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스노우 화이트 박 Snow White Park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하얀 잎, 최고급의 얇디얇은 한지 생각이 나게 하는 이 식물은
재작년 국립종자원에 신품종으로 등록되어 작년부터 시중에 선보이기 시작한 ‘스노우 화이트 박(Snow White Park)’이랍니다.
자랑스럽게도 처음 개발하신 분이 우리나라의 ‘박씨’ 성을 가진 분이라 이름 끝에 ‘박’을 붙이셨다는군요.
칼라디움의 한 종류인 스노우 화이트 박은 열대성 알뿌리 식물로, 온도와 습도가 높은 장마철을 아주 좋아합니다.
가을철 잎이 시들기 시작하면, 휴면기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물 주기를 중단해야 해요.
그대로 영상 10도 이상의 실내에 두고 다음 해 봄까지 기다려주세요.

햇빛 한여름의 직사광선을 피한다면 밝은 햇빛일수록 좋아요. 햇빛이 부족하면 줄기가 길어지고 잎이 푸르스름해집니다.
물주기 흙은 건조하게! 화분의 속흙까지 말랐을 때 한 번에 흠뻑 주세요. 건조한 실내라면 가끔 물을 분무해주세요.
관리 늦은 봄 화분의 흙 위에 작은 고체형 비료를 얹어주세요. 시든 잎이나 줄기는 그때그때 잘라냅니다. 탄저병이나 응애, 진딧물이 생기면 상한 잎을 깨끗이 자른 후 병충해 약을 뿌려주세요.
번식 알뿌리를 나눠 심기 하세요.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에너지 시드 Energy Seed, 폐건전지가 모여 빛의 꽃을 피운다

만든 사람: 박성우 30세. 김선희 27세. 디자이너

이름은?

에너지 시드(Energy Seed). 폐건전지를 모아 공공장소에 불을 밝히는 친환경 폐건전지 수거함이다. 적은 양의 에너지를 간직한 채 버려지는 건전지가, 씨앗(Seed)이 되어 화분에 심어지고, 그 에너지들이 모여 빛의 꽃을 피워낸다는 콘셉트이다. 에너지 씨앗을 심는 즐거움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이 환경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우연히 장난감 자동차를 바라보다가 ‘자동차의 모터를 돌리느라 소모된 건전지를 벽시계에 넣는다면 시계 바늘이 돌아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폐건전지가 완전히 사용되지 못한 채 버려진다는 사실을 알았고 분리수거가 되지 않을 경우에 화학 물질(니켈, 카드뮴)이 대기와 토양을 오염시키게 된다. 그래서 환경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화분 형태로 만들었고 건전지를 씨앗 심듯이 넣을 수 있게 했다. 밤이 되면 불빛으로 재사용된 폐건전지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분리수거할 수 있도록 했다.

중점을 둔 부분은?

전체 크기는 120cm 정도이고, 구멍이 난 곳에 건전지를 직렬로 넣을 수 있는데 이때 +, -극을 잘 맞춰서 넣어야 한다. 구멍 아래에는 스프링이 있어서 충분한 양의 건전지를 넣을 수 있고 그렇게 모여진 에너지가 합쳐져 LED 조명에 빛을 공급한다. 대부분의 폐건전지에는 0.8~1.3V의 전력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두 개 이상 모일 경우 2V의 LED 조명 한 개의 빛을 낼 수 있다. 간단한 타이머 기능을 통해 불이 켜지고 꺼지며, 몇 달 후 빛이 약해지면 아래쪽 문을 열고 건전지를 수거한다.

주변의 반응은?

여러 공모전에 출품했고 2008 서울디자인 올림픽과 세계 3대 디자인 공모전 중 하나인 미국 2009 IDEA에서 Gold Prize를 수상했다. 해외의 한 사이트에 소개된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메일을 보내왔고 캐나다 출신의 한 학생은 직접 책상용 에너지 시드를 제작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몇 백 개의 제품을 주문하고 싶다는 메일도 받았는데 프로젝트의 규모가 너무 커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아쉬운 점은?

거리에 놓인 에너지 시드가 비를 맞는다거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 -극을 잘못 집어넣어 빛이 나지 않는 등 문제점들이 많다. 현재는 상용화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가정용이나, 연립 단지에 놓이는 작은 제품의 형태로 좀 더 많은 고민을 해보면 상용화가 가능하리라고 본다. 좀 더 현실성 있게 발전시키기 위해 깊은 고민을 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아쉬움이다.

‘나는 가수다’ 프로의 아름다운 도전

지난 5월 마지막 주 ‘나는 가수다’ 경연에서 박정현은 고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를 열창했습니다. 박정현 특유의 애절한 보이스가 살아 있는 명곡이었죠. 비록 경연에서는 3위에 그치고 말았지만, 원곡이 여성들이 부르기 ‘어려운’ 노래라는 것을 감안하면 선전한 셈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나는 가수다’ 경연 녹화 전날까지 5일 동안이나 자신의 콘서트에서 노래를 했다고 합니다. 콘서트를 막 마친 후라 목 상태도 안 좋은데, ‘나는 가수다’에서 열창을 하여 많은 시청자들을 감동시키기까지 한 것입니다.

박정현 콘서트에 가보신 분들은 그녀가 라이브의 여왕이라는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고 하더군요. 유감스럽게도 저는 박정현의 라이브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가수다’를 보고 조그마한 체구에서 폭발적이면서도 간드러지는 보이스를 뽐내는 박정현에 반했습니다. 박정현의 앨범을 들어보면 여러 장르의 음악을 소화하고 있고,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자질도 뛰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점은 지난주 경연에서 부른 부활의 ‘소나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아일랜드 음악 풍에, 드렐라이어 등 다소 생소한 악기로 잔잔한 변신을 추구한 것이죠.

비록 청중단들의 평가 등수는 1위에서 7위로 내려가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수로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악의 장르를 소화해내려는 그녀의 아티스트적 면모가 더욱 마음에 들더군요.

 

‘주먹이 운다’를 부른 이소라 역시 ‘이럴 것이다’라는 프레임을 완전히 깨버렸습니다. 평소 이소라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감성 보컬로 마음 깊숙이 우러나는 목소리로 사랑받은 여가수입니다. 하지만 보아의 ‘넘버원’에 이어 힙합은 물론 락적인 요소가 접목된 ‘주먹이 운다’까지 완벽히 소화해내는 이소라의 파격 변신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실제 그녀는 몸 상태가 좋지 못해 경연을 끝내자마자 병원에 입원을 했고 방송 진행도 못할 정도였지만 무대에서는 아픈 몸이라는 걸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신의 열창을 선보였습니다.

