야는 보이지 않았다. 온몸은 물먹은 상태였고 숨은 이미 멈춤 상태를 지난 듯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숨쉬기가 편해지더니, 가족들의 얼굴이 필름처럼 쏜살같이 나타나다 사라졌다. 이게 죽는 과정이구나, 삶이란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가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땅에 눕혀져 있었고, 옆집 형이 “너! 큰일 날 뻔했다”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집에 오니 가족이 다시 보였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삶, 죽음, 이런 것에 대해 고민을 하는 조숙한 어린이가 되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 때, 두 번째 죽음의 문턱을 넘게 된다. 꿈속인 듯 검은 구름이 계속 나를 엉키면서 못 일어나게 하는 느낌이었다. 뭔지 모를 무게에 눌려 온몸이 마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다행히 형수님의 목격으로 살 수 있었다.

세 번째 죽음의 위기는 군대에서 겪었다. 한겨울 대대장실 안 당번병실에서 새 연탄을 갈고 난로 뚜껑을 연 채로 깜빡 잠이 들었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이미 연탄은 새하얗게 타버린 상황이었다. 밀폐된 4평 남짓한 좁은 공간. 분명 100%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일어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세 번째 죽음을 면하게 되면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을 하라는 뜻이구나, 확신하게 되었다. 느긋한 마음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 아옹다옹하며 숨 가쁘게 치고 싸우고 헐뜯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여유롭게 가족과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나마 잘하는 건 그림밖에 없는데…. 그림을 통해서 뭔가 하려면 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1993년에 상경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첫 자취 생활을 하며 도전을 재산으로 매일 눈물을 비벼 먹던 시절, 마치 외판 사원처럼 일거리를 찾아 여기저기 출판사를 기웃거렸다. 좋은 사람도 만나고 불편한 사람도 만나고, 그림이 퇴짜를 맞은 적도 있고, 길을 잘못 가고 있는 건가 고민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의 현실을 수업으로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했다. 편안하고 웃음과 여유가 있는, 한 번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게 하는 그런 그림을 그리려 했고, 지금도 노력 중이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지금’ 딱 두 글자인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그 안에 모든 게 내포돼 있는 것 같다. 오늘 죽더라도 미련이 없도록 지금을 사는 것이다. 내가 덜 욕심을 내어 다른 이가 행복하다면 더 즐겁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세 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국에 함께 가는 것이다. 어차피 자연에서 왔으니 누굴 원망할 필요도 없고, 미련을 가질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다. 그저 이 순간의 행복을 느끼면 된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동안 걸어왔던 길을 한데로 모으는 작업을 하고 싶다. 동네 어딘가에 24시간 불빛이 새어나오는 갤러리를 만들고 싶다. 그 갤러리가 쉼터가 될 수도 있고, 그 불빛이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면 좋겠다.

하이경 작. <연작-하고 싶은 이야기들>

캔버스에 오일. 25×150cm. 2008.

작은 한 걸음,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기 힘으로 일어서리라 마음먹는 것, 그것이 시작입니다.

저에겐 꿈 같은 건 없을 줄 알았습니다

조연희 19세. 학생. 광주시 서구 화정4동

저희 집은 어렸을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옆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잘 집이 없어서 오빠와 함께 교회에 가서 자기도 했습니다. ‘죽을 만큼 돈을 벌어서 오빠를 먹여 살릴 거야’라고 결심한 게 제가 여섯 살 때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절실했던 돈의 소중함과 가족의 소중함, 하지만 그것은 커갈수록 돈에 대한 원망과 가족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는 큰아빠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글 쓰는 걸 되게 좋아해서 글쓰기 대회에 다니면서 상품 받는 재미로 지냈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독서 토론 대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왕따로 지냈던 저는 남들 앞에선 말을 못했어요. 역시나 그 대회에 나가서도 입도 뻥긋 못 해보고 들어왔어요. 다음 날부터 선생님의 심한 구박과 아이들의 비웃음을 당해야 했고,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늘어갔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는 동안 저는 허구한 날 가출을 하고, 남의 돈을 빼앗고, 경찰서를 밥 먹듯이 드나드는,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비행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사는 게 싫었고 저에겐 미래라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건 어린 우리를 버린 가족이라고 생각했고, 그들과 나중에라도 만났을 때 기뻐하게 될 일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장담했고, 자꾸만 제 자신을 망가뜨렸습니다.

