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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에서 한국문화원 ‘사랑채’ 운영하는 길동수, 박은미 부부

사라진 잉카문명의 마지막 걸작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여행가라면 꼭 들른다는 페루의 쿠스코.
한국에서라면 꼬박 하루를 넘게 날아가야 하는 페루 쿠스코에도 한국의 문화를 전하는 곳이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까사 꿀뚜랄 뻬루 꼬레아(Casa Cultural Peru-Corea)로 불리는 한국문화원 ‘사랑채’입니다.   
취재 문진정

이 문화원을 만들고 운영해온 사람은 한국인 길동수(50), 박은미(39) 부부입니다. 2004년 당시 한국에서 ‘잘나가던’ 도예가와 도자기 회사 직원이었던 이들은 한국국제협력단의 봉사대원으로서 페루의 쿠스코에 오게 됩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쿠스코의 코라오 마을 사람들은 농사짓고 가축을 키우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가진 잉카 문양에 한국의 도자 기술을 결합하여 훌륭한 도자기를 생산한다면 현지인들에게 더 나은 생활 여건을 마련해줄 수 있었지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 타문화에 대한 불신이 큰 걸림돌이었지요. 그럴수록 길동수, 박은미 씨는 끈질기게 설득하고 질 좋은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했고,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결국 1년 만에 원주민들은 마음의 문을 열었고 두 사람은 코라오 도자기 학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서로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린 두 사람은 부부의 연도 맺게 되지요.

이후 이 부부는 열심히 일군 도자기 학교를 현지인들의 손에 넘겨준 뒤 현지인의 자립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리하여 현지 여행사와 한식당 등을 운영하며 모은 수익으로 작년 가을 한국문화원 ‘사랑채’를 열었습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매매 등에 노출된 페루의 청소년들에게 건전한 놀이 문화와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지요.

때마침 페루에도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국 문화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었고 페루를 여행하는 한국인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를 가르치고, 중창단을 만들며 사회 복지도 실천하는 문화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오후에는 한글, 요리 수업에다 아이돌 그룹까지 공부하느라 바쁜 동수씨 부부는 주말마다 손수 빵을 만들어 노숙자에게 나눠주는 일도 7년 넘게 해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것은 단순한 한국의 문화를 넘어 함께 나누는 한국인의 따뜻한 정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기에 하루하루 더 열심히 하게 된다는 동수씨는 코라오 도자기 학교가 그랬듯 문화원도 현지인들에게 온전히 돌려주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합니다. 문화원에서 배출한 학생들이 직업을 갖고, 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은 보호받으며 공부방, 놀이방, 문화센터로 작게나마 사회 복지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날을 위해 오늘도 동수씨는 일을 벌이고, 은미씨는 묵묵히 뒷바라지를 하며 알콩달콩 즐거운 사랑채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열심히 꿈을 갖고 노력하면 다 되더라고요. 제가 가진 능력은 여기 아이들하고 나눠 쓰면 되고 이 아이들이 가진 여유와 행복한 마음을 제가 또 배우고요. 그렇게 함께하는 게 세상살이인 거 같아요.”

2004년 한국국제협력단의 봉사단원으로 페루의 쿠스코를 방문한 길동수 박은미 씨는 2007년 결혼한 뒤 2009년부터 민박집, 한식당을 운영해왔습니다. 현재는 아들 도영(2)군까지 세 명이 함께 쿠스코에 정착하여 한국문화원 ‘사랑채’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 되어 함께 살기 Coexist코이그지스트!

동시에[같은 곳에] 있다, 공존(共存)하다 | 이 간단한 단어 안에 우리가 느끼는 무수한 의미들.

‘미래는 이타주의자의 것이며, 이제는 이타주의를 연습해야 할 때다.’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의 저자 슈테판 클라인의 말입니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진다고 하는 이 시대에, 그는 우리 안에는 아무 대가 없이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이타성이 있다는 것을, 결과적으론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으로 돌아온다는 진리를 확인시켜줍니다. 이는 곧 그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전하는 하늘의 메시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 위에 하나로서 존재합니다. 혼자만 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이제는 마음을 모아 함께 살 때라고, 이제 그런 시대가 왔다고 하늘은 말합니다.

Coexist(코이그지스트)!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함께 사는 것 내 가짐이 없어져 하나가 되는 것 너 나가 없어지는 것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 움츠린 사람에게 먼저 손 내밀어주는 것 미움이 없어지는 것 원수가 없어지는 것 시기, 질투가 없어지는 것 이기심을 버리는 것 정신을 깨워주는 것 뒤처져 가는 사람과 함께 속도 맞춰주는 것 비난하지 않는 것 그 사람 입장에서 이해하고 들어주는 것 그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힘들 땐 도와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 코이그지스트coexist를 떠올리며

낯선 여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어떻게 지내느냐 묻는다. 그리고 당신이 대답하면 그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50유로가 든 봉투를 내민다. 그 돈을 마음대로 쓰되, 하루 내에 다 써야 한다. 이번에 그 여인은 이웃집을 찾는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돈 봉투를 건넨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건이 다르다. 그 돈을 기부든, 누군가에게 밥을 사주든, 선물해야 한다는 것.

