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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수련 인간관계_대인기피증 극복의 비밀은, 자신감

방 안에 혼자 외로이 앉아있는 여자, 대인기피증, 우울증

“ 저는 대인기피증 때문에 너무 힘들 있었는데요, 예전의 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했어요. “

어,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제 스무 살 시절 이야기요.
아..막상 이야기하려니 조금 창피하네요..

그때 저는요, 단체생활에서 말도 잘 못하고 자신감도 없었어요.
단체생활을 항상 피해 다녔죠. 대부분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었구요.
사람들이랑 대화하는것도 어색했고, 그냥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아무렇지 않은 척 부자연스럽게 있었어요.
힘들었죠.. 사교성, 사회성 완전 제로.

이런 제 인간관계가 엉망이었던 이유는 바로 ‘대인기피증’이었습니다..!

완전히 달라진 나

어떻게 달라졌냐고요? 명상하고 자신감을 되찾았어요!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바로 ‘마음수련 빼기명상’인데요,
제가 어떻게 마음수련으로 극복했는지 말씀드릴게요. ㅋㅋ

불안감, 긴장감밖에 없었던 나의 인간관계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 긴장감과,
불안감을 자주 느끼는 분들 있으신가요?
혹시, 저와 같은 고민이 있으신가 궁금하네요.

대학 시절, 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얘기할 때
머리 속이 하얘질 정도로 긴장했어요.
아니, 일반 긴장이 아니었어요. 앞, 뒤, 좌, 우가 완전 막혔었죠.
말하기 전엔 심장이 뛰고, 말문이 항상 막혔었죠.

나름 제 머릿속 상상 속에서는 명언을 술술 풀어내고 있었죠.
이 정도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혹하겠다, 모두에게 인정받겠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당당했죠. 그런데 현실은?

어.. “저.. 그.. 음..” “이게..” 막힘없이 나오는 건 이것뿐이었어요.
결국 뜻대로 안 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사람 많은 곳은 피하게 됐어요. 소개팅? 팀 과제?
아, 하고 싶어도 못해.. 그렇게 저는 ‘외톨이’가 되어갔죠. 히키코모리처럼..ㅋㅋ

카페에서도 혼자 구석에 앉아 커피 마시는 게 일상이 됐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인기피증으로 일상속 힘들었던점이 많았던것 같아요.

대인기피증 때문에 힘들었던 점

소통장벽

대화의 어려움

소통이 힘들었어요. 할 말은 많은데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 목소리가 떨리고 말문이 막혀버려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정리해서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죠.

대화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첫 마디를 꺼내는 게 왜 이리 힘든지!
상대방과 대화를 하려고 해도, 어떻게 소통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죠.
결국 하고 싶었던 말들은 가슴 속에 묻어둔 채,
대화의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경우가 많았어요.

피곤

빠른 피로감

사람들을 만나면 지쳤죠.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크게 움직이거나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쉽게 지치곤 했어요.

이유는 간단해 보이지만 복잡해요. 겉으로는 조용히 있는 것 같아도,
마음속으로는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거든요.
“내가 지금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진 않을까?”,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뭔가 말을 해야 하나?”
이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빠르게 소모하게 되었죠.

결국 실제로 한 일은 별로 없는데도 마음은 이미 지쳐있고,
점점 더 예민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빨리 지치고,
혼자만의 시간이 항상 필요하다 느꼈었어요.


소통의 어려움

감정표현의 벽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었어요.
감정표현을 정말 못했어요.
“좋다”, “싫다”와 같은 기초감정조차
말로 꺼내기가 어려웠죠.

특히 이성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건 더욱 힘들었어요.
좋아한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도,
그 말이 생각에서만 맴돌다
다시 돌아오곤 했죠.

항상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가득했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
이런 생각들이 표현하는 것을 가로막았죠.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커서, 제 감정은 항상 억누르고 숨겼어요.
결국 저는 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채,
그저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보며 지냈어요.

본래 제 모습은 어딘가에 숨겨둔 채로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저는
마치 감정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아요.

대인기피증 원인_나의 문제, 아니면 상대의 문제?

과거의 상처

어릴 적 대학입시에서의 경험이 제게
큰 상처를 남겼어요. 입시를 준비하던 중,
그림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학원장에게 심한 폭언을 들었죠.
많은 친구들 앞에서요.

그 순간 제 마음은 심하게 위축되었고,
그때부터 사람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이 사건이 제 마음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었어요.

눈치보는 마음, 자유롭지 못한 나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돼요.
밥을 먹을 때도, 대화 중에도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느라
정작 제 중심을 잡기 어려웠어요.

이런 끊임없는 타인의식 때문에
모든 자리가 불편하고 힘들게 느껴졌죠.
결국 저는 점점 주체성을
잃게 되었던 것 같아요.

선입견과 편견, 내가 만든 고립

사람들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판단을 내리고 했어요.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할 거야”,
“이 사람은 나를 이해 못할 거야”
같은 생각들이었죠.

이런 선입견 때문에 저도 모르게
사람을 피하게 되고, 결국 혼자
고립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어요.
내가 만든 편견으로 사람과
어울리지 못했구나 느꼈죠.

이런 문제들로 힘들어하던 제가
변화의 기회를 만난 건
마음수련 명상을 통해서였어요.
명상을 하며 제 삶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제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제 모습들을
하나, 둘 발견하게 되었죠.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제 행동과 생각들이 사실은
대인기피증의 원인이었고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마음수련 명상은 마치 유리알처럼
제 속을 비추어 주었어요.

마음수련 후 변화_내가 달라지니 옆사람도 달라졌어요

명상을 하면서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변화가 시작됩니다.

변화, 새로운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이제는 자신있게 표현해요

이제는 상황에 따라
저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인정해야 하지만,
상대방에게 할 말이 있다면 표현해요.

내가 꼭 맞는 말을 해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을 상대에게
적절히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표현을 안 하고 상대가 알아주길 바랐는데,
제가 표현을 안 하면 상대도 모른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표현하며 소통해야 되는구나
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어요.

더 이상 눈치보질 않아 자유롭다

사람들과의 불편함은
내가 과하게 눈치를 보고
지나치게 의식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것이 내 마음에서 시작된 걸
알아차리고 버리니, 더 이상
눈치 보는 일이 없어졌어요.
이제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게 되었죠.

편견을 버리니 만난 새로운 사람들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사라지니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편견과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죠.
편견 없이 사람을 만나니
자유롭고 편안해졌어요.

마음수련으로 얻은 자신감의 비밀_ 대인기피증 극복 후 나의 삶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던
제가 지금은 직장에서 프레젠테이션 발표자로
서 있어요. 처음엔 떨렸지만, 지금은 오히려
즐기게 되었죠. 또 친구관계에서도 제가 밝고
행복하니 다들 저를 좋아해주고 다가와줘서
고마움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전환점은 바로 ‘마음수련 빼기명상’이었죠.
저를 밝고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매개체였습니다.

내 안에 있던 나를 바닥으로
내려가게 만든 생각들,
“나는 못생겼어”, “나는 못 할거야”,
“나는 가진 게 없어”..
이런 부정적인 내 모습들을 하나씩
없애다 보니, 어느새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드러났어요.

제가 밝고 행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과의 만남이 편해졌고,
이제는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에너지를 얻게 되었어요.

우정, 친구

저도 지금 내가 왜 행복하지?
생각해보면, 마음속에 자신감과
자존감이 있기에 가능한 것 같아요.

내가 밝아져서, 함께 웃고 떠드는 것.
이게 바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요?

함께, 행복

가장 편안한 친구, 우리 엄마를 소개합니다

지금도 엄마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만약 명상을 안 했더라면 아마 우리 둘 중 한 명은 이 세상에 있지 못할 거라고….” 그땐 그 정도로 힘들고 괴로웠다. 나는 어릴 때 문제아였다.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친구들을 괴롭혔고, 부모님 속을 썩였다. 그에 비하면 동생은 정말 양반이어서 항상 비교되었고, “동생보다 못한 놈”이란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늘 나를 의심하고, 체크하는 엄마가 싫었다.

