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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그 영원한 찰나

사진 & 글 이창수

K2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달빛 1200×1800mm.

“3년, 700일 동안의 여정, 히말라야는 내게 한 걸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줬어요. 처음엔 의식적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어느 순간 그 욕심이 사라지더라고요. 밤새 5,000m 설산을 넘으며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극복하니 걷는 게 달라지더군요. 많은 생각을 하다 어느 날 굉장히 가뿐하게 치고 올라갔더니 벌써 에베레스트에 와 있더군요. 그때 어떤 깨달음이 왔어요. 한 걸음, 한 걸음일 뿐이야… 한 걸음만 떼면 돼. 오래 걷다 보니 무시간성(無時間性) 시간이라는 게 느껴져요. 나 없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게 뭔지 어렴풋이 알게 됐고, 그게 시간성, 현재성이 주는 실재 아닐까 생각했죠. 그렇게 걷는 것에 집중하면서 다가오는 것을 한 장 한 장 담았습니다.”

‘자연’이라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시간의 변화를 안고 간다. 그곳에서 작은 한 점 되어 걸었다. 길을 걷다 보면 앞에 있는 산이, 그 산을 감싸는 구름이, 그 구름 사이를 비집는 빛이, 꿈틀대고 넘실대는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아니한 것이 없다. 큰 기쁨이다. 너도 나도.

어느 한순간 마음으로 한 장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비록 한 편의 일부일지라도 대상과 맞닿는 기쁨이 있다. 그 기쁨의 순간이 ‘영원한 찰나’라는 살아 있음이다. ‘사진 찍기’는 대상을 마음으로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 순간의 진정한 마음만이 필요할 뿐이다.

얌드록초 호수 1500×4300mm. 라싸에서 시가체 가는 중간 길에 있는 얌드록초 호수. 티베트의 4대 성호 가운데 하나이다.

히말라야는 고대 인도 말인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사는 곳을 뜻하는 ‘알라야(alaya)’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로 ‘눈이 있는 곳’ 또는 ‘눈의 집’을 의미한다. 이처럼 히말라야에는 1년 내내 새하얀 만년설이 덮여 있다.

시작도, 끝도 찰나.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다는 현존. 그 길을 걸었다. 높은 산, 먼 길. 살 수 있는 땅과 죽을 수 있는 땅의 경계까지. 너무 빨라 멈출 것만 같은 심장의 뜀박질과 희박한 산소를 한껏 마셔야만 될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다시 또 한 걸음 내디뎠다. 히말라야 산중에서, 히말라야 산중을.

언제였는지도 모를,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묵은 눈, 빙하에 지금 눈이 내린다. 더 짙을 수 없는 푸른빛이 설산을 감싸 안아 더 투명할 수 없는 세상을 연다. 2000억 개인지, 4000억 개인지도 모를 만큼, 많은 별이 모였다는 은하의 강이 먹빛 어둠을 밝힌다. 그런 시간 속에서 얼키설키 엮여 만들어진 나의 DNA에 이 모든 것들이 내려앉는다.

한 호흡과 한 걸음에 깊이 빠질 때, 산과 내가 ‘한 존재’로 느껴지는 바로 그때, 감히 사진 한 장 찍곤 다시 걷는다. 히말라야가 품고 있는 내면의 숨결 또한 가슴 깊이 새긴다. 그런 산의 모습을 오롯이 느끼는 순간은 곧 자신의 본성을 보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야크 카르카 캠프의 아침 운해 1200× 5800mm. 시샤팡마 베이스캠프 가기 전 야크 카르카 캠프에서 본 아침 운해.
멀리 네팔의 히말라야산맥이 운해 사이로 보인다.

팅그리 평원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와 초오유 1200×4800mm. 에베레스트(초모랑마) 와 초오유에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다.
에베레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영국의 측량국장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사진가 이창수님은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샘이 깊은 물> <월간 중앙> 등의 사진기자를 지냈다. 2000년 경남 하동 악양에 정착하여 지리산의 속내와 사람살이를 사진에 담아 <움직이는 산, 智異> <Listen-‘숨’을 듣다> 등의 사진전을 열었다. 현재 순천대학 사진예술학과 외래교수이다. 2011년 12월부터 700여 일에 걸쳐 히말라야 설산의 내면과 사람들을 담은 히말라야 14좌 사진展 <이창수·영원한 찰나> 전시회가 오는 8월 11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3층에서 열린다. 히말라야 14좌는 히말라야산맥과 카라코람산맥에 걸쳐 분포하는 8,000미터급 봉우리 14개를 말한다. 히말라야는 인도 북부에서 중앙아시아 고원 남쪽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이다.

영원한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바야흐로 태양의 계절이다. 이즈음이면 누구라도 배낭을 둘러메고 낯선 거리에 서고 싶다. 순백색 자유를 찾아서…. 세계적인 여행가 김찬삼(1926~2003), 그는 돈키호테였다. 그가 세계 여행을 떠난 1958년의 우리나라는 암흑의 시대였다. 이 암흑을 뚫고 그는 돈키호테의 기상으로 세계를 향해 돌진하였다. 3차례의 세계 일주를 포함하여 20여 회의 해외여행을 성취하였다. 모두 합치면 160여 개국, 여행 거리로는 지구 둘레 약 32바퀴를 여행한 셈이며 여행한 기간은 총 14년에 해당한다. 그 여행들을 바탕으로 그가 펴낸 여행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 어두웠던 시절 우리 민족의 꿈이요, 희망이었다.
글 & 사진 제공 김재민

“한 우물을 파게, 물이 나올 때까지!” 슈바이처와의 만남

“코리아에서 온 미스터 킴이시지요?” 흑인 간호사는 김찬삼을 허름한 오두막으로 안내하였다. 호롱불 아래서 글을 쓰고 있던 슈바이처 박사는 찬삼을 보자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어서 오게! 왜 이리 늦었어? 무슨 사고가 났는지 걱정했다네!” “박사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1963년 11월 25일 밤, 서른여덟의 김찬삼은 소년 시절부터 동경해오던 슈바이처 박사를 만났다. 슈바이처 박사는 오랜 여행 끝에 땀에 찌든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지친 모습으로 서 있는 김찬삼을 따사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 후 김찬삼은 가봉의 람바레네에 위치한 슈바이처병원에 머물면서 병원 일을 도왔다. 환자도 보살피고, 침대나 의자 등 집기도 고치고, 건물 보수도 돕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보름 후 김찬삼은 남은 여정 때문에 슈바이처 박사와 이별을 고해야 했다.

“박사님! 따뜻한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박사님! 제게 인생의 지혜를 하나 가르쳐주십시오.” “음, 인생의 지혜라… 그래! 한 우물을 파게, 물이 나올 때까지!” 김찬삼은 이 슈바이처의 충고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세계로 향하는 창문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은 1926년 6월 5일,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김찬삼에게 있어서 여행은 저항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소년 시절 그의 꿈은 기차의 차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기차의 차장은 하얀 연기와 함께 기적을 울리며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신비로운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후 부친의 근무지를 따라 인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그의 꿈은,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영국 배를 견학한 후 마도로스로 발전하였다. 그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선원 학교를 지망했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세계 여행이라는 그의 꿈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은 슈바이처 박사와 동방견문록의 마르코 폴로였다. 김찬삼은 학창 시절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여행하였다. 집 안에 있으면 왠지 힘이 빠지고,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면 새장에 갇혔던 새가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처럼 한없는 자유가 느껴졌다.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의 꿈은 더욱 절실한 신념이 되었다.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내가 세계 구석구석을 직접 가 봐야겠어! 컴컴한 우물 안에 있는 것 같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세계로 향하는 창문을 만들어야 한다!’

김찬삼은 어린 시절부터 존경해온 슈바이처 박사를 만났다.(가봉 람바레네. 1963년)

김찬삼은 세계 여행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어학을 공부하며, 신체를 단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가족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김찬삼은 장손이자 독자로서 부모님의 권유로 열아홉에 결혼을 하였으며, 33세에 이미 1남 3녀를 거느린 가장이었던 것이다. 늙으신 부모님과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찬삼은 세계 여행이라는 뜨거운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부친께 세계 여행의 포부를 밝혔다. 그의 부친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끊임없는 노력으로 법관이 된 훌륭한 분이었다. 김찬삼의 부친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법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그는 “네가 신중히 결정한 것이라면 감행하거라! 다만 이왕 뜻을 품었으면 반드시 성취하거라!” 하며 아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부인 역시 남편의 세계 여행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김찬삼의 부인은 평생토록 남모르는 헌신을 했으며, 그녀의 헌신으로 김찬삼의 꿈은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의 여행기는 어려웠던 시절 많은 젊은이들의 꿈의 산실이었다”

김찬삼이 대망의 세계 여행길에 오른 것은 33세 때인 1958년 9월이었다. 당시는 전쟁 후의 혼란이 채 가시기 전으로, 세계 여행을 시도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요, 선구자적인 것이었다. 이후 그는 3차례의 세계 일주를 포함하여 20여 회의 해외여행을 성취하였다.

