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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길었던 한 시간
박병춘 51세. 교사. 대전시 서구 복수동
1993년 늦봄, 당시 고2 담임 교사였던 나는 대전에서 경기도 송탄까지 차를 몰고 질주를 해야 했다. 무려 보름이 넘게 결석 중인 가출 학생 네 명을 붙잡아오기 위해서였다. 해맑고 순수했던 태경이와 정규, 경준이. 그리고 다른 학교 친구인 규철이도 함께 있었다.
부모님의 이혼 등 가정불화,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목표를 상실한 아이들은 결국 가출을 감행했다. 장기 결석이 되면서 네 명의 부모는 물론 담임 교사들의 애간장도 탔다. 나는 수업할 때마다 소식을 아는 사람은 제발 내게 와서 이야기해 달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그런 어느 날, 한 학생이 애들이 송탄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귀띔을 해주었다. 나는 드디어 아이들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떨려왔다.
닥치는 대로 찾아보리라, 발품만이 기적을 만들 거라 믿었다. 송탄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터미널 뒤에 있는 여관과 여인숙을 뒤지기 시작했다. 연속 허탕이었다. 나름대로 구획을 정해 터미널 뒤 굴다리를 기점으로 우측 편을 다 돌았다. 긴 시간이 흘렀다. 이제 남은 것은 좌측 편이었다. 어느 막다른 골목 여인숙 대문 한쪽이 열려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여주인은 잠을 자고 있었다. 조심조심 발뒤꿈치를 들고 복도부터 살폈다. 그리고 방 창문을 통해 복도 끝 부분에 있는 방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 담배꽁초 가득한 재떨이, 수북한 만화책, 서너 개의 등산용 가방이 눈에 띄었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역시나 녀석들의 냄새나는 옷가지 사이에서 학생증이 나왔다. 그리운 얼굴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아아, 왜 너희들이 이런 여인숙에서 머물러야 하는가! 침착해야 했다.
조심스레 여인숙을 빠져나와 대문 한쪽에 숨어 있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운동복 복장에 슬리퍼를 신은 경준이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얼굴로 경준이의 친구 같아 보이는 아이도 뒤를 따랐다. 녀석들이 여인숙의 꼬부라진 복도로 진입하는 순간, 뒤통수를 바라보며 크게 불렀다. “경준아!!” 나를 향해 돌아본 경준이는 순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옆에 있던 친구도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나는 경준이의 두 뺨을 내리쳤다. “이 한 방은 네 녀석이 미워서이다! 또 한 방은 네 녀석이 반가워서다! 들어와!” 녀석들이 머무는 방에 들어갔다. 심호흡을 하며 우선 전열을 가다듬은 후 나머지 두 명의 행방을 함께 찾아 나섰다. 그리고 다시 녀석 넷을 데리고 여인숙으로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행여나 달아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순간 나는 운명이란 것을 생각했다.
이 네 명의 운명에 선생인 내가 관여하여 진정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공부냐, 아니냐. 인생의 중대한 결정은 스스로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말했다.
“만일 너희들이 나와 함께 가고 싶지 않다면 가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결정은 너희들이 한다.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집으로 간 것이, 학교로 돌아간 것이, 훗날 너희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후회하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밖에서 1시간을 기다리겠다.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할 것이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주기 바란다.”
자정이 훨씬 넘어 있었다. 나는 차 안에서 부디 네 아이가 가출 생활을 접고 함께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설렘과 불안을 동반한 그 시간은 참으로 길고 길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아이들은 가방을 메고 주차장에 나타났다.
“선생님, 저희들 내려가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는 한 명 한 명 손을 잡고 악수했다. 왠지 모를 속울음을 삼키며…. 곧장 우리 학교로 차를 몰았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운동장 네 바퀴를 돌았다. “한 바퀴에 한 사람씩이다. 학교 잘 다니라는 선생님의 바람이야.”