박정현, 이소라뿐만이 아닙니다. 김범수, BMK도 지난 방송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부었던 탓인지 몸이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윤도현도 기침이 멈추지 않자,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와서는 전혀 아픈 기색 없이 무대를 소화해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가수는 무릇 아파도 무대 위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언제나 최상의 상태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했습니다. 목 상태가 말이 아니었음에도 애초 예정되어 있던 녹화가 하필이면 자신의 콘서트 다음으로 미뤄졌어도 군말 없이 노래를 부르고, 또 열창을 하는 박정현의 프로 정신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심각한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파격 변신을 거듭하는 이소라의 열정에는 이런저런 핑계로 열심히 살지 않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입니다.

비록 요즘 말이 참 많지만, 이렇게 가수들이 자신의 틀과 한계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도전이 돋보이는 ‘나는 가수다’가 참 좋습니다. 아픈 와중에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열창하는 가수들의 도전 정신, 노래 잘하는 가수에서 아티스트로 진화해가는 그 모습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그런 대접을 받을 권리가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앞으로도 그런 가수들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방송 무대에 설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권진경 문화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MBC

권진경님은 1985년생으로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으며 2009년부터는 자신의 블로그에 ‘너돌양’이라는 이름으로 드라마와 예능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고요하고 포근한 생명의 땅에서…

고요하고 포근한 생명의 땅에서…
시간마저 정지한 듯 고요한 늪 둑을 걸어갈수록 팽팽한 고요 속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집니다. 생명의 수런거림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억겁의 세월을 살아 숨 쉬어온 생명의 땅, 우포의 숨결입니다.

경남 창녕 우포늪. 2007년 4월

+

언제나 함께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며…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노을을 따라 어둠이 부드럽게 스밉니다. 모든 것들이 제 색깔을 버리고, 어둠 속에서 하나가 되어갑니다. 비로소 내 곁에 당신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언제까지나 어디든지 함께하겠노라는 우리의 맹세에 노을도 함께합니다.

인천 영종도 갯벌. 2004년 8월

사진, 글 김선규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서울 한복판에 비밀의 화원이 있다. 창덕궁

“창덕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은 담장이다. 경계가 삼엄해야 할 왕궁의 담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낮다. 담장 밖 숲의 나무들은 왕의 집무실과 침소, 왕비의 거처가 있는 궁궐을 향해 서 있다. 담장 안과 밖의 경계를 보지 않고 숲을 품고 있는 왕의 정원. 동서양 어느 왕궁에서도 만날 수 없는 창덕궁의 특별함이다.”
사진, 글 배병우

주합루에서 내려다본 부용지 일원.
주합루(宙合樓)란 우주와 하나가 되는 집이란 뜻이다. 부용지는 사방이 네모난 연못인데, 못 중앙의 둥글게 생긴 작은 섬에는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천원지방(天員地方)의 세계관을 잘 나타낸다. 2003년

낙선재 후원의 만월문.2003년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공헌한 정도전(鄭道傳)은 새 군주가 살 궁궐을 짓는 이들에게 이런 지침을 내렸다. 한마디로 ‘검소함을 숭상하라’다.

창덕궁은 조선의 제3대 임금인 태종이 1405년에 지었다.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건립된 궁궐이지만 왕들은 주로 창덕궁에 거처하며 정사를 보았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하였다.

북쪽의 응봉에서 내려온 산자락의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세워진 창덕궁은 지형지세와 어울리는 건물 배치와 후원의 조경으로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궁궐로 평가받고 있다. 후원은 자연 그대로의 기복을 가진 수림 속에 지형에 따라 알맞게 방지를 꾸며 물가에 누각이나 정자를 앉혔기 때문에 자연미와 인공미가 서로 조화를 이룬 소정원이 곳곳에 산재한다.

승화루 일원의 담장과 능수벚나무. 2003년

연못 옆의 관람정과 언덕 위의 승재정. 2003년

낙선재 후원에서 상량정으로 연결되는 협문. 2003년
창덕궁 후원은 무질서하게 드러난 서울 시내의 도시 풍경 속에서 서울의 아름다운 자연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이 지나치기 쉬운 곳이지만 숨겨진 보배 같은 곳이기도 하다.
건축이 자연과 함께하는 방식으로 소로(小路)가 언덕과 구릉을 따라 지나며 그 곁에 적절히 배치됐다. 그 속에는 시간과 공간이 자연과 함께하는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다. 너무나 소중한 서울의 심장 창덕궁. 이곳이 없다면 서울은 삭막한 도시일 뿐이다.

 

소나무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작가 배병우님은 1950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술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연구 생활을 했습니다. <풍경을 넘어서> 등 다수의 기획전과 개인전을 열었으며, 현재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자연과 조화하는 건축과 후원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창덕궁을 1970년부터 촬영해 왔으며, 2006년 동양의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세계 3대 미술관인 스페인의 티센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작가입니다. 사진집으로 <종묘> <소나무> <창덕궁> <Sacred Wood> <빛으로 그린 그림> 등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쿠키

오늘 아침 8시 50분 독서 활동 시간, 기특한 내 아이들은 하나같이 책 읽기에 열중하고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런데 교실 뒷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옆 반 여선생님 얼굴이 빼꼼 들어왔다. 그 선생님은 우리 반 독서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는 듯 손가락으로 ‘밖에 누가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나가 보니 우리 반 그 아이가 가방을 멘 채, 골마루 바닥에 망연히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는 또 깊은 물속의 고기처럼 제 안에 빠져 있었다.

올 삼월, 새 학년이 되어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까지, 나는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열한 살짜리 아이는 수업 시간 내내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교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외진 계단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 수면을 튀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불현듯 달려들어 친구들을 밀치고 때렸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는 허둥지둥 당황할 뿐이었다.

급식 시간도 힘겨웠다. 아이는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옆에 앉아 “밥 먹어라” 채근해도 겨우 먹는 시늉만 하다가 도리질을 하였다. 하지만 시간에 맞춰 건네주는 알약은 아무 저항 없이 받아먹었다. 숙명처럼 약을 삼키는 아이 옆에서, 우걱우걱 내 몫의 밥을 챙겨 먹기가 부끄러웠다.

어느 날은 수업 중에 그 아이가 갑자기 나를 향해 “나, 저 선생님 싫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묵묵부답인 내게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도 나 싫어요?” “아니.”