여행은 고행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과 배고픔, 예측할 수 없는 위험 그리고 강행군을 통한 구도자의 길이었다. 김찬삼은 평생을 통한 세계 여행을 정리하여 책을 만들었다. 수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완간된 그의 여행기는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외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독자들은 그가 소개하는 여행담과 세계의 문물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의 여행기는 세계로 열린 창이었고, 경이로운 설렘이었다. 서재와 도서관마다 그의 책은 빼놓을 수 없는 장서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의 꿈의 산실이었다.

1992년 67세의 노장 김찬삼은 그가 14세 소년 시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읽고 자신은 동에서 서로 가며 서방견문을 하리라 다짐했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발 끈을 동여매었다. 그리고 그 314일간의 고행은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되고 말았다. 여행의 신이 더 이상 그에게 여행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지 않은 것이었다.

길 위에서 죽어도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는 2003년 7월 78세의 나이로 여행 인생을 마감하였다.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의 유산은 남아 있다. 그 유산은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용기요, 꿈을 성취해내는 추진력이요, 우리나라 세계화의 초석이요, 인생의 후배들에게 남겨놓은 불굴의 정신적 이정표이다.

여행의 신을 믿는 그의 영혼은 어쩌면 지금도 남미 어느 골목이나 아프리카 오지 마을, 남태평양 작은 섬의 해변가에서 자유로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1950년대에 사진기는 시골은 물론 도시에서조차 ‘요술상자’라 할 만큼 신기한 물건이었다.

김찬삼님은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이후 숙명여자고등학교와 인천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1956년부터 세종대학 지리학과 교수, 1984년부터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저서로는 1962년 <세계 일주 무전여행기>를 시작으로 <목숨을 건 세계 여행> <김찬삼의 세계 여행> <실크로드를 건너 히말라야를 넘다> 등 다수의 여행기를 펴냈으며 2008년에는 우리나라 여행 문화를 개척하고 선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받았습니다.

뚜벅이 변호사 조우성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사람이 되겠습니다.”

뚜벅이 변호사 조우성씨

기업분쟁연구소 조우성(46) 변호사.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우연히 본 동영상에서였다. 그는 ‘경청은 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가’란 주제로 강의 중이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감동으로 다가왔다. 조우성 변호사는 변호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경청이라고 말한다.
분노하고 격정적으로 부딪치는 상황에서도 얼마나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수없이 목격해왔다는 것. 냉혹한 승부사가 아닌 동반자로서의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그에게 경청의 지혜를 들어본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2014-08-(20)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 17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직접 체험한 ‘경청의 힘’에 대한 내용들을 담아내셨는데요, 책을 내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12년 5월인가 연달아 2개의 사건을 졌어요. 사건에 지고 나면 되게 힘이 빠지거든요. 그러면서 변호사로서 내가 잘하고 있나? 자문할 때였죠. 사건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고, 제 스스로가 방전된 상태라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는데 마침 출판사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처음엔 제 글이 너무 변호사답다고 해서 소설가분들의 책을 필사해가며 편안한 문체로 바꾸려는 연습까지 했어요. 덕분에 공부도 많이 됐습니다. 그동안 제가 쓴 글은 목적과 결론이 중요했는데, 글 쓰는 여정 자체가 의미가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원고를 탈고하는 순간 제 스스로 방전 직전이었던 배터리가 충전되는 기분이었어요.

자연스럽게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돌아보게 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랬죠. 그동안 진짜 앞만 보고 달려가면서 로마 시대 검투사같이 살았거든요. 승과 패에 대해 민감했죠. 근데 돌이켜보니 진짜 좋은 변호사는 가이드(안내자) 같은 사람이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가령 누군가가 캄캄한 동굴에 갇혀요. 처음 소송을 당한 사람은 그런 심정이거든요. 그때 옆에 가이드가 등장하는 거죠. 그런데 가이드라고 해서 이 동굴을 완벽하게 알진 않아요. 가다가 같이 돌부리에 넘어지기도 하고 박쥐 떼 습격도 받고. 동굴을 빠져나와서 밝은 세상으로 갈 수도, 못 갈 수도 있죠. 하지만 지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 앞으로의 교훈으로 삼고,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거든요. 승소보다 패소했을 때 의뢰인과 어떤 관계를 가져가느냐도 결과 못지않게 중요해요. 책을 쓰면서 ‘조우성, 너 그렇게 살아왔잖아.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잘 가봐’ 하고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달릴 때는 몰랐는데 일단 멈추고 삶을 반추하면서 알게 된 거죠.

 

조변호사가 전하는 수많은 사건 중에는 가슴 찡한 사연도 많다. 그는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음에도 자식을 위해 끝까지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아버지의 애틋한 부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글을 못 읽는 피의자가 있었는데, 그 사실만 밝혀도 쉽게 무죄를 밝힐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이를 거부했던 것. 그 이유를 알고 보니 고등학생인 자신의 아들이 동네에서 놀림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이 사건을 맡으며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했다는 그는 무죄 선고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실을 밝히려고 끈질기게 설득한 자신이 못내 부끄러웠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도 이럴 것이다’ 지레짐작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닫게 됐다고 한다.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린다는 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작년에 20대 후반 남자분이 3개월째 월급을 못 받았다고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사장을 상대로 민사, 형사, 노동청 소송을 다 했는데도 돈을 못 받은 상태였죠. 그동안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했기에 제가 마땅히 줄 수 있는 해결책이 없다는데도 꼭 상담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일단 얘기를 들어보니 그 과정에서 인격적인 모독을 당했고,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어서 1년 동안 법정 투쟁을 했더라고요. 변호사님, 전 뭘 할 수가 있습니까? 묻는데 ‘정말 할 만큼 다 했네요. 더 잘할 수 없습니다. 이제 과거는 놓고, 새로운 길로 가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할 거 같습니다’ 하니까 이 친구가 갑자기 펑펑 우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야 정리가 된다’는 겁니다. 변호사로서 꼭 해결책을 주는 게 다가 아니구나…. 그 뒤로 비록 해결책은 주지 못하더라도 상담하고 들어주고 조언해주는 것만으로도, 되게 효용이 있는 변호사가 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경청의 힘’을 실감하게 되신 거군요.

많은 의뢰인들을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소송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언제 분노하고 상처받는 걸까? 저마다 사연과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변호사를 찾는 이유는 비슷해요. 바로 자신의 고통에 공감해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다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소송을 시비를 가리고 분쟁을 처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치유의 과정이자 분노를 풀기 위한 방법인 거죠. 사실 어떤 사람은 승소를 해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반면, 패소를 해도 후련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거든요. 결국 소송의 과정을 거치면서 삶의 용기를 얻고 자기 치유를 시작하느냐, 반대로 분노로 제자리걸음하느냐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과정을 거치며 그 일을 해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비즈니스 코칭 콘서트인 ‘을을 위한 행진곡’ 강연. 경제력, 협상력 등에서 불리한 위치인 ‘을’들이 거래 상황에서 알면 유용한 법률 지식과 협상 기법을 소개했다.
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경청은 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조변호사는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나누는 강연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991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철도 공무원이셨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검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찰청에서 인턴 생활을 하던 중 자신의 적성과는 맞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당시 검사시보(試補 : 수습)였던 그가 했던 일은 피의자, 즉 죄가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을 심문해 수사 기록을 작성하는 거였는데 피의자의 딱한 사정까지 기록했던 것. 급기야 담당 검사가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가 아니라 변호인이 작성한 변론요지서 같습니다”고 말할 정도였다. 피의자의 범죄 행위와 그 사람이 처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몹시 어려웠던 그는 결국 변호사의 길을 택하게 된다.

변호사로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게 가장 기쁘다고 하셨는데요, 그런 성품은 부모님의 영향인가요?

돌아보면 외할머니, 어머님의 영향이 컸던 거 같아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저희 외갓집에는 항상 거지들이 많았어요. 외할머니가 항상 밥을 주셨거든요. 그러다 보니 외갓집에서 무슨 일을 치르면 그 사람들이 와서 다 도와주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남을 도울 수 있는 건 되게 행복한 일이다. 돈이든 마음을 써주는 일이든. 도울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한 거다’고 늘 말씀하셨죠.

법정에선 사람의 밑바닥까지 다 본다고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긍정과 믿음이 계속 변치 않으셨는지요?

사실 제가 정이 많고, 마음이 앞서다 보니 상처받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옛글을 보면서 힘을 많이 얻죠. 제가 한비자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얘기했거든요. 보통 성선설, 성악설 하는데 저는 성약설을 믿어요. 어떤 사람의 얘기든 들을수록 이해되는 것이 그 상황에서 그 선택을 한 이유가 있거든요. 많이 가진 사람은 자기 의도대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은 작은 이익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거죠. 배신도 하고. 저도 사실 흑과 백이 분명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살아갈수록 회색도 많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단정적으로 되지가 않아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는 거죠. 결국 인간은 이익 때문에 움직이니까 그런 인간을 이해하고 컨트롤하라는 게 한비자인데 공부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되게 단단해져요. 일희일비하지 않고, 어떤 충격이 와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도록 제 마음을 단단하게 해준 책이에요.

실제로 고전, 철학 등 인문학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책을 통해 배운 지혜를 사건에 적용한 적이 있으신지요?

