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혁 선수,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 있는 전설

20여 년간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단거리 500m, 1,000m 대표 주자로 달리며 수없는 신기록과 메달을 한국에 안겨주었던 이규혁(35) 선수. 최근 그에게 또 한 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최고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를 가리는 세계스프린트(단거리)선수권대회 종합 2위와 더불어 전국동계체육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다섯번째 올림픽 도전 실패라는 아픔을 딛고, 나이 어린 쟁쟁한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체력적 한계를 극복한 도전이었기에 더욱 의미 있었다. 언제나 스케이트와 함께였던 그의 삶, 그의 마음 이야기를 들어본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2012년 세계스프린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 남자 500m 경기. 모태범, 이강석 등 쟁쟁한 후배들을 제치고 멋진 레이스를 펼친 선수는 다름 아닌 스피드스케이팅계의 ‘맏형’ 이규혁 선수였다. 현역 선수로서 은퇴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서른다섯이란 나이에 이뤄낸 성과이기에 그는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언제까지 선수로 뛸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준비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하다”는 말처럼 그는 매 시합마다 최선을 다해왔다.

1991년 13세 때 ‘빙상 신동’이라 불리며 국가대표가 된 이후 1997년 한국 빙상 사상 처음으로 1,000m, 2001년엔 1,500m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07~2008, 2010~2011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금메달,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언제나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그렇게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스타로서 숱한 국제 대회를 석권해왔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올림픽 메달이다.

1994년부터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까지 5번의 올림픽 무대에 도전했지만, 유독 올림픽 메달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

하지만 선수로서의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최고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한 뒤, 2007~2008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 연속 1위를 한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메달 획득 실패 후, 사람들은 그가 선수 생활을 그만두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2011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종목별 세계선수권 우승에 이어 2012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이르기까지…. 그의 끊임없는 도전은 선수로서, 한 사람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2011년 2월에 열린 제92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일반부 1,000m 경기에서 이규혁이 역주하고 있다. 사진_뉴시스

최근의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셨는데요,
체력적 한계는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약간의 거품을 뺐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운동을 열 번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못 해요. 그걸 다 하면 부상 내지는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니까요. 특히 이번 시즌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시즌 초반엔 어린 선수들에 비해 좀 부족하다는 소리도 들었고. 예전 같으면 거기에 많이 연연해하고 못 견뎠을 텐데, ‘아, 이 친구들이 나보다도 열 살이 어린데 같이 간다는 건 욕심이다’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모든 걸 수정했어요. 전에는 국제 대회는 물론 선발전 모든 대회에서 입상하기 위해서 스케줄을 빡빡하게 짰을 텐데, 이제 불필요한 건 버리고 원하는 대회에 맞게 준비를 해요.

스케이트는 0.1초의 시간 차이로 순위가 결정 나기도 합니다.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요.

스피드스케이팅이란 빨리 도는 사람이 이기는 단순한 게임이지만 그 안에 테크닉이나 훈련 방법, 음식 조절, 휴식 등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단거리에서는 100분의 1초, 때론 1000분의 1초로 순위가 갈리니까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엄청난 훈련을 하죠. 매일 산을 뛰어오르고, 사이클에 무거운 타이어를 달고 언덕을 오르기도 하고, 몸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바벨을 들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그 0.1초를 줄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죠. 그게 실력이기도 하고요.

처음 스피드스케이팅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버님이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셨고, 어머니는 피겨 국가대표셨다 보니 자연스레 스케이팅을 접하게 됐어요. 모든 스포츠가 선의의 경쟁을 하지만, 솔직히 남이 이기면 배가 아프기도 하잖아요. 근데 스피드스케이팅은 기록경기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우승을 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더라고요. 저 선수 때문에 지는 게 아니라 내가 못해서 지는 거란 공감대가 있으니까, 그런 점이 굉장히 신사적으로 보여 좋았어요.