이창욱. 미국 버지니아주 거주

중학교 때 엄마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고백했었다. 엄마는 당장 헤어지라고 하셨다. 이유는 단 하나, 공부 잘하는 동생은 되지만, 공부 못하는 난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난 집에선 항상 무뚝뚝했고, 부모님에게 ‘귀한 아들’이 아니라 문제아에 더 가까웠다. 말 안 듣는다고 동생 때리고, 학교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엄마를 몇 번이나 불려 오시게 했다. 어느 날 엄마가 하신 말씀, “너한테 큰 기대를 가졌었는데, 지금은 아무 기대도 안 한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엄마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남 앞에서는 좋은 엄마인 척, 잘난 아들이 있는 척하다가, 나하고만 있으면 남처럼 대하는 엄마가 너무 싫고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엄마는 내가 밤늦게 오고 공부도 안 하는 게 친구들 때문이라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셨다. 실시간 전화로 체크하는 엄마가 너무 싫었다. 그 집착이 끔찍했다. 그럴수록 엄마의 말을 더 안 들었다.
한번은 학원 가기가 싫어서, 친구와 오락실 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아빠가 오시더니 갑자기 나의 뺨을 때렸다. 집에 와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저 엄마의 전화 한 통, 지금 아들이 나쁜 짓을 하고 있을 거란 얘기만 듣고 그러신 거였다. 그 뒤로 엄마 아빠와 대화를 거의 안 하고 살았다. 엄마는 항상 나를 의심하고 남과 비교했다. 무조건 학원부터 보내려는 엄마의 욕심에 한때는 정말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엄마가 언젠가부터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말 안 들으면 벌써 회초리가 날아왔어야 하는데 그러질 않으셨다. 몰래 오토바이를 탔던 터라 늘 조마조마했던 내게 “조심해서 타라”고 하셨고, 집 밖에서 친구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릴 때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실 땐 정말 놀랐다. 동생에게 엄마가 왜 저러냐고 물어봤더니 마음수련 명상을 하신다고 했다. 그래도 난 시간이 지나면 똑같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모습이 점점 눈에 띄었다. 공부 못한다고 무작정 학원을 보내려던 전과 달리 너 편한 대로 다니라고 하셨다. 어느 순간 진심으로 느껴졌다.
엄마의 모습을 보고 나도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 가게 되었다. 엄마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의 사진을 하나하나 버릴 때마다 홀가분해졌다. 엄마가 나를 미워하고, 의심했다 여겼던 기억과 마음을 버리니 정말 세상이 달라 보였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확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자 웃음 없이 우울했던 엄마가 보였다. 나 때문에 속 썩어서 늘 아팠던 엄마, 후회가 많이 되었다. 나를 낳고 시댁에서 이쁨받던 엄마,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면서 힘들어했을 고통이 느껴졌다. 난 너무 이기적이었다. 정말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큰절을 했다. 잘못했다고, 엄마 아빠의 마음을 몰랐었다고, 제가 힘들었던 만큼 엄마의 마음은 더 많이 아프고 힘드셨을 텐데 그래도 아들이라고 밥 챙겨주시고 신경 써주셨던 거 정말 감사하다고…. 그 말씀을 들은 부모님은 오히려 “그동안 너무 큰 욕심으로 너를 힘들게 했다”면서 정말 잘못했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명상을 하시고 나서 건강을 회복하셨고 늘 밝게 웃어주신다. 엄마의 변화가 나에겐 더 큰 변화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좋은 친구도 더 많이 생기고, 선생님들도 항상 밝아서 좋다고 칭찬하신다.
지금은 미국 유학 중이다. 낯선 그곳에서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마다 엄마의 전화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전엔 ‘무조건 안 돼’였는데 이젠 ‘그것 괜찮다’ 하시면서 편한 친구처럼 상담해주신다. 지금은 엄마가 내 친구 소식을 더 잘 아실 정도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커서 뭘 해야 할 지 몰랐는데, 지금은 꿈이 생겼다. 어릴 적부터 자동차를 좋아한 나는 훌륭한 자동차 정비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자동차 매케닉 대학에도 입학할 예정이다.
예전엔 엄마 없을 때만 집에 놀러왔던 친구들이 아들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항상 명절 때면 찾아가 세배를 올리는 친구들 덕분에 마음 놓고 공부하고 있다. 친구들도 엄마가 되게 많이 변하신 거 같다면서, 친구들 엄마 중에서 우리 엄마가 제일 편하다고 한다. 한국에 가게 되면 엄마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2010. 5. May 월간마음수련

“애들과 남편이 그냥 앉아만 있어도 햇살처럼 빛난대요”

엄마들은 늘 꿈꾼다. 자식들을 통해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고, 자신의 ‘헌신’과 ‘희생’을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어 한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자녀들이 우울증을 겪으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엄마 정태연(58)씨와, 사랑받고 살면서도 늘 공허하고 우울했던 엄마 정영숙(52)씨는 마음수련 명상을 하고 난 후 비로소 인생의 문제를 풀었다 한다. 환한 미소가 아름다운 두 엄마가 말하는 ‘내 삶의 변화와 감동’ 이야기.

정리, 사진 김혜균 진행 문진정

난 꽤 괜찮은 여자인데 세상이 몰라주는 줄 알았죠
태연 저는 결혼 전부터 남 앞에서 잘나고 반짝반짝 빛나고 싶었어요. 근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세상이 원망스러웠죠.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가 다섯 형제를 키우셨거든요.
영숙 저는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셨는데 시골에서 ‘교장 선생님 딸’ 하면 알아주니까 커서도 은연중에 남이 알아주길 바랐던 거 같아요. 근데 충족이 안 되니까 외롭고 자신감도 없고, 많이 우울했죠.
태연 옛날엔 나이 차면 빨리 결혼시켰잖아요. 생활이 너무 어려우니까 엄마가 시집가래서 갔어요. 힘든 상태에서 결혼하니까 남편도 안 좋은 것만 보이는 거예요. 첫아이 낳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둘째 낳기는 싫었는데 남편과 친정 엄마가 낳으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설상가상으로 쌍둥이인 거예요. 냉장고, 세탁기도 없고, 남의 집 셋방살이에 갓난아이가 셋이다 보니, 기저귀 빨면서 맨날 울고, 원망하고, 짜증 내고. 이건 사람이 아니에요.
영숙 제 남편은 가정적이었어요. 그런데도 ‘도대체 나는 뭐지’ 하면서 불만이 많았어요. 남편이 직업군인이라 외진 지역에 주로 다녔기 때문에 외로움을 더 탔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애들한테 깊은 사랑을 못 줬더라고요.
태연 쌍둥이 낳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때 세상이 참으로 원망스럽더라고요. 주인아주머니가 시끄럽다고, 물 많이 쓴다고 나가라고 한 거예요. 돌아서면 기저귀가 쌓이고, 밤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그러다 보니 아기들 한번 따듯하게 안아서 우유 먹인 적도 없어요. 나중에 아이들이 크니까 어릴 때 엄마한테 받지 못한 사랑이 나타나더라구요.
영숙 형편이 좀 낫다 해도 허한 마음은 같아요. 이것저것 많이 배웠죠. 조리사에 가스 점검, 발마사지, 비즈공예, 양재, 근데도 허하더라고요. 명상하면서 보니 그게 다 열등감 때문이었어요.
태연 그런 욕구 불만을 저는 자식을 통해서 이루겠다고 생각한 거 같애요. 남한테 흠잡히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굉장히 심해서 애들도 많이 때렸어요.
영숙 그런 모습이 상상이 안 돼요.
태연 제가 척하는 데 왕이에요. 남들은 저를 절대로 화를 낼 사람으로 안 봐요. 근데 완전히 괴물이었죠.(웃음) 그건 우리 애들밖에 몰라요. 지겹게 잔소리하고 신경질 내고 때리는 엄마였어요. 아이 셋 다 내성적이고 순종적이고 공부도 잘했거든요. 돈 많이 벌어서 아이들을 최고로 가르치겠다, 나 같은 설움, 콤플렉스 없이 키우겠다는 집념만 있었죠. 아들은 대학 보내고 딸들은 돈이 없어서 상고를 억지로 보냈는데, 쌍둥이한테 우울증이 왔어요. 직장 적응 못 하고, 친구 관계도 안 좋고. 아들은 대학에 적응 못 해 군대 가고. 그때까지도 저는 돈 버느라 몰랐어요. 큰딸이 대학에 다시 들어가면서 우울증에서 벗어나기에 둘째 딸도 대학엘 보냈는데 얘는 더 심해지는 거예요. 애들과 싸우면서 10년이 지나더라고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태에서 마음수련 명상을 만났어요.
영숙 저는 2006년도 중앙일보에 난 마음수련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어요. 1과정을 하면서 혼자 만세를 불렀어요. 업연의 고리를 이제 끊었다 싶었어요. 왜 사는지 알았고, 맨날 외롭다, 나란 존재란 도대체 뭘까, 고민 많았는데, 그런 것들이 다 풀리니까 이제 살았구나, 그 순간이 너무 좋았어요.
태연 그 시원함, 명상한 사람은 다 알죠. 명상센터 가면 조용한 게 그렇게 좋았어요. 집에선 맨날 싸웠으니까요. 한 열흘쯤 되니까 마음이 편안한 거예요. 아, 이런 게 다 있나 싶어서 더 열심히 버렸어요. 근데 명상 중에 어릴 때 오빠가 동생들 때리는 걸 본 장면이 사진처럼 딱 떠오르더라구요. 내가 애들을 때린 게 거기에서 온 거였어요. 눈물이 많이 났어요. 이 사진 한 장이 우리 세 아이를 그렇게 때리게 했구나. 정말 어렸을 때 찍어놓은 ‘사진’이 전 인생을 끌고 가더라고요. 누굴 원망할 필요가 없어요. 이 사진이 계속 연결되는 고리구나, 이걸 끊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정영숙(52). 2006년 마음수련 명상 시작. 1983년에 남편 국승철씨와 결혼해서 두 딸을 키우고 있다.

정태연(58). 2007년 마음수련 명상시작. 1977년에 남편 이재홍씨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쌍둥이 3남매를 키우고 있다.