피고인들이 처음 소송을 당할 때는 그 일이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법리적으로 이끄는 것 못지않게 인간적으로 어떻게 안내할까 고민하게 되는데, 그 사람의 멘탈을 바로잡아주고 싶을 때 고전을 인용하곤 해요. 예를 들어, 어떤 사장님이 잘나가다가 부도가 나고, 2년간 감옥에 있다 나오면서 울분에 차 있는 거예요. 잘나갈 때는 알짱거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무도 안 보인다면서, 얼른 성공해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계속 무리한 사업을 벌이는 거죠. 그래서 제가 사마천 <사기>의 맹상군열전에 나오는 맹상군과 풍환의 이야기를 해드렸어요. 잘나가던 제상인 맹상군에게는 참모만도 3천 명이었는데, 어느 날 제상 자리에서 물러나자 다 흩어지고, 풍환이란 노참모만 남게 됩니다. 후에 맹상군이 다시 복직하자, 사람들이 다시 아첨하면서 몰려들어요. 이를 본 맹상군이 화가 나서 혼내줘야지 하는데, 이때 풍환이 하는 말이 있어요. ‘세상일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그리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아십니까? 부귀다사 빈천과우(富貴多士 貧賤寡友), 부귀할 때는 선비들이 주위에 많지만 가난하고 천할 때에는 주위에 친구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꽃이 봄여름에 피었다가 가을 겨울에 떨어지듯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저도 그분한테 그랬어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사람들이 떠나간 것에 대해서 분을 갖고 있으면 또 다른 일에 휘말리게 됩니다. 노여움을 풀고 모래성이 아닌 정상적인 탑을 쌓아 가십시오.

17년 동안 몸담았던 법무법인을 떠나 기업분쟁연구소를 차린 지 1년째. 요즘은 SNS를 통해서도 활발한 소통을 하고 있는데, 페이스북으로 들어오는 법률 상담이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다른 변호사, 변리사들과 함께 페이스북에 전문가 그룹을 결성해 국내 스타트업(창업 기업)을 돕고 있다. 그룹 이름은 ‘어벤져스’. 영웅들이 흩어져 있다 사건이 발생하면 모여 일을 해결하는 영화처럼,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함께 능력을 발휘해 도움을 주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앞으로도 법률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스타트업과 중소기업들에 대한 법률 자문을 지속적으로 할 계획이다.

대형 로펌을 그만두고 기업분쟁연구소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실제 법을 필요로 하는 작은 회사나 개인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하셨는데요.

대형 로펌에서는 돈은 벌어 좋았지만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어요. 큰 회사를 대리해서 작은 회사랑 싸우는 게 많았는데, 실제 법을 필요로 하는 곳은 작은 회사나 개인들이었지요. 그런 것에 막연한 채무감이 있었죠. 사실 법은 하나의 도구거든요. 사람들은 흔히 법을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얼마든지 소송 전 단계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우도 많아요. 승소 못지않게 중요한 게 무익한 소송을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분쟁 예방 쪽에 관심이 많은데 되도록 분쟁이 발생되지 않도록 하고,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최소의 비용과 시간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마무리하는 프로그램을 전파하는 게 제 꿈이에요.

변호사로서는 물론 강연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지요?

30대 때는 빨리 무언가를 이뤄야 된다는 ‘스피드’에 대한 갈증이 있었어요. 근데 막상 40대가 되어 보니까 스피드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아무리 목적을 향해 빨리 달렸다 해도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그리고 40대에 막 접어들었을 때, 재능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나는 뭘 잘할 수 있는가, 뭘 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가.’ 그러다가 문득 저란 사람은, 내가 갖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데 열정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됐어요. 그래서 변호사로서의 전문성 외에 리더십, 협상 등 다양한 콘텐츠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를 하면서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었던 사람이 급전직하로 떨어지는 경우도 봤고, 힘들었지만 재기하는 사람도 보면서, 그 물을 담을 만한 역량이 되지 않으면 그릇은 깨진다는 걸 깨달았죠. 그러면서 출세나 돈에 대한 욕심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좋은 일을 하면서 행복을 찾게 된 것 같습니다.

조우성 변호사는 서울대 법과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97년부터 17년간 법무법인 태평양 민사총괄부 및 기업소송부 파트너 변호사로 일했으며, 현재는 기업분쟁연구소 소장이자 법무법인 한중의 파트너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수많은 소송 사건을 담당하며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계약서 작성실무, 지적재산권 소송전략 등을 주제로 법률 강의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4-08 (7)
이 세상에 어떤 변호사로 남고 싶은가요? 좋은 변호사? 혹은 훌륭한 변호사?

좋은 변호사란 승률도 높고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훌륭한 변호사는 처한 상황에 대해 잘 어루만져주고, 이 힘든 상황도 분명히 지나간다, 이기든 지든 여기서 당신은 뭔가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줘서, 재판이 끝나도 아, 그때 그 변호사가 내가 힘들 때 바로 세워줬지, 하고 떠오르는 그런 친구 같은 변호사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이 조영래 변호사님이신데 그분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그분의 반의반 정도, 제가 할 수 있는 깜냥 내에서 소박하게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떳떳하게.

“변호사만큼 절박한 이들을 많이 도울 수 있는 직업도 없다”는 그는 뚜벅이란 말을 좋아한다. 쉽게 흔들리거나 지치지 않고 진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한결같은 변호사가 되겠다는 의미이다.

인생의 소용돌이에서 외롭게 서 있을 때, 자신의 삶에 공감해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명암이 달라지는 것을 수없이 목격해왔다는 조우성 변호사.

그가 말한다. 우리가 그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된다는 건, 팍팍한 무릎을 두드리고 다시 먼 길을 떠날 수 있도록 용기 한 줌을 전하는 것과 같다고.

가슴 펴고 크게 웃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빛났던 내 인생의 전성기입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늦깎이 학창 시절, 주부학교

장미숙 50세. 주부. 서울시 송파구 장지동

며칠 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날 오래전 추억 속으로 데려갔다. 전화를 한 사람은 중학교 3학년 때 짝꿍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전혀 연락을 못 하고 살았으니 35년 만에 처음으로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나도 그 친구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먼저 소식을 전해온 친구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난 네가 공부 잘했던 게 가장 생각나. 시험이 다가오면 네가 항상 요점 정리를 해줬잖아. 그러면 진짜 그 부분이 시험에 나왔다니까.” 친구는 날 공부 잘했던 짝꿍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기억하고 있는 친구가 고마웠다. 친구는 덧붙였다.

“그런데 넌 고등학교를 어디로 갔니?” “나? 고등학교 못 갔잖아. 우리 집이 엄청 가난했던 건 모르지? 학교 대신 공장에 다녔어.” 내 말에 친구는 “아! 그랬었구나. 네가 공부를 잘해서 계속 공부를 한 줄 알았어” 하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 고등학교 못 갔지만 나중에 다시 공부를 하게 됐어.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도 졸업했지.”

나는 친구에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추억을 나눴다.

그랬다. 꿈 많던 소녀 시절, 나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닐 때, 나는 공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참으로 우울한 날들이었다. 과도한 노동으로 얼굴은 노랗게 뜨고,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은 날 위축시켰다. 그나마 내가 번 돈으로 동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어 그게 낙이었다. 공부를 못 한 설움이 내게는 한으로 남아 언젠가는 다시 공부를 할 거라는 다짐을 한 번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살았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내가 다시 책가방을 든 건,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두근대는 가슴을 다독이며 모교에 첫발을 디뎠던 그날의 감동은 지금도 가슴속에 생생하다. 파릇파릇하고 발랄한 청소년들이 아닌, 동글동글한 몸매와 구불구불한 파마머리에 책가방을 든 학생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 드나드는 곳, 교문도 운동장도 없는 그곳은 주부학교였다.

갑자기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나는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빠졌다. 주부, 엄마, 아내, 며느리, 딸에 학생이란 역할까지 주어졌으니 그야말로 시간이 금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 못 할 사연들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떳떳하게 밝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누가 알까 봐 경계를 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학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마흔 살까지 따라다니던 중졸이란 학력에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모든 걸 배제하면 그곳은 열정과 재미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시끌벅적한 교실은 아이들 못지않게 아줌마 학생들의 수다로 들썩거렸고, 공부 시간만큼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빛을 발했다. 정규 고등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봐야 했기 때문에 나는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난 뒤에는 공부보다는 반원들과의 추억을 만들기에 더 바빴다. 꿈에 그리던 소풍을 가게 되었고, 연말에는 반별 대항 장기자랑 송년회준비를 하면서 반원들과의 우정을 돈독히 쌓을 수 있었다. 인생을 살 만큼 살아온 분들이 대부분이라 장기들도 많았다.

우리 반은 송년회 때 각설이타령과 댄스를 하기로 했다. 나는 반원들 중 젊은층(?)에 속해서 내가 총대를 멨다. 왕언니들에게 댄스를 가르치는 일은 정말 개그 무대를 방불케 했다. 덕분에 연습을 하면서 우리는 매일 배꼽이 빠졌다. 웃다가 혼절하지 않을까 염려가 될 지경이었다. 최종적으로 의상을 맞춰놓고 드디어 송년회 밤이 되었을 때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이 지긋한 아줌마들은 어디 가버리고 모두가 소녀 같았다. 귀여운(?) 언니들을 격려해가며 우리는 무대에 올라 마음껏 감춘 끼를 발산할 수 있었다. 떨려서 못하겠다던 몇몇 언니들은 몰래 술을 두어 잔씩 마시고, 발그레해진 얼굴로 무대에 올랐다. 잊지 못할 밤이었고 열광의 도가니였다.

