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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부모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립니다

2003년 소리도 등대로 널리 알려진 전남 여수 연도(鳶島)라는 섬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여수에서 뱃길로 두 시간, 주민들이 저 바다 건너가 곧 일본 ‘대마도’라고 늘 말하듯이 그만큼 육지에서 먼 섬.
끝없이 펼쳐진 옥빛 바다와 말없이 서 있는 등대….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객지로 떠나고,
연세 많은 어르신들끼리 밭농사나 작은 어업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육지와 많이 떨어져 있기에 외로움도 더 크신 듯했다.

어버이날이 다가왔다.
카네이션이라도 달아드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웬 꽃이야? 아이고, 고마워라!”
“기대도 안 했는데 꽃을 다 달게 됐네.”
어르신들이 너무나 좋아하셨다. 손을 잡고 흔들기도 하시고, “뭐 이런 걸 준비했어” 하시면서도 입가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꽃 다니까 기분이 더 젊어져버리네” 하시는데 정말 훨씬 젊고 화사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좋아하실 줄은 몰랐는데, 그 모습을 뵈니 내가 다 행복해졌다.

그 다음 해부터 카네이션을 직접 만들어 달아드리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육지에 있는 아내가, 생화를 사서 하나하나 만들어 보내주었다. 100송이가량의 꽃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달아드렸다. 5월이면 한창 농사철이라 댁에 안 계시는 분들이 훨씬 많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분이라면 다들 논으로 밭으로 바다로 일하러 가 계신 것이다. 밭에서, 들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그때 꽃을 달아드렸다. 못 뵙게 되면 ‘어버이날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오’란 쪽지와 함께 마루에 꽃을 남겼다.

“올해도 또 하네!” 하며 반가워하시고 “술이나 한잔 하고 가~” 하며 붙잡으시는 통에 섬 한 바퀴를 도는 데 하루 가까이 걸리기도 했다. 특히 섬 지역의 부모님들에게 카네이션의 의미는 조금 더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버이날은 어버이들의 날이기보다는 자식들의 날이 아닌가 싶다. 자식들이 한 번쯤 부모를 생각할 수 있는 날인 것이다. 섬에 홀로 남겨진 부모님들은 어버이날에 즐겁기가 힘들다. 때로 가정사와 사업 실패 등으로 발길이 끊긴 자식들, 연락이 없는 자식들을 기다리는 부모에게는 차라리 고통의 날이기도 하다. 자식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더욱 절절해지는 날, 그럴 때 작은 꽃 한 송이가 주는 위안은 참 큰 것이었다.

한번은 등대 쪽 외진 곳에 사시는 할머니께 꽃을 달아드렸을 때였다.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데 눈물을 보이셨다. “이렇게 꽃을 다니, 누군가 나도 찾아보는구나 싶어. 다들 그런 마음일 거여. 고마워….”

한 번 두 번 정을 나누는 날들이 계속되자 점차 주민들께서 ‘아들’ ‘동생’ 그렇게 부르며 다가와주셨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우리’라는 용어를 써주셨다. ‘우리’ 소장님, ‘우리’라는 말은 굉장히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셔서 더욱 감사했다. 관사에 가보면 어느 틈에 오셔서 두고 가신 호박고지, 작은 생선들, 그리고 반찬거리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때로 자녀 문제, 가정의 대소사 등 속 깊은 고민들도 꺼내놓으셨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으시는 것 같았다. 해결하기 힘든 사정들을 들으며 마음도 아프고 안타깝기도 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하는 것을 매번 느꼈던 것 같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연도에서 5년 동안의 근무를 마치고, 2008년에 화정면 백야도로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일은 계속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주위에서 좋은 일이라며 카네이션을 만드는 걸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희망을 잃어가는 무기력한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좀 더 현실적인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백야도는 3년 전 육지와 연결된 백야대교가 완공되어, 무언가 조금만 개선하면 훨씬 생활이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백야도에 맞는 농산물 메이커를 개발하면 좋을 것 같았다. 백야도는 좋은 날씨와 맑은 공기, 바닷바람으로 인해 찰옥수수나, 고구마 등을 키우기에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주민들에게 그런 작물들을 심을 수 있도록 권유했다. 그리고 ‘백야도 호박고구마 캐기’ 등 시민들 대상으로 행사도 주최하고, 시내 각지를 다니면서 판매처를 찾았다.

처음에는 장사꾼이라며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진심은 통하는 법이라 점차 품질이나 맛을 인정받으면서 작년에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우리가 이제 뭘 하겠어…” 했던 어르신들의 마음에 조금씩 힘이 생기는 것을 보며 나도 힘이 났다.

작년에 본점으로 발령을 받으며 다시 육지로 나왔는데, 지금도 섬마을 어르신들은 놀러오라는 전화도 하시고, 당신들로서는 아주 귀한 것들을 종종 보내오신다. 그럴 때마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이런 마음을 받을 자격이 있나 돌아보게 된다.

우리 어머니는 봇짐장수를 하며 우리를 키우셨다. 어머니의 ‘봇짐’은 항상 열심히 살라고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젊은 시절엔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고, 어느 정도 살 만해지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늘 죄송스러운 어머니…. 섬마을 어르신들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때면 더욱 어머니 생각이 난다.

올해도 관내의 조그마한 섬 ‘하화도’의 부모님들을 찾아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것이다. 그날만이라도 꽃처럼 환하게 웃으시길 바라며….

백형선 53세. 전남 여수 농협 경영관리 상무

‘아파트 조명 바꾸면 무당벌레 살릴 수 있다’ 연구 발표한 소녀 과학자 이환희 양


“아파트 옥상 조명 때문에 수많은 무당벌레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한 소녀의 주장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은 바로 ‘아파트 옥상 조명이 곤충 생태에 미치는 영향’이란 제목으로 무당벌레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한 이환희(잠실중 3학년. 16세)양. 2년간 호기심 많은 소녀의 눈에 포착된, 작지만 소중한 무당벌레의 이야기는 테드엑스(TEDx)와 유튜브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조명을 끄거나 무자충 램프로 바꿔 무당벌레를 살리자는 소녀의 제안에는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 학자들까지 칭찬과 격려를 쏟아냈다. 작지만 자연을 꼭 닮은 큰마음을 지닌 소녀, 이환희양을 만나보았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2년 전의 그날은 환희에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식을 보러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조명 위에 새까맣게 타 죽은 수십 마리의 무당벌레를 보게 된 것. 그날도 그 다음 날도 하루에 적게는 50마리에서 많게는 70마리까지의 무당벌레가 발견됐다.

