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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멋진 세상을 음미하라 _몽골 2

글 & 사진 이용한 <시인, 여행가>

몽골에서는 여자에게 “암사슴 같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예쁘다’는 최고의 찬사이다. 반면 남자는 “늑대 같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용감하고 멋지다’는 뜻의 찬사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늑대 같다는 표현과는 상반된 의미로 통한다.
몽골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처음 늑대와 암사슴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고 이런 이야기는 신화로도 전해져온다. 그래서 몽골 사람들은 초원이나 구릉에서 늑대를 만나면 행운이 생길 거라고 말한다. 더러 유목민이 키우는 가축을 늑대가 물어가거나 다치게도 하지만, 몽골 유목민들은 이때에도 늑대를 잡기보다는 쫓아버리기만 한다.

 

이 지구에서 아직도 유일하게 원초적인 자연의 삶을 꾸려나가는 곳이 있다면, 몽골이다. 그러므로 몽골의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선량한 자연의 후손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땅의 자식들이다. 몽골의 아이들에겐 초원과 사막이 학교이고, 양 떼와 말과 낙타가 스승이다. 이 아이들은 아장아장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말고삐를 잡는다. 한국의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유치원과 학원에 다닐 때, 이 아이들은 말고삐를 잡고 초원과 사막을 공부한다. 한국의 아이들이 컴퓨터와 TV를 보고 있을 때, 이 아이들은 초원의 지평선과 구름을 시청한다.

어느 쪽이 더 불행한가, 행복한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들은 그렇게 평생을 살면서도 우리처럼 불평과 불만, 불안 속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작해야 게르 한 채에 양 떼 50마리를 키우며 살아도 언제나 우리보다는 그들이 더 행복해 보인다. 언제나 부족을 느끼며 더 많이 가지려는 쪽은 우리다. 언제나 남을 딛고 올라서 이기려는 쪽도 우리다. 도대체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그토록 눈에 불을 켜고 입에 칼을 물고 사는 걸까. 세상에는 분명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럴 땐 멈춰 서야 한다.

우리는 이 멋진 세계를 천천히 음미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맛있는 알타이의 푸른 바람’ 알타이를 노래한 몽골의 시 한 구절이다. 몽골인들은 바람에도 색깔이 있다고 말한다. 가령 고비의 모래바람은 ‘하얀 바람’, 알타이의 바람은 ‘푸른 바람’. 산자락의 초원이 푸르고, 하늘이 푸르니 바람도 푸르다. 푸른 바람을 뚫고 보르항 보다이(붓다를 뜻함)로 간다. 알타이에서 가까운 만년설산. 가깝다고?

이용한님은 196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습니다. 길에서 만난 순수한 풍경과 사람, 고양이를 담아온 사진가이기도 한 님은 그동안 시집 <안녕, 후두둑 씨>, 문화기행서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옛집 기행> 고양이 시리즈 <명랑하라 고양이> 등을 펴냈으며 영화 <고양이의 춤> 제작에도 참여했습니다. 여행 에세이로는 <티베트 차마고도를 따라가다>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등 다수가 있습니다.

 

여백, 비워야 채워지는 무한의 공간

강화도 해 질 무렵 바닷가.
강화도 동막리. 2011.

사진 & 글 전학출

어린 시절, 꼴망태를 메고 아버지 뒤를 쫓아 나섰다. 안개가 유난히 자욱한 저수지 길을 돌고 돌아 산을 오르면, 한 편의 수묵화 같은 풍경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 기억 때문인가. 지금도 안개 자욱한 풍경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시절의 풍경들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그 떨림을 느끼며 새하얀 화선지에 먹으로 채색하듯 오늘도 셔터를 누른다.

말도바다
새벽이면 중국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중국과 가장 가까운 섬이다.
서해의 외딴섬 말도. 2010.

자연은 늘 변화한다. 한 번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분명 같은 장소임에도 똑같지 않다. 어제는 없던 구름이 지나가든,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이 흔들리든, 자연은 매 순간 변화한다. 여백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찍는 동안 자연을 이해하며 순응하게 되었다. 화가는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사진가는 자연이 응해주지 않으면 그 어떠한 사진도 찍을 수 없다. 그 자연의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마음은 자연의 텅 빈 여백을 닮아갔다. 삶이 되어갔다.

느티나무
느티나무 보리밭에서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전북 김제. 2012.

여백은 비어 있는 미완성 상태 같지만 보는 사람의 생각과 감성에 따라 채울 수도 있고 비울 수도 있는 무한의 공간이다. 가득 차 있으면 담을 수 없듯이 비어 있지 않으면 채울 수도 없다. 여백은 누구에게나 무한한 상상력을 주고 그 안의 주인공이 되게 하며 자유롭게 생각하게 한다.

 

나룻배 어부가 전날 쳐놓은 그물을 안개 속에서 걷어 올리고 있다. 남이섬. 2011.

사진가 전학출님은 1946년에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으며, 홍익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30년이 넘게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우리나라 자연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담아온 님은 16회의 개인전, 20여 회의 그룹전을 해왔으며, 저서로는 <한국의 풍경 이야기> <한국 풍경 사진 친구들>(공저) 등이 있습니다.

안녕, 당나귀


오랜 세월 잘 버텨온 내 차가 주저앉았다. 견인차를 불러 정비소에 갔더니 사장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엔진을 바꾸든지 폐차를 시키든지 하란다. 일찍이 가난한 집에 와서 고락을 함께한 정든 당나귀처럼, 헤어지려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그리고 당장에 주말마다 시골 어머니 집에 가야 할 일도 난감했다. 하지만 나는 이 급작스러운 사태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음을 비우면 편하고 궁하면 통한다. 나는 나름대로 방안을 강구하고, 토요일 오후 기차를 타고 어머니 집으로 출발했다. 오랜만에 열차에 몸을 싣고 창밖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느리지만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순천역에 도착해서 미리 계획한 대로 시민공영자전거 거치대로 갔다. 그곳에 있는 전자판에 회원정보를 입력하니 잠금 쇠가 딸깍 열렸다. 그리고 노란 자전거 한 대가 선물처럼 튀어나왔다. 나는 그 자전거를 타고 도심을 가로질러 변두리에 있는 마지막 공영자전거 거치대에 도착하였다.

공영자전거를 반납하고 이제 걷는 일이 남았다. 논길과 둑길을 하염없이 걷자 하니, 폐차장으로 간 내 당나귀가 그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무튼 허위허위 그 긴 여정 끝에 시골집에 도착해서 어머니 밭일을 거들었다.

다음 날, 나는 미리 계획한 대로 새벽같이 일어나 창고에 있는 낡은 자전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자전거를 타고 어제 그 마지막 공영자전거 거치대로 갔다. 나는 또 회원정보를 입력하고 노란 시민공영자전거를 빌렸다. 이제 두 대를 한꺼번에 몰고 집으로 왔다가, 집 자전거를 창고에 넣어둔 다음, 노란 공영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면 성공이다.

나는 집 자전거를 탄 상태에서, 한쪽 손으로 노란 자전거의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서서히 페달을 밟았더니 두 대의 자전거는 의좋은 형제처럼 나란히 굴러갔다. 아! 내가 봐도 대단한 기술이었다. 혼자 보기 아까운 그 묘기를 아무도 봐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 집까지 무사히 돌아왔다.

집 자전거를 창고에 넣어 두고, 역을 향해 출발하려는데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손으로 우산을 펼쳐든 채 노란 자전거에 올랐다. 그런데 세상에 이럴 수가! 노란 자전거의 한쪽 페달이 없다! 원래 고장 난 것인지, 아니면 아까 몰고 올 때 페달이 빠져버렸는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또 나 홀로 묘기 대행진을 벌였다.

일단 성한 한쪽 페달을 밟고 나서 발등으로 그 페달을 되감아 올린 다음, 다시 밟기를 반복해 보았다. 하지만 어림없었다. 이번에는 자전거 안장에 앉은 채 양다리를 길게 늘어뜨려, 캥거루처럼 두 발로 땅바닥을 힘껏 차보았다. 자전거는 빌빌거릴 뿐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 발과 두 발의 차이가 그렇게 클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결국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털레털레 끌고 갔다.

그런데 하늘이 무심치 않았다. 얼마 안 가서 기적처럼 길에 나뒹굴고 있는 자전거 페달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비에 젖은 그 페달을 얼른 주워 돌로 꽝꽝 박아 조립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달렸다. 아! 형언할 수 없는 성취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니 멀리 어머니가 서 계셨다. 칠순 노모는 오십 대 아들의 희한한 자전거 행진을 줄곧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한참을 달리다 개천 다리 밑에 자전거를 세웠다. 그리고 이 해괴한 상황에 노심초사하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벌써 순천역에 도착했느냐고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막 도착했다고 뻥을 쳤다. 어머니의 감격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우리 아들 장허다. 용감허다. 우리 아들!”