우리 반은 대상을 차지했고 후배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 오십여 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토록 열심히 뭔가에 도전해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너무 짧았던 시간이어서 아쉬움이 컸지만, 내 삶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었던 늦깎이 학창 시절은 바로 나의 전성기였다.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나는 소원했던 대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꿈에 그리던 졸업장을 가슴에 안을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의 시초가 주부학교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신수원 작.
<옹달샘>
72.5×60.5cm. Acrylic on canvas. 2012.

작은 시골 고등학교에서의 기숙사 생활

문귀애 22세. 대학생. 대구시 북구 태전동

나는 4개의 반으로 이루어진 시골의 작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우리 학교는 말은 자율이지만 실상은 강제인 야간 자율 학습을 실시했다. ‘야자’가 끝나면 집에 가야 하는데, 집에 가려면 가로등 하나 없는 산과 고속도로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 너무 무서웠던 나는, 결국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첫 룸메이트들과는 생각보다 맞지 않았고, 너무 힘이 들어 기숙사를 나올까도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6개월마다 한 번씩 방이 바뀌었기 때문에 꾹 참고 생활을 했다.

시간은 흘러 2학기가 되었고 새로운 방이 배정되었다.

이때부터가 내 인생 전성기의 시작이었다. 바뀐 방 사람들 모두 나와 너무 잘 맞았다. 야자를 끝내고 오면 같이 컵라면도 끓여 먹고, 몰래 치킨도 시켜 먹었다. 밤 12시, 생일을 맞은 친구를 위해 깜짝 생일 파티도 하고, 사감 선생님의 눈을 피해 심야 자습 시간에 방으로 돌아와 농땡이를 피우기도 했다. 새벽에 친구들과 수다를 떨 곳이 없어 공용 샤워실 탈의실에 모여 앉아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3학년이 되었을 때는 기숙사 체제가 바뀌면서 고3끼리만 방을 쓰게 되었다. 나는 우리 반 친구 6명과 다른 반 친구 2명과 같은 방에 배정되었다. 게다가 고3을 모두 같은 층에 넣었기 때문에 층 전체가 고3이었고, 모두 친한 친구들이었다.

마치 내 세상을 얻은 것만 같았다. 주말이면 일요일 자습을 끝내고 걸어서 15분 거리인 우리 집에 다 같이 걸어가서 밥도 먹고, 급식소에서 남은 반찬과 밥을 받아와 야식으로 먹기도 했다.

고3이 되며 배정된 기숙사 방은 졸업할 때까지 유지되었고, 그 친구들과 함께  1년이나 같은 방을 썼다. 대학교 원서를 쓰고, 합격의 기쁨과 불합격의 슬픔을 함께 나누며 성장하였다.

수능 D-200일을 기념하며 술을 먹다가 걸려서 벌 청소를 한 방도 있었고, 도난 사고가 일어나 기숙사가 발칵 뒤집힌 방도 있었고, 공용 냉장고에서 음식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 많은 추억을 쌓은 곳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힘든 일도 많았고, 그만큼 즐거웠던 일도 많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힘든 일들이 많아서 조금 즐거울 일도 더 즐겁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또 오더라도 지금은 그때만큼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교에 와보니 고등학교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도 처음에는 그랬다. 대학교라는 곳은 생각보다 지루했고, 냉정했고, 외로웠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생 시절이 그리워지곤 했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직 짧은 인생을 살아온 내가 섣불리 고등학생 시절이 전성기였노라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우스워 보일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고등학교 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고, 더 가슴 벅찬 일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전성기가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새로 쓰여지고 있는 나의 전성기일지도 모른다.

신수원 작.
<엘리제를 위하여>
91×72.5cm. Acrylic on canvas. 2012.

버림 그리고 제2의 인생

박기영 60세. 수필가.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 사진을 꺼내보지를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방에다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한다.

마음수련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부터는 죽음에 대한 태도도 많이 바뀌었고 삶을 편안하게 즐길 줄 알게 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 또한 유방암에 걸려 무척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연이어 충격을 받고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을 때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수련을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는 사실 늘 나만 위해서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년간 독거노인분들을 위해 목욕 봉사를 하면서도, 나는 정작 우리 어머니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씻겨 드린 적이 있었던가.

늘 어머니께 효도해야지, 생각하면서도 막상 마음만큼 실천하지 못한 나는 얼마나 불효막심한 딸이었는지.

돌아보니, 남에게 봉사하는 것도 모두 나의 만족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봉사하면서도 늘 뭔가에 목마르고 행복하지가 않았던 것도 내 만족을 위해서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나와 같이 사시면서 아픈 몸으로 집안일까지 도와주시느라 어머니는 얼마나 힘들고 고되셨을까. 마음으로는 늘 잘해드리고 싶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사무친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너무 집착하며 살았다. 아이들이 나를 외롭게 하고 섭섭하게 한 것에 원망도 많았지만, 내 마음을 바라보았더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후회가 아이들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겠는가.

마음수련을 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집착, 나만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냐는 원망, 어머니에게 진정으로 참회를 하고 잘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버리고 나니 정말 홀가분해졌다.

버리려고만 하면 버려지고 이렇게 편한 것을 근심걱정을 끌어안고 아까워서 버리질 못하고 살았으니 얼마나 고통이었는지. 당시에 갖고 있었던 많은 문젯거리와 혼란스러운 것들에서 많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면서 나는 다시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누가 별 의미 없이 한 말까지 의미를 알아내려고 많은 생각과 시간을 소비했다. 지금은 웃어넘길 줄 아는 방법을 알았으니 이 또한 감사하다. 버리면 편해지는 것을 알기에 나는 노력하며 나의 삶을 즐길 것이다.

삶에 좋은 계획이 있어 나를 이 세상에 내놓으셨는데 잡다한 생각과 지난날의 후회로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버리는 것을 선택한다.

삶을 즐길 줄 아는 방법을 배웠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버리면 버릴수록 매 순간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신수원 작.
<봄의 로망스>
53×72.5cm. Acrylic, oil pastel on canvas. 2013.

가슴 펴고 크게 웃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가장 빛났던 내 인생의 전성기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나를 울린 할머니와의 밥상

이정숙 57세. 전북 군산시 조촌동 21통 통장

“이통장! 이통장! 이통장 있어?!” 여느 동네와 달리 우리 동네는 이런 소리와 함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오늘도 어김없이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가신다.

사소한 문제부터 중대한 문제까지 할머니들은 나를 찾아와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러면 나는 당연지사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어떻게든지 해결해 드리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나를 ‘대단하다’ ‘자네 같은 사람이 어디 있냐’며 추켜세우지만 나는 그 일이 그렇게 칭찬받을 만큼 잘한 것이지는 모르겠다. 나에게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는 것이 나를 믿어주시는 거라 생각되어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아주 깊은 터널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에 그분들에 의해서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왔다고 나름 자부해왔다. 그런데 한순간이었다. 눈 깜짝할 새도 없이 허물어졌다. 남편의 사업이 IMF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20년 넘게 가꾼 나의 가정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나름 강한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나는 그야말로 공황 상태가 돼버렸고, 말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 되었다.

뭘 어떻게 손을 대야 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내 자신도 추스를 기력이 없어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기를 몇 달. 생전 입에도 대지 않던 술도 먹어보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어도 보고, 다리가 끊어질 정도 무작정 걸어보기도 했지만 답이 안 나왔다. 이젠 뭘 해먹고 살아야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때껏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았을까. 사춘기에도 안 해본 나의 인생에 대해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론은 희망이 아닌 좌절 쪽으로 기울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암담함이란.

그러던 어느 날, 집을 나서다가 우연히 동네 할머니 한 분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할머니가 아직 식사를 안 하셨다는 말에 집으로 모시고 와 밥을 차려드렸다. 오랜만에 편안하고 따뜻한 밥상을 받았다는 할머니 말에 나는 그만 울컥했다. 사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내 스스로 상처가 치유되는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형편이 어려워 식사를 거르시는 동네 할머니를 한 분 두 분 모셔다 밥을 차려드렸고, 나중에는 열 분, 스무 분이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할머니들께 밥 한 끼라도 해드리고 싶었던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특별한 기술이 없어, 족발집 배달부터 식당 일, 여관 청소, 찜질방, 대리운전까지 나를 써주시는 곳이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 돈으로 할머니들의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또한 발 뻗고 앉을 자리가 비좁아 집 화단을 밀어 ‘쉼터’라는 명목으로 방을 하나 만들었다. 그곳에서 할머니들이 식사하시고 앉아 담소라도 나눌 수 있었다. 조용하고 우울했던 우리 집에 이젠 사람들의 말과 웃음소리가 났다. 너무 보람되고 기뻤다.

할머니들과 친해지면서 나는 미용 기술을 배워 머리를 직접 손질해주고, 할머니들의 한글 공부를 위해 시청에 가서 한글 선생님을 보내달라고 부탁도 하고, 할머니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통장이 되었다. 할머니들의 문제를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싶어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대학교에 들어가 사회복지학도 전공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게 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나의 활동이 입소문 나면서 후원하고 싶다는 분들도 찾아오게 되었고 동 직원들도 할머니의 어려움을 발 벗고 해결해 주려고 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지금의 나는 이렇게 웃고 살고 있다.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하고 인생이 즐겁다.