“왜 죽었을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텃밭을 가꾸며 생태계의 중요성을 체험한 환희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당벌레는 어디에서 날아 왔을까?” “만약 이 무당벌레가 살아 있다면 어땠을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은 관찰과 연구로 이어졌다. 일지를 기록하고 책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조명 전문가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고, 죽음의 원인이 아파트 조명 때문이란 걸 알아냈다. 옥상에 설치된 조명은 ‘메탈할라이드’라는 것으로 자외선을 방출, 무당벌레를 유인했고, 무당벌레는 서식지도 없이 뜨거운 조명의 빛에 그대로 노출되고 마는 것이다.

처음 무당벌레 죽은 걸 보았을 때 어땠나요?

너무 끔찍하고 슬펐어요. 그 얘길 엄마한테 했더니 “정말 이상하다. 왜 죽지? 무당벌레는 되게 중요한 벌레 아니니? 큰일 났다” 하시는 거예요. 저도 계속 관심을 갖게 됐고, 때마침 방학 숙제로 탐구 계획이 있어서 이걸 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당벌레가 중요하다는 건 언제부터 알았나요?

유치원 들어가기 전인데, 그때 본 그림책이 너무 생생해요. 진딧물, 개미, 지렁이, 무당벌레랑 돼지가 나와요. 나쁜 돼지가 텃밭을 기르는데, 좋은 곤충을 다 내쫓아요. 대신 진딧물과 배추벌레가 신나게 배추, 무를 막 갉아먹고요. 돼지가 그제야 뜨끔하는 거예요. ‘내가 내쫓은 애들이 좋은 애들이었구나’ 하고 다시 불러들여요. 그래서 다시 배추랑 무도 잘되는 얘기였어요. 무당벌레 한 마리가 일생 동안 잡아먹는 진딧물이 4천 마리래요. 무당벌레는 꼭 필요한 친환경적인 농약이구나, 그때 알았죠.

탐구 숙제로 끝내지 않고 무당벌레를 꼭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요?

무당벌레는 대개 갈대밭 아니면 늪지에 살아요. 우리 아파트 근처랑 환경이 비슷한 거예요. 그럼 희귀하고 다양한 무당벌레들이 와서 죽을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어느 날 보니까 진짜로 책에서 봤던 희귀한 애들이 다 있는 거예요. 완전 노란 색깔에 머리가 하얀 무당벌레, 남생이무당벌레도요. 되게 귀여운 애들인데 여기 와서 죽었구나…. 넘 불쌍했어요.

어릴 때부터 자연과 가까이 지낸 편이었나요?

초등학교 때 엄마 아빠가 집 근처에 텃밭을 가꾸셨어요. 배추, 무, 토마토도 심고 소변 받아서 거름도 주고…. 밭일이 재밌어서 저도 매일 갔고, 그렇게 자연하고 친구하면서 키우고 뿌린 만큼 결과가 온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무당벌레 한 마리가 죽은 게 아니라 자연의 일부가 죽은 거라는 걸. 아무런 이유 없이 곤충을 함부로 죽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해로운 곤충이라 해도 다른 좋은 곤충들의 먹이가 되어주어서 생태계가 돌아가는데, 지금은 조명이 무당벌레를 잡아먹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상한 먹이사슬이 됐어요. 작고 여리다고, 나랑 상관없다고 얕보는 걸 보면 속상해요.

환희양은 먼저, ‘조명의 위험성’을 알리고 싶었다 한다. 아파트 주민들에게 홍보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호응해주신 분들도 있었지만, 학생이 쓸데없는 짓 한다며 핀잔도 듣고 면박도 당해야 했다. 아파트 관리소장님과 구청 담당자를 찾아가 인터뷰도 요청했다. 하지만 공통된 대답은 ‘어렵다’ ‘안 된다’였다. 옥상 조명을 벌레에 무해한 무자충 램프로 바꾸면 경제적으로 2~3배 더 비용이 들고, 조명을 끄면 최신식 아파트로 보이지 않아 집값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무당벌레의 죽음을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당장에 무당벌레 한 마리라도 살리고 싶었던 환희가 문득 생각한 것은 텃밭 가꾸기였다. 스티로폼에 흙을 담아 나르고, 양동이로 물을 길어 나르고…. 무당벌레를 향한 한 소녀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고추, 토마토, 상추 사이로 무당벌레가 살아 움직였다.

옥상 텃밭에서 살아 있는 무당벌레를 처음 발견했을 때 너무 좋았겠어요.

네. (웃음) 손으로 툭 치면 날아가잖아요. 와, 살렸다. 살았다~!! 너무 기뻐서 막 소리를 질렀어요. 생명을 살렸으니까요. 그동안 불을 못 꺼줘서 미안했는데, 조금 덜 미안했고요.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흙을 옥상까지 옮기는 게 너무 힘들어서 텃밭을 많이 가꾸지는 못했거든요.

어른들이 보기에 환희가 참 기특한데, 환희는 누가 제일 고맙고 감사해요?

엄마요. 솔직히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많이 응원해주고 기다려줬어요. 그래서 호기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수 있었어요. 또 엄마 말씀 듣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 다녀온 것도 도움이 됐어요. 수련하면서 우리가 다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 뒤로도 그런 생각이나 행동이 저절로 되는 거예요. 덕분에 연구가 잘된 거 같아요. 무당벌레가 슬프면 나도 슬프니까요.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 다녀오고 무당벌레를 연구하면서 자기 자신도 많이 돌아봤나 봐요.

반성을 많이 했어요. 전엔 제 의견이 안 받아들여지면 화내고 잘 삐쳤거든요. 그럴 때마다 엄마가, 네 생각만 옳은 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의 생각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섭섭하고 기분 나쁘다고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다 버리라고 하셨어요. 만약에 마음수련을 안 했다면 엄마 말도 잔소리처럼 들리고, 속상해했을 거예요. 근데 수련하면서 그때그때 마음을 버리니까 지치지 않고 연구도 계속 해나갈 수 있었어요. 다른 의견도 수용할 줄 알게 되니까 동네 어른들도 제 얘기를 들어주시더라고요.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어른들의 칭찬과 격려, 꾸중 덕분이었다”고 환희는 의젓하게 말했다. 계속 연구해보라고 격려해주신 과학 선생님도 있었고, 우연히 알게 된 경원대 정석 교수님은 환희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려주어, 그걸 계기로 테드엑스잠실(TEDx Jamsil)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테드엑스는 ‘좋은 아이디어를 널리 퍼트리자’는 취지를 살려 독자적으로 개최되는 강연회. 강연 내용이 동영상 전문 인터넷 커뮤니티 ‘유튜브’에 올려지면서 트위터, 페이스북을 통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조명을 끄거나 벌레에 해가 없는 무자충 램프로 바꾸어 무당벌레를 살리자는 소녀의 제안에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는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부화한 거북이 새끼들도 육지의 빛 때문에 엉뚱한 방향으로 기어가는 등 조명 공해가 많은 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참 좋은 연구를 했다”고 격려했다.

