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난폭했던 음주 습관, 우울증 극복기

한때 술 좀 마시고 폭력 좀 행사하셨다는 그녀. 큰 키에 긴 생머리, 시원한 미소, 훈훈한 외모에 영어 통역 봉사 활동까지 하고 있는 그녀는 레알 능력자였습니다. 1년 전만 해도 못 이길 정도로 술을 마시며 좀비같이 살았다는 그녀는 초면인 저 문기자에게 자신의 흑역사를 거침없이 털어놓을 만큼 가벼워져 있었습니다.
마음수련을 하며 술에 매이는 것도, 우울증도 다 날려버리고 활력 가득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그녀와의 리얼 빼기 토크입니다.

술과의 첫 만남은 언제였나? 고2 수학여행 때. 고2 정도면 괜찮지 않나? (응?…;;) 애들이 마시니까 같이 먹었는데 그 후로 계속 먹고 싶었다. 해방된 느낌이었다. 그때는 술집에서 민증(주민등록증) 검사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 피부 탄력만 약간 달랐지, 고2 때 얼굴이랑 지금이랑 똑같았다. 일부러 꾸미지 않고 반바지에 반팔 티 입고 가서 마셨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약간 노안인 듯? 주량은 어느 정도? 주량은 모르고 그냥 끝까지 가는 거다. 그때는 학생이었으니까 일주일에 2번 정도만(?) 마셨다. 안주는 중요하지 않았다. 취하는 게 중요했다.

부모님한테 걸린 적은 없나? 안 취한 척, 이 닦고 향수 뿌리고 들어갔는데 아마 다 아셨을 거다. 내가 술을 마시면 폭력성이 드러난다. 하루는 추워서 깨어 보니까 학교 가는 길에 있는 무슨 아파트 계단에서 자고 있었다. 휴대폰도 빠개져 있고 신발은 없고 가방이랑 옷은 저~ 아래층에 있고. 할 수 없이 공중전화로 엄마한테 전화하고 맨발로 택시 타고 집에 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등교할 때마다 ‘언젠가 저기서 뛰어내려야겠다’ 했던 아파트였다. 그래서 취해서 죽을 생각으로 신발부터 벗어놓고 올라가다가 중간에 잠이 든 거다.
음… 생각보다 심각한데? 술 마시면 무조건 필름이 끊기나? 일단 처음엔 기분이 아주 좋아지다가 급격히 다운되고 필름이 끊긴다. 그 뒷이야기는 애들한테 듣는다. 화내고 친구들 때리고 물건 부수고 길거리에서 소리 지른단다.

거참, 겉은 참하게 보이는데, 그렇게 쌓인 게 많았나? 표출하지 못한 게 많았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는데 고등학교 가니 공부해도 성적은 안 오르고, 친구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거 같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공부 잘하던 애가 못하니까 엄마도 나를 많이 혼내고 때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술을 먹길 했나 담배를 피길 했나,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살아야 되나 어차피 혼날 거 내 인생을 놓자. 망가지자 한 거다.

부모님이 충격이 크셨겠다. 그렇다. 그때쯤 부모님 사이도 안 좋으셨고 첫째 동생이 선천적인 장애로 죽었다. 근데 나마저도 공부를 안 했으니 상실감이 크셨을 거다. 나도 나름 노력하는데 혼을 내시니까 ‘나는 왜 이것도 못하고 쓸모없고 멍청한가’ 생각했다. 애들하고 있을 때도 거짓말을 많이 했다. 공부 안 하는 척하려고 흰색 색연필로 줄을 치며 공부했다. 가족도 친구들도 진실된 관계가 없었다. 그러다 엄마도 집을 나가셨다. 그 후로는 남자 친구에게 많이 의존했다. 미저리처럼 1초에 한 번씩 어디야? 뭐해? 답장 안 해? 카톡 보내고. 그때 이미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편두통이 심했는데 마음이 힘드니까 조금만 아파도 곧 죽을 것 같았다. 결국 남자 친구도 버티고 버티다가 도망가고. 그때부터는 매일 울고 밥도 안 먹어서 한 달 만에 10킬로가 빠졌다. 죽으려고 약을 먹기도 했었는데 배가 너무 아파서 못 죽겠더라. 할머니가 나를 간호하러 오셨는데 그때 생각이 번득 들었다. 정신 차리고 살아야겠다고. 근데 그게 잘 안됐다. 집에 틀어박혀서 페이스북에 힘든 타령을 만날 올렸는데 그걸 보고 고등학교 동창이 마음수련을 같이 해보자고 했다. 걔도 우울증이 많이 좋아졌다고. 그렇게 수련을 하게 됐다.

