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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사업가, 그리고 승훈이 아빠_ 이상우

‘장미 꽃 한 송이를 안겨볼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경쾌하고 상큼한 발라드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등 1990년대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가수와 연기자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상우씨.

언젠가부터 그는 한가인, 장나라 등을 발굴한 연예 기획자, 잘나가는 사업가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7년, KBS 휴먼다큐 인간극장에서 보여진 이상우씨의 모습은 뜻밖이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큰아들을 키우면서
가졌던 아픔과 방황의 시간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아버지 이상우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훗날 아이들로부터 “나도 아버지처럼 제 아이들을 키울래요”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최고로 행복할 것 같다는, 참 좋은 아빠 이상우씨를 만나보았다.

최창원 사진 홍성훈


승훈이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지요?

네. 1학년이에요. 이제 혼자 학교도 가고 레슨 받으러 갔다가 두세 군데 거쳐서 올 정도는 되는데, 아직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어딜 갔다 와라 하는 건 못 해요. 예전에는 많이 조급했어요. 아이는 커 가는데 실생활에서 안 되는 게 너무 많으니까. 그런데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더라고요. 승훈이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해나가야죠.

2007년 9월, 인간극장에 출연하셨을 때 많은 화제가 됐어요.

“제 아들이 장애가 있습니다” 하고 밝히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요.

무엇보다 나중에 아이가 혹시라도 상처받을까 봐 그게 두려웠어요. 그런데 PD가 “보통 장애아를 키우면 힘들고 고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장애아를 키우면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방송으로도 우리가 밝고 예쁘게 나왔잖아요. 그걸 보고 제가 부끄러울 만큼 정말 많은 분들이 응원과 격려를 해주셨어요. 승훈이도 사람들이 자신을 따듯하게 바라보는 것을 느끼면서, 세상에 한발 더 나가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폐라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나오는데 눈물이 비 오듯이 나더라고요. 처음 3개월은 거의 폐인이었어요. 술을 얼마나 먹고 다녔는지. 근데 아내는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계속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언어 치료, 행동 치료며 뭐든지 해보려고 하고. 그게 엄마의 힘인 것 같아요. 아내가 그러는 걸 보면서 나도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더라고요.

지금은 승훈이를 ‘스승’이라 생각하신다고요.

예전에는 정말 나 잘난 맛에, 소위 말하는 출세한 사람으로 살았거든요. 그렇게 오만 덩어리였던 나를 승훈이가 겸손하게 만들어준 겁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세상이 허락한 만큼밖에 인간은 누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또 행복이라는 게 마음 안에 있다는 것도 승훈이를 키우면서 알게 됐어요. 많은 인터뷰를 통해서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진심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정말로 힘들거든요. 저희들 역시 수없이 좌절하고 절망적인 상황들을 겪었어요. 그럴 때 어떤 식으로든 버텨야 하다 보니 자꾸 희망을 찾게 돼요. 난 그래도 이런 게 좋잖아, 하면서. 그런데 신기하게도 억지로 찾다 보면 그게 진짜 감사한 겁니다. 난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감사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진짜 행복이 와요. 그리고 장애아를 키우면 부모들이 잠깐도 허튼짓을 못해요. 그런 긴장감들이 저를 참 열심히 살게 만듭니다. 승훈이는 우리 부부한테는 정말 스승이에요.

1993년 결혼, 큰아들이 30여 개월 되었을 때 발달장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그를 가르치기 위해 세상에 온 ‘스승’처럼 그의 삶을 이끌어주었다. 그는 승훈이와 같은 처지의 발달장애아들과 부모들을 돕기 위한 공연을 다녔다. 남을 위해 살겠노라 대단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가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이상우. 학창 시절 각종 대회에서 상도 받고, 중창단, 밴드도 만들어서 활동했다. 그러다 대학 시절, 친구의 권유로 1988년 강변가요제에 출전한다.  기대치 않은 금상을 받으며 가요계에 데뷔한 후 드라마, CF모델, 영화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며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발달장애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 그는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다. 아들 승훈이를 위해 경제적으로 넉넉해져야 했기에 사업을 시작했다. 연예기획사, 교육, 문화, 의류 사업…. 까만 뿔테 안경에 순둥이로만 보이던 방송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논리적이고 꼼꼼한 사업가적인 면모를 발휘해갔다.

이제 사업가라 불리는 것도 어색하지 않으시겠어요.

처음에 사업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승훈이 때문이었어요.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의 마음은 똑같죠.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 아이가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 괴로워요. 학교 졸업 후 직장을 갖지 못하면 결국 다른 누군가의 신세를 지면서 살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발달장애아들의 자활 교육과 자립을 도와줄 복지센터 같은 걸 만들고 싶었어요. 일단 지금은, 아는 목사님께서 발달장애아를 위한 복지센터를 만드신 상태예요. 제가 하는 것보다 목사님이 만드시는 게 훨씬 수월해서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저는 계속 후원을 할 거고요.

발달장애아와 부모를 돕기 위한 음악봉사단 등 봉사도 활발하게 하시고 계시지요.

제가 넓은 가슴을 지닌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아이가 발달장애라는 것이 알려지고 난 후부터 자꾸 섭외가 들어와요.(웃음)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면 다른 누군가가 또 우리 아이를 많이 도와주시겠지 이런 생각도 있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치가 있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조금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조금은 못한 사람을 돌보는 세상, 그런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최근에는 보컬아카데미도 여셨다고 들었습니다.

노래는 참 좋은 거예요. 진정성을 가지고 전달했을 때 듣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거든요. 요즘에는 오디션 프로그램도 많고, 가수를 꿈꾸는 친구들이 참 많습니다. 노래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제대로 노래를 가르쳐주기는 힘들죠. 노래의 근간이 되는 게 좋은 호흡과 발성인데, 그건 몸속에 있는 근육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져요. 그런데 사람 몸속에 있는 근육의 움직임을 이론이나 논리로 가르치기는 참 어렵거든요. 그래서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이 가르치는 게 중요해요. 이번에 10년 이상의 경험을 가진 분들이 2년 가까이 연구해서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제대로 노래를 가르쳐보고 싶고, 내년부터는 음악에 재능 있는 장애아들을 매니지먼트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승훈이를 통해 기다림을 배웠다고 하셨는데요,

그러한 마음이 사회생활하며 사람을 대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원래 성격이 급한 편이었는데, 엄청나게 바뀌었지요. 예를 들어 원래 수영 가는 날인데 일정이 꼬이잖아요. 그러면 아빠, 오늘 수영 하러 안 가죠? 그러면 안 가요, 해요. 그러면 조금 있다 또 물어요. 그럼 또 안 가요, 대답하고. 그 과정을 300번 넘게 반복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근데 200번 잘하다가 한 번 안 간다 그랬잖아! 하고 소리 지르면 끝이에요. 끝까지 참고, 있는 그대로 대답해줘야 해요. 왜냐면 불안해서 그런 거거든요. 지는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하면 그렇게 수백 번을 물어보겠어요. 어쨌든 승훈이 덕분에 사람 됐다고 하죠. 커뮤니케이션이 힘든 아이하고도 끊임없이 대화를 하는데, 멀쩡한 사람하고 왜 대화를 못 하겠어요. 말로 못 풀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웃음)

승훈이와 둘째 도훈이, 또 아내분까지 네 가족이 굉장히 화목하신 것 같아요.

아이들한테 조금 미안하지만 저는 아이들보다 아내가 더 좋아요. 그 사람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살까 그런 생각도 들고. 근데 이것도 다 승훈이 덕분이에요. 집사람은 무남독녀 외딸에 서울 여자고 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니 처음에 얼마나 싸웠겠어요. 그런 와중에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애한테 정말 잘하는 거예요. 저도 감동을 받아서 아내한테 잘하게 되고, 제가 잘하니까 아내도 저한테 잘해주고. 또 승훈이 문제를 풀려면 부부끼리 대화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서로 이해하게 되고. 이게 계속 상승작용을 하니까 닭살 부부가 될 수밖에 없죠.(웃음)

둘째 도훈이가 그렇게 똑똑하고 음악적 재능도 많다면서요? 승훈이와 도훈이가 어떤 형제가 되길 바라시는지요.