앞으로의 계획과 꿈을 말해줄래요?

계속해서 조명을 끄거나, 벌레에 해가 없는 무자충 램프로 바꾸자고 홍보할 거예요. 우리나라는 다 그렇게 환경을 생각하는 조명으로 바꾸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다음에 제인 구달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 ‘희망의 자연’이란 책에서요, 동물과 교감하고 자연과 대등하게 사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어요.

꿈과 희망을 말하면서도 환희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이제 곧 5월, 무당벌레는 5월을 기점으로 아파트로 날아들기 때문이다.

“저도 어디에서 읽었는데요, 시애틀의 인디언 추장이 이렇게 말했대요.”

2011년,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향하는 한 16살 소녀의 간절한 외침이기도 하다.

꼬마 과학자가 내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경원대 도시계획학과 정석 교수

이환희양의 보고서에는 왜 이런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의 동기, 무당벌레의 생태와 곤충 자원의 중요성, 그리고 무려 1년에 가까운 관찰 기록이 충실히 담겨 있었다.

유익 곤충인 무당벌레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으로 옥상 조명을 현재의 메탈할라이드 램프에서 곤충을 유인하지 않는 무자충 램프로 교체하자는 것과, 옥상에 무당벌레의 서식 공간이 될 도시텃밭을 가꾸자는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무당벌레의 죽음을 유심히 보고 연구를 시작했던 그 ‘마음’이 참 대단했다. 또한 연구는 협력이 중요한데, 혼자서만 하지 않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장님, 송파구청 담당자, 또 관련 분야 전문가들을 찾아 의논하고 도움을 받으며 진행한 점들도 좋았다. 그 결과 2개의 답도 스스로 밝혀냈다. 조명 기구 교체와 텃밭 조성. 텃밭은 직접 가꾸며 무당벌레가 살아 있는 것도 확인했다. 학생으로서 나름 큰 성과이며, 연구자로서 필요한 끈기와 협력 등 자질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보인다.

멋을 내기 위해, 재산 가치를 높이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 휘황찬란 불야성을 밝히는 동안 수천 마리의 무당벌레가 죽어가고 있음을 잘 알지 못했던 내게 꼬마 과학자는 진실을 알려주었다. 앞으로 아파트 주민들과 이 문제를 함께 느끼고 마음을 모으는 일도 중요하겠고, 많이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함께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소박한 아름다움 잃지 않았던 어머니처럼

몸뻬 바지에 낡은 셔츠,
멋이랑 담을 쌓고 선머슴처럼 일만 하시던
어머니가 예기치 않게 학교에 찾아오셨습니다.

교실 창문 너머로 힐끔 보았던
한복을 입은 어머니 모습.
왜 그리 부끄럽던지 이내 외면했지만
파꽃처럼 수수하게 서 계시던 어머니의 그 모습이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들녘에서
매운 몸통에 피어난 파꽃을 보면
어려운 시절 살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파꽃나비 경기도 화성. 2008년 5월

꽃들이 속삭이네요… 환하게 피어나라고

깽깽이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천마산. 2004년 4월

누구보다 먼저 봄을 알리는 야생화가 서둘러 꽃을 피우는 이유는 햇빛 때문이지요. 키 큰 풀이나 나무가 무성한 잎으로 햇빛을 가리기 전에 먼저 꽃을 피우고 씨앗을 뿌리려는 나름의 생존 전략입니다. 연두색 새순이 아기 손만큼 올라온 나무 아래로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노란색, 흰색, 보라색, 분홍색 꽃들이 벌이는 꽃 잔치는 봄 산행 길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기쁨입니다. 늘어진 가지마다 축복 같은 새순이 쏟아지고 꽃들이 발밑을 간질이는 그곳. 얼어붙은 마음에도 우리 꽃 하나 환하게 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앵초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천마산. 2004년 4월

사진, 글 김선규

작은 영혼들이, ‘돌아가라’ 말합니다


 
고무줄놀이
캄보디아에서 만난 아이들입니다. 익숙하거나 낯선 길 위에서 얻은 작은 영혼들…. 앞만 보고 내달리기만 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돌아보니 가늠할 수 없는 울림이 가슴을 저며 옵니다. 잊고 있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다시 돌아갈래
어릴 적엔 빨리 어른이 되길 누구보다 원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힘없는 어린 처지가 싫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오히려 어른이 된 내가 싫었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젠 어디가 길인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낯선 길 위에서 만난 한 소녀의 가늠할 수 없이 우아한 미소 앞에 서서 이젠 행복하렵니다.

 
 
누드 사진 한 장
투둑대며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실오라기 하나 남김 없이 홀라당 벗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고인 빗물에서 뒹굴며 물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이 번쩍 눈에 감겨왔지요.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요. 허락이야 나중에 사탕 몇 개랑 바꿔 얻자는 묘수를 쓰며 그냥 셔터를 누를 수밖에요. 쉴 새 없이 웃고 떠들며 장난을 멈추지 않습니다. 벗어던졌던 옷을 빗물에 담그며 딴에는 빨래질을 합니다. 가엾은 애들 어미에겐 빨랫거리만 늘어날 일인데, 사진사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작은 우주
한순간에 쏘옥 빠져들었습니다.
잘 웃지도 않고 별다른 몸짓도 보여주지 않는
수줍은 한 아이에게 그냥 반해버렸습니다.
커다란 눈자위에 담긴 맑고 투명한 눈동자.
세상 모두 담아도
채워지지 않을 만큼 가늠할 수 없이 깊기만 합니다.
아무런 모자람 없이 그렇습니다.

 

천사의 새치기
처음엔 요 녀석에게 별 관심이 없었답니다. 그 옆에 아주 귀여운 놈이 따로 있었거든요.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 컷 건지려 했지요. 이제 되었구나 싶어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살살 눈치만 보며 기웃거리던 요 녀석이 불쑥 뛰어든 겁니다. 도저히 내칠 수 없는 환한 웃음을 코에 걸고…. 어쩌겠습니까. 마냥 따라 웃을 수밖에요.

 

이제 나서는 길
이젠 가야 한다며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픔이 짙은 땅입니다.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그 땅입니다. 그렇지만 숨소리 같은 하얀 미소가 더없이 곱기만 한 그런 곳입니다. 주려고 간 줄 알았다가 오히려 한가득 받아오기 마련인,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이 사내 녀석처럼 맑은 웃음다발을 들이대면서 다시 돌아오라며 성화이니 어쩌겠습니까. 가야지요.

사진가 임종진은 <월간 말>과 <한겨레신문> 사진기자를 지냈으며, 오랫동안 ‘대상과의 소통을 통한 사진 찍기’ 강좌를 진행해왔다.
사진집으로 <천만 개의 사람꽃>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공저) 등이 있다.
사진 출처 <천만 개의 사람꽃>(넥서스BOOKS) : 사진가 임종진이 세계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나의 오늘을 있게 한 소중하고 감사한 이야기들, 그 기다림에 관하여….

