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우리는 함께 해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내야, 사랑하는 나의 아내야

정태하 55세. 구미상록학교 교장

나는 경북 김천시의 조그만 촌락에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두들 그러했듯이 먹고살기가 힘들던 때라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을 하고, 어린 나이에 신문 배달, 구두닦이, 생선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스물셋에 나보다 한 살 어린 아내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마치 여고생마냥 머리를 양 갈래로 늘어뜨리고 웃음 띤 얼굴에, 보조개가 살며시 들어가는 아리따운 모습에 나는 한눈에 반했다. 너무나 가난해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였지만 이담에 꼭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아내와 함께 열심히 일을 했다. 포장마차, 과일 장사, 생선 장사…. 부지런히 일해서 돈도 모으고 어느 정도 성공도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허전함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못 배운 설움 때문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가정 통신란에 부모 학력을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중학교 졸업 어떤 때는 고등학교 졸업을 했노라고 양심을 속이고 말았다. 여러 모임에 참석을 하곤 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사람이라며 무시를 받는 것 같아 항상 꾸어다놓은 보릿자루마냥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늘 배우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설움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보! 빨리 갑시다” 아내가 내 손을 잡고 야간학교에 데려갔다.

“난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내가 식모살이라도 해서 도울 테니 공부를 시작해 봐요.” 내가 방황만 하고 있을 동안 오히려 아내는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본 것이다.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처음엔 내가 서른이 넘어 무슨 공부를 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남들에게 들킬까 봐 숨죽여 가며 야간학교에 다녔다. 굳어진 머리로 공부를 하는 것 또한 쉽지가 않았다. 힘들어지면 나는 또 술을 마셨다. “나는 안 돼” 하면서 창문 밖으로 책을 마구 집어던졌다. 그러면 아내는 무조건 내가 잘못했으니 이러지 말라며 남몰래 책을 주워다가 살며시 머리맡에 놔두고는 하였다. 그리고는 두 손을 꼬옥 붙들고 “배우지 못한 설움이 죄는 아니다”라며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차츰 공부에 재미를 붙인 나는 3개월 만에 고입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았다. 나는 아내에게 “여보! 고맙소” 하며 머리를 파묻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내도 말없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싹텄고 대입 검정고시, 대학, 대학원까지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993년 나는 야학교를 설립했다. 나처럼 가난 때문에, 혹은 갖가지 형편 때문에 공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 배움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90세가 가까운 할머니도 계시고, 주경야독으로 공장에서 일하면서 어렵게 공부하는 청소년들도 온다. 지금까지 천여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한글도 깨우치지 못했던 어르신들이 글을 읽고, 손수 은행에 가서 통장도 만들고 스스로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등교하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감개무량함을 느낀다.

2008년부터는 대안학교를 설립하여 정규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위기의 청소년들도 맡아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출석조차 안 하는 애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데려다놓고, 그러면 또 도망가고…. 그렇게 일년 정도 지나면 열심히 공부를 한다. 졸업할 때는 졸업식장이 온통 눈물바다가 된다. 그리고 자기를 붙잡아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 때면, 내가 방황할 때 붙잡아준 아내 생각이 난다.

지난날 아내가 그토록 믿고 기다려주지 않았다면 나에게 이런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아내와 나는 중년이 되어 마주하고 있다. 아내는 40대 초반에 큰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아야 했다. 아내가 입원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된 나는 항상 받기만 하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내가 퇴원한 후, 나는 아내에게도 공부하라고 독려했다. 그렇게 검정고시에 합격한 아내는 올해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는 대학생이 되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게 죄가 아니라, 방법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환경 탓으로만 돌리던 나약한 내 삶을 바꿔준 진정 용기 있는 아내. 아내가 있었기에 나는 살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아내를 만난 나의 삶에 감사한다. 아내야 사랑하는 나의 아내야.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닥종이에 혼합 채색. 65×52cm. 2008.

지금 소중한 나의 친구도

처음엔 낯선 사람이었다

이태희 30세. 직장인.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4년 전, 나는 일본으로 향했다. 똑같은 일이라면 외국에서 한번 해보고 싶었다. 일본 회사에 입사하여 신입 사원 공동 수련회에 가게 되었다. 장소에 도착한 후 같은 방을 쓰게 된 사람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목소리가 밝고 활발한 그 친구와는 동갑이었고, 취향도 비슷해서 우린 급속도로 친해졌다.

첫날부터 힘든 일정을 소화한 우리들의 마지막 코스는 목욕탕이었다. “등 밀어줄까?” 그 친구는 스스럼없이 등을 밀어주겠다며 다가왔다. 일본 사람이 선뜻 다가와 등을 밀어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어서 놀랍고 고마웠다. 나는 보답으로 그 친구에게 양 머리 수건을 만들어주었고, 그 친구는 만드는 법도 가르쳐 달라고 하며 주위에 있던 다른 친구들도 데리고 왔다.

두 번째 날은 호된 산행 훈련. 나는 그날 모든 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몸져누워 버리게 되었다. 집 떠나 다른 나라에 온 지 며칠 안 되었는데 고열로 아파 눕게 되니 왠지 모르게 그리움이 밀려왔다. 복받치는 슬픔에 서러워하다 잠이 들었는데, 얼마쯤 지났을까? 방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내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는 다시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때 참 신기하게도 조금 전까지도 추웠던 침대가 갑자기 따뜻해져오는 것이 느껴졌다.

일본을 동경해왔지만 처음엔 많은 것이 힘들었다. 일본어도 서툴고, 일본 사람들이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용기 있는 선택이었지만, 막상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따듯하게 다가와준 그 친구를 보며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수련회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만남을 이어갔다. 당시 회사에는 원리, 원칙을 따지며 나를 싫어하는 여직원이 있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 때면 나는 그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 친구는 언제나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었고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일본의 기본 예절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들 등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지혜로운 조언들을 해주었다.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장지에 혼합 채색.

장지에 혼합 채색. 53×45cm. 2010.

일본은 친한 사람과 안 친한 사람의 경계가 확실하다. 힘든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의 차이가 확실해서,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것을 하면 굉장히 큰 실례로 여긴다. 그런데 그 친구는 힘든 얘기를 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어 소박하게 사는 것이 꿈인 친구, 하지만 작은 만남도 소중하게 가꿀 줄 아는 그녀에게서 내가 느낀 것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넉넉하고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일본에서 2년 좀 넘게 일을 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도 그 친구와 여전히 연락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 친구를 위해서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함이 많다. 언젠가 한국에 오면 이번엔 내가 많이 돌봐주고 싶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낯선 사람과의 만남의 연속일 것이다. 지금 잘 알고 지내는 누군가도 처음엔 낯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첫 만남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계속해서 낯선 이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 낯선 첫 만남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던 내 친구. 힘든 상황의 누군가에게 먼저 건네는 작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걸 알게 해준 그 아이에게 고맙다.