사고를 치고 경찰서에 가고 재판을 받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은 소년원까지 가게 되었어요. 소년원에서 저는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온 걸까?’ 하는…. 결론은 제 자신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였습니다. 그곳에서 책도 읽고 미래도 생각하면서 나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가면 다시 그 생활이 반복될 거라는 생각에 소년원 선생님께 아예 다른 지역 쉼터에 보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소년원 선생님들은 제 생각대로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쉼터에서 2년제 고등학교에 다니고 컴퓨터 학원도 다니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월간 마음수련>도 읽게 되었습니다. <마음수련>은 저에게 아주 큰 경험을 하나 하게 해주었습니다. 잡지를 보다가 예전에 제가 상처 준 친구 한 명이 떠오른 겁니다.

사춘기 때, 가출을 했다가 우연히 알게 된 친구였는데, 말도 제대로 안 해 봤으면서 다짜고짜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악담을 퍼부었던 적이 있거든요. 저는 메신저로 미안했다고 사과의 글을 남겼습니다. 그 친구는 물론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답장이 왔습니다.

<난 너의 그 말 때문에 그 이후로 친구도 못 믿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도 못 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

그 친구가 과연 나의 사과를 받아줄까 싶었지만 막상 그 답장을 받자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여전히 제 욕심만 채우려 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사과를 하면서도 그 친구의 아픔보다는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친구는 제가 한 한마디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거부하며 외롭게 지냈는데 말입니다.

하이경 작. < Don_t frazile>

캔버스에 아크릴 및 혼합재료.

45.5×53cm. 2007.

너무나 미안하고 더욱 진심으로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사과를 했고, 그 친구도 결국 제 사과를 받아주었어요. 요즘은 연락도 자주 하면서 지냅니다.

그 일 이후 세상도 아주 달라 보였습니다. 무슨 자격증이든 어떻게 해서든 다 따게 해주려는 쉼터 선생님부터 단골 PC방 아저씨까지, 사람들의 따듯함이 느껴졌습니다.

전 누구 한 사람의, 무엇 하나로 변한 것이 아니라 이 계절과 이 풍경과 지나가는 사람들, 앞집 개, 그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크다면 큰 모든 것을 보고 지금 이곳까지 온 거였습니다.

2011년부터는 남들에게 그동안 상처 줬던 나쁜 마음들을 스스로 치료하고 싶습니다. 어른들에게 질리도록 듣던 말이 “사람은 꿈이 있어야 성장한다”였지만 저에겐 꿈 같은 건 없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저에게도 꿈이 생겼습니다. 청소년 상담사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의 비행 청소년들을 안아주고, 큰 바위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햇볕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나는 늘 아내에게 밥을 지어준다

박의흠 61세. 요리사.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장군동

2003년 12월 31일 오랫동안 몸담아왔던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당시 신제품 개발 업무 총괄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내가 사직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나는 결혼 생활 30여 년 중 20년간을 가족과 떨어져 살았다. 회사 일 때문에 서울, 양산, 보령, 폴란드, 천안 지역에 부임하여 홀로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가족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아내가 아들을 출산할 때도, 아내가 난소암 판정을 받아 수술할 때조차도 같이 있어주지 못했다. 수술 후에도 그 아픈 몸으로 아이의 교육까지 떠맡게 했다. 일에 푹 빠져 가족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졸음운전을 하는 바람에 죽을 뻔한 순간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살다가 그런 순간이 한 번, 두 번, 세 번이 되자 내 인생이 돌아봐지기 시작했다. 만약 차 사고로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즈음 마침 정년퇴임한 회사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여유롭게 들려주신 여러 가지 말씀 중 그분의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느끼면서, 나 또한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여생을 아내를 위해 보내야겠다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요리라는 해답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몸이 안 좋은 아내가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인 생선, 일식으로 정했다.

하이경 작. <Visit… sometimes>

캔버스에 오일 및 아크릴. 145×120cm. 2010.