정말 미안하지만 사실 승훈이 때문에 둘째를 생각했던 것도 있어요. 나중에 혼자가 될 승훈이를 생각하면 앞이 깜깜해서요. 도훈이가 6살 때인가, 얘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궁금해서, “도훈아 너는 형이 어때?” 하고 물었죠. 그러니까 형이 좀 시시하대요. 게임을 해도 항상 자기한테 지니까. 그래서 “앞으로 네가 커가면서 형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야, 아빠는 그게 너한테 참 미안하다. 그럴 때라도 씩씩하게 잘해줬으면 좋겠어” 그랬더니 6살짜리가 펑펑 우는 겁니다. “아빠, 내가 미안해” 이러면서. 자기가 형을 많이 챙겨야 하는데, 많이 못 챙겨서 미안하다는 거예요. 승훈이도 도훈이를 정말 좋아해요. 한번은 도훈이가 4살 때인가 승훈이가 나가다가 공을 밟아서 넘어졌어요. 그걸 보고 도훈이가 깔깔깔 웃었어요. 그러니까 얘가 그 자리에서 스무 번은 더 넘어지더라고요. 도훈이가 좋아하니까. 지 동생이 웃으니까…. 서로 얼마나 아끼고 챙기는지 어느 땐 니들이 부모보다 낫다,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런 생각도 들 때가 많아요.

도훈이에게 한마디 해주시겠어요? ‘영상 편지’ 대신 ‘지면 편지’가 되겠네요.

“도훈아, 도훈이가 앞으로 커가면서 형이 보통 형들하고 다르다는 느낌을 받겠지만 형이 절대 부족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가끔은 도훈이가 형을 챙겨야 할 일도 생길 거야. 그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주리라 믿어. 엄마 아빠는 도훈이도 무지무지 사랑하니까, 엄마 아빠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듬뿍 줄 거야. 그 사랑 받고 잘 자라서 형한테도 나눠줄 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줄 아는 따듯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수, 연기자, 사업가, 이상우씨를 수식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어떤 타이틀도 다 떠나서 훗날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으신지요.

제가 나중에 눈감을 때 내 아들이 당신이 제 아버지여서 정말 좋았습니다, 저한텐 그게 행운이었습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내 아이를 키우겠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아내한테는 당신은 남편으로 최고였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다.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닌가 해요. 이게 제가 사는 목적이고 목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상우씨를 응원하는 많은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했다. “항상 제가 모르는 곳에서도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이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너무 감사드립니다.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 자세를 바로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세상 앞에 더욱 겸허해진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순간 그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 같은 아내와 스승이 되어주는 두 아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안다는 것, 그는 이미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할 삶의 가장 큰 가치와 의미를 정확히 깨닫고 있지 않은가.

이상우 님은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MBC 강변가요제 ‘슬픈 그림 같은 사랑’으로 금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였습니다. 1989년 1집 발표를 시작으로 5집까지 발표를 했고, ‘그녀를 만나는 곳 100m전’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이젠’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고, CF모델, 드라마, 영화배우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동안 음반 프로듀서, 교육, 문화 사업, 엔터테인먼트사 운영 등 사업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던 그는 현재 티원보컬아카데미를 운영하며, KBS2 라디오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7’이라 쓰고 행운이라 부른다 하는 럭키lucky7! 이달엔 행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일명 ‘럭키 가이Lucky Guy’의 고백

황휘 서울 상문고등학교 3학년. 국제로봇올림피아드 3회 금메달 수상

나는 운이 잘 따르는 편이다. 럭키 가이라고나 할까^^.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구독하는 잡지 이벤트에 당첨이 되고, 우연히 돌아다니다가 TV 인터뷰에 나오기도 하는 등, 당첨 운은 기본이고 뭔가 지원해서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도전, 연속 7개의 컴퓨터 자격증을 어렵지 않게 땄고, 초, 중, 고 3번 모두 국제로봇올림피아드에 나가서 금메달을 받았다. 벼락치기 공부를 해도 딱 내가 본 부분에서 문제가 나오니, 이쯤 되면 행운의 여신이 나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ㅋㅋ

“너는 참 운이 좋은 것 같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운이 좋냐?”

‘괴짜’라는 별명처럼 생각도 행동도 엉뚱한 데다, 수업 시간에는 졸기만 하고 별로 공부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성적은 잘 나오고, 뭔가 술술 풀려가는 것 같으니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나의 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을 잘 만나서인 듯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외가 쪽으로 큰손자였고, 친가 쪽으로는 아이가 한참 귀할 때 태어난 늦둥이였다. 그러다 보니 친가, 외가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런 사랑 덕분에 성격도 무난하고 마음도 갇혀 있지 않게 된 것 같다.

로봇을 만들 때도 항상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팀을 이룰 때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었다. 보통 한번 대회에 나가려면 팀 사람들과 반년 이상을 준비한다. 어떤 로봇을 만들까 기획하고, 설계도 짜고, 재료와 부품을 찾으러 청계천 시장을 왔다 갔다 하고, 톱질하다 상처를 입기도 하고, 불에 데기도 하고, 작은 부품 하나라도 잘 맞지 않으면 다시 찾아 나가야 하고…. 고비 고비 힘들지만 그때마다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봐라. 이왕 할 거면, 이걸 했다, 하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하라”고 하셨던 부모님 말씀을 떠올린다.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뒷받침해주셔서 만든 행운이었기에, 나 혼자만 누리기에는 미안한 행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의 꿈은 로봇 공학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외할아버지 덕분이다. 나는 원래 이과 계열이 잘 맞긴 했지만 법관이 되고 싶어 인문계 고등학교에 왔다. 그런데 그즈음 외할아버지께서 치매를 앓게 되셨다. 어릴 때 부모님이 일하러 가시면, 바둑도 가르쳐주시고, 자전거 태워 산책도 시켜주시던 할아버지. 병세가 깊어지시며 다른 사람은 기억 못 해도, 나만은 기억하는 할아버지를 뵈며, 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셨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갈수록 증세가 심해지시는 할아버지를 뵈며, 24시간 할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는 로봇이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고, 진로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아직 19살의 어린 나이지만, 나름 10여 년 가까이 로봇을 만들다 보니, 배우고 변화된 것도 많다. 각각은 정말 작고 하잘것없는 부품들이라도, 하나라도 없으면 로봇이 작동되지 않는 것을 보면, 나사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생활 속에 불편한 게 있을 때, 저걸 해결하려면 어떤 로봇을 만들면 좋을까? 생각하게 된다. 외할아버지를 위한 치료용 로봇을 시작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로봇을 만들고 싶다. 나에게 쏟아지는 이 모든 행운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그런 로봇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행운’이라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선 ‘노력’이라는 부품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쯤에서 친구들에게 한 가지 고백하고자 한다.

친구들아, 나 겉으로는 공부를 안 하는 것 같아 보여도 집에 가면 완전 새벽까지 공부한다. 내가 마냥 초월한 괴짜처럼 보여도 실은 나도 성적에 대한 부담감 완전 많단다.ㅋㅋ^^

 

김인옥 작 <항금리 가는 길> 순지에 채색. 100×100cm. 2007.

 

당신이 행운입니다

박미경 43세. 호주 퍼스 베이스워터

존, 29살 때 혼자서 유럽 여행을 하다 당신을 만났지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가 남편의 배신으로 일년 만에 이혼을 한 저는 여러모로 참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쾌활, 명랑한 척했지만, 남자에게 받은 피해 의식, 이혼녀를 보는 따가운 시선에 많이 주눅 들어 있었어요. 호주 사람이던 당신은 나를 그냥 따듯하게 바라보고 도와주었지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저에게 “내 인생에 후회하는 일 만들지 않겠다고, 자기는 변하지 않겠다”며 프러포즈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하며 저는 정말 이 세상에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를 한 남자의 소유물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존중해주었지요. 언어가 서툴러 많은 것을 당신께 미루던 나에게, 그러면 나중에 힘들어진다며 다 해보도록 했고,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화가 나서 침묵할 때면 그것은 안 좋은 습관이라며 화가 난 이유를 솔직하게 표현하라며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결혼 초 “당신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에 하늘에 감사한다” 했을 때 “한 10년을 살고 난 뒤에 그 얘기를 하면 믿어주겠다”고 너스레를 떨던 당신. 1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당신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깊어짐을 확인합니다.