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해졌을까? 대부분 마음대로 쓰는 편이 더 행복할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론 남을 위해 돈을 쓴 사람들이 더 기분이 좋았다.

이 이야기는 캐나다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던의 실험 내용이다. 이번에는 이 심리학자가 600명의 미국인을 선별하여 수입 중 얼마를 선물이나 선행에 지출하는지, 얼마나 행복한지 물었다. 이번에도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더 행복했다.

신경심리학자들의 실험 결과를 보면, 피실험자들에게 가진 돈의 얼마를 선의의 목적에 기부할지 결정하라고 부탁하고 그들의 뇌 활동을 측정했더니 돈을 기부하는 순간, 선물을 받고 기뻐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보상 시스템)가 활동을 시작했다. 가진 것을 나누면 맛난 음식을 먹거나 예상치 못한 돈을 선물로 받았을 때와 같은 길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선행을 결심할 때는 그 신호가 사랑의 호르몬인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분비되는 부위에까지 간다. 그 부위는 상대가 감사를 표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을 때에도 반사적으로 활동을 개시한다. 타인이 제3자에게 무언가를 받는 광경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타인의 행복을 보며 느끼는 순수한 행복 역시 앞서 설명한 보상 시스템 덕분이다. 뇌 촬영을 해보니 뇌 활동이 강한 피실험자일수록 나중에 자기 것을 나누어준 비율도 높았다. 그러니 그들은 단지, 자신의 선행으로 상대가 행복해진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낀 것이다.

 –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슈테판 클라인, 웅진지식하우스) 중에서

모든 존재가 자기 안에 있고 자기가 모든 존재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 힌두교 경전 <아샤 우파니샤드> 중에서

남극의 겨울은 가혹하다. 영하 50도. 눈과 얼음 외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이곳에 황제펭귄이 있다. 1미터가 넘는 키에 40kg의 체구, 펭귄 중에 가장 크고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 이들은 말 그대로 남극의 황제들이다.

차가운 대륙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속 1~2백 킬로미터의 눈 폭풍이 불어온다. 눈 폭풍이 서식지를 덮치기 직전 눈치 빠른 몇 녀석들이 목을 길게 빼고 소리를 낸다. 그 순간 허들링이 시작된다. 허들링(huddling)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을 밀착하는 행동이다.

두 발 위에 알을 품은 채 수천 마리의 펭귄들이 서식지의 중앙을 향해 모여든다. 잠시 후 1㎡ 안에 10마리가 들어설 정도로 빽빽한 대오를 이룬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눈 폭풍을 견디고, 그렇게 두 달을 버티면 사랑스런 황제펭귄 새끼들이 탄생한다.

황제펭귄의 허들링이 감동적인 이유는 양보였다. 바깥보다 10도 정도 온도가 높은 허들링의 중앙에서 몸을 덥힌 황제펭귄들이 자리를 내주며 밖으로 이동하고 바깥쪽에서 눈 폭풍을 온몸으로 막아낸 녀석들은 안쪽으로 들어온다. 마치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움직인다.

‘아, 난 몸 좀 더 녹이고 나가야지’ 하며 잔머리를 굴리는 펭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대한 허들링의 행렬에서 아무도 망설이거나 주춤거리지 않았다.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수천 수만 년 동안 남극의 겨울을 견디면서, 이 혹독한 환경 속에서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를 배려해야만 한다는 것을 조류인 그들이 알고 있었다. 남극 대륙 40여 개의 서식지에서 이렇게 한겨울에 새끼를 낳아 기르며 살았었던 생명체는 강하고 사나운 동물이 아니라 서로 배려하고 협력하며, 변화에 대처한 펭귄이었다.

우리 촬영팀 세 명도 허들링으로 추위를 견뎌냈다. 눈 폭풍이 불어오면 황제펭귄에게서 배웠듯이 온몸을 붙이고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 김진만 / MBC PD. <남극의 눈물> 제작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 이웃이 너와 같기 때문이다.

 – 마르틴 부버

‘군인’같던 우리 형 ‘애교남’되다

곽민수 26세. 대학생. 부산시 해운대구 우2동

나랑 세 살 터울인 형은 어렸을 때부터 누가 봐도 바르고 바른 에프엠 자체, 원리원칙주의자의 전형이었다. 군 입대도 하기 전에 이미 철두철미한 ‘군인 스타일’로,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고 낭비라고는 전혀 없으며 공부만 열심히 하는 듬직한 장남이었다.

형이 대학에 갈 때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형의 곧고 바른 성격은 더 철저해졌다.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스스로 학사장교의 길을 택했고, 4년간 학교에 다니면서도 조금이라도 엇나간다거나 해이해진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모태군인’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갔다.

