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이라 쓰고 행운이라 부른다 하는 럭키lucky7! 이달엔 행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일명 ‘럭키 가이Lucky Guy’의 고백

황휘 서울 상문고등학교 3학년. 국제로봇올림피아드 3회 금메달 수상

나는 운이 잘 따르는 편이다. 럭키 가이라고나 할까^^.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구독하는 잡지 이벤트에 당첨이 되고, 우연히 돌아다니다가 TV 인터뷰에 나오기도 하는 등, 당첨 운은 기본이고 뭔가 지원해서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도전, 연속 7개의 컴퓨터 자격증을 어렵지 않게 땄고, 초, 중, 고 3번 모두 국제로봇올림피아드에 나가서 금메달을 받았다. 벼락치기 공부를 해도 딱 내가 본 부분에서 문제가 나오니, 이쯤 되면 행운의 여신이 나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ㅋㅋ

“너는 참 운이 좋은 것 같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운이 좋냐?”

‘괴짜’라는 별명처럼 생각도 행동도 엉뚱한 데다, 수업 시간에는 졸기만 하고 별로 공부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성적은 잘 나오고, 뭔가 술술 풀려가는 것 같으니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나의 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을 잘 만나서인 듯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외가 쪽으로 큰손자였고, 친가 쪽으로는 아이가 한참 귀할 때 태어난 늦둥이였다. 그러다 보니 친가, 외가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런 사랑 덕분에 성격도 무난하고 마음도 갇혀 있지 않게 된 것 같다.

로봇을 만들 때도 항상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팀을 이룰 때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었다. 보통 한번 대회에 나가려면 팀 사람들과 반년 이상을 준비한다. 어떤 로봇을 만들까 기획하고, 설계도 짜고, 재료와 부품을 찾으러 청계천 시장을 왔다 갔다 하고, 톱질하다 상처를 입기도 하고, 불에 데기도 하고, 작은 부품 하나라도 잘 맞지 않으면 다시 찾아 나가야 하고…. 고비 고비 힘들지만 그때마다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봐라. 이왕 할 거면, 이걸 했다, 하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도는 하라”고 하셨던 부모님 말씀을 떠올린다.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뒷받침해주셔서 만든 행운이었기에, 나 혼자만 누리기에는 미안한 행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의 꿈은 로봇 공학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외할아버지 덕분이다. 나는 원래 이과 계열이 잘 맞긴 했지만 법관이 되고 싶어 인문계 고등학교에 왔다. 그런데 그즈음 외할아버지께서 치매를 앓게 되셨다. 어릴 때 부모님이 일하러 가시면, 바둑도 가르쳐주시고, 자전거 태워 산책도 시켜주시던 할아버지. 병세가 깊어지시며 다른 사람은 기억 못 해도, 나만은 기억하는 할아버지를 뵈며, 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셨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갈수록 증세가 심해지시는 할아버지를 뵈며, 24시간 할아버지를 보살펴드릴 수 있는 로봇이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고, 진로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아직 19살의 어린 나이지만, 나름 10여 년 가까이 로봇을 만들다 보니, 배우고 변화된 것도 많다. 각각은 정말 작고 하잘것없는 부품들이라도, 하나라도 없으면 로봇이 작동되지 않는 것을 보면, 나사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생활 속에 불편한 게 있을 때, 저걸 해결하려면 어떤 로봇을 만들면 좋을까? 생각하게 된다. 외할아버지를 위한 치료용 로봇을 시작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로봇을 만들고 싶다. 나에게 쏟아지는 이 모든 행운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그런 로봇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행운’이라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선 ‘노력’이라는 부품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쯤에서 친구들에게 한 가지 고백하고자 한다.

친구들아, 나 겉으로는 공부를 안 하는 것 같아 보여도 집에 가면 완전 새벽까지 공부한다. 내가 마냥 초월한 괴짜처럼 보여도 실은 나도 성적에 대한 부담감 완전 많단다.ㅋㅋ^^

 

김인옥 작 <항금리 가는 길> 순지에 채색. 100×100cm. 2007.

 

당신이 행운입니다

박미경 43세. 호주 퍼스 베이스워터

존, 29살 때 혼자서 유럽 여행을 하다 당신을 만났지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가 남편의 배신으로 일년 만에 이혼을 한 저는 여러모로 참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쾌활, 명랑한 척했지만, 남자에게 받은 피해 의식, 이혼녀를 보는 따가운 시선에 많이 주눅 들어 있었어요. 호주 사람이던 당신은 나를 그냥 따듯하게 바라보고 도와주었지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저에게 “내 인생에 후회하는 일 만들지 않겠다고, 자기는 변하지 않겠다”며 프러포즈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하며 저는 정말 이 세상에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를 한 남자의 소유물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존중해주었지요. 언어가 서툴러 많은 것을 당신께 미루던 나에게, 그러면 나중에 힘들어진다며 다 해보도록 했고,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화가 나서 침묵할 때면 그것은 안 좋은 습관이라며 화가 난 이유를 솔직하게 표현하라며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결혼 초 “당신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에 하늘에 감사한다” 했을 때 “한 10년을 살고 난 뒤에 그 얘기를 하면 믿어주겠다”고 너스레를 떨던 당신. 1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당신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깊어짐을 확인합니다.