그러자 아이가 황급히 두 손을 가로저으며 소리쳤다. “아니에요. 싫다고 하세요! 선생님도 내가 싫다고 하세요. 빨리요. 빨리요!”

아이는 곧 울음을 쏟을 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도 네가 싫다”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이는 책상에 엎드려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차츰 잠잠해졌다.

아이가 밀치면 물러서주고 당기면 보듬어주는 일 말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흔들리던 며칠 전, 급식소 점심 메뉴에 쿠키가 나온 날이었다. 아이가 내 식판을 보더니 “왜 쿠키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른들은 쿠키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나중에 내 꺼 하나 줄게요.”

내가 식사를 마치고 숟가락을 놓자, 진짜로 쿠키 하나를 내 식판으로 옮겨주었다. 나는 너무 감사해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그래서 쿠키를 둘로 쪼갰다. 반은 내가 먹고 나머지 반은 다시 그 아이한테 돌려주었다. 아이는 그 쿠키 반 조각을 다시 둘로 갈라 그중 한 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넙죽 받아 입속에 넣었다. 비록 오래전에 쿠키 맛을 잊은 어른이지만 목구멍 깊은 곳에서 달콤한 그 무엇이 느껴졌다.

오늘 아침 8시 50분 독서 활동 시간. 아이는 골마루에서 가방을 멘 채 망연히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녀석은 냉큼 일어나지 않고 나를 힐끗 올려 보았다. 그러고는 대뜸 “선생님 머리 깎았어요?” 하고 물었다.

아이 말대로 나는 어제 이발소에 다녀왔다. 다른 아이들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항이다. 내 손을 잡고 골마루 바닥에서 일어나던 아이가 또 말했다.

“좋아요.” “정말? 어제 머리 모양보다 더?” “예.”

갑자기 가슴이 메어졌다. 나는 아이의 참새 같은 어깨를 감싸 안고 교실로 들어왔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산골 아이들, 자신만의 악기를 만들다

경남 함양에 위치한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26명인 작은 산골 학교다. 가진 것은 많이 없지만 너무 순수한 아이들, 늘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었다.

지난해 말에는 ‘예민의 음악캠프’에 참여하였다. 전국의 분교를 다니며 ‘분교음악회’를 꾸준히 열었던 가수 예민씨는, 2년 전부터 창작 악기 만들기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었다. 아이들 스스로 악기를 구상하고 만들어가면서 많은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음악캠프> 2010년 말경 경남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주최로 경남 지역 다섯 개 산골 학교에서 진행된

예민의 음악캠프 ‘창작 악기 만들기’에서 아이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펼쳐졌다.

음악캠프를 하기 위해 온 첫날, 화려한 인사말보다 “따듯한 차 한잔 줄게” 하며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핫초코를 타주는 예민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아이들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이었다.

예민씨는 우선 아이들과 악기 사이의 거리감부터 좁혀나갔다. 처음에는 동서양의 많은 악기 소리를 들려주고 직접 만져보고 소리를 내보라고 했다. 그다음에는 바이올린, 장구, 통기타 등의 악기들을 전부 분해했다. 결국 몇 가지 재료를 이리저리 조합해서 만든 것이 악기라는 게 드러났다.

‘아, 누구나 악기를 만들 수 있는 거구나’ 아이들은 그렇게 자신감을 가졌다.

매 과정마다 꾸준히 대화를 했다. 어른들이 보기에 별로다 싶은 아이디어에도, “이 악기 괜찮다. 이건 어떻게 해서 소리를 내야 하지? 선생님한테 이야기해줄래?”라며 다가갔다. 아이가 신이 나서 이야기해주면, 좀 더 보충할 수 있는 부분을 이야기해주었다. 아이들 안의 가능성이 충분히 다 표출되도록 한 명 한 명 유도를 해주었다.

예민씨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는구나, 가슴으로 아이들을 가득 품고 있구나 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연히 아이들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수업을 했지만 한 명도 지루해하는 아이가 없었다.

‘바이러스와 공감하고 싶다’며 바이러스 모양을 만든 아이, ‘평상시 귀신을 무서워했는데, 귀신이 있는가 없는가 대화를 해보고 싶다’며 ‘귀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악기를 만들겠다는 아이 등등 어른들이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순수하고 기발한 발상들이 나왔다.

그 아이디어들을 보고 다섯 개 지역의 학교에서 최종 10여 명을 뽑아, 8박 9일 동안의 2차 캠프가 진행되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준엽이, 어진이, 한비 세 명의 아이가 뽑혔다. 2차 캠프의 마지막 날에는 아이들이 만든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연주 시간, 아이들의 눈빛에서 캠프의 과정이 얼마나 행복했는지가 전해졌다.

“저는 물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어진(12)이가 만든 악기는 ‘Don’t angry water’. 물로 음을 조절하는 타악기였다. 준엽이는 구슬로 쇠판을 치거나, 채로 동전 긁기, 채로 가죽 치기, 채로 방울 흔들기 등을 통해서 소리가 나게 하는 ‘도낙기(돈악기)’를 만들었고 한비(11)가 만든 것은 대나무 위의 철판을 채로 치기, 손으로 줄을 튕기기, 대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채를 넣고 옆으로 흔들기 등으로 소리를 내는 ‘대화나무’라는 악기였다.

다들 아이들이 직접 만든 악기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대견하고 대단했다. 우리 아이들 안에 저런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구나,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표출될 수 있는 거구나, 새삼 다시 느껴졌다.

3년 전, 이곳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산골 아이들 특유의 때 묻지 않은 모습이 참 좋았다. 하지만 곧 가정 방문을 하며 아이들의 어려운 사정을 알았을 때는 가슴이 아팠다. 화목한 가정도 있었지만, 부모의 갈등으로 한부모나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 길러지는 아이들, 학교에서 주는 급식이 유일한 식사인 아이들도 많았다. 그런 사정을 전혀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밝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역시나 위축되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던 아이들. 하지만 아이디어를 내고, 자르고, 뚫고, 색칠하고, 다듬고, 붙이고, 말리고 사포질하고…. 악기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감추어진 응어리들이 탁 터지면서 자신감을 많이 가지게 된 것이다.

스스로도 “내가 이런 악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는 아이들은 캠프 후 참 많이 변한 듯했다. 작년 10월 서울에서 전학을 와 바로 캠프에 참석했던 준엽이는 공부도 더 잘하게 되고 더 활발해지고 아이들하고도 잘 어울린다. 어진이는 “원래 부끄러움을 엄청 타는데 그 이후로 조금은 더 당당해진 거 같다”고 했다. “악기를 만들고 난 성취감이 기억에 남고, 나도 뭐든지 창작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는 한비 역시 한층 더 밝아졌다.

