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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남수단 톤즈 마을의 희망, 고 이태석 신부가 남기고 간 이야기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다.” 2010년 4월 KBS스페셜로 방영된 후 9월에 영화로도 개봉한 <울지 마 톤즈>의 첫 장면에 나오는 글이다.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 20년이 넘는 내전으로 오랜 굶주림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곳, 그곳의 유일한 의사로 주민들과 함께 희망을 일구었던 고 이태석(1962~2010) 신부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내가 이태석 신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케냐 나이로비 UNEP(유엔환경계획)에 파견 근무를 나갔을 때였다. 신부님은 내 인생에도 커다란 변화의 계기를 주었다. 나에게도 꽃이 되어준 사람, 이태석 신부를 기리며….

이재현 환경부 정책관,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 사진 제공_KBS

“톤즈에 한번 와보세요.”

2003년 1월, 이태석 신부는 우리 가족에게 톤즈에 와볼 것을 제안했다. 작년에 이은 두 번째 권유였다. 당시 나는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였다. 간곡한 권유에 약속했지만 막상 가려니 막막했다. 아프리카 최고의 오지인 데다 전쟁 중인 톤즈. 폭탄이라도 떨어지면 어쩌나 이상한 병에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 밀려왔고, 주변 사람들도 적극 만류했다. 그렇게 정해진 날짜를 두고도 고민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하서방님(하느님) 빽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출발하세요.”

그의 말대로 오로지 하느님 빽만 믿기로 하고 2003년 3월 4일 톤즈로 향했다. 다음 날, 톤즈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섭씨 55도가 넘는 살인적인 더위, 톤즈강의 오염된 물을 그냥 마시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려 있었다.

그날부터 신부님과 그곳의 참모습을 만나기 시작했다. 허름한 신부님의 진료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에 보통 2~3백 명의 환자가 오는데 그를 만나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며칠씩 걸어서 오는 이들도 많았다.

“나을 수 있지만 그저 팔자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다”는 신부님은 진심으로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져주는 의사였다.

매주 한 번씩은 병원에 오기 힘든 사람들을 찾아 여든 개가 넘는 유목민 마을을 직접 방문을 했다. 특히 이신부가 심혈을 기울인 곳은 한센병 환자들의 마을이었다.

병으로 인해 손가락 발가락이 잘려나가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의 사람들, 차마 똑바로 보기조차 미안했지만 그들에게서는 너무나 따스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신부가 오고 나서 환자들도 많이 감소되었다며, 그들은 진심으로 신부님께 감사하고 있었고, 신부님 또한 “가진 건 없어도 감사할 줄 알고 기쁘게 사는 그들에게서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다.

전율이 일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그냥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또한 부끄러웠다. 하나를 가진 톤즈 사람들의 기쁨은 그 하나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아홉을 가진 나의 고통은 그 하나가 없다며 불평할 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신부님께서 왜 그렇게 톤즈로 오라고 하셨는지, 그 뜻도 조금씩 헤아려졌다.

이태석 신부는 알면 알수록 바보 같은 분이었다. 워낙 능력이 많아 한국에서 의사가 되었다면, 쉽게 부와 명예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을 포기하고 사제가 된 후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곳’을 선택했다.

“부족하지만 나의 모든 것도 하느님께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어야지요. 저는 이곳에 도움을 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살러 온 사람이에요.”

신부님은 진심으로 이들과 함께할 밝은 미래를 꿈꾸었다. 벽돌 한 장 없던 이곳에 톤즈강에서 모래를 퍼와 벽돌을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병원을 만들고, 학교를 지었다. 20년 넘게 내전을 치르며, 상처받을 대로 받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드럼, 트럼펫, 기타…. 음악으로 아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고 싶어 하셨다.

“쫄리, 쫄리, 쫄리!” 어느 곳을 가더라도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외쳤다. Fr(Father) John Lee. 이신부의 영어 이름 ‘존 리’를 빨리 부르다 보니 쫄리가 된 것이다. 가진 자로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민과 하나가 되어 사랑을 나누던 이신부는 이 지역의 희망이었다.

나에게도 삶의 가치를 가르쳐준 이태석 신부님, 그분의 모습 중 가장 닮고 싶은 것은 ‘부드러움’이었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던 나는 ‘강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신부님은 어떤 어려운 여건에서도 항시 유머와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딱 부러지지도 않았고, 어찌 보면 하는 둥 마는 둥 보이는데도 누구보다 많은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자신이 하려고 애쓰기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2008년 10월, 한국을 방문했던 신부님에게 말기 암 선고가 내려졌을 때,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신부님은 항암 치료를 받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톤즈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톤즈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친구가 되어주실래요’라는 책을 출간했고, 2009년 12월에는 두 명의 톤즈 아이들 한국 유학을 도운 것이다.

“아이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든 다시 톤즈로 돌아가려 했던 신부님, 하지만 2010년 1월 14일, 48세의 젊은 나이로 끝내 선종하셨다.

그가 떠난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하지만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수단 아이들의 교육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계속해서 후원을 해나갔다. 다행히 2010년 4월, <울지 마 톤즈>가 다큐로 또 영화로 만들어지며 수단어린이장학회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인터넷 카페 회원이 19,000명까지 늘었고, 후원자도 봉사자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어떻게든 공부해서 신부님처럼 되고 싶다”며 한국으로 유학 온 톤즈의 아이도 더 생겼다.

우리는 신부님을 통해 저 먼 톤즈와 연결되었고, 또 그렇게 감동받은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 우리라는 이름으로 맺었던 그 따뜻한 ‘끈’은 계속해서 이어져 널리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로 퍼져나갈 것이다.

“톤즈 하면 생각나는 두 가지 빛이 있어요. 하나는 무수한 밤하늘의 별이고, 또 하나는 유난히도 빛나 보이는 아이들의 큰 눈동자이지요.”

톤즈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맑은 미소를 띠던 이태석 신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착하고 정 많은 톤즈의 아이들은 신부님의 바람대로 톤즈의 빛이 되어줄 것이다.

수단어린이장학회 http://cafe.daum.net/WithLeeTaeSuk

이태석 신부의 한센인에 대한 애정은 지극했다.
아무리 치료를 해도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상처가 번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자,
환자들의 발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그려 맞춤 신발을 만들어주었다.

이재현씨는 톤즈를 방문한 후 톤즈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사진은 2008년 11월
서울 상도동에서 열린 ‘수단 어린이를 돕기 위한 음악회’에서의
이태석 신부(왼쪽)와 이재현씨(오른쪽).
2005년 1월, 북수단과 남수단 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자
이태석 신부는 남수단에 처음으로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들었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의 등장은 남부 수단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단숨에 유명 인사가 됐다.

사막에 녹색장성을 쌓다, 나무 심는 사람 ‘미래숲’ 권병현 대표

매년 봄철이면 우리나라에 불어닥치는 황사의 진원지라 알려진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의 쿠부치 사막.
그 광대한 사막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가느다란 녹색 띠가 보인다.
사막 동쪽 끝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15km에 달하는 녹색 만리장성이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던 이곳에 나무를 심은 이가 있다.
1998년 당시 주중대사였던 권병현씨.
모두 어리석은 일이라 만류했지만 그의 진정 어린 노력과 열정은 몇 년 후 푸른 녹색장성을 만들어냈다.
이제 다시 사막 이전의 푸른 초원이 펼쳐진 마을로 복원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는 권병현(74) ‘미래숲’ 대표,
그에게서는 녹색의 짙푸른 젊음과 활력이 넘쳐났다.