어르신 쉼터를 만든 지도 13년이 되어간다. 낮에는 스무 분 정도의 어르신이 이곳에서 생활하신다. 어르신들과 같이 생활하기 위해 헌옷과 책 폐지를 수거해 파는 등의 일을 하며, 부지런히 생활비도 번다. 내년에는 문예교육사 자격증을 따서 할머니들께 한글도 직접 가르쳐드리고 싶다.

뜻하지 않은 시련이 나를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만들었다. 지금 현재 나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는 내 인생 최고의 삶을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해본다.

신수원 작.
<작은 별>
53×46cm. Acrylic, oil pastel on canvas. 2014.

청춘이라 불리는 두 딸에게 소망한다

소광숙 49세. 작가, <힘내라는 말은 흔하니까> 저자

돌아보면 굽이굽이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둘로 난 길에서 하나를 선택해 살았지만 때로는 가지 않은 길이 내가 걸었어야 할 여정이었다는 생각도 들고, 또 발 들여놓은 길에서 좀 더 성실했어야 한다는 미련이 남기도 한다.

1980년대 중반,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나는 세상과 나에 대해 수많은 ‘물음표’를 던지며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도서관과 최루탄 가스 언저리를 오가며 난 어느 색의 옷을 입고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 흰색도 검정색도 아니었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어정쩡하게 회색 옷을 걸치고 있었다. 시간은 고민하며 주춤거리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느새 졸업을 하고, 스스로의 삶을 책임져야 할 위치로 내밀렸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 안 되면 선생님이나 되어야지 하고 준비했던 교직 이수는 현실에서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독어과 선생님이 되는 길은 없었다. 구할 수 있는 일은 학원 강사 자리였다.

나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부모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어른이 되었다는 것에 미안해했다.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에 매진했고 성공적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4년이 흐른 후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껍데기였다. 대학만 나오면 보장된 미래가 있을 줄 알았던 어리석은 시간들이 후회스러웠다. 그리고는 청소년들이나 하는 질문이라 여겼던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미래를 탐색한다는 명분으로 부모님 울타리에 여전히 머무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었다.

종종 나는 딸들에게 이야기한다. 결혼은 선택이라고. 하지만 나의 결혼은 그렇지 못했다. 나의 염치없음과 떨어진 자존감을 가리기 위해 선택한, 남들 모두 ‘그렇다’고 가는 길을 따라갔을 뿐이었다.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어 당당히 부모님에게서 독립하지 못하고 나는 결혼을 선택하여 부모님 곁을 떠났다. 미리 해보거나 연습해 볼 수 없는 것이 결혼 생활 아닌가! 자발적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한 결혼 생활은 내게 자유를 얻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이깊이 가두었다.

첫딸이 태어나고 굳은 마음 하나 준비하지 못한 채 나는 엄마라는 이름을 얻었다. 벗어나기 힘든 굴레였다. 내 나이는 청춘이라고 불리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하지만 내 곁에는 커다란 두 눈으로 나만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다. 키워내야 하는 존재였다. 그때 과연 나는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눈이 부신 푸르른 청춘이었을까?

두려울 것 없이 세상에 마주 서 있는 것이 청춘이라면 나의 청춘은 이미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어린아이를 안고 한없이 두려웠다. 문밖을 나서면 아카시아 꽃향기가 그리도 낭만적일 수 없었지만 세상에는 나와 아이 둘만 남겨진 것 같아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로웠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처럼 삶이 결연하지도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는 노래 가사처럼 낭만적이지도 않은 일상이 흘렀다. 나는 아이를 등에 업고 ‘엄마 돼지 꿀꿀꿀, 아기 돼지 꿀꿀꿀…’과 같은 아이를 얼러줄 노래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그런 시간도 이제는 아련하다. 유치원 차에서 내리는 아이를 맞이하러 갈 일도 없고 친구와 놀이터에서 싸웠다고 씩씩거리며 돌아온 아이를 타이를 일도 없다. 큰딸은 어학 공부를 한다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켰고, 작은딸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느라 방문을 닫는다. 청춘이라 불리는 데 어떤 어색함도 없는 스물둘, 스물다섯의 딸에게 나는 소망해본다. 아니 스물일곱의 청춘이었던 나에게 다시 말을 건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던 길을 멈추지 말기를. 죽을 것같이 사랑한다는 김수현보다 더 멋진 남자가 있더라도 자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기를. 그리고 청춘의 시간을 서둘러 끝내지 말고 길게 늘려 쓰라고. 꿈을 꾸라고. 현실에서 꿈이 없다면 잠 속에서라도 꿈을 꾸라고.’

나는 오랜 시간 선택한 것이 주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느라 급급하게 살아왔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여전히 나를 묶고 있지만, 오늘 내가 걷고 있는 길을 나의 선택으로 여길 것이다. 이제 다시 꿈을 꾼다.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마흔이 넘어 대학원에 들어간 친구가 말했다. “팔팔한 20대 아이들과 지내려니 힘에 달려. 머리도 예전만 못한 것 같지. 외모도 신경 써야지….”

힘들다면서도 공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이는 친구에게서 청춘을 본다. 꿈을 이루려는 열정에서는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겁고 가벼운, 또 즐겁고 괴로운 삶의 여정을 걸어 이제 흰머리가 드문거리지만 새롭게 꾸는 ‘꿈의 무게’는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녀는 지금 ‘청춘’이다.

신수원 작.
<바둑이 방울>
53×73cm. Acrylic, oil pastel on canvas. 2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김성운 26세. 직장인. 인천시 연수구 송도동

나는 감사하게도 가진 것이 참 많다. 그중 몇 가지만 말해보자면 우선, 건강하다.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전거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어찌나 건강한지 심하게 잘 탄다. 기타도 잘 친다. 11년간 독학으로 배웠는데,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 몇 가지 곡은 연주할 실력을 갖췄다. 그리고 긍정적이고 밝아서 잘 웃는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데, 잘생겼다.(^^)

하지만 이렇게 가진 것이 많지만, 남들이 아주 쉽게 가질 수 있었던 한 가지를 가지지 못했다. 바로 부모님이다. 어머니는 내가 4살 때, 집을 나가셨다. 생활이 어려웠던 아버지는 나를 보육원에 맡기셨다. 내가 11살이 되면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12살 때, 돌아가셨다.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었다.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보육원 형들의 괴롭힘 때문에 숱하게도 맞으면서 팔다리에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아버지가 거두어주셔서 보육원에서 나갈 수 있었지만, 큰아버지 집에서도 호되게 혼나고 맞으며 농사일을 해야 했다. 결국 중학생 때, 큰집에서 쫓겨나 자취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자취할 때는 하루에 학교에서 주는 급식 한 끼만 먹으면서 살았다. 빨래도 제대로 하지 못해 매일 꼬질꼬질한 교복 한 벌 입고 다니는 것이 다였다.

나는 다시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정말 끔찍한 곳이었지만,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새로 들어간 곳은 다행히 예전과 같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다들 잘해주자, 나는 마음이 안정되었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꿈과 목표도 갖게 되었다. 살아갈 길이 공부뿐이라고 생각한 나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했고, 결국 서울대 동물생명공학과에 들어갔다.

이러한 경험으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삶에 대한 긍정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면서 점점 생활이 나아지자, 이제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나와 비슷한 환경의 아이들에게 그들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싶었다. 보육원에 사는 아이들은 만 18세가 되면 살던 곳을 떠나 혼자 살아가야 한다. 누구보다도 그들의 어려움을 잘 알기에,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립과 꿈에 대한 강연을 하는 봉사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작은 도움이 되고자 시작한 일이었지만, 아이들이 희망을 품는 걸 보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자는 꿈을 갖게 되었다.

사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나에게 상처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강연을 하면서 나의 어린 시절의 아픔이 치유되고, 위로받으며,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처를 나누면, 점차 아물어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 나누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상처도 어루만져 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나에게 좌우명과 같은 말이 하나 생겼다.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내가 만약 부모님이 없다는 것에, 외롭다는 것에, 가난하다는 것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인생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면,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일들에 감사하면서, 비록 현실은 정말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열심히 노력해서 이겨낼 수 있었으며, 점점 행복한 사람이 되고 있다. 올해는 원하던 기업에 취직도 하여 신입 사원으로서 많은 걸 배우고 있다. 매 순간 내 인생의 행복한 때를 만들어가고 있다.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 삶이 원하는 대로 잘 살아지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내가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은 시련과 역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이겨낼 수 있고, 행복해질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신수원 작.
<꿈꾸는 마음>
38×45.5cm. Acrylic, oil pastel on canvas. 2013.

나는 과연 의리 있는 사람일까?