처음 2년 동안은 일식과 복어 자격증을 따기 위해 횟집에서 청소며 설거지까지 밑바닥 일부터 시작해 배웠다. 쉰이 넘은 나이에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의 지도를 받으며 배우는 일은 쉽진 않았다. 하지만 결심이 확고했기에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2006년 살던 집을 리모델링하여 음식점을 내며 아내에게 약속했다. 이제는 당신을 위해 살겠다고. 암 수술 때조차 곁에 있어주지 못한 미안함을 갚아주고 싶었다. 그 이후 나는 고등학교 교사인 아내가 출근하기 전 늘 새 밥을 지어준다. 다시는 부엌일을 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30년여 만에 다시 신혼으로 돌아간 것 같다. 꾸준한 식이요법과 등산을 병행한 결과 아내도 지금은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길이 있겠지만, 나는 새롭게 시작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처음 갑작스럽게 사직서를 낸다고 했을 땐 아내도 놀랐다. 하지만 큰 병을 앓으며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았기에 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다. 아내와 함께 오래도록 서로 보듬고 살았으면 좋겠다.

애들이 우리 엄마가 달라졌대요

유은경 44세. 호수인터내셔널 대표.

러시아 모스크바 거주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나는 교통이 혼잡한 사거리의 교차로 한가운데 홀로 내팽개쳐진 채로 서 있는 것 같았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남편은 해외 주재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업을 한 터였다. 나는 남편의 회사를 계속 유지하면서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변화를 막아보려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하지만 돈이 벌려도 돈이 없었고 돈이 안 벌려도 돈이 없었다. 항상 쫓기는 기분이었고 누구에겐가 주시를 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술을 먹기 시작하였고 약에 의존했다.

회사 일과 관련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과 교제하기도 꺼렸다. 동정받기도 싫었고 쓸데없는 관심으로 인해 쏟아지는 여러 가지 말들이 상처가 되었다. 폭풍이 몰려오면 그 폭풍이 쓸고 간 잔재까지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잔인함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밉고 무서웠다. 대신 아이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아빠가 없는 자리가 티가 안 나도록 해주려고 기러기 가족이 많다고 하는 곳으로 이사도 하여 보았고, 학교도 좀 더 좋은 곳으로 옮겨 보았다. 그러면 상쇄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나의 착각이었다. 모래 위의 성처럼 이 어설픈 노력들은 나와 아이들과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지켜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망가뜨려갔다.

할 만큼 하는데도 상황은 더 악화되자 아이들과 나는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서로를 할퀴며 극도로 지쳐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마음수련을 만나게 되었다. 마음 자가 들어간 것이라면 뭐든 다 싫은 때였는데도 마음수련 오리엔테이션을 받아보고는 이거다 싶었다. 살아온 삶의 기억들과 그에 묻어 있는 오래된 감정들과의 해원, 그리고 버리기, 그리고 나의 참 본성을 찾아가는 마음수련은 너무도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수련을 하며 어쩌면 나 자신의 모습을 이리도 모르고 살 수가 있었을까, 기가 막혔다. 남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회사 일을 해도 인정을 못 받을까 봐 전전긍긍해하며 자존심을 세웠다. 남편에게 하던 예우 이상으로 내게 안 하면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났다. 아버지 역할까지 해서 경제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버거워 ‘내가 누구 때문에 이방인으로 이렇게 살고 있는데’ 하며 아이들에게 폭군 노릇을 했다. 나는 항상 피해자라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온 세상에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 절절히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나 때문에 너무도 지쳐버린 엄마와 아이들에게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변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마음의 변화는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하였다. 화가 날 때 화난 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일단 멈춤을 하고 시간을 가진다. 아이들이 이젠 ‘우리 엄마가 달라졌어요’라며 웃는다. 감정이 앞서지 않고 짜증이 현격하게 줄었으며 말투가 온화해졌단다. 이젠 엄마의 관심이 집착이 아닌 진짜 사랑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봐주고 기다려주고, 나의 노력에 마음의 문을 열어준 가족에게 감사하다. 이제 보다 순한 얼굴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새롭게 나아갈 수 있을 듯하다.

