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함께 해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있었을까

김영지 26세. 어린이집 교사.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

나에겐 언제나 떠올리면 마음이 훈훈해지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고등학교 동창 지혜다. 지혜를 처음 본 건 학기 초 토론 시간이었다. 어찌나 말이 논리 정연한지 ‘쟤는 대체 누구야?’ 하며 궁금했다. 지혜와 친해진 건 기숙사에서였다. 그 당시 기숙사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감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는데, 지혜는 자원해서 밤새 각 층을 돌면서 점호를 하고 다음 날도 일찍 일어나 기상 음악을 틀어 친구들을 깨워서 등교를 시키고 나서야 기숙사를 나오곤 했다. 나는 지혜를 도와주고 싶어서 “뭐해?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물었고 자연스럽게 기숙사 일을 함께 했다.

그게 고마웠던 것일까. 지혜가 나를 집에 초대했다. 지혜는 집에 친구를 초대한 것은 처음이라며 쑥스러워하였다. 그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편찮으셔서 거동하기 힘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목욕탕에서 일하시는 어머니, 두 동생, 그리고 실직하신 아버지. 언제나 적극적이던 지혜의 가정 형편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더 놀라운 건 지혜였다. 지혜는 밝은 얼굴로 가족들을 소개시켜주었다. 나는 그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미안하기도 하면서, 고맙기도 하면서 얼떨떨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맏딸인 지혜는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가정을 돕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네가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주변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이렇게 할 수 있어서 좋다, 감사하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게다가 공부 잘하는 아이, 안 하는 아이, 두루두루 친구의 폭도 넓었다. 지혜를 중심으로 봉사 단체가 만들어질 만큼 활동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선배들조차 고민 상담을 하러 올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우린 고3이 되었고, 지혜는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과외 선생님께 지혜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논술과 면접 과외를 무료로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정말로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해주셨고 얼마 뒤, 지혜는 수도권 대학의 법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 이후 각자 다른 대학에 입학하고 학업에 매진하느라 바빠 반년 정도 만나지를 못했다. 그사이 나에겐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들이 닥쳐왔다. 경제적 문제, 가족과의 문제, 학업에 대한 부담감 등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대학 입학 후 처음 사귄 남자 친구와도 헤어져 마음도 많이 약해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숨쉬기가 힘들고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공황장애와 대인 기피 증세였다.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장지에 혼합 채색.

53×45cm. 2009.

그러던 와중에 지혜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지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취방에 들러주었다. 내가 먹고 싶다고 하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불면증에 시달려서 늦은 시각에 연락을 하면 달려와 나를 돌봐주다가 등교했다.

살기 싫다며 울고 화를 내도 오히려 자기에게 화를 더 쏟아붓게 해주었다. 말을 하면서 풀 수 있도록 유도를 해준 것이다. 불안해하고 초조할 때마다 과거에 좋았던 추억들을 이야기해주고 “너는 할 수 있어, 괜찮아질 거야”라며 격려해주었다. 그러한 따듯한 보살핌 속에서 나는 점차 회복되어갔고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다.

지혜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지혜는 로스쿨에 합격했다. 지혜는 늘 사람을 사랑하는 법관이 되고 싶다고 말해왔다. 지혜라면 그 꿈을 이룰 거라고 믿는다. 사랑해, 고마워, 지혜야~^^.

당신의 뒷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백영기 53세. 직장인. 울산시 남구 신정4동

이십 년을 함께했는데, 이제 정년을 맞이해 새로운 세계로 떠나시는 당신. 가는 이의 발걸음은 가벼운데 함께한 추억이 많은 저는 보내기가 힘이 듭니다.

이십 년 전, 저는 당신보다 한 달 먼저 입사를 했었습니다. 처음 만난 당신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자그마한 체구와 동안(童顔)으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늘 웃으면서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모습에 끌렸고, 점차 형, 동생으로 편하게 지내게 되었지요. 그렇게 함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재작년 여름, 십 년 전에 그만둔 동료가 사업이 어려워진 터에 부친상까지 당했습니다. 그 소식에 네 시간의 버스를 타고 가 상여를 메시더니 그 동료에게 “다음에 나 죽으면 네가 내 상여를 메라” 하시곤 돌아올 차비만 남기고 적지 않은 부의를 선뜻 내어놓으셨지요.

직장 특성상 교대로 식사를 할 때도 매번 나이 어린 동료부터 먹게 하고, 당신은 맨 나중이었습니다. 식은 밥과 흐트러진 반찬에 미안해하시는 아주머니께 뜨거운 음식 잘 못 먹는다고 괘념치 마시라고 웃음으로 너스레 쳐주시던 그 마음 어찌 모르겠습니까!

갓 입사한 동료가 아기를 낳아 단칸 셋방에 어려워할 때, 아기 옷 한 벌 준비하시고 그 속에 넣으신 당신 한 달의 용돈 봉투, 산모가 맛난 것 먹고 젖이 잘 돌아야 아기 배 곯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고 잔병치레 없어야 병원비 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을 술도 안 하고, 버스도 타지 않고 운동한다며 걸어 다니셨지요.