‘봄 나드으리~’ ‘아메으리카노~’ ‘대으리운전~’ 의리 시리즈가 전 국민적인 유행입니다. 데뷔 이래 초지일관 의리를 부르짖었던 김보성은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고, 한때는 입 밖에 내기에 어색했던 ‘의리’는 이제 모든 단어에 마구 붙이고 싶을 만큼 친근해졌습니다. 왜 우리는 새삼스레 의리에 열광하는 걸까요? 단순히 김보성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당연한 정의가 쉽게 깨져버리는 사회에 대한 반작용, 불신의 사회를 거부하는 대중 심리의 반영이 아닐까요. 우리가 갈망하는 진정한 의리와 신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 편집자 주


당신, 왜 나랑 살아? 의리 때문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서는 여러 연구 결과를 토대로 오랜 기간 신의를 지키는 것에 대한 장점을 밝혔다.(A Healthy Dose of Loyalty. 2011. 6. 21일자)

연인에 대한 의리 애정 관계에서 장기간 신의를 지키는 것이 인생에 대한 만족도와 행복감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온다. RAND 고령화연구센터가 22년 동안 4천 명의 남성을 조사한 결과, 50대~70대 기혼 남성은 미혼이나 이혼 혹은 사별한 동년배에 비해 수명이 현저하게 길었다. 130명의 신혼부부를 조사한 결과 부부 싸움의 대부분이 ‘의리 없음’에서 비롯됐다. 상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신뢰가 돈독한 부부는 자신이 아닌 배우자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직장에 대한 의리 의리를 지키는 것은 경력에도 도움이 된다. 한 직장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들은 금전적인 보상뿐 아니라 생산성 및 창의성 향상을 경험한다고 스탠포드 경영대학원 연구는 밝혔다. 이직이 빈번한 실리콘밸리의 IT기업 직원 5만 명의 연봉을 조사한 결과, 한 직장에서 최소 5년 머무른 직원의 평균 연봉 상승률은 1년에 8%인 반면, 이직을 자주한 경우는 5% 정도였다. 또 한 회사에 오래 머무르는 직원은 그 회사에 온 지 얼마 안 된 직원에 비해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보인다. 미식축구 선수 역시 팀을 옮긴 직후 1년 동안은 성적이 향상되지만, 장기적으로는 5년 이상 머무른 선수들이 더 뛰어난 성적을 보인다고 한다.
좋아하는 팀에 대한 의리 한 팀을 계속 응원함으로써 팬이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지난 1년 동안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간 400명 이상의 스포츠 팬을 조사한 결과, 이사를 가더라도 고향 팀을 응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럴 경우 다른 도시로 이주하는 데 따른 불안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익을 놓고 의리를 생각하고, 위급한 시기에 목숨을 내놓고, 오랜 약속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지킨다면 완성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 공자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반드시 모두 성실하지 못하더라도 자기만은 홀로 성실하기 때문이며,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사람이 반드시 모두 속이지 않더라도 자기가 먼저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이다. ● 채근담

열매 맺지 않는 과일나무는 심을 필요가 없고, 의리 없는 벗은 사귈 필요가 없다.
● 명심보감

의리는 용기에 의해 행해지고, 용기는 의리에 의해 키워진다. ● 요시다 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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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사나이 김보성 의리 열풍

김보성이 1989년 데뷔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시작은 비락식혜 CF였다. 여기서 그는 느닷없이 쌀가마니를 후려치며 ‘우리 몸에 대한 의리!’를 외치더니 모든 단어에 ‘으리’를 집어넣기 시작한다. ‘전통의 맛이 담긴 항아으리!’ ‘신토부으리!’ ‘이로써 나는 팔도와의 의리를 지켰다. 광고주는 갑, 나는 으리니까! 으하하하!’라며 70년대 액션 영화 주인공같이 포효하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네티즌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사람들은 김보성과의 ‘으리’를 지켜야 한다며 식혜를 사먹기 시작했고 으리를 집어넣어 패러디 만들기 열풍이 이어졌다.
김보성이 의리를 외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1990년대부터 초지일관 의리를 외쳐온 ‘싸나이’였는데 왜 2014년에 갑자기 사람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걸까?
투박하게 의리만을 외치는 모습이 처음 볼 땐 너무나 이상하고, 촌스럽게 느껴졌지만 무려 10년 이상 의리를 외치자, 결국 사람들은 그 캐릭터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정까지 들어 그에 대한 의리 감정까지 생긴 것이다. 또한 사회에 대한 불신,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 극에 달했다는 것도 의리 열풍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김보성에 대해 단순한 호감을 넘어서서 거의 추앙하는 분위기까지 나타나는 것은 그가 초지일관 외친 의리라는 가치가 현실에서 극히 희소해졌기 때문이다. 선장은 승객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도망쳤다. 국가 시스템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우왕좌왕했다. 이럴 때 의리는 ‘나는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 ‘나는 당신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끝까지 내 손을 놓지 않겠다는 우직한 메시지에 사람들은 무의식적 안정감을 느꼈다. 자극적인 유희와 위안을 추구하는 불안 불신 고독의 각박한 시대가, 십 년 이상 의리를 외친 우직하며 우스꽝스러운 상남자에게 반응해 나타난 ‘으리 김보성’ 열풍. 김보성 자체는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지 못할 경우에 곧 사람들에게 잊혀질 수 있겠지만, 상남자 김보성 캐릭터에 열광했던 대중 심리는 그대로 남아 또 다른 ‘으리’의 대상을 찾을 것이다. ● 하재근 문화칼럼니스트


의리란 나를 옳게 다스리는 것

난 ‘의리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의리 있는 사람도 좋아한다. 의리라고 하면 보통 남자들 사이에만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의리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고 생각한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부끄럽지만 나는 “의리 있다”는 소리를 좀 들은 편이다. 지난 추억을 되짚어볼 때 가장 대표되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
1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마트에서 술을 사고(철없던 시절ㅎㅎ) 대학생쯤 보이는 분께 대신 계산을 부탁했다. 그분은 선뜻 허락해주었다. 근데 술을 건네받는 장면을 그곳 직원한테 딱 걸리고 말았다. 친구 두 명은 줄행랑을 쳤고 그분은 같이 왔던 친구들의 이름을 물었지만 끝까지 불지 않았다.ㅎㅎ 이후 나는 의리 있는 친구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2 고등학교 때 친구 둘이 싸웠다. 지나가던 3학년 언니가 선생님께 일렀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 모두를 불러다 반성문과 경위서를 작성하라고 하셨다. 싸운 친구 둘을 제외하고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반성문을 쓰게 되었는데 친구 둘은 자세한 내막을 써갔지만 나는 백지로 제출했다.
철없는 시절의 에피소드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새삼 의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언가 거창한 게 아니라 나를 믿어주고 뽑아준 회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 먼저 안부를 묻는 것, 연인 사이에도 한눈팔지 않는 것….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지켜나가고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의리를 아는 사람이지 않을까. 의리(義理), 옳게 다스리는 것, 날 다스려서 옳은 사람을 만드는 것. 의리! 하면 김샛별! 하고 떠오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김샛별 28세.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나에 대한 최고의 의리는?

우리 세대는 어릴 적부터 ‘반공반첩’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골목 놀이를 할 때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 또한 학창 시절부터 의리의 사나이, 정의의 사도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 중에 하나다.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구해주고, 불량 학생 눈에 찍힌 약한 친구 대신에 내가 주먹질을 당하기도 했다. 운동선수를 했던 때라 몸을 굉장히 사렸는데도 그런 불같은 의리는 어디서 나왔는지. ROTC 시절에는 ‘눈빛’ 때문에 술집에서 패싸움이 붙기도 했었는데 그럴 때도 나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은 절대 때리지 않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니다 하는 강직성, 약자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이 돌직구를 날렸다.
그러다 몇 년 전, 마음수련을 하며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열심히, 정의롭게’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가만히 보니 그 옛날의 가난하고 외로웠던 삶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웃들에게 온정을 베풀지 못했던 가난한 형편, 또 내가 태어났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 결국 나도 남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고 이름을 얻고 싶다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거였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의리’는 교육이라는 틀 속에서 배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쌓아온 의리와 비겁함에 대한 개인의 기준을 내려놓고 보니, 진정한 의리란 변하지 않는 ‘참’이고 그것은 곧 ‘무한한 세상 자체’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변하지 않는 참마음이 되는 것이 나에 대한 의리이자 세상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 마음이라면 무슨 일을 하든 남을 위할 것이고, 그런 사람이라면 저절로 많은 이들의 신의를 얻을 것이다. ● 나윤길 52세. 부산서여자고등학교 교사


관우는 왜 신으로까지 추앙받았을까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 유일하게 신앙의 대상이 된 인물이 바로 관우다. 중국, 일본, 대만, 태국 등 여러 나라에서 사당이 세워지고 추앙받고 있다. 한 나라의 수장(首長)도 아닌 일개 무장인 관우가 오랜 세월 동안 존경을 받는 이유, 그것은 의리에서 찾을 수 있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은 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유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싸웠으며, 평생을 함께했다.
관우의 마지막은 이랬다. 관우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 맥성이란 작은 성채에서 구원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진이었던 손권 군 편에서는 제갈근을 보내 그를 설득하려 했다. 손권과 사돈을 맺은 다음 협력해서 조조를 치고 한실을 부흥시키면 어떻겠냐고 유인하지만, 관우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나는 해현 출신의 이름 없는 무부(武夫)일 뿐으로 우리 주군이신 유비 형님께서 수족처럼 보살펴주는 은혜를 입었소. 어찌 의를 버리고 적국으로 갈 수 있으리오. 만일 이 성이 함락된다면 죽을 뿐이오. 옛말에도 있지 않소. ‘옥을 부술 수는 있어도 그 흰색을 바꿀 수 없고, 대나무를 태울 수 있어도 그 마디를 훼손할 수 없다’고 말이오. 비록 내 몸은 죽어도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으리니 그대는 여러 말 하지 말고 속히 여길 떠나시오.” 결국 관우는 손권에게 참수를 당했다.
그렇게 관우는 외롭게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지만 민중들의 마음에는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의 역대 제왕들은 관우의 신의와 충성심, 의리의 덕목을 널리 떨치게 하여 백성들의 귀감을 삼으려 했고, 이러한 작업은 민중들의 관우 숭배와 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
어떠한 유혹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의리,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용기, 목숨을 걸고라도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당당함. 관우 같은 사람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기만 해도 든든할 것 같다.
● 참조 도서 <관우의 의리론>(나채훈 | 보아스)

가정 폭력, 그 상처를 씻어내다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해줘야 할 부모로부터 폭력을 당한다면 그 상처가 어떨까요. 그 고통의 세월을 보낸 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겪어야 했던 부모의 구박과 구타의 기억은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증과 강박증에 시달리게 했다고 합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던 환경. 하지만 이제 다 벗어났다는 그녀가 담담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합니다. 혹여라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면 자신처럼 다 벗어나길 바라면서.


