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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수련 그 끝자리에 이르다, 심윤정씨

마 음 수 련     끝 자 리 에  이 르 다  심 윤 정 씨

 인터뷰 김혜진 사진 홍성훈

사람들은 건강해지기 위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마음을 닦는다. 그러한 시간들이 지극하게 흐르면 실제 건강해지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가 오직 거기까지일까. 마음수련에서는 ‘마음수련은 인간마음을 우주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라 한다. 즉, 인간으로 살면서 쌓아온 온갖 마음을 버리고 순수우주의 의식, 영원불변의 진리인 우주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지만 오직 마음을 닦고 버리는 것에만 매진해오는 사이, 참으로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상과 하나 되어 살고 있다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들은 어떠한 날들을 지나온 걸까. 현재 마음수련 교육원에서 4과정 수련 안내를 도와주고 있는 심윤정(44)씨를 만나보았다.

심윤정씨는 1969년 경남 울산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엄격한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평소 자유로운 삶을 동경해왔다. 부모님은 그녀가 어떤 옷을 입고, 화장을 어떻게 하고, 누구를 만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 삶이 답답했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간 그녀는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학업에 정진하는 남편을 보고, 저 사람과 같이 살면 자유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했고, 그녀는 한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한국 돈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책을 통째로 다 외울 정도로 하루 19시간 이상 악바리처럼 공부한 덕분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장학금도 받았다. 아이를 낳고도 친정에 아이를 맡긴 채 공부에만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남편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갔다.

6년간의 중국 유학 생활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온 뒤 시댁에서 지냈지만, 남편과의 관계는 여전히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갑자기 그녀와 아이를 남긴 채 외국으로 떠나 버렸다. 그녀는 자신을 힘들게 한 남편이 밉고 원망스러워 매일 눈물로 하루를 보냈고, 불면증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다. 가족이 반대한 결혼을 했기에 내색조차 할 수 없었던 시간들…. 답답한 마음에 1년 반 동안 늦은 밤이면 산에 올랐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생겼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러던 1997년 그녀는 마음수련을 하게 된다.

처음 마음수련을 할 때의 심정이 어떠셨나요?

너무나 당당했죠. 나는 늘 착하고 바르게 살았다, 세상이 이상해서, 잘못된 인연을 만나 내 인생이 꼬였지만 이 마음만 추스르고 나면 다시 사회에 나가 보란 듯이 잘 먹고 잘살아야지, 하는 마음이었어요. 아, 그런데 마음수련엔 정확한 방법이 있었어요. 그 방법대로 하다 보니 나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보이더군요. 차츰차츰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우주 입장에서 보게 되니, 그렇게 교만하고 위선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남이 잘되면 시기, 질투하고, 착한 척 바른 척하면서 살았던 게 나였더라고요. 엄마를 십 년 정도 병수발했었어요. 엄마 앞에서 잘하는 척하고, 돌아서면 왜 나를 힘들게 하나 원망했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 그때 진짜 많이 울었어요. 어쩜 이렇게 자기밖에 모를까…. 너무나 부끄러워서 한 달간 밥을 못 먹었어요. 밖에 나갈 수가 없더라고요. 하늘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 인간마음들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마음을 버리는 과정이 참으로 진실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 볼수록 그 ‘나’란 존재를 반드시 버리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더 커지더군요. 늘 우주 입장에서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마치 몰래카메라가 붙어 있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보면서 버려나갔죠. 그렇게 버리고 버려도, 언제나 저 밑바닥에서 먼지 티끌처럼 올라오는 마음들은 있어요. 가령 분명히 누군가가 계속 간섭하고 괴롭히면, 내 맘 한구석에서 “네가 그렇게 잘났어?” 따지고 들거든요. 하지만 결국 그런 모든 마음도 다 ‘내가 잘났다’는 교만함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100% 인정했을 때 나를 다 버릴 수가 있더라고요.

‘나를 버린다’는 말이 참으로 막연합니다.

몇 년 전에 저의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남는 걸 보면서 죽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없는 거네, 나도 이렇게 살다가 가는구나,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으면 이렇게 없어지는 것인데, 그걸 위해서 평생 아등바등 살아간다는 건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나를 버린다’는 건 그 허무한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진짜 참의 세상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마음을 우주마음으로 바꾸는 거라고 하지요. 나한테 묶인 마음이 아니라 우주마음에서 보면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참으로 버려야 할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수련을 하신 후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수련을 안내해 오셨지요.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내가 살면서 가져왔던 수많은 마음들, 돈에 집착하고, 사랑에 목매고, 체면을 중시하고, 명예를 좇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잘난 척하고, 가족을 원망하고…. 그 수많은 마음들을 하나씩 버려가면서 느꼈던 그 희열과 통쾌함, 나로부터 벗어날 때만 느낄 수 있는 참자유. 내가 그동안 직접 겪고 체험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잘 안 버려지면 이렇게 버려보세요, 조금만 더 버려보세요…, 하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저였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수련을 안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배로 처절하게 저 자신부터 봐야 했거든요. 내가 없어야 상대와 하나가 되고, 진심으로 상대의 입장에서 안내를 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매일매일 기도했습니다. 부디 ‘나’ 없이, 진정 우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해달라고. 그러면서 점점 저 사람이 자기를 다 버리고 진리만 될 수 있다면, 저 사람을 위해 내가 모든 걸 바칠 수 있겠다,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되더라고요.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오늘에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굳이 마음수련을 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잠깐 동안 그런 행복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있는 한 상황이 바뀌고 조건이 바뀌면 그새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왔다 갔다 항상 변합니다. 그런 모든 것들에서 다 떠나서 살 수 있는 게 바로 마음수련이에요. 옛날에는 수명을 다해 죽는 것이 죽는 건 줄 알았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 살지 못하고 내 마음세계 안에 갇혀 있었던 것 자체가 생명이 없는 죽음 같은 삶인 것입니다. 그런 나는 버리고 우주마음으로 다시 태어나 재밌게 신나게 살자는 게 마음수련이니, 뭐 밑져야 본전이다, 하고 한번 해볼 만하시지 않을까요.(웃음)

본인은 마음수련 끝자리인, 살아 있는 영혼으로 살고 계시는지요?

네, 감사하게도요. 십여 년을 그렇게 매일매일 신나게 내 마음을 버리다 보니, 어느 순간 정말 한 치의 남음도 없이 나란 존재가 사라지더라고요. 왜 ‘대자유’ ‘대해탈’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말이 딱 이런 거구나, 일체의 마음이 버려진 순간 스스로 알 수 있는데, 아, 어떻게 말로 표현이 안 되네요.(웃음) 중요한 건 우리 인간은 그렇게 됐을 때 비로소 허상에서 벗어나 참 영혼을 지닌 참생명으로서 진짜 삶을 살게 된다는 거예요. 참으로 기쁜 것은, 그것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일체의 마음만 버리면 누구나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전에만 나오는 말인 줄 알았던 인간 완성이 정말 이루어지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도 마음수련 교육원에서 4과정 수련을 안내하고 있으며, 대학생캠프 지도 교수로서 상담과 강의 등에 여념이 없다. 매 순간 어떤 한 사람이 마음을 버렸음을 확인할 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심윤정씨는 부족한 자신이 마음수련을 안내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다고 했다.