당신을 만나 점차 위축됐던 마음이 많이 풀어지고 여유로워져갔지만, 제 마음속에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항상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흔들림 없는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후회로부터 자유롭고 싶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항상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현재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철학, 종교 책을 읽고, 템플스테이, 피정 등에도 참여해 봤지만 항상 그때뿐이었지요. 그러다 마음수련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주 수련원에서 3일을 수련하며, 아,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논산에 있다는 마음수련 본원에 가서 마음수련의 모든 과정을 밟아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내가 진정으로 찾던 것을 찾았다”고 했을 때 당신은 진심으로 기뻐해주었지요. 하지만 한국에 가서 몇 개월을 수련하고 오고 싶다는 나의 부탁은 정말이지 당신으로서도 들어주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이 네 명이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제 손에 한국행 비행기 표를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장장 8개월을 저는 한국의 마음수련원에서 지냈습니다. 제가 직감했던 대로 마음수련은 제 안에 맺혀 있던 모든 의문을, 모든 한을 풀어주었습니다. 간혹 통화하며 가족을 걱정하면, 당신은 “수련에만 집중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주위에서 어떻게 아내를 그리 오래 내보낼 수 있냐고 하자 “나비는 날게 해야 다시 돌아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했지요. 당신의 희생과 사랑 덕분에 마음수련의 과정을 마쳤을 때, 저는 알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후회로부터,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어떤 상황이 나에게 온다 해도 이 마음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제가 없는 동안, 직장에 다니며 초등학생 세 명의 보호자로 도시락을 싸고, 과제물을 챙겨주고, 집안일까지 두루 챙겼을 당신. 그동안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만을 바랐던 나를 많이 참회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있는 그대로에 감사합니다. 나의 남편이어서가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나에게는 가장 행운입니다. The luckiest thing in my life.

 

김인옥 작 <기다림> 순지에 채색. 110×55cm. 2003.

 

참을 인(忍)과 어질 인(仁)이 가져다준 행운

문관배 77세. 전북 군산시 경장동

나는 1934년 일제 강점기 때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아마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다. 워낙 먹을 게 없어서 논에 가면 벼와 비슷하게 생긴 피를 뽑아, 씨앗을 훑어 먹고, 소나무 속 속피를 뜯어 먹었다. 그러다 일본 사람들의 압박 속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진 부모님은 내가 6살 때 만주로 향하셨다.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떠난 빈집에서 다시 시작했다. 나는 군산 비행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녔는데, 항상 배가 고팠다. 주위에 옷도 잘 입고, 다방에서 고상하게 차도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에게도 저런 행운이 왔으면 좋겠다 해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너무 먼 꿈일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훌륭한 학자가 돼서 많은 후진들을 키워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놔도 상위급에 오를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거였다. 하지만 더 배울 형편이 되지 않았고, 어떻게 갖게 된 직업이 소방관이었다. 옛날에는 공직 사회도 백그라운드가 좋거나 지역이 같거나, 무엇이 있어야 승진이 잘되고 보직도 잘 받았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던 나는 내 스스로 해야지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열심히 내 자신의 독학으로 실력을 넓혀갔다. 영어, 일본어 등의 외국어 공부도 하고 시간 나는 대로 책을 보고 성공한 사람들의 기록 같은 것을 탐독했다. 그 사람들의 길을 똑같이 밟을 수는 없었지만 내가 가는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응용을 해봤다. 소방관을 하며 위험한 일일수록 내가 먼저 앞장을 섰다. 남들이 싫어하는 보직을 맡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런 모습을 상사들이 좋게 봐주어서인지, 승진 운도 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련도 많았다. 묵묵히 내 일만 한다고 하는데도 나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를 헐뜯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항상 내 앞에 참을 인(忍)과 어질 인(仁) 자를 붙여놓았다.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작용들이 험악하게 달려든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질게 받아들이고,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통을 참아가면서 그냥 내 할 일을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 자신에 충실한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누가 뭐라 하든 꿋꿋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더니, 결국 나를 헐뜯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진실이 드러나고는 했다.

54세 때 소방서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는 참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 자리 하나에 20명 정도의 경쟁자가 있었기에 나는 꿈도 안 꿨는데, 당시 내무부 소방국장이 공정한 인사를 해야겠다며, 대상자들의 인사 기록 카드를 꼼꼼히 검토한 후 내가 된 것이다. 그동안의 노력이 그 운을 만들어준 거였다.

지금은 퇴직해 안사람과 노년을 보내고 있다. 2남 2녀 모두 다 잘 자라, 손자들도 8명이나 있으니 이 정도면 행복한 노년이라 생각한다.

주위에 보면 자기는 진짜 운이 안 풀린다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내가 충성을 다하고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는데 윗분들이나 주변에서 제대로 봐주지 않는 것인지. 내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에 재밌는 것만 하면서, 좋은 일이 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이 살다 보면 온갖 것이 다 보인다. 남들이 어떤 것을 이뤘으면 그것도 이루고 싶고 음식을 먹으면 그것도 먹고 싶고, 하지만 다 가질 수는 없다. 안 되는 걸 굳이 탓하지 말고, 내 운은 내가 만들어간다 생각하며 살면 그리 어려운 인생은 아닐 것이다.

 

김인옥 작 <기다림> 순지에 채색. 53×45.5cm. 2007.

‘7’이라 쓰고 행운이라 부른다 하는 럭키lucky7! 이달엔 행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엄마, 아파도 괜찮아, 엄마에겐 착한 딸이 있잖아

황의선 34세. 직장인.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엄마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다. 간경화, 류머티즘, 재생불능성빈혈, 갑상선에 비장비대…. 내가 핏덩어리였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엄마는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셨단다. 젊은 엄마는 자식 셋을 홀로 키우기 위해 당신의 체력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진하셨을 것이다. 덕분에 먹고살 걱정 없이 살게는 되었지만, 엄마는 건강을 잃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때는 내내 누워계셔야 했던 엄마. 아침이면 엄마 옆에 전화기와 물 등을 놓아드리고, 저녁에는 오빠들과 번갈아 엄마를 주물러 드렸다. 엄마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였는데, 깜빡 약 기운에 잠이라도 드시면, 큰오빠는 새벽까지 주물러드리곤 했다.

엄마는 약 기운으로 버티며 조금씩 생활을 하셨다. 운동회라든지, 방학을 맞아 우리들 코에 바람이라도 쐐주겠다고 집을 나설 때면, 그 전날 집에서 링거액을 맞으셔야 했다. 정신력이 강하시고 여장군 같았던 엄마는 가장의 짐 때문에 늘 묵직한 얼굴이셨는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런 엄마와 나는 조금은 먼 사이가 되었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왜 살고 어디로 가는지와 같은 의문이 엄마에게는 쓸데없는 생각이었고, 사춘기 딸의 핑크색과 초록색 옷 사이에서의 고민도 엄마를 힘들게 할 뿐이었다.

한껏 멋을 부린 엄마와 딸이 친구처럼 다니는 것을 보면 부러웠다. 무엇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다느니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너희는 그러고 사는구나’ 싶었다. 내 의견을 주장하기엔 ‘편찮으신 가여운’ 엄마였기 때문에.

30여 년 내내 엄마는 편찮으신 모습이다. 종일 누워계셔서 헝클어진 머리, 속옷 차림, 개수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 어쩌다 시간이 나는 휴일에도 집안 청소에 빨래로 내 시간은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예쁘게 홈패션을 차려입고 가꿔져 있는 엄마를 보고 싶다고, 퇴근 후에는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데이트도 하고 싶다고. 휴일에는 엄마랑 산에도 가고 여행도 가고 싶다고. 이 모든 걸 하지 못한다 해서 누구를 마음 놓고 원망할 수 있느냐 말이다.

한 달 전 엄마가 갑상선 수술을 받은 후부터 이삼일 간격으로 30분간 떠오던 쑥뜸을 매일 떠드리고 있다. 다행히 쑥뜸 치료가 잘 맞아서 꼼짝없이 한 자세로 누워 있어야 하는 불편함에도 엄마는 잘 참으신다. 그런 모습을 보니 어쩌다 늦게 퇴근하거나, 녹초가 되어 피곤할 때도 쑥뜸 뜨는 일을 건너뛸 수가 없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건너뛰자’ 하시면 내심 좋으면서도 착한 딸은 아무 말 없이 쑥뜸기를 엄마 배에 올려놓고 1시간이 넘도록 펌프질을 한다.

“엄마는 의선이한테 제일 미안해. 엄마가 건강하지 못해서 여행도 한번 제대로 못 가고, 친구처럼 지내주지 못해서. 어쩌다 일찍 집에 와도 엄마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너도 이런 엄마가 귀찮고 싫지.”

가끔 촉촉해진 목소리로 하시는 엄마의 말씀이, 습도가 가신 청량한 날씨 때문일까, 내 마음을 정확히 비추는 맑은 거울 같다.

‘엄마 덕분에 이만치 착하다는 소리 듣고 살았잖아. 한 사람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았잖아. 이보다 더 인생 공부 잘 시킬 수 있는 엄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엄마는 내 인생의 행운이야. 엄마 사랑해~^^’

 

김인옥 작 <기다림> 순지에 채색. 33.4×45.5cm. 1996.