가정 폭력, 입에 담기도 참담한 단어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나?

당연하다. 이제 다 벗어났으니까. 한마디로 태어나면서부터 사랑 따위는 못 받았다. 맞고, 구박당하고, 미움 받으면서 컸다는 뜻이다. 그것도 나를 낳아준 부모로부터.

도대체 왜?

구구절절 말하자면 우리 집 가정사가 좀 막장 드라마다. 엄마가 18살에 나를 가졌다. 당연히 원치 않는 임신이었다. 양가에서 난리가 나고, 결국 아빠와 살림을 차렸는데, 아버지한테 다른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차마 아기와 여자를 버리지는 못했다.

그럼 어쨌든 가정을 꾸리신 건데….

그래서 동생들도 태어났다. 할머니가 아들을 원했는데, 둘째도 셋째도 딸이었다. 할머니가 뭐라고 했는지 엄마가 셋째를 낳고 죽는다고 약을 먹었다. 그때 내가 여섯 살이었는데 엄마가 젖을 못 먹이니까 내가 갓난쟁이를 돌봐야 했다. 아버지가 경제적 능력이 없어 엄마는 혼자 아이들 키우며 붕어빵 장사 등 부업을 했다. 그때 엄마 나이 겨우 20대 초반이었으니, 여자로서도 힘들었겠지. 그 원망이 다 나한테 왔다.

그 화를 자식에게 풀었단 말인가?

내가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 너만 아니었으면’이었다.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다. 뱃속에 있는 나를 지우려고 배를 때리고 그랬다더라. 엄마가 나를 부를 땐 이유가 두 가지였다. 혼내기 위해서, 아니면 시키기 위해서. 11살 때 엄마가 횟집을 하면서 엄마의 레이더망에서 좀 벗어나게 됐다.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는 장사를 도와야 했다.

어린 나이에 그걸 다 견뎠나, 나 같으면 가출했겠다.

그런 생각도 못 했다. 내가 핍박받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를 못 했던 것 같다. 그 환경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술 먹고 깽판은 쳤다. 15살 때 처음으로 술을 먹었다. 필름이 끊겨서 기억이 안 나는데, 다음 날 엄마가 엄청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뭔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속이 시원했다. 그때부터 주사가 생겼다. 그 뒤로 1년에 한두 번씩은 술 먹고 깽판을 친 거 같다.

일본에서 직장 생활 했다고 들었다.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했다. 혼자 자취하면서, 연애도 하고 자유롭게 사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집만 생각하면 힘들었다. 그러다 일본 회사와 연이 닿아 일본에서 13년을 살았다. 나중에 마음수련을 하면서 보니, 역시나 엄마한테서 도망가고 싶었던 게 제일 컸다.


마음수련은 언제 시작했나?

2007년. 그 당시에 엄마가 가출을 했다. 여자다운 삶 한 번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 50대에 들어서면서 엄마도 더 이상 못 견딘 거다. 이게 현실이구나 싶었다. 내가 아무리 재밌게 살아도 집은 늘 우울했다. 엄마를 찾고 한숨 돌리는데, 직장 동료가 한 일주일만 쉬고 오라며, 마음수련을 소개해줬다. 첫날 강의를 듣는데 이게 일주일만 할 게 아니더라.

마음수련은 자기 삶을 돌아보는 거 아닌가. 힘들었을 것 같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10살 때까지 인격이 형성된다고 한다. 나는 엄마의 핍박을 받으면서 자랐다. 아버지도 때리고는 했지만 엄마에 대한 상처가 훨씬 컸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면 안 되는 존재, 나는 사라져야 하는 존재였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짓눌려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내가 사실 오줌싸개였다. 사십이 다 되어서까지 오줌을 쌌다. 그런데 수련을 하며 두려움, 불안함 들이 버려지면서 멈춰졌다.

엄마에 대한 마음이 잘 버려졌나?

징글징글했다. 수련을 하면 할수록 남아 있는 게 엄마인 거다. 실제 엄마가 옆에 있든 없든 엄마가 계속 내 안에 있었다. 엄마한테 혼나면 안 된다, 엄마가 시키는 건 다 해야 한다, 이런 게 항상 있었다. 사람을 만나도 다 엄마로 대입이 됐다. 그러니까 사람이 싫고 짜증 나고 불안했다. 어차피 낳은 자식인데, 그렇게 미워했어야만 했나,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수련하면서 엄마 뱃속에서부터 모든 인연의 사진을 버리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가 배를 때리면서 날 죽이려고 하니까, 태아인 내가 나만 죽을 줄 아냐, 나 혼자 죽지만은 않겠다, 이런 마음을 먹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못 믿는 분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소름이 끼치고 끔찍했다. 결국 엄마는 자기를 향해 증오를 품었던 나를 본능적으로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안 그러려고 해도, 조절이 안 됐을 거다. 엄마도 후회하고 구박하고 후회하고 때리고 그랬겠지.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고, 참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럼 내 마음속의 감시자였던 그 엄마는 없어졌나?

원망은 없다. 엄마도 힘들었을 텐데 나는 내 마음사진으로만 엄마를 봤다. 엄마에게 힘이 되어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못한 게 미안했다. 그 뒤로도 수련하면서 엄마만 생각하면 그냥 눈물이 났다. 미워서도 아니고 원망도 아니었다. 한순간 아, 내가 엄마 마음을 닦아주고 있구나 알았다. 이게 다 엄마 마음이구나, 엄마도 이렇게 힘들었구나….

생활도 좀 바뀌었나? 주사 부리는 거는 없어졌나?

술은 아예 안 먹고 있다. 사실 원래 알콜이 맞는 체질도 아니었다. 19살 때부터 피던 담배도 끊었다. 끊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3과정 수련할 때쯤부터 내가 담배를 안 피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전혀 생각이 안 나서, 담배가 끊어졌구나 알았다. 주변에서 다 놀랐다.

사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나,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엄마 뱃속부터 10살까지의 산 삶에 모든 답이 들어 있다고 본다. 그때 어떤 환경이었느냐가 지금의 내 성격, 가치관 등을 정하지 않겠나.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알고 버려야 모든 문제가 풀린다. 나는 마음수련을 통해서 그 고통의 고리를 끊어냈다. 다 벗어났다. 당연히 마음수련을 하라 권하고 싶다.

디자인 기획자 김미진

간호장교 출신의 디자인 기획자 김미진(36)씨. 사관생도 시절 간호사관학교 캐릭터 ‘한나예’를 직접 디자인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녀는 사관학교 4년, 간호장교 6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자신의 적성과 꿈을 찾아 디자인 회사로 이직을 한다. 하지만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도 사람과의 부딪침, 스트레스, 상처들 때문에 방황했다는 그녀는 마음수련을 하면서 바른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해답을 찾았다고 한다. 이제는 자신의 재능이 세상에 쓰일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다는 그녀의 행복한 마음 빼기 이야기. 정리 & 사진 문진정

어릴 적부터 만화가가 꿈이었어요. 뭔가 그리고 만들고 글을 쓰는 게 좋았고 재능 있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지요. 그러다 중2 때 어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간호도 제대로 못 해드리고 임종도 못 지킨 채 엄마를 떠나보내야 했던 게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 후론 항상 마음 한편에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죠. 돌아가신 엄마에게 누가 되면 안 되겠다, 동생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모범적으로, 원리 원칙대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IMF를 겪으면서 집안 형편도 어려워졌죠. 7남매 중 여섯째인 저는 결국 대학에 진학해서 만화를 그리고 싶었던 꿈을 접고 학비가 면제되는 국군간호사관학교에 진학해야 했습니다. 사관학교에서도, 간호장교 생활을 하면서도 원리 원칙적인 성격은 여전했습니다. 상명하복이 기본인 곳에서 선배들에게도 저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배들에게 미움도 많이 받았지요.