최창원 사진 홍성훈


‘한국 노인의 녹색 열정이 사막의 확장을 막고 있다.’ 지난 2008년 10월 29일, 중국 인민일보는 ‘쿠부치 사막 식수 프로젝트 초보적 성공’이라는 기사를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사막에 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녹색장성을 만들기까지의 전 주중대사 권병현씨의 노력과 그 결실에 대한 이야기였다.

쿠부치 사막은 중국 서북부에 동서로 넓게 펼쳐 있는 거대한 사막.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초원이 남아 있었지만 급격한 사막화로 모두 자취를 감추고, 계속 동진하며 사막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권병현씨는 “이 사막의 최 동쪽에 나무를 심어 사막의 확장을 막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가능할 거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묵묵히 나무를 심어나가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시작된 나무 심기는 2010년 그 첫 결실을 맺었다. 최 동쪽 400만 그루의 나무로 구성된 길이 15km, 폭 0.5km의 방풍림이 조성된 것이다.

 

보통 사막에서 나무가 자란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다 비웃었어요. 그 당시까지는 사막에 나무를 심어도 자라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이었거든요. 사실 저도 겁이 났죠.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막을 막을 수 없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사막이 베이징 쪽으로 오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한국은 시도 때도 없이 황사에 시달릴 거고….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문제를 인식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거의 절망적이었습니다. 사막이라는 건 고정돼 있지 않습니다. 산만 한 사구가 엄청나게 센 바람으로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사막이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나무를 심어놓으면 다음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더 많은 나무를 심고 또 심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모래 바람이 방향을 틀기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놀라웠습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는 ‘황색룡을 길들이다(Taming the Yellow Dragon~)’라는 제목으로 취재하기도 했어요.

사막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볼 때 느낌이 남다르시겠어요.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참 신기하죠. 몰아치는 모래 바람과 그 찌는 열기, 밤이면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 살아남은 거잖아요. 마치 나무가 말을 하는 것 같아요. ‘나 살아남았어요, 정말 살아남았어요, 그래서 내 주변을 이렇게 살렸어요'(웃음). 나무가 자라면서 죽었던 땅도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 등이 썩으면서 미생물이 생기고, 미생물을 먹고 사는 지렁이가 생기고, 그걸 먹는 새들이 오고. 옛날에는 거기도 초원이었고 마을이었잖아요. 잘못된 인간의 활동들로 사막이 만들어졌는데, 자연은 무한한 힘으로 스스로 회복하더라고요.

사막이 되려는 곳에 나무를 심어 가꾼 경우는 있지만,
이미 사막이 되어버린 곳에 나무를 심은 경우는 최초라고 들었습니다. 가장 큰 성공의 원인을 꼽는다면요.

사막 옆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도 처음에는 굉장히 냉담했어요. 사실 중국의 사막화로 빼앗긴 마을만 2만 5천 개입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에 대한 절망과 원망뿐이었죠. 어쩔 도리 없이 살고 있는데, 생활이 참 어려워요. 강풍으로 모래들이 집안 가득 스며들고, 심할 땐 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무들이 자라면서 모래 바람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아, 나도 어릴 때 태어났던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긴 거죠. 나중에는 주민들이 밤낮으로 물을 주고 나무를 가꿨어요. 결국 그 주민들이 있었기에 성공을 가져왔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제가 가면 웃으면서 안아줘요.(웃음) 서로 희망의 눈빛을 교환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보람인지 몰라요. 이제 사막 식수 사업은 최고의 ‘한중우호’ 상징 사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처음, 사막에 나무를 심겠다는 마음을 어떻게 가지게 되셨나요.

1998년 봄에 주중대사로 부임을 할 때였어요. 북경공항에 도착한 순간 처음으로 나를 맞아준 것은 지독한 황사였습니다.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문명의 앞에는 숲이 있고 뒤에는 사막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맨 뒤, 잿빛 문명을 본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서울에도 황사가 심하다는 딸아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때 뭔가 깨달음 비슷한 게 왔습니다. 아, 뭔가 굉장히 잘못돼가고 있구나 하는.

바로 대사관 직원을 시켜 조사를 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전 세계적으로 이미 엄청난 사막화가 진행 중이었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1997년 통계에 따르면 벌써 지구의 3분의 1이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산림 벌채, 과도한 경작 및 방목, 온실가스 등 인간의 활동 때문이었다. 특히 20세기 들어 가장 심각한 사막화 지역 중 하나가 중국이었다. 중국은 해마다 서울의 4배가 넘는 지역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막화는 매년 우리나라에 황사 피해를 심화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심각한 현실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사실 그렇게 결심한 순간부터 그의 삶은 이전과는 정반대의 삶일 수밖에 없었다.

2000년 8월 퇴임 후, 전 외교관으로서의 보장된 편안한 노후를 뒤로한 채 그는 2001년 ‘미래숲’이라는 비정부기구(NGO)를 만들었다.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기업과 정부를 대상으로 지원금을 받기 위해 수도 없이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

외교관이었다는 명예와 자존심도 내려놓고 먼저 고개를 숙였다. 몸이 약한 사람은 사막에 한 번 갔다 오면 쓰러질 만큼 사막의 환경은 열악했지만, 칠십 노구에도 한 번도 쓰러져본 적이 없었다. “망가지는 땅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그 염원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점차 함께하는 기업과 전문가, 후원자들도 늘어났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에 비해 심각성이 덜 알려진 사막화에 대해 세계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래숲’은 2008년 국내 최초로 유엔환경계획(UNEP)의 환경 NGO로 등록되었고, 권대표는 2010년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에서 ‘사막화 방지에 공헌한 세계 15대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외교관으로서 많은 걸 누렸던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는데요.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국익을 위해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지구가 위기를 맞고 있는데, 국경, 국익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돌아보게 된 거예요. 결국 우리 모두가 하나인데, 다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신납니다. 지나보면 힘든 순간도 많았습니다. 기존의 권위와 가치를 버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이걸 시작하고 난 뒤에 제 목뼈가 없어졌어요, 하도 구걸하고 다녀서.(웃음) 사람들이 필요성을 알도록 하는 데는 내가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하잖아요. 사실 그동안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걸 누렸는데, 지금은 그걸 되갚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 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나요.

혹시 태어나서 지구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더 이상 빚을 지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넓은 우주 속에 아름다운 별, 유일하게 인간의 거주지인 지구가 빠른 속도로 망가지고 있어요. 지구는 정말 우리한테 좋은 어머니고 아무 대가 없이 무한정 주기만 했죠. 망가져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용서하고 포용하며 다 주려고 하고 있어요. 너무 늦기 전에 어떻게든 돌려놓고 싶었습니다.

‘미래숲’에서 하고자 하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요.

저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무엇보다 미안합니다. 나와 내 세대의, 내 전 세대의 욕심으로 인해 망쳐진 지구를 물려줬잖아요.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은 ‘신나게 자신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갔으면’ 합니다. 저는 뒤늦게 제 길을 찾았지만, 청년들은 지금부터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마음을 쏟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2002년부터 매년 봄이면 한국의 대학생들이, 중국의 대학생들과 같이 나무를 심어왔습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기 위해 한마음으로 모이는 젊은이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아이들도 한번 나무를 심고 나면, 가장 큰 마음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앞으로 이 사막에 전 세계의 청년들이 나무를 심으며 우정을 나누고, 우리가 만들어갈 평화로운 세상에 대해서 토의, 연구하는 녹색기지가 만들어질 겁니다. 이제는 뒤에서 조용히 청년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 2009년부터는 전 세계인이 참여하는 ‘사막에 내 나무 심기 운동’을 시작했어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 첫 나무를 기증받았고, 앞으로 많은 이들이 사막에 나무를 심을 것입니다. 자연이 우리를 아끼듯이 자연한테 돌려주고, 자연과 한마음이 돼서 같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거지요.