그에 반해 유순하고 자유스러웠던 나는 형의 그런 행동과 말이 답답하기만 했다. 형은 농담도 안 받아주고 애교도 없고, ‘짜면 물 붓고 싱거우면 소금 치는’ 곧이곧대로의 성격에다가, 꼭 필요하지 않은 곳에는 돈을 하나도 안 쓰니 재미도 없고 마트에서 과자 하나 사 먹는 데도 눈치를 봐야 했다.

형은 나의 조그만 잘못에도 “왜 그렇게밖에 생각 못 하냐” “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냐” “네가 그렇게 하니까 안 되는 거다”라며 가차 없이 질책했고 형의 차가운 말투 때문에 내 속은 뒤집어지고 기는 팍팍 꺾였다. 하나뿐인 사춘기 동생이 실수도 할 수 있고 좀 놀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융통성이 없는지, 20년을 같이 산 형제이지만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대학 선배의 권유로 마음수련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군대에 가게 됐다.

전역 후 형을 봤을 때 솔직히 좀 놀랐다. ‘헐~ 군인의 카리스마는 어디로 간 거지?’ 그 까칠했던 표정 대신 웃음이 많아지고 관대해지고 밝아 보였다. 착해야 한다, 아껴야 한다 등등 나에게 훈계도 하지 않았다. 남한테 절대 피해 안 끼치고 손해도 안 보았었는데 사람들한테 너스레를 떨며 부탁도 곧잘 하고 식사도 대접하고 특히 부모님께는 없던 애교도 마구 부렸다. 오리지널 부산 사나이라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편하고 자유로운 형의 모습에 나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군대에 있는 2년 동안 이제는 착한 동생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형의 권유대로 마음수련 대학생 캠프에 참가해 보기로 했다. 수련을 하는 내내 형만 떠올랐다. 형이 나한테 잘 못해줬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순전히 내 기분 때문에 형의 진심을 모르고 있었다. 형은 항상 내 옆에서 쓴소리, 좋은 소리를 하며 내가 잘되도록 도와준 것밖에 없었다. 집안 장남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며 가족을 위해, 주기만 하는 형이었는데 너무나 미안했다.

형은 그 후에도 학업과 마음수련에 열중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뒷바라지를 다 해주었다.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며 나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형한테 받은 거 어떻게 다 갚느냐고 물었을 때도 “나한테 갚을 생각 하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해주면 돼”라고 해 나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취직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것보다 무엇이든 내가 잘할 수 있는 거, 좋아하는 걸 해보라며 적극적으로 응원해준다.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는 형, 나도 형처럼 되고 싶다.

“형, 덕분에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생겼어. 형이 나한테 해준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살고 싶다. 누구보다도 나한텐 형밖에 없는 거 알지? 정말 고마워.”

마음수련 그 끝자리에 이르다, 심윤정씨

마 음 수 련     끝 자 리 에  이 르 다  심 윤 정 씨

 인터뷰 김혜진 사진 홍성훈

사람들은 건강해지기 위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마음을 닦는다. 그러한 시간들이 지극하게 흐르면 실제 건강해지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가 오직 거기까지일까. 마음수련에서는 ‘마음수련은 인간마음을 우주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라 한다. 즉, 인간으로 살면서 쌓아온 온갖 마음을 버리고 순수우주의 의식, 영원불변의 진리인 우주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지만 오직 마음을 닦고 버리는 것에만 매진해오는 사이, 참으로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상과 하나 되어 살고 있다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들은 어떠한 날들을 지나온 걸까. 현재 마음수련 교육원에서 4과정 수련 안내를 도와주고 있는 심윤정(44)씨를 만나보았다.

심윤정씨는 1969년 경남 울산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엄격한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평소 자유로운 삶을 동경해왔다. 부모님은 그녀가 어떤 옷을 입고, 화장을 어떻게 하고, 누구를 만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 삶이 답답했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간 그녀는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학업에 정진하는 남편을 보고, 저 사람과 같이 살면 자유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했고, 그녀는 한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한국 돈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책을 통째로 다 외울 정도로 하루 19시간 이상 악바리처럼 공부한 덕분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장학금도 받았다. 아이를 낳고도 친정에 아이를 맡긴 채 공부에만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남편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갔다.

6년간의 중국 유학 생활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온 뒤 시댁에서 지냈지만, 남편과의 관계는 여전히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갑자기 그녀와 아이를 남긴 채 외국으로 떠나 버렸다. 그녀는 자신을 힘들게 한 남편이 밉고 원망스러워 매일 눈물로 하루를 보냈고, 불면증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다. 가족이 반대한 결혼을 했기에 내색조차 할 수 없었던 시간들…. 답답한 마음에 1년 반 동안 늦은 밤이면 산에 올랐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생겼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러던 1997년 그녀는 마음수련을 하게 된다.

처음 마음수련을 할 때의 심정이 어떠셨나요?