전화를 끊자마자 자전거에 올랐다. 나는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또다시 죽어라 페달을 밟아야 했다. 그날 그렇게 한바탕 자전거 쇼를 벌이고 나니, 떠나보낸 당나귀에게 조금 덜 미안했다. 무엇이든 정들다 헤어지면 그런 이별 의식이 필요한 모양이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소아암 환아들을 위한 동물교실

류성용 ‘휴애니원’ 운영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본과 4학년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부터 할게요. 얘네 이름은 샤인, 뭉치, 후추, 테라, 구름이에요.”

지난 1월,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열린 소아암 환아들을 위한 ‘동물교실’. 귀여운 동물들이 나타나자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아이들은 동물들과 교감을 나누며 어릴 때부터 아프면서 겪었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고 한다. 2010년 여름 방학부터 소아암 환아들을 위한 ‘동물매개치료교실’을 열어온 류성용과 친구들의 훈훈한 이야기.

– 편집자 주

“선생님, 얘는 이름이 뭐예요?” “어떻게 만져야 해요?” “뭘 좋아해요?”

재작년 겨울 방학 동물교실 때였다. 수업 시간 내내 눈 한번 안 마주치며, 짜증만 부렸던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강아지를 보더니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이가 관심을 가진 강아지는 하얀 털이 특징인 비숑이라는 귀여운 강아지였다. 강아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이의 얼굴은 훨씬 밝아져 있었다.

소아암을 앓고 있는 아이들은 마음까지 아픈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부터 병원 생활을 하다 보니, 또래 친구들과도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굉장히 위축돼 있기도 하고, 사람에 대한 배려나 사회성이 부족한 경우도 많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아이들도 동물과 만나면, 대부분 먼저 다가가고 싶어 하고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이런 교실을 열어주는 학생들에게 너무 감사합니다. 아이가 아프면 가족 모두 마음이 아픈데, 이런 교실을 계기로 한 번이라도 아이의 웃음을 보게 되면 너무 기쁘지요.”1회부터 4년째 동물교실에 참가해온 천송이(14세) 양과 어머니 김성희씨. 송이 양도 이런 활동을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다고 한다.

온순하고 귀여운 동물들을 보자마자 표정부터 환해지는 아이들, 심지어 소아암으로 인해 전혀 몸을 움직이지 못해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가, 귀여운 동물을 보더니 스스로 만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기도 했다.

‘온순한 동물을 만나다 보면, 아이들의 마음까지도 치료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은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2007년 대학교에 입학한 후, 자취를 시작하면서 나를 둘러싼 많은 환경이 달라졌다. 여러 가지 어렵고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가장 큰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부재, 어머니의 빈자리, 그걸 감당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혼자 방에 멍하니 누워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우울해졌다. 근데 그즈음 내가 만나게 된 아이가 길에 버려진 아주 조그만 삼색 아기 고양이였다. 꼭 엄마를 잃은 내 모습 같기도 하고, 구슬프게 우는 것이 가여워서, ‘삼순이’라고 이름 붙여주고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는데, 내가 멍하니 누워 있을 때면 삼순이도 옆에 와서 가만히 누워 있곤 했다. 삼순이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2년 후 소아암 환아들을 위한 학습 봉사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정서적인 도움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심은 선하지만 어떻게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는지 ‘관계 맺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배려심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부분 때문에 병원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간다 해도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따돌림으로 인해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기도 한다. 그때 삼순이가 떠올랐다. 삼순이 같은 반려동물을 키우다 보면, 관계 맺는 법도 배우고 따듯하고 부드러운 동물들을 쓰다듬는 것만으로도 정서적으로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지난 1월 열린 동물교실 현장. 20여 명의 소아암 환아들이 참가했다.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전문 동물매개 치료사 분들과 샤인, 뭉치, 후추, 테라, 구름이 등 동물치료를 위해 훈련받은 개들이 함께했다. 개들과 친구 되기, 아픈 개들 만져주기 등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의 표정은 훨씬 밝아져 있었다.

현재 동물교실은 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고 있다. 동물교실은 방학 때마다 서울대 강의실에서 열리는데, 약 한 달가량 10회 정도의 수업이 진행된다. 종강 후에는, 아이들과 즐거운 소풍 시간도 갖는다.

몇 개월간의 준비 과정 끝에, 2010년 여름 방학을 맞아 제1회 동물교실을 열었다. 먼저 한국소아암재단에서 받은 소아암 환아의 연락처로 일일이 전화를 해서 15여 명의 참가자를 받고, 과 친구들에게는 자기가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엔 개와 고양이 등 동물에 대한 기본 상식을 가르쳐준 후, 동물을 만지고 이름을 불러보고 간식을 만들어주는 시간도 가졌다. 동물도 무조건 다가간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동물도 좋아하는 것이 있고, 싫어하는 것이 있다. 아이들은 ‘이 동물이 나를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상대에 대해 배려하는 법을 배워갔다.

전문적인 동물매개치료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는 전문가들도 초청을 했다. ‘동물매개치료’는 동물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신체적, 정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이들의 치료에 도움을 주는 심리 치료의 한 분야였던 것이다.

동물은 참 단순하다. 동물은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감정을 품는 ‘양가감정’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사랑하거나 싫어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등 한 감정을 품는 동안에는 그 감정만을 생각한다.

반면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좋아하면서도 질투하는 등 한 번에 여러 감정을 품을 수 있다. 그러한 것들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는데, 단순한 동물과의 교감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나 피로감을 보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는 동물을 보면서, 상처받은 마음도 치유받고, 또 나를 받아주는 동물을 보며 자신감도 갖게 되는 아이들도 많이 보아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은 1회부터 참가했던 당시 초등학생 2학년 여자아이다. 백혈병 치료 중인 그 아이는, 학교에서 놀림도 당하고, 따돌림을 많이 당해서 위축되어 보였다. 그런데 방학 때마다 동물교실에 참가하던 어느 날 ‘수의사’라는 꿈을 갖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어떻게든 걸으려 하고 밥도 잘 먹으려 하는 등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표정도 점점 밝아졌다. 아이의 어머니가 감사하다며 눈물을 보이실 때는 정말 찡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독한 병을 앓은 아이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먹는 거라고 한다. ‘동물교실’이 그런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에 나도 감사했다.

방학마다 진행하다 보니, 관심을 갖는 친구, 후배들도 늘어났다. 우리는 아예 ‘휴애니원(Human + Animal = One)’이라는 ‘동물교실’ 팀을 꾸리게 되었다. 앞으로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정서 치료로, 동물교실을 넓혀볼까 한다.

동물교실을 여는 것이 나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활동 하나가 어떤 친구에게는 꿈을 주고, 희망을 주는 삶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니, 작은 나눔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더 느끼게 된다.

누구나 시작은 미약하지만, 작은 발걸음이라도 내민다면, 그 하나하나가 모여 정말 이 사회에 멋진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샘 킴, 마음까지 따듯하게 해주는 요리사

샘 킴의 요리는 따듯하면서도 정갈하고, 아기자기하면서도 아름답다. 그렇기에 “기분 좋아지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요리”라고 평가받는다. 2010년 미국스타셰프협회 선정 ‘아시아라이징스타셰프’, 2010년에 방송된 MBC 드라마 <파스타>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현재 바른 식문화 운동을 하며 요리사가 되고 싶은 소외 계층 아이들을 돕고 있다. ‘요리와 삶은 같이 가는 것’이라 말하는 셰프 샘 킴. 그의 파스타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이야기.

분주한 저녁 시간 이탤리언 레스토랑 ‘보나세라’의 주방. 총괄셰프 샘 킴이 요리 하나하나를 꼼꼼히 감수한다. 그가 15여 명의 주방 식구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조금은 늦더라도 스스로가 100% 만족할 수 있는 요리를 만들라는 것.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만든 사람의 정성까지 함께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음식에 무한한 가치를 올려놓자’라고 했는데, ‘요리의 가치’란 무엇인가요?

요리는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을 주는 언어도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요리 하나로 할 수 있는 게 참 많아요. 한번은 제가 요리사가 꿈인 청소년들을 멘토링하러 갔다가 한 중학생 아이에게 들은 얘기인데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에게 자기가 학원에서 배워간 애호박볶음 요리를 해드렸더니, 아빠가 감동해서 술을 끊으시더래요. 아빠도 딸이 고사리손으로 만든 요리를 받는 순간 마음이 부끄러웠겠죠.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되게 부끄러웠어요. 저는 제가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고가의 음식을 만들지만, 과연 요리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어떤 게 더 가치가 있을까. 당연히 그 중학생 아이의 애호박 요리겠죠.