어릴 때의 기억 ‘사진 한 장’이 평생 좌우
영숙 아까 고리를 끊었다 한 게 바로 그거였어요. 어릴 때 어머니가 집에 많이 안 계셔서 많이 외로웠어요. 한번은 저녁이 돼서 컴컴하니까 등잔불을 붙였는데 불이 확 났어요. 어린 마음에 너무 무서워서 막 울었거든요. 아무리 둘러봐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거기서부터 외롭고 두려운 마음이 커졌더라고요.
태연 그걸 대물려 준 거예요. 벗어나지 않으면 아이들도 나랑 똑같은 인생이 되겠구나, 너무나 기가 막히더라고요. 싫었던 내 인생을 애들한테 그대로 강요한 거예요. 혼났던 거, 두려웠던 것들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오빠가 아버지한테 맞았던 걸 동생들한테 그대로 했어요. 그게 너무 싫어서 나는 절대 오빠같이 안 한다 했는데, 제가 그대로 자식들한테 하더라구요.
영숙 애들이 결혼 전에 마음공부를 해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자식 낳아도 우리처럼 안 키울 수 있잖아요.
태연 물론이죠. 옛날엔 일거수일투족 잔소리를 했거든요. 왜 이리 늦게 일어나냐, 엄마 힘든데 너는 왜 그리 사냐, 근데 내가 달라지지 않고는 자식보고 달라지라고 할 자격이 없더라고요. 그런 지독한 엄마 밑에서 살아준 것만도 감사하죠. 요즘은 가끔 잔소리를 해도 바로 후회하죠. ‘아직 내가 남아 있어서 잘못했습니다’ 하루 종일 반성하고.
영숙 아이들이 많이 좋아졌겠어요.
태연 저희 가정은 다시 태어난 거예요. 아빠하고 부딪치는 것도 손가락 꼽을 정도고, 애들은 거의 웃질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 잘 웃어서 탈이에요.(웃음) 며칠 전엔 큰딸한테 전화했어요. 가만히 보니까 마음으론 회개하지만 실제로는 안 했더라고요.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싶어서 전화했다 하니까 딸이 ‘엄마도 모르고 그런 거니 이해한다’고 하더라구요.
영숙 저는 남편이나 아이들한테 충분히 사랑을 못준 게 미안하고 그 죄책감이 많았어요. 제가 느낀 외로움을 줬잖아요. 그동안 내 안에 갇혀서 외로웠는데, 지금은 그게 다 허물어지니까 하루하루가 정말 새로워요.
태연 남편도 명상하고부터는 먼저 잘못했습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는 말을 잘해요. 남편이 다 내 잘못이라고 할 땐 그 말이 송구스러울 정도로 다 내 잘못이더라고요. 내가 그동안 했던 행동, 말들에 남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예전엔 뭐든지 비교했어요. 누구는 이런데 내 신세는 왜 이러나 하고.
영숙 맞아요. 저도 돈 많고 남편이 잘해주는 친구들 보면 질투도 많이 났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요. 친구들이 여유 있게, 웃고 사니까 좋고요.
태연 제가 시집 식구들에 대한 미움이 참 많았어요. 남편하고 싸울 때 항상 시집 식구들을 걸고넘어지고, 잘사는 형제들이 밉고, 안 도와주는 게 원망스러웠는데 명상하고부터는 친척들은 물론 친구들이 잘사는 것도 감사한 거예요. 거짓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못살아도 옆의 사람이 잘살면 그게 더 좋으니, 그렇게 변한 내가 참으로 놀라워요.
영숙 정말 이거 나 맞어? 정영숙 맞어? 하는 거죠.(웃음)

인상 좋아져 평생의 보톡스 맞은 셈
태연 전부 다 똑같으면 이 세상이 굴러가지가 않잖아요. 작고 크고 높고 낮고 모든 만상만물이 다 다르니까 완전한 거죠. 그걸 아니까 내가 못났다는 것도, 비교하는 마음도 저절로 없어지더라구요. 솔직히 지금 제가 하는 일이 거리 청소거든요. 명상하고부터는 맨날 즐거워요. 썩은 음식을 치우면서도 감사하고 불만이 없어졌어요. 또 전에는 가족들한테 희생했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명상하고부터는 내가 희생한 게 아니라 온 세상이 나를 지금 여기 살게 해주고 있더라고요.
영숙 잘해야 한다, 돋보이고 싶다 그런 게 없어지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니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대로 보여주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마음도 편안해지고요. 잘해야지 하는 마음도 없는데 정성은 더 들이게 돼요. 마음 없이 하니까 음식도 더 맛있고 뭘 해도 전보다 더 잘 만들어지고. 있는 대로 세상을 산다는 게 대충 사는 게 아니구나, 결과는 더 완벽하더라고요.
태연 거기서 이게 행복이구나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편안한 마음으로 가족을 쳐다볼 때 남편이 예뻐 보일 때. 이런 마음을 찾게 되었다는 게 감사하죠.
영숙 보통 같으면 화나야 할 상황에도 마음이 안 일어나요. 아, 마음을 비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한테 편안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얼굴에 생기가 있고,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오기도 하고. 전엔 얼굴 표정이 나도 모르게 경직됐는데, 애들 말로는 찌푸렸던 미간이 활짝 폈다고 하더라고요. 보톡스 맞은 것처럼.(웃음) 그러니까 엄마들이 진짜 마음을 비워야 해요. 요즘 엄마들 자식 교육 욕심이 극에 달했잖아요. 여유도 전혀 없고, 마음에 빈틈이 없는 거 같아요. 마음을 비운 만큼 아이들과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럼 엄마로서 잘하고 싶은데도, 자꾸만 꼬여가던 많은 문제들의 해결방법도 보일 거예요.
태연 엄마들이 마음의 짐이 많잖아요. 명상하기 전까지는 우리 집에서 제일 골칫덩어리가 딸이었는데 명상하고 나서는 다들 모두를 살린 복덩이라고 해요.
영숙 기적이 멀리 있나요, 이게 바로 기적이죠.(웃음)

2010. 5. May 월간마음수련

존댓말 써야 대화하던 남편의 엄청난 변화

남편한테는 항상 존댓말을 써야 했다. 그러다가 좀 편해진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말을 놓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갑자기 남편은 하던 말을 멈췄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대화가 끊긴 게 감지되면 ‘아, 내가 존댓말을 안 했구나’를 알 수 있었다. 남편과 편안한 대화가 어렵다 보니 부부 사이는 편치 않았고, 마음의 벽은 쌓여만 갔다.

송영선. 서울시 구로구

한번은 하도 답답해서 왜 꼭 존댓말을 써야 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남편은 신입 사원 때 상사 댁에 갔다가 그 부인과 차를 마시게 되었다 한다. 그때 부인이 상사한테 반말하는 게 보기가 좋지 않았다면서, 남편한테는 꼭 존댓말을 써야 된다고 생각했다 한다.
남편은 집안일에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혼 후 첫아이를 낳을 때였다. 삼칠일 동안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다가 집에 갔는데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오기 전날 분명 남편한데 청소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도 소용없었다.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 그동안 보지 않은 신문지도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걸 본 뒤로 나는 남편이 집안일을 돕는 것에 대해선 아예 포기하고 살았다.
남편과 시댁에 가는 일도 큰 스트레스였다. 시댁에서 돌아오면 남편은 시댁에서 한 말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당신은 어머니에게 그런 얘기는 하지 말았어야 돼!” 말만 하면 꼬투리가 잡힌다 싶어 말을 할 땐 남편이 트집 잡을까봐 마음이 항상 불편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했다.
3년 전부터인가 남편과 대화를 하는 게 점차 편안하다고 느껴졌다. 대화가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속으론 ‘이상하네. 이 사람이 왜 꼬투리를 안 잡을까’ 생각했다. 처음엔 잠깐이려니 했지만 그 후에도 편안한 모습 그대로였다.
남편의 존댓말 시비가 없어지면서 나도 점차 남편에 대한 시비가 없어졌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집에 오면 겉옷을 벗자마자 청소부터 한다. 매끌매끌한 바닥이 좋아 발을 동동 구를 때면 남편도 “우리 아내가 나이 들어도 귀엽다”면서 좋아한다. 집안 정리 정돈에다 청소는 물론 설거지까지, 남편은 그야말로 완전히 바뀌었다.
또한 남편은 언제부턴가 계속 칭찬을 해주었다. 뭐를 하든 “참 잘했어” “당신 전보다 어머니 뜻을 잘 받들어주네” 하면서 그냥 속으로 지나칠 수 있는 말들도 딱 집어서 얘기해 주었다. 남편이 칭찬을 해주니 나도 남편의 단점보다 장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남편과의 대화가 즐거워졌다.
차츰 물들어가듯이 남편의 변화에 나도 마음이 편해지고 좋아지면서 작년부터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20년 동안 운영한 가게를 그만두었을 때 남편은 한 달 동안 쉴 겸 해서 마음수련 메인센터에 다녀오라고 권유했다. 오랫동안 집을 비워도 남편이 잘할 거란 믿음 덕분에 갈 수 있었다. 살아온 삶을 버리자 진짜 버려지는 게 신기했다. 남편이 왜 그렇게 바뀌었나 했더니 삶의 ‘마음사진’을 버린 데 그 비결이 있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먼저 장점이 보이고 또 감사한 생각이 든다.
아이들도 아빠를 아주 편안해한다. 전엔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아빠여서 아이들도 꼭 존댓말을 해야 했고, 아빠와의 대화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가 명상을 하면서 격이 없어지니까 아이들도 편하게 얘기한다. 그런 아빠의 모습을 아들들도 점점 본받는 것 같다. 아빠가 하듯이 엄마한테 안부 전화도 잘하고, 배려도 해준다. 또한 식사하다가 물컵이 쏟아지거나 음식을 떨어뜨리며 실수를 하면 전엔 “너 그럴 줄 알았어” 하며 힐책을 했었지만 이젠 서로 먼저 일어나 걸레를 가져와 닦는다.
요즘은 자기 전에 늘 남편이 나의 손등에 잘 자라며 입을 맞춰준다. 가끔 손을 보면 다정다감해진 남편 생각이 나서 웃기도 한다. 명상 전과 후의 남편의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남편 따라 명상을 한 가족 모두가 이젠 그 차이를 체감한다. 좁은 마음세계를 벗어나 마음 편하게 지내는 진짜 행복을 실감하고 있다.