“수련을 해서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면 참영혼으로서 영원히 살아 있음이 너무나 확연해집니다. 인간의 마음세계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생명 자체, 이 자체가 ‘나’고 통째로 ‘하나’란 걸 알게 되지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지나온 삶과 인연들, 저를 만났던 모든 수련생들, 그리고 마음수련에 감사드립니다.”



| BLOG 심샘의 힐링 상담소 

돼지고기쑥갓덮밥,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싱글의 숙명이란, 맘먹고 마트에 가도 파 한 단, 양파 한 망 사기가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 딱 두 가지 재료로만 사서 차려 먹고 음식물 쓰레기는 최대한 버리지 않는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 둘 나만의 요리를 개발해내고 싱글들의 고충을 들어보며 아이디어를 주고받은 결과, 이 땅의 모든 싱글, 1~2인 가족, 자취생, 주말에만 요리를 만들어 먹는 회사원을 위한 레시피를 만들게 되었다.

모든 싱글들이 건강하게, 간단하게, 알뜰하게, 맛있고 균형 잡힌 만찬을 즐겼으면 한다. 문인영

{ 재료 }

돼지고기(불고기용) 100g, 청주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쑥갓 50g, 다시마 육수 1/2컵, 고추장 2/3큰술, 고춧가루 1/3큰술, 조청 1/3큰술, 전분물 1큰술(전분가루 1/2큰술, 물 1/2큰술), 밥 1공기

{ 만들기 }

① 돼지고기는 청주와 다진 마늘로 재운다. 쑥갓은 4cm 길이로 자른다. ② 팬에 고기를 넣고 볶는다. 반 정도 익으면 다시마 육수와 고추장, 고춧가루, 조청을 넣고 끓인다. ③ 고기가 익으면 전분물을 고루 풀어 농도를 조절한다. ④ 밥 위에 쑥갓과 고기를 올려 먹는다.

single’s tip _ 쑥갓의 향이 고기의 잡내를 잡아준다. 전분물을 빼고 조리하면 촉촉한 돼지고기쑥갓덮밥을 맛볼 수 있다.

문인영님은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현재 푸드스타일리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다양한 잡지와 방송매체를 통해서 메뉴 개발과 스타일링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싱글만찬> <다이어트 야식>이 있습니다.

빅 아이 니들, “바늘에 실 꿰기, 어렵지~ 않아요”

이름은?

바늘구멍을 영어로 표현하면 바늘의 눈이다. 큰 바늘구멍이어서, 빅 아이 니들(big eye needle)이라 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재학 시절 유니버셜 디자인(Universal design) 과제를 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유니버셜 디자인은 모두가 사용 가능한 디자인을 말하는 것으로, 장애인이나 노약자분들도 제약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가 바느질할 때 실 꿰기의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대학교 재학 시절, 디자인 혁신이란 주제를 갖고 소재 측면에서 많이 접근해 보았다. 같은 디자인이지만 소재만 변화시켜 적용한다면, 가령 휴대폰이 고무처럼 물렁하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들. 그러다가 우연히 본 맥주 광고에서 맥주병이 바닥에 떨어질 때,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깨지지 않고 통통 튀는 장면을 보았을 때 너무나 통쾌했다. 발상 전환 차원에서 빅 아이 니들 소재를 연구할 때도 그때 본 광고가 상당히 영향을 준 듯하다.

제품의 원리는?

소재는 스프링 스틸(spring steel)로써, 일반적으로 스프링에 사용하는 철 소재와 열처리(후가공)를 달리해서 만들었다. 바늘이 가져야 하는 경질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유연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소재의 전환이다. 사용 방법은 바늘의 뒷부분을 누르면, 바늘 구멍이 커지면서 실을 넣기가 수월해진다.

하고 싶은 말

운이 좋게도 수상을 많이 했다. reddot design award의 concept부문을 수상했고, iF design award에서도 concept 부문 1000 euro prize를 수상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40주년 기념행사 때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신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로 평소의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게 제시한 점을 좋게 봐주신 것 아닌가 싶다. 하지만 아직 상용화는 되지 않은 상태다.

만든 사람 우문형 30세. 디자이너


1박 2일, 가장 그들다웠던 마지막 여행… 이젠 안녕!

드디어 5년 동안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1박2일’의 마지막 회가 방송되었습니다. 마지막 회인 만큼 미션 하나하나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한 제작진의 정성이 엿보이더군요. 41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장국집, 32년째 운영되고 있는 케이블카, 무려 40년 된 정읍의 유일한 영화관까지 모두 과거에서 현재로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온 공간입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황당한 미션을 수행하러 뛰어다녔고, 여느 때처럼 잠자리 복불복 게임을 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날보다 더욱 잔잔하고 평화로웠지요. 마당에서 스태프들과 족구 시합이라도 벌였다면 좀 더 요란뻑적지근한 마지막 게임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좁은 방 안에서 멤버들끼리 서로를 붙잡으러 다니는 평범한 좀비 게임을 했을 뿐입니다.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그 어느 때보다도 소박하고 평범했던 마지막 여행. 어쩌면 가장 ‘1박2일’다운 마무리였습니다.

수고한 멤버들을 위해 제작진이 마련한 선물은 우정 반지였습니다. 똑같은 반지 5개를 저마다 손가락에 나눠 끼고 새삼 밀려오는 감동에 울컥하려는 순간, 그 반지에도 복불복이 숨어 있었다는 반전을 깨닫고 말지요. 24K 순금 반지는 엄태웅이 차지했고, 김종민은 14K, 은지원은 10K, 그리고 특별 주문 제작한 5K 반지는 이승기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감동이 극대화되는 순간 뒤통수를 치고, 눈물이 흐르려는 순간 웃음이 터지게 만드는 ‘1박2일’ 특유의 코드는 이렇게 변함없이 끝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정직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새벽이 밝아왔습니다. 제작진이 특별히 늦잠을 허락했는데도 멤버들은 저절로 하나 둘씩 깨어나 담담한 표정으로 마지막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오직 은초딩, 은지원만이 조금이라도 헤어짐의 시간을 늦추고 싶어 이불을 다 뺏기고도 떼쓰듯 늦잠을 고집해 보았지만, 피할 수는 없는 이별이었습니다.

막내 이승기는 일찍 일어나서 나영석 PD를 비롯한 스태프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등 아침부터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더군요. 혼자서 머리를 감다가 문득 울컥한 나머지 소리 죽여 한참 울기는 했지만, 형들 앞에서는 의연하게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떠나는 은지원과 이승기는 물론이거니와, 가장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해온 이수근의 슬픔도 무척 큰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울지 않기로 굳게 약속을 했었나 봅니다. 지원과 승기의 눈에 살짝 눈물이 비치려 할 때마다 이수근은 잽싸게 달래더군요.