예민씨가 음악캠프를 진행하는 걸 보면서 20년 가까이 교사 생활을 한 내 모습도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교직에 있으면서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은 가슴속에 아이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항상 마음과 현실은 달랐던 것 같다. 평가하기보다는 말없이 기다려주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끔 믿어주는 것. 예민씨는 그것을 보여준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났건만 지금도 아이들은 “예민 선생님 안 오세요?” 하며 물어본다.

그만큼 아이들의 마음에 그 사랑이 깊이 각인이 된 것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성취감과 그때 받은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기가 되어, 오래도록  아이들의 가슴에 영롱한 소리를 내어주기 바란다.

노정우 유림초등학교 교사. 경남 함양군 유림면

 

 

대한민국과 세계를 잇는 커넥터,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씨

‘독도는 한국 땅이다(DOKDO IS KOREAN TERRITORY).
일본 정부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2005년 7월 27일, 뉴욕타임스에 광고가 실렸다. 국가 현안에 대한 광고로는 아시아인 최초,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던 이 광고를 제작한 이는 서경덕씨였다. 그는 이것을 시발점으로 ‘동해 표기’ ‘위안부 문제’ ‘한글’ ‘비빔밥’…을 알리는 일까지, 전 세계를 향해 누구보다 참신하게, 열정적으로 한국을 알려나갔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느새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한국 홍보 전문가’라는 직함이 생겨났다.

최창원 사진 홍성훈

2005년 2월 말,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는 조례안을 가결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일본은 ‘독도는 일본 땅, 한국이 무단 점거하고 있다’라며 주장을 해왔고, 점차 수위를 높여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진실을 알릴 수 있을까? 서경덕씨가 선택한 방법은 세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언론 중 하나인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하는 거였다. 철저한 자료 조사, 수많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테스팅 작업을 거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반박 광고까지 고려하며 몇 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드디어 2005년 7월 27일, 뉴욕타임스에 ‘독도’에 대한 광고를 게재한다.

폭발적인 반응을 뒤로한 채 그는 바로 제2탄 광고 작업에 들어간다. 바로 ‘동해’를 알리는 것이다. 일본의 적극적인 홍보로 세계 대부분의 지도에 ‘East Sea(동해)’가 아닌 ‘Sea of Japan(일본해)’으로 표기가 되어 있었고, 외국인이 볼 때는 당연히 ‘일본해’에 있는 섬이면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2천 년 동안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는 ‘동해’로 불려왔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었고, 이것을 알리는 일이 시급했다.

동해와 독도가 들어간 대한민국 지도를 넣어, 동해에 독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광고는 그해 11월 21일, 뉴욕타임스와 함께 미국 신문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렸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의 광고 담당자는 서경덕씨에게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국가적 현안에 대해 개인이 의견 광고를 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훗날 이 광고들은 국제적인 증거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009년, 그는 좀 더 과감한 광고에 도전한다. ‘뉴욕타임스의 실수(Error in NYT)’ ‘워싱턴포스트의 실수(Error in WP)’라는 내용으로 일본해로만 표기하는 언론사들에 ‘동해’가 옳은 표기임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매번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 세계로 진실은 퍼져 나갔고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2009년 10월 19일자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처음으로 ‘동해(East Sea)’가 적힌 지도를 신문에 게재한 것이다.

2010년 11월 26일부터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장에 서경덕씨와 함께 진행한, MBC 무한도전 팀이 출연하는 비빔밥 동영상 광고가 상영되었다. 광고판 관계자는 당시 타임스스퀘어 내의 광고 중 가장 화려하고 멋있어 뉴요커들에게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전했다.

광고를 게재할 때마다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한번은 뉴욕에서 세탁소를 하시는 교포 분께 광고 파일을 받고 싶다며 연락이 왔어요. 한국에 대한 광고를 보는데 너무나 가슴이 뛰더래요. 그래서 옷을 덮는 비닐 커버에 광고를 인쇄해서 세계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고, 그렇게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고 하시는데 가슴이 찡했습니다. 캐나다 택배 회사 회장님은, 택배 박스에 인쇄해서 전 세계에 내보내고 싶다 하셨고,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회 분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그 나라 유력지에 같은 광고를 내겠다며 연락도 주셨습니다. 외국인들의 관심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해외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많았고, 미국의 한 교수님은 광고를 보여주며 그 주제로 학생들끼리 토론을 하게 했다고 하고요.

어떻게 이런 일들을 시작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진실이 왜곡되고 있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다 생각했어요. 개인 자격으로 이런 광고를 낸다는 게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일지 몰라도, 눈 뜨고 당하는 바보가 되기보다는 계란이라도 던져보자는 마음이었죠. 예상대로 일본인 단체로부터 항의가 빗발쳤어요. 그런데 두렵다기보다는 더 큰 용기가 생겼어요. 제가 생각하는 글로벌 홍보란 ‘우리 것’을 ‘우리 것’이라고 정정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와 실천력이거든요. 반면에 저를 격려해주시는 일본 분도 계셨습니다. 그런 분이 있어 일본이 돌아가는구나 생각했죠. 이렇게 광고를 내는 건 일본과 싸우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된다는 거죠. 함께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해도, 일단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 중요하잖아요.

처음에는 힘든 점도 많았을 텐데요.

처음 뉴욕타임스 광고를 진행할 때는 어려움이 많았어요. 직원이 독도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독도에 대한 영문 자료도 많지 않았지요. 아는 어휘를 총망라해 취지를 설명하면서 하나하나씩 해나갔어요. 처음에는 몇 개월이 걸렸는데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죠. 광고비도 처음에는 자비로 했지만, 가수 김장훈씨 등 점차 도움을 주겠다는 분도 많이 생겼고요.

서경덕씨의 마음에 ‘한국 홍보’라는 것이 싹트기 시작한 때는 1996년, 대학교 3학년 때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면서였다. 당시는 2002년 월드컵 유치가 결정됐을 때였다.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의미 있는 일을 벌이기 좋아했던 그는 유럽을 돌며 월드컵을 홍보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다 유럽 사람들 대부분이 중국, 일본에 대해서는 알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심지어는 한국말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이도 있었다.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억울함과 자괴감이 여러 날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한탄만 하지 말고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전 세계에 한국을 제대로 알려봐야겠다 결심했다. 특히나 독도, 동해, 위안부 문제, 중국의 동북 공정 문제 등은 반드시 진실을 알려야만 하는 큰 문제들이었다.