“그 애호박 요리처럼, 요리가 가진 무한한 힘을 보여주고 싶다”는 샘 킴. 그에게 요리가 가진 힘을 제일 처음 보여주었던 분은 어머니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며 무작정 하숙집을 시작했던 어머니. 김밥도 잘 못 쌀 정도로 요리 솜씨가 없던 어머니는 하나하나 부딪혀가며 요리를 배워가셨고, 언제나 정성껏 푸짐하게 하숙생들을 위한 밥상을 차리셨다. 비록 뛰어난 솜씨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진심 어린 요리에 감동하고 행복해하던 하숙생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그도 자연스레 요리사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1999년 8월, 그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요리사의 꿈을 찾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비행깃값 정도만 간신히 마련한 채 오른 유학길. 떡집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일식집 막내로 들어가 채소 다듬기, 생선 손질, 설거지와 청소 등 잔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웠다. 그 후 초밥 요리사로 3년. 하지만 정적인 일식 요리사보다는 움직임이 많은 역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주방에서 일하고 싶다는 열정이 커져갔다.

그는 다시 이탤리언 식당에서 채소 다듬기, 면 삶는 법부터 배웠다. 일이 끝나면 주방에 남아 수없이 요리 연습을 하고, 쉬는 날이면 대형 서점에 가서 하루 종일 요리책들을 보며 레시피를 연구했다. 그러면서 점점 이탤리언 요리사로서의 실력을 키워갔지만, ‘동양인 요리사에겐 파스타나 리소토 같은 불을 사용하는 이탤리언 음식을 맡길 수 없다’는 편견에 부딪친다. 하지만 그럴수록 실력으로 입증해 보였고, 결국 그는 유명 레스토랑의 수석셰프, NBC 방송국의 TV쇼와 드라마의 오픈과 엔딩 파티를 지휘하는 등 실력 있는 이탤리언 셰프로 당당히 인정받는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인종을 초월해 누구나 감탄하듯, 항상 눈을 반짝이며 즐겁게 배우고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청년의 진심은 결국 통했던 것이다.

이방인으로서 이탤리언 레스토랑의 셰프가 되기까지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어요. 좋은 레스토랑, 좋은 셰프들이 일하는 곳에서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 100장 넘게 이력서를 돌렸지만 한 군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꼭 일해보고 싶은 레스토랑이 있으면, 이력서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것을 보고서도 몇 번이나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하다 보니 결국 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파스타나 리소토 같은 음식들에는 프라이팬을 안 주더라고요. 예를 들어 미국에서 김치찌개를 먹고 싶다면, 당연히 한국인이 하는 걸 먹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이탤리언 음식은 이탤리언이 하는 것을 먹고 싶어 할 거라는 이유였죠. 이해는 가지만 꼭 그 나라 사람만 잘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안 되겠다 싶어서, 한번은 주방이 아주 바쁜 시간에 무작정 프라이팬을 잡고 저도 파스타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그 후로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서게 된 거죠.(웃음)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은 어떤 역경도 이겨낸다는 걸 보여주셨네요.

제가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딱 그거예요. 환경에 나를 가두지 말라고요. 어떤 친구가 저한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고졸밖에 안 되는데 유학을 갈 수 있을까요, 훌륭한 셰프가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랬죠. “나는 고졸인데…”라고 말하는 자체가 이미 나를 과소평가하는 거다, 고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다리에 족쇄를 채우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더 큰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리지 말라고요. 자기만의 꿈을 이루느냐 마느냐는 내 자신이 얼마나 긍정적이냐에 달려 있는 거 같아요.

샘 킴의 멘토는 누구셨을지 궁금합니다.

최초의 멘토는 어머니였고요, 요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는, 미국에서 처음 만난 일식 스승님이세요. 한국인 초밥 요리사로, 한국 셰프 중에서도 최고인 분이었는데, 성격이 되게 괴짜셨습니다. 밑에 셰프의 요리가 마음에 안 들면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버리기도 하셨어요. 그런데 그렇게 완벽한 음식을 만들어 드리려는 모습이 좋더라고요. 그분 말씀이 “요리란 하얀 백지 위에 그린 그림이다. 만약 산을 그리고 나무와 강을 그린다면 요리사는 그 사물의 아름다움과 높이가 다 다름을 표현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정말 인상적이어서, 그렇게 요리를 할 수 있는 감각을 익히기 위해 수없이 노력을 했습니다.

샘 킴 요리의 출발점이 되어준 어머니 김영애 여사와 함께.

후배 요리사 홍준표씨의 요리를 봐주고 있다. 늘 후배들을 위한 진심 어린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미국 유학 시절부터 13년 이상 쓴 레시피 노트가 40여 권. 지금도 레시피 노트는 그가 있는 자리라면 어디에서나 항상 펴져 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을 바로 메모하기 위해서.

최고의 셰프를 꿈꾸며 미국 생활을 하던 그에게, 어느 날 ‘진정한 요리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유명한 셰프들을 따라 홈리스(노숙자)들에게 음식 봉사를 하러 가게 된 것이다. 몇 백 불짜리 코스 요리를 만들던 최고의 셰프들은 홈리스들을 위해서 1달러짜리 ‘타코’를 만들었다. 처음엔 그 모습이 의아했는데 단 1달러짜리의 음식에 행복해하는 홈리스들을 보면서, 기존의 생각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가치들이 되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마음을 감동시키는 요리를 하자, 음식이 가진 무한한 힘을 보여주는 요리사가 되자, 그때부터 또 다른 꿈이 생겼지요.”

그는 소외 계층 아이들에게 요리 교육을 시켜주어 당당하게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기업을 만들기로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실천하기 위해, 미국에서 셰프로서 쌓아온 명성을 모두 내려놓고, 2009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에서는 전혀 인지도가 없었기에 어려움도 겪었지만, 2010년 1월 드라마 파스타가 방영되면서 일약 스타 셰프로 떠오르며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도 날개를 달게 된다.

지금은 요리사를 꿈꾸는 친구들을 위한 멘토링 강의, 아이들을 돕는 방송 프로, 요리를 통한 나눔 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아름다운재단의 ‘보육원 아이들에 대한 정부 식비 지원 늘리기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고른 영양분을 제공해줄 수 있는 식비 지원은, 곧 아이들의 평등한 미래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요리를 가르쳐주는 시간이 샘 킴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탈북자나 고아들, 쉼터에서 지내는 아이들에게 요리를 가르친 적이 있어요. 처음엔 어두웠던 표정들이 요리를 하면서 웃음도 짓고 눈빛도 초롱초롱해지는 것을 보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얼마 전에 요리사가 꿈인 소아암에 걸린 7살 아이와 같이 요리를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순간이라도 셰프가 됐다는 꿈이 이뤄지는 경험을 한 후 아이의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됐대요. 그럴 때면 제 개인의 뿌듯함을 넘어, 요리의 무한한 가치를 되새기게 되니, 저에게는 참 소중하고도 고마운 시간들이지요.

성공한 셰프이지만 정말 이 길이 나의 길인가, 되짚어 보거나 후회한 적은 없으신지요?

성공이라는 말은 좀 이른 거 같아요. 사실 성공한 셰프, 스타 셰프라는 시선도 부담스럽습니다. 아직 제가 꿈꾸는 최종 목적지에는 가지도 못했으니까요. 무엇보다 요리라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어려움도 어려움으로 느끼지 않았고 후회 같은 것도 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지금도 제가 가장 잘해야 하는 분야는 오직 요리라고 늘 생각해요. “요리가 좀 그런데?”라는 말에 피가 끓는 걸 보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느끼는 거죠.(웃음)

샘 킴이 전하는 내 인생의 레시피

‘차갑게 먹어도 맛있는 알리오 올리오’

나는 파스타를 정말 좋아한다. 미국에서 이탤리언 요리를 배우던 막내 시절 선배 셰프들이 후배들을 위해서 파스타를 만들어주면, 늘 마지막 뒷정리 후 식어버린 차가운 파스타를 먹었는데 그것조차 너무 맛있었다. 한국에서 총괄셰프가 된 후 나도 그때의 선배들처럼 후배들에게 파스타를 만들어주었다. 올리브오일을 넉넉하게 두른 후 다진 마늘과 때에 따라 남은 재료들을 넣어 면과 함께 볶아 만드는 ‘알리오 올리오!’ 간단히 허기를 면하는 용이었던 이 파스타는 드라마 <파스타> 덕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사진 제공 <소울 푸드>(담소)