내 생애 가장 길었던 한 시간

박병춘 51세. 교사. 대전시 서구 복수동

1993년 늦봄, 당시 고2 담임 교사였던 나는 대전에서 경기도 송탄까지 차를 몰고 질주를 해야 했다. 무려 보름이 넘게 결석 중인 가출 학생 네 명을 붙잡아오기 위해서였다. 해맑고 순수했던 태경이와 정규, 경준이. 그리고 다른 학교 친구인 규철이도 함께 있었다.

부모님의 이혼 등 가정불화,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목표를 상실한 아이들은 결국 가출을 감행했다. 장기 결석이 되면서 네 명의 부모는 물론 담임 교사들의 애간장도 탔다. 나는 수업할 때마다 소식을 아는 사람은 제발 내게 와서 이야기해 달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그런 어느 날, 한 학생이 애들이 송탄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귀띔을 해주었다. 나는 드디어 아이들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떨려왔다.

닥치는 대로 찾아보리라, 발품만이 기적을 만들 거라 믿었다. 송탄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터미널 뒤에 있는 여관과 여인숙을 뒤지기 시작했다. 연속 허탕이었다. 나름대로 구획을 정해 터미널 뒤 굴다리를 기점으로 우측 편을 다 돌았다. 긴 시간이 흘렀다. 이제 남은 것은 좌측 편이었다. 어느 막다른 골목 여인숙 대문 한쪽이 열려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여주인은 잠을 자고 있었다. 조심조심 발뒤꿈치를 들고 복도부터 살폈다. 그리고 방 창문을 통해 복도 끝 부분에 있는 방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 담배꽁초 가득한 재떨이, 수북한 만화책, 서너 개의 등산용 가방이 눈에 띄었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역시나 녀석들의 냄새나는 옷가지 사이에서 학생증이 나왔다. 그리운 얼굴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아아, 왜 너희들이 이런 여인숙에서 머물러야 하는가! 침착해야 했다.

조심스레 여인숙을 빠져나와 대문 한쪽에 숨어 있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운동복 복장에 슬리퍼를 신은 경준이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얼굴로 경준이의 친구 같아 보이는 아이도 뒤를 따랐다. 녀석들이 여인숙의 꼬부라진 복도로 진입하는 순간, 뒤통수를 바라보며 크게 불렀다. “경준아!!” 나를 향해 돌아본 경준이는 순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옆에 있던 친구도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나는 경준이의 두 뺨을 내리쳤다. “이 한 방은 네 녀석이 미워서이다! 또 한 방은 네 녀석이 반가워서다! 들어와!” 녀석들이 머무는 방에 들어갔다. 심호흡을 하며 우선 전열을 가다듬은 후 나머지 두 명의 행방을 함께 찾아 나섰다. 그리고 다시 녀석 넷을 데리고 여인숙으로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행여나 달아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순간 나는 운명이란 것을 생각했다.

이 네 명의 운명에 선생인 내가 관여하여 진정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공부냐, 아니냐. 인생의 중대한 결정은 스스로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말했다.

“만일 너희들이 나와 함께 가고 싶지 않다면 가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결정은 너희들이 한다.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집으로 간 것이, 학교로 돌아간 것이, 훗날 너희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후회하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밖에서 1시간을 기다리겠다.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할 것이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주기 바란다.”

자정이 훨씬 넘어 있었다. 나는 차 안에서 부디 네 아이가 가출 생활을 접고 함께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설렘과 불안을 동반한 그 시간은 참으로 길고 길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아이들은 가방을 메고 주차장에 나타났다.

“선생님, 저희들 내려가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는 한 명 한 명 손을 잡고 악수했다. 왠지 모를 속울음을 삼키며…. 곧장 우리 학교로 차를 몰았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운동장 네 바퀴를 돌았다. “한 바퀴에 한 사람씩이다. 학교 잘 다니라는 선생님의 바람이야.”

네 아이 모두 교칙에 따른 징계를 받은 후 정상적인 학교생활에 복귀했다. 태경이는 잘 적응하여 졸업을 한 후 중국에 중의학을 공부하러 떠났고, 다른 학교 학생 규철이도 무사히 졸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규는 결국 자퇴하고 말았지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에 진학했고, 경준이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교단에 선 지 어느덧 23년. ‘교사란 학생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늘 생각한다. 선생이라는 직업은 어쩌면 기다림과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언제든지 변화할 가능성을 가슴 깊이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 섣불리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 믿고 기다려주는 것, 이왕이면 좀 더 오래, 남들보다 조금 더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교사의 길일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배나무>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1903년

조금 더 성장한 내 모습을 기다려 봅니다

신은솔 23세. 대학생. 부산시 남구 대연동

동아리 활동을 하며 처음 만난 그는 정말 환한 미소로 웃어주고 정말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내게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좋은 말도 많이 해주고 격려해주고 항상 웃게 해주는 고맙고 감사한 사람. 점점 그는 나에게 좋은 오빠이자 좋은 선생님이자 등불 같은 사람이 되어갔다. 어쩌면 나는 그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에 매우 힘들어하고 있는 듯했다. 그가 힘들어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나 역시 힘들었다. 그때부터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때부턴가 서로 어색해지고 장난도 칠 수 없고 웃을 수 없었다. 점점 불편해지고 서로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 화를 내기도 했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다렸다. 서로 다시 웃고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기를, 서로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마음수련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고마움이라는 이름 아래 그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직 내게만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던 마음과 그에 대한 욕심도 알게 되었다. 자꾸만 죄어오는 나 때문에 그가 지쳐갔던 거였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해바라기가 있는 시골 정원>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1906년경

가끔 생각해본다. 신은 어떤 이유로 그와 나를 만나게 하시고 어떤 이유로 멀어지게 하신 것일까.

그 뜻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그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사람들이 맺어가는 만남과 헤어짐, 그 씁쓸한 관계의 모습을 본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의 모습이었다.

잘해줄 때는 모든 것을 다 줄 듯하다가 기대에 못 미친다 싶으면 돌아서버리고 마는 냉정한 내 마음. 한결같이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는 내 마음. 그걸 알고 나서야 그가 갑자기 무관심하게 대하며 외면했던 것조차 감사했다. 그가 있어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누군가와의 만남에서든 부드럽게 다가가고 여유롭게 가까워지고 따뜻하게 바라봐줄 줄 아는, 좀 더 크고 넓은 마음의 내가 되기를 기다린다.