 

행운이 찾아오게 하는 비결, 알려드리지요

김영삼 41세. 농업인. 전북 진안군 부귀면

25살 젊은 나이에 선택한 직업이 표고버섯을 생산하는 농업인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17년 차 농부의 길을 걷고 있다. 다들 힘들다고 떠나는 농촌으로 다시 돌아온 건 분명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 마음속에, 몸속에는 어린 시절 산촌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서 각인된 자연인의 기질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원래 전공을 살려 컴퓨터 관련 일을 하다 23살에 군 입대를 했다. 군 생활을 하며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심각히 했다. 특히 내 머리에 떠나지 않던 대사가 있었는데, 오래전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에서 만물 수리점을 하던 순돌이 아빠가 습관처럼 하는 이야기였다.

“요즘 전자제품은 어려워서 못 고치겠다.”

그게 미래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내가 평생 행복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고민하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운명처럼 보게 된 방송이 KBS스페셜 ‘미래의 식량 버섯’ 4부작이었다. 버섯!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들께서 부업으로 짓던 표고버섯 농사, 이거야말로 내가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 중에 으뜸인 참나무! 그 참나무를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과 바람으로 썩혀, 그 양분으로 표고버섯은 자란다. 처음엔 젊은 혈기에 자연을 위반하는 행위들을 많이 했다. 표고버섯은 주로 봄과 가을철에 나는데, 그 철이 아닐 때 나오는 것이 아무래도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 제철이 아닐 때도 재배 하우스 안에서, 바람과 햇빛과 비를 막아, 습도와 온도를 조정해 버섯을 나오게 했다. 내 계획하에 버섯은 자라는 거라고 생각했고, 인위적인 힘으로 자연을 다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욕심으로는 안 되는구나를 느껴갔다. 버섯들은 미세한 곰팡이 균으로 키우는 생명이다 보니까 나오고 싶을 때 나오는 버섯이 통통하고 예쁘고, 영양가도 풍부했다. 그런데 억지로 나게 한 버섯은 버섯 자체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모양도 작고, 기형 버섯이 많이 발생했다. 원래의 향이나 영양도 떨어졌고, 참나무 평균 수확 기간이 3~4년인데 2년 만에 폐목을 시킬 정도로 빨리 상해 버렸다.

그즈음 나는 결혼하고 5년이 흘렀는데도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에 대한 소망이 너무 커서,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보고 인공수정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이 우리에게는 안 통했다. 우리 부부는 아기가 없는 운명인가 보다 받아들인 후 여행을 갔는데, 여행지에서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겼다. 그때 내 마음에 들려온 소리는, “가장 자연스러운 게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구나, 자연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였다.

이제 아이들을 키우면서, 버섯을 키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만 하고 나머지는 자연에 맡긴다. 가을을 기다리고, 봄을 기다리고…. 세월을 벗 삼아 유유자적할 줄 알아야 스스로 지치지 않고 오래 달려갈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화학적인 요인들로 망가졌던 농장에는 어느새 장수풍뎅이가 돌아오는 등 자연 생태계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주변 환경을 혹사시켰다면 30~40년 후쯤 이 농장에서 생명체가 살아가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농장 안에 있는 그 어떤 생명들도 불필요한 것들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다들 자기의 역할이 있고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활동해 줄 때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금이라도 자연에 맞서 이기려 했던 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를 깨달았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스스로 선택한 일 속에서 삶의 가치를 알게 되고, 자연의 위대함을 배웠다.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자연에 거스르지 말고 순리대로 사는 것, 그것이 행운을 찾아오게 하는 가장 큰 비결이라는 걸.

 

김인옥 작 <기다림> 순지에 채색. 30×30cm. 2010.

 

지지리도 운 없던 나, 대박 행운을 만나다!

최진희 39세. 간호사.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나는 단 한 번도 행운권 따위에 당첨된 적이 없다. 기필코 내가 가지고 있는 번호의 다음 번호가 불릴 때의 아쉬움은 너무도 많이 반복되어 언젠가부턴 아쉽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때 성적은 늘 0.1~0.2점 차이로 과목 등급이 떨어졌고, 공부를 열심히 해도 과외하는 애들을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말을 잘 듣는다 해도 선생님의 관심은 늘 내 옆의 친구에게로 향했고, 부모님의 관심 또한 늘 어린 동생들에게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난 운이 지지리도 없는 애’ ‘난 어떻게 해도 안 돼!!’라는 마음이 지배적이 되어 버렸다.

그런 마음은 직장 생활에서도 계속되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일에 집중도 잘 안 되고, 늘 사고를 치어 상사에게 지적을 들었다. 내가 직장 상사에게 관심을 받거나, 잘한다는 칭찬을 듣는 것은 그동안의 나의 ‘운 없는’ 삶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는 스트레스는, 동료들과 함께 직장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것으로 해소했다.

주변에는 나와 똑같은 불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는 그들을 진정한 나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마음수련원이라고 내 맘에 들 리가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도 걸핏하면 불평불만을 얘기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저 사람들, 저 여유, 저 편안함은 뭐지?’

그들은 어떤 말도 귀 기울여 들어주되, 먼저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도록 안내도 해주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한번 시키는 대로 해보자,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흉내라도 내보자 생각했다. 그러면서 투덜거리기보다는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짚어보고, 불평하기보다 그 일을 잘하려면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하고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나는 변해갔나 보다. 어느 날이었다.

밑의 직원이 힘들다고 하자, 내가 맞장구치기보다 한번 힘내서 잘해보자고 격려의 말을 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어느 사이엔가 불평불만으로 내 시간을 채워주었던 사람들보다, 잘해보자며 힘을 보태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겨났다.

내 안에서 나의 일을 조금 더 열심히, 그리고 조금 더 사명감을 가지고 해보자는 마음도 들었다. 마흔이 가까워진 나이에 대학원도 들어갔다. 알게 모르게 바뀐 나는 공부도 재미있어 했고, 재미가 있으니 더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도 해주게 되었다.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선생님은 이 일에 딱 맞아요.”

항상 지적을 받던 나로서는 생소한 칭찬들이 쏟아졌다. 그 후 난생처음 장학금도 받고, 과 대표가 되고, 교수님과 함께 연구 사업도 하게 되었다. 이제 교수님의 권유로 박사 학위를 생각하고 있다. 교수님 추천으로 정말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분야로 직장도 옮길 예정이다.

오 마이 갓! 그렇게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던 나에게 연속으로 행운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요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느끼는 중이다.

‘어떻게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뀌었지?’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서였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건 내 마음세계가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아, 내 인생의 가장 대박 행운은 바로 마음수련을 만난 거였다.

 

김인옥 작 <기다림> 순지에 채색. 60×72cm. 2009.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3)

지네 한 마리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여우가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그 많은 발들을 조절하니? 백 개의 발을 가지고도 아주 잘 걷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느 발을 먼저 내딛는 거니?”

“나는 그냥 이렇게 걸어 다닐 뿐이야. 한 번도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어. 내게 시간을 줘. 차분히 생각해볼게.”

 

지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지금까지 지네는 자신이 지닌 능력에 따라 살았고, 다리를 움직이는 자신과 다리가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전체가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여우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면서 자신과 걸음을 분리하고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지네는 다시는 자연스럽게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우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네가 걷는 건 무척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어.”

 

지네는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습니다.

 

“전에는 결코 어렵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 나는 다시 그전처럼 걸을 수가 없게 되었어.”

 

우화 속에 등장하는 여우는 분석과 논리와 의심의 상징입니다.

이 우화는 여우처럼 분별하고 따지는 것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지네의 백 개의 발만큼이나 온갖 어려운 짐을 질지언정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한결같이 묵묵히 살아간다면 우리 인생도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분석하고 따지고 비교하는 순간, 자연스러움은 멀어지고 남을 의식하며 살게 될 뿐입니다.

그것은 참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마음 없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이 말들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빼기의 건강법

소심한 낙오자 능력자 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책가방이 고장 나 급히 어머니가 주신 등산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조용한 수업 시간,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내 가방을 번쩍 드셨다.

“이게 학생이 들고 다니는 가방 꼬라지야? 이런 놈이 무슨 공부를 하나!”