요즘 강연이나 SNS를 통해 바른 식문화 운동을 펼치고 계시지요?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을 나타낸다(What you eat is who you are)’라는 것을 많이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몸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기잖아요. 그래서 더 나은 먹을거리를 먹으면, 더 나은 삶을, 더 나은 미래를 가꿔갈 수 있을 것이라는 거죠. 요즘 어린아이들의 비만율이 20년 전에 비해 5배가 되었다고 해요. 아이들의 식단이 인스턴트 위주로 변해가면서 생기는 변화죠. 일단은 지금 무엇을 먹는지 점검해보는 습관이 중요한 거 같아요. 음식 주문 전에 잠깐이라도, 어제 뭘 먹었지? 생각해 보는 겁니다. 어제 고기를 먹었으면, 오늘은 채소를 먹자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한동안 안 먹은 음식도 적어보면, 거기서 오는 부족한 영양소도 알 수 있지요. 요리사는 사람의 병을 예방할 수 있게 하는 직업이니까, 그런 걸 꾸준히 알리려고요.(웃음)

좋은 요리를 만들 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죠.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좋은 요리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의 모토 중 하나가 ‘당신이 만든 요리가 바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나타낸다(What you cook is who you are!)’예요. 요리에는 나 자체가 그대로 담기거든요. 성격은 어떤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래서 요리사를 뽑을 때, 화려한 경력보다 우선은 좋은 사람인가부터 봅니다. 요리와 삶은 같이 가는 거니까요.

그렇다. ‘요리와 삶은 같이 가는 것’이기에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레시피 연구를 한다. 일상생활, 아이의 옷과 동화책의 색감들, 주위에 널려 있는 사물들에서도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어 자신만의 요리로 표현해낸다. 아이들을 위한 사회적기업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그 길에서 만나는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반긴다. 그조차도 삶이라는 코스 요리를 멋지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재료들이라 믿기 때문이다.

“따듯함과 포근함, 밝고 경쾌한 생명력이 있어 좋다”는 이탤리언 요리처럼 그렇게 꼭 닮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 샘 킴. 앞으로 그가 베풀 만찬은 얼마나 푸짐하고 풍성할까.

최창원 & 사진 김혜진

샘 킴이 자신의 음식 철학인 ‘What you eat is who you are!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을 나타낸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있다.

 

샘 킴(본명 김희태, 37세)은 어렸을 때부터 하숙집을 하는 어머니를 도와드리며, 자연스레 요리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다. 10여 년간의 미국 유학 기간은 요리에 담긴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OliveTV의 ‘올리브 쿠킹타임’ ‘샘 앤 레이몬의 쿠킹타임 듀엣’ 등을 진행했으며, 최근에는 라디오 프로그램 ‘정엽의 푸른밤’ <세 남자의 소울 푸드> 코너를 통해 요리에 얽힌 에피소드를 나누고 있다. 저서로는 자전적 에세이 <소울 푸드>(담소) 등이 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강화도 온수리의 세 식구를 보며

김미소 29세. 대학원생.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강화도 온수리에는 외삼촌과 숙모님 그리고 외할머니, 이렇게 세 식구가 살고 계신다. 무엇이든 본인 손을 거쳐야 직성이 풀리는 산장 주인 삼촌, 그런 삼촌을 언제나 묵묵히 지지해주는 숙모님 그리고 자식 자랑보다 본인 자랑에 더 열심이신 외할머니. 모두 각자의 개성을 잃지 않고 한 공간에서 숨 쉬고 계신다. 자식, 남편, 며느리, 아내, 시어머니, 부모라는 지위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공존하는 이 핵가족을 볼 때마다 나는 사람이 얼마나 재미있게 살 수 있는가를 보게 된다.
본인의 미모와 춤 실력을 자랑하시는 외할머니에게 숙모는 언제나 잔잔한 미소로 답변을 대신한다. 삼촌은 외할머니의 춤 실력과 미모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시고, 어떻게 하면 산장을 친환경적으로 아름답게 지으실까 골머리를 썩으며 본인의 아이디어가 현실화될 수 있도록 경제권을 지닌 숙모를 설득하신다. 숙모는 절대적으로 삼촌을 신뢰하고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지해 주신다.

대외적인 활동을 중시하시는 외할머니는 강화읍에서 주관하는 무용 연습에 매진하시며 당신 연배의 노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에 열심이시다. 때로는 할머니도 노인인데, 노인이 노인을 위로하는 위문 공연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시다는 것에서 노년의 즐거움을 찾고 계신 듯하다. 내가 찾아뵐 때마다 손녀, 손자들이 시집 장가 가서 증손자를 보고 이 세상을 마무리하실 수 있는지 물어보시는 할머니. 그때마다 나는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세요. 지금 할머니 모습으로 보아, 증손자가 아니라 그다음 손자까지 보실 수 있을 테니”라며 웃음을 드린다.

즐겨 먹는 식단과 식사 시간까지 다른 그들의 삶은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고 의미를 찾으며 인생의 작은 기쁨들을 함께한다. 개성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집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족이기에 누구보다도 각자의 개성을 인정해주고 같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관계 속에서 대부분은 갈등과 상처를 경험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족이기 때문에 받는 상처나 기쁨은 남들에게 느끼는 것 이상으로 다가온다. 그들에게 받는 상처들 또한 여운이 크지만, 그들에게 받는 위안 또한 어떤 좋은 경전 말씀보다 따뜻하다. 강화도 온수리에 있는 세 식구를 보면서 내 삶 속에서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 특히 가족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얻곤 한다. 그들이 있기에 나도 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김현아 작.

<설레임> 116.8×91cm

Mixed media / 2012

11명의 선수들이 있기까지

구윤경 29세. 축구 칼럼니스트.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처음 잡지사에서 축구 사진기자로 그라운드에 발을 내디뎠을 때 나의 카메라는 주로 선수들의 멋있는 모습을 찍기에 바빴다. 선수들이 골을 넣고 세리머니하는 장면 등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진에 매달렸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그런 축구 사진에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90분 동안 내가 그린 그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가야 할까. 그런 고민들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렇게 보내기를 1년여.

오랜만에 푸른 그라운드를 다시 찾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축구공 하나에 울고 웃는 사람들. 경기를 뛰는 선수들,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 선수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과 선수들을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팬들까지.

나에게는 일터이자 놀이터였던 푸른 그라운드엔 이렇듯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구나, 생각하니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나만의 축구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들에 주목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골을 넣은 선수들에게 박수갈채와 환호를 보낸다. 하지만어느 때부터인가 내 눈에 다른 선수들이 들어왔다. 바로 벤치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 선수들이다.

특히 작년에는 런던올림픽에서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이 동메달을 따내면서 온 국민의 환호성으로 전국이 들썩였다. 일본과의 준결승 경기 후반전.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경기 종료 휘슬이 나기 직전까지 그동안 함께 고생했던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을 경기장에 내보내는 홍명보 감독의 용병술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사람들은 고작 1~2분을 뛴 선수들도 동메달을 땄다며 운이 좋다 말했지만, 나는 감독의 배려가 참으로 고마웠다.

사실 축구 대표팀 23명의 선수들은 본선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 수많은 예선 경기를 치른다. 여름엔 더위와 싸우고 겨울엔 추위를 견디며 힘든 훈련을 해내는 선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데도 애쓰는 선수들을 보면 되게 멋있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골키퍼 선수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 너머로 고마운 마음마저 들곤 한다.

김현아 작.

<여행의 기억- 여유> 116.8×72.7cm

Mixed media / 2012

대개 축구팀에서는 3명의 골키퍼를 선발한다. 주로 메인 선수 위주로 훈련하면서, 다른 2명의 골키퍼는 보조를 해주는 식으로 훈련을 진행한다. 하지만 메인 선수가 교체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선수가 다치지 않는 이상 다른 두 명의 골키퍼에겐 언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경기장에서 세 번째 골키퍼를 볼 때면 짠한 마음마저 들곤 한다. 선수들이 연습 경기를 할 때 두 명의 골키퍼는 각각의 골문을 지키고 있지만, 세 번째 선수는 연습 경기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혼자 몸을 풀고 훈련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선수들이야말로 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중요한 선수들이다. 만약 자신이 경기에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의기소침하게 있으면 팀 분위기가 어떻게 될까. 그리고 만에 하나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이 ‘저 선수가 좀 못했으면 좋겠다’ ‘저 선수가 다쳐야 내가 경기에 뛸 수 있는데, 그래야 나한테 기회가 있는데…’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좋은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골 득점은 단순히 한 선수의 결과물이 아닌, 23명의 선수들 모두가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해주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선수들, 코칭스태프들을 보면서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

축구를 매개로 사진을 찍고, 축구공 하나에 울고 웃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러한 경험들이 나 자신을 성숙시키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생의 시야를 폭넓게 해주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돋보이려 하기보다 희생하고 양보하며 팀 전체를 위해 뛰는 선수들이야말로 나에겐 베스트 멤버다.