 

하이경 작. <오후 5시 39분>

캔버스에 오일. 72.7×91cm. 2008.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5)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5)


겨울나무 아래 부지런히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매미의 허물은 지난여름 환골탈태의 흔적이지요.
그 무더운 여름날, 빈껍데기를 벗어던지고 그렇게도 큰 소리로 울어댄 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매미의 생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 3천여 종의 매미가 살지만 매미가 되기까지는
모두 오랜 기간 땅속에서 애벌레로 살아야 합니다.
2년에서 무려 17년이라는 세월입니다.
하지만 껍질을 벗고 매미의 모습으로 사는 날은 불과 10일에서 20일 정도지요.
그 기간에 수컷은 짝짓기를 하고 죽고, 암컷은 알을 낳은 후 생을 마감합니다.
몇 주일이 지나면 그 알들은 애벌레로 부화한 뒤 먹이를 찾아 땅속에 구멍을 파고 자리를 잡습니다.
그곳에서 오랜 세월 애벌레로 지내는 것이지요.
그렇게 단 10여 일을 매미로 살기 위해 10여 년을 땅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오직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지극하게 기다립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껍데기를 벗어버립니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지요.
참으로 매미는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난 이유를 잘 아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애벌레 시절을 그리워한다거나 주어진 삶이 너무 짧다고 탓하지 않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해 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삶에 지극한 매미처럼, 우리도 가짜인 껍데기를 버릴 수 있다면….

효과적인 군살 빼기, 스트레스부터 없애야

정리 문진정

획기적인 체중 감량 프로그램과 다이어트 식품이 날마다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비만 환자는 여전히 늘어나는 추세다. 살을 빼야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성공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살이 안 찌는 사람의 식습관을 살펴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배가 고플 때 먹고, 배가 부르면 그만두는 것. 하지만 과체중인 경우에는 배가 고파서는 물론이고, 힘들어서, 심심해서, 나중에 배고플까 봐, 주는 사람에 대한 예의로…. 그 밖에도 외로움, 좌절감, 박탈감 등 감정적인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서 음식을 찾는 경우도 많다. 마음껏 먹고 나면 포만감을 느끼고,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식은 정서적인 굶주림을 근본적으로 채워주지 못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이어트를 지속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해도 안 될 거야’ 같은 부정적인 생각은 생활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무슨 일이든 쉽게 포기하게 만든다. 체중 감량의 강박증과 과거의 다이어트 실패 경험을 털어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성공적인 다이어트를 시작할 수 있다.

살을 빼려면 스트레스부터 빼야 한다

비만인의 대다수가 스트레스가 쌓일 때 습관적으로 음식을 먹는 성향이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식욕 조절과 관련이 있는 스트레스호르몬 코르티솔이 분비된다. 스트레스 초기에는 입맛이 떨어져 살이 빠지지만 계속되면 코르티솔의 균형이 깨지면서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폭식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식이요법에 앞서 스트레스를 없애는 게 우선이다. 스트레스만 해소되어도 식욕이 조절되고 체중이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다.

유아기의 음식에 관한 기억을 버린다

어릴 적 음식과 관련된 경험이 현재의 식습관에 영향을 미친다. 부모님께 사랑받기 위해 많이 먹거나, 불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음식을 이용한 적이 있는지, 착한 일을 했을 때 음식으로 보상받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그런 기억을 버려나간다. ‘빨리 크려면 많이 먹어야지’ ‘불쌍한 어린이들을 생각해서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된다’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자라면 배가 불러도 계속 먹는 습관이 형성되고, 결국 어른이 되어서 비만이 되거나 쉽게 체중 감량을 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화학물질을 제거한다

단순히 칼로리만 제한했던 다이어트가 실패하는 데는 몸속으로 유입된 화학 물질의 영향도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농약, 방부제, 색소, 육류 속의 항생제, 식품 포장재 등 화학 물질들이 부쩍 늘면서 우리 몸은 화학 물질 처리에 혼란을 겪고 있다. 신진대사에 악영향을 끼쳐 체중을 조절하는 능력을 잃게 되고 영양소 소모량도 늘어난다. 따라서 무조건 적게 먹기보다 생활 속 화학 물질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

① 유기농 식품이나, 식품 첨가물이 적은 음식을 먹고 카페인 음료, 청량음료, 알코올, 트랜스 지방은 피한다. ② 수용성 식이섬유를 충분히 섭취하여 화학물질 해독과 배출을 돕는다.