2010. 7. July 월간마음수련

차갑던 마음을 풀어준 햇볕은 마음수련 명상이었죠

강영성 한의사. 2005년에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했다.

다정다감 아빠의 비결
강영성씨와 가족의 대화

컴퓨터 게임 하느라 공부를 등한시했던 아들 때문에 스트레스받던 아빠 강영성(52)씨. ‘인생은 부지런히 살아야 보람차다’는 신조로 살아온 강영성씨는 가족들이 태만해 보이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처럼만 열심히 살아라”는 강요에 아들과 딸은 냉랭했고, 이를 바라보는 아내 조부덕(49)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한다. 틀 세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아버지를 부드럽게 변화시킨 건 마음수련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이들 가족의 화해기를 들어본다.

정리, 사진 김혜균


당신은 ‘인상파 강영성’이었어요
아들 우리 집이 정말 화목해지긴 했나 봐요. 이렇게 잡지에도 나오고.(웃음)
아빠 이게 다 우리 아들 덕분이다. 니 덕분에 우리 식구가 모두 마음수련을 시작했고 아빠도 많이 바뀌었잖니.
엄마 당신은 얼굴부터가 확 펴졌어. 전엔 집에 들어오면 인상부터 썼잖아.
아빠 전에야 당신 마음에 얼마나 안 들었겠어. 무슨 말 한두 마디만 하면 ‘됐다, 그만해라’ ‘알았다, 그리 안 할게. 끝!’ 했으니까.
엄마 ‘그리 안 할게’도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뭐 있나 하면서 자기가 잘못한 걸 인정한 적이 없었지.
아빠 맞다, 맞다. 내는 오십 평생 살아오면서 무조건 열심히 사는 게 제일 잘 사는 거라 생각했어.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으니까 잘못한 게 없다 생각했지.
엄마 당신 인생의 목표가 ‘열심히’였잖아.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고 일요일 날 한 번도 집에 있는 걸 못 봤어. 하루에 세 번 정도는 나갔다 들어와야 하고, 쉴 새 없이 움직여야, ‘보람찬 하루였다’ 했잖아.(웃음)
아빠 한 시간이라도 몸을 땅바닥에 붙이면 보람찬 하루가 아니었지.(웃음)
아들 내가 다섯 살 때, 처음으로 배운 말이 ‘보람차다’였어요. 아빠가 하도 그러시니까 제가 보람차다가 뭐야? 물었더니, ‘하루를 억수로 한 일 많게!’라고 설명해주신 게 기억나요. 그래서 저도 맨날 일기장에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라고 쓰고.(웃음)
아빠 아빠도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어. 할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농사를 지었는데 내내 일하고도 한 번도 아프다고 드러누운 적이 없으셨어. 그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열심히 살아야겠다가 몸에 밴 거지.
엄마 옛날엔 먹고사는 게 제일 큰일이었지만 요즘 애들은 원하는 게 다르잖아. 내가 당신은 애들한테 너무 해주는 게 없다고 하면 첫마디가 “내가 할 일 안 하는 게 뭐 있노. 일 열심히 해서 돈 벌어주는데” 했잖아. 항상 12시 넘어서 들어오고, 일찍 들어오는 날은 자기 공부하고, 애들하고 같이 놀아준다는 거 자체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게 불만이었던 거라.
아들 저도 아빠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같이 있으면 불편하니까 밥도 잘 안 먹고, 용돈 달라는 소리도 잘 못했어요.
아빠 그래. 니들하고 진짜 오순도순 이야기해 본 적이 없던 거 같다. 때가 되면 알아서 할 건데 그걸 못 참아서 이래라 저래라 야단만 쳤지. 니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아빠하고 대판 싸운 거 기억나나?
아들 그때가 학원 다니다가 가출했을 때였잖아요.

강태규. 2005년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에서 명상을 시작했다.

아빠랑 대화하면 TV랑 하는 것 같았어요
아빠
중학교 때는 공부해야 된다는 개념이 딱 들어 있었거든. 근데 공부 안 하지, 컴퓨터 게임도 많이 하지, 야단치고 혼내도 바뀌지 않으니까, 아빠도 너무너무 힘들어서 퇴근하기가 싫었어. 집에 오는 게 꼭 감옥소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지.
아들 저도 아빠가 집에 오는 게 싫었어요. 배가 좀 차가지고 깨작깨작 먹으면 아빠가 밥상 엎으면서 “왜 밥을 그래 먹노!” 하고…. 제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혼내고 화내시니까요. “왜 꼭 그래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빠랑 대화하면 TV하고 얘기하는 것 같았어요. 대화가 안 통하니까.
아빠 다행히 그 무렵에 마음수련을 하게 됐지. 엄마가 잘 가는 미장원 원장님이 니가 오락에 빠져 있다고 하니까 청소년 마음수련 캠프 보내라 한 거야. 부모부터 해야 한다고 하기에 아빠도 했지. 근데 수련을 해보니까 아빠가 정말 잘못한 게 많더라. 한 번도 니들이나 엄마 말을 수용한 적이 없었어. 미안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
엄마 당신 바뀐 거 보고 나도 너무 놀랐어. 나보고 하고 싶은 말 다 하라고 하고, 애들한테 너무 해준 게 없다 하고.
아빠 수련하고 처음 한 달 동안은 정말 마음이 편안하데. 근데 또 아들이 게임을 하면 속이 디비지고, 딸내미까지 친구하고 문제가 있어 학교를 휴학하겠다고 하니까 마음수련을 계속 안 할 수가 없더라고.
아들 아빠를 이해하면서도 나한테 강요하는 게 싫었어요. 저도 수련하면서 아빠에 대한 마음 버리면서 울기도 했는데, 아빠에 대한 연민 같은 게 느껴져서였어요. 아빠가 틀에 매여 사는구나, 그래서 아빠도 괴롭고 주변 사람도 괴롭구나, 하고요.
아빠 그래 맞다. 작년에는 너하고 아빠하고 엄청 다퉈서 결국 문짝 다 부숴지고, 엄마가 보기에 이러다 진짜 아들하고 애비하고 원수가 되겠다 싶어 니가 원룸 구해서 집 나갔잖아. 그러고 나서 아빠도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나. 그렇게 불같이 성질을 내고 보니까 너무나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데. 진심으로 제대로 버린 게 없었구나 싶었어. 그때부터 수련을 정말로 열심히 했어. 그랬더니 어느 순간에,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나로 인해서 비롯됐다는 걸 깨닫게 됐지. 그래, 우리 가족부터 100% 수용해보자 다짐을 하고, 일단 너희 일에 간섭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엄마 그래도 아빠가 아들한테 얼마나 공 많이 들였노. 아침 먹다가 아들 좋아하는 거 있으면 엄마한테 그것 좀 싸라 해서 아빠가 차에서 아침 먹이고, 학교도 데려다 주고.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잖아. 그러더니 니가 거짓말같이 게임 안 하고 올해 2월부터 공부하겠다 했잖아.

각자가 자신을 돌아보는 힘이 생긴 거지
아들
이제 게임 그만하고 공부해야겠다 결심했을 때 그냥 눈물이 났어요. 왜 울었는지 몰라도 속으론 기뻤어요. 제가 공부 안 해도 겉으론 되게 편안해 보이니까 친구들이 속세를 떠난 도인 같다 했거든요. 근데 어느 날부턴가 쟤들은 저리 열심히 하는데 나는 뭐하고 있지 이런 생각도 들고.
아빠 공부하겠다 하고는 휴대폰도 컴퓨터도 다 끊어버렸잖아. 집에도 다시 들어오고.
아들 나갈 때 아빠 얼굴 죽을 때까지 안 볼 거다 하고 나갔는데, 아빠도 바뀌고 있고, 올해 아빠가 화내는 건 한 번도 못 봤으니까요. 밤늦게 컴퓨터 하다 아빠한테 들켜도 그냥 들어가라고만 하시고. 아빠가 옛날엔 전부 부정이었으면 요즘은 항상 긍정인 거 같아요.
엄마 태규가 어느 날 우리 가족 중에 아빠가 제일 힘들겠다고 한 거, 당신 알아요? 자기는 공부하기 싫으면 안 하고, 엄마도 우리 보내고 나면 맘대로 할 수 있는데 아빠는 우리를 위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해야 되고, 돈 벌어야 한다고 하면서.(웃음)
아빠 우리 아들이 그런 소리를 했나?(웃음)
아들 아빠는 보면 은근히 정이 많으신 거 같애요. 친척 분들이 어려우면 아빠가 많이 도와주시잖아요. 항상 엄마도 아빠는 저 작은 몸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책임지냐고, 그런 말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 거 생각하면 아빠도 힘드니까 우리한테 신경질 낼 수도 있는 건데, 그걸 이해 못 했던 게 반성이 됐어요.
아빠 수련하면서 우리가 다 서서히 바뀐 것 같애. 당신도 그랬잖아. 세상 살면서 어떻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애들이 다 그렇게 클 수 있겠냐고. 애들한테 너무 바라지 말자, 그런 얘기를 들으면 아, 맞다 내가 애들한테 너무 집착해서 내가 바라는 사람으로 키우려고 했구나, 정말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데.
엄마 내도 참 잘못한 게 많았지. 당신하고 사이가 안 좋다 보니까 애들한테 당신과의 자리를 못 만들어준 거 같애. 늘 당신은 바쁘니까 하고 제외시켰으니까.
아들 전엔 대학 갈 생각이 없어서 공부도 안 했는데 요즘은 목표가 생기니까 좋아요. 한번은 나의 장점과 단점을 나열해 보는데, 장점은 못 적겠더라고요. 그때 내가 진짜 안될 놈이구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엄마 자신을 돌아보는 힘이 생긴 거지. 전엔 지겨워서 일부러 학교에서 잤는데 지금은 잠 올까봐 밥도 조금 먹고 수업 다 듣고 한다며. 공부한 지 한 달 만에 성적도 많이 올랐고.