기다림, 행복해지는 방법

구은희 43세. 미국 어드로이트 칼리지 학장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오늘의 세상이 우리들로 하여금 기다릴 줄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끓는 물을 붓고 3분이면 먹을 수 있는 컵라면도 모자라서 이제는 동전을 넣으면 바로 끓인 라면이 나오는 자동판매기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이제는 기다리지 못하는 병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는 ‘인터넷’이라는 것도 한몫하지 않았나 한다. 우표를 붙일 필요도, 우체통까지 걸어가 편지를 부칠 필요도 없어졌으며, 그 편지가 받는 이에게 도착할 때까지 몇 날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 시간들도 없어졌다. 즉각 답변을 받아볼 수 있는 전자우편이 우리들로 하여금 짧은 시간조차 조바심을 내게 만드는 건 아닐까?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가르데 호수 주변의 말세진느>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1913년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장장 세 시간 동안 바깥에서 기다렸던 적이 있다. 오늘날처럼 휴대전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연락할 길도 없던 차라 약속한 곳에서 그냥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30분이 지날 때는 ‘길이 막히나 보다’ 생각했는데 1시간을 넘기면서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걱정이 들었고, 2시간이 다 되어가자 ‘약속을 잊었나?’ 싶었다. 그래도 금방 친구가 저쪽에서 달려올 것 같아서 30분만 더 기다리자 마음먹었다. 그렇게 2시간 반이 지난 후에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하니 집에서 받는 게 아닌가. 약속에 대한 착오가 있었음을 깨닫고 미안해한 그 친구는 당장에 약속 장소로 나오겠다고 했다. 30분이나 걸리는 거리를 오겠다는 친구에게 차마 ‘내가 30분을 더 기다려야 하니 다음에 만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결국 30분을 더 기다려서야 친구를 만날 수 있었고, 그것은 내 생애에 있어 최장 시간 누군가를 기다려본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잘 기다리는 편이다. 어쩌면 그때 기다리는 방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은 꼭 올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게 되므로 기다림 자체가 행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사실, 그와 같은 일이 오늘날 일어난다면 바로 휴대전화로 통화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렇게 긴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안 올지도 모른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고 시간을 유용하게 쓰는 방법이라고 사람들도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기다림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기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도 무척 소중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때 내가 그 친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때로는 행복해지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 누군가를, 아니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순간 또한 행복의 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급함을 버리고 행복의 시간들을 만끽하며 다가올 희망의 그 시간들을 위하여 기다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나의 오늘을 있게 한 소중하고 감사한 이야기들, 그 기다림에 관하여….

건강한 나, 그날이 오면…

장유진 17세. 시인. 경기도 안산시 초지중학교 3학년

엄마와 나는 일찍이 기다리는 것에 도가 텄습니다. 2002년 7월 7일 저녁 7시 이후부터입니다. 뇌동정맥 기형. 8살 때 처음 발병된 그 병 때문에 내 삶은 건강하기만을 기다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1년에 한 번꼴로 중환자실로 실려 갑니다. 엄마는 항상 병원 복도에서 면회 시간을 기다리고 중환자실의 나는 무서움과 고통 속에서 엄마를 만날 순간만 기다립니다. 게다가 후유증으로 왼편 마비가 와서, 일상에서 무엇을 하든 남들보다 2~3배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주변 사람들을 또 기다리게도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 입원해 있을 때였습니다. 겨울이었는데도 눈이 한 번도 오지 않아, 언제 눈이 올까 기다렸습니다. 그날은 일기예보에서 눈이 온다고 해서 잔뜩 기대를 하며 창밖을 계속해서 보고 있었는데도 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잠자리에 들기 전,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리자 하며 창밖을 보았는데 마침 눈이 내렸습니다.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아, 조금 더 기다리기를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늘 무언가를 꿈꾸고 기다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어느새 따듯한 봄이 오듯, 정말 믿고 기다린다면 그 꿈은 꼭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지금도 엄마와 나는 ‘건강’이라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건강해지면 코피 터지게 공부하고 싶은 나의 소망과, 딸에게 하고 싶은 공부를 다 시켜주고 싶은 엄마의 바람을 말입니다. 그 기다림은 분명 곧 얼마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항상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기다림도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예쁜 꿈 꾸며 건강을 기다립니다.

입원을 하니

다시는

입원하지 않겠다는 엄마와의 약속

어겨버렸네

그래도 엄마는

좋다네

내가 폐렴이라서…

그래도 나는 안 좋네

학교 못 가서

엄마는 좋다네

학교 못 가고 병원에 입원했어도

하루 종~일 내가 옆에 있어서

갑자기

나도 좋아졌네

긍정적인 엄마 생각 덕에…

“유진아,

이번에만 입원하고

‘다시는 아프지 말고’

다시는 입원하지 말자”

“네, 엄마”

“고마워

넌 나의 희망이고

나의 보물이야”

“나두요”

입원을 하니

긍정적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엄마와의 사랑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아터 호숫가의 시골집(여름 풍경)>

캔버스에 유채. 110×110cm. 1914년

라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조아람 25세. 애견 미용사. 충남 천안시 두정동

  생각만 해도 코끝이 찡해온다. 2009년 12월 20일.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날. 2년을 나와 동고동락한 나의 작은 천사 라미를 잃어버린 날….

가난한 대학 시절 애견과 전공이었던 나는 강아지를 분양받으러 가게 되었다. 여러 강아지들 사이에서 라미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태어난 지 100일째라는 너무 작고 약한 푸들, 너무 약하다며 더 튼튼한 강아지를 데려가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라미에게 계속 눈길이 갔다. 나 역시 2.5kg이라는 작고 약한 몸으로 태어났기에 왠지 모르게 끌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 생애 처음으로 한 이불에서 자며 사랑으로 보살피는 반려견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돈이 없어도 맛있는 거 사주고 싶었고 멋진 집도 사주고 싶었다. 라미는 활달하고 천방지축인 성격이었다. 머리를 감기는 데 도망쳐서 감던 머리를 잡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기도 했고, 똥오줌 가리는 걸 가르칠 때는 오히려 내게 인내심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 문 앞으로 달려 나와 한결같이 반겨주었다. 첫 취업 후 힘든 일 때문에 녹초가 되던 나에게 라미는 그렇게 힘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세 달쯤 같이 지냈을 때, 서울에 놀러갔다가 라미를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여의도가 잠길 정도의 장마 때였는데, 3일 내내 울면서 우산도 없이 잠도 자지 않고 거의 굶다시피 하며 라미를 찾아다녔었다. 드디어 어느 초등학교 쪽에서 라미를 찾았을 때, 그토록 무섭게 내리치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었다. 라미를 찾은 후에야 배고픔이 느껴졌고 다리 힘도 풀렸으며 미친 듯이 잠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마치 내가 낳은 자식 같았다고나 할까. 결혼은 안 했지만 아낌없이 주고 보살펴주는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라미는 참 씩씩했다. 힘든 바이러스장염도, 눈이 다치는 어려움도 이겨냈고, 나는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하기도 했다. 그 연약한 라미가 어느새 새끼를 낳을 때가 되었을 때는 그 경이로움에 밤새 뜬눈으로 기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해준 것보다 라미가 나에게 주었던 것들이 훨씬 컸다. 라미를 키우면서 내가 받았던 마음의 치유와 성장, 그리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행복함들.