③ 무조건 덜 먹기보다 비타민, 미네랄이 많은 음식을 먹어, 적절한 영양소를 섭취한다. ④ 환기를 자주 하고 공기정화 식물을 길러서 공기 중 화학 물질을 줄인다.   ⑤ 유리나 천연 용기에 음식을 보관한다. 기름진 음식은 플라스틱 용기에 함유된 화학 물질을 빨아들이므로 주의한다. ⑥ 파마나 염색 시에는 비타민 C와 E, 식이섬유를 먹고, 가능한 유기농 용품을 사용한다. ⑦ 드라이클리닝한 의류는 하루 정도 실외에서 통풍시킨 뒤 옷장에 보관하며 합성가죽, 방수처리, 내열처리 된 옷은 되도록 옷장에 넣지 않는다. ⑧ 집안 해충을 제거하는 방충 스프레이는 독성이 많으므로 허브나 소다 등을 이용한다.

꾸준한 근육 운동

같은 몸무게라 할지라도 체지방이 적고 근육 량이 많아지면 기초대사가 활발해지므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① 복부에 힘주기: 복부가 척추에 닿는 느낌으로 복부의 근육을 6초 정도 수축시킨 다음 긴장을 푼다.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꼭 해주면 복부 근육의 힘이 빠르게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② 복부 마사지: 잠들기 전 5분 정도 복부를 위아래로 마사지하고 두드리거나 꼬집는다. 혈액순환과 신진대사를 도와 부분 비만에 효과적이다.

참고 도서 <자기최면 다이어트> 엘지 버킨쇼우 / 넥서스BOOKS

 <내 몸을 되살리는 친환경 다이어트> 폴라 베일리 해밀턴 / 북센스

<다이어트 절대 하지 마라> 로버트 M. 슈워츠 / 샘터

대인 기피의 원인 ‘눈물의자’의 기억

심명진 23세.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 3학년

나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웠다. 사람들 시선이 너무 힘들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사람들을 피해 숨으려고 애썼고, 늘 혼자이게 되었다. 불안과 긴장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마음이 불편하니 늘 지쳐 있었고 어린 나이임에도 밝고 명랑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고, 그 마음의 원인이 된 ‘마음사진’ 또한 찾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특별한 발명품 하나를 갖고 계셨다. 우유 곽으로 만든 조그만 의자였는데 우리는 그 의자를 ‘눈물의자’라 불렀다. 수업 시간에 떠들거나 잘못하면 그 의자에 앉아 눈물이 날 때까지 야단을 맞아야 했다. 어느 날 내가 그 의자에 앉게 되었다. 나는 그 의자에 앉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마음으로 울고, 소리 지르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결국 나는 그 의자에 앉지 않은 유일한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1분도 안 되어 나는 내가 피운 소란을 후회했다. 엉엉 울며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데 그 누구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는 것 같았다. 그때 마음먹었다.

‘이제 다시는 남의 눈에 띄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모두가 나를 싫어하게 될지 몰라.’

나는 그때의 상황을 계속해서 버렸다. 그런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실제라기보다는 내가 마음속에 만들어놓은 안 좋은 ‘사진’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 담임 선생님은 내가 좋아하던 선생님이었다. 엄마처럼 따뜻해서 밤에 전화를 할 정도였다. 눈물의자 사건 이후에도 선생님은 나를 바로 달래줬었다. 눈물의자는 선생님 나름대로 아이들을 잘 지도하려는 방법이었다. 돌아보니 다른 친구들은 눈물의자에 앉은 후에도 평상시처럼 잘 지냈는데 나만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거였다.

이게 그냥 다 내가 만들어놓은 마음사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나는 그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창피하다, 부끄럽다 하며 남을 의식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수련 후 독일 유학을 가게 됐다. 우리 과에서 동양인은 나 혼자다. 하지만 지금 난 항상 사람들 속에 있다. 인사조차 피하고 힘들어했던 내가 이제는 먼저 밝게 인사하고 말을 건넨다. 수업 시간에 질문하고, 발표하는 것도 이젠 그냥 자연스럽다.

