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프로로 입단해 18년이었다.
2,135경기 출전 7,332타수 2,318안타 351홈런…. 프로야구 통산 1위. 그러나 양준혁 선수는 지난해 9월 은퇴식을 끝으로 인생 제2막을 열었다.“최고의 기록보다 1루까지 전력 질주했던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그에게 지금도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은 ‘양준혁 선수’였다. 사람들은 그 열정과 헌신의 감동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강연과 방송 출연으로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보았다.
그날 대구 구장엔 비가 쏟아졌다. 어김없이 그는 9회에서 땅볼을 치고도 모자가 벗겨지도록 1루로 죽어라 전력 질주했다. 한결같았다.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 뻔한 1루를 향해서도 악착같이 뛰었던 그가 누구던가. 프로야구 통산 최다 출장, 최다 홈런, 최다 안타, 최다 2루타, 최다 득점, 최다 사사구…. 18년 프로 선수 생활 중 14시즌 동안 3할대 타율, 15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홈런, 16시즌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때려낸 대(大)타자 양준혁 선수의 마지막 경기 모습이었다.
팀에 부담을 주면 유니폼을 벗겠다고 마음먹고 일년여 간 고민했단다. 어린 시절, 어려운 형편 때문에 부모님이 반대하자, 동냥을 해서라도 야구를 하겠다고 설득하던 그때 이후 그는 오직 야구만 생각하며 살았다. 중학생 시절, 프로야구 출범 때부터 그의 꿈은 고향 팀 삼성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달리는 거였다. 그 후로도 그 마음은 일편단심. 사춘기도 청춘도 야구만 생각했고, 밥 먹을 때도 젓가락을 야구 ‘빳다’로 생각했다는 그이다. 야구 때문에 행복했고, 야구 때문에 수도 없이 자신을 내려놓으며 담금질도 해야 했던 그가 은퇴를 마음먹었을 때 왜 아쉬움이 없었을까. “무지하게 허전하고 외로울 것 같아 조금 두려웠다”는 은퇴식은 그의 32년 야구 인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고 야구장 앞은 텐트촌이 되었다.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다. 팬들은 그의 지극한 야구 사랑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는다. 평상시 별로 말이 없는 그가 초청 강연을 위해 연단에 서면 구수하고 진솔한 입담이 거침없다. 말재주 덕이 아니다. 오직 한 가지 꿈을 꾸며 한길을 달려온 사람만이 갖게 되는 지혜가 이젠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있었다.
선수가 은퇴 후 이렇게 강연을 많이 하는 건 처음인 듯한데요.
사회 초년생인 셈이죠. 아주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선수 때는 그냥 팀에 속해서 움직이는 대로 스케줄대로 따라가면 되었지만 이제는 달라졌죠. 선수할 때는 승부의 세계에서 긴장하며 살았잖아요. 이제는 마음이 너무 편안합니다. 저는 경상도 사람이고 혼자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말을 할 일이 별로 없었어요. 말수도 적은 편인데 이제는 말이 직업이 되어 버렸네요.(웃음)
청중들이 주로 어떤 부분에 관심을 갖고 감동하던가요.
살아왔던 얘기들을 주로 합니다. 아무래도 선수 활동 하면서 겪었던 어떤 시련이나 슬럼프 경험을 얘기해요. 제 말투 자체가 사투리도 팍팍 쓰다 보니 잘 들어주시더라고요. 되게 좋아들 해주세요. 누구나 살다 보면 안될 때가 많잖아요. 저도 수천 번의 실패를 겪었죠. 그렇지만 중간에 포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부분에 공감하시는 것 같아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를 하지 않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끝까지 하는 거죠. 부딪쳐보고 안 돼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고, 데이터로 갖고 있었어요. 예를 들면 타격 폼이 안 맞을 때는 그 원인을 찾는 거죠. 실패에서 원인을 찾아서 오늘은 이렇게 해보고 안 되면 내일은 저렇게 해보고. 실패한 걸 토대로 다른 방법을 찾는 거예요. 진짜 밀림에서 길을 내듯이 찾아 나가는 거예요.