그렇게 함께한 지 2년. 새로운 내 인생의 출발로 인해 라미를 할머니에게 맡길 수밖에 없던 나의 선택. 자주 보러 오겠다며, 꼭 다시 같이 살겠다는 다짐을 뒤로하고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라미를 맡기고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물었다. 고향에 라미 보러 가는 날이면 가슴이 뛰어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몇 달 후 정말 마지막 이별이 찾아왔다. 할머니께서 화장실에 간 사이에 열린 문틈으로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아마도 나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나는 세상에 태어나 제일 많이 울었다. 그리고 라미를 찾아 헤맸다. 수소문 끝에 어떤 아저씨가 자기 옷을 벗어서 감싸 안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라미를 찾기 위해 유기견 보호소 사진들을 보고 있으며, 라디오에 사연도 올리고 애견 가게와 동물 병원들에 전화를 해본다. 찾기만 하면 지금까지 못 해준 걸 다 해주고 싶다.

직업상 매일 강아지들을 보고 대한다. 강아지들을 돌보며 무엇보다 주인과의 오랜 행복을 빌어준다. 나중에 후회 없도록 아낌없이 서로 사랑하길 바란다.

라미는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살아 있을까. 따스한 봄날이 되면 또 한 번 기다려본다. 새 주인과 산책하고 있는 행복한 라미와 마주하기를….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생명의 나무>(꽃 핀 덤불이 있는 오른쪽 부분)

스토클레 저택 벽화를 위한 밑그림. 120.3×194.6cm. 1905-1909년

   

배역을 기다리며, 촬영을 기다리며…

유병준 65세. 탤런트. <불멸의 이순신> 구루지마 장군 역

나는 항상 아침 일찍 산에 간다. 산을 오르며 발성 연습도 하고, 예전에 했던 15분짜리 긴 대사도 다시 외워본다. 즐겁게도 포악하게도 슬프게도 해본다. 혼자서 비굴한 역도 해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10미터 앞에 있다 상상하면서 연극도 해본다. 출연하는 작품이 없을 때도 쉬지 않고 한다. 이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야지, 연기자이니 눈은 살아 있어야 되겠지, 목소리도 늘어지거나 하면 안 되겠지, 하며 연습을 한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주시면 피를 토하든 쓰러지든 정말 작품을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이 기다림이 꽃이 필지 안 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 무슨 역이든 오면 할 수 있도록, 갈고 닦는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이상하게 연극에 끌렸다. 대학 졸업 후 취업과 연기 사이에서 갈등하다 운명처럼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연기를 할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했다. 지금도 무슨 역이든 한번 오기만 하면 정말 잘할 자신이 있다. 그래서 광대인가 보다.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작품의 설정대로 해줘야 드라마가 살기에 전체 속에서 그 배역을 이해하며 최선을 다했다. 2004년부터 그 다음 해까지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 왜장 구루지마 역할을 할 때는 특히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순신 장군 때문에 죽은 형과, 그 원수를 갚으려고 이를 가는 쌍둥이 동생 역을 함께 했는데, 비중은 별로 크지 않았으나 임팩트가 강해서인지 그 당시에 ‘불멸의 구루지마’라는 말도 떠다니고, 전화도 많이 받았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작. <성취>

스토클레 저택 벽화를 위한 밑그림. 120.3×194.5cm. 1905-1909년

그것도 잠시, 다시 기다림이었다. 사실 내 또래가 다 그렇다. 하지만 이제 불러줄 사람도 없겠지, 하며 좌절하다가도 77세의 이순재 선배님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탤런트실에 가면 일년 내내 TV에서 안 보인 친구들이 있다. 나처럼 한 번의 기회만 온다면, 정말 잘할 수 있는데 하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본이 탄탄한 친구들인데…. 안타깝기도 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가 다 기다림일지 모른다. 젊은 시절에는 설레는 기다림이 있었다. 나의 짝은 누가 될까, 아이를 낳을 때는 이 아이가 누굴 닮을까, 어떻게 키울까, 어떻게 클까…. 이제와 돌아보면 기다림이 나를 만들었고, 그 기다림이 내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배역을 기다리고, 단 몇 분 촬영을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기다림도 예술이라 생각된다.

기다림을 선택한 내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제 정년퇴직하고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기다리는 거라면 나한테 배우라고. 어떻게 기다리냐 물으면 그냥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아무도 알아준 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좋아서 이 길을 걸어왔다. 열심히 한길을 걸어왔으니 나 어쩌면 괜찮은 사람이야, 라며 나를 위안한다. 촬영이 없을 때는 동네 텃밭에서 하루 종일 묵묵하게 땡볕에서 땅을 파고 농사도 지으며 열매 맺기를 기다린다. 어쩌면 마지막까지 기다림이다.자연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그렇게 아름답게 기다림의 나날을 만들어가고 싶다.

-만상이 난 이유와 목적은 -살아서 참이 되어야 천국 간다

만상이 난 이유와 목적은

푸른 창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고 그냥 있구나

그 창공이 인간 사는 지구에도 만상만물에도

아니 있는 곳이 없구나

영원 이전에도 있었고 영원 이후에도 있는 것은

본래인 하늘 이전의 하늘이라

날 밝으면 하늘만 남아 있듯이

이 천지가 없으면 하늘의 본정신만 있구나

그 정신은 물질이 아닌 물질 이전의

스스로 존재하는 정과 신이구나

하나이지만 정과 신이 있어

없는 가운데 신이 존재하여

없는 것이 천지의 어머니요

신이 만상의 그 마음이 만상의 의식이라

천지에 나타난 것은 이 존재로부터 나타난 것이고

이 존재는 시작 이전에도 있었고

시작 이후에도 스스로 계시는 전지전능의 존재인

하나님 부처님이라

살아계시는 진리의 존재고 살아계시는 진짜인 존재라

스스로 완전하여 에너지가 완전한 진짜라

에너지와 신이 하나라 부족함이 없고

인간의 허상의 몸 마음이,

이 존재의 몸 마음인

참 에너지와 신으로 거듭난 자는

죽음이 없이 이 나라에 영생불사신으로 살 것이라

이 나라는 그 자체가 에너지라

그냥 스스로 존재하여 만상이 난 이유와 목적이

이 존재의 몸 마음으로 다시 나서

영원히 살기 위함이라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등 다수가 있습니다.