겉으로 봐선 정말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모르겠다. 수련은 해보니 어땠나? 보시다시피 술주정도 안 하고 멀쩡한 사람이 되었다.ㅎㅎ 처음에는 내가 힘드니까 수련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힘든 마음이 버려지고 진짜 편해지니까 계속 해야겠구나 했다. 술 먹고 매일 세상이 뒤집어져야 된다고 욕하면서도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싫었다. 2과정 수련을 하며 그동안 내가 잘못 살아왔구나 확연히 느꼈다. 마음속에 쌓아뒀던 사람들과, 장면들을 떠올려 버리는데, ‘내가 당했다, 나는 불쌍한 사람이다’ 했던 것이 알고 보니 내 입장에 갇혀서 왜곡해서 받아들인 거였다. 엄마가 나를 때린 장면들에서도 나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어디 가서 뺨 맞고 어디서 화풀이 한다고 내 감정을 다른 사람한테 막 쑤셔 넣고, 술 먹고 죄 없는 친구 때리고. 오랫동안 히스테리를 받아준 남자 친구한테도 미안하고 고마웠다. 인생의 대 전환점이었다. 이 수련을 끝까지 해서 다 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오~ 대단하다. 그럼 그 이후에는 술을 안 마시나? 마실 기회가 되면 지금도 마신다. 하지만 우울, 스트레스, 허무함, 이런 게 없으니까 기분 풀려고 일부러 찾아서 마시지 않는다. 힘든 마음은 그때그때 빼기를 하면 되니까 따로 술의 힘을 빌려 감정을 분출할 일이 없다. 한마디로 계속 해방이다. 마음수련 처음 시작했을 때 옆에서 나를 도와줬던 언니가 말하길 ‘마음수련을 하고 나면 밥 먹을 때는 밥만 먹고 걸어 다닐 때는 걸어만 다닐 수가 있다’고 했다.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바로 ‘움직이는 좀비’였기 때문에. 길을 걸으면서도 내 생각에 갇혀 아는 사람이 코앞까지 와도 몰랐고, 밥 먹으면서도 수만 가지 생각을 했다. 근데 지금은 그게 바로 내 얘기가 됐다.

지금 생활은 어떤가? 무기력한 게 없어지고 진짜 활력이 들어차는 느낌이다. 또 예전에는 감정 조절 장애가 있어, 기분이 좋을 땐 엄청 좋다가 짜증을 한번 내면 며칠씩 갔다. 나중에는 내가 왜 이렇게 짜증을 내고 있지? 할 정도로. 근데 그런 게 없어졌다. 1년 전의 ‘걔’는 어떻게 지치지도 않고 하루 종일 짜증을 냈을까. 그게 더 신기할 정도다.

마지막으로 술로 세월을 보내는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술 먹으면서 잠깐 느끼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거기에 쓰는 돈과 에너지, 체력을 모아서 마음을 좀 비워보라고 말하고 싶다. 술로 풀고 뭐고 할 게 하나도 없다. 합리적으로 따져 봐도 마음수련은 투자 대비 효과가 엄청나다.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이고 언제나 자유롭고, 남 의식하고 감출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신한은행 용암지점장 이준원씨

신한은행 청주 용암지점 이준원(49) 지점장. 23년간의 은행원 생활이 늘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2008년 어느 날, 당시만 해도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새로운 업무에 대한 부담감과 스트레스… 인생의 고비의 순간, 그는 수련을 하면서 힘든 시기를 지혜롭게 넘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직장생활의 행복, 동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마음수련. “이제 직원 모두가 행복한 직장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준원 지점장의 마음 빼기 이야기입니다.

정리 & 사진 김혜진

나는 두 딸의 아버지이자 가장입니다. 27살에 은행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덕분에 승진도 빨랐습니다. 사실 은행은 영업 실적과의 전쟁입니다. 은행 셔터는 오후 4시에 내려지지만 이때부터 업무는 다시 시작됩니다. 마케팅 업무에다 마감 업무까지…. 집에 와도 머릿속은 일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의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아 새로운 부서로 자리도 옮기면서였습니다. 그때의 제 모습은 마치 신입사원 같았습니다. 그동안 해왔던 일과 많이 달라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으니까요. 팀장으로서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의견 충돌로 인해 해도 소용없고, 결과도 없는 생활이 6개월간 반복됐습니다. 갈수록 나는 작아졌습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터벅터벅 혼자 외로이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황… 잠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쳇바퀴 같이 살아왔던 인생을 잠시 놓아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직장에서 나와 무작정 버스를 탔습니다. 창밖으로 풍경은 무심히 흐르지만,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동안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출세하려고 아등바등했던 모습….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 그날 밤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그러다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서러움에 북받쳐 울었습니다. 그렇게 운 건 처음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는지… 그리고 가족에게 미안했습니다.