18살 그해 여름,

척추장애가 가져다준 깨달음

최진섭 화가, 소울음아트센터 원장.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들과 함께 계곡으로 놀러갔고, 재미 삼아 시도한 다이빙. 그것이 나에게 장애 1급의 척추장애, 전신 마비라는 평생의 짐을 안겨주게 될지는 몰랐다.  8시간의 큰 수술, 여러 번의 병원 이동, 몸을 움직이지 못해 욕창으로 고생하며, 몇 차례나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도 겪어야 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식물인간처럼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던 10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저런 생각뿐이었다.

왜 내가 태어났을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필 왜 그곳에 갔을까, 왜 다이빙을 했을까. 몇 번이고 그 상황으로 되돌아가 후회도 했다. 하지만 다 부질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모든 상황을 그냥 인정해보자며, 나를 조금씩 내려놓을수록 마음도 점점 편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어느 겨울이었다. 우연히 꽁꽁 언 땅을 뚫고 피어난 꽃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깨달음처럼 다가왔다. 저 언 땅에서도 꽃이 피어나지 않는가. 나도 살아가보자. 그즈음 무슨 계시처럼,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에 연필을 끼워주셨다. 손가락에 연필을 끼고, 마치 다시 초등학생이 된 기분으로 3년 동안 선 긋는 연습만 했다. 내 이름을 완전히 쓰는 데만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캔버스에 내가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나마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전신 마비 장애인이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에서 도움을 주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1992년 장애 화가들의 전시회인 ‘소울음 3인전’으로 화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장애 화가 최진섭이 아니라, 일반 화가로서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1992년 7월 장애인들을 위한 문화예술 공간인 ‘소울음아트센터’의 문을 열었다. 소울음은 ‘깨달음’의 우리말이다. 내가 언 땅에서 피어난 꽃을 보며 용기를 얻었듯, 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그림을 그리며 사랑을 나누고 삶을 즐기는 방법을 깨닫자는 취지로 붙인 이름이다. 그림을 팔아서 운영비로 이용하며, 교습비는 받지 않았다.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장애인들도 우리 화실에 배우러 온다. 앞으로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 없이 누구나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이 와서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장애와 비장애인들 사이를 좁히면서, 이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

김현아 작.

<3 dog house> 30×30cm

Mixed media / 2012

장애 1급의 척추장애, 전신 마비. 그래도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나는 숟가락도 들 수 없는 사람이다. 처음 사고 당시 엎드려 있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욕창이 생길까 봐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두 시간마다 나를 돌아눕혀 주었다.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시는 10년의 시간 동안에도 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돌보아주었다. 그리고 작가가 되게 해주셨다.

매일 장애인들을 차로 데려다주는 이웃들, 화실에 들러 이발을 해주는 아주머니, 또한 식사와 청소 등 화실을 도와주는 자원 봉사자들을 볼 때 이런 분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따듯해짐을 느낀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은, 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봉사라는 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보답하는 일인 거 같다. 나도 그렇게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싶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평범한 대한민국 고3이 되기까지

한나경 고등학교 3학년. 대구시 달서구 진천동

나는 이제 수능을 바라보는 고3이 되었다. 때론 동정심, 때론 존경심으로 바라보던, 평생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고3이 내게도 다가온 것이다. 10대의 끄트머리에서 나의 공부 인생을 돌이켜보니 참 순탄치만은 않았다. 지겹기도 했고 잠깐 놓다가 부여잡기도 했고 후딱 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코앞에 다가오니 불안해 미치겠고 시간이 딱 1년만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처음 고등학교에 올라왔을 땐 정말 혼란스러웠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는 멘붕. 내가 생각해왔던 성적과 성적표에 적힌 수준이 너무 달랐다. 선생님과 상담을 할 때는 ‘이건 내 점수가 아니에요!’라고 외칠 뻔했다. 이렇게 성적도 떨어져 가는데 난 꿈마저 흔들려 버렸다.

분명히 자기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꿈꿔야 한다고 배웠는데 고등학교에 들어오니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좀 보랬다. 안정적인 게 최고라고, 공무원만 되면 된다고.

드라마 작가를 꿈꾸고 있는 나를 정신 못 차린 철부지로 취급해 버렸다. 중학생 때와는 너무 다른 성적이 나오고 꿈도 의심하게 되자 의욕이 사라져 나태해졌다. 잠 오면 자고 하기 싫으면 ‘야자(야간자율학습)’도 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엄마가 한마디 하려고 하면 알아서 한다고 빽 소리쳐버렸다. 그러다 한 날은 또 알아서 한다는 나에게 엄마가 모진 말을 던졌다. 그 말에 너무 자존심이 상한 나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해버렸다.

“엄마도 나한테 그런 말 할 만큼 공부 잘한 거 아니잖아요.”

말해놓고 아차 싶었는데 다시 주워 담기도 전에 엄마의 눈이 점점 붉어졌다.

“그래, 엄마도 공부 놓쳤었다. 근데 그래서 말하는 거다. 엄마는… 정말로 네가 엄마처럼 안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 아빠가 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두 분은 내게 충분히 잔소리하고 간섭할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나보다 더 나를 생각해주시는 분들이니까. 그걸 알면서, 누구보다 잘 알면서…. 엄마랑 내가 아빠 옷 좀 사라며 옷집에 가면 아빤 항상 엄마와 나의 추천을 모두 거절했다. 결국 아빠가 예쁘다며 사자고 한 옷은 늘 세일코너에 있던 옷. 또 평소에는 돈 몇 천 원이라도 아끼려고 항상 머릿속에 계산기가 존재하던 엄마도 나 공부할 때 필요한 거라 말만 하면 문제집이든 인터넷 강의든 가격도 안 보고 구입해 주시고 더 해줄 것이 없냐고 꼭 물어보시는 분들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런 배려가 본의 아니게(?) 내게 상처를 준 적도 있었다. 이것은 ‘웃픈(웃기지만 슬픈)’ 추억이다.

김현아 작.

<소풍> 10×10cm

Mixed media / 2010

< With tea> 34.8×27.3cm

Mixed media / 2009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때였다. 영어, 국어 시험을 쳤던 날 난 펑펑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는데 한 과목에서 찍은 것보다 못한 점수가 나온 것이다. 밥도 못 먹고 하루 종일 우는 나를 보며 아빠는 조심스레 위로를 해주셨다.

“나경아, 국어를 망쳤는지 영어를 망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나경이 믿는다. 다음에 잘하면 된다 아이가. 솔직히 수학은 한 번 떨어지면 복구가 힘들지만. 에이, 수학만 아니면 된다. 괜찮다니까. 수학도 아닌데 뭐. 그만 울어도 된다.”

내 울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던 이유를 아빠는 그땐 몰랐다. 내가 망쳐버렸던 과목은… 영어도 국어도 아니었다. 뒤늦게 매긴 수학이었다. 아빠가 복구가 힘들다던 수학.

하지만 세상에 불가능은 없는 법! 겨울 방학 내내 수학만 파고든 결과 2학년 첫 시험에서 94.8점으로 우리 반 일등이라는 쾌거를 얻어냈다. 물론 운도 좋았지만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그날 밤 우리 가족 모두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었다.

이럴 땐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지 싶다. 그러다가도 때론 공부가 다가 아니라며 괜히 세상 탓을 해보기도 한다. 그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이시다.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라도 보는 날엔 “그래. 공부가 뭐가 중요하노. 이렇게 따뜻한 집이 있고 가족이 있다는 게 행복이지. 나경아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다가도 성적표가 나오는 날엔 “니 이걸 성적이라고 받아오는 거가? 이래서 뭐 될래!!!!!!”라고 하신다. 부모님도 나도 참 변덕쟁이다.

우여곡절 끝에 난 아직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하고 있고 꿈도 다시 확고해졌다. 만약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게 철부지라면 나는 평생 철부지로 살기로 했다. 길고도 험한 길이었지만 안 믿는 척하면서도 늘 맹목적으로 믿어주시는 부모님이 있기에 난 평범한 대한민국 고3이 될 수 있었다. 그분들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밤하늘의 은은한 별빛처럼 그렇게

조정훈 42세. 직장인. 광주시 북구 두암동

4년 전 어느 날,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그야말로 이방인이 되는 경험이 찾아왔으니 그것은 바로 ‘이혼’이라는 사건이었다. 나의 불찰로 인해 행복했던 가정에 상처를 주고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들은 정말 참기 힘든 나날이었다. 아무리 날씨가 맑아도 정작 내 머리 위에는 먹구름이 낀 것 같았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모두가 배를 타고 항해를 할 때 나만 홀로 부표에 매달려 표류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괴로움….