어느 여름 장마 때였습니다. 침수로 차가 다니지 않아 야간 근무 출근이 어려웠지요. 아무도 출근하지 못했을 때 당신은 철길로 돌아 돌아서 출근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오히려 웃음으로 사과를 했지요.

회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동료를 꼭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대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돌아서던 당신이었습니다. 피곤해하는 동료를 대신하여 새운 밤이 얼마이며, 힘들어하는 동료의 주머니에 아무 말 없이 음료수를 살며시 넣어주면서 꼭 잡아주시던 손, 동료의 생일은 꼭 기억하고 챙겨 작은 선물이라도 주시던 배려를 어찌 잊겠습니까.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닥종이에 혼합 채색. 53×45cm. 2009.

이 모두가 당신의 책임감과 성실, 그리고 배려의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작년 말, 당신이 떠나시고 이제 저는 이 회사에서 가장 연장자가 되었습니다. 후배들에게 나도 형님처럼 그런 뒷모습을 남겨줄 수 있을까 두렵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하고 베풀고자 마음먹지만,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당신이 만든 배려의 전통을 후배들이 따라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사회가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항상 당신을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베풀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앙금이 없이 너무 아름다워 보입니다. 이젠 쉴 수 있어 시원하다 하시면서도 아쉬워하는 마음 압니다. 일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몇 번을 당부하시는 마음도 압니다. 남은 이들의 가슴에 좋은 형, 좋은 동생으로, 좋은 인연으로 계속 이어지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좋은 추억만 생각하시고, 건강하시고, 직장 생활하느라 못 하셨던 많은 꿈 다시 시작하여 모두 이루시길 바랍니다.

정년 퇴임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는 김복철님께 올립니다.

내 인생의 반전 가져다준 소중한 인연

강민주 28세. 직장인. 러시아 모스크바 가리발디 거주

2003년 가을이었다. 이제 갓 스무 살, 하지만 나는 엄청나게 지쳐 있었다. IMF 위기 때 집이 부도가 나며 중학교 때부터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내가 아무리 바동거려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세상 앞에 나는 너무 작은 존재였고, 희망이라는 것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대학, 아르바이트, 또 홀로 서울 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들키기 싫어 겉으로는 더욱 밝은 척 행동을 했다. 하지만 혼자가 되면 나는 무척 지쳤다. 반복되는 감정 기복과 불면증, 외로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계속되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1학년을 마치자마자 호주로 떠났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3개월간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저녁엔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 바다와 사막으로 미친 듯이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라도 하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나는 내 인생을 뒤바꿔 버린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그분은 내가 청소를 해주는 대가로 다락방에서 무료로 지내게 된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숙을 하고 계셨다. 그곳 미대에 교환 교수로 와 계신 한선주 교수님, 독신이셨던 그분은 그냥 ‘엄마’라 부르라며 친근하게 대해주셨고, 나는 자연스레 살면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교수님은 한국 음식도 해주시고,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셨다. 마음 둘 곳 없었던 내게 그 멀리 타국에서 의지할 곳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7개월 정도 교수님과 함께했고,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에 복학해 당시 광주에 계시던 교수님을 뵈러 갔을 때였다. 교수님은 고향 온 자식처럼 온갖 것을 챙겨주었다. 같이 여행도 다니고, 전시회도 데리고 다니는 교수님을 보면서 “저렇게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호주에 다녀와 잠잠했던 마음이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 있거나 작업을 할 때가 되면 갑자기 우울해지면서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 당시 잠들기 전에 했던 기도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죽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제자가 하고 있다는 마음수련을 소개해주셨고 마음을 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희망이었다.

취업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수련부터 하겠다는 결정에, 모두 걱정했지만 교수님은 달랐다. “마음수련부터 끝내라, 취업이 문제가 아니다”라며, 수련비까지 대주셨다. 나중에 꼭 갚겠다고 했을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마음 깊이 남아 있다.

“이 돈은 나중에 내가 아니라 다른,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갚으면 돼. 아무 생각 말고 우선 마음부터 다스리고 생각하자. 먼저 네 스스로가 행복해야지.”

교수님은 남들이 볼 때 행복해 보이는 자리가 아닌, 진정한 나의 행복을 위해 그렇듯 도와주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수련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기억, 부모님에 대한 원망, 나는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느낀 불안함…. 그렇게 하나하나 버렸다. 남보다 잘살고 싶었지만 그런 조건이 되지 않아 원망하고 나를 포장했던 마음들을 버리며 깨달았다. 나는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 주변을, 세상을, 단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었구나, 참으로 나 자신을 만나본 적이 없었구나….

그렇게 나를 가리던 마음의 때를 닦아내며 나는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했다. 너무나 순수하고 맑고 아름다운 나, 그리고 세상.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나를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감사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나무도 하늘도 감사했다.

나는 바로 교수님께 편지를 썼다.

“마음수련을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엄마는 저를 낳아줬지만 교수님은 저를 정신적으로 성장시켜 준 분입니다.”

나는 지금 모스크바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랑으로 품어주신 교수님 덕분에 나는 지금 새로운 세상에서, 진짜로 숨을 쉬고 살고 있다.

장영모 작. <고향 이야기>

닥종이에 혼합 채색.

53×45cm.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