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꽃 한 송이를 안겨볼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경쾌하고 상큼한 발라드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등 1990년대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가수와 연기자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상우씨.
언젠가부터 그는 한가인, 장나라 등을 발굴한 연예 기획자, 잘나가는 사업가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7년, KBS 휴먼다큐 인간극장에서 보여진 이상우씨의 모습은 뜻밖이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큰아들을 키우면서
가졌던 아픔과 방황의 시간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아버지 이상우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훗날 아이들로부터 “나도 아버지처럼 제 아이들을 키울래요”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최고로 행복할 것 같다는, 참 좋은 아빠 이상우씨를 만나보았다.
글 최창원 사진 홍성훈
승훈이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지요?
네. 1학년이에요. 이제 혼자 학교도 가고 레슨 받으러 갔다가 두세 군데 거쳐서 올 정도는 되는데, 아직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어딜 갔다 와라 하는 건 못 해요. 예전에는 많이 조급했어요. 아이는 커 가는데 실생활에서 안 되는 게 너무 많으니까. 그런데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더라고요. 승훈이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해나가야죠.
2007년 9월, 인간극장에 출연하셨을 때 많은 화제가 됐어요.
“제 아들이 장애가 있습니다” 하고 밝히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요.
무엇보다 나중에 아이가 혹시라도 상처받을까 봐 그게 두려웠어요. 그런데 PD가 “보통 장애아를 키우면 힘들고 고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장애아를 키우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방송으로도 우리가 밝고 예쁘게 나왔잖아요. 그걸 보고 제가 부끄러울 만큼 정말 많은 분들이 응원과 격려를 해주셨어요. 승훈이도 사람들이 자신을 따듯하게 바라보는 것을 느끼면서, 세상에 한발 더 나가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폐라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나오는데 눈물이 비 오듯이 나더라고요. 처음 3개월은 거의 폐인이었어요. 술을 얼마나 먹고 다녔는지. 근데 아내는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계속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언어 치료, 행동 치료며 뭐든지 해보려고 하고. 그게 엄마의 힘인 것 같아요. 아내가 그러는 걸 보면서 나도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더라고요.
지금은 승훈이를 ‘스승’이라 생각하신다고요.
예전에는 정말 나 잘난 맛에, 소위 말하는 출세한 사람으로 살았거든요. 그렇게 오만 덩어리였던 나를 승훈이가 겸손하게 만들어준 겁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세상이 허락한 만큼밖에 인간은 누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또 행복이라는 게 마음 안에 있다는 것도 승훈이를 키우면서 알게 됐어요. 많은 인터뷰를 통해서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진심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정말로 힘들거든요. 저희들 역시 수없이 좌절하고 절망적인 상황들을 겪었어요. 그럴 때 어떤 식으로든 버텨야 하다 보니 자꾸 희망을 찾게 돼요. 난 그래도 이런 게 좋잖아, 하면서. 그런데 신기하게도 억지로 찾다 보면 그게 진짜 감사한 겁니다. 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감사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진짜 행복이 와요. 그리고 장애아를 키우면 부모들이 잠깐도 허튼짓을 못해요. 그런 긴장감들이 저를 참 열심히 살게 만듭니다. 승훈이는 우리 부부한테는 정말 스승이에요.
1993년 결혼, 큰아들이 30여 개월 되었을 때 발달장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그를 가르치기 위해 세상에 온 ‘스승’처럼 그의 삶을 이끌어주었다. 그는 승훈이와 같은 처지의 발달장애아들과 부모들을 돕기 위한 공연을 다녔다. 남을 위해 살겠노라 대단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가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이상우. 학창 시절 각종 대회에서 상도 받고, 중창단, 밴드도 만들어서 활동했다. 그러다 대학 시절, 친구의 권유로 1988년 강변가요제에 출전한다. 기대치 않은 금상을 받으며 가요계에 데뷔한 후 드라마, CF모델, 영화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며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발달장애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그는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다. 아들 승훈이를 위해 경제적으로 넉넉해져야 했기에 사업을 시작했다. 연예기획사, 교육, 문화, 의류 사업…. 까만 뿔테 안경에 순둥이로만 보이던 방송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논리적이고 꼼꼼한 사업가적인 면모를 발휘해갔다.
이제 사업가라 불리는 것도 어색하지 않으시겠어요.
처음에 사업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승훈이 때문이었어요.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의 마음은 똑같죠.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 아이가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 괴로워요. 학교 졸업 후 직장을 갖지 못하면 결국 다른 누군가의 신세를 지면서 살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발달장애아들의 자활 교육과 자립을 도와줄 복지센터 같은 걸 만들고 싶었어요. 일단 지금은, 아는 목사님께서 발달장애아를 위한 복지센터를 만드신 상태예요. 제가 하는 것보다 목사님이 만드시는 게 훨씬 수월해서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저는 계속 후원을 할 거고요.
발달장애아와 부모를 돕기 위한 음악봉사단 등 봉사도 활발하게 하시고 계시지요.
제가 넓은 가슴을 지닌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아이가 발달장애라는 것이 알려지고 난 후부터 자꾸 섭외가 들어와요.(웃음)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면 다른 누군가가 또 우리 아이를 많이 도와주시겠지 이런 생각도 있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치가 있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조금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조금은 못한 사람을 돌보는 세상, 그런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최근에는 보컬아카데미도 여셨다고 들었습니다.