미루기의 대가, 빠릿빠릿한 선생이 되다

곽초롱 27세. 교사. 경남 진주시 망경동

나는 뭐든 나중으로 미뤄 뒀다가 하는 습관이 있었다.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이 그랬고 동생 물건을 빌려 쓰고는 돌려주는 걸 미루다가 잃어버려서 동생의 원성을 산 적도 많다. 학창시절엔 시험공부도 계획대로 한 적이 없었다. ‘좀 쉬었다가 해야지’ ‘저녁 먹고 해야지’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해야지’ 미루면서 시험 범위도 제대로 못 본 채 시험을 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다음에는 꼭 미리미리 공부해야지’ 다짐했지만 반복하고 후회하고 또 반복이었다. 미루고 미루다 쫓기듯 한꺼번에 하려다 보면 과부하가 걸려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해,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부모님의 권유로 수련을 시작하며 이런 습관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00하면 성공한다’ 류의 자기계발서가 많았다. 그걸 보며 훌륭한 사람, 성공한 사람에 대한 환상과 높은 기준을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주변의 일들은 하찮게 느껴졌다. 작은 것부터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이런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별일 없겠지’ ‘누군가는 해주겠지’ 하며 요행을 바라고 순간순간을 모면하기에 급급했다. 내가 만든 성공의 기준을 가지고는 ‘지금 해야 할 사소한 것’에 충실할 수가 없었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임용 시험이 닥쳐왔다. 다행히 수련을 하며 허황된 바람도 게으른 습관도 함께 버리자, 집중이 잘되었다. 덕분에 미루기 대가인 내가 한 번에 임용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교사가 된 후 만약 마음수련을 안 해 아직도 미루기의 습관에 빠져 있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가슴이 철렁해지곤 한다. 학예회 준비, 가정통신문 만들기 등등 정해진 기한에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다행히 학교에서 나는 미리미리 일을 처리할 줄 아는 빠릿빠릿한 선생님으로 통한다.

어린아이들은 모방력이 강해서 선생님의 행동을 금방 따라한다. 그만큼 선생님의 좋은 습관이 중요하다. 한껏 미루다가 벼락치기만 하던 내가 아이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하루하루 알차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恬憺虛無 염담허무

마음을 다스려 질병을 치료하는 이치

이태종 <마음한의원> 원장

“이 병에는 어떤 음식을 먹는 게 좋을까요?” 어딘가 아프기 시작하면 대부분 무엇을 더 해야 할지를 묻는다. 설령 아프지 않더라도 건강을 위해서 뭔가 더 할 것을 찾는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 넘쳐서 늘 문제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더 할까가 아니라 어떤 것을 뺄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다.

한의원이 시장 거리에 있어 장사하는 분들이 많이 오는데, 특히 호소하는 증상이 소화불량이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요즘 장사가 잘 안된다, 누가 돈을 떼어먹었다, 사업 자금이 필요한데 돈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르겠다 등 많은 걱정들을 호소한다.

그렇게 많은 걱정을 하다 보니, 소화기가 안 좋아지고 만성적으로 속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치료를 하면 잠시 편해지지만 몇 달 후 다시 똑같은 증상을 겪는다. 근본적인 걱정, 고민거리가 해결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한의학에서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본다. 감정과 인체 장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폐는 슬픔, 간은 노여움과 화, 비장은 생각, 신장은 공포, 심장은 기쁨과 관련이 있다. 또한 사람 몸에는 12개의 경락이 있는데, 경락은 마음이 다니는 통로라 하여, 경락마다 독특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가슴에서 시작하여 팔, 엄지손가락으로 내려가는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은 자신감과 연관이 있다. 그래서 너무 자신감이 없고 염세적인 사람은 이 경락을 자극해서 치료를 해줄 수 있다. 경락이 마음이고 침을 놓는다는 것은 결국은 마음을 바꿔먹게 하는 것이다.