너무나 당당했죠. 나는 늘 착하고 바르게 살았다, 세상이 이상해서, 잘못된 인연을 만나 내 인생이 꼬였지만 이 마음만 추스르고 나면 다시 사회에 나가 보란 듯이 잘 먹고 잘살아야지, 하는 마음이었어요. 아, 그런데 마음수련엔 정확한 방법이 있었어요. 그 방법대로 하다 보니 나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보이더군요. 차츰차츰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우주 입장에서 보게 되니, 그렇게 교만하고 위선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남이 잘되면 시기, 질투하고, 착한 척 바른 척하면서 살았던 게 나였더라고요. 엄마를 십 년 정도 병수발했었어요. 엄마 앞에서 잘하는 척하고, 돌아서면 왜 나를 힘들게 하나 원망했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 그때 진짜 많이 울었어요. 어쩜 이렇게 자기밖에 모를까…. 너무나 부끄러워서 한 달간 밥을 못 먹었어요. 밖에 나갈 수가 없더라고요. 하늘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 인간마음들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마음을 버리는 과정이 참으로 진실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 볼수록 그 ‘나’란 존재를 반드시 버리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더 커지더군요. 늘 우주 입장에서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마치 몰래카메라가 붙어 있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보면서 버려나갔죠. 그렇게 버리고 버려도, 언제나 저 밑바닥에서 먼지 티끌처럼 올라오는 마음들은 있어요. 가령 분명히 누군가가 계속 간섭하고 괴롭히면, 내 맘 한구석에서 “네가 그렇게 잘났어?” 따지고 들거든요. 하지만 결국 그런 모든 마음도 다 ‘내가 잘났다’는 교만함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100% 인정했을 때 나를 다 버릴 수가 있더라고요.

‘나를 버린다’는 말이 참으로 막연합니다.

몇 년 전에 저의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남는 걸 보면서 죽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없는 거네, 나도 이렇게 살다가 가는구나,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으면 이렇게 없어지는 것인데, 그걸 위해서 평생 아등바등 살아간다는 건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나를 버린다’는 건 그 허무한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진짜 참의 세상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산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마음을 우주마음으로 바꾸는 거라고 하지요. 나한테 묶인 마음이 아니라 우주마음에서 보면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참으로 버려야 할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수련을 하신 후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수련을 안내해 오셨지요.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내가 살면서 가져왔던 수많은 마음들, 돈에 집착하고, 사랑에 목매고, 체면을 중시하고, 명예를 좇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잘난 척하고, 가족을 원망하고…. 그 수많은 마음들을 하나씩 버려가면서 느꼈던 그 희열과 통쾌함, 나로부터 벗어날 때만 느낄 수 있는 참자유. 내가 그동안 직접 겪고 체험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잘 안 버려지면 이렇게 버려보세요, 조금만 더 버려보세요…, 하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저였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수련을 안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몇 배로 처절하게 저 자신부터 봐야 했거든요. 내가 없어야 상대와 하나가 되고, 진심으로 상대의 입장에서 안내를 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매일매일 기도했습니다. 부디 ‘나’ 없이, 진정 우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해달라고. 그러면서 점점 저 사람이 자기를 다 버리고 진리만 될 수 있다면, 저 사람을 위해 내가 모든 걸 바칠 수 있겠다,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되더라고요.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오늘에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굳이 마음수련을 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잠깐 동안 그런 행복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있는 한 상황이 바뀌고 조건이 바뀌면 그새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왔다 갔다 항상 변합니다. 그런 모든 것들에서 다 떠나서 살 수 있는 게 바로 마음수련이에요. 옛날에는 수명을 다해 죽는 것이 죽는 건 줄 알았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 살지 못하고 내 마음세계 안에 갇혀 있었던 것 자체가 생명이 없는 죽음 같은 삶인 것입니다. 그런 나는 버리고 우주마음으로 다시 태어나 재밌게 신나게 살자는 게 마음수련이니, 뭐 밑져야 본전이다, 하고 한번 해볼 만하시지 않을까요.(웃음)

본인은 마음수련 끝자리인, 살아 있는 영혼으로 살고 계시는지요?

네, 감사하게도요. 십여 년을 그렇게 매일매일 신나게 내 마음을 버리다 보니, 어느 순간 정말 한 치의 남음도 없이 나란 존재가 사라지더라고요. 왜 ‘대자유’ ‘대해탈’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말이 딱 이런 거구나, 일체의 마음이 버려진 순간 스스로 알 수 있는데, 아, 어떻게 말로 표현이 안 되네요.(웃음) 중요한 건 우리 인간은 그렇게 됐을 때 비로소 허상에서 벗어나 참 영혼을 지닌 참생명으로서 진짜 삶을 살게 된다는 거예요. 참으로 기쁜 것은, 그것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일체의 마음만 버리면 누구나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전에만 나오는 말인 줄 알았던 인간 완성이 정말 이루어지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도 마음수련 교육원에서 4과정 수련을 안내하고 있으며, 대학생캠프 지도 교수로서 상담과 강의 등에 여념이 없다. 매 순간 어떤 한 사람이 마음을 버렸음을 확인할 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심윤정씨는 부족한 자신이 마음수련을 안내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다고 했다.