살아서 참이 되어야 천국 간다

우리는 흔히들 종교를 믿으면서 죽으면 천극락에 간다고 생각한다.

또 나쁜 짓을 한 자는 지옥에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극락이 어딘지 지옥이 어딘지 알 자가 없다.

간단히 말하면 천국은 실인 참이 사는 나라요

지옥은 허인 망상이 있는, 없는 나라다.

사람인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기적 중 기적이다.

자기의 조상으로부터 또 자기의 부모로부터 그날 그 시에 조상도 부모도

수억 개의 정자 중 그 정자가 난자에 놓아졌으니 기적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기적적으로 태어난 자기는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의 나이만큼만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영원히 사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은 진리로 화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진리란 참이고 참이 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 참이 되고 살아 있을 때 천국 나 있지 않은 자가 천국 간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가 아닌가.

살아서 인간 완성인 참이 되려면 허인 자기가 다 없어져야 참이 될 것이다.

참이란 이 세상이고 허란 자기이기에 자기를 다 부수면, 다시 말하면 다 없애면 영원불변의 참이 나올 것이다.

살아서 이 참으로 거듭난 자만 참이라.

참 나라인 천극락에 영원히 살 것이다.

허로 죽으면 허가 될 뿐이고 허는 없는 것이다.

글, 그림 우 명

-天に生まれて生きる道 -生きて天?に生まれてこそ天?に行ける


天に生まれて

生きる道

天は高く、一点の雲もない

天地はここから生まれ、ここへと?るのだなあ

人が生まれるのも天地の調和によってである

この天は限りなく、何も語らないが、全知全能である

天以前の天である精神に自分がいることに感謝だなあ

この世にいることに感謝だなあ

自分が本?の精神を取り?してみたら、この世が自分と一つであり、この世と共に自分は

順理に生きるのだ

天を?み、天に祈っても

本?の天である本?の精神でなかったら、天が?えてくれたことなど何も無い

この世にあるものはみな、一つの浮き雲と同じで

この天なる精神の?のみが永遠なる本物の世界だ

人間が完成し人間が生きることとは

この天に生まれて生きるということなのだが

そこへ至る道はただ自分を捨てる道である

自分がなくなれば天の精神だけが?り、その天で生まれ?われるのである

生きて天?に生まれてこそ天?に行ける

 

生まれながらにして人間は、この世とこの世の物事を??に撮り?める心を持っている。

我?の?親も祖先もみなが、この世を??に撮って作った?像の中で生きては死んで行った。

それゆえ人間の心はそもそもが、??を撮ってできた一つのフィルムに等しいのである。

人はフィルムの中の筋書きにしたがって話し、行動して生きる。

しかし、??は?物そのものではないように、このフィルムのすべては?物である。

ゆえに人の心そのものが罪であり業であるのだ。

この??の世界と、??そのものである自分とを無くしきらないことには、天?であるこの世に出ることはできない。

自らの個?の心の世界がなく、自分が存在しなければ本?の世界はあるではないか。

本?の世界に復活し、生まれ?わろうとするのなら、自分と自分の心の世界とを無くさなければならない。

自分と自分の心の世界がすべてなくなれば本?の世界が現れるだろう。

?理である天の精神と、いつ何時どこにいようが常に一つになっている時に天に生まれ出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し、

天の?理のエネルギ?と神なる?と魂として100%完全に生まれ出なければならない。

生きて天?に生まれてこそ、天?に行けるのである。

文と? ウ?ミョン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

농촌과 도시를 잇는 착한 브로커, ‘빛트인’의 정천식씨

‘배가 저온 창고에서 상해갑니다. 차라리 좋은 일에 쓰일 방법은 없을까요?’

작년 5월, 트위터에 올라온 어느 농민의 글이다. 이 글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빠르게 번져나갔고 결국 한 청년의 눈에 들어왔다. 청년은 배의 활용 방법을 인터넷으로 공모했고, 충남 아산의 한 마을에서 잼을 만들 수 있다는 답변을 받게 된다. 결국 쓰레기가 될 뻔했던 배들은 소셜 네트워크와 청년의 노력으로 배 잼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태풍이나 구제역처럼 갑작스런 재해가 발생하면 판매할 시기를 놓치는 농산물이 많이 생겨요. 먹는 데 문제가 없어도 외모 때문에 제값을 못 받는 ‘못난이 농산물’도 생기고요. 그런 농산물을 대신 팔아주는 착한 중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경희대 3학년에 재학 중인 정천식씨는 청년 기업 ‘빛트인’의 대표다.

‘빛트인(Between)’은 작거나 못생겨서, 혹은 판로가 없어져서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하는 농산물을 도시의 소비자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위탁 판매하는 청년 기업. 농촌과 도시에 희망의 빛을 틔운다고 해서 ‘빛트인’으로 이름 붙였다 한다.

고등학교 때 조리를 전공했던 정천식씨는 작년 3월 박원순씨의 ‘희망제작소’에서 진행한 희망별동대 청년 프로젝트 중 친환경 먹을거리 분야에 참여를 시작했었다. 그러던 차 처분 못한 배 때문에 고민하는 농민의 글을 보았고 배 잼 만드는 일까지 적극 도왔다.

그것은 평소 정천식씨가 생각하던 것들이기도 했다.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처치 곤란, 한숨 덩어리 취급을 받으며 버려져야 하는 농산물들에 대한 재활용 말이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동료도 생겼다. 일본에서 1년간 농사를 체험하며 환경 문제를 고민해왔다는 경희대 4학년 김주영씨가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며 합류한 것.

처음엔 돈도 없고 경험도 부족한 대학생들이 농산물 유통 사업을 현실화할 수 있을까, 단순한 봉사 활동 아닐까, 부정적인 의견도 많았다 한다. 하지만 이들은 직접 농촌 현장을 체험하고 농산물 시장, 일본의 유통 시장까지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고, 작년 5월엔 ‘배 잼 판매 프로젝트’, 7월에는 ‘유기농 단호박 판매 프로젝트’를 실현해 나갔다.

그들은 신세대답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SNS)를 충분히 활용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SNS의 특성 때문에, 큰 비용 없이 사업의 아이디어 공모와 홍보, 판매가 온라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작년 9월, 추석을 앞두고 태풍 ‘곤파스’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도 이들은 농촌으로 달려갔다. ‘빛트인’은 그중 한 농가의 흠집 사과를 대신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강한 바람 때문에 흠집은 났지만 먹기엔 전혀 문제가 없어서 ‘OK사과’라고 이름 붙였고, 농민과 함께 소비자 가격을 책정한 뒤, 홈페이지를 통해 판매했다. 결과, 한 달 만에 4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과를 구매했고, 고객들은 “못난이 사과가 맞느냐? 정말 맛있다”며 추가 주문도 이어졌다.