약을 쓴다는 것도 약의 마음을 써서 마음을 치료한다고 본다. 하기에 서양의학에서는 약의 유효 성분을 논하지만 한의학에서는 유효 성분이 아닌 약성(藥性), 즉 약의 마음을 논한다. 요새 비염이 많은데 주로 쓰는 약재로 ‘신이화(辛夷花)’라는 것이 있다. 목련과 백목련의 꽃봉오리인 신이화는 나뭇가지의 끝에서 위로 솟구쳐 자라고 맛도 매우며 기운을 발산시킨다. 화사하게 폭발적으로 꽃을 피우고자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이다. 풍한(風寒)으로 인한 비염에 일종의 폭탄 같은 역할을 해주는 신이화를 쓰는 것이다. 즉, 약의 마음을 먹어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것이다. 세상 만물이 마음이며, 마음은 하나로 통한다.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욕심과 번뇌 등에 매이고 쓸데없는 짐을 지고 있다면, 하루빨리 빼내어 버리는 것만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이다.

한의학의 근간이 되는 <황제내경>에서는 가장 위대한 치료법을 ‘염담허무(恬憺虛無)’라 일컫는다. ‘마음을 담담하게 비우고, 맑게 하면 모든 병이 물러가게 된다’는 뜻이다. 또 허준의 <동의보감>에 보면 ‘이도료병(以道療病) : 도로써 병을 치료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질병을 치료하려면 먼저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만 도에 의지할 수 있다. 병자에게 마음속에 있는 의심과 생각들, 모든 망념과 모든 불평을 다 없애고 평소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을 깨닫게 하면, 곧 몸과 마음을 비우고 자기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를 일치시킬 수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되어 마침내 신이 모이게 되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하게 되고 성정이 화평하게 된다. … 이와 같으면 약을 먹기도 전에 질병은 사라진다. 이것이 도를 가지고 마음을 다스려 질병을 치료하는 진인의 큰 법이다.’

결국 병의 근원은 마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으로, 한의학에 치미병(治未病)이라는 말이 있다. 성인불치이병 치미병(聖人不治已病 治未病)에서 나온 말로, ‘성인은 병들기 전에 병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평소에 마음의 중요성을 알고 마음을 다스린다면 병을 예방할 수가 있다. 때문에 가장 최고의 의사를, 마음을 치료한다 하여 심의(心醫)라 일컫는 것이다.

완전한 세상이란. 신선세계

완전한 세상이란

 

완전하다는 것은 죽음이 없고 영원히 살아 있는 나라가 완전한 나라다.

 

이 세상이 완전한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대자연의 마음으로 거듭나야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인 우주심으로 다시 나야만 너나가 없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참으로 죽음이 없이 살아야 완전한 것이다.

 

사람이 생로병사로부터 해탈되는 것도 허상인 자기가 없어야 될 것이고

세상이 완전하나 사람의 마음에 의하여 세상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자기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 완전하지 못한 것이라.

 

세상은 이미 완전하고 깨쳐 있고 완성이 되어 있다.

 

인간의 마음을 신인 대우주와 하나가 되게 하면

참세상에 거듭나게 되니 이것이 완전한 세상이다.

신선세계

 

홍송이 꽉 어우러진

산속에 호수가 있어라

하늘 높이 치솟아 서로의 키 크기를 자랑이라도 한 듯

쭉쭉 뻗은 붉은 송이 탐스러워라

자라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듯이

수백 년이 된 나무라 향도 좋구나

호수 위에는 저 높은 가파른 바위 사이에서

폭포가 줄기차게 떨어지고

이름 모를 새가 하늘 높이서 떼 지어 빙빙 돌고 있구나

홍송 위에는 점잖은 황새들이

이 소나무 저 소나무에 앉아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고

맑은 하늘에는 흰 뜬구름이 운치를 더하구나

푸르다 못해 검은 물속에는

이름 모를 고기들이 왔다 갔다 하고

시름없는 자연을 벗 삼아

이따금씩 사람이 찾아오곤 하구나

가파른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다가 보니까

사람이 살지 않는 낡은 집이

나이가 백 년은 넘어 보인다

이곳에는 누가 살다가 갔을까

혼자 생각하며 내려오니

노루들이 한가히 풀을 뜯고 있고

산새가 쉴 새 없이 지저귀구나

산 위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맑기가 그지없구나

한참을 내려오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구나

신선세계에서 사바세계에 온 것 같구나

내 마음에 있는 세계는 사바 중생 세계이고

내 마음이 세상과 하나가 되어

내가 난 세계가 신선세계이구나

글, 그림 우 명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등 다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