다른 것은 그래도 참아낼 수 있었지만 아이들과 헤어져 있어야 하는 1년여의 유배 생활의 고통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행히 1년이 지나면서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지만 이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충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딸아이는 불안 증세를 보여 12시가 다 되어서야 어린이집에 가서 4시만 되면 찾으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러기를 6개월. 당연히 직장 생활은 거의 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카드 명세서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이의 정서적인 안정이 우선이었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이 전달이라도 된 것일까? 이혼의 이유가 아빠 탓이라는 고백에 5살 딸은 되레 큰소리를 쳤다.

“지난번에 잘못했다고 말했잖아. 잘하면 되지. 이제 그런 소리 그만해.”

공기 좋은 산자락에 있던 30평대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공장 소음이 가득한 동네에 있는 13평의 작은 원룸으로 옮겨온 후 전쟁터 같은 생활이 3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원빈이가 잠자리에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한 날이 있다.

“이빈아, 지금 이런 원룸에 사는 것도 다 추억이 된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정말 좋은 기억이 될 거야. 물론 예전 아파트 같지는 않지만 이렇게 셋이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사는 것도 오빠는 재미있다. 아무나 해볼 수 있는 경험이 아니거든….”

가슴이 뭉클했다. 아빠에게 싫은 감정을 쏘아대던 아들이 어느새 커서 나를 위로하고 동생을 다독여주는 것이 아닌가? 막상 학교를 다녀보니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많았고, 처음엔 자기도 힘들었지만 잘 극복했으며 지금은 애들을 상담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절대 자신의 상황을 누구에게 말하는 것조차 내게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그리고 얼마 전, 우리 가족은 비록 월세지만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점점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너무 좋아했고, 순간순간 기쁘고 즐거운 일들을 감사하며 경험하고 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아빠를 챙기는 것부터,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더 깊어만 간다. 아빠가 커피를 많이 마시면 건강을 챙겨야 한다며 조금만 마시라며 사랑스러운 잔소리를 하는가 하면, 빨래와 설거지를 할 때면 도와주겠다며 의자를 들고 옆에 자리를 잡곤 했다. 어느 날 차에서 잠든 딸을 깨워 집으로 업고 올라가려고 했더니 끝까지 업히지 않겠다는 딸. 그러면서 “아빠. 힘들까 봐 그러지. 우리 아빠가 얼마나 고생이 많은데…”라면서 어깨를 토닥이면서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안마를 해준다. 천사를 업고 가는 경험이란 이런 것일까. 아빠 때문에 흔들린 행복의 울타리를 도리어 천사 같은 아이들이 다시 묶고 조이며 단단히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정말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넘쳐서….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도 아이들 덕분에 흘리는 감사의 눈물은 내게는 소중한 보석이 되어서 마음에 새겨지고 있다.

김현아 작.

<당신을 위한 기도> 27.3×22cm

Mixed media / 2013

며칠 전, 아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가 망할 줄 알았어요. 빚도 많고 상식적으로 이미 쓰러졌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이겨내고 우리를 키워주시는지 놀랍기만 해요. 정말 존경합니다.”

많은 월급을 받았을 때는 적은 월급을 받는 사람들을 조금은 무시했고, 내 가정이 화목할 때는 불우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 솔직하게 말하면 약간 차별을 두고 살았고, 부끄러운 것이 없는 상황에서는 남의 잘못에 조금은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기도 했었다.

아마 계속 그렇게 살았더라면, 나는 지금 아이들과 친구처럼 삶을 나누는 이런 축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우월 의식 속에 살아가는 껍데기만 번듯한 사람으로 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아빠의 부족한 점들을 아이들에게 용납받고 따뜻한 격려를 받으면서 나는 비로소 남들의 연약한 부분을 이해하는 심장의 온기를 회복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삭막한 겨울을 살아가는 우리 어른의 품에 온기를 전달하는 신비한 난로요, 어두운 길을 헤매며 가는 부모의 길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램프의 요정이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작년 여름 우리 세 가족은 보름 동안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중국 동쪽의 5개 도시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자신의 꿈에 대해서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행 이후로 우리 가족은 스스로를 ‘별빛가족’이라고 부른다. 고요한 밤하늘에 은은하게 빛을 내는 별빛처럼 그렇게 행복의 빛을 내며 알콩달콩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추락하는 별똥별이었던 내가 다시 힘을 얻고 저 하늘의 영롱한 빛을 내는 별이 되어가고 있다. 떨어지는 운석이 빛나는 별이 되어 소망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분명 천사 같은 우리 아이들 덕분이다. 바로 내 존재의 이유!

절망의 끝에서 만난 따듯한 사람들

윤정희 45세. ‘아름다운 피부관리실’ 운영.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6년 전 나는 한 톨의 희망도 없어 보였던 막장 주인공. 파산한 남편은 도망자로, 두 아들과 나는 이삿짐을 싸놓고 갈 곳을 찾아야 했다. 암담했다. 몇 개월간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 집을 전전하다, 지인의 도움으로 보증금 500만 원의 월세방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 갈 곳이 없다가 생긴 집이라 그런지 천장에 비가 풍선처럼 고여도, 그래도 좋았다.

“너는 끝이다, 이제 어디서도 도움받을 수 없고, 더 이상 올라갈 수도 없을 거야”라는 모진 소리까지 들었던 그 시절. 혼자 힘으로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했던 그 시절. 아이러니하게도 그 절망의 끝에서 내가 느낀 건 주변의 따듯함이었다.

세상이 냉정하다고 하지만, “내가 이런 상황이니까 도와주세요” 절박하게 이야기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한부모가정으로 채택되어 국가의 도움을 받게 해준 분들. 남편 대신 제2의 채무자가 되어 들어왔던 정말 막막했던 통장 압류 사건도 국세청 분들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2009년 나에게 찾아왔던 인생의 터닝 포인트. 바로 아름다운재단에서 지원하는 ‘저소득 여성 가장을 위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알게 된 것이다. ‘희망가게’라고 이름 붙인 이 사업에서는, 최대 4,000만 원의 창업자금을 무보증, 무담보로 대출해주었다. 대출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체계적인 교육과 상담도 제공해주어서, 안정적으로 가게를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나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고, 과감히 지원했는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채택이 되어 그해 가을, 피부관리실을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창업을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막상 열고 나니 한숨만 나왔다. 어떡해야 손님이 우리 가게를 찾을까? 처음 해보는 사업이었기에 두려움도 많았다.

고민을 하며 이제부터 나와의 싸움이 아니라 세상과의 싸움임을 인지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해줄까? 고민했다. 좋은 물건을 싸게 살 때 아무래도 가장 행복하다는 점에 착안해서, 좋은 품질의 서비스를 저렴하게 받을 수 있게 해드렸다. 점점 입소문을 타며 고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4년여가 흐르며 가게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사업은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기에.

김현아 작.

<도시의 낭만 1> 65.1×53cm

Mixed media / 2012

그동안 위기도 많았다. 가장 큰 것은 최근에 6년 전의 어떤 문제로 다시 통장 압류가 들어온 것이다. 비싼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들 친구의 부모님이 변호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선뜻 찾아가지는 못하고, ‘네 부모님께 상담을 받아야 하는데’라고 말만 던졌는데 변호사님이 직접 먼저 나를 찾아주셨다.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보자 하셨다. 그냥 형식적인 말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상담을 받고 돌아가시는 길에 그분께서 다시 전화를 해주셨다. “?? 어머니, 포기하지 마세요.” 그 한마디가 정말 하나님의 음성 같았다. 눈물이 저절로 났다. 나를 다시 일으켜주는 한마디였다. 이렇게 세상에는 따듯한 사람들이 많았다.

앞으로 나는 우리 가게를 사회적기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업장으로 만들고 싶다. 나의 인생은 쉽지 않은 여자의 길을 가고 있지만 내가 겪은 일들을 통해 많은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싶다. 어렵고 힘든 일을 겪는 분들을 만나면 나의 일처럼 마음이 아프다.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같이 들어주고 알아봐 주고 눈을 맞춰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 것인지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그분들에게 꼭 드리는 말씀이 “좌절만 하고 있으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지만, 내가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하려고만 하면 반드시 도와줄 분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희망은 절망의 끝에 있다. 예전에는 무책임한 남편이 원망스러웠는데, 지금은 남편이 오히려 고맙다. 남편의 파산 이후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도전이었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내가 사업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극적이던 성격도 너무나 적극적으로 열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두 아들과 나는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 남편의 그늘에 있었다면 내 안의 잠재돼 있던 또 다른 나 역시 계속 잠자고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재단, 국세청 분들, 자존감을 회복하게 도와준 학교 선생님들과 교회 분들, 진실을 위해 내 편이 되어주셨던 변호사님과 직원분들, 그리고 순간순간 나타나 나를 도와주신 나의 천사들, 어려운 시기에 사춘기를 보내며 힘들었을 텐데도 참 착하게 잘 커준 두  아들…. 끝없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10분의 힘

하루 24시간.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란 것이 참으로 오묘해서 나에게만은 유난히 공평하지 않은 것 같을 때도 많습니다.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물 새듯 시간만 새어나가 버리고는 하니까요.
무의식적으로 하릴없이 흘려보내는 시간도 많습니다.