“지원아, 울지 않기로 했잖아” “승기야, 울지 마. 참아, 참아” 그래 놓고 나중에는 자기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중얼거리더군요. “참았어, 참았어… 가슴을 이겼어!”

그렇게 참으려 애썼지만 모두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고, 합류한 지 1년밖에 안 된 엄태웅도 슬쩍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닦았습니다.

어쨌든 그들의 마지막 여행은 가장 ‘1박2일’답게 마무리되었습니다. 평범하게, 소박하게, 담담하게, 눈물은 감추고 웃음은 드러내며,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도 어제처럼, 변함없이 계속될 행복한 여행을 꿈꾸며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마지막 순간을 만납니다. 처음이 있었기에 마지막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처럼 열정적이나 평소처럼 담담할 때인 것 같습니다. ‘1박2일’ 마지막 회처럼 말입니다.

출연진들이 그랬듯이 이제 시청자로서도 평범하고 소박하게 이 이별을 받아들일까 합니다. ‘1박2일’ 여러분,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며 실컷 웃고 함께 즐겼습니다.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사종사색四種思索

사진, 글 김선규

나 는  가 장 家 長 이 다

외줄 타듯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도

식구 생각에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저 분주한 발걸음.

2008년 7월. 서울 여의도 한강 둔치

어 디  일 자 리  좀  없 나

내가 빨리 취직해야
부모님이 덜 고생하실 텐데
동생들도 돌봐줄 텐데

취직만 되면 성실하게
월급의 열 배로 일할 텐데
정말 잘할 자신 있는데
일자리만 생기면….

2009년 3월. 서울 광진구 화양동

서 울 에 서  내  집  마 련 하 기 란

새들이 둥지를 트는 계절,
집 장만에 여념이 없는 까치는,
주차장 좁은 틈에서 제 몸집의 두세 배나 되는
나뭇가지를 물어 나릅니다.

까치집을 지으려면 나뭇가지가 적어도 천 개는 필요하다던데,
도심에 사는 까치에게는
마음에 드는 자리를 정하는 것도,
집 지을 재료를 구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보입니다.

소중한 새끼들을 길러낸다는 생각에
오늘도 까치는
시멘트로 뒤덮인 도심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닙니다.

2005년 3월. 서울 여의도에서

이 게  웬  떡 이 냐

금강산 구룡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계단 길을 오르자
마침내 비경이 펼쳐졌습니다.
푸르고 맑은 물줄기와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머릿속의 번잡함도 함께 날아가는 기분이었지요.

발밑 바위 위에서 조그만 다람쥐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온통 바위투성이에 소나무만 듬성듬성 있는 이곳에는
다람쥐가 먹을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았습니다.
비상식량으로 챙겨두었던 떡 한 조각을 던져주었습니다.
다람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입에 물고 달아났습니다.

험준한 산,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하게 금강산을 지키는 다람쥐야,
떡으로 맺은 우리 인연 금강산처럼 아름답게 지켜나가자.

2004년 7월. 금강산에서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야생화가 말을 걸다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지만 강하고, 단아하지만 우아한 매력을 지닌 꽃이 바로 우리의 야생화다. 그렇게 우리 꽃에 매료당한 지 30여 년, 그동안 산과 들을 헤매며 숨 막히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이른 봄, 눈 속을 뚫고 나오는 새싹들이 나올 무렵이면 어느덧 내 발길은 산과 들로 향했다. 꽃에는 제 스스로 열을 발산하면서 언 땅을 녹이는 위대함이 있다.
바로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봄은 찾아온다.   사진, 글 김정명

두메자운 Oxytropis anertii Nakai 고산준령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이름에는 산속에서 자란다 하여 ‘두메’, 구름 속에서 핀다 하여 ‘구름’이라는 단어가 붙은 꽃들이 많다. 이들 식물들은 대부분 고도가 높은 곳에서 자라서 강한 바람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바람의 저항을 줄이는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줄기에 잎이 거의 없고, 잎 모양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그래야 바람을 통과시키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줄기 역시 바람의 저항에 견딜 수 있도록 가늘고 길다.

1986년 어느 날,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산에 올라 잠시 쉬고 있을 무렵 아주 작고 앙증맞은 흰 꽃을 보게 되었다. 너무 예뻐서 꽃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면서 어지러웠다. 작은 꽃들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향기가 진한 법인데, 그걸 전혀 몰랐던 것. 그 꽃은 바로 ‘은방울꽃’이었다.

그때부터 우리 꽃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꽃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야생화 이름을 알기 위해 일일이 식물도감을 찾아보며 외우고 꽃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꽃에 대해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게 너무 많았고, 자료를 찾아봐도 알 수 없는 우리 꽃들이 너무 많았다.

처음 산에 가면 야생화가 보이지 않는다. 힘들어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귀가 트이고 바람 소리가 들린다. 그 후 하늘과 햇빛과 나뭇잎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발밑의 야생화가 보인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결하지 않으면 꽃의 순수한 자태를 포착할 수 없다. 동시에 조물주가 빛과 바람을 허락해줄 때, 그때 비로소 꽃이 말을 걸어온다. 이제 나를 찍으라고.

보라색 동강할미꽃 Pulsatilla tongkangensis Y. Lee 할미꽃은 어쩐지 지친 모습으로 느껴진다. 해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꽃을 피우기 때문일까? 그러나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고개 든 할미꽃이 있다. 강원도 정선의 동강 주변에서 자라는 동강할미꽃이다. 바위틈을 비집고 돋아나는 강인함. 이 꽃은 필자가 정선 동강에서 최초로 발견하여 사진으로 보고한 우리나라 미기록 식물종 중의 하나로 꽃색이 분홍 또는 자주색과 흰색이고, 꽃받침이 뒤로 완전히 젖혀지지 않는다.

노랑제비꽃 Viola xanthopetala Nakai
제비꽃의 잎은 가늘고 너비가 좁으며,
잎 아래쪽 잎자루 부분에서 갑자기 좁아진다.
땅속줄기는 땅속을 옆으로 기면서 뻗어나간다.
잎은 뿌리에 모여서 돋아나고,
꽃에는 짧은 꽃받침이 있다. 이른 봄,
어떻게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직접 온도계를 가지고 다니며 외부 온도와
꽃잎 속의 온도를 재보았다. 외부 온도는 영하 1, 2도
하지만 꽃술 속의 온도는 영상 11도였다.
‘꽃 밖은 아직 겨울이지만
꽃 안은 이미 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메 양귀비 Papaver radicatum Rott.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운 야생화.
가련한 꽃이 아름답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성급하게 얼굴을 내밀다가 추위의 기습으로
시린 이슬과 얼음 속에 갇히게 된 새싹들.
자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는 표정들이며,
오랜 기다림과 깊은 관찰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허락되는 짧은 만남이다.
강렬한 햇빛이 처연한 아름다움을 거두어 가기 전,
꽃들과 새싹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 싱그럽고 아름답다.