만남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안수경 Ahn Studio 대표, 미술칼럼니스트

몇 년 전 지하철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 경미를 만났다. 나는 그 친구 앞에 서 있었고 앉아 있었던 내 친구는 책을 읽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나를 알아본 것이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참 많이 반가워했다. 하지만 서로 행선지가 다르고 약속도 있는 상황이어서 전화번호만 주고받고 헤어졌다.

경미는 전공이 비슷했던 영미와는 일 때문에 자주 사회에서 만나는 상황이었나 보다. 그런데 영미는 또 우연히 신원이를 만났다. 신원이는 꽤 오래전에 미국에 간 친구이고 그래서 나와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최근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정말 우연히 길에서 영미를 만났고 신원이는 나를 궁금해했다고 했다. 이 우연한 만남 때문에, 경미와 영미 때문에 나는 그동안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했던 신원이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신원이가 더욱 반가운 것은 사실 상희 때문이었다. 신원이는 미국에서 상희와 왕래를 하며 지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민을 간 상희와 나는 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긴 지 20년쯤 된다. 그동안 그토록 연락이 닿기를 원했었지만 다시는 소식을 알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했던 상희와 다시 연락이 닿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꿈만 같았다. 우리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상희와 나와의 만남은 더 큰 만남의 준비 단계일 뿐이었다.

회사일로 미술 전시회에 갔다가 나는 또 뒤에서 “너, 안수경이지?” 하는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뒤돌아보니 초등학교 동창 미경이었다. 미경이는 자녀들의 미술 교육 차원에서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미경이는 그날 저녁에 전화를 했고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한두 달쯤 지났을까? 상희가 한국에 잠깐 온단다. 그것은 상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했다. 아, 이렇게 척척 맞아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인가? 반창회를 할 만한 연락망이 바로 얼마 전의 모든 우연한 만남으로 준비가 된 것이다.

졸업한 지 벌써 30년. 우리는 서로 몇몇 친구들과만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우연한 만남들이 하나를 캐면 줄줄이 따라 나오는 고구마처럼 서로 이어졌고, 상희가 20년 만에 한국에 온다는 소식은 우리가 만나야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라고 말한다. 정말 우리가 겪은 이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의 이 만남을 위해 예정된 과정이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우주는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에겐 살아가는 날만큼의 많은 만남이 있었다. 그 많은 만남 속에서 정말 멋진 우주의 어떤 힘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 같다.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50×72.7cm. 2010.

우리는 함께 해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있었을까

김영지 26세. 어린이집 교사.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

나에겐 언제나 떠올리면 마음이 훈훈해지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고등학교 동창 지혜다. 지혜를 처음 본 건 학기 초 토론 시간이었다. 어찌나 말이 논리 정연한지 ‘쟤는 대체 누구야?’ 하며 궁금했다. 지혜와 친해진 건 기숙사에서였다. 그 당시 기숙사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감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는데, 지혜는 자원해서 밤새 각 층을 돌면서 점호를 하고 다음 날도 일찍 일어나 기상 음악을 틀어 친구들을 깨워서 등교를 시키고 나서야 기숙사를 나오곤 했다. 나는 지혜를 도와주고 싶어서 “뭐해?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물었고 자연스럽게 기숙사 일을 함께 했다.

그게 고마웠던 것일까. 지혜가 나를 집에 초대했다. 지혜는 집에 친구를 초대한 것은 처음이라며 쑥스러워하였다. 그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편찮으셔서 거동하기 힘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목욕탕에서 일하시는 어머니, 두 동생, 그리고 실직하신 아버지. 언제나 적극적이던 지혜의 가정 형편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더 놀라운 건 지혜였다. 지혜는 밝은 얼굴로 가족들을 소개시켜주었다. 나는 그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미안하기도 하면서, 고맙기도 하면서 얼떨떨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맏딸인 지혜는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가정을 돕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네가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주변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이렇게 할 수 있어서 좋다, 감사하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게다가 공부 잘하는 아이, 안 하는 아이, 두루두루 친구의 폭도 넓었다. 지혜를 중심으로 봉사 단체가 만들어질 만큼 활동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선배들조차 고민 상담을 하러 올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우린 고3이 되었고, 지혜는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과외 선생님께 지혜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논술과 면접 과외를 무료로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정말로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해주셨고 얼마 뒤, 지혜는 수도권 대학의 법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 이후 각자 다른 대학에 입학하고 학업에 매진하느라 바빠 반년 정도 만나지를 못했다. 그사이 나에겐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들이 닥쳐왔다. 경제적 문제, 가족과의 문제, 학업에 대한 부담감 등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대학 입학 후 처음 사귄 남자 친구와도 헤어져 마음도 많이 약해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숨쉬기가 힘들고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공황장애와 대인 기피 증세였다.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장지에 혼합 채색.

53×45cm. 2009.

그러던 와중에 지혜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지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취방에 들러주었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불면증에 시달려서 늦은 시각에 연락을 하면 달려와 나를 돌봐주다가 등교했다.

살기 싫다며 울고 화를 내도 오히려 자기에게 화를 더 쏟아붓게 해주었다. 말을 하면서 풀 수 있도록 유도를 해준 것이다. 불안해하고 초조할 때마다 과거에 좋았던 추억들을 이야기해주고 “너는 할 수 있어, 괜찮아질 거야”라며 격려해주었다. 그러한 따듯한 보살핌 속에서 나는 점차 회복되어갔고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다.

지혜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지혜는 로스쿨에 합격했다. 지혜는 늘 사람을 사랑하는 법관이 되고 싶다고 말해왔다. 지혜라면 그 꿈을 이룰 거라고 믿는다. 사랑해, 고마워, 지혜야~^^.

당신의 뒷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백영기 53세. 직장인. 울산시 남구 신정4동

이십 년을 함께했는데, 이제 정년을 맞이해 새로운 세계로 떠나시는 당신. 가는 이의 발걸음은 가벼운데 함께한 추억이 많은 저는 보내기가 힘이 듭니다.

