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13)

지네 한 마리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여우가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그 많은 발들을 조절하니? 백 개의 발을 가지고도 아주 잘 걷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느 발을 먼저 내딛는 거니?”

“나는 그냥 이렇게 걸어 다닐 뿐이야. 한 번도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어. 내게 시간을 줘. 차분히 생각해볼게.”

 

지네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지금까지 지네는 자신이 지닌 능력에 따라 살았고, 다리를 움직이는 자신과 다리가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전체가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여우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기면서 자신과 걸음을 분리하고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지네는 다시는 자연스럽게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우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네가 걷는 건 무척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어.”

 

지네는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습니다.

 

“전에는 결코 어렵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 나는 다시 그전처럼 걸을 수가 없게 되었어.”

 

우화 속에 등장하는 여우는 분석과 논리와 의심의 상징입니다.

이 우화는 여우처럼 분별하고 따지는 것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지네의 백 개의 발만큼이나 온갖 어려운 짐을 질지언정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한결같이 묵묵히 살아간다면 우리 인생도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분석하고 따지고 비교하는 순간, 자연스러움은 멀어지고 남을 의식하며 살게 될 뿐입니다.

그것은 참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마음 없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이 말들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빼기의 건강법

소심한 낙오자 능력자 되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책가방이 고장 나 급히 어머니가 주신 등산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조용한 수업 시간,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내 가방을 번쩍 드셨다.

“이게 학생이 들고 다니는 가방 꼬라지야? 이런 놈이 무슨 공부를 하나!”

나는 반 전체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친구와 못하는 나를 교무실에 불러다 놓으시곤 ‘너희 둘이 지금은 친구지만 커서도 친구가 될 수 있겠느냐’고 하시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수업이 재미가 없고 딴생각만 났다. 나는 그냥 ‘공부 못하는 애’일 뿐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성적은 더 떨어져 고등학교도 갈 곳이 없을 정도였다. 운 좋게도 정원이 미달된 기술 고등학교에 들어가 전문대학 전자과로 진학했지만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대학을 휴학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고민 끝에 비교적 학비가 싼 싱가포르에서 비즈니스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유학을 떠났다.

친구들보다 한두 시간씩 잠을 줄여가며 책을 보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공부를 등한시했던 터라 열정만으로는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특히 싱가포르의 대학교는 한 과목 시험에서 두 번 이상 떨어지면 추방을 당하는데 한 번만 더 떨어지면 유급당할 위기였다. ‘나이 먹고 비싼 돈 들여 공부하는데 또 떨어지면 부모님 얼굴을 어떻게 보나…’ 압박감이 밀려왔다.

그러던 유학 생활 2년째, 아는 동생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들의 무관심으로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이 그대로 떠올랐다. 나는 공부도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 나를 무시했던 선생님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 공부를 방해하는 모든 망상과 잡념을 열심히 버렸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라온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임도 알게 되었다. 다 버리고 나니 본래의 나는 거리낄 게 없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우주 자체였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돈이 많든 적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냥 하나의 존재였고 그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공부를 도와주신 부모님과 선생님들, 좋은 교육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감사했다.

그 후 나의 학교생활은 달라졌다. ‘무엇이든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열고 수업에 임했다. 교수님의 이야기에 집중이 되면서 공부에 재미도 붙었다. 얼마 후 시험이 다가왔다. 예전 같으면 뭘 할지 몰라 패닉 상태였을 텐데 긴장이 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에게 조언도 구하고 모르는 것은 적극적으로 질문했다. 시험 당일에도 꼭 붙어야 된다는 생각보다 수업 내용을 차분히 떠올려 아는 것의 최대치를 쏟았다. 그 이후에는 시험에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무난히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하던 2009년은 미국의 금융 위기로 세계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걱정보다는 자신감 있는 태도로 인터뷰에 임했고 곧 채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받아쓰기에서 빵점만 받던 ‘소심한 낙오자’가 글로벌 기업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지금도 생각하면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다. 나에게 무한한 능력을 열어준 마음 버리기 방법은, 누구라도 자신이 바라는 삶으로 이끌어주는 우리들의 희망이다.

이동형 32세. 와일리 출판사(WILEY Publisher) 근무. 싱가포르 거주

빼기의 건강법

저혈압을 물리치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말썽 한번 안 피우는 착한 아이였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많이 편찮으셨고, 아버지는 가정에 무관심하셨다. 장남인 나는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다. 엄마가 더 아플까 봐 나를 떠날까 봐 엄마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한 첫 직장은 외삼촌 공장이었다. 외삼촌은 나와 정반대의 다혈질인 성격이었다. 혼도 많이 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가족이니까 어른이니까 꾹꾹 참았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자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머리가 몽롱했다. 병원에 갔더니 저혈압이니 큰 병원에 가라고 했지만 가기가 두려웠다. 어머니의 수술과 오랜 병치레를 지켜봐왔기 때문이었다.

몇 개월 후 공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의 영업직으로 취직을 했다. 앞서 실패한 직장 생활을 만회하고 싶어서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일이 점점 잘 풀려 승진도 했고 돈도 꽤 벌었다. 그러다 보니 쉬는 날도 고객의 불만 사항을 처리하느라 바빴고 몸은 점점 지쳤다.

고객을 만나 영업하는 일은 참고 또 참아야 하는 과정이었다. 모든 일은 고객 중심이었고 말도 행동도 하나하나 눈치를 보게 되고 상대에게 맞춰야 된다는 강박증이 생길 정도였다.

뒷골이 당기면서 저혈압 증세가 더 심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운이 없고 머리가 핑 돌아서 이틀 일을 하면 하루는 누워 있어야 할 정도였다. 혈압 약을 먹어야 한다, 뇌졸중 가능성이 있으니 병원에 가보라는 이야기를 수차례 들었지만 한쪽 귀로 흘렸다. 성공해서 장남으로서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다.

책상 앞에 참을 인 자를 써 붙여놓고 꾹꾹 참았다. 힘들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 노래방에서 나의 십팔번인 ‘오늘도 참는다’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참지 않으면 방법이 없었다.

어느덧 삼십 대가 되니 몸은 상하고 이십 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나도 마음을 비워서 다른 삶을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수련을 하며 눌러 담고 살았던 감정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가정환경을 감추고 고객 앞에서는 언제나 밝게 웃는 모습으로 살았으니 마음은 뒤죽박죽, 당연히 혈액순환도 안 되고 기혈이 막혀 있었다. 음식을 먹고 하루만 배출을 안 해도 힘이 드는 것처럼 마음 또한 꾹꾹 담아만 두고 한 번도 배출을 못 했으니…. 머지않아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겠구나,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2~3주가 지나자 가슴이 뻥 뚫리고 목구멍이 시원해지면서 신선한 공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날 때면 어깨가 뻐근하고 뒷목이 당기는 증상이 싹 사라졌다. 그 후 몇 번 더 몸 상태가 엎치락뒤치락 하더니 최근에는 일주일 내내 몸을 움직여도 몸이 가볍고 기초 체력이 월등히 좋아진 느낌이다.

내 틀과 관념과 내 마음이 있는 한, 참는다는 것은 한계가 있고 곧 스트레스로 쌓이게 된다. 미리미리 마음을 비워 모두 다 건강한 인생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김경도 34세. 직장인.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