노랑할미꽃 Pulsatilla cernua Spreng. var. koreana
할미꽃은 보통 자주색 꽃인데 반해 북한산의 노랑할미꽃은 겉은 연한 노란색, 안쪽은 연한 주황색 꽃이 핀다.
온몸에 털이 많고 꽃은 아래를 향하여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할미꽃 종류에서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잎이 아니고 꽃받침이다.
꽃잎은 퇴화되어 없어졌고, 꽃받침 속에 수많은 수술과 붉은 암술이 들어 있다.
안타깝게도 다 멸종됐는지 이제는 볼 수가 없어졌다.

 

우리나라 야생화가 각광받는 이유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이다. 겨울엔 영하 25도, 여름엔 영상 25도의 환경을 넘나들며 살아낸다. 전 세계적으로 50도나 되는 큰 온도 차를 견디며 자라는 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가.

이들은 봄이 오기도 전에 새싹이나 꽃봉오리의 체온으로 언 땅과 눈을 녹일 만큼 많은 열을 내뿜는다. 새싹이나 꽃봉오리 주변의 눈이 둥그렇게 녹아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언 땅을 뚫고 눈을 녹이는 어린 식물들의 생명력은 신비롭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것이 바로 바람과 물과 흙과 빛, 우주의 힘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 창조의 최전선 현장에서 야생화는 말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봄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다 가져가십시오.”

* 야생화 보호를 위해 촬영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호범꼬리 Bistorta ochotensis Komarov
백두산 고산지대는 식물이
양분을 생산할 수 있는 기간은
짧은 반면에 추운 기간은 아주 길다.
호범꼬리는 오랫동안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땅속줄기에 많은 양분을 저장하여
어려울 때를 대비하고 있다.
그래서 유난히 땅속줄기가 굵게 발달했다.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7월에서 8월에 걸쳐
엷은 분홍색 꽃이 줄기 끝에서 핀다.

야생화 전문 사진가로 불리는 김정명 작가는 1946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15살 때 카메라에 빠진 후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우리의 산과 들을 다니며 들꽃을 찍어왔습니다. 4,500종으로 추산되는 국내 야생화 가운데 1,800종 70만 장의 사진을 찍었으며, 특히 98년 동강할미꽃을 처음 찍어 세계 유일의 특산종으로 등록시키는 등 이름 없는 들꽃들을 세상에 알려 왔습니다. 야생화의 생태적 특성을 모두 섭렵한 진정한 야생화 사진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사진집으로 <한국의 야생화> <꽃의 신비> 등 다수가 있습니다.

잘났다, 까미!

아내는 설거지 중이었다. 어머니가 과일을 깎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며칠 전, 어머니 집 고양이 까미가 달걀만 한 생쥐를 물어왔다. 까미는 생포한 전리품을 단박에 처치하지 않고 현관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앞발로 툭툭 치면서 장난감 굴리듯 가지고 놀았다. 달걀만 한 생쥐는 죽기 살기로 탈출하려 하고 까미는 잽싸게 제자리에 물어다 놓기를 되풀이하였다. 나중에는 생쥐도 지쳤는지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또 좀 더 있으니까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는 듯 땅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꼼지락꼼지락 제 할 짓을 하고 다녔다.

애가 닳은 쪽은 부삽을 들고 지켜보던 어머니였다. 까미가 얼른 생쥐를 처치해주어야 부삽으로 떠서 울 넘어 풀밭 사이에 훽 던져버릴 텐데, 까미란 놈은 세월아 네월아 재작질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꼬물꼬물 포획자의 행동 반경을 넘나들던 달걀만 한 생쥐가, 순식간에 장독간 매실 단지 사이로 숨어버렸다. 멍청한 고양이 까미는 뒤늦게 엉뚱한 곳을 기웃거리고, 보다 못한 할매가 다급하게 장독 사이로 한쪽 발을 밀어넣어 쥐 꼬리를 밟으려 했다. 하지만 생쥐는 생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시골 고양이는 결코 주인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날 사냥의 맛을 알게 된 까미는 세상의 쥐란 쥐는 모두 잡아버릴 듯 쥐를 잡아 날랐단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자신의 전리품을 보란 듯이 현관 앞에 갖다 두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게 고양이 마음인지, 까미가 갑자기 사냥을 뚝 끊었다. 만날 밥만 축내고 빈둥대는 그 꼴을 보다 못해 어머니가 말했다.

“까미야, 요새 왜 쥐 안 잡아오노? 내일은 쥐 한 마리 잡아서 이 할미한테 좀 보여줘라잉.”

다음 날 아침, 세상에 이럴 수가. 까미가 진짜로 쥐 한 마리를 물어다 놓았다. 똑똑한 고양이 까미가 마침내 한국어를 깨친 것이다. 어머니는 하도 기특해서 까미를 쓰다듬어  주고 부삽을 들고 전리품을 치우러 다가갔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했다. 예전에 제 녀석이 사냥해서 텃밭 고랑에 버려둔 거의 박제가 된 상태의 쥐였다.

“아이구, 요놈 고양이까지 할매한테 사기를 치네!”

눈 가리고 아옹이란 말이 달리 나온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까미는 모처럼 할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접수했지만, 사냥할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밭고랑 사이에 굴러다니는 마른 쥐를 대신 갖다 놓았다는 이야기다.

“까미가 말을 할 줄 알면 참 재미있겠네요.”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한마디 했다. 그것도 아내가 뭘 모르는 소리다. 이미 한국어를 깨친 고양이 까미가 만약에 한국말까지 구사한다면 진짜 성가실 것이다. 할매 발부리에 걸려 부딪칠 정도로 졸졸 따라다면서 종알종알 궁시렁궁시렁 참견하는 꼴이라니. 아마 견디다 못한 우리 어머니가 괴나리봇짐을 싸고 가출을 시도하지 싶다.

최형식

우리는 ‘비빔밥유랑단’ 전 세계인들에게 비빔밥을 알리다

강상균 32세. 비빔밥유랑단 단장

2010년, 서른 살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직장 생활 2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뭔가를 하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지만,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나이.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일까? 너무 늦기 전에, 무언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거렸다.

같은 뜻을 공유한 다섯 명의 젊은이가 모였다.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다. 우리의 것을 세계에 제대로 알려보면 어떨까? 고민하던 중 ‘비빔밥’이 떠올랐다.

흔히 “밥 한번 먹자”라는 이야기를 한다. 밥 먹는 자리는 곧 나눔의 자리다.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비빔밥은 최고의 기내식으로 꼽혀 머큐리상을 수상할 정도로, 세계적인 웰빙 트렌드에 맞는 우리 음식이었다. 음식이라는 것을 통해, 세계로 나가, 세계를 배우고 세계와 소통하고 싶었다.