나는 반 전체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친구와 못하는 나를 교무실에 불러다 놓으시곤 ‘너희 둘이 지금은 친구지만 커서도 친구가 될 수 있겠느냐’고 하시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수업이 재미가 없고 딴생각만 났다. 나는 그냥 ‘공부 못하는 애’일 뿐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성적은 더 떨어져 고등학교도 갈 곳이 없을 정도였다. 운 좋게도 정원이 미달된 기술 고등학교에 들어가 전문대학 전자과로 진학했지만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대학을 휴학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고민 끝에 비교적 학비가 싼 싱가포르에서 비즈니스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유학을 떠났다.

친구들보다 한두 시간씩 잠을 줄여가며 책을 보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공부를 등한시했던 터라 열정만으로는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특히 싱가포르의 대학교는 한 과목 시험에서 두 번 이상 떨어지면 추방을 당하는데 한 번만 더 떨어지면 유급당할 위기였다. ‘나이 먹고 비싼 돈 들여 공부하는데 또 떨어지면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보나…’ 압박감이 밀려왔다.

그러던 유학 생활 2년째, 아는 동생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들의 무관심으로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이 그대로 떠올랐다. 나는 공부도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 나를 무시했던 선생님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 공부를 방해하는 모든 망상과 잡념을 열심히 버렸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라온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임도 알게 되었다. 다 버리고 나니 본래의 나는 거리낄 게 없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주 자체였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돈이 많든 적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냥 하나의 존재였고 그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공부를 도와주신 부모님과 선생님들, 좋은 교육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감사했다.

그 후 나의 학교생활은 달라졌다. ‘무엇이든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열고 수업에 임했다. 교수님의 이야기에 집중이 되면서 공부에 재미도 붙었다. 얼마 후 시험이 다가왔다. 예전 같으면 뭘 할지 몰라 패닉 상태였을 텐데 긴장이 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에게 조언도 구하고 모르는 것은 적극적으로 질문했다. 시험 당일에도 꼭 붙어야 된다는 생각보다 수업 내용을 차분히 떠올려 아는 것의 최대치를 쏟았다. 그 이후에는 시험에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무난히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하던 2009년은 미국의 금융 위기로 세계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걱정보다는 자신감 있는 태도로 인터뷰에 임했고 곧 채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받아쓰기에서 빵점만 받던 ‘소심한 낙오자’가 글로벌 기업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지금도 생각하면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다. 나에게 무한한 능력을 열어준 마음 버리기 방법은, 누구라도 자신이 바라는 삶으로 이끌어주는 우리들의 희망이다.

이동형 32세. 와일리 출판사(WILEY Publisher) 근무. 싱가포르 거주

빼기의 건강법

저혈압을 물리치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말썽 한번 안 피우는 착한 아이였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편찮으셨고, 아버지는 가정에 무관심하셨다. 장남인 나는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다. 엄마가 더 아플까 봐 나를 떠날까 봐 엄마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한 첫 직장은 외삼촌 공장이었다. 외삼촌은 나와 정반대의 다혈질인 성격이었다. 혼도 많이 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가족이니까 어른이니까 꾹꾹 참았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자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머리가 몽롱했다. 병원에 갔더니 저혈압이니 큰 병원에 가라고 했지만 가기가 두려웠다. 어머니의 수술과 오랜 병치레를 지켜봐왔기 때문이었다.

몇 개월 후 공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의 영업직으로 취직을 했다. 앞서 실패한 직장 생활을 만회하고 싶어서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일이 점점 잘 풀려 승진도 했고 돈도 꽤 벌었다. 그러다 보니 쉬는 날도 고객의 불만 사항을 처리하느라 바빴고 몸은 점점 지쳤다.

고객을 만나 영업하는 일은 참고 또 참아야 하는 과정이었다. 모든 일은 고객 중심이었고 말도 행동도 하나하나 눈치를 보게 되고 상대에게 맞춰야 된다는 강박증이 생길 정도였다.

뒷골이 당기면서 저혈압 증세가 더 심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운이 없고 머리가 핑 돌아서 이틀 일을 하면 하루는 누워 있어야 할 정도였다. 혈압 약을 먹어야 한다, 뇌졸중 가능성이 있으니 병원에 가보라는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지만 한쪽 귀로 흘렸다. 성공해서 장남으로서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 참을 인 자를 써 붙여놓고 꾹꾹 참았다. 힘들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 노래방에서 나의 십팔번인 ‘오늘도 참는다’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참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다.

어느덧 삼십 대가 되니 몸은 상하고 이십 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마음을 비워서 다른 삶을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수련을 하며 눌러 담고 살았던 감정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가정환경을 감추고 고객 앞에서는 언제나 밝게 웃는 모습으로 살았으니 마음은 뒤죽박죽, 당연히 혈액순환도 안 되고 기혈이 막혀 있었다. 음식을 먹고 하루만 배출을 안 해도 힘이 드는 것처럼 마음 또한 꾹꾹 담아만 두고 한 번도 배출을 못 했으니…. 머지않아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겠구나,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2~3주가 지나자 가슴이 뻥 뚫리고 목구멍이 시원해지면서 신선한 공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날 때면 어깨가 뻐근하고 뒷목이 당기는 증상이 싹 사라졌다. 그 후 몇 번 더 몸 상태가 엎치락뒤치락 하더니 최근에는 일주일 내내 몸을 움직여도 몸이 가볍고 기초 체력이 월등히 좋아진 느낌이다.

내 틀과 관념과 내 마음이 있는 한, 참는다는 것은 한계가 있고 곧 스트레스로 쌓이게 된다. 미리미리 마음을 비워 모두 다 건강한 인생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김경도 34세. 직장인.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화사한 봄날이면 아지랑이가 아롱다롱

지게 진 사람은 진달래꽃을 꺾어 지고 오고 있고

나물 캐러 간 처녀들은 건넛마을 밭에서

달래랑 쑥이랑을 캐고

또 산나물을 한 보따리를 이고 오는구나

동리에 있는 바위샘에서는

동리 아줌마들이 빨래를 하고 있고

냇가에는 봄기운에 만상이 움트고 있구나

따스한 봄날이면 보리골을 타는데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울고

보리밭 사이에 집을 지어놓은 종다리는

못내 자기 집을 다칠까 봐 걱정을 하고 있구나

비포장된 신작로에는 뿌연 먼지를 내며

이따금씩 자동차가 지나가고

강가에는 조개를 잡는 이도 있구나

화전놀이에 처녀 총각이 닭을 잡아 국을 끓이고

나무에는 그넷줄에 처녀들이

그네를 화사한 한복 차림에 타고 있구나

살기 좋은 봄의 시절은 보릿고개라 하여

식량이 모자라서 끼니를 못 먹는 사람들도 있어서라

빼깃잎과 물금을 담그고

나물로 배를 채우는 일도 많아서라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면 산천에 나무는 푸르르고

소 먹이는 아이들은 소를 산천에 던져놓고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하구나

손발이 불어서 부었구나

객지 간 형제들이 이따금씩 고향을 찾으면

모두 다가 어느 집에 누구라는 것을 알구나

소를 먹이고 또 소풀을 하여 집에 돌아오면

저녁은 호박범벅과 국수로

허기진 배를 정신없이 퍼먹어 채우구나

들에는 모를 심은 나락이 자라고 있고

밭에는 콩이랑 목화가 자라고 있고

산천에는 이런저런 묘가 있고

어느 가문에 누구 묘라는 것까지 알 수가 있고

장터는 십여 리가 되고

그 장터에 필요한 것을 사러 나가서 돌아올 때는

술이 만탕이 되어 장 보아 올 곡식을 판 돈으로

볼일을 못 보고 돌아온 남정네에게

이웃집 아줌마는 소리 높여 야단이구나

모깃불에 잠시나마 모기를 피할 수가 있으나

모깃불이 없으면 모기가 극성이구나

늙고 젊고 간에 밤에는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나이 또래의 처녀 총각이 모여서 놀고 있구나

가을이면 운동회가 있고 추석이 있고

봄여름 가꾼 나락 농사를

포기 포기마다 낫으로 베어 논에 깔아놓고 있구나

여름에 푸르던 나무들도 단풍이 지기 시작하고

풀들도 누른 색깔로 변하여 가고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할 때 겨울이 시작이 되는구나

겨울에는 나무를 하러 가고

밤에는 김치를 훔쳐 먹고 또 닭도 훔쳐 먹고

화투 놀이를 호롱불 밑에서 하고 있구나

밤늦게 사람들이 갈 즈음에는 방이 다 식어 싸늘하구나

머나먼 이국땅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곳도 있고

여름만 있는 곳도 있고

봄 가을이 없고 겨울과 여름만 있는 곳도 있고

세상에는 이런저런 곳이 많기도 하구나

젊어서 등산을 많이 하고

나대로 인간무상에 관하여 생각도 많이 했어라

봄의 산천과 여름의 산천 가을 겨울이

마냥 다녀도 그 산은 달랐어라

이름 있는 명산은 그 절경들이 신선이 놀던 곳과 같아서라

이곳 미국은 넓기도 하고

이곳 미국은 좁은 나라 살다 와 보니 크고 넓어서라

이곳에 나의 뜻인 인류가 하나가 되고

너의 나라 나의 나라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구나

글, 그림 우명

우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에 영역판 <World Beyond World>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 등 다수가 있습니다.