1996년 ‘한국 홍보’를 결심한 이후 그는 언제나 시대의 흐름에 안테나를 세웠고, 세계인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참신하고 새로운 기획을 하기 위해 고민했다. 역사적인 이슈뿐 아니라, 전 세계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에 한국어 음성 서비스 유치, ‘한글 세계 전파 프로젝트’, ‘한식 세계화 프로젝트’ 등 16년간 수많은 분야를 넘나들며, 한국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을 제대로 알리겠다’는 한 개인의 열정과 노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어느새 그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던 최초의 ‘한국 홍보 전문가’라는 직함이 따라다녔다. 그렇다고 언제나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시도한 것의 성공 확률은 30%. 나머지 70%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도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왜 실패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를 기록하고 돌아보았다.

그렇게 끊임없이 해나갈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솔직히 재밌으니까 자꾸 하게 됩니다. 제가 일을 할 때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게 ‘재미’거든요. 기획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뭔가 일이 이뤄지는 과정들이 참 재밌습니다. 그런데다 이 일은 저 혼자만의 재미가 아니잖아요. 저 같은 경우 돈을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기업들의 프로젝트 참여 요청, 특강 요청에다가 계속 한길을 걸어온 것을 인정받아서 교수로도 임용됐어요. 먹고사는 것은 저절로 해결이 된 겁니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한테도 인생을 너무 조급하게 보지 말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 보람 있는 일에 열정을 바치는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요.

노하우(know-how)보다는 노후(know-who)가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이렇게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일처럼 도와준 선후배들, 친구들 덕분이에요. 요즘은 인터넷에 세상 모든 게 다 나오니까, 인터넷이 전부라고 여기는 젊은이들도 많아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거죠. 무슨 일이든 성사시키려면 사람을 직접 찾아가 만나는 게 중요해요. 단 5분이라도 서로 눈을 바라보고 직접 대화를 할 때, 비로소 진심이 통할 수 있죠.

서울시장애인복지시설협회, 나눔의 집 홍보대사, 대학생들을 위한 강연 활동 등 사회 활동도 활발히 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외국인들이 한국에 많이 오기 시작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한국에 좋은 이미지를 갖는 것도 하나의 홍보 방법이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안에서의 문제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저도 국내의 사회적인 현상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고 싶고, 그분들의 아픔도 얘기하고 싶어요. 그동안은 먹고살기에만 바빴다면 이제는 우리나라도 국가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관심이 필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한국 홍보’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세계 어디를 가나 유태인과 화교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요. 우리 한민족이 그렇게 되는 데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을 하나로 묶는 연결 고리뿐 아니라 우리의 좋은 것들을 다른 나라에게 소개하고 다른 나라의 본받을 점들을 우리에게 알리는 진정한 커넥터가 되고 싶어요. 그렇다고 민족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화(世界化)에서 세계화(世界和)로요.(웃음)

그의 올해 최고 목표는 뉴욕 타임스스퀘어 광장에 한국을 알리는 24시간 전용 전광판을 만드는 것이다.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이곳에 전용 전광판이 만들어진다면, 한국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뉴욕타임스에 첫 광고를 냈던 2005년, 서경덕씨의 나이는 32세, 광복 60주년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광복 100주년이 되면 그는 칠순 할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 무렵 우리나라가 세계의 리더 국가가 되고, 우리 한민족이 세계에 우뚝 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서경덕씨. 그는 오늘도 세계를 향해 한판 크게 벌여보기 위해 배낭을 꾸린다.

2009년 5월 11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전면 광고.

‘뉴욕타임스의 실수(Error in NYT)’라는 주제의 이 광고는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하는 뉴욕타임스 측에 ‘동해(East Sea)’가 옳은 표기임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2010년 5월 26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낸
‘기초 한국어’에 대한 광고.

‘안녕하세요’에 이어 ‘고맙습니다’ 광고를 냈다.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중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소리와 발음 기관이 완벽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과학적인 문자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가 세계에서 정보 통신 강국이 된 것 또한 한글의 우수성과 편리성 덕이 큰 것이다.

2008년 8월 25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전면 광고.

한 포털사이트를 통해 네티즌 약 10만여 명이 광고 비용을 모아줘서 낸 최초의 독도 관련 ‘국민광고’이다. 광고 게재를 할 때는 한국 역사 홍보
홈페이지인 ‘다음 세대를 위해 (www.forthenextgeneration.com)’ 의 주소를 명기해 더 자세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도록 했다.

2009년 12월 21일
뉴욕타임스 비빔밥 광고.

자국을 대표하는 음식을 가지고 전면 광고를 내는 사례는 처음이라, 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서경덕씨는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96년 ‘한국 홍보’의 길로 들어서게 된 그는 독도, 동해 바로 표기하기, 위안부 문제, 동북 공정에 따른 고구려 역사 왜곡 등의 문제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등 세계적인 신문에 게재하며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세계에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참신한 기획과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실천하고 행동하여 ‘한국 홍보 전문가’라 불리는 그는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객원교수, 국가브랜드위원회 자문위원, 서울시장애인복지시설협회, ‘나눔의 집’ 홍보대사를 역임하고 있으며 저서로 <세계를 향한 무한도전>이 있습니다. www.forthenextgeneration.com

각자의 삶에 주어진 그 목적지를 향해…. 신나게 행복하게 기쁘게 내 삶 속으로 떠난 진정한 여행 이야기.

은둔녀, 방문을 활짝 열고

세상 속으로 여행을 떠나다

김진영 35세. 프로그래머.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나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집에만 있기를 좋아했다. 멋진 풍경을 봐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소풍, 수학여행, 엠티….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여행들은, 발표되는 순간부터 갔다 올 때까지 스트레스였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고 적응하는 게 어려웠다. 어딜 가도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러다 스물세 살 때 친한 친구와 일본 도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 친구가 너무나 가고 싶다고 해서 따라나선 여행이었다. 이번 기회에 나도 새로운 경험을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친구와 달리 나는 여행 내내 즐겁지가 않았다. 가는 장소마다 묘하게 싫은 구석들이 있었다. 기껏 해외까지 가서 그렇게 김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후로는 정말로 아주 오랫동안 여행을 가지 않았다. 역시 ‘여행’이란 것은 별로 즐겁지도 않고 피곤하기만 한 거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며 다들 휴가 계획을 세울 때 나는 그냥 집에 있었다. 남들은 답답하면 훌쩍 떠나고 싶어 했지만, 나는 그냥 나만의 공간에 있는 게 편했다. 그러면서 여행을 좋아하거나 낯선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왜 저렇게 못 하지?’ 하며 비교했다.