꿈을 찾아 디자인 회사에 들어가서도, 가는 곳마다 부딪침은 심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주로 관공서나 기업의 캐릭터, CI, BI를 개발해주는 업무입니다. 그러려면 디자이너, 상사, 고객의 의견을 원만하게 조율하면서 프로젝트 전체를 이끌어나가야 하는데, 자주 듣는 이야기가, 너무 원리 원칙적이다, 강하다 등이었죠. 갈등은 심해지고 일은 더 많이 쏟아지고. 아마 마음수련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직장 생활 자체를 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마음수련을 하게 된 건 4년 전입니다. 그 당시 저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한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회사 생활에 지친 저는 휴직을 했고, 마음에 늘 품고 있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되살리며 너무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시인을 찾아갔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시를 쓰고 글쓰기를 즐겼던 저에게 그 선생님의 시는, 앞으로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자 이상향 자체였거든요. 하지만 그분을 가까이 모시게 되면서 작품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람에 대한 기대와 어릴 적부터 꿈꿔온 이상향마저도 완전히 무너뜨릴 만큼 큰 충격이었지요.

저는 그 상처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친구의 권유로 마음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고 만나왔던 인연을 한 명 한 명 떠올려보았습니다. 임종도 못 지키고 돌아가신 엄마, 모범적으로 살아왔던 학창 시절. 옳다, 바르다, 정의로움에 대한 엄격한 기준, 늘 인정받고 싶었던 제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배웠고, 내게 주어진 재능은 당연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왜 열심히 하지 못할까 불평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예술 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했던 이유도 교양 있고 우아하고 지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 나를 참회하고 버리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내 위주로만 돌아가던 생각에서 점점 벗어나게 되었고 사람들에 대한 높은 기대치나 환상도 없어졌습니다. 늘 머릿속을 맴돌았던 ‘해야 한다’ 하는 집착도 사라졌지요. 여가 생활을 해야 한다, 창작 활동을 해야 한다, 사진도 찍어야 되고 글도 써야 되고 만화도 그려야 한다, 하며 스스로 마음에 빚을 지고 있었는데 더 이상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사람들과 부딪치고 상처받았던 상황들이 제게 일어났던 이유도, 그만큼 제 틀이 강했기 때문이었지요.

그 시인 선생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선생님을 판단했던 제가 오만했음을 고백했지요. 늘 부딪쳤던 디자인 실장님께도 잘못했다고 사과를 드렸습니다. 수련을 마치고 다시 회사에 돌아왔을 때는 정말 낮은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주 전체의 본래 바닥은 ‘바닥’이기에 가장 낮은 마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거짓된 마음에서 모두 벗어났을 때만이 진정 겸손해지고 낮은 마음이 될 수 있음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그토록 동경해왔던 이상적이고 가장 바른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음수련을 시작할 무렵, 사람이 마음을 다 버리고 우주마음 자체가 되면 가장 지혜로워지고 가장 아름다워진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때는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궁금했는데 제 마음이 그렇게 되어보니 주변의 환경이 저를 지혜롭고 아름답도록 만들어주더군요. 직장에서는 상사나 동료가 조언을 해주고, 마음수련을 함께하는 분들도 저에게 언제나 지혜를 나눠주십니다.

“김팀장, 디자인을 이렇게 바꾸면 좋겠어~” “헤어스타일을 약간 바꾸면 어때?”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들의 말을 받아들이니 디자인도 더 좋아지고 더 지혜로워지고 저절로 예뻐지더라고요.

브랜드 디자인 강의를 나갈 때도 잘 가르쳐야겠다가 아니라 잘 도와드리고 싶다는 입장에서 하다 보니 무엇이 필요한지, 최대한 맞춰드리게 되고 듣는 분들의 만족도도 더 올라갔습니다. 직장 후배들이 어떻게 그렇게 스트레스를 안 받느냐며 신기하다고 해요. 돋보이고 싶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으면, 나는 옳은데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내려놓고 나면 똑같은 환경일지라도 마음가짐이 확 달라집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나의 재능이 쓰일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고 최선을 다하게 되지요. 예전에는 막연히 행복한 삶을 꿈꿀 뿐 그 방법을 몰랐다면, 이제 빼기의 방법이 있습니다. 강박 관념도, 스트레스, 걱정도 다 빼기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서 모두가 행복한 직장 생활을 해나가셨으면 합니다.

“보통 상사들이랑은 진짜 다르세요. 뒤끝 없고, 스트레스도 안 받고, 화를 내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4년째 함께 일하고 있는 김민지(27) 대리는 ‘자연스럽게, 나를 놓고, 저절로 된다’는 김미진 팀장의 마인드를 보고 배우는 점이 많다고 한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나오고,
겉에 배어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이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 중용 23장

영화 <역린>을 보다가, 한순간 그대로 멈춰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관 역을 맡은 배우 정재영이 중용 23장을 읊는 대목이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힘 있게 마음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평소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가 그리 어렵고,
매사 정성을 다하여 주변을 밝히기란 더욱 어렵고,
남을 감동시켜 세상을 변하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봅니다.
 
헌데, 비록 영화 속 대사로 인용된 고전의 한 구절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하고 단호히 말하니,
‘나는 그러지 못했어’라는 자책보다는
‘나도 그렇게 해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되더군요.
 
이제부터라도 아주 작은 약속, 소소한 일부터
최선과 정성을 다해보겠노라 마음을 단단히 먹습니다.
나도 성장하고, 세상도 변할 수 있도록.

자기 속서찾자

나는 새는 정처 없이 날아가지만
그것도 본능에서 갈 곳 알고
그곳에서 살다가 떠나가는 철새는
제 갈 길을 가다가 죽기도 하구나
세계의 제일 높은 히말라야 산을
넘어갔다가 돌아오는 철새도 있고
자유로워 보이는 새들의 삶도
항시 죽음이 도사리고 있구나
흐르는 구름 따라 자유로이 살고픈 사람도
방해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자유로이 살고픈 생각도
정처 없이 걸림이 없이 떠나고 싶은 심정이나
가졌던 인연과 가진 것에 자유로이 떠나지 못하고
고달픈 인생사에 뜻 없는 인생사에
죽고픈 생각이 날 때도 있었으리라
갑갑한 심사에 무엇을 하여 자유가 될까
가졌던 삶을 떨쳐버리고픈 마음이
수없이 많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이 심사에서도 처자 두고 어디론가
이국땅으로 산사로 훌쩍 떠나버리고
그것이 집착을 버림이 아니고
현실 도피하였는지 무엇 때문인지는
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열등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이혼하고 동반 자살하는 것도
자기의 마음에 현실이 맞지 않아서라
모두가 자기 위한 방법이었으나 모두가 그 원한만 안고
자기를 위함이 없었던 것 같구나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에
처자 두고 일본 가서 돈 벌어오겠다던 남편이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 수가 너무 많구나
세월이 지나 청춘과부로 세월 보내다
언제나 돌아오나 눈 빠지게 기다리다가
늙어 남편이 와도 새 처자를 데리고 오기도 하고
새 처자를 두어 다시는 못 오겠다고 말하나
잃어버린 젊음을 어디서 찾고 원한만이 남구나

이런저런 수많은 사연에 사람은 삶을 살아왔지만
이것도 저것도 모두가 원한이라
가도 와도 진정한 자유는 없고 바른 삶 또한 없었다
어디로 가야 어디에 살아야 자유가 있을까 살고플까
그것을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의 못난 마음을 버리고 버려서
못난 자기를 없애고 없애서
못난 자기가 없으면 진정한 자유고
갈 곳 가서 잘 살 수가 있을 텐데
말 없는 산천과 하나 되어 말 없는 하늘과 하나 되어
말 없는 세상과 하나 되어 살면
부족함이 없고 자유고 해탈이라
마음의 노예가 되어 이곳저곳서 자유 행복 찾아도
그 자유 행복이 없는 것이라
세상 마음과 하나가 되면
나의 헛된 마음이 없이 항시 쉬구나
항시 그 마음이 변함이 없고 마음이 오고 감이 없어
오고 가지를 않고 자유고 해탈이구나
못난 자기를 버리고 사는 자가
신선이고 부처이고 성인이라
못난 자기를 버리는 자가
말만 듣던 영생천국을 살아서 가지
이것 또한 꿈인가 생시인가
사는 곳이 천극락임 알고 살면 신명 나는 삶이 아니겠는가
푸른 창공은 말이 없으나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고
산천도 말이 없으나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고
인간만이 말이 많고 생각도 많으나
하나도 제대로 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인생이라
세상은 말이 없어 좋고 인간은 말이 많아 싫구나
저가 잘났다는 말밖에 있겠는가
무엇이 그리웁고 무엇이 해야 할 일인가
이것저것이 모두가 부질없는 꿈인 걸
그 꿈을 깨고 보면 부질없음 알고
꿈속에 허덕이지 않듯
못난 자기를 없앰이 꿈 깨는 약이라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시인, 저술가, 강연가입니다. 2002년 인간 내면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UN-NGO 산하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평화 대사로도 활동 중입니다. 저서로 <세상 너머의 세상>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등이 있으며 그의 저서 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은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에서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5개 국제도서상 2013 LNBA, NIEA, IBA, IPPY Awards, 2012 eLit Awards에서 영성, 정신, 철학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근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의 영역본이 2014 에릭 호퍼 북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하는 등 마음과 비움, 깨침에 대한 우 명 선생의 철학이 전 세계의 관심과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