Baek Chung-kang, The winner of MBC audition program MBC ‘\'Birth of Great Star’

On last November, there was an audition TV program named MBC ‘Birth of Great Star.’

Many competitors from all around the world came together to compete in singing.

Baek Chung-kang(23) dreamed to become a singer from since he was a young boy. He didn’t receive much attention in the beginning;

however he has a special singing ability. Ordinary appearance, covering eyes with his hair and looking shy…,

But Baek Chung-kang tried to mend all his weak points. He became the final winner after 7 month. Nobody expected his reversal,

but his win also could be the hope for the people who are trying their best to reach their dream.

We met Baek Chung-kang who has his new start as a singer.    Article by Choi Chang-won, Photo by Hong Sung-hoon

I guess you had many happy feelings but were also afraid when you won.

First of all, I was happy because I can now do the things I want. Some people worried about me that I might be such a peacock, but I think just now this is the time to start. I’m just a new singer however I won the audition. Being a singer or not, it depends on me how to do from now. If one day I can be a really great star, I will think that moment is also the time to start again. Just doing my best is the best thing I can do.

As I know, many music companies contacted you.

But you chose the ‘Boohwal Entertainment’.

It’s hard to speak the names who contacted me but all of the big music companies contacted me. Honestly I concerned those companies at first. You know, I like dancing. I worried such as "Boohwal Entertainment has no relation with dance, what can I do?" But I concerned humanity more than singing. Whatever you become, the most important is being a good person. Finally I decided ‘Boohwal Entertainment’ because I can learn humanity from Kim Tae-won (Baek Chung-kang’s mentor at the audition program) and he is a good man to lead me so far. (Laugh)

You donated a big amount of your prize money.

I hope people think it’s not very big thing. I think it’s a matter of course. I thought I got many loves from Koreans, so I would like to help the poor children in Korea."

Baek Chung-kang was a boy who liked to sing and dance in front of others when he was a young boy.

He was alone since his parents went to Korea for making money when he was 9 years old.

He said, he cried when he felt lonely but he was happy when he sang songs.

Many with these times made him sing with all of his heart and get consideration for others.

Baek Chung-kang who dreamed to become a singer began to learn music in earnest when he entered the music institute after he graduated his elementary school. He liked Rock star ‘Kim Kyung-ho’ and wanted to be a rocker. But one day he had another shock after knowing dance group named ‘HOT’. "How can they sing with those dances?" He practiced dancing and singing over 10 hours a day. He made money at clubs as a singer and attended many auditions. He won many award: Yanji music contest, Yanji Teenager audition… At all the auditions where he attended, he won. But the reality of being singer told a different story. China is too big to promote himself just as a winner of the local contests, especially as a minority race in China. When he was starting to lose his confidence, he knew about MBC ‘Birth of Great Star’ in China. It was only one hope for the guy who couldn’t find the right way becoming a star.

It took almost 1 and half day to Qingdao where the audition was held by train. His mother said "How can you go to Korea? There are so many people who have good singing abilities." Then she tried to stop attending the audition. But finally he persuaded his mother and he staked his all on the audition, thinking this was his last chance.

At the audition day, he was valued highly as a singer with comments such as "We met one of the people who can sing very easily." But unclear pronunciation because of nasal sound, and imitating other singers were a big problem for him. In the end, the result of his first audition in …China… was passing.

"I’m happy. I feel so great. Mother and father, I will do my best and become a good singer. I love you."

Just only one thing he could do at his first step to his dream, he cried. Then he came to …Korea… He competed with 100 people who passed the first audition. Finally he was chosen as a mentee of Kim Tae-won. Finally, there was no mentor who wanted Baek Chung-kang as their mentee. At that time, Kim Tae-won raised his hand and said "I will choose him." He realized Baek Chung-kang’s strong passion and ability for singing.

Baek Chung-kang nurtured his strengths after being Kim Tae-won’s mentee. Every step of the competition, his nasal sound and unstable voice was his weak points, but he made efforts day and night to correct them.  

We could know how hard he was working to make his dream come true after watching his perfect performance at dancing and singing the idol’s song. His mournful voice touched people. His inner beauty came out and he got many fans.

After the broadcasting, you got more fans.

As I knew, after the first broadcasting about the audition in …China…, my fan cafe appeared on the community website named, "Daum". There was only David’s fan cafe. Honestly I envied him at that time. Then there was my fan cafe, too. At first I couldn’t believe it. And I appreciated them to like me. Well, I was so happy to have fan cafe. "My dear fans, Thank you so much for supporting me. I really appreciate you. I’ll do my best not to make you to shame on me."(Laugh)

I think it would make you nervous if people point your weak points such as nasal sound or imitation singing in front of you.

Actually, at first time I was very embarrassed and surprised. But I was begging to understand it and tried to correct it. All their advice are for me and to make me better. Especially, the advice for the nasal sound was quite hard. I have had the nasal sound since birth. It is an inherited trait. But I changed my mind and practiced a lot to change. Then it worked. Even now, I try to remember their advices on the stage. Such as mentor, Lee Eun-mi who said "The background music and his voice didn’t match. Try to make harmony with the music." And she told me the tune was not clear. I checked my performance by myself backstage. And they were right. The tune was getting lower while I was singing. So, I also practiced it. It’s getting better. And mentor Shin Seung-hoon said "Show the gesture clearly. If it’s not impossible, it’s better not to do the gesture." I will always remember it.

You remembered all words mentor told you.

Especially you and mentor Kim Tae-won have so special relationship.

To me, mentor Kim Tae-won is really my savior. He was so good to me that I can never repay the debt I owe him. Thank him so much. Especially since he often told me "Don’t forget your original intention" and "Don’t be to proud of yourself." Something like, a person who becomes more popular, it’s easy for them to lose their original intention. So I think the original intention is very important. In the beginning as singer, people think I can do everything. But after they become singers, "You’re nothing. (It means like look down on others.) That’s why I will always remember what mentor Kim Tae-won said. I will never forget my original intention.

"Baek Chung-kang and I made a promise in our mind to become a singer who can give hope and courage to people. I hope he keeps our promise." Kim Tae-won spoke after Baek Chung-kang won at the audition. Frankly speaking, the fact that the Korean-Chinese who has nothing in Korea won the audition already gave people many hope. While the audition, the people in Yanji were so excited. The young boy who has generated buzz such as ‘Angkka'(Yanji dialect) became a pride of Korean-Chinese in Yanji and a bridge between Koreans and Korean-Chinese.

As we know, you became a role model in Yanji. What do you want to say to your friends in China

and the participants who will apply for MBC ‘Birth of Great Star’ season 2?

I hope they never lose their dream even if it’s hard to do. If you do your best for your dream come true, you can reach to your dream. This is also for me. And the MBC ‘Birth of Great Star’ season 2 will start soon, I know you will be very nervous but I hope you overcome it and go step by step. Please think this is your last stage and do your best as much as you can. I also did like that.

What is music really about for you?

For me, music is a ‘WAY’. The way I choose, and the way I have to go. That is music. Also I want to cheer up people who never lose their dreams through my music.

These days, Baek Chung-kang started his life as a singer singing a main theme of MBC drama ‘Gyebaek’ O.S.T. Baek Chung-kang said he knows how precious this moment is because he has experienced frustration a lot. A young guy who just came here only with a passion for singing, he will make his own world as a singer ‘Baek Chung-kang’. And he will show how the singer who never forgets his original intention is.

We imagined his future after having interview with him. At the Top Star Baek Chung-kang’s concert, he is on the stage with his particular sweet smile, then he will ask,

"Everyone, do you know that I was the winner of MBC ‘Birth of Great Star?"

– translation : Chungkang_news

Baek Chung-kang was born in 1989 in Yanji. He dreamed to become a singer and began to learn music in earnest when he entered the music institute after he graduated his elementary school. He practiced dancing and singing over 10 hours a day. He won many award: Yanji music contest, Yanji Teenager audition… With his special singing ability, he became the final winner after 7 months of competing at MBC audition program MBC ‘Birth of Great Star’.