조부덕. 1989년도에 강영성씨와 결혼해서 남매를 키우고 있다. 명상은 2005년에 시작했다.

아빠가 매사 긍정적이니 집안이 화목해요
아빠
니 얘길 들어보니까 아빠가 자꾸 내를 돌아보듯 너도 똑같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잘못인지 스스로 찾고 해결하려 하고.
아들 아빠가 매사 긍정적이 되니까 집안 자체가 화목하게 돌아가잖아요. 옛날엔 불화의 원인은 아빠라고 생각했는데.(웃음)
아빠 (웃음) 맞다. 아빠가 바뀌니까 모든 게 순리대로 되잖아. 아참, 올 초 니가 고3이라고 보약을 지어줬는데, 너는 괜찮다고 아빠 힘드니까 아버지 주라는 얘기 엄마한테 들었을 때, 아빠가 얼마나 짠했는 줄 아나.
아들 약 먹기 싫어서 그런 건데요.(농담^^)
아빠 하하하. 그 말 들었을 때 아빤 정말 행복했다. 우리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열리고 있구나 싶었어.
엄마 언제부턴가 아들이 아빠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 전에는 무늬만 가족이었잖아. 근데 수련하고 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가족이 됐다는 게 너무 고마워.
아빠 알다시피 아빠가 얼마나 잘난 척하고 자존심 강하고 남한테 굽히는 거 억수로 싫어했나. 그런 내를 니들이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해준 거라. 요즘 나는 진짜 근심 걱정이 없고, 누가 조금만 우스갯소리 하면 그냥 웃음이 나고 그래. 요즘은 환자들이 “같은 사람 맞습니까?” 그런다니까. 전엔 사람들이 “저 한의원 원장은 완전 얼음이다. 사람 보고 가지 말고 병 나으러만 가라”고 했다잖아.
엄마 맞어. 당신 진짜 많이 달라졌어.
아들 다 제가 복이 많은 아이라 그런 거예요.(웃음)
아빠 그래. 니가 복덩이다. 엄마 아빠 마음수련도 하게 해주고.(웃음)

우는 남자가 아름답다, 중년 남성의 눈물 바람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는 말이 있다. 울고 싶어도 아무나 울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나마 울 수 있으면 다행이다. 특히 남성들은 눈물을 흘리지 못해 병난다. ‘울 수 있는’ 방을 만들어 남자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곳이 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울 수 있는 공간에서 한바탕 울고 난 중년 남성들은 ‘울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편안해지는 것인지 몰랐다’고 말한다.

취재, 사진 정하나

“난 여태 울어본 적도 없고, 울 새도 없었어요”
말쑥한 양복 차림의 50대 남성이 굳은 얼굴로 들어선다. 중소업체의 대표인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 증상으로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아, 내가 이런 데 올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은 뛰는데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 하고 아무래도 안 되겠는 깁니다. 괜찮아지는 약 있으면 좀 줘보이소.”
“언제부터 그런 증세가 있으셨어요?”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갓집 다녀오는 길에 그럽디다. 밀리는 차 안에서 가슴이 답답~ 해지는데, 갑자기 숨을 못 쉴 것 같고 이대로 죽을 것 같더라고. 마음이 심약한 것도 아닌데, 나는 사막에 던져놔도 사는 사람이란 말이요.”
“그런 증세는 열심히 살아오신 분들한테 많이 나타나지요.”
“그렇죠. 열 살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장남인데 그때부터 안 해본 게 없어요. 지금도 나를 따르는 사람도 많아요.”
“그렇게 힘들게 사시면서 마음이 괴로울 때는 없으셨어요?”
“참, 나도 사람인데 왜 그런 게 없겠습니까? 내 마음은 아무도 모르지….”
“….”
“아버지 돌아가신 날 울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요번에 친구 아버지 돌아가시는 것 보는데 아버지 생각도 나고. 이러다가 죽으면 우리 노모와 자식들도 결혼 안 했는데 어떻게 죽나 싶고. 거 참….”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많이 있으셨나 보네요.”
“그런 순간이 많았죠…. 말해 뭐합니까….”
남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흠, 흠 헛기침을 하며 눈물을 감추려 하자 김성미 원장이 다시 말을 잇는다.
“힘드신 거 있으면 얘기를 하세요. 사장님도 사람인데 어떻게 한 면만 보이며 살아가시겠어요. 울고 싶으면 우세요.”
“내가 여지껏 한 번도 울어본 적도 없고, 아버지 죽은 후로는 울 새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상갓집 갔다 오는데 그렇게 눈물이 납디다. 인생이 이게 뭔가 싶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는 내리막길밖에 없구나, 인제 죽는구나, 너무너무 불안하고 외롭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6남매 맏이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며, 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심경을 토로하던 그는 마침내 눈물을 보이고야 만다. 봇물이 터진 눈물은 이내 흐느낌이 된다.
“우세요. 얼마나 힘드셨어요. 사장님이라고 울고 싶을 때가 왜 없었겠어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 못 운 거 지금 우세요. 여기서는 괜찮아요.”
한참 동안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진정이 될 즈음, 조용히 지켜보던 원장은 그를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김성미 원장은 <마음과마음> 정신건강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가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의 방을 만든 것은 6년 전이었다. 상담하다 보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남성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억누르려 하거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처음부터 울 생각으로 오는 분은 안 계세요. 그런데 상담하다 보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동안 참 외로우셨겠다, 하는 말 한마디에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시고요. 한번 울고 나면 무장해제가 돼요. 나중엔 함빡 웃음을 지으면서 울 수 있는 게 이렇게 편해지는 것인 줄 몰랐다고 하세요.”

“그동안 참 외로우셨겠어요.” 자기의 감정을 돌아볼 새 없이 앞만 보며 달려온 중년 남성들은 이런 공감의 말 한마디에도 금세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로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꼽는 김성미 원장은 영화는 ‘파이란’, 소설은 조두진의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추천한다.

자기 감정조차 잘 모르는 ‘마음 난독증’
처음엔 정신과를 찾아온 것만 해도 남자들에겐 자존심 상하는 일이란다. 게다가 의사가 여성인 것을 알면 눈물을 흘리기는 더욱 어려운 조건이 되니, 이런 상황에서 한동안 흐느끼다 보면 자연히 자신의 틀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 된다.
“40~60대의 중년 남성들이 특히 많이 찾아옵니다. 그것도 회사의 중견 간부급이나 경영자,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지요. 이분들은 대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뒷골이 댕긴다, 머리가 아프다, 심장이 두근거린다,라며 신체 증상을 호소하지만 결국 마음에서 기인한 병이라는 것이다. 열심히 앞만 보며 살아오다가 이제 어느 정도 정점에 선 단계가 되면 더 이상 갈 곳도 없어 보이는데 건강마저 예전 같지 않으니 불안이 크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호르몬의 변화가 큽니다. 회의감 위기감도 잘 느끼고, 슬프고, 허전하고, 마음도 약해지지만, 직장이나 가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도 많은 거지요. 나약한 모습을 어디 호소할 곳도 없고 겉으로는 더 강한 척할 수밖에 없어요.”
특히 남성 중엔 마치 난독증처럼 자신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감정을 억압만 하며 살아오다 보니 진짜 자기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지식에 대해서 늘어놓는 것에는 능숙하지만, “오늘 기분이 어땠어요?”라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신체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김원장은 때로 다음과 같은 말로 감정을 말할 수 있도록 바꾸어 말해준다고 한다.
“위장병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화가 날 일이 많다고 이야기하세요”라고 말하고, “위장이 아픈 것은 화난 것을 참아서 아픈 것”이라고 설명해주는 것이다. “얼굴이 자주 화끈화끈해진다” 하면 “사람들 앞에서 바보 취급을 당할까봐 두려웠다 이야기하세요”라며 신체의 증상이 아닌 감정이나 마음을 표현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너무 자기 감정을 억압하지 말고 어릴 때처럼 잔잔하게 이야기하세요”라고 하면서.