결국 한 사람의 마음이
엄청난 일을 하게 만든 거잖아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진정으로 바라고 진정으로 노력하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자연은 그 마음과 노력을 받아줍니다. 그 핵심이 마음이에요. 사막을 막았다는 건 인간의 진정한 뜻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를 실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고정관념이에요. 사실 사막화도 그렇고, 마음이 흐려져서 세상이 어지러워진 거잖아요. 그러기에 우리가 얼마나 진정한 마음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느냐, 마음을 수련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연 사랑, 나무 심기 이런 것들이 본심을 찾는 지름길이 될 거예요.

그는 지난 2월 또 한 번 중국 내몽고를 방문했다. 녹색장성이라는 가느다란 띠를 동서로 확장해서 잃어버린 마을을 복원하는 ‘한중우호 녹색생태원’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올해에도 이곳에 150만 그루의 나무를 심을 예정이다. 이제 몇 십 년 후면 이곳에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가장 친환경적인 마을이 만들어질 것이다.

거친 모래 바람, 그리고 그게 정말 가능하겠냐는 인식과의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미래에 대해 희망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희망을 만들어가고, 그 진심을 자연이 받아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경남 하동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흙의 아들이니 흙으로 돌아가자’라는 것을 이상으로 품고 살았다는 권병현씨. 인생의 굽이굽이를 돌고 돌아, 이제야 그 꿈의 길을 걷고 있다. 나무 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사막이 푸른 숲으로 바뀌는 그 순간까지 나무를 심을 것이다.


‘미래숲’ 대표 권병현(權丙鉉)은 1938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1963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968년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공공행정 및 국제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1962년 고등고시에 수석 합격 후 미국, 중국,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외교관을 지냈으며, 1992년 한·중 수교 실무 교섭의 한국 대표로 큰 공로를 세운 것을 인정받아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퇴임 이후 2001년 ‘미래숲’이란 비정부단체(NGO)를 만들었고, 2006년부터 쿠부치 사막을 막는 녹색장성사업을 시작했다. 2010년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는 ‘사막화 방지에 공헌한 세계 15대 인물’에 선정했으며, 초대 ‘지속가능한 토지관리 챔피언(Sustainable Land Management Champion)’ 및 녹색대사로 임명했다. 현재 동북아 공동체 연구원 원장, 국제 아동 돕기 연합 회장 등도 맡고 있다. www.futureforest.org

거짓말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으나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머물게 된 나만의 이야기들, 그 사랑스러운 고백을 들어봅니다.

거짓말의 특효약, 믿음

신문자 조선대학교 언어치료학부 교수,

신-언어임상연구소 대표

초등학교 때 일이다. 나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선생님이 뭐라 말만 해도 눈물이 나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더구나 발표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이 돌아가면서 한 명씩 노래를 부르라고 하셨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마침 종이 울렸다.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일은 나부터 다시 한다는 말씀으로 끝을 내셨다.

다음 날 나는 꾀병을 부렸다. 아파서 학교에 못 가겠다는 나의 완강한 태도에 어머니는 이유도 묻지 않으시고 담임 선생님에게 내가 아파서 학교에 못 간다고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마나 고마웠던지 이불 속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린 아이들은 상상의 세계와 현실을 혼돈하여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말이 서투르다 보면 말이 잘못 나와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이를 올바로 키우려는 마음이 지나쳐 작은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는 어머니들을 보기도 한다. 실제로 매를 들어도 아이의 거짓말이 잦아지자,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하였다는 부모도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거짓말을 안 하게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하여 아이는 더욱 머리를 짜내고 그러다 보면 또 큰 거짓말을 하게 되고 만다.

나는 우리 어머니를 통해서 누구를 진정으로 믿어주는 것이야말로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특효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초등학교 당시, 어디가 아프냐, 정말 학교를 못 갈 만큼 아프냐, 하고 어머니가 캐물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는 이유가 있을 테지 하며 속마음을 먼저 헤아려주셨기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고, 나는 감동을 받고 스스로를 더 돌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무슨 얘기든 믿어주셨다. 그러다 보니 그 이후로는 사실 거짓말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니 오히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삶 속에는 어려운 일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잘못을 해도 항상 믿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든든하다. 그럴 때 모든 일을 좀 더 자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나 싶다.

나 역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잘못했다고 따지기보다는 믿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장차 언어치료사가 될 학생들에게, "언어장애를 먼저 고치려고 하기보다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그 사람의 고통을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 생활에서도 혹시 상대가 나를 속이는 것 아닐까, 거짓말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 그냥 믿어버리면 내 마음도 편하고 세상도 믿음으로 다가온다.

모두 어머니한테 배운 지혜이리라. 그런 지혜를 가르쳐주신 어머니께서는 63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고, 올해 아흔한 살이 되셨다. 새해 초부터 호흡이 급격히 안 좋아지셔서 병원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한 달여를 지내다 이제야 힘들게 집으로 모셔 왔다. 우리 가족 모두가 한마음으로 30년 가까이 되는 긴 시간 동안 어머니를 정성으로 간병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사랑과 믿음으로 키워주신 덕분이다.

어머니! 어머니의 귀한 가르침, 아이들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잘 전하고 있어요. 올 것 같지 않던 생명의 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머니, 너무나 사랑합니다.

김주호 작. <사랑해요>

질구이 재벌. 65×31×18cm. 2006.

거짓말쟁이 아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최영애 60세.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

김주호 작. <사랑스런>

질구이 재벌. 68.5×21×19.5cm. 2009.

그해를 굳이 기억해보면 결혼 25주년 기념일, 큰딸 대학원 졸업, 막내 대학교 졸업! 곁눈질할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연구원이었는데 며칠째 늦게까지 근무하느라 과로를 했고, 퇴근길 승용차 안에서 가볍게 어지럼증이 생겨 병원에 들러 진료를 했다. 그리고 담도암인 듯하니 입원 절차를 밟으라는 병원 측 통보에 눈앞이 캄캄하여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오진이기를 바라고 또 바라고, 그럴 리가 없다며 남편도 황당해했다. 그 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6개월의 투병 생활 끝에 남편은 마른 장작 같은 처절한 모습으로 떠나고 말았다.

가슴속 죄멍을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었으나 자식들을 생각하니 차마 속단할 수가 없었다. 불면증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일시적으로 끊게 된 인연도 회복시키며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마음 비우고 버리기를 생활화했다.

이제 남편이 떠난 지 10년. 아직도 남편의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 아깝고 가슴 시리게 안타깝다. 가장 열정적으로 일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생활할 시기였는데 너무 가엾다. 인간이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때를 모르고 살아가지만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그리고 지금 나 역시 새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느낀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나눴던 우리 부부였는데, 이제 세월이 흘러 두 손자들로부터 나 홀로 듣는다. 남편 몫까지 심장이 뚫리도록 사랑을 담으며 귀한 인생 겸허하게 살 것이다.

여보! 죽을 때도 함께 죽자고 했던 말 지키지 못하여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거짓말쟁이 아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원히 존경하고 사랑해요.

세상은 나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김조영 대전대 한의학과 본과 3학년

어린 시절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열등감 때문인지 친구들이 조금만 농담 하거나 장난치면 화만 냈다. 늘 친구들에게 외면당했고, 문제아로 찍힐 정도였다.