당신을 만나 점차 위축됐던 마음이 많이 풀어지고 여유로워져갔지만, 제 마음속에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항상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흔들림 없는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후회로부터 자유롭고 싶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항상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현재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철학, 종교 책을 읽고, 템플스테이, 피정 등에도 참여해 봤지만 항상 그때뿐이었지요. 그러다 마음수련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주 수련원에서 3일을 수련하며, 아,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논산에 있다는 마음수련 본원에 가서 마음수련의 모든 과정을 밟아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내가 진정으로 찾던 것을 찾았다”고 했을 때 당신은 진심으로 기뻐해주었지요. 하지만 한국에 가서 몇 개월을 수련하고 오고 싶다는 나의 부탁은 정말이지 당신으로서도 들어주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이 네 명이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제 손에 한국행 비행기 표를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장장 8개월을 저는 한국의 마음수련원에서 지냈습니다. 제가 직감했던 대로 마음수련은 제 안에 맺혀 있던 모든 의문을, 모든 한을 풀어주었습니다. 간혹 통화하며 가족을 걱정하면, 당신은 “수련에만 집중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주위에서 어떻게 아내를 그리 오래 내보낼 수 있냐고 하자 “나비는 날게 해야 다시 돌아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했지요. 당신의 희생과 사랑 덕분에 마음수련의 과정을 마쳤을 때, 저는 알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후회로부터,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어떤 상황이 나에게 온다 해도 이 마음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제가 없는 동안, 직장에 다니며 초등학생 세 명의 보호자로 도시락을 싸고, 과제물을 챙겨주고, 집안일까지 두루 챙겼을 당신. 그동안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만을 바랐던 나를 많이 참회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있는 그대로에 감사합니다. 나의 남편이어서가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나에게는 가장 행운입니다. The luckiest thing in my life.

 

김인옥 작 <기다림> 순지에 채색. 110×55cm. 2003.

 

참을 인(忍)과 어질 인(仁)이 가져다준 행운

문관배 77세. 전북 군산시 경장동

나는 1934년 일제 강점기 때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아마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다. 워낙 먹을 게 없어서 논에 가면 벼와 비슷하게 생긴 피를 뽑아, 씨앗을 훑어 먹고, 소나무 속 속피를 뜯어 먹었다. 그러다 일본 사람들의 압박 속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진 부모님은 내가 6살 때 만주로 향하셨다.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떠난 빈집에서 다시 시작했다. 나는 군산 비행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에 다녔는데, 항상 배가 고팠다. 주위에 옷도 잘 입고, 다방에서 고상하게 차도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에게도 저런 행운이 왔으면 좋겠다 해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너무 먼 꿈일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훌륭한 학자가 돼서 많은 후진들을 키워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놔도 상위급에 오를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거였다. 하지만 더 배울 형편이 되지 않았고, 어떻게 갖게 된 직업이 소방관이었다. 옛날에는 공직 사회도 백그라운드가 좋거나 지역이 같거나, 무엇이 있어야 승진이 잘되고 보직도 잘 받았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던 나는 내 스스로 해야지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열심히 내 자신의 독학으로 실력을 넓혀갔다. 영어, 일본어 등의 외국어 공부도 하고 시간 나는 대로 책을 보고 성공한 사람들의 기록 같은 것을 탐독했다. 그 사람들의 길을 똑같이 밟을 수는 없었지만 내가 가는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응용을 해봤다. 소방관을 하며 위험한 일일수록 내가 먼저 앞장을 섰다. 남들이 싫어하는 보직을 맡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런 모습을 상사들이 좋게 봐주어서인지, 승진 운도 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련도 많았다. 묵묵히 내 일만 한다고 하는데도 나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를 헐뜯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항상 내 앞에 참을 인(忍)과 어질 인(仁) 자를 붙여놓았다.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작용들이 험악하게 달려든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질게 받아들이고,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통을 참아가면서 그냥 내 할 일을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 자신에 충실한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누가 뭐라 하든 꿋꿋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더니, 결국 나를 헐뜯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진실이 드러나고는 했다.

54세 때 소방서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는 참말로 기분이 좋았다. 그 자리 하나에 20명 정도의 경쟁자가 있었기에 나는 꿈도 안 꿨는데, 당시 내무부 소방국장이 공정한 인사를 해야겠다며, 대상자들의 인사 기록 카드를 꼼꼼히 검토한 후 내가 된 것이다. 그동안의 노력이 그 운을 만들어준 거였다.

지금은 퇴직해 안사람과 노년을 보내고 있다. 2남 2녀 모두 다 잘 자라, 손자들도 8명이나 있으니 이 정도면 행복한 노년이라 생각한다.

주위에 보면 자기는 진짜 운이 안 풀린다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내가 충성을 다하고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는데 윗분들이나 주변에서 제대로 봐주지 않는 것인지. 내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에 재밌는 것만 하면서, 좋은 일이 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이 살다 보면 온갖 것이 다 보인다. 남들이 어떤 것을 이뤘으면 그것도 이루고 싶고 음식을 먹으면 그것도 먹고 싶고, 하지만 다 가질 수는 없다. 안 되는 걸 굳이 탓하지 말고, 내 운은 내가 만들어간다 생각하며 살면 그리 어려운 인생은 아닐 것이다.

 

김인옥 작 <기다림> 순지에 채색. 53×45.5cm.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