노래는 참 좋은 거예요. 진정성을 가지고 전달했을 때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거든요. 요즘에는 오디션 프로그램도 많고, 가수를 꿈꾸는 친구들이 참 많습니다. 노래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제대로 노래를 가르쳐주기는 힘들죠. 노래의 근간이 되는 게 좋은 호흡과 발성인데, 그건 몸속에 있는 근육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져요. 그런데 사람 몸속에 있는 근육의 움직임을 이론이나 논리로 가르치기는 참 어렵거든요. 그래서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이 가르치는 게 중요해요. 이번에 10년 이상의 경험을 가진 분들이 2년 가까이 연구해서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제대로 노래를 가르쳐보고 싶고, 내년부터는 음악에 재능 있는 장애아들을 매니지먼트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승훈이를 통해 기다림을 배웠다고 하셨는데요,
그러한 마음이 사회생활하며 사람을 대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원래 성격이 급한 편이었는데, 엄청나게 바뀌었지요. 예를 들어 원래 수영 가는 날인데 일정이 꼬이잖아요. 그러면 아빠, 오늘 수영 하러 안 가죠? 그러면 안 가요, 해요. 그러면 조금 있다 또 물어요. 그럼 또 안 가요, 대답하고. 그 과정을 300번 넘게 반복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근데 200번 잘하다가 한 번 안 간다 그랬잖아! 하고 소리 지르면 끝이에요. 끝까지 참고, 있는 그대로 대답해줘야 해요. 왜냐면 불안해서 그런 거거든요. 지는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하면 그렇게 수백 번을 물어보겠어요. 어쨌든 승훈이 덕분에 사람 됐다고 하죠. 커뮤니케이션이 힘든 아이하고도 끊임없이 대화를 하는데, 멀쩡한 사람하고 왜 대화를 못 하겠어요. 말로 못 풀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승훈이와 둘째 도훈이, 또 아내분까지 네 가족이 굉장히 화목하신 것 같아요.
아이들한테 조금 미안하지만 저는 아이들보다 아내가 더 좋아요. 그 사람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까 그런 생각도 들고. 근데 이것도 다 승훈이 덕분이에요. 집사람은 무남독녀 외딸에 서울 여자고 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니 처음에 얼마나 싸웠겠어요. 그런 와중에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애한테 정말 잘하는 거예요. 저도 감동을 받아서 아내한테 잘하게 되고, 제가 잘하니까 아내도 저한테 잘해주고. 또 승훈이 문제를 풀려면 부부끼리 대화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서로 이해하게 되고. 이게 계속 상승작용을 하니까 닭살 부부가 될 수밖에 없죠.(웃음)
둘째 도훈이가 그렇게 똑똑하고 음악적 재능도 많다면서요? 승훈이와 도훈이가 어떤 형제가 되길 바라시는지요.
정말 미안하지만 사실 승훈이 때문에 둘째를 생각했던 것도 있어요. 나중에 혼자가 될 승훈이를 생각하면 앞이 깜깜해서요. 도훈이가 6살 때인가, 얘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도훈아 너는 형이 어때?” 하고 물었죠. 그러니까 형이 좀 시시하대요. 게임을 해도 항상 자기한테 지니까. 그래서 “앞으로 네가 커가면서 형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아빠는 그게 너한테 참 미안하다. 그럴 때라도 씩씩하게 잘해줬으면 좋겠어” 그랬더니 6살짜리가 펑펑 우는 겁니다. “아빠, 내가 미안해” 이러면서. 자기가 형을 많이 챙겨야 하는데, 많이 못 챙겨서 미안하다는 거예요. 승훈이도 도훈이를 정말 좋아해요. 한번은 도훈이가 4살 때인가 승훈이가 나가다가 공을 밟아서 넘어졌어요. 그걸 보고 도훈이가 깔깔깔 웃었어요. 그러니까 얘가 그 자리에서 스무 번은 더 넘어지더라고요. 도훈이가 좋아하니까. 지 동생이 웃으니까…. 서로 얼마나 아끼고 챙기는지 어느 땐 니들이 부모보다 낫다,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런 생각도 들 때가 많아요.
도훈이에게 한마디 해주시겠어요? ‘영상 편지’ 대신 ‘지면 편지’가 되겠네요.
“도훈아, 도훈이가 앞으로 커가면서 형이 보통 형들하고 다르다는 느낌을 받겠지만 형이 절대 부족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가끔은 도훈이가 형을 챙겨야 할 일도 생길 거야. 그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주리라 믿어. 엄마 아빠는 도훈이도 무지무지 사랑하니까, 엄마 아빠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듬뿍 줄 거야. 그 사랑 받고 잘 자라서 형한테도 나눠줄 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줄 아는 따듯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수, 연기자, 사업가, 이상우씨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어떤 타이틀도 다 떠나서 훗날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으신지요.
제가 나중에 눈감을 때 내 아들이 당신이 제 아버지여서 정말 좋았습니다, 저한텐 그게 행운이었습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내 아이를 키우겠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아내한테는 당신은 남편으로 최고였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다.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해요. 이게 제가 사는 목적이고 목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상우씨를 응원하는 많은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했다. “항상 제가 모르는 곳에서도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이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너무 감사드립니다.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자세를 바로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세상 앞에 더욱 겸허해진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순간 그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 같은 아내와 스승이 되어주는 두 아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안다는 것, 그는 이미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할 삶의 가장 큰 가치와 의미를 정확히 깨닫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