그런 건 누가 지도해주는 건 아닐 텐데요, 어떻게 극복해 나가셨나요.
아무리 해도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오히려 바닥을 쳐버렸어요. 야구는 그냥 놔버리고 페이스를 오히려 떨어뜨려 버려요. 대신에 완전히 놓는 건 아니고 나름대로 연구도 많이 하죠.저는 오히려 슬럼프 오고 힘들면 팀의 궂은일을 하며 봉사를 해버려요. 혼자 땅 고르고 볼 줍는 일을 합니다. 야구는 딴 애들한테 맡겨 놓고, 후배들을 위해 벤치에서 파이팅 하고. 그러니까 오히려 팀에서 더 좋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준비를 하죠.
그에겐 실패와 좌절, 슬럼프와 부활의 치열한 경험이 있었다. 은퇴하기까지 8년간의 기간이 그랬다. 팀의 리더로 삼성의 우승을 이끈 2002년, 그는 개인적으로 사상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타율이 3할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바로 타율 3할 2푼 9리를 기록하며, 완벽하게 부활했다. 그는 “그때까지 치던 타격 폼을 다 버리고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타격 기술을 다시 쌓기 시작했다”고 했다. ‘잘나가던 양준혁’을 버리고 얻은 게 ‘만세 타법’이다.
그는 두 달간 혼자서 타격 폼을 연구했단다. 어느 날 배트를 휘두른 뒤 한 팔을 놓으면서 마치 만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단다. 그렇게 쳐보니까 잘 맞았다. 방망이를 던지면서 임팩트를 가하는 게 치면 칠수록 굉장히 효과적이었던 것. 그 특유의 만세 타법으로 그는 2003년에는 최고 속력을 냈고 야구 인생의 큰 전환점을 갖게 된다.
이제 그 ‘만세 타법’을 못 보는 팬들의 아쉬움이 큰 듯합니다.
그거는요. 또 얼마 안 있으면 다 잊혀집니다. 저는 그렇게 꿈을 먹고 살지는 않아요.(웃음)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준비들을 저는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야구 시작할 때부터 언젠가는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은퇴할 때도 결단을 내릴 수 있었고요. 저는 제가 그렇게 스타라고도 생각하지 않고요. 그걸 계속 갖고 있으면 힘들어요. 빨리빨리 잊어야지.
늘 스스로를 최고의 선수가 아닌, 2인자라고 하셨지만 팬들은 ‘양신(梁神)’이라고 불렀지요.
하하. 선수 생활 때는 안 그랬습니다. 끝에 가서 좀 그런 소리 들었지요. 저는 진짜 살면서 도 닦는 기분으로 살았어요. 기록도 많이 갖고 있었지만 항상 2인자였죠. 우리 팀에는 이승엽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으니까요. 솔직히 서러운 것도 좀 많았어요. 표정 관리하기 참 힘든 때도 있었고요. 하지만 묵묵히 이겨냈어요. 오히려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그런 조연 역할을 잘 해왔던 거 같아요. 잘하는 사람을 살려주고 뒷받침해주는 것이 팀을 위한 것이고 그런 역할을 하다 보니까 2인자처럼 살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모든 기록을 다 갖고 있잖아요.
그런 마음을 가지려면 치열하게 자신을 객관화할 때 가능할 텐데요.
저는 제 자신은 진단을 잘해요. 저는 항상 내 자신이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한테 묻고 내가 스스로 처방을 내려요. 의사처럼요.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보고 연구해야죠. 저는 제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반성하고 판단을 해야 어떻게 앞으로 나갈 건가 진단을 내릴 수가 있어요. 저는 주위에서 지적을 해주면 굉장히 잘 받아들입니다. 자신한테 고집을 부리지는 않아요.