남편이 울 땐 부끄럽지 않게 격려해주세요
사람의 마음을 보살피는 정신과 전문의인 김성미 원장도 한때는 눈물을 흘리는 환자를 보면 ‘눈물까지 흘리는 걸 보니 중증이구나’ ‘이제 좀 덜 울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남자들의 울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때도 많았다. 이십대 후반의 젊은 의사인 그녀는 환자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보다는 의학 서적을 파고들면서 진단명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노력할 때도 있었다.
어린 시절 감수성이 풍부하고 눈물 많은 아이였지만, 성인이 되어 성공과 성취를 향해 매진하는 그 시간은 눈물을 잊고 산 세월이기도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 세 명을 낳고, 쉴 틈 없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즈음 다시 눈물을 되찾게 되었다.
“전투적으로만 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결혼 후 환경이 바뀌면서 몸도 아프니까 예전만큼 활동할 수가 없었어요. 뭔가 이렇게 숨 가쁘게 사는 게 다가 아닌데 하며 저를 돌아보게 된 거죠. 그러면서 흘린 눈물이 많았죠.”
그 눈물은 진정으로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환자가 무슨 이름의 병이냐를 찾기에 앞서 환자의 상처나 아픔에 대해서 귀 기울였다. 그리고 ‘눈물’에 대한 관점도 바뀌었다.
“결국 환자들 이야기가 제 얘기죠. 이제는 울면 성공이라 생각해요. 울 수 있다는 것은 꼭 흑백TV를 보다가 칼라TV를 보는 느낌처럼, 세상이 바뀌는 거더라고요.”
김성미 원장은 가정에서도 아빠나, 남편이 눈물을 흘릴 때 편안하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말한다.
“중년이 되면서 마음이 약해지니까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물을 흘려요. 그럴 때 아내들이 ‘와 우노, 보기 싫다, 애들 보는데 빨리 들어가라’ 그러세요. 남편이 약해지면 자기 울타리가 무너질까봐 겁이 나는 거죠.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남편이 울면 드디어 저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었구나, 귀한 기회로 보시면 좋겠어요. 손수건 갖다주면서 옆에서 등을 쓸어준다든지, 부끄럽지 않게 격려해주는 게 필요합니다.”

“저 어릴 때는 잘 울었어요. 이 마루는 누나들하고 놀던 시골 들마루 같네요.” 눈물방에 들어간 남성들은 그 공간을 무척 편안해한다.

“울고 싶어진다는 것은 약해진 게 아니에요. 오히려 굉장히 긍정적이고 자기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인 거죠.”

눈물은 진정한 자기와 만나는 신호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김원장은 집에서도 자신의 우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단다. 친구나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우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좋은 교육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잘 우는 막내아들에 비해 맏딸은 참 씩씩하지만 강한 척하고 눈물 안 보이려고 해서 걱정이라는 그녀다.
“가족이든 친구든 또는 환자든 울고 싶을 때는 참지 말고 울 수 있는 공간에서 울라고 조언합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면 되거든요. 물론 제 자신에게도 해당되고요.”
때로는 그녀도 뭔가 너무 꽉 찼다 싶을 때는 혼자만의 장소를 찾는다. 차 안이나 가까운 절을 찾아간다. 두 아름 정도 되는 산벚꽃나무와 냇물이 흐르는 그곳에서 실컷 울고 나면 개운해진단다.
자신을 만나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온 성공의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 앞만 보고 질주할 것이 아니라, 가만히 멈추어 서서 자기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진정한 자신을 만나는 첫 시작인 것이다.
“감정적으로 힘들거나 그런 상황과 마주쳤을 때 외면하거나 부딪쳐 싸우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 들어줄 사람을 찾아 울거나, 혼자만의 장소를 찾아가 우세요. 울고 싶어진다는 것은 약해진 게 아니에요. 오히려 굉장히 긍정적이고 자기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인 거죠.”

2010. 6. June 월간마음수련

그냥 존재하는 진리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참인 그 마음에는 그냥 있구나
흘러가는 물도 세상이 변하여도
참인 그 마음은 그냥 있구나
흘러가는 세월 따라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늙어가도 그 마음은 그냥 있구나
죽어도 그 마음은 그냥 있구나

소리 높이 외치던
가슴 치며 통곡하는 수많은 인생사에
모든 한도 모든 원도 그 마음에는
인간사에 일체로부터 떠나갔구나
어디 가고 어디에 있느냐
한이 많은 인생사는
뜬구름 같은 것을 마음에다 담고 살아가면서
너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시비하지만
모두가 잘난 이가 없는 뜬구름 인생사
말만 많았고 말만 잘났지 잘난 것이 하나도 없구나
어디론가 사라지는 물거품 인생사인 줄
알지를 못하는 것은
물거품이니 세상 나 살지 못하니
알 수가 없는 것이라

가도 가도 끝이 없고 갈 곳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속서 뱅뱅 돌고 있기만 하누나
소리도 냄새도 맛도 없이 소리 소식도 없이
언젠가는 참이 와서
세상에 이치를 가르치고 세상을 말하나
뜻도 이유도 모르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소리도 안 들리고
보지도 못할 것이다

詩_ 우 명

우 명 선생은 마음수련의 창시자이며, 저술가이자 시인이다. 깨달음과 진리에 관한 3권의 시집을 포함, 모두 열 권의 책을 펴냈으며, 마음과 우주의 이치, 사람들이 마음을 닦아 참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담고 있다.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로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기념하는 에릭 호퍼 어워드에서 몽테뉴 메달을 수상했으며 철학, 영성, 명상 분야에서 다수의 도서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및 일본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전 세계를 다니며 강의와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2010. 6. June 월간마음수련

마음공부는 취업과 성취의 가장 큰 ‘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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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마음껏 누리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요즘 대학생들. 공부, 동아리 활동, 연애 등 두루두루 열심히 하면서도 늘 허무했다는 서지행(25)양과 원하던 학교도 전공도 아닌 대학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문현진(29)양. 이들이 대학 시절을 인생의 방향을 정립하는 알찬 시기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비우면서였다. 꿈과 희망, 열정…. 무엇이든 채워야만 발전할 것 같은 청춘의 시기에 이들은 비움으로써만 가능한 진정한 성취를 경험했단다.

정리, 사진_ 김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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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하면 성형 안 해도 된다고 하죠
  요즘 대학 분위기는 어때? 후배들 보면 취업 준비 때문에 진짜 바쁜 것 같더라.
  정말 바빠요. 공모전, 어학연수, 해외 봉사, 인턴십도 해야 하고, 이런 게 필수 코스가 돼버린 거 같아요. 뒤떨어질까봐 아등바등하고, 경쟁에 치여 사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요즘은 다들 열심히 해서 학점도 좋고 토익 점수도 비슷하잖아. 그래서 인사 담당자나 헤드헌터들은 잘 융화될 수 있는 성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나로선 명상으로 열린 생각을 갖게 되면서 삶의 여유가 생긴 게 면접 볼 때도 남다르게 한 것 같애.
  굉장히 공감이 가요. 스펙도 많이 쌓고 자기 계발을 많이 해도 자기가 누구고 왜 살아가는지 근본을 모르면 허무하죠. 저도 그랬고요. 선배님 말처럼 인사 담당자들이 인성을 가장 중요하게 보잖아요. 저도 명상하면서 저건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니 반은 했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나중에 명상센터에서 나랑 같이 면접을 봤던 분을 우연히 만났어. 되게 반갑더라. 그분 말이 ‘네가 명상을 해서 면접할 때 그랬구나!’ 하는 거야. 어쩐지 말하는 게 굉장히 여유로웠다면서. 사실 그게 제일 어렵잖아.
  면접관들이 얼마나 많은 지원자들을 만나봤겠어요. 근데, 다들 인성이 중요하다면서도 왜 지나쳐버리게 되는 걸까요?
  인성은 시험이 없잖아. 구체적인 수치로 내가 인성이 좋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자꾸 그렇게 되는 거 같애. 난 면접 가서 인상 좋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 마음 비우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면서 저절로 얼굴이 펴진 덕분이지.
  그래서 ‘마음수련 명상은 성형외과다’라고 하잖아요.(웃음)
  자신감이 생기니까 외모도 예뻐질 수밖에 없는 거 같애. 4학년 취업설명회 때 친구들은 그냥 듣고 갔지만 나는 인사 담당자를 찾아갔어. 그 뒤에도 취직에 대해 잘 알 거 같은 사람, 또 회사 다니는 선배한테 물어가며 하니까 취업 준비도 되게 신나고 재밌더라구.
  진짜 놀랍다. 그런 건 정말 자신감이 없으면 못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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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있는 자신감, 취업 준비 즐겁게 하는 법
  사실 취업 준비가 힘든 게 아니거든. 오히려 즐겁고 신나지. 다양한 걸 알고 경험할 수 있으니까. 만약 명상을 안 했다면 나도 내가 잘났다는 생각에 혼자 다 알아서 하려고 애썼을 거야. 하지만 명상하면서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게 된 후엔 그냥 묻고 다녔어. 모르는 걸 묻는 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진 거야.
  마음을 버리며 자기반성을 하면 허황된 생각을 버리게 되니까 현실적으로 나한테 맞는 걸 찾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옛날엔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좌절하고 힘들어했는데 이제는 새롭게 길을 찾아가게 되었다고 할까.
  맞아. 그 길을 계속 가든, 다른 길을 찾든, 중요한 건 두려움이 없어졌다는 거지.
  선배님 얘기 들어보니까 직장 구하는 것도 복잡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겠는데요. 특히나 요새는 인턴 한번 안 해보면 지원도 못 해요. 근데 말씀 듣다 보니 내가 하고 싶으면 한번 해봐야겠구나, 직장 구하는 게 아무리 어렵다 해도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확 드네요.
  어디든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애. 내가 하는 일이 하찮다고 업신여기거나 대충 하는 게 아니고, 작은 일이라도 열심히 하다 보면 더 좋은 기회는 생기게 되어 있으니까.
  저는 명상하고 가장 좋았던 게 잡생각이 없어진 거예요. 어떤 걸 하든지 그 순간엔 집중하고 있더라구요. 명상하고 나선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있게 책을 보고 즐겁게 공부를 하고 있더라구요.
  마음공부하느라 시간 뺏길 것 같지만 오히려 학점도 더 잘 나오잖아. 그게 점수에 매여서 책 봤을 때랑 다른 거야. 내 친구들만 봐도 2학년 말부터 우리도 이제 학점 신경 쓰자, 이러다간 취직 못 한다면서 공부했거든. 근데 토익 시험 치기도 전부터 걱정만 하는 거야. 하도 그래서 ‘모르는 건 잘하는 애한테 물어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도대체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냐고 하더라고.(웃음)
  그거 근거 있는 자신감인데.(웃음)
  난 처음에 대학 들어가서 실망을 많이 했었어. 내가 생각했던 거랑 너무 다른 거야. 대학에 가면 공부도 심도 있게 하고 똑똑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친구들이랑 매일 술이나 마시고. 학교도 전공도 원하던 것이 아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애. 그러던 차에 1학년 여름 방학 때 엄마가 마음수련 명상을 해보라고 했어. 그때는 아싸, 엄마랑 안 싸워도 되는구나, 집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웃음) 마치 도피처처럼 명상을 하러 갔던 거 같아.