그러다 점차 수학에 흥미를 들이게 되었다. 수학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친구들도 나를 달리 보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못해도 공부만 잘하면 인정받을 수 있고,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는 희망 같은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중학교 입학 후 치른 첫 시험에서 전교 4등을 했다. 공부를 잘한다는 평이 돌자 모두 나를 좋게 보았다. 하지만 중학교 공부는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영어, 수학, 과학 경시 대비 학원, 특목고 대비 학원 등을 보내셨지만, 그 모든 공부를 소화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리고 노력할 끈기도, 인내심도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거짓말은 시작되었다. 내 실력보다 시험 성적을 훨씬 부풀려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들은 나를 좋게 보았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 그룹에 끼어 있는 것이 좋았다. 거짓말은 계속되었다. 거짓말을 또 다른 거짓말로 메웠다. 점점 더 높게, 더 좋게 점수를 포장했다. 나는 그렇게 내 자신을, 남을, 세상 전체를 속여 갔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지원했던 경시대회에서 별다른 상을 타지 못했고, 특목고 입시도 고배를 마셔야 했다. 결과가 나의 실력을 말해주었다. 친구들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나의 말들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다. 괴로웠다. 내 자신과 세상을 그렇게 속이며 살았다는 것 또한 너무나 괴로웠다. 나의 모든 행동이 정말로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그놈의 공부 잘한다는 칭찬이 뭐기에, 그 칭찬을 듣기 위해 세상을 속여야 되나.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 세상을 속이지 않으리라.

고등학교 시절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좋아하던 게임, 싸이월드 등은 아예 접었다. 잠이 와도 놀고 싶어도 참으면서 오직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갔다.

나는 세상을 향해 수없이 거짓말을 했지만 세상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실제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내가 꿈꾸던 한의과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내가 중학교 때 했던 그 수많은 거짓말이 그 당시에는 나를 바닥으로 끌고 내려갔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완전 바뀌게 만들었고, 새롭게 성장하게 했다. 뭔가를 진정으로 얻고 싶은 게 있다면 그만큼 움직이고 부딪치고 노력해야 한다는, 세상의 답을 알게 된 것이다.

김주호 작. <와하하>

질구이 재벌. 67×21×18cm.

2009.

엄마는 다 알고 있었단다

권지예 52세. 소설가. <4월의 물고기> 저

거짓말,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지금도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나는, 동생을 잃어버릴 뻔했던 아찔한 기억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집 골목 앞에는 늘 ‘뽑기’니 ‘달고나’니 하는 군것질 장사가 있었다. 연탄불에 설탕을 녹여 만든 납작한 설탕 과자에 여러 가지 모양의 틀을 찍어 그 틀대로 과자를 다듬어 오면 몇 가지 상품을 뽑을 수 있거나 덤으로 설탕 과자를 더 먹을 수 있었다. 동네 조무래기들처럼 나 또한 그 재미에 한없이 빠져 있었다.

그날도 어머니 지갑에서 동전을 슬쩍 해가지고 나서는데 세 살배기 남동생이 같이 가자고 쫓아 나왔다. 귀찮았지만 동생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저만치 ‘뽑기 판’ 주위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북적거렸다. 어린 동생을 옆에 앉히고 나도 설탕 과자 하나를 쥐고 앉아 ‘쪼기’ 시작했다. 동생도 좋아라 궁둥일 들썩였다. 얼마나 정신없이 그 일에 매달렸는지 허리가 아파 기지개를 켜며 둘러보니 동생이 안 보였다. 어느새 어둑해지고 있었다.

이 녀석이 집에 갔나, 하며 집으로 달려가 보니 동생은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는 나와 같이 있는 줄 알고 계셨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온 건 거짓말이었다. 어머니가 금지하는 ‘뽑기’를 했고, 무엇보다 그것을 하기 위해 지갑에 손댄 것부터 불어야 하니 애초에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난 친구네 집에 숙제하러 갔었는데…." "아니, 그럼 얘가 어디 갔다니?"

어머니는 사색이 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동생은 보이지 않았고 이웃들 또한 모두 모른다고 했다. 아무도 내가 동생과 함께 ‘뽑기 판’에 있었던 사실을 몰랐다. 나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지만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했다.

동생이 큰길가를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누군가 동생을 유괴해갔다면? 차 사고라도 났다면? 나 때문에, 내가 동생을 잃어버렸다는 자책감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동생이 사라지고 이틀이나 지났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버지는 파출소에 들락거리고 어머니는 드디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 숨 막힐 것 같은 며칠이 지났다. 여덟 살의 나는 거짓말의 올가미와 그로 인한 죄책감의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질식할 것 같았다. 며칠인가 지났을 때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뛰어나갔다. 한참이 지나고 어머니가 동생을 업고 오셨다. 동생은 살아 있었다. 게다가 뽀얗게 살까지 올라 있었다.

사연인즉, 우리 옆 동네에 사는, 너무나 아이를 키워보고 싶었던 늙은 과부가 골목을 헤매는 동생을 보자 욕심이 나서 데려다 키웠고, 그걸 이상하게 여긴 이웃이 파출소에 신고를 한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는 대통령 아들 부럽지 않게 키울 자신 있었다며 동생과 떨어질 때는 통곡을 하더란다. 어머니는 그 후 정성스럽게 떡을 만들어 동생과 함께 아주머니 집에 가서 인사를 드리곤 했다.

순간적인 두려움 때문에 한 철없는 거짓말이었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그 죄책감에 얽매여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조금은 조숙한 아이가 되어간 것 같다. 거짓말과 진실, 그리고 참된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동생을 찾지 못했다면 어린 가슴에 감당하기 힘든 비밀을 간직하며 어두운 터널 같은 인생을 살았을지 모른다.

몇 년 전에야 어머니께 그 비밀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놀란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나였다.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하면 자식을 둘이나 죽일 수 있기에 모르는 척했어. 없어진 애도 애지만 멀쩡한 눈앞의 자식도 살려야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나 또한 아이를 둔 엄마이기에 더 절절히 다가왔는지 모른다. 그렇다. 거짓말조차 감싸준 엄마의 사랑이 나를 키운 거였다.

김주호 작. <귀엽지>

질구이 삼벌. 60×20×18cm. 2009.

거짓말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으나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머물게 된 나만의 이야기들, 그 사랑스러운 고백을 들어봅니다.

희망을 전하는 거짓말쟁이

김숙이 47세. 전남 화순군 효성노인복지센터장.

사회복지사.

"오늘따라 너무 예쁘시네요, 무슨 좋은 일 있으셨어요? 오늘만 같으면 아주 금방 나으시겠어요…."

복사꽃 꽃망울이 터질 듯 봄을 알리는 아침, 나는 오늘도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며 어르신 댁에 들어선다. 척추 골절로 인해서 아예 서지를 못하던 80세의 어르신을 살포시 안아드리며 뽀뽀를 해준다. 어르신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그 순간, 그곳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나라로 변모한다.

어르신을 처음 뵌 것은 2008년 7월. 사회복지사로 일주일에 한 번씩, 2년 넘게 만나 뵈면서 설령 그것이 거짓말일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희망을 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시네요? 곧 걸을 수도 있으시겠어요." "이번 봄에는 같이 꽃구경 가실 수 있겠어요~ 하하하!"