이십 년 전, 저는 당신보다 한 달 먼저 입사를 했었습니다. 처음 만난 당신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자그마한 체구와 동안(童顔)으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늘 웃으면서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모습에 끌렸고, 점차 형, 동생으로 편하게 지내게 되었지요. 그렇게 함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재작년 여름, 십 년 전에 그만둔 동료가 사업이 어려워진 터에 부친상까지 당했습니다. 그 소식에 네 시간의 버스를 타고 가 상여를 메시더니 그 동료에게 “다음에 나 죽으면 네가 내 상여를 메라” 하시곤 돌아올 차비만 남기고 적지 않은 부의를 선뜻 내어놓으셨지요.

직장 특성상 교대로 식사를 할 때도 매번 나이 어린 동료부터 먹게 하고, 당신은 맨 나중이었습니다. 식은 밥과 흐트러진 반찬에 미안해하시는 아주머니께 뜨거운 음식 잘 못 먹는다고 괘념치 마시라고 웃음으로 너스레 쳐주시던 그 마음 어찌 모르겠습니까!

갓 입사한 동료가 아기를 낳아 단칸 셋방에 어려워할 때, 아기 옷 한 벌 준비하시고 그 속에 넣으신 당신 한 달의 용돈 봉투, 산모가 맛난 것 먹고 젖이 잘 돌아야 아기 배 곯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고 잔병치레 없어야 병원비 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술도 안 하고, 버스도 타지 않고 운동한다며 걸어 다니셨지요.

어느 여름 장마 때였습니다. 침수로 차가 다니지 않아 야간 근무 출근이 어려웠지요. 아무도 출근하지 못했을 때 당신은 철길로 돌아 돌아서 출근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오히려 웃음으로 사과를 했지요.

회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동료를 꼭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대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돌아서던 당신이었습니다. 피곤해하는 동료를 대신하여 새운 밤이 얼마이며, 힘들어하는 동료의 주머니에 아무 말 없이 음료수를 살며시 넣어주면서 꼭 잡아주시던 손, 동료의 생일은 꼭 기억하고 챙겨 작은 선물이라도 주시던 배려를 어찌 잊겠습니까.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닥종이에 혼합 채색. 53×45cm. 2009.

이 모두가 당신의 책임감과 성실, 그리고 배려의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작년 말, 당신이 떠나시고 이제 저는 이 회사에서 가장 연장자가 되었습니다. 후배들에게 나도 형님처럼 그런 뒷모습을 남겨줄 수 있을까 두렵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하고 베풀고자 마음먹지만,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당신이 만든 배려의 전통을 후배들이 따라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사회가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항상 당신을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베풀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앙금이 없이 너무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젠 쉴 수 있어 시원하다 하시면서도 아쉬워하는 마음 압니다. 일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몇 번을 당부하시는 마음도 압니다. 남은 이들의 가슴에 좋은 형, 좋은 동생으로, 좋은 인연으로 계속 이어지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좋은 추억만 생각하시고, 건강하시고, 직장 생활하느라 못 하셨던 많은 꿈 다시 시작하여 모두 이루시길 바랍니다.

정년 퇴임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는 김복철님께 올립니다.

내 인생의 반전 가져다준 소중한 인연

강민주 28세. 직장인. 러시아 모스크바 가리발디 거주

2003년 가을이었다. 이제 갓 스무 살, 하지만 나는 엄청나게 지쳐 있었다. IMF 위기 때 집이 부도가 나며 중학교 때부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내가 아무리 바동거려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세상 앞에 나는 너무 작은 존재였고, 희망이라는 것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대학, 아르바이트, 또 홀로 서울 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들키기 싫어 겉으로는 더욱 밝은 척 행동을 했다. 하지만 혼자가 되면 나는 무척 지쳤다. 반복되는 감정 기복과 불면증, 외로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계속되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1학년을 마치자마자 호주로 떠났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3개월간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저녁엔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 바다와 사막으로 미친 듯이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라도 하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나는 내 인생을 뒤바꿔 버린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그분은 내가 청소를 해주는 대가로 다락방에서 무료로 지내게 된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숙을 하고 계셨다. 그곳 미대에 교환 교수로 와 계신 한선주 교수님, 독신이셨던 그분은 그냥 ‘엄마’라 부르라며 친근하게 대해주셨고, 나는 자연스레 살면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교수님은 한국 음식도 해주시고,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셨다. 마음 둘 곳 없었던 내게 그 멀리 타국에서 의지할 곳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7개월 정도 교수님과 함께했고,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에 복학해 당시 광주에 계시던 교수님을 뵈러 갔을 때였다. 교수님은 고향 온 자식처럼 온갖 것을 챙겨주었다. 같이 여행도 다니고, 전시회도 데리고 다니는 교수님을 보면서 “저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호주에 다녀와 잠잠했던 마음이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 있거나 작업을 할 때가 되면 갑자기 우울해지면서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 당시 잠들기 전에 했던 기도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죽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제자가 하고 있다는 마음수련을 소개해주셨고 마음을 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희망이었다.

취업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수련부터 하겠다는 결정에, 모두 걱정했지만 교수님은 달랐다. “마음수련부터 끝내라, 취업이 문제가 아니다”라며, 수련비까지 대주셨다. 나중에 꼭 갚겠다고 했을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마음 깊이 남아 있다.

“이 돈은 나중에 내가 아니라 다른,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갚으면 돼. 아무 생각 말고 우선 마음부터 다스리고 생각하자. 먼저 네 스스로가 행복해야지.”

교수님은 남들이 볼 때 행복해 보이는 자리가 아닌, 진정한 나의 행복을 위해 그렇듯 도와주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수련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기억, 부모님에 대한 원망, 나는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느낀 불안함…. 그렇게 하나하나 버렸다. 남보다 잘살고 싶었지만 그런 조건이 되지 않아 원망하고 나를 포장했던 마음들을 버리며 깨달았다. 나는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 주변을, 세상을, 단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었구나, 참으로 나 자신을 만나본 적이 없었구나….

그렇게 나를 가리던 마음의 때를 닦아내며 나는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했다. 너무나 순수하고 맑고 아름다운 나, 그리고 세상.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나를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감사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나무도 하늘도 감사했다.

나는 바로 교수님께 편지를 썼다.

“마음수련을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는 저를 낳아줬지만 교수님은 저를 정신적으로 성장시켜 준 분입니다.”