그러다 우연히 마음수련을 시작했다. 나는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며 단순히 여행뿐 아니라 삶이라는 여행 자체를 정말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자꾸 안으로만 은둔하려 하고, 나에게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들과만 있으려고 했다.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이 최선이자, 최고라 여기며 그에 안 맞는 장소나 사람들은 멀리 했다. 내가 세상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에 감사하기는커녕, 세상이 내 사소한 기분까지 맞춰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내 기분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세상에 단단히 토라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수련을 통해 그런 마음들을 모두 빼내기로 했다.

미련하게 쌓아놓기만 했던 마음들을 하나하나 버려나간 끝에, 드디어 만나게 된 진짜 세상은, 놀랍게도 완전함 그 자체였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살아 있게 하는 우주의 정신,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도 있었고, 어디에 가도 변치 않는 참마음이었다. 지금 하는 행동이 최선의 선택일까,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런 고민들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집과 여행지를 서로 다른 곳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도 모두 나였다. 마음수련을 하고 마음이 열린 만큼 나는 국내 곳곳을 돌아다니고 일본도 가고, 남미, 미국으로 여행도 다녀왔다. 이제 아무리 멀리 가야 할 일이 생겨도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다. 지구 반대편을 가는 것과 집 앞 슈퍼에 가는 것이 다를 이유가 없었다. 직업상 컴퓨터 앞에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할 때도 많지만, 그 또한 휴양지에서 산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난 그저 불필요한 가짜마음들을 버렸을 뿐인데 이렇게 근사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이렇게 신나게 살려고 세상에 나온 것이었구나. 나는 매일매일 ‘세상’이라는 최고의 여행지를 여행하고 있다. 이보다 더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박구환 작. <peach blossom 2>

woodcut. 60×35cm. 2008.

 

장모님, 이제 저희가

소의 빈자리 채워드릴게요

김 현 완산여고 교사. 전북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1가

“농사일을 못 놓겠으면 소라도 키우지 마세요.” 2005년 장모님 일흔한 번째 생신 때, 8명의 딸들은 입을 모아 얘기했다.

10여 년 전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나시고, 적적해하는 장모님을 모시고 여행이라도 가려고 해도 ‘소’ 걱정에 집을 비우지 못하셨다. 게다가 혼자 농사일에 소까지 건사하다 보니 더욱 힘들어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를 키우지 말라는 딸들의 말에 장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것들 너그 아버지 때부터 키워 온 것이다. 저것들 없으면 내가 너그 아버지 영원히 떠나보내는 것 같아 데리고 있는 거여. 그리고 저것들이래도 있응게 밤도 덜 무섭고 덜 적적하다. 내가 저것들 건사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저것들에 의지하고 사는 게여.”

그 뒤로 어느 자식도 장모님에게 소를 팔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장모님 모시고 여행을 가겠다는 바람을 접었다.

옛날부터 농촌에서의 소는 재산 목록 1호이자 또한 한 식구처럼 애환을 함께하는 존재였다. 장모님은 당신의 밥은 안 챙겨도 새벽 일찍 쇠죽을 끓여 먹이시는 등 소를 돌보는 데 정성을 다하셨다. 그 마음을 아는지 해마다 송아지를 두어 마리씩 낳아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되었다. 소와 한 가족처럼 지내다 보니 웃지 못할 사연들도 많이 있었다.

한번은 어미 소 한 마리가 송아지를 낳았을 때였다.

“한 두어 시간 뜸 들이더니 송아지를 낳았지. 그런데 송아지가 ‘수놈’이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이왕이면 암놈이나 낳지’ 하지 않았던가. 수송아지보다 암송아지가 조금 더 비싸거든. 헌디 내 말을 에미 소가 들었나 봐. 그때부터 지 새끼를 발로 차고 난리를 피는 것이여. 처음엔 뭐라고도 하고 타일러도 봤는데 당초 새끼를 붙여주질 않는 것이여.”

“그래서 어찌 하셨어요?” 장모님 말씀에 우린 깜짝 놀라 물었다. “어찌 허긴, 싹싹 에미 소헌티 빌었지.”

박구환 작. <한가로운 마을-여름날>

유성목판화. 60.5×35cm. 2009.

장모님은 “내가 잘못했네. 내가 말 잘못했으니 한 번만 용서해주고 어서 새끼 젖 주소” 하고 몇 번이고 빌었다고 했다. 그때서야 어미 소가 송아지를 발로 차지 않았는데 이번엔 송아지 새끼가 어미젖을 먹으려고 하지 않아 또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송아지도 어미 소한테 섭섭했던 것이다. 결국 어미 소와 송아지는 화해를 하고 잘 지내게 되었는데, “내 이참에 큰 공부했당게” 하시며 장모님은 크게 웃으셨다.

그렇게 소 얘기라면 손주 자랑하듯 신나 하시던 장모님께서 언제부턴가 “소를 팔아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힘이 있는 데까정 키워 볼라꼬 했는디 요놈의 무릎이 따라두덜 안 히여.” 하지만 팔아야지 팔아야지 하면서도 미련과 서운함 때문에 계속 키워왔던 소들을 결국 작년에 모두 파셔야 했다.

“서운혀도 어쩔 수 없지. 이젠 힘이 부쳐서….”

그리고 우린 처음으로 장모님을 모시고 1박 2일 여행을 갔다. 손자들이랑 함께 다니며 무척 흐뭇해하시던 장모님을 뵈며, 어쩌면 장모님께 자식보다 더 자식 노릇을 해주었던 것은 ‘소’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소의 빈자리를 채워드려야겠다.  

 

걱정 말고 떠나십시오,

여행의 신이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노동효 39세. 여행 작가

“나, 내년 여름에 회사 그만두고 히말라야로 갈 거다.” 안정된 회사를 그만두고 오랜 꿈이었던 히말라야에 가겠다는 L에게 나는 말했다.