그리고 다 해드리기보다는 어르신의 남은 힘으로 하실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때론 말상대가 되어 세상 이야기도 나누고 재미난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드린다. 그런 과정에서 어르신도 많이 변하셨다. 수저, 젓가락 하나도 못 들고 누워만 계시던 분이 이제는 혼자 일어나고 혼자 앉으시고 혼자 누우실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웃음을 찾으신 것이다.

"나 언제나 걸어 다닐 수 있을까?"

통 말씀도 안 하시던 분이 그 말씀을 하셨을 땐 희망을 가지시는 것 같아 너무나 기뻤다.

김주호 작. <생생관계>

마트지에 아크릴릭.

53.5×38.5cm. 2009.

나는 매주 20여 분의 어르신들을 찾아뵙는다. 다들 편찮으신 분들이기에 물리치료와 재활 마사지, 혈당, 혈압 체크도 해드리고 빨래며 청소며 반찬이며 목욕 등을 도와드린다. 분위기 쇄신을 위해 어르신이 예전에 즐겨 부르시던 노래라도 같이 불러드리면 지난 세월이 원망스러우신지 때론 엉엉 울기도 하신다.

사회복지사란 직업은 참 어렵고 힘이 든다. 하지만 가장 힘들 때는 "나는 인제 이러다 죽겄지라잉? 나 같은 것은 살아 봐야 식구들만 귀찮게 하니께 그만 살고 빨리 죽어야 하는디…"라고 하실 때이다. 몸도 좋지 않은데 그런 암울한 마음으로 살아가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프다. 그럴 때 나는 용기를 내어 말한다.

"그런 걱정 하실 힘이 있는 거 보니까 충분히 나아서 걸어 다니실 수 있으시겠네요.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지금 얼마나 많이 좋아지시고 있는데요!"

그러면 내심 거짓말인지 뻔히 아시면서도 굉장히 좋아하신다.

그럴 때마다 안쓰럽고 마치 내가 불효자가 된 것처럼 죄송스럽지만, 단 한 시간을 살아도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나는 또 거짓말을 하고야 만다. 비록 뻔히 아는 거짓말일지라도 이 일을 멈추지 않는 한 나의 거짓말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분들이 마지막 남은 삶의 굴레에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며 한 조각 희망을 잃지 않는 그날까지는….

내 인생 최악의 거짓말 세 편을 고백합니다

박필선 49세. 교사. 경남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나의 최초의 굵직한 거짓말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집에서는 별로 대접을 못 받았으나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인정을 받고 있던 터라, 여름 방학 숙제를 하나라도 안 해가는 것은 내 이미지에 치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를 졸라 그림을 그려 달라 하고, 중학생 오빠의 국어책에서 동시를 하나 베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우리 선생님은 초등학교에만 계시니 중학교 책은 모르겠지! 떡하니 내 이름을 달아 제출했다. 다음 날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너 이 시 베껴왔지?"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셨는데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며 서 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 선생님은 나에게 눈길도 안 주시고 심부름도 시키지 않으셨다. 그해 2학기는 무척 힘든 학기였고, 내 마음속에 그늘 하나가 새겨졌다.

20대 시절의 가장 발칙한 거짓말은 29세 때였다. 나는 그때까지 나름 꿋꿋하게 싱글로 버티고 있었는데 내년이면 삼십이라 생각하니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김주호 작. <그런데 말이야>

질구이 삼벌. 68×47×23cm. 2009.

4월의 잔인한 어느 봄날, 외롭다고 툴툴대는 나에게 여고 시절 친구가 성당 청년회 회장이라며 한 남자를 소개시켜주었다. 나이도 동갑이고 해서 같이 영화도 보고 선물도 받고 하는 사이 어느새 가을이 와버렸다. 그런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어느 토요일 밤 그 남자가 양복을 쫙 빼입고 와서는 청혼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나 부담스럽고 어색한 순간을 빨리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다음 달에 수녀원에 들어갈 거라고 거짓말을 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남자가 술만 먹고 성당도 안 나온다는 소식을 친구들로부터 들었다. 그 뒤 나는 꽤나 깊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30대 후반 끔찍했던 거짓말 사건은 추운 어느 겨울에 어이없이 찾아왔다. 험한 고개를 두 번 넘는 장거리 출퇴근을 할 때였다. 어느 날 출근을 하는데 고개 꼭대기에 눈이 하얗게 쌓여 쌀가루를 뿌려놓은 듯 별천지였다. 그 눈부신 세상은 나의 허황한 낭만주의를 자극하고 말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저 하얀 눈 위를 뽀드득뽀드득 걷고 싶은 유혹을 못 이기고 외투도 벗어둔 채 차에서 마침내 내리고 말았는데…. 아뿔싸! 그만 차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지나가는 차를 애타게 기다렸다. 한참 뒤 꿈같이 경찰차가 고개를 내려왔고 사정을 말하니 읍내 가서 열쇠업자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곧이어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선생님이 차를 세웠는데 나는 경찰이 해결해주기로 했다며 그냥 보내 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1교시를 시작할 즈음이고 연락할 길도 없고…. 두려움이 엄습해와 추위에 떠는 것은 뒷전이었다.

한참 뒤 트럭이 하나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두 팔을 마구 흔들며 차를 세우자 온몸을 무장한 장정 대여섯 명이 내렸다. 무서웠지만 차문 좀 열어달라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와중에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과 아는 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분들은 산에 야생 난을 캐러 다니기 때문에 온갖 도구가 있다면서 쉽게 열어주었다. 어찌나 고맙던지 꼭 보답하겠다고 인사를 하고 시동을 거는데, 누군가 혹시 소변이 마려워서 내린 거냐고 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후  산꼭대기에서 방뇨를 한 여교사라는 오명을 남기고 창원으로 전근을 오게 되었다. 나의 알량한 낭만과 체면은 그 고갯마루 눈 속에 뭉개진 채….

아직도 나는 거짓말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쉬고 싶을 때 학생들이 찾아오면 바쁘다고 해 버리고, 남편과 자식에게도 최대한 내 편한 쪽으로 핑계를 댄다.

지금이라도 매순간 누구에게나 진솔할 수 있다면 남은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 텐데, 나는 오늘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바쁘다, 힘들다, 죽겠다 하면서!

착한 거짓말을 응원한다

조세형 41세. 삼성SDS 홍보팀,

<회사에서 통하는 커뮤니케이션> 저자

내가 일하는 사옥의 식당으로 들어가는 1층 입구에는 대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들을 처음 식당으로 데리고 갈 때면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이 대나무밭에 유리벽을 쳐놓은 이유는 이곳에 판다곰 한 쌍이 살고 있어서 그래. 북경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우리 기업의 적극적인 후원에 감사해서 중국 정부가 판다곰 한 쌍을 중국 본사에 선물로 주었고, 이곳에 사옥을 건립하면서 한국으로 들여왔지."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신입사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판다곰을 열심히 찾는다. 그럼 내가 또 덧붙인다.

"아, 그게. 점심시간에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해서 곰들이 스트레스를 받거든. 그래서 매주 화요일하고 수요일, 이틀만 3시부터 5시까지 볼 수 있어."

신입사원들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곰 찾는 일을 멈춘다.

 

김주호 작. <나는 지금>

캔버스에 아크릴릭.

72.5×60cm. 2009.

점심을 먹으며 나는 나의 거짓말에 대한 자수를 바로 한다. 곧 웃음이 터지고 식사 시간은 유쾌해진다. 도심 한복판에 판다곰이 살 리가 없건만 진지한 나의 말을 믿어주는 사원들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 나 또한 그들과 더욱 친해지게 된다. 서먹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착한 거짓말’에 그들도 긴장을 풀고 마음을 연다.