항상 경쟁하다 보니 스케이트를 즐겁게 타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지금도 경쟁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시합이 있으면 시합 전날까지, 오직 그 생각만 하거든요. 지금 이렇게 대화하는 순간에도 그게 계속 떠오르기 때문에 시합보다 준비 과정이 더 힘들어요. 그 긴장감 때문에 지친다는 게 맞을 거예요. 근데도 하는 걸 보면 제가 단순해서인 거 같아요. 힘들어서 안 해야지 하다가 또 1등 하면 그걸 싹 다 잊고, ‘이 고통을 알면서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러다가 시합이 끝나면 또 잊어먹고…. 기억력이 너무 좋으면 안 돼요. 단순하면 운동선수 할 수 있어요.(웃음)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당시, 모든 언론과 국민은 그를 주목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다섯 번째 올림픽 도전. 당시 33살의 나이로,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는 스피드스케이팅계에서는 환갑이라 불리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도전했던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아쉽게도 1,000m 시합에서 1분 9초 92의 기록으로 9위. 시합이 끝난 뒤 바닥에 드러누워 거친 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누구와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기자회견 당시 고백처럼, 그가 선수로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결국 올림픽 메달은 후배들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밴쿠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후배들은 한결같이 그 공을 이규혁 선수에게 돌렸다.

시합에선 경쟁 상대나 다름없는 후배들에게, 스케이팅 기술부터 정신 자세까지 자신의 노하우를 기꺼이 나눠주면서 후배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모태범 선수는 “규혁이 형은 나의 우상이다.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줬고, 내가 쓰는 주법도 형한테서 배운 것”이라고 말할 정도. 그래서 지인들은 그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 ‘대인배’라 부른다. 시합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은 “그가 있었기에 후배 선수들에게 메달의 영광이 있었다”며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라며 존경과 경의를 표했다.

사실 국민들은 밴쿠버 올림픽 이후로 메달을 떠나 이규혁 선수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네티즌의 투표로 국민 감동 금메달도 받으셨잖아요.

진짜 너무 감사했어요. 공항에 수많은 취재진과 팬들이 나와 계시는데 어안이 벙벙한 거예요. 올림픽 메달을 제일 중요시하는 이유가 그 대회를 많은 사람들이 보고 기억하기 때문인데 그런 면에서 저는 올림픽 메달 못지않은 과분한 걸 얻었다고 생각해요. 선수는 무조건 결과로써만 평가받는다고 후배들을 독려했었는데, 노력에 박수를 쳐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동받았죠.

밴쿠버 올림픽을 위해 굉장히 열심히 준비했었죠?

스스로 생각해도 뿌듯할 정도였죠. 그때는 뭐, 몸을 칼로 찔러도 안 들어올 정도로 단단하게 준비했고요.(웃음) 올림픽 우승 후보란 얘기를 듣고 싶어서 4년간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올림픽이 가까이 왔을 때도 우승권에 있었어요. 그 시즌 최고 기록도 갖고 있었고, 외국에서도 제 이름이 거론됐었죠. 아, 계획대로 왔구나.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만 주는 메달이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먹고 자고 뛰고, 어떻게 쉬고, 누구랑 무슨 얘기를 하고, 지금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지 같이 어울리는 시간이 필요한지 이런 것까지도 다 계획 안에 있었죠. 그렇게 혼신을 다했기 때문에 올림픽이 끝났을 땐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나는 여기 지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했어요. 올림픽을 계기로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2011년 네덜란드 헤렌벤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스프린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한 이규혁(가운데)이 준우승을 차지한 모태범(왼쪽), 3위를 차지한 샤니 데이비스(미국)와 함께. 사진_연합뉴스

작년에는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셨는데요.