야구에서처럼, 자기 분야에서 일할 때 가장 중요한 마음 자세는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사랑, 열정. 나는 야구로 표현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얼마만큼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야구도 결국 실력은 백지 한 장 차입니다. 그렇지만 야구를 얼마나 사랑하고 애살을 가지고 하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더라고요. 승엽이 같은 경우도 안타를 못 치는 날은 훈련장 가면 새벽 세 시, 네 시까지 때립니다. 그런 열정이 있어야 돼요. 보통 마음만 있지 행동을 잘 안 하잖아요.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일단 부딪쳐 본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부딪쳐 보면 답이 나오거든요.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되면 되는 대로 답을 찾아내고 그런 과정이 있어야 되겠죠. 그렇지만 제일 중요한 건 부딪쳐 봐야 된다. 될 때까지. 중간에서 포기하는 게 제일 나쁜 겁니다. 후배들도 보면 이런 얘기 많이 합니다. 하다가 또 힘들면 안 해버린다고요.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여러 기록 중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늘 사사구를 말씀하시더라구요.
사사구(四死球)는 포볼하고 데드볼, 몸에 맞는 볼이에요. 그건 안타에도 타율에도 올라가지 않아요. 하지만 팀을 위한 야구를 했는가를 말해주죠. 저도 신문 1면에 나고 싶죠. 홈런도 하고 싶고요. 하지만 그런 욕심을 참고 오히려 뒷타자한테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상대 투수들 공 하나라도 더 던져 지치게 하려고요. 아무도 안 알아주는 기록이지만 저한테는 제일 소중한 기록입니다. 솔직히 어렵습니다. 다른 기록은 다 깨지겠지만 그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거예요.
그런 마음이 야구를 오래도록 할 수 있게 했던 힘인 것 같습니다.
과거에 얽매이면 절대 안 돼요. 현재에 충실하게 삶을 살아야죠. 옛날에 야구 잘했다, 그거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냥 이력서일 뿐이에요. 제가 오래 할 수 있었던 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타격 폼도 늘 변화를 추구했어요. 야구할 때도 오로지 이 한 게임에 최선을 다했지 내일은 없었어요. 오늘에 모든 걸 쏟아붓는 거죠. 그 한 게임에 전력을 다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거죠.
32년 야구 인생의 2막을 시작하셨는데요, 오랜 야구 경험이 그대로 녹아난 앞으로의 계획들이 기대가 됩니다.
일반 사람들은 해외 연수 가서 감독 되는 게 수순인데 저는 강연하면서, 야구를 알리면서, 이론 공부하면서, 야구 재단 만들어서 아이들이 야구를 마음껏 할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야구는 엄청난 야구 인구를 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또 아이들도 공부도 중요하지만 체력이 우선이 돼야 해요. 그리고 위기에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죠. 야구를 통해서 인성 교육을 하고 사회의 리더로 키우는 것이 제 궁극적인 취지입니다.
1구 1구 온 힘을 다하는 정성, 어떤 공이 들어오든 끝까지 지켜보는 인내심, 땅볼을 치든 뜬공을 치든 무조건 1루를 향해 전력 질주하던 그의 한결같은 모습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성의에 다름 아니었다.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 지금, 그는 자신을 두고 ‘2루 베이스에 슬라이딩하려는 시점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홈까지 전력으로 뛰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을 것이다. 언제나 마치 1회 첫 타격에 나선 초보 선수처럼, 그 초심으로.
양준혁 선수는 1969년 대구 생으로 대구상고와 영남대를 졸업하고 1993년 프로야구에 입단했다. 해태, LG에 1년 정도 머문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삼성 라이온즈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타격왕, 타점왕, 최다안타왕에 이어, 8차례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으며, 2,135경기 출전 7,332타수 2,318안타 351홈런, 사사구 1,380개 등 프로야구 통산 1위라는 기록을 남겼다. 사진 제공_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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