아내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하게 됐습니다. 40대의 한 남성이 보입니다. 나름 열심히 해서 좋은 부서에 배치 받고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낯선 업무는 새로운 시험대였습니다. 그때의 상황들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결국 자존심이 문제였습니다. 인정받지 못했다는 좌절감은 자꾸 도망치게 만들었습니다. 쥐꼬리만한 자존심을 지키려고 모든 걸 남 탓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도 내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내 생각만 맞다고 했으니, 사람들과 부딪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남이 아닌 내가, 나를 괴롭혀왔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고개를 떨굽니다.

그때부터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 마음에 찍어왔던 사진들 자존심, 잣대, 틀, 기준들을 열심히 버려나갔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않았을까. 내가 부족했다는 걸 인정했다면…. ‘남자는 자존심 없으면 시체’라는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 말인지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 모두가 좁아빠진 내 마음에서 빠져나오면서 알게 된 것들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에 한편으론 더없이 고마웠습니다.

회사에서 승진하고 일이 잘 풀리면 그게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고 나면 기쁨도 잠시 또 다른 목표가 저만치에 있습니다. 나는 또 달립니다. 하지만 목표에 닿는 순간, 기쁨은 신기루처럼 사라졌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내 몸은 물 한 모금도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져 갔습니다.

직장 동료도 경쟁자일 뿐이었습니다. 집에서도 가장이란 권위와 체면 때문에 힘든 마음조차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내가 편히 있을 곳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거 같았습니다. 마음수련은 이런 내게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수련을 하면서 알게 된 본래의 나는, 그 모든 걸 알고 있었습니다. 왜 그리 힘들 수 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마치 목을 조여 왔던 넥타이가 느슨하게 풀리듯 나는 비로소 크게 숨 쉴 수 있었습니다.

직장인들의 삶이라는 게 어찌보면 살고 죽고의 문제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니까요. 하지만 거기엔 왜 태어났고 왜 살고 어디로 가느냐가 없습니다. 문득 허무한 마음이 들어도 바쁜 일상에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언제 직장에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도 힘들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본래 마음을 되찾은 순간, 나는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무수한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나간 과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들로 시간을 보내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가장 좋아하는 일터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14명의 든든한 직원들과 함께하는 지점장으로서 말입니다. 수많은 거래처 고객들을 만나 예금관리, 대출, 상품 판매 등 영업을 추진하면서 한 지점을 운영하는 일이 제 업무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주말엔 아내와 산책도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소소한 기쁨을 알아갑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했습니다. 고객분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처음 뵙는 분인데도 마치 오랜 친구와 만나는 것처럼 편안합니다. 놀라운 건 일을 할 때 문제를 어떻게 풀까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게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실타래처럼 꼬였던 문제들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습니다. 개인의 자존심보다 문제 해결에 집중해서 생긴 결과입니다. 그것은 그동안의 나는 버리고 새로운 나로 변화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직원들에게도 마음수련을 권했습니다. 스트레스 없는 삶이 누구나 가능하다는 것, 그 행복을 직원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해주는 직원들이 고맙기만 합니다. 나를 넘어 동료들의 나은 삶을 꿈꾼다는 건 예전의 나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알아갑니다. 행복은 남을 위할 때 저절로 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난해 말, 우리 지점에 기쁜 소식이 있었습니다. 고객 만족상을 수상한 것입니다. 한 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는 1년 내내 좋은 평가를 받아야 가능한 상이지요. 모두 묵묵히 애써준 직원들 덕분입니다.

퇴근하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문득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초생달이 유난히 밝습니다. 오늘 하루에 대해 아쉬움도 미련도 부족함도 없는 내 마음을 봅니다. 남음이 없는 하루하루. 그 옛날, 직장인으로서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이나 했을까요. 나는 지금 행복한 직장인입니다.

삶에 대해 의문이 많다면

삶에 대해 의문이 많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왜 무상한가? 우리는 왜 희로애락을 겪는가?”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
“왜 나는…? 왜 우리는…?”
의문투성이의 세상 속에 살며 늘 번뇌하고 힘들어하는 그에게,
어느 날 스승님이 말했습니다.
“너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네 옷자락에 붉은 얼룩이 묻었다 하자.
너는 이 얼룩이 도대체 무엇인지, 언제 왜 묻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얼룩을 완전히 깨끗하게 지워,
원래의 깨끗한 옷으로 돌아갔다 하자.
너는 얼룩이 있었다는 것조차 생각이 안 날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얼룩이 있는 만큼 의문이 생기고, 답답하기 마련이다.
본래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그 얼룩을 닦아내라.
옛날에 얼룩이 있었다 없었다는 중요하지 않다.
원래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면,
세상의 이치 또한 저절로 알게 되니,
더 이상 의문도 의심도 생기지 않게 된다.”


나는 오늘 어떤 의문을 가졌었나요?
그 답이 원래 내 안에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멀리서 찾지 않기.
뭔가 삶의 의문이 생기면, 내 마음부터 닦습니다.