거짓말이 좋을 리는 없다. 거짓은 일단 상대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이처럼 거짓말이 다 나쁜 거짓말이지 착한 거짓말이 어디 있겠냐마는 가끔 동료들을 웃게 하는 거짓말이나 술자리의 분위기를 띄우는 재밌는 거짓말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기분 좋은 ‘착한 거짓말’은 정말 기분을 ‘거짓말’처럼 풀어주기 때문이다.

다만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거짓말’은 절대 안 될 것이다. ‘나쁜 거짓말’은 언젠가 자기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오직 ‘착한 거짓말’을 응원한다.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7)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7)

1980년 프랑스에서의 일입니다.

르네(Rene Poec’h)라는 의사는 마음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합니다.

무작위로 움직이는 로봇 하나를 빈 박스에 넣습니다.

로봇은 벽에 부딪히면서 박스 안 전체를 골고루 다녔습니다.

그다음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로봇을 본 병아리 한 마리를 박스 옆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러자 무작위로 돌아다니던 로봇이 병아리 근처에서만 움직였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르네 박사는 무려 20년 가까이 그 실험을 지속적으로 했고, 매번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2002년 박사는 초심리학 학술지에 ‘마음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로봇의 동선에 영향을 준 건 바로 병아리가 가진 마음의 힘이라는 확신을 얻은 겁니다.

조류는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 처음 본 움직이는 사물을 어미로 인식하지요.

병아리의 어미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로봇의 움직임에 변화를 준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마음의 힘에 주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긍정의 힘’을 믿고 자신의 염원을 시도해 보지만 생각처럼 되지는 않지요.

그럼 이내 포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의 힘’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하지만 특별한 사람만 되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병아리의 마음이 생명체도 아닌 로봇의 움직임을 바꾸게 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마음은 그저 어떤 욕심도 바람도 없는 순수 앞에 그 힘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과연 나에게 돈은 무엇인가?

돈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1)

정리 문진정

‘돈보다 인생이 중요하다’고 누구나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의 절반을 희생한다. 대학에 가기 위해, 결혼과 자녀 양육을 위해 또 풍요로운 노후 생활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한 지출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출퇴근용 차를 사고, 자녀 보육비를 내며, 업무 스트레스로 병원에도 가야 한다. 그리고는 5일간의 힘든 생활을 보상받는 것처럼 주말에는 과소비를 한다.

사람들은 돈을 동경하고 돈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도 정작 돈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가 없다. 돈을 버는 대로 투자하느라 빚에 허덕이면서도 더 많은 돈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지금 지갑에 있는 돈을 앞에 꺼내 놓고 바라보자.

‘돈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돈을 버느라 에너지를 소모하며 죽어가고 있는가.’

돈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교환 수단일 뿐, 그 가치는 항상 변한다. 돈으로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얻었는지, 돈 때문에 걱정이 늘지는 않았는지 따져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돈으로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돈에 대한 굳은 신념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과연 나에게 돈이란 무엇이고, 돈 때문에 무엇을 포기했는지, 돈에 대한 두려움, 욕심 등의 감정들도 충분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 돈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

어린 시절 돈을 대하는 심리 상태에 따라 나의 행동 패턴이 정해진다. 실제로 성장기에 경제적 어려움을 체험한 ‘IMF 세대’는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에 비해 ‘돈이 인생에서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높았다.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못 했거나, 친구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었던 경험 때문에 돈을 인생의 보호자이며 성공의 척도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 높은 연봉이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우리는 직업으로 정체성을 대신해 온 지 오래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직위나 연봉을 과장하여 말하는 것도 그것을 자신의 가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친구의 삶의 가치보다는 직장, 직위, 사는 집과 차가 먼저 궁금해진다면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다.

* 돈은 남보다 많을수록 좋다

주어진 조건은 무시하고 ‘더 많이, 더 좋게, 남과 다르게’를 고집한다면 현재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다. 많은 돈을 벌어도 ‘내가 이만큼 쫓아가면 남은 저만큼 가더라’며 더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항상 남보다 더 많이, 더 특별하기를 원하는 한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은 멀어진다.

* 돈으로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는 생각

기분이 우울하거나 외로울 때 새 옷을 사거나 술을 마시는 등 소비 활동으로 위안을 얻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험에서 느끼는 순간적 기쁨과 안정감은 무의식중에 남아 있다가 기분이 상할 때마다 과소비를 부추긴다. 기분 전환용 소비로 내면의 안정감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잡동사니와 빚만 늘어나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나는 돈에 대해 어떤 감정이었는지 점검해보자. 우선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던 돈에 대한 관념과 지식, 신념, 행동에서 벗어나 돈을 새롭게 정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지금과는 다른, 돈의 주인으로 사는 삶이 시작될 것이다.

참고 도서  <돈 사용설명서>  비키 로빈 ·조 도밍후에즈 · 모니크 틸포드 / 도솔

아토피가 깨끗이 사라졌어요

김소연 22세.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과 1학년

"아토피가 있었어?" "네, 아주 심했답니다."

지금 친구들은 내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른다. 나의 아토피 과거사를.

아토피는 나의 십 대 시절을 지배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팔 안쪽부터 시작되었던 아토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점점 심해지더니 목, 얼굴, 다리까지 번졌고 중·고등학교 때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얼굴에서 진물이 나고 목 주변이 다 굳어서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안 해본 치료도 없었다. 피부과에서 알레르기 검사도 해보고 한의원 가서 침도 맞고 한약도 먹었다. 이사도 가보고 벽지도 바꿔봤다. 된장국에 야채만 먹었던 때도 있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하나하나를 조심하고 신경 써야 했다. 그런데도 차도가 없었다. 일시적으로 좋아지다가도 또 악화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너무나, 지쳤다.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불을 끄고 목욕을 했다.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여기까지 말하면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전혀 그렇게 안 보여~ 이렇게 피부가 뽀얗고 예쁜데?"

반전은 이제부터다. 2007년 엄마 친구분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된 것이다. 수련을 하며 아주 오랜만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아예 고등학교를 휴학했다. 그리고 수련을 하면서 아토피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찾아 버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나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아이었다. 그러다가 새 학년이 되었는데, 나를 몰라주는 아이들, 바뀐 교실 분위기.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때의 스트레스로 아토피가 시작된 거였다. 아토피가 점점 심해졌음에도 무리해서 공부를 했다. 전교 1, 2등을 놓치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친구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 안 아픈 척했지만 외모를 예쁘게 꾸밀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다. 그 무렵 마음에 쌓인 걸 그때그때 버릴 수만 있었더라면 이렇게 심해지진 않았을 텐데….