나는 지금 모스크바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랑으로 품어주신 교수님 덕분에 나는 지금 새로운 세상에서, 진짜로 숨을 쉬고 살고 있다.

장영모 작. <고향 이야기>

닥종이에 혼합 채색.

53×45cm. 2008.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6)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6)

사냥꾼들에게는 원숭이를 잡을 때의 비결이 있습니다.

손 하나 들어갈 정도로 병목이 좁은 유리병 안에

바나나를 넣어놓는 것이지요. 그리고 원숭이가 잘 다니는 길에 놓아둡니다.

맛있는 바나나를 발견한 원숭이는 병 속으로 손을 넣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나나를 꽉 움켜쥔 채로는 주먹이 빠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손목을 빼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을 때 사냥꾼이 다가옵니다.

빨리 바나나를 놓고 손을 빼면 도망칠 수 있는데,

계속 움켜쥔 채 빼려고 욕심내다가 결국 사로잡히고 맙니다.

 

누구에게나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중요한 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이때 뭔가를 움켜쥐고 있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그것이 실패에 대한 참담한 기억일 수도,

혹은 성공이 준 달콤한 결과물일 수도 있습니다.

상처가 남긴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가진 것을 놓지 않는 나 중심의 판단이라면….

 

남음 없이 내려놓을 때 더 큰 미래가 기다립니다.

후회 없고 아름다운 삶의 출발, ‘내려놓음’이 시작입니다.

책상과 컴퓨터 비우기, 머릿속이 정리된다

정리 문진정

사무실을 둘러보면 한 명쯤 책상이 너저분한 동료가 있기 마련이다. 서류가 넘치고 책들이 쌓여 있고, 쪽지들, 과자 봉지, 커피 잔…. 빈 공간이 거의 없다. 이러한 사람은 산만한 주변 환경 때문에 일에 몰두하기 어렵고 뭔가를 찾아 헤매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므로 일에 실수도 많다.

반면 매번 일이 끝나는 대로 책상을 정리하는 사람은 생산력과 창의력, 일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류 더미를 치우느라 기진맥진하는 것보다 훨씬 안정감을 얻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이 정리가 되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진다. 최근 대기업들이 직원의 업무 효율 향상을 위한 방법으로 ‘책상 정리 정돈’을 내세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캐서린 K. 타깃의 연구 결과, 난잡한 작업 환경에서 일할 경우 심박 수와 혈압 상승, 머리와 어깨의 통증을 일으키기 쉽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해 동료나 부하 직원에게 화를 잘 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깨끗한 책상은 깨끗한 마음을 나타낸다. 매일 5분씩 책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생각을 명확히 하고 현재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서류 정리, ‘우선 박스’ 하나면 끝낼 수 있다

서류는 머릿속의 생각을 종이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서류를 버리면 쓸데없는 잡념도 함께 버려져, 정신 집중에 도움이 된다.

①다 쓴 문구류, 우편물, 포스트잇, 메모는 가능한 자주, 많이 버린다. ②중요한 메시지는 하나의 노트에 정리하고 정기적으로 컴퓨터에 옮겨둔다. ③서류는 ‘불필요한 것’을 구분해 버리고 애매한 서류는 ‘우선 박스’를 만들어 몇 개월 후 버린다. 이렇게 반복하면 중요도를 판단하는 능력이 커진다.

늘어나는 명함, 과거를 버려라

중요한 인맥을 책상 한구석에 어수선하게 방치하는 것은 인간관계를 소홀히 하는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명함 수가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명함은 즉시 버린다. 그와 연관된 성공과 실패의 기억도 함께 버린다면 새로운 만남에 더 충실할 수 있다.

정리 정돈의 사각지대, 컴퓨터를 비우자

컴퓨터 속은 책상과 똑같이 머릿속의 상태를 그대로 표현한다. 컴퓨터의 느린 속도를 탓하기 전에, 바탕화면에 폴더와 파일이 정신없이 늘어져 있지 않은지 살펴본다. 나름의 기간을 정해 하드디스크를 정리하면 오래도록 빠른 속도의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 판단이 어려운 파일은, 종이 서류와 마찬가지로 ‘우선 폴더’를 만들어 보관해 두었다가 몇 개월 후 제일 먼저 버린다. 불필요한 파일만 제거해도 머릿속이 맑아지고 업무 부담이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①바탕화면의 아이콘은 컴퓨터 속도를 떨어뜨리므로 최소화한다.   ②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 사용하지 않는 소프트웨어와 ‘즐겨찾기’는 삭제한다. ③수시로 ‘휴지통’을 비워준다. ④이메일은 바로 답장하여 편지함을 비우고, 3개월간 안 읽은 뉴스레터는 수신을 차단한다.

초록이 주는 긍정과 편안함

책상이 깔끔히 정돈되었다면 근처에 녹색식물을 놓아 보자. 일본과 호주의 심리학자들이 업무 환경과 창의성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책상 근처에 화분을 놓아두면 창의성이 1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분을 두기 어렵다면, 점심시간만이라도 싱그러운 식물을 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

참고 도서 <부자가 되려면 책상을 치워라> 마스다 미츠히로 / 이아소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 캐런 킹스턴 / 도솔

감당키 어려운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지닌 이들에게

이수정 28세.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

어느 날이었다. 수련을 하는데, 불현듯 네다섯 살 때의 일이 눈앞에 떠올랐다. 먼 친척 어른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기억이었다. “예쁘다”며 다가왔던 그 아저씨…. 너무 힘들고 싫었던 기억…. 그 일은 남자들에 대한 깊은 증오를 갖게 했고, 예쁘다는 것은 안 좋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뿌리 깊게 했다. 비로소 나의 모든 행동과 성격이 그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항상 가슴을 움츠리고, 남의 시선을 두려워한 것도, 폭식으로 뚱뚱해진 것도, 모두 그 일 때문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이제 도망치지 않으리라. 나는 당당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버려나갔다. 그 일은 일종의 사고였고, 나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기에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 기억의 사진을 버린 만큼 남자에 대한 증오와 혐오심이 조금씩 사라졌다. 또한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 나는 정말 딴사람이 되었다. 너무 밝아졌다며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외모에도 신경을 쓰게 되고 체중도 돌아왔다. 연애도 시작했다.

누군가 너무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평생 짊어져야 할 것이 절대 아니며, 반드시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마음속에 찍어둔 사진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에 뿌리박혀 나의 성장을 방해했던 그 마음사진들을 털어버린 후에야 나는 진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진짜 어른 말이다.