자연의 마음

하늘이 맑으니
하늘 색이 푸르다 못하여 검게 보이누나
맑은 물이 산 사이의 계곡 따라
돌바닥인 계곡물이 맑기 그지없는데
이름 모를 고기가 놀고 있구나
 
산은 높은데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나고
새싹이 나뭇가지에 돋아나고 있구나
산에는 산나물이 돋아나고
다래나무에는 다래순이 많기도 하구나
산 계곡을 따라가다가 보니 취나물이
밭처럼 많기도 하구나
인적이 없는 산천을 따라 나물하러 이리저리 다니니
햇살마저 따스해 맑은 공기에 맑은 물에
세상에 찌들은 몸이 찌든 기가 다 빠지고
가볍기가 그지없고
온몸이 산천 닮아 깨끗하기가 그지없구나
젊은 날 등산을 했던 덕에 이 산 저 산을
헤매고 걸어도 지칠 줄을 모르겠구나
 
가지고 간 도시락을 물가의 넓은 바위에
앉아 먹고 있으니
조그마한 폭포가 있구나
낙수되는 언덕바지에 이름 모를 새가
무어라 조잘거리며 왔다 갔다 하구나
봄날의 산천에는 나만 보기가 너무나 아까운 것이 많고
날씨마저 따스한데
이 산천이 있고 얼마만 한 사람이
나가 다닌 곳을 다녔는지가 궁금해지구나
오기가 쉽지 않은 심산유곡에
사람이 다녔겠느냐는 마음이 들어 궁금했던 것이다

산 높은 곳으로 올라갈 때마다
현저히 나뭇잎이 덜 자라 있구나
계곡에 왔던 산노루 놀라 뒤를 힐끔힐끔 보며
달아나고 있고
이 산에 있는 동식물이 사람처럼 대 이어 살구나
집도 없고 발가벗은 자기만 가지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오는 대로
춥고 더우면 춥고 더운 대로 말없이 살구나
 
있었던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다시 오고 또 가고 하지만
간 곳도 본래이고 온 곳도 본래인 이치를
나만이 알고
무상한 세상에 무엇을 찾고 구하려고
수많은 이가 싸움하고 죽이고
도둑질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철없다는 생각이 드누나
 
자연의 심이 되어 탓함도 없고
시기 질투 잘남이 없고 옳다 그르다가 없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분별하는 마음이 없고
인간의 마음이 다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심이라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시인, 저술가, 강연가입니다. 2002년 인간 내면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UN-NGO 산하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평화 대사로도 활동 중입니다. 저서로 <세상 너머의 세상>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등이 있으며 그의 저서 중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의 영역본은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에서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데 이어, 5개 국제도서상 2013 LNBA, NIEA, IBA, IPPY Awards, 2012 eLit Awards에서 영성, 정신, 철학 분야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근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의 영역본이 2014 에릭 호퍼 북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하는 등 마음과 비움, 깨침에 대한 우 명 선생의 철학이 전 세계의 관심과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열린 고민 상담소

제 고민은요?

한순간의 실수로 3년 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재소자입니다. 저는 교도소에서 새사람이 되고자 많이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전기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도 졸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로 돌아가면 분명 주변 사람들보다 뒤처질 테고, 또한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흠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범죄자라는 편견, 차별과 불이익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내고 싶네요. 힘내라고 응원 좀 해주세요.

제 생각은요!

저는 강원도에서 건설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희 사업장에는 모두 일곱 명의 출소자분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출소한 후 오갈 데 없는 분들을 돕기 위해 2008년부터 고용을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십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전과자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에 개의치 마시고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만 가지십시오. 취업을 한 후에도 성실히 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요. 저는 출소자들을 위한 상담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출소 예정자들을 미리 만나 살길을 의논하고 상담을 하다 보니까 전혀 거부감이나 편견 없이 자연스럽게 고용까지 이뤄졌습니다. 전국적으로 지역마다 법무복지공단이 있고, 공단에서 운영하는 생활관에서는 생활도 함께하고 직업 교육 등도 시켜줍니다. 취업하실 때 도움을 받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장덕범

저는 교도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님의 고민은 수형자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고민입니다. 전문 용어로 게이트 피어(gate fear)라고 하는데 수형 생활에 익숙해지고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단계에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전과를 가지고 사회에 나가서 적응하는 것은 당연히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곳에서도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열심히 수형 생활을 한 수형자들이 교도소 소개로 자동차 정비 업체 등에 취업한 사례가 다수 있습니다. 업주들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채용하였으나 출소자가 정말 성실히 일하여, 선입견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이후 적극적으로 교도소에 구인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의 열심히 하고자 한 결심이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파에 마음을 닫지 않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성실히 삶을 살아간다면 사회 구성원들과 같은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먼 훗날 뒤돌아봤을 때 전과자라는 작은 흠은 시나브로 덮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장성일

저는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무기수에서 또다시 20년 수로 감형이 되었고, 모범적인 수형 생활을 인정받아 2010년 3.1절 특사로 가족의 품에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변해버린 사회 속에서 그동안 잃어버린 청춘을 찾으며, 가족의 몫을 충실히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고군분투하며 정신없이 4년을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청천벽력같이 아내가 위암으로 떠나는 등 큰 아픔과 슬픔을 겪으면서 가파른 험한 산을 몇 번 넘어왔는지 모릅니다.