네 아이 모두 교칙에 따른 징계를 받은 후 정상적인 학교생활에 복귀했다. 태경이는 잘 적응하여 졸업을 한 후 중국에 중의학을 공부하러 떠났고, 다른 학교 학생 규철이도 무사히 졸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규는 결국 자퇴하고 말았지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에 진학했고, 경준이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교단에 선 지 어느덧 23년. ‘교사란 학생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늘 생각한다. 선생이라는 직업은 어쩌면 기다림과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언제든지 변화할 가능성을 가슴 깊이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 섣불리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 믿고 기다려주는 것, 이왕이면 좀 더 오래, 남들보다 조금 더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교사의 길일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배나무>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1903년
조금 더 성장한 내 모습을 기다려 봅니다
신은솔 23세. 대학생. 부산시 남구 대연동
동아리 활동을 하며 처음 만난 그는 정말 환한 미소로 웃어주고 정말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내게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좋은 말도 많이 해주고 격려해주고 항상 웃게 해주는 고맙고 감사한 사람. 점점 그는 나에게 좋은 오빠이자 좋은 선생님이자 등불 같은 사람이 되어갔다. 어쩌면 나는 그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에 매우 힘들어하고 있는 듯했다. 그가 힘들어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나 역시 힘들었다. 그때부터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때부턴가 서로 어색해지고 장난도 칠 수 없고 웃을 수 없었다. 점점 불편해지고 서로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 화를 내기도 했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다렸다. 서로 다시 웃고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기를, 서로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마음수련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고마움이라는 이름 아래 그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직 내게만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던 마음과 그에 대한 욕심도 알게 되었다. 자꾸만 죄어오는 나 때문에 그가 지쳐갔던 거였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해바라기가 있는 시골 정원>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1906년경
가끔 생각해본다. 신은 어떤 이유로 그와 나를 만나게 하시고 어떤 이유로 멀어지게 하신 것일까.
그 뜻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그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사람들이 맺어가는 만남과 헤어짐, 그 씁쓸한 관계의 모습을 본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의 모습이었다.
잘해줄 때는 모든 것을 다 줄 듯하다가 기대에 못 미친다 싶으면 돌아서버리고 마는 냉정한 내 마음. 한결같이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는 내 마음. 그걸 알고 나서야 그가 갑자기 무관심하게 대하며 외면했던 것조차 감사했다. 그가 있어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누군가와의 만남에서든 부드럽게 다가가고 여유롭게 가까워지고 따뜻하게 바라봐줄 줄 아는, 좀 더 크고 넓은 마음의 내가 되기를 기다린다.
기다림, 행복해지는 방법
구은희 43세. 미국 어드로이트 칼리지 학장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오늘의 세상이 우리들로 하여금 기다릴 줄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끓는 물을 붓고 3분이면 먹을 수 있는 컵라면도 모자라서 이제는 동전을 넣으면 바로 끓인 라면이 나오는 자동판매기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이제는 기다리지 못하는 병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는 ‘인터넷’이라는 것도 한몫하지 않았나 한다. 우표를 붙일 필요도, 우체통까지 걸어가 편지를 부칠 필요도 없어졌으며, 그 편지가 받는 이에게 도착할 때까지 몇 날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 시간들도 없어졌다. 즉각 답변을 받아볼 수 있는 전자우편이 우리들로 하여금 짧은 시간조차 조바심을 내게 만드는 건 아닐까?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가르데 호수 주변의 말세진느>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1913년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장장 세 시간 동안 바깥에서 기다렸던 적이 있다. 오늘날처럼 휴대전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연락할 길도 없던 차라 약속한 곳에서 그냥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30분이 지날 때는 ‘길이 막히나 보다’ 생각했는데 1시간을 넘기면서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걱정이 들었고, 2시간이 다 되어가자 ‘약속을 잊었나?’ 싶었다. 그래도 금방 친구가 저쪽에서 달려올 것 같아서 30분만 더 기다리자 마음먹었다. 그렇게 2시간 반이 지난 후에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하니 집에서 받는 게 아닌가. 약속에 대한 착오가 있었음을 깨닫고 미안해한 그 친구는 당장에 약속 장소로 나오겠다고 했다. 30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오겠다는 친구에게 차마 ‘내가 30분을 더 기다려야 하니 다음에 만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30분을 더 기다려서야 친구를 만날 수 있었고, 그것은 내 생애에 있어 최장 시간 누군가를 기다려본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잘 기다리는 편이다. 어쩌면 그때 기다리는 방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은 꼭 올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게 되므로 기다림 자체가 행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사실, 그와 같은 일이 오늘날 일어난다면 바로 휴대전화로 통화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렇게 긴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안 올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고 시간을 유용하게 쓰는 방법이라고 사람들도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기다림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기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도 무척 소중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때 내가 그 친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때로는 행복해지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 누군가를, 아니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순간 또한 행복의 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급함을 버리고 행복의 시간들을 만끽하며 다가올 희망의 그 시간들을 위하여 기다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