놀랍게도 수련 3개월이 지나면서 점점 아토피가 없어졌다. 8개월 후쯤에는 언제 아토피가 있었냐는 듯이 얼굴이 깨끗해졌다. 피부가 좀 아프다가도 마음수련을 하며 그 스트레스를 버리면 금세 다시 좋아졌다. 아토피가 생겼던 이유가 확실히 ‘내 마음’ 때문이었음을 그때 알았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모두 치유되고 나서 학교에 복학했고, 한 살 어린 동생들이랑 학교도 신나게 다녔다. 나 때문에 늘 어두웠던 부모님, 눈치 보던 동생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아토피는 단순히 증상만 치료해서는 잘 낫지 않는다. 스트레스가 아토피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져 주눅이 들고 콤플렉스가 생긴다. 심하면 내 경우처럼 대인기피증, 우울증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토피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같이 치료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정말 지긋지긋했던 아토피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토피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내 마음을 들여다볼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

-하늘 나고 사는 길 -살아서 하늘나라에 나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다

하늘 나고 사는 길

하늘은 높고 구름 한 점 없구나

천지는 이것에서 나왔고 이곳으로 되돌아가구나

사람이 난 곳도 하늘땅의 조화로 난 것이다

이 하늘은 끝이 없고 말이 없으나 전지전능하여라

하늘 이전의 하늘이신 정신에 내가 있는 것이 감사하구나

세상에 있는 것이 감사하구나

내가 본정신 차리니 세상이 나와 하나이고 세상과 순리로 살구나

하늘 보고 절하고 빌었던 것도 하늘은

하늘인 본정신이 아니면 이루어준 것이 하나도 없구나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의 뜬구름과 같고

이 하늘인 정신의 나라만이 영원한 진짜의 세상이구나

인간이 완성이 되고 인간이 사는 것은

이 하늘 나고 사는 것인데

이 길은 오직 자기를 버리는 길이라

자기가 없으면 하늘 정신만 남고 그 하늘에서 다시 나는 것이라

살아서 하늘나라에 나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진 찍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

우리의 부모도 조상도 모두 다가 세상을 사진 찍은 허상 속에 살다가 갔다.

그러기에 태어나면서부터 그 마음이 사진 찍어 가진 하나의 필름과 같다.

이것은 그 필름 속의 각본에 의하여 그만큼 말하고 행하고 산다.

그러나 사진이 실이 아니듯 이것은 모두 다가 허다. 사람의 마음 그 자체가 죄요 업이다.

이 사진의 세계와 사진인 자기를 다 없애지 않고는 천국인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자기 개체의 마음의 세계가 없고 자기가 없으면 참세상은 있지 않는가.

참세상에 거듭 다시 나려면 자기와 자기의 마음의 세계가 없으면 다시 날 수가 있다.

자기와 자기의 마음세계가 일체 없으면 참세상이 나올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항시 진리인 하늘의 정신과 하나가 되었을 때 하늘에 날 것이고

하늘의 진리의 에너지와 신인 영과 혼으로 100% 완전히 나야 한다.

살아서 하늘나라에 나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가 있다.

글, 그림 우 명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등 다수가 있습니다.

-生きている世界 -?理であるこの世と一つになってこの世に生まれたら


生きている

世界

雲一つなく

晴れ渡った空に、?えきれないほど多くの

星だけが?って輝いている

その遠い昔にも

??しい人?の?史にも

この星?は何も言わずにただあった

??しかった人?は?月に?み?まれてしまったのだなあ

この世にある天?と万物万象も

いつかは?月に?み?まれてしまう

人間の心の世界にある話だ

この世では一切が生きている存在なのだなあ

この世になってみたら

この世と一つになっているものは

すべてがみな生きているのだ

?理であるこの世と一つになってこの世に生まれたら

人間の生そのものが?像である

「人は妄想に生きている」。そんな話を私たちはよく耳にしてきた

また、いつかは救世主が現れて

私たちを救?してくれるという

このような話があるのも人間が正しき世界に生きられずにいるためだ

だから宗?では「心を磨け」

「心を無くせ」と?いているのだ

人間は?際の世界に生きていると思っているが

人間が暮らしている世界とは自分が作った一つの映?フィルムの中である

?際の世界と心の世界が重ね合わされているために?付かずにいるだけなのだ

人は小さい頃から

一つのフィルムを製作し

自分の心の中に持ち

この世を撮影して作ったフィルムの中に暮らしている

試しに、今朝の食事を思い返してみればいい

自分の心の中に、自分が座っていた場所や

一?に食事をした人も、??に撮られて

自分の心の中という??の中にあるではないか

?際の世の中ではなく、自分の心の中という??の中の出?事だったではないか

朝の食事も今日一日の生活も

自分の心のフィルムの中にあるではないか

自分は?際の世の中にいたのではなく

自分の心の中にいたではないか

今この瞬間も後から振り返ってみれば

??の中にあるはずだ

今この瞬間は心とこの世が重なっているために

人は?際の世の中に生きていると錯?しているのである

?際の世の中と一つになってこの世に生きれば

??は一つも無いだろう

人間の心は、??を撮って作られたフィルムであるが

本?の世界の心には??が撮られない

この事?を知らないために

人間は、本?の世界に生まれ出るという救?に?れずにいるのである

この??の世界の中には

苦痛の荷物と生死と善?、生老病死

過去、未?、現在があるが

?理であるこの世と一つとなりこの世に生まれたら

それら一切が無い

永遠不?の生命そのものだ

文と? ウ?ミョン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

병원 봉사 연주자, ‘포유뮤직’의 이주은, 최시애 씨

취재 최창원, 사진 홍성훈

“어머니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였어요. 로비에서 음악 공연하는 걸 보게 되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지쳐 있던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눈물이 나는 겁니다. 나도 음악 전공자인데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저도 꼭 하리라 마음을 먹었지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졸업 후 전문 강사와 연주자로 활동하던 이주은(32)씨에게 그때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녀는 우선 대학에서 함께 피아노를 전공하고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는 최시애(32)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2009년 3월, 병원 연주 봉사자들의 모임인 ‘포유뮤직(For You Music)’이라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었고, 2009년 4월 1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첫 연주를 시작했다.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아해주시는 거예요. 고맙다며 손잡아주시고, 또 오라고 해주시고. 저희가 오히려 진심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지더라고요.”

한 번, 두 번 연주를 진행하는 사이, 점차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저도 악기 연주 가능한데, 함께할 수 있을까요?” 하며 동참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렇게 연주자가 2백여 명으로 늘었고, 앙상블, 관현악, 합주뿐 아니라 성악, 국악, 재즈 등 장르도 다양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 건대병원, 아산병원 등 5개 병원에서 정기 연주를 하고, 요양원 등의 요청이 있으면 방문한다.

“눈물이 나오네요” “덕분에 힘이 났어요”라며 감동하는 사람들, 꼬깃꼬깃 지폐를 건네주시던 할머니, 그 시간만 기다려진다는 환자분들. 그중에서도 음악을 듣고는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는 뇌성마비 아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2009년 5월, 보라매병원에서였다. 누워 있던 아이가 음악에 반응을 보이자, 놀란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나왔고 아이는 연주를 들으며 웃음까지 지었다. 그때부터 음악 연주회는 이 모자에게 큰 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작년 8월 이주은씨는 갑작스럽게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그녀 자신이 환자가 된 것이다.

“수술하러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번엔 제가 환자의 입장에서 음악을 듣게 되었어요. 영화음악, 재즈 같은 친근한 음악들이었는데 정말 눈물이 나도록 힘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항상 더 높은 것만을 좇았구나 싶었어요. 나도 저 사람처럼 유학 가고 싶다 등등 못 이룬 것이 너무 안타깝고, 더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이렇게 제 연주를 즐거워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구요.”

함께 연주를 해왔던 최시애씨도 “항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제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마음이 생겨가는 것 같다”고 한다.

“예전에는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무조건 여행을 갔어요. 그렇게 허전함을 달래고 충전을 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누군가를 위해 연주를 하면 마음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겁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도 더 유심히 보게 되고, 환자들과 어떻게 더 교감할 수 있을까 노력하게 되고 생활에도 활력이 생겼어요.”

정기 연주뿐 아니라 밸런타인데이 콘서트, 화이트데이 콘서트도 기획하는 이들은 앞으로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무료 레슨도 하고 싶단다.