5분, 10분, 15분….

이 짧은 시간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휴식이든 운동이든 공부든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 틈새 시간만 잘 활용해도 놀라운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편집자 주


시간을 최악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부족하다고 늘 불평한다. 라 브뤼에르

시간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에셴 바흐

작은 일도 정성을 담아 10년을 하면 위대해지고, 20년을 하면 두려울 만큼 거대한 힘이 되고, 30년을 하면 역사가 된다.
가기야마 히데사부로, 옐로우햇 창업자

승자는 시간을 관리하며 살고 패자는 시간에 끌려 산다. J. 해비스


귀중한 시간이 낭비되는 이유

시간 관리 분야의 전문가인 앨릭 매켄지는 그의 저서인 <타임전략>에서 시간 낭비 요인을 5가지로 지적했다. 1.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려고 욕심을 낸다. 2.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어 둔다. 3. 적절하게 위임하지 않고 혼자서 다 한다. 4.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 5. 주변 정리를 못하고 산만하게 일한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변명은 시간이 없다는 변명이다. 에디슨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테오프라스토스

버려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시간을 찾아내어 그 일정에 관해 “만약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고 질문해보자. 그에 대한 답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면 두말할 필요 없이 중단하라. 피터 드러커

일본 후쿠오카 메이젠 고등학교는 점심시간 뒤 약 15분간 매일 12시 55분부터 1시 10분까지 조용해진다. 1분 1초가 아까운 대입 수험생들이지만, 이 시간만큼은 책을 덮고 낮잠을 자는 것이다. 그 결과 전교생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낮잠을 잔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 비해 수업 집중도(16%), 공부의욕(12%), 성적(4%) 등이 좋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15분간 낮잠을 잔 수험생들은 대체적으로 머리가 맑아지고 수업 집중이 잘된다고 했다.
<기억력의 비밀 2부-잠자는 뇌를 깨워라>(EBS 다큐프라임) 중에서


직장에서도 하루 10분을 활용하면 업무 성과가 달라진다. 한국화장품 음성 공장의 경우 10년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10분 탈춤 운동을 실시하고 있다. 일을 시작하기 전 8시 10분부터 강당에 모여 탈춤을 추는 것이다. 운동 시간은 고작 10분.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9개월 후에는 어깨 통증을 호소한 직원의 수가 10배나 감소했으며 10년 동안 산업재해 제로를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산재보험료도 매년 4,000만 원이나 절약하고 있다. 일하기 전에 탈춤으로 잠자던 뇌를 깨우니 근로자들의 작업 집중력과 능률 또한 높아졌다.

9개월 후에는 어깨 통증을 호소한 직원의 수가 10배나 감소했으며 10년 동안 산업재해 제로를 달성했다. 뿐만 아니라 산재보험료도 매년 4,000만 원이나 절약하고 있다. 일하기 전에 탈춤으로 잠자던 뇌를 깨우니 근로자들의 작업 집중력과 능률 또한 높아졌다.

<하루 10분의 기적>(KBS 수요기획팀 지음 ㅣ 가디언) 중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플래너(다이어리)’를 펼친다. 그리고 그날의 일들을 정리하면서 적어본다. 하루를 계획하는 것이다. 무작정 생각나는 대로 일단 적는다. 그다음, 오늘 꼭 해야 하는 일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즉 일의 중요도를 분류한다. 중요한 것의 기준은 ‘진정 나에게 소중한 것’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다음 제일 중요한 일부터 순서대로, 오전, 오후, 저녁 등의 순으로 하루를 ‘시뮬레이션’해본다. 아침에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할 일, 오전에 꼭 해야 할 것들, 중요한 전화 통화나 경조사 등등…. 나름 시간 흐름에 따라 순서를 정하면서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실천할 시간을 확정하지는 않는다. 물론, 미리 약속된 것이라면 시간에 맞춰 계획하지만, 나머지는 중요 포인트와 순서를 정하면 된다. 이것이 부담이나 강박관념이 없는 비법이다. 이렇게 하루를 계획하는 데, 10분 남짓의 시간이 소요된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다, 시간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10분만 하루를 ‘계획’해보자. 미리 생각하고 준비했기에 하루의 시작이 당황스러울 것도 부담스러울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 하루 10분의 계획과 그 계획의 실천이라면, 정말 멋진 하루가 되지 않을까?

홍용준. 44세. 런어스컨설팅 대표

틈새 시간 활용이 가져다준 60여 개의 자격증

직장에서 돌아온 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개인 시간을 갖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랬다. 빠듯하게 하루를 보내지만, 보다 새로운 시간을 창출할 수 없을까 싶어 생각한 게 틈새 시간 활용이었다.

당시 나에겐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였지만 직업전문학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위축된 교직 생활을 해야 했다. ‘더 이상 이래선 안 된다’는 절박함에 1990년 전기 기능장 자격증 취득을 시작으로 매년 2~3개의 자격증에 도전하게 되었다. 처음엔 학교에 출근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동안 책의 내용을 담은 테이프를 듣곤 하다가, 수업을 마친 후의 쉬는 시간 10분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책상 위에 책을 펼쳐놓는다. 그렇게 해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공부할 때마다 번번이 책을 펼치는 번거로움을 줄일 뿐만 아니라 시간도 절약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이다.

틈새 시간 활용은 내게 높은 집중력을 가져다주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시험 치기 10분 전에 본 내용들이 평상시 한 시간 공부한 것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겐 10분이란 시간이 그랬다. 10분 후면 종이 울릴 것이라는 적당한 긴장감은 집중력과 암기력을 높여주었다. 특히 짬짬이 공부하는 게 좋은 것은 공부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침에 공부를 하고 다시 저녁에 공부를 하기 위해 책을 펼치다 보면 시간 간격이 생겨서 공부의 흐름이 끊기기 쉬운데,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보다 보니 공부 흐름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

내겐 하루 10분씩 4~5번, 즉 하루 40~50분의 시간이 주어진 셈이었고, 그렇게 10여 년이 넘게 틈새 시간을 활용해 공부한 결과 60여 개의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학력 콤플렉스 또한 자연스레 날아가 버렸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처럼, 밀알 같은 작은 씨앗이 자라나서 큰 나무를 이루듯, 내겐 시간이 그랬다. 이제는 그동안 취득한 자격증을 사회에서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선 시간을 잘 활용하고 싶다면, 자신이 꼭 달성해야 하는 목표를 정확히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절실한 목표가 있을 때 달릴 수 있고 계획을 세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짜투리 시간을 하릴없이 흘려보내지 않고, 원하는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

소병량. 59세. 서울방송고등학교 교사

세상을 움직이는 조용한 내면의 힘

 
우리 사회는 대개 외향적인 성격을 선호한다. 사람들은 훌륭해지려면 대담해야 하고, 행복해지려면 사교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학교,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인재를 키워내려고 한다. 교실 풍경을 한번 떠올려보자. 요즘 아이들은 대개 4~7명이 한 책상에 앉아 얼굴을 맞대면서 수많은 조별 과제를 해내야 한다. 반면, 혼자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는 문제아라 생각한다. 직장에서 조용한 사람들 역시 내성적인 성격인 자신을 탓하며 외향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도 한다.

심리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2~3 명 중에 1명은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한다. 우리 모두 외향성을 강조하기에 앞서 조용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 수많은 연구 결과와 사례를 통해 우리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한 편견은 내려놓고, 각자의 기질을 인정하면서 능력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한 때다.

정리 편집부  참조 도서 <콰이어트>(수전 케인 | 알에이치코리아)

현대 사회가 외향성에
주목하게 된 이유

 20세기 초,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서구 사회는 농업 사회에서 대규모 상업 사회로 변화했다. 그 과정에서 시골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급격한 도시화가 형성되면서 작은 마을에서 소소한 친분을 쌓던 사람들의 생활 패턴도 변하기 시작했다. 낯선 도시의 이방인들과 부딪치면서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것. 그때부터 적극적인 태도는 성공의 지름길이 되었고, 인간의 외향성은 필수 요소가 됐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고민하던 ‘인격의 시대’에서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고민하는 ‘성격의 시대’로 가치관이 이동한 것이다.