우리는 비빔밥을 제대로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전주비빔밥 명인 1호이신 김년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비빔밥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더욱 생겼다. 비빔밥에는 시금치, 당근, 계란… 등 건강에 좋은 재료들이 다양하게 포함된다. 미국 뉴트리라이트 건강연구소의 샘 렌보그 박사는 비빔밥을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음식이라며 칭송했을 정도다. 또 비빔밥은 완벽한 컬러푸드 음식이다. ‘컬러푸드 이론’에 따르면, 균형 잡힌 영양을 섭취하려면 다양한 색상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비빔밥은 그 요건을 만족한다. 게다가 비빔밥은 조화와 평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렇게 8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1년 4월 5일 우리는 드디어 중국 북경으로 출발했다. 아시아와 유럽, 북미와 남미의 주요 도시를 돌며 100번의 시식회를 열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상세한 계획까지 세우기는 어려웠지만, 한 가지 원칙만은 정했다. 한 그릇, 한 그릇 정성껏 준비해서 외국인에게 보여주자는 것, 한 분이라도 비빔밥을 제대로 알고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비빔밥유랑단입니다. 비빔밥이라는 한국 음식을 소개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며 무료 비빔밥 시식회를 열고 있습니다.”

중국 북경의 첫 행사. 비빔밥을 중국인들에게 드리며, 어떤 음식인지 설명했다. 그렇게 중국, 태국, 인도 등 아시아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유럽으로 이동했다.

비빔밥의 인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너무 맛있어요” 하며 심지어 네 그릇까지 드시는 분도 있었다. “비빔밥 어디 가면 먹을 수 있냐?” “고추장 어디서 살 수 있냐”는 질문도 많았다. 그런 외국인들을 보면서, 기쁘고 보람도 많이 느꼈다.

물론 처음 이삼 개월은 보람보다 힘든 게 훨씬 많았다. 하지만 하나씩 이겨내고 나아가면서 탄력이 붙었다. 비빔밥을 완성하는 속도도 빨라지고, 세계인들과 소통하는 재미도 늘어났다. 그리고 우리만의 비빔밥 레시피도 점차 확정되었다.

처음엔 비빔밥의 맛이 나라마다 달라지는 것이 문제였다. 야채의 경우, 그 나라에서 직접 구입하는데, 나라마다 재료의 특성이 다 다르다 보니 맛도 다른 것이다. 구할 수 없는 재료도 있었고,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너무 비싼 것도 있었다. 또 고사리는 외국에서는 독초라고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생전 처음 비빔밥을 보는 사람들은 그 안에 재료가 뭔지를 궁금해하는데, 모르는 게 있으면 먹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 우리만의 레시피가 체계화되었다. 표고버섯 대신 현지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구하기 쉬운 송이버섯과 시금치, 계란 흰지단, 노란지단, 무나물, 애호박, 당근, 소고기. 이렇게 8가지였다. 이것은 전 세계 어디나 익숙한 재료들이었다. 외국에는 채식주의자들이 많아, 소고기를 넣지 않은 것도 준비했다. 고추장은 취향에 맞게 뿌려드리고, 매운 것을 못 드시는 분들을 위해서는 간장레몬소스를 만들었다.

스페인, 프랑스, 체코, 이탈리아, 브라질…. 우리의 시식회는 계속 이어졌다. 단체나 기관을 섭외하여 하는 행사와 게릴라식 행사, 때로 홈파티를 한 적도 있었다. 홈파티는 소수지만, 깊이 있게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한번은 L.A에서 뉴욕타임즈가 주최하는 ‘The Taste’ 푸드페스티벌에 참가를 했다. L.A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각자의 음식을 소개하고 맛도 보는 행사인데, 비빔밥이 제일 인기가 있어서 뿌듯했다. 그곳에서 비빔밥을 드신 분이 다음에 또 하자고 해서, 섭외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빔밥의 세계화 가능성’을 점점 확인해갔다.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은 “샐러드는 건강에는 좋지만 먹고 나면 먹은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비빔밥은 샐러드 같으면서도 식사로도 적당한 것 같아서 자주 먹고 싶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12월 12일, 미국 뉴욕에서 99번째 행사를 하고, 드디어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12월 29일 서울 홍대에서, 마지막 100번째 행사를 진행했다. 그렇게 255일, 23개 도시, 100회에 걸쳐 약 8,770인분의 비빔밥을 알린, 유랑단 1기의 활동은 끝났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나니, 무엇보다 우리가 내뱉은 말을 다 지킬 수 있었다는 게 뿌듯했다.

그러면서 도전은, 성공에 대한 자신감뿐 아니라, 진실로 우러나오는 마음, 나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이외의 다른 것은 포기하고 오직 그 일에 모든 걸 투자해야만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회사를 과감히 그만두고, 비빔밥유랑단을 준비하면서 일년 내내 비빔밥만 생각했다. 비빔밥을 알리는 데 나의 모든 역량과 시간을 썼다. 어떻게 비빔밥을 잘 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좋아할까…. 이 생각만 하고 움직이니 자연스레 지혜가 생기고 길도 열렸다. 그렇게 몰입하여 진행했기에, 가기 전의 나와 갔다 온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르다. 이제는 나의 이야기를 진짜로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2기 유랑단을 모아 떠나려 한다. 2기는 더욱 발전된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내가 느낀 비전과 희망, 도전 정신을 심어주고 싶다. 그것이 바로 비빔밥의 힘이니까.

우리는 비빔밥을 먹고 자란 대한민국의 젊은이다.

비빔밥유랑단원 왼쪽부터,

정겨운(29), 김수찬(27), 김명식(32), 강상균(32), 박현진(23)이다.

직장인 네 명이 각자 퇴직금 1,500만 원씩, 학생인 현진이는

1,000만 원을 내 초기 자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농림수산식품부와

한식재단, 문화체육관광부와 해외문화홍보원, 스페인한국대사관과

CJ그룹, 아웃도어 용품 밀레, 한인회 등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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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혁 선수,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 있는 전설

20여 년간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단거리 500m, 1,000m 대표 주자로 달리며 수없는 신기록과 메달을 한국에 안겨주었던 이규혁(35) 선수. 최근 그에게 또 한 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최고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를 가리는 세계스프린트(단거리)선수권대회 종합 2위와 더불어 전국동계체육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다섯번째 올림픽 도전 실패라는 아픔을 딛고, 나이 어린 쟁쟁한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체력적 한계를 극복한 도전이었기에 더욱 의미 있었다. 언제나 스케이트와 함께였던 그의 삶, 그의 마음 이야기를 들어본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2012년 세계스프린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 남자 500m 경기. 모태범, 이강석 등 쟁쟁한 후배들을 제치고 멋진 레이스를 펼친 선수는 다름 아닌 스피드스케이팅계의 ‘맏형’ 이규혁 선수였다. 현역 선수로서 은퇴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서른다섯이란 나이에 이뤄낸 성과이기에 그는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언제까지 선수로 뛸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준비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하다”는 말처럼 그는 매 시합마다 최선을 다해왔다.