“수련을 해서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면 참영혼으로서 영원히 살아 있음이 너무나 확연해집니다. 인간의 마음세계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생명 자체, 이 자체가 ‘나’고 통째로 ‘하나’란 걸 알게 되지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지나온 삶과 인연들, 저를 만났던 모든 수련생들, 그리고 마음수련에 감사드립니다.”



| BLOG 심샘의 힐링 상담소 

돼지고기쑥갓덮밥,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싱글의 숙명이란, 맘먹고 마트에 가도 파 한 단, 양파 한 망 사기가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 딱 두 가지 재료로만 사서 차려 먹고 음식물 쓰레기는 최대한 버리지 않는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 둘 나만의 요리를 개발해내고 싱글들의 고충을 들어보며 아이디어를 주고받은 결과, 이 땅의 모든 싱글, 1~2인 가족, 자취생, 주말에만 요리를 만들어 먹는 회사원을 위한 레시피를 만들게 되었다.

모든 싱글들이 건강하게, 간단하게, 알뜰하게, 맛있고 균형 잡힌 만찬을 즐겼으면 한다. 문인영

{ 재료 }

돼지고기(불고기용) 100g, 청주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쑥갓 50g, 다시마 육수 1/2컵, 고추장 2/3큰술, 고춧가루 1/3큰술, 조청 1/3큰술, 전분물 1큰술(전분가루 1/2큰술, 물 1/2큰술), 밥 1공기

{ 만들기 }

① 돼지고기는 청주와 다진 마늘로 재운다. 쑥갓은 4cm 길이로 자른다. ② 팬에 고기를 넣고 볶는다. 반 정도 익으면 다시마 육수와 고추장, 고춧가루, 조청을 넣고 끓인다. ③ 고기가 익으면 전분물을 고루 풀어 농도를 조절한다. ④ 밥 위에 쑥갓과 고기를 올려 먹는다.

single’s tip _ 쑥갓의 향이 고기의 잡내를 잡아준다. 전분물을 빼고 조리하면 촉촉한 돼지고기쑥갓덮밥을 맛볼 수 있다.

문인영님은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현재 푸드스타일리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다양한 잡지와 방송매체를 통해서 메뉴 개발과 스타일링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 <싱글만찬> <다이어트 야식>이 있습니다.

빅 아이 니들, “바늘에 실 꿰기, 어렵지~ 않아요”

이름은?

바늘구멍을 영어로 표현하면 바늘의 눈이다. 큰 바늘구멍이어서, 빅 아이 니들(big eye needle)이라 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재학 시절 유니버셜 디자인(Universal design) 과제를 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유니버셜 디자인은 모두가 사용 가능한 디자인을 말하는 것으로, 장애인이나 노약자분들도 제약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가 바느질할 때 실 꿰기의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대학교 재학 시절, 디자인 혁신이란 주제를 갖고 소재 측면에서 많이 접근해 보았다. 같은 디자인이지만 소재만 변화시켜 적용한다면, 가령 휴대폰이 고무처럼 물렁하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들. 그러다가 우연히 본 맥주 광고에서 맥주병이 바닥에 떨어질 때,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깨지지 않고 통통 튀는 장면을 보았을 때 너무나 통쾌했다. 발상 전환 차원에서 빅 아이 니들 소재를 연구할 때도 그때 본 광고가 상당히 영향을 준 듯하다.

제품의 원리는?

소재는 스프링 스틸(spring steel)로써, 일반적으로 스프링에 사용하는 철 소재와 열처리(후가공)를 달리해서 만들었다. 바늘이 가져야 하는 경질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유연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소재의 전환이다. 사용 방법은 바늘의 뒷부분을 누르면, 바늘 구멍이 커지면서 실을 넣기가 수월해진다.

하고 싶은 말

운이 좋게도 수상을 많이 했다. reddot design award의 concept부문을 수상했고, iF design award에서도 concept 부문 1000 euro prize를 수상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40주년 기념행사 때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신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로 평소의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게 제시한 점을 좋게 봐주신 것 아닌가 싶다. 하지만 아직 상용화는 되지 않은 상태다.

만든 사람 우문형 30세. 디자이너


1박 2일, 가장 그들다웠던 마지막 여행… 이젠 안녕!

드디어 5년 동안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1박2일’의 마지막 회가 방송되었습니다. 마지막 회인 만큼 미션 하나하나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한 제작진의 정성이 엿보이더군요. 41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장국집, 32년째 운영되고 있는 케이블카, 무려 40년 된 정읍의 유일한 영화관까지 모두 과거에서 현재로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온 공간입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황당한 미션을 수행하러 뛰어다녔고, 여느 때처럼 잠자리 복불복 게임을 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날보다 더욱 잔잔하고 평화로웠지요. 마당에서 스태프들과 족구 시합이라도 벌였다면 좀 더 요란뻑적지근한 마지막 게임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좁은 방 안에서 멤버들끼리 서로를 붙잡으러 다니는 평범한 좀비 게임을 했을 뿐입니다.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그 어느 때보다도 소박하고 평범했던 마지막 여행. 어쩌면 가장 ‘1박2일’다운 마무리였습니다.