판타지 소설 중독에서 벗어나다

김하정 15세. 전주 풍남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판타지 소설에 중독되었다. 중학생이던 오빠가 판타지 소설을 빌려 왔기에 슬쩍 훑어본다는 게, 어느 순간부터 푹 빠져들었다. Fantasy. 현실과 동떨어진, 내가 원하는 것만 존재하는 마법 같은 세계가 좋았다.

심각하게 빠지자 부모님이 통제하셨다. 그때부터 새벽에 몰래 읽었다. 길거리에서도, 학교에서도, 매일 네 권 이상 읽었던 것 같다.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공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 내가 여기에 미쳤나 보다’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계속 읽었다. 마음은 그만 읽고 싶은데 그만둘 수 없었다. 내성적이었던 성격이 더 심해졌고 현실 세계의 모든 일에 불만이었다.

6학년 때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 가게 되었다. 짧은 인생을 떠올려 버리다가 판타지 소설에 빠졌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밤늦도록 혼자 집을 지켰다. 외로움, 현실의 불만족을 환상의 세계로 채우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환상의 세계는 없는 것이었다. ‘허튼짓을 했구나’ 그때 알았다.

요즘도 판타지 소설을 읽기는 하지만 없으면 생각도 안 난다. 밤샐 일이 없어서인지 피부도 좋아졌고 몸도 가뿐해졌다. 목표가 없고 주변에 무관심했는데,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도 관심이 가고 선물도 해주고 싶다. 일본어 통역가라는 꿈도 생겼다. 잡생각도 확실히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사춘기도 별 탈 없이 보낼 것 같다.ㅋㅋ

가슴 시원해지면서 코가 뻥 뚫리다

장진익 33세. 직장인.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

나는 항상 코가 막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비염 증세가 있었다. 15세 때부터였는데, 어느 날부턴가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그래서 입으로 숨을 쉬었는데 답답하고 머리까지 멍했다. 조금 지나면 괜찮겠지 하며 무시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간 것이 20대 중반 때였다. 콧구멍 안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이 막혀 있고, 콧구멍 안이 부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을 때는 잠깐 괜찮아지다가, 조금 지나면 다시 똑같아졌다. 답답한 마음에 유명한 이비인후과를 다녀 봐도 똑같았다. 나중에는 아예 포기를 하게 되었다.

코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를 정도로 생활에 지장이 크다. 일단 집중을 잘하지 못했다.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엉뚱한 대답을 하니 사람들도 점차 멀어지는 것 같았다.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 이뤄본 것도 없고, 자신감도 없었고, 세상에 당당하지 못했다. 이런 내 자신이 싫고 괴로웠다. 그 무렵 마음수련을 알게 되어 살아온 삶을 떠올려 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가 지병으로 초등학교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시느라 너무 바빴다. 어린 나이에 관심도 받고 싶고 사랑도 많이 받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되지않았다. 거기다 “네가 장남이니까 이렇게 해야지” 하는 얘기만 들으니 불만이 많았다. 성격도 내성적이라 모든 감정을 누르는 편이었다.

객관적으로 나를 볼 수 있고 이런 마음들을 버릴 수 있는 게 너무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2주인가 지났을 때였다. 속에 있는 돌멩이가 빠져나간다는 느낌이더니, 코가 뻥 뚫리는 것이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외로움, 꾹꾹 눌러놓은 화와 울분, 위축되어 있던 마음들이 몸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허리, 어깨, 머리 안 아픈 곳이 없었는데, 마음을 쌓아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늘 긴장한 탓에 무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주어 신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코가 뚫렸다가 막히고, 다시 뚫리는 과정이 반복되더니 점차 숨을 제대로 쉬는 날들이 길어졌다. 숨이 편안하니 가슴이 편안하고, 몸이 이렇게 편한 거구나, 깜짝 놀랄 정도였다.

식습관도 돌아보게 되었다. 가공식품을 많이 먹고 항상 빨리 먹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활동량에 비해서 너무 많이 먹었다. 과하게 먹으니 산만하고 졸리게 되고, 집중력도 당연히 떨어졌다. 이런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니, 저절로 천천히 먹으려고 노력했고, 가공식품도 되도록 멀리 했다. 이제 그런 것쯤은 조절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서 수련을 병행하자 점차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생활에 활기가 생겼다. 막힌 코가 뚫리니 집중력도 좋아지고, 쉽게 포기를 하는 성격이었는데, 못할 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노력하니 끝까지 해내는 일들도 생겼다. 나에게 생긴 변화들이 지금도 난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살아 있는 세상 -참인 세상과 하나가 되어 세상 나면

살아 있는

세상

구름 한 점이 없고

맑은 하늘에 헤아리지 못할

수많은 별만 말없이 떠 있구나

그 옛날 옛날에도 있었고

말 많은 사람의 역사에도

그 별이 말없이 그냥 있었다

말 많던 사람은 세월에 잡아먹히고 말았구나

천하에 있는 천체와 만상만물도

언젠가는 세월에 잡아먹히고 마는구나

인간 마음의 세계에 있는 이야기이구나

세상에는 일체가 살아 있는 존재이구나

세상이 되어보면

세상과 하나가 된 것은

모두 다가 다 살아 있구나

참인 세상과 하나가 되어 세상 나면

인간의 삶 자체가 허상이다  

또 망상에 산다고 우리는 흔히들 들어왔고

언젠가는 구세주가 와서

우리를 구원해준다 한다

인간이 바른 세상에 살지 못해서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마음을 닦으라

비우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참인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줄 착각하고 사나

세상과 마음의 세계가 겹쳐져 있으니

자기가 만든 하나의 영화 필름 속에 살고 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하나의 필름을 제작하여

자기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어

세상을 사진 찍은 필름 속에 살고 있다

가령 오늘 아침 먹었던 것을 생각하여 보라

내 마음속에 내가 앉아 있었던 곳과

같이 먹었던 것도 사진이 찍혀 있고

세상에 있었던 것이 아닌

사진 속인 마음속에 있지 않았는가

아침 먹고 하루 종일 했던 것도

내 마음의 필름 속에 있지 않았는가

나는 세상 있었던 것이 아닌

나의 마음속에 있지 않았는가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하여 보면

사진 속에 있지 않았는가

세상과 이 순간에는 마음속과 겹쳐져 있으니

세상 사는 줄 인간은 착각하고 산다

만일에 세상과 하나가 되어 세상에 살면은

그 사진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인간 마음은 사진을 찍어 담는 필름이요

세상 마음에는 사진이 찍히지 않는다

인간이 이 사실을 몰라

세상에 나는 구원이 되지 않는다

이 사진의 세계 안에서는

고통 짐과 삶 죽음과 좋고 나쁘고 생로병사

과거 미래 현재가 있으나

참인 세상과 하나가 되어 세상 나면

이런 것들이 없다

영원불변의 생명 자체라

글, 그림 우 명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등 다수가 있습니다.