1991년 13세 때 ‘빙상 신동’이라 불리며 국가대표가 된 이후 1997년 한국 빙상 사상 처음으로 1,000m, 2001년엔 1,500m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07~2008, 2010~2011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금메달,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언제나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그렇게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스타로서 숱한 국제 대회를 석권해왔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올림픽 메달이다.

1994년부터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까지 5번의 올림픽 무대에 도전했지만, 유독 올림픽 메달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

하지만 선수로서의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최고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한 뒤, 2007~2008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 연속 1위를 한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메달 획득 실패 후, 사람들은 그가 선수 생활을 그만두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2011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종목별 세계선수권 우승에 이어 2012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이르기까지…. 그의 끊임없는 도전은 선수로서, 한 사람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2011년 2월에 열린 제92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일반부 1,000m 경기에서 이규혁이 역주하고 있다. 사진_뉴시스

최근의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셨는데요,
체력적 한계는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약간의 거품을 뺐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운동을 열 번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못 해요. 그걸 다 하면 부상 내지는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니까요. 특히 이번 시즌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시즌 초반엔 어린 선수들에 비해 좀 부족하다는 소리도 들었고. 예전 같으면 거기에 많이 연연해하고 못 견뎠을 텐데, ‘아, 이 친구들이 나보다도 열 살이 어린데 같이 간다는 건 욕심이다’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모든 걸 수정했어요. 전에는 국제 대회는 물론 선발전 모든 대회에서 입상하기 위해서 스케줄을 빡빡하게 짰을 텐데, 이제 불필요한 건 버리고 원하는 대회에 맞게 준비를 해요.

스케이트는 0.1초의 시간 차이로 순위가 결정 나기도 합니다.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요.

스피드스케이팅이란 빨리 도는 사람이 이기는 단순한 게임이지만 그 안에 테크닉이나 훈련 방법, 음식 조절, 휴식 등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단거리에서는 100분의 1초, 때론 1000분의 1초로 순위가 갈리니까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엄청난 훈련을 하죠. 매일 산을 뛰어오르고, 사이클에 무거운 타이어를 달고 언덕을 오르기도 하고, 몸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바벨을 들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그 0.1초를 줄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그게 실력이기도 하고요.

처음 스피드스케이팅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버님이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셨고, 어머니는 피겨 국가대표셨다 보니 자연스레 스케이팅을 접하게 됐어요. 모든 스포츠가 선의의 경쟁을 하지만, 솔직히 남이 이기면 배가 아프기도 하잖아요. 근데 스피드스케이팅은 기록경기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우승을 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더라고요. 저 선수 때문에 지는 게 아니라 내가 못해서 지는 거란 공감대가 있으니까, 그런 점이 굉장히 신사적으로 보여 좋았어요.

항상 경쟁하다 보니 스케이트를 즐겁게 타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지금도 경쟁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시합이 있으면 시합 전날까지, 오직 그 생각만 하거든요. 지금 이렇게 대화하는 순간에도 그게 계속 떠오르기 때문에 시합보다 준비 과정이 더 힘들어요. 그 긴장감 때문에 지친다는 게 맞을 거예요. 근데도 하는 걸 보면 제가 단순해서인 거 같아요. 힘들어서 안 해야지 하다가 또 1등 하면 그걸 싹 다 잊고, ‘이 고통을 알면서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러다가 시합이 끝나면 또 잊어먹고…. 기억력이 너무 좋으면 안 돼요. 단순하면 운동선수 할 수 있어요.(웃음)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당시, 모든 언론과 국민은 그를 주목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다섯 번째 올림픽 도전. 당시 33살의 나이로,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는 스피드스케이팅계에서는 환갑이라 불리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도전했던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아쉽게도 1,000m 시합에서 1분 9초 92의 기록으로 9위. 시합이 끝난 뒤 바닥에 드러누워 거친 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누구와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기자회견 당시 고백처럼, 그가 선수로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결국 올림픽 메달은 후배들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밴쿠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후배들은 한결같이 그 공을 이규혁 선수에게 돌렸다.

시합에선 경쟁 상대나 다름없는 후배들에게, 스케이팅 기술부터 정신 자세까지 자신의 노하우를 기꺼이 나눠주면서 후배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모태범 선수는 “규혁이 형은 나의 우상이다.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줬고, 내가 쓰는 주법도 형한테서 배운 것”이라고 말할 정도. 그래서 지인들은 그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 ‘대인배’라 부른다. 시합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그가 있었기에 후배 선수들에게 메달의 영광이 있었다”며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라며 존경과 경의를 표했다.

사실 국민들은 밴쿠버 올림픽 이후로 메달을 떠나 이규혁 선수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네티즌의 투표로 국민 감동 금메달도 받으셨잖아요.

진짜 너무 감사했어요. 공항에 수많은 취재진과 팬들이 나와 계시는데 어안이 벙벙한 거예요. 올림픽 메달을 제일 중요시하는 이유가 그 대회를 많은 사람들이 보고 기억하기 때문인데 그런 면에서 저는 올림픽 메달 못지않은 과분한 걸 얻었다고 생각해요. 선수는 무조건 결과로써만 평가받는다고 후배들을 독려했었는데, 노력에 박수를 쳐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동받았죠.

밴쿠버 올림픽을 위해 굉장히 열심히 준비했었죠?

스스로 생각해도 뿌듯할 정도였죠. 그때는 뭐, 몸을 칼로 찔러도 안 들어올 정도로 단단하게 준비했고요.(웃음) 올림픽 우승 후보란 얘기를 듣고 싶어서 4년간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올림픽이 가까이 왔을 때도 우승권에 있었어요. 그 시즌 최고 기록도 갖고 있었고, 외국에서도 제 이름이 거론됐었죠. 아, 계획대로 왔구나.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만 주는 메달이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먹고 자고 뛰고, 어떻게 쉬고, 누구랑 무슨 얘기를 하고, 지금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지 같이 어울리는 시간이 필요한지 이런 것까지도 다 계획 안에 있었죠. 그렇게 혼신을 다했기 때문에 올림픽이 끝났을 땐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나는 여기 지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했어요. 올림픽을 계기로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2011년 네덜란드 헤렌벤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스프린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한 이규혁(가운데)이 준우승을 차지한 모태범(왼쪽), 3위를 차지한 샤니 데이비스(미국)와 함께. 사진_연합뉴스

작년에는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셨는데요.