개인의 특성을 고려치 않는
브레인스토밍의 한계

기업이나 조직에서는 그룹 멤버들이 집단으로 아이디어를 짜내는 이른바 브레인스토밍이 매우 효과적인 회의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1963년 미네소타대학교 심리학과 마빈 더넷 교수의 실험 결과 브레인스토밍을 실시한 24그룹 중, 23그룹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아이디어를 냈을 때보다 혼자일 때 더 많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아이디어의 질도 월등히 뛰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그 이후로 40년간 연구 결과는 놀랍게도 똑같은 결론을 제시했다.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브레인스토밍의 성과는 나빴던 것.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브레인스토밍은 오히려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인류 역사 발전에 공헌한
내향적인 사람들

간디, 아인슈타인, 쇼팽, 고흐, 스티븐 스필버그, 스티브 워즈니악….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내향적이라는 것이다. 애플 공동 창업자로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연 스티브 워즈니악은 첫 PC를 만들 때까지 늘 혼자였다. 그 외에도 빌 게이츠, 에이브러햄링컨, 마이클 조던, 토머스 에디슨 등도 내성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으로 유명한 저자 짐 콜린스는 최고 성과를 거둔 기업 CEO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조용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며 자기를 과시하지 않고 절제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나타났다고 했다.

내향성과 외향성의 상생 방법
– 자기 내면 성찰 중요

정신분석학자 칼 융에 따르면 내향적인 사람은 ‘생각과 느낌’이라는 내면세계에 끌리고,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과 활동’이라는 외부세계에 끌린다고 한다. 즉, 내향적인 사람은 책을 보거나 혼자 지낼 때 에너지를 충전하지만, 외향적인 사람은 타인과 어울릴 때 충전된다.
내향성과 외향성이 공생하기 위해서는 그 방식을 좀 더 세심하게 할 필요가 있다. 각자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알맞은 자극을 주는 게 중요하다. 즉, 타고난 장점과 기질에 따라 자유로이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반면 조용히 혼자 집중하면서 있을 수 있는 개인 사무 공간도 조성하는 것이다. 이미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픽사같이 창의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회사에서는 단독 작업 공간이나 편안한 회의실 등 작업에 방해받지 않는 환경 조성에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오늘날 개인의 침묵과 명상, 고독은 기업 전체의 상품 개발이나 생산 효율성에 영향을 주기에, 자기 내면에 집중하며 성찰할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수련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PTSD)에서 벗어나다, 장학수 소방관 이야기

마음수련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벗어난 장학수 소방관
장학수 소방관. 그가 하는 일은 화재, 교통사고, 산악 사고 등 각종 위급 상황이 발생할 때 출동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직업의 특성상 참혹한 사고 현장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겪는 이른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고통받아야만 했다. 마음 빼기를 하며 비로소 그 기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장학수(46) 소방관. “이제 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뻐꾹뻐꾹~” 출동벨이 울리면 자동적으로 몸이 무조건 달립니다. 빨리 구급차량을 타고 현장으로 출동해야 하니까요. 처음엔 출동에 대한 부담감이 컸어요. 언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는 긴장의 연속인 데다, 인명 구조는 시간이 곧 생명이니까요. 하지만 귀중한 생명을 구했을 때의 뿌듯함과 보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각종 사고 현장에서 보게 되는 처참한 광경이에요. 제가 처음 죽음을 접했던 건 교통사고 현장이었죠. 중년 여성의 운구를 이송했었는데 뇌리에 오랫동안 남더라고요. 2005년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따고 본격적으로 응급구조 업무를 하면서 상황은 더했어요. 추락사, 자살, 교통사고 등 각종 사건 사고들을 접하다 보니 어느새 장면 장면이 진하게 각인이 되더라고요. 일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고 꿈에도 나타나고 가위눌림도 당하고…. 예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유사한 현장에 갔을 경우엔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오르니까 참 많이 괴로웠죠. ‘제발 이런 걸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굴뚝같았어요. 정말 이직을 하고 싶을 정도였죠.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2002년엔 청양에서 큰 산불이 났었는데, 예산 지역까지 퍼질 정도로 굉장했죠. 산 중턱에 암자가 있어서 불을 끄러 갔다가 순식간에 불에 포위돼서 죽을 뻔한 적이 있었어요. 다행히 소방 헬기가 와서 불을 끄는 바람에 살아날 수 있었죠. 그런 사건들을 겪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출동벨이 울리면 두려운 마음부터 들더라고요.

그러다 2007년 청양파출소에서 3년간 혼자 근무하면서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불이 나면 소방차 끌고 가서 끄고, 환자 생기면 구급차 끌고 가서 병원에 후송하고…. 교대할 때만 사람을 볼 뿐 혼자 하다 보니 ‘단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동료 없이 업무 처리를 하는 부담감, 외로움과 두려움, 매사 의욕도 없어지면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회의도 많이 들었습니다.

소방관의 하루

그 무렵 우연히 마음수련에 대해 알게 됐어요. ‘진짜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이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거기서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간절히 찾던 중이라 바로 논산 교육원에 갔습니다.

처음엔 기억을 떠올려 버린다는 게 힘들데요. 특히 죽음과 관련된 사진을 버릴 때는 그 감정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하면서 오기 반 간절함 반으로 버려나가 봤어요. 그러다 보니 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유독히도 컸는지 알게 됐죠. 어릴 적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염하는 과정 등을 고스란히 뒷문을 통해서 다 보고 있는 아이. 무서워서 방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기억. 그런 산 삶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저장돼 내 마음을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더욱 열심히 수련했어요. 그랬더니 어느 순간 ‘아, 이 모든 것이 다 없는 허상이구나’ 하는 걸 마음으로 깨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정말 잘 버려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신기한 건 수련한 지 3일이 지났을 뿐인데, 머리만 대면 바로 잠이 든다는 거예요. 수면 장애가 있어서 잠 한번 자려면 한 시간 이상을 뒤척이면서 실랑이를 벌여야 했거든요. 자다가도 3~4번씩 깨니까 늘 피곤했는데, 잠을 푹 자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렇게 수련하는데 어느 순간, 묵직하게 막혀 있던 게 뻥 뚫리면서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가득 차 있는 충만함이 느껴지면서 우주가 본래 나임을 깨달았지요.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 속에 갇혀 있다가 한줄기 빛을 만난 듯, 그동안 풀지 못한 숙제가 확 풀리는 기분이었으니까요.

장학수 소방관의 구급출동 모습

인터뷰 도중 출동벨이 울리자 구급 출동을 다녀온 장학수 소방관. 임무를 마치고 귀대한 후 다음 출동 대비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사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을 하다 보니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과 다를 바 없구나 싶어 늘 허무했거든요. 과연 산다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수련을 통해 깨닫게 된 거죠. 이 몸이 사는 게 아니라, 우주와 하나가 돼서 그 정신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야말로 진짜 삶이라는 걸…. 휴가가 끝난 후에도 우리 동네 지역 수련회에 나가면서 꾸준히 수련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제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우선 출동에 대한 두려움들이 조금씩 사라지더라고요. 일할 수 있음이 감사하고, 그 일이 또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일임이 감사하고,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어서 감사하고…. 매사 긍정적이 되고, ‘이 일이 천직이구나, 내가 있어야 될 곳이구나’ 하면서 마음 자세가 바뀌는 거예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나를 괴롭혔던 그 참담한 기억들의 끄달림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늘 회피하고 싶었던 현장에서 사건 사고를 담담하게 처리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놀라기도 하고요. 그렇게 마음의 평온을 찾으니까 하루에 10건 이상씩 사고 처리를 해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때 진정한 휴식은 마음에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소방관, 경찰관 등은 다른 직종에 비해 외상 후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밝아 보여도 눌러놓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이런 직종의 분들은 특히 마음수련을 했으면 좋겠어요. 집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한 번쯤 싹 리모델링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힘든 마음들 털어내고, 무거운 기억들을 빼내고 나면 새롭게 편안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요즘은 출동벨이 울리면 그냥 몸이 뛰어나가지, 어떤 번뇌도 생각도 없어요. “가자! 빨리 가자!” 하고, 오직 내가 필요한 그곳을 향해 힘차게 출동할 뿐입니다.

정리 김혜진 & 사진 최창원

119 안전센터에서는 소리로 위급상황을 구분한다. 뱃고동 소리는 구조구급 상황, 뻐꾸기 소리는 구급상황, 기상나팔 소리는 화재가 났음을 의미한다. 장학수 소방관이 화재 진압 시 착용하는 개인 보호 장비를 입고 포즈를 취해 주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고 환하게 웃는 장학수 소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