-The Complete Land -Falseness and Truth

The Complete Land

There is nothing; nothing. There is absolutely nothing. But amidst the nothingness, there is consciousness: The origin of the creations of heaven and earth; The master of heaven and earth; The Creator. This existence does not exist in man’s mind, Thus, man does not know the Creator. He must be reborn from the Creator In order for the world to transform into complete Truth, And for light to come into the world. Although the absolute nothingness is the origin, All existences with form are one with it. The world is already enlightened, Because I am complete.

Since my false self has died, then died again, Only the Lord, who is Truth, remains. I am reborn with the Lord’s mind and body, And thus I am without death in the complete land. The reason man lives, Is so that he can in the complete land, Because his body which is material can exist only for a limited amount of time. The reason his material body was born, Why his form had to appear in the world Is because only then, can he live in heaven as his form. What exists exist, because existence exists. We are born in the world through our karmic ties, We live in the world through our karmic ties, And we die after living in the world through our karmic ties. For a person who has been born in the true world, His Soul and Spirit will live forever.

Falseness and Truth

People insist their own religion is right and that other religions are cults or heretical.

Falseness is always false even if it appears similar to Truth and it is false even if it speaks of Truth. Truth must be Truth for it to be true.

While travelling around the world, I have seen a lot of in-fighting in each religion. It seems that they do not have any wisdom. Then, what exactly is Truth? If you have not become Truth, that is real and true, then are you not false? Have you become complete, and if you have not, then, again, are you not false?

The way for falseness to become Truth is to discard all of one’s body and mind that is false.

Only a person who eliminates all of his self, just as Christ did by being crucified, can become Truth.

Buddhism speaks of a “big” death, mahanirvana, a death without remains, paranirvana, and a perfect death, nistha nirvana.

If one dies in such a “big” way and eliminates all of one’s false self without anything remaining,

he will be resurrected because his sin and karma no longer exist.

Salvation is falseness becoming Truth. The way to become Truth is to discard one’s false self; then only Truth will remain and he can be reborn as Truth.

Places that are unable to teach you how to become Truth now, or places which until now have not helped you to become Truth, are all false. Even if a place speaks of Truth and is similar to Truth, if one cannot become Truth there, it is false.

If you are not complete, then are you not false? It is a question that should be considered seriously.

Even if one memorizes the Buddhist scriptures, the Bible, the Koran, the Vedas or all the other scriptures in the world, there is no Truth in what one has memorized. Only when one repents all of his sins does Truth emerge, and only then can he truly know the principles of Truth.

Drawings and writings of Woo Myung

Woo Myung founded Maum Meditation. For his outstanding dedication to the service of humanity, he was awarded the Mahatma Gandhi Peace Award by the United Nations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Educators for World Peace (IAEWP) in 2002. He is the author of numerous books on discovering Truth including ‘Wisdom for Life’ (1996), ‘The Natural Flow of the Universe’ (1998), ‘True Mind’ (1998),’The Enlightened World’ (1998), ‘World Beyond World’ (2003), ‘Forever Living World’ (2004), ‘The Formula from Heaven that will Save the World'(2005), ‘The Way to Become a Person in Heaven While Living'(2006), ‘The Place where One Becomes Real is the Real Place(2008) and ‘Stop Living on this Land. Go to the Everlasting World of Happiness. Live There Forever(2011).

-完全なる? -?物と本物


?

ない。ない 何もない ない中に精神だけがある 天地万物万象の根源であり 天地の主だ 創造主だ 人の心にこの存在がないから 人は創造主が分からない 創造主から再び生まれ出てこそ この世は完全なる?理となり この世は明るくなるだろう 一切がない所が根源だが 形象を持つすべてのものもまた一つである この世自身が完全だから この世のすべては悟っている ?物の自分が死にきれば ?理なる主だけが?る その主の心と?に生まれ?われば 完全なる?に死はないのだ 物質としてのこの?は有限だが 人が生きるのは 完全なる?に生きるためなのだ 物質として生まれた理由は その姿でこの世に現れてこそ その姿で天の?に生きられることだろう 存在するものがあるから存在できる この世に生まれたのも因?であり この世に生きるのも因?であり この世で一生を送ることも因?である 本?の?に生まれた者はその?魂が永遠に生きることだろう

?物と本物

人?が信仰する宗?では、互いが「自分たちこそ正統で、他はみな異端であり?物である」と主張している。 ?物は、本物に似ていたとしても?物であり、本物を語っていても?物である。 本物は、本物になっていてこそ本物なのだ。

世界各地を旅してみると、同一の宗?同士の?いがあまりに多い。それぞれの宗?人たちには智慧がないようだ。一?何が本物なのか。自らが、本物である本?の?理になっていないのなら、みな?物ではないか。自らは完成しているのか。完成していないのなら?物ではないか。

?物が本物になろうとするのなら、?物である自分の心と?をすべて捨てることだ。それが本物になる方法だ。 イエスのように、十字架にかけられ自らのすべてを無くした者だけが本物になれることだろう。??でいう大般涅槃?無余涅槃?究竟涅槃に至れば、すなわち、?である自分自身の一切を余すことなく捨て去れば、罪と業がすべて無くなり復活できる。 救?とは、?物が本物になることだ。

いま本物になれず、また今日に至るまで本物になっていない所はみな?物ではないのか。

本物になる方法とは、?物である自分を捨てて本物だけとなり、本物に生まれ?わることである。 本物を語り、本物のように振る舞っていても、本物自?になっていないのならみな?物であろう。 いま自分が完成していないのなら?物ではないか。 性根を据えて直視するべき問題だ。 人が、聖書、?典、コ?ラン、ヴェ?ダ等、この世にある?典をすべて?えたとしても、その?えたものの中には?理がない。しかし、ただ自らの罪業を滅ぼせば、?理が現れ、本?の理を悟ることが出?るだろう。

文と? ウ?ミョン

ウミョン(禹明) 韓?にて生まれる。長年にわたって生と死、人生について深い考察を重ね、1996年、?理に?して心の目を開く。同年、「マウンスリョン」を創始。現在はアメリカを中心に世界各?でセミナ?、講演等を精力的に行なっている。著書に「この世界に生きずに、永遠なる幸福の?へ行って生きよう」「本物になれる所が本物だ」「生きて天の人になる方法」他多?。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 자원봉사 성우 이진화씨

취재, 사진 김혜진

“시각장애인의 눈이 되어드려요. 시각장애인은 TV 소리를 들을 뿐, 어디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잖아요. 저 사람들이 공원을 거닐고 있구나, 알 수 있도록 설명해 드려요.”

이진화씨는 일주일에 3~4번 서울 노원구에 있는 시각장애인복지관으로 출근한다. 화면 해설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서다.

녹음 스튜디오에 영화 <전우치>의 장면들이 펼쳐지자, 등장인물이 어디로 걸어가는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장면 장면마다 성우 이진화씨의 내레이션도 곁들여진다.

1977년 TBC 성우 공채 9기로 입사한 이진화(54)씨는 특이한 음색을 잘 살린 폭넓은 목소리 연기로 <개구쟁이 스머프>의 허영이, 욕심이 역을 비롯해 <토이 스토리>의 포테이토 부인 역, <MBC 주말의 명화> <동물의 왕국> 등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아왔다.

그녀가 봉사를 결심하게 된 건 2년 전. 우연히 휴먼 다큐를 보게 되면서였다.

“휴먼 다큐를 보면 우리가 보살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나누며 살잖아요. 특히 제 맘에 불을 지핀 건 호주의 닉 부이치치에 관한 다큐를 보면서였어요. 머리와 몸통만 있는 장애인이지만 너무나 사랑스런 표정을 짓고 열심히 사는 걸 보면서 나는 그 사람보다 건강한 육체를 갖고 있는데 왜 가만히 있지,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그 첫 시작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소리샘 방송이었다. 집에서 전화 사서함으로 전화를 걸어 책을 읽고 녹음 저장 버튼을 누르면 되는 것으로, 한 달에 2번 좋아하는 소설을 골라서 낭독했다. 그러다가 방송국 PD의 소개로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미디어접근센터와도 인연이 닿았다. 미디어접근센터는 2000년부터 국내에서 유일하게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 방송을 만들어 온 기관으로 <전원일기>를 비롯해 현재까지 1만여 편의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가족들하고 같이 TV를 봐도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는데 화면 해설이 있어서 좋았다. 더 확대됐으면 좋겠다”는 한 시각장애인의 소감처럼, 그동안 TV를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시각장애인들에게 화면 해설 방송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였다.