어머니와 동생이 피겨 선수다 보니까 어릴 때부터 피겨가 굉장히 궁금했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제 동생 때문이에요. 각자 선수 생활을 하다 보니까 제 마음은 안 그런데, 어떻게 보면 멀어졌다고 해야 하나? 어렸을 때는 되게 친했는데 어느 순간 저는 터프한 스포츠를 하고, 동생은 섬세한 스포츠를 하면서 약간의 차이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섭외가 왔을 때 첫 번째 조건이 동생이 날 가르친다면 하겠다,였어요. 만만하게 보고 처음엔 연습도 안 했어요. 스케이트 선수가 연습하는 게 웃기잖아요. 근데 그렇게 못 탈 줄이야.(웃음) 그 뒤로 낮에는 스피드스케이팅을 하고, 밤에는 피겨스케이팅을 탔어요. 시즌 때처럼 살이 쫙 빠질 만큼 되게 힘들게 했어요.

남다른 예능감이 돋보였습니다. 예능에 출연하며 느끼신 게 있다면요.

처음엔 긴장했었어요. 민망함, 쑥스러움도 있었죠. 창피하지 않게끔만 하자 했는데 나중엔 재미있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 덕분에 인지도가 높아졌죠. 또 얻은 게 있다면 동생하고 많이 가까워진 거예요. 피겨가 어렵다는 걸 느끼면서 ‘아, 내 동생이 대단한 피겨 선수였구나’를 알게 된 거죠. 피겨는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못 따니까, 무시하는 맘이 있었거든요. 형으로서 정말 실수를 했구나, 동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였는데, 나도 선수이면서 보이는 걸로만 판단했구나. 동생한테 미안했어요.

스케이트를 타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이 있다면요.

어릴 때는 단순하게 내가 하는 게 최고의 스포츠고 올림픽을 우승함으로써 최고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패도 하면서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제가 만약 어린 나이에 올림픽 메달을 땄다면 그런 것들을 모르고 지나쳤을 거예요.

스케이트를 통해 뭔가 얻거나 생각하기 전에 일찌감치 은퇴해서 다른 일들에 실패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고, 인격적으로 많이 무너졌을 거 같아요. 우승은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그렇게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오랜 스포츠 선수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됐죠.

이규혁 선수에게 스케이팅이란 무엇인가요?

제 삶이죠. 기억도 못 할 어린 시절부터 탔고 지금도 타고 있고, 다른 건 모르니까요. 힘들 땐 하루에도 몇 번씩 저한테 얘기해요. ‘너 왜 이거 하고 있냐?’ 그럼 ‘왜? 좋아하잖아’ 하고 답하죠. 해마다 다른 거 같아요. 작년의 우승과 지금의 우승은 다르고. 매번 상황이 올 때마다 저는 되게 간절히 원했고, 그래서 그걸 얻었을 때 성취감이 컸던 거 같아요. 그런 순간들이 제겐 되게 행복한 시간인 거죠.

그는 현재 3월에 열리는 월드컵 파이널과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를 목표로 훈련 중이다. 똑같은 트랙을 수십 번 수백 번 돌면서 그는 생각한다. 처음 스케이트를 탔던 순간의 겸허함, 우승했던 순간의 환희와 기쁨, 세상에서 제일 빠른 선수가 되고 싶었던 열정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은 결과에 상관없이 선수들의 노력에 아낌없이 박수를 쳐준 사람들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한마음이 되어 언제나 응원해주던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그것이 그를 오늘도 달리게 한다. 그것을 잊지 않는 선수이기에, 그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챔피언이다.

이규혁님은 1978년생으로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인 아버지 이익환씨와 피겨 국가대표 출신 어머니 이인숙씨 사이에 태어나 스케이트를 자연스레 접했으며, 13세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현재까지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해오고 있습니다. 2007년 장춘동계아시안게임 금메달,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4회 우승, 2011년 세계선수권 우승 등 수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그가 세운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통산 4회 우승은 아시아에선 그 누구도 세우지 못한 대기록으로, 그의 열정적인 스케이트 인생을 말해줍니다.

나는 누구인가요? 나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진짜 나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들입니다.

 

나는 소방관이다

신동철 35세. 서산소방서 119구조대

“몸 조심해야 돼.” 출근할 때면 아내는 늘 그렇게 이야기한다. 언제나 위급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이 소방관의 일이다.

“그래, 알았어.” 아내를 안심시키지만, 막상 위급한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 몸을 사릴 겨를이 없다. 그냥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한다. 몸이 먼저 앞선다고 우리 구조대에서는 나를 행동대장이라고 부른다. 사실 구조 현장에서 내 안전을 위해 이것저것 따지면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리고 현장에서 몸을 사리면 오히려 더 큰 부상을 당할 수 있다.

성경에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고, 살려고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어쩌면 우리 구조하는 데도 맞는 말일지 모르겠다. 이 힘든 상황을 이겨내야겠다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구해내면, 다음에 또 같은 상황에서 나만의 노하우가 쌓이고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2004년부터 그동안 1,000번이 넘는 화재 현장과 구조 현장에 출동했다. 그리고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힘을 합쳐 구해냈다. 정말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몇 년 전, 부탄가스 공장에 화재가 났을 때다. 화재 진압 도중 가스통이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도망갈 수는 없었다. 불을 꺼야 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그것이 자동적인 소방관의 본능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작년 3월, 가야산 산불 진압에 나섰을 때였다. 산불이 크게 나서 비번이던 나도 긴급 출동되었다. 그런데 진화 작업을 하던 소방 헬기가 저수지로 추락했다는 속보가 들렸다. 급하게 달려갔는데, 헬기는 이미 두 동강 나 있었고, 저수지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말 급박한 상황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물속으로 바로 들어갔다. 솔직히 구명환을 가지고 들어가야 하지만 그것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차가운 물살을 헤치고 열심히 헤엄을 쳤다. 한 명을 구조하고, 다시 동료와 함께 나머지 한 사람을 가까스로 구해왔다.

이 일을 계기로 작년 말, 최고영웅소방관으로 선정이 되었다. 민망했다. 나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공적을 세우신 분들이 많은데, 너무 과분한 상을 주신 것이다. 누구나 그 상황이었다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묵묵히 맡은 역할을 다하는 대한민국 소방관 3만7400명 모두가 영웅소방관이라 생각한다.

소방관이 되고부터는 매일 운동을 한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구조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아주 위험한 상황을 경험하고 나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특히 사망자가 생길 경우, 우리가 조금만 빨리 출동했다면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사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소방 환경이 열악한 편이다. 하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면 모두가 목숨을 걸고 출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노력하는 만큼 우리 후배들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리라 믿는다.

하면 할수록 소방관은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 어렵다 하며 피하는 일을 우리가 한다. 위험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몇 배의 행복과 보람이 있다. 사람을 위급한 상황에서 구한다는 건 정말 멋지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아들이 태어났다. 아내는 반대하지만, 나중에 아들이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후원해주고 싶다. 아들에게도 한 생명을 구하는, 돈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나는 천생 소방관이구나 싶다.