“꼭 가겠다면, 당장 회사를 그만둬라. 내년 7월이 되면 넌 또 ‘내년’ ‘다음에’ 그러고 있을 것이다.” 나의 말에 L은 멈칫했고,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갔다 와선, 뭐 해서 먹고사냐?” “걱정 마. 지금의 너와 히말라야에서 돌아온 너는 이미 다른 사람일 테니, 지금 네가 그것을 미리 걱정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L은 결단을 내렸고, 스무 살 때부터 꿈꾸었던 설산 원정대에 지원을 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룬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푸르른 스물, 나 역시 무작정 길을 떠나 이 행성의 반 바퀴를 돌았던 적이 있었다. 동서경 0도인 런던 그리니치천문대에서 프라하, 부다페스트, 로마, 이스탄불, 베이징 등의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여 112일 만에 부산의 집까지 도착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야간열차나 장거리 버스를 잠자리로 이용했던 탓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른 도시였다.

 

박구환 작. <peach blossom 3>

woodcut. 74×51cm. 2008.

인간의 수명이 백 년이라면, 우리는 백 년간 작게는 ‘한국’ 크게는 ‘지구’의 가치관 속에서 살아간다. 가치관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 단 한 번의 생을 그런 ‘틀’ 속에서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남루한 생활일지라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아 보았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과거의 관계와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과 자세를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영국 런던으로 떠났다. 어느새 영국에서의 삶도 1년이 훌쩍 지나갔다. 모든 순간순간이 경이로웠다. 들꽃 한 송이, 구름 한 점까지. 더 이상 떠나야겠다는, 떠나 있겠다는 생각을 붙들고 있을 필요조차 없었다. 세계를 새롭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어린애가 되었으니까.

이젠 고국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너무 싱거웠다.

바다를 만나면 바다를 건너고, 산을 만나면 산을 넘고, 길을 더듬어가며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해서 귀국하기로 했다. 첫 번째 경유지는 체코 프라하였다. 이곳에서 우연히 야간 택시 운전수와 프라하의 대학생을 만났다. 이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하룻밤을 보냈고, 그 인연으로 폴란드에서도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숙박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헝가리에서 만난 부랑자는 돈을 구걸하려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는 내가 그날 가장 먹고 싶었던 아침 식사를 아무 조건 없이 시켜주었다. 그렇게 매 순간 우연처럼, 사람들을 만났고 또 헤어졌다. 물론 로마에서는 소매치기를 당해 100만 원이 사라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파키스탄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또 다른 만남으로 나를 이끌었다. 천사처럼 나타나 나의 앞길을 안내하고 돌봐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가벼운 주머니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나침반으로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때 알았다. 미지의 길에서는 언제나 여행자들을 보호하는 여행의 신이 어깨에 내려앉으며, 그 신은 고난의 모험을 선택한 이들에게 반드시 무언가 보여준다는 것을.

아무리 힘든 여행길이라 할지라도 내일을 위한 계획은 하되, 걱정은 하지 마라. 당신을 내려다보던 여행의 신은 당신이 정말 간절히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이 곧 여행이다.

 

각자의 삶에 주어진 그 목적지를 향해…. 신나게 행복하게 기쁘게 내 삶 속으로 떠난 진정한 여행 이야기.

“동생아, 꼭 일어나야 해,

그때 우리 또 여행 가자”

박소정 26세. 사회복지사. 경남 거제시 고현동.

“저에겐 전신 마비로 누워 있는 남동생, 시각 장애를 갖게 된 어머니, 당뇨 합병증으로 힘든 아버지가 계십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도 나는 당당하게 나의 가족을 소개한다. 그러면 대개 힘들지 않냐고 묻는다.

그럴 때면 “가족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있을 때 잘하시라”고 말한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은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님은 동생에게 중증 장애인을 돕는 일을 하게 하시며, “장애를 가졌지만 너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스스로에게 당당해라”는 말씀을 늘 하셨다. 그 덕분에 동생은 밝은 성격으로 자랐다.

그런데 공부도 곧잘 하며 프로그래머의 꿈을 꾸던 동생이, 계속 몸이 나빠졌다. 급기야 고3 되던 해 전신 마비 증세로 집에만 있게 되었다. 내가 지쳐 들어오면 라면도 끓여주고, 아플 때면 죽을 쑤어 주고, 용돈을 안 쓰고 모았다가 “누나, 써” 하며 주어서 깜짝 놀라게 했던 내 동생.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희망이던 동생이었기에 내 마음은 더욱 아팠다.

남동생을 보며 늘 바람이 있었다. 가족 여행을 가는 거였다. 좋은 구경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도 먹여주고 싶은데, 그저 꿈만 꿀 따름이었다. 그러다 어려운 사정의 가족에게 여행을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2009년 신청을 했는데, 정말 당첨이 되었다.

10여 년 만에 우리 가족 모두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여행길에 올랐다. 울산을 거쳐 설악산까지 2박 3일간의 일정이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 ‘이것이 행복이구나’ 생각했다. 주최 측의 세심한 배려로 캠핑카를 타고 시작된 우리의 여행길. 첫날엔 울산대공원 장미 축제에 갔다. 따스한 햇볕 아래 활짝 핀 장미꽃들을 보며 걷다 보니 어머니의 콧노래가 들려왔다. 부모님이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다음 날 설악산에 도착해, 정상에 오르는 케이블카를 탔을 때는 정말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악산은 동생이 전신 마비가 되기 전에 등반했던 곳이라서 더욱 감회가 컸다.

동생이 “누나, 내가 걸어 다녔을 때 여기 등산했었어, 참 새롭다” 하며 어눌한 말투로 이야기했을 땐 그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아팠다. 산 정상에 올라 동생이 하루빨리 건강해지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힘들어도 곧 행복한 날들만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힘내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 힘도 내고 가족 모두 모여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다. 가족 모두 하루빨리 건강해져 또 가족 여행을 가자고 한다.

동생은 “좀만 기달려, 누나 시집갈 때까지는 꼭 일어날게” 하며 웃는다.

박구환 작. <한가로운 마을-해풍>

유성목판화. 64.5×50cm. 2009.

누군가 꿈이 꿈인 이유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지만, 꿈은 이루어지기 때문에 꾸는 것이라는 평범하고 소중한 진리를 그 여행을 다녀오며 알게 되었다.

‘곧 다시 동생이 끓여주는 라면도 먹고, 가족이 다 같이 여행도 갈 수 있겠지.’ 나는 오늘도 그날을 꿈꾼다.