포유뮤직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연주를 다닌다. 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등 5개 병원 정기 연주와 요양원 등의 초대 공연을 한다.

http://cafe.naver.com/musichm

자기 성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지름길

스트레스, 기업이 관리해야

중앙대병원 순환기 내과 이광제 교수는 “미국에서는 피로를 호소하는 직원을 전문 상담사와 연결해 치료까지 지원하는 멘탈 피트니스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며 “사업주가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하나의 질병이라고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례로 종업원 지원 프로그램(EAP)을 도입한 미국 기업 ‘3M’은 종업원의 생산성이 80% 가량 향상되었으며, ‘킴벌리클라크’는 건강 증진 프로그램인 ‘LIVEWELL’을 통해 건강검진, 에너지 재충전, 멘탈 헬스 관리를 실시하여, 결근율 43%, 산업재해 35%를 감소시켰다. 일본 기업 ‘소니’는 ‘Wellness Center(건강 센터)’를 설치하여 정신과 의사를 상근시키고 있으며, ‘캐논’은 보건 담당자가 상담과 스트레스 관리 교육을 연간 80시간씩 받는 등 직원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회사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고, 기업 및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SK텔레콤’은 입사한 지 10년이 지난 사원에게 1~3개월 리프레시 휴가를 주고 있으며, 삼성전자도 올해부터 일반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 정신과 검진을 확대하고, 심리상담사 수를 늘릴 계획이다.

인제대학교 스트레스 연구소 우종민 소장(백병원 신경정신과)은 “업무상 스트레스로 산업재해와 과로사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스트레스를 기업이 나서서 풀어주는 것이 생산성 향상과 위기 탈출의 관건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 고통의 원천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 그것이 스트레스 관리의 출발점”이라고 진단했다.

직장에서 행복을 유지하는 6가지 비결

미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은 미국 컨설팅업체 숀 아처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긍정적인 사고를 통해 직장에서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6가지를 제시했다.

1. ‘고마운 일’을 찾아라 : 매일 감사 리스트를 작성한다. 감사할 때 일의 성과도 높아진다.
2. 일하는 틈틈이 재미를 찾아라 : 잠시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인터넷에서 재밌는 동영상을 찾아 즐기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된다.
3. 업무 환경을 밝게 꾸며라 : 긍정적인 생각을 유도할 수 있는 사진이나 장식들로 책상을 꾸며보자.
4. ‘걱정 노트’를 만들어라 : 부정적인 느낌을 글로 쓰게 되면 걱정거리가 객관화되면서 그 크기가 반감된다.
5. 인간관계에 투자하라 :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끈끈한 유대 관계는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6. 쉬면서 업무 효율을 높여라 : 90~120분 일하고 5분 쉴 때 업무 효율이 극대화 된다.

아등바등 안 해도 늘 생기가 돋네!

전전긍긍 아등바등 안 해도
늘 생기가 돋네!

양재일 52세. K은행 본점 부서장.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


지난 90년대 말 IMF 사태가 준 충격은 컸다.
우리 회사 전체 직원의 30%가 감원되고,
지점에선 많은 동료들이 줄줄이 떠나가게 된 것이다.
떠난 자와 남은 자의 갈림길, 그 속에서 나는 남겨진 자에 속했다.
하지만 남겨진 것에 대한 안도와 감사함 한편으로 회의가 밀려왔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것,
과연 열심히 일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공허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더 이상 여태껏 해온 생활을 반복하면
안 된다는 거였다. 달라져야 했다.

 

먼저 급변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실 감각을 키우고 싶었다. 업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영어 공부는 물론 은행 업무와 관련한 전문 자격증 취득에 매진했다. 덕분에 10개 이상의 자격증을 취득했고, 인사 담당관은 “이제 더 딸 자격증이 없겠네요”라고 했다.

아침 8시, 회사에 1등으로 출근했고, 고객의 전화 한 통이면 무조건 달려갔다. 고객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방문을 했다. 토요일, 일요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온 결과, 온종일 내 책상의 전화는 불이 났다. 예금 유치액도 2배 이상 늘어났다. 실적에 자신감이 생겼고, 어느 순간엔 맘만 먹으면 목표 달성액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신바람이 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부하 직원들의 업무 태도가 눈에 점차 거슬렸다. 9시 출근, 6시면 땡~ 퇴근하는 직원들이 못마땅했다. 고객이 찾으면 휴일도 반납하고 언제든지 달려가는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 하나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왜 그리 못하냐”면서 직원들을 꾸짖었고, 직원들의 불만도 커졌다. 내 책상 앞으로 고객들은 줄을 섰지만 직원들과는 손발이 맞지 않아 일이 점점 힘겨워졌다.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직장 생활에 대한 허무함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설사 목표 달성을 하더라도 아무런 보람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바쁘게만 뛰어갈 뿐, 이유도 뜻도 없이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나름 동기 부여를 하면서 의미를 애써 찾아보았지만,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직장 생활이 이런 게 아닌데, 내가 이렇게 다니려고 직장에 들어온 게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내 얼굴이 안되어 보였는지 은행 청원경찰이 내게 마음수련 책자를 건네주었다. 마음을 버릴 수 있다는 문구가 참 맘에 와 닿았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나. 서글프면서도 씁쓸했다. 나이 먹는다는 게 두렵고 불안한 나. ‘갑자기 잘리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남보다 잘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나. 자기밖에 모른다며 면박을 주었던 직원들. 근데 돌아보니 나야말로 나밖에 몰랐다. 고객을 위한다고 휴일도 반납했지만, 결국 나를 위한 거였다. 실적은 곧 내 명예요, 자존심이었다. 목표를 세워 그 기준에 따라오면 잘한 거고, 못 미치면 못한다고 다그쳤던 직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했지만 오직 나만을 위한 최선이었다. 직원들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희생양에 다름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아찔했다. 소의 고삐를 잡고 끌고 가듯 내 잣대에 맞추려고 억지로 끌고 가려 했으니 힘들 수밖에 없었구나….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수많은 굴레에 덮어씌어 있었다. 자식도 잘돼야 했고, 동기들한테 창피 안 당하려면 승진도 해야 했다. 퇴직도 마찬가지였다. ‘직장 생활 30년 했다, 지점장이다’ 등 과거의 타이틀을 부여잡고, 낯선 세상에 던져진다는 게 두려웠다. 아등바등 잘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사이 주변 사람들은 이미 깊은 상처를 받고 있었다. 내가 오히려 그들을 힘겹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미안했다.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주위 사람들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내 잣대로 바라본 세상이 불만투성이였다면, 나로부터 벗어나 바라본 세상은 온전히 나를 거두어주는 한없이 따듯한 세상이었다. 하나하나가 다 감사했다. 잘 커주는 아이들, 아내가 정성스레 끓여준 된장국,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 그들이 달리 보였다. 그 자리에 있는 이유와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내 방식대로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게 줄어들었다.

직원들의 의견을 많이 듣고 존중하려 했다. 혹여 할 일을 잊어버린 거 같으면 메시지를 띄워주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제안해주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좀 더 많이 웃으면서 대했을 뿐인데 직원들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해주었다. 그 결과 우리 지점은 고객만족도평가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욕심으로 일을 할 땐 하는 것 없이 힘만 들더니, 지금은 많은 일을 해도 늘 생기가 돋는다.

내가 무수히 그어놓았던 선을 지우니 그 자유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앞으로 다가올 퇴직도 이젠 걱정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내 인생 제2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이제야 제대로 된 자격증을 딴 기분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참되게 살아갈 수 있는, 생애에서 가장 멋진 자격증을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