 

신철 작 <여름밤의 꿈> 캔버스 위에 아크릴. 31.8×31.8cm. 2011.

 

나는 위기의 인문학도다

윤보라 25세. 취업 준비생.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

처음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을 다닐 때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든 처음 본 사람들이든, 내 전공을 듣고 나서는 백이면 백 이런 말을 했다.

“국문학 배워서 뭐 먹고살 건데? 요즘 인문학 전공해서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살아?”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머릿속에 생각이 있어도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기 일쑤였다. 교양 수업으로 평소 관심 있었던 철학이나 종교학, 예술사 수업을 선택해 들을 때도 주위 친구들은 배부른 생각 그만하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실용적인 과목을 들으라 충고했다.

나 역시 때때로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기도 했다. 정말 그런가? 내가 생각을 잘못한 걸까? 늦기 전에 전과를 해볼까?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교양을 찾아볼까? 그러면서도 인문학 관련 수업과 인문학 서적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홀로 마운드 위에 서 있었다.

2회 초, 내 인생은 너무 일찍 홀로 감당하기 힘든 위기를 맞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머리를 싸쥐고 쓰러지셨다. 어머니께서는 건강이 나빠져 교외의 병원에 요양차 입원 중이셨다. 남동생은 고3 수험생이었다. 나는 대학교가 있는 아산에서 집이 있는 안양까지 매일 통학하며 공부를 하고, 집안일과 가족을 돌봐야 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내적인 상황이었다. 외면하려 해도 현실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 환경에 대한 열등감 등이 한 번씩 쓰나미처럼 나를 덮쳤고, 그럴 때마다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서럽게 울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있는 힘을 다해 전력투구했지만 단 하나의 공도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가지 않았다. 불행이라는 견고한 타자는 볼을 골라내며 조소를 흘렸다. 9회 말까지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순간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타자를 향해 데드볼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마운드 위에 서 있다. 다시 홈런을 맞는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 2회 말을 향해 가고 있다. 더 이상 불안해하지도, 서럽게 울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어설프게 동조하지도 않는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지금 이렇게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 위기와 상관없이 꿈꿀 수 있게 한 것은 4년의 대학 공부에서 쌓은 인문학적 정신 때문이라고. 강의 시간에 배웠던 인문학 속에는 내 고통을 후벼 파는 정직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 안에 깃들어 있었던 참다운 인문정신은 얼기설기 대충 꿰매어 놓은 내 곪은 상처를 날카로운 메스로 터뜨리고 그 내용물을 바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진정한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많이 아팠지만 참 열심히 공부했다. 인문학 수업이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었다. 어느 순간 머리가 서서히 차가워지면서 다시 스트라이크 존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인문학 전공해서 뭐에다 쓸 수 있냐’고 말한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는 없는 시대, 너도나도 실용과 스펙을 외쳐대는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많은 친구들이 쫓기듯 살고 있고, 작은 상처에도 크게 아파하며, 쉽게 좌절하고, 어설픈 자기 연민이나 위로 속에 빠져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잃어간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 나는 내가 더 이상 위기의 인문학도가 아님을 느낀다.

고통과 위기가 없는 삶은 없다. 내 키를 훌쩍 넘기는 불행을, 위기를, 나는 잡아낼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문학은 불행과 위기의 순간을 담담하고 유연하게 관찰할 수 있는 힘을 주었고, 흔들리지 않는 마인드 컨트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삶을 살면서 위기가 서 있어도, 불행이 서 있어도, 직구를 던질 수 있는 힘을 길러준 것이다. 이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스펙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그 고통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통찰과 지혜를 겸비한 나는, 기회의 인문학도다.

 

신철 작 <기억풀이_ Be Happy> 캔버스 위에 아크릴. 45.5×53.0cm. 2010.

 

나는 발명가다

현태섭 19세. 충남 논산시 연산면. blog.naver.com/xotjq2006

중학교 시절, 나는 소위 ‘문제아’였다.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말썽을 피웠다. 가정적으로 불우한 환경의 영향이 컸다. 어떤 것도 하기 싫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처음엔 그런 생활이 이어졌다. 어떤 아이와 시비가 붙어 싸웠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는 아이들과 싸우고 싶지도, 학교에 부모님이 소환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또 그동안 내가 힘들게 했던 나의 가족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었다. 더 이상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혼자 방 안에서 울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생각났다. 당시 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물건 같은 것을 만들어, 아이들을 괴롭히곤 했었다. 그래서 많이 혼났지만, 선생님은 한편으로 내 창의성을 인정해주셨다. 내가 철이 든다면, 그 손기술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발명 동아리에 들어갔다. 처음 과제는 주변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발명품을 개발해오라는 것이었다.

어떤 게 좋을까 생각하던 중, 우연히  바람이 가득 차 날아가고 있는 비닐 봉투를 보게 되었다. 그때 ‘아, 비닐 봉투나 바구니가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늘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스타킹과 펀칭기, 고무 조각, 작은 갈고리 등을 이용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팽창의 정도를 정할 수 있는 바구니를 만들어냈다. 그것을 본 동아리 스승님은 극찬하셨고, 지역 공동 발명 영재에 지원해보라 하셨다. 그렇게 영재 시험에 합격한 이후, 나는 계속 발명을 해나갔다.

책상 속에 넣어둔 교과서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일반 책상을 보안 책상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장치, 점선을 쉽게 그릴 수 있는 필기구 등 20여 종류의 생활 발명품을 만들었다. 가끔 코피를 쏟기도 하고 몸살에 걸리기도 했지만 ‘발명’을 하는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그 결과 46건의 산업재산권(특허, 실용신안, 디자인) 실적과 현재 아직도 대기 중인 1,400여 개의 아이디어가 있다. 발명을 한 2년 동안, 발명 대회에서 많은 수상도 했다.

나는 더 큰 세계로 진출을 시도했다. ‘마스터 현’이라는 닉네임으로 발명 블로그를 운영한 것을 시작으로, 현역 발명계 사업에 지원하여 한참 위의 선배님들과 함께 강의 등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정말 현역 발명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발명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하여 현재는 현역 발명가로써 활동 중에 있다.

나는 발명가다. 나는 열정적으로 기존의 것을 새롭게, 더 유용하게, 행복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을 생각한다. 그렇게 발명을 할 때 나는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발명은 ‘모두의 꿈과 희망, 행복을 만드는 창조’라고 생각한다.

발명을 함으로써,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고 지금은 내일을 바라보는 내가 되었다. 발명은 ‘문제아’라는 손가락질을 칭찬과 격려로 바꾸어주었다. 이제는 나의 재능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발명품을 만들고자 한다.

누구나 각자의 어려운 시절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이것을 역경으로부터 이루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래전, 강의 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자들이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그들은 수많은 고난과 좌절을 겪는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라. 좌절과 고난의 눈물을 흘린 사람이야말로,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

 

신철 작 <date> 캔버스 위에 아크릴. 70×140cm.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