-完全なる世界とは -神仙の世界


完全なる世界とは

 

完全であるということは、死ぬことがないということであり、

永遠に生きる?が完全なる?である。

この世が、“完全なる一つそのもの”となることは、

人?が大自然の心に復活してこそ?現する。

言い換えれば、神なる宇宙の心に生まれ?わってのみ、自他の?別がなくな り、

すべてが一つとなり、?理として、死ぬことなく生きられるようになる。

そうなってこそ完全なのだ。

人間が生老病死から?け出ることも、

?像である自分自身がなくなってこそ果たされる。

この世は完全であるが、人は自分の心があるためにこの世と一つになれずにおり、

自分の心があるために完全ではないのである。

この世はすでに完全であり、すでに悟っており、完成している。

人間の心を神なる大宇宙と一つにすれば、本?の世界に復活できる。

そして、そうしてこそ世界は完全なる世界となるのだ。

神仙の世界

 

紅松が一?となって?がる

山の中には湖がある

互いに背比べをするかのように天高く

幹を伸ばした紅い松たちがじつに見事だ

樹木(きぎ )が育つには長い年月が必要だが

樹?は?百年になるのだろう。香りも素晴らしい

湖の上には、あの高く?しい岩間から

?が激しく流れ落ち

名の知れない鳥の群れが空高く飛び回っている

紅松の枝の上では、物?かなコウノトリたちが

それぞれ腰を下ろして暇をつぶしていて

晴れた空に?っ白な雲が景?をさらに際立たせる

限りなく?い水の中には

見知らぬ魚たちが往?し

?みとも憂いとも無?の自然を友にしようと

人は時おりここを訪ねる

?しい山道に沿ってしばらく行くと

もはや住む人のいない古びた家がある

百年以上にもなる家のようだ

ここには誰が住んでいたのだろうか

ひとり考え山を下っていくと

ノロジカたちが暇そうに草を食んでいて

山鳥がさえずり?けている

山頂から流れ落ちてくる水の音は??しいが

水は限りなく?らかだ

しばらく下りていった所に

たくさんの人?が寄り集まって暮らしている

まるで神仙の世界から外界に下りてきたかのようだ

自分の心にある世界は娑婆、衆生の世界であり

自分の心がこの世と一つになり

自分が生まれた世界は神仙の世界なのだなあ

文と? ウ?ミョン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

10년간 이웃에게 나눠준 찐빵 65만 개_ 강봉섭 할아버지

아직은 어두운 새벽 6시. 대전시 중구 대전노인복지관 옆 가건물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강봉섭(80) 할아버지가 찐빵을 만들고 있다.
밀가루, 베이킹파우더, 소금, 이스트, 물로 반죽하고, 앙꼬를 넣어 큰 솥에 10분 정도 쪄내자 따끈따끈한 찐빵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빵은 그날그날 양로원, 요양원 등에 배달이 된다.

취재 정하나, 사진 홍성훈

강봉섭 할아버지가 하루도 빠짐없이 찐빵을 만들어 나눈 것은 2001년 경로당 노인회장직을 맡고서였다. 몸이 불편한 분들을 병원에 데려다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가뜩이나 기운 없는 노인들이 더욱 지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 지켜보다 생각해낸 것이 찐빵이었다. 당시 밀가루 한 포대 가격이 8천 원. 앙꼬까지 계산해도 3만 원 정도면 육칠 백 명에게 빵이라도 나눠줄 수 있겠다 싶으셨단다. 강할아버지는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처음 찐빵을 쪄내어 나눠주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아, 옛날 생각나네.’ ‘배고픈 시절에 먹었던 빵이네’… 작은 찐빵 하나에,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나 같은 늙은이도 뭔가 할 수 있구나 자부심이 들더라고.”

강할아버지는 “만날 자식들이 사오는 것만 받다가 직접 빵을 만들어서 주니까 자꾸 해주고 싶은 의욕이 생기더라”고 한다.

그 후 점점 요양원, 양로원, 어린이 보호센터, 경로당, 파출소 등으로 그 대상이 늘어났다. 한 달에 한두 번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기도 하고, 2007년에는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한 태안으로, 숭례문 화재 사고 후엔 복구 작업 현장으로 큰 솥과 찐빵을 준비해 달려갔다. 이렇게 저렇게 지금까지 나눠준 찐빵만 해도 65만 개나 된다.

“빵을 호호 불면서 먹는 모습을 볼 때의 기쁨은 나밖에 모를 거야. 내가 정성 들여 만든 빵을 맛있게 먹어주니 감사한 거지.”

1932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강봉섭 할아버지는 늘 이웃과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고 한다. 먹을 것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었고, 언제나 웃음이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찐빵을 나눠줄 때면 그 시절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이 생각 나 가슴 한 켠이 짠해져 온다고 한다.

10년 동안 찐빵을 쪄서 나눠주는 일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한 달에 드는 재료비만 90~110만 원 정도. 처음에는 폐지와 재활용품을 수거해서 충당했지만, 점차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일이었기에 부족한 부분은 늘 저절로 채워졌다.

“신기하게도 비용 걱정을 할 때면 도움을 주는 후원자가 나타나곤 한다”는 할아버지는 “이 일을 하면서 뜻이 있으면 언제나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신다.

요즘엔 찐빵 제조 기술도 나눠주고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성심성의껏 가르쳐주며 “좋은 일을 하며 살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사랑의 찐빵 2호점, 3호점을 냈으면 하는 바람도 내비치셨다.

“나는 무조건 주는 사람이다, 하면 걱정이 없잖아. 욕심을 부리는 순간부터 괴로워지는 거지. 앞으로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한없이 만들어서 나눠주고 싶어.”


하루 평균 200개 정도의 찐빵을 만든다.
포실하게 쌓인 모습만 봐도 모든 피로가 싹 가신다고 하신다.
대한노인회 대전광역시 동구 지회장을 맡고 있는 할아버지는 이곳 직원들 뿐 아니라,
건물의 이웃들, 방문객들에게도 항상 빵을 나누어준다.