응원의 메시지도 폭발적이었다. 함께 일하고 싶다며 휴가 기간에 찾아온 군인도 있었고, 무료로 컨설팅을 해주겠다는 컨설팅 회사 대표, 1년 동안 자동차를 후원해주는 곳도 생겼다.

도움의 손길이 뻗칠 때마다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면서 다시 열정이 솟아난다는 이들은 혹여 착한 일을 한다며 안주하고 있진 않은지, 기존 유통업자의 관행을 따르고 있진 않은지, 항상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착한 중개자는 농민에게도 소비자에게 꼭 필요한 파트너예요. 당장 큰 도움은 못 되더라도 작은 실천 하나하나가 미래의 농촌과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습니다.”

취재 문진정 사진 홍성훈

엄마 스트레스를 풀어드리는 우리가 진짜 ‘엄친아’

집안일을 도와드려요

나는 어렸을 때 엄마가 집안에서 하는 일은 어렵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6살 때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설거지를 못 하신 걸 보았다. 내가 재밌을 줄 알고 했는데 냄비는 너무 무겁고, 허리는 너무 아팠다. 그때부터 설거지가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 9살 때 손님이 오셔서 엄마를 도와 하루 종일 요리를 해보았다. 그때도 요리는 재밌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그때서야 엄마들이 하는 집안일이 보통 일이 아니란 걸 알았다. 엄마가 팔이 아프셔서 나는 지금도 엄마를 도와 쌀 씻기, 음식물 쓰레기 갖다 버리기, 청소기 돌리기, 빨래 널기, 바닥 닦기 등을 도와드린다. 그런데 가끔 엄마가 너무 많은 일을 시키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난다. 그래도 그 일을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깐 엄마들은 아프셔도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앞으로도 난 엄마가 시키시는 심부름을 날 보살펴주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은 마음으로 할 것이다.

신미수 13세. 서울 월촌초등학교 6학년

따듯하게 안아드려요

엄마가 직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시다 퇴근해서 집에 오시면 표정이 어둡고 힘들어 보일 때가 있다. 바로 침대에 쓰러져 주무실 때면 안쓰럽기도 하다. 어릴 때 엄마가 따듯하게 안아주었던 게 좋아서인지 몰라도, 나도 모르게 엄마가 집에 오면 두 팔을 벌려 안는다. “엄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빨리 주무세요”란 말과 함께. 가끔 다 큰 자식이 안긴다며 “수염이 까칠하다, 저리 가~” 하지만, 좋아하시는 게 분명하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로하는 나만의 응원가인 셈이다. 엄마의 밝은 미소를 보면 나도 힘이 나는 것 같다.

윤상혁 19세. 서울 현대고등학교 3학년

동생을 돌봐줘요

엄마가 꽃 가게를 하시다 보니 밤늦게 오실 때가 많다. 엄마가 없어서 동생과 밥 차려 먹고 설거지할 때마다 힘들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이해가 갔다. 엄마가 이렇게 힘드니 나한테 짜증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엔 내가 미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엄마가 덜 힘들게 도와드리고 싶어서 내가 동생을 돌보기 시작했다. 동생과 놀아주고, 한글을 가르쳐주고, 씻겨주기도 한다. 동생이 방을 어질러 놓을 때면 “엄마가 지금까지 너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셨는데 이렇게 하면 어떡해” 하며 오빠로서 충고도 한다.^^ 우리가 집안을 깨끗이 해놓아서, 엄마가 집에 들어오실 때 밝은 표정을 지으시면 행복하다.

송영철 13세. 제주도 서귀북초등학교 6학년

엄마랑 데이트해요

3년 전부터 엄마가 할아버지의 병 수발을 하게 되었다. 매끼 할아버지의 식사를 챙겨드려야 해서 밖에도 잘 못 나가신다. 옛날엔 그런 엄마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아닌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서 마음이 아파왔다. 그동안 우리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셨고 이젠 자식들이 다 컸으니 친구도 만나고 여행도 다니시면 좋으실 텐데, 오히려 우리를 키우느라 힘들었던 때로 되돌아간 거 같아 맘이 아프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기분전환 겸해서 엄마와 영화나 연극 공연을 보러 간다. 하루라도 집안일에서 해방시켜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가 즐겁게 보시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 기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왜 진작 해드리지 못했을까’ 하는 죄송한 마음이 든다. 서로 공연을 본 소감을 얘기하다 보면 엄마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도 더 잘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이보희  29세. 회사원.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

 

‘수고했어’ 한마디가 아내를 행복하게 합니다

김종신 41세.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주부 역할을 자청한 남자, 남편들에게 고함

나는 전업주부이다. 공무원인 아내가 직장을 계속 다니기로 하며 가장 역할을 떠맡았다. 5살 된 딸을 키우고 가정 일을 하며, 과외를 한다. 이런 생활이 만 2년을 넘어갔다. 전임강사였던 시절 아내와 나는 평일 한 끼 식사도 같이 하기 힘든 상태였다. 아내가 퇴근하면 난 일을 하러 나가야 했고, 아내가 출근할 때 난 잠에 취해 있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고 아내의 1년 휴직 기간이 끝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바로 육아 문제였다. 아이를 할머니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돌도 안 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안정적인 아내가 직장 생활을 계속하고 불안정한 직장인 학원 강사였던 내가 전업주부를 하기로 했다.

집안일은 작은 일의 연속이지만 그것이 주는 피곤함과 스트레스는 주부라면 다 알 것이다. 아침 준비 후 청소하고, 점심 준비하고 빨래하고, 아이와 놀고, 저녁 준비하고 청소하고…. 조금 과장하면 아내가 퇴근해서 아이와 놀아주기 전에는 쉴 틈이 없다. 나름대로 건강한 편인 내가 이렇게 힘들다면 여자인 주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초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기 시간이 없다는 것,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작아져간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존재감을 회복하기 위한 사회생활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좋지 않을까 싶다.

세상의 남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내 입장에서 아내를 보고 생각해 달라는 것이다. 오늘도 아내는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고,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하루 종일 집에서 힘들었을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줄 남편을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 소박한 바람을 밖에서 힘들게 일하다 왔다는, 돈 벌고 왔다는 이유로 처참하게 뭉개지 않았으면 한다. 남편이 먼저 “집안일하느라 오늘 수고했어요”라고 따뜻하게 한마디 건네고 안아주자. 아빠를 기다렸을 아이들과 진심으로 30분이라도 놀자. 소파에 누워 TV에만 시선을 맞추지 말고 말이다.

직장 일이 힘든 것을 안다. 그러나 집안일도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자신만큼 어쩌면 자신보다 힘들었을 아내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애정 어린 한마디 잊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편으로, 가장 행복한 아내와 자식과 함께, 더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