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삶에 주어진 그 목적지를 향해…. 신나게 행복하게 기쁘게 내 삶 속으로 떠난 진정한 여행 이야기.

“동생아, 꼭 일어나야 해,

그때 우리 또 여행 가자”

박소정 26세. 사회복지사. 경남 거제시 고현동.

“저에겐 전신 마비로 누워 있는 남동생, 시각 장애를 갖게 된 어머니, 당뇨 합병증으로 힘든 아버지가 계십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도 나는 당당하게 나의 가족을 소개한다. 그러면 대개 힘들지 않냐고 묻는다.

그럴 때면 “가족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있을 때 잘하시라”고 말한다.

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은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님은 동생에게 중증 장애인을 돕는 일을 하게 하시며, “장애를 가졌지만 너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스스로에게 당당해라”는 말씀을 늘 하셨다. 그 덕분에 동생은 밝은 성격으로 자랐다.

그런데 공부도 곧잘 하며 프로그래머의 꿈을 꾸던 동생이, 계속 몸이 나빠졌다. 급기야 고3 되던 해 전신 마비 증세로 집에만 있게 되었다. 내가 지쳐 들어오면 라면도 끓여주고, 아플 때면 죽을 쑤어 주고, 용돈을 안 쓰고 모았다가 “누나, 써” 하며 주어서 깜짝 놀라게 했던 내 동생.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희망이던 동생이었기에 내 마음은 더욱 아팠다.

남동생을 보며 늘 바람이 있었다. 가족 여행을 가는 거였다. 좋은 구경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도 먹여주고 싶은데, 그저 꿈만 꿀 따름이었다. 그러다 어려운 사정의 가족에게 여행을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2009년 신청을 했는데, 정말 당첨이 되었다.

10여 년 만에 우리 가족 모두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여행길에 올랐다. 울산을 거쳐 설악산까지 2박 3일간의 일정이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 ‘이것이 행복이구나’ 생각했다. 주최 측의 세심한 배려로 캠핑카를 타고 시작된 우리의 여행길. 첫날엔 울산대공원 장미 축제에 갔다. 따스한 햇볕 아래 활짝 핀 장미꽃들을 보며 걷다 보니 어머니의 콧노래가 들려왔다. 부모님이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다음 날 설악산에 도착해, 정상에 오르는 케이블카를 탔을 때는 정말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악산은 동생이 전신 마비가 되기 전에 등반했던 곳이라서 더욱 감회가 컸다.

동생이 “누나, 내가 걸어 다녔을 때 여기 등산했었어, 참 새롭다” 하며 어눌한 말투로 이야기했을 땐 그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아팠다. 산 정상에 올라 동생이 하루빨리 건강해지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힘들어도 곧 행복한 날들만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힘내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여행을 다녀오고 난 뒤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 힘도 내고 가족 모두 모여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다. 가족 모두 하루빨리 건강해져 또 가족 여행을 가자고 한다.

동생은 “좀만 기달려, 누나 시집갈 때까지는 꼭 일어날게” 하며 웃는다.

박구환 작. <한가로운 마을-해풍>

유성목판화. 64.5×50cm. 2009.

누군가 꿈이 꿈인 이유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지만, 꿈은 이루어지기 때문에 꾸는 것이라는 평범하고 소중한 진리를 그 여행을 다녀오며 알게 되었다.

‘곧 다시 동생이 끓여주는 라면도 먹고, 가족이 다 같이 여행도 갈 수 있겠지.’ 나는 오늘도 그날을 꿈꾼다.

자전거와 함께한 64일간의 유럽 여행

정태일 33세. <바이시클 다이어리> 저자

스물일곱 살 2005년의 이야기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바로 군 입대를 했다가 이제 막 전역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남들 하는 만큼 공부도 마쳤고, 그럴듯한 대학까지 나왔으니 이젠 도심의 고층 빌딩으로 출퇴근하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탈락, 탈락, 또 탈락. 마흔 번째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고 나니 처음의 패기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초라했고 부끄러웠고 무서웠다. 그럴수록 스펙 쌓기에 집착했다. 하지만 뭔가 잘못 가고 있단 생각을 지울 순 없었다. 습관처럼 토익학원 새벽반에 나가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의 문제는 스펙이 아니라 서른 살 가까이 살면서 아직까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아리송하다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너보다 어릴 때 동네 쌀집 아저씨 자전거를 무작정 훔쳐 타고 전국 일주를 한 적이 있었어. 딱 열흘 동안 타고 다녔는데 아주 생고생을 했지. 허허. 하지만 그 짧은 여행이 나에게 많은 걸 알려줬어. 이젠 너도 그런 때가 온 게 아닌가 싶다. 이왕 가는 거 유럽은 어떠니?”

평소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꺼냈다고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유럽을 자전거로 여행한다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열정이 필요한 것일까?’ 자전거로 유럽을 달린다면, 내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남들과 경쟁하는 스펙이 아니라, 나와 겨루는 도전과 변화가 더욱 절실했다.

새빨간 자전거를 골라, ‘빨간비늘’이라는 이름도 붙여줬다. 딱 2주를 준비한 후 유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64일 동안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에서 미친 듯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처음에는 지도를 보며 불안하게 움직였지만 다행히도 내 젊은 심장은 금방 이곳에 익숙해졌다.