저는 힘겨움이 닥치면 옛날 교도소 사형수 시절의 교훈들을 떠올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긍정적인 마인드로 굳건히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지금은 직장에서 A급으로 인정을 받고 있고, 교도소에서 배운 자동차 광택업을 창업하여 투잡으로 늘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비번 날에는 교정기관 교육 강사로도 활동하면서 삶의 보람도 찾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행복한 사형수>라는 자전적 에세이 책도 출판했고, 시인으로 등단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자화자찬하는 이유는 님께서도 “나도 남들처럼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재소자라는 선입견에 위축이 되지 말고, 조금이나마 힘과 용기를 내셔서 힘찬 삶을 사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전과자를 넓은 마음으로 보아주는 이는 드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수한 과거에 대해 죗값을 치르고, 앞으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잘 살겠노라 다짐하며, 따듯한 마음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향기로운 꽃처럼 사람의 향기를 풍기는 이에게 왜 돌을 던지겠습니까. 가슴 쓰라린 오늘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내일의 태양이 찬란하게 떠오릅니다. 행복한 내 삶을 위하여 희망의 끈을 잠시도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배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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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고 싶은 다음 고민입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 지난 호 박성근 님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네요. 전 50세의 주부(백수)인데 지독한 손치, 몸치, 느린 행동, 안경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고도근시, 사고로 인해 못 듣는 왼쪽 귀를 지녔습니다. 올봄 수급자를 위한 취업을 했지만 한쪽 귀만 들어서 일하는 데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중도 탈락했습니다. 요즘처럼 살기 빠듯한 세상에 남편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제가 답답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모든 걸 빠르게 빠르게, 더 빠른 사람만이 인정받는 세상에서 제가 살아갈 길은 없을까요?

‘개딸’이라 불리는 우리 집 딸아이

아침 7시 중학교 2학년 딸아이를 깨우려고 방에 들어갑니다. 방문이 안 밀립니다. 안에서 잠가놓은 건 아닌데 잘 안 밀립니다. 좀 더 힘을 줘서 밀어보니 제 몸 하나 겨우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확보됩니다. 문 앞에 딸아이의 책가방이 놓여 있습니다. 어깨끈이 문 밑에 끼어서 잘 안 열렸습니다. 책가방뿐만 아니라 문 앞에 널브러진 물건들이 많습니다. 문 앞에서 딸아이가 누워 있는 침대까지 약 네 걸음….

첫발에 무언가 걸렸습니다. 딸아이가 벗어놓은 바지, 형체 그대로 홀라당 뒤집혀 있습니다. 두 번째 발걸음, 발바닥에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생라면 부스러기를 밟았습니다. 세 번째 발걸음에 무언가 미끄덩하며 중심을 잃었습니다. 딸아이의 스타킹을 밟았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물건이 그냥 방바닥에 널려 있습니다.

“야~~~ 개딸~~~ 일어나라~ 7시다~~~”

딸아이가 미동도 없습니다.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미끄덩하고 손이 미끄러집니다. 잠들기 전 동백기름을 바르고 잤는지 머리에 기름기가 좔좔입니다.

“야~~ 개기름 딸~~~ 개딸~~~ 빨리 일어나~~~” 그제야 딸아이가 눈을 부스스 반쯤 뜹니다. “야, 가시나야 너 어제 또 라면 끓여 먹고 잤냐? 얼굴 부은 거 봐라 눈 코 입이 다 파묻혔다.”

커튼을 올리며 딸아이의 방을 한 번 훑어봤습니다. 책상에는 온갖 책과 참고서가 널려 있고 교복은 의자에 반쯤 걸쳐 소매 부분은 의자 바퀴에 끼어 있습니다. 딸아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길게 하품을 한 번 합니다. 볼에 하얗게 침 자국이 선명합니다.

내 딸이지만 정말…………………… 개를 닮았습니다.