포장할 필요가 없는 게 좋아요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모범생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대학 가면 일단 하고 싶은 걸 다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동아리도 서너 개,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장학금도 받았거든요. 근데 나중엔 스트레스가 되더라구요. 모두 잘해야 한다는 욕심 때문이었죠. 정말 힘들더라고요. 뭘 위해서 이러는지 모르겠고, 왠지 허무하고 충족이 안 되는 거예요. 매사에 나는 안 될 거야 하는 부정적인 생각부터 들고요. 저도 교환 학생 가려고 준비할 때 부모님이 권해서 하게 됐어요.
  난 명상하면서 내가 진짜 잘못 살았다는 게 느껴지더라. 다 내가 선택해놓고, 학교도, 친구도 색안경 끼고 봤던 거야. 괜히 엄마한테 왜 나를 이해 못 해주냐고 뭐라 하고, 친구들한테도 진실하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더라구. 명상하고는 완전히 바뀌었지. 엄마한테도, 친구들한테도 정말 잘못했다고 했어.
  저도 그랬어요. 제가 워낙 내성적인데 대학 와선 좀 달라져야겠다 싶어서 억지로 활발한 척했거든요. 그런 내 모습에 지쳤었는데, 명상하면서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지 알게 됐어요. 어릴 때부터 항상 ‘착하고 모범적인 아이’라는 말을 듣고 인정받기 위해 포장하며 살아왔더라고요. 지금은 있는 그대로 대하게 됐고, 사람들 만나는 게 편해졌어요.
  완전 공감. 나도 친구들한테 이중 마음으로 대했더라고. 예를 들어 나는 친구가 힘들 때 얘기 들어주고 힘내라며 편지도 써줬는데 그 친구는 안 그러는 거야. 그게 되게 힘들었어. 근데 명상하고선 완전 바뀌었지. 그냥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잖아. 바라는 거나 기대하는 거 없이…. 그 마음을 배웠지.
  저는 매사에 완벽하고, 하고 싶은 걸 이뤄야 한다는 욕심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계획대로 안 되면 좌절하고 불안해하고.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요. ‘미래에 꼭 어떻게 되어야만 해’ 하는 생각은 오히려 저의 가능성을 막는 걸 수도 있잖아요. 옛날엔 계획 세우느라 시간이 다 갔는데 이젠 안 그래요. 지금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니까 길도 보여요.
  맞아. 그렇게 부정적인 마음을 버린 만큼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거야. 마음수련 명상을 하고 나서 좋아하지 않았던 학교의 캠퍼스가 아름다워 보이고, 전공이 재밌어졌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신기해. 명상 후에야 대학 생활이 진짜 즐거워졌다니까.
  전 어릴 때부터 세상에 불만이 많아서 내가 이다음에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러다 명상을 하면서 세상은 그대로 있을 뿐인데, 내가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라는 걸 크게 깨달았어요. 오늘 선배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구요. 고마워요, 참 많은 도움이 됐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아주 좋은 시간이었어. 우리 앞으로도 파이팅 하자!!

 

2010. 7. July 월간마음수련

예민했던 나, 대인 관계의 고수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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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 읽기와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소심하고 평범한 아이였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잘 받는 예민한 성격이라 대인 관계가 아주 힘들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니 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빠졌다.

왕혜진. 이화여대 한국화과 4학년

고등학교 때와는 모든 게 달랐다. 수업이 끝나면 따로따로 흩어지던 학부 친구들, 적성에 맞지 않던 학과와 전과(轉科)를 반대하시던 부모님, 사람들과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찾아간 동아리도 생각이 나와는 너무 달라 힘들었다. 대학에 입학하면 자유롭게 내 꿈을 펼칠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외롭고, 힘들었고, 별세계에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점점 지쳐갔다. 학교상담센터를 방문해도, 잠깐의 위로였을 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대학에 들어간 뒤 점점 더 심해졌다. 심하게 다투면 방에 틀어박혀 울거나 집을 뛰쳐나가거나 했다. 그럴 때 전화할 만한 친구도 없었다. 무리 사이에 껴 있으면 항상 겉돌았다. 몸도 늘 무기력하고 피곤했고, 그러다 보니 게으름이 습관이 되었다. 팔, 허리, 어깨 아픈 곳도 많았다.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보려고 해도 그때뿐이었다. 나는 심리적인 압박이 너무 커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매일매일 자해하는 망상을 했다. 산다는 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별일도 없는데 눈물을 줄줄 흘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고장 난 걸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특이한 공개강좌가 열렸다. 마음수련 명상이라는 거였는데, 느낌도 좋았고, 명상에도 관심이 있어서 가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나를 구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데 거기 사람들은 정말, 가식이 없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걸 보니 ‘아, 나도 이걸 하면 행복해질 수 있겠다’ 싶어 대학생 캠프를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잘 이해도 되지 않았고, 정말로 버려지는지 의문도 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버려 가면서, 며칠 지나지 않아 명상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주일이 지난 뒤, 몸과 마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난생처음, 행복이라는 것도 느꼈다. 예전의 행복이란 건 내가 원하는 게 이뤄지거나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조건에서 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거나 머리로 행복하다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비워지니 그런 것 없이도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마음수련 명상은 내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우선 스트레스가 제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거의 없다. 평소에도 긴장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타입이라서, 전엔 무언가를 하게 되면 불안에 떨고 이것저것 고민도 많이 하고 심리적으로 압박감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 이젠 새로운 일을 준비해도 불안함이 없다. 마음 없이 그냥 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학교에서 하는 전시회도 열등감과 완벽주의, 불안함과 걱정, 자책감과 도망치고 싶은 기분 같은 갖가지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게 없으니 너무 즐겁고 좋다.
친구들에게도 집착하거나 내 생각이 옳다고 강요하는 경우도 많았다. 친구들이 고민을 이야기하면 그냥 이겨내면 되지 뭘 말하냐는 투로 성의가 없었다. 또 나는 속이 매우 좁은 나머지 친구들을 꼭 한 번씩은 미워했다. 맘에 안 드는 점이 있으면 혼자 미워했다. 상대방이 뭐라 하면, 겉으론 수용하는 척하면서 속으론 ‘너는 틀렸고 내가 옳아’ 시비했다. 상대가 내 말을 안 따라주면, 아무리 나한테 잘해줬어도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들을 버린 지금은 정말 친구들이 모두 다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놀랍다.
이제는 친구들과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해도 집착이 없으니 관계가 끊길까봐 불안하지 않고, 오랜만에 만나면 있는 그대로 편하게 대할 수 있다. 대화할 때도 저절로 상대에게 맞추게 된다. 또 새로이 누군가와 친해질 때면 전에는 완벽하게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 부담을 느끼곤 했지만 이제는 자유롭다. 얼마 전에 직업적성검사를 했는데 집중력 최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전엔 그림 그릴 때도 30분에 한 번씩 화장실 가거나 일어나서 돌아다닐 정도로 산만했다. 그런데 이제는 집중하면 몇 시간이 훌쩍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몸도 건강해지고 무기력증도 없어졌다.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즐겁다.