비로소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다

비로소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다

송순영 39세. 경기도 안성시 봉산동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파출부, 막노동을 하면서 4남매를 키우셨다. 엄마는 항상 ‘힘들다, 지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고, 그럴 때마다 난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정신 차리고 살자’고. 당시 내 인생의 목표는 돈 많이 벌어서 잘사는 거였다.

 

그러다 스물두 살 때 연애를 하게 되었다. 길을 걷는데 나를 보고 쫓아온 그는 고위직 집안에다 유학도 다녀온 너무나 좋은 조건의 남자였다. 그 앞에 서면 내 속의 깊은 열등감이 고개를 쳐들었다. 일단, 학벌이라도 따고 싶었다. 당시 직장을 다녔던 나는 어렵사리 야간 전문대학에 진학했고, 5년의 연애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해 보자. 같이 노력하면 잘될 거야.” 서로 잘해보자는 거였지만, 내겐 큰 상처였다. 야간 전문대학도 얼마나 죽을 둥 살 둥 다녔는데…. 그가 야속했다. 인연이 아니다 싶어, 그날로 이별을 고했다.

너무나 괴로운 마음으로 보낸 6개월 후, 우연히 친구를 통해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골프장 운영을 하던 남자였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는 그럴싸한 모습에 마음이 기울었고 연애를 시작했다. 처음 남자 친구 집에 인사 간 날, 부모님은 쪽지 한 장을 꺼내시며 ‘며느리의 30가지 조건’을 쭉 읽으셨다. ‘안경 쓴 며느리는 안 된다, 두 부모님 밑에서 자라야 한다…’ 등등 까다로운 조건들이었지만, 이미 큰 상처를 받은 나로서는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누구보다 잘 살 수 있다며 오기로 결혼을 강행했다. 하지만 주변의 우려대로 기막힌 상황이 펼쳐졌다. 남자는 소위 ‘마마보이’에다 부모님께 기대 살며 눈치만 보는 무능력한 남자였다. 결국 5년 만에 이혼을 했고, 실패한 인생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즈음 직장 동료로부터 우연히 마음수련에 대해 들었다. 그는 시골 아저씨 같은, 해맑은 모습이 늘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다. 내 마음도 편안해질 수 있을까….

수련을 하며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지 내 이상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다닐 뿐이었다. 열등감과 콤플렉스로 채워진 좁디좁은 마음이었기에 어떤 사랑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끔찍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수련을 알려준 그 직장 동료는 나를 대신해 혼자 계신 어머니를 살뜰히 돌봐주었고, 덕분에 나는 수련에 정진할 수 있었다.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지나온 상처와 열등감을 버리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마음부터 다스리라고 말해주던 사람.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그가 프러포즈 했을 때,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그 과분한 사랑이 차고 넘쳐서…. 남편은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하지만 나에겐 은인이자 스승 같은 존재다. 그를 만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었고, 참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대요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대요

박강우 22세. 서울대 산업공학과 2학년

고3 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살이 쪘었다.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조금만 방심을 하면 살이 쪄버리는 체질인데, 그때는 공부에만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살이 쪄버린 것이다. “너 왜 그렇게 살이 쪘니, 아저씨 같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잘생겼다는 소리를 듣던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고, 외출할 때는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녔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헬스클럽에 다니며 두 달간 20킬로 정도의 살을 뺐다. 그럼에도 이전에 가졌던 상처들은 그대로 내 속에 있었다. 다시 살이 찔까 봐 불안해서 매일 아침마다 체중을 쟀고 조금만 몸무게가 늘어도 당장 뛰어나가서 운동을 했다.

더 이상 아저씨 같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콤플렉스는 계속되었다.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를 했기에 합격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주변에 다재다능한 친구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진짜 잘하는 애들 앞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좌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누가 농담으로라도 단점을 얘기하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서 더욱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패션 잡지를 보며 연구하고, 멋진 옷을 찾으러 동대문에도 돌아다니고, 신상품을 사는 데 많은 돈을 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게 세팅이 되지 않으면 집 밖에 나설 수가 없었다. 내 차림 중 어디 한구석만 마음에 안 들어도 짜증이 밀려오고 사람을 만나는 데 자신이 없어졌다. 옷을 자주 사도, 언제나 입을 옷은 없었다. 매일 새로운 이미지로 나를 포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학생 마음수련 캠프에 가게 되었다. 수련을 하며 감추려고만 들었던 나의 콤플렉스를 하나하나 꺼내어 볼 수 있었다. 고3 시절 살이 쪘을 때 사람들에게 들었던 충격의 말들, 나를 무시하는 듯한 사람들의 눈빛, 위축되었던 모습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버려갔다.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한순간 우리 모두의 근원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나로서는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고, 엄청난 변화도 가져왔다. 나 따로 세상 따로일 때는 내가 돋보여야 하기 때문에 힘들었는데, 나라는 틀이 깨지는 순간 나와 세상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고, 모든 게 하나였다. 그 안에 콤플렉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더 이상 꾸미지 않아도 당당할 수가 있었다. 외모에 대한 강박관념, 다이어트에 대한 부담조차 버리고 나니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스스럼없고 많이 편해졌다.

한번은 친구들에게 나에게는 이런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걸 감추기 위해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되게 차가운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냄새가 난다는 둥 하며 공감해주었고 편안해했다. 콤플렉스를 드러내면 무시를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친구는 예전엔 인상이 날카로웠는데, 수련을 하더니 인상이 둥글둥글해지고, 눈빛도 선해졌다고 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인상도 부드럽게 바뀌는구나 싶다.

수련을 하다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짜는 자기가 가짜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치장을 해서 드러내려고 하지만, 진짜는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난다고. 허울, 허례허식, 허상의 세계 속에서 살던 나는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가짜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그런 가짜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로소 진짜의 세상에서 진짜 내 삶을 사는 기분이다.

콤플렉스, 깨어나야 할 꿈일 뿐

콤플렉스, 깨어나야 할 꿈일 뿐

차재성 사진 홍성훈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나름 생긴 건 괜찮았다. 하지만 멀쩡한 겉과 다르게 사람들 앞에서 말이라도 할라 치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 아무것도 아닌 말에 상처받고, 심장은 쿵쿵 뛰고 말꼬리도 쏙 기어들어갔다. 어린 시절,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면 가게 앞에 쭈뼛쭈뼛 서 있다가 그냥 돌아오기 일쑤였다. 가게 주인한테 “이거 주세요” 말하는 것이 왜 그리 힘든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엉뚱한 걸 사오는 일도 많았다. 모심는 날, 엄마를 따라가면 맛있는 못밥을 먹을 수 있는데도 그 길을 차마 따라나서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난 언제나 꾸어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마치 세상과 뚝 떨어진 외딴섬 같았다.