15년 전 두 살 많은 오빠 밑으로 딸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정말 예쁜 내 강아지였습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정말 15년 후에 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쁜 애완견이 아닙니다. 일요일 아침 동물농장에 가끔 나오는 녹색 그물에 포획되어 발버둥치는 유기견의 몰골입니다. 다시 그물 속으로 아니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딸아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저는 방문을 나와 발바닥에 붙어 있는 라면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출근을 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퇴근을 하며 집 앞 슈퍼에 들러 개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한 통 사서 들어가는데 마침 딸아이가 슈퍼 앞을 지나칩니다. 길 건너로 달려가는 오빠 친구와 인사까지 하면서 희희낙락입니다. 경비실 앞을 통과하는 딸아이 뒤를 따랐습니다. 한겨울에 짧은 반바지를 입었습니다. 위는 하얀색 두꺼운 털 스웨터를 한쪽 어깨가 보이게 삐딱하게 걸쳤습니다. 가방은 어디 수산시장 아줌마들이나 들 법한 비닐 가방을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등까지 흘러내린 긴 생머리는 드러난 어깨 반대편으로 쓸어 넘겨져 있습니다. 딸아이를 불러 세웠습니다. 저를 돌아보는 딸아이의 얼굴이 경비실 불빛에 환하게 다가옵니다. 입술에 뭔가를 처발랐나 봅니다. “학원 갔다 오냐?” 딸아이가 저에게 달려옵니다. 아침에 봤던 개딸과는 전혀 다른, 이제 아가씨 티가 나는 것도 같은 딸아이가 반갑게 저를 향해 달려옵니다. 두 팔을 벌렸습니다…………… 왼쪽 손에 들려 있던 아이스크림 봉투만 낚아채서 집 쪽으로 뛰어갑니다. 진짜 개라면 꼬리라도 흔들 텐데…… 썅.

조금 전에 길 건너로 내달리던 오빠 친구 녀석은 과연 알까요? 밤마다 생라면을 먹으며 수프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고 이불에 쓱쓱 닦는 우리 개딸을… 하루 종일 신었던 스타킹을 고스란히 침대 밑으로 쑤셔 넣는 우리 개딸을… 분홍색 베개 커버에 알록달록 침 자국을 남기는 우리 개딸을… 침대에서 아이스크림 먹다 질질 흘리고 그냥 손으로 쓰윽 닦고 처자는 우리 개딸을….

15년 전 신생아실 창밖에서 꼼지락거리는 우리 딸아이를 바라보며 “우리 똥강아지~~ 아빠야~~”라고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 똥개까진 아닌 거 같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렵니다… 에휴….

백일성

백일성(44)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 <땡큐, 패밀리>를 출간했습니다.

노숙인이 만드는 종이 옷걸이 두손컴퍼니

취재 문진정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 겨울, 하루하루 추위와 싸우고 있는 노숙인들을 생각하는 기업이 있다. 일하는 손과 돕는 손이 만나 탄생한 소셜 벤처 ‘두손컴퍼니’. 대학교 동아리에서 시작된 두손컴퍼니의 대표는 28세 청년 박찬재씨다.

2011년 여름, 서울역 노숙인 강제 퇴거 조치로 인해 노숙인들은 서울역 인근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사설 용역을 피해 시간마다 자리를 옮기는 노숙인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박찬재씨는 곧장 막걸리를 사들고 서울역을 찾았다. 대부분 과거에는 정상적인 삶을 살다가 IMF 등의 위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앉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고민한 끝에 종이 옷걸이 제작을 생각해냈고 1년여의 준비 끝에 2012년 여름, 친환경 종이 옷걸이에 기업의 광고를 실어 수익을 내는 두손컴퍼니를 만들게 되었다.

옷걸이 광고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홍보 방법이라 소비자들의 주목도가 높은 것이 큰 장점이다. 현재 기업의 판촉물, 광고용 등으로 만들어진 옷걸이는 노숙인들이 직접 조립하고, 140여 곳의 게스트하우스에 배포되고 있다. 작은 옷걸이지만 만든 사람들의 정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제품, 그러면서 사용하는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두손컴퍼니. 노숙인들의 손을 맞잡아주는 이들 덕분에 올 겨울은 더 훈훈할 것 같다.

박찬재 대표 이야기
대학생으로서 생각지도 못했던 창업을 준비하면서 6개월간 노숙인 관련 기관들, 사회적 기업 관계자분들을 만났어요. ‘사지 멀쩡한 사람들이 게을러서 노숙을 한다’는 편견이 있잖아요. 실상을 들여다보면 간절히 재기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하게 된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노숙자’라고 했을 때 흔히 떠올리는 거리 노숙인은 10~20%에 불과하고, 쉼터에서 자활을 준비하거나 구직 활동을 하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이 계세요. 새벽 네다섯 시부터 부지런히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며 저 스스로도 편견이 많이 깨지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지요. 그래서 저희와 함께 옷걸이 조립 작업을 하시는 분들도 주로 자활 의지가 있는, 쉼터에서 생활하는 노숙인입니다. 아직 ‘일자리’라고 할 만큼 안정적인 고용을 만들어내긴 어렵지만 최대한 지속적으로 일거리를 제공해드리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흔히 농부의 고마움은 잊게 되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이걸 만들고 포장하고 운송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잊게 되는데 그 손길들을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어요. 단순히 물건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연결 관계를 느낄 수 있게요. 노숙인들과 함께 조금 특이하지만 의미 있는 길, 누군가 가지 않은 길을 먼저 가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상을 예방하는 방한화 선물 캠페인