자전거와 함께한 64일간의 유럽 여행

정태일 33세. <바이시클 다이어리> 저자

스물일곱 살 2005년의 이야기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바로 군 입대를 했다가 이제 막 전역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남들 하는 만큼 공부도 마쳤고, 그럴듯한 대학까지 나왔으니 이젠 도심의 고층 빌딩으로 출퇴근하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탈락, 탈락, 또 탈락. 마흔 번째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고 나니 처음의 패기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초라했고 부끄러웠고 무서웠다. 그럴수록 스펙 쌓기에 집착했다. 하지만 뭔가 잘못 가고 있단 생각을 지울 순 없었다. 습관처럼 토익학원 새벽반에 나가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의 문제는 스펙이 아니라 서른 살 가까이 살면서 아직까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아리송하다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너보다 어릴 때 동네 쌀집 아저씨 자전거를 무작정 훔쳐 타고 전국 일주를 한 적이 있었어. 딱 열흘 동안 타고 다녔는데 아주 생고생을 했지. 허허. 하지만 그 짧은 여행이 나에게 많은 걸 알려줬어. 이젠 너도 그런 때가 온 게 아닌가 싶다. 이왕 가는 거 유럽은 어떠니?”

평소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꺼냈다고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유럽을 자전거로 여행한다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열정이 필요한 것일까?’ 자전거로 유럽을 달린다면, 내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남들과 경쟁하는 스펙이 아니라, 나와 겨루는 도전과 변화가 더욱 절실했다.

새빨간 자전거를 골라, ‘빨간비늘’이라는 이름도 붙여줬다. 딱 2주를 준비한 후 유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64일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에서 미친 듯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처음에는 지도를 보며 불안하게 움직였지만 다행히도 내 젊은 심장은 금방 이곳에 익숙해졌다.

자전거 유럽 여행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스호스텔에서 홀로 숙박을 하는 것은 일상이었고, 때로는 노숙도 피할 수 없었다. 힘이 들었다.

박구환 작

<peaceful village-ride a bicycle>

woodcut. 53.5×38cm. 2010.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도 나를 응원하는 사람을 계속 만났다. 쿠바인 역사 교사, 나의 여행을 취재하겠다던 여행칼럼니스트, 짐을 주렁주렁 달고 달리던 일본인 아가씨, 여든의 독일인 할아버지까지. 예상하지 못한 그들의 감탄에 몸은 지쳐도 자꾸만 신이 났다. 그리곤 내친김에 먼 길을 달려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그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만약 기차로 이동했다면 이런 감정을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전할 수 있었을까?

이후 스페인과 독일로 이어진 여행 역시 매 순간이 감동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보니, 64일간 약 3,500㎞를 달렸고, 700만 번 페달을 밟았으며, 하루 평균 10시간을 자전거 위에서 보냈다. 펑크는 5번 났고, 손톱은 3번이나 깨졌다.

내가 자전거 여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3가지였다. 첫째, 나의 성공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 둘째,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페달을 밟았다는 것. 셋째, 이 모든 일이 가능할 거라는 열정을 가진 것이다.

이후 서너 번의 면접을 더 치렀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듯 합격을 알리는 해피콜을 여러 번 받았다.

지금도 게으름과 핑계가 나를 괴롭힐 때면 유럽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흘린 땀방울을 기억하면서 ‘빨간비늘’을 다시 꺼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페달 소리가 윙윙 들리면서 전기에 감염된 듯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남편들이여, 인생 여행 함께 떠난

아내의 말을 잘 들으시게나

송춘종 77세. <선녀와 나무꾼의 60년 여행 이야기> 저자

우리 부부는 함께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의 여행만 좋은 줄 알지만, 나이가 들어서 하는 여행도 참 좋다. 눈도 나빠지고 귀도 잘 안 들리지만 세상이 더 멀리 보이고 더 깊이 들린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특히 나이 들어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은 더없이 좋다. 1996년 아내와 단둘이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37년 동안의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아들 3형제를 다 분가시키고 난 뒤라 호젓하게 둘만의 여행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당시 여행을 하며 놀랐던 것은 평소엔 조용하기만 하던 아내의 적극적인 모습과 용기였다. 음식이 맛있으면 만든 사람을 불러 어떻게 만들었는지 물어보고, 이해를 못 하겠으면 직접 주방으로 가서 보기도 했다. 손짓, 발짓, 정 안 되면 적어서라도 소통을 하려고 했다. 사람들도 언제나 도와주려고 했고, 덕분에 우리 마음도 넉넉하고 따듯해졌다.

아내의 그런 적극성 덕분에 여행에서 그곳의 문화를 더 많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다. 아내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냐고 하니 “외국 가서 그 나라 말 못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그러니까 부끄러울 것도 없고,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는 거지요.” 그러면서 “세상을 살아보니 그렇게 부끄러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더라”는 말을 하였다.

그 후로도 나는 전혀 보지 못했던 관점으로 여행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아내의 지혜와 안목에 감탄하고는 했다. 여행을 가면 새롭게 사람이 알아진다는 말처럼, 아내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사실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서로 배려하지 않으면 힘들다. 하지만 남자들이 여자 말만 잘 들으면 거의 다 해결된다. 그런데 내 나이 또래들이 대개 그렇듯, 집에서처럼 여행 갈 때도 아내에게 상사 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러니 어느 아내가 같이 가고 싶을까. 짐을 싸고 풀어놓기, 빨래를 짜서 너는 것 등 남자가 알아서 할 일을 나눠서 하면 여행이 훨씬 가벼워진다. 남자로서 가부장제를 허물어뜨리면 내 마음도 가볍고 행복해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니 아내한테 잘못한 게 참 많았다. 한번은 지나가는 말처럼 “내가 미안한 게 참 많~은 사람이요” 하고 고백했다. 나 중심으로 아내가 다 맞춰주길 바라며 살았으니까. 그럼에도 오랜 세월 화목하게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은 다 아내가 말없이 참아주고 맞춰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

같이 다니기만 했지, 아내 마음은 동쪽에, 남편 마음은 서쪽에 있는 부부를 종종 본다. 좀스러운 자존심 때문에 서로 배려하지 못하고 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사는 것도 여행이라면, 우리는 부부로 만나 47년 세월을 함께 여행한 셈이다. 부부가 즐겁게 삶의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벽을 허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슈퍼도 같이 가서 무거운 짐도 들어주고, 간섭과 잔소리를 덜 하고, 상대가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저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저 사람이 기쁘면 나도 기쁜 게 부부다. 그래서 반쪽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도 이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기에, “지금까지 살기를 잘했다, 더 일찍 죽었으면 이걸 몰랐을 것 아니냐”며 웃는다. 칠십이 넘도록 건강하여 이렇게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르겠다. 참 감사하다.

박구환 작. <late afternoon>

woodcut. 53×41cm.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