자전거 유럽 여행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스호스텔에서 홀로 숙박을 하는 것은 일상이었고, 때로는 노숙도 피할 수 없었다. 힘이 들었다.

박구환 작

<peaceful village-ride a bicycle>

woodcut. 53.5×38cm. 2010.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도 나를 응원하는 사람을 계속 만났다. 쿠바인 역사 교사, 나의 여행을 취재하겠다던 여행칼럼니스트, 짐을 주렁주렁 달고 달리던 일본인 아가씨, 여든의 독일인 할아버지까지. 예상하지 못한 그들의 감탄에 몸은 지쳐도 자꾸만 신이 났다. 그리곤 내친김에 먼 길을 달려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그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만약 기차로 이동했다면 이런 감정을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전할 수 있었을까?

이후 스페인과 독일로 이어진 여행 역시 매 순간이 감동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보니, 64일간 약 3,500㎞를 달렸고, 700만 번 페달을 밟았으며, 하루 평균 10시간을 자전거 위에서 보냈다. 펑크는 5번 났고, 손톱은 3번이나 깨졌다.

내가 자전거 여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3가지였다. 첫째, 나의 성공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 둘째,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페달을 밟았다는 것. 셋째, 이 모든 일이 가능할 거라는 열정을 가진 것이다.

이후 서너 번의 면접을 더 치렀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듯 합격을 알리는 해피콜을 여러 번 받았다.

지금도 게으름과 핑계가 나를 괴롭힐 때면 유럽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흘린 땀방울을 기억하면서 ‘빨간비늘’을 다시 꺼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페달 소리가 윙윙 들리면서 전기에 감염된 듯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남편들이여, 인생 여행 함께 떠난

아내의 말을 잘 들으시게나

송춘종 77세. <선녀와 나무꾼의 60년 여행 이야기> 저자

우리 부부는 함께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의 여행만 좋은 줄 알지만, 나이가 들어서 하는 여행도 참 좋다. 눈도 나빠지고 귀도 잘 안 들리지만 세상이 더 멀리 보이고 더 깊이 들린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특히 나이 들어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은 더없이 좋다. 1996년 아내와 단둘이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37년 동안의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아들 3형제를 다 분가시키고 난 뒤라 호젓하게 둘만의 여행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당시 여행을 하며 놀랐던 것은 평소엔 조용하기만 하던 아내의 적극적인 모습과 용기였다. 음식이 맛있으면 만든 사람을 불러 어떻게 만들었는지 물어보고, 이해를 못 하겠으면 직접 주방으로 가서 보기도 했다. 손짓, 발짓, 정 안 되면 적어서라도 소통을 하려고 했다. 사람들도 언제나 도와주려고 했고, 덕분에 우리 마음도 넉넉하고 따듯해졌다.

아내의 그런 적극성 덕분에 여행에서 그곳의 문화를 더 많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다. 아내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냐고 하니 “외국 가서 그 나라 말 못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그러니까 부끄러울 것도 없고,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는 거지요.” 그러면서 “세상을 살아보니 그렇게 부끄러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더라”는 말을 하였다.

그 후로도 나는 전혀 보지 못했던 관점으로 여행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아내의 지혜와 안목에 감탄하고는 했다. 여행을 가면 새롭게 사람이 알아진다는 말처럼, 아내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사실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서로 배려하지 않으면 힘들다. 하지만 남자들이 여자 말만 잘 들으면 거의 다 해결된다. 그런데 내 나이 또래들이 대개 그렇듯, 집에서처럼 여행 갈 때도 아내에게 상사 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러니 어느 아내가 같이 가고 싶을까. 짐을 싸고 풀어놓기, 빨래를 짜서 너는 것 등 남자가 알아서 할 일을 나눠서 하면 여행이 훨씬 가벼워진다. 남자로서 가부장제를 허물어뜨리면 내 마음도 가볍고 행복해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니 아내한테 잘못한 게 참 많았다. 한번은 지나가는 말처럼 “내가 미안한 게 참 많~은 사람이요” 하고 고백했다. 나 중심으로 아내가 다 맞춰주길 바라며 살았으니까. 그럼에도 오랜 세월 화목하게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은 다 아내가 말없이 참아주고 맞춰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

같이 다니기만 했지, 아내 마음은 동쪽에, 남편 마음은 서쪽에 있는 부부를 종종 본다. 좀스러운 자존심 때문에 서로 배려하지 못하고 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사는 것도 여행이라면, 우리는 부부로 만나 47년 세월을 함께 여행한 셈이다. 부부가 즐겁게 삶의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벽을 허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슈퍼도 같이 가서 무거운 짐도 들어주고, 간섭과 잔소리를 덜 하고, 상대가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저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저 사람이 기쁘면 나도 기쁜 게 부부다. 그래서 반쪽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도 이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기에, “지금까지 살기를 잘했다, 더 일찍 죽었으면 이걸 몰랐을 것 아니냐”며 웃는다. 칠십이 넘도록 건강하여 이렇게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르겠다. 참 감사하다.

박구환 작. <late afternoon>

woodcut. 53×41cm.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