두손컴퍼니에서는 최근 출시된 옷걸이 세트를 구매하면, 그 수익금으로 신발이 없는 노숙인에게 방한 신발을 전달하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옷걸이 디자인은 국민대학교 학생들의 재능 기부로 이루어졌다. 1월 31일까지 참여하면 된다.

www.dohands.com / www.ohmycompany.com

거친 눈보라에도 꺾이지 않는 들풀을 닮은 내 친구

하늘도 청명했던 지난 봄, 출근길에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따스한 봄 햇살과 시원한 공기가 필요할 것 같은 친구의 소식이 궁금해서다.

“어, 나야. 웬일이냐 형한테 전화를 다 하고….”

수신음이 한참 전달된 후 막 끊으려는 순간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눌함이 느껴지지만 목소리에 힘도 있고 무엇보다도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반응이어서 반가웠다.

“아침은 먹었냐? 날 좋은데 바람이라도 쐬러 밖에 좀 나오지 그래?”
“너… 잔말 말고… 지금 어디냐? 지금 다 와 가니까 사무실로… 아니 점심이나 같이 먹자. 거 뭐냐… 왜 새로 생겼다던 쌈밥, 후배 누구…? 에이, 집사람 바꿀게.”

적극적인 의사소통은 아직 무리인 듯 말이 매끄럽지 않다. 며칠 전 후배가 새로 개업한 쌈밥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는 얘긴데, 끝을 맺지 못하고 결국 부인을 바꾼다.

친구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 중환자실에서 두 달여를 보냈다. 심각한 것은 사람을 제대로 못 알아보며 엉뚱한 말을 하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점차 빠르게 회복되어 갔고, 하루 두어 차례씩 전화를 걸어와 완전치는 않지만 안부를 묻고 한참씩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부인은 그의 기억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매일 외출 허가를 받아 그가 일하던 일터를 보여주곤 한다고 했다. 오늘도 그렇게 아침 일찍 병원을 나선 것이다.

점심시간에 만나 밥 한 공기를 간단히 비운 친구는 며칠 새 빠졌던 살이 다시 찐 것 같다며 ‘허허’ 웃었다. 두 달여 만에 함께한 친구와의 식사 자리는 유쾌하게 끝났다. 재삼 다행임을 되뇌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는 유일하게 고향을 함께 지키며 서로 의지하던 친구인 데다, 얼마 전 지역에서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후배가 쓰러진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하직한 일도 있었던 터라 내심 조바심이 컸었다.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안흥찐빵’으로 유명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그 친구와 나의 고향이다. 덩치도 크고 운동 좋아하고 남성스럽고 호방한 성격의 친구. 학창 시절에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각자 도회지로 나가 실컷 삶의 쓴맛을 맛보고 비슷한 시기에 귀향을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30대 후반에 나보다 일찍 고향에 내려와서 몇 년간 열심히 일한 친구는 결국 다시 삶의 터전을 회복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서울에서 작은 사업을 하다 어려움을 겪고 고향에 내려온 나를 따듯이 챙겨준 이가 바로 이 친구였다. 아무리 고향이라 해도 여러 가지로 변해 낯설어진 이곳에서 내가 잘 정착할 수 있었던 건 이 친구의 도움이 컸다. 외모만큼이나 털털하고 정이 많았던 친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야~ 나와, 술 한잔 하자” 하며 속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라며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무던히도 많이 헤쳐 온 친구를 보면, 재작년 때늦은 폭설 때 본 들풀이 생각난다. 내가 일하는 건물 지붕 처마 밑 금속 틈바구니에 쌓인 흙먼지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던 이름 모를 들풀. 눈보라를 견디지 못하고 휩쓸려 사라진 줄 알았던 들풀이 며칠 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유난히도 거센 바람이 부는 날 창문을 통해 처마 끝을 바라보는 순간, 비스듬히 기울어진 들풀 두 포기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몸을 흔들었지만 오히려 ‘우리, 여기 이렇게 살아 있소’ 몸짓하는 것 같았다. 거친 삭풍 속에서도 절대 꺾이지 않는 배짱과 한결같음. 친구의 삶이 들풀을 닮았다.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지다 보니 친구가 간혹 “난 안 돼” 하며 자포자기할 때가 있다. 하지만 분명 이 친구는 모두 극복해낼 것이다. 머지않아 정상의 모습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야! 커피 한 잔 타~뫄”라고 소리치며 사무실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들꽃이 다시 몸을 드러내었듯, 밤새 몰아치던 비바람이 이내 봄을 가져다 놓듯이.