이진화씨는 현재 KBS 드라마 <우리 집 여자들>, KBS <현장르포_동행>, EBS <한국영화시리즈> 등의 해설을 맡고 있다. “녹음하기 전에 눈을 감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힘드실까….” 때문에 미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 느낌을 어떻게 전달할지, 어떻게 해야 듣는 분들이 편안할지를 늘 고민한다는 이진화씨.

근황을 묻는 후배들에게 본업보다 “시각장애인 자막 해설 방송을 하고 있다”는 말을 먼저 하게 된다는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로 상상의 세계를 펼쳐드린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 작은 나눔이 주는 행복은 내면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늘 남들과 비교하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고, 내게 주어진 조건에 대해 감사하게 된 것.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처럼 한 번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된 것도 봉사를 통해 배운 지혜였다. 그녀는 사회를 위해 미약하게나마 무언가를 한다는 기쁨을 이렇게 설명했다.

“시각장애인들이 제 목소리를 듣고 행복해하는 걸 상상만 해도 너무 좋아요. 나중엔 괜찮은 드라마를 각색해서 보이는 라디오 드라마도 해보고 싶어요. 시각장애인들과 함께하면서 예쁜 할머니로 나이 들고 싶어요.(웃음)”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내가 더 사랑하면 되고 -지금 나의 생각이 나의 미래다

임수정

45세. 헤어숍 점장.

인천시 부평구 부평동

미용을 한 지 10년째 될 무렵 점차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잘될 때도 있지만 안될 때는 불안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없었다. 과연 내가 하고 있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기도 어려웠다. 맞춘다고 했는데, 고객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뭔가 크게 잘못한 거 같아 죄스러웠다.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그 무렵 4박 5일 일정으로 일본에 간 나는 우연히 버스에서 헤어 체인점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말씀은 내게 큰 자극이 되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내가 더 사랑하면 되고, 모르면 더 공부하면 되고,

그러다 보면 줄 수 있는 게 많아지기 때문에 그만큼 남과 나누게 된다.”

그분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분이었다. “너는 지혜로우니까 공부를 해서 지식만 더 쌓으면 좋겠다”며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셨다. 뭔가 일이 잘 안될 때, 내 생각만 가지고 아무것도 안 하며 세상 탓만 하고 있다면 부정이고, 한 번 더 세상에 맞춰 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것이 긍정이었다. 왜 안 될까에 머물지 말고 그 이유를 찾아가자 비로소 길이 보였다.

나는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곱게 자랐다. 그러다가 스무 살 때 서울로 상경하면서 펼쳐진 세상은 전과 너무나도 달랐다. 한순간 어떤 것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돼버린 것이다. 오로지 사랑만 받고 자라면서 맛있는 거 있으면 먹을 줄만 알았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미용실 선배들한테 혼나도 왜 혼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키가 작아 일에서도 밀리자 마음은 위축되었고, 사람들과 부딪침은 큰 상처로 다가왔다. ‘죽고 싶다’는 생각 한편으로, 나를 힘들게 한 상대 탓만 하고 있었다.

동업자와 미용실을 운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너 때문이야” “너만 잘하면 돼” “원장님은 우리 마음을 모르잖아요” 점점 엇나가는 직원들, 멀어지는 남편과 아이들. 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나한테 왜 이럴까? 왜 이렇게 화를 낼까? 답답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 사장님과의 만남 이후 적극적으로 나를 바꾸어보고 싶었다. 미용 공부와 함께 상담 치유 공부를 병행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곱게 자라며 만들어놓은 좁은 세계 안에서만 움직이고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김새가 다르듯 표현 방식도 다른 법인데, 나는 오직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에만 모든 것을 맞추려 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세상을 향해 귀를 기울이기로 했고, 먼저 가정에서부터 실천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들이 놀고 싶어 할 때 같이 놀아주었다. 자신을 위해주는 모습에 기뻤는지, 평소 엄마 말을 잘 안 듣던 아들도 “엄마가 해주니까 나도 들어줄게” 하면서 심부름을 하는 등 내 부탁을 하나씩 들어주었다. 아이의 반응은 서로 마음으로 교류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주었다.

미용실 고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맘에 안 들어요” 할 때도 그 말에 위축되기보다, 어느 부분이 맘에 안 드는지 대화를 통해 찾아나갔다. 그 과정에서 고객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자르다 보면 잘생기고 못생기고의 문제를 떠나 어느 순간 고객의 장점이 드러나면서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 너무 예뻐 그 모습에 빠지는 걸 보게 된다.

“나도 머리를 꾸미면 예뻐질 수 있다는 희망을 줘서 고맙다”며 감동한 나머지 뽀뽀해주거나 얼굴을 비비거나, 아이들이 90도로 인사하고 갈 땐 나조차도 놀라웠다.

사람들은 대개 잘될 때만 길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많은 부딪침을 통해 깨달은 건, 왜 안 될까? 그 이유를 찾고 맞춰가다 보면 거기에 길이 있다는 것이다. 전엔 미용실 일 중에서 고객분들 머리를 감겨드리는 게 제일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근데 이젠 손님들 머리 감겨드리는 게 좋다. 손님의 모발 상태를 알 수 있고 그에 따른 스타일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대를 이해하고 교류하려고 노력하면서 점차 부딪침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내 방식대로 열심히 하는 건 아무런 뜻과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주변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한번은 어떤 고객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 왜 상사는 나를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하며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물었다. “내 방식대로 열심히 하셨나요? 아니면 상사가 원하는 대로 했나요?” 그럼 대부분 “내 방식으로 했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상사랑 부딪치는 거예요”라고.

‘나’라는 세계가 강할수록 부정적이고, 나에서 벗어날수록 긍정적이 된다. 하기 싫은 일일지라도 상대가 원하면 한번 해보는 거다. 그렇게 해나갈 때 비로소 내가 조금씩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스타일에 나를 맞춰가는 것, 그것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금 나의 생각이 나의 미래다

최상림 마음코칭센터 이사

지금 현재 내가 생각하는 것이 미래의 나를 만든다. 똑같이 시작해도 항상 “나는 못해요” 했던 사람과 “한번 해볼게요” 했던 사람은 시간이 지났을 때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많이 본다. ‘못해요’ 했던 사람은 계속 못하고 있지만, ‘해보겠다’ 했던 사람은 월등히 발전해 있다. 지금 긍정적이라면 미래의 나도 긍정적이지만, 지금 부정적이라면 미래의 나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꾸기 위해 해봐야 할 5가지.

 

자기 자신부터 긍정하라

‘내 강점을 30가지 써보라’ 하면, 대부분 5개 이상 쓰지 못한다. 내 강점이 생각나는 순간, 남들이 뭐라 생각할까, 내가 과연 이런가, 부정적인 생각부터 스친다. 하지만 잘 웃는다 등의 소소한 것들이 다 자신의 강점이다. 남의 시선을 떠나 자신부터 긍정할 수 있을 때,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상황도 긍정적으로 보는 연습을 한다

아무리 부정적인 상황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부정의 생각이 떠오를 때, 우선 긍정적인 면을 찾아보고, 그것을 말하는 습관을 들인다. 내가 무척 목이 말랐을 때 물병에 물이 조금밖에 없다 해도 ‘와, 물이 있었네’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면 그 물은 감로수가 되어 내 목을 축여준다.

감사 일기를 쓴다

매일 하나씩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감사할 거리를 찾아본다. 한번은 강의 때 세상 사람들 모두 자신에게 무관심하다며, 극도의 우울과 부정에 휩싸인 분이 있었다. 그분에게 억지로라도 감사할 거리를 찾아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도무지 없다고 하더니,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지는 않아도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안 받는 게 감사하다, 누군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조언해주는 게 감사했다… 등 하나씩 찾아갔다. 그러면서 주변에 감사를 느끼고, 우울과 부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땐 먼저 웃는다

웃는 표정만 지어도 우리의 뇌는 기분 좋다고 느끼게 되고, 긍정적 정서와 관련된 호르몬을 분비한다. 그러면서 주변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결과를 바꿈으로써 마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을 내려놓는다

사람들이 하는 걱정의 96%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걱정을 하게 되면 쉽게 짜증이 나며 화가 나는 부정적인 상태가 된다. 불필요한 생각을 내려놓음으로써 편안해지고 긍정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짧게라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명상을 하는 것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주변과 공명한다. 내 마음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커지면 긍정적인 에너지와 공명하여 건강도 좋아지고 대인 관계도 좋아져 일도 잘 풀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