수고한 멤버들을 위해 제작진이 마련한 선물은 우정 반지였습니다. 똑같은 반지 5개를 저마다 손가락에 나눠 끼고 새삼 밀려오는 감동에 울컥하려는 순간, 그 반지에도 복불복이 숨어 있었다는 반전을 깨닫고 말지요. 24K 순금 반지는 엄태웅이 차지했고, 김종민은 14K, 은지원은 10K, 그리고 특별 주문 제작한 5K 반지는 이승기의 몫으로 돌아갔습니다. 감동이 극대화되는 순간 뒤통수를 치고, 눈물이 흐르려는 순간 웃음이 터지게 만드는 ‘1박2일’ 특유의 코드는 이렇게 변함없이 끝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정직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새벽이 밝아왔습니다. 제작진이 특별히 늦잠을 허락했는데도 멤버들은 저절로 하나 둘씩 깨어나 담담한 표정으로 마지막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오직 은초딩, 은지원만이 조금이라도 헤어짐의 시간을 늦추고 싶어 이불을 다 뺏기고도 떼쓰듯 늦잠을 고집해 보았지만, 피할 수는 없는 이별이었습니다.

막내 이승기는 일찍 일어나서 나영석 PD를 비롯한 스태프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등 아침부터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더군요. 혼자서 머리를 감다가 문득 울컥한 나머지 소리 죽여 한참 울기는 했지만, 형들 앞에서는 의연하게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떠나는 은지원과 이승기는 물론이거니와, 가장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해온 이수근의 슬픔도 무척 큰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울지 않기로 굳게 약속을 했었나 봅니다. 지원과 승기의 눈에 살짝 눈물이 비치려 할 때마다 이수근은 잽싸게 달래더군요.

“지원아, 울지 않기로 했잖아” “승기야, 울지 마. 참아, 참아” 그래 놓고 나중에는 자기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중얼거리더군요. “참았어, 참았어… 가슴을 이겼어!”

그렇게 참으려 애썼지만 모두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고, 합류한 지 1년밖에 안 된 엄태웅도 슬쩍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닦았습니다.

어쨌든 그들의 마지막 여행은 가장 ‘1박2일’답게 마무리되었습니다. 평범하게, 소박하게, 담담하게, 눈물은 감추고 웃음은 드러내며, 언제나 그랬듯이, 내일도 어제처럼, 변함없이 계속될 행복한 여행을 꿈꾸며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마지막 순간을 만납니다. 처음이 있었기에 마지막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처럼 열정적이나 평소처럼 담담할 때인 것 같습니다. ‘1박2일’ 마지막 회처럼 말입니다.

출연진들이 그랬듯이 이제 시청자로서도 평범하고 소박하게 이 이별을 받아들일까 합니다. ‘1박2일’ 여러분,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며 실컷 웃고 함께 즐겼습니다.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사종사색四種思索

사진, 글 김선규

나 는  가 장 家 長 이 다

외줄 타듯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도

식구 생각에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저 분주한 발걸음.

2008년 7월. 서울 여의도 한강 둔치

어 디  일 자 리  좀  없 나

내가 빨리 취직해야
부모님이 덜 고생하실 텐데
동생들도 돌봐줄 텐데

취직만 되면 성실하게
월급의 열 배로 일할 텐데
정말 잘할 자신 있는데
일자리만 생기면….

2009년 3월. 서울 광진구 화양동

서 울 에 서  내  집  마 련 하 기 란

새들이 둥지를 트는 계절,
집 장만에 여념이 없는 까치는,
주차장 좁은 틈에서 제 몸집의 두세 배나 되는
나뭇가지를 물어 나릅니다.

까치집을 지으려면 나뭇가지가 적어도 천 개는 필요하다던데,
도심에 사는 까치에게는
마음에 드는 자리를 정하는 것도,
집 지을 재료를 구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 보입니다.

소중한 새끼들을 길러낸다는 생각에
오늘도 까치는
시멘트로 뒤덮인 도심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닙니다.

2005년 3월. 서울 여의도에서

이 게  웬  떡 이 냐

금강산 구룡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계단 길을 오르자
마침내 비경이 펼쳐졌습니다.
푸르고 맑은 물줄기와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머릿속의 번잡함도 함께 날아가는 기분이었지요.

발밑 바위 위에서 조그만 다람쥐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온통 바위투성이에 소나무만 듬성듬성 있는 이곳에는
다람쥐가 먹을 것이 별로 없을 것 같았습니다.
비상식량으로 챙겨두었던 떡 한 조각을 던져주었습니다.
다람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입에 물고 달아났습니다.

험준한 산,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하게 금강산을 지키는 다람쥐야,
떡으로 맺은 우리 인연 금강산처럼 아름답게 지켜나가자.