성락 50세. 직장인.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친구의 쾌유를 바라는
성락 님의 마음을 담아,
친구분께 꽃바구니를 보내드립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사람’을 소개해주세요.
그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담은 편지도 좋습니다.
소개된 분께는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건강한 화초 고르는 방법

그리 머지않은 곳으로부터 포근한 봄이 다가오는 게 느껴집니다. 우리 집 새봄맞이 분위기 좀 내볼까 하시는 분들께 가장 저렴하고도 효과 만점인 방법은 바로 예쁜 꽃 화분 하나 들여놓는 거라고 귀띔 드리고 싶네요.

화초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키우려면 처음부터 튼튼한 것을 골라야 합니다. 꽃집 주인이 권해주는 대로 덜컥 집어올 게 아니라 다음 몇 가지 사항을 눈여겨보는 게 좋아요.

같은 종류의 화초 여러 개를 비교해 봤을 때, 한눈에 싱싱함이 물씬 느껴지는 것, 잎의 색깔이 진하고 잎맥이 뚜렷한 것, 줄기가 굵고 튼튼하며 잎 표면이 매끈한 것을 고르면 됩니다. 화분 밑으로 뿌리가 삐져나와 있는 건 뿌리가 잘 내렸다는 증거이죠.

잎의 앞뒷면을 꼼꼼히 살펴봤을 때 작은 반점이나 얼룩이 있거나 표면이 울퉁불퉁 하다면 건강하지 못한 녀석이니 조심하세요. 벌레는 주로 잎의 뒷면에 많이 붙어 있으니까 잎을 뒤집어 잘 살펴야 해요. 아울러, 화분의 흙도 유심히 살펴 작은 벌레가 숨어 있는지도 보세요.

꽃이 피는 식물을 구입할 때는 색깔이 선명하고 상처나 얼룩이 없으며 꽃대가 굵은 것이 좋은데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많은 것보다는 꽃이 어느 정도 피어 있는 것을 구입하는 게 훨씬 안전해요. 집으로 데려오면 온도와 습도, 빛의 밝기와 같은 문제로 꽃봉오리가 그냥 그대로 마르거나 떨어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참, 화초 잎 표면에서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에 현혹되지 마세요. 원래 건강한 화초의 잎에서는 특유의 윤이 나는 게 당연하지만, 요즘엔 대부분 식물 광택제를 뿌려 일부러 윤을 내기 때문에 분간이 어렵답니다.

실내 화초 대부분은 계절에 관계없이 구입할 수가 있는데, 그래도 특히 겨울엔 조심해야 합니다. 온도가 높은 꽃집에 있던 화초를 데리고 와서 서서히 적응시키지도 않고 추운 베란다에 두었을 경우,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로 식물이 스트레스를 받아 상해 버리기 때문이에요. 어때요? 건강한 화초 고르는 방법, 그다지 어렵지 않죠?^^

글 &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길쭉길쭉 떡갈비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칼국수에는 칼이 없다(^^)지만, 오늘은 정말 떡이 들어가 떡갈비인, 또 떡처럼 고기를 치대어 만드는 떡갈비를 해보자. 미트로프라고 다진 고기 속에 채소를 넣어 길쭉하게 만들어 먹는 서양 요리가 있는데, 그 요리를 응용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김치와 떡을 넣어 보았다. 쇠고기뿐 아니라 돼지고기나 닭고기로 응용해도 좋다. 미리 만들어 쿠킹호일에 싸서 냉동 보관하였다가 하나씩 꺼내어 구워 먹어도 된다.

글 & 요리 이미경 자료 제공 <국민 야참>(상상출판)

재료 가래떡 1줄, 배추김치 2장, 양파 1/4개, 표고버섯 1개, 식용유 조금, 다진 쇠고기 200g, 빵가루 약간

양념장 간장 1큰술, 설탕 0.5큰술, 맛술 0.5큰술, 다진 파 1큰술, 다진 마늘, 참기름, 후춧가루 약간

➊ 가래떡이 딱딱하다면 물에 담가 부드럽게 불린다. ➋ 배추김치는 속을 털어내고 물기를 제거한다. ➌ 양파와 표고버섯은 곱게 다져 프라이팬에 볶은 후 식힌다. ➍ 볼에 쇠고기와 양념장 재료, 다진 양파와 표고버섯, 빵가루를 모두 넣고 섞어 치대어 쇠고기 반죽을 만든다. ➎ 김발에 랩을 씌운 후, 쇠고기 반죽을 넓게 펴고 그 위에 배추김치와 가래떡을 올려 돌돌 만다. ➏ 200℃로 예열한 오븐에서 10~15분 정도 구운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낸다. 프라이팬에 구울 때는 굴려가며 뚜껑을 덮고 익혀준다.

요리 연구가 이미경님은 쿠킹스튜디오 ‘네츄르먼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동양매직요리학원 원장, 선재사찰음식문화 수석연구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건강한 제철 음식, 심플하고 부담 없는 레시피를 대중에게 알려오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국민 야참> <아이요리> 외 다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