 

2010. 7. July 월간마음수련

화를 다스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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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화낼 일이 많은 요즘 사람들이다. 꾹꾹 눌러 참다가 급기야 병을 불러 화병 진단을 받는 이도 매년 늘어나고 있다. 화를 참는 사람만 화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버럭 화를 잘 내는 사람도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심신이 쇠약해지기는 마찬가지다. 화 때문에 대인 관계를 잘 못하고 화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다. 그런 화 덕에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았다는 사람들이 있다. “화를 보고 나를 보며, 화를 버려 진짜의 나를 찾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자존심, 열등감, 화와 함께 버려지다

5년 전, 은행에서 명예퇴직한 후, 사업을 하다 IMF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택시 운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모두들 힘들고 어려운 직업이라고 하듯이 처음엔 16시간 꼬박 운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늘 짜증과 화로 바람 잘 날이 없었고, 항상 마음이 쫓기는 것 같았다.

엄준용. 대구시

부지런히 움직여야 회사에 사납금을 낼 수 있으니 택시 기사에게 5분, 10분은 돈과 직접 연결된다. 30분 이상 차가 막히는 날은 그야말로 공치는 날이다. 그럴 땐 부지런히 승객을 태워 하루 일당을 채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차가 막히거나, 신호 대기가 길어지면 짜증이 밀려왔다. 게다가 도로에서 일어나는 끼어들기, 난폭 운전, 운전자끼리의 시비 등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 힘든 건 승객이었다. 택시에 타자마자 다짜고짜 욕부터 하거나, 불이익을 당한 울분을 토해내거나, 술에 만취해서 갑자기 목이나 어깨, 머리를 잡아끄는 승객까지, 이번에는 과연 어떤 승객이 탈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의사소통도 어려웠다. 승객에게 조언했다가 오히려 화를 자초하기도 했고, 이번엔 맞장구를 쳐줘야지 했다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네’ 한다고 바보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무시한다고 화를 내는 승객도 있었다. 정말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난감했다. 속이 두근두근거리면서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승객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승객이 내리면 차를 세워두고 잠시 명상을 했다. IMF 위기로 어려웠던 시절, 마음을 비우면서 힘든 마음들을 추스릴 수 있었기에 나에게는 마음수련 명상이 큰 버팀목이었던 셈이다. 방금 전 승객들과의 일들을 버리면서 조금씩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운전을 하다가도 시간이 날 때면 가까운 지역 명상센터에 들러 집중적으로 버려나갔다.
사실 나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따지는 것을 좋아했다. 한편으론 “왕년에 나도 이런 사람이었는데…” 하는 마음도 컸다. 가끔 승객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을 때마다 울컥해지는 것도 그런 마음에서였다. 그건 내 열등감의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피해 의식이 있다 보니 작은 말에도 금방 상처받고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자존심, 열등감을 버리다보니, 이미 지나가고 없는 과거에 매여 있다는 게 부질없고 우습게 느껴졌다.
승객을 위한답시고 했던 말들이 왜 화를 불러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승객한테 맞장구 친다고 무조건 예예, 했던 것도 속마음을 보니 ‘떠드는 게 귀찮으니까 이제 그만하라’는 의미로 건성으로 대답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승객에게 조용히 아무런 대꾸도 안 했던 것도 ‘됐다, 지겹다, 이제 그만해라’ 하면서 무시하고, 무관심했던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런 마음들을 버려나가자 점차 마음이 평온해졌고, 승객을 대하는 것도 달라졌다. 승객을 만날 때도 마음 없이 그냥 들어주고 그 심정을 헤아리다 보니 울분과 화를 토해내던 승객들의 마음도 점차 풀리는 걸 경험한다. 만취해서 하소연하는 승객을 만나도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싶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그러다 보면 처음엔 감정을 주체 못 했던 승객들도 “내가 너무 떠들어서 미안합니다” 하고 하차한다.
전에는 항상 머릿속엔 사납금을 맞춰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급해서 난폭 운전을 하게 되고, 짜증과 스트레스는 더 심해졌다. 하지만 마음을 버리고 여유를 갖게 되면서 택시 일이 훨씬 수월하게 느껴진다. 내 마음의 반영인 듯, 돈과 시간, 고객에 쫓기지 않고도 여유 있게 차를 운전하게 되었다. 신기하게 승객들도 더 많이 태우게 된다.
전엔 택시 안이 너무 좁고 갑갑하게 느껴진 나머지 잠잘 때 하루 종일 갇혀 있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이젠 확 트인 내 마음처럼 편안하고 자유로운 공간이 되었다. 요즘은 승객 한 분 한 분이 감사하고 내 이웃처럼 소중히 다가온다. 그분들이 있기에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위급한 환자나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 다리를 다친 학생을 목적지까지 편안히 모셔다 드렸을 때는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보람도 느낀다.
대부분의 택시 기사들은 쉬는 날이면 등산을 한다. 스트레스를 풀고 신체 단련을 위해서다. 그것도 좋긴 하지만 나는 명상을 꼭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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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같은 엄마, 대인배 되다

남편과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화를 참지 못했다. 그 분(憤)을 이기지 못해 물건을 던졌다. 남편은 나를 피해서 도망갔고, 그러고 나서도 화가 진정이 안 돼서 계속 씩씩거리곤 했다. 분이 풀릴 때까지 심지어 남편 옷을 찢거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자제를 하고 싶지만 내 마음을 나도 어찌할 수 없었다.

방인혜. 경기도 고양시

남편한테 불만이 많았다. 사랑받으면서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지만, 남편은 무뚝뚝했다. 차가운 돌 위에 앉으면 손수건을 털어서 깔아주었던 연애할 때의 자상한 남편은 온데간데없었다. 친구들을 좋아하던 남편은 술 먹고 늦게 들어오거나 외박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도대체 이 시간에 뭘 하고 있나 머릿속은 복잡했다.
남편이 밉다 보니 시댁의 ‘시’자만 들어도 싫었고, 아이들도 싫었다. 그 화는 힘이 약한 아이들한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이들한테는 괴물 같은 엄마였다. 학습지를 해놓지 않으면 바로 그 앞에서 찢어버리며 혼을 냈다.
화가 많다 보니 늘 몸이 아팠다. 감기가 걸리면 성인용이 아닌 소아용 감기약을 먹고 링거를 맞아야 할 정도로 몸은 쇠약해졌다. 그러다가 이웃의 권유로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되었다. 몸이 좋아지고 특히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말이 내 마음에 각인이 되었다.
명상을 하면서 산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특히 남편에 대한 집착을 많이 버렸다. 남편을 처음 만나 알콩달콩 연애했던 기억부터 부부 싸움하고, 아이들을 혼내고, 시댁과의 기억까지, 화와 관련한 ‘마음 사진’들을 버려나갔다. 내겐 시어머니도 어렵고 힘든 존재였다. 집안 종손인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가장 잘난 아들이었다. 하지만 결혼 당시 어머니가 원했던 며느리가 아니었기에, 나를 못마땅해 하셨다. 어머니는 며느리한테 운전면허를 따서 아들 대신 운전하고 다니라 하셨고, 음식도 자식과 손주만 챙기셨다. 시어머니한테 섭섭해서 분을 삭여야 했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영화 필름 돌아가듯 쏟아져 나왔다.
남편이 내게 사랑을 주지 않아 화를 낸 것도, 결국 어린 시절 외로움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난 항상 외톨이였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은 항상 밤늦게 들어오셨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집안 살림살이를 도맡아 했다. 그런 기억을 버리자 지금의 내 모습에서 친정엄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는 게 힘겨워 자식들한테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무서운 엄마. 결혼 전부터도 입버릇처럼 “우린 엄마처럼 안 살 거야” 했던 내가, 우리 엄마처럼 아이들한테 하고 있었다.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지옥 같은 삶을 되풀이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끔찍했다.
명상을 하면서 남편에 대한 감정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전엔 ‘내가 왜? 뭘 잘못했는데?’ 하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뿐이었다면, 명상을 하면서 점차 ‘내 잘못이구나’ 인정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난 남편한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남편에게 “여보,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하자, 남편은 “당신 왜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야?” 하면서 놀라워했다.
그 다음 날부터 이상하게 남편도 확 바뀌었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일도 줄고, 나를 대신해 집안일도 해주고 주말엔 애들과도 놀아준다. 화를 버리면서 몸도 좋아졌다. 지금은 30분만 자도 몸이 쉬이 지치질 않는다.
명상을 하고 난 후 초등학생인 큰아이를 마음수련 청소년 캠프에 보냈다. 마음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내가 그동안 해온 걸 다 기억할 텐데 엄마한테 뭐라 할까…. 아이는 처음엔 엄마가 가장 버리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일 잘 버려졌다고 했다.
“엄마가 잘못했어, 미안해.” 아들에게 사과하자, “엄마도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날 난 아이를 껴안고 미안하고 고마워서 펑펑 울었다. 전에는 엄마가 집에 있으면 말도 안 하고 조용했던 아이들이 이젠 숙제도 봐달라고 하고 대화도 자주 한다.
나는 화를 통해 나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전엔 화가 나면 그 속에 갇혀서 객관적으로 나를 볼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 순간 나를 보게 된다. 마음이 긍정으로 바뀌자, 의욕도 생겨 지금은 회사 일도 하고 쇼핑몰도 운영할 정도로 생활도 활기가 가득해졌다.
내가 표현하는 일체의 감정은 살아온 삶의 찌꺼기다. 때문에 그동안 살아온 산 삶의 마음 사진을 빼지 않고는 답이 없다. 화나 짜증 같은 스트레스를 버리면 삶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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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August 월간마음수련