2004년 7월. 금강산에서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야생화가 말을 걸다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지만 강하고, 단아하지만 우아한 매력을 지닌 꽃이 바로 우리의 야생화다. 그렇게 우리 꽃에 매료당한 지 30여 년, 그동안 산과 들을 헤매며 숨 막히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이른 봄, 눈 속을 뚫고 나오는 새싹들이 나올 무렵이면 어느덧 내 발길은 산과 들로 향했다. 꽃에는 제 스스로 열을 발산하면서 언 땅을 녹이는 위대함이 있다.
바로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봄은 찾아온다.   사진, 글 김정명

두메자운 Oxytropis anertii Nakai 고산준령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이름에는 산속에서 자란다 하여 ‘두메’, 구름 속에서 핀다 하여 ‘구름’이라는 단어가 붙은 꽃들이 많다. 이들 식물들은 대부분 고도가 높은 곳에서 자라서 강한 바람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바람의 저항을 줄이는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줄기에 잎이 거의 없고, 잎 모양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그래야 바람을 통과시키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줄기 역시 바람의 저항에 견딜 수 있도록 가늘고 길다.

1986년 어느 날,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산에 올라 잠시 쉬고 있을 무렵 아주 작고 앙증맞은 흰 꽃을 보게 되었다. 너무 예뻐서 꽃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면서 어지러웠다. 작은 꽃들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향기가 진한 법인데, 그걸 전혀 몰랐던 것. 그 꽃은 바로 ‘은방울꽃’이었다.

그때부터 우리 꽃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꽃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야생화 이름을 알기 위해 일일이 식물도감을 찾아보며 외우고 꽃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꽃에 대해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게 너무 많았고, 자료를 찾아봐도 알 수 없는 우리 꽃들이 너무 많았다.

처음 산에 가면 야생화가 보이지 않는다. 힘들어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귀가 트이고 바람 소리가 들린다. 그 후 하늘과 햇빛과 나뭇잎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발밑의 야생화가 보인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결하지 않으면 꽃의 순수한 자태를 포착할 수 없다. 동시에 조물주가 빛과 바람을 허락해줄 때, 그때 비로소 꽃이 말을 걸어온다. 이제 나를 찍으라고.

보라색 동강할미꽃 Pulsatilla tongkangensis Y. Lee 할미꽃은 어쩐지 지친 모습으로 느껴진다. 해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꽃을 피우기 때문일까? 그러나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고개 든 할미꽃이 있다. 강원도 정선의 동강 주변에서 자라는 동강할미꽃이다. 바위틈을 비집고 돋아나는 강인함. 이 꽃은 필자가 정선 동강에서 최초로 발견하여 사진으로 보고한 우리나라 미기록 식물종 중의 하나로 꽃색이 분홍 또는 자주색과 흰색이고, 꽃받침이 뒤로 완전히 젖혀지지 않는다.

노랑제비꽃 Viola xanthopetala Nakai
제비꽃의 잎은 가늘고 너비가 좁으며,
잎 아래쪽 잎자루 부분에서 갑자기 좁아진다.
땅속줄기는 땅속을 옆으로 기면서 뻗어나간다.
잎은 뿌리에 모여서 돋아나고,
꽃에는 짧은 꽃받침이 있다. 이른 봄,
어떻게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을지 궁금했다.
직접 온도계를 가지고 다니며 외부 온도와
꽃잎 속의 온도를 재보았다. 외부 온도는 영하 1, 2도
하지만 꽃술 속의 온도는 영상 11도였다.
‘꽃 밖은 아직 겨울이지만
꽃 안은 이미 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메 양귀비 Papaver radicatum Rott.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운 야생화.
가련한 꽃이 아름답다 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성급하게 얼굴을 내밀다가 추위의 기습으로
시린 이슬과 얼음 속에 갇히게 된 새싹들.
자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는 표정들이며,
오랜 기다림과 깊은 관찰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허락되는 짧은 만남이다.
강렬한 햇빛이 처연한 아름다움을 거두어 가기 전,
꽃들과 새싹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 싱그럽고 아름답다.

노랑할미꽃 Pulsatilla cernua Spreng. var. koreana
할미꽃은 보통 자주색 꽃인데 반해 북한산의 노랑할미꽃은 겉은 연한 노란색, 안쪽은 연한 주황색 꽃이 핀다.
온몸에 털이 많고 꽃은 아래를 향하여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다.
할미꽃 종류에서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잎이 아니고 꽃받침이다.
꽃잎은 퇴화되어 없어졌고, 꽃받침 속에 수많은 수술과 붉은 암술이 들어 있다.
안타깝게도 다 멸종됐는지 이제는 볼 수가 없어졌다.

 

우리나라 야생화가 각광받는 이유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이다. 겨울엔 영하 25도, 여름엔 영상 25도의 환경을 넘나들며 살아낸다. 전 세계적으로 50도나 되는 큰 온도 차를 견디며 자라는 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가.