 

그렇게 작아지다 못해 쪼그라지는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준 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우연히 시인 이상의 작품을 본 순간, 마치 ‘부조리’한 내 모습을 발견한 듯 반가울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려, 인간의 모습은 원래 이리 복잡하고 부족한 것. 내가 잘못된 건 아니여.”

그렇게 문학에 취한 나는 대학 같은 덴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공부를 못해서, 환경이 안 따라줘서라기보다는 필요 없기 때문에 안 가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간혹 “몇 학번이세요?” 하고 물으면 슬그머니 문학 이야기로 얼버무리고 책의 한 구절로 튕겨냈다. 속으로 ‘대학 나와 봤자 별 볼 일 없으면서’ 하며 ‘썩소’를 날렸다. 집에 들어오면 방 안 벽면 가득한 책들이 나를 반긴다. 저 책들은 나의 교양과 지적 수준을 드러내는 것, 저것이면 충분했다. 대학 졸업장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울한 걸까.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대학생들 앞에선 어쩔 수 없이 기가 죽고, 꿈을 꿔도 대학에 떨어지는 꿈을 꾼다. 그런 내가 싫어 매일 술을 마셨다. 하지만 술에서 깨어나 다시 쪼그라든 내 모습을 발견할 때의 참담함이란…. 그야말로 아침에 뜨는 해조차 절망스러웠다. 매일 술을 마시고 엉망진창으로 사는 나를 직장에서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나는 그렇게 믿지 못할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못났다’는 생각이 화석처럼 굳어져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만난 마음수련. 그때가 내 나이 마흔둘이었다.

가짜라고 했을 때 희망이 생겼다

수련을 하며 앨범을 들추듯 내 인생을 살펴보니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학예발표회 때였다. 1인극을 해야 했는데 연습을 제대로 못 해 결국 무대에 섰다가 중간에 도망 나왔던 창피한 기억. ‘아, 그 기억의 사진 때문에 내가 사람들 앞에만 서면 긴장했구나.’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나는 그 기억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무엇 하나 남들보다 잘난 것이 없는 상태에서 택했던 문학과 술. 하지만 그럴수록 가난한 가정환경과 학력, 대인 기피로 인한 콤플렉스의 늪에서 더욱 허우적거렸고 헤어나질 못했다.

문학을 했던 속마음도 그대로 드러났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인간이야!” 하며 정신세계를 추구한답시고 나는 다른 속물적인 인간들과 다르다며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했다. 결국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에다 아주 못난 놈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면 너무 힘들어서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내가 그보다 한 수 우위에 있다는 걸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문학을 하면서 냉소적으로 변해간 것도 그 이유였다. “당신도 어딘가 못난 구석이 있을 거야. 당신도 별 볼 일 없네….” 그렇게 단정하고 치부해야 내가 존재할 명분이 생기기에. 나도 세상도 속이고 있었구나, 나는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워 그 모든 마음들을 버리고 비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 차의 헤드라이트를 켜면 환해지듯이, 내 마음에 빛을 비추니 지저분한 부유물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천만다행인 건 그동안 그렇게 살아온 나는 가짜이고 나의 본래는 무한대 우주라는 것! 결국, 콤플렉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나 역시 버리면 되는 거였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것이 꿈처럼 없는 세상이었음을 아는 순간, 희망이 생겼다. 간밤의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꿈이었으면 좋겠습니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김춘수의 ‘꽃’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였다. 세상과 전혀 교감을 못 한 나로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란 시구가 생경할 뿐이었다. 꽃을 봐도 예쁜지 몰랐고, 오히려 “너는 뭐하려고 이 세상에 나왔니?” 하며 못마땅해했다. 그만큼 내 마음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생기 있는 봄과는 겉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봄이 좋고, 봄이 기다려진다. 꽃을 보면 “너는 왜 이리 예쁘게 생겼냐, 반갑다~!”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도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몇 층 가십니까?” 하고 먼저 묻는다.

명절 때면 가족들 만나기가 불편해 직장에서 숙직을 도맡아 하는 일도 이젠 없다. 아직도 가정을 갖지 못한 것이 부모님과 동생들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명절 때면 제일 먼저 찾아뵙고 집안일도 돕는다.

나도 모르게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어느새 나는 세상과 교류하고 있다. 망각의 강을 건넌 듯, 열등감에 주눅 들고 살았던 때가 언제 있었나 싶다.

지금 콤플렉스로 인해 힘드신 분들이 있다면 묻고 싶다. “그것이 꿈이었으면 좋겠습니까?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콤플렉스라는 악몽에서 깨어나 실제 삶을 누릴 수 있다.

차재성(52) 님은 전북 전주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국민연금공단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위장을 보호해요, 연근 파래전

연근과 파래는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을 예방하고 진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파래는 추운 겨울이 제철이지만 구할 수 없을 때는 파래가루를 활용해도 좋다.
또 새콤달콤하게 무쳐도 좋지만 이렇게 전을 부치면 쫀득쫀득해지며 맛과 향이 더 좋아진다.

재료 준비

연근 1개(큰 것), 파래 1/2컵(한 타래), 녹말·밀가루 각 1큰술씩, 소금·후춧가루·쌀눈유(현미유)·밀가루 조금씩

만들기

① 연근은 껍질을 필러로 깎고 얇게 저며 썬 것 10장을 남기고
② 나머지 연근은 강판에서 간다. 파래는 물속에서 흔들어 씻어 물기를 짠 다음 짧게 썬다.
③ ②의 연근에 파래와 녹말, 밀가루, 소금, 후춧가루를 넣어 섞는다.
④ 팬에 쌀눈유를 두르고 ③을 한 숟가락씩 떠놓은 다음 ①의 얇게 저민 연근의 한쪽 면에 밀가루를 묻혀 위에 올리고 손으로 살짝 눌러 앞뒤로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도서출판 소풍) :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펴낸 면역력을 높이는 요리 레시피.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맛도 좋고, 칼로리는 낮으면서 발암물질을 해독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