어머니와 동생이 피겨 선수다 보니까 어릴 때부터 피겨가 굉장히 궁금했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제 동생 때문이에요. 각자 선수 생활을 하다 보니까 제 마음은 안 그런데, 어떻게 보면 멀어졌다고 해야 하나? 어렸을 때는 되게 친했는데 어느 순간 저는 터프한 스포츠를 하고, 동생은 섬세한 스포츠를 하면서 약간의 차이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처음 섭외가 왔을 때 첫 번째 조건이 동생이 날 가르친다면 하겠다,였어요. 만만하게 보고 처음엔 연습도 안 했어요. 스케이트 선수가 연습하는 게 웃기잖아요. 근데 그렇게 못 탈 줄이야.(웃음) 그 뒤로 낮에는 스피드스케이팅을 하고, 밤에는 피겨스케이팅을 탔어요. 시즌 때처럼 살이 쫙 빠질 만큼 되게 힘들게 했어요.

남다른 예능감이 돋보였습니다. 예능에 출연하며 느끼신 게 있다면요.

처음엔 긴장했었어요. 민망함, 쑥스러움도 있었죠. 창피하지 않게끔만 하자 했는데 나중엔 재미있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 덕분에 인지도가 높아졌죠. 또 얻은 게 있다면 동생하고 많이 가까워진 거예요. 피겨가 어렵다는 걸 느끼면서 ‘아, 내 동생이 대단한 피겨 선수였구나’를 알게 된 거죠. 피겨는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못 따니까, 무시하는 맘이 있었거든요. 형으로서 정말 실수를 했구나, 동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선수였는데, 나도 선수이면서 보이는 걸로만 판단했구나. 동생한테 미안했어요.

스케이트를 타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이 있다면요.

어릴 때는 단순하게 내가 하는 게 최고의 스포츠고 올림픽을 우승함으로써 최고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패도 하면서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제가 만약 어린 나이에 올림픽 메달을 땄다면 그런 것들을 모르고 지나쳤을 거예요.

스케이트를 통해 뭔가 얻거나 생각하기 전에 일찌감치 은퇴해서 다른 일들에 실패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고, 인격적으로 많이 무너졌을 거 같아요. 우승은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그렇게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오랜 스포츠 선수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됐죠.

이규혁 선수에게 스케이팅이란 무엇인가요?

제 삶이죠. 기억도 못 할 어린 시절부터 탔고 지금도 타고 있고, 다른 건 모르니까요. 힘들 땐 하루에도 몇 번씩 저한테 얘기해요. ‘너 왜 이거 하고 있냐?’ 그럼 ‘왜? 좋아하잖아’ 하고 답하죠. 해마다 다른 거 같아요. 작년의 우승과 지금의 우승은 다르고. 매번 상황이 올 때마다 저는 되게 간절히 원했고, 그래서 그걸 얻었을 때 성취감이 컸던 거 같아요. 그런 순간들이 제겐 되게 행복한 시간인 거죠.

그는 현재 3월에 열리는 월드컵 파이널과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를 목표로 훈련 중이다. 똑같은 트랙을 수십 번 수백 번 돌면서 그는 생각한다. 처음 스케이트를 탔던 순간의 겸허함, 우승했던 순간의 환희와 기쁨, 세상에서 제일 빠른 선수가 되고 싶었던 열정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은 결과에 상관없이 선수들의 노력에 아낌없이 박수를 쳐준 사람들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한마음이 되어 언제나 응원해주던 국민들에게 감사한다. 그것이 그를 오늘도 달리게 한다. 그것을 잊지 않는 선수이기에, 그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챔피언이다.

이규혁님은 1978년생으로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인 아버지 이익환씨와 피겨 국가대표 출신 어머니 이인숙씨 사이에 태어나 스케이트를 자연스레 접했으며, 13세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현재까지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해오고 있습니다. 2007년 장춘동계아시안게임 금메달,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4회 우승, 2011년 세계선수권 우승 등 수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그가 세운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 통산 4회 우승은 아시아에선 그 누구도 세우지 못한 대기록으로, 그의 열정적인 스케이트 인생을 말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