이들은 봄이 오기도 전에 새싹이나 꽃봉오리의 체온으로 언 땅과 눈을 녹일 만큼 많은 열을 내뿜는다. 새싹이나 꽃봉오리 주변의 눈이 둥그렇게 녹아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언 땅을 뚫고 눈을 녹이는 어린 식물들의 생명력은 신비롭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것이 바로 바람과 물과 흙과 빛, 우주의 힘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 창조의 최전선 현장에서 야생화는 말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봄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다 가져가십시오.”

* 야생화 보호를 위해 촬영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호범꼬리 Bistorta ochotensis Komarov
백두산 고산지대는 식물이
양분을 생산할 수 있는 기간은
짧은 반면에 추운 기간은 아주 길다.
호범꼬리는 오랫동안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땅속줄기에 많은 양분을 저장하여
어려울 때를 대비하고 있다.
그래서 유난히 땅속줄기가 굵게 발달했다.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7월에서 8월에 걸쳐
엷은 분홍색 꽃이 줄기 끝에서 핀다.

야생화 전문 사진가로 불리는 김정명 작가는 1946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15살 때 카메라에 빠진 후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우리의 산과 들을 다니며 들꽃을 찍어왔습니다. 4,500종으로 추산되는 국내 야생화 가운데 1,800종 70만 장의 사진을 찍었으며, 특히 98년 동강할미꽃을 처음 찍어 세계 유일의 특산종으로 등록시키는 등 이름 없는 들꽃들을 세상에 알려 왔습니다. 야생화의 생태적 특성을 모두 섭렵한 진정한 야생화 사진작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사진집으로 <한국의 야생화> <꽃의 신비> 등 다수가 있습니다.

잘났다, 까미!

아내는 설거지 중이었다. 어머니가 과일을 깎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며칠 전, 어머니 집 고양이 까미가 달걀만 한 생쥐를 물어왔다. 까미는 생포한 전리품을 단박에 처치하지 않고 현관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앞발로 툭툭 치면서 장난감 굴리듯 가지고 놀았다. 달걀만 한 생쥐는 죽기 살기로 탈출하려 하고 까미는 잽싸게 제자리에 물어다 놓기를 되풀이하였다. 나중에는 생쥐도 지쳤는지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또 좀 더 있으니까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는 듯 땅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꼼지락꼼지락 제 할 짓을 하고 다녔다.

애가 닳은 쪽은 부삽을 들고 지켜보던 어머니였다. 까미가 얼른 생쥐를 처치해주어야 부삽으로 떠서 울 넘어 풀밭 사이에 훽 던져버릴 텐데, 까미란 놈은 세월아 네월아 재작질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꼬물꼬물 포획자의 행동 반경을 넘나들던 달걀만 한 생쥐가, 순식간에 장독간 매실 단지 사이로 숨어버렸다. 멍청한 고양이 까미는 뒤늦게 엉뚱한 곳을 기웃거리고, 보다 못한 할매가 다급하게 장독 사이로 한쪽 발을 밀어넣어 쥐 꼬리를 밟으려 했다. 하지만 생쥐는 생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시골 고양이는 결코 주인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날 사냥의 맛을 알게 된 까미는 세상의 쥐란 쥐는 모두 잡아버릴 듯 쥐를 잡아 날랐단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자신의 전리품을 보란 듯이 현관 앞에 갖다 두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게 고양이 마음인지, 까미가 갑자기 사냥을 뚝 끊었다. 만날 밥만 축내고 빈둥대는 그 꼴을 보다 못해 어머니가 말했다.

“까미야, 요새 왜 쥐 안 잡아오노? 내일은 쥐 한 마리 잡아서 이 할미한테 좀 보여줘라잉.”

다음 날 아침, 세상에 이럴 수가. 까미가 진짜로 쥐 한 마리를 물어다 놓았다. 똑똑한 고양이 까미가 마침내 한국어를 깨친 것이다. 어머니는 하도 기특해서 까미를 쓰다듬어  주고 부삽을 들고 전리품을 치우러 다가갔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했다. 예전에 제 녀석이 사냥해서 텃밭 고랑에 버려둔 거의 박제가 된 상태의 쥐였다.

“아이구, 요놈 고양이까지 할매한테 사기를 치네!”

눈 가리고 아옹이란 말이 달리 나온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까미는 모처럼 할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접수했지만, 사냥할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밭고랑 사이에 굴러다니는 마른 쥐를 대신 갖다 놓았다는 이야기다.

“까미가 말을 할 줄 알면 참 재미있겠네요.”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한마디 했다. 그것도 아내가 뭘 모르는 소리다. 이미 한국어를 깨친 고양이 까미가 만약에 한국말까지 구사한다면 진짜 성가실 것이다. 할매 발부리에 걸려 부딪칠 정도로 졸졸 따라다면서 종알종알 궁시렁궁시렁 참견하는 꼴이라니. 아마 견디다 못한 우리 어머니가 괴나리봇짐을 싸고